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강경에는 '불응주색생심 불응주성향미촉법생심 응무소주 이생기심'이라는 매우 유명한 사구게가 있습니다.

색에 머물러 마음을 내지 말고, 성향미촉법에 머물러 마음을 내지 말고, 응당히 머무는 바 없이 마음을 내라는 말씀입니다.

초기불교에서는 이것을 십이처, 십팔계로 설명하면서, 이것을 통해 무아를 증명하곤 하였습니다.

눈이 색(모양, 대상)을 볼 때, 그 보이는 대상이 실재한다고 여기고, 실체시하게 되면 거기에 집착하게 되고, 본 것에 머물러 마음을 내게 됩니다. 

본 것을 옳다고 여기면서 '내가 보았으니 맞아'라고 주장하는 것이지요.

어떤 사람을 아느냐고 물으면, 한 번 본 사람은 안다고 답변할 것입니다.

그런데 진짜로 보았으니까 아는 것일까요?

사실 본다고 할 때 그 대상을 있는 그대로 온전히 본 것이 아니라, 자기 식대로 해석해서 보고, 자기 판단대로 보았을 뿐입니다.

또 어떤 사람은 그 사람을 보고 좋지 않은 느낌이 일어날 수도 있고, 어떤 사람은 그 사람에게 반하고 사랑에 빠질 수도 있겠지요.

이처럼 어떤 한 사람을 보았다고 해서 그것을 안다고 여기거나, 내가 본 것에 대해, 보아서 안 견해에 대해 옳다고 여기거나 거기에 집착할 필요는 없습니다.

그것은 그 대상을 있는 그대로 본 것이 아니라, 내 안에 식으로 그려놓은 허상, 상을 본 것이기 때문입니다.

실상을 본 것이 아니라 허상을 본 것이지요.

그 사람을 보고 사랑에 빠졌다면, 그 사람이 정말 사랑스러운 사람이라고 여기면서, 내가 빠져 있는 이 사랑의 감정을 실재라고 여기고 상대에게 집착하기 시작합니다.

그 상대방을 내가 좋게 해석한 것임에도 불구하고, 그 사람은 정말 좋은 사람, 매력 있는 사람, 사랑스러운 사람이라고 굳게 믿고 집착하는 것이지요.

그러다 결혼 하고 살다보면, 때로는 그 때 사랑스러웠던 부분들이 오히려 더 미워질 수도 있습니다.

왜 이런 일이 벌어질까요? 나는 분명히 그 사람을 아는데 왜 훗날 보니 그것이 오류였음이 밝혀질까요?

실상을 본 것이 아니라, 허상을 본 것을 진짜라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보았다고 다 믿지 말고, 보고 알았다고 그 생각을 100% 믿지는 마세요.

그것이 바로 불응주색생심, 즉 색에 머물지 않고 보는 것입니다.


다른 비유를 하나 더 들어보죠.

빨간색깔 도화지를 보고, 우리는 누구나 빨간색이라고 여기고, 내가 보았기 때문에 빨간색이 확실하다고 말합니다.

혹시 누군가가 그것은 빨간색이 아니라고 우기면서, 나를 바보 취급한다면 너무 황당해서 기가 막히겠죠?

제가 초등학교 때 모든 면에서 똑똑한 모범생 친구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친구가 반에서도 별로 똑똑하지 못하던 한 친구와 교실 한 쪽에서 논쟁이 붙었어요.

빨간색인가 어떤 색깔을 보고 모범생은 다른 색이라고 주장하는 것이었습니다.

둘이 너무 한 치도 물러섬이 없이 분명하게 자기가 주장하는 색깔이라고 하니, 반의 다른 친구들에게 물어봐서 누가 옳은지 보자고 했지요.

반의 모든 친구들이 똑똑하지 못했던 그 친구가 본 색깔이 맞다고 했지요.

알고보니, 그 모범생 친구는 자기도 모르는 색약이 있었던 것입니다.

자식은 결정코 '무슨 색'이라고 믿었는데, 반의 친구들 모두가 전부 다른 색깔이라고 할 때의 그 친구의 표정을 잊지 못합니다.

우리에게는 빨간색으로 보이는 것이 다른 사람에게는 다른 색으로도 보일 수 있습니다.

빨간색이라고 고집할 필요는 없지요.

자외선을 보는 곤충들은 가시광선만을 보는 우리들과는 다르게 세상을 봅니다.

자외선 필름으로 꽃밭을 촬영하면 그 색감이 우리 눈으로 보는 것과 다르게 나타납니다.

적외선 촬영기술로 사진을 찍으면 낭만적이고 몽환적인 사진을 얻게 되지요.

우리는 가시광선의 영역만을 볼 수 있는 것일 뿐, 적외선을 보는 뱀은 전혀 다른 세상을 볼 수도 있습니다.

이처럼 내가 보았다고 해서 그것을 전적으로 옳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 

더욱이 뇌과학에서 말하듯, 우리의 뇌는 대상을 전체적으로 파악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관심사를 근거로 제한적으로만 인식한다고 합니다.

인식 자체에서 자기식대로 왜곡해서 받아들인다는 것이지요.

그러니 나는 이렇게 보았지만, 다른 사람은 다르게 볼 수도 있습니다.

그러니 내가 보았다고 해서 절대적으로 옳다고 집착해서는 안 되겠지요.

.....

* 10년 전 광주 관음사 시절
일요법회 설법을 공유합니다

YouTube에서 '[음성/행복입문1] 나를 괴롭히는 방어벽을 깨라, 고정관념을 깨면 자유롭다' 보기
https://youtu.be/P2jTdXAE1mI

 

 

티베트 불교 교파 캬규파의 창시자 나로빠에게 그의 스승 틸로빠는 여러 가르침을 주셨는데, 그 중 이 불법공부에 대한 핵심을 설하는 유명한 여섯 마디의 가르침이 유명하다.

살펴보면, 첫째는 이미 지나간 일을 기억하지 말라, 둘째는 앞으로 다가올 일을 상상하지 말라, 셋째는 지금 일어나고 있는 일에 대해서도 생각지 말라, 넷째는 어떤 것도 탐구하거나 머리로 헤아리지 말라, 다섯째는 어떤 일이 일어나도록 조작하거나 만들어내지 말라, 여섯째는 그저 쉬라이다.
이 여섯 마디의 가르침은 아주 단순한 것이지만, 이 마음공부의 핵심을 아주 적절하게 제시해 주고 있다. 우리가 이 공부에 대해 주의해야 할 것이 무엇인지에 대해 잘 드러내 주고 있는 것이다.

먼저 지나간 일을 기억하지 말고 앞으로 다가올 일을 상상하지 말고, 지금 일어나는 일에 대해서도 생각하지 말라는 것이 첫 세 마디 말이다. 과거심불가득, 미래심불가득, 현재심불가득이다. 과거나 미래, 현재라는 것은 전부 환상일 뿐, 실제가 아니다. 주로 나이가 들수록 ‘내가 예전에는 어땠는데’ 하면서 과거를 들추길 좋아한다고 한다, 나이가 젊은 사람들은 반대로 미래를 상상하며 부푼 꿈을 꾼다. 그러나 과거나 미래를 향한 그 모든 기억과 상상은 한낱 분별망상일 뿐이다. 물론 필요할 때 잠시 필요한 만큼의 기억을 꺼내와 쓸 수도 있고, 또 필요할 때는 미래를 계획할 필요는 있다. 그것까지 하지 말라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이 마음공부를 하는 입장에서는 과거의 기억과 미래의 상상이 전부 헛된 망상일 뿐이다.

그렇다면 현재의 생각은 실제일까? 그렇지 않다. 현재에 일어나는 생각 또한 망상일 뿐이다. 현재 일어나고 있는 현실에 대해 과거 기억을 꺼내와 현재와 비교 대조함으로써 현재를 판단하고 해석하는 일들은 있는 그대로의 생생한 현재를 살지 못하게 할 뿐이다. 그럼으로 인해 우리는 현재를 경험하는 이 생생한 순간에조차 현재에 깨어있지 못한 채 과거와 비교분별의 생각 속 망상의 세계를 경험하는 것이다.
네 번째는 어떤 것도 탐구하거나 머리로 헤아리지 말라인데, 이 또한 현실 생활에서나 사회생활에서까지 탐구나 생각을 하지 말라는 말은 아니다. 이 공부에서는 그렇다는 것이다. 마음공부하는 사람에게 이 말은 아주 필수적이며 중요한 가르침이다.

우리는 깨달음을 향한 수행을 하면서도 세속의 습관을 못 버리곤 한다. 생각으로 헤아리고 탐구하는 버릇이 그것이다. 수행에서는 가장 독이 되는 것이 바로 생각으로 헤아리는 것이다. 이 법의 세계는 생각이나 의식으로 가 닿을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가장 중요한 것은 ‘식’이라는 분별, 알음알이, 생각, 망상이 꼼짝 못하고 꽉 막힐 때가 되어야 그 너머에 있는 진리가 드러난다는 점이다.

다섯 번째도 비슷한데, 어떤 일이 일어나도록 조작하거나 만들어내지 말라는 것이다. 우리는 수행을 하면서 어떤 신비체험이나 삼매나, 깨달음이 일어나기를 바라면서 그것이 일어나도록 조작하고 만들려고 애쓴다. 그러나 그것은 수행이 아니다. 수행은 무언가를 조작하는 것이 아니다. 깨달음은 이미 있는 것이고, 수행은 이미 있는 것을 드러내는 것이지, 없는 것을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깨달음이 일어나도록 조작하고 만들려고 애쓰는 동안에는 깨달음이 오지 않는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할까? 깨달음을 탐구해도 안되고, 만들어내려고 추구해도 안된다면 도대체 어떻게 해야 하는 것일까? 바로 여섯 번째 가르침에 그 답이 있다. 그저 쉬어라. 그 모든 분별망상, 생각, 조작, 탐구, 추구를 몽땅 몰록 쉴 때 진리는 드러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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