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쨍!’하는 적연부동의 순간 – 안나푸르나 순례(5)
법상스님의 목탁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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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말라야 명상순례

‘쨍!’하는 적연부동의 순간 – 안나푸르나 순례(5)

목탁 소리 2012. 6. 30. 16:54

 

사우스와 히운추리의 일출

이른 새벽, 아직 날이 채 밝기도 전에 눈이 뜨인다. 눈을 뜨자마자 깜짝 놀란 사람처럼 앞마당으로 뛰어 나간다. 여전히 새벽별이 하늘을 수놓고 있지만 동녘하늘이 깨어남과 함께 별은 그 힘을 잃어가고 있다. 어스름한 아침, 어둔 이불을 걷어치우는 촘롱 마을, 그 위로 우뚝 선 안나푸르나 사우스(Annapurna South, 7219m)와 히운추리(Hiunchuli, 6441m)의 기상이 초연하다.

시간은 정지된 듯 정지된 듯 그러나 침묵의 새벽을 뚫고 쏜살같이 흐른다. 어느덧 창백하던 새벽빛이 황금빛으로 바뀌며 사우스와 히운추리 설봉의 저 위쪽부터 서치라이트를 비추듯 빛이 비쳐 내려오고 있다.

사우스와 히운추리가 금빛 옷을 차려입고 화려한 대자연의 공연을 벌이는 동안 마차푸차레(Machapuchare, 6501m)와 안나푸르나 3봉(Annapurna III, 7555m)은 저만치 떨어진 발치에서 해끔한 눈을 뒤집어쓰고 즐거운 관객이 된 양 두 봉우리의 향연을 지켜보고 있다. 촘롱에서는 새벽 시간의 주인공은 사우스와 히운추리의 장엄한 일출이고, 저녁 시간의 주인공이 바로 마차푸차레와 안나푸르나 3봉의 처연한 일몰이다.

해질 무렵이 되면 하루 종일 희뿌옇던 두 봉우리가 저녁놀과 함께 장결한 빛의 연주를 시작하는 것이다. 물론 두 공연 모두 클라이막스는 잠깐이다. 한 5분에서 10분 정도 봉우리를 붉게 달구며 태양과의 합주를 이루어내고는 이윽고 더 밝아지거나 더 어두워지곤 한다.

안나푸르나 사우스의 일출을 이곳에서처럼 가깝고도 명정하게 볼 수 있는 곳은 없지 싶다. 산정의 봉우리 빛깔이 비스듬히 비치는 첫 햇살을 받아 황금빛으로 붉게 타오르더니 점차 그 빛을 산 아래 몸뚱이 전체로 흩뿌리며 절정의 빛감을 대지와 나눈다. 봉우리의 빛이 흐려지는 대신 촘롱 전체가 밝아오기 시작한다. 첫 새벽의 빛은 화려하지만 좁고, 이윽고 퍼져나가 산 전체를 감싸는 빛은 수수하지만 전체 산맥을 고루 비춘다.

이마 위로 떨어지는 햇살이 따갑다. 눈을 제대로 뜰 수 없어 햇발에 등을 돌린다. 산과 나무와 집과 꽃 그리고 이름 모를 야생초들이 햇귀의 축복을 받아 하늘거리며 속삭인다.

일찍 아침을 챙겨먹고는 길을 나선다. 사우스 봉우리는 여전히 당당하다. 산등성을 따라 길게 늘어 선 게스트 하우스, 표연히 나부끼는 룽다(Lungda)와 타르초(Tharchog), 그리고 반짝이는 햇살과 영봉이 만들어내는 풍경이 한 폭의 그림을 이룬다. 계단을 걸어 내려가다 말고 이 한 자락 그림 풍경에 넋을 잃고 서 있다. 길을 걷다 아쉬워 자꾸만 뒤를 돌아보며 하릴없이 이 수윤한 풍경에 잠긴다.

이 자체만으로도 이미 이 곳은 경전이요 진리가 숨 쉬는 법신(法身) 그대로다. 거기에 타르초의 성성한 수트라 한 구절이 여린 바람에 흩날려 이 대지 위로 법을 설하고 있는 풍경이란!

깊고 중후한 목소리의 노스님 염불소리가 귓전을 씻고 지나가는 듯도 하고, 가난한 시골 교회에서 흘러나오는 작은 성가대의 연주 소리가 들리는 듯도 하다. 이 오랜 대지와 산이 만들어내는 진리의 풍경소리가 어찌 인간의 그것에 미치지 못할 것인가.

내리쬐는 아침 햇발 사이사이로 따스한 법비(法雨)가 내리는 듯 하다. 산봉우리에서부터 능사면 전체로 퍼져나간 촘롱의 계단을 오랜 마을길을 따라 미끄러지듯 걸어내려 간다. 계단 끝에는 사우스에서부터 내려왔을 눈 녹은 시원한 계곡물 줄기가 흐르고 그 위로 다리가 놓여 있다. 다리를 건너면 지금까지 내려 온 만큼 다시 걸어 올라가야 한다.

 

가을, 산에는 꽃이 피네

천천히 아주 천천히 햇살을 머금고 있는 꽃들과 인사를 나누며 산을 오른다. 꽃들이 참 많다. 지난 주 막 트레킹을 마치고 돌아 온 한 여행자에게 설레는 마음으로

"산에 가면 지금쯤 꽃들도 많겠지요?"

하고 물었더니 돌아오는 대답이

"꽃요? 못봤는데요. 요즘 산에는 꽃 없어요."

였다.

그러면 지금 내 눈 앞에서 이렇게 선하디 선한 모습으로 내 눈길을 반겨주는 이들은 뭐란 말인가! 분명 지천으로 피어난 꽃을 바라 볼 마음의 빈 공간이 없던 거지 꽃이 없던 것은 아니다.

우리 눈이라는 것이 그렇다. 모든 있는 그대로의 존재를 있는 그대로 바라보지 못하고, 내 관심사만, 내 마음 속에 혹은 기억이나 업식(業識)에 담겨 있던 것들만을 선택해서 볼 뿐이다. 무언가를 바라볼 때 우리 눈과 마음은 자동적으로 분별하고 취사선택한다. 내 관심사가 아닌 것은 철저히 배제되고 소외된 채. 그런 바라봄에서는 지혜가 움트지도 않으며 만물에 대한 평등한 사랑도 깃들 수 없게 만든다.

그 시선 자체가 벌써 세상을 차별하고 나누는 것이다. 카스트만 카스트가 아니라 이런 마음의 창을 닫아버린 모든 시선이 바로 카스트다. 카스트는 겉으로 드러난 차별이다 보니 오히려 그것을 바꾸려는 의지가 있고 잘못된 것이라는 앎이라도 있지만, 우리 시선에 깃든 이 엄청난 차별심은 아마도 거의 인식하지 못한 채 지나쳐 버리기 쉽다.

눈을 통해 들어오는 마음의 창을 활짝 열어두라. 닫지 말고 모든 것이, 모든 사물이 아무런 제한 없이 들어올 수 있도록 하라. 있는 그대로를 있는 그대로 보는 것, 이것이야말로 모든 지혜의 길이며, 모든 성자들의 길이다. 왜곡과 색안경과 나만의 필터에 거르지 않은 순수한 야생의 자연 그대로의 것, 날 것, 그것을 있는 그대로 바라볼 때, 우리 삶에는 경이로운 변화와 삶의 진정한 진보가 시작된다. 바로 그 때, 생생한 지혜가 스스로 우리를 찾아온다. 아니 찾아 온다기 보다 그동안 꽉 닫아 놓았던 마음의 문을 활짝 열어둠으로써 그동안 들어오고 싶어도 들어오지 못하던 지혜, 사랑, 깨달음이라는 영적인 것들이 비로소 들어올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삶에서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어쩌면 이것뿐인지도 모른다. 이 세상을 향해 나를 완전히 열어두고 모든 것이 있는 그대로 내 존재 위를 오고 가도록 내버려 두되, 무엇이 오고 가는지 차별 없이 다만 지켜보는 것!

한참을 걷다 잠시 게스트 하우스 식당에서 쉬며 점심으로 색다른 메뉴를 시켜 본다. 맛있게 먹고는 잠시 쉬면서 한숨을 돌린다.

 

'쨍!' 하고 빛나는 적연부동(寂然不動)의 순간

아름다운 꽃들의 향연은 길을 걷는 내내 계속된다. 문득 고개를 들어 바라본 꽃한송이에서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싱그러운 생명력을 본 적이 있는가! 날갯짓하는 자유로운 비둘기의 비상에서, 도도하게 흐르는 강줄기의 거센 웅고함 속에서, 우레와 같은 거친 침묵으로 거기 서 있는 저 희말라야 설산 봉우리 속에서, 때로는 습한 계곡의 작은 이끼들 혹은 이름 모를 풀들의 가녀린 손짓 속에서, 간드룽을 지나며 만난 갓 두 살 바기 아기의 눈빛 속에서, 우리는 때때로 일상을 벗어난, 세속을 넘어서는, 말로 도저히 표현될 수 없는 '쨍!' 하고 빛나는 적연부동(寂然不動)의 순간을 만나곤 한다. 이런 순간의 침묵의 지켜봄이야말로 우리의 거친 속 뜰에 신의 메시지를 전해주며, 붓다의 지혜를, 생기로운 생명력을 불어넣어 준다.

어제와는 달리 오늘은 계속해서 숲길이 이어진다. 원시의, 몇 천 년을 인간의 인위적 손길이 깃들지 않았을 법한 순수 천연의 야생 숲들이 눈길 가는 곳마다 펼쳐진다. 야생 원숭이들이 이 나무 저 나무를 질주하고, 나무 등걸마다 천년만년 세월을 버텨 온 이끼들로 고색창연한 옷을 뽐내고 있다. 말 그대로 듣기만 했던 원시 밀림이 오롯하게 펼쳐진다.

이곳부터는 사원이 있는 지역이라 일체 고기나 생선 종류는 출입이 금지되어 있으며, 트레커들에게도 정숙과 경건을 요구한다는 내용의 푯말이 걷는 이의 마음을 숙연하게 만든다.

사실 사원이 있든 없든 이 자연 그대로가 사원이요, 이 야생을 흐르는 우리 존재 자체가 이미 거룩한 법당이다. 숲은 모든 존재를 거룩하게 씻어주는 맑은 옹달샘과도 같다. 콘크리트 빌딩과 도시 속에서 매일같이 생존투쟁을 벌이며 싸우고, 욕하며, 사로 먼저 가려고, 더 많이 가져가려고, 더 높이 오르려고 아웅다웅하던 사람들도 도시를 벗어나 청량한 숲에 깃드는 순간 저절로 자연의 마음을 닮게 된다. 대자연이 신성한 갠지즈 강물이 되어 길을 걷는 이를 목욕시키는 것이다. 억겁의 묵은 때를 벗겨내듯, 오랜 업장의 켜켜한 때까지 활활발발하게 벗겨내 주는 것이다. 어찌 자연을 닮지 않을 수 있겠는가.

 

히말라야 생수와 산딸기 천연간식

뱀부(Bamboo, 2310m)에서 점심을 먹고 잠시 쉬다가 다시 걷는다. 하루 종일 꾸준한 오르막이 계속되지만 오히려 시간 가는 줄 모르고 걷기만 한다. 걷기에 집중이 되다 보면 시간의 흐름을 잊는다. 어떻게 시간이 가는 줄도 모르고, 어떻게 저 길들을 올라왔는지도 모르는 사이에 훌쩍 솟구친 듯 지도를 보면 날아 와 있다.

뱀부에서 점심을 먹고 물통에 물을 사 온다는 것이 그만 깜빡 하고 말았다. 생수를 사 먹을 수도 있지만 생수 값은 고도가 올라갈수록 값이 훌쩍 따라 올라간다. 그래서 생수 대신 사 먹을 수 있는 물이 산중을 흐르는 계곡물을 끓여서 파는 물인데, 생수 값에 비하면 아주 저렴한 편이다. 그런데 깜빡 하고 그 물조차 사오지 못한 것이다.

계곡을 따라 걷는 코스가 계속되거나, 계곡 한쪽 옆에서 폭포수처럼 뚝 떨어지는 작은 지류의 계곡물들이 드문드문 보이면서 목마름을 유혹하고 있다. 여행자들 말에 이곳의 계곡물은 그냥 막 먹으면 안 된다고 했던 말이 떠오른다. 그런데 현지 포터들은 아무런 거리낌 없이 현지의 계곡물을 벌컥벌컥 마시면서도 아무런 탈이 없다. 어떤 포터들은, 아니 어쩌면 대부분의 포터들이 아예 물통을 가져오지도 않는 경우가 많다. 계곡을 따라 오르면서 물을 먹고 싶으면 그저 계곡물을 마시면 되기 때문이다. 물통이 따로 필요가 없는 것이다. 그런데 왜 여행자들만 물통이 필요한가!

내 목마름 탓도 있겠으나, 가만 생각해 보니 이 물이 이 울울창창한 밀림과도 같은 숲을 뚫고 흐르는 물이 아니던가. 숲을 통과한 물이란 그 어떤 성능 좋은 정수기 보다도 더 좋은 대자연의 필터로 조화롭게 정제된 생명수일 터다. 이런 생각이 들자 현지의 어떤 것도 먹어서는 안 되고, 마셔서도 안 된다고 했던 여행자의 말이 기우처럼 들렸다.

생각이 많은 것 보다는 저지르는 것이 많아야 한다. 짐꾼들이 쉬고 있는 계곡 곁에서 함께 쉬다가 그들을 따라 몸을 납작 엎드린 채 물을 벌컥벌컥 시원하게 들이마시고, 물통에 물까지 채워 둔다. 물 마시는 걸 본 영국인 여행자 한 사람이 엄지 손가락을 치켜 세우며 활짝 웃더니, '저럴 수도 있구나' 하는 표정으로 자신도 아예 얼굴을 계곡물에 푹 파묻고 입을 뾰족하게 내밀어서는 후루룩 하고 물을 들이 마시더니, 이윽고 "카~" 하는 소리와 함께 다시 한번 엄지 손가락을 치켜든다.

시원스레 불을 마시고, 또 채워 넣고 길을 걷다 보니 이제는 배가 고파온다. 그런데 이게 웬 일! 어느 때 부터인가 길 곁에 빠알간 산딸기가 토실토실 익어 있는 게 아닌가. 분명 한국에서 보아오던, 따 먹었던 바로 그 산딸기가 맞다. 그런데 더 신기한 것은 이 맛있는 산딸기가 이렇게 바로 길가에 풍요하게 열려 있는데 아무도 따 먹는 사람이 없다는 점이다. 심지어 현지인 포터들도 이 산딸기를 따 먹지 않는다. 순간 무언가 내막이 있지 않을까, 먹으면 안 되는 이유라도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스쳐지나가지만 기본 상식을 따르기로 한다. 분명 한국에서의 산딸기가 맞는데다가, 가시가 있는 나무의 열매는 백이면 백 독이 들어 있지 않은 열매다.

이럴 때는 남들이 따 먹어 주지 않은 것이 너무나 고맙다. 혼자서 쉬엄 쉬엄 길을 걸으며 한 두 발자국 길에서 더 들어간 쪽에 풍성하게 열려 있는 산딸기를 따 먹는다. 한참의 시간이 흘렀는데 계속해서 길가에는 산딸기가 멈추지를 않는다. 오후 한 때의 간식으로는 그야말로 제격이 아닐 수 없다.

 

혼자 걷기, 생각과 함께 걷기

쉬엄 쉬엄 걸어 오르는데도 생각보다 속도가 빠르다. 많이 가야 희말라야 롯지(Himalaya, 2,870m) 쯤에서 하루를 묵지 않겠나 하던 계획이 저절로 바뀌면서 희말라야 롯지 위쪽 3,200고지 데우랄리(Deurali, 3,200m)까지 내친김에 오르기로 한다.

3,000고지부터 본격적인 고산병이 시작된다고 하니 2,800고지인 희말라야 롯지보다는 오히려 3,000고지를 조금 웃도는 데우랄리에서의 1박이 더 나을지도 모르겠다는 계산도 깔려 있다. 그래야 3,200고지에서 하룻밤을 보내며 고산병 증세를 하루쯤 묵혀둘 수 있지 않을까 싶은 생각이다.

그러고 보니 생각이 많다. 산에 와서 그저 걷기만 하다 보니 내 안에서 일어나는 생각, 상념의 조각들이 얼마나 많이 또 끊임없이 조잘대며 올라오는지가 보다 더 생생하게 보인다. 희말라야 롯지에서 자든 데우랄리에서 자든 사실 뭐 특별할 것이 있겠나. 본래의 계획이야 어떻든 간에 그 때 그 때 바뀔 수 있는 것이니 별 생각 없이 발길 닿는 대로 가면 되지만, 이런 별 것 아닌 순간에 조차 생각은 늘 어떤 방법으로든 자신의 위치를 합리화하기 위해 논리를 만들어 내곤 한다. 내가 혼자 만든 계획을 나 혼자 바꾸겠다는데 무슨 논리가 필요한가 말이다. 그러나 생각이란 녀석은 완전 자동 시스템으로 완벽한 자기합리화를 만들어내는 것을 보면 놀라울 정도다.

때로는 자신의 잘못된 판단이나, 사회적으로 용납되지 않는 어떤 잘못에 대해서도, 우리 생각이란 녀석은 언제나 줄기차게 내 편에 서서 합리적이고도 논리적인 변명거리를 만들어주는 든든한 아군이다. 그러나 이 아군이 고맙다고 그 녀석의 논리에 반갑게 동조해서는 안 된다. 생각, 사고는 본질적으로 보았을 때, 내 편도 아니고, 나 자신인 것은 더욱 아니다. 그저 생각은 생각일 뿐, 내 아상이라는 편에서 아상을 강화시켜주기 위한 논리를 끊임없이 만들어 내는 자기 집착의 전형일 뿐이다. 여기에 속게 되면 이제부터 나의 존재는 생각의 늪에 빠져 공허하고 괴로운 연극을 시작해야 한다. 두 눈 똑똑히 뜨고 생각이라는 감옥 속에서 빠져 나오는 것만이 내가 주체적으로 이 삶 위를 자유롭게 걸을 수 있는 방법이다.

걷다 보면 생각이 나를 지배할 때와 내 존재가 투명하고도 분명한 인식으로 나 자신의 길을 걷는 두 때를 만나게 된다. 전자의 길을 걸을 때 나는 지금 이 자리에 없고 온갖 기억과 추억과 과거의 또 미래의 흔적 속에서 무수한 소설의 시나리오를 써 가곤 한다. 그리고 그 이야기는 늘 내 안에 있던 과거 기억들의 반복이요 진부한 스토리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게 된다. 생각이란 녀석은 전혀 새로운 무언가를 도저히 만들어내지 못하는 태생적 한계를 가졌기 때문이다. 생각은 과거의 반복일 뿐이다. 그래서 생각을 비웠을 때, 생각의 감옥에서 벗어났을 때 비로소 진정한 창의력과 새로움이 마구 마구 샘물처럼 솟아나곤 하는 것이다.

그 어떤 일을 계획할 때라도 생각으로 계획을 짜서는 그 한계를 벗어날 수 없지만, 명상 속에서, 무념(無念), 무심(無心) 속에서 텅 빈 공간을 거름으로 피어난 생명은 창조적이고 전혀 새로운 꽃을 피워낸다. 그래서 때때로 어떤 회사원들은 명상을, 참선을 시작하고부터 새롭게 번뜩이는 아이디어가 많이 샘솟는다고 말한다. 또 어떤 분은 그런 연유로 명상을 할 때면 꼭 메모지를 앞에 두고 시작한다고 한다. 일상이 아닌 명상 속에서, 생각이 아닌 무심 속에서 비로소 우리의 존재는 대지 위에 참생명의 전혀 새로운 꽃을 피워내는 것이다. 비로소 내가 가야 할 내 몫의 길 위를 우왕좌왕하지 않고 오롯이 걸을 수 있게 된다.

데우랄리 롯지에 어둠이 덮인다.

촘롱에서보다 더 빛나는 별빛이 눈을 끌어당기지만, 3,000미터 고지를 넘어선 계곡의 산장은 너무 춥다. 차디찬 계곡물이 흐르고, 그 물소리가 쩌렁쩌렁 산장을 울리고, 그 시린 계곡에 목욕한 차가운 바람이 여행자의 뼛속 깊은 곳까지 파동을 심어주고 있다.

돌아보니 오늘은 많이도 걸었다. 거의 1,000여 미터 가까이를 하루 사이에 내달려 오른 것이다. 덕분에 내일은 조금 여유있는 일정이 될 것 같다.

저녁을 먹고 침대에 눕자마자 잠에 떨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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