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이란 곧 하나의 여행이다. 어머님 뱃속을 뚫고 이 세상으로 내던져진 순간 우리는 모두 한 사람의 나그네요 순례자가 된다. 그리고 펼쳐지는 매 순간의 삶 속에서 우리는 언제나 순유중이다. 단 한 순간도 정체하거나 머물지 않고 매 순간 우리의 여행은 계속된다. 그리고 그 여행은 누구에게나 집으로 돌아가는 길이다. 숭고한 귀의(歸依)의 과정. 존재의 근원이라는 본래 나온 그 텅 빈 곳으로 누구나 되돌아가고 있다. 삶이라는 여행길은 언제나 완전한 깨달음을 지향하고 있다.

이처럼 삶은 곧 하나의 여행이기에 한 순간도 머물지 말고 흘러야 한다. 세상 모든 것은 끊임없이 변화하면서 이 끝없는 우주를 여행하는 임무를 부여받았다. 그것의 목적은 끊임없는 여행에 있지 어느 한 곳에 정착하는데 있지 않다. 불가에서는 길을 떠나는 것을 만행, 순례라고 하여 수행의 필수적 요소로 본다. 매 순간 머물지 않고 흐르는 이러한 무집착의 여행은 단순한 놀이가 아니라 영적인 성장의 과정이요, 깨달음을 향한 정진의 길이 된다.

특히 홀로 고요한 숲길을 걷는 것은 더없이 중요한 수행의 방식이다. 가부좌가 그렇듯 걷는다는 행위는 그 자체로써 생각을 비우고 무심(無心)으로 나아가게 한다. 그렇게 되었을 때 ‘대지를 맨발로 걸으면 우리의 정신은 우주로 연결된다’는 아메리카 인디언의 말처럼 걷는 그 행위 속에 정신적인 각성과 우주적인 교감이 함께 한다. 결가부좌를 틀고 앉아 좌선하거나, 천천히 걸으며 자신을 관조하는 경행(經行), 이 두 가지야말로 인류의 오랜 수행법이 아니었던가.

오랫동안 걷다 보면 우리는 저절로 생각이 멎는 것을 경험한다. 생각이 단순 명쾌해지고 저절로 욕심과 집착과 내면의 화가 사라지면서 삶에 대한 통찰과 사유가 싹튼다. 비로소 나 자신에 대해, 삶에 대해 전체적으로 볼 수 있는 열린 자각이 시작되는 것이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은 여행을 통해 새로운 가능성에 눈뜨게 되고, 비로소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에 대한 자기다운 독자적 삶의 방식을 깨닫게 되곤 한다. 모든 해답은 내 안에 있다. 그러나 끊임없이 아상의 확장을 위해 살아가는 일상에서는 그 답을 찾을 수 없다가 비로소 여행을 떠나며 두 발에 의지해 걷고 걷는 과정 속에서 삶의 해답을 찾는 방법을 깨닫게 된다. 삶이란 본래 완전한 것이었으며 질문도 답도 모두 내 안에 구족되어 있었음을 깨닫는 것이다.

이처럼 여행은 의도하든 의도하지 않든 간에 누구에게나 구도(求道)의 한 과정이다. 우린 여행자가 되는 동시에 순례자가 되고 구도자가 된다. 누구나 여행을 통해 자신이 삶에서 깨달아야 할 귀중한 선물을 얻게 된다. 특히 홀로 걷는 여행은 또랑또랑한 지혜로써 삶을 빛나게 한다.

티베트의 위대한 성자 밀라레빠(Milarepa, 1052~1135)는 ‘여행을 떠나는 것만으로도 깨달음의 반은 성취한 것’이라는 말을 남기고 히말라야로 떠났다. 그에게 히말라야는 우주의 중심이자 수미산이었다. 히말라야로의 순례는 그에게 깨달음의 원천이었으며, 이 우주 속에서 끊임없이 돌고 도는 윤회라는 여행의 종지부와도 같았다. 그는 탐욕과 성냄과 어리석음으로 괴로워하는 이들에게 ‘모든 것을 버리고 히말라야로 떠나라’고 외친다.

이제 곧 여름이고, 휴가 시즌이다. 어떤가. 이번 휴가는 홀로 숲길을 걷는 만행의 길을 떠나 보는 것이. 지리산도 좋고, 올래길도 좋고, 산사의 숲길도 좋으며, 히말라야도 좋다. 한 사람의 순례자가 되어 홀로 고요한 숲길을 걷는 그 텅 빈 구도의 길을 떠나 보자.

 

-법상스님- 


양구 읍내가 환히 내려다 보이는
비봉산은
강원도 1000고지 이상의
높은 산들 가운데
어깨를 나란히 할 수 없는
아주 얕은 봉우리의 산이다.

그야말로 양구에 사는 사람들이
매일같이 산책하기 알맞도록
자연에서 베풀어 준 산인 듯도 하다.

오후 늦은 시간에
혹은 새벽 예불을 끝내고
터벅 터벅
쉬엄 쉬엄 올라도
정상까지 올라갔다가 내려오는데까지
1시간 정도의 시간이면 족하다.

어제는 바람이 얼마나 불던지.
귀를 활짝 열고
산 길을 오르는데
여기가 산인가 바다인가 싶을 정도로
거센 바람소리가 파도치듯 귓전을 맑고 차게 스치운다.

조금 춥기는 해도
산에서 부는 파도소리를
온 몸으로 느끼면서 걷다 보면
나도 모르게 마음이 평화로와 지면서
입가에 미소가 살랑살랑 피어오르곤 한다.

처음 강원도 양구로 간다고 했을 때
많은 벗들이
눈 구경 실컷 하겠다고,
추워서 잘 견딜 수 있겠냐고,
걱정어린 눈길을 주곤 했었는데,
한달 넘게 살아보니
여기가 강원도가 맞는가 싶을 정도로
눈도 적고 그다지 추운 날씨도 손에 꼽을 정도다.

여기 주민들 말씀이
예년에는 이러지 않았다고
작년, 그작년만 해도 이 정도는 아니었다고 하신다.
어르신들 말씀을 들어보면
10년, 20년전하고 비교해 보면
그야말로 세상이 변해도 한참을 변했다고들 하신다.

겨울이 겨울다와야지
겨울이 미지근해지면
우리 몸의 생기도, 대자연 숲의 생기도
함께 미지근해지고 만다.

겨울이 춥고, 눈이 많이 내릴 때일수록
그 다음 해 농사는 더욱 풍성하게 여물어간다.

그래서 그런가
강원도 산에만 가면 늘 눈 속을 걸어야 한다고
산을 좋아하는 내게 아이젠을 선물해 주던
오랜 도반의 조언과는 다르게
이 곳 비봉산도 눈이라고는 찾아보기 힘들다.

산 아래쪽에만
길가에 아주 조금씩 하이얀 눈들이
채색하듯 흩뿌려져 있을 뿐이다.

1

그 대신에
길가 좌우로 이 추운 날씨를 견뎌내며
성성하게 깨인 정신으로
낙옆썩은 흙빛의 땅을 뚫고
초록의 작은 생명들이 근근이 이 겨울을 지켜내고 있다.

겨울에 무슨 초록이냐고 하겠지만
이처럼 겨울 산에도
생명의 숨결은 나즈막하게 호흡을 하고 있다.

2

겨울 산에서
발 아래 피어난 초록의 생명들을 보자니
미리 봄을 맞이한 듯
내 안에도 설레는 봄의 기운이 가득하다.

지금같이
하루 해가 저물어 가는 숲은
더욱 생기어리다.

겨울의 눅눅한 흙색의 숲들이
지는 햇살의 따뜻하고 노오란 빛을 받아
겨울산을 황홀하게 물들인다.

3

비봉산 정상.
해는 뉘엿뉘엿 저물어 가는데
감시초소 저홀로
이 시린 바람을 맞아가며
양구 시내를 내려다 보고 있다.

비봉산 정상
해발 482m

4

대암산, 대우산, 가칠봉 등
1,000고지가 넘는 산들 사이에서
비봉산은 산이 아니라 그냥 언덕이거나,
어릴적 뛰어놀던 어린이들의 뒷산 놀이터다.

어린이들의 놀이터.
내가 어릴적만 해도
뒷산처럼 놀기 좋은 놀이터가 없었다.

이 산 저 산으로 뛰어다니면서
숨바꼭질도 하고, 또 싸움놀이도 하고,
산딸기도 따러 다니고, 산나물도 케러 다니고,
때때로 산토끼를 사냥하겠다고,
혹 어떤 때는 밤에 친구들이 모여서
귀신을 잡으러 가겠다고도 하면서 숲을 헤짚고 다녔다.

또 그렇게 놀다가 지치면
산을 베게 삼아
하늘의 구름을 이불 삼아
때로는 이름모를 산소 위에 올라 가
푹신푹신한 잔듸를 요 삼아 깔고 누워 잠이 든 적도 많았다.

뒷 산 만한 놀이터는
아무리 생각해도 없지 싶다.

그런데 요즘의 아이들의 놀이터는
더이상 산이 아니고, 들이 아니다.
심지어 아파트 옆에 딸려 있는
놀이터에서 조차 어린이들을 보기는 어렵다.

어디에 있냐?
다 좁은 골방 안에 앉아 있고,
그 좁은 모니터 앞에 죄다 모여 있다.
그 모니터 앞에서 친구도 사귀고,
공부도 하고, 만화도 보고,
거기에서 모든 것을 다 한다.

그러면서 어린아이들도 어른들도
몸과 마음의 건강을 잃어가고 있다.

어른들이 먼저 아이들을 데리고
집을 빠져 나가야 한다.
집에서 빠져 나와 뒷 산으로 들어가야 한다.

매일 매일 적어도 몇 시간씩은
집을 벗어나, 학교를 벗어나
산으로 들로 밖으로 나가야 한다.

숲에 깃들 때마다,
바람을 깊숙이 빨아들일 때 마다,
흙과 나무를 맨발로 두 손으로 쓰다듬을 때 마다
우리는 건강과 평안과 깨어있는 정신을 선물받게 된다.

집에만 머물러 있으면,
좁은 골방에만 갇혀 있거나
딱딱한 의자 위에 앉아 모니터만 쳐다보고 자판만 두둘기고 있으면,
우리의 몸도 건강을 잃어버리게 되고,
우리의 정신도 심각한 이상을 앓게 되고야 만다.

핸리 데이빗 소로우는
'집은 일종의 병원'이라고까지 했다.
또 옛 사람들은
사람이 흙과 가까이 할수록 병원과는 멀어지고
흙과 멀어질수록 병원과는 가까와진다고 했다.

집을 빠져나가는 일은
그래서 저 산으로 뛰어드는 일은
한 편으로 얼마나 고된 일이며 귀찮은 일인가.

그러나 왜 집 나가길 주저하는가.
왜 늘 방 안에만 틀어박혀 안주하려 드는가.
건물 안에 갇혀 있는 것이라면
직장에서도, 학교에서만도 족하다.

우리의 아이들에게
아니 나 자신에게
자연을 선물 해 주자.

뒷 산의
소박하지만 생기로운 놀이터의 추억들을
우리의 아이들에게도 일깨워주자.

우리 집, 우리 마을의
뒷 산을 우리 손으로 소중하게 지켜내야 한다.
뒷 산의 놀이 문화를
우리의 어린 아이들에게 물려줄 수 있어야 한다.

비봉산을 오르며,
어릴 적 내가 살던 마을의 뒷산 모습이
아름다운 수채화를 보듯 뚜렷하게 그려진다.

뒷 산에서 산불이 났을 때
집집마다 모든 사람들이 자신들의 일을 뿌리치고
모두들 삽자루, 빗자루, 물통을 짊어지고
너도 나도 산으로, 불길 속으로 뛰어들던 장면은
두고 두고 우리 마을의 아름답고 살풋한 정감어린 기억으로 자리잡고 있다.

마을 사람들이 한꺼번에 모두 모이기가 참 어려웠는데,
더구나 저마다의 일들로 다들 바쁘곤 했는데,
뒷 산에 산불이 나니까
누가 시킨 것도 아닌데 그 모든 마을 사람들이 한꺼번에
다들 우루루 몰려들어서는
한마음 한뜻으로 단합을 이루며
뒷 산을 지켜내던 그 모습이 얼마나 아름답고
눈물어린 감동으로 남아 있는지 모른다.

나는 그 날
아버지를 다시 봤다.

아버지는 늘 차갑고 무섭고
다른 일에는 관심도 없이
오로지 일에만 집중해 계시는 모습이 내가 본 아버지의 모습이었는데,
그 날 아버지는
마을 사람들을 이끌고 산에 올라가
그 매서운 불길을 두려워하지 않고
산을, 숲을, 우리의 놀이터이자 마을의 삶터인 뒷 산을 그렇게 지켜내셨다.

지친 듯 산을 내려오시는 아버님 모습이
얼마나 자랑스럽고 뿌듯하고 감동스럽던지.
그리고 우리 마을의 어르신들이 얼마나 감격스럽던지.

그렇게 우리 마을의 어르신들은
뒷 산을 생명처럼 소중하게 지켜내셨다.
그리고 그렇게 지켜낸 뒷 산 언덕 위에서
우리는 또 다시 마음껏 뛰어놀 수 있었다.

그렇게 뒷 산에서
자유롭게 뛰어놀며 자란 어린 아이가
훌쩍 자라 어른이 되면서
잠시 동안은 자연을 뒤로하고
사회에서 학교에서 시키는대로 공부도 하고
입시전쟁도 치르고, 취직하느라 고생도 하겠지만,
그렇게 초록의 추억을 가슴에 품고 자란 어른들은
다시금 늙어가면서 산을 찾고
깃들어 살 숲을 그리워하게 된다.

그런 어른들이
환경파괴를 걱정하며 숲도 지키게 되고,
원흥이 방죽을 걱정하며 지켜내게도 되고,
멀쩡한 산을 뚫어 터널을 만드는 일에 왜 반대를 해야 하는지도 알게 되며,
발전과 개발의 논리 보다는 보존과 놓아 둠의 논리를,
또 부자보다는 지혜로운 가난의 정신을 지키게도 되고,
나아가 산과 숲의 정신을
우리 인간의 마음에 일치시키는 선의 길, 명상의 길에도
밝은 원력을 투영하게 되는 것이 아닐까.

비봉산 정상.
매서운 칼바람을 맞으면서
이 아름다운 강원도의 자연을 내려다 보면서
언젠가 이 곳까지도
개발과 발전의 논리가 지배되어
모든 사람들의 눈에 선량한 눈빛이 사라지고
독이 오른 부와 개발과 성공을 향한
매서운 칼바람이 불어오면 어쩌나 하는 걱정,
괜한 거겠지?

아직 소나무는 푸르다.
햇살도 아직 건너편 산봉우리를 넘지 못했다.
생기어린 창창한 소나무 숲.
그 사이로 새어나오는 저녁 햇살의 따스함.

5

앙상한 소나무 숲 사이로 난
길.
숲 길.

6

발걸음이 산 아래로 내려가면서
서산으로 떨어지는 태양이
나뭇가지에 걸렸다.

7

그리고는 곧장 곤두박질.
태양의 여운은 뜨겁다.

태양이 사라진 자리에서
앙상한 겨울 가지 끝에
단풍잎 하나.

8 

고개를 돌려 내려온 산을 바라보니
비봉산 하늘 위에서
태양과 맞교대를 하고 막 뛰쳐나온
달.

 9

노을의 여흥이
달 아래
구름을 녹녹히 덥혀주고 있다.

10

태양빛이 달님을 맞이하는 순간.

오늘 밤
달빛, 별빛은
더없이 초롱초롱 빛나고 있다.

둘째날, 나리분지에서 태하까지(나리분지 출발, 12:20)


나리분지에서 민박집 어르신이 일어주신 산마을 식당에 들러
울릉도에서 난 산채들로만 만들었다는 산채비빔밥을 시켰다.
육지에서는 볼 수 없는 산채들이 풍성하게 한 그릇 가득이다.

주인 아주머님 인심은 또 얼마나 좋은지,
밥이며 산채며 반찬들이 전통 한정식 저리가라 하고 많이 나오는데다
민박집 어르신 얘기를 했더니
이 곳의 자생인 천궁, 호박, 더덕 등으로 직접 만들었다는
씨앗주라는 곡차도 한 사발 내어 주셨다.

늦은 점심을 먹고는 터벅터벅 바닷가 쪽으로 발길을 돌린다.
고갯길을 오르니 나리분지가 한 눈에 들어온다.

1

1시간 남짓 고개를 넘어 내리막길을 걷다보니
시원스런 바다와 거친 파도가 가슴을 뻥 뚫어준다.
그리고 바닷길 쪽으로 눈길을 돌리니
산에서 바다 쪽을 향해 약간 기울어 진 듯 보이는
육중한 바위산 하나가 시선을 잡아끈다.
성인봉의 한줄기 산봉우리가
송곳처럼 뽀족하게 생겼다고 해서 송곳산이라고 한다.

2

그래서 이 송곳산 때문에 이 인근 마을도 송곳산의 한자명인
‘송곤 추(錐), 메 산(山)’자를 써서 추산이라고 불린다고 한다.
높이가 430m라고 하니 육중한 바위산이라고 말했던 규모가 짐작이 가려나.

그리고 송곳산에서 바다 쪽으로 눈을 돌리면
일명 코끼리 바위라고 불리는 공암이 바다 위에 떠 있다.
바위 모양이 코끼리가 물 속에 코를 담그고 물을 마시는 형상이라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바다로 난 길을 따라 잠시 걸으니
저 멀리로 죽암이 보인다.

3

죽암과 삼선암을 들렀다가 서면 쪽으로 가려고 했는데
아무래도 북면 쪽에서 너무 시간을 오래 끌다 보면
내일 떠나야 하는 일정에 차질이 생기지 않겠나 싶어 아쉬운 발길을 돌렸다.
여행을 다니며 구경을 하는 것도 아쉬운 듯 한 것이 좋고,
모조리 다 감상을 하겠다는 것 보다는 욕심을 좀 덜 내는 것이 좋다는 것을
몇 몇 만행길에서 터득한 바다.

바닷길을 따라 걷고 또 걷는다.
인적은 드물다.
그래도 작은 어촌 마을인데 사람이 살고 있기는 한 건가 싶을 정도로
여간해서 사람 모습이 보이지 않는다.

4

바람은 점점 거세진다.
때때로 파도의 잔영들이 뺨을 스치운다.
한참을 걷다보니 바닷길 위에까지 파도가 흩뿌려져 겉옷이 축축하다.

걷다가 걷다가 길가 간이 의자에 앉았다가 이내 드러누웠다.
가만히 드러누워 하늘을 바라보고 있다.
하늘을 보며 온 몸으로 간간이 뛰어드는 파도를 맞아가며
점점 거세게 불어오는 바람의 찬기를 느끼면서
아무도 없는 외딴 섬 길 위에 버려진 듯 철저한 고독의 소리를 듣는다.

산 위에서 그랬듯이 길 위에도 인적은 없다.
이따금씩 지나치는 차량만이
이 땅이 그래도 사람 사는 곳이라는 것을 증명해 줄 뿐이다.

나중에 알아봤더니 요즘, 늦가을부터 겨울까지는
거의 관광객들도 없고, 일들도 많이 줄어드는 시기라고 한다.
요즘 같으면 배가 들어왔어도 나가지 못하는 날이 더 많은 연유라고 했다.
그 말을 듣고 보니
차라리 한 몇 일 이 곳에 갇히는 것도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거센 바닷가 한 켠에 앉아
하염없이 바다 쪽으로 시선을 고정시키고 마음도 고정시켜 본다.
외로운 느낌을 가만히 살펴본다.
이럴 때, 외로운 느낌이 존재를 뒤덮으려 할 때,
바로 그 때가 수행자에게는 가장 좋은 구도의 때다.

가만히 그 느낌을 주시하고 있다보면
이내 느낌도 생각도 어느덧 사라지는 것을 본다.
다만 파도가 칠 뿐.

5

바다도 산처럼 사람의 생각을 잠재우고
감성을 일깨우는 그 어떤 힘을 가졌다.
이런 외딴 섬에서의 외로운 거센 파도는 내 삶에서도 드문 경우다.
더구나 이런 철저히 외딴 곳에서의 거친 풍경은 더욱 드문 일이다.
이런 생경한 경험들이 지진하던 내 속 뜰에 생기를 불어넣어 준다.

바다와 하늘, 구름의 경계선이 사라진다.
온몸은 거센 바닷바람을 따라 춤을 춘다.
또 다시 길을 따라 걷고 또 걷는다.
걷다가 지치면 멈추고 눕다가 또 다시 길을 나선다.

이렇게 조용하게 그 어떤 훼방 없이 걸을 수 있는 곳은 아마도 처음이지 싶다.
길 위의 고요를 이제껏 본 적이 없다.
언제나 길은 시끄럽다.
차량이 줄을 잇고, 엔진의 소음이 그칠 줄 모른다.
차의 길은 차의 소음으로 시끄럽고
사람의 길은 사람들의 재잘거림으로 시끄럽다.
물론 벗과 함께 걷는 길에는 사람들의 소리들까지도 정겹지만
홀로 속 뜨락을 거닐을 때는 때때로 조용한 길이 그리워지기도 하는 법이다.

이 곳 울릉도의 길이 바로 그런 길이다.
이 길은 차 만을 위한 길이 아니다.
길 위에서 사람도 자유롭게 걸을 수 있고
바다도 파도도 그리고 깊은 침묵 또한 길 위를 걷는다.

차량의 행렬이 멈춘 도로는 낯설다.
그 낯섬이 길을 걷는 여행자에게는 반가운 도반이다.

저 섬 반대편까지 가야 일몰을 볼 수 있으리란
민박집 어르신의 말씀이 문뜩 떠올라
지나치는 차를 향해 손을 들었다.

이곳의 차량은 언제나 사람을 태울 준비가 되어 있는 듯 하다.
차량 향해 손만 들으면 어떤 차도 어떤 사람을
당연히 태우고 갈 준비가 되어있지 싶다.
차도 섬을 닮아 가슴이 따뜻한가.

거의 반나절을 걷고 걸어 되돌아 보면 한 뼘이더니
이 섬의 차는 순식간에 내 수고를 덜어
훌쩍 섬 반대편 태하의 성하신당에서 나를 떨구어 주었다.

역시 차를 타고 오다보니 놓치는 것이 많다.
눈을 초롱 초롱 뜨고 산과 바다를 또 보이지 않는 또 다른 것들을 향해
깊은 시선을 던지긴 했어도 보지 못하는 것들이 너무 많다.
하나를 얻으면 역시 하나를 잃게 마련이다.

문명의 이기는 이렇듯 볼 수 있는 것을 보지 못하게 만드는 기능도 한다.
빠르면 빠를수록 놓치는 것이 많아진다.
차창 밖에 보여지는 사물들만 놓치는 것이 아니라
그 하나 하나의 풍경들이 담고 있는 내 안의 의미도 놓치고
그들이 내게 던져주는 화두 같은 것도 놓치게 된다.

삶의 속도도 매한가지다.
인생의 속도가 빨라지면 빨라질수록
더 빨리 얻는 것은 죽음을 맞이하는 시간이다.
삶의 참된 의미는
봄 꽃이 피어나는 듯 느린 가운데에서 꽃피어난다.

태하 마을로 들어가는 입구도 완전히 태풍에 강타를 당했다.
물론 이 곳 또한 물길 작업이 한창이고,
바닷가 쪽은 방파제 작업으로 분주하다.
거대한 굉음과 장비들의 소음이
이 아름다운 풍경의 정서를 반감시키고 있다.

태양은 이제 저 바다 너머로 뛰어내릴 준비를 하고 있다.
어둑 어둑한 뭉개구름들 사이로 투명한 빛이 바다를 향해 쏟아진다.

6

빛의 향연. 아직 빛은 투명하다.
이제 조금 더 시간이 지나면 빛은 더욱 따뜻한 노을빛으로 바뀔 것이다.

7

저 건너편 풍경이 이채롭다.
늘상 바라는 바지만 저 언덕 위에 작은 오두막을 짓고
조그만 텃밭을 일구며 매일같이 바닷가로 지는 태양을 바라보며
사는 것을 그려보게 된다.

8

시끄러운 소음과 정신없는 공사 때문에
이 곳에서 일몰을 맞으려던 생각을 바꾸었다.
태하 마을을 걸어 나오는데
울릉도 곳곳에서 자주 목격하던 오징어 말리는 풍경이 이젠 익숙하다.

9

아직 일몰까지는 시간 여유가 있다.
또 한 번 차를 얻어 탔다.


둘째날, 통구미 거북바위 일출을 바라보며(통구미 도착, 16:00)

사자바위 쪽에서 일몰을 볼까 하다가
아무래도 도동 가까운 곳이 좋겠다 싶어 단숨에 통구미까지 내달렸다.
거북이가 마을을 향해 기어가는 듯한 모양을 보고
거북이가 들어가는 통과 같다고 하여 통구미라는 지명이 생겼다고 한다.
이 곳은 향나무 자생지로도 유명한데 천연기념물 48호로 지정된 곳이라 한다.
포구 앞의 바위는 거북이를 닮았다고 하여 거북바위라 부른다.

통구미와 거북바위의 일몰도 유명하다고 했는데
차에서 내리니 ‘잘못 온 게 아닌가’ 싶은 착각을 일으킬 정도로
아무것도 없다.
그야말로 바위 하나 달랑 있고
도로 곁에 그 흔한 슈퍼나 식당 조차 없다.

10

일반적인 생각으로는 관광지의 유명 명소는
호텔과 휴양시설이며 온갖 식당가와 관광물품판매점에, 심지어 유흥업소까지
얼마나 정신 없는 시설들로 꽉 들어 차 있는가.
그런데 지금까지 울릉도를 걸으며 느낀 공통점이 바로
울릉도의 명소는 인위적인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이런 곳에 통구미라는 지명까지 만들어졌다는 것이 신기할 정도다.
일몰을 구경 온 관광객도 없고,
관광객들을 위한 그 흔한 일몰 전망대 같은 것도 없다.
그냥 길가에 앉으면 그곳이 전망대도 되고 휴게실도 된다.

이렇게 개발되고 발전되지 않아 호젓한
이런 곳이 참으로 소중한 줄 알아야 한다.
아무것도 없는 가운데 그 텅 빈 가운데 꽉 찬 무언가가 있다.
너저분한 것들이 없어야 정말 보아야 할 그 하나에 집중할 수 있는 법이다.

길을 벗어나 바다 쪽으로 바위가 하나 있어 그 위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태양도 이제 많이 내려왔다.
이제 조금 있으면 저 수평선 바다가
저 위의 붉은 생명을 단숨에 품어 안을 것이다.

11

여러모로 이번 여행은 의미가 남다르다.
가는 곳곳마다 사람들로 넘쳐나고,
문명의 이기로 넘쳐나는 그런 여행지 풍경 속에서는
나 자신에 집중하기도, 여행지 풍경에 집중하기도 어렵지 않은가.

그러나 이 곳에선 호젓한 가운데, 아무런 걸림 없이, 아무런 방해 없이
두 눈의 시선은 오직 저 붉은 태양에 고정되고 있다.

12

태양 빛을 받아 반짝이는 바다의 살결도 찬연하지만
그 위에서 휴식을 취하듯 소박한 바위 위에 앉아 있는 갈매기들의 모습에서도
더없는 평화로움과 삶의 여유를 읽을 수 있다.

13

노을이 내려앉은 바다 물결이 곱다.
용광로 같은 태양 아래
바위 위에 옹기종기 모여 앉아 있는 갈매기가
빛을 받아 더욱 반짝인다.

14

잠잠히 앉아서 일몰을 기다리던 갈매기들이
시간이 지나면서 하루를 마감하는 일몰의 축제에 빠져든 듯
노을진 하늘을 배경으로 떼지어 날아올라 황홀경에 빠져들고 있다.

15

거북바위가 지는 태양의 곁에서 묵묵히 일몰을 지켜주고 있다보니
함께 곁에서 지켜보는 여행자의 가슴도 따뜻해진다.

16

시간과 함께
태양은 뜨거운 옷을 갈아입는 중이다.

17

한 30분 남짓의 시간동안 서서히 아주 조금씩
태양과 바다의 간격이 좁혀지더니
이네 푸른 선과 붉은 원이 감격의 재회를 맞으며 하나 된다.

18 

둘이 만남을 이루고 나면
태양은 빠른 속도로 바다 속을 파고들며 자신을 소멸시킨다.

19

이내 태양은 보이지 않고 수평선만 외로이 덩그러니 남아있다.
태양이 사라져도 여운은 남는다.
아직도 하늘과 바다 그리고 땅은 태양의 여운으로 은은하다.

20 

또 다시 바다 곁을 따라 난 길을 걸으며 녹록한 태양의 여흥을 느껴본다.
짙어지는 어둠 속에서 호올로 길 위를 걷는 느낌은 적막 혹은 적멸이다.
첫 느낌은 적막하기 그지없는 휑하고 허한 느낌이지만
그 느낌을 깊이 바라보고 있노라면
그 휑한 적막감은 이내 깊은 고요와 평화를 간직한 적멸의 자리처럼 느껴진다.
이렇게 걷다보면 길 위에서 적멸의 벗을 만나게 될 것도 같다.

한참을 걷다 또 한 차례 차를 얻어 타고 도동으로 내달렸다.
저녁 공양을 하고 잠시 도동의 밤거리를 거닐었다.
피곤이 몰려온다.


셋째날 새벽, 행남등대와 해안산책로 일출(도동항 출발, 05:50)

애초 아침 일찍 독도를 다녀오려고 했는데
마침 오늘이 독도편 배가 출항하지 않는 날이라
독도를 다녀오는 계획은 언제인지 알 수 없는 다음으로 미뤄야 했다.

대신에 행남등대와 해안산책로를 돌아보기로 했다.
새벽 일찍 일어나 도동항에서 해안산책로가 아닌
산길을 따라 행남등대까지 가는 길을 택했다.

아직 도동은 한밤중이다.
도동항 마을에서 가파른 계단을 따라 얕은 산 위로 올라가니
도동의 밤 풍경이 한 눈에 들어왔다.
손전등을 미처 준비하지 못한 탓에
어두운 산길을 두 눈 부릅뜨고 직감에 의지해 걸어야 한다.

어둠 속에서 낯선 산길을 걷는 건 또 다른 생경함이다.
어둠은 짙고 세상은 조용하다.
터벅 터벅 길이 난 곳만을 향해 계속해서 걷는다.
이른 새벽 숲 길의 청명함이 온 몸으로 느껴진다.
방에서 나올 때만해도 바람이 차다고 느꼈는데
한참 걷다보니 안에서부터 땀이 주르륵 흘러 내린다.

금방 도착하지 않겠나 싶었는데
밤길이라 그랬는지 1시간을 조금 넘게 걸은 것 같다.
오르락 내리락 하며
또 둘로 난 길에서는 그냥 대충 직감을 따라 길을 선택했다.
우측으로 가면 바다에 다다를 것이고
너무 좌측으로 가면 저동에 다다를 것 같고
중간 즈음의 길을 따라 계속 걷다보니 길 끝에 집이 한 채 보이고
갈라진 길 앞의 간이 이정표에 ‘행남등대’ ‘저동’이란 푯말이 보였다.

행남등대에 잠시 올랐다가 일출을 보기에는 바다쪽이 낫겠다 싶어
다시 해안산책로 쪽으로 내려왔다.
빠른 걸음으로 해안산책로에 다다르니 이제 막 일출이 시작되고 있다.

   21

어제 새벽 저동의 일출과는 또 다른 느낌의 태양이 떠오른다.
뭐랄까 조금 더 부드럽고 따뜻하며 차분한 느낌.
어제의 일출이 강렬했다면 오늘의 일출은 포근하고 따스하다.
때때로 고기잡이 어선이 하나 둘씩 지나간다.

22

갈대 사이로 솟아오른 태양이 지극히 순박하다.

23

갈대도 태양을 향해
합장을 하듯 이 아침의 일광보살을 맞이한다.
산책로 사이로 피어난 왕해국이 대견하게 느껴진다.

24

바위틈 사이 그 척박한 곳에 왕해국 작은 꽃무지도
그 곳이 제 집이라고 뿌리를 박고 피어올랐다.

바위틈에서 자란 건 왕해국만이 아니다.

 25

그 곁에서 산부추도 계절감을 잊고 바위틈에서
바닷바람을 피해가며 호젓하게 서 있다.

26

바위 위에 앉아 떠오르는 태양을 가만히 바라보고 있는
갈매기 한 마리가 내 외로움을 달래준다.

 27

그 하늘 위로 뭉개구름 몇 송이 평화롭게 떠 다닌다.

28

한참동안 발을 떼지 못 하고 바다쪽을 향해 서 있다.

29

아! 이 뜨거운 하늘, 바다, 태양 그리고 섬...
이 한 편의 장면이 그대로 동화 속 풍경처럼 선명하게 그려진다.
예상했던 것 보다 해안산책로의 절경은 더없이 특별하다.
어제까지의 풍경들이 평범한 가운데 평화와 순박의 경이가 담겨있었다면
오늘 아침 해안산책로의 그것은 경희(驚喜) 그 자체다.

30

이런 풍경은 도무지 사람이 사는 곳이라고는 생각되지 않을 정도다.
이런 풍경을 대할 때마다
대자연의 무위의 예술성에 고개를 숙이지 않을 수 없게 된다.
어찌 이런 절경을 만들어 낼 수 있단 말인가.

31

더욱이 기암괴석의 하늘신이 빗어놓은 듯한 천상의 산책로 위로
새벽 태양빛이 하늘에서 금싸라기를 흩어 뿌리는 듯 난연히 비춰주는
이 해안의 풍경은 도무지 언어로 담아내기에는 역부족이다.

33

그 어떤 언어로 이 대자연의 하늘 연주를 담아낼 수 있단 말인가.

32

깍아 지른 듯한 기암괴석 아래로
금새라도 떨어질 듯한 아슬아슬한 스릴을 느끼면서 걷는다.

 34

아! 지금 이 순간
내 영혼도 저 갈매기처럼
청량한 하늘 위를 날고 싶다.

35

내 안에서는 또 다시 침묵의 선율이 흐른다.
모든 티끌들이 말끔히 사라지고
청연청아한 텅 빈 공간이 내 안의 뜰에 맑은 비질을 한다.
이 선연한 하늘의 연주와 선율을 알아들었기라도 했다는 듯
하늘 위로 갈매기 떼의 발랄한 날개짓이 춤을 춘다.

천천히 경행하듯 옮긴 발걸음이
시간 가는 줄도 모르고 어느덧 도동항에 다다랐다.
도동항 마을도 아침 햇살을 받아 투명하게 반짝인다.

 36

해도 이제 제법 하늘 위로 솟아올랐다.
날씨가 좋아 배는 당연히 뜬다고 했다.
육지로, 일상으로 다시 되돌아 가는 배에 몸을 싣고 잠시 눈을 붙였다.
꿈결 속에서 울릉도를 다시 그려본다.

37

설레임 가득한 일탈의 만행을 만들어 준 울릉도,
언제 다시 오게 될 지 모르겠지만 그 때까지 안녕.

둘째날, 안평전에서 성인봉까지(안평전 출발, 07:50)


울릉도의 택시는 전부가 4륜구동의 승합차량들이다.
그도 그럴 것이 곳곳이 가파른 오르막이고
때때로 위험해 보이기까지 하는 곳들도 많이 보인다.

택시를 타고 산 아래 안평전까지 가면서도
울릉도의 풍경, 바다위로 피어오르는 태양 빛,
그 빛에 반사되어 황홀경을 선사하는 산세며
어느 것 하나 내 눈을 사로잡지 않은 것이 없다.

1

울릉도는 섬이라 산세는 고만고만할 것이라 예상했는데
내 생각은 그야말로 완전히 빗나갔다.
주봉 성인봉을 중심으로 동서남북으로 펼쳐져 있는 봉우리들이
그야말로 울릉도의 아름다움을 한껏 드높이고 있다.

2

한참을 차창 밖으로 펼쳐지는 울릉도의 아름다움에 취해 있는데
한동안 산 쪽 오솔길로 들어선다 했더니 벌써 안평전에 다다랐다.
성인봉 쉼터라고 쓰여 있는 바로 이 곳이
안평전에서 오르는 등산의 초입이다.

3

성인봉 오르는 길,
초입에 몇몇 채 소박한 집들이 늘어 서 있을 뿐
안평전의 풍경은 조용하고 차분하다.

4

마지막 소담한 농가에서 멀리 바다를 굽어보며
물을 한 잔 얻어 마시고는 이제 본격적인 입산에 들어간다.

5

저 멀리 바닷가 위로 떠오른 햇살이 아직 따스한 온기와 빛으로
성인봉 얕은 산봉우리들을 비춰주고 있다.

이런 풍경 하나 하나가 내 안에 자연 성품을 일깨우며
감미로운 뉴에이지 피아노 선율이 잔잔히 대지 위로 연주되는 듯
내 온 몸이 마음이 이 법계의 연주에 동참하고 있다.

연주를 하지 않아도 연주되는 음악이 있다.
때때로 이런 대자연의 경이로움을 온몸으로 호올로 느낄 때
하늘에서 대지에서 산과 바다에서
온 존재를 하나되게 만드는 음악이 연주되곤 한다.

산길을 걷는 내내 연주는 끊이지 않는다.
발걸음에 바스락 거리는 낙엽 소리도,
앙상한 가지 끝에서 돌아감을 순수히 기다리며 미처 떨어지지 않은 낙엽이
시린 바람과 함께 만들어 내는 소리도,
온갖 새들의 지저귐이며 간간이 들려오는 꿩 소리도,
저 멀리서 들릴 듯 말 듯 간지럽혀 오는 파도 소리도,
또 산길을 오르며 거칠어지는 호흡 소리며,
내 안에서 들려오는 심장박동 소리까지
그 어떤 소리 하나 법계의 노랫소리 아닌 것이 없게 느껴진다.

인위가 개입되지 않은 순수한 무위의 소리들이
그대로 진리인 양, 사자후인 양
흡사 가릉빈가의 연주처럼 성성하고도 적적한 감미로움을 자아낸다.

날씨는 더없이 화창하다.
산 아래는 아직 가을의 잔영이 남아있다.

6

육지에서는 벌써 단풍 구경 끝난 지가 오랜데
신기하게도 산 아래는 생의 마감에 미련이 남기라도 한 듯
푸석푸석한 막바지 단풍들이
아쉬운대로 두 계절의 즐거움을 선사해 주고 있다.

7

오르는 길에 나무로 만든 투박하지만
자연과 조화를 잘 이룬 계단들이 인상적이다.

8

여느 국립공원 산 같으면
인위적인 가공 계단들을 반듯 반듯하게 세워 놓거나,
또 어떤 곳은 철로 만든 계단을 만들어 놓아
산길을 걸으며 느낄 수 있는 흙과 낙엽 소리 대신에
철철거리는 철계단의 소리를 들어야 하는 곳도 있었을 터인데
이 곳의 계단들은 하나같이 그 산의 나무들로 이루어진
그것도 반듯하게 잘라서 인위적으로 만들었다기 보다는
부러지고 쓰러진 나무들을 엉성하게 모아 만들어 놓은 계단들이다.

9

이렇듯 계단 하나도 자연과의 조화를 생각하면
운치가 있고 정감이 가도록 만들 수 있는 법.

산을 오르며 곳곳에 오랜 세월을 버텨오다 버텨오다
인연이 다해 자연으로 되돌아가는
꺾이고 쓰러진 고목들이 곳곳에 눈에 띈다.

10

그런 쓰러진 나뭇가지들을 적당히 크기 맞게 잘라
이렇게 계단도 만들고 잠시 쉴 수 있는 의자도 만들어 놓은 것을 보니
왠지 모르게 더없는 정겨움과 고향 같은 풋풋함을 느끼게 된다.

11

그런 고즈넉한 산길을 따라 계속 걷다 보니
산 중턱 곳곳까지도 고사리류와

12

섬바디, 

13

섬노루귀 등이

14

초록의 빛깔을 잃지 않은 채
이 추위를 근근히 버텨내고 있는 것이 보인다.

이 늦가을 겨울 초입의 날씨에 단풍에 초록의 식물들까지
참 대견하다 싶더니만 역시나 중턱을 넘어서면서부터
나무들은 가지 끝에 남은 단풍 한 떨기조차 다 떨구어 냈고
초록의 식물들도 사라진 채
한겨울을 초록으로 끝까지 나는 조릿대만 나무 아래 녹빛 흔적을 남겼다.

15

산 아래에서부터 중턱, 정상까지 오르며
조금씩 계절은 가을에서 겨울로 빠르게 옮겨가고 있다.
중턱을 넘어서니 하늘빛도 더욱 푸르고
잎을 다 떨구어 낸 나무들도 훨씬 홀가분하고 호젓하게 서 있다.

16

그렇다보니 건너편 산도,

17

나뭇 가지 사이로 푸른 하늘도 그대로 시원하게 드러난다.

18

아무도 없는 산 길,
침묵만이 내 벗이 되어주는 이 길이
오늘따라 내 마음을 왜 이리도 설레게 만드는지.

대자연의 길벗들이,
이 숲의 나무와 바람, 흙과 풀들, 하늘과 청량한 내음들이
모두 내가 걷는 길을 축복해 주고 밝혀주는 것만 같다.
아주 오래 전부터 오늘 이 자리에서 만나게 될 나와의 인연을
그토록 기다리며 마중하기라도 했다는 듯
전혀 낯설지 않은 포근한 숲의 도반들이 반가운 인사를 건네 오고 있다.

이런 때, 이런 날, 이런 곳!
난 이런 문득 스치는 낯선 자연의 인연을 미치도록 좋아한다.
내 삶에 가장 소중한 인연이자 도반이자 스승이 되어주는
이 대자연 법계의 소식들이 짠하게 내 품을 감싸주고 있다.

오랜 도반들, 내 삶의 길벗들! 안녕!
산과도 나무와도 바람과도 인사를 건낸다.
모든 숲의 생명들이 속 뜰의 예민한 감성과 따스한 교감을 나누고 있다.
공평하고 평등한 존재와 존재가
민감하게 서로를 살려주며 공명하고 있음을 느낀다.

느릿 느릿 한 시간 여를 올랐을까.
7시 50분 즈음에 안평전에서 출발했는데
시계를 보니 8시 40분이 막 지나고 있는 걸로 봐서
생각보다 걸음이 빨랐던 것 같다.

울창한 마가목 나무 원시림이
또 한번 내 마음을 설레게 한다.

19

계곡과 능선 사잇길을 따라 느릿한 걸음으로 한 시간여를 올랐을까
능선 위로 오르면서 원시림이 펼쳐지고 조금을 더 걸어올라가니
발 아래 울릉도 도동항과

20

끝없이 펼쳐진 망망대해가 그림처럼 펼쳐진다.

21

잠시 숨을 돌리고 또 다시 울창한 숲 터널을 걷는다.
계곡 쪽에서 능선을 타고 오르니 비로소 따스한 햇살이 길 위로 내려앉는다.
바다 위에 떠 있는 태양은 이 산위로, 바다 위로, 도동항 마을 위로, 숲 길 위로
자신의 따스한 햇살을 한없이 나누어주고 있다.

22

새벽 일출 때부터 지금 즈음까지의 햇살이
하루 중 가장 가볍고 상냥하며 따스한 느낌으로 세상을 비춘다.
그리고 낮 시간에는 정직하고 곧게 내려쬐며 대지를 덥히다가
또 다시 늦은 오후부터 일몰 직전까지는
아침보다 좀 더 짙고 차분하며 따뜻한 느낌으로 대지를 품에 안는다.

햇살도 가만히 관찰해보면 이렇듯
새벽과 아침 오후와 저녁 때가 예민한 차이를 보인다.
그러더라도 그 차이점이 더 좋다거나 나쁘다거나 하는 걸 의미하지는 않는다.
저마다의 햇살이 제각기 독자적이고 완전한 자기의 삶을 대지 위로 꽃피워낸다.

햇살만 그런 게 아니라 이 대지 위의 모든 존재며 생명들이
모두가 저마다의 시공간 속에서 제각기 독창적이고 완전한
자신만의 길을 걷고 있다.
그래서 모든 존재는 자신의 길을 온전히 걸음으로써
그 안 깊은 곳에 담겨진 진리를 고스란히 세상에 표현해 낸다.

그래서 모든 존재는 그 모습 그대로의 모습으로써 아름다울 수 있는 것이다.
자기 자신의 모습으로써 온전한 완성과 지복의 행복을 부여받는다.
그래서 울릉도도 울릉도만의 독자적인 모습으로써 존재함으로써
이렇듯 법계의 아름다움에 동참할 수 있는 것이다.

어쩌면 다른 많은 곳이 그러고 있듯이
이 울릉도도 머지 않아 개발과 발전의 논리가
섬 전체를 집어 삼킬 지 모르겠지만
그랬을 때는 더 이상 울릉도가 울릉도의 아름다움을 잃고 말 것이다.

쭉쭉 뻗은 빌딩숲이나 대형 콘도며 호텔들,
인공의 잔디가 광범위하게 깔린 골프장이며,
산을 뚫고 길을 내거나
저 성인봉 정상에까지 케이블카를 설치하는 등
이 무위의 섬 울릉도에 문명의 이기와 인위적인 것들을 들여놓기 시작하면
그 때부터 울릉도는 더 이상 울릉도만의 성품을 잃고 말 것이다.

그것들이야 어디든 다 있는 것 아닌가.
그것을 애써 울릉도까지 들어와서 또 봐야 할 것이 무언가.
하기야 이 울릉도도 조금씩 변해가고 있고,
전 세계가 이미 개발과 발전의 논리로 인해
저마다의 온전한 독자성과 독창적인 본성을 잃고 말았다.

전 세계 어느 곳을 가더라도 세계적인 휴양지라는 곳은
죄다 똑같은 유럽식 호텔에, 똑같은 조경에, 똑같은 아스팔트 길이며
무엇 하나 그 나라만의 그 고장만의 독창적인 멋스러움을
고스란히 간직한 곳을 찾아보기 어렵게 돼 버렸다.
그런 인위적인 것들은 생명의 기운을 떨어뜨리며
그 고장만의, 그 나라만의 독자적인 진리 성품을 사장시키고 말 뿐이다.

대자연은 항상 진리의 소식에 귀를 기울이며
무위로써 자연스럽게 살려지고 있다.
법신 부처님의 숨결대로, 아버지 하느님, 어머니 대지의 선택 대로
모든 것을 내맡기며 자연스레 자신만의 성품을 드러내고 있다.

그렇게 인위적인 개입을 최소화 시키고
대자연의 진리에 모든 것을 내맡기면서 살려지도록 놓아두는 것만이
시름 시름 앓고 있고, 아름다운 생명 본연의 모습을 잃어버린 이 지구를
살릴 수 있는 유일한 처방전이 될 수 있다.

숲 터널을 따라 계속해서 오르니 어느새 인가
가을의 분위기는 온데 간데 없고 완연한 겨울로 옮겨왔다.

23

발 아래는 지난 주엔가 왔다는 눈이 완전히 녹지 않은 채 길 섶에 있고
때때로 마가목 빠알간 열매들만이 흑백의 명암에 생기를 불어넣어 주고 있다.

24

성인봉 가까이에 조금 더 다가가니
발 아래로 어제 가 보려다 못 갔던 봉래폭포 쪽 계곡과
저동항의 풍경이 창창하게 펼쳐진다.

25

햇살이 많이 비치는 곳에는 눈이 거쳤는데
초록의 연한 이끼들이 햇살을 받아 곁의 눈을 녹여가며
겨울을 날 생명수로 흡수하고 있다.

26

조금 더 걸으니 안평전과 도동 대원사 쪽에서 올라오는 사람들이
성인봉 오르기 전 만나는 곳, 삼거리 쉼터다.

27

그리고 얼마 안 가
드디어 성인봉 정상.

28

바람은 차다.
성인봉 정상에 올라서니
그야말로 울릉도 섬 전체가 한 눈에 들어온다.

29

동서남북 사방으로 눈만 돌리면
산과 바다가 조화롭게 펼쳐진다.

30 

31

올라오는 쪽 하늘은 구름이 별로 없어 화창했는데
성인봉에 올라 반대쪽을 보니 하나 둘씩 구름이 모여들고 있다.

32

성인봉 전망대에서 내려다 보이는 나리분지와
그 너머의 바다, 그리고 그 위로 펼쳐진 구름들이 한 폭의 그림같다.

33

구름이 오며 가며
나리 분지의 신비를 열었다 닫기를 반복하고 있다.

34 

35 

36

한참을 성인봉 위에 앉아 울릉도 중심에 서서
이 울릉의 법계를 다만 바라보고 있다.

아침에 민박집 어르신께서 성인봉의 산기운이 전국에서 제일이라며
꼭 정상에 오르면 정성스런 마음으로 기도를 드리라고 했던
당부가 생각났다.
언뜻 말씀하시는 것을 들으니 당신께서도
불경 공부를 꾀나 많이 하셨고 요즘도 집안에서 부처님을 모시고
기도 수행을 퍽이나 열심히 하시는 모양이었다.

어르신의 말씀도 말씀이려니와
이 생경한 신비감에 저절로 기도심이 북받쳐 올랐다.
“이 법계 두루 두루에 대자연 법신의 사랑이 가득하기를,
이 경이로운 삶의 신비에 눈뜨지 못하고 여전히 아만과 욕심,
이기에 물든 모든 이들에게 지혜의 빛 찬연히 비추기를,
기아와 가난, 전쟁에 깊은 상처를 받고 죽어간 수많은 형제들께
본래 청정, 본래 원만 구족의 대 적멸이 깃들길,
이 세상 모든 이들의 가슴 속에 깨어있음의 연꽃 한 송이 피어오르길,
깨달음을 향한 적멸의 발원 이 생을 넘기지 않길,
성인봉 산신님께, 울릉도 이 대자연 법신불께,
아버지 하느님, 어머니 대지에 간절한 마음 모아 기도드렸다.”


둘째날, 성인봉에서 나리분지까지(성인봉출발, 10:00)

아이젠을 하지 않아 그런지
나리분지로 향하는 내리막길은 퍽이나 미끄럽다.

37

초록과 흰 눈, 그리고 나무와 하늘색의 조화가
마치 하늘 예술가가 내려와 물감을 뿌려 놓은 듯
내 안의 특별한 정서를 일깨우고 있다.

38

내려오는 길에 약수터 성인수에서
성인봉의 정기어린 시원한 생명의 감로수를
대자연 벗들에게 한 잔 대접받고 났더니 더없는 생기가 돌았다.

39

그리고 조금 더 내려가는데
‘이곳이 성인봉 원시림이구나’ 싶은 생각이 번뜩 스칠 법한
그런 창연한 숲과 오랜 고목들을 만났다.

40

약 500여 년 된 섬피나무가 있다고 하니
얼마나 오랜 역사를 이 한 곳에서 살아내며
500번이나 반복되었을 계절의 변화와 생멸을
온몸으로 버텨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500번의 봄에 꽃을 피웠을 것이고,
또 500번의 여름을 짙은 초록으로 물들였을 것이며,
500번의 가을에 단풍을 만들어 잎을 떨구고
지난한 500번의 겨울을 시린 침묵에 잠겨왔을 것이다.

그러면서 잎은 흙이 되고 거름이 되어
다시 제 생명의 뿌리로 되돌아 가
또 다시 자신의 뿌리를 가지를 잎을 만들었을 것이다.
그 윤회의 작업은 500여 년 동안 끊임없었을 터다.
겉모양을 바꾸며 몇 번이고 윤회에 윤회를 거듭하면서
저렇듯 육중하게 세월의 역사를 한 몸에 담아
지금의 원시림으로 거듭났을 것이다.

겉보기에는 그냥 아무렇지 않게 서 있는 것 같은 나무 한 그루도
그 존재 안에는 무시무종의 윤회와 숯한 업연이 담겨 있고
전 우주적인 소식을 내제하고 있으며
그 피어남을 위해 온 우주가 기꺼이 도왔을 터다.

41 

그렇기에 나무 한 그루도, 풀 한 포기도, 하찮게 보이는 곤충 하나조차
전 우주 법계의 거룩한 신성이 불성이 담겨 있는 숭고한 존재다.
하물며 사람이랴.
기아로 죽어가는 사람이든,
가난에 찌들어 괴로운 사람이든,
하물며 큰 죄를 지은 죄수라 할지라도
어찌 그 존재가 하찮을 수 있겠는가.

42

오랜 세월이 담기고 역사가 담긴,
지난 세기를 묵묵하게 살아 낸 원시림 숲의 정령들과
나무와 대지에 깃든 생명신들,
대자연의 천사들과 청량한 선신들
어떻게든 이름 지어진 그 모든 인연 도반들께, 이웃들께
이렇게 숲 길을 걸을 수 있음에 대한 깊은 감사와 경외를 보냈다.

43

원시림 숲 속을 가로질러 내려오는데
저 아래 계곡이 크게 몸살을 앓고
살저름을 떼어내는 듯한 아픈 현장을 목격했다. 

지난 태풍으로 인해 이 거대한 원시림 계곡이 무너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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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자연의 조화는 언제나 여여하고 법에 맞다.
여법한 일들, 꼭 필요한 일들만이, 꼭 필요한 곳에서 일어나고 있다.
그것이 우리가 이 대자연을, 이 우주 법계를 바라보는
가장 큰 ‘보는 관점’, 정견(正見)이 되어야 한다.

이 아름다운 숲이 왜 이렇게 훼손되고 있을까.
왜 태풍은 매년 이 아름다운 대지를 할퀴고 지나가는 것일까.
그것은 지엽적인 문제가 아니다.
그것은 온 우주적인 문제이며, 전 지구적인 문제이며,
전 역사적인 복잡한 인과가 인다라망처럼 얽혀 있는 문제다.

어쨌든 그 이유들을 하나하나 다 살펴볼 수는 없지만
중요한 것은 그 태풍 또한 이 세상에, 이 곳에
꼭 필요한 이유와 목적을 가지고 여여하게 이렇게 나타났다는 점이다.

어쩌면 아직 더 많은 태풍이, 폭우가, 지진이, 해일이
이 세상을 뒤덮어 버릴 지 모른다.
지금까지 있어 온 기상이변들은 어쩌면 서막에 불과했는지도 모를 일이다.
요즘에 전 세계적으로 거대하게 일어나는 기상이변은
대자연 존재계의 본질에서 보내는 지구를 위한 자비로운 힌트일 지 모른다.

여전히 신은, 붓다는 온갖 방법으로 우리에게 경고 혹은 힌트를 보내고 있다.
사람들이 대자연을 훼손하는 공업(共業)을 세계적으로 꾸준히 짓다보면
인과의 결과 이 지구는 결국 그 당사자인 인간들을 훼손시키고 말 것이다.
그것이 공평한 인과응보의 이치가 아닌가.

지금 세계적으로 일어나는 기상이면들은
바로 그것이 시작되고 있음을, 진행되고 있음을 알리는 경고다.
그런데도 여전히 사람들은 그 경고를 무시하고
끊임없이 개발지상주의에 빠져 전 지구를 파헤치고 있는 일을 멈추지 않는다.

이렇게 강력한 힌트를 존재계의 본질에서 꾸준히 보내주고 있는데도
사람들은 그 힌트를 알아채지 못하고 있다.
아니 알아채고 있다고 하더라도 지금까지 해 왔던
온갖 욕심충족과 만족을 모르는 어리석은 생각들,
탐내고 성내고 어리석은 삼독심이 그 힌트를 무시하고 있다.

대자연이 보내는 자비로운 경고를 무시해서는 안 된다.
이렇게 수많은 기상이변이며 대형 태풍들이 불어닥칠 때
그 힌트를 알아채고 곧장 본질로 돌아갈 수 있어야 한다.

본질은 무엇인가.
이 지구의 모든 사람들이 더 이상 대자연을 훼손시키지 말고,
개발이란 이름으로 죽이지 말고,
사람의 생명과 대지의 생명이 둘이 아니란 자각으로써
조화로운 지구 공동체를 이루어 내는 것이다.

조금 더 절약하고, 조금 더 만족하며,
욕심을 줄이고 집착을 버리며,
대자연의 시름 시름 앓고 있는 몸살을 동체대비로써 어루만져야 한다.

그러나 현실은 본질에 접근하기 보다는
지엽적인 것에만 매달려 어리석게 일을 진행시키고 있다.
태풍으로 계곡이 무너졌다고
콘크리트로 계곡을 반듯하게 바를 생각만 하고 있다.

지금 전국의 모든 하천들은 예전의 생명하천이 아니다.
모두가 반듯반듯하게 콘크리트 등으로 인위적으로 쌓아 놓아
작은 하천생명들이 더 이상 살아낼 수 없는 죽은 환경이 되고 말았다.

사람들의 바람대로 모든 하천은 깨끗해졌다.
흙도 별로 없고, 풀도 없고, 나무도 없으며
그 안에 깃든 하천 생명들도 사라져 버렸다.
오직 죽은 물이 흐르기만 하는 기능성 정비 하천이 되어 버렸다.
그래놓고 사람들은 그런 하천 풍경을 보며 개발되어 좋다고 말한다.
너도 나도 우리 동네 하천도
그렇게 포크레인과 거대 자본으로 개량해 주길 바란다.

모든 사람이 죽은 하천을 바란다.
그것을 깨끗하다고 여기며,
그것이 개발과 발전의 이기이며 축복이라 말하고 있다.
그런 인위적인 정비 하천을 보며 물도 맑아졌고
물길도 구불구불하던 것이 잘 펴졌으니
이만하면 환경 정비가 잘 되었다고 하겠지만 그건 얼마나 어리석은 것인가.

자연 하천은 있는 그대로 내버려 두는 것이 가장 온전하다.
그래야만 사람도 살고 그 물에 물고기도 작은 생명체도 살아갈 수 있다.
이제 모든 개발 정책은 최우선에 생명을 두어야 한다.
하찮게 보이는 생명이 살아나야 인간 생명도 살아나기 때문이다.

이 곳 성인봉 아래 나리분지 가기 전의 무너져 가는 계곡도
그걸 살리겠다고 지금 곳곳에 포크레인과 대형 장비들이 들어 와
계곡에 새로 튼튼한 인위적인 벽을 쌓는 현대적 정비작업에 나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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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듯하게 쌓아 올린 인공 계곡과 하천의 모습을 보니
더 깔끔해 지고 있다는 느낌 보다는 안타까운 마음이 앞선다.
무언가 산과 나무와 계곡의 조화가 깨지고 있는 느낌이다.

그냥 내버려두면 자연은 저절로 진리에 걸맞는 꼭 필요한 만큼의
정비와 정화를 스스로 해 낼 것이다.
인간의 해석과 장비를 들이대니 그것이 병인 것 처럼 보이고,
인간이 개입하지 않으면 절대로 안 될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가만히 놔두었을 때,
자연의 일은 자연 스스로에게 맡겨 두었을 때
자연은 정확하게 해야 할 일을 알고 스스로를 치유하기 시작한다.

물론 요즘의 현실이 애초부터 사람에 의해 발전되고 파괴되다보니
한 번 사람 손이 간 것들은 이제부터 끝까지
사람의 손에 길들여 져 복구가 되어야지만 되도록 해 놓아서
어쩔 수 없이 인위적인 손길이 필요한 곳들도 있지만,
그런 곳이라도 될 수 있다면 지속가능한 방법으로,
환경과 조화를 이루는 방법으로, 모든 생명을 살리는 방법으로
그 방법이 전면 제고되어야 할 것이다.

본래 자연에는 병이 없다.
자연 속에 깃든 모든 존재는 병으로 앓지 않는다.
유독 인간들만이 병으로 고생하고
인간에게 길들여진 애완동물들만이 인간의 병을 닮은 온갖 병들로 고생한다.

자연이 병들어 보이는 것도 사실은 그게 병이 아니다.
변화의 한 모습일 뿐.
그래서 자연은 파괴되는 듯 보이는 겉모습도
자연스런 삶의 과정으로 인식된다.
그러니 인간이 보기에 병들어 보이는 것도
가만 내버려 두면 스스로 알아서 치유된다.

저 성인봉 아래 하천을 정비하겠다는 모습만 보더라도
자연을 보호한다는 것이 도리어 흉측하게 바꿔 놓았다.
한 번 인위가 개입되면 그 때부터는
작은 상처에도 인간이 개입되야 하고, 온갖 기술과 장비,
돈과 인위적인 노력이 따라 들어와야 한다.
여러모로 번거롭고 어리석은 일들이 점차 우리 주위에는 늘어가고 있다.

이 늦가을, 하천 정비 공사장 곁에는
6, 7월에 피는 섬바디 하얀 꽃이 계절 감각을 잃고 피어올라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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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아래 나리분지 가까이에는 또 하나
한창 겨울에 피어야 할 동백꽃도 유독 한 나무에서만
빠알간 생명의 숨결을 틔워올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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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금 더 걸어내려가니
울릉도 전통 가옥이라는 투막집 몇 채가 보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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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리분지 쪽에는 너와집도 몇 채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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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흙이나 통나무로 만든 전통 가옥에 대해 관심이 가던 터라
유심히 관찰하며 투막집 안으로 들어가 보았더니
그야말로 울릉도의 자연에서 나온 흙과 나무 그리고 볕집들이
조화롭고도 견고하게 짜여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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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시 옛 사람들의 자연스런 지혜는
인위적이기 보다는 무위 자연의 조화로운 공존을 바탕으로 하는
선지자의 그것이다.
옛 것을 보라.
어느 것 하나 파괴되거나 조화를 깨는 것이 없다.

도무지 불가능하다고 입을 모아 말할 것이고,
또 실제로도 실현 불가능하겠지만
이 인류를 구할 수 있는 정말 획기적이고도 혁명적인 방법은
옛날로 돌아가는 것이 아닐까 싶다.

물론 요즘은 그런 옛 것의 우수성이 점차 알려지기도 하고
또 옛 것과 새 것을 잘 공유시킨 의식주 물품들이 유행이기도 하지만
그것이 한 때의 유행이나 돈벌이를 위한 수단으로 전락해서는 곤란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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