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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이란 곧 하나의 여행이다. 어머님 뱃속을 뚫고 이 세상으로 내던져진 순간 우리는 모두 한 사람의 나그네요 순례자가 된다. 그리고 펼쳐지는 매 순간의 삶 속에서 우리는 언제나 순유중이다. 단 한 순간도 정체하거나 머물지 않고 매 순간 우리의 여행은 계속된다. 그리고 그 여행은 누구에게나 집으로 돌아가는 길이다. 숭고한 귀의(歸依)의 과정. 존재의 근원이라는 본래 나온 그 텅 빈 곳으로 누구나 되돌아가고 있다. 삶이라는 여행길은 언제나 완전한 깨달음을 지향하고 있다.

이처럼 삶은 곧 하나의 여행이기에 한 순간도 머물지 말고 흘러야 한다. 세상 모든 것은 끊임없이 변화하면서 이 끝없는 우주를 여행하는 임무를 부여받았다. 그것의 목적은 끊임없는 여행에 있지 어느 한 곳에 정착하는데 있지 않다. 불가에서는 길을 떠나는 것을 만행, 순례라고 하여 수행의 필수적 요소로 본다. 매 순간 머물지 않고 흐르는 이러한 무집착의 여행은 단순한 놀이가 아니라 영적인 성장의 과정이요, 깨달음을 향한 정진의 길이 된다.

특히 홀로 고요한 숲길을 걷는 것은 더없이 중요한 수행의 방식이다. 가부좌가 그렇듯 걷는다는 행위는 그 자체로써 생각을 비우고 무심(無心)으로 나아가게 한다. 그렇게 되었을 때 ‘대지를 맨발로 걸으면 우리의 정신은 우주로 연결된다’는 아메리카 인디언의 말처럼 걷는 그 행위 속에 정신적인 각성과 우주적인 교감이 함께 한다. 결가부좌를 틀고 앉아 좌선하거나, 천천히 걸으며 자신을 관조하는 경행(經行), 이 두 가지야말로 인류의 오랜 수행법이 아니었던가.

오랫동안 걷다 보면 우리는 저절로 생각이 멎는 것을 경험한다. 생각이 단순 명쾌해지고 저절로 욕심과 집착과 내면의 화가 사라지면서 삶에 대한 통찰과 사유가 싹튼다. 비로소 나 자신에 대해, 삶에 대해 전체적으로 볼 수 있는 열린 자각이 시작되는 것이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은 여행을 통해 새로운 가능성에 눈뜨게 되고, 비로소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에 대한 자기다운 독자적 삶의 방식을 깨닫게 되곤 한다. 모든 해답은 내 안에 있다. 그러나 끊임없이 아상의 확장을 위해 살아가는 일상에서는 그 답을 찾을 수 없다가 비로소 여행을 떠나며 두 발에 의지해 걷고 걷는 과정 속에서 삶의 해답을 찾는 방법을 깨닫게 된다. 삶이란 본래 완전한 것이었으며 질문도 답도 모두 내 안에 구족되어 있었음을 깨닫는 것이다.

이처럼 여행은 의도하든 의도하지 않든 간에 누구에게나 구도(求道)의 한 과정이다. 우린 여행자가 되는 동시에 순례자가 되고 구도자가 된다. 누구나 여행을 통해 자신이 삶에서 깨달아야 할 귀중한 선물을 얻게 된다. 특히 홀로 걷는 여행은 또랑또랑한 지혜로써 삶을 빛나게 한다.

티베트의 위대한 성자 밀라레빠(Milarepa, 1052~1135)는 ‘여행을 떠나는 것만으로도 깨달음의 반은 성취한 것’이라는 말을 남기고 히말라야로 떠났다. 그에게 히말라야는 우주의 중심이자 수미산이었다. 히말라야로의 순례는 그에게 깨달음의 원천이었으며, 이 우주 속에서 끊임없이 돌고 도는 윤회라는 여행의 종지부와도 같았다. 그는 탐욕과 성냄과 어리석음으로 괴로워하는 이들에게 ‘모든 것을 버리고 히말라야로 떠나라’고 외친다.

이제 곧 여름이고, 휴가 시즌이다. 어떤가. 이번 휴가는 홀로 숲길을 걷는 만행의 길을 떠나 보는 것이. 지리산도 좋고, 올래길도 좋고, 산사의 숲길도 좋으며, 히말라야도 좋다. 한 사람의 순례자가 되어 홀로 고요한 숲길을 걷는 그 텅 빈 구도의 길을 떠나 보자.

 

-법상스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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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구 읍내가 환히 내려다 보이는
비봉산은
강원도 1000고지 이상의
높은 산들 가운데
어깨를 나란히 할 수 없는
아주 얕은 봉우리의 산이다.

그야말로 양구에 사는 사람들이
매일같이 산책하기 알맞도록
자연에서 베풀어 준 산인 듯도 하다.

오후 늦은 시간에
혹은 새벽 예불을 끝내고
터벅 터벅
쉬엄 쉬엄 올라도
정상까지 올라갔다가 내려오는데까지
1시간 정도의 시간이면 족하다.

어제는 바람이 얼마나 불던지.
귀를 활짝 열고
산 길을 오르는데
여기가 산인가 바다인가 싶을 정도로
거센 바람소리가 파도치듯 귓전을 맑고 차게 스치운다.

조금 춥기는 해도
산에서 부는 파도소리를
온 몸으로 느끼면서 걷다 보면
나도 모르게 마음이 평화로와 지면서
입가에 미소가 살랑살랑 피어오르곤 한다.

처음 강원도 양구로 간다고 했을 때
많은 벗들이
눈 구경 실컷 하겠다고,
추워서 잘 견딜 수 있겠냐고,
걱정어린 눈길을 주곤 했었는데,
한달 넘게 살아보니
여기가 강원도가 맞는가 싶을 정도로
눈도 적고 그다지 추운 날씨도 손에 꼽을 정도다.

여기 주민들 말씀이
예년에는 이러지 않았다고
작년, 그작년만 해도 이 정도는 아니었다고 하신다.
어르신들 말씀을 들어보면
10년, 20년전하고 비교해 보면
그야말로 세상이 변해도 한참을 변했다고들 하신다.

겨울이 겨울다와야지
겨울이 미지근해지면
우리 몸의 생기도, 대자연 숲의 생기도
함께 미지근해지고 만다.

겨울이 춥고, 눈이 많이 내릴 때일수록
그 다음 해 농사는 더욱 풍성하게 여물어간다.

그래서 그런가
강원도 산에만 가면 늘 눈 속을 걸어야 한다고
산을 좋아하는 내게 아이젠을 선물해 주던
오랜 도반의 조언과는 다르게
이 곳 비봉산도 눈이라고는 찾아보기 힘들다.

산 아래쪽에만
길가에 아주 조금씩 하이얀 눈들이
채색하듯 흩뿌려져 있을 뿐이다.

1

그 대신에
길가 좌우로 이 추운 날씨를 견뎌내며
성성하게 깨인 정신으로
낙옆썩은 흙빛의 땅을 뚫고
초록의 작은 생명들이 근근이 이 겨울을 지켜내고 있다.

겨울에 무슨 초록이냐고 하겠지만
이처럼 겨울 산에도
생명의 숨결은 나즈막하게 호흡을 하고 있다.

2

겨울 산에서
발 아래 피어난 초록의 생명들을 보자니
미리 봄을 맞이한 듯
내 안에도 설레는 봄의 기운이 가득하다.

지금같이
하루 해가 저물어 가는 숲은
더욱 생기어리다.

겨울의 눅눅한 흙색의 숲들이
지는 햇살의 따뜻하고 노오란 빛을 받아
겨울산을 황홀하게 물들인다.

3

비봉산 정상.
해는 뉘엿뉘엿 저물어 가는데
감시초소 저홀로
이 시린 바람을 맞아가며
양구 시내를 내려다 보고 있다.

비봉산 정상
해발 482m

4

대암산, 대우산, 가칠봉 등
1,000고지가 넘는 산들 사이에서
비봉산은 산이 아니라 그냥 언덕이거나,
어릴적 뛰어놀던 어린이들의 뒷산 놀이터다.

어린이들의 놀이터.
내가 어릴적만 해도
뒷산처럼 놀기 좋은 놀이터가 없었다.

이 산 저 산으로 뛰어다니면서
숨바꼭질도 하고, 또 싸움놀이도 하고,
산딸기도 따러 다니고, 산나물도 케러 다니고,
때때로 산토끼를 사냥하겠다고,
혹 어떤 때는 밤에 친구들이 모여서
귀신을 잡으러 가겠다고도 하면서 숲을 헤짚고 다녔다.

또 그렇게 놀다가 지치면
산을 베게 삼아
하늘의 구름을 이불 삼아
때로는 이름모를 산소 위에 올라 가
푹신푹신한 잔듸를 요 삼아 깔고 누워 잠이 든 적도 많았다.

뒷 산 만한 놀이터는
아무리 생각해도 없지 싶다.

그런데 요즘의 아이들의 놀이터는
더이상 산이 아니고, 들이 아니다.
심지어 아파트 옆에 딸려 있는
놀이터에서 조차 어린이들을 보기는 어렵다.

어디에 있냐?
다 좁은 골방 안에 앉아 있고,
그 좁은 모니터 앞에 죄다 모여 있다.
그 모니터 앞에서 친구도 사귀고,
공부도 하고, 만화도 보고,
거기에서 모든 것을 다 한다.

그러면서 어린아이들도 어른들도
몸과 마음의 건강을 잃어가고 있다.

어른들이 먼저 아이들을 데리고
집을 빠져 나가야 한다.
집에서 빠져 나와 뒷 산으로 들어가야 한다.

매일 매일 적어도 몇 시간씩은
집을 벗어나, 학교를 벗어나
산으로 들로 밖으로 나가야 한다.

숲에 깃들 때마다,
바람을 깊숙이 빨아들일 때 마다,
흙과 나무를 맨발로 두 손으로 쓰다듬을 때 마다
우리는 건강과 평안과 깨어있는 정신을 선물받게 된다.

집에만 머물러 있으면,
좁은 골방에만 갇혀 있거나
딱딱한 의자 위에 앉아 모니터만 쳐다보고 자판만 두둘기고 있으면,
우리의 몸도 건강을 잃어버리게 되고,
우리의 정신도 심각한 이상을 앓게 되고야 만다.

핸리 데이빗 소로우는
'집은 일종의 병원'이라고까지 했다.
또 옛 사람들은
사람이 흙과 가까이 할수록 병원과는 멀어지고
흙과 멀어질수록 병원과는 가까와진다고 했다.

집을 빠져나가는 일은
그래서 저 산으로 뛰어드는 일은
한 편으로 얼마나 고된 일이며 귀찮은 일인가.

그러나 왜 집 나가길 주저하는가.
왜 늘 방 안에만 틀어박혀 안주하려 드는가.
건물 안에 갇혀 있는 것이라면
직장에서도, 학교에서만도 족하다.

우리의 아이들에게
아니 나 자신에게
자연을 선물 해 주자.

뒷 산의
소박하지만 생기로운 놀이터의 추억들을
우리의 아이들에게도 일깨워주자.

우리 집, 우리 마을의
뒷 산을 우리 손으로 소중하게 지켜내야 한다.
뒷 산의 놀이 문화를
우리의 어린 아이들에게 물려줄 수 있어야 한다.

비봉산을 오르며,
어릴 적 내가 살던 마을의 뒷산 모습이
아름다운 수채화를 보듯 뚜렷하게 그려진다.

뒷 산에서 산불이 났을 때
집집마다 모든 사람들이 자신들의 일을 뿌리치고
모두들 삽자루, 빗자루, 물통을 짊어지고
너도 나도 산으로, 불길 속으로 뛰어들던 장면은
두고 두고 우리 마을의 아름답고 살풋한 정감어린 기억으로 자리잡고 있다.

마을 사람들이 한꺼번에 모두 모이기가 참 어려웠는데,
더구나 저마다의 일들로 다들 바쁘곤 했는데,
뒷 산에 산불이 나니까
누가 시킨 것도 아닌데 그 모든 마을 사람들이 한꺼번에
다들 우루루 몰려들어서는
한마음 한뜻으로 단합을 이루며
뒷 산을 지켜내던 그 모습이 얼마나 아름답고
눈물어린 감동으로 남아 있는지 모른다.

나는 그 날
아버지를 다시 봤다.

아버지는 늘 차갑고 무섭고
다른 일에는 관심도 없이
오로지 일에만 집중해 계시는 모습이 내가 본 아버지의 모습이었는데,
그 날 아버지는
마을 사람들을 이끌고 산에 올라가
그 매서운 불길을 두려워하지 않고
산을, 숲을, 우리의 놀이터이자 마을의 삶터인 뒷 산을 그렇게 지켜내셨다.

지친 듯 산을 내려오시는 아버님 모습이
얼마나 자랑스럽고 뿌듯하고 감동스럽던지.
그리고 우리 마을의 어르신들이 얼마나 감격스럽던지.

그렇게 우리 마을의 어르신들은
뒷 산을 생명처럼 소중하게 지켜내셨다.
그리고 그렇게 지켜낸 뒷 산 언덕 위에서
우리는 또 다시 마음껏 뛰어놀 수 있었다.

그렇게 뒷 산에서
자유롭게 뛰어놀며 자란 어린 아이가
훌쩍 자라 어른이 되면서
잠시 동안은 자연을 뒤로하고
사회에서 학교에서 시키는대로 공부도 하고
입시전쟁도 치르고, 취직하느라 고생도 하겠지만,
그렇게 초록의 추억을 가슴에 품고 자란 어른들은
다시금 늙어가면서 산을 찾고
깃들어 살 숲을 그리워하게 된다.

그런 어른들이
환경파괴를 걱정하며 숲도 지키게 되고,
원흥이 방죽을 걱정하며 지켜내게도 되고,
멀쩡한 산을 뚫어 터널을 만드는 일에 왜 반대를 해야 하는지도 알게 되며,
발전과 개발의 논리 보다는 보존과 놓아 둠의 논리를,
또 부자보다는 지혜로운 가난의 정신을 지키게도 되고,
나아가 산과 숲의 정신을
우리 인간의 마음에 일치시키는 선의 길, 명상의 길에도
밝은 원력을 투영하게 되는 것이 아닐까.

비봉산 정상.
매서운 칼바람을 맞으면서
이 아름다운 강원도의 자연을 내려다 보면서
언젠가 이 곳까지도
개발과 발전의 논리가 지배되어
모든 사람들의 눈에 선량한 눈빛이 사라지고
독이 오른 부와 개발과 성공을 향한
매서운 칼바람이 불어오면 어쩌나 하는 걱정,
괜한 거겠지?

아직 소나무는 푸르다.
햇살도 아직 건너편 산봉우리를 넘지 못했다.
생기어린 창창한 소나무 숲.
그 사이로 새어나오는 저녁 햇살의 따스함.

5

앙상한 소나무 숲 사이로 난
길.
숲 길.

6

발걸음이 산 아래로 내려가면서
서산으로 떨어지는 태양이
나뭇가지에 걸렸다.

7

그리고는 곧장 곤두박질.
태양의 여운은 뜨겁다.

태양이 사라진 자리에서
앙상한 겨울 가지 끝에
단풍잎 하나.

8 

고개를 돌려 내려온 산을 바라보니
비봉산 하늘 위에서
태양과 맞교대를 하고 막 뛰쳐나온
달.

 9

노을의 여흥이
달 아래
구름을 녹녹히 덥혀주고 있다.

10

태양빛이 달님을 맞이하는 순간.

오늘 밤
달빛, 별빛은
더없이 초롱초롱 빛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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둘째날, 나리분지에서 태하까지(나리분지 출발, 12:20)


나리분지에서 민박집 어르신이 일어주신 산마을 식당에 들러
울릉도에서 난 산채들로만 만들었다는 산채비빔밥을 시켰다.
육지에서는 볼 수 없는 산채들이 풍성하게 한 그릇 가득이다.

주인 아주머님 인심은 또 얼마나 좋은지,
밥이며 산채며 반찬들이 전통 한정식 저리가라 하고 많이 나오는데다
민박집 어르신 얘기를 했더니
이 곳의 자생인 천궁, 호박, 더덕 등으로 직접 만들었다는
씨앗주라는 곡차도 한 사발 내어 주셨다.

늦은 점심을 먹고는 터벅터벅 바닷가 쪽으로 발길을 돌린다.
고갯길을 오르니 나리분지가 한 눈에 들어온다.

1

1시간 남짓 고개를 넘어 내리막길을 걷다보니
시원스런 바다와 거친 파도가 가슴을 뻥 뚫어준다.
그리고 바닷길 쪽으로 눈길을 돌리니
산에서 바다 쪽을 향해 약간 기울어 진 듯 보이는
육중한 바위산 하나가 시선을 잡아끈다.
성인봉의 한줄기 산봉우리가
송곳처럼 뽀족하게 생겼다고 해서 송곳산이라고 한다.

2

그래서 이 송곳산 때문에 이 인근 마을도 송곳산의 한자명인
‘송곤 추(錐), 메 산(山)’자를 써서 추산이라고 불린다고 한다.
높이가 430m라고 하니 육중한 바위산이라고 말했던 규모가 짐작이 가려나.

그리고 송곳산에서 바다 쪽으로 눈을 돌리면
일명 코끼리 바위라고 불리는 공암이 바다 위에 떠 있다.
바위 모양이 코끼리가 물 속에 코를 담그고 물을 마시는 형상이라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바다로 난 길을 따라 잠시 걸으니
저 멀리로 죽암이 보인다.

3

죽암과 삼선암을 들렀다가 서면 쪽으로 가려고 했는데
아무래도 북면 쪽에서 너무 시간을 오래 끌다 보면
내일 떠나야 하는 일정에 차질이 생기지 않겠나 싶어 아쉬운 발길을 돌렸다.
여행을 다니며 구경을 하는 것도 아쉬운 듯 한 것이 좋고,
모조리 다 감상을 하겠다는 것 보다는 욕심을 좀 덜 내는 것이 좋다는 것을
몇 몇 만행길에서 터득한 바다.

바닷길을 따라 걷고 또 걷는다.
인적은 드물다.
그래도 작은 어촌 마을인데 사람이 살고 있기는 한 건가 싶을 정도로
여간해서 사람 모습이 보이지 않는다.

4

바람은 점점 거세진다.
때때로 파도의 잔영들이 뺨을 스치운다.
한참을 걷다보니 바닷길 위에까지 파도가 흩뿌려져 겉옷이 축축하다.

걷다가 걷다가 길가 간이 의자에 앉았다가 이내 드러누웠다.
가만히 드러누워 하늘을 바라보고 있다.
하늘을 보며 온 몸으로 간간이 뛰어드는 파도를 맞아가며
점점 거세게 불어오는 바람의 찬기를 느끼면서
아무도 없는 외딴 섬 길 위에 버려진 듯 철저한 고독의 소리를 듣는다.

산 위에서 그랬듯이 길 위에도 인적은 없다.
이따금씩 지나치는 차량만이
이 땅이 그래도 사람 사는 곳이라는 것을 증명해 줄 뿐이다.

나중에 알아봤더니 요즘, 늦가을부터 겨울까지는
거의 관광객들도 없고, 일들도 많이 줄어드는 시기라고 한다.
요즘 같으면 배가 들어왔어도 나가지 못하는 날이 더 많은 연유라고 했다.
그 말을 듣고 보니
차라리 한 몇 일 이 곳에 갇히는 것도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거센 바닷가 한 켠에 앉아
하염없이 바다 쪽으로 시선을 고정시키고 마음도 고정시켜 본다.
외로운 느낌을 가만히 살펴본다.
이럴 때, 외로운 느낌이 존재를 뒤덮으려 할 때,
바로 그 때가 수행자에게는 가장 좋은 구도의 때다.

가만히 그 느낌을 주시하고 있다보면
이내 느낌도 생각도 어느덧 사라지는 것을 본다.
다만 파도가 칠 뿐.

5

바다도 산처럼 사람의 생각을 잠재우고
감성을 일깨우는 그 어떤 힘을 가졌다.
이런 외딴 섬에서의 외로운 거센 파도는 내 삶에서도 드문 경우다.
더구나 이런 철저히 외딴 곳에서의 거친 풍경은 더욱 드문 일이다.
이런 생경한 경험들이 지진하던 내 속 뜰에 생기를 불어넣어 준다.

바다와 하늘, 구름의 경계선이 사라진다.
온몸은 거센 바닷바람을 따라 춤을 춘다.
또 다시 길을 따라 걷고 또 걷는다.
걷다가 지치면 멈추고 눕다가 또 다시 길을 나선다.

이렇게 조용하게 그 어떤 훼방 없이 걸을 수 있는 곳은 아마도 처음이지 싶다.
길 위의 고요를 이제껏 본 적이 없다.
언제나 길은 시끄럽다.
차량이 줄을 잇고, 엔진의 소음이 그칠 줄 모른다.
차의 길은 차의 소음으로 시끄럽고
사람의 길은 사람들의 재잘거림으로 시끄럽다.
물론 벗과 함께 걷는 길에는 사람들의 소리들까지도 정겹지만
홀로 속 뜨락을 거닐을 때는 때때로 조용한 길이 그리워지기도 하는 법이다.

이 곳 울릉도의 길이 바로 그런 길이다.
이 길은 차 만을 위한 길이 아니다.
길 위에서 사람도 자유롭게 걸을 수 있고
바다도 파도도 그리고 깊은 침묵 또한 길 위를 걷는다.

차량의 행렬이 멈춘 도로는 낯설다.
그 낯섬이 길을 걷는 여행자에게는 반가운 도반이다.

저 섬 반대편까지 가야 일몰을 볼 수 있으리란
민박집 어르신의 말씀이 문뜩 떠올라
지나치는 차를 향해 손을 들었다.

이곳의 차량은 언제나 사람을 태울 준비가 되어 있는 듯 하다.
차량 향해 손만 들으면 어떤 차도 어떤 사람을
당연히 태우고 갈 준비가 되어있지 싶다.
차도 섬을 닮아 가슴이 따뜻한가.

거의 반나절을 걷고 걸어 되돌아 보면 한 뼘이더니
이 섬의 차는 순식간에 내 수고를 덜어
훌쩍 섬 반대편 태하의 성하신당에서 나를 떨구어 주었다.

역시 차를 타고 오다보니 놓치는 것이 많다.
눈을 초롱 초롱 뜨고 산과 바다를 또 보이지 않는 또 다른 것들을 향해
깊은 시선을 던지긴 했어도 보지 못하는 것들이 너무 많다.
하나를 얻으면 역시 하나를 잃게 마련이다.

문명의 이기는 이렇듯 볼 수 있는 것을 보지 못하게 만드는 기능도 한다.
빠르면 빠를수록 놓치는 것이 많아진다.
차창 밖에 보여지는 사물들만 놓치는 것이 아니라
그 하나 하나의 풍경들이 담고 있는 내 안의 의미도 놓치고
그들이 내게 던져주는 화두 같은 것도 놓치게 된다.

삶의 속도도 매한가지다.
인생의 속도가 빨라지면 빨라질수록
더 빨리 얻는 것은 죽음을 맞이하는 시간이다.
삶의 참된 의미는
봄 꽃이 피어나는 듯 느린 가운데에서 꽃피어난다.

태하 마을로 들어가는 입구도 완전히 태풍에 강타를 당했다.
물론 이 곳 또한 물길 작업이 한창이고,
바닷가 쪽은 방파제 작업으로 분주하다.
거대한 굉음과 장비들의 소음이
이 아름다운 풍경의 정서를 반감시키고 있다.

태양은 이제 저 바다 너머로 뛰어내릴 준비를 하고 있다.
어둑 어둑한 뭉개구름들 사이로 투명한 빛이 바다를 향해 쏟아진다.

6

빛의 향연. 아직 빛은 투명하다.
이제 조금 더 시간이 지나면 빛은 더욱 따뜻한 노을빛으로 바뀔 것이다.

7

저 건너편 풍경이 이채롭다.
늘상 바라는 바지만 저 언덕 위에 작은 오두막을 짓고
조그만 텃밭을 일구며 매일같이 바닷가로 지는 태양을 바라보며
사는 것을 그려보게 된다.

8

시끄러운 소음과 정신없는 공사 때문에
이 곳에서 일몰을 맞으려던 생각을 바꾸었다.
태하 마을을 걸어 나오는데
울릉도 곳곳에서 자주 목격하던 오징어 말리는 풍경이 이젠 익숙하다.

9

아직 일몰까지는 시간 여유가 있다.
또 한 번 차를 얻어 탔다.


둘째날, 통구미 거북바위 일출을 바라보며(통구미 도착, 16:00)

사자바위 쪽에서 일몰을 볼까 하다가
아무래도 도동 가까운 곳이 좋겠다 싶어 단숨에 통구미까지 내달렸다.
거북이가 마을을 향해 기어가는 듯한 모양을 보고
거북이가 들어가는 통과 같다고 하여 통구미라는 지명이 생겼다고 한다.
이 곳은 향나무 자생지로도 유명한데 천연기념물 48호로 지정된 곳이라 한다.
포구 앞의 바위는 거북이를 닮았다고 하여 거북바위라 부른다.

통구미와 거북바위의 일몰도 유명하다고 했는데
차에서 내리니 ‘잘못 온 게 아닌가’ 싶은 착각을 일으킬 정도로
아무것도 없다.
그야말로 바위 하나 달랑 있고
도로 곁에 그 흔한 슈퍼나 식당 조차 없다.

10

일반적인 생각으로는 관광지의 유명 명소는
호텔과 휴양시설이며 온갖 식당가와 관광물품판매점에, 심지어 유흥업소까지
얼마나 정신 없는 시설들로 꽉 들어 차 있는가.
그런데 지금까지 울릉도를 걸으며 느낀 공통점이 바로
울릉도의 명소는 인위적인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이런 곳에 통구미라는 지명까지 만들어졌다는 것이 신기할 정도다.
일몰을 구경 온 관광객도 없고,
관광객들을 위한 그 흔한 일몰 전망대 같은 것도 없다.
그냥 길가에 앉으면 그곳이 전망대도 되고 휴게실도 된다.

이렇게 개발되고 발전되지 않아 호젓한
이런 곳이 참으로 소중한 줄 알아야 한다.
아무것도 없는 가운데 그 텅 빈 가운데 꽉 찬 무언가가 있다.
너저분한 것들이 없어야 정말 보아야 할 그 하나에 집중할 수 있는 법이다.

길을 벗어나 바다 쪽으로 바위가 하나 있어 그 위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태양도 이제 많이 내려왔다.
이제 조금 있으면 저 수평선 바다가
저 위의 붉은 생명을 단숨에 품어 안을 것이다.

11

여러모로 이번 여행은 의미가 남다르다.
가는 곳곳마다 사람들로 넘쳐나고,
문명의 이기로 넘쳐나는 그런 여행지 풍경 속에서는
나 자신에 집중하기도, 여행지 풍경에 집중하기도 어렵지 않은가.

그러나 이 곳에선 호젓한 가운데, 아무런 걸림 없이, 아무런 방해 없이
두 눈의 시선은 오직 저 붉은 태양에 고정되고 있다.

12

태양 빛을 받아 반짝이는 바다의 살결도 찬연하지만
그 위에서 휴식을 취하듯 소박한 바위 위에 앉아 있는 갈매기들의 모습에서도
더없는 평화로움과 삶의 여유를 읽을 수 있다.

13

노을이 내려앉은 바다 물결이 곱다.
용광로 같은 태양 아래
바위 위에 옹기종기 모여 앉아 있는 갈매기가
빛을 받아 더욱 반짝인다.

14

잠잠히 앉아서 일몰을 기다리던 갈매기들이
시간이 지나면서 하루를 마감하는 일몰의 축제에 빠져든 듯
노을진 하늘을 배경으로 떼지어 날아올라 황홀경에 빠져들고 있다.

15

거북바위가 지는 태양의 곁에서 묵묵히 일몰을 지켜주고 있다보니
함께 곁에서 지켜보는 여행자의 가슴도 따뜻해진다.

16

시간과 함께
태양은 뜨거운 옷을 갈아입는 중이다.

17

한 30분 남짓의 시간동안 서서히 아주 조금씩
태양과 바다의 간격이 좁혀지더니
이네 푸른 선과 붉은 원이 감격의 재회를 맞으며 하나 된다.

18 

둘이 만남을 이루고 나면
태양은 빠른 속도로 바다 속을 파고들며 자신을 소멸시킨다.

19

이내 태양은 보이지 않고 수평선만 외로이 덩그러니 남아있다.
태양이 사라져도 여운은 남는다.
아직도 하늘과 바다 그리고 땅은 태양의 여운으로 은은하다.

20 

또 다시 바다 곁을 따라 난 길을 걸으며 녹록한 태양의 여흥을 느껴본다.
짙어지는 어둠 속에서 호올로 길 위를 걷는 느낌은 적막 혹은 적멸이다.
첫 느낌은 적막하기 그지없는 휑하고 허한 느낌이지만
그 느낌을 깊이 바라보고 있노라면
그 휑한 적막감은 이내 깊은 고요와 평화를 간직한 적멸의 자리처럼 느껴진다.
이렇게 걷다보면 길 위에서 적멸의 벗을 만나게 될 것도 같다.

한참을 걷다 또 한 차례 차를 얻어 타고 도동으로 내달렸다.
저녁 공양을 하고 잠시 도동의 밤거리를 거닐었다.
피곤이 몰려온다.


셋째날 새벽, 행남등대와 해안산책로 일출(도동항 출발, 05:50)

애초 아침 일찍 독도를 다녀오려고 했는데
마침 오늘이 독도편 배가 출항하지 않는 날이라
독도를 다녀오는 계획은 언제인지 알 수 없는 다음으로 미뤄야 했다.

대신에 행남등대와 해안산책로를 돌아보기로 했다.
새벽 일찍 일어나 도동항에서 해안산책로가 아닌
산길을 따라 행남등대까지 가는 길을 택했다.

아직 도동은 한밤중이다.
도동항 마을에서 가파른 계단을 따라 얕은 산 위로 올라가니
도동의 밤 풍경이 한 눈에 들어왔다.
손전등을 미처 준비하지 못한 탓에
어두운 산길을 두 눈 부릅뜨고 직감에 의지해 걸어야 한다.

어둠 속에서 낯선 산길을 걷는 건 또 다른 생경함이다.
어둠은 짙고 세상은 조용하다.
터벅 터벅 길이 난 곳만을 향해 계속해서 걷는다.
이른 새벽 숲 길의 청명함이 온 몸으로 느껴진다.
방에서 나올 때만해도 바람이 차다고 느꼈는데
한참 걷다보니 안에서부터 땀이 주르륵 흘러 내린다.

금방 도착하지 않겠나 싶었는데
밤길이라 그랬는지 1시간을 조금 넘게 걸은 것 같다.
오르락 내리락 하며
또 둘로 난 길에서는 그냥 대충 직감을 따라 길을 선택했다.
우측으로 가면 바다에 다다를 것이고
너무 좌측으로 가면 저동에 다다를 것 같고
중간 즈음의 길을 따라 계속 걷다보니 길 끝에 집이 한 채 보이고
갈라진 길 앞의 간이 이정표에 ‘행남등대’ ‘저동’이란 푯말이 보였다.

행남등대에 잠시 올랐다가 일출을 보기에는 바다쪽이 낫겠다 싶어
다시 해안산책로 쪽으로 내려왔다.
빠른 걸음으로 해안산책로에 다다르니 이제 막 일출이 시작되고 있다.

   21

어제 새벽 저동의 일출과는 또 다른 느낌의 태양이 떠오른다.
뭐랄까 조금 더 부드럽고 따뜻하며 차분한 느낌.
어제의 일출이 강렬했다면 오늘의 일출은 포근하고 따스하다.
때때로 고기잡이 어선이 하나 둘씩 지나간다.

22

갈대 사이로 솟아오른 태양이 지극히 순박하다.

23

갈대도 태양을 향해
합장을 하듯 이 아침의 일광보살을 맞이한다.
산책로 사이로 피어난 왕해국이 대견하게 느껴진다.

24

바위틈 사이 그 척박한 곳에 왕해국 작은 꽃무지도
그 곳이 제 집이라고 뿌리를 박고 피어올랐다.

바위틈에서 자란 건 왕해국만이 아니다.

 25

그 곁에서 산부추도 계절감을 잊고 바위틈에서
바닷바람을 피해가며 호젓하게 서 있다.

26

바위 위에 앉아 떠오르는 태양을 가만히 바라보고 있는
갈매기 한 마리가 내 외로움을 달래준다.

 27

그 하늘 위로 뭉개구름 몇 송이 평화롭게 떠 다닌다.

28

한참동안 발을 떼지 못 하고 바다쪽을 향해 서 있다.

29

아! 이 뜨거운 하늘, 바다, 태양 그리고 섬...
이 한 편의 장면이 그대로 동화 속 풍경처럼 선명하게 그려진다.
예상했던 것 보다 해안산책로의 절경은 더없이 특별하다.
어제까지의 풍경들이 평범한 가운데 평화와 순박의 경이가 담겨있었다면
오늘 아침 해안산책로의 그것은 경희(驚喜) 그 자체다.

30

이런 풍경은 도무지 사람이 사는 곳이라고는 생각되지 않을 정도다.
이런 풍경을 대할 때마다
대자연의 무위의 예술성에 고개를 숙이지 않을 수 없게 된다.
어찌 이런 절경을 만들어 낼 수 있단 말인가.

31

더욱이 기암괴석의 하늘신이 빗어놓은 듯한 천상의 산책로 위로
새벽 태양빛이 하늘에서 금싸라기를 흩어 뿌리는 듯 난연히 비춰주는
이 해안의 풍경은 도무지 언어로 담아내기에는 역부족이다.

33

그 어떤 언어로 이 대자연의 하늘 연주를 담아낼 수 있단 말인가.

32

깍아 지른 듯한 기암괴석 아래로
금새라도 떨어질 듯한 아슬아슬한 스릴을 느끼면서 걷는다.

 34

아! 지금 이 순간
내 영혼도 저 갈매기처럼
청량한 하늘 위를 날고 싶다.

35

내 안에서는 또 다시 침묵의 선율이 흐른다.
모든 티끌들이 말끔히 사라지고
청연청아한 텅 빈 공간이 내 안의 뜰에 맑은 비질을 한다.
이 선연한 하늘의 연주와 선율을 알아들었기라도 했다는 듯
하늘 위로 갈매기 떼의 발랄한 날개짓이 춤을 춘다.

천천히 경행하듯 옮긴 발걸음이
시간 가는 줄도 모르고 어느덧 도동항에 다다랐다.
도동항 마을도 아침 햇살을 받아 투명하게 반짝인다.

 36

해도 이제 제법 하늘 위로 솟아올랐다.
날씨가 좋아 배는 당연히 뜬다고 했다.
육지로, 일상으로 다시 되돌아 가는 배에 몸을 싣고 잠시 눈을 붙였다.
꿈결 속에서 울릉도를 다시 그려본다.

37

설레임 가득한 일탈의 만행을 만들어 준 울릉도,
언제 다시 오게 될 지 모르겠지만 그 때까지 안녕.
Posted by 법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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둘째날, 안평전에서 성인봉까지(안평전 출발, 07:50)


울릉도의 택시는 전부가 4륜구동의 승합차량들이다.
그도 그럴 것이 곳곳이 가파른 오르막이고
때때로 위험해 보이기까지 하는 곳들도 많이 보인다.

택시를 타고 산 아래 안평전까지 가면서도
울릉도의 풍경, 바다위로 피어오르는 태양 빛,
그 빛에 반사되어 황홀경을 선사하는 산세며
어느 것 하나 내 눈을 사로잡지 않은 것이 없다.

1

울릉도는 섬이라 산세는 고만고만할 것이라 예상했는데
내 생각은 그야말로 완전히 빗나갔다.
주봉 성인봉을 중심으로 동서남북으로 펼쳐져 있는 봉우리들이
그야말로 울릉도의 아름다움을 한껏 드높이고 있다.

2

한참을 차창 밖으로 펼쳐지는 울릉도의 아름다움에 취해 있는데
한동안 산 쪽 오솔길로 들어선다 했더니 벌써 안평전에 다다랐다.
성인봉 쉼터라고 쓰여 있는 바로 이 곳이
안평전에서 오르는 등산의 초입이다.

3

성인봉 오르는 길,
초입에 몇몇 채 소박한 집들이 늘어 서 있을 뿐
안평전의 풍경은 조용하고 차분하다.

4

마지막 소담한 농가에서 멀리 바다를 굽어보며
물을 한 잔 얻어 마시고는 이제 본격적인 입산에 들어간다.

5

저 멀리 바닷가 위로 떠오른 햇살이 아직 따스한 온기와 빛으로
성인봉 얕은 산봉우리들을 비춰주고 있다.

이런 풍경 하나 하나가 내 안에 자연 성품을 일깨우며
감미로운 뉴에이지 피아노 선율이 잔잔히 대지 위로 연주되는 듯
내 온 몸이 마음이 이 법계의 연주에 동참하고 있다.

연주를 하지 않아도 연주되는 음악이 있다.
때때로 이런 대자연의 경이로움을 온몸으로 호올로 느낄 때
하늘에서 대지에서 산과 바다에서
온 존재를 하나되게 만드는 음악이 연주되곤 한다.

산길을 걷는 내내 연주는 끊이지 않는다.
발걸음에 바스락 거리는 낙엽 소리도,
앙상한 가지 끝에서 돌아감을 순수히 기다리며 미처 떨어지지 않은 낙엽이
시린 바람과 함께 만들어 내는 소리도,
온갖 새들의 지저귐이며 간간이 들려오는 꿩 소리도,
저 멀리서 들릴 듯 말 듯 간지럽혀 오는 파도 소리도,
또 산길을 오르며 거칠어지는 호흡 소리며,
내 안에서 들려오는 심장박동 소리까지
그 어떤 소리 하나 법계의 노랫소리 아닌 것이 없게 느껴진다.

인위가 개입되지 않은 순수한 무위의 소리들이
그대로 진리인 양, 사자후인 양
흡사 가릉빈가의 연주처럼 성성하고도 적적한 감미로움을 자아낸다.

날씨는 더없이 화창하다.
산 아래는 아직 가을의 잔영이 남아있다.

6

육지에서는 벌써 단풍 구경 끝난 지가 오랜데
신기하게도 산 아래는 생의 마감에 미련이 남기라도 한 듯
푸석푸석한 막바지 단풍들이
아쉬운대로 두 계절의 즐거움을 선사해 주고 있다.

7

오르는 길에 나무로 만든 투박하지만
자연과 조화를 잘 이룬 계단들이 인상적이다.

8

여느 국립공원 산 같으면
인위적인 가공 계단들을 반듯 반듯하게 세워 놓거나,
또 어떤 곳은 철로 만든 계단을 만들어 놓아
산길을 걸으며 느낄 수 있는 흙과 낙엽 소리 대신에
철철거리는 철계단의 소리를 들어야 하는 곳도 있었을 터인데
이 곳의 계단들은 하나같이 그 산의 나무들로 이루어진
그것도 반듯하게 잘라서 인위적으로 만들었다기 보다는
부러지고 쓰러진 나무들을 엉성하게 모아 만들어 놓은 계단들이다.

9

이렇듯 계단 하나도 자연과의 조화를 생각하면
운치가 있고 정감이 가도록 만들 수 있는 법.

산을 오르며 곳곳에 오랜 세월을 버텨오다 버텨오다
인연이 다해 자연으로 되돌아가는
꺾이고 쓰러진 고목들이 곳곳에 눈에 띈다.

10

그런 쓰러진 나뭇가지들을 적당히 크기 맞게 잘라
이렇게 계단도 만들고 잠시 쉴 수 있는 의자도 만들어 놓은 것을 보니
왠지 모르게 더없는 정겨움과 고향 같은 풋풋함을 느끼게 된다.

11

그런 고즈넉한 산길을 따라 계속 걷다 보니
산 중턱 곳곳까지도 고사리류와

12

섬바디, 

13

섬노루귀 등이

14

초록의 빛깔을 잃지 않은 채
이 추위를 근근히 버텨내고 있는 것이 보인다.

이 늦가을 겨울 초입의 날씨에 단풍에 초록의 식물들까지
참 대견하다 싶더니만 역시나 중턱을 넘어서면서부터
나무들은 가지 끝에 남은 단풍 한 떨기조차 다 떨구어 냈고
초록의 식물들도 사라진 채
한겨울을 초록으로 끝까지 나는 조릿대만 나무 아래 녹빛 흔적을 남겼다.

15

산 아래에서부터 중턱, 정상까지 오르며
조금씩 계절은 가을에서 겨울로 빠르게 옮겨가고 있다.
중턱을 넘어서니 하늘빛도 더욱 푸르고
잎을 다 떨구어 낸 나무들도 훨씬 홀가분하고 호젓하게 서 있다.

16

그렇다보니 건너편 산도,

17

나뭇 가지 사이로 푸른 하늘도 그대로 시원하게 드러난다.

18

아무도 없는 산 길,
침묵만이 내 벗이 되어주는 이 길이
오늘따라 내 마음을 왜 이리도 설레게 만드는지.

대자연의 길벗들이,
이 숲의 나무와 바람, 흙과 풀들, 하늘과 청량한 내음들이
모두 내가 걷는 길을 축복해 주고 밝혀주는 것만 같다.
아주 오래 전부터 오늘 이 자리에서 만나게 될 나와의 인연을
그토록 기다리며 마중하기라도 했다는 듯
전혀 낯설지 않은 포근한 숲의 도반들이 반가운 인사를 건네 오고 있다.

이런 때, 이런 날, 이런 곳!
난 이런 문득 스치는 낯선 자연의 인연을 미치도록 좋아한다.
내 삶에 가장 소중한 인연이자 도반이자 스승이 되어주는
이 대자연 법계의 소식들이 짠하게 내 품을 감싸주고 있다.

오랜 도반들, 내 삶의 길벗들! 안녕!
산과도 나무와도 바람과도 인사를 건낸다.
모든 숲의 생명들이 속 뜰의 예민한 감성과 따스한 교감을 나누고 있다.
공평하고 평등한 존재와 존재가
민감하게 서로를 살려주며 공명하고 있음을 느낀다.

느릿 느릿 한 시간 여를 올랐을까.
7시 50분 즈음에 안평전에서 출발했는데
시계를 보니 8시 40분이 막 지나고 있는 걸로 봐서
생각보다 걸음이 빨랐던 것 같다.

울창한 마가목 나무 원시림이
또 한번 내 마음을 설레게 한다.

19

계곡과 능선 사잇길을 따라 느릿한 걸음으로 한 시간여를 올랐을까
능선 위로 오르면서 원시림이 펼쳐지고 조금을 더 걸어올라가니
발 아래 울릉도 도동항과

20

끝없이 펼쳐진 망망대해가 그림처럼 펼쳐진다.

21

잠시 숨을 돌리고 또 다시 울창한 숲 터널을 걷는다.
계곡 쪽에서 능선을 타고 오르니 비로소 따스한 햇살이 길 위로 내려앉는다.
바다 위에 떠 있는 태양은 이 산위로, 바다 위로, 도동항 마을 위로, 숲 길 위로
자신의 따스한 햇살을 한없이 나누어주고 있다.

22

새벽 일출 때부터 지금 즈음까지의 햇살이
하루 중 가장 가볍고 상냥하며 따스한 느낌으로 세상을 비춘다.
그리고 낮 시간에는 정직하고 곧게 내려쬐며 대지를 덥히다가
또 다시 늦은 오후부터 일몰 직전까지는
아침보다 좀 더 짙고 차분하며 따뜻한 느낌으로 대지를 품에 안는다.

햇살도 가만히 관찰해보면 이렇듯
새벽과 아침 오후와 저녁 때가 예민한 차이를 보인다.
그러더라도 그 차이점이 더 좋다거나 나쁘다거나 하는 걸 의미하지는 않는다.
저마다의 햇살이 제각기 독자적이고 완전한 자기의 삶을 대지 위로 꽃피워낸다.

햇살만 그런 게 아니라 이 대지 위의 모든 존재며 생명들이
모두가 저마다의 시공간 속에서 제각기 독창적이고 완전한
자신만의 길을 걷고 있다.
그래서 모든 존재는 자신의 길을 온전히 걸음으로써
그 안 깊은 곳에 담겨진 진리를 고스란히 세상에 표현해 낸다.

그래서 모든 존재는 그 모습 그대로의 모습으로써 아름다울 수 있는 것이다.
자기 자신의 모습으로써 온전한 완성과 지복의 행복을 부여받는다.
그래서 울릉도도 울릉도만의 독자적인 모습으로써 존재함으로써
이렇듯 법계의 아름다움에 동참할 수 있는 것이다.

어쩌면 다른 많은 곳이 그러고 있듯이
이 울릉도도 머지 않아 개발과 발전의 논리가
섬 전체를 집어 삼킬 지 모르겠지만
그랬을 때는 더 이상 울릉도가 울릉도의 아름다움을 잃고 말 것이다.

쭉쭉 뻗은 빌딩숲이나 대형 콘도며 호텔들,
인공의 잔디가 광범위하게 깔린 골프장이며,
산을 뚫고 길을 내거나
저 성인봉 정상에까지 케이블카를 설치하는 등
이 무위의 섬 울릉도에 문명의 이기와 인위적인 것들을 들여놓기 시작하면
그 때부터 울릉도는 더 이상 울릉도만의 성품을 잃고 말 것이다.

그것들이야 어디든 다 있는 것 아닌가.
그것을 애써 울릉도까지 들어와서 또 봐야 할 것이 무언가.
하기야 이 울릉도도 조금씩 변해가고 있고,
전 세계가 이미 개발과 발전의 논리로 인해
저마다의 온전한 독자성과 독창적인 본성을 잃고 말았다.

전 세계 어느 곳을 가더라도 세계적인 휴양지라는 곳은
죄다 똑같은 유럽식 호텔에, 똑같은 조경에, 똑같은 아스팔트 길이며
무엇 하나 그 나라만의 그 고장만의 독창적인 멋스러움을
고스란히 간직한 곳을 찾아보기 어렵게 돼 버렸다.
그런 인위적인 것들은 생명의 기운을 떨어뜨리며
그 고장만의, 그 나라만의 독자적인 진리 성품을 사장시키고 말 뿐이다.

대자연은 항상 진리의 소식에 귀를 기울이며
무위로써 자연스럽게 살려지고 있다.
법신 부처님의 숨결대로, 아버지 하느님, 어머니 대지의 선택 대로
모든 것을 내맡기며 자연스레 자신만의 성품을 드러내고 있다.

그렇게 인위적인 개입을 최소화 시키고
대자연의 진리에 모든 것을 내맡기면서 살려지도록 놓아두는 것만이
시름 시름 앓고 있고, 아름다운 생명 본연의 모습을 잃어버린 이 지구를
살릴 수 있는 유일한 처방전이 될 수 있다.

숲 터널을 따라 계속해서 오르니 어느새 인가
가을의 분위기는 온데 간데 없고 완연한 겨울로 옮겨왔다.

23

발 아래는 지난 주엔가 왔다는 눈이 완전히 녹지 않은 채 길 섶에 있고
때때로 마가목 빠알간 열매들만이 흑백의 명암에 생기를 불어넣어 주고 있다.

24

성인봉 가까이에 조금 더 다가가니
발 아래로 어제 가 보려다 못 갔던 봉래폭포 쪽 계곡과
저동항의 풍경이 창창하게 펼쳐진다.

25

햇살이 많이 비치는 곳에는 눈이 거쳤는데
초록의 연한 이끼들이 햇살을 받아 곁의 눈을 녹여가며
겨울을 날 생명수로 흡수하고 있다.

26

조금 더 걸으니 안평전과 도동 대원사 쪽에서 올라오는 사람들이
성인봉 오르기 전 만나는 곳, 삼거리 쉼터다.

27

그리고 얼마 안 가
드디어 성인봉 정상.

28

바람은 차다.
성인봉 정상에 올라서니
그야말로 울릉도 섬 전체가 한 눈에 들어온다.

29

동서남북 사방으로 눈만 돌리면
산과 바다가 조화롭게 펼쳐진다.

30 

31

올라오는 쪽 하늘은 구름이 별로 없어 화창했는데
성인봉에 올라 반대쪽을 보니 하나 둘씩 구름이 모여들고 있다.

32

성인봉 전망대에서 내려다 보이는 나리분지와
그 너머의 바다, 그리고 그 위로 펼쳐진 구름들이 한 폭의 그림같다.

33

구름이 오며 가며
나리 분지의 신비를 열었다 닫기를 반복하고 있다.

34 

35 

36

한참을 성인봉 위에 앉아 울릉도 중심에 서서
이 울릉의 법계를 다만 바라보고 있다.

아침에 민박집 어르신께서 성인봉의 산기운이 전국에서 제일이라며
꼭 정상에 오르면 정성스런 마음으로 기도를 드리라고 했던
당부가 생각났다.
언뜻 말씀하시는 것을 들으니 당신께서도
불경 공부를 꾀나 많이 하셨고 요즘도 집안에서 부처님을 모시고
기도 수행을 퍽이나 열심히 하시는 모양이었다.

어르신의 말씀도 말씀이려니와
이 생경한 신비감에 저절로 기도심이 북받쳐 올랐다.
“이 법계 두루 두루에 대자연 법신의 사랑이 가득하기를,
이 경이로운 삶의 신비에 눈뜨지 못하고 여전히 아만과 욕심,
이기에 물든 모든 이들에게 지혜의 빛 찬연히 비추기를,
기아와 가난, 전쟁에 깊은 상처를 받고 죽어간 수많은 형제들께
본래 청정, 본래 원만 구족의 대 적멸이 깃들길,
이 세상 모든 이들의 가슴 속에 깨어있음의 연꽃 한 송이 피어오르길,
깨달음을 향한 적멸의 발원 이 생을 넘기지 않길,
성인봉 산신님께, 울릉도 이 대자연 법신불께,
아버지 하느님, 어머니 대지에 간절한 마음 모아 기도드렸다.”


둘째날, 성인봉에서 나리분지까지(성인봉출발, 10:00)

아이젠을 하지 않아 그런지
나리분지로 향하는 내리막길은 퍽이나 미끄럽다.

37

초록과 흰 눈, 그리고 나무와 하늘색의 조화가
마치 하늘 예술가가 내려와 물감을 뿌려 놓은 듯
내 안의 특별한 정서를 일깨우고 있다.

38

내려오는 길에 약수터 성인수에서
성인봉의 정기어린 시원한 생명의 감로수를
대자연 벗들에게 한 잔 대접받고 났더니 더없는 생기가 돌았다.

39

그리고 조금 더 내려가는데
‘이곳이 성인봉 원시림이구나’ 싶은 생각이 번뜩 스칠 법한
그런 창연한 숲과 오랜 고목들을 만났다.

40

약 500여 년 된 섬피나무가 있다고 하니
얼마나 오랜 역사를 이 한 곳에서 살아내며
500번이나 반복되었을 계절의 변화와 생멸을
온몸으로 버텨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500번의 봄에 꽃을 피웠을 것이고,
또 500번의 여름을 짙은 초록으로 물들였을 것이며,
500번의 가을에 단풍을 만들어 잎을 떨구고
지난한 500번의 겨울을 시린 침묵에 잠겨왔을 것이다.

그러면서 잎은 흙이 되고 거름이 되어
다시 제 생명의 뿌리로 되돌아 가
또 다시 자신의 뿌리를 가지를 잎을 만들었을 것이다.
그 윤회의 작업은 500여 년 동안 끊임없었을 터다.
겉모양을 바꾸며 몇 번이고 윤회에 윤회를 거듭하면서
저렇듯 육중하게 세월의 역사를 한 몸에 담아
지금의 원시림으로 거듭났을 것이다.

겉보기에는 그냥 아무렇지 않게 서 있는 것 같은 나무 한 그루도
그 존재 안에는 무시무종의 윤회와 숯한 업연이 담겨 있고
전 우주적인 소식을 내제하고 있으며
그 피어남을 위해 온 우주가 기꺼이 도왔을 터다.

41 

그렇기에 나무 한 그루도, 풀 한 포기도, 하찮게 보이는 곤충 하나조차
전 우주 법계의 거룩한 신성이 불성이 담겨 있는 숭고한 존재다.
하물며 사람이랴.
기아로 죽어가는 사람이든,
가난에 찌들어 괴로운 사람이든,
하물며 큰 죄를 지은 죄수라 할지라도
어찌 그 존재가 하찮을 수 있겠는가.

42

오랜 세월이 담기고 역사가 담긴,
지난 세기를 묵묵하게 살아 낸 원시림 숲의 정령들과
나무와 대지에 깃든 생명신들,
대자연의 천사들과 청량한 선신들
어떻게든 이름 지어진 그 모든 인연 도반들께, 이웃들께
이렇게 숲 길을 걸을 수 있음에 대한 깊은 감사와 경외를 보냈다.

43

원시림 숲 속을 가로질러 내려오는데
저 아래 계곡이 크게 몸살을 앓고
살저름을 떼어내는 듯한 아픈 현장을 목격했다. 

지난 태풍으로 인해 이 거대한 원시림 계곡이 무너지고 있다.

45

그러나 자연의 조화는 언제나 여여하고 법에 맞다.
여법한 일들, 꼭 필요한 일들만이, 꼭 필요한 곳에서 일어나고 있다.
그것이 우리가 이 대자연을, 이 우주 법계를 바라보는
가장 큰 ‘보는 관점’, 정견(正見)이 되어야 한다.

이 아름다운 숲이 왜 이렇게 훼손되고 있을까.
왜 태풍은 매년 이 아름다운 대지를 할퀴고 지나가는 것일까.
그것은 지엽적인 문제가 아니다.
그것은 온 우주적인 문제이며, 전 지구적인 문제이며,
전 역사적인 복잡한 인과가 인다라망처럼 얽혀 있는 문제다.

어쨌든 그 이유들을 하나하나 다 살펴볼 수는 없지만
중요한 것은 그 태풍 또한 이 세상에, 이 곳에
꼭 필요한 이유와 목적을 가지고 여여하게 이렇게 나타났다는 점이다.

어쩌면 아직 더 많은 태풍이, 폭우가, 지진이, 해일이
이 세상을 뒤덮어 버릴 지 모른다.
지금까지 있어 온 기상이변들은 어쩌면 서막에 불과했는지도 모를 일이다.
요즘에 전 세계적으로 거대하게 일어나는 기상이변은
대자연 존재계의 본질에서 보내는 지구를 위한 자비로운 힌트일 지 모른다.

여전히 신은, 붓다는 온갖 방법으로 우리에게 경고 혹은 힌트를 보내고 있다.
사람들이 대자연을 훼손하는 공업(共業)을 세계적으로 꾸준히 짓다보면
인과의 결과 이 지구는 결국 그 당사자인 인간들을 훼손시키고 말 것이다.
그것이 공평한 인과응보의 이치가 아닌가.

지금 세계적으로 일어나는 기상이면들은
바로 그것이 시작되고 있음을, 진행되고 있음을 알리는 경고다.
그런데도 여전히 사람들은 그 경고를 무시하고
끊임없이 개발지상주의에 빠져 전 지구를 파헤치고 있는 일을 멈추지 않는다.

이렇게 강력한 힌트를 존재계의 본질에서 꾸준히 보내주고 있는데도
사람들은 그 힌트를 알아채지 못하고 있다.
아니 알아채고 있다고 하더라도 지금까지 해 왔던
온갖 욕심충족과 만족을 모르는 어리석은 생각들,
탐내고 성내고 어리석은 삼독심이 그 힌트를 무시하고 있다.

대자연이 보내는 자비로운 경고를 무시해서는 안 된다.
이렇게 수많은 기상이변이며 대형 태풍들이 불어닥칠 때
그 힌트를 알아채고 곧장 본질로 돌아갈 수 있어야 한다.

본질은 무엇인가.
이 지구의 모든 사람들이 더 이상 대자연을 훼손시키지 말고,
개발이란 이름으로 죽이지 말고,
사람의 생명과 대지의 생명이 둘이 아니란 자각으로써
조화로운 지구 공동체를 이루어 내는 것이다.

조금 더 절약하고, 조금 더 만족하며,
욕심을 줄이고 집착을 버리며,
대자연의 시름 시름 앓고 있는 몸살을 동체대비로써 어루만져야 한다.

그러나 현실은 본질에 접근하기 보다는
지엽적인 것에만 매달려 어리석게 일을 진행시키고 있다.
태풍으로 계곡이 무너졌다고
콘크리트로 계곡을 반듯하게 바를 생각만 하고 있다.

지금 전국의 모든 하천들은 예전의 생명하천이 아니다.
모두가 반듯반듯하게 콘크리트 등으로 인위적으로 쌓아 놓아
작은 하천생명들이 더 이상 살아낼 수 없는 죽은 환경이 되고 말았다.

사람들의 바람대로 모든 하천은 깨끗해졌다.
흙도 별로 없고, 풀도 없고, 나무도 없으며
그 안에 깃든 하천 생명들도 사라져 버렸다.
오직 죽은 물이 흐르기만 하는 기능성 정비 하천이 되어 버렸다.
그래놓고 사람들은 그런 하천 풍경을 보며 개발되어 좋다고 말한다.
너도 나도 우리 동네 하천도
그렇게 포크레인과 거대 자본으로 개량해 주길 바란다.

모든 사람이 죽은 하천을 바란다.
그것을 깨끗하다고 여기며,
그것이 개발과 발전의 이기이며 축복이라 말하고 있다.
그런 인위적인 정비 하천을 보며 물도 맑아졌고
물길도 구불구불하던 것이 잘 펴졌으니
이만하면 환경 정비가 잘 되었다고 하겠지만 그건 얼마나 어리석은 것인가.

자연 하천은 있는 그대로 내버려 두는 것이 가장 온전하다.
그래야만 사람도 살고 그 물에 물고기도 작은 생명체도 살아갈 수 있다.
이제 모든 개발 정책은 최우선에 생명을 두어야 한다.
하찮게 보이는 생명이 살아나야 인간 생명도 살아나기 때문이다.

이 곳 성인봉 아래 나리분지 가기 전의 무너져 가는 계곡도
그걸 살리겠다고 지금 곳곳에 포크레인과 대형 장비들이 들어 와
계곡에 새로 튼튼한 인위적인 벽을 쌓는 현대적 정비작업에 나섰다.

46 

47

반듯하게 쌓아 올린 인공 계곡과 하천의 모습을 보니
더 깔끔해 지고 있다는 느낌 보다는 안타까운 마음이 앞선다.
무언가 산과 나무와 계곡의 조화가 깨지고 있는 느낌이다.

그냥 내버려두면 자연은 저절로 진리에 걸맞는 꼭 필요한 만큼의
정비와 정화를 스스로 해 낼 것이다.
인간의 해석과 장비를 들이대니 그것이 병인 것 처럼 보이고,
인간이 개입하지 않으면 절대로 안 될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가만히 놔두었을 때,
자연의 일은 자연 스스로에게 맡겨 두었을 때
자연은 정확하게 해야 할 일을 알고 스스로를 치유하기 시작한다.

물론 요즘의 현실이 애초부터 사람에 의해 발전되고 파괴되다보니
한 번 사람 손이 간 것들은 이제부터 끝까지
사람의 손에 길들여 져 복구가 되어야지만 되도록 해 놓아서
어쩔 수 없이 인위적인 손길이 필요한 곳들도 있지만,
그런 곳이라도 될 수 있다면 지속가능한 방법으로,
환경과 조화를 이루는 방법으로, 모든 생명을 살리는 방법으로
그 방법이 전면 제고되어야 할 것이다.

본래 자연에는 병이 없다.
자연 속에 깃든 모든 존재는 병으로 앓지 않는다.
유독 인간들만이 병으로 고생하고
인간에게 길들여진 애완동물들만이 인간의 병을 닮은 온갖 병들로 고생한다.

자연이 병들어 보이는 것도 사실은 그게 병이 아니다.
변화의 한 모습일 뿐.
그래서 자연은 파괴되는 듯 보이는 겉모습도
자연스런 삶의 과정으로 인식된다.
그러니 인간이 보기에 병들어 보이는 것도
가만 내버려 두면 스스로 알아서 치유된다.

저 성인봉 아래 하천을 정비하겠다는 모습만 보더라도
자연을 보호한다는 것이 도리어 흉측하게 바꿔 놓았다.
한 번 인위가 개입되면 그 때부터는
작은 상처에도 인간이 개입되야 하고, 온갖 기술과 장비,
돈과 인위적인 노력이 따라 들어와야 한다.
여러모로 번거롭고 어리석은 일들이 점차 우리 주위에는 늘어가고 있다.

이 늦가을, 하천 정비 공사장 곁에는
6, 7월에 피는 섬바디 하얀 꽃이 계절 감각을 잃고 피어올라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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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아래 나리분지 가까이에는 또 하나
한창 겨울에 피어야 할 동백꽃도 유독 한 나무에서만
빠알간 생명의 숨결을 틔워올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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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금 더 걸어내려가니
울릉도 전통 가옥이라는 투막집 몇 채가 보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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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리분지 쪽에는 너와집도 몇 채 보인다.

 51

요즘 흙이나 통나무로 만든 전통 가옥에 대해 관심이 가던 터라
유심히 관찰하며 투막집 안으로 들어가 보았더니
그야말로 울릉도의 자연에서 나온 흙과 나무 그리고 볕집들이
조화롭고도 견고하게 짜여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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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시 옛 사람들의 자연스런 지혜는
인위적이기 보다는 무위 자연의 조화로운 공존을 바탕으로 하는
선지자의 그것이다.
옛 것을 보라.
어느 것 하나 파괴되거나 조화를 깨는 것이 없다.

도무지 불가능하다고 입을 모아 말할 것이고,
또 실제로도 실현 불가능하겠지만
이 인류를 구할 수 있는 정말 획기적이고도 혁명적인 방법은
옛날로 돌아가는 것이 아닐까 싶다.

물론 요즘은 그런 옛 것의 우수성이 점차 알려지기도 하고
또 옛 것과 새 것을 잘 공유시킨 의식주 물품들이 유행이기도 하지만
그것이 한 때의 유행이나 돈벌이를 위한 수단으로 전락해서는 곤란하다.
Posted by 법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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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째날, 내수전 일출 전망대에 올라...(‘05. 11. 21. 15:42)



울릉도에 도착하자마자
복잡한 도동을 피해
언덕 하나 넘어 가까운 이웃 마을 저동에 여장을 풀었다.

1

소박하고도 호젓한 어촌 저동의 풍경을 뒤로
내수전 일출 전망대에 올랐다.

가슴이 탁 트이는 바다 풍경,

2

그리고 고개들어 바라보면
우뚝 솟은 높은 산의 신비로운 그림.
그 위로 떠가는 구름, 태양.

3

이제 해는 서산 너머로 떨어지고
바다는 조금씩 어두운 침묵 속으로 잠긴다.

조용하다. 고요하다. 적멸!
저동항이 내려다보이는 전망대 의자에 앉아 내 삶을 의지한다.

4

아랫마을 개짓는 소리,
일 끝나고 들어가는 농부의 경운기 소리,

5

그리고 멀리서 들려오는 나직한 파도소리,
그리고 침묵, 침묵, 침묵!!!

세상도 침묵하고 내 마음도 깊은 침묵에 잠긴다.
이 거대한 산과 바다의 침묵,
선(禪)으로 이끄는 이 풍경들이 내 마음을 비워준다.

저 멀리서부터 스치우는 바람이 지나는 소리
들리고 듣는다.
저 멀리 저동항 불빛들이 하나 둘씩 켜지고
내 마음에도 고독의 불빛이 짠히 켜지고 있다.

6 

7

산은 높다. 그리고 바다는 넓다.
높고 넓은 산과 바다, 그 한 가운데
그 둘을 잇는 그 속에 한 존재가 서 있다.
높고 드넓은 산과 바다의 마음이 되어.

바다 한 가운데 홀로 외로이 떠 있는 섬,
죽도, 죽도는 또 하나의 고독이다.

8

내 안의 외로움과
산과 바다의 깊은 침묵의 외로움,
그리고 저 바다 속 홀로 떠 있는 죽도의 외로움은
오롯이 한마음이다.

9

아!! 이 고요, 이 침묵, 이 고독이 좋다.
평온하고 깊다.

두 세 차례 몇몇 관광객들의 발걸음이
드문 드문 내 앞을 스치고 있다.
사람들은 오고 또 가고 시간은 흐르는데
나 홀로 시간이 멈춘 듯 그렇게 그렇게 앉아만 있다.

오고 가는 사람들을 통해 시간의 흐름을 짐작해 볼 뿐.
어둠이 내려앉고
산과 바다의 빛이 바뀜을 통해 시간을 바라보고 있다.

10

이 고요함이 좋다.
이 외로운 침묵이 좋다.

아니, 좋다기 보다 아주 미미한 감각.
좋되 좋지 않고, 외롭되 외롭지 않은 작은 떨림.
내가 좋은 것이 아니라
이 대지가 이 산이 이 바다가 좋다.
그 좋은 대자연의 영혼에 내 마음이 살짝 포개어지는 듯 하나되는 듯
그런, 그런 느낌...

어쩌면 내 전생은 외로움이었는가. 침묵이었는가!
내 온 곳은 외로움이고 침묵의 그 곳이다.
그리고 내가 다시 돌아가야 할 곳도 외롭고 고요한 침묵의 그 곳!
그 곳은 일상에서는 잘 보여지지 않다가
이렇게 홀로 깊은 존재의 침묵을 마주할 때
그 때 힐긋 힐긋 그것도 아주 미세한 감각으로 보여질 뿐이다.

바다엔 침묵이 깊고 하늘엔 구름이 짙다.
저 산 위에 떠 있는 먹구름 사이로 간간이 햇살이 비치며 흐른다.

11

하늘 천신이 손전등으로 하늘 아래 가장 높은 곳에
그림처럼 사는 사람들의 삶을 비춰보는 듯
햇살은 한 줌씩 산 허리를 스쳐가고 있다.

12

하늘의 구름도 노을이 선사하는 노랗고 붉은 빛의 옷을 갈아 입고
바다와 산과 들녘, 그리고 바람과 파도가 만들어내는
대자연의 오케스트라 연주에 막바지 혼을 다하고 있다.
산 너머로 지는 태양에 비친 구름 빛이 그 어느 때보다도 아름답다.

13

그렇듯 저 높은 산 바로 위에 앉아 짙은 구름 뒤에 숨은 채
잠깐 잠깐씩 보여주던 애잔한 햇살도
이제 완전히 서산 뒤로 넘어갔고 어둠은 더욱 짙게 깔렸다.
대자연의 어둠이 깊어지면서 사람들의 불빛은 더욱 늘었다.
이제 나도 저 사람들의 불빛 속 어딘가에 몸을 뉘여야지.

이제 어둠도 제법 깊어졌고 배도 출출해 온다.
저 아래 불빛들 속에 내 작은 거처로 발길을 돌린다.
터벅 터벅 내려오는 길, 어둠은 깊고 침묵은 무겁다.

바닷바람이 싸늘하게 불어 와 내 안 깊은 곳에까지 가 닿는다.
밤 바다를 스치운 찬 바람이 살갖을 적실 때
온 존재의 감각이 깨어나는 듯 몸까지 출렁이며 파도친다.
그래서 한여름보다 이렇듯 늦가을이나 겨울 문턱에서
대자연과 접촉하는 느낌은 ‘깨어있음’이란 청량한 존재감을 가져다 준다.

오래도록 느릿 느릿한 발걸음으로 바닷길을 걷는다.
방파제에서 바라 본 저동항의 불빛들이
내 안의 서정과 감성을 마구 뒤흔들며 일깨우고 있다.

14

이런 깨어있는 시린 외로움의 청안청락의 시간을
그냥 좁은 골방 안에서 가둬두기 싫어
늦은 밤까지 옷깃을 여미며 저동항 곳곳을 거닐었다.

동네 작은 분식점이 마침 문을 열고 있어 들어갔더니
중고생들의 재잘거리는 소리며,
공사 인부들이 소주 한 잔 기울이며 회한을 품어내는 소리가
이곳도 사람사는 곳이란 새삼스런 자각을 일깨워 주었다.

아! 그랬었구나.
이 외로운 섬 속에도 삶이 있고 고뇌가 있고
사람 사는 향기가 물씬 풍기는 그 누군가의 고향이구나.
모처럼 홀로 서정적이고도 선(禪)적인 섬 풍경에 깊이 빠져들다 보니
잠시 세상의 일을 잊고 말았는가.

식당에 들어 와 음식을 시키고 앉아 있자니
아침 10시 쯤에 포항에서 배를 타기 전 터미널 앞 식당에서
간단히 된장찌개를 먹고는 내내 빈 속이었음이 상기되었다.
그러고 보니 전망대에서 내려올 때만 해도 속이 출출했었는데
배고픔도 잠시 잊고 저동항의 밤풍경에 젖어 있었나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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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양을 하고는 소화도 시킬 겸
조금 더 걸으며 어촌의 밤 풍경을 느끼다
늦은 밤이 되어 방 안에 들어 녹록한 몸을 뉘였다.


둘째날, 새벽 저동항의 일출(민박집 나섬, 06:40)

저동항의 불빛 속에서 잠을 청하고 새벽을 맞는다.
일찌감치 눈이 뜨여졌다.
창문 커튼을 열고 기지개를 쫘악 켜고 나니
새삼 내 몸이 머물고 있는 곳이
낯선 섬 어느 귀퉁이란 사실이 느껴지며
자유로움, 평화, 혹은 그 어떤 짠한 해방감 같은 것이 밀려온다.


16

이런 느낌을 가만히 느껴보는 것 또한
일상을 벗어난 여행이 내게 주는 또 하나의 선물이다.
저동항과 촛대바위의 깨어남을 창 밖으로 바라보며
아직 깨어나지 않은 어둠을, 그리고 낯선 섬에서의 설렘,
일상에서의 해방과 자유를 될 수 있는 한
온 몸의 감각으로 깊이 충분히 느끼고 또 느꼈다.

17

이 울릉도가 준 또 하나의 선물은 사람이다.
하룻밤을 머문 허름한 민박집 주인 어르신의 인간미와 자상함은
도무지 잊을래야 잊을 수가 없다.
내가 태어나서 이런 깊고 진한 사람을 본 적이 없다.

고작해야 엊저녁에 도착하여 오늘 새벽에 떠날 사람이고
그것도 엊저녁에는 늦게까지 내수전 전망대에 올랐다가
저동항의 야경 속에서 거닐다 늦게 들어간 것을 생각하면
정말이지 잠깐 스친 인연일진데
그 잠깐의 시간 안에서 인간의 깊은 향기를 듣는다는 건 참 어려운 일 아닌가.

아직도 그 짠한 사랑과 관심과 인간미는 내 안에 온기가 되어 남아 있다.
전혀 모르는 한 사람이 한 사람과 만나 이런 깊은 관계를
그것도 그렇게 짧은 시간 안에 가질 수 있다는 건
세상이 얼마나 살아볼만한 곳인가를 깨닫게 해 주는 삶의 축복이요 선물이다.

누가 소개를 시켜주는 바람에 엊저녁을 이 민박집에서 묵었는데,
이 선택이야말로 울릉도라는 섬에서 보고 느낀 최고의 선물로 기억된다.
그래서 만행이라는 것이 중요한 것이다.
전혀 다른 삶 속으로 뛰어들어 본다는 건 이렇듯 새로운 선물을 선사해 준다.

찬 물에 세수를 하고 정신을 일깨우며 나갈 준비를 하고 있는데
주인 어르신께서 방 안으로 들어오시더니 지도를 펴서
오늘 하루 내 일정을 꼼꼼하게 체크해 주신다.

촛대바위에서의 새벽 일출, 아침 공양, 안평전까지의 차편,
성인봉 오르는 길, 등산후 나리분지에서의 점심 식당,
그 이후 바닷길 코스에서부터 통구미의 일몰까지
오늘 하루의 일정을 하나하나 지도를 짚어가면서 설명해 주셨다.

민박집을 나서면서 방값이 생각보다 너무 헐어
조금 더 드리겠다고 했더니
방도 좋지 않은데 뭘 더 주느냐고 한사코 마다하신다.
이런 분께는 그 배로 값을 치르더라도 아까운 생각이 없다.

은사스님께서는 항상 사람들에게 신세를 지거나 거래를 하실 때
생각보다 더 많은 액수를 지불하곤 하셨다.
분명히 더 깎을 수도 있는데 깎기는 커녕
오히려 달라는 액수보다 더 많이 얹어 드리는 일이 많았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 마음을 다 헤아릴 수는 없지만,
사람들과의 거래에서는 미리부터 조금 받고 많이 주겠노라는
그런 생각이 있으셨던 것 같다.

경주 남산 중턱에 도량을 지으실 때에도
그 시골 땅을 대구 시내 땅값을 쳐 주며 사셨고,
무언가 도움을 받으면 그 도움에 대한 몫보다 항상 더 많이 얹어 주셨다.
도량의 처사님이나 공양주 보살님께도
항상 월정 보시금 이외에 기도 때며 행사 때마다
당신과 똑같은 몫의 대중 보시를 나누곤 하셨다.

그런 마음으로 사시다 보니
사람들과의 거래에서 손해를 본다거나
흔히 있을 거래에서의 손실로 인해 마음 아파하는 일이 없다.
남들이 보기에는 손해이겠지만
당신의 거래에서는 그것이 당연한 일상이셨다.

그런 은사스님의 가르침은 내내 내게도 넓은 마음을 심어주셨다.
은사스님 도량에서 하산하여 내 길을 처음 갈 때
낯선 곳에서 낯선 사람들과 낯선 세상 물정을 거래할 때
처음에는 모르는 사람이라고 바가지를 씌우면 어쩌나 하는 걱정이 앞섰는데
은사스님처럼 그래 주는 마음으로 손해보는 마음으로 살자 하고
턱 놓고 가니까 가는 곳곳에서 오히려
향기나는 사람, 풋풋한 사람들을 만나곤 했다.

설사 조금 손해를 보고 거래를 하는 일이 있더라도
그로인해 손실을 보았다거나
어떻게 저렇게 장삿속을 드러내며 이익을 챙길 수 있느냐거나 하는
그런 진심과 분별이 생기지 않아 좋았다.

기어이 민박집 어르신께도 내가 받은 감사의 마음의 표시로
주머니 속에 얼마를 더 넣어드리고 나오는데
같이 가자시며 잠바를 걸쳐 입고 따라 나서신다.

한사코 춥다고 안 나오셔도 되니까 그냥 계시라고 해도
끝까지 따라 나오시면서 식당도 소개해 주시고
일출을 보고 택시를 잡아타는 것까지 끝가지 챙겨 주셨다.

든든히 아침 공양을 하고 나가니 서서히 여명이 밝아오기 시작하고 있다.

18

촛대 바위 너머 저 멀리 수평선 가까이부터 붉은 색감이
하늘로 하늘로 번져 오르기 시작한다.

19

어둑어둑하던 하늘과 구름들이
조금씩 조금씩 가장자리부터 붉은빛 물감을 풀어내고 있다.
그러더니 이내 그 옅은 먹구름 사이로
햇살 한 줄기 거짓말처럼 고개를 내민다.

20

한참을 그렇게 바라보고 있자니
어느덧 햇살이 찬연히 구름의 빛깔을 황홀하게 바꾸어 놓더니
이내 구름들이 조금씩 걷히고
붉은 태양 빛을 배경으로 파아란 하늘이 속살을 수줍은 듯 드러내고 있다.

21

아직 바람은 차다.
찬 바람이 계속 신경이 쓰인다.
여기 택시값이 여행자에게는 부풀려 지는 경우가 많다고
일출 보고 나서 정직한 택시 기사를 불러주시겠다며
끝까지 찬 바람 속에서 매일 아침 일상처럼 맞을 일출을
천진하게 함께 기꺼이 맞이해 주시는 어르신이
혹시나 감기나 걸리지 않으실까 걱정이 되었다.

들어가시라고 몇 번을 더 말씀드려도
막무가내로 손가락을 수평선 쪽을 가리키시며
딴 생각 말고 일출 놓치지 않게 눈을 떼지 말라시며
일출은 잠깐 사이에 불쑥 떠오른다고 조언을 해 주신다.

22

이 곳에서는 창만 열면 일출을 맞이 할 것 같지만
사정은 전혀 그렇지 않다고 하신다.
울릉도에서는 일 년에 3/1 정도 밖에
화창한 일출을 감상할 수 없다고 하시며
오늘이 바로 그 날인 것 같다고 어린애처럼 좋아하신다.

드디어 붉은 태양이 저 바다 위로 힘주어 떠오른다.

 23

새벽부터 일 나간 어부의 작은 배를 뒤로
온 세상을 일깨우는 광명, 일광보살이 내 눈앞에 나투고 있다.

24 

25

저동항도 함께 깨어난다.

26

붉은 빛을 받아 저동항 집집들이, 어선들이
선홍빛으로 단장을 하고 있다.

27

몇 몇 여행자들은 새벽 일출을 보겠다고
방파제로 등대로 뛰어 나왔고
바다 갈매기들도 일광보살의 설법에 날개짓으로 화답하고 있다.

28

아! 뜨겁다.
차고 시리지만 뜨겁다.

29

속 깊은 곳까지 붉어진다.

30

저동항 어선이 들어오고
어부들은 오징어를 분주하게 다루며 삶을 살아내고 있다.

 31

어르신 말씀이 지금은 고작 이정도지만
옛날에는 이 곳 전체가 오징어 배들과 사람들
또 파닥거리는 오징어들로 가득했다고 아쉬워했다.

32

그러고 있는데 할아버님께서 어느새 전화를 하셨는지
한 택시기사님께서 우리를 부르며 손짓하고 있다.
할아버님 처럼 믿음이 가고 든든한 또 순수해 보이는
30대 후반쯤의 청년 택시기사다.
Posted by 법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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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
온 산이 불타고
온 자연이 불타는 계절.

내가 사는 도량도
온통 형형색색의 단풍빛으로 물들었다.
어떻게 이렇게 변할 수 있을까.
똑같은 도량이
봄 여름 가을 겨울
늘 새로운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1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왜 나는
이렇게 변화하는 자연의 생명 소리를 듣지 못하고,
그 경이로운 모습을 보지 못하며 자랐을까.

세상을 바라보는 눈은
저마다 다르다.

이 아름다운 세상을
아름다움으로 바라볼 수 있는 사람이 있지만
우울한 시선으로 바라보는 사람도 많이 있다.

그러면 어떻게 보았을 때
가장 대자연 본연의 모습을
우리들 가슴 속에 온전히 담아낼 수 있을까.

그건 아마도
마음을 얼마나 비우느냐에 달려있을 것 갔다.

마음이 호젓하게 비어있으면
자연은 바로 그 텅 빈 마음 속으로
빨려들듯 무한하게 들어오지만,
마음이 욕심과 바램, 탐심과 진심으로
잔뜩 꽉 차 있는 사람에게는
자연을 한 움큼도 담을 마음의 여백이 없다.

2

지금 이 순간
죽을 일이 생겼다면
큰 미련 없이 떠날 수 있겠는가?

그럴 수 없다면
왜 그럴 수 없는가.
가만히 생각해 보라.
날 떠나지 못하게 발목 잡고 있는 것
바로 그것이 내 마음을 채우고 있는
욕망과 집착의 실체일 수 있다.

마음공부는
내가 바라는데로
좋은 일만 있도록 바라는 기도가 아니다.
좋은 일만 있고,
괴로움은 없으며,
날마다 행복만 가득한 것이 수행이 아니다.

좋고 나쁜 것도
즐겁고 괴로운 것도
그 양 극단의 모든 것도 다 놓아버려
있는 그대로 다 받아들일 수 있는 넓은 마음
드넓은 하늘의 마음이 바로 수행자의 마음이 아닐까.

그러니 오래 살겠다는 마음도 욕심의 일종이다.
수행 열심히 하면 오래 살겠지
하는 그 마음도 욕심이지 수행심이 아니다.

심지어는 삶과 죽음까지도
턱 놓아버릴 수 있어야 한다는 말이다.
그래서 '지금 죽는다면?' 하는 좀 극단적인 질문으로
욕심의 실체를 볼 수 있다는 말을 던진 것이다.

3

그렇게
일체 모든 욕심과 아집, 번뇌와 탐진치를
모두 비울 수 있다면
더이상 깨닫겠다고 애쓸 것도 없고,
지금 이 순간 더없는 온전한 평화가 있다.

평화라고 이름붙일 것도 없는
그냥 텅 빈 그 무엇이
무심(無心) 속에서 피어오른다.

그랬을 때
그렇게 마음을 비웠을 때
대자연의 아름다움도 우리 가슴속에서 꽃필 수 있다.

대자연은
언제나 그 자리에서 경이롭고 신비로운 아름다움으로
우리 곁에서 환한 미소를 짓고 있으니까.
10년 전에도 그랬고 10년 후에도 그럴 것이다.

내가 태어났을 때도 그랬고,
초등학생 때나 중고등학교 때, 대학생 때,
막 사회에 발 디뎠을 때도 그랬고,
지금 이 순간도 그러하며,
내가 생을 마감하는 그 순간까지
언제나처럼 빛나는 아름다움과
숨이 턱 막힐 만큼 경이로운 생명의 숨결을 우리에게 선사할 것이다.

그것은 일종의 선물이다.
마음을 비운 자 만이 볼 수 있는 선물.
마음이 꽉 찬 사람은
항상 우리와 함께하고 있는 그 선물을 얻을 수 없다.
곁에 있어도 보지 못하고 듣지 못한다.

가을이 오면
그러한 선물은 더없는 아름다움을 연출한다.

4

가을은 봄에 긴긴 겨우내 안으로 거둬들인 생명의 빛을
활짝 꽃피우는 봄꽃들의 생명력에 비할 수 없는
가을만의 또 다른 아름다움이 있다.

어쩌면 봄에 활짝 피어나는
생명 시작의 아름다움 보다도
생명이 활짝 꽃피웠다가 그 빛을 다하면서
막바지 빛을 수놓는 가을 단풍의 아름다움이
더욱 더 내 가슴을 셀레게 한다.

그것은 마치
이른 아침에 깨어있는
부지런한 사람만이 바라볼 수 있는
새벽녘의 떠오르는 햇살도 좋지만,
오히려 하루를 마감하면서
뉘엿뉘엿 이 세상을 노오랗고 붉게 비추는
저녁 노을의 아름다움이 더없이 가슴을 설레게 하는 것과도 같다.

5

저녘 노을 얘기가 나와서 말인데,
난 작은 오두막에서
대자연과 벗하며 소박하게 살고자 하는 소망이 있다.
그런데 그 오두막은
내 손으로 흙과 나무를 인연에 맞게 추슬러
만들고 싶은 생각을 가지고 있다.

그런데 그런 생각을 하게 될 때가 언제인고 하니
바로 해질녁 노을을 바라보면서다.
오두막이 되었든 작은 법당이 되었든
그 보금자리는 하루일과를 마치고
편안한 마음으로 마루에 걸터 앉아
해지는 노을을 바라볼 수 있도록 지을 것이다.

시야가 툭 터진 산 중턱 즈음에
해지는 노을을 훤히 바라볼 수 있는 방향으로
큰 창을 하나 내고
해지는 저녁이면 노곤한 몸을 이끌고
이 대자연이 그려내는 지상 최고의 아름다운 그림을 보며
내 마음 뜨락에도 노을을 하나 그릴 것이다.

매일 매일이 같은 나날일지라도
나의 하루 하루는 날마다 새로울 것이다.
똑같은 하루란 도저히 없는거니까.
매일 매일 똑같은 곳에서 노을을 바라보더라도
난 늘 새로운 그림을 보게 될 것이다.
그러면서 내 마음도 자연을 닮은 화가가 되겠지...

6

자연에 중독되면
사람이 참 평화로워진다.

어젯밤에도
지는 해를 바라보면서
저녁 노을에 비친 가을 단풍의 풍경에
그 두 가지 지는 것들의 아름다움이 연출해 내는
가슴벅찬 연주를 들었다.

우리 절에서 산길을 따라 난 길을
한 5분쯤 걸으면
그야말로 가슴이 후련할 만큼 툭 트인 풍경을 볼 수 있다.
절에서는 아침 뜨는 해는 볼 수 있어도
저녁 지는 해는 볼 수 없는데
그 아쉬움을 바로 그 장소에서 해소할 수 있다.

그래서 난 이따금씩
그 길을 걸어 저녁 노을을 마주하며
나의 하루를 들여다 보곤 한다.

7

그런데 어제 저녁
한 해를 마감하면서 온 산을 물들이기 시작한 가을 단풍과
하루를 마감하면서 대지를 물들이는 저녁 노을의
환상적이고도 신비로운 연주는
그 어느 때보다도 나를 설레게 했고
급기야 내 안에 자리잡고 있는 방랑벽을 일깨워 놓았다.

그 가슴 벅찬 화폭을 들여다보면서
마음 속에 그려만 놓았던 봉화 청량산과 청량사를 떠올렸다.

가을 단풍으로 온통 물들었을 도량.
산 중턱 가파른 봉우리 아래
자연과 조화를 이루며 새겨놓은 가슴 벅찬 도량.

노을이 비출 저녁이면 천상 신들이 사바예토에 내려와
거닐으며 차 한 잔 마시고 갈 것 같은 신비로운 도량.
깎아지른 듯한 봉우리들과
그 봉우리를 후광으로 딱 버티고 서 있는 청량사의 법당들
그리고 그 대자연과 도량의 아름다움을
한층 경이롭게 수놓는 가을 울긋불긋한 단풍의 향연.

가을 청량사의 아름다움은
그 어느 때보다도
또 그 어느 사찰의 그것보다도 뛰어나다.
봉화 청량산 청량사.

8

봉화라는 땅 부터가
그나마 이 세상의 개발논리로부터
그래도 많이 멀고,
아무래도 자연의 파괴가 덜 진행된
그래서 더욱 내 가슴에 한 줌 고향이 된 땅이다.

퇴계가
'차마 세상에 알려질까 두렵다'고 했다는,
그만큼 사람들의 손길이 닿지 않기를 바랬다는
그런 곳이 봉화요, 청량산이다.

봉화의 땅이 가장 오지에 가깝고
그래서 땅값도 우리나라에서 가장 싸다고 해서
가난한 귀농자들이 많이 찾는 곳이라고 들었다.
실제로 대자연과 어우러지는, 친환경 농업으로 이루어진
자연 공동체, 농업 공동체, 명상 공동체들이
많은 곳이 바로 경북 봉화땅이라고 한다.

봉화와 함께 우뚝 서 있는
일월산과 청량산
그 속에 서 있자면
마치 산의 숨소리가 들릴 듯 하다.

아마도 요즘 같은 시절에
봉화 쪽에서처럼
도로에 차가 드문 곳도 없을 것 같다.
저녁나절이면
한참을 가야 차 한 대 마주할 수 있을 정도로
봉화, 청송 쪽의 산길은 호젓하여 좋다.

조용하게 차분한 음악을 들으며
호젓한 도로를 따라 도착한 청량산 청량사.
한적하던 도로사정과는 다르게
청량산 아래 주차장에는 차들이 많다.

아마도 단풍철이라
이 오지까지 많은 사람들이 찾아왔는가 보다.

9

처음 찾은 분들은,
더구나 가을 단풍철의 청량사를 처음 와 보는 분들은
한적하던 시골에
이렇게 많은 사람이 찾아온 것을 보고 놀라곤 한다.

청량사를 오르는 사람들은 그렇게 놀라는데,
막상 한 30여분 남짓 터벅 터벅 걸어
청량사 도량을 참배하고 내려오는 이들은
왜 그렇게 많은 이들이
이 먼 길을 돌아 돌아 오는지 금방 이해할 수 있다.

제2의 금강산이라고 불린다는데
금강산에 다녀오신 분들 말씀을 빌리자면
청량산의 아름다움은
금강산에 도저히 비할 바가 아니라고 하곤 하신다.

30여 분 터벅 터벅 걸어 올라
청량사 소개 전각을 찬찬히 읽어보고
고개를 딱 돌려 도량을 바라볼 때
그 누가 탄성을 자아내지 않을 수 있단 말인가.
그 누가 감탄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10

우선 도량의 아름다움에 놀라고
도량과 하나가 된 듯
도량 뒤쪽으로 우뚝 솟아있는 봉우리들에 또 한번 놀란다.
거기에 이 가을 단풍으로 물든 도량과 산세를 보자면
그야말로 딱 벌린 입을 다물기가 어려워진다.

11

지현스님께서
청량사 주지로 부임하시고부터
'산사음악회'를 처음 시작하셨는데,
아마도 청량사 산사음악회가
요즘은 흔해져 버린 산사음악회의 시초가 아닌가 싶다.

이 웅장한 도량에서 울려퍼지는
음성공양의 행진은
가슴속으로 생각만 해 보아도 감동이다.

올해 산사음악회도 미처 가 보지는 못했지만
들려오는 소문을 들으니
여러 종교의 성직자, 수행자들이 함께 모여 음악회를 열어
다른 해의 유명한 가수들이 왔었던 때보다
한층 경건하고 조화로우며 감동적이었던 음악회였다는 들림이 있었다.

그런 음율의 향기가 청량산 그리고 청량사와
내 마음에서 인연을 맺으면서
아마도 이 도량을 한층 더 그리워하게 된 듯 하다.

그런 곳, 그리움의 도량 청량산 그리고 청량사.
청량산은 총 36의 봉우리가 있고
그 가운데 큰 봉우리만 12 봉우리가 있다고 하는데
그 기암괴석으로 이루어진 12 봉우리가
마치 연꽃처럼 청량사를 둘러싸고 있으며
그 중심 꽃술의 자리에 바로 이 도량 청량사가 자리하고 있다고 한다.

신라 원효스님께서 창건하셨다고 하는데
창건 당시에는 33개의 부속건물을 갖춘 그야말로 대 가람이었다고 하니
상상만 해 보더라도 어떠했는지 짐작이 가고도 남음이 있다.

12

아...
나는 여지껏 이런 산사를 본 적이 없다.

아마도 가을이었기에
온산을 물들인 단풍이 있었기에 더욱 그러했을 것이지만
아! 이곳은 사바 예토(穢土)의 그것과는 거리가 멀다.

우선 첫 번째로 만날 수 있는 곳이
얼마전 주지 지현스님께서 출판하신 책의 제목과도 같은
‘바람이 소리를 만나면’이라는 현판의 안심당(安心堂),

13

통나무와 황토벽에 너와지붕을 얹은 다원이
단아하면서도 아름다운 모습으로 눈에 들어온다.

14

차 한 잔 생각나던 차에
이렇게 고즈넉한 산사에서 전통다원을 만나면
그렇게 행복하고 고마울 수가 없다.
도량에 다원이 있으면 난 그 도량이 더없이 정겨워보인다.

오대산 월정사나 적멸보궁 가기 전에 있는 상원사가 그렇고,

15

금산사, 대둔사, 지리산 대원사, 영월의 법흥사, 송광사
양평 용문사, 직지사 등
이렇듯 전통다실을 갖추어 놓은 도량은
차 한 잔의 따뜻함 만큼이나 향기가 난다.

그리고 또 한 곳 빼놓을 수 없는
정말이지 차 한잔처럼 맑고 향기로운 도량이
경기도 양수리의 수종사.

16

더없이 경관이 빼어난 곳에 아름답고 운치있는 다실을 만들어 놓았는데
그것도 모든 방문객들에게 무료로 차를 마실 수 있도록
해 놓은 점이 더없이 도량을 더욱 고향처럼 느낄 수 있게 해 준다.

이 점은 정말이지 모든 도량들이 꼭 배웠으면 하는 점이다.
도량이란 오고 가는 모든 사람들이
몸도 마음도 푹 쉬고 갈 수 있는 고향 같은 곳이다.
고향에 가면 모든 것을 주고 또 주고
그것도 모자라 집에 갈 때 보따리로 싸 주지 않나.
그렇게 까지는 못 하더라도
차 한잔 따뜻하게 대접하는 그 마음이 얼마나 고마운지 모른다.

도량에서까지 돈이 오고 가기 보다는
그저 모든 이들을 품어주면서
모든 이들에게 차 한 잔 따뜻하게 대접할 수 있는
그런 자비로움이 보다 많은 도량에 전해지길 간절히 바란다.

수종사에서는 처음에 찻값을 받다가
지금처럼 무료로 차를 내어 드리기로 하고부터는
오히려 보시함에 더 많은 희사(喜捨)가 들어오고 있다고 한다.

그럼 그렇지.
주지스님의 또 사중의 그 후덕하고 자비로운 마음을
어찌 사람들이라고 모를 리 있겠나.
수종사의 그 따뜻한 차 한잔의 마음이
정말 우리네 중생들에게는
얼마나 고맙고 감사하게 느껴지는 지 모른다.

도량 참배를 끝내고 차 한 잔 마시며 쉬다 가겠노라던 생각이
안타깝게도 한참을 도량 참배하다가 보니 시간 가는 줄도 몰라
어느덧 해가 뉘엿뉘엿 지고 말았다.

안심당에서의 차 한 잔 계획은 무산되었지만
그만큼 도량이 아름다움을
내 안에 담아내기에 시간이 부족했음이니
얼마나 도량에 푹 빠져 있었는지 알 만 한 샘이 아닌가.

다실을 지나 종각을 오르고
종각에서 다시 우뚝 선 봉우리쪽을 바라보니
탑과 전각 그리고 봉우리가 눈안에 시원스레 들어온다.

17

그 봉우리 쪽으로 오르자면
흡사 설악산 봉정암에서 보았을 법한
야외의 불탑과 그 앞에서 참배하는 기도객들을 볼 수 있다.

18

불탑에서 삼배를 올리고 일어나서 고개를 들면
감탄사가 저절로 터져나온다.
가슴이 그만 활짝 열리고 툭 터지는 무언가가 있다.

불탑을 바라보면 그 건너편의 산봉우리가 멀리 눈에 들어오고
불탑 아래로는 깎아지른 듯 한참을 아래로 꺼지는 낭떠러지
그 위에 봉우리를 기단 삼아 올려 놓은 불탑이다.

19

삼배를 올리고 몸을 뒤로 돌리자니
왼쪽으로는 거침없이 우뚝 솟아있는 봉우리가 눈에 들어오고

20

바로 정면으로는 약사여래부처님을 모신 유리보전이

21

그리고 오른쪽으로는 스님들 방사와 산신각 등의 전각이
자연과 조화를 이루며 단아하게 펼쳐진다.

22

청량사는 다른 도량과는 다르게
대웅전이 있어야 할 곳에
모든 중생들의 병을 치료하고 수명을 연장해 주는
의왕으로써 신앙되는 부처님이신
약사여래부처님을 모신 유리보전이 있다는 점이 특이할만 하다.

23

유리보전이라는 이 현판은
고려 공민왕의 친필이라고 알려져 있고,
그 안의 약사여래부처님은 종이를 녹여만든 귀중한 지불로 유명하다.

24

그런데 도량 안에 들어가 보니
약사여래부처님 좌우로 문수보살과 지장보살이
왠지 일반 다른 사찰의 그것과는 다르게
조금 조화를 이루지 못하고 있는 듯 보여 그 연유를 알아 보았더니,
전쟁으로 불탄 문수전의 문수보살과
명부전의 지장보살을 약사여래의 좌우 협시로 한 곳에 모셨다고 한다.

그리고 유리보전과 불탑 사이에 큰 소나무가 하나 있는데
그 모습이 특색 있으며 우람하고 아름다워
얼핏 보기에도 무슨 사연이 담기지 않았나 싶을 정도다.
물론 이 소나무는 소에 얽힌 사연을 담고 있다.

25

이 소나무는 가지가 셋으로 갈라져 있는데 그래서인지 그 이름이 삼각우총.
즉 ‘뿔 셋 달린 소의 무덤’이다.
도량을 중창 불사할 때 남면에 사는 남씨가 기르던 뿔 셋 달린,
말을 안듣는 골칫거리 소를 보시받았는데,
소가 스님을 도와 기와·나무 등을 져올리며 불사를 마치고 죽었다고 한다.
죽고나서 법당 앞에 묻었더니 이 소나무가 자라났다고 한다.

이런 아름다운 도량에서는
볕 좋고 경치 좋은 어느 적정처 아란냐 한 곳을 택해
가만히 앉아 몸도 눈도 마음도 좀 쉬면서
아무것도 할 일 없이 그냥 쉬다 가는 것이 좋다.

이런 곳에서는
그야말로 아무 것도 하지 않고
가만히 앉아만 있어도,
혹은 천천히 도량을 거닐기만 하더라도
누구나 저절로 명상의 세계로 빠져들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보이는 모든 것이 그대로 선(禪)적이고 명상적이다.
그저 푹 쉬고 있다보면
이 조화로운 자연의 숨결을 그대로 닮아가지 않겠나.
그것이 명상이고 선이다.

선이나 명상이라는 것이
우리가 생각하는 것처럼 그렇게 어렵고 번잡한 것이 아니다.
우리는 선에 대해서 너무 관념적으로 따지고 드는 경향이 있다.

선을 수행하는 사람은 어떠해야 하고,
어떤 마음을 가져야 하며, 몸가짐은 어떠해야 하고,
어떠한 계율을 지켜나가야 하며,
얼마만큼의 시간을 투자해서 좌선이나 경행을 해야 하고,
어떤 수행법을 택해 몇 시간씩 앉아 있어야 하고,
말로 따져 보자면 한도 끝도 없는
선과 명상의 길이 펼쳐지는 것을 보고는
초심자는 그냥 지레 겁을 먹고 도망치기 일수다.

그러나 선이라는 것은
그러한 방법론이나 이론적인 틀에 가둬두어선 안된다.
어떠한 일정한 틀에 갖힌 것은 선이 아니다.
선은 자유롭다.

26

‘이것이 선이다’라고 정의를 내렸다면
그것은 이미 선이길 포기한 것이다.
선은 그 어떤 틀이나 고정관념으로부터도 자유로울 수 있어야 한다.

너무나도 걸릴 것이 없어서
완전한 자유와 평화가 툭 트여있다.
그러면서도 자유나 평화라는 단어에 조차 갖히지 않는다.

우리의 삶이
번잡하지 않고 푹 쉴 수 있을 때
우리는 누구나 선수행자다.

어디에도 갖혀 있지 않고
활짝 열린 가슴으로
텅 빈 마음으로
그저 다 놓아버릴 수 있었을 때
우리는 비로소 선수행자가 될 수 있다.

이 말은
너무 쉬운 말이다.
아니 너무 쉬운 말이라기 보다는
‘어떻게’ 해야 한다거나 하는 틀이 없는
그저 본연의 텅 빈 자리를 의미하는 표현일 뿐이다.

그러니 얼마나 쉬운가.
‘어떻게’ 하려고 애쓰면 선이 아니다.
그저 다 놓아버렸을 때 선이 된다.

그냥 무심으로
그 어떤 작의나 의도를 다 비웠을 때
참된 선이 드러난다.
완전한 무위의 함이 없는 행이
걸림없이 이어진다.

그러나 이런 것들도 다 말이고 표현일 뿐이다.
그저 푹 쉬고
다 놓으면 된다.

27

그러니 선을 어디에 가두지 말라.
선수행을 하고자 애쓰지 말라.
청정한 선수행자가 되기 위해 ‘어떤’ 방법을 쓰지 말라.
‘선’을 버렸을 때 비로소 ‘선’이 드러날 것이다.

그저 이렇게 아름다운 도량을 거닐으라.
숲 길을 한 발 한 발 거닐으라.
떠오르는 태양을 온몸으로 마주하고
지는 노을을 한마음으로 바라보라.

참된 만행이란 이런 것이다.
선이 곧 만행이다.
그저 새롭고 경이로운 발걸음을 내딛는 것이 만행이다.
거닐음도 없이 거니는 것이 만행인 것이다.
그래서 만행이 곧 수행이다.

이런 도량에 와서는
번잡하게 떠올리지 말고
고민하지 말고
분별하지 말고
그저 이렇게 거닐기만 해도 좋은 것이다.

이 아름다운 도량을 한참동안 거닐었다.
거닐면서 내가 선을 수행 했다기 보다는
청량산의 대자연이 나를 선원에 앉아있게 했다.
이 모든 산 생명들의 명상적인 기운이
아무것도 하지 않은 나를 선으로 안내했다.

한참을 거닐다 보니
시간이 훌쩍 지나가 버렸다.
시간이 너무 늦어
금탑봉의 응진전을 채 다녀오지 못한 것이 작은 아쉬움으로 남는다.
또 하나
안심당에서 차 한 잔 마시지 못한 아쉬움도 함께.

28

그렇지만 아쉬움을 남긴다는 것도 좋은 일이다.
언젠가 다시 오게 될 때 그 때 설레는 마음으로 찾을 수 있으니까.
응진전에서의 풍경이 매우 빼어나다던데
그 모습을 보기 위해서라도 또다시 청량사를 찾게 될 것이다.

내려오는 발길이 경쾌하다.
참 정이 가는 도량.
따뜻한 도량.
Posted by 법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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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유병철 2019.05.30 16:13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하긴 청량산 밑에서 4년을 보냈어도, 정작 아름답다는 생각은 커녕 그저 지방 시골 산 어쩌구 했으니...
    어찌 봉황의 큰 뜻을 알겠느뇨...
    감사합니다. _()()()_


3월은
만물이 생동하는 달이다.

한겨울 침묵을 지키며
저마다 자신의 빛을 안으로 비추던 숲의 생명들이
봄햇살을 맞아 그 침묵을 깨고 피어오르는 계절.

이런 날은 누구나 그러하겠지만
겨울 동안의 오랜 추위와 침묵을 깨고
자연 생명의 리듬에 맞춰
설레는 마음으로 길을 떠나고 싶은 그런 때다.

때때로 이렇게 쉽게 길을 떠날 수 있는 내 처지가
그렇지 못한 많은 이들에게 미안함으로 다가오기도 한다.
떠나고 싶지 않은 사람이 어디 있으랴.

요즘들어 ‘가난한 삶’이라는 것이
하나의 화두처럼 내 삶에 숙제로 다가오면서
이러한 나의 잦은 길 떠남이 가난의 정신에 위배되는 것 같아
스스로에게 몇 번이고 되묻기도 하고
또 길 위에서의 씀씀이를 최소한의 필요로 줄이고자 면밀히 살핀다.

지금은 내가 해야 할 소임이 있다 보니
걸망 하나 둘러 매고
날짜 기약도 없이 가난한 길을 나서지 못하는 형편이지만,
마음속에서는 내 식대로의 진짜 만행을 꿈꾸곤 한다.

일정한 거처가 없는 것이 참된 만행이고,
참된 만행이야말로 모든 수행자의 삶이고 길이며 집이다.
거처가 없다는 것은
어느 한 곳도 머물러 있을 곳이 없다는 말이고,
그것은 꼭 어떤 공간 개념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닌
오래도록 정착하여 마음 둘 곳이 없어야 한다는 말이기도 하다.

마음이 어느 한 곳에 머물러 있게 되면
고여 있는 물이 썩고 말듯
우리 마음도 이내 퇴색되고 그 빛을 잃어가게 마련이다.

머문다는 것은 집착을 의미하고
집착은 곧 괴로움이기 때문이다.
그렇게 보았을 때
참된 만행이라는 것은
괴로움을 떨치기 위한 수행의 과정인 것이다.

몸이 길을 떠나는 것은 작은 만행이다.
마음이 어느 한 곳에 머물지 않을 수 있도록
날마다 아니 매 순간 새로울 수 있도록
마음이 길을 떠나는 것 그것이 참된 만행이다.

나의 길떠남이
그러한 마음의 길이 되고 있는지
오늘도 길 떠남에 앞서 스스로에게 물어본다.

길을 나설 때는 어느정도 어느 곳을 갈 것인지
미리 정해 놓고 가는 것이 대부분이지만
내 여행길은 보통 딱 정해 놓고 가는 길은 아닌 경우가 많다.
그저 발길 닿는 대로, 마음 가는 곳으로
그 때 그 때 가고 싶은 곳으로 가는 쪽이 더 자유롭다.

딱 정해 놓고 그 곳을 가려는 마음이 너무 커버리면,
또 일정별로 코스와 시간을 딱 정해 놓고
그 시간표대로 움직이려고 애쓰다 보면
내가 주체적으로 여행을 하는 것이 아니라
여행 일정에 되려 내가 휘둘리는 일이 생기게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어느 한 곳이 좋으면 그냥 좋은대로
하루 종일 있을 수도 있고,
또 눈에 거슬리고 귀에 거슬리는 풍경이거나
요즘 같아서는 너무 화려하게 치장을 했거나,
자연 그대로를 잃어버리고 너무 개발이 되었다거나 하는 등의 풍경에서는
나도 모르게 빨리 발길을 돌리고 싶어지기도 한다.

다니다 보면 그 명성과 유명세를 듣고 찾아간 곳에서
오히려 실망감을 안고 돌아오는 곳도 있고,
전혀 생각지도 못했던 곳에서
도리어 큰 행복감과 만족을 얻게 되는 곳도 있게 마련이다.

후자의 대표적인 경우가
선암사를 가는 길에 이정표를 보고 문득 들른 경남 사천의 다솔사.

1

아마도 작년 여름인가
도반들과 함께 대흥사 가는 길에 문득 들렀던
월출산 도갑사도 그런 경우에 속한다.

2

이름도 낯설고, 혹시나 싶어 들른 곳에서
생각지 못한 풍경을 만날 때
그 행복감은 한층 배가가 되곤 한다.
물론 상대적으로 큰 기대를 품고 찾아간 도량에서
눈살 찌푸리는 풍경을 만나고 나면
그 실망감 또한 한층 깊은 것은 말할 것도 없다.

어쨌든 봄꽃향기를 느끼기 위한 길 위에서
이름이 마음에 들어 문득 들른 이번 만행의 첫 번째 도량 다솔사에서
생각지 못한 평화로운 봄소식은
이번 여행의 느낌을 더없이 설레게 해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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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선 톨게이트를 벗어나 절을 찾아가는 길에서부터
여기 저기 우거져 있는 대숲의 모습이 인상적이었고,
절 아래 초입에서 일주문까지 오르는 길 또한
오른쪽으로는 시원스레 쭉쭉 뻗어오른 소나무 숲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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왼쪽길로는 마찬가지로 훤칠하게 솟아오른 삼나무 숲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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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량의 첫 느낌을 시원하고 청정하게 만들어 주었다.

그런데 막상 경내를 거닐다 보니
도량의 아기자기한 풍경 또한 마음을 잔뜩 흔들어 놓고 있다.

가만히 보니 이 도량은 대웅전이 있을 자리에
적멸보궁이 들어 서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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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은 5대 적멸보궁 외에도
전국의 곳곳에 부처님 진신사리를 모신 적멸보궁이 많이 있던데
이 곳 다솔사도 적멸보궁으로
법당에는 부처님께서 입적하시는 모습의 열반상이 보이고
그 위로 투명한 유리 사이로 사리탑이 눈에 들어온다.

보궁에서 참배를 하고 보니
여느 적멸보궁처럼 뒤쪽 사리탑이 훤히 내다보이게 창을 달아 놓았지만
부처님을 모시지 않은 다른 보궁과는 다르게
열반상을 하고 계신 와상의 부처님이 모셔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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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멸보궁 뒤쪽에는 사리탑이 있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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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리탑 뒤쪽으로 차밭이 생기롭게 펼쳐져 있다.
차밭이 처음 눈에 들어오자니
우연히 찾아 간 곳에서 어머님을 만난 것처럼
오랜 도반을 만난 것처럼
평안하면서도 그윽한 마음의 향을 느끼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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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고 봤더니
다솔사 또한 빼놓으면 서러울 차의 도량이다.
차에 대한 책을 우리나라에 처음 내 보인
효당스님의 ‘한국의 다도’란 책도 이 도량에서 처음 선보인 것이라고 한다.

다솔사 차는 ‘죽향차’라고 하여 제조방법부터 좀 독특하다.
차잎을 가마솥에서 여덟 번 덖고
옹기에 넣어 일주일간 숙성시킨 뒤
대나무에 넣고 황토로 막아 철판 위에서 아홉 번 굽는다.
또한 덖을 때는 참솔 장작만을 사용하고
장작불을 땐 황토방에서 숙성을 시킨다고 한다.

다솔사 사리탑 뒤쪽으로 펼쳐져 있는 차밭에서 직접 딴 차잎으로
스님과 신도님들께서 이 모든 작업을 수작업으로 제작하기 때문에
그 맛이 더욱 깊고 정성이 담겨 있다고 한다.

이러한 정성이 담기다 보니 많이 만들기는 어려운가 보다.
한 해에 우전과 세작을 다 합쳐도
50g 짜리 2,000통 정도밖에 못 만든다고 하고,
그렇게 만든 차도 거의 전국의 절에 선물로 보내거나
다솔사에서 스님들이 마시다 보니
일반인들이 죽향차를 쉽게 구하지는 못할 수 밖에 없다.

다솔사의 경내 서점에 가야 조금 구할 수 있는데다
그것도 다 팔리면 다음 해를 기다려야 한다니
죽향차 맛을 음미해 보기가 참 어려울 것 같다.

이러한 죽향이 만들어지는 차밭으로 발길을 옮겼다.
차밭 곳곳에는
벌써부터 아기자기 예쁜 야생화들이
앞다투어 피고 있다.
내 봄맞이 만행의 시작을 환하게 열어준 꽃들...

중부지방에서는 아직 봄꽃들을 맞기에는
조금 이른 때에 아랫지방으로 만행을 온 이유도
피어오른 봄꽃들에서 봄소식을 전해듣기 위해서였다.
그런 내 마음을 이 꽃들이 잘 알아준 것인지,
아니면 나의 그런 마음이 다솔사로 이끌어 준 것인지는 잘 모르겠다.

스님들께서 일부러 심으신 것 같다는 착각을 일으킬 정도로
온갖 종류의 야생화들이 너무나도 앙증맞게 피어올랐다.
그야말로 꼭 1년 만에 보는 야생화 군락,
봄꽃들이다.

처음 눈에 들어오는 꽃이 양지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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뱀딸기하고도 똑같이 생겨 구분이 조금 어려운 꽃인데
노오란 꽃잎을 활짝 열어 보여주었을 때
그 기쁨을 어떻게 표현해야 좋을까.

혹시나 싶어 고개를 이리 저리로 돌려 보니
생각지 못했던 온갖 이른 봄꽃들이 활짝 피어올라
내 마음을 온통 물들이고 있다.

양지꽃 옆에서 본 꽃이 제비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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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먼저번 산수유마을에서 보았던 별꽃도 보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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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대나물은 군락을 이루며 지천으로 펼쳐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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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에 보일 듯 말 듯 작디 작은 참꽃마리도 피어올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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윗 지방에서는 한참 냉이를 먹고 있는데 이 곳에서는 냉이꽃도 벌써 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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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다지하며, 민들레도 도량 곳곳에 무리지어 피어있다.

원추리 새순도 연초록이 찐하게 솟아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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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자꽃들도 이제 막 꽃봉오리를 열어재끼고 있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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빠알간 동백도 막바지 생명에 온 힘을 기울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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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야말로 봄이 생동하며 내려앉아 있다.

아마도 이 도량 다솔사에만
이른 봄꽃들이 먼저 내려앉지 않았을까 싶을 만큼
벌써 다솔사는 봄의 한 가운데에 와 있다.

날씨도 조금 전까지 우울하여 비가 올 것만 같더니
거짓말처럼 다솔사에 들어오자마자 햇살을 내비쳐 주고 있다.
적멸보궁 앞에서는 다회가 열려
누구든지 들어 와 다솔사 차 맛 보고 가라고
친절하게 안내까지 해 주고 있다.

그 유명한 죽향차인가 싶어 한 잔을 마셨는데
아쉽게도 보이차지만
이런 만행길에서 차 한 잔 마실 수 있다는 건
참 행복한 인연이고 평화로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차 한 잔 따뜻하게 마시고는
다시 발길을 돌려 선암사로 향한다.

이 이른 봄 선암사를 향하는 이유는
매화의 향이 그리워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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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매화 뿐 아니라 산수유며 동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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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밖의 봄꽃들이 화알짝 수놓은 모습 하며,
다른 절과는 다르게 고색 창연한 도량의 운치가
바라보는 이로 하여금 마음까지 고요하게 해 준다.

매화하면 단연 선암사를 꼽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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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화마을이나 남쪽지방의 다른 사찰들도
이 즈음이면 매화의 향연이 한창일 때이지만
선암사 매화처럼 운치있고
고풍스런 도량과 잘 어우러져 조화를 이루는 곳은 흔치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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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화마을에는 온 산이 다 매화 천지라
그냥 말문이 턱 막힐만큼 우리의 시선을 잡아끌지만
그 많은 매화꽃에도 불구하고
그 향에서는 선암사 매화에 미치지 못한다.

모르긴해도 매화마을에서는 매화꽃 필 무렵의 관광자원과
매화꽃이 지고 난 뒤 매실을 수확해야 하다 보니
거름도 듬뿍 주어야 하고,
비료며 병충해 예방이며 뭐다 뭐다 해서
인위적인 노력이 많이 들어가지 않을 수 없을것이다.

그러다 보면 매화 본연의 향기며 매화 자신의 색과 빛을
많이 잃게 되지 않을까 싶다.
모든 자연이 그렇듯 자연은 자연 그대로 놓아두었을 때
제 빛을 한껏 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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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선암사를 비롯한
남쪽지방 사찰의 매화는 그런 인위적인 노력이
아무래도 덜하지 않을까 싶다.

실제로 지난 주 지리산 화엄사를 들렀을 때
각황전 아래 한 그루 피어난 매화나무에서
얼마나 진한 매화향을 들었었는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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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럴진대 선암사의 매화야 더 말할 나위도 없다.

빛바랜 고풍스런 도량의 모습에
곳곳에 피어오른 매화꽃을 보고 있노라면
그냥 말문이 딱 막혀버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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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량 오른쪽으로 차밭 가는 길목에 펼쳐진
매화꽃 터널은 그야말로 극락세계가 예 아닌가 싶을 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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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곳에서는 촐싹거리며 바삐 구경다닐 것이 아니라
한 발 한 발 차분히 걸으며 마음으로 그 향기를 들을 수 있어야 한다.

때때로 가만히 앉아 두 눈을 감고
가녀리게 내 품으로 안기는 매화향기를
온몸으로 느껴볼 수 있어야 한다.

좌선을 하듯,
호흡을 관해 보듯,
들이고 내는 숨을 바라보며
그 숨을 따라 함께 오고 가는 매화향을
차분한 가슴으로 느낄 수 있어야 한다.

이런 느낌, 이런 풍경, 그리고 이런 향기는
자주 접하는 것이 아니니까.

이러한 아늑한 풍경일수록
어떻게 바라보는가 하는 점이 중요하다.
이런 순간은
내 안의 깊은 울림을 관찰해 볼 수 있는
아주 소중한 기회가 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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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통 사람들은 선암사 매화가 유명하다더라고 하면
매화꽃이 만발할 무렵 바삐 시간을 내서
훌쩍 다녀가곤 한다.

그런데 막상 와서 보고 느끼다 보면
사진에서 본 것보다,
혹은 지난 해 와서 보았던 것 보다
더 별로라거나,
또는 무언가 생각했던 것보다 못하다고 느끼는 수가 많다.

왜 그럴까?
무엇이 좋다고 하면
그것을 보러 가면서 마음속에서는
무언가 감각적으로 강렬한 느낌이나 자극을 바라게 마련이다.

그런데 막상 딱 가서 보면
분명 좋기는 좋고, 아름답기는 아름다운데
육근을 자극할만한 그 어떤 감각적이라거나 자극적인 느낌이 아니거든.
그러다 보니 막상 가서는 여기저기 찾느라고
바삐 걷고 뛰다가
혹은 사진 몇 장 펑펑 찍다가 그냥 뒤돌아 오곤 하는 것이다.

그것은 왜 그렇겠는가.
정말 좋은 느낌은
감각적으로 강렬하게 다가오거나 하는
자극적인 느낌이 아니다.

오히려 자극적이고 아주 감각적인 좋은 느낌은
금새 육근을 마비시키거나 싫증나게 만든다.
금새 끓어올랐다가 금새 식게 만들고 만다.

그 때 뿐이지
그 때가 지나고 나면 그 여운이
향기로운 향내가 되고,
은은한 종소리가 되어 메아리 치지 못한다.

그러나 정말 좋은 느낌은
은은하고
가녀리며
차분하면서도 뼛속 깊은 곳에까지 울리면서
나도 모르는 순간에 알게 모르게 다가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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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면서 훗날 문득 그 때를 회상하게 되었을 때
아련함과 설레임으로
내 가슴을 한껏 물들이면서 수를 놓곤 한다.

그래서 내 생각엔
정말 좋은 느낌, 좋은 곳은
그 때 보다도
시간이 지나면서
내 마음을 더욱 훈훈하게 해 주고
그립게 해 주는 그런 곳이 아닌가 싶다.

조용하고 고요한 숲 속에서
끼륵끼륵 풀벌레 울음소리를 들을 때의 느낌은
웅웅거리는 선술집이나 노래방 같은 데서
요란하게 울려대는 노랫소리와 견줄 수 없는 것과 같다.

후자는 그 순간 감각적이고 자극적이지만
향기가 없고 여운이 없다.
그러나 전자의 그것은
당장에 감각적이고 자극적이지는 않더라도
육근을 조용히 관하면서
그에 비친 대상을 차분히 바라보고 있노라면
나도 모르는 사이에
내 안 깊은 곳에까지 은은하지만 경이로운 감성을 자아낸다.

그래서 매화꽃 한창인 선암사를 걸을 때에도
그 어떤 감각적인 바램은 그냥 편안히 놓아버리고
그저 온몸과 온몸의 감각을 내맡기고
편안하게 느끼며 천천히 걸을 수 있어야 하는 것이다.

이렇듯 한동안
고요한 마음으로
도량을 거닐다 보면
내 마음은 어느덧 편안하게 쉬고 있다.

마음을 쉰다는 것이야말로
수행자의 가장 중요한 일과이다.

수행 수행 하고 고집하면서
수행을 잘 하려고 많이들 애를 쓰는데,
사실은 수행 잘 하려고 애쓰는 것이 수행이 아니다.
그저 잘 쉬면 그것이 수행이다.

잘 쉴 줄 알아야 하고,
참된 휴식을 얻을 줄 알아야 하는 것이다.
이렇듯 도량은 모든 이들을 쉬게 해 주는 곳이다.
영혼에 맑은 휴식을 주는 것
그것이야말로 도량의 참된 기능이다.
그런 점에서 매화꽃 필 무렵 선암사의 품은
어머님 품처럼이나 포근하고 편안하다.

이렇듯 도량은
모든 사람을 품어주는 곳이다.
스님이든 신도든,
불교신자든 타종교 신자든,
괴로운 사람이든 즐거운 사람이든,
나쁜 사람이든 좋은 사람이든,
따뜻한 말과 생각과 행동으로
일체 모든 이들을 그윽하게 품어주는 것이
도량의 본연의 기능이다.

도량 한 쪽에서는
스님들의 운력이 한창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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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옆으로
사연 많은 이들의 마음 속 바램들이
기와에 고스란히
아로 새겨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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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암사도 이제 얼마 안 있으면
차 계절이 돌아오고,
차 따는 스님들의 분주함이
이 도량을 한층 생기있게 만들어 줄 것이다.

선암사 차 맛은 지허스님 덕분에 보긴 했지만
차 한 통 주문을 해야지 하고는
작년에 못 해 놓았던 것이 후회가 되어
올 해에는 꼭 한 통 주문을 해야지 싶다.

어느덧 산그림자가 도량을 뒤덮고 있다.
대웅전 그림자가 길게 늘어졌다.
도량은 이제 더 깊은 침묵으로 서서히 잠이 들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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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어둠을 뒤로 하며
터벅 터벅 걸어 나오는 발걸음이 가벼웁다.
Posted by 법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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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BlogIcon 이시환 2015.02.23 11:52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아!... 흠~^^ 덕분에 좋은 만행이었습니다.^^
    _()_
    다솔사^^ 선암사^^


1

봄이 오는 소식이
이젠 재법 바람결에서도 느껴진다.

벌써 지난 달부터인가
봄꽃하며 봄나물 또 봄바람소식,
숲속으로부터 소리없는 소리로 봄소식을 듣는다 했더니,
지난 주 금요일에
서울 용산에 원광사를 갔다가
법당 앞 뜰에 거짓말처럼 화사하게 피어오른 매화꽃을 보았다.

저쪽 남쪽지방 지리산 아래 섬진강을 따라
매화꽃이 이제 막 시작이란 얘기를 얼핏 들었는데
거짓말이지 거짓말이지
봄꽃소식은 아랫지방부터 슬그머니 올라오는 맛이라는데
아랫지방에서도 꽃망울을 막 틔운 꽃이
이 텁텁한 서울 땅에서 이렇게 아름다운 모습으로 피어오르다니...

뜻하지 않던 행복감에
내 안에서도 따뜻한 봄바람에 매화꽃 한송이 움트는 듯 하다.

동백과 함께 겨울 잔설을 뚫고 솟아오르는 모습이
매화의 기상을 더없이 성성하게 해 준다고 하던데,
그야말로 지난 주 폭설 이후로
봄이 좀 늦으려나 싶은 염려는 기우였구나 싶다.

한동안 매화꽃 앞에 서서,
그냥 그냥 매화꽃을 마주하고 있었다.

활짝 핀 매화꽃 사이로
아직은 몽우리를 안으로 안으로 살찌우며
화알짝 필 날을 기다리는 꽃봉우리
다음 주 쯤이면 그야말로 매화가 만발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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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지스님 말씀이
지금부터 한 15일 정도가 매화꽃차가 한창이라며
그 예쁜 매화꽃을 따다가 차를 우려 마시는
그 운치를 말씀하시는데
아이고 참 가슴이 얼마나 시려오던지...

이런 것이 우리 삶의 참 행복이 아니겠나
싶은 마음이 순간 새삼스레 스친다.

사람들은 좀 더 잘 살아보겠다고,
좀 더 많은 돈 벌어 보겠다고,
좀 더 좋은 차에, 좋은 집에, 좋은 직장에, 좋은 학벌에
수많이 찾아 나서고 또 헤매고 그러지만
정작 그런 욕망과 욕망의 성취에서 오는 행복을 행복이라 할 수 있을까.

그런 건 그냥 들뜸일 것 같다.
우리가 저 한 송이 꽃이 피어오를 때
우리 안의 뜰을 가만히 살펴보게 된다면
바로 그 때 우리 안에서 꽃봉우리가 움트면서
그다지 들뜬다거나,
그렇게 오감으로 느낄 만큼의 행복감은 아닐지라도
은은하게 풍겨오는 꽃내음 같은 참행복을 누구라도 느낄 수 있는 것이다.

그런 행복은 너무 작기도 하고,
너무 미미하여 좀처럼 보여지지 않을지라도,
그것이 우리 삶의 가장 큰 행복 가운데 하나이다.

그 행복을 느낄 수 있는 사람만이
삶이 무엇인지, 인생이 무엇인지 느낄 수 있지 않을까.
내 인생의 행복은 이렇게 온다.

마음 속에 너무 들어 찬 게 많고,
너무 이룰 것이 많고,
너무 복잡한 일이 많으며,
너무 욕망과 집착이 많으면
감각적이고 들뜨는 행복만 보이고 찾게 되지
이런 행복감을 감히 느껴볼 수 없지만,
그냥 단순하게 비우고 살면
이런 행복감이 주는 그 평화의 참의미를 알 것 같다.

원광사 앞 뜰에 피어난 매화를 뒤로하며
돌아오는 길이 얼마나 많은 아쉬움으로 남았는지.
돌아오는 내내 눈앞에 꽃망울이 아른거리고
내 가슴은 봄의 생기로움으로 가득했다.

일요일 법회 때에도
매화 소식을 어린애처럼 전해주고 나서는
그 다음날
가슴 속에 담아둔 매화향의 그리움을 따라
지리산 자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지리산은 언제 가더라도
어머님 품 속 같은 숭고함으로
내 가슴을 아련하게 파고드는 산이다.

지난 해에도, 또 그지난 해에도
지리산 자락 산수유 소식이며 매화 소식
또 쌍계사 벚꽃 소식을 들으면서
내일 내일 미루다가 결국엔 못 가고 말았던 터라
미루고 미루다가 올해도 또 한 해를 넘길까 싶어 바로 길을 나섰다.

남원에서 구례읍 쪽으로 가다보면
온통 길 주위가 노오란 산수유로 가득하다.
산에 피는 생강나무하고 비슷하게 생겼는데,
보통 이렇게 산아래마을에는 산수유가 피고,
산에는 생강나무가 핀다고 언젠가 들은 적이 있다.

3

이 곳 지리산 산수유마을 말고도
경기도 이천 백사면에 산수유마을이 또 있다고 하니
4월 초 쯤에 서울 사시는 법우님들은
꼭 한번 찾아가 보시길...
특히 이천 산수유는 원적산 기슭 도립리 마을 끝자락
산기슭의 산수유 군락이 특히 아름답다고 한다.

아마도 산수유는 이번 주 보다는
다음 주(3월 넷째주) 쯤이 만개할 때라고 하지만,
이렇게 약간 덜 피었을 때
막 아름다운 꽃송이를 피우기 위해 마음을 다해
봄을 맞이할 때
그 첫 생기로움의 모습 또한 그 운치가 남다르다.

4

새봄을 가장 먼저 알리는 꽃으로는
단연 매화고 또 산수유다.
동백이 봄꽃의 강렬한 아름다움을 품고 있다고는 하지만
동백은 봄꽃이기도 하지만
오히려 겨울 꽃이라고 부르는 편이 좋을 지도 모른다.

지난 1월 제주도에 갔을 때,
우리 사는 동네에는 옴짝달싹 할 수 없는 추위며 눈이
몇 십년 만인지, 백년 만에 왔다는 소식에 움츠렸던 마음을
1월의 동백이 성스러운 기연으로 녹여 주었던 것을 기억하기 때문이다.

동백이 활짝 피어오른 때에
그 위로 하이얀 눈이 살짝 내려앉은 모습은
아직 보지는 못하였지만
설레는 마음으로 마음 속에서 봄이오는 마음으로 품고 있다.

산수유와 매화는
그 색이며 생김새가 전혀 다르지만
똑같이 이른 봄에 봄소식을 알리는 전령사라는 점도 그렇고,
잎이 피기 전에 먼저 꽃을 틔운다는 점도 닮은꼴이다.

5

잎을 다 떨구고 한겨울을 보내며
그 위에 눈꽃을 피워올리던 가지들이
눈꽃이 녹아내리는 소식과 함께
잎을 기다릴 것도 없이,
온연한 봄을 기다릴 것도 없이
불쑥 그 천연한 꽃들을 피워내는 것을 보면
이 대자연의 나툼이 그야말로 관음보살의 화신일거란 생각에 수긍이 간다.

6

대자연의 모습은
그대로 부처님의 나툼이고 관음의 나툼이며
하느님의 나툼이고
불성이고 신성이 그대로 꽃을 피우는 신성한 연주다.

산수유 가득한 봄길을 걷고 있자니
내 생명의 봄이
행복한 몸짓으로 나를 부르는 듯 하다.

지리산 아랫마을
사람 손길로 덜 더렵혀진
고색이 창연한 가파른 계곡, 개울 물소리,
오랜 집 몇 채, 나른한 봄 햇살을 쬐며 집앞에 나앉은 할머님 모습.
그리고 그 계곡을 노오랗게 수놓고 있는 산수유꽃의 향연.

산수유마을의 절정은 아무래도
상위마을 묘봉골 개울 좌우로 수채화처럼 펼쳐진 산수유와
맑게 흐르는 청아한 물소리에 있다.
개울가를 걷고 있자니
지난 해 봄에나 보았던 또다른 봄꽃들이 손짓을 한다.

꼭 용이 하품을 하는 것 같은 모양을 한 광대나물도
한겨울 긴긴 겨울잠을 자고 일어나 하품을 하는 듯 눈길을 끌고,

7

봄에 길가에나 밭둑에서 많이 보았던
손톱보다 작은 크기의 앙증맞은 별꽃도 꼭 일년 만이다.

8

역시 남쪽 지방엔 봄이 빠르게 온다.

노오란 마을
노오란 정겨운 나무 사이를 걷고 있자니,
어릴 적 유치원복 입고 성모유치원 다니면서
신부님 수녀님과 뛰어놀던 기억이 어름어름 떠오른다.

점심공양 맛있게 먹고나서
매화마을 찾아 가는 길.
대학 때 산을 올랐다가 내려오면서 잠시 들렀던
쌍계사엘 잠시 들렀다.

산수유마을에서 구례읍 쪽으로 가다가
하동쪽으로 가는 19번 도로를 옮겨 타고 달리면
왼쪽으로는 지리산자락의 아름다움이
오른쪽으로는 섬진강의 아련함에 매료되지 않을 수 없다.

화엄사 천은사 이정표를 지나
연곡사 피아골 이정표도 지나
쌍계사 즈음에 와서는 도무지 그냥 발을 옮길 수가 없었다.

19번 국도에서 쌍계사 이정표를 보고
지리산 쪽으로 들어오다보면
이제 여기서부터 벚꽃의 화사한 터널이 이어지는데,
물론 지금은 3월 중순이라 벚꽃까지 보기에는 아직 이르다.

그렇더라도 아쉬워 할 것은 전혀 없다.
내가 참 좋아하는 곳이 또 이곳인데,
이 계곡은 좌우측 가파른 산비탈로
야생의 얕은 차나무가 그야말로
다향의 그윽함으로 배어나오는 곳이다.

9

차나무며 차나무 사이 사이에 드문 드문 피어오른 매화꽃에
길 곳곳에 운치있게 지어진 찻집들까지
그리고 물소리 봄바람소리까지 곁들여진
가만히 생각만 해도 입가에 미소가 띄어지는 부처님 품속이다.

아직 차를 딸 때는 많이 이르다는 것이 일반적일 터인데
차밭 한가운데로 차따는 아낙 둘이서
올 해의 첫 차를 우리기 위해 그 여리디 여린 차잎을 따고 있다.
이제 한 달여가 지나면 우전에 쓸 찻잎을 따는 손길이
많이 빨라지고 더없이 정성스러워질 것이다.

그 때가 되면
이 계곡은 그야말로 물이 오를대로 오른 초록의 숨결로 고동을 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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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이 되어 산빛이 초록으로 물든다는 표현을
난 처음 이 곳에서 새삼 찐하게 느끼게 되었다고 하면
곡우 전후 이 곳의 초록빛 아름다움이 조금은 상상이 가려나.

그런 곳이다.
차 계절이 되면 이 차 고장의 풍경은
더없는 초록의 아름다움을 선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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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좋은 곳, 맑은 곳에
그 차향이며, 벚꽃길, 매화향과 지리산의 이름에
견주어도 전혀 손색이 없는 도량
쌍계사가 자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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좁은 계곡 다리를 건너 터벅터벅 걸어오르다 보면
차밭의 풍경도 풍경이지만
육중한 몸매를 자랑하는 굴참나무 몇 그루가 먼저 눈에 들어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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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주문에서부터 펼쳐지는 삼나무의 쭉쭉뻗어 오른 기상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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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측 선방쪽 대숲의 청청한 기운도 그렇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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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량 곳곳에 아기자기 심어 놓은 온갖 꽃과 나무가
고풍스런 도량과 참 잘 어우러져 있다.

도량을 걷는 마음이
꿈결 속을 거니는 듯
나지막한 설렘으로 가득하다.
도량 곳곳에 피어오른 꽃들도 참 대견하고...

범종루 앞에 한 그루 화사히 피어오른 매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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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웅전 앞에 강렬하게 피어오른 동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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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상전 뒤로 한 그루 풍성하게 피어있는 산수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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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방 뒤안에는 노오란 산수유와 하이얀 매화 두 그루가
오랜 연인처럼 혹은 깊은 도반처럼 그렇게 조화롭게 서 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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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량 곳곳에 하얀 백의관음 매화꽃이 사뿐히 내려앉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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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 가는 줄 모르고 도량을 거닐다 보니
벌써 늬엇늬엇 해가 서쪽으로 기울고 있다.
그제서야 아차 싶은 마음에 매화마을 생각이 났다.

섬진강을 따라 내려가는데
좌우로 산비탈을 수놓고 있는 차나무며 매화꽃들이
서산으로 지는 저녁 노을을 받아
더욱 황홀경으로 물들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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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움에 취해 한참을 내려가는데
서쪽 산으로 떨어지는 저녁노을을 받아
반짝 반짝 빛나는 섬진강 물결 위로 배 한 척 지난다.

매화마을에 막 도착하니
마을 전체가 떠들썩 하고
평일이고 저녁인데도 많은 사람들로 가득하다.
알고 봤더니 매화축제를 한다고
이번 주가 한참 매화의 절정이라고 한다.

섬진강이 유유히 흐르고
산과 마을 전체가 온통 하이얀 매화꽃으로 가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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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말을 듣고 머리 속으로 상상만 해 가지고는
도무지 이런 풍경을 연출할 수 없을 것 같다.

3월의 지리산은 도무지 알 수가 없다.
이러니 내 마음이
지리산에 흠뻑 빠지지 않을 수가 없는 것도 당연한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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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화꽃으로 가득하다는 표현보다는
하늘나라에서 매화의 신들이 잠시 내려앉은 듯,
어쩌면 2,500여 년 전
부처님 회상에서 1,250인의 부처님 제자들과
온갖 천신들이 법석을 베풀었던
그런 회상이 흡사 이렇게 아름다웠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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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화마을을 훤히 바라보며 산 위쪽으로 걸어오르다 보면
매화와 매화열매인 매실을 잘 담궈 놓은 장독들이
그 뒤로 매화꽃들과 잘 조화를 이루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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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쪽 곁에 외떨어진 장독과 그 옆의 작은 매화나무도
어진 풍경을 연출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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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참을 그러고 있는데 나도 모르게
매화마을 이 성연한 하늘 위로
어둠이 내려앉고 있다.

꿈결 속을 거닌 듯,
부처님 회상에 나들이를 다녀온 듯,
노오란 또 하이얀 봄꽃과 함께 한 하루가
짠한 그리움으로 스치운다.
Posted by 법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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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청우 2014.03.28 12:37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스님어 순례기를 읽으니 제가 스님의 마음이되어
    자연의 아름다움과 웅장함에 같이 감탄하고 느끼게되네요
    감동입니다

  2. BlogIcon 환희심 2015.03.08 08:50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집에 가만히 앉아서 새 봄의 예쁜 얼굴을 ㅂ잘 봤습니다 매주 화요일 가는 원광사를 이 번주에 못 갔더니 법사님께서 봄소식을 주시네요 해마다 예쁜 얼굴로 반가워 해주는 고마운 꽃이랍니 한송이 꽃을 보며 셔터를 누르시는 법사님의 아이처럼 좋아하시는 모습을 생각하며 한번 웃어봅니다 아래녁에 산수유와 매화꽃 장독대 옆에 얌전히 핀 매화에 한참 눈이갔습니다
    서울에선 이른 봄여행 보내주셔서 잘 다녀왔습니다 오늘 법회하시느라 바쁘시겠네요 수고하시고 성불하세요
    환희심 올림

  3. BlogIcon 진실행 2015.03.08 14:40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샛노랑, 초록. 화사한 흰색, 초록으로 전해주신 봄그림들이 너무 아름답습니다! 봄이 오는 풍경들 잘감상하고 갑니다. 움츠렸던 몸과 마음도 기지개를 켜고 봄을 들여야 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