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상스님의 목탁소리
법상스님의 목탁소리

상주 대원정사 일요법회(13:30), 부산 목탁소리 토요법회(13: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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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트레스를 받을 때

적당한 스트레스는 필수불가결한 삶의 요소다. 스트레스 없는 삶을 꿈꾸지 말라. 스트레스로 인해 괴로워하며, 스트레스를 없애려는 바로 그 마음이 더 큰 스트레스를 만들어 내는 주범이다. 사실은 스트레스 받는 상황, 그 상황을 받아들여 다루어 나갈 때 지혜가 싹튼다. 스트레스를 향해 두 손을 활짝 열고 미소 지으며 어서 오라고 손짓 해 보라. 스트레스를 '받는' 대신에 '받아들여' 보라. 스트레스를 받으면 괴롭지만 받아들이면 즐겁고, 스트레스를 받으면 더 커지지만 받아들이면 줄어든다.

진정 원하는 일을 찾으려면

내가 진정 원하는 일, 나다운 일이 무엇인지 모르겠습니다. 내가 진정으로 원하고 해야 하는 삶의 몫이 무엇일까요? 애써 찾아야 되는건지요? 내가 진정 원하는 일, 나다운 일이 무엇일까요? 나다운 일은 어디에 가서 애써 찾는 것이 아닙니다. 그저 나로써 살아가는 문제입니다. 즉 인위적이지 않은 자연스러운 삶을 말합니다. 내가 나다운 삶을 찾으려고 애쓰는 순간 이미 그 마음은 자연스러움을 잃게 되고, 곧 나다움을 잃게 되는 것입니다. 그저 인연 따라 나에게 주어진 삶을 온전히 받아들이고 거부하지 않으며 자연스럽게 사는 것입니다. 또한 나답게 산다는 것은 내 안의 생각이나 감정을 나라고 착각하고 생각과 감정에 끄달려 사는 것이 아니라, 그 모든 것을 '지켜보는 자'로써 사는 것을 말합니다. 내 안에서 올라오는..

차에 고사를 지내야 하나?

어제가 길일이라고, 차를 산 친구는 차에다 고사를 지내고 사무실을 낸 언니는 사무실에서 고사를 지내데요. 제 생각엔 왜 고사를 지내는지 궁금합니다. 저는 고사 안 지내도 차사고 한 번 안 났거든요. 돼지 머리를 올려놓고 입에 지폐를 집어놓고 절을 하고 축원하는 것도 올바른 것일까요? 고사를 지내야 하느냐 말아야 하느냐? 본질에서 본다면 그게 다 필요 없는 것일 수 있습니다. 그런데 고사라는 말의 의미나 고사를 지내는 방식이나 그 마음이 조금 달라진다면 고사를 지내는 것도 그리 나쁘다고 할 수만은 없을 수도 있습니다. 즉 고사를 지내는데, 돼지 머리를 사다 놓고 돈 코에 쑤셔 넣고 뭐 그러면서 절을 하는 것 보다는, 차를 샀거나, 집을 샀거나 간에 차에서, 집에서 신묘장구대다라니 독송을 몇 독이고 해 주거..

시기 질투심에 괴로울 때

저는 사촌이 땅을 사면 배가 아파요. 시기 질투 욕심이 줄지 않습니다. 겉으론 표현 못하면서 속으론 무지 힘들어 합니다. 저 좀 도와주세요. 바뀌고 싶어요. 시기질투 안하고 싶어요. 사촌이 땅을 사서 배 아픈 것, 그 배 아픈 마음 그 마음이 나라고 우리는 종종 착각을 합니다. 누구나 사촌이 땅을 사고, 남이 잘 되면 배가 아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중요한 사실은, 그 배 아프고 질투 나는 그 마음은 내가 아니란 사실입니다. 다만 그 마음이 ‘나’인 것으로 착각해서 거기에 집착하고 실망스러워하고 그러면서 부정적이고, 혼탁한 에너지와 업을 끊임없이 발산하며 살고 있는 것이 문제지요. 질투 나는 마음 그것은 ‘내 마음’이 아니라 내가 나라고 착각하는 모양, 착각하는 상일 뿐입니다. 그렇다면 그것이 나인 줄로..

절수행에 대한 궁금증들

절 수행 중에 기도의 내용이 매일 바뀌고 어떤 때는 절 하는 중에도 계속 바뀝니다. 오히려 번뇌가 더해가는 느낌이랄까요? 어떤 마음으로 절을 해야 하는지요. 아무 생각 없이 절만 해도 되는지요? 절 하는 도중에 무슨 기도를 한다거나, 무슨 발원을 생각한다거나 그러지 마시고, 그저 절만 하세요. 생각, 바람, 기원 등의 마음도 다 놓아버리고 다만 절만 하면서 절하는 나 자신을 관하시기 바랍니다. 다만 발원 할 내용이 있으면 마음을 비우는 기도를 한 뒤에 기도 끝에 하면 됩니다. 마음이 비워진 뒤에 그 텅 빈 마음에서 이타적인 발원이 나오면 거기에 힘이 붙습니다. 그러나 기도 중에 계속 발원을 하면 오히려 생각이 많아지고 그 발원에 힘도 안 붙어요. 오직 무념으로 생각 없이 관하며 절하시기 바랍니다. 또 어..

기도 중 생기는 온갖 경계가 두려워요

기도를 오래 하다보니 기도하는 중에 온갖 경계를 만납니다. 마장이라고 해야하는건지 모르겠네요. 다 말로 표현할 수 없지만 때때로 두렵고 무서워 기도를 포기해야 하나 하는 생각도 듭니다. 기도 중 생기는 마장은 어떻게 해야할까요? 어떤 수행을 하든 다양한 수행중의 경계를 만날 수 있게 되는데, 그 경계를 만난다고 할지라도 중요한 것은 그 경계에 얽매이지 않고, 집착하지 않고 다만 그러한 경계가 수행 중에 나타나고 생활 중에 나타나고, 꿈 속에서도 나타나고 있다는 것을 한 발자국 떨어져서 가만히 분별 없이 지켜보기만 하시면 됩니다. 중요한 것은 그 경계가 즐겁고 신비하다고 좋아하여 집착하려 하거나, 다시 한 번 느끼려고 하거나, 또 무섭고 두렵다고 해서 미워하고 밀쳐내려 하거나 하지 말고, 그저 있는 그대로..

오락가락 하는 기도, 괜찮은가요?

제가 처음 다니던 절에서는 관음경을 독송했는데요, 이사를 와서 나가게 된 절에서는 대비주 기도를 합니다. 또 요즘은 어떤 인연이 되어 금강경 독송을 하고 있습니다. 물론 때때로 직장생활 중에는 관세음보살 염불을 합니다. 이렇게 오락가락하는 기도가 맞는지요? 우선 수행의 인연이 처음에는 관음경이 되어다가, 다라니가 되고, 또 금강경 독송으로, 관음정근으로 바뀌어 가고 있다고 하셨는데요, 그것은 그렇게 인연 따라 이 절 저 절 다니다보면 수행법도 바뀌게 될 수도 있습니다. 수행법이 바뀌는 것은 전혀 문제될 것은 없습니다. 왜 그런고 하니, 그런 모든 수행법의 그 이면에는 깊은 바탕과도 같은 지관(止觀)의 수행이 깔려 있기 때문입니다. 불교가 불교일 수 있는 이유는 바로 지관의 수행 때문입니다. 기도니, 보시..

남편 일이 너무 힘든데, 바라는 기도해도 될까요?

현실적으로 남편하는 일이 너무 힘이 듭니다 .부처님 앞에 일 잘되게 해달라고 하기가 죄송스럽지만 집에 와서 남편과 아이들 얼굴을 보면 부처님께 내 욕심을 담은 기도를 하고 싶기도 합니다. 바라는 기도, 기복적인 기도를 해도 될까요? 기도를 한다는 것은 무언가 세속적인 빌 것이 있다는 말인데, 사실은 빌게 되면 오히려 그것을 얻지 못하게 되기 쉽습니다. 예를 들어 ‘남편 하는 일이 잘 되게 해 주세요’ 하고 빌었다면 사실 마음의 이면에 무엇이 연습되고 있는지를 보세요. 그 이면에는 '지금 남편 하는 일이 잘 안 됩니다. 그러니 앞으로 미래에는 더 잘 되게 해 주세요' 하는 것입니다. 즉 잘 되게 해 달라는 말 이면에 우리는 사실 '남편 일이 잘 안 된다'는 말을 법계를 향해 계속해서 뿜어내고 있는 것입니다..

벌레가 너무 무서워요

저는 어릴적부터 벌레를 너무 많이 무서워합니다. 새벽 좌선 중에 갑자기 벌레를 보고 놀라 너무 무서워서 살충제를 쏘아 죽였습니다. 벌레에 대한 혐오감과 두려움을 극복하기가 너무 어려워요. 어떻게 하면 좋지요? 한 마리의 벌레가 있습니다. 그 벌레는 그저 벌레일 뿐입니다. 나무처럼, 구름처럼, 한 송이의 꽃처럼, 혹은 강아지나 예쁜 토끼처럼 하나의 존재일 뿐입니다. 그것은 무분별이고, 무차별입니다. 좋을 것도 없고 나쁠 것도 없고, 무서울 것도 없고 그렇다고 애착할 것도 없고, 그저 그렇게 거기에 있을 뿐입니다. 문제는 곤충이나 벌레 그 자체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그것에 대한 내 안의 해석, 분별, 판단, 경험 등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법우님께서 느끼는 그 공포나 무서움은 벌레 자체의 문제가 ..

수행은 홀로 가는 것인가요?

무엇을 위해 공부하는 걸까요? 수행한다고 하면서 그 외의 일들에 무심해지고 주위 인연들에 소홀해졌습니다. 이 공부는 어쩔수 없이 주위와 멀어지면서 홀로 가는 것인가요? 이 마음을 관찰하는 공부는 바로 내 삶을 관찰하는 공부이고, 매 순간 순간의 삶에서 충실해 지는 것입니다. 앉아 있는 것만이 좌선이고 공부가 아닙니다. 삶의 현장 속에서 생생하게 깨어있는 것이 공부입니다. 그래서 불교 공부는 세상과 동떨어진 공부이거나, 주변 사람들에게서 소외되는 공부가 아닙니다. 내 바로 앞에 나타난 사람과 말 한 마디며,(정어) 행동 하나 하나를 할 때며,(정업) 또 생각을 하나 일으킬 때 조차(정사유) 온전히 깨어있는 것이 불교 공부입니다. 그래서 불교의 가장 핵심이 되는 수행법인 팔정도에 정념, 정정진, 정정만 있는..

무아, 내가 없는데 누가 해탈하죠?

불교에서는 무상과 무아라고 합니다. 항상 하는 것이 없고 나라고 할 만한 것이 없다고 하는데요, 그렇다면 무엇이 있어 해탈을 하는지요? 해탈을 하는 '나'도 없습니다. 해탈이라는 것은 '나'에 얽매여 있던 삶에서 벗어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깨어있음이 있을 뿐이지, 깨달은 자는 없다고 하는 것입니다. 깨달은 자가 '자신이 깨달았다'는 상에 얽매여 있다면 그것은 아직 자아가 남아 있고, 아상이 다 없어지지 않은 것이겠지요. 다시 말하면 '깨달은 자'가 없다는 것은 깨달은 자라는 육신이나 존재 자체가 없다는 말이 아니라 스스로 자아에 갇힌 생각이 없다는 말이고, 무아와 무상을 완전히 자각한 채 고정적인 실체관념을 비워버렸다는 뜻입니다. 불교에서 말하는 공이나 무아는 '없다'는 말이라기 보다는, '연기한다'는 ..

언젠가 나도 깨달을 수 있을까?

깨달음에서 중요한 것은, 우리의 일반적인 생각과는 달리, 내가 과연 깨달을 수 있을까 없을까의 문제가 아닌 '언제' 깨달을 것인가 하는 시기의 문제에 있다. 얼마나 오랜 세월, 오랜 윤회가 필요할 지는 모를지라도 분명한 사실은 언젠가 우린 모두 깨닫게 되어 있다는 사실이다. 더 분명하게 말한다면 이미 깨달아 있는 존재임을 언제쯤 알게 될 것인가 하는 문제다. 그런데 여기서 짚고 넘어가야 할 중요한 사실 하나는, 바로 그 관건이 되는 '시간'이라는 것의 실체가 환상이라는 점이다. 즉 언제 깨닫게 될 것인가 하는 이 절체절명의 문제가 바로 이 지점에서 공해지는 것이다. 깨닫고자 애쓸 필요가 없으며, 깨닫고자 하는 모든 인위적 노력이 무력해지는 순간이다. 일념즉시무량겁. 지금이 곧 몇 겁 이후와 다르지 않기 ..

타인의 장점이 보인다면

어느날 당신이, 평소 보지 못하던 친구나 아내의 '장점'이 보이기 시작한 다면, 그건 단순한 것이 아니다. 비로소 당신 내부에 당신이 타인에게서 본 바로 그 장점이 꽃처럼 피어나고 있다는 증거이기 때문이다. 언제나 내가 상대방에게서 보고 느끼고 깨닫는 것은 자기 안에 바로 그 부분을 창조하거나 강화시킨다. 요즘 점점 사람들이 싫어진다면 자기 안에 부정성이 커지고 있음을 알라. 타인의 장점과 긍정적인 부분, 지혜와 사랑을 보게 된다면 그것은 축복받을 일이다. 언제나 내가 타인에게서 보는 것을 내 안에서도 보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더 놀라운 사실은, 타인을 보는 방식대로 내 안에 바로 그것이 강화되는 것을 넘어서서 내가 보는 방식대로 타인과 주위에 영향을 끼친다는 사실이다. 즉, 타인의 긍정성에 ..

긍정적 정보와 부정적 정보

하루가 다르게 TV에서는 온갖 다양한 정보들이 쏟아져 나온다. 신문, 라디오, 영화, 드라마, 뉴스, 잡지 등에서 우리는 무수한 정보를 끌어당겨 흡수함으로써 정보들을 자기화하고 있다. 내가 접한 정보들은 그냥 흘러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 일정부분 나를 형성시킨다. 부정적인 정보를 많이 흡수했다면 그것은 내 존재의 부정적인 부분을 그만큼 키웠다는 것을 의미한다. 부정적인 정보에 관심을 기울이는 것 만으로도 우리는 부정적인 주파수와 파장을 흡수시키고, 자기화함으로써 내 존재에 부정적인 파장을 깃들게 한다. 그러면 머지않아 부정적인 파장으로 길들여진 내 안의 세포 하나 하나가 내 외부에 있는 부정적인 또 다른 정보들과 공명하고 유유상종으로 끌어당겨 내 인생은 부정적인 일들로 넘쳐나게 될 것이다. 반대로 긍정적인..

상대를 판단하는대로 내 삶이 경험된다

상대방을 미워하는 것은 곧 자기 자신을 미워하는 것이며, 상대를 나쁜 사람이라고 판단하는 것 역시 사실은 자기 자신을 나쁜 사람으로 규정짓는 것이다. 외부가 곧 내부이며, 상대방이 곧 나 자신과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이를 업보의 법칙, 균형의 법칙, 황금률의 법칙, 작용 반작용의 법칙, 끌어당김의 법칙 등 무엇으로 말해도 상관은 없지만 그 원리는 모두 같다. 외부를 향해 판단하고 말하고 생각하는 모든 것들은 사실 나 자신을 향해 보내는 창조적 에너지다. 세상 사람들에 대한 긍정적인 견해가 많은 사람은 나 자신에 대한 긍정성의 메시지를 보내는 것이고, 상대방을 욕하고 헐뜯으며 미워하는 것은 사실 곧 자기 자신을 그런 존재로 만들고 있는 작업을 하고 있는 것이다. 내가 세상 사람들을 어떻게 바라보고 판단하..

삶은 정해져 있을까, 바꿀 수 있을까?

‘자유의지’라는 것이 있다고 했는데, 한 편으로는 모든 것이 법계의 큰 계획과 질서에 의해 운행된다는 것이 모순 아닌가요? 지금까지 제 맘대로 살아온 것 같지만 그 모든 것이 법계의 계획이었고 현재 그리고 앞으로의 저의 삶도 정해져 있는 것이라면, 아, 혼란스럽습니다. 업의 차원에서 조금 쉽게 설명해 보겠습니다. 이미 내가 지은 업이 있습니다. 그 업은 분명히 받아야 돼요. 그리고 남들이 지은 업도 분명히 그들이 받아야 합니다. 그런데 이렇게 자신이 지은 업을 받아야 하는 이들이 이 세상에는 무수히 많습니다. 그러면서 또한 그 많은 사람들 사이에는 수없이 많은 인연, 인과, 업보의 관계가 놓여있습니다. 그래서 법계란, 그 수많은 사람들의, 수많은 존재들의 다양한 인과와 업보를 조화롭게 질서 있게 운행시킴..

감사, 용서, 참회해야 할 나도 없나요?

내가 없는 것이라면 참회해야 할 나도 없는 것 아닌지요? 모든 것이 공하다면 용서를 구할 필요도 없지 않을까요? 또 내가 없는 것이라면 무엇에 감사할 대상도 없어지는 것이 아닌가요? 업도 없는 것인지요? 만약 말씀하신대로 그렇게 결정짓고 살게 된다면, 그것이 바로 무기공에 떨어지는 거예요. 무애하게 살아야 한다면서 참회도 안 하고, 감사도 안 하고, 악업도 마구 지으면서 업을 받을 나도 없다고 한단 말입니다. 주로 그런 경우는 무아, 공, 연기, 중도에 대한 이해가 올바르지 않기 때문인 경우가 많아요. 머리로만 이해해도 그렇습니다. 무아는 밑도 끝도 없이 그냥 '내가 없다'라고 하는게 아니예요. 이렇게 내가 있잖아요. 그런데 왜 없다고 했느냐? 그건 이런 내가 없어서 없다고 한 것이 아니라, 고정된 실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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