법상스님의 목탁소리
법상스님의 목탁소리

상주 대원정사 일요법회(13:30), 부산 목탁소리 토요법회(13: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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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지 말고 살아지라

모두들 잘 살아 보려고 애를 쓴다. 어떻게 하면 남보다 더 잘 살고, 풍요롭게 살고, 지혜롭게 살 수 있을지를 평생동안 궁리하며 산다. 그런 모든 애씀과 인위적 노력들을 한번쯤 쉬어보면 어떨까? 졸릴 때 우린 억지로 자려고 애쓰지 않는다. 그냥 저절로 자 진다. 숨 쉴 때도 억지로 쉬지 않고 그냥 쉬어진다. 사실 삶이란 것도 마찬가지다. 살려고 애쓰지 않아도 그냥 살아진다. 계획하고 연구하고 궁리하며 심각하게 고민하지 않더라도 삶은 늘 자연스럽게 흘러간다. 물론 우린 안 그런줄 알고 힘주고 애쓰면서 살지만 한번쯤 돌이켜 힘을 빼고 삶의 흐름에 내맡긴 채 지켜봐 보라. 애쓰는 '나'가 없어도, 저 혼자서 얼마나 잘 살아지는지.

내 중심이 나를 이끌고 가도록

온갖 점을 치는 일이나 해몽, 관상 보는 일을 완전히 버리고, 길흉화복의 판단을 버린 수행자는 세상에서 바르게 살아갈 것이다. 좋아하는 것이나 좋아하지 않는 것이나 다 버리고 아무것에도 집착하거나 매이지 않고 온갖 속박에서 벗어난다면, 그는 세상에서 바르게 살아갈 것이다. [숫타니파타] 공부하는 수행자는 잘 되고 못 되었다는 분별이라거나, 좋고 싫다는 분별, 옳다 그르다 라는 분별, 그리고 맞다 틀리다라는 분별부터 쉬어야 한다. 그냥 그냥 굳게 믿고 턱 놓고 살면 다 잘 사는 것이다. 잘 살고 못 살고를 나누어서 잘 사는 쪽을 선택한 그 잘 사는게 아니라 그냥 그 양쪽을 넘어선 잘 사는 것이란 말이다. 길흉화복의 판단을 버린 수행자. 이 얼마나 거침없는 훤한 길인가. 내 앞에 펼쳐지는 그 어떤 경계라도 ..

지구를 살리는 방법

나 한 사람의 나눔과 절약이 과연 이 지구에 도움을 줄 수 있을까? 나 혼자 음식을 낭비하지 않는다고 아프리카 어린이를 살릴 수 있을까? 그렇다. 그럴 수 있다. 직접적으로 돕는 힘은 작을지라도 그것이 다는 아니다. 한 사람을 돕는 순간 우주는 그 따뜻한 사랑의 정신을 기억한다. 나무 한 그루를 심을 때 지구의 여신이 맑은 호흡을 내쉰다. 물 한방울을 아낄 때 그 절약정신은 우주 끝까지 전달된다. 그 단 한 사람에게 행하는 따뜻한 나눔과 사랑의 정신은 우주와 함께 공명하여 그 파장을 인류가 함께 나누어 가지는 것이다. 이것이 나부터, 작은것부터 먼저 시작해야하는 이유다. 실천하지 못하는 타인을, 세상을 탓하지 말고 그저 내가 먼저 하라. 내가 정화되는 것이 곳 세상의 정화다.

만남에 담긴 의미

모든 만남은 우리에게 삶의 성숙과 진화를 가져온다. 다만 그 만남에 담긴 의미를 올바로 보지 못하는 자에게는 그저 스쳐 지나가는 인연일 뿐이지만 그 메시지를 볼 수 있고 소중히 받아들일 수 있는 이에게 모든 만남은 영적인 성숙의 과정이요, 나아가 내 안의 나를 찾는 깨달음의 과정이기도 하다. 아직 존재의 본질에 어두워 만남 속에 담긴 의미를 찾지 못할지라도 그 만남을 온 존재로서 소중히 받아들일 수는 있다. 하루에도 수십 수백 번이나 펼쳐지는 '만남'의 진리를 온전히 받아들이고 소중히 가꾸어 갈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불가에서는 '만나는 모든 사람이 부처요, 관세음보살이라'고 했다. 좋은 사람이든 싫은 사람이든, 적이든, 내 편이든, 이익을 주는 사람이든, 손해를 주는 사람이든, 그 모든 사람이 내게 ..

가까운 사람이 나를 비춰준다

나와 가장 가까운 사람과의 인연이 중요하다. 가장 가까운 사람과 바른 관계를 유지하지 못한다면 먼 사람과의 관계도 바를 수 없다. 만약 가까운 사람과는 바르지 못한 관계를 가지면서 먼 사람과 좋은 관계를 가진다면 그 사람은 자신을 속이고 있는 것이 아닌지 되짚어 봐야 한다. 나와 가장 가까운 사람과의 관계 속에서 나의 여실한 모습을 볼 수 있다. 그러니 가까운 사람과는 좋지 않은 관계를 가지면서 먼 사람과는 친하고 좋은 관계를 가진다면 그만큼 겉과 속이 투명하지 못하다는 반증이 될 것이다. 가장 가까운 사람이 나의 거울이며, 바로 내 모습의 나툼이다. 내 업식만큼만, 내 그릇의 크기만큼만 이 세상은 내게 모습을 드러내기 때문이다. 아버지를 너무 미워하던 딸이 아버지 같은 사람 정말 싫으니 남편감은 죽어도..

‘쨍!’하는 적연부동의 순간 – 안나푸르나 순례(5)

사우스와 히운추리의 일출 이른 새벽, 아직 날이 채 밝기도 전에 눈이 뜨인다. 눈을 뜨자마자 깜짝 놀란 사람처럼 앞마당으로 뛰어 나간다. 여전히 새벽별이 하늘을 수놓고 있지만 동녘하늘이 깨어남과 함께 별은 그 힘을 잃어가고 있다. 어스름한 아침, 어둔 이불을 걷어치우는 촘롱 마을, 그 위로 우뚝 선 안나푸르나 사우스(Annapurna South, 7219m)와 히운추리(Hiunchuli, 6441m)의 기상이 초연하다. 시간은 정지된 듯 정지된 듯 그러나 침묵의 새벽을 뚫고 쏜살같이 흐른다. 어느덧 창백하던 새벽빛이 황금빛으로 바뀌며 사우스와 히운추리 설봉의 저 위쪽부터 서치라이트를 비추듯 빛이 비쳐 내려오고 있다. 사우스와 히운추리가 금빛 옷을 차려입고 화려한 대자연의 공연을 벌이는 동안 마차푸차레(M..

히말라야의 밤 하늘, 별똥별 관찰 – 안나푸르나 순례(4)

촘롱의 밤하늘, 이것이 별빛이구나 촘롱의 초입 즈음에 한 두 채 작은 게스트 하우스가 보인다. 그런데 이 히말라야 산중 마을에, 그것도 지금까지 한국인이라고는 한 명도 만나보지 못한 이곳에 익숙한 한글 간판이 눈에 확 들어온다. 내용을 보면서 한바탕 웃고 간다. 한국인이 많은 것인지, 한국을 너무나도 사랑하는 주인이 사는 것인지, 한국 라면에 김치찌개 심지어 한국식 백숙까지 해 준다니! 촘롱은 지나 온 간드룽 보다도 더 크고 더 장대한 품으로 나를 이끈다. 산위 한 쪽 능사면 전체가 저 위 봉우리부터 저 아래 계곡까지 온통 게스트 하우스 천지다. 그 사이 사이로 중간 아래쪽 부터는 평범한 이 곳의 원주민인 구릉족들의 삶의 터전, 평범한 시골 농가가 펼쳐져 있다. 당연하다는 듯 제일 꼭대기의 게스트 하우스..

나의 전생은 히말라야의 거센 바람 – 안나푸르나 순례(3)

2일차 산중 도시, 촘롱을 지나며 밤늦도록 빗줄기가 이어지더니 이른 새벽 빗물 머금은 산과 나무와 풀들과 논의 벼까지 모든 생명들이 일제히 고개를 치켜들고 생기어린 춤을 춘다. 밤새 비는 그쳤고 비 그친 산은 더없이 개운하고 청명하다. 간단히 베지누들수프(야채라면)와 직접 새벽에 할아버지께서 소에게서 짜 끓인 우유로 만든 찌아 한 잔으로 아침을 해결하고 길을 떠난다. 오늘은 간드룽을 거쳐 촘롱(Chhomrong, 2170m)까지 갈 계획을 잡고 여유 있는 느린 걸음을 옮긴다. 한두 시간 산길을 오르니 간드룽을 만난다. 얕은 산 정상 즈음에 올망졸망 게스트 하우스들과 시골 농가가 모여 있는 우리나라 작은 시골 마을 같은 곳이다. 그래도 산에서 처음 만나는 규모 있는 도시인 셈이다. 그도 그럴 것이 대부분의..

비난과 험담에서 자유로와지려면

누군가가 나를 비난하거나, 듣기 싫은 말을 하거나, 동의하기 힘든 평가를 내린다면, 바로 그 순간, 당신은 아주 중요한 선택을 내려야 한다. 그 말을 받아들임으로써 스스로 그 부정적인 말의 위력에 굴복당한 채 그런 존재가 되기를 선택하거나, 아니면 정신을 똑바로 차려 깨어있는 의식으로써 그 말이 그저 아무 힘도 얻지 못한 채 그저 흘러가도록 할 것인가를 선택해야 하는 것이다. 사실 나에 대한 상대방의 평가는 어디까지나 그의 단편적인 관점일 뿐이며, 그 말은 진실도 거짓도 없는 중립적인 에너지일 뿐이다. 그 말이 힘을 가질지 말지는, 그 말이 진실인지 거짓인지는 언제나 나의 선택에 달려 있다. 별 의미 없이 쉽게 내뱉는 상대방의 말 한마디에 우리는 언제나 과도하게 의미를 부여함로써 스스로를 그 말에 자신을..

꺼려지는 것들과 만나라

우리의 몸과 마음 가운데 내 스스로 마주하기를 꺼려하는 부분, 피하고 거부하려고 애쓰는 부분이야말로 나를 괴롭히고 아프게 만들며 나아가 질병을 일으키게하는 원인이 된다. 자신의 괴로운 과거 기억들과 만나고, 싫은 성격과 대면하며, 몸의 아프고 불편한 부분을 관찰하고 느껴보라. 내가 피하려고 애쓰는 부분으로 인해 내가 점점 고통받고 있다! 꺼려지는 부분과 만나라. 만나고 느껴보고 대화하며 관찰해 보라. 회피하지 않고 정면으로 마주하길 선택할 때 길은 열린다.

화엄성중, 관음보살은 진짜로 있나요?

화엄성중이 진짜로 있나요? 관음보살님께서 진짜로 중생을 구제해 주실까요? 아미타부처님의 서방 극락 정토가 실제로 존재하나요? 영가천도는 진짜 가능한 것인지요? 이 모든 것들이 단순한 방편에 불과한 것인지, 아니면 실제로 존재하는 것인지가 궁금합니다. 사실 방편법을 말하려고 한다면, 우리가 입을 벌려 하는 모든 말들이 방편법입니다. 근본법을 말하고자 한다면, 그 어떤 말도 꺼낼 수도 없고, 어떻게 말로는 표현할 수가 없습니다. 표현함과 동시에 방편법이 되어 버리니까요. 그래서 사실은 부처님의 모든 가르침은 방편법문입니다. 본질에 가까이 간 법문들도 있지만, 그 또한 엄밀히 말한다면 세속제(世俗諦)인 언어를 빌어 설명할 수밖에 없는 한계를 가지고 있지요. 극락세계도, 영가천도도, 화엄성중도, 불보살의 가피도..

초심을 유지하려면/짜증이 날 때는?

초심은 어떻게 지킬 수 있을까요? 성경 필사를 통해서 넘치는 감사의 마음을 경험하였는데, 어느 순간부터 감사의 마음은 줄어들고 의무적으로 필사를 하는 모습이 되어버린 후 마음이 너무나도 차가워져서 사랑과 자비의 마음이 사라진 줄 알았습니다. 그러던 중 불교와 절 수행, 스님의 말씀을 통해서 내 마음 안에 사랑과 자비의 마음을 다시 보았습니다. 첫 사랑을 처음 보았을 때와 같은 그 마음, 그 초심을 겨우 찾았는데, 이제 다시는 잃고 싶지 않아요. 어떻게 하면 초심을 유지할 수 있을까요? 그러게요. 그 초심을 잘 유지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어요. 그런데 우리 마음이 잘 그렇지 못하죠. 계속 변하고 바뀌어요. 그런데 그런 변하는 마음 또한 자연스러운 마음입니다. 변하는 마음에 대해 시비를 걸 필요도 없고, ..

내가 할 수 있는 일과 없는 일

우리의 인생에는 직접적으로 내가 바꿀 수 있는 것이 있고, 바꿀 수 없는 것들이 있다. 내 의지로써 할 수 있는 것과 할 수 없는 것이 있다. 괴로움 없는 삶을 바란다면, 삶이 물 흐르듯 자연스럽고 평화롭게 흘러가게 하고자 한다면 바로 이 점만 잘 깨달으면 된다. 삶은 아주 단순하다.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힘써 행하고, 할 수 없는 것들은 애써 붙잡지 않으면 된다. 그러면 문제될 것이 하나도 없다. 우리의 가장 큰 문제는 내가 할 수 있고 바꿀 수 있는 것들은 별로 하려고 하지 않으면서, 할 수 없는 것들, 바꿀 수 없는 것들에 대해 욕심내고 집착하면서 어떻게든 바꾸어 보려고 애쓰는데서 시작된다. 우리가 의지로써 직접 변화시킬 수 있는 것들은 무엇이 있을까? 또 내가 직접 할 수 없는 것들은 무엇이 있..

타인에 대해 대화할 때

대화를 할 때는 가급적 그 자리에 없는 다른 사람에 대한 말은 꺼내지 않는 것이 좋다. 그에 대해 칭찬하든 비난하든, 좋게 말하든 나쁘게 말하든 타인에 대한 화재를 될 수 있는 한 끌어들이지 말라. 누군가에 대한 판단, 비교, 평가를 대화의 주제로 삼지 말라. 누군가가 대화중에 상대를 비난할 때, 동조하기도 동조하지 않기도 어렵다. 어떻게 하든 양 쪽 다 대화 뒤에는 후회가 뒤따르게 마련이다. 가장 좋은 대화는 제3자를 끌어들이지 않는 것이다. 우린 타인에 대해 판단할 수 있는 입장도 아니고, 그를 평가할 만큼 잘 알지도 못하며, 무엇보다도 판단 평가 해석 자체가 어리석은 분별심과 번뇌만 키울 뿐이다.

고통에 반응하는 방식의 차이

괴로운 일이 일어났을 때 당신은 어떻게 반응하는가. 어리석은 이는 남을 탓하거나 상황을 탓하면서 끊임없이 외부로 비난의 화살을 돌린다. 반대로 지혜로운 이는 그 모든 것이 자기로부터 시작되었음을 알고 자기 자신을 탓할 뿐이다. 그러나 완전히 깨어있는 자는 자신도 남도 탓하지 않으며, 자신에게 일어난 일을 불행이라거나 행복이라고 해석하지 않은 채 아무런 동요없이 그저 주어진 삶을 받아들일 뿐이다. 그에게는 언제나 우주와 조화를 이루는, 일어나야 할 꼭 필요한 '어떤 일'이 일어날 뿐, '좋거나 싫은 일'이 일어나지는 않는다. 그가 할 일은 그저 주어진 삶을 받아들일 뿐, 더는 할 일이 없다. 삶은 언제나 가볍고 자유롭다.

괴로운 일이 일어나는 이유

죄를 지으면 반드시 그 죗값을 치러야 할까? 부처님이나 하느님은, 혹은 진리는 죄를 지은 사람을 용서하실까 아니면 벌을 주실까? 사실 진리는, 부처님과 하느님은 죄 지은 사람을 단죄하는 법칙을 만들지 않았다. 아무리 큰 죄를 지었다 할지라도 오로지 대자대비한 사랑으로 용서할 뿐이다. 그렇다면 인과응보는 뭐고, 잘못한 사람이 받는 과보는 뭐고, 천벌은 무엇이며, 지옥은 또 무엇일까? 그리고, 나쁜 짓 한 사람도 다 용서 받는다면, 왜 애써 착한 일을 해야 하는 것일까? 그렇다면 부처님이 오히려 잘못하는 것은 아닐까? 오히려 선인선과 악인악과라고 말하는 편이 더 진리와 가깝게 느껴진다. 물론 그 또한 진리이고 진실이다. 인과응보도 진실이고, 잘못한 사람은 그에 합당한 죗값을 치르는 것도 진실이다. 뭐라고? ..

안나푸르나 입산 첫 날의 풍경 - 안나푸르나 명상순례(2)

홀로 산길을 걷는 신성함 홀로 바쁠 것도 없이 홀연한 가벼움을 짊어지고 맑게 비운 가슴으로 소담한 마을 나야풀을 지난다. 오후의 햇살 아래 마을에서는 막 산에서 내려 온 듯한 짐꾼 나귀들이 줄지어 짐을 풀어놓은 채 지친 피로를 식히고 있다. 홀로 걷는 이 텅 빈 호젓함을 어떻게 말로 표현할 수 있을까. 이런 산길을 너무 많은 인원이 함께 가게 되면 자신의 페이스와 호흡과 즐거움 보다는 상대방에게 맞춰야 하다 보니 산행이 자유로운 순간이 되기보다는 또 다른 산 아래 직장이나 관계 속에서와 똑같은 인간관계의 연장으로 전락하게 되는 수가 있다. 그래서 산행은 혼자면 가장 좋고, 아주 좋은 영혼의 깊이를 자연의 깊이처럼 서로 나눌 수 있는 그런 벗이 있다면 그것은 그 다음으로 쳐 줄 수도 있을 것이다. 초의 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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