힘들 때, 괴로울 때, 우리는 그것을 없애기 위해 온갖 노력을 다한다.

그 괴로움을 대하는 태도를 조금 달리 해 볼 수는 없을까?

괴로운 일이 생길 때, 그 괴로움에서 벗어나기 위해 애쓰고 노력하고 방법을 찾던 기존의 방법을 내려놓고 전혀 다른 방법을 써 보는 것이다.

이것은 방법이라고 할 것 조차 없을 정도로, 너무 쉬운 방법 아닌 방법이지만, 가장 지혜로운 방식이고, 부처님의 방식이며, 모든 수행자가 행함 없이 행하는 중도의 수행법이다.

그 괴로운 일에서 벗어나려는 애씀 대신, 그 괴로움 속으로 뛰어드는 것이다.

아니, 그 괴로움과 함께 있어 주는 것이다.

그 괴로움에 대해 좋다거나 나쁘다거나, 나를 왜 이렇게 괴롭히느냐거나, 빨리 없어지라거나 하는 생각을 내려놓고, 그저 그 괴로움을 있는 그대로 허용해 주는 것이다.

아무런 판단 없이 그 괴로운 것과 함께 존재하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그 괴로움을 통해 깨어있는 것이며, 그 괴로움을 중도라는 수행으로 접근하는 방식이다.

그것이 애쓰지 않는 무위법이며, 이렇게 하거나 저렇게 하지 않는 중도의 길이며, 그 괴로움과 나를 둘로 나누지 않는 불이의 수행이며, 그 괴로움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는 위빠사나 수행이고, 그 괴로움을 생각하느라 복잡해지지 않는 평정, 고요, 사마타의 수행이다.

우리의 모든 괴로움은 괴로운 것들을 대상으로 벗어나려고 하거나, 싸워 이기려고 하거나, 없애버리려고 하는 등의 온갖 행위함, 유위행, 조작에서 생겨난다.

그 괴로움을 대상으로 어떻게 해 보려고 하면 할수록 점점 더 그 괴로운 것에 얽혀매어지고, 사로잡히게 될 뿐이다.

괴로움을 없애려고 애쓰는 마음이 오히려 괴로움을 실재화하게 만들고, 괴로움에 힘을 부여하는 결과를 가져오기 때문이다.

중도적으로 허용한다는 것은 집착하지도 않고 거부하지도 않으며, 그냥 내버려둘 뿐 그것을 밀고 당기지 않는 것이기에 전혀 힘이 들지 않는다.

이 불법의 마음공부 방식은 이렇듯 유위 조작을 행하지 않는 것이며, 한다고 할 수도 없을 정도로 쉬운 공부다.

그러나 강력하다.

그 괴로움에게 전혀 힘을 실어주지 않는 방식이다.

이 방법 아닌 방법, 길 없는 길, 수행 아닌 수행을 통해 괴로움은 힘을 잃고 저절로 사라져 갈 것이고, 괴로움이 사라지면 본래의 행복이 저절로 드러날 것이다.

본래의 삶, 평상심의 도가 비로소 드러날 것이다.
.....

그간의 마음공부 이야기들을
5가지로 핵심만 뽑아
전에 써놓았던 것을 다시 써서
유튜브로 공개합니다.

#마음공부 #지혜글 #명언 #좋은글

YouTube에서 '행복하고 지혜로운 삶을 사는 5가지 방법 - 인생명언, 좋은글, 지혜글' 보기
https://youtu.be/CeD_ZTwO5jU
Posted by 법상

어떻게 사는 것이 잘 사는 것일까? 바르게 사는 것일까?
지혜롭게 사는 것일까?

어떤 것이 바른 수행일까?
어떻게 해야 괴로움 없는 참된 행복의 삶을 살 수 있을까?

아주 단순하다.
거짓을 좇지 말고, 진실만을 보면 된다.
거짓을 따라가지 말고, 진실의 삶을 그저 살면 된다.

그러면 무엇이 거짓이고, 무엇이 진실일까?
지금 여기에 있는 '이것', '이대로'만이 진실하다.

지금 이대로라는 이러한 진실에 대해 내 식대로 해석하고, 판단하고, 분별한다면 그것은 곧장 거짓이 되고 만다.

머릿속의 생각은 거짓이다.
그것은 내식대로 만들어진 것이고, 조작된 것이기 때문이다.

눈앞에 어떤 한 사람이 있다.
그 사람은 그저 있는 그대로의 실상으로 있다. 진실로 있다.

그러나 그 사람에 대해 좋으니 나쁘니, 키가 크니 작으니, 능력이 있느니 없느니, 나와 친하니 안 친하니 등등 온갖 생각을 개입시키면 그 사람은 진실을 보는 것이 아니라, 자기의 생각, 허상, 거짓을 좇는 것이다.

그 사람에 대해 사람들마다 판단하는 바는 다 다를 것이다.
그러니 그 판단들은 있는 그대로의 그 사람에게서 나온 것이 아니라, 사람들의 생각 속에서 나온 허망한 것이고, 거짓이다.

진실은 바뀔 수가 없다. 허망한 것, 거짓된 것은 사람마다 다 다르다.
이 사람에게는 좋은 사람이 저 사람에게는 나쁜 사람일 수도 있다.

그런 판단은 100% 진실일 수 없기 때문이다.
실상만 보면, 그저 내 눈 앞에 한 사람이 있을 뿐이다.

우리는 그 사람에 대해 좋다거나 나쁘다거나, 내 편이라거나 적이라거나 하는 등의 온갖 생각을 가지고 대하다보니, 그 사람으로 인해 괴로울 수도 있고, 행복해질 수도 있다.

그러나 그 사람을 있는 그대로 만나면, 아무 일이 없다.
그 사람을 허상으로 만나지 말고, 실상으로 만나 보라.

머릿속으로 판단하지 말고, 그저 있는 그대로 만나 보라.
그것은 힘드는 일이 아니다.
그럴 때 그 사람의 참된 진실에 이를 수 있다.

그럼으로써, 우리는 그 사람을 통해 깨어있을 수 있다.
자기식대로 판단한 그 사람을 만나면, 그 사람으로 인해 점점 더 중생이 되어가겠지만, 판단 없이 있는 그대로 만나면 그를 통해 깨어난다.

.....

YouTube에서 '[7.28일요법회] 생각, 견해가 없으면 괴로움도 없다, 부처는 견해가 없다! 팔정도의 정견' 보기
https://youtu.be/EnNXdL2QYjM
Posted by 법상

괴로운 일이 일어나는 것은 흔히 악업의 업보를 받는다고 말합니다.

어떤 사람이 나에게 욕을 하거나, 화를 내거나, 또는 정말 하기 싫은 일을 해야 할 때가 생겼다고 해 보죠.

그 때 우리는 나를 괴롭힌 사람을 탓하고, 하기 싫어서 짜증을 내기도 하며, 피해가려고 애쓰거나, 화를 폭발시키기도 합니다.

반대로 좋은 사람을 만나거나, 좋은 일이 일어날 때는 행복해 하며, 나아가 집착하고, 그런 일이 계속 더 일어나기를 바라기도 하지요.

그러나 그런 일은 일어났다가 때가 되면 사라지기 때문에 또 다시 괴로워지기도 합니다.

그런데 이것은 바람이 불고, 비가 오고, 태풍이 불거나, 혹은 낮과 밤이나, 봄 여름 가을 겨울이 변화되는 이치와 비슷합니다.

자연의 순환은 때가 되면 저절로 이루어집니다.

비가 올 때가 되면 저절로 비가 내립니다.

밤이 올 때가 되면 저절로 낮은 물러갑니다.

이처럼 삶도 그렇습니다.

내가 원하고, 내가 집착하는 일만 일어나지는 않습니다.

원하는 일, 좋아하는 일들도 일어나지만, 그 일이 때가 다하면 싫어하는 일, 하기 싫은 일도 할 때가 생겨납니다.

그럴 때 사람들은 괴롭다거나, 스트레스 받는다고 말하지만, 낮이 다하면 밤이 오듯, 여름이 가면 가을이 오듯, 좋은 일도 다하면 싫은 일이 올 수도 있습니다.

그것은 때가 되었기 때문에 오는 것입니다. 시절인연은 꼭 그 인연이 와야 했기 때문에 옵니다.

대지에 비가 필요하면 그저 비가 내리는 것 처럼, 나의 업에도 무언가 풀려나가고, 균형이 맞아져야 할 때가 되면 거기에 걸맞는 인연의 때가 오는 것이지요.

그러니 좋은 일이 생긴다고 그것이 더 오래 지속되기를 바라며 집착할 것도 없고, 싫은 일이 온다고 그것을 미워하고 화내며 거부할 것도 없습니다.

그것은 밤낮이 교대하는 것처럼, 인연의 때가 되어 교차하는 것일 뿐입니다.

거기에 시비를 걸 필요도 없고, 좋은 것을 집착하거나 싫다고 미워할 것도 없습니다.

그저 인연 따라 온 것은 오도록 허용해 주고, 갈 것은 가도록 허용해 주어 보세요.

취사간택하면서 힘들어하는 대신에, 전혀 힘쓸 필요 없는 있는 그대로의 수용을 선물해 주어 보세요.
자연을 자연 그대로 둘 뿐, 내가 개입하지 않는 것이지요.
바로 그 때, 모든 것은 저절로 주어지고, 삶은 저절로 풀려나갑니다.
.....
#마음공부 #금강경 #불교

YouTube에서 '하나와 전체가 다르지 않아 - 금강경 강의 30강(30분 일합이상분)' 보기
https://youtu.be/HGsFWvT4-j0
Posted by 법상


삶을 지혜롭게 사는 것은 사실 아주 단순합니다.

인연따라 생겨난 것들에 대해 그저 내버려두면 됩니다.

일어나는 그대로 허용해 주면 됩니다.

어떤 삶이 경험될 때 경험되는 그대로를 그저 있는 그대로 경험해 주세요.

어떤 일이 일어나면 일어나는 그대로,
보이면 보이는 그대로,
들리면 들리는 그대로,
그저 그렇게 모든 것을 있는 그대로 내버려 두면 됩니다.

거기에 생각과 판단으로 온갖 해석을 가하고, 온갖 생각의 덧칠을 입히고, 그것을 믿으면서, 그 생각에 걸리들고, 집착하고, 구속되는 이런 연속된 중생심의 번뇌망상에 끌려가지만 않으면 됩니다.

번뇌망상으로 생각하고 판단하고 집착하고 거부하는 것은 힘들고 어려운 일이지요.

애써야 하고, 에너지의 낭비가 많습니다.

유위법, 유위행에는 이처럼 힘쓸 일이 많고, 힘들 뿐 아니라, 유위행에는 유위의 결과 즉 과보가 따르듯이, 그렇게 만들어낸 온갖 생각들로 인해 괴로운 결과가 만들어집니다.

가만 두면 아무 문제 없이 그저 인연따라 생겼다가 사라지면 그 뿐인 것을, 생각으로 판단 해석함으로써 스스로 거기에 일을 만들고, 괴로움을 만들어 내는 것이지요.

인연 따라 첫 번째 작용, 경험이 일어나면, 그저 있는 그대로 경험해 주세요.

해석하지 말고, 그것이 일어나도록 허용해 주고, 판단하지 말아 보세요.

그저 그 모든 것이 지나가도록 허락해 주세요.

그러면 모든 것들은 왔다가 갑니다.

그리고 끝이지요.

인연 따라 온 것에 대해 좋다고 해석하면서 집착하거나, 싫다고 해석하면서 안 왔으면 좋았을 것이라고 여기며 거부하는 등의 취사간택심을 일으키게 되면, 그 대상에 사로잡히고, 그 대상으로 인해 휘둘리게 될 뿐입니다.

인연따라 온 모든 것들에 대해 취사간택하지 않고, 그저 내버려두면, 그 모든 것이 자연스러운 실상의 작용이 되고, 아무런 문제를 만들어내지 않게 됩니다.

삶은 가벼워지고, 삶에는 아무런 일이 없어집니다.

인연 따라 모든 일들은 일어나지만, 거기에 구속되지는 않는 것이지요.

머무는 바 없이, 집착하는 바 없이 자유롭게 살아가게 됩니다.

이것이 수행자의 흔적 없고 걸림없는 삶입니다.
.....

YouTube에서 '['19.7.21 일요법회] 어떻게 살 것인가? 팔정도 수행, 불교교리 총정리와 팔정도의 정(正)의 실천' 보기
https://youtu.be/zpeS9-dgc9k
https://youtu.be/zpeS9-dgc9k
Posted by 법상


눈으로 대상을 봅니다.

'보는 것'일까요? '보이는 것'일까요?

'보는 것'은 '내가 본다'는 것이고, '보이는 것'은 그저 보일 뿐 거기에 내가 개입되지 않는 듯 보입니다.

우리는 습관적으로 '내가 본다'고 말하고, 잘 보기 위해 애씁니다.

그러나 눈앞에 어떤 대상이 탁 들어오면, 그냥 저절로 보이지 않는가요?

억지로 보려고 애써야지만 볼 수 있나요?

그냥 보이잖아요.

듣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내가 듣는 것이 아니라, 그저 들리는 것이 아닐까요?

어떤 소리가 납니다.

애쓰지 않아도 그저 들리지요.

만약에 '내가 듣는다'고 하려면, 내 마음대로 들을 수 있듯이, 내 마음대로 들을 수 없기도 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어떤 소리가 들리면, 듣기 싫어도 그냥 저절로 들립니다.

내가 듣는 것이면 내 마음대로 들을 수도 있고, 듣지 않을 수도 있어야 하겠지만, 그냥 들리는 것이기 때문에 내 마음대로 듣는 것을 완벽히 통제할 수는 없습니다. 

조금 이상하지 않은가요?

내가 보고, 내가 듣는다고 생각해 왔지만, 사실은 그저 보이고 들렸을 뿐입니다.

거기에 '나'를 개입시킬 필요는 없는 것이지요.

이처럼 우리는 보고 듣기 위해 전혀 애쓰지 않더라도, 그저 무위법으로써, 자연스럽게 모든 것을 보고 듣습니다.

거기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습니다.

보고 듣는 것만 그런 것이 아니라, 맛보고, 냄새맡고, 감촉하고, 생각하는 모든 것이 이와 같이 저절로 일어납니다.

향기가 나면 저절로 향기를 맡게 됩니다.

어떤 대상을 보면 저절로 생각이 떠오릅니다.

감촉을 느끼면 저절로 촉감이 자각됩니다.

이처럼 삶은 자연스럽게 저절로 일어납니다.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이렇게 자연스럽게 무위로써 살려지고 있습니다.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살려지는 것처럼 보입니다.

이렇듯 아무런 문제 없이, 그저 자연스럽게 반응하며 인연 따라 물 흐르듯 살아간다면 아무런 일이 없습니다.

괴로울 것이 없습니다.

그저 매 순간 보일 뿐, 들릴 뿐, 생각할 뿐, 느낄 뿐, 아무런 시비가 붙지 않습니다.

이것이 무위자연이며, 불이중도이고, 일 없는 무사인의 삶입니다.

이렇듯 시비분별만 붙이지 않으면, 이렇듯 이미 문제 없는 실상의 삶이 살아지고 있습니다.

진리의 삶을 살고 있습니다.

이토록 완벽하게 주어진 삶을 상대로, '나'라는 허상을 개입시켜, 내가 본 것이 옳으니, 내가 듣기로는 기분이 나빴다느니, 나는 감정이 상했다느니 하는 등의 아상, 에고, 분별심을 내세우면서, 이 완전한 삶이 내 마음에 들거나 들지 않는, 내 기준으로 좋거나 나쁜 삶으로 변해버린 것입니다.

나라늘 생각과 분별만 없다면, 삶은 지금 이대로 완전합니다.
.. ..

YouTube에서 '['19.7.14 일요법회] 괴로움을 없애는 진짜 수행은 기도, 염불, 좌선이 아니라 중도! 도성제, 사념처' 보기
https://youtu.be/Z_TFv8Zeab0
Posted by 법상

[사진 : 불사중인 1군단 법당 후불탱화]

있는 그대로를 자기 식대로 해석하고, 분별하고, 판단하면서 보는 것을 중생의 어리석음이라고 한다.
있는 그대로를 그저 있는 그대로 보는 것은 지혜라고 한다.
경험이 일어날 때, 그저 그렇게 일어나는 경험 그대로를 있는 그대로 경험하게 된다면, 그것이 지혜이고, 깨달음이다.
깨달음이란 이처럼 단순하고, 아무런 깨달음이라는 어떤 실체적인 상태 같은 것이 아니다.
어제 보았던 것과 비교해서 보지 않기 때문에, 지금 본 것에 대해 그저 지금 이 순간으로 생경하게, 분별없이 그저 볼 뿐이다.
한 사람을 볼 때, 어제, 그리고 과거에 만났던 그 사람이라고 여기면서 만난다면 그것은 있는 그대로 보는 지혜가아니다.
그렇게 보는 것은 그 사람을 실체화시켜서, 그 사람이라는 특정한 존재가 어제부터 지금까지 계속된 실체라고 여기는 생각일 뿐이다.
그것은 무상이 아니고 무아가 아니다.
그 사람이라는 실체가 외부에 딱 정해져 있어서, 어제부터 오늘까지 항상했던 것이 아니다. 내 생각이 항상하다고 착각하고, 실체라고 착각했을 뿐이다.
이 상태가 무상과 무아를 모르는 상태다. 삼법인에 무지한 것이다.
지혜는 단순하다.
그저 있는 그대로의 진실을 있는 그대로 보는 것이다.
어제 보았던 사람이라는 허망한 기억 속의 생각으로 오늘 만나는 이 사람을 판단하면서 만나는 것이 아니라, 그저 지금 내 눈앞에 있는 이 사람을 있는 그대로 만나는 것이다.
그렇게 있는 그대로 보는 것이 곧, 무상을 자각하는 것이다.
항상한다고 여기면, 어제의 그 사람이 지금의 이 사람으로 항상하다고 착각하는 것이지 않은가?
어제의 기억은 허상이니 신경쓸 것이 없다.
그저 지금 이 사람을 지금으로써, 무분별로써, 그저 있는 그대로 만날 수 있다면, 그것이 곧 삼법인의 지혜이며, 있는 그대로 보는 정견이고, 깨달음이다.
.....
YouTube에서 '[음성/행복입문2] 양자물리학 홀로그램과 불교, 파동, 공명, 과학' 보기
https://youtu.be/rYE3JsOE3SY


Posted by 법상



과거의 기억은 말 그대로 하나의 기억일 뿐, 실재가 아니다. 

그것은 진실로 있는 것이 아니라, 머릿속에서 기억으로만 존재할 뿐이다. 

이런 것을 허망한 것이라고 하여 허상이라고 설한다. 

그것은 100% 진실일 수 없지 않은가? 

내가 잘못 기억했을 수도 있고, 잘못 보았을 수도 있으며, 뇌과학에서도 말하듯이 인지왜곡이 일어났을 수도 있다. 

당연히 그 허상을 믿을 필요는 없다. 

과거라는, 기억과 상상이라는 허상을 믿지 않는다면, 지금 이 순간은 무엇일까?

어떻게 자각될까? 

그저 이럴 뿐이다. 

우리는 현재에 무언가를 볼 때, 과거에 보았던 이것과 비슷한 무언가를 떠올린 뒤에 그것과 비교해서 지금의 이것을 판단하고 자각한다. 

그러나 지금 눈앞에 보이는 이것과, 과거의 기억된 무언가를 비교하지 않는다면 어떨까? 

그저 지금 이대로일 뿐, 그 어떤 해석이나, 비교나, 분별, 판단도 개입되지 않는다. 

이처럼 매 순간은 날마다 새롭다. 

익숙한 것, 이미 아는 것이란 우리의 허망한 의식이 만들어내는 환상에 불과하다. 

익숙한 것도 없고, 아는 것도 없다. 

매 순간이 새롭다. 

모를 뿐이다.

매 순간이 그저 그러할 뿐이다. 

그 어떤 개념으로도 해석할 수 없는 그저 이대로의 삶이 있을 뿐이다. 

거기에는 아무런 문제도 없다. 

그저 그러할 뿐! 

매 순간 새롭게 보라. 

그렇다고 억지로 새롭게 보려고 애쓰라는 것이 아니다. 

새롭게 보는 것은, 낯설게 보고, 난생 처음 보는 것처럼 보는 것이다. 

즉 과거의 기억을 끌어와 판단, 분별, 해석하지 않고 그저 있는 그대로를 있는 그대로 보는 것이다. 

정견하는 것이다. 

그러니 얼마나 쉬운가? 

그냥 보면 되니까. 

그러나 해석하고 판단하고 비교해서 보는 것은 힘드는 일이다. 

그래서 이 공부는 무위법이다. 

애써서 할 것이 없다. 

저절로 새롭게, 그저 이렇게, 아무 일 없이, 함이 없이 볼 뿐이다.

.....

YouTube에서 '명상 참선 수행 실습, 스님 목소리 들으며 쉽게 따라하는 명상 참선, 조사선, 간화선 실수'

이론설법
https://youtu.be/A8jHrLY0xeg

실습수행
https://youtu.be/zjUCADmh7VY

#명상 #참선 #선수행 #마음공부


Posted by 법상

손가락 다섯 개를 들어 올려 보여 보겠습니다.

이 손과 손가락은 그저 하나의 손일 뿐, 아무런 의미도 없습니다.

이 손은 우리를 괴롭힐 아무런 힘이 없습니다.

그냥 이것은 하나의 손일 뿐이기 때문이지요.

그런데 이 보이는 손가락에 대해 의미를 부여해 놓은 뒤, 그렇게 의미부여한 것을 진짜로 믿기 시작하면, 이 아무것도 아닌 손가락이 우리를 괴롭히기 시작합니다.

중간 손가락만 놔두고 나머지 손가락 네개를 접은 뒤 손을 들어 올리면, '욕'을 한다는 의미가 되지요.

이 손가락 자체에 특정한 모양을 특정한 의미로 부여함과 동시에 그 손모양을 들어보이면 우리는 화를 내게 됩니다.

본 것이 진짜라고 여기기 때문이지요.

저 사람에 나에게 욕했다고 하면서 화를 냅니다.

그러나 그렇게 우리가 머리를 굴려서 의미를 부여하고, 상을 부여하고, 판단분별을 가하지 않고, 그저 있는 그대로를 있는 그대로 본다면, 정견한다면, 실상 그대로만 본다면, 그저 손가락 하나를 들은 것일 뿐입니다.

내가 만든, 세상 사람들이 만든 허상을 좇게 되면 욕한 것이 되어 나를 괴롭히지만, 실상을 바로 보게 되면, 그저 손가락을 든 것일 뿐이니, 그 손동작에 괴로워할 이유가 없습니다.

이처럼 본 것을 내 식대로 의미부여하고, 해석해서 그 해석을 믿고 집착하게 되면, 그 아무것도 아닌 것이 나를 괴롭히기 시작합니다.

사실 우리가 느끼는 모든 괴로움은 이런 방식으로 아무것도 아닌 허상이, 내가 스스로 만들어 판단분별한 생각으로 인해 나를 괴롭히게 됩니다.

실상을 보지 않고, 허상을 좇아가는 것이지요.

사실 손가락은 우리를 괴롭힐 그 어떤 힘도 없습니다.

거기에 의미를 부여하고, 분별하고, 그것을 옳다고 믿기 시작하면서부터, 그것이 나를 울고 웃게 만드는 것이지요.

손가락 모양을 엄지와 검지를 포개어 하트 모양으로 만들면 그것은 사랑한다는 의미가 되죠? 

이처럼 아무것도 아니던 것이, 내 생각 하나에 의해 나를 괴롭히거나 행복하게 하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허상을 좇는 것이고, 색에 머물러 마음을 내는 것입니다.

그러면 실상을 바로 보지 못하게 됩니다.
.....
#마음공부 #목탁소리
#불교교리 #불교 #참선 #깨달음 #금강경
YouTube에서 '겉모습으로 부처를 찾지 말라 - 금강경 27강(25분 화무소화분~26분 법신비상분 강의)' 보기
https://youtu.be/zxNNDrLO-Io 
Posted by 법상

금강경에는 '불응주색생심 불응주성향미촉법생심 응무소주 이생기심'이라는 매우 유명한 사구게가 있습니다.

색에 머물러 마음을 내지 말고, 성향미촉법에 머물러 마음을 내지 말고, 응당히 머무는 바 없이 마음을 내라는 말씀입니다.

초기불교에서는 이것을 십이처, 십팔계로 설명하면서, 이것을 통해 무아를 증명하곤 하였습니다.

눈이 색(모양, 대상)을 볼 때, 그 보이는 대상이 실재한다고 여기고, 실체시하게 되면 거기에 집착하게 되고, 본 것에 머물러 마음을 내게 됩니다. 

본 것을 옳다고 여기면서 '내가 보았으니 맞아'라고 주장하는 것이지요.

어떤 사람을 아느냐고 물으면, 한 번 본 사람은 안다고 답변할 것입니다.

그런데 진짜로 보았으니까 아는 것일까요?

사실 본다고 할 때 그 대상을 있는 그대로 온전히 본 것이 아니라, 자기 식대로 해석해서 보고, 자기 판단대로 보았을 뿐입니다.

또 어떤 사람은 그 사람을 보고 좋지 않은 느낌이 일어날 수도 있고, 어떤 사람은 그 사람에게 반하고 사랑에 빠질 수도 있겠지요.

이처럼 어떤 한 사람을 보았다고 해서 그것을 안다고 여기거나, 내가 본 것에 대해, 보아서 안 견해에 대해 옳다고 여기거나 거기에 집착할 필요는 없습니다.

그것은 그 대상을 있는 그대로 본 것이 아니라, 내 안에 식으로 그려놓은 허상, 상을 본 것이기 때문입니다.

실상을 본 것이 아니라 허상을 본 것이지요.

그 사람을 보고 사랑에 빠졌다면, 그 사람이 정말 사랑스러운 사람이라고 여기면서, 내가 빠져 있는 이 사랑의 감정을 실재라고 여기고 상대에게 집착하기 시작합니다.

그 상대방을 내가 좋게 해석한 것임에도 불구하고, 그 사람은 정말 좋은 사람, 매력 있는 사람, 사랑스러운 사람이라고 굳게 믿고 집착하는 것이지요.

그러다 결혼 하고 살다보면, 때로는 그 때 사랑스러웠던 부분들이 오히려 더 미워질 수도 있습니다.

왜 이런 일이 벌어질까요? 나는 분명히 그 사람을 아는데 왜 훗날 보니 그것이 오류였음이 밝혀질까요?

실상을 본 것이 아니라, 허상을 본 것을 진짜라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보았다고 다 믿지 말고, 보고 알았다고 그 생각을 100% 믿지는 마세요.

그것이 바로 불응주색생심, 즉 색에 머물지 않고 보는 것입니다.


다른 비유를 하나 더 들어보죠.

빨간색깔 도화지를 보고, 우리는 누구나 빨간색이라고 여기고, 내가 보았기 때문에 빨간색이 확실하다고 말합니다.

혹시 누군가가 그것은 빨간색이 아니라고 우기면서, 나를 바보 취급한다면 너무 황당해서 기가 막히겠죠?

제가 초등학교 때 모든 면에서 똑똑한 모범생 친구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친구가 반에서도 별로 똑똑하지 못하던 한 친구와 교실 한 쪽에서 논쟁이 붙었어요.

빨간색인가 어떤 색깔을 보고 모범생은 다른 색이라고 주장하는 것이었습니다.

둘이 너무 한 치도 물러섬이 없이 분명하게 자기가 주장하는 색깔이라고 하니, 반의 다른 친구들에게 물어봐서 누가 옳은지 보자고 했지요.

반의 모든 친구들이 똑똑하지 못했던 그 친구가 본 색깔이 맞다고 했지요.

알고보니, 그 모범생 친구는 자기도 모르는 색약이 있었던 것입니다.

자식은 결정코 '무슨 색'이라고 믿었는데, 반의 친구들 모두가 전부 다른 색깔이라고 할 때의 그 친구의 표정을 잊지 못합니다.

우리에게는 빨간색으로 보이는 것이 다른 사람에게는 다른 색으로도 보일 수 있습니다.

빨간색이라고 고집할 필요는 없지요.

자외선을 보는 곤충들은 가시광선만을 보는 우리들과는 다르게 세상을 봅니다.

자외선 필름으로 꽃밭을 촬영하면 그 색감이 우리 눈으로 보는 것과 다르게 나타납니다.

적외선 촬영기술로 사진을 찍으면 낭만적이고 몽환적인 사진을 얻게 되지요.

우리는 가시광선의 영역만을 볼 수 있는 것일 뿐, 적외선을 보는 뱀은 전혀 다른 세상을 볼 수도 있습니다.

이처럼 내가 보았다고 해서 그것을 전적으로 옳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 

더욱이 뇌과학에서 말하듯, 우리의 뇌는 대상을 전체적으로 파악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관심사를 근거로 제한적으로만 인식한다고 합니다.

인식 자체에서 자기식대로 왜곡해서 받아들인다는 것이지요.

그러니 나는 이렇게 보았지만, 다른 사람은 다르게 볼 수도 있습니다.

그러니 내가 보았다고 해서 절대적으로 옳다고 집착해서는 안 되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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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0년 전 광주 관음사 시절
일요법회 설법을 공유합니다

YouTube에서 '[음성/행복입문1] 나를 괴롭히는 방어벽을 깨라, 고정관념을 깨면 자유롭다' 보기
https://youtu.be/P2jTdXAE1mI
Posted by 법상


매 순간 지금 일어나는 이것뿐 다른 것은 없습니다. 

작용이 일어나고 있는 바로 지금 이것 외에 나머지는 전부 다 망상입니다. 

큰스님들이 죽비를 한 번 탁 치면서 '이것이 법이다'라고 설합니다. 

그 때 곧바로 생각을 일으켜서 죽비를 치는 것이 왜 진리일까? 하고 생각을 한다면 그것은 벌써 두 번째 자리에 떨어진 것입니다. 

그냥 죽비를 치는 그것이 전부입니다. 

여기에는 어떤 숨겨놓은 진리 같은 것은 없습니다. 

그저 액면 그대로, 날것 그대로 죽비를 치는 그것이 전부입니다. 

죽비 치는 것에 대한 의미를 생각하고 떠올리고 연구하고 해석하려고 하면 힘이 들지만, 그냥 죽비 한 번 치는 그것은 전혀 힘들여서 알 필요가 없어요. 

그냥 '탁!'(죽비 한 번) 이것뿐이니까요. 

이미지를 따라가지 않고, 생각으로 해석하지 않으면, 모든 것이 전부 '탁(죽비)' 이것뿐입니다. 

친구가 욕을 했어도 그 욕의 내용을 따라가고, 그 욕소리에 반응하며, 화를 내는 등의 남은 이미지, 그림자를 따라가지 않고, 그 욕이라는 말이 나온 그 첫 번째 자리에서 그 소리를 듣게 되면, 그저 그 소리가 일어났다가 사라졌을 뿐, 아무 일이 없습니다. 

'능력 없는 녀석'이라는 그 말 한마디는 아무런 힘도 없고 그냥 아무 것도 아닌 소리의 파동일 뿐입니다. 

그런데 내가 그 말을 듣고 화를 내면서, 그 말에 의미를 부여하고, 힘을 실어주게 되면, '능력 없는 녀석'이라는 말이 나를 집어삼키게 됩니다. 

그건 내 스스로 그렇게 만든 것일 뿐, 그 말 자체에 그런 힘이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이런 방식으로 어떤 특정한 소리, 말, 경험, 경계를 우리는 자기식대로 해석하고는 그 해석에 얽매여서 스스로 괴로워하고 있습니다. 

모든 경험, 작용은 그저 '탁!(죽비)' 이것과 전혀 다를 것이 없어요. 

아무런 의미, 개념, 분별이 없는 텅빈 공일 뿐입니다. 

내가 문제를 만들어내지만 않으면 문제는 없어요. 

삶 자체가 그렇습니다. 

삶은 그저 있는 그대로일 뿐, 좋은 것도 나쁜 것도 아닙니다. 

좋게 해석하는 사람에게 삶은 좋은 곳이고, 나쁘게 해석하는 사람에게 세상은 살기 싫은 곳이지만, 그 모든 해석에 걸려들지 않는 사람에게 삶은 그저 있는 그대로일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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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ouTube에서 '그 사람이 내 인생에 나타난 이유, 한 사람이라는 우주' 보기
https://youtu.be/RSoJIBLZ4e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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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법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