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말라야의 밤 하늘, 별똥별 관찰 – 안나푸르나 순례(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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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말라야 명상순례

히말라야의 밤 하늘, 별똥별 관찰 – 안나푸르나 순례(4)

목탁 소리 2012. 6. 25. 22: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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촘롱의 밤하늘, 이것이 별빛이구나

 

촘롱의 초입 즈음에 한 두 채 작은 게스트 하우스가 보인다. 그런데 이 히말라야 산중 마을에, 그것도 지금까지 한국인이라고는 한 명도 만나보지 못한 이곳에 익숙한 한글 간판이 눈에 확 들어온다. 내용을 보면서 한바탕 웃고 간다. 한국인이 많은 것인지, 한국을 너무나도 사랑하는 주인이 사는 것인지, 한국 라면에 김치찌개 심지어 한국식 백숙까지 해 준다니!

촘롱은 지나 온 간드룽 보다도 더 크고 더 장대한 품으로 나를 이끈다. 산위 한 쪽 능사면 전체가 저 위 봉우리부터 저 아래 계곡까지 온통 게스트 하우스 천지다. 그 사이 사이로 중간 아래쪽 부터는 평범한 이 곳의 원주민인 구릉족들의 삶의 터전, 평범한 시골 농가가 펼쳐져 있다. 당연하다는 듯 제일 꼭대기의 게스트 하우스에 여장을 풀고 의자에 앉아 촘롱 마을을 한 눈에 내려다 보고 있다.

아, 그런데 이게 왠일인가. 조금 전만 해도 구름에 가려 보이지 않던 촘롱 건너편 산 위쪽으로 그림처럼 하이얀 설옹산이 고개를 내밀다 말다 한다. 여유로운 오후 내내 그 의자에 몸을 기대고 촘롱 마을과 사람들과 숲과 안나푸르나 사우스(Annapurna South, 7220m), 히운출리(Hiunchuli, 6441m), 안나푸르나 3봉(Annapurna III, 7555m), 마차푸차레(Machhapuchre, 6993m) 고고한 영봉들이 만들어내는 장엄한 소리를 듣고 있다. 저녁을 먹고 따뜻한 물로 샤워를 하고 밀린 빨래도 해서 널고 촘롱의 밤 공기에 몸과 마음을 씻으러 나온다.

그런데, 아! 또 한 번의 내 인생의 클라이막스!

아! 나는 이런 밤하늘을, 이런 별들을, 이런 은하수를 지금까지 본 적이 없다. 지리산에서 보았던, 그리고 설악산 중청산장과 지난 가을 비온 뒤 강원도 양구에서 보았던 별들을 다 합쳐놓은 것보다 더 밝고 초롱초롱히 빛나는 별들을, 그것도 몇 배는 많은 숫자를 지금 한 눈에 바라보고 있다. 과장 없이 내 인생에서 최고의 별의 축제를 지금 누리고 있는 중이다.

별빛이 이럴 수도 있다는 것을 나는 처음 깨닫고 있다. 어떻게 저토록 많은 수의 별들이, 쏟아져 내리지 않고도 저렇게 떠 있을 수 있는지. 내 생에 이렇게 많은 별들의 숫자를 헤아려 본 적은 없다. 지금 이 순간, 그동안 가지고 있었던 별에 대한 고정관념, 별빛에 대한 가치들이 완전히 떨어져 나가고, 전혀 새로운 의미로써 새겨지고 있다.

'이럴 수도 있구나' '이럴 수도 있구나' '아! 어떻게...'

말 문이 콱 막힌다. 도무지 언어로는 표현할 수가 없다. 만약 지금의 이 느낌을 알기를 원하는 이가 있다면, 이 자리에 와서 보지 않고서는 이 말을 도저히 공감할 수 없으리라.

'추운 밤공기는 아무것도 아니다. 게스트 하우스 옥상 야외식당 긴 의자에 그대로 드러누워 하늘을 바라본다. 저 멀리 별이 떠 있는 것이 아니라, 내 눈 바로 앞에서 떨어질 것처럼, 내 눈 속으로 빠질 것처럼 별들이 쏟아져 내리고 있다. 눈으로 빠져들어 마음속에 고스란히 박히고 있다.

 

5분에 하나씩 떨어지는 별똥별 관찰

 

별똥별을 한 번도 보지 못했다는 이에게 한 여행자는 태연히 말했다.

"하늘의 별에 관심이 없어서 그렇지 5분 이상만 눈을 안 떼고 별을 지켜보면 분명히 별똥별을 볼 거예요. 5분, 10분에 한 번꼴로 별똥별이 떨어지거든요."

과연 그 말이 맞았다. 거의 정확하게 5분에 한번 꼴로 별똥별이 떨어지고 있다. 물론 한국에서는 이렇게 많은 별들을 볼 수도 없을뿐더러, 이토록 선명하게 보여 질 리 만무하다 보니, 아무래도 한국의 밤하늘에서는 이토록 자주 별똥별을 관찰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조금 더 별을 관찰할 여유와 인내, 심연을 갖추었더라면 누구나 흔하게 관찰할 수 있는 것이기도 함을 비로소 깨닫게 된다.

저렇게 자주 떨어지는 별똥별을 왜 우리는 보지 못하고 살았을까. 밤하늘에서는 매일 같이 저 고징한 별들의 공연이 5분마다 펼쳐지는 동안 우리는 우리 인생의 30년, 40년 아니 70년, 80년을 단 한 번도 저들을 보지 못하거나 단지 몇 번 보고 소원을 빌 정도로 우리의 관심은 별에서 하늘에서 우주에서 자연에서 멀어져 있는 것은 아닐까. 아니 무언가를 꾸준히 지속적으로 바라본다는 것 자체가 낯선 것일지도 모른다. 아니 그럴 시간과 여유가 없다. 빨리 빨리 해야 할 일을 해치우고, 짧은 시간에 더 많은 업무를 소화해 내고, 남들에게 뒤질세라 앞만 보고 달려가는데 바빠서 잠시 멈추고 세상을 바라보는데 익숙치 않은 것이다. 아니 그럴 필요조차 느끼지 않는다. 그리고 그것은 너무도 비생산적이며 무의미하게 느껴진다.

과연 그런가? 잠시 바쁜 걸음을 멈추고 무언가를 향해 나의 주의와 시선을 모아 있는 그대로 관찰한다는 것이 그렇게 무의미한 일인가? 그렇지 않다. 오늘날 많은 이들에게 가장 흔히 간과되며, 우리가 가장 놓치기 쉬운 삶의 비밀스런 진리가 바로 이 '바라봄'에 있다.

'지속적인 바라봄', 그 대상이 무엇이 되었든 생각을 개입시키지 않고, 판단을 개입시키지 않은 채 지속적으로 어떤 한 대상을 관찰해 보라. 분별없이 다만 지켜보기만 해 보자. 바로 그 때 우리는 바로 그 대상과의 진정한 하나 됨을 경험할 수 있으며, 진정 의미 있는 관계로 맺어질 수 있고, 참으로 그것을 사랑과 자비로 어루만지게 되는, 지극히 평범하고 별 것 아닌 것 같지만 그 속에 가장 비범하고 지혜로우며 깨어있는 어떤 내 안의 에너지를 만나게 된다.

 

힐긋 보기, 진하게 보기

 

우리가 세상을 바라보는 것은 잠깐 잠깐 흘깃 흘려 보거나, 생각과 판단으로 대상을 가치판단하며 색안경을 끼고 재단해 보는 정도를 넘어서지 못한다. 그러나 그것은 참된 바라봄이 아니다. 그것은 대상에 대한 진지함과 진솔함 혹은 순수성이 결여되어 있거나, 내 안에 있는 과거의 어떤 틀 안에 대상을 끼워 맞추는 것 밖에 되지 못한다. 그것은 전혀 새로운 어떤 것이 아니라 과거의 반복이요 지루함의 연속일 뿐이다. 과거의 그 어떤 틀이나 생각, 관념, 가치관으로부터 완전히 벗어난 채 그 어떤 판단도 내리지 말고 세상을 눈부신 어린아이의 눈으로 바라보라. 그랬을 때 이 세상의 그 모든 대상은 그것이 사람이든, 사물이든, 자연이든, 별이든, 한 송이 꽃이든 그것 속에서 신을 발견할 것이고, 그 순간 내 안에서는 한 송이 연꽃이 만개할 것이다.

별을 향해 이 몸을 눕히고 벌렁 드러누워 나를 완전히 낮추고 비운 채로 오직 빛나는 별을 바라보기만 한다. 어떤 한 사람을 만날지라도 그 순간 오직 그 사람을 진지한 집중력을 가지고 별을 보듯 지켜보라. 다른 모든 것을 놓아버린 채, 나의 지위와 상대의 지위라거나, 나와 상대의 관계라거나, 과거 그와 나 사이에 있었던 사건들과 그로인한 좋거나 나쁜 모든 감정들 또한 텅 비워두고 완전히 새로운 날 것의 한 사람으로 그를 마주하라.

그가 누가 되었든, 지위 고하를 막론하고, 친소유무를 떠나, 나에게 득이 되는지 실이 되는지를 전혀 판단하지 않은 채 오직 지금 이 순간 내 앞에 서 있는 바로 그에게 나의 모든 집중과 에너지를 쏟아 주의를 집중하라. 그랬을 때 의미 없을 것 같던 사람 속에서 진한 의미를 발견하게 되고, 미워하는 사람 안에서도 깊은 사랑을 발견하며, 도움이 안 될 것 같던 사람에게서 큰 지혜를 선물 받게 될 수 있다.

이처럼 '지속적인 텅 빈 바라봄'은 삶의 비밀스런 원칙이요 진리의 법칙이고 신에게 붓다에게 이르는 유일한 길이다. 삶의 매 순간이 선물이요, 매 순간의 진중한 바라봄이야말로 더할 나위 없는 축복이다. 힐긋 볼 때는 전혀 볼 수 없었던 수많은 지혜의 가치와 덕목들이 진하게 지속적으로 바라보는 순간 무수히 쏟아져 내린다.

별똥별 열 두 개를 무려 하룻 밤 잠시 동안 본다는 것은 어쩌면 안나푸르나가 내게 준 선물이다. 그것을 바라봄으로써 새로운 축복을 부여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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