괴로운 일이 일어나는 것은 흔히 악업의 업보를 받는다고 말합니다.

어떤 사람이 나에게 욕을 하거나, 화를 내거나, 또는 정말 하기 싫은 일을 해야 할 때가 생겼다고 해 보죠.

그 때 우리는 나를 괴롭힌 사람을 탓하고, 하기 싫어서 짜증을 내기도 하며, 피해가려고 애쓰거나, 화를 폭발시키기도 합니다.

반대로 좋은 사람을 만나거나, 좋은 일이 일어날 때는 행복해 하며, 나아가 집착하고, 그런 일이 계속 더 일어나기를 바라기도 하지요.

그러나 그런 일은 일어났다가 때가 되면 사라지기 때문에 또 다시 괴로워지기도 합니다.

그런데 이것은 바람이 불고, 비가 오고, 태풍이 불거나, 혹은 낮과 밤이나, 봄 여름 가을 겨울이 변화되는 이치와 비슷합니다.

자연의 순환은 때가 되면 저절로 이루어집니다.

비가 올 때가 되면 저절로 비가 내립니다.

밤이 올 때가 되면 저절로 낮은 물러갑니다.

이처럼 삶도 그렇습니다.

내가 원하고, 내가 집착하는 일만 일어나지는 않습니다.

원하는 일, 좋아하는 일들도 일어나지만, 그 일이 때가 다하면 싫어하는 일, 하기 싫은 일도 할 때가 생겨납니다.

그럴 때 사람들은 괴롭다거나, 스트레스 받는다고 말하지만, 낮이 다하면 밤이 오듯, 여름이 가면 가을이 오듯, 좋은 일도 다하면 싫은 일이 올 수도 있습니다.

그것은 때가 되었기 때문에 오는 것입니다. 시절인연은 꼭 그 인연이 와야 했기 때문에 옵니다.

대지에 비가 필요하면 그저 비가 내리는 것 처럼, 나의 업에도 무언가 풀려나가고, 균형이 맞아져야 할 때가 되면 거기에 걸맞는 인연의 때가 오는 것이지요.

그러니 좋은 일이 생긴다고 그것이 더 오래 지속되기를 바라며 집착할 것도 없고, 싫은 일이 온다고 그것을 미워하고 화내며 거부할 것도 없습니다.

그것은 밤낮이 교대하는 것처럼, 인연의 때가 되어 교차하는 것일 뿐입니다.

거기에 시비를 걸 필요도 없고, 좋은 것을 집착하거나 싫다고 미워할 것도 없습니다.

그저 인연 따라 온 것은 오도록 허용해 주고, 갈 것은 가도록 허용해 주어 보세요.

취사간택하면서 힘들어하는 대신에, 전혀 힘쓸 필요 없는 있는 그대로의 수용을 선물해 주어 보세요.
자연을 자연 그대로 둘 뿐, 내가 개입하지 않는 것이지요.
바로 그 때, 모든 것은 저절로 주어지고, 삶은 저절로 풀려나갑니다.
.....
#마음공부 #금강경 #불교

YouTube에서 '하나와 전체가 다르지 않아 - 금강경 강의 30강(30분 일합이상분)' 보기
https://youtu.be/HGsFWvT4-j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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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락산 학림사]

 


억울합니다.
왜 나에게만 이런 괴로운 일이 닥치지요?
제가 전생에 죄를 많이 지은겁니까?

지금
네 호흡의
들고 남을 보고 있느냐?
다만 들이쉬고 내쉬어라.


...

그 사람은
처음부터 저를 싫어했어요.
전 아무 잘못도 하지 않았는데
그냥, 그냥 제가 못마땅하다는 게 말이 됩니까?
그 사람 때문에 미치겠습니다.

그가 나를 미워하는 순간
네 호흡은
완연하게 들고 나는지 살펴보라.


...

일이 잘 안 풀립니다.
요즘은 통 되는 일이 없어요.
남들은 돈 잘도 벌고 일도 잘 하던데
난 왜 이런 걸까요?

숨만 잘 쉬면 된다.


...

완전히 망했습니다.
거리로 내 앉을 판이니
이거 어찌해야 합니까.

지금 이 순간
호흡을 잘 비추어 보라.


...

타종교 신자들이
자꾸 비판하고 욕을 합니다.
지하철만 타면
승복 입은 죄로 욕을 얻어 먹으니
어떻게 대처해야 지혜로울 수 있겠습니까.

묵묵히
지켜보아라.


...

욕심을 버리고 싶습니다.
집착을 버리고 싶습니다.
다 놓아버리고
자유롭게 살고 싶은데
그게 맘같이 잘 되지 않아요.
어디 똑 부러지는 수행방법 없을까요?

숨을 올바로 쉴 수 있다면
숨을 쉬는 순간
욕심도 집착도 붙을 자리가 없다.
수행도 해탈도 다 티끌일 뿐이다.


...

이번 주부터
정말 중요한 일이 시작됩니다.
일이 잘 될 수 있도록
스님께서 축원해 주시면 좋겠습니다.

그래
나도 내 숨 잘 쉬지.
그래도
네 숨은 네가 쉬어야 한다.


...

이제 모든 것이 끝났습니다.
내 생에 두 달이 남았습니다.
난 아직 해야 할 일이 남아있는데,
아들 딸 학교도 보내야 하고,
우리 예쁜 아내 사랑도 해 줘야 하고,
손 붙잡고 가 보고 싶은 곳도 많고,
수행도 아직 익지 못했는데...
남은 삶을 어떻게 보내야 합니까.

들이 쉬고 내 쉬고
들이 쉬고 내 쉬고...
숨만 잘 따라가면
나고 죽는 일 없다.


...

빨리 깨닫고 싶습니다.
깨달음에 대한 욕망이 너무 큽니다.
어떻게 해야 확철대오 할 수 있겠습니까.

숨 잘 쉬는
바로 그 순간이
확철대오의 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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괴로움,
그것은 곧 즐거움이다.
즐거움이자 성장이자
도반이자 스승이며
내 삶의 반려자요 수행의 재료이다.

아픔, 괴로움, 서글픔, 상처, 고통, 몸부림, 실수,
좌절, 패배, 슬픔, 공포, 증오...

이런 것들은 곧 우리를 성숙하게 해 주고,
내적으로 성장하게 해 주며,
우리 삶을 더욱 풍성하고 깨어있게 해 주는
스승의 죽비와도 같고 한줄기 목탁소리와도 같은 것이다.



아픔 없는 삶, 괴로움 없는 삶이 어디 있으랴.
우리는 끊임없이 삶의 한복판에서
고통과 좌절과 슬픔, 아픔을 마주하게 된다.

지나 온 삶을 돌이켜 보라.
생의 어느 한 순간에 내 존재를 스쳐 간
수많은 아픔과 고통과 좌절들이야말로
내 삶에 없어서는 안 될,
지금의 나를 나일 수 있게 해 주는 소중한 감로였고 동반자였다.

그 때 그 아픔이 없었다면
어떻게 지금의 내가 있을 수 있을까.
모든 아픔들, 모든 고통과 좌절들은
어떤 방법으로든 내 삶의 성장과 성숙을 가져다 준다.

어떤 것들은 내가 충분히 깨달을 수 있을 만큼 성장을 가져다 준 것도 있고,
또 어떤 것들에서는 도저히 그 아픔 속에서 무슨 깨달음이 있을까 싶을 정도로
좋지 않은 기억만을 가져다 준 것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후자의 기억 또한 어떠한 방법으로든
지금의 나를 만드는데 분명한 기여를 했으며
내가 알지 못하는 어떤 방법으로 나를 도왔다.
인생의 어느 때가 되고, 내적으로 어느 정도 삶의 통찰이 깊어지게 되면
그 때의 그 아픔이 나에게 어떤 성장을 가져다 주었는지,
어떤 도움을 주었는지를 깨닫게 되는 날이 있을 것이다.



아픔 없는 삶, 괴로움 없는 삶, 순탄한 삶,
우리가 꿈꾸는 삶은 그런 삶이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사실 그런 삶 속에는 깨우침도, 성숙도, 지혜도, 자비도 꽃피어나기 어렵다.

원하는 것을 다 가질 수 있고,
원하는 대로 다 할 수 있는 삶이란
고작해야 우리에게 어리석음과 얕은 정신과 공허한 내면을 가져다 줄 뿐이다.

‘자녀를 망칠 수 있는 가장 확실한 방법은 원하는 대로 다 해 주는 것’
이란 말은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한다.

나의 아버지는 내가 어렸을 때 넘어져서 어지간히 피가 나더라도
‘일어나자. 일어날 수 있어.’ 하고 응원을 해 주셨을 지언정
호들갑스레 달려와서는 일으켜주고 옷을 털어주지는 않으셨다.
학교 다닐 때에도 빠듯한 용돈을 쥐어 주시며
알아서 잘 쓰라는 말 외에는 어디에 무엇을 썼느냐고 묻지도 않고 맡겨주셨다.
대학 때는 될 수 있으면 알아서 학비며 용돈도 벌어 쓰고
정 힘들 때만 이야기를 하라고 하셨고,
우리 자식들에게 대학 입학 이후에는
알아서 학교도 다니고 결혼도 하고 취직도 해야지
그 다음에는 손 벌릴 생각을 애초부터 하지 못하도록 늘 말씀해 오셨다.

괴로운 상황에서, 혹은 인생의 그 어떤 문제나 좌절 속에서
스스로 이겨낼 수 있도록 믿고 맡겨 주는 것은,
그것은 무관심이나 냉정 그 이상의 지혜롭고 자비로운 배려이다.



수행자의 삶이란 바로 그런 것이다.
영적인 삶, 명상적이고 선(禪)적인 삶이란 것은
그 어떤 삶의 고난과 역경과 좌절 속에서도
그 문제의 뒤뜰 깊은 곳에서 피어나는 꽃봉오리의 의미를 깨닫는 것이다.

일반적인 사람들은 삶에서 어떤 문제에 부딪쳤을 때
그 겉에 드러난 표면적인 상황만을 보기 때문에
쉽게 상처받고, 아파하고, 좌절하며, 괴로워 할 뿐이지만,
보다 영적이고 깨어있는 삶을 사는 이는
그 문제의 깊은 심연에서 피어나는 의미를 지혜롭게 관찰하곤 한다.

언제나 문제는
그 이면에 우리를 돕기 위한 분명한 목적을 가지고
우리의 삶에 노크를 한다.
우리의 삶에서 어떤 문제가 생겨났다면
그것은 우리가 삶에서 어떤 배울 것이 생겼다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는 그 의미를 깨달을 수도 있고,
때로는 그 의미가 너무 깊고 심오하여 깨닫지 못하는 수도 있지만
존재의 깊은 곳에서는 그 의미를 이미 알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어떤 문제나 아픔을 만났을 때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란
언제나 그 상황, 그 문제를 전체적으로 받아들이고 수용하며
따뜻하고 자비로운 마음으로 보듬어 주고 포용하는 일이다.

그 깊은 의미를 찾고자 애쓸 필요는 없다.
내 깊은 곳에서 알아서 깨달을 것이고, 알아서 이끌어 갈 것이니
그저 믿고 맡기면서 감사하게 받아들이면 그만이다.



보통 사람들이 삶의 어떤 문제를 만났을 때
그 문제를 향해 취하는 방법에는 두 가지가 있다.
첫째는 회피이며 둘째는 투쟁이다.

회피는 괴로움과의 대면에 대한 두려움이다.
괴로움을 피해 도망칠 곳을 찾기 위해 애를 쓴다.
그러나 다른 관심사나 일을 찾아 나서면 잠시는 그 문제를 잊은 듯 해도
그것은 사라진 것이 아니기 때문에 언제고 인연을 만나면 다시 되살아 난다.

또 어떤 사람은 그 괴로운 문제를 어떻게든 이겨보려고 애를 쓴다.
괴로운 문제와의 투쟁을 선포한다.
괴로움을 향해 화를 내 보기도 하고,
또 어떤 사람은 기도나 수행을 통해 괴로움을 이겨보려고 애를 쓰기도 한다.
물론 전자보다는 조금 더 낳은 방법일 수도 있겠지만
이 방법 또한 그리 좋은 방법은 아니다.

기도나 수행은 그 문제를 없애기 위해,
그 문제와의 투쟁에서 승리하기 위한 무기 같은 것이 아니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들은 몸에 병이 들었을 때
그 부분을 창으로 찌르고 칼로 자르는 상상을 하면서
그 부분의 병이 사라지기를 바라기도 하고,
또 어떤 수련단체에서는 이 몸이 있기 때문에 괴로움이 있는 것이라며
무아를 증득하려면 몸을 없애야 한다는 논리를 내세워
몸을 칼로 자르고 폭탄으로 터치는 등
몸을 헤치는 각종 방법을 동원해 상상으로 몸을 죽여 없애라고 권하기도 한다.

이 두 방법은 모두 지혜로운 중도의 길이 아니다.
부정하면서 회피하고 도망치려는 것이나
그 문제와의 투쟁을 통해 이겨내려는 것 모두 극단의 방법일 뿐이다.



삶에서 부딪치는 그 어떤 문제를 해결하는 가장 지혜로운 중도의 길은
회피하거나 투쟁하는 양 극단을 떠나
있는 그대로 내버려두고(止) 가만히 지켜보는 것(觀)이다.
아픔이 오면 아픔이 오도록 그저 내버려 두라.
아픔이 내 존재 위를 스치고 지나가도록 그저 놔두고
다만 어떻게 왔다가 어떻게 스쳐지나 가는지를 묵연히 바라보기만 하라.

아픔을 나와 둘로 나누어 놓고 나면
아픔으로부터 도망을 치거나, 아니면 싸워 이기거나
둘 중 하나의 방법을 쓸 수 밖에 없지만,
아픔을 나와 둘로 나누지 않고 내 존재의 일부분으로,
내 삶의 하나로써 가만히 포개어 놓고 나면
더 이상 아픔과 싸울 필요도 도망 칠 필요도 없음을 깨닫게 된다.
그것이 아픔과 괴로움과 좌절을 다루는 중도적인 수행방법이다.

사실 수행의 길, 명상의 길, 영적인 구도의 길은
괴로움이 없고 항상 즐거움만 있는 그런 길이 아니다.
어떤 사람들은 명상을 하면
괴로운 일이 사라지고, 장애가 사라지고
항상 즐거운 일만 일어날 것이라고 생각하곤 한다.

그러나 오히려 구도의 길 위에는
온갖 가시밭길이 놓여 질 수도 있고,
일반인들 보다 더 큰 아픔과 좌절과 슬픔을 겪어야 하는 수도 있다.
아픔과 괴로움을 대항해 싸우려 하지도 도망치려 하지도 않으니
오히려 그들이 물밀듯 밀려들어올 수도 있다.

그러나 그것은 구도의 길을 돕기 위한 법계의 배려요,
신의 사랑이고, 붓다의 자비이다.
지혜로운 이는 문제 속에서, 아픔과 좌절 속에서
붓다의 자비로운 이끎을 보고 신의 사랑스런 도우심을 본다.



그래서 때때로 구도의 길을 걷는 이들은
자신을 단련시키기 위해 일부러 괴로운 상황을 만들어 내기도 한다.
그렇게 함으로써 자신을 더욱 공부의 한 가운데로 몰아넣고
자신 안에서 어떤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그런 괴로운 상황 속에서 자신의 마음이 어떻게 변화해 가는지를 지켜본다.

실제로 티베트에서는 수행을 시작하기 전에
괴로움을 청하는 축원을 암송하기도 한다고 한다.
그런 수행을 통해 지혜와 자비와 인내와 정진을 성취하는 것이다.

이럴진데 우리의 삶 앞에 펼쳐지는 그 어떤 괴로움이 생겼다고
아파하고 좌절하고 회피하고 투쟁을 할 필요가 무엇인가.
오히려 그 때를 소중한 공부의 기회로 알아야 한다.
내 삶이 한 단계 도약할 수 있는,
내 정신의 지평이 한층 넓어질 수 있는 소중한 기회로 알아야 한다.

물론 즐거운 일도 마찬가지다.
괴로움이 공부의 재료이듯 즐거움 또한 공부의 재료가 된다.
즐거움이 오더라도 거기에 집착해 더 많은 즐거움을 쟁취하려 애쓸 것도 없고
그렇다고 고행을 위해 즐거움을 죄다 내다버릴 필요도 없다.

즐거움이 오든 괴로움이 오든
그것은 한줄기 바람이 내 존재 위를 스쳐가는 것에 다름 아니다.
그것은 즐거운 것도 괴로운 것도 아닌
다만 ‘어떤 인연’이 잠시 오고 가는 것일 뿐이다.
그러니 들뜰 것도 없고 가라앉을 것도 없는 것이다.

언제나 우리의 인생에서는
‘어떤’일이 일어날 뿐이지
좋은 일이나 나쁜 일이 일어나는 법은 없다.

이 모든 ‘어떤 일’들은
항상 부처님의 자비로써 하느님의 사랑으로써
내 존재 위에 살며시 내려앉았다가 인연이 다하면 살며시 돌아 갈 뿐이다.

내 삶에는 괴로운 일도 없고 즐거운 일도 없다.
다만 ‘어떤 일’들이 우리를 돕기 위해
우리의 정신의 지평을 넓혀주기 위해
우리의 심심한 일상에 지혜의 기회를 던져 주기 위해
꿈처럼 환영처럼 잠시 그렇게 왔다 그렇게 갈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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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야심경 강해 -12강-

멸성제와 도성제

(3) 멸성제 - 괴로움의 소멸에 대한 진리

멸이란, ‘니르바나’의 음역으로, ‘불이 꺼진 상태’를 말하며, 흔히 ‘열반’이라 표현합니다. 다시 말해, 괴로움의 원인인 온갖 번뇌의 불길이 모두 꺼진 상태, 즉, 고가 소멸된 상태입니다. 현대적으로 표현한다면, ‘최고의 행복’, ‘절대적 행복’ 의 경지라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멸성제는 사성제의 집성제와 반대되는 경지입니다. 집성제는 십이연기의 유전문[순관]을 통해 괴로움의 원인을 고찰해 십이지분을 거슬러 올라가 보니, 그 근본원인이 무명(無明)이라고 관찰한 것입니다. 이를 차례 차례로 바른 방향으로 관찰하는 것을 순관(順觀)이라 합니다. 그런데, 반야심경에서 ‘어리석음도 없고[無無明], 나아가 늙고 죽음도 없다[無老死]’고 한 것은 바로 이 유전문의 이치에 대한 부정을 나타내고 있는 것입니다. 즉, 근본불교에서 이렇게 십이연기의 유전문을 설명하고 있지만, 반야심경에서는 이것도 없다고 부정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괴로움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멸성제)는 어떻게 하면 될까요? 불교는 현상계가 ‘괴롭다’ 라고 하여, 그 원인을 밝히는 것 그 자체에 목적을 두지는 않습니다. 즉, 괴로움의 원인을 밝힌 것은, 그 원인을 제거하여 괴로움이 없는 깨달음의 세계로 나아가기 위한 준비작업일 뿐입니다. 어쨌든 괴로움의 원인을 십이연기의 유전문을 통해 살펴보면, 그 근본 원인인 무명에서부터 차례로 하나씩 지분을 소멸시켜 나가는 환멸문[역관(逆觀)]을 통해서 괴로움의 소멸에 이를 수 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좀 더 자세히 말하면, 노병사의 괴로움을 멸하기 위해 그 원인인 생(生)을 멸해야 하고, 생을 멸하기 위해 그 원인인 유(有)를 멸해야 하고, 유를 멸하기 위해 취(取)를 멸해야 하고……. 이렇게 해서, 결국에는 무명(無明)을 멸하면 괴로움의 모든 고리가 풀려서 괴로움의 소멸인 열반의 상태까지 다다르게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것을 ‘십이연기의 환멸문(還滅門)’이라 하며, 이렇게 관찰하여 열반의 상태로 다다르는 관법이 바로 역관(逆觀)입니다. 반야심경에서 ‘어리석음이 다함도 없고, 나아가 늙고 죽음이 다함도 없다’란 말은 바로 이 ‘십이연기의 환멸문도 사실은 없다’는 사실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여기에 대해서는 다음 장에서 살펴보기로 하고 멸성제에 대해 조금 더 부연합니다.

열반에는 두 가지 종류가 있다고 합니다. 살아있는 동안 성취하는 열반을, ‘생존의 근원, 즉, 육신이 남아 있는 열반’이라 하여 ‘유여의열반(有餘依涅槃)’이라 하고, ‘생존의 근원이 남아 있지 않은 열반’을 ‘무여의열반(無餘依涅槃)’이라 합니다. 후자는 완전한 열반을 의미하므로 반열반(般涅槃)이라고 하는데, 이는 정신적, 육체적인 일체의 고(苦)가 모두 소멸된 열반의 경지입니다.

(4) 도성제 - 괴로움 소멸의 실천에 대한 진리

도성제는 괴로움의 소멸에 이르는 길로서, 열반에 이르는 길입니다. 이 도성제는 괴로움을 멸할 수 있다는 확신을 심어주고, 그 열반에 이르는 구체적인 방법을 제시해 줍니다. 이것은 ‘중도(中道)’라고도 부르는 것으로, 양극단을 떠난 길입니다. 즉, 지나치게 쾌락적인 생활도 아니고, 반대로 극단적인 고행 생활도 아닌, 몸과 마음의 조화를 유지할 수 있는 상태의 길을 말합니다. 『소나경』은 이러한 중도에 대한 좋은 비유를 들려주고 있습니다.

“소나야, 너는 집에 있을 때 비파를 잘 타지 않았더냐?”

“그렇습니다. 세존이시여!”

“너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비파 줄을 너무 강하게 죄면 소리가 잘 나더냐?”

“그렇지 않습니다. 세존이시여.”

“그러면 비파 줄을 아주 느슨하게 하면 소리가 잘 나더냐?”

“그렇지 않습니다. 세존이시여.”

“소나야, 그와 마찬가지로 노력도 너무 지나치면 마음의 동요를 가져오고, 너무 느슨하면 나태하게 된다. 그러므로, 소나야, 군형을 유지해야 한다.”

“예, 그렇게 하겠습니다.”

소나 존자는 세존의 가르침대로 행하여 마침내 깨달음을 얻어 아라한이 되었다.

거문고 줄이 지나치게 팽팽하거나, 지나치게 느슨하면 좋은 소리가 날 수 없고, 가장 좋은 소리를 위해서는 그 줄이 적당한 상태를 유지해야 하듯이, 열반을 얻기 위한 수행의 길 또한 극단적인 상태를 피하고, 중도를 실천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이 중도를 구체적으로 말한 것이 바로 ‘팔정도(八正道)’입니다. 팔정도의 ‘정(正)’이 바로 중도의 ‘중(中)’에 해당하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팔정도의 ‘정’과 중도의 ‘중’이란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요? ‘여덟가지 바른 길’이라고 할 때의 ‘바른’이라는 의미가 무엇인지, 또 중도의 중이 과연 어떤 의미인지를 묻고 있는 것입니다. 중도라고 하여 그저 단순히 ‘중간’ 정도를 의미하는 것은 아닐 것입니다. 또한 ‘바른 길’이라고 했을 때도 도대체 무엇이 바른 길이냐 하는 점에서 의문의 여지가 있습니다. 여기에서 말하는 ‘중’과 ‘정’의 의미는 앞서 설명했던, 불교 근본 교설인 연기와 공, 삼법인의 실천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즉 중도란 적당히 중간의 길이라는 의미가 아니라, 세상 모든 대상은 고정된 실체 없이 끊임없이 변하는 것이며 다만 인연따라 모였다 흩어지는 존재이므로 텅 비어 있다는 온전한 자각에서 오는 실천을 의미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즉 인연 따라 잠시 모였다 흩어지는 텅 빈 존재라면 어느 한 쪽을 택해 옳다거나 그르다거나, 좋다거나 싫다거나, 선하다거나 악하다거나 하는 치우친 견해를 내세울 수 없게 됩니다. 팔정도에서 바른 길이라는 것도 연기와 무아, 공에 입각한 길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정견이라고 했을 때 어떻게 보는 것이 ‘바르게 보는 것’인가 하면, 보되 실체적인 어떤 것으로 보지 말라는 것이고, 다만 인연 따라 생겼다가 흩어지는 것임을 바로 보라는 것이며, 항상하지 않는 것으로 보라는 뜻이 되는 것입니다. 이처럼 중도와 팔정도의 실천은 곧 연기와 공과 삼법인의 실천인 것입니다. 뒤에서 조금 더 자세히 설명하기로 하고 『잡아함경』의 말씀을 보겠습니다.

사리불의 옛 친구가 물었다.

“사리불이여, 왜 세존과 함께 청정한 수행을 하는가?”

“벗이여, 괴로움에서 벗어나기 위해서이다.”

“그 괴로움에서 벗어나는 길은 있는가?”

“길은 있다. 그 길은 팔정도이니, 정견・정사・정업・정명・정정진・정념・정정이 그것이다.”

1) 팔정도(八正道)

① 정견(正見) - 바른 견해

정견은, ‘있는 것을 있는 그대로 보는 견해’를 말합니다.

다시 말해, ‘나다’ 하는 아상 없이, 편견, 선입견, 고정관념 없이 사물에 대해 있는 그대로 바라보는 것을 말합니다. 이는 불교의 진리인 연기의 진리를 올바로 깨달아 사성제의 진리를 여실히 보는 것을 말합니다. 어디에도 치우치지 않은 견해이며, 연기적으로 보는 견해이고, 모든 것이 실체가 없다는 텅 빈 시선으로 보는 견해이며, 항상하는 것이 없다는 견해로 보는 것입니다. 정견은 나머지 일곱 가지 정도의 실천을 통해서 얻을 수 있는 궁극인 지혜의 견해라 하겠습니다.

② 정사(正思) - 바른 생각

정사는 바른 생각, 사유, 즉, 바르게 마음먹는다는 뜻입니다.

생각할 바와 생각해서는 안 될 것을 마음에 잘 분간하는 것을 말합니다. 어떤 행동을 하기 전에 우리가 미리 마음속으로 생각하는 그 생각이 바르게 되어있음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바른 생각을 통해, 바른 행동, 바른 말, 그리고 바른 생활이 나오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③ 정어(正語) - 바른 말

바른 구업을 의미하는 것으로, 입으로 짓는 네 가지 악업을 행하지 않고, 진실되고 부드러워 화합하는 말을 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입으로 짓는 네 가지 악업이란, 거짓말・잘못된 말인 망어(妄語), 아부・아첨하는 말인 기어(綺語), 이간질하는 말인 양설(兩舌), 욕설 등의 험악한 말인 악구(惡口)를 말합니다. 요컨대, 삼업(三業) 중 구업을 올바로 짓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④ 정업(正業) - 바른 행동

바른 신업(身業)을 말하는 것으로, 몸으로 짓는 세 가지 선한 행위를 말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즉, 살생, 도둑질, 삿된 음행 등의 행위를 하지 않는 것을 말합니다. 이 업에도 유루(有漏)와 무루(無漏)가 있습니다. 유루의 업은 번뇌가 있는 행위라는 뜻으로, 아상에 기초한 행동이며 탐, 진, 치 삼독심에 의하여 형성되는 것이므로 그 과보를 반드시 받게 되는 업을 말합니다. 무루의 업은 아상이 모두 사라져, 번뇌가 소멸되고 탐진치 삼독심을 벗어난 행위이므로, 이것은 과보를 받지 않는 수승한 행위라 할 수 있습니다.

⑤ 정명(正命) - 바른 생활

정명은 몸으로는 청정한 행위를 하고, 입으로는 청정한 말을 하고, 뜻으로 청정한 생각을 하는 것으로, 십선업을 닦는 생활을 의미합니다.

다시 말해, 정사유, 정어, 정업이 삶 속에서 드러나는 생활을 말하는 것입니다. 구체적으로는, 바른 직업을 가지고, 올바른 생활을 통해 올바른 의, 식, 주를 영위해 나아가는 것을 의미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⑥ 정정진(正精進) - 바른 노력

정진은 ‘노력한다’는 의미로, ‘끊임없이 노력하여 물러섬이 없는 마음을 연습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다시 말해, 목표를 향해 쉬지 않고 부지런히 실천해 가는 힘입니다. 물론, 나쁜 방향으로 정진해서는 안 되며, 정진은 항상 선한 것을 바르고 둥글게 키워나가기를 끊임없이 노력하는 것입니다.

⑦ 정념(正念) - 바른 관찰

올바른 통찰, 관찰이라는 의미로서, 신체의 움직임, 좋고 싫은 느낌, 마음의 온갖 분별, 주위에서 일어나는 모든 것들에 대하여 놓치지 않고 잘 관(觀)하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근본불교의 핵심적 수행방법인 사념처(四念處) 수행이며, 요즈음 우리들이 잘 알고 있는 위빠사나 수행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이것은 다음 장에서 따로 살펴보게 될 것입니다.

⑧ 정정(正定) - 바른 선정

마음을 고요하게 안정시키는 것으로, 평상시 산란하고 복잡한 번뇌・망상・분별심을 고요히 가라앉히는 집중력을 말합니다.

마음을 순일하게 하여 삼매(三昧)를 얻는 것을 의미합니다. 다시 말해, 마음을 한 곳에 집중시키는 정신집중을 의미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정(定)을 닦는 구체적인 방법이 선(禪)이므로, 이 둘을 합해 선정(禪定)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대승불교의 참선도 이 정정의 한 방법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2) 삼학(三學)

이상에서 살펴본 팔정도는 불교 수행의 세 가지 핵심인 계(戒), 정(定), 혜(慧) 삼학(三學)을 발전시키고 완성하는 것을 돕습니다. 따라서, 팔정도는, 계정혜 삼학을 중도설에 입각하여 세분하여 구체화한 것이라고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즉, 정어, 정업, 정명은 계(戒)를 의미하며, 이러한 계행을 통한 올바른 생활을 바탕으로 올바른 수행생활을 하는 것, 이것이 바로 정(定)으로, 정정진(正精進), 정념(正念), 정정(正定)의 세 가지가 바로 그것입니다. 이러한 바른 수행을 통하여 밝은 지혜를 증득할 수 있으니, 이것이 혜(慧)이며, 정견(正見)과 정사(正思)가 여기에 해당하는 것입니다.











Posted by 법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