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전생은 히말라야의 거센 바람 – 안나푸르나 순례(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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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말라야 명상순례

나의 전생은 히말라야의 거센 바람 – 안나푸르나 순례(3)

목탁 소리 2012. 6. 25. 21: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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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일차

 

산중 도시, 촘롱을 지나며

밤늦도록 빗줄기가 이어지더니 이른 새벽 빗물 머금은 산과 나무와 풀들과 논의 벼까지 모든 생명들이 일제히 고개를 치켜들고 생기어린 춤을 춘다. 밤새 비는 그쳤고 비 그친 산은 더없이 개운하고 청명하다. 간단히 베지누들수프(야채라면)와 직접 새벽에 할아버지께서 소에게서 짜 끓인 우유로 만든 찌아 한 잔으로 아침을 해결하고 길을 떠난다.

오늘은 간드룽을 거쳐 촘롱(Chhomrong, 2170m)까지 갈 계획을 잡고 여유 있는 느린 걸음을 옮긴다. 한두 시간 산길을 오르니 간드룽을 만난다. 얕은 산 정상 즈음에 올망졸망 게스트 하우스들과 시골 농가가 모여 있는 우리나라 작은 시골 마을 같은 곳이다. 그래도 산에서 처음 만나는 규모 있는 도시인 셈이다. 그도 그럴 것이 대부분의 트레커들이 첫날 밤을 보내는 곳이니 그럴 법도 하다.

어제 하룻밤을 보낸 숙소와는 차원을 달리하는 최신시설을 갖춘 깨끗한 게스트 하우스들이 즐비하고, 언뜻 살펴 본 메뉴판에도 훨씬 다양한 먹거리들이 입맛을 유혹한다. 게스트 하우스 뒤로 히말라야의 장쾌한 설산이 두둥 하고 불현듯 나타났다.

마을 곳곳에 히말라야의 아이들이 삼삼오오 모여 앉아 지나가는 여행자들을 지켜보고 있다.

마을을 관통하며 마을 사람들의 소소한 살림살이에 눈이 머문다. 어릴 적 살던 시골집 풍경 그대로를 옮겨 놓은 듯 낯설지 않은 풍경 속에서 고향을 느낀다.

마을이 처음에는 작은 듯 하더니, 계속해서 제법 큰 규모의 산중 도시가 본색을 드러낸다.

아직 점심 시간은 이르고 아침 먹을 것도 채 소화가 안 된 터라 조금 더 가서 점심을 먹기로 한다. 한 시간 쯤 더 가니 콤롱 고개(Kyumrong, 2,255m) 정상 즈음에 식당과 간이휴게소가 하나 나오고 휴게소 의자에 앉아 고개를 돌리니 장쾌한 풍경이 펼쳐진다. 산 아래 계곡이 흐르고 가파른 내리막과 저 계곡 너머 산으로 오르는 가파른 오르막이 나를 손짓하듯 부르고 있다.

 

오르막 길의 즐거움

안나푸르나를 내려오며 '어렵게 오르면 그만큼 또 내려가야 하길 몇 번이고 반복해야 한다'고 했던 한 여행자의 허탈한 말투가 생각났다. 하기야 오르고 내리길 반복하기 위해 산에 오르는 것이 아닌가. 가만 느껴 보면 오르막길은 오르막 길 나름대로의 재미와 묵직한 느낌이 좋고, 내리막길은 오르막에서 지친 다리를 풀고 가볍게 흘러내릴 수 있어서 좋다. 때때로 내리막길보다 오히려 오르막길이 나 자신을 더 진하게 깊이 바라볼 수 있게 해 준다는 데서 더 매력 있는 느낌을 주기도 한다.

아무래도 내리막길 보다는 가파르고 힘겨운 오르막에서 몸은 급한 마음을 접고, 천천히 아주 천천히 한 발 한 발을 거북이처럼 걷게 된다. 그런 느릿느릿 힘겨운 숨을 몰아쉬다 보면 저절로 생각은 저만치 달아나고 만다.

바로 이 순간이 일반적인 사람들도 때때로 생각을 비우고 집중과 몰입에 들 수 있는 자연스러운 명상의 순간이 되기도 한다. 오르막은 내리막에서처럼 마음이 들뜨지 않고 묵직하게 가라앉으며, 입 또한 조잘대기 보다는 저절로 침묵하게 되고, 그간의 끊임없이 어어지던 생각이라는 내면의 소설가도 그 집필을 멈추고 만다. 이 순간을 잘 지켜보는 사람이라면 오르막의 육중한 무게감이 우리에게 선사하는 고요와 평온의 깊이를 온 존재로써 느껴볼 수 있을 것이다.

어릴 적만 해도 오르막길은 힘들고 어려운 곳이며, 오르막길을 오를 때는 조금 더 힘들여 오르면 내리막이 나오겠지 하며 내리막길이 마치 행복의 조건인 양 내리막길을 좇곤 했다. 물론 삶도 그랬다. 힘겹고 어려운 일이 생길 때는 '이 역경도 언젠가는 끝나겠지, 이 오르막이 끝나고 나면 내 삶에도 반짝이는 내리막길이 있을거야' 라고 스스로를 위로하곤 했다.

그러나 오르막과 내리막, 행복과 불행, 역경과 순경계라는 두 가지 차별심을 내려 놓고 그 양 극단의 길을 가만히 현존하며 살펴보니 그 분별이 무의미한 것임을 점차 깨닫게 된다. 오르막도 오르막대로 좋은 점이 무수히 많다는 것을 깨닫는 것이다. 돌이켜 보면 힘겹고 고되며 슬픔이 지속되는 순간에조차 '빨리 지나가기를' 바라는 마음을 잠시 내려 놓은 뒤, 잠시 그 자리에 서서 그 상황들과 함께 어울려 있다 보면 그것 또한 그 나름대로의 의미와 목적을 가지며, 심지어 흥미와 묘한 재미를 가져다 주기도 한다.

괴로울 때, 슬플 때, 실현 당했을 때, 실패했을 때, 외로울 때, 시련이 찾아왔을 때, 발버둥 치며 벗어나려고 애쓰고 애쓰다 마음처럼 잘 되지 않던 어느 순간, 문득 모든 것을 포기하고 잠시 그것과 함께 있어 본 적이 있는가? 벗어나길 멈추고 그것과 함께 있으며 그것을 받아들이고 수용해 줄 때 바로 그 의식의 흐름이 바뀌는 순간에 깨달음과 평화는 찾아온다. 영적인 성숙이란 언제나 그런 순간에서 반짝이며 깃드는 것이 아닐까.

 

내 삶의 클라이막스가 흐른다

한 달음에 가파른 내리막 길을 날아 한 마리 노새가 가볍게 착지하듯 콤롱 계곡(Kyumrong Khola) 옆 콤롱(Kyumrong, 2010m) 마을에 도착해 점심을 먹는다. 주로는 달밧을 시켜 먹곤 하는데 산에서 먹는 음식에, 또 네팔 음식에 조금씩 적응을 해 가는 건지 이제는 달밧이 그저 우리 밥 먹는 것처럼 맛있고 행복하다. 그러나 매번 먹는 달밧이 물렸는지, 색다른 메뉴에 눈길이 간다. 산중 허름한 게스트 하우스에서 먹는 피자는 어떤 맛인가 궁금하기도 하고, 맛은 포기한다는 마음으로 혹시나 싶은 마음에 시켜본 피자 맛이 일품이다. 하기야 이 배 고픈 때에 무엇인들 맛 없을 수 있으랴.

따스한 오후 햇살과 계곡을 기면서 흐르는 느린 바람의 나지막한 속삭임, 그 달콤한 속삭임에 몸둘바 모르고 사랑에 빠져버린 코스모스의 하늘거리는 춤사위 하며 모든 것이 지금 이대로 완벽하다.

세상 모든 것이 지금 이대로 족하다. 태초의 자연과 하늘과 바람과 계곡 물소리를 고스란히 간직한 듯, 이 속에 몸을 박고 숨 쉬며 살아가는 구릉족 원주민들조차 이 야생의 거룩한 신의 품속에서 하나의 자연으로 숨 쉬고 있다.

점심 식사 후의 이 여유로운 바라봄. 대자연과의 하나 되는 순간!

이런 순간이야말로 매 순간 우리가 그 어떤 것과도 바꿀 수 없는 우리 삶의 최고의 클라이막스가 아닐까. 그 어떤 거창한 성취나 엄청난 소유, 높은 지위나 명예, 유명세나 인기가 가져다주는 거추장스런 삶의 순간이 클라이막스가 아니라 매일 매 순간 마주할 수 있는 우리 앞의 바로 이러한 생생한 존재와의 대면, 그 대자연과의 마주침, 교감, 바로 지금 이 순간의 깨어있음, 그 소박한 평범한 순간이야말로 우리 삶에 최고의 절정이다.

이제 다시 내려온 길과 똑같은 높이의 오르막을 고스란히 걸어 올라야 한다. 한 걸음, 한 걸음, 한 숨, 한 호흡의 색다른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고 눈길을 줄 시간!

계곡과 함께 흐르는 마을 초가들과 논두렁 계단들이 오후 햇살을 받아 금빛으로 반짝인다.

몇 걸음 오르고 고개 들어 저들을 바라보고, 또 몇 걸음 걷다가 하늘을 바라보길 두어 시간 이렇게 오르막은 오르막 대로의 삶의 정취를 간직하고 있다. 곳곳에 작은 계곡 물소리가 새소리와 어우러져 아름다운 음악을 연주해 주고 있다.

 

나의 전생은 히말라야의 거센 바람이었으리라

네팔의 특색 있는 시골 특성이라면 뭐니 뭐니 해도 산 중턱이고 정상이고를 가리지 않고 지어진 집들과 논밭의 그림 같은 풍경일 것이다. 네팔 자체가 히말라야의 장대한 산맥들로 둘러쌓여 있다 보니 평지랄 곳이 별로 없어서 그런가, 네팔의 마을은 거의가 산을 끼고 그 허리춤이나 머리 꼭대기에 한두 채 삶의 터전을 그려내고 있다.

나는 개인적으로 워낙 높은 곳을 좋아하고, 시야가 툭 트인 풍경을 좋아하는 터라 이런 네팔 산마을의 전경들이 여간 반가운 것이 아니다. 오죽했으면 한국에서도 강원도나 지리산 자락을 다니다 산 중턱에 한 두 채 낡은 집을 만날 때면 당장에 뛰어올라가 내 작은 오두막이나 토굴로 쓸 수 없을지를 여쭙고 싶어질 정도다.

지리산을 종주할 때에도 나는 늘 높은 봉우리만을 쫒아 다니곤 했다. 지리산 하면 가장 떠오르는 풍경도 높은 봉우리 위에 홀로 앉아 오고 가는 사람들이며, 파노라마처럼 펼쳐지는 산하를 굽어 보는 것이었다. 나는 늘 그랬다. 높은 곳 어디 쯤에 앉아 대자연을 굽어보는 것이 그렇게 좋았다. 그렇게 앉았다가 바람이 불어올 때는 잠시 눈을 감고 온몸에 젖어드는 바람의 숨결을 느꼈다.

아마도 나는 전생에 높은 산을 표표히 휘감고 여행하는 거센 바람이었나 보다.

언제나 길을 걷다 툭 트인 풍경을 만날 때면 어김없이 그 자리에 주저앉곤 했다. 이런 내 취향 상 네팔의 이런 풍경들은 나의 그리움, 나의 소망을 마구 마구 현실로 거두어 들여 줄 것만 같은 기대를 품게 한다. 이런 곳에 저 농가 하나를 얻어 나름의 공부처요 터전으로 은둔하며 사는 것도 아름다운 한 생의 이야기가 되지 않을까 싶은 생각도 든다.

화엄경이나 도덕경, 바가바드 기타나 신약 같은 내밀한 지혜서들을 읊어가면서 말이지. 하하. 이런 생각 끝에는 항상 환한 웃음이 묻어난다. 저들의 웃음처럼.

 

소설을 써라 소설을 써!

이런 저런 생각에 잠기며 걷다 보니 어느덧 촘롱이다. 그러고 보니 촘롱까지 오면서 내 머릿속에서는 이미 이 아름다운 터전에 자리를 잡고 토굴을 짓기도 하다가, 그 생각들은 어느덧 한국의 낯선 농가, 산하를 굽어보는 높은 산촌 마을에 터를 잡고 농사를 지으며, 도를 닦으며, 소소히 책을 읽은 한도인이 되기도 하고, 한바탕 소설을 쓰고 있지를 않는가. 이것 봐라. 아까 전에 거친 오르막을 거닐 때에는 그 느긋한 발걸음을 챙기고, 그 가쁜 숨을 챙기느라 생각이고 뭐고 없이 무던히 텅 빈 마음으로 걷다가도 오르막이 끝나고 평지의 편안한 길을 걷다 보니 슬그머니 생각이란 놈이 자신만의 오랜 습에 길들여진 이야기를 펼쳐놓지를 않는가.

생각이 끊임없이 솟구치는 시간을 되짚어 보면 그렇게 생각에 빠져있던 순간의 자연 풍광은 기억에서 희미하다. 생각이란 녀석에게 주인 자리를 내주고 있던 순간 나는 더 이상 히말라야를 걷고 있는 것이 아니다. 생각이라는 통속적이고 진부한 길 위를 걷고 있는 것일 뿐.

가만 보면 생각이란 녀석은 우리 머릿속에서 너무나도 많은 것들을 생각해 내면서 우리의 내면을 정신 없게 만들곤 한다. 생각에 빠져, 생각이 온갖 소설을 쓰도록 내버려 두는 그 순간에 나는 없다. 그저 생각이란 녀석이 자신의 오랜 이야기를 두서없이 꿈을 꾸듯 시정잡배처럼 마구잡이로 풀어헤칠 뿐!

'아차!' 하며 그 생각을 주시할 때, 비로소 한 편의 공허한 소설은 막을 내리고 이제부터 진짜배기 삶의 순간이 나를 통해 숨을 쉬게 되는 것이다.

길을 걷다 문득 생각이 솟구치고 있는 순간을 관찰하면 잠시 멈추고 자신에게 한 마디 경책을 보낸다.

'소설을 써라. 소설을 써!'

그러고 나면 과거와 미래를 분주히 쏘다니던 생각이 들킨 도둑 마냥 슬그머니 꼬리를 내리고 몸 있는 곳에 마음도 함께 붙어서 온전히 길을 걷게 되는 것이다. 몸 있는 곳에 마음도 함께 있는 다는 것이 쉬우면서도 이렇게 어려운 일이다. 몸은 언제나 지금 여기에 있지만, 마음은 늘 과거나 미래를 쏘다니며 생각으로 소설을 쓰는 것이다. 명상이란 어쩌면 아주 단순한 것이다. 몸 있는 곳에 언제나 마음도 함께 있는 것, 그것이 수행이며 참선이다.

산길을 걷는 모든 순간이 그런 깨어있음의 생생한 진짜 순간이 되게 하리란 다짐으로 다시 길을 걷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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