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비탈진 내리막에서
뒤집혀 내동댕이쳐질 때
바로 그 때 도리어
획기적인 삶의 변화가 찾아온다.

역경이 없고
순탄하기만 한 삶이란
곧 가장 큰 역경이다.

순경과 역경, 
긴장과 이완이야말로
자연스러운 삶의 파동이다.
...

삶의 역경과 혼란을 타고 진리는 온다. 

삶이 비탈진 내리막에서 내동댕이쳐지고 있을 때 도리어 삶의 획기적인 변화가 찾아온다. 

불안과 혼란은 우리를 더욱 내면 깊은 곳에 뿌리내리게 해 준다. 

역경(逆境)이 없고 순경(順境)만 있는 삶이란 그것이 곧 가장 큰 역경이다. 

우리의 삶이 역경과 순경, 긴장과 이완이 반복된다는 것은 여간 감사한 일이 아니다. 

우리는 다만 그것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면 된다. 

좋고 싫게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다만 오면 오는 대로, 가면 가는대로 받아들이면 된다. 

그러지 않고 불안과 위험을 버리려 애쓰고, 행복과 편안과 순탄한 삶만을 붙잡고자 애쓴다면 그 때부터 삶은 그대를 외면하고 심지어 파멸시켜 버릴 것이다. 

지큼 이대로의 온전한 삶이 그대를 비켜가기 때문이다. 

양 극이라는 삶의 파동 위에 올라타라. 

어느 한 쪽에 사로잡히지도, 어느 한 쪽을 거부하지도 말아 보라.

일어나는 삶을 통째로 받아들이라.

마음껏 삶의 서핑을 즐기라.

'365일 눈부신 하루를 시작하는 한마디' 중에서

* 법상스님 1월 서울법회 안내
일시 : 2020.1.18(이번주 토요일)
16:00~18:00
장소 : 서울 용산 원광사(신용산역 1번출구에서 나와 용산우체국 보며 왼쪽 골목 직진 후 부대 위병소에서 우회전, 도보 8분)

#역경 #괴로움 #받아들임 #마음공부 #법상스님의목탁소리

Posted by 법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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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간 불광 1월호

[특집 - 기도]

 

기도의 의미를 묻다

법상 스님

 

. 남형권

사진. 최배문

 

오늘도 수많은 사람이 부처님 앞에서 간절히 기도한다. 우리는 과연 어떤 목적으로 기도를 하고 있는가. 진정한 기도의 의미는 무엇일까. 또 기도가 어떻게 깨달음과 이어지고, 기도는 수행의 관점에서 어떻게 바라볼 수 있을까. 불교와 마음공부, () 분야의 대표적인 유튜브 채널 법상스님의 목탁소리를 이끄는 법상 스님을 만나 기도에 관한 이야기를 들어봤다.

 

Q. 기도란 무엇인가요.

 

빌 기()에 빌 도()자를 쓰잖아요. 우리가 흔히 말하는 기도는 말 그대로 뭔가를 빈다는 겁니다. 많은 사람이 자신이 원하는 바를 정해놓고 기도합니다. ‘부자가 되고 싶다’, ‘진급하고 싶다’, ‘어떻게 되었으면 좋겠다.’ 등 자기가 정한 목표를 향해 기도하고 이루면 행복할 거라고 확신해요. 하지만 그 기도 목표는 본인 생각, 즉 분별로 만든 것일 뿐이에요. 분별심 자체가 망상이고, 분별심 때문에 괴로움이 생겨요. 분별심을 강화하는 기도는 자신을 더 옥죄기도 합니다

 

부모가 본인이 원하는 자식의 어떤 삶을 위해 간절히 기도할수록 집착을 심하게 만들어 아이는 더 힘들어지고 답답해하기도 하죠. 전 그래서 기도를 조금은 편하게 하시라고 말씀드립니다. 그 외에도 여러 가지 기도가 있죠. 참회의 기도, 감사하는 기도, 만족의 기도 등 오히려 이런 기도가 진정한 의미의 기도죠

 

하는 기도보다는 빼는 기도가 좋은 기도라고 생각해요. 용서와 참회, 비움의 기도, 만족과 감사의 기도 등은 더하기(+)가 아닌 빼기(-)의 기도입니다. 괴로움을 소멸시키는 기도죠. 밀림 속 코끼리 발자국이 모든 짐승의 발자국을 포섭하듯이 부처님 모든 가르침은 4성제에 포함된다고 했어요. 사성제의 핵심은 괴로움의 소멸인데요, 기도가 괴로움을 소멸하는 방향으로 가게 해야겠지요

 

분별과 망상을 끊임없이 더하는 삶 속에서, 기도를 통해 분별망상과 집착을 뺄 수 있다면 그것이 기도의 진정한 의미일 것입니다.

 

 

Q. 빼는 기도로 삶에 대한 진취적인 태도나 열정, 살아갈 힘이 사라지진 않나요.

 

사람들은 절에서 마음을 비우고, 집착을 버리고, 무소유를 실천하는 것이 스님들에게나 좋지, 우리 중생들에게는 오히려 열심히 살지 않고 게으르게 하는 것이 아니냐고 의문하기도 합니다. 금강경에 응무소주 이생기심(應無所住 而生基心)’이란 말이 있죠. 머무는 바 없이, 집착 없이 마음을 내라는 겁니다

 

하되 한 바가 없는 무위행(無爲行)이 불교의 진정한 행입니다. 이루기 위해 노력하고 달려가 성공하면 행복, 실패하면 괴로움이라고 만드는 게 바로 유위(有爲), 조작입니다. 업을 만들어가는 유위행(有爲行)과 달리 무위행은 깨달음의 행이라고 해요

 

고등래퍼란 TV 프로그램에 김하온이라는 친구가 있었어요. 처음에 나와서 떨어졌는데 두 번째 나와서는 1등을 했죠. 누군가에게 보여주고, 성공하고, 과시하려고 음악 하지 않겠다. 내가 즐거워서 음악을 하겠다고 자기 생각을 말하더라고요. 열심히 노력하지 않으면 성공할 수 없다는 게 모든 사람의 신앙과 같은데 받아들일 수 없다고 했죠

 

“'No pain NO Gain(고생 없이는 얻는 것도 없다)'이 하나의 '프레임' 이라는 걸 깨달은 거지. 고통 없이는 얻는게 없다 라는 말이 너무 잔인하지 않니? 그래서 그 프레임에서 벗어나려고 했어.”라고 말했습니다

 

집착이 클수록 두려움도 함께 커지는 법입니다. 집착이 없다고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게 아니에요. 무기력해질 것 같지만 오히려 더 큰 순수한 열정이 피어납니다. 어린아이들은 오후에 재미있는 놀이터에 가니까 오전에 조금만 놀아라고 해도 오전에 완전히 전력을 다해서 놀죠. 푹 자고 다시 깨어난 후 오후에 또 100% 힘을 다해 놀아요. 에너지 낭비가 없고 쉴 때 쉬니 순수한 열정이 피어나죠

 

과도한 집착엔 삿됨이 끼어듭니다. ‘내가 조금 안 좋은 일을 해서라도 진급해야지와 같은 거죠. 마음을 비울 때 오히려 더욱 순수한 열정이 피어납니다.

 

 

Q. 수행의 관점에서 기도란.

 

기도는 방편의 기도와 본질로 다가가는 수행이라는 참된 기도가 있습니다. 저는 매일 밤 우리가 꿈을 꾸는 이유가 삶이 꿈이다라는 사실을 알려주는 힌트가 아닐까 생각해요. 방편의 기도는 꿈속에서 나쁜 꿈이 아닌 더 좋은 꿈을 꾸려고 애쓰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나 참된 수행은 꿈에서 깨어나자는 것입니다

 

내가 기도하는대로 이루어지든 안 이루어지든 이 모든 것이 실재가 아니라 허망한 하나의 꿈이라는 것을 자각하고 꿈에서 깨는 것이죠. 방편의 기도에서는 원하는 대로 이루어지는 것이 중요해요. 그러니까 열심히 빌죠. 그런데 참된 깨달음의 관점에서는 이루어져도 꿈이고 이루어지지 않아도 꿈입니다. 중요한 건 꿈에서 깨는 것이죠.

 

당장 밥도 못 먹을 정도로 가난하거나, 몸이 너무 아프거나, 정신적으로 너무 과도하게 힘든 사람에게 아무리 마음공부를 하라거나, 깨달음 공부를 하라고 해도 안 통하죠. 그래서 부처님도 근기에 따라 단계별로 설법을 하셨습니다. 재가자나 당장 힘든 사람에게는 복을 지어라, 착한 행동을 해라, 계율을 지켜라 등 시론(施論), 계론(戒論), 생천론(生天論)이라고 하는 인과응보적인 쉬운 얘기를 해주셨죠. 그러다가 어느 정도 근기가 성숙되었을 때 제욕(諸欲)의 과환(過患), 출리(出離)의 공덕에 이어 결국 사성제라는 괴로움의 소멸에 이르는 열반의 법을 설하셨습니다. 이를 차제설법이라고 해요. 그런 점에서 기도 또한 방편으로 필요합니다.

 

내가 만약 A라는 대학교 입학을 목표로 기도하려는 마음이 일어났다면 그것도 좋습니다. 하지만 A대학 아니면 절대 안 된다는 생각에 집착할 필요는 없습니다. 숭산큰스님 말씀처럼 오직 모를 뿐하는 마음으로 기도하는 거죠. 내가 정말 그 대학에 가야 하는지를 100% 알 수는 없는 것이 진실이거든요. 어쩌면 다른 대학에 내 인생을 바꿔줄 많은 귀인들이 있어서, 원하는 대학은 떨어졌지만 다른 대학에 갈 수도 있습니다. 그 대학을 나와 크게 성공할 수도 있죠

 

이처럼 우리의 의식, 의지는 내 인연이 어디인지를 완전히 알 수 없습니다. 그러니 모를 뿐하는 마음으로 기도하면, 최선은 다하되 결과에 집착하지는 않게 됩니다. 나는 모르니 부처님께 모든 것을 내맡기게 되죠. 이게 진정한 기도입니다

 

집착 없이 행하면 언제나 법계가 나를 완전히 도와줍니다. 또한 최선은 다하되 결과에 집착을 하지 않았기 때문에 되도 좋고 안 되도 좋을 수 있게 됩니다. 기도의 결과에 상관없이 언제나 나의 평화는 깨지지 않는 것이죠.

 

 

Q. ‘오직 모를 뿐’, 하지만 끊임없이 선택하고 변화하는 게 삶이지는 않을지요.

 

바다와 파도에 비유를 해보죠. 파도가 아무리 일어도 바다일 뿐입니다. 번뇌와 망상이 올라와도 생사즉열반(生死卽涅槃)’ 즉 생사가 열반이고 꿈 깬 세계와 꿈의 세계가 따로 있는 게 아닙니다. 즉 내 생각이나 의도(파도)에 집착은 안 하지만, 그 또한 바다에서 올라온 것을 알기에 한생각 올라오면 분별없이 빈 마음으로 저지르게 됩니다

 

보통 사람들은 한 생각이 일어나도, 남들이 어떻게 볼까,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을까 하는 등의 자기 분별 망상 때문에 순수한 마음으로 저지르지 못해요. 제가 학생 때 어떤 스님께서 이런 마음을 가져보라고 이야기해 주신 게 저질러라였어요. 표현이 성불의 지름길이라는 거죠. 좋아하는 사람이 있는데 혼자서 앓다가 끝나는 것보다 사랑한다고 표현하고 차이는 게 훨씬 아름답다고요. 상대방이 날 우습게 보면 어쩌나, 고백했다가 차이면 어쩌나, 이런 걱정과 분별 망상 때문에 못 하잖아요

 

마음공부를 하는 사람은 모를 뿐하며, 과도한 집착이 없기에 오히려 순수하게 저지르죠. 이것저것 따지지 않고 순수하게 실천합니다. 그러니 무집착, 모를 뿐, 비움을 말하지만, 오히려 그렇게 내려놓을 때 더 큰 열정과 실천이 뒤따릅니다

 

아는 지인이 유튜브 불교채널을 만들어 보고 싶은데 이런저런 고민이 많다고 하길래 일단 저질러 보라고 했습니다. 결과는 모를 뿐하며 내맡기고, 고민 없이 일단 저지르라고요. 처음 몇 달은 어차피 몇 명 밖에 안 볼 텐데 잘 안 나오면 어쩌나 하는 고민이 전혀 의미가 없죠.(웃음)

 

 

Q. 기도가 어떻게 깨달음으로 이어질까요.

 

세상사가 힘들고 어려울 때는 먼저 기도를 하세요. 다만 집착 없는 기도를 하세요. 기도는 응급처방과 같습니다. 응급상황이 끝나면, 이제 괴로움을 해결하고자 하는 사성제 공부, 마음공부, 발심의 이 공부를 해야 합니다

 

금강경에도 기도하라는 말은 없어도, ‘발아뇩다라삼먁삼보리’, 즉 발심하라는 말은 계속 나옵니다. 깨달음으로 갈 때 중요한 건 발심이에요. 마음만 내면 저절로 공부가 됩니다. 가짜 자기만 보느라 내 안의 부처가 숨어 있었는데, 발심하면 내가 본래 부처니까 본래부처가 본래부처를 확인하기 위해 그 발심을 현실화되도록 이끌어 줍니다. 내 안의 부처가 얼마나 기뻐하겠습니까

 

본래 부처는 완벽한 노력으로 돕고 있었는데 나 혼자 막았던 거예요. 진정한 내가 누구인지 확인하겠다고 발심하면 저절로 자기 안에 답이 생깁니다. 꿈에서 깨겠다는 발심이 핵심입니다. 그럼 내 괴로움을 해결해주기 위해 온 우주 법계가 도와주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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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승불교에서는 언어로 표현된 진리를 세속제라고 하여, 제일의제, 승의제라고 표현되는 '진짜' 진리와는 구분하여 설명하곤 합니다.

일단 진리가 언어로 표현되고 나면 일단 한 번 왜곡되고, 언어라는 상으로 그려지고, 있는 그대로를 언어로 짜맞추게 되기 때문입니다.

'사과'라는 언어는 있는 그대로의 생생한 사과라는 진짜를 있는 그대로 표현할 수 없습니다.
그저 '사과'라고 이름붙였을 뿐이지, '사과'라는 이름 속에 사과는 없습니다.

그 이름이 사과라면 사과를 먹고 싶을 때, 그 이름만 들어도 사과를 먹은 것과 같을까요?
당연히 아니죠.
사과라는 이름, 언어에는 사과가 없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깨달음을 설명하는 모든 말에는 진짜 '깨달음'이 없습니다.

그러니 '깨달음은 이런 것일거야', '해탈, 열반은 어떤 것이겠지' 하고 아무리 머릿속에서 그림을 그려 보더라도, 그것은 하나의 상이고, 이름 밖에 되지 못합니다.

그것은 진짜 깨달음이 아닙니다.
견성, 성불, 해탈, 열반, 참나, 본래면목, 그 어떤 말에도 참된 진리는 없습니다.

그래서 불교에서는 '말에 떨어지지 말라'고 설합니다.
말만 붙잡아서는, 언어에 집착해서는, 특정한 상으로 그림 그린 것을 붙잡아서는 '그것'에 다가갈 수 없기 때문입니다.

사과라는 언어도, 사과에 대한 그 어떤 설명도, 사과에 대한 사진도, 사과를 있는 그대로 드러낼 수는 없습니다.

그저 눈앞에 있는 사과를 깨물어 먹어 보면 될 뿐, 먹어 보고 나서 그 사과에 대한 맛을 설명할 필요가 없습니다.

설명해 버리면, 벌써 자기식대로 해석한 자기만의 분별심이 되고, 해석된 것이 되기에 어긋나 버립니다.

매 순간 있는 그대로의 진실을 그저 있는 그대로 경험해 보세요.

이름 붙이지 말고, 그림 그리지 말고, 해석하지 말고, 말로 표현하지 말고, 그저 있는 그대로를 느껴보세요.

보되 본 것을 해석하지 말고, 듣되 들은 것에 대해 생각하지 말고, 느끼되 느끼는 것에 대해 이름 붙이지 말고, 그저 보고 듣고 느끼기만 할 수 있습니다.

그것이 곧, 첫 번째 자리, 분별 이전, 본래자리에서의 생생한 경험입니다.
생생한 존재 자체이지요.
눈 앞에 뭐가 보이나요?
그냥 보기만 해 보세요.

.....
YouTube에서 '당장 행복해지는 마음공부, 삶은 매 순간 완벽하다, 30억 아파트도 이것과 바꿀 수 없다 - 12월 서울법회(1)' 보기
https://youtu.be/ADbXt6mLxD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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칭찬은 어떻게 해야 할까요? 칭찬에도 지혜가 필요합니다. 우리는 칭찬이 무조건 좋은 줄 알지만 역효과를 가져올 확률도 상당히 높습니다...

우리사회는 유위(有爲) 상태를 중시합니다. 하지만 부처님 법은 무위(無爲)를 강조합니다. 

명상에서도 행위(Doing)가 아닌 존재(Being)를 말하죠. 참되고 올바른 칭찬은 그 사람이 잘한 행위를 칭찬하는 것이 아니라, 그라는 존재 자체를 칭찬하는 것입니다.

사실 많은 경우 부모는 자식을 내 뜻대로 통제, 조종하기 위한 방편으로 칭찬을 활용합니다. 지금 그것을 잘하니까 계속 더 잘하라는 것이죠. 

이런 칭찬을 받은 아이는 기쁘기보다, 부담감, 심리적 압박감을 느낄 뿐 아니라, 칭찬의 결과에 부응하지 못할까봐 불안해집니다. 

외부의 권위자, 부모의 인정에 쩔쩔매고, 칭찬받기 위해 눈치 보는 아이로 커가는 것이지요.

이것은 실험에서도 증명됐는데요. 단어를 외우게 하고 너무 잘 한다고 칭찬을 해 준 뒤에 외운 단어를 칠판에 최대한 적어보라고 하고 선생님이 나갑니다. 

칭찬을 받지 않은 아이들은 적을 수 있는 만큼만 적고 자유롭게 뛰어놀지만, 칭찬을 받은 아이는 불안해하다가 결국 70% 정도가 선생님이 두고 간 단어카드를 컨닝합니다. 선생님의 칭찬에 부응해야 한다는 압박감 때문이지요.

그렇다면 어떻게 칭찬할까요? 먼저 잘 한 행위를 칭찬하기보다 아무 것도 안 했더라도 있는 그대로의 존재 자체를 칭찬해 줍니다. 

두 번째로 통제 조종하기 위한 칭찬이 아닌, 그저 분별없이 있는 그대로를 거울처럼 비춰주는 말이 좋습니다.

아이가 그림을 그렸을 때 화가 기질이 있다든가, 그림을 잘 그렸다고 칭찬하는 것 보다는 분별없는 시선으로, 아이를 판단 없이 지켜본 것을 말해줍니다.

“그림 그리고 있구나” “파란색으로 그렸네”라고 판단 없이 말하는 것이지요. 

그럴 때 아이는 부모가 판단하지 않으니 부담 없이 마음껏 자신을 표현합니다. 잘못했다는 말을 들을까봐, 칭찬을 못 받을까봐 두려워하지 않는 것이지요.

그리고 한걸음 더 나아가 “파란색으로 그렸구나. 어떤 의미니?”라고 질문을 던져주세요. 

답을 주는 게 아니라 질문을 던지는 겁니다. 답을 주려는 이유는 너는 모르고 나는 안다는 분별심 때문인데요, 질문을 하는 것은 너라는 부처님은 어떤 의미를 여기에 담았니 하고 그의 존재 자체를 물어봐 주는 것입니다. 

정해진 답이 없기에, 그의 답을 존중해 주는 것이 질문인 것이지요. 

이것은 아이와 부모를 분별된 수직적 상하관계로 보지 않고, 너도 온전한 부처님, 나도 부처님이라는 전제가 깔려 있는 것입니다.

훌륭한 중생이 못난 중생에게 가르치는 건 칭찬여래원이 아닙니다. 존재 자체를 바라보고, 같은 여래로서 칭찬하는 것입니다. 

지금 이 순간, 주위를 살펴보세요. 가족, 친구, 동료, 반려동물, 내가 먹는 밥, 입는 옷까지 세상의 어떤 것들이 나와 연결돼 있는지 느끼고 찬탄해보시길 바랍니다.

http://www.hyunbulnews.com/news/articleView.html?idxno=302088

현대불교신문
정리=윤호섭 기자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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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전혜경 2019.12.24 21:09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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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상스님 12월 서울법회 및 부산 불교아카데미 공지
[서울법회]
- 일시 : 2019.12월 21일 오후 4시~6시(20년에도 계속됩니다.)
- 장소 : 서울 용산구 원광사(4호선 신용산역 1번출구 용산우체국끼고 골목 도보 8분)
[부산 금련사 불교아카데미]
- 12월 아카데미는 12월 18일(수)에 종강합니다.
- 2020년 3월 모든 대소승 불교 경전의 핵심 가르침만을 모아 '불교경전과 마음공부' 과정이 3월~6월까지 매주 수요일 14:00~16:00 시작될 예정입니다.
.....
자녀를 키울 때, 가장 중요한 것은 아이들이 부모님에게 사랑받고 있구나 하고 느끼느냐 하는 점입니다.
'엄마, 아빠는 나를 너무 사랑하시는 것 같아! 눈에 하트가 그려져'
이렇게 느끼는 정도가 된다면, 그 아이의 마음에는 그 어떤 역경이나 괴로운 일들이 오더라도 이겨낼 수 있는 큰 사랑의 마음이 생겨나게 됩니다.
어떤 분들은 너무 사랑하기만 하면 버릇없이 큰다고 말하곤 하시는데요, 잘못했을 때조차 무조건 잘했다고만 하라는 것은 아닙니다.
사랑과 자비의 마음으로, 늘 그 큰 사랑을 바탕으로 깔고 있게 되면, 아이들의 마음에는 그 어떤 것도 이겨낼 수 있는 무한한 마음이 커가기 때문입니다.
성적이 좋으면, 착한 행동을 하면, 부모님 말을 잘 들으면 그 때 가서 그 결과로 사랑해 주는 것이 아니라, 그저 있는 그대로, 존재 자체로 그냥 하염없는 사랑을 보여주는 것이지요.
그렇게 큰 아이가 어른이 되면, 세상을 향한 자비심과 사랑이 내면에 중심을 잡게 됩니다.
나머지 소소한 것들은 그 큰 사랑과 자비심으로 인해 저절로 해결해 나갈 수 있게 됩니다.
사랑받은 사람만이 무한한 사랑을 나누어 줄 수 있겠지요.
[사진 : 금련사 김장봉사 : 금련사, 금련사유치원, 사회복지단체 보시할 김장까지 많은 불자님들께서 이틀에 걸쳐 봉사 해 주셨습니다. 깊이 감사드립니다.]


YouTube에서 '[보현행원품(1)] 불면증 해결, 당면한 괴로움을 해결하려면, 화엄경과 보현행원품 소개' 보기
https://youtu.be/kMGePUGg19c
Posted by 법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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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보통 여기에 '나'가 있고, 내 바깥에 외부의 독자적인 세계, 대상이 있다고 여깁니다.

그래서 내가 세상을 인식한다고 여기지요.

오늘 절에서 떡국을 먹었는데요, 어떤 사람은 이 떡국을 짜다고 느끼고, 다른 사람은 싱겁다고 느낍니다.

그러면 그 싱겁다거나 짜다는 것은 떡국 속에 실체적으로 있는 것일까요? 아니면 나에게 그렇게 느껴지는 것일까요?

나에게 그렇게 느껴질 뿐입니다.
내 바깥에 짜거나 싱거운 떡국이라는 실체가 있어서, 내가 그것을 인식하는 것이 아니라, 그 짜거나 싱겁다는 인식은 온전히 나 자신에게서 나옵니다.

다른 사람은 다르게 인식하기에 다른 사람에게는 나와는 다른 떡국이 있는 것입니다.

한 여인을 봅니다.
한 사람은 너무 예쁘다고 하고, 다른 사람은 너무 밉다고 합니다.
그 여인은 사람에 따라, 인식에 따라, 인연 따라 존재할 뿐입니다.

어떤 사람에게는 예쁜 여인으로, 다른 사람에게는 미운 사람으로 있지요.
이것을 인연가합으로 있다, 가짜로 있다, 실체가 아니다, 무아다라고 합니다.

진짜로 있는 것이 아니라, 그런 인식이 있을 때만 그런 존재로 있는 것처럼 느껴질 뿐입니다.

그 여인 뒤쪽에 있던 자신의 여자친구를 보고 있는 사람이라면, 그 여인을 전혀 인식하지 못했을 수도 있습니다.

이처럼 한 사람, 한 존재, 하나의 대상은 진짜로 있는 것이 아니라, 인연 따라, 사람의 의식에 따라서만 존재합니다.
이것을 십이처, 십팔계가 공하다고 합니다.

즉 나와 세상과 인식은 따로 따로 있는 것이 아닙니다.

여기에 내가 있고 밖에 세상이 있고, 내가 세상을 인식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 세 가지가 서로 연기적으로 인연화합할 때만 거짓으로 있는 것처럼 느껴질 뿐입니다.

육근, 육경, 육식 중에 어느 하나라도 없다면, 그 대상은 인식되지 않습니다.
인연이 화합되어야지만 인연따라 있는 것처럼 느껴질 뿐입니다.

그러니 이것이 있어야 저것도 있는 것이어서, 이것은 저것을 근거로 있을 뿐입니다.

모든 것은 인연 따라 십이처가 접촉할 때, 만들어진 그림자를 보고, 그것이 맞다고 여기고, 진짜로 있는 것이라고 여겨서 거기에 집착함으로써, 자기만의 세계가 창조되는 것이지요.

그런데 짜고 싱거운 것은 대상에 있는 것이 아니라, 나에게 있는 것처럼, 사실 대상이라는 것이 내 바깥에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내가 대상을 접촉하는 인연으로 동시에 생겨납니다.

나와 대상은 동시생, 동시멸이지요.
보는 자와 보이는 대상은 둘이 아닌 하나입니다.

보는 자, 보는 작용, 보이는 대상 이런 식으로 나누어 분별할 수는 있지만, 사실 이것들은 서로 나누어져 있지 않습니다.

보는 자가 곧 봄이고, 봄이 곧 보이는 대상이며, 보이는 것이 곧 보는 자입니다.

이 세 가지는 동시에 생겨나고 동시에 사라집니다.

나와 세상이 둘로 나누어져 있는 것이 아니라, 그렇게 인식하고 있을 뿐입니다.

유식불교에서는 보는 쪽을 견분, 보이는 대상을 상분이라고 해서, 하나의 의식을 중생들은 보는부분(견분)과 보이는 대상(상분, 보이는 모양)으로 둘인 것으로 착각을 한다고 설합니다.

나와 세상은 둘이 아닙니다.
내가 곧 세상이고, 보는 자가 곧 보는 것이며, 생각하는 자와 생각하는 것이 둘이 아닙니다.

꿈 속에서는 나와 세상이 따로 있는 것 처럼 느껴지지만, 꿈을 깨고 보면 꿈 속의 나와 세상과 그 속에서 벌어지는 모든 일들이 전부 하나의 꿈이었을 뿐임과 같습니다.

이것이 곧 그것입니다.
내가 곧 세상입니다.
보는 자가 곧 보는 것입니다.

다만 생각이 착각을 일으켜, 나와 세계를 둘로 나누어 놓았을 뿐입니다.
이것이 불이중도입니다.
둘이 아닌 존재의 실상입니다.
.....
#목탁소리
#수행명상
#마음공부
YouTube에서 '[서울법회(11월)] 진리를 확인하려면? 견성의 체험? 선수행의 실재, 생활 속 참선' 보기
https://youtu.be/WCWG13TgBEw
https://youtu.be/WCWG13TgBE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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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은 부처를, 참나를, 깨달음을 찾고 있다.
그러나 여기 있는 당신이 저기 어딘가에 있는 진리를 찾는다는 바로 그것이 진리와 멀어지게 만들고 있다.
왜 그럴까?
당신은 당신을 찾는자, 구하는 자라고 여기면서 찾을 대상, 구할 것을 찾아 나서지만, 사실 당신은 찾는자가 아니라, 찾는 것이다.
눈이 눈을 볼 수 없듯이, 찾고 있는 당신이 바로 찾는 그것이기 때문에, 바깥으로 찾고 있는 동안은 결코 그것을 찾을 수 없다.
진리를 찾고 있는 그것은 무엇인가?
무엇이 그토록 진리를 갈망하고 있는가?
찾고 있는 대상을 찾아 바깥을 기웃거리지 말고, 찾고 있는 바로 그 놈이 누구인지를 살펴보라.
회광반조.
당신은 무엇을 찾고 있는가?
바로 당신을 찾고 있다.
찾는다는 바로 그 사실이 당신을 증명해주고 있지 않은가?
.....
YouTube에서 '[일요법회, 11.10] 지금까지 완전 착각하며 살았다면? 헛된 착각을 거두고 바른 지혜를 얻으려면, 반야심경 강의 종강' 보기
https://youtu.be/cQ3HTn_YPbc
Posted by 법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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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Favicon of https://h-agit.tistory.com BlogIcon [ H ] 2019.11.25 00:34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좋은 말씀 감사합니다.


입시기도 하는 첫 번째 부모님의 마음은
방하착의 마음이라야 합니다.
자식에 대한 집착, 대학에 대한 집착,
성적에 대한 집착을 부모님이 먼저 놓으셔야 합니다.

어느 대학을 가야한다거나,
어느 정도의 성적은 내야 한다거나,
옆집 누구보다는 시험을 잘 봐야 한다는 등의
자기 고집을 비워 버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자기 고집이 크면 클수록
자식에 대한 기대심리와 집착이 커지고,
자식이라는 경계에 크게 휘둘릴 준비를 하고 있는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입시기도를 하지 말라는 말이 아닙니다.
집착을 놓고 하라는 말입니다.
집착으로 하는 기도는 바라는 바가 크기 때문에
결과에 따라 우리 마음은 극락으로 지옥으로 오고 갈 것이기 때문입니다.

괴로움을 미리부터 준비하는 일 밖에 되지 못합니다.
진정 놓았을 때 전체를 잡을 수 있습니다.
진정한 사랑은 잡는 것이 아닌 놓는 사랑입니다.

새옹지마란 말을 새겨 보세요.
우리 중생의 눈으로 볼 때에는 좋은 대학 가는 것이
성공처럼 보일지라도 보다 넓은 안목으로 본다면
당장의 실패도 성공을 위한 실패일 수 있습니다.

마음의 중심을 잡으시면
당장에 대학이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굳게 자성불을 믿고 넉넉한 마음으로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온전히 믿고 놓는다는 말은
어떤 결과도 모두 자성부처님의 뜻임을 굳게 믿겠다는 말입니다.

굳은 믿음이 있으면 잘 되고 안 되고가 없습니다.
오직 수행할 뿐입니다.
크게 믿고 크게 놓고 가시는 길이
가장 밝게 이루는 일임을 깨쳐보셔야 할 것입니다.

두 번째 입시기도를 빈다는 의미로 받아들이기 보다는
닦음의 의미로 받아들여야 할 것입니다.
입시 수행이 되는 것입니다.

삶의 힘겹고 괴로운 모든 일들을 경계로 보고
마음을 닦음으로 경계를 녹여가듯,
입시라는 삶의 경계를 마음공부의 재료로 삼아
거뜬히 내 안에서 녹여내야 한다는 말입니다.

입시며 공부, 성적 또한 내 안의 나툼이기 때문입니다.

만약 여러분이 입시에 '과도하게' 집착하고 있다면, 떨고 있다면, 초조해하고 있다면, 또 결과에 크게 낙담한다면, 그건 입시라는 경계에 휘둘리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물론 안 휘둘릴 수는 없지만, 너무 과도한 집착은 내려놓을 수 있습니다. 최선은 다하되 결과는 내맡긴다는 마음으로 마음 편히 지낼 수 있다면 입시라는 경계를 수행자답게 잘 다스리고 있는 것이지요.

입시라는 괴로움에 크게 휘둘리지 않고 있는 것이란 뜻입니다.

세 번째로 그렇기에 입시기도 때에는
기도문을 쓰기 보다는 발원을 세워야 합니다.

성적 몇 점 이상, 어느 대학 이상 합격을 비는 개인적인 기도 보다는
지금 원하는 바를 이룸으로써
크게 회향할 수 있는 토대를 만들겠다는
큰 마음으로 발원해야 합니다.

이를테면 ‘자식 서울대 붙게 해 주세요’ 하기 보다는
‘자식 서울대 입학으로 원하는 공부 원만성취하여
사회에 널리 회향하길 발원합니다.’
하는 식의 이타적인 자비심으로 궁극의 회향을 삼아야 합니다.

자신만을 위한 기복적인 기도가
목마른 사람에게 한 바가지의 물을 가져다 준다면,
이타적인 회향심이 담긴 발원은
마치 한량없는 물이 셈솟는 우물을 파는 것과도 같습니다.

이것이 바로 그릇을 키우는 일입니다.
그릇을 키워야 법계(法界)의 법비를 한껏 받아
필요한 곳곳에 쓸 수 있는 노릇입니다.

모쪼록 수능시험을 위해 애쓴 수험생들을 응원하며, 그들을 위해 기도할 많은 가족들의 행복과 무집착과 참된 지혜를 축원드립니다.

오늘 금련사에서는 매년 해오듯 수능 시간표에 맞춰 기도수행을 합니다. 꼭 수능이 아니신 분들도 시간되실 때 함께 동참하셔서 지금 여기에서 기도하며 깨어있는 마음공부를 함께 하시는 것도 좋겠습니다.
.....

YouTube에서 '[삶의 나침반] 도전을 두려워 마! 과거로 현재를 해석하지 마! 날마다 새롭게 깨어나라' 보기
https://youtu.be/gH4dZDbDsG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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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월 서울법회 안내
일시 : 11월 16일(토)
          오후 4:00~6:00
장소 : 서울 용산 원광사
  (신용산역 1번출구에서 용산우체국 보고 좌측 골목 직진 후 위병소에서 우회전,네비:원광사)
* 혹시 공지가 없더라도 매월 3주차 토요일에는 항상 원광사에서 법회합니다
.....

즐거움과 괴로움, 이 두 가지가 모두 필요하다.

그 두 가지는 서로 다른 방식으로 가르치고 있다.

순경과 역경이 교차하는 삶의 파동을 허용해 주라.

두 방식 모두를 감당함으로써 균형 있게 삶을 배우라.

행복하고 즐거운 삶을 살아보는 것이 반드시 필요한 것처럼, 괴로움과 역경을 이겨내 보는 삶의 경험 또한 소중하다. 

자식에게 좋은 일만 있으면 좋겠고, 대인관계도 좋고, 좋은 선생님만 만나고, 좋은 성적만 받았으면 좋겠다고 여기지 말라. 

오히려 역경과 순경이라는 양 극단의 경험을 조화롭게 감당하게 해 줌으로써 균형 잡힌 인격으로 성장할 수 있게 해 주라. 

괴로움을 감당할 수 있는 기회는 하나의 선물이다. 

괴로움을 감당하고 이겨내 보지 못한 아이는 언젠가 괴로운 상황이 올 때 그것을 이겨내는 힘이 없다. 

삶의 의미를 깨닫는 데는 역경과 순경, 이 두 가지가 모두 필요하다. 

그 두 가지는 서로 다른 방식으로 우리를 일깨우고 있다. 

두 방식 모두를 수용함으로써 그 양 쪽에서 균형 있게 삶을 배우라. 

한 쪽에 치우치기 보다는 중도적으로 삶을 경험하라.

YouTube에서 '[10.22 법문] 견성의 체험, 깨달음은 어떻게 오는가? 깨달음에 대한 상을 깨라!' 보기
https://youtu.be/QWCN-Lons8s
Posted by 법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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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주 토요일 10월 19일
오후 4시~6시까지
서울 용산 원광사에서
'법상스님 10월 서울법회'가 있습니다
(신용산역 1번출구에서 용산우체국 보고 좌측 골목 직진, 국방부 후문에서 우회전)

.....

삶은 이대로 완전합니다.

나도 세상도, 모든 것이 이대로 원만구족합니다.

완전한 세상을 완전하게 존재하도록 그대로 내버려 두는 것이야말로, 우리가 할 수 있는 최고의 수행입니다.

나만이 아니라, 이 세상도, 타인도, 모두가 자기대로 자기답게 존재할 수 있도록 허락해 주는 것이지요.

지금 이렇게 경험되어지는 이대로 모든 것을 그대로 허용해 주세요.

그것이 있는 방식대로 있을 수 있도록 허락해 주는 것입니다.

삶에 깊이 개입하지 않는 것이고, 내 방식대로 존재하도록 조종하려 들거나, 애쓰지 않는 것입니다.

지금 이대로가 진실이기 때문입니다.

지금 이대로 경험되도록, 진리가 진리답게 살아나도록 약간의 노력을, 약간의 수행이란 것을 해 본다면, 이런 방식이 어떨까요?

지금 여기에서 경험되는 것이 날것으로, 생생하게, 그저 일어나도록 경험해 주는 것입니다.

어떤 소리라도 상관이 없어요. 들려오는 모든 소리를 해석하지 않고 그대로 들어 봅니다. 그냥 듣기만 합니다.

보이는 모든 것을 그저 보기만 하고, 몸에 느껴지는 모든 감촉, 감각들을 그저 맨느낌으로 느껴주기만 합니다.

그것을 통해 무언가를 깨닫겠다고 느끼는 것은 곧 중생심일 뿐입니다.

있는 그대로 느끼고 보고 듣는 것을 통해서 얻어지는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무엇을 얻겠다거나 하는 추구심 없이 그저 지금 이 순간을 온전히 받아들여 살아 주는 것입니다.

사실, 이것 외에 무엇을 더 할 수 있겠습니까?

삶을 사는 것, 그것이 삶의 목적입니다.

그저 그렇게, 지금 이렇게 경험되는 것이 전부입니다.

바로 이, 아무 것도 아닌, 이 평범한 이대로의 삶이 그저 이대로 경험되도록 허용해 주기만 하면 됩니다.

이렇게 단순합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살아지는 이대로 살지 못하고, 이대로가 아닌 다르게, 내 방식대로, 남보다 더 뛰어나게 살려고 하는 아상과 분별로 인해 이 아무 문제 없는 삶을 상대로 싸우고 있습니다.

삶과의 전쟁에서 내가 승리할 수는 없습니다.

삶이 바로 나이기 때문이지요.

삶에 항복하세요.

진정한 나 자신인 삶과 하나가 되어 삶을 타고 흐르세요.

.....

YouTube에서 '[삶의 나침반] 좌절의 순간이 올 때, 한 번은 꺾이는 것이 인생, 노후의 마음공부' 보기
https://youtu.be/W6N9_1npU88
Posted by 법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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