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요, 그 우리가 이제 생각하고 있는 우리는 어떻게 생각을 하냐 하면

여기 안에 안에는 나라는 존재가 있고, 바깥에는 나라는 피부,

바깥 이라고 생각 할지 어디라 생각 할지 모르겠지만

내 바깥에는 바깥의 세상이 따로 있다 이렇게 생각을 합니다.

그래서 내가 바깥에 있는 세상과 접촉을 하면서 이 세상을 인지하고 있다 이렇게 생각합니다.

즉 나라는 것, 독자적인 어떤 실체가 따로 있고

바깥에는 저마다 자기만의 어떤 독자적인 규범을 가지고

자신의 삶의 룰을 따르고 있는 어떤 특정한 외부 존재가 별도로 있다고 여긴다 말이죠.

 

저 나무 한 구르는 저기 저대로 정해진 대로 있지 않습니까 그렇죠?

 그것을 우리가 그저 인식할 뿐인 거겠죠. 우리는 그렇게 보고 있단 말이죠.

뭔가 실체적인 무언가가 내 바깥에 절대적으로 전적으로 탁 존재하고 있고

그래서 그것의 어떤 특징이나 이런 것들을 사람들이 저마다 인식하고 있다 그렇게 여깁니다.

그래서 우리는 어떤 오류를 범하느냐 하면 어디 절에 갔다 왔어? 이렇게 물어 봅니다

아니면 어디 좋은데 여행지에 갔다 왔어? 하고 물어보면,

어 나도 갔다 왔어, 나도 알아 이렇게 저마다 다 안다고 생각해요.

그러다 보니까 어떤 특정한 한 여행지를 갔다 왔다 이러면 너도 갔다 오고 나도 갔다 왔다 이러면

같은 것을 보고 왔을 거라고 지리짐작을 해버립니다.

근데 같은 여행지에 가서 같은 것을 보고 오지를 않죠.

사람들은 저마다 자기 업대로 보고 옵니다.

, 무슨 나무 연구가 같으면 그 지역에 있는 나무나 어떤 식물, 꽃들을 주로 보고 올 수도 있고요,

뭐 수석 전문가는 돌 같은 것들을 주로 보고 왔었을 수도 있겠죠.

어떤 한 사람을 만날 때도 마찬가지 입니다.

그 사람을 만나고 나서 그 사람 알아? 나도 알아 그 사람, 이라고 얘기는 하지만

우리가 진짜 그 사람을 아는가 라고 인제 얘기를 해보면 어떤 사람은 그 사람을 똑같이 십분 만나고 왔는데

그 사람은 성격이 어떻고 이렇게 얘기를 하고 또 어떤 사람은 그 사람은 능력이 어떻고

그 사람은 외모가 어떻고 저마다 보는 사람마다 관점을 다르게 이해한단 말이죠.

그러니까 똑 같은 사람을 보고 왔는데도 백이면 백 전부다 다른 것을 보고 왔단 말이죠.

그럼 우리가 생각 했을 때 그 바깥에 그 만의 독자적인 어떤 정해진 실체가 있는가

정해진 어떤 독자적인 바깥에 있는 어떤 그 무엇도 정해진 실체라는 것은 없고

다만 사람들이 어떻게 인식 하느냐에 저마다 인식하는 방식의 차이가 있을 뿐 입니다.

우리가 착각하고 있는 것이 내 바깥에는 뭔가 독자적인 실체가 있다라고 항상 생각 한단 말이죠.

, , , , , 뜻이라는 육근이 인제 인식활동 뭐 감각활동, 감각작용 이렇게 얘기하는데

눈으로 뭔가를 보고, 귀로 뭔가 소리를 듣고, 코로 냄새를 맡고, 입으로 맛보고 몸으로 촉감을 느끼고

의식으로 생각을 한다 말이죠. 이 여섯 가지가 접촉할 때 바깥에 있는 대상을 접촉할 때 이 여섯 가지 기능을 활용해서 우리는 그것을, 대상을 파악 합니다.

그래서 색, , , , , 법 이라는 내 바깥에 있는 대상을 파악하는데요

그걸 육근과 육경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눈으로 뭔가를 볼 때 이 보는 의식이 생깁니다.

알음알이 판단 분별이 생기는 거에요.

이게 뭐구나 하고 판단 한다 말이죠.

이 육식 의식의 도움을 받아서 우리는 이걸 보면 컵이라고 분별하고 분별해서 아는 것이죠.

아는 마음을 우리는 식이라 그럽니다. 그래서 보통 마음 이러면 식을 마음이라고 해요.

그래서 심은 식의 동의어다 하는데 마음과 의식 이런 말은 같은 말로 쓴다는 말이죠.

그래서 뭔가를 파악할 때 내 바깥에 있는 뭔가를 파악할 때 우리는 마음으로 인식으로 인식되는 것을 이제 알았다.

파악했다. 이렇게 여기는 겁니다. 근데 이것이 이제 근원적인 어떤 오류를 범하고 있는 것이라 그러죠.

내 바깥에 뭔가 독자적인, 여러분들도 다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까.

바깥에 뭐가 실체가 있다 이렇게 느끼자나요.

근데 우리는 바깥의 실체가 뭔가 진짜로 있어서 그것이 있다고 여기는 것이 아니고,

초기불교의 설명해 의하면, 내 육근이라는 감각기관과 바깥에 있는

대상이라는 감각 대상과 그것이 접촉했을 때

인식 작용이 일어나는 것뿐이랍니다.

우리가 안다는 마음, 인식 한다라는 인식 작용 또한 내가 진짜 있고

바깥의 대상이 실제 있어서 이게 접촉하면 내가 바깥에 있는 것을 인식하는 구나 이게 아니고,

근데 뭐, 현대 과학이나 이런 거에는 바깥에 있는 실체가 도대체 그것이 어떤 특성을 가지느냐,

어떤 이치를 가지느냐 하고 그것을 파고 들어서

이것만의 독자적인 어떤 규범이나 어떤 법칙이 있다라고 생각해서

이것은 어떤 법칙으로 움직이고 있느냐 이걸 연구하는 것이지 않습니까.

근데 그런 건 없다는 것이죠. 요즘에 양자물리학에서 비로서

아 우리가 지금까지 과학에서 물리학에서 바깥에는 어떤 독자적인 것들을

그것은 어떤 특성을 가지고 어떤 실체를 가지는지를 연구하는 학문이었단 말이에요.

근데 바깥에 언제나 독자적인 실체가 있었고 사람은 그게 어떤 특징을 가지고 있는지를

연구하는 존재에 불과했단 말이에요. 그런데 지금의 양자 물리학에서는 그게 아니구나 라는 것이 분명해 졌어요.

바깥에 실체가 있어서 내가 그것을 보고 인식하는 것이 아니고

바깥에 있는 실체라는 별도가 있는 게 아니라 내가 어떤 의식을 가지고 보느냐에 따라서

바깥의 대상이 규정되는 것이구나.

이 주관이 객관과 상호의존관계 속에서 존재하는 것이지

독자적인 내 바깥의 실체라는 것은 없구나 라는 것이 분명해졌단 말이죠.

그러니까 주관을 빼고 객관을 이야기 할 수 없다라는 상황이 분명해 졌습니다.

언제나 그 자리에는 이 알갱이가 있을 것 같은데

내가 관찰하는 순간 있다가 관찰하지 않는 순간에는 사라진다는 것이죠.

이게 인제 초기불교 부처님께서 육근 육경 십이처 십팔계에서 이미 하신 말씀인데요

우리가 눈이 뭔가 대상을 바라볼 때 육경을 볼 떄 육 식이 생기는데

육근과 육경과 육식이라는 것은 세가지가 상호의존해 있다라는 것입니다.

세 가지가 같이 이렇게 의존해 있다는 것이죠.

그래서 어느 하나가 없어지면 나머지가 무너져 버리는 것입니다.

나머지도 존재할 수가 없는 것 입니다.

그러니까 바깥의 실체적인 대상이 있어서 우리가 그것을 인식하는 것이 아니고 나

라는 감각기관이 있고 바깥에 대상이 있어서 그것이 접촉함과 동시에 인식이 생겨나는

이 세 가지 중에 한가지만 없어도 인식작용이 일어날 수가 없는 것이라는 거죠.

그런데도 불구하고 우리는 바깥에 실체가 있다고 여깁니다.

바깥에 실체가 있다고 여기는 대에서 모든 괴로움이 시작 되잖아요.

실제로는 바깥에 실체가 없는데. 뭐 우리 바깥에 돈이 있다고 여겨요,

아파트가 있다고 여기고 자동차가 있다고 여겨서 있다고 여기니까 이게 중요해지고 내가 가지고 싶어지고

집착하고 싶어지잖아요. 이게 진짜라고 여기니까 실체가, 여러분 실체라고 여기지 않는데 그것을 집착하겠습니까?

실체라고 여기니까 집착하는 것 입니다.

자식에게 왜 집착 하겠어요. 자식은 내 자식이라는 정해진 실체가 있다라고 여기니까

그 자식에게 집착을 하는 거에요. 이 실체가 아니라는 것이 분명해 진다면 집착할 필요가 없겠죠.

내가 내 자식은 귀하고 내 자식이 경쟁 관계에 있는 그 경쟁하는 친구가 맨날 둘이 일등 이등을 다퉈 했다.

그럼 내 자식 일등을 해야 이 친구는 이등을 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일등을 하기 바라겠지만 가만히 생각해보면 쟤는 떨어지고 내 자식 일등 했으면 좋겠다 라고 여겨 왔지만

생각해 보니까 가만히 전생을 보니까 이등 했던 이 친구가 전생에 내 자식이었단 말이에요.

그런데 나는 이번 생만 보니까 내 자식 일등 했으면 좋겠고

그 친구는 떨어졌으면 좋겠는데 이 아이는 전생의 자식이고 얘는 현생의 자식이면

그런데 그 반에 있는 30 40명 아이들이 전부가 과거 어느 생엔가 내 자식 이였을 수도 있고

내 부모였을 수도 있고 내 형제였을 수도 있고 내 사랑하는 사람일 수 있다 라는 사실을 안다면

누가 일등하고 누가 꼴지 하느냐 그걸 어떻게 나눠 가지고 이번 생의 자식만 잘됐으면 좋겠다 라고 집착하고

분별할 이유가 없잖습니까. 이와 마찬가지로 우리가 그렇게 가치를 부여하는 것일 뿐입니다.

실제 그 가치를 가진 어떤 특정한 대상이 내 바깥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그 대상에다가 대고

내 나름대로의 가치를 분별할 뿐이에요.

뭐에 따라서?

자신의 업에 따라서.

자신 업에 따라서 그냥 바깥에 있는 어떤 하나의 특정한 중립적인 대상을 가치 부여하는 것일 뿐입니다.

그래서 예를 들어 우리 스님들 만나면 그런 이야기를 합니다.

차를 너무 좋아하는 스님들 같으면 그 스님들은 이제 신도님들이 차를 많이 사다 주죠.

근데 신도님들이 사다 주는 차도 인제 드시지만 그 차를 마시기에도 사실은 이게 번거로움 많을 수도 있거든요.

근데 당신들은 꼭 차를 당신들이 사서 드십니다.

귀한 차 정말 좋은 차 어떤 차가 좋은지 차 매니아들은 차를 딱 그 차를 사서 드시지 않습니까?

그런데 이제 차를 사서 드시는 분들이 이제 뭐 우리 같은 우리 있는 거 그냥 먹는 다 말이죠.

스님한테 와서 묻는다 말이죠 차 어디서 사냐고. 그럼 우리는 좀 갸우뚱스럽죠. 차를 왜 사지?

있는 거 먹기도 바쁜데. 그냥 있는 데로 먹는데 주는 대로 먹고 그냥 있으면 먹고 좀 없으면 좀 아껴먹고,

그냥 그러고 산다. 이렇게 이야기하면 되게 당황스러워 하면서

어떻게 스님이라는 사람이 차를 스스로 사서 안 먹을 수가 있느냐고 그 무슨 소리에요 이랬더니

차는 아무거나 먹으면 안 된다고 그럼, 왜 그렇습니까 이랬더니.

어떻게 차를 아무거나 먹을 수 있느냐고 하면서 그 분은 이제 차에 대해서 아주 가치 부여를 하다 보니까,

탁 아주 좋은 차를 스스로 사서 아주 귀하게 드시고 하다 보니까

당신은 차를 마실 때 아주 마음부터 경건해 지고 이게 아주 귀한 차니까 귀하게 드시면서

아주 음미 하면서 천천히 드시면서 그걸 또 수행 삼아 하시고 이런단 말이죠.

그건 그 나름대로의 그 스님의 어떤 삶의 방식입니다. 그 스님이 가치 부여한 어떤 방식인 거에요.

그럼 그분이 이제 좀 갸웃했더니 그 분이 이제 비유를 드는데 이렇게 얘기를 한다 말이죠.

스님 책을 내가 내 스스로 서점가서 골라 사서 봐요 안 봐요 이래서 책이야 골라 보죠,

책도 남이 주는 것만 보고 안주는 것은 안보고 그럽니까 아니면 사서 봅니까

그래서 책이야 내가 원하는 거 사서 보죠.

뭐 큰 스님들 법문들을 때 내가 선택해서 어른 스님 법문 듣겠다고 선택해 봅니까 아니면

그냥 들리는 대로 듣습니까. 선택해서 듣죠.

그 스님 하는 얘기가 그것과 똑같다. 차를 수행 삼아 하는 사람에게는

차가 아주 귀한 스님이 책 사서 보는 것과 차를 사서 먹는 것과 똑같다.

들어보니까 일리가 있더라고요.

그것처럼 우리는 자신이 가치 부여한 거에 대해서 가치를 느끼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명품백에 이렇게 빠져 있는 사람, 명품 백 무슨 뭐 루이비통이니

이런 명품 백에 엄청난 가치를 부여한다 말이에요

그래서 그것을 내가 딱 들고 있을 때 내가 우월해지는 것 같고

남들을 내가 확 내려 누른 것 같고 남들이 나에게 딱 눌리겠지 하는 어떤 느낌을 느낄 수도 있고.

화장을 가치부여 하는 사람은 화장이 잘 된 날은 왠지 모르게 딱 뿌듯하고

또 남자들 같으면 자동차나 뭐 이런 것들을 좋은 차를 딱 타고 어디를 가면

사람들이 벌써 나에게 탁 눌리겠구나 라고 생각하거나 아니면 내가 올라가겠구나

내 가치가 올라가겠구나 하고 느낄 수도 있는 것이겠죠. 저마다 가치부여 하는게 다르거든요.

근데 아무리 다이아몬드가 있더라도 그건 뭐 저를 다이아몬드를 갖다 주면 뭘 하겠습니까?

예를 들어 루이비통 가방을 뭐 몇 백만 원짜리를 저한테 갖다 준들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그냥 굴러다니는 뭐 하나의 그것밖에 안 되는 거지. 거기는 하다못해 뭐 목탁이나 승복조차 넣고 다닐 수가 없자나요. 뭐 아무 의미가 없는 것입니다 그런 가방은.

제가 가치부여를 안 냈기 때문에 의미가 없는 것이지 그 자체가 의미가 없는 것은 아닌 거죠.

그러니까 어떻게 의미부여를 하느냐에 따라서 그 사람만의 삶이 만들어지는 것 입니다.

그 사람의 삶이 규정되는 것입니다. 그것은 좋다 나쁘다라고 판단할 수는 없는 거에요.

제가 여러분에게 뭐 가방에 집착을 내려놔라 돈에 대한 집착을 내려놔라 한다 할지라도

그것은 집착하고 있는 사람에게 부여하는 약과도 같은 것입니다.

병 있는 사람에게만 약이 필요하지 병 없는 사람에게는 약도 필요 없는 것처럼

가방에 대한 집착이 없는 사람에게는 가방에 집착하지 말라는 말이 필요가 없는 것이죠.

오히려 그 사람에게는 가방을 너무 하찮게 여기고 가방에 집착하는 사람을

너무 욕하는 사람에게는 야 저 사람도 저럴 의미가 있는 것이다.

나름대로의 내가 차나 뭐 책이나 뭐 무슨 공부하는 것을 중요하게 여기듯이

저 분은 그 가방을 중요하게 여기는 것이다 이렇게 이야기 해 줄 수도 있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것은 하찮다라는 그런데 집착하는 사람은

못난 사람이다라는 집착이 있는 사람에게 그렇게 이야기 해줌으로써 못났다 라는 상을 깨 줄 수도 있다는 말이죠.

그러니까 여러분들이 무엇을 집착한다 할 지라도 그게 좋은 것도 아니고 나뿐 것도 아니다.

이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예를 들어 스님들이 어떤 수행에 집착하고 명상에 집착하고 깨달음에 집착하는 것과

어떤 한 신도님이 루이비통 가방에 집착하는 것과

사실은 깨달은 자 입장에서 보면 오십 보 백 보다. 집착하는 것은 똑같다 이 말이죠.

왜 그러냐 하면 그건 다 망상분별 허망한 생각이라는 생각이 만들어내는 분별에서 오는 것이기 때문에

분별에서 오는 모든 분별들은 오십 보 백 보일 뿐이지

더 수승한 분별 더 안 좋은 분별이 없습니다.

그래서 도에는 선도 필요 없고 악도 필요 없다고 하는 것입니다.

착한 것이 도가 아니고 나쁜 것이 아니듯이 착한 것도 도가 아니다.

선 악이라는 분별이 있으면 그건 벌써 선악의 이분법으로 분별해서 나누는

거기서 나눠놓고 그 중에 좋은 거 선택하는 것 밖에 안되 자나요?

둘로 나누고 그 중에 좋은 거 선택하는 것은 근원적이지 못한 것 입니다.

좋은 거 선택해서 거기 집착할게 뻔하니까.

좋은 거 선택해서 집착 하고서는 나쁜 거 선택해서 거기 집착하는 사람을 못난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나는 우월한 사람이라고 생각하면서 우월감에 빠진다고 말이죠.

이건 똑같이 어리석은 것이다.

그래서 수행하는 사람이 나는 수행하는 사람이고 나는 삼천배를 열번한 사람이고

나는 공부하는 아주 훌륭한 사람이다. 너희들은 중생이다.

수행도 안하고 공부도 안하고 법문도 안 듣고 세상에 집착만 하는 사람들이니

너희들은 못난 사람들 이다 라고 생각한다면 그거는 정말 똑 같은 것이죠. 똑같은 거

저 위에서 본다면 분별 없는 자리에서 본다면 똑같이 분별하고 있는 것 입니다.

이와 같이 분별하는 그 자체 분별한다 라는 그 자체 분별한다 라는 그 자체가 바로

이 의식 인식이 하는 식이라는 것이 분별심 이럽니다. 알음알이, 분별심, 분별심이 바로 식이에요.

근데 이 분별심 조차 정해진 고정된 실체적인 집착할 것이 못 된다

그것은 감각기관이 감각대상을 접촉했을 때 그저 일어나는 하나의 망상일 뿐이라 말이죠.

실체가 아니라. 이 분별심 이라는 이 마음이 대상을 보고

대상을 실체 한다고 착각하고 실체 한다고 착각하니까 분별심을 일으킨 것뿐입니다.

실체 한다고 여기니까 좋다고 생각하고 실체 한다고 여기니까 싫다고 생각하는 거지 않습니까?

실체라고 생각하지 않으면 내 바깥에 있는 대상이 실체가 아니라고 안다면

좋다고 실체로 집착할 필요도 없고 싫다고 실체적으로 괴로워할 필요도 없고

밀쳐 내려고 애쓸 필요도 없겠죠.

바깥에 대상은 이 인식 식 우리가 식이라고 생각하는 알음알이 분별 식의 대상

이 인식의 대상을 초기불교에서는 명색이라고 부릅니다.

명이라는 건 주로 정신적인 대상 정신적인 대상에는 이름이 붙자 나요

정신적으로 뭔가 물질적으로 딱 이루어지지 않은 것 이니까 그런 이름이 붙는다 말이에요.

예를 들어 사랑, 사랑이 물질적인 어떤 대상이 있는 게 아니지 안습니까

정신적으로 정신적인 대상이지. 그러니까 사랑이란 이름을 붙여 놓는다 말이죠.

또 색이라는 것은 물질, 모양을 이야기 합니다.

이거는 컵이라는 이름을 붙이는 색이 있단 말이죠

사람 몸뚱어리도 색이 있고 우리가 대상이라고 인식하고 알음알이 분별 하나 모든 것은 이름이 부여돼있거나

정신적인 대상이라서 이름이 부여돼있거나 아니면 색이다. 모양이 있는 색이다.

그래서 이름을 어떤 상을 짓던 모양을 모양 있는 대상을 물질적인 것이든 정신적인 것이든

전부다 대상으로 만들어 놓고 상을 부여한다 말이죠.

상이라는 것은 사랑했을 때 사랑 이라는 내 마음속에 만들어진 이미지 있잖습니까

이 이미지를 상이라고 합니다. 컵 이러면 컵 이라는 어떤 이미지가 딱 떠오르지 안습니까 그것이 상입니다.

그래서 금강경에서 그 상을 타파해야 된다 그러죠 왜 상을 타파해야 되느냐

명과 색 이름 붙인 모든 것 물질적인 모든 것은 고정된 실체가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우리가 뭐 물질적인 대상을 본다고 했을 때 예를 들어 뭐 청국장이란 대상이 있다.

청국장이라는 것은 눈, , , , , 뜻으로 이것을 인식했을 때 좋은 것인가요 나쁜 것인가요?

어떤 사람은 우리나라 사람은 그걸 좋아하는 사람한테는

청국장 하면 좋은 맛도 좋고 향기도 좋고 접촉해서 씹어봐도 좋고 생각해봐도 좋고 다 좋단 말이에요

그러나 외국인들은 그런 거 처음 느껴보고 그런 사람들은

이 무슨 화장실 냄새 같기도 하고 그걸 아주 안 좋아하는 사람도 있단 말이에요

향기도 안 좋고 맛도 안 좋고 이렇게 느낄 사람도 있단 말이죠.

홍어 같은 거 안 좋아하는 사람은 그걸 어떻게 먹느냐 하고 이렇게 생각하지만

또 좋아하는 사람은 또 너무너무 좋아하는 것처럼 홍어라는 것 자체에 고정된 자체 성품이 없단 말입니다.

실체적인 어떤 고정된 자체 성품을 가지고 있는 독자적인 규범을 가지고 있는 자체 성품이 딱 있다고 한다면

그 어떤 사람이 그걸 보더라도 똑같이 인식할 것입니다.

자체 성품이 없으니까 누구는 그것을 좋게 인식하고 누구는 나쁘게 인식한단 말이죠.

독자적인 실체가 있지 않기 때문에 그렇다.

아까 말한 명품 백이라고 할지 다이아몬드라고 할지 자동차라 할지 좋은 집이라 할지

돈이라고 할지 이 모든 것들이 자체 성품을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돈을 수천억 수 조원을 벌었다 할지라도 본인이 그걸 다 쓰고 죽을 것 같지만

자신이 살아 있으면서 실제 쓸 수 있는 것은 한정되고 제한돼있지 않습니까?

인생이 어떤 사람은 한때 몇 백억씩 벌었다가 망해가지고 몇 백억을 한꺼번에 그냥 탕진해본 이런 것들도 있어요.

가만히 생각해 보니까 그분 이야기를 듣고 보니까

몇 백억을 벌어서 막 떵떵거리며 살다가 하루 아침에 그냥 다 날려가지고

완전히 하루아침에 거지 신세가 된 그분의 이야기를 듣고 보니까

야 진짜 한바탕 꿈이 일어난 것이구나……

정말 내가 부자라는 하나의 생각을 확 가지게 되는 한 시기가 있었고

또 왕창 날리는 어떤 시기가 있었고 그 정말 한바탕 꿈이 일어났다가 사라진 것과 다르지 않구나.

삼천억 가지고 있는 중에도 삼천억을 쓰고 살지 않지는 안잖습니까

어차피 밥 먹을 때 똑같이 밥 먹고 똑같이 삼천 원, 오천 원, 만 원짜리 밥 먹지,

잠잘 때 어차피 똑같이 누워 자는 그것은 똑같습니다.

똑 같은 이불 덥고 수백만 원짜리 이불 덥고 자는 것도 아니고,

뭐 백 평짜리 아파트 산다고 그것을 다 돌아다니며 사는 것도 아니고

화장실을 쓴다고 해서 똑 같은 변기 위에 앉아 있는 거지 뭐 더 고급스럽고 더 큰 변기에 앉아있는 것도 아니고

그 순간 똑같이 쓰고 있는 것이거든요.

길을 걸을 때 똑같이 걸어 가는 거구, 차에 탈 때 똑같이 타는 거구

뭐 조금 편하냐 안 편하냐 이 차이는 있겠지만 사실 크게 달라질 것은 없거든요

내 의식에서 야 이 돈이 내가 있다 괜히 든든한 마음을 마음속으로 품고 있는 거구

또 돈이 다 없어졌으니까 나 인제 궁핍할 거다 하는 어떤 이러한 마음을 품고 있는 것 뿐이지

그게 마음으로 만들어내고 마음으로 무너뜨리는 것 뿐이지

그런 어떤 삶의 실체가 있는 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정신적인 대상도 마찬가지죠 뭐 예를 들어 종교 불교라는 종교 하면 떠오르는 이미지가 있단 말이죠.

그 이미지가 실체적인 어떤 고정된 실체가 있다면 모든 사람이 다 좋아해 해야 될 거에요

어떤 사람은 좋아하지만 예를 들어 배타적인 타 종교 신자 중에 일부는

뭐 아주 불교는 사탄이고 마귀다 이렇게 생각할 수도 있단 말이죠.

그러니까 이게 실체가 있는 어떤 것이 아니라 사람들이 어떻게 인식하느냐에 따라서

그 대상은 전적으로 달라질 뿐입니다. 우리가 세상을 살면서 접촉할 수 있는 모든 대상이 마찬가지이다.

그 대상이 실체가 있는 대상은 아무것도 없다. 내가 내 마음에서 규정할 뿐이지

내 마음에서 가치 부여를 한대로 가치부여가 되는 것입니다.

실제로 내가 가치부여를 이것을 A라는 것을 좋게 가치 부여를 하게 되면 그건 나에게 와서 좋게 바뀝니다.

내가 꽃이라고 불러줄 때 나에게 와서 꽃이 되었다 하듯이

내가 이것을 아름답게 생각하면 그건 나에게 와서 좋은 영향을 미친단 말이에요.

어떤 차를 어떤 분에게 차에 아주 정말 푹 빠진 분들은요

거의 차를 만병통치약처럼 느끼시는 분들이 계세요.

그리고 심지어 차를 마시면 저절로 수행이 된다고 여기는 분께서도 계시더라고요.

이 차를 마시면 수행이 엄청 난 도움이 될 뿐 아니라 차를 마시고 탁 앉아 있으면

좌선이 저절로 삼매에 드는 이런 정도 까지 생각하는 분들이 계셔요.

또 몸이 엄청 건강해 진다고 여기는 분들도 계시고요.

예전에 제가 아는 어떤 분은 죽염에 대한 어떤 아주 강력한 신앙을 가지고 계시는 분이 계셨어요.

이 분은 감기 걸려도 죽염 먹으면 낳는다고 생각하고 무슨 병이 걸려도 죽염만 먹으면 다 낳는 거에요

이분한테는. 배탈이 나도 죽염 먹으면 낳는다고 생각하고

그런데 실제로 그분은 뭔 병이 걸려도 죽염만 먹으면 낳는 현실을 경험합니다.

왜냐하면 실제 바깥에 실질적인 어떤 규정지어진 어떤 실체적인 있는 것이 아니고

내 의식에 따라 정해진 것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죽염 먹으면 만병통치약이라고 곧게 믿고 있는 사람에게는

내가 굳게 믿고 있는 이 가치부여 한 것 때문에 실제 그런 일이 벌어집니다.

뭔 일이 있어도 죽염만 먹으면 낳길 시작해요.

기도하면 모든게 낳는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무슨 안 좋은 일이 있어도 기도만 하면 낳기 시작합니다.

믿음 없이 기도하는 사람은 아무리 해도 낳지를 않는 것이죠.

믿음이 없는 사람은 죽염 먹으면서도 별 생각 없이 먹죠.

어떤 분이 죽염을 이만한 통에 들은 죽염을 자주자주 먹으라고 사다 주셨어요.

저는 그게 그렇게 귀한 줄도 몰랐고 좋은 줄도 모르고 하니까

별 생각 없이 먹고 그렇게 크게 먹을 일도 없으니까 별로 안 먹었고

신도님들이 김치 담근다고 하니까 이것도 같이 넣어서 담그세요 하고 드리기도 하고 그러고 지냈죠.

나중에 이분이 와가지고 그때 그 죽염 잘 드셨냐고, 네 잘 먹었습니다 했더니

그거는 그냥 먹으면 안되고 이건 뭐 아홉 번 어떻게 어떻게 하고 해서 이거는 사기도 힘들뿐더러

너무 귀한 거라 꼭 입에 넣어가지고 침으로 녹여서 드셔야 하고 뭐 한참 설명을 해주시더라고요.

그게 그렇게 귀한 거에요 이랬더니 구하기도 힘든 정말 귀한 거라고.

누가 먹을지는 모르겠지만 누군가 먹었을 겁니다 이랬더니 그렇게 이야기를 하시더라고요.

그 이야기를 들으니까 야 이게 그렇게 귀한 것인가 싶고 그분께서 그것을 먹고 확 나은 이야기를 해주세요.

야 이게 그런 거구나 한번은 보이차를 요만큼 빼서 갖다 줬단 말이죠.

그것을 스님들하고 나눠서 맛있게 잘 먹었죠

근데 뭐 보이차 어떤 게 귀하고 어떤 게 안 귀한지 제가 잘 모르니까 그냥 맛있게 먹었죠.

후딱 먹어버렸죠. 근데 얼마 있다 오셔가지고 그 보이차 좀 가지고 오라고

그분은 이제 같이 먹는 보이차가 있고 저 뒤에 구석에 혼자 먹는 보이차가 따로 있으신 거에요.

저도 이제 구석에 쟁여놓은 줄 알고 가지고 오라고. 없습니다 이랬더니.

그 어찌했냐 하셔서 그 다음날 다 없어졌죠 그랬더니 그게 시가로 따진다면 몇 천만 원 보이차 수가 있다

이거 구하기 귀한 건데 그런 보이차다.

근데 뭐 우리가 보기에는 보이차 정말 좋아하는 귀한 보이차는요 이거를 한번 넣어가지고

열 번 이십 번 삼십 번 사십 번씩 막 이게 물 색깔 안 나올 때까지 우려먹습니다.

아무 색깔 안 날 때까지 우려먹다가 그걸 또 나가지고 말려요.

그걸 다 마른 것을 주전자에 넣어가지고 또 끓여 드십니다.

정도의 어떤 가치를 딱 부여하고 계신 분께서 계신다고 봐야죠.

실제 그런 분에게 그게 효과가 있습니다.

그 보이차만 먹으면 정말 아주 막 수행도 더 잘되고 공부도 더 잘된다 말이죠.

이 모르는 사람이 봤을 때 웃기는 이야기죠 그냥 우스운 이야기죠.

그런데 여러분들이 모르는 사람이 봤을 때 우스운 이야기지만

아는 사람이 보면 정말 심각하게 중요하다고 느끼지 않습니까

그렇게 중요하게 느끼는 사람을 우리가 보면 웃기죠.

근데 이런 일들을 우리 모두가 하고 인생을 살고 있습니다.

여러분이 돈이 중요하다고 이렇게 여기지 않습니까?

자식이 성적이 중요하다고 여기고 서울대 가고 좋은데 취직하고

돈을 많이 벌고 하는 게 중요하다고 여기지 않습니까.

그런데 그게 정말 깨달은 도인들이 봤을 때 이건 웃기는 거겠죠.

거기에 가치 부여하지 않는 사람에게는 이건 우스운 일이죠

내가 가치 부여한 게 다르니까

심지어 내가 젊은 친구들이 내가 사랑하는 여자친구에게 마음이 딱 꽂혔다.

거기에 막 사로잡혀 있는 것입니다. 나의 모든 가치는 거기가 있어요

그러면 그 사람에게 야 내가 백억을 줄 테니까 그 여자를 버려 버리겠습니까?

백억을 줘도 안 버립니다. 한참 그냥 사로잡혀 있을 때는 아파트를 줘도 안 버리고요

그러면 마찬가지 입니다 내가 어떻게 가치 부여를 했느냐에 따라서 그 가치가 달라지는 것이고

그것이 나를 좌우 하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세상은 이렇게 만들어 집니다.

여러분들이 견고하다고 여겼던 모든 가치는 단지 내가 부여한 것일 뿐이지

그러한 견고한 가치를 지닌 내 바깥에 있는 특정한 대상은 없습니다.

돈이라는 게 그렇게 견고한 것 같지만 그러한 가치를 가진 무언가가 아닙니다.

자식이 서울대 가는 게 아주 중요한 어떤 거 같지만

서울대 갔지만 거기 가서 갑자기 뭐 교통 사고로 죽었다거나

아니면 그 서울대 갔지만 그래서 좋은데 취직했지만 거기서 진급도 못하고 이랬다던가

거기에서 뭔가 아주 안 좋은 일들이 벌어진다던가

회사를 취직했는데 좋은데 취직해서 돈은 많이 버는데 그 삶이 괴롭다던가

돈 많이 버는 사람은 삶이 괴롭지 않겠습니까? 괴로울 수 있죠.

하루하루 사는 게 괴롭다거나 아니면 맨날 싸우고 자식과 맨날 싸우고

하루하루가 정말 죽고 싶을 만큼 괴롭다던가 수백억을 벌어온들 그런다 한다면 그게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이와 같이 내가 지금 중요하다고 여기고 가치 부여했던 모든 것들은

다른 누군가가 보기에 다른 쪽에 가치부여를 하는 다른 누군가가 보기에는 전부다 우스운 일밖에 안됩니다.

나 혼자서 심각하게 집착하고 대단하다고 여기는 것일 뿐이지

이렇게 내 바깥에 있는 모든 대상은 이렇게 내가 스스로 가치 부여를 해가지고 그게 대단하다고 여길 뿐이지

실체적인 어떤 규범을 가지고 기준을 가진 특정한 가치를 가진 무언가는 이 세상에 없습니다 없다는 말이죠

다이아몬드라는 것은 우리가 중요하다고 여기니까 그게 중요해 진 것이지

이 바깥에 있는 풀 잡초들이 우리가 보기에는 잡초지만

제가 한때 자연 이런걸 공부할 때 보니까요 잡초라고 여기던 대부분의 것들이 약초 입니다. 약초 

그런데도 우리는 밭에서 크는 것들은 사실은 이것은 그렇게 크게 몸에 도움되는 것들이 아니더라고요.

그냥 막 자라는 잡초들 이것들 뜯어 먹으면 제일 건강해지기 쉽더라고요.

산에서 피어나는 수없이 많은 마구자비로 그냥 우리는 잡초라고 생각하는 것들

이게 최고의 어떤 가치를 지닌 것들이기 쉽습니다.

근데 그 전문가들이 하는 이야기가 뭐냐 하면은요 이 잡초요 이거 간단합니다.

이걸 대단한 걸로 만드는 것은 간단합니다. 그렇게 이야기를 하더라고요.

그래서 왜 간단합니까 여기에다가 돈만 투자하면은 이거는 대단한 게 되어 버립니다.

무슨 말이에요?이랬더니

예를 들어 무슨 가시오가피라던가 뭔가 그 특정한 가시오가피를

어디 지역에나 특정한 가시오가피 그걸 연구를 시켰다는 거에요.

몇 억을 투자해서 연구를 시켜서 그것이 얼마만큼 몸에 효능이 좋은지를 연구를 딱 시켜서

논문을 몇 개를 만들었더니 갑자기 그때부터 대서특필이 되고

그때부터 이게 엄청난 약초인 것처럼 되더란 말입니다.

어느 날 연구를 좀 해서 막 길가에 피어난 민들레가 좋다 이러니까

민들레를 서로 다 뜯어가서 먹고 유행을 하더라

이 세상 모든 것이 이렇게 가치를 어떻게 부여할 거냐에 따라 달라집니다.

모든 가치부여를 할 수가 있어요 우리가 돈이 드는 것뿐이지,

노력이 필요한 것일 뿐이지 그러니까 그 가치 부여를 해놓아 버리면 거기 사로잡혀 버리면

거기 노예가 되어서 심지어 목숨까지 겁니다.

예를 들어 특정 이단 종교가 있어요 그 종교에 가치 부여한 사람들은 어떻겠습니까.

그 종교를 위해서 목숨까지 내 받치고 내 전 재산까지 갖다 받칩니다.

실질적인 실체가 있어서 받치는 게 아니라

내가 실체가 있다라고 내 스스로 여기고 내 스스로 가치 부여를 했기 때문에

내가 인식을 그렇게 했기 때문에 그런 것일 뿐이라는 것이죠

이렇게 초기불교에서 십팔계라는 육근 육경 육식이라는 십팔계라는 가르침은 어떤 것도 실체가 없다

여기 안에 나도 없고 바깥에 특정한 가치를 지닌 대상도 없고 내가 단지 인식할 뿐이다

내가 그렇게 알음알이로 인식해서 허망하게 생각으로 마음으로 인식하는 것일 뿐이다

그래서 이세상 모든 것은 오직 식 뿐이다 

이렇게 유식이 이 십팔계를 나중에 유식 불교에서는 오직 식뿐이다 해서 유식이라고 부릅니다.

그럼 모든 것은 식이 나눈 건데 그 식초자 허망한 것이란 말이죠.

허망한 식이 나눈 것일 뿐이다.

그래서 유식에는 뭐라고 하냐 하면 나라고 생각하는 부분이 있어요, 내가 세상을 보지 않습니까?

보고 듣고 맛보고 냄새 맡고 향기 맡고 접촉하지 않습니까?

보는 부분 나라고 여기는 부분 이 주관이라고 생각하고

바깥은 객관이라고 생각하는데 주관이라고 여기는 부분 보는 부분 이것을 견분이라고 합니다.

견분 보는 쪽이다 이거죠. 바깥에 있는 대상 객관이라는 대상을 상분 이라고 부릅니다.

보여지는 상이란 말이죠 상 이미지 대상이라 여깁니다.

그래서 견분이 상분을 접촉한다

그런데 이 견분과 상분이 모두가 동일한 식에서 나온 거라는 말이죠

즉 나도 바깥에 있는 대상도 전부다 식 마음 알음알이에서 나온다

그래서 불교에서는 내가 대상을 보는 게 아니고 마음이 마음을 보는 것뿐이다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이 컵을 보는 것 같지만

사실은 내가 이 컵을 보자마자 과거 기억 속에 컵이라는 것을 배우고 익히고 경험해서 안

그 옛날에 배웠던 것을 자동으로 떠올려가지고 걸러 가지고 아 이건 컵이구나 라고 인식하는 것뿐이란 말이죠.

내 안에서 인식한 것을 다시 재 상영할 뿐인 것 입니다.

불교라는 것을 볼 때 부처님을 볼 때 여러 여러 법담 할 때 날마다 새롭지 못한 이유는

법담 할 때 지난주 그 지난주 계속 나와서 봤던 부처님을 인식하는 것뿐이에요.

그러니까 여러분께서는 오늘 지금 부처님을 보고 계시지만 새로운 부처님을 보고 계신 게 아니에요.

지금 이순간에 있는 그대로의 부처님을 보고 계신 것이 아니고

과거 기억 속의 부처님을 투영해서 재생해서 보는 것에 불과합니다.

매일같이 새로운 부처님을 못 봐요.

저를 볼 때도 지금 이 순간의 있는 그대로의 저를 보는 것이 아니라

과거에 내가 알고 있던 그 법상스님을 내 기억 속에 투영해서 바라볼 뿐인 것입니다

처음 볼 때는 좀 새롭게 보이겠지만 그렇지 않은 이유가 내 머릿속의 기억을 되살려야 하는 것뿐입니다.

그러니까 바깥에 있는 저라는 실체를 본다고 여러분은 여기겠지만

저를 있는 그대로 지금 이순간의 나를 보는 것이 아닙니다.

지금 이 순간의 저는 지난주일 때 저와 전혀 다른 존재 입니다.

끊임없이 변화하는 전혀 새로운 존재에요.

제가 지난주에 하였던 설법과 지금의 설법과 비슷한 것 같지만 전혀 새로운 설법 입니다.

여러분이 전혀 새롭게 들을 수가 있다면

과거의 배워 익혔던 그 어떤 기억들을 끄집어 내어가지고 투영해가지고 해석하지 않는다면

지금 이순간에 새롭게 들을 수만 있다면 이건 전혀 다른 이야기 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전혀 다른 이야기로 듣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내 안에 이 식이 둘로 나눠가지고

주관과 객관으로 나눠서 동일한 식이 주관과 객관으로 나누는 것 입니다.

제 나눠져 있는 것이 아니고 그래서 우리가 생각을 했다 하면 그건 벌써 주관과 객관으로 나뉘는 것 입니다.

둘로 분별된단 말이죠 그래서 이 인식작용이 주관과 객관으로 나눠서

내가 나를 보는 건데 내가 나를 보는 것인지 모르고 내가 세상을 본다고 착각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걸 이 인식이 세상을 본다라는 것 자체가 인연 따라 본다 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인연 따라 모든 것은 육근과 육식 육경과 육식이 인연 따라 맺어져야 상호상의관 상의상관적인 관계 따라서

인연 따라 만들어지는 것입니다.

눈에 보이는 모든 것은 그래서 능히 세상을 인연 따라 인연을 맺어서 보는 주관이 저이지 않습니까

그리고 능히 나는 인연을 맺지만 내 바깥에 있는 모든 것들은

내가 인연 맺을 때 인연 맺어지는 대상이란 말이죠.

그런 면에서 유식에서는 능견 이라고 부르고

이 견분에 보면 나의, 주관적인 부분을 능연 능히 인연을 맺는 사람이다

바깥에 있는 대상을 소연 그래서 인연이 맺어지는 바다 그래서 바소()자를 써서 소연이라 부릅니다.

즉 인연 맺어지는 것도 나고 인연 맺어지는 대상도 다 원래 하나에서 나온 것이다.

그래서 인연을 맺는 인연 따라 만들어진 모든 것은 이렇게 내 마음이 나눈 것이란 말입니다.

그래서 또 이 능연을 능량이라 부르고 소연을 소량이라고도 부릅니다.

헤아릴 량 자를 써서 즉 내가 생각하고 헤아려서 아는 모든 생각들

이 헤아린 알음알이 이 모든 것 전부다 능량이든 소량이든 전부다 실체가 있는 것이 아니라

내가 허망한 식에서 투영되어서 나온 착각이고 분별심일 뿐이다.

진짜 제대로 된 생각 이라는 것은 이 세상에 하나도 없다는 소리입니다.

전부다 능량 아니면 소량일 뿐이지 내가 능히 이렇다라고 내가 내 스스로 분별한 생각 이거나

바깥에 우리가 세상이 전부다 저 사람은 나쁜 사람이야

세상이 전부다 저건 나쁜 것이고 이건 좋은 것이야 하고 기준을 매겨 놓지 안잖습니까

객관적이라고 여기자나요 개관적이라고 여겨지는 그렇게 소량 되는 그런 어떤 분별심이 있을 뿐이지

실제 그건 그렇지 않다.

그래서 뭐 능연식 소연경 이럽니다.

이 식이라는 것이 능히 분별하고 분별되는 많은 바깥의 경계 대상으로서 분별 되어지는 바다 이런 식으로

말을 쓰기도 하죠 그래서 유식이란 이 용어 때문에 어려운데 그냥 한가지 입니다.

다른 어려운 이야기가 아니라 내가 보는 쪽이나 보는 바 대상이나 전부다 식의 작용일 뿐이다.

마음의 작용일 뿐이다.

우리는 내가 진짜 바깥에 있는 규정된 어떤 실체적인 좋고 나쁜 대상을 따라서 움직인다고 생각 하지만

저기 좋은 게 있으니까 내가 그것을 따라가 집착하는 것이지요 라고 생각하지만

저기 좋은 게 진짜 있어서 내가 따라가는 게 아니었단 말입니다.

내가 좋은 거라고 규정함과 동시에 내가 좋은 거라고 집착함과 동시에

허망한데 내가 그걸 좋은 거라고 가치를 매김과 동시에 그게 좋은 게 돼버리고

내가 그걸 쫓아가 버리는 것입니다.

그러다가 아 내가 그 동안 집착했구나 집착에 빠져가지고

그걸 못 갖게 된다고 괴로워하다가 그럼 또 인제 집착을 떨어뜨리려고 고생고생하고

수행을 한다고 난리를 치다가 그 수행을 해서 다 떨구고 났더니 막 자유로워졌다 하면서

나는 그 집착에서 자유로워졌어 나는 집착을 떨군 사람이야 하고 자유인인척 한단 말이죠.

그런데 그러지만 또 다른데 집착을 끊임 없이 하게 된단 말이에요.

집착의 대상을 끊임없이 바꿔가면서 우리 인생은 평생 이렇게 계속해서

이 식의 노예가 되어서

이 헤아림의 알음알이의 노예가 되어서 살아가고 있을 뿐이었던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 인생이 얼마나 허망한 것입니까

허망하게 내가 그렇게 내가 만든 것에 내가 빠져가지고

내가 거기 노예가 돼서 괴로워하고 사는 삶이 얼마나 허망한 것입니까.

그래서 부처님 가르침은 이 모두가 공하다 나도 세상도 텅 비어있다.

나도 아상일 뿐이고 세상이라 여기는 것도 법상일 뿐이지

아상과 법상이 전부다 공허하다 그래서 아공법공 이런단 말이죠

모든 것이 허망한 것의 작용일 뿐이다

그래서 생각을 하나 일으켰다 하면

이것은 전부다 둘로 나뉘고 주관과 객관으로 나뉘고 둘로 나뉘어서

분별 판단이 시작되고 그런단 말이에요

그래서 불법은 생각으로 헤아려서 알 수 있는 방편은 어느 정도 까지지

불법에 본질을 꾀 뚫어 보려면 생각이 움직여서 안 된단 말이죠.

생각이 딱 멎는 곳에서 그래서 마음을 있는 그대로 분별 없이 지켜보는 이유가 그것입니다.

분별로서는 그 어떤 불법에 다다를 수 없기 때문에

그래서 이것을 불교에서 예를 들면 솜씨 부릴 수 없는 그 어떤 솜씨도 부릴 수 없는 자리이다.

내가 아무리 똑똑해도 머리를 가지고 아무리 분별해가지고 솜씨를 부리려고 해도 어긋난단 말이죠.

조작해서는 어긋나는 자리이다 라고 얘기를 하는 이유가 여기 있다.

그래서 여러분들이 괴로워하는 모든 것은 이 나가 진짜라고 생각해서

더 좋은 나를 만들려고 더 좋은 나가 만들어지지 못하니까 괴로운 것인데

그 또 한 허망한 분별일 뿐이고

바깥에 있는 진짜 중요하다고 여기고 귀하다고 여기는 것을

그러한 가치를 부여해 놓고 거기 쫓아가느라고 괴로운 거란 말이에요.

이 사람 쫓아가고 저 사람 쫓아가고 하느라 괴로운 것인데 그 또한 허망한 분별일 뿐이다.

옛날에 학교 다닐 때 인제 외국에 가있을 때인지 보니까

아주 순진한 여학생이 있는 거에요. 예쁘고 착하고 순진한 여학생이 있는데

예쁘고 착하고 순진하니까 남자들이 막 서로 관심을 갖겠죠.

와 근데 참 이게 뭐랄까 막 동생 같고 하는데 너무 가슴이 아픈 거에요

분명히 이놈들이 시퍼런 속내가 보이는 거에요. 제가 시퍼런 속내가 보이는데

순진하니까 좀 잘생기고 하니까 쫓아갔다가 하는 게 너무 가슴이 아픈 거에요.

그러면서 제가 좋아하는 마음이 든 건지 이렇겠죠 그러다 보니까 집착이 생겼겠죠

그러다 보니까 얘가 남자한테 휘둘리고 저 사람한테 휘둘리고

또 새로운 다른 사람이 막 이렇게 하니까 막 착하니까 이리 끄달리고 저리 끄달려 다니니까 가슴이 아픈 겁니다.

그런데 이런 일이 한두 명이 아니지 않습니까

내가 그때 무슨 생각이 들었냐 하면요

야 내가 이 아이가 착하고 순진하다고 동생 같다고

이 아이가 이사람 만나고 저 사람 만나고 다 가슴이 아파하고 다 하지 말라 하고 이거 집착하면

내가 이세상 모든 사람들 다 쫓아다니면서 그래야 될 판인데

내가 이세상 모든 사람 다 쫓아다니면서 그럴 수 있느냐 그럴 수 없는 겁니다.

그러면 그것을 집착해야 맞느냐 굳이 집착 할 필요가 없을 수도 있겠구나

내가 할 수 있는 상황이라면 해줄 수 있지만.

이때 제가 깨달은 게 뭐냐 하면요

그전만 해도 제가 예를 들어 정치인들이 뭐 잘못했다 아

니면 뭐 연예인들 누가 뭘 잘못을 했다 친구 누가 뭔 잘못을 했다

학교 다닐 때 학교에서 학회장이 뭔 잘못을 했다

이런 거 있을 때마다 내일인 것처럼 막 화를 내고 열을 내면서

이걸 내가 바꿔야 될 것 갖고 이세상을 내가 다 바꿔야 될 것 갖고

내가 안 바꾸면 절대 안될 것 갖고 그랬거든요

근데 그게 딱 깨달은 게 뭐냐 하면

아 내가 이모든 것을 다 바꿀 수가 없구나

내가 정의심을 가지고 어떤 이 세상을 아름다운 자비심을 가지고 바꿔준다고

나는 집착해 생각하지만 그거는 정의감이 아니라 내 집착일 뿐이구나.

내가 정말 자비로운 마음을 내서 그런 마음을 낸다면

내가 특정한 사람에게만 집착을 한다라는 거 자체는 집착일 뿐이지 이건 정의감도 뭐도 아니구나.

예를 들어 한국의 어떤 정치인이나 누가 잘못했다 바꾸려고 노력하는 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열심히 노력하는 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그런데 내가 아니면 안 된다고 생각하거나

절대적으로 내가 이걸 안 바꾸면 절대 안 된다고 생각 한다면

그건 한국이라는 집단적인 아상에 갇혀있는 사람이에요.

사실은 한국이라는 아상이 아니라 좀 더 확장하면 인류라는 어떤 것으로 넓혀진다면

왜 한국 사람 한국 정치인 잘못한 것만 문제 삼습니까

외국 정치인들이 잘못한 거 다 문제 삼아야죠

인류라는 전체를 놓고 본다면 그런데 우리가 그럴 수 있습니까.

그게 옳은 것입니까.그러지 못하거든요.

다 그래서 내 문제라고 집착하게 되면 그걸로 내가 괴롭지만

그걸 내려놓게 되면 내가 최선은 다하되 내가 세상을 바꾸기 위해서 최선은 다하되

나만이 할 수 있다거나 내가 안되면 절대 안 된다거나 이거는 내 집착일 뿐이구나 이걸 알아야 됩니다

그래서 옳은 명분을 가지고 옳게 일하는 사람도 그럴 수 있어

요 명분은 옳은데 그럴 수가 있어요.

왜냐하면 그 명분에 집착하게 되기 때문에 이거 반드시 내가 해야 된다거나 하고 집착 할 때는

그게 틀려버릴 수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더 큰 가치에서 봤을 때는 그게 참 허망한 것이거든요

제가 인류 세계사 같은 것을 다시금 뒤져보니까 더 분명해 집니다.

세상을 세계사를 전체를 놓고 봤더니만

모든 사람들이 내가 바꿔야 된다고 생각하고 이 세상을 반드시 바꾸어야 한다고 생각하면서

유토피아를 꿈꾸면서 수많은 인류 속에 있는 위인들이나 정치인들 임금들

모든 사람들이 신하들이 모든 사람들이 이 세상을 바꾸려고 미친 듯이 노력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해서 어느 순간은 세상이 바뀌었다고 생각했지만

그 바뀌어진 세상은 또다시 타락하고 또 다시 무너지고 또 바뀌고 또 무너지고 이 연속이더라고요.

이게 세상이라는 것이 인류라는 것이 배우고 깨닫는 과정입니다

올라 갔을 때도 배우는 것이고 내려갔을 때도 배우는 것이 있는

이 파장 속에서 배우고 깨달아가는 과정이었단 말이죠

그렇게 여기면 세상을 바꾸는 건 당연히 해야 되지만 바꾸는 것에 집착할 필요도 없는 것입니다

지금 좀 세상이 다운돼 있다고 할지라도 그것을 가지고 크게 문제 삼을 필요도 없는 것입니다

최선을 다하되 집착할 필요는 없다 말이죠.

그러니까 좋은 것이든 나쁜 것이든 내가 최선을 다해서 하려고는 하되 그렇게 집착하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으로 해서 내가 괴로워 죽을 것 같지는 않는 것입니다

왜 그 모든 것이 내 마음 안에서 일어나는 한바탕 꿈과 같은 것 인줄 아니까

우리는 세상이 이렇게 흥망성회를 한다고 여기지만

사실은 내 마음 안에서 일어나는 허망한 것들이 일어나는 것이 분명해 지기 때문에

그래서 정말 중요한 것은 무엇입니까 바깥을 바꾸는 것이 아니구나

나를 바꾸는 것이 먼저구나 내가 내 마음을 바꾸면 그게 세상을 바꾸는 것이구나

부처님께서 딱 깨닫고 봤더니

온 우주가 부처님이 깨달음과 동시에 온 우주 전체가 깨달음을 얻은 것과 똑같다

세상은 바꾸려고 집착할 뿐이지 아무리 쫓아가도 다 바꿀 수 없습니다

기를 써서 우리나라 바꿔나도 다른 나라가 또 괴로운데

그 다른 나라 가서 또 바꿀 겁니까?

굳이 바꿀 필요가 없을 수도 있어요

왜 부처님이 법을 전하지 않으려고 처음에 했었던 것처럼

본래 깨달아 있는 사람들이 다만 허망한 착각을 가지고 그리 살고 있을 뿐이고

그들은 그 누구나 그 착각이라는 것을 깨닫는 과정을 가고 있을 뿐입니다.

깨달음의 과정으로 가고 있을 뿐이다 그

리고 우리가 정말로 시급한 건 바깥을 바꾸는 것이 아닙니다

바깥을 바꾸려고 하다가 내가 죽습니다.

내가 더 괴로워서 내가 바깥을 다 못 바꾸니까 증오에 불타올라서 괴롭단 말이에요

시민운동 하는 사람들이 바깥을 바꾸려고 하다가

내가 그 괴로움에 넘어가가지고 내 마음도 못 다스린단 말이죠

내 마음이 딱 먼저 다스려지고 내 공부가 먼저 딱 되는 게 세상을 구제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부처님께서도 나라 전체를 구제해야 할 왕자가 나라를 탁 버리고 가서

나 자신을 먼저 구제했더니 지금 이렇게 인류전체를 구제하는 큰 인물이 된 거 아니겠습니까

그래서 자꾸 바깥에 세상을 구제하겠다고 막 나서는 거 나쁘다는 게 아니라

나 자신을 먼저 자신을 구제해야 하고 바깥에 세상에 귀하다고 쫓아다닐게 아니고

나 자신을 먼저 구제하면 그 모든 게 허망하다라는 게 탁 깨달아 지니까

거기서 더 이상 쫓아갈 것도 없고

이거 쫓아가고 저걸 쫓아가고 더 많이 더 많이 더 많이 하는

이러한 허망한 삶을 그 자리에서 끝낼 수 있는 게 바로 이 마음공부란 말이죠 이 부처님 가르침이다.

이 공부를 하게 되면 그 어떤 것도 바깥으로 쫓아다닐 필요 없이

이 자리에서 탁 끝나는 공부다 여기까지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 , 희소식이 하나 있고 좋은 소식이 하나 있고, 나쁜 소식이 하나 있다면 뭐부터 들으시겠습니까? 좋은 거부터 들을까요? 나쁜 거부터 들을까요? 좋은 거부터 듣고 나면 그다음엔 나쁜 거 들어야 되니까 나쁜 거를 간단하게 먼저 말씀 드리고 좋은 거를 많이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 제가 느끼기에요, 부처님 가르침을 공부하는 많은 사람들이 있고, 지금까지 역사 속에서, 수없이 많은 불교역사가 이어져 내려왔습니다. 불교뿐 아니라 수없이 많은 사상가, 철학가, 수없이 많은 종교들이 일어났다가 사라지고 또 지금까지 종교의 역사가 흘러갔어요. 그런데 애초에 가르침의 핵심, 순수한 가르침의 본질 그 자체, 그 자체로서 남았을 때 아름다웠던 가르침들이 역사를 수도 없이 오랜 역사를 이어오면서 우리가 앞으로 불교 역사를 공부하면서 깨닫게 되시겠지만, 오랜 역사를 이어오면서 너무나도 많이 왜곡됐습니다.

 

많이 왜곡되기도 하고, 너무 많이 보태지고, 우리 불교는 특히나 수도 없이 방편의 가르침이잖아요? 그런데 방편들이 너무 많아지다 보니까 이제는 본질은 어디가고 방편이 정말 중요한 것인 것처럼, 그래서 의외로 많은 사람들이 불교 그 자체에 가르침을 공부하면서 환희심을 느끼는 것이 아니라, 방편에 억매여서 방편에 집착해가지고 괴로워하는, 불교로 인해서 오히려 괴로워하거나, 종교로 인해서 오히려 괴로워하고, 종교가 이 세상에 빛이 되는 것이 아니라 종교가 이 세상을 우울하게 만들기도 했고, 그런 어떤 방편에 너무 우리가 치우쳐있지 않았나? 그러다보니까 종교를 공부하면서도 항상 찜찜하고, 절에 안 나가면 왠지 안 될 거 같고, 아이가 고3인데 딴 사람들은 다 기도하는데 나는 가서 기도 안하면 왠지 좀 이게 큰일날거 같고, 뭔가 잘못하고 나서 부처님께 가서 참회하지 않으면 죄짓는 거 같고, 뭔가 많은 어떤 것들로 인해서 우리 마음이 무거운 마음들을 가지고 종교생활을 한단 말이죠.

 

그런데 그것이 본질이 아니라는 것을 보고 나니까 아, 본질이 어떤 것이구나. 라는 것을 보고 나니까 부처님 가르침을 이렇게 힘들여하는 것이 아니었구나. 이렇게 괴롭게 하는 것이 아니었구나. 무한한 행복과 무한한 환희심을 가지고 덩실덩실 춤을 추면서 부처님 가르침을 공부할 수 있는 것이 불교 가르침의 핵심이었구나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먼저 좀 안 좋은 소식을 먼저 말씀드린다고 하는 것은 아마 이제 이 강의를 들으시고 불교 공부를 하시다보면 저 또한 그랬으니까요, 처음에 어떤 사람들은 좀 충격을 받을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조금 기분이 안 좋아질 수도 있어요. 그래서 좀 공허해 질 수가 있습니다. 왜그런고 하니, 이를테면 이와 같습니다. 제가 불교를 공부를 하다보니까, 어릴 적에 저를 이끌어주셨던 은사스님을 만나 뵌 다음부터는 불교로 제가 이렇게 탁 불교를 공부하기 시작하면서는 뭘 하든지 잘 되는 거예요.

 

부처님 가르침만 하면 뭐, 불교공부만 하면 뭐, 뭐든지 잘 되는 겁니다. 무엇을 해도, 다 잘되고, 공부도 더 잘 되고, 그러다보니까 제가 어떤 마음이 있었냐 하면, “, 나는 부처님과 정말 큰 인연이 있고, 큰 어떤 공부연이 있고, 그래서 참 나는 딴사람들에 비해서 부처님 가르침에 대해서 우월하구나.” 이런 생각들을 가지게 되는 거죠. 그러다보니까 나는 참 남들에 비해서 야, 정말 참 낫구나.” 이런 착각을 하게 됐었다는 거죠. 그런데 그런 착각을 하게 되면서 너무 행복한 거예요. 왜 행복하냐 하면 남들은 이렇게 노력해야지 갈 수 있다면 저는 요만큼 공부한 거 같은데 이미 이만큼 간 것처럼 느껴졌단 말이죠. 착각을 했단 말이죠. 남들 어렵게 가는데 나는 대게 쉽게 갔구나. , 정말 남들 말처럼 내가 아주 그 큰 인연이 있는 가보다. 이런 어떤 상대적인 우월감을 느끼면서 아주 행복하게 살았었습니다.

 

그러다보니까 부처님 가르침을 믿고 부처님께 기도하니까 안되는 게 없이 되는 겁니다. 이렇게 하니까 이것도 되고, 저것도 되고, 부처님께 기도하니까 기도 한데로 되고, 그러니까 그걸 착각했던 거예요. , 부처님께 기도하니까 기도를 다 들어주고, 기도를 들어주고 부처님만 믿으니까 뭐든지 잘 되니까 이것이 불교구나. 이렇게 생각하고 살았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순간, 이것이 불교가 아니구나. 그리고 넘어지는 일들이 생기더란 말이죠. 그때 넘어질 때마다 , 이건 뭐지? 나는 넘어지지 않아야 되는데 남들은 넘어지더라도 나는 남들 보다 더 우월하게 앞서가야 되는데, 내가 왜 넘어졌지? 내 인생에 넘어지는 건 안 되는 거야. 나는 부처님과 깊은 인연이 있기 때문에 나는 남들과 달라야 되는 거야.”라는 착각을 하면서 살았었던 겁니다. 그런데 부처님 가르침을 온전히 다시금 돌이켜보고 났더니 그것은 그야말로 전혀 불교를 모르고 있었던, 정말 불교를 모르고 있었구나. 라는 것이 증명이 되는 겁니다.

 

의외로 제가 이런 비유를 들어서 그런데, 여러분들 가운데에도 지금 삶을 사는데 있어서 제가 아마 좀 절망할 수도 있다라고 괴로울 수도 있다라고 말씀 드렸는데, 어떤 사람이 심각하게 절망하느냐 하면, 이런 사람입니다. 지금 까지 인생을 살면서 남들보다 잘했던 사람, 남들보다 공부도 잘했고, 남들보다 돈도 더 잘 벌었고, 남들에게 인정도 받았고, 남들에게 성격 좋다고 능력 있다고 인물 좋다고 자식 잘 키웠다고 많은 칭찬을 들어왔던 사람들일수록 이제 절망이 시작될 수가 있습니다. 그건 왜 그런가 하니 지금까지 우리 사람들이 살아가는 삶의 근원이 뭐냐 하면 아상이라고 해서 이게 나라고 착각을 하다보니까 나라는 걸 만들어 놓고, 여러분이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살아가는 삶의 기쁨이 뭐냐 하면 아상이 확장이 될 때 기쁨을 느끼는 겁니다. 돈이 늘어나고 내 돈이 늘어나고, 내 명예가 늘어나고, 내 지위가 높아지고 내 것이 많아졌을 때 행복을 느끼는 거예요.

 

그리고 반대로 내 것이 축소됐을 때 남들에게 비난받고 돈도 없고, 사업도 망하고 이렇게 됐을 때 아상이 축소되니까 그땐 괴로워지기 시작하는 겁니다. 그러니까 이 아상의 확장을 삶의 행복으로 여겨왔던 사람들, 그런 사람들은 이제 더 큰 행복을 위해서 잠시 절망을 기쁘게 받아들여야 되는 시기가 찾아 올 거라는 거죠. 왜냐하면 우리가 아상의 확장이 기쁨이라고 생각하고 지금 아마 많은 분들이 나도 모르게 아니라고 생각할지 모르겠지만 우리는 나도 모르는 사이에 은연중에 그런 마음들을 가지고 있거든요. 그래서 남들보다 뭔가를 잘하고 잘 됐을 때 기쁨을 느낍니다. 그래서 그 기쁨에 도취되고, 그 기쁨을 남들보다 뭔가 잘한 게 있을 때 자꾸 남에게 얘기도 하고 싶고, 내 자랑도 하고 싶고, 남들 만나면 은근슬쩍 내 자랑 자꾸 하게 된단 말이죠. 그게 아상의 확장에서 오는 기쁨을 내가 기쁨에 빠져서 이 세상을 살아오고 있었구나라는 것을 증명하고 있는 겁니다.

 

그런데 애석하게도 이 부처님 가르침은 아상이 꺾이는 공부입니다. 다시 말해서 지금까지 내가 기뻐해오던 삶의 방식, 아상이 확장되는 것이 기쁨이라고 생각하고 지금까지 살아왔다면 그것은 언젠가는 꺾이죠. 지금은 어쩌면 안 꺾이신 분들도 있고, 서서히 꺾이는 분들도 계실 텐데, 우리는 나이가 들어감에 따라서, 기력이 쇄함에 따라서, 정년퇴직이 따라옴에 따라서, 진급을 못함에 따라서, 다양한 이유로서, 특히나 나이를 든다는 것은 그만큼 아상이 이제 한창 때보다 못해진다는 것을 의미하거든요. 언젠가 우리는 아상이 꺾이는 것은 예약되어 있습니다. 생로병사잖아요. 노병사라라는 것은 분명히 예야 되어 있는 거예요. 노병사가 오지 않는 사람은 없기 때문에. 그러면 지금까지 아상을 확장하는 것만이 기쁨이라고 생각하고 살아왔던 사람은 내 인생은 꺾이지 않겠지. 나는 죽어서 중환자실에 가지 않겠지. 병이 들어서. 나는 무너지지 않겠지.’ 라고 생각했던 사람이라면 그때 가서 그것을 당하고 나서 괴로워할 것이냐?

 

아니면 지금 미리 이 아상이 꺾이는 공부가 무엇인지, 아상이 타파하는 공부가 무엇인지를 알아서 아상이 꺾이고 확장되는 거에 상관없이 아상이 늘어나느냐? 줄어드느냐에 상관없이 나는 정말 아름다운 삶을 휘청거리지 않는 삶을 살겠느냐? 이것을 먼저 결정짓고 나아가야지만 이 부처님 가르침은 제대로 공부하기가 쉬워집니다. 당장 이렇게 되요. 나는 남들보다 나은 사람인데, 부처님 가르침은 이 세상에는 나보다 잘난 사람도 없고, 나보다 못난 사람도 없습니다. 내가 전적으로 옳은 것도 아니고 내가 전적으로 틀린 것도 아니거든요. 그 어떤 사람보다 나는 높지 않습니다. 위대하지 않아요. 그 어떤 사람보다 나는 못나지도 않고, 부족하지도 않습니다. 사실은 이것이 아름다운 것인데, 우리들은 이것은 기분 나빠요. 마음에 안 드는 겁니다. 나는 남들보다 더 나아야 되니까. 그리고 더 나은 것을 향해서 지금까지 달려왔고 어지간히 성공했기 때문에 그것이 지금까지 삶에 배여 있는 겁니다.

   

40506070년 살아오신 삶속에서 이 아상의 확장이 그것을 기쁨으로 여기는 것이 배여 있는 겁니다. 그래서 이 사실을 딱 처음에 접하고 나며 충격을 받습니다. “내가 그렇게 남들보다 더 나은 사람이 아니란 말이야?” 여기에 충격을 받습니다. 그런데 그것보다 더 좋은 소식은 나라는 존재는, 나라는 존재는 남들보다 낫지 않은 존재이고, 못하지도 않은 존재이지만, 나라는 존재는 완전히 무한한 가능성을 가진 존재이고, 나는 상상할 수 없는 힘과 지혜와 자비로움을 완전히 구족하고 있는, 내가 바로 이 우주의 모든 것과도 바꿀 수 없는, 내 안에 바로 부처가 있는, 무한한 어떤 존재라는 것이 드러난다는 거죠. 그런데 그것이 나만 그런 것이 아니라 모두가 그렇다. 풀한 포기조차, 내가 그렇게 미워하던 그 녀석조차, 아주 수준 낮다고 깔보아 왔던 저 옆집 저 사람조차, 나는 불교 가르침을 열심히 공부해서 좀 지혜롭지만 저 사람은 불교도 모르고 참 어리석은데 저 사람조차 나보다 한 티끌만큼도 백짓장 한 장만큼도 못 나눈 게 사실은 근원에서는 없다는 거죠.

 

반대로 그 어떤 잘난 사람이라 할지라도 나보다 티끌하나도 더 잘난 것이 사실은 없습니다. 겉보기에, 겉모습 속에서 또 내 생각이 그렇다라고 생각하고 해석하므로서 내 스스로 그 속에 빠져가지고 살았을 뿐이었던 거죠. 이제 제가 여러분들에게 기쁜 소식을 말씀을 드리면요, 우리는 지금까지 불교를 어떻게 믿었냐하면요, 기독교 천주교 다 마찬가지입니다. 종교를 어떻게 믿었냐하면 구속되는 종교를 믿어왔습니다. 좀 종교가 이렇게 구속받아 온 게 많아요. 매일 기도 다니다가 100일기도 다니다가 100일 기도 하겠다고 딱 결정해놓고 한 50일 정도 했는데 나가기 싫단 말이에요. 그리고 한 2~3일 못나가고 딴 친구들은 다 나갔는데 나는 못나갔어요. 그럼 괜히 마음이 찜찜하고 괜히 부처님이 나를 벌 줄 거 같고, 이런 마음이 들 수도 있어요.

 

또 어떤 사람은 내가 뭔가 잘못했을 때 부처님이 다 알고 계실 텐데. 부처님이 날 벌하지 않을까? 이런 어떤 두려움에 사로잡히는 분들도 계시고, 또 아마 여러분들 지금까지 살아오시면서 아마 큰 잘못이라든가 결정적인 어떤 실수라든가 이런 걸 안 해본 사람은 아마 없을 수도 있어요. 많은 분들이 어떤 하나의 아픔 내지는 짐 내지는 죄의식, 그러니까 씻을 수 없을 거 같은 죄의식에 시달리는 경우도 있습니다. 아마 많은 분들이 그런 것도 있을 수 있어요. 제가 만약 어떤 젊은 보살님이었는데, 그분은 그 누구에게도 얘기를 못했데요. 그 얘기를 하시면서 막 우시면서 나는 천벌을 받을 거라고, 이게 항상 기쁘다가도 이런 생각만 하면 너무나도 그 괴롭다고. 내가 천벌을 받을 거 같아서 괴롭다. 그렇게 얘기를 하더라고요. 무엇이냐고 여쭈어 봤더니, 그 분은 어린 나이에 아이를 가졌는데, 아이가 뱃속에서 많이 크고 있고 있었는데, 본인의 의지에 의해서 어쩔 수 없었지만, 본인의 의지에 의해서 이걸 낙태수술을 하셨던 거예요.

 

그런데 본인은 그것이 아주 큰 어떤 인생에서 너무나도 큰 짐처럼 뭔가 하나가 꽉 내리누르는 것처럼 나를 계속 해서 옥죄어 오고 있었던 겁니다. 그러니까 무엇을 해도 내가 너무나도 행복한 순간에 행복하게 지내다가도 내가 이런 죄를 지어놓고 죄를 저질러 놓고 내가 이렇게 행복하게 살면 더 나쁜 놈이 되지 않을까? 이렇게 생각하고 있는 겁니다. 제가 아는 어떤 장병 아이는 군 생활 하는데 얼굴 인상이 어둡습니다. “왜 그렇게 어둡니?” 물어봤더니, 자기가 옆에서 돌봐드렸어야 되는데, 아버지를 돌봐드렸어야 되는데 돌봐드리지 못하고 있었고, 또 내가 내 좋다고 원하는 걸 하러 나갔다가 아버지가 내가 돌보지 못해서 아버님이 돌아가시는 거를 본거죠. 군에 입대하자마자 돌아가신 거예요. 그러데 이 친구는 어떤 생각을 하고 있었느냐 하면 내가 군 생활을 행복하게 하면, 내가 기쁜 마음으로 웃으면서 군 생활을 하고 친구들하고 활짝 웃으면 아버지에게 더 큰 죄를 지을 거 같은 거예요.

 

내가 아버지를 돌아가시게 놨다고 여기는데, 나는 이렇게 기쁘게 웃고 있으면 아버지에게 큰 죄를 짓는 거 같고 천벌을 받을 거 같은 겁니다. 그래서 이 친구는 좀 좋은 일이 있어도 잠깐 웃다가 바로 인상이 어두워지고, 밝아지지 못하는 겁니다. 그래서 제가 이 친구에게는 그런 이야기를 해줬어요. 네가 정말, 정말 잘못된 착각을 하고 있었구나. 아버지가 너 때문에 돌아가셨다는 그것 자체는 너무나도 큰 착각입니다. 그거로 인해서 죄의식을 가진다는 것은 엄청난 착각입니다. 나로 인해서 내가 결정했다고 할지라도 나로 인해서 이 아이가 낙태가 되었다는 생각은 죄의식을 가져 올 뿐입니다. 사실은 여러분들은 그 어떤 잘못에도 불구하고, 지금까지 큰 죄를 지었음에도 불구하고, 아무리 큰 남들에게 차마 말할 수 없는 큰 죄를 지었음에도 불구하고 여러분들은 무죄입니다. 아무런 죄가 없고 실수도 없습니다.

 

인생에는 실수라는 게 없고 죄가 없습니다. 부처님 가르침에서 물론 방편으로 지옥도 얘기하고, 아귀 축생 다 얘기를 하죠. 그런데 그것은 하나의 방편일 뿐이고, 그것은 좀 있다 말씀 드리겠지만, 또 다른 차원에서 설하는 것이고, 그것을 우리는 어떻게 생각하냐 하면, 진리가 있어서 부처님이 계셔서 부처님이 내가 죄를 지었으니까 저 놈은 나쁜 놈이야. 너는 지옥에 가야 돼.” 하고 지옥에 보낸다고 생각해요. 진리가 나를 체벌한다고 생각합니다. 단죄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다 보니까 죄의식에 사로잡히는 거예요. 이건 우리들의 엄청난 착각입니다. 내가 두려워하고 있으면 죄의식에 사로잡혀 있으면 아버지가 행복할까요? 그 아이 아버지가 행복할까요? 돌아가신 아버지가 , 내 아들이 그래도 내 생각하느라고 저렇게 우울하게 있구나.” 하고 기뻐하실까요? 결코 그렇지 않죠.

 

이 마음의 에너지, 마음의 파장이 밝은 파장을 가지고 있어야지만 그것이 아버지에게 돌아가신 아버지라 할지라도 연결이 되어 있습니다. 연기법은 생사를 뛰어넘는 진리에요. 죽었다고 해서 그 사람과 연결 관계가 끊어지냐?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그 분과 우리는 언제나 연결되어 있어요. 그분이 심지어 다음 생에 또 다른 존재로 윤회했다 할지라도 지금 그 분을 위해서 기도해주고 지금 그 분을 위해서 기쁜 마음으로 축원해준다면 그분에게 영향을 미칩니다. 언제나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그럴진대 내가 그런 생각을 못하고 더 우울해 하고 지낸다면 그것은 그분을 오히려 더 괴롭게 만드는 것 밖에 되지 못하는 거죠. 정말 중요한 것은 우리는 지금까지 죄를 지었을 때 이것을 벌을 받는다. 라고 생각하고 살아왔습니다. 그러다 보니까 우린 누구나 마음속에 하나의 짐이 있어요. 큰 짐 같은 게 하나 있습니다.

 

심지어 내가 자식 클 때 내가 이렇게 좀 해줬어야 되는데 그렇게 못해줘서 그게 하나의 짐이 되기도 하고, 누군가에게 좀 더 잘해주지 못해서 짐이 되기도 하고, 돌아가신 부모님께 좀 더 잘해드릴 걸 하는 게 짐이 되기도 하고, 큰 어떤 죄를 지었기 때문에 짐이 되기도 하고, 그런 짐을 누구나 안고 살고 있단 말이죠. 부처님 가르침을 공부하는데 있어서 첫 번째로 공부해야 될 것은 뭐냐 하면, 그것은 환상이라는 것을 깨닫는 일입니다. 이게 바로 진정한 참회, 이참회입니다. 사참회는 제가 이런 잘못을 했으니 부처님 용서해 주십시오. 하고 고하는 것이 사참회라면, 이건 진정한 참회가 아닙니다. 진정한 참회는 이치적인 참회, 이 참회라고 해서 진참회입니다. 진참회는 어디서 나오냐 하면, 죄라는 것이 본래 없다라는 것을 자각하는 데서 온다. 천수경에 죄무자성종심기 심약멸시죄역망, 죄라는 것은 본래 자성이 없어서 마음 따라 일어난다.

 

내가 죄의식을 느끼는 사람에게만 그 죄의식은 작동을 하는 겁니다. 즉 내가 나는 이런 죄를 지었기 때문에 나는 이러한 벌을 받을 거야. 이러한 벌을 받아야지 나는 마땅해.”라고 믿는 사람에게 내가 그 죄의식을 믿기 때문에 과보가 오는 겁니다. 악업의 과보가 오는 겁니다. 악업의 과보를 반드시 받아야 되는 것이 아닙니다. 불교는요, 숙명론을 거부하는 종교죠. 부처님께서 외도들이 육사외도라고 얘기할 때 그 중에 하나가 숙명론이었어요. 그 숙명론은 이 불교의 인연법과 뭐가 다르냐하면 숙명론은요, 죄를 지었으면 숙명적으로 죄를 지은 사람은 절대적으로 죄를 받아야지만 됩니다. 죄를 받지 않으면 끝나지를 않는 것이 숙명론이에요. 불교는 기계론적인 인과론, 기계론적인 숙명론이 아닙니다. 죄를 지었으면 반드시 지옥가야 된다. 이건 불교가 아니에요.

 

우리는 자유의지로서 부처님께서 소금물에 비유를 드셨죠? 악업을 지었을 때 악업을 반드시 받아야 되는 건 아니다. 컵에 있는 소금물을 먹어야 된다면, 이 소금물이 죄업이라고 한다면 소금물을 이대로 다 먹으면 너무 짜게 먹어야 되겠죠? 먹긴 먹어야 됩니다. 그러나 반드시 짜게 먹을 필요는 없다. 그릇을 키우게 됐을 때 큰 이 원통 버전만한 큰 그릇에다가 그 소금을 그대로 넣고 물을 잔뜩 채워가지고 목마를 때마다 물을 마시면 결국에는 소금물은 다 먹을 수 있겠지만 목마를 때 마시니까 기쁘게 소금물을 먹을 수도 있는 겁니다. 그러니까 죄업을 지었을 때 무조건 죄악으로서만 과보를 받을 필요는 없다. 평범하게 받을 수도 있고, 반대로 기쁘게 받을 수도 있습니다. 이게 기계론적인 운명론 숙명론과 불교의 연기법이 다른 점입니다. 그럼 우리는 지금 이 자리에서 종결짓고 넘어가야 된단 말입니다.

 

불교를 공부하겠다. 나는 부처님 가르침을 공부하겠다.’라고 생각한 사람이라면, 지금까지 내가 짊어지고 어떤 무거운 짐들, 죄의식, 내가 과거에 그때 이렇게 했어야 되는데. 그때 그놈을 만나지 말았어야 내 인생 폈을 텐데. 이 남편이 바뀌어야 되는데.” 이런 후회, 과거에 대한 모든 후회, 내가 잘못 선택했었다라고 생각했던 모든 오해들. 이런 것들을 내려놓는 작업부터 해야 됩니다. 여러분들의 지난 과거는 단 한순간도 잘못된 것이 없습니다. 단 한순간도 죄를 지은 적이 없다. 진리에서는. 부처님은 여러분들이 죄를 지은 사람은 미워하고 선행을 많이 한 사람은 좋아할까요? 좋아할까요?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부처님은 베푼다고 좋아하고 나쁜 짓을 한다고 싫어하고 이런 분이 아닙니다. 그걸 넘어선 분이에요. 부처님은 분별이 없단 말입니다. 완전한 무분별이에요. 이 사람이 죄인이든 선행을 많이 한 사람이든 상관하지 않습니다.

 

상관하지 않고 어떻게 할까요? 무한한 자비심으로 품어줄 뿐입니다. 언제나 용서라는 개념 자체가 없어요. 부처님께는. 용서할 게 없으니까. 내가 용서할만한 게 아무것도 없으니까. 그 누구도 죄라는 게 없으니까. 우리는 내가 내 안에서 개념으로 만들어 놨던 죄의식에 내 스스로 사로잡혀 있었던 겁니다. 누가 여러분들을 비난하고 욕을 합니다. 손가락질 하고. 그랬을 때 여러분들이 상처받는단 말이에요. 그거는 그 사람 욕한 사람 잘못일까요? 그건 결코 욕한 사람의 잘못이 아닙니다. 그 사람은 그냥 자기 업 따라 욕을 했을 뿐인 거예요. 그 사람 눈에는 이러이러한 행동을 하는 사람은 나쁜 놈이다. 그러니까 그 사람은 그냥 욕했을 뿐이에요. 그 사람 잘못이 없습니다. 전적인 책임은 내가져야 되는 겁니다. 왜 그럴까요? 그 사람이 욕을 했는데, 이걸 내가 받을 것인지 말 것인지 이걸 실체화해서 맞아 맞아. 그 사람이 저보고 넌 이것 밖에 못하는 놈이냐?” 욕을 했어요.

 

그랬을 때 그 말을 내가 받아들여서 맞아, 맞아. 나는 이런 욕을 받아도 싸. 맞아. 저 사람 말도 일리가 있어. 나는 진짜 좀 나쁜 놈이긴 해. 내 이런 과보를 좀 받아야 돼.” 라고 스스로 인정하는 만큼, 스스로 그게 맞다고 동의하는 만큼만 아플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는. 그러니까 아플지 말지는 그 사람이 결정하는 게 아니라 언제나 내가 결정합니다. 예를 들어 지나가던 약간 정신 나간 미친 사람이 있어요. 아무나 보고 욕하는 미친 사람이 있습니다. 그 사람이 우리를 보고 욕을 했어요. 여러분 기분 나쁘겠습니까? 기분 안 나쁘죠. 욕을 했는데도 기분이 안 나빠요. 우리는. 내가 안 받아들였으니까. 그런데 욕을 들었을 때 기분 나쁜 건 왜 그렇겠습니까? 그 사람이 욕해서 기분 나쁜 게 아닙니다. 내가 그것이 옳다고 동의했기 때문에. 오케이. 나는 그 욕에 휘둘리겠다. 라고 동의했기 때문에 그때부터 우리는 괴로워지기 시작하는 겁니다. 그러니까 모든 괴로움은 이와 같습니다.

 

모든 괴로움은 내 스스로 껴안았기 때문에 오는 것이지. 내 스스로 마음으로 껴안았던, 아니면 업 때문에 그것을 껴안게 되었다면, 내가 그 원인제공을 했기 때문에 그 결과를 받는 것이지 그 사람은 연극을 하는 것일 뿐입니다. 제가 우린 아무런 잘못이 없고, 죄가 없다고 말씀드렸어요. 그러면 의문이 듭니다. 아니 그러면 나쁜 짓해도 되는 거냐? 나쁜 짓 한 사람들, 그 사람들을 미워해야 되는 거 아니냐? 그건 실질적인 나쁜 짓을 한 사람 아니냐? 라고 생각이 됩니다. 법화경에 보면 제법실상이라고 해서 제법_이건 뭐냐 하면요. 일체 모든 존재와 일체 모든 존재가 벌이는 모든 사건들. 존재와 존재가 벌이는 모든 행위, 이 모든 것은 허상이 아니라 실상이다. 이 말은 뭐냐 하면 참되다. 잘못된 것이 하나도 없다는 소리입니다. 제법은 그대로 실상입니다. 우리가 그 어떤 일을 하던, 그것은 다 아름다운 일이다. 진리의 몫을 행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런 얘기는 아마 어쩌면 아마 못 들어보셨을 수도 있고, 아마 엄청난 어쩌면 마음속에 거부감도 느끼는 분들도 계실 수 있어요. 혹은 너무나도 자유로워지는 분들이 계실 수 있습니다. 거부감을 느끼는 분들은 내가 저 놈은 실체적인 나쁜 놈이야.”라고 생각해서 그 사람한테 내가 당한 게 있는데 그놈이 죄가 없단 말이야? 그럼 괴롭겠죠. 내가 어떤 죄를 지은 게 있는데, 이 얘기를 듣고 ~ 내가 여기에 이 죄의식에 사로잡힐 필요가 없었겠구나. 나는 이제 자유로워질 수 있겠구나.” 라고 생각하면 자유로워질 수가 있는 겁니다. 그런데 이러한 엄청난 자유로움의 사상을 왜 여러분들은 지금까지 옆으로 제쳐놓고 방편의 가르침들만 죽자사자 잘못하면 절에 가서 3천배를 해야지만 참회가 되는 거야. 돈을 많이 벌어서 내가 부자가 되고 높은 자리에 오르면 안 돼. 무소유가 좋은 거야.” 왜 이런 것만을 지금까지 공부해 왔습니까?

 

그것만이 전부가 아니었다. 우리가 지금까지 해 온 것은 모두가 실상입니다. 왜 그런고 하니, 요 얘기부터 먼저 드릴게요. .. 여러분들은 아까 신에 대해서 물어보셨는데 경전에 그렇게 나옵니다. 옛날에 우리는 본래, 이 우주라는 것이 처음에 생성된 게 어떻게 생성됐냐하면 텅 빈, 그러니까 불교에서 공이라고 말하는 텅 빈 공 그 자체였습니다. 이 우주법계는. 아무것도 없는 텅 빈 공, 그 자체였어요. 그러나 그 공속에는 아무것도 없는 허무한 공이 아니라, 무한한 가능성으로 넘실거리는, 모든 가능성이 그 안에 다 포함되어있는, 공이지만 모든 것을 내포하고 있는 그러한 공이었습니다. 아무것도 없었다는 거죠. 그런데 거기서 한 생각 홀연히 일어나면서 어떤 존재계가 벌어지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면서 이제 천상세계에 높은 천상세계 욕계색계무색계에 올라갈수록, 천상세계의 영적 정신적인 어떤 수준이 높아진다고 쳤을 때에, 저 높은 천상세계에 있다가 내려왔다는 말이죠.

 

그래서 인간들은 천상세계에서 내려온 존재라는 얘기가 경전에 나옵니다. 그 말은 뭐냐 하면 천상세계의 무수히 많은 존재들이 있지 않겠습니까? 우리 인간만이 전부다라고 생각하는 건 너무나도 말도 안 되는 편협한 생각이죠. 인간계는 여기가 있잖아요. 인간계는 아주 제한적인 공간입니다. 아주 독특한 존재들이 살아가는 곳이 인간계에요. 사실은 우리 본 바탕은 인간계가 아니라 인간계는 잠깐 놀러 온 겁니다. 놀러 왔다기 보다는 잠깐 깨달으러 온 겁니다. 여러분들은 천상세계에서 복락을 누리고 있던 존재였던 거죠. 그런 어떤 존재들이 천상세계에서는 무한한 행복만 있잖아요. 무한한 행복만 있으니까 깨달음을 얻을 필요가 없어요. 항상 기쁘니까. 무한한 즐거움만을 느끼다가 그 천상세계 속에서도 , 이러한 무한한 행복과 복락을 누리고 있지만, 이것이 다 일까?”

 

여러분 아무리 기쁜 것도 계속 누리면 어때요? 지루해집니다. 아무리 좋은 즐거움도 계속 누리면 지루해지거든요. 그러다보니까 이것이 다인가? 아니지 않을까? 뭔가 삶에 또 다른 것이 있지 않을까?” 라는 것을 의문을 삶에 어떤 의문을 품든 어떤 존재들이 폭 넓게 보다보니까 넓혀보는 거예요. 의식이 넓어지게 되면 이제 보이기 시작하는 겁니다. “, 이 세계가 다가 아니구나.” 그러고 알고 봤더니 인간계라는 아주 독특한 세계가 있다는 걸 보는 겁니다. 인간계가 부처님께서 인신난득이라고 하고, 맹구우목이라고 하듯이 인간 몸 받기가 어렵다. 저 태평양 한가운데에 요만한 조만한 판자가 하나 있는데 거기 구멍이 하나 뚫려있어요. 그런데 저기 밑에 심연에 있던 거북이가 그냥 별 생각 없이 이렇게 올라와가지고 태평양 한가운데 요만큼 떠 있는 판자에 그냥 숨 쉬러 올라갔는데 동그라미에 목이 콱 걸릴 확률.

 

그 확률로 여러분이 인간계에 태어난 거예요. 여러분들이 공무원 되려면 요즘에 200:1이니, 이거는 경쟁도 아니 겁니다. 여러분들은 지금 인간의 몸을 받아서 태어났다는 그 자체만으로도 상상할 수 없는, 상상할 수 없는 경쟁률을 뚫고 이 자리에 와 앉아계신 거예요. 왜 그런 경쟁률을 뚫고 내가 인간의 몸을 받아 태어나겠다고 자원을 했을까요? 이 지구라는 별은 독특한 곳인 겁니다. 부처님께서 뭐라고 그러셨냐하면 나머지 오도는 주로 업을 받는 곳이다. 천상은 그냥 복락을 받는 것 밖에 안합니다. 지옥은 악업을 받는 것 밖에 안합니다. 업을 받는 곳인데 인간계만이 복을 지을 수 있고, 수행을 할 수 있는 곳이다. 유일한 곳이다. 아주 획기적인 공부의 진화가 일어나는 곳입니다. 성숙, 깨달음이 놀랍게 빠르게 일어나는, 진도가 빠르게 일어나는 곳이 유일하게 인간계라는 말이죠.

 

부처님도 인간의 몸을 받아서 깨달았고, 많은 존재들이 인간의 몸을 받아서 깨닫는단 말이죠. 인간으로 있을 때 놀라운 어떤 정신적인 깨달음이 일어나는 겁니다. 그런데 천상세계는 욕계, 제일 높은 천상세계만 해도 인간의 1660년이 그 천상세계의 하루에요. 그런데 왜 천상세계에서 봤을 때 인간계에 가서 100년을 살다 와도 욕계 6천 타화자재천에서 봤을 때는 한 1시간도 안 되는 시간, 30분 잠깐 갔다 오는 시간 밖에 안 되는 겁니다. 경전에 그런 게 나와요. 천상세계 두 부부가 꽃을 따고 있다가 그 아내가 잠깐 사라졌다가 나타났어요. 그런데 아내가 하는 얘기가 내가 인간 몸 받아 태어났다가 내가 몇 10년을 살다가 자식도 셋씩이나 낳다가 한참 살다가 죽어가지고 온 건데, 이렇게 왔다.” 그 남편이 좀 전에 갔다 왔잖아?” “그럼 그 시간동안 나는 몇십평생을 살다왔다.”

 

그 남편이 질문을 합니다. “, 인간들은 어떻게 살든가? 인간이라는 별은 이 천상세계완 달라서 깨달음이 놀랍게 빠른 곳이라던데, 복도 짓고 수행을 할 수 있는 유일한 곳이라던데, 인간들은 정말 수행을 열심히 하고 복을 정말 지으면서 평생 서로 복을 지으려고 서로 남들 도와주려고 애쓰며 살겠어요? 서로 수행하려고 마음 공부하려고 기를 쓰면서 살겠습니다.” 얘기했더니 아내가 하는 말이 말도 마라. 이 인간들은 자기가 왜 인간으로 태어났는지 조차 깜빡 잊고 정말 어리석은 삶을 살고 있더라. 복과 지혜를 증장하기는커녕, 돈 벌기 바쁘고, 남들 짓밟고 올라서기 바쁘고, 명예와 권력이 평생 갈 줄 알고, 좋은 집, 좋은 차 사는 게 자기를 늘려가는 줄 착각하면서 100년 밖에 안되는 게 엄청난 세월인걸로, 착각하고 살더라. 이게 욕계육천이 그렇다는 겁니다.

 

색계와 무색계로 넘어가면 인간계의 겁이 거기서의 하루에요. . 겁은 뭐냐 하면 서울만 한 바윗덩어리가 있는데 천사가 천년에 한 번씩 내려와서 이 바윗덩어리를 옷으로 한번 스치고 올라가는데 이 바윗덩어리가 다 닳아 없어지는 기간입니다. 그 어마어마한 기간을 보내고 가봐야 찰나밖에 안 되는 거예요. 그러니까 천상세계의 신들이 인간계가 힘든 곳인지 알지만, 자원해 내려가겠습니까? 안가겠습니까? 가죠. 너무나도 많은 천상세계의 신들이 인간계로 오고 싶어 한다. 부처님이 오죽했으면 맹구우목이라고 했겠어요. 인간 몸 받아 태어나기 어렵다고 했겠습니까? 그런데 부처님께서는 인간계는 고해라고 그랬습니다. 고해. 고통의 바다다. 무슨 얘기냐 하면 깨달음은 일어나기 위해서는 천상세계 같은 곳에서는 깨달음이 일어날 수가 없습니다. 고통이 없기 때문에. 지옥세계는 너무 심한 고통만 있기 때문에 깨달음이 일어날 수가 없습니다. 다른 오도가 다 마찬가지에요.

 

유일하게 짐승 축생계는 어리석기 때문에 깨달음이 일어날 수가 없습니다. 인간계는요, 적절한 고통이 주어지는 유일한 세계입니다. 다시 말해서 그 사람의 정신적인 수준에 따라서, 그 사람의 정신적인 각성의 수준에 따라, 깨달음의 차원의 수준에 따라서, 그 사람에게 최적의 적합한 괴로움의 재료를 보내주는 곳이 바로 지구별입니다. 그래서 고해라고 하는 이유가 고통을 통해서 깨달아가는 동네가 바로 이 지구별인 겁니다. 그러니까 여러분들은 인간으로 태어난 목적이 뭐냐 하면 고통을 통해서 성장하고 깨닫기 위해서 인간계에 태어나신 거예요. 여러분은 지금까지 착각하고 살은 겁니다. 행복하게만 살고 싶었잖아요. 복 받고 살고 싶기만 했잖아요. 남들한테 베풀어주기보다는 남들을 어떻게 좀 등쳐먹고 내가 좀 더 돈 많이 벌까? 이 생각하기 쉽잖아요. 남들한테 얻어먹으면 기쁘고, 사주면 좀 싫잖아요.

 

좀 냉철하게 얘기를 하면요, 남들한테 얻어먹고 덕 보는 거 있잖아요. 남들한테 얻어먹고 덕보는 거, 이거는 아주 충격적인 일일 수가 있어요. 아주 안 좋은 일 중에 하나죠. 아주 안 좋은 일 중에 하나죠. 이치를 안다면. 아주 좋은 상황은 베푸는, 왜 베풀어야 되느냐 하면 여러분에게는 무한한 자원이 있습니다. 베풀 수 있는 것은 무한하게 넘쳐납니다. 이 우주법계에 전체가 바로 내거기 때문에 베푸는 사람은 이 우주법계 전체를 내거로 쓸 수 있는 사람인데, 베풀지 않으면 갇혀있는 사람이에요. 자기라는 속에 갇히게 됩니다. 이런 식으로 우린 착각하면서 지금까지 인생을 살아왔던 겁니다. 여러분들이 지금까지 사시면서 즐거움도 있고 괴로움도 있었을 겁니다. 즐거움도 격고, 괴로움도 겪고 죄도 짓고 선행도 했을 겁니다. 그런데요, 죄도 짓고 선행도 지으셨을 텐데, 죄를 지으신 게 있다면 그 모든 것은 가볍게 내려 놓으셔도 좋습니다.

 

그리고 괴로운 일을 당한 게 있으셨다면 아니면 지금 앞으로 괴로운 일이 있으면 어쩌지 하고 두려운 마음이 든다면 , 내가 이러다 진급 못하면 어쩌지?” “내가 이러다 남들에게 인정 못 받으면 어쩌지?” “내가 나중에 노후가 위태해지면 어쩌지?” “우리 집값이 떨어져서 내가 벌어놓은 돈 다 탕진하면 어쩌지?” 이런 미래에 대한 막연한 두려움들, “내가 몸에 병이 나면 어쩌지?” 고가 올 거에 대한, 괴로움이 언젠간 올 거 같은 이런 불안감, 이거 이제 과감하게 정리하셔도 됩니다. 왜냐하면 여러분들은요, 진리의 차원에서 여러분들은 죽고 나서 죽음에 대해서도 늙고 병들고는 상관없고, 죽음에 대해서도 두려워 할 것이 하나 없단 말이죠. 하나 없습니다. 여러분 임사체험을 한 사람들, 죽음을 체험한 사람들이 대부분 뭐라고 그럽니까? 지금은요, 서양이나 유렵에서 이런데서 보면요, 임사체험을 한 사람들이 옛날에는 좀 이상한 사람들이 한다. 이렇게 생각했는데 지금은 그게 아닙니다.

 

아주 유명한 대학교 나온 그 관련된 유능한 어떤 교수, 학자 이런 분들이 임사체험을 하고 나서 놀랍게 그것을 논문으로 남기고 이것은 내가 여태까지 착각했었다. 이것은 정말 진실이다.” 너무나도 이제는 과학적으로 제가 지금 하는 이야기들이 부처님 경전에만 있는 게 아니라, 과학적으로 밝혀지고 있는 시대입니다. 제가 부처님 가르침을 공부하면서 앞으로 과학에서 어떻게 얘기하는지도 말씀 드리겠지만, 놀라울 정도로 시대가 바뀌고 있는 상황입니다. 부처님 가르침이 이 세상 사람들에게 너무나도 강력하게 전해지고 있는 시기에요. 지금이. 죽음에 대해서 결코 두려워 할 것이 없습니다. 죽음은 우리를 괴롭히는 것이 아니라, 본래 자리로 되돌아가는 것일 뿐이고, 무한한 지구의 평화, 지구의 행복감 속에 다시 되돌아가는 것입니다. 단 자살을 한다거나 이러면 왜 안 될까요?

 

내 의지로 죽이는 것이기 때문에, 죽기 직전의 의식. 여러분 윤회하는 것의 가장 큰 비중이 한평생 어떻게 살았느냐의 업도 중요한데요, 바로 그 다음 생을 결정하는 것, 한평생을 가지고 왔던 업들은 그 다음 생, 그 다음 생, 두고두고 놔뒀다가 그 과보를 받습니다. 그런데 바로 다음 생이 결정하는 상당한, 예를 들면 70~ 80% 정도가 되는, 바로 다음 생이 결정짓는 결정적인 요인은 죽기 직전의 의식입니다. 죽기 직전의 위식. 어떤 스님은 불교에서 수행하는 이유는 죽기 직전에 깨어있기 위함이다라는 경우도 있단 말이죠. 그러니까 죽기 직전에 자살을 한다는 거는 내가 내 스스로를 너무나도 어둡고 암울하고 암담하게 여겨서 죽이는 거 아니겠어요? 그러다 보니까 그 의식 그대로가 그 의식과 맞는 파장으로 태어날 수밖에 없는 거죠. 그러니까 이제 안 된다는 것이고, 그렇지 않은 경우는 대부분의 경우는 이런 어떤 경우를 빼고는 대부분의 경우는 어떤 죽음을 당해도 우리들은 생각하기를 살아있으면 성공하는 것이고, 죽음은 실패한 거로 착각 합니다.

 

30대 밖에 안 된 젊은 사람이 교통사고로 죽었어요. 우린 실패라고 생각합니다. 그거는 결코 실패가 아닙니다. 그 사람은 그 사람의 입장에서는 그것이 가장 아름다운 그 사람의 어떤 영혼의 선택이었던 겁니다. 그 사람의 인연에서는 그 사람의 공부에서는 그것이 가장 최선이었기 때문에 그 일이 그 사람한테 벌어졌던 겁니다. 여러분 예를 들어, 10생을 매년 100살씩 10번 사는 게 낫겠어요? 아니면 한 70살씩 한 열댓번 사는 게 낫겠어요? 아니면 한번은 80살도 살고, 한번은 100살도 살고, 한번은 30살도 살고, 이런 게 낫겠어요? 그건 취향에 따르죠. 그죠? 어느 게 좋고 어느 게 나쁜 게 아닙니다. 좋고 나쁜 상황이 아니에요. 죽는다 하는 것도. 우리는 생사의 사고방식에 갇혀있기 때문에. 생사가 실제 있다고 생각하니까, 생사가 성공과 실패인 걸로 착각하는 겁니다. 그건 결코 성공과 실패가 아닙니다.

 

여러분들이 누리고 있는 그 어떤 괴로움도, 앞으로 올지 모르는 그 어떤 괴로움이라도 결코 여러분들이 두려워 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것은 분명한 목적을 가지고 오는 거예요. 어떤 목적을 가지고 오느냐하면 나를 깨닫게 하기 위한 목적. 나를 돕기 위한 목적으로만 옵니다. 나에게 나를 돕기 위한 자비심으로 인해서 오는 것이고요, 나를 깨닫게 하기 위한, 즉 지혜를 나에게 전해주기 위한 목적으로 옵니다. 자비와 지혜를 전해주기 위한 목적. 이것 때문에만 오는 겁니다. 우리 삶이 벌어지는 이유는. 내 인생에 병이 오는 목적은 어떤 사람이 앞만 보고 달리고, 열심히 일만 하고 이러던 사람이 갑자기 병이 나서 쓰러져 있으면서 깨닫는 거죠. “이러다가 죽을 수도 있겠구나. , 내가 여태까지 앞만 보고 달려왔는데 이게 다가 아니구나.” 그래서 이제 그 큰 병을 앓고 일어난 사람은 자기 몸도 더 돌보고요, 안 좋은 음식도 안 먹고요, 운동도 더 하고요, 가족과 더 따뜻한 시간을 많이 보내고, 자식과 대화도 더 많아지고, 그렇게 됩니다.

 

너무 어떤 회사에서 승승장구만 하는 사람은 분명히 교만해 지기 쉽습니다. 그런데 승승장구를 하다가 주춤 거리고 무너지기도 하고, 또 이게 잘 올라가다가 말고 또 다시 욕도 얻어먹고, 좌절도 당해보고 이러던 사람들은 삶을 대게 겸손하고 겸허하게 받아들이면서 삶을 바라보는 안목이 상당히 넓어지게 됩니다. 많은 것을 수용하고 받아들이고 포용하는 넒은 가슴이 생겨요. 그런데 앞만 성장만 성장만 하고 좋은 일만 계속 생기던 사람은 이게 최악의 상황입니다. 여러분 인생에서 최악의 상황은요, 계속해서 좋은 일만 벌어지는 상황입니다. 이게 왜 최악의 상황이겠어요? 그럴 거 같았으면 여러분이 천상세계에 그냥 있으면 되지 왜 왔겠어요? 인간계에. 인간계에 온 목적이 고해라는, 나에게 적합한 고를 통해서 성장하기 위해서 왔는데, 그 고가 내 인생에 오지 않는다면 아무 삶의 이유가 없지 않습니까?

 

그래서 지금까지 여러분들이 생각해 왔던 고에 대한 관점, 이거 완전히 뒤바꿔야 됩니다. 우린 착각하고 살아왔던 겁니다. 고가 왔을 때 가슴 열고 받아들일 수 있어야 되요. 수용할 수 있어야 되요. 그런데 수용함과 동시에, 허용함과 동시에 이게, 여러분들의 의식수준이라는 게 뭐냐 하면요, 공부를 하면 지혜가 증장이 되는데, 지혜가 증장한다는 게 뭘 의미하냐하면요, 허용하는 범위가 넓어지는 겁니다. 수용하는 것이 넓어지고 마음이 열리기 시작하는 겁니다. 옛날에는 마음이 꽉 닫혀가지고 요만큼만 받아들였는데, 공부를 하게 되면 더 많은 것을 받아들일 수 있는 공간이 생겨요. 마음이 열려있기 때문에. 여러분 마음이 요만큼 좁아졌을 때는 어때요? 자식들이 엄마엄마 이렇게 해줘요. 저렇게 해줘요. 뭐라고 뭐라고 소리소리 지르는 게 대게 듣기 싫잖아요. “,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말고 들어가.” 이러고 욕을 한단 말이죠.

 

그런데 그날이 기분이 너무 좋은 날이에요. 기분이 너무 좋아가지고 마음이 활짝 열려있어요. 애들이 하기 싫은 거 하게 해 달라 해도 그래. 해라.” 이러고. 게임 한다 그래도 그래그래. 뭐 게임도 해라. 할 수도 있지.” 이거 다 허용해 준단 말이죠. 마음이 열리면 허용이 됩니다. 많은 것들이 허용이 돼서 그 속에 많은 것들이 들어오기 시작해요. 그런데 우리는 의식이 제한되어 있단 말이죠. 여러분들 불교에서는 지혜가 중요하잖아요. 대학교수라고 지혜롭고 초등학교도 못나온 사람이라고 지혜롭지 않은 게 아닙니다. 불교에서 말하는 지혜를 단적으로 볼 수 있는 것은 어떤 것이냐 하면, 대학 교수라고 할지라도 보는 시야가 한정된 사람이 있습니다. 그게 무엇이 되었든, 어떤 견해가 되었든, 심지어 어떤 종교가 되었든, 어떤 도그마가 되었든 그 안에 딱 갇혀서 이것만이 진리라고 생각하는 사람, 이거 밖에 건 전부다 잘못된 거라고 탁 벽을 긋고 요만한 한 점, 그 안에서만 생각하는 사람.

 

그게 바로 의식이 제한되어있는 겁니다. 저 또한 부처님 가르침이 너무나도 위대하다는 것을 알지만, 옛날에는 불교만 공부했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는 불교만 진리라는 생각이 아니라 불교는요, 제가 공부해보니까 그렇습니다. 불교는 광대무변한 전체의 진리를 의미한다면 히말라야 정상에 올라가는 데는 다양한 루트가 있지 않습니까? 다양한 길이 있지 않습니까? 그 다양한 돌아가는 길도 있을 수도 있고, 힘들지만 가파른 길도 있을 수 있고, 그건 취향의 차이인거에요. 다양한 종교 사상 철학, 이런 것들을 통해서 그 가까이 까지 갈 수가 있습니다. 분명히 가까이 까지 갈 수가 있어요. 그런 면에서 모든 종교를 허용하게 되는 겁니다. 저는 목사님 신부님 타종교 신자들을 미워하거나 이런 마음들이 어느 순간부터 사라지고, TV옛날에 보면 뭐 이렇게 시상식 같은 거 할 때 하나님께 감사합니다.” 이러면 옛날에는 얼굴을 붉혔으면, 지금은 그 분의 마음이 이해가 되는 거에요.

 

저분은 저분의 저 상황 속에서 저 아름다움, 그분의 입장에서는 그분의 상황 속에서는 최선의 아름다움을 표현하고 있는 겁니다. 그분은. 그걸 우리가 미워할 필요는 없어요. 그걸 미워한다는 것은 우리 안에 그걸 받아들이지 못하는 제한된 것이 내 안에 있기 때문에 그걸 못 받아들이는 것이거든요. 그래서 이 지혜가 열리기 시작하면 많은 것들이 받아들여지기 시작하고요, 부처님 가르침도 마찬가지입니다. 옛날의 경전을 보면 요거 요거는 맞는 얘기인데, 이거는 조금 허황된 거 같다. 이런 생각들을 했었어요. 제가. 그런데 공부를 하면서 보니까 경전에 나와 있는 이야기들이 상당히 많은 부분이 , 이게 허황됐다고 생각했는데 그게 허황된 것이 아니었구나.” 예를 들면 천상세계에 관련된 이야기들이라든가, 우리가 아까 말씀 드렸던 이야기들, 천상세계의 신들에 대한 이야기들로부터 다양한 가르침들이 옛날에는 이건 아니야.” 라고 생각했던 것들이 이제는 활짝 열린 가슴으로 들어오기 시작하는 겁니다.

 

아주 단적인 예로 옛날 같으면 신도님들이 꿈에 대해서 얘기하고 그러면 아이고 그런 건 꿈일 뿐이니까 그려러니 해석하려고 하지도 말고 필요 없다.” 이렇게만 생각했는데, 물론 그 말이 근원에선 맞습니다. 근원에선 맞는데, 또 다른 차원에서는 꿈이라는 것은 우리의, 티베트에서는 꿈을 점검 받으므로서 그 사람의 의식수준이 얼마만큼 공부가 되고 있는지를 스승에게 점검을 받고 있기도 하거든요. 그 꿈이라는 것이 어떤 수행의 과정에 포함되는 것이구나라는 것들을 알게 되니까 그것도 하나의 공부재료로 쓸 수가 있게 되고, 다양한 것들을 포용하면서도 근원을 놓치지 않게 된단 말이죠. 그래서 여러분들은 그 본질을 이제 전도된 몽상으로서 이 역사가 만들어 왔던 지금의 와서는요, 불교 하면은 여러분들은 뭐를 불교가 생각하세요? 스님이 사시불공 하는 거, 이걸 불교라고 생각해요. 사시불경 열심히 해야지 이게 올바로 하는 거 같고 49재하고 천도재하고 뭐 한 시간씩 이것도 하고 저것도하고 해야지 이게 불교를 제대로 한다고 생각을 한단 말이죠.

 

그거는 역사에서 만든 부산물이죠. 부처님 가르침의 부산물일 뿐이죠. 지금 요즘에 많은 스님들은 아예 사시불공도 없애고, 천도재도 없애거나 아니면 심플하게 하거나 이러는 사찰들도 많이 생겨나고 있어요. 본질로 다가가기 시작하는 겁니다. 이제 다시. 역사에서 왜곡해 왔던, 방편을 너무 거추장스럽게 집착해 왔던 그런 것들을 놓아버리기 시작하는 겁니다. 지금은 이제는, 이제 그런 시대로 이 시대 자체가 도립을 했어요. 지금의 시대는 놀랍게 본질이 중심이 되기 시작하는 시대이고, 이 세상이 보다 많은 사람들이 놀라운 속도로 깨어나기 시작하는 시대입니다. 부처님께서도 예언하셨던 것처럼. 그래서 지금의 시대에 우리에게 정말 필요한 것은 공부고 수행이고, 우리가 지금 이 시기에 공부라고 수행을 하게 됐을 때는요, 이 우주적인 공명을 받게 됩니다.

 

어떤 양자물리학자는 그렇게 얘기를 해요. 지금 지구 전체적인, 지구 인류에 전체적인 파장, 헤르츠가 옛날보다 상당히 많이 빨라지면서 과학적으로 봤을 때 대게 놀라운 차원으로 진입하고 있다고 그래요. 제가 상담을 하는 많은 신도님들 중에 스님들뿐 아니라 신도님들 중에도 상담을 하다보면 아주 재미난 일들을 봐요. 신도님들 당신은 뭔지 모르시면서 이렇게 당황해 하시는데, 뭐랄까 옛날 같았으면 그야말로 한 소식 했다고 할법한. 이런 공부하는 과정에서 놀라운 어떤 경험들을 많이 하는 분들이 많이들 나타나기도 합니다. 이게 본질이 중요해지는 시기이기 때문에 그 흐름을 그 공명의 에너지, 공명의 파장을 우리도 함께 타고갈 수 있는 놀라운 시기에 우리가 접한 겁니다. 그래서 제가 다시 결론을 좀 말씀을 드리면요, 여러분들은 단 한순간도 실수한 적이 없습니다.

 

여러분의 과거는 완전히 옳았습니다. 잘못했다고 생각하는 것조차 완전히 아름다웠습니다. 그것은 그 일이 일어날 수밖에 없었기 때문에 일어났던 겁니다. 그것은 왜 일어났느냐? 나를 돕기 위해서. 나를 깨닫게 해주기 위해서 일어났던 겁니다. 그리고 그것을 통해서 여러분들은 성공적으로 착착 깨달아 오고 있었던 거예요. 여러분들 전생 그 전생이 뭐였는지 궁금하십니까? 그 수없이 많은 수억 겁의 전생의 총채, 총화가 지금 나의 모습인 겁니다. 지금 나의 모습으로 나는 지금 어떤 깨달음의 정점에 지금 놓여 있는 겁니다. 수없이 많은 윤회 속에서. 단 내 머릿속에서 지금까지는 그것은 아니라고 배워왔던 겁니다. 하나님께서 심판을 한다. 염라대왕이 주고나면 심판을 한다. 지옥 보낼지 어디 보낼지 심판을 한다. 이렇게 배워왔잖아요. 심판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이 우주에 심판하는 존재는 유일하게 나 자신밖에 없습니다.

 

단 심판하지 않으면 어쩝니까? 나쁜 짓을 해도 그 사람 벌 받지 않습니까?” 벌은 받지 않습니다. 그러나 균형의 법칙에 따라서, 들어오고 나감의 법칙에 따라서, 균형의 법칙에 따른 인과응보는 받습니다. 내가 누굴 죽이면 누군가의 죽임을 당하죠. 내가 누군가를 죽였어요. 다음 생에 아프리카에 태어나서 한 살 두 살 밖에 안 됐는데 못 먹고 바로 그 자리에서 죽게 될 수도 있습니다. 그 다음 생엔 또 그 업을 멸했으니까 또 다르게 태어날 수 있겠죠. 그럼 그 아프리카에서 한 살 두 살 돼서 죽었던 아이 같은 경우에, 우리가 무조건 이것은 좋고 나쁘고 이런 관점에서 볼 수가 없단 말입니다. 더 깊은 차원에 그 아이만의 몫이 있었던 겁니다. 에를 들어 내가 누군가를 죽였어요. 내가 거기에 대한 죄의식에 사로잡히고 있었다가 죽었습니다. 다음 생에 누군가가 나를 죽일 수 있어요. 그것은 자기가 끌어당긴 겁니다. 그 죽인 사람만 나쁜 놈이 아니에요.

 

내가 그것을 죄의식으로서 붙잡고 있었기 때문에 그러한 과보로서 이 과보를 받아야지만 이건 사라진다고 굳게 믿고 있었던 겁니다. 그리고 그러한 어떤 인과응보의 법칙에 따라서 그러한 과보를 받았던 거죠. 그러기 때문에 사실은 우리는 나쁜 짓을 하는 사람을 절대적으로 욕을 했습니다. “저 나쁜 놈, 저 놈은 죽일 놈이다.”하고 욕을 했어요. 그런데 사실은 근원에서 보면 욕 얻어먹을 사람은 없습니다. 그리고 여러분 무작위로 요즘에 보면 그런 거 있잖아요. 미국에서 보면 갑자기 따발총으로 죽이거나 뭐죠? 묻지 마 살인도 하고 이러지 않습니까? 그런 걸 보면서 여러분들은 두려움에 떨어요. 그러면서 집에 가다가 혹시 그런 게 나한테 있지 않을까? 걱정을 할 수도 있습니다. 여러분들은 전혀 걱정 할 필요가 없는 존재입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겉으로 봤을 땐 무작위라고 생각을 하지만, 이 세상에 이 우주에 무작위라는 건 없습니다. 정확한 인과응보, 인연 따라 그 일이 일어나고 있을 뿐입니다.

 

내가 업으로 인해서 끌어당겼던, 아니면 내 한 생각으로 끌어당겼던, 내가 그것을 원했든, 그 죄의식을 붙잡고 있으므로서 그것이 이 죄의식의 에너지가 그것을 공명해서 끌어당겼던, 내 안에서 만들어냈기 때문에 그것이 일어나는 것이지, 그래서 부처님의 가르침의 핵심은 그 과보를 반드시 받아야 되는 것만은 아니다. 딱 참회하고, 참회하고 그 자리에서 내려놓고, 그 때부터 새롭게 살기 시작하면 됩니다. 보통 많은 사람은 죄를 지었을 때, “난 어차피 죄인이니까 앞으로 열심히 살아도 소용없어. 한번 배린 몸.” 그러면서 더 나쁜 짓을 더하거든요. 죄를 짓는다는 의식 속에서는 지옥 간다는 의식 속에서는 그럴 수밖에 없어요. 그런데 부처님 가르침에서는 그 어떤 사람도 지금 이 순간이 가장 중요하기 때문에 지금 이 순간 참회하고 내려놓게 되면 모든 것은 제로로 돌아갈 수 있습니다. 그 사람은 다시 시작할 수가 있어요. 모든 사람은 늦은 순간은 없습니다.

 

왜냐하면 지금 이 순간만이 존재하기 때문에 그래요. 여러분들의 과거의 그 어떤 많은 죄나 잘못이나 미래에 있을 그 어떤 일들, 모든 것이 지금 이 순간에 존재합니다. 지금 이 순간에 어떤 의식을 바꿀 것이냐에 따라서 여러분들은 놀라운 삶으로 바뀔 수가 있어요. 그래서 이 부처님 가르침을 이제 다음 주도 공부를 하실 텐데 이 가르침은요, 이 놀라운 공부를 하는 겁니다. 여러분들이 지금 이 순간에 여러분들의 의식을 확장하고, 더 많은 것을 열므로서 여러분들은 다른 거 할 필요가 없습니다. 우주법계에서 언제나 지혜는 무한하게 공급되고 있는 중에 있습니다. 매순간. 다만 내가 제한했기 때문에 그만큼만 오고 있었던 거죠. 그런데 부처님의 가르침을 공부함으로 통해서 이것을 점점 저절로 열게 됩니다. 아마 여러분들이 강의 끝날 때쯤 되면 내 마음이 많이 열려있구나.

 

내가 옛날 같으며 이렇게 생각했을 텐데. 더 많은 것을 받아들일 수 있고, 더 많은 것을 수용할 수 있고, 허용할 수 있고, 괴로움이 오더라도 그것을 허용할 수 있는 여유가 생기고, 고통이 오더라도 그것을 허용하고 수용할 수 있는 여유가 생기는 그 어떤 지혜가 증장 되는 그런 일들이 분명히 생겨날 거라고 저는 생각을 합니다. 그래서 다음 시간부터 이제 공부를 하실 건데, 오늘부터 가셔서요, 제가 아까 말씀 드린 그것을 실천을 하시는데, 어떻게 하면 실천을 하시느냐하면 공부를 하기 위해서는 내 안에 있던 죄의식, 업장, 괴로움, 찜찜한 마음, 과거의 잘못됐다고 여겼던 모든 것들 이것을 내려놔야 된다 그랬잖아요. 어떻게 하면 내려놓고 참회할 수 있냐 하면 나 자신을 완전히 용서해 주는 것. 그리고 나 자신을 완전히 사랑하는 것부터 시작해야 됩니다. 남들을 용서해주고, 남들을 사랑한다? 이거는 두 번째 문제입니다.

 

나 자신을 용서하고 나 자신을 사랑하지 못하는 사람이 어떻게 남을 용서하고 사랑하겠어요? 이것은 획기적인 수행입니다. 아주 획기적인 겁니다. 여러분들이 상상 한 것, 그 이상으로 획기적입니다. 여러분들이 여러분 자신을 무한정 용서해 줘야 된단 말이죠. 용서해도 이거는 도저히 용서 못 하겠는데 라는 게 없어야 됩니다. 그 어떤 잘못에도 불구하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용서를 해주시기 바랍니다. ? 부처님은 언제나 용서했는데 내가 그걸 붙잡았기 때문에 거기에 스스로 사로잡히고 있었던 거거든요. 여기에 사로잡혀 있으면 평생 그 어둡고 탁한 에너지에 걸러서 모든 것이 바라보이시게 되요. 세상이 어둡고 탁한 것에 걸러서 색안경처럼 보게 되고, 내 안에 있는 것이 공명 되어서 우주에서 나에게 옵니다. 내 안에 어둡고 탁한 마음이 있으면 어둡고 탁한 일들이 자꾸 나에게 와요.

 

내가 누굴 미워하는 마음 있으면 나를 미워하는 사람을 직장에서도 만나고, 여기가도 만나고 저기다도 만나요. 내가 원한심이 있으면 원한심을 느낄 만한 사람을 만나게 되고, 내가 사랑의 마음이 마음속에 있으면, 이상하게 이 단체에 가도 나를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고, 저 단체에 가도 나를 도와주는 사람을 만나고 그렇습니다. 내 마음의 상태에 어떤 것이 있느냐에 따라서 내 바깥에 있는 세상은 내면이 그대로 투영된 거에 달리 합니다. 안팎은 없어요. 유식이라 그러잖아요. 오직 마음이다. 이 마음이 드러난 거에 불과한 겁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이 해야 될 것은 세상을 바꾸는 거, 나쁜 놈 성격을 바꾸는 거, 남편을 바꾸는 거, 자식을 바꾸는 거, 이거 다 아닙니다. 내 마음을 바꾸는 거예요. 내 마음만 바꾸면 그 바깥은 저절로 바뀌게 되어 있습니다. 내 마음을 바꾸는 첫 번째는 다음시간 오시기 전까지 나 자신을 완전히 용서해 주세요. 방법? 어떻게 하면 되느냐 하면, 단순합니다.

 

내 마음을 바라보면서 하루에 5분도 좋고 틈나는 데로도 좋습니다. 나 자신을 바라보면서 내 마음에 일어나는 모든 것을 허용해 주고, 또 내가 과거에 찜찜했던 모든 것을 허용해 주면서 괜찮다. 괜찮다.” 하면서 그것은 다 온전한 것이었다. 그거 자체가 아름다운 것이었다. 그것을 이해한다. 다독거려주는. 어머니가 아무리 잘못을 한 자식이라도 안아주고 다독거려 주듯이 부처님은 언제나 여러분은 안아서 토닥여 줍니다. 여러분이 어디 가서 살인을 저지르고 왔어도 언제나 토닥여 주고 사랑해주는 분이 부처님이고 진리다. 그러니까 나 자신을 완전히 용서해주기부터 시작해야 됩니다. “용서합니다. 용서합니다.” 하는 말을 숨을 들이쉬면서 감사합니다.” 하고, 숨을 내쉬면서 용서합니다.” 하셔도 좋고. 또 숨을 들이쉬면서 수용합니다.” 숨을 내쉬면서 용서합니다.”도 좋습니다. 그러니까 수용과 목탁소리에 글이 나와 있을 텐데, 수용과 용서의 호흡관을 통해서 내 삶에 등장하는 모든 것을 수용하고 그것을 다 용서해 주십시오.

 

과거를 전부 다 통째로 수용하고 그것을 용서해 주세요. 그래서 용서합니다. 용서합니다.” 하는 말을 하루에 백번, 2백번, 3백번 좋으니까, 하루에 하여간 백번 이상씩. 수용와 용서의 호흡관을 꾸준히 하시고, 그 내용을 카페에서도 좋고 그냥 검색엔진 같은 데서도 수용과 용서의 호흡관치면 자세한 설명이 나와 있으니까 그걸 읽어보셔도 좋고요. 그래서 수용하고 용서하는 그런 걸 통해서 내 내면을 완전히 정화하는 그 작업을 다음시간까지 미션수행으로 드립니다. 아카데미하면서 한 번씩 미션수행을 드립니다. 그 주 한주동안 이제 숙제죠. 숙제. 숙제로 하고 실천해야 될 것들인데, 이번 주 어떤 미션은 수용과 용서의 호흡관이고, 숨을 들이쉬면서 수용합니다.” 하고 숨을 내쉬면서 용서합니다.” 해서 나 자신을 완전히 용서해 주는 것부터 하시고, 그것을 통해서 내 내면이 어느 정도 정화가 되었는지, 어느 정도 용서가 되었는지, 나 자신을 완전히 허용할 수 있는지,

 

어느 것이 내면이 되느냐하면 내가 너무나도 사랑스러워지면, 내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랑스러워지면, 나의 과거가 완전히 받아들여지고 사랑스러워지고, 나의 미래에 대해서도 그 어떤 것이라도 와라. 내가 받아들여주겠다. 그것을 통해서 성장해 나가고 그것을 통해서 깨달아 나가 주겠다. 라고 수용이 되고, 용서가 된다면 여러분들은 큰 성공을 이룬 겁니다. 어쩌면 이번 생에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단 한 번도 겪어보지 못한 놀라운 성공을, 언제나 성공이었지만, 더 큰 성공을 거둘 수가 있을 수 있습니다. 그렇게 하시고, 목탁소리 지대방, 다음 카페에 가시면 거기 아카데미 게시판이 있고요, 거기 미션 수행방이라고 있습니다. 달마미션 수행방, 붓다미션 수행방인가요. 있습니다. 거기에 붓다 미션 수행을 하시고 그것에 대해서 이렇게 수행 일기 같은 것들을 이렇게 좀 올려주시면 좋겠고요,

 

또 이렇게 강의 후기 같은 것도 거기에 좀 올려주시면 많은 분들이 보시고 공유하시고 그것이 하나의 계기가 되어서 또 많은 분들이 공부해 동참도 하시고 그 하나의 포교가 되고, 또 그런 것들이 아주 좋은 많은 도반들과 함께 가는 것이 될 거 같고요, 그렇게 해서 글을 올리고 하신 분들을 이렇게 가끔씩 뽑아가지고 선물도 드리고, 수료하는 날, 또 수료선물도 드리고, 뭐 그렇게 하겠습니다. 그래서 강의만 한번 듣고 끝나는 것이 아니라 일주일 내내 수행을 하고, 그 수행을 통해서 다른 사람이 어떻게 수행하는지 점검하고, 많은 분들이 그렇게 얘기를 했어요. 여기서 강의를 듣는 것도 좋았지만, 집에서 그 수행을 직접 실천해보고, 그리고 딴 분들이 어떻게 수행했는지를 가서 보고, 내 수행일기도 쓰고 하면서 더 큰 어떤 공부가 되었고, 더 큰 실천이 되었다. 그 실천에 따르지 않는 수행은 여기 1년을 공부해도 별 소용이 없을 겁니다.

 

그래서 수용과 용서의 호흡관을 오늘 가셔서 열심히 해보시고, 다음 주에 목요일 날 새롭게 부처님 생애부터 공부를 시작하겠습니다. 오늘 늦게까지 듣느라고 고생 많으셨구요, 아주 돌아가셔서 주무시고 여러분 자신을 완전히 용서해서 얼굴이 환하게 핀 모습을 다음 주에 뵙도록 하겠습니다. 수고하셨습니다.

 

 

 

보통 깨달음이라는 것은 옛날 전통방식에서는

'수행을 통해서만 온다' 그리고 '특정한 수행을 통해서만 온다'고

우리가 생각하기도 했었는데요, 꼭 그런 것이 아니죠.

 

요즘에 그 서양이나 뭐 이런 데서도 그렇고 우리나라도 마찬가지인데,

불교를 통해서, 수행을 통해서 깨달음을 얻는 분들도 계시지만

또 중국 조사서에서 보면 어떤 스님의 한 마디, 말 한마디에 깨달음을 얻기도 하고,

뭐 어떤 꽃 한 송이를 바라보다가,  

부처님 같은 경우는 새벽 별을 보고 깨달음을 얻으시기도 하고

혹은 요즘에 보면 아주 깊은 그 절망과 고통과 우울과 이런 어떤 깊은,

어떤 침체에 빠져 있던 사람이 정말 극에까지 가는 어떤 괴로움 속에 있다가

한 생각, 한 순간 그냥 그것이 탁 깨지면서 깨달음이 오는 경우들도 더러 있습니다.

 

그런가 하면 요즘에 또 이렇게 알려져 있는 것들 가운데 보면

임사체험을 한 사람들이, 임사체험을 하는 사람들이 죽음을 경험하고 돌아와서 봤더니

옛날과, 전과는 전혀 다른 어떤 세상을 보는 어떤 관점들이 생기게 되고, 이런 것들이 있습니다.

 

『티벳 사자의 서』에도 보면 우리가 죽음이란 것은

죽고 나서 놀라운 깨달음의 가능성이  열리기 시작한다 그럽니다.

그래서 우리가 칠칠재를, 일곱 번 재를 하는 이유도 일곱 번의 어떤 가능성이 열린다는 거죠.

 

그러니까 우리가 살아 있을 때, 살아 있을 때 이 깨달음도 마찬가지잖습니까?

우리가 생각했을 때는 그냥 한 생각 탁 깨달은 것 같지만,

겉에 보기에는 한 생각 깨달은 것이지

실제로 보면 부단히 닦고 노력하고 어떤 선근 인연을 쌓고 그랬을 때

어느 한 마디 말에 의해 탁 깨달을 수도 있고 하는 것이거든요.

 

마찬가지로 우리가 살아있을 때 수행을 열심히 하거나

또는 오랜 생 동안 많은 공부가 되어 있는 사람이라면

그게 살아 있는 어느 순간에 탁 깨달음의 순간이 올 수도 있지만,

그 놀라운 기회 중에 하나가 죽음이라는 거죠.

 

죽음이라는 그 순간에 놀라운 깨달음을 탁 얻게 되는 수가 있다는 겁니다.

그래서 임사체험한 사람들 가운데 어떤 사람들은

아주 놀라운 어떤 것들을 경험하고 오는 이런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런데 그 가운데, 오늘 제가 여러분께 한 분을 좀 소개를 시켜드릴까 하는데요.

아니타 무르자니라는 분인데요.  

제가 법보신문에 '스님이 사랑하는 책들' 인터뷰에도 실었던 책 중에 한 권인데,

이 사람은 암과의 사투 끝에 죽음의 문턱에 이르렀다가, 갔다가 돌아온 인도여성입니다.

싱가포르에서 태어나서 홍콩에서 계속 살았던 사람인데요,

2002년에 임파선 암이 발견되고, 4년 동안 투병 생활을 했고,

2006년에 이제 마침내 악성세포로 인해서 모든 몸의 기능이 멈추게 됐고,

이제 뭐 죽음의 상태, 임사체험의 상태로 들어가면서

한 30여 시간 동안 이제 임사체험을 경험하게 됩니다.

 

그런데 그 경험을 하고 다시 살아났는데,

살아나고 나서 너무나 그 놀라운 체험을 하게 된 거예요.

임사체험이라는 시간동안 이분은

그야말로 깨달음과 같은 그런 어떤 경험들을 체험하게 된 겁니다.

 

그래서 이런 책들 유형의 비슷한 책들도 또 여럿 나와 있는데,

이 책이 특별히 아주 감동적인 어떤 이야기들이 있고,

이분이 지금도 아주 임사체험 끝에 건강을 되찾아서

지금 세계 각국을 돌아다니면서 강의도 하러 다니고 있고,

유투브에도 보면 이분의 어떤 인터뷰 같은 것들이 나와 있는 것을 봤습니다.

 

그래서 이분이 쓴 책이 ‘그리고 모든 것이 변했다’ 라는 책인데,

저도 어떤 신도님께서 추천을 해주셔서 읽어봤는데, 아주 그 내용도 아름다웠지만

그 곳곳에 나오는 이분이 죽음을 체험한 다음에 돌아와서 느꼈던 깨달음,

뭐 이런 것들에 대해서 적어놓은 부분이 정말 제가 여태까지 내가 하던 이야기들,

흔히 그런 이야기들, 혹은 스님들이나 불교에서 항상 하던 이야기들,

그런 것과 그야말로 동일한 그런 이야기들이었습니다.

제가 몇 구절을 좀 소개를 해드리겠습니다.

 

“나는 내 자신에게, 내가 만난 모든 이에게, 그리고 삶 자체에게

언제나 내 고유한 본질을 표현해야 할 의무가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다른 누군가가 혹은 무언가가 되려는 노력은 나를 더 나은 존재로 만들어주지 않았다.

오히려 진정한 나 자신을 앗아가기만 했다.

그럴수록 다른 이들이 내 진정한 모습을 경험하지 못하도록 가로막을 뿐이었고,

내가 그들과 진정으로 만나지 못하게 만들 뿐이었다.

진정한 내 자신이 되지 않는 것은 또한 내가 여기에 와서 되고자 하고 표현하고자 하는

존재의 모습을 이 우주로부터 빼앗는 것이었다.”

 

이분이 깨달은 첫 번째가 이것이었습니다.

자신이 이 세상에서 만나는 모든 사람에게 자신의 삶 자체에

언제나 자신의 고유한 본질, 나다운, 자기다운 자신만이 가지고 있는

독특한 자신의 본질을 표현해야 할 의무가 있다.

 

그러니까 즉, 나는 다른 누군가가 되려고 노력하면서

다른 뭔가가 되려고 노력하면서 다른 사람처럼 되려고,

딴 사람 저게 좋아 보이고,

저 사람은 저게 좋아 보이고,

저 사람의 삶이 더 멋있어 보이고,

저 사람이 가진 돈이 부럽고,

저 사람이 가진 외모가 부럽고,

저 사람이 가진 능력이 부럽고,

저 사람 아들은 시험도 잘 보고, 학교도 좋은 데 갔고,

남의 남편은 돈도 잘 벌어 오는데, 진급도 잘하고 하는데 내 남편은 왜 이런가. '

 

이렇게 우리는 끊임없이 내 바깥에 있는 다른 사람들을 보면서

그 사람과 나의 삶을 비교하고, 어떤 우월감에 때로는 우쭐하다가

또 비교 열등감에 때로는 기분이 축 쳐지기도 하고

이런 삶을 끊임없이 반복하면서 산단 말이에요.

즉, 나 자신이라는 내 자신의 진정한 삶을 살지 못하고,

타인의 삶을 살지 못해서 안달하면서 살아왔다는 것이죠. 우리는 그동안....

 

그런데 그런 ‘다른 누군가가 되려고 하거나 뭔가가 되려고 하는 노력은 나를 더 나은 존재로

절대 만들어주지 않는다는 것을, 만들어 주지 않았다.’ 라는 것을 깨닫게 된 겁니다.

오히려 진정한 자기 자신을 앗아가는 거죠.

진정한 자기 자신을 앗아갈 뿐입니다.

 

우리는 남의 삶을 기웃거리면서, 남의 삶을 부러워하면서

남처럼 살려고, 저 사람의 좋은 점을 따라가려고 뒤꽁무니만 쫓아가면서,

저도 살아보니까 학교 다닐 적에 끊임없는, 끊임없는 절망의 연속이 아니었나 싶습니다.

학교 다닐 때 보면요, 놀라울 정도로 이 세상에는

대단한 친구들이 많고, 대단한 능력을 갖춘 아이들이 많습니다.

 

공부를 아무리 아무리 열심히 해도

나보다 더 잘하는 사람은 분명히 있기 마련이고요.

아무리 그 학교에서 1, 2등을 해서 카이스트를 가도

카이스트에서 꼴찌를 하는 아이들이 있지 않습니까?

카이스트에서 저 밑바닥을 기는 아이들이 있단 말이죠.

공부로 전혀 따라갈 수 없는 아이들이 분명히 있습니다.

 

내가 내 외모에 자신이 있다 할지라도

나보다 더 잘생기고 잘난 사람은 언제나 있게 마련이고,

심지어 누가 보편적으로 그 사람보다 내가 더 잘 생겼다 여길지라도

내가 좋아하는 그 여인은 내가 아니라 저 사람을 더 좋아한다면

이것 또한 사람들에게 절망이 된단 말이죠.

 

너무 잘난 저 사람에게, 저 친구에게 내가 이것만은 이기고 말 거야 해서

막 열심히 해서 그  친구를 딱 이겨버렸더니 그 친구가 음악 시간에 보니까 연주를 하는데,

놀랍게 연주를 하는 것을 보고 또 절망을 한단 말이죠.

어떻게 저렇게 저것까지 잘하는 친구가 있을 수 있을까.

 

이것은 내가 그 사람에게 이기기 위해서,

이 사람에게 이기기 위해서 아무리 아무리 노력을 한들

그런 삶의 패턴 자체가 우리를 죽을 때까지 절망으로 몰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모든 것을 잘할 수가 없거든요. 우리는....

 

그리고 모든 것을 잘하는 것이 우리 삶의 목적이 아니거든요.

어쩌면 우리는 어느 생엔가 완벽하게 모든 것을 잘하는 사람으로 태어나 보기도 했었을 것이고,

그 삶을 통해서 배운 것은 이미 배웠기 때문에 지금 우리가 배워야 할 것은

지금 나라는 모습의 이 개성을 가진, 이 삶을 통해서 배워야 할 것이 있기 때문에

이 삶을 통해서 우리는 이 세상에 나온 겁니다.

다른 삶을 산다면 내가 배워야 할,

이생에 내가 반드시 배워야 할 그것을 배우지 못하고 말 것이란 말이죠.

 

그래서 진정한 나 자신이 되지 않는 것은

내가 여기서 와서 되고자 하고 표현하고자 하는

본연의 존재의 모습을 이 우주로부터 빼앗는 것과 다르지 않다.

 

우리는 자기 자신으로써 살면 됩니다.

다른 사람의 삶을 전혀 기웃거리지 않더라도

지금 이 모습 그대로 인정하고, 받아들이고, 수용하고, 허용하면서,

지금 나 자신을 온전히 사랑해주면서, 기특하다고 이야기해주면서,

온갖 우여곡절을 겪었다 할지라도,

온갖 고통을 겪었다 할지라도,

뭔가 힘든 일들이 내 인생을 스쳐 갔다 할지라도

그것은 나를 괴롭히기 위해 온 것이 아니라 다운 삶에서 나만이,

이 우주에 있는 이 세상에 있는 그 많은 인구 가운데

오직 유일하게 나만이 겪을 수 있는 그 경험을 통해서

나만이 느낄 수 있는 깨달음을 얻고,

그 깨달음을 이 우주법계 전체와 부처님이라는 우주법계 전체와 공유하기 위해서,

내가 그 우주법계 전체의 바다라는, 부처의 바다에 나라는 물결이,

내가 느낀 깨달음을 전체와 함께 공유하기 위해서,

거기에 기여하기 위해서 그럼으로써 내가 우주법계의 하나이면서 전체인,

일즉다 다즉일(一卽多 多卽一)인 그러한 방식으로

내가 이 우주법계 전체에 공헌하는 방식이고, 공헌한다고 할 수도 없죠.

 

우주법계 그대로가 나니까,

그러니까 그런 방식으로 이 세상 모든 사람들은

저마다 자기다운 방식으로 살 때만이

가장 자기다운 방식으로 우주법계에 기여할 수 있고,

자기부처를 드러낼 수 있는 겁니다.

그리고 이분이 그 명징한 상태 속에서 깨달은 큰 것이 무엇이었냐 하면,

 

“그 명징한 상태 속에서 나는 나라는 존재가

내가 늘 생각하던 그 모습이 아니라는 것도 알게 되었다.

여기 이렇게 몸도, 인종도, 문화도, 종교도, 신념도 없이 내가 있어.

하지만 나는 여전히 나는 이렇게 존재해.

그렇다면 나는 뭐지? 나는 누구지?

분명 어떤 식으로도 내가 줄어들거나 작아지지 않았어.

오히려 나는 이렇게 크고 이렇게 힘 있고

또 이렇게 모든 것을 아우르는 존재였던 적이 없어.

와, 정말 이런 식으로는 단 한 번도 느껴본 적이 없구나. ”하고 느끼게 됐다는 것이죠.

 

“거기에 내가 있었다. 몸이나 다른 어떤 물리적 특징도 없이 말이다.

그러나 내 순순한 본질은 여전히 존재했고,

내 전체 자아에서 조금도 덜어내진 요소는 없었다.

아니, 내 물리적 존재보다 훨씬 더 크고 훨씬 더 강렬하며 훨씬 더 넓어졌다고 느껴졌다.

사실상 장엄했다는 표현이 옳겠다.

나는 언제나 존재해 왔고, 앞으로도 언제나,

시작도 끝도 없이 영원히 존재하리라는 느낌이 들었다.

내가 그저 장엄할 뿐이라는 앎이 나를 가득 채웠다.

내가 이렇다는 걸 어떻게 전에는 까마득히 몰랐을 수가 있지? 나는 몹시도 궁금했다.“

 

이것이 바로 어찌 보면

우리가 보통 ‘참나’라고 하는, 주인공, 불성이라고 하는 그 자리를

탁 확인해보고 개합하면서 확인해보고서 느낀 어떤 체험이라고 할 수가 있을 겁니다.

 ‘나라는 존재는 내가 죽은 그 상황 속에서도 줄어들거나 작아지지 않고,

오히려 더 크고 더 힘 있고, 모든 것을 아우르는 존재였구나.’라는 것을 느끼게 된다는 것이죠.

 

“순수한 나의 본질은 언제나 존재하고,

조금도 덜어내어지는 것은 없고, 훨씬 더 크고 강렬하고 넓어졌다.

나는 사실상 장엄했다. 있는 그대로 완전한 장엄한 순간이었다.”

 

이 ‘장엄하다’는 표현은 부처님과 불국토를 표현할 때 쓰는 표현이거든요.

모든 것이 원만구족해서 더 더할 것도 뺄 것도 없이,

원만 구족한 그대로로써 온전한 그것을 장엄하다고 표현합니다.

 

우리의 본질은 지금 이렇게 아파하고 있고,

지금 이렇게 돈이 없어 허덕이고, 지금 이렇게 힘든 일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 몸뚱이가 남들보다 못났고, 이랬다고 느끼는 이 순간에조차

우리는 언제나 장엄한 존재로서 언제나 그 자리에 존재할 뿐입니다.

 

단 한순간도 이 장엄한 '나'라는 존재의 본질은

훼손되지 않고, 줄어들지 않고, 어디로 달아난 적이 단 한 번도 없다.

단 한 번도 부처가 나에게서 벗어난 적은 없습니다.

내가 부처가 아니었던 적은 없고, 우리가 부처를 잊어버린 적은 없다.

 

다만, 우리가 부처에 집중하지 않고,

내 머릿속에서의 내 드라마,

내가 만들어낸 연기,

내가 만들어낸 연극,

내가 만들어낸 이 삶이라는 이 시나리오 속을 살고 있으니까

그것이 진짜인 줄 알고,

내가 이 아이의 아빠고, 이 아이의 엄마고, 이 뭐 학교에서는 뭐고,

사회에서는 어떤 존재고, 절에 가서는 어떤 존재고,

이런 내가 만들어 놓은 드라마, 이 한낮 꿈, 이생에서 경험하는 독자적인 하나의 꿈,

이 꿈 이것이 나의 전부인 것으로 착각하고 사니까, 그게 심각해지는 겁니다. 중요해지고....

 

그러니까 그것만이 나에게 중요하구나라고 착각하면서 사는 거예요.

그래서 남들과 비교하면서 사니까 나는 남보다 더 못하고,

더 잘 살아야 할 것 같은데, 지금 이것밖에 못 살고,

남들이 나를 무시했고, 남들이 나를 욕했고,

그것이 나인 줄로 착각하니까 그게 심각해지는 겁니다.

 

그것은 중요한 문제가 아닌데,

내가 뭘 먹고 살든, 뭘 해먹고 살든,

돈이 많든 적든 아무 상관이 없는 것인데,

그게 중요하다고 여겨지기 시작하는 겁니다.

 

그러나 우리 삶의 본질은 단 한 번도 훼손되지 않고

장엄한 부처 그 자체로 언제나 존재하고 있다.

 

우리가 이렇게 이 드라마 속에 빠져서,

이 머릿속에 어떤 시나리오와 각종의 어떤 망상 분별 속에 빠져서

그것이 실체라고 여기면서 착각하고 사는 그 순간에조차 그것은 착각일 뿐이지,

사실은 우리는 지금 이 순간 이대로 장엄하다.

이대로 온전한 '참나'의 어떤 존재란 말이죠.

그것을 확인하게 된 겁니다.

그리고 또 한 가지 또 이분이 깨달은 것이,

 

“나는 왜 늘 다른 사람들을 기쁘게 해주려고만 하고

내 스스로 생각할 수 있는 힘과 창조적인 능력을 억누르기만 했을까?

(그동안 나는 삶에서) 싫을 때도 좋다고 하면서 번번이 내 자신을 왜 배신하기만 했을까.

그냥 내가 되는 대신 늘 다른 사람의 인정을 구하면서 스스로를 모독하기만 했었구나.

왜 나의 아름다운 가슴을 따르지 않고 나의 진실을 말하지 않았을까?

 

우리는 왜 몸을 입고 사는 동안에는 이것을 깨닫지 못할까?

자신에게 그토록 가혹할 필요가 없다는 것을 난 어찌도 그리 몰랐을까?

 

나는 여전히 조건 없는 사랑과 수용의 바다에 온전히 잠겨 있었다.

새로워진 눈으로 자신을 볼 수 있었고,

내가 이 우주의 아름다운 존재라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존재한다는 사실 자체만으로 나는 판단이 아니라

부드러운 사랑을 받을 만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특별히 무언가를 할 필요는 없었다.

더도 말고, 덜도 말고 그저 내가 존재한다는 이유만으로 나는 사랑을 받아 마땅한 존재였다.

 

이것은 그야말로 놀라운 깨달음이었다.

나는 늘 노력을 해야만 사랑받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

사랑을 받기 위해서는 그럴만한 가치가 있든지

사랑받을 만한 뭔가를 해야 한다고 믿었기에

그럴 필요가 없다는 것을 깨달았을 때 나는 몹시 놀랐다.

내가 아무 조건 없이 사랑받고 있다니.

그저 내가 존재한다는 이유 단 하나만으로 사랑받고 있다니.

 

이 확장된 장엄한 존재의 본질이 실제의 나라는 사실을 깨달았을 때

나는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명징한 상태가 되었다.

그것이 바로 내 존재의 진실이었다."

 

얼마나 아름답습니까?

아, 우리라는 이 존재의 진실은...

우리는 자꾸 세상 사람들의 인정을 받으려고 애쓰잖아요.

그 인정받아서 뭐하겠다고.

 

한편 생각하면 그게 참 허망한 거라는 걸 알 듯 알 듯하지만

이 몸의 습관이 배겨놓으니까 자꾸 인정받고 싶단 말이죠.

남들이 나를 인정해줬으면 좋겠고,

내 남편이, 내 자식이, 내 주변 친구들이 나를 인정해줬으면 좋겠고,

 ‘야, 너 참 대단하다.'

'너의 남편은 참 대단하구나, 야, 너 아들 참 대단하다.’

이런 얘기를 꼭 듣고 싶고,

절의 스님에게도 공부 잘한다는 소리를 듣고 싶고,

모든 사람에게 ‘잘한다, 훌륭하다, 뛰어나다.’ 이런 소리를 듣고 싶단 말이죠.

 

왜 듣고 싶겠어요?

인정받아야지만 그 사람이 나를 인정할 거로 생각하고,

그래야지만 나는 인정받은 존재가 될 거야.

'나는 지금 이대로는 인정받을 만한 존재가 아니야, 사랑받을 만한 존재가 아니야.

내가 인정받을 만한 존재가 되고, 그럴싸한 존재가 되고, 멋있는 존재가 되고,

위대한 존재가 되어야지만 사람들이 나를 인정하고, 존중하고 존경할 거야.

그러기 전까지 나는 인정받을 만한 사람이 아니고, 사랑받을 만한 사람이 안 될 거야.’

이러면서 인정을 갈구하고, 사랑을 갈구하고,

관심을 갈구하면서 우리는 평생을 살아가고 있단 말이죠.

 

그런데 우리는 단 한순간도 이 우주법계로부터,

사람들이 나를 인정하지 않는 이유는 뭘까요?

사람들은 저마다 부처이지만 부처로 살지 않고

자기 머릿속에 저마다, 자기 머릿속에, 망상 속에 만들어 놓은 자기 드라마에서 살고 있는 겁니다.

 

자기가 만들어 놓은 꿈속에, 망상 속에 살고 있어요. 전부다!

그러니까 자기 망상 속에 있는 사람이 그 망상에서 판단했을 때 '저 사람 별로'거든.

그런데 내가 내 망상도 지금 깨부숴야 될 판인데,

남의 망상이 나를 판단하는 것에 그것까지 신경 쓰면서 살기가

이거 얼마나 어처구니없는 일입니까?

 

내가 내 망상 깨 부시고 살기도 지금 바빠 죽겠는데,

남의 망상 속에 들어가서 거기에 휘둘리면 사는 게 얼마나 어처구니없는 일입니까.

 

나를 판단하는, 나를 욕하는 그 사람도 자기 자신의 본질이 뭔지도 몰라요.

그 사람의 판단이 옳지 않습니다.

옳다는 보장이 없어요.

그 사람은 그 사람의 망상 속에서 나를 판단하고 있는 것일 뿐이니까.

그걸 다 믿을 필요가 없고, 그걸 따라갈 필요가 없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 상대방의 망상에 힘을 실어주고 있단 말이에요.

상대방이 나를 욕하면 진짜 내가 욕 얻어먹을 사람인가 하고 죽을 것 같이 괴로워하고.

 

어떤 이런 분이 계셨어요.

20대 때 자기를 싫어하는 어떤 사람이, 싫어해서 그런 것도 아니겠죠.

어떤 사람이 자신한테 그런 얘기를 하는 것을 뒤에서 살짝 들은 거예요.

 “아니, 어떻게 저렇게 비호감으로 생겼냐. 생긴 자체가 비호감이야.” 이런 얘기를 들었나 봐요.

 

그런데 그분이 실제 비호감인 건 아닌데 그 사람 마음에 안 드는 거였어요.

그런데 이 사람은요, 나이 한 40대 중반이 될 때까지

‘나는 비호감의 사람이구나.’ 라는 것을 20대 때 그 사람에게 한 마디 듣고 깨달았다는 거예요.

 

자신은 여태까지 자신이 비호감이란 것을 몰랐는데

그 때 그 사람 말 한 마디 듣고 내가 비호감이구나 라는 걸 깨닫고,

25년을 ‘나는 모든 사람이 나를 비호감으로 느낄 거야.’ 라는 관념 속에 빠져 살았던 겁니다.

 

회사 다니면서 자꾸 위축되고 사람들이 나를 비호감으로 볼 텐데,

이런 마음으로 위축되는 삶을 계속 살아온 거예요.

정말 너무나도 어처구니없고, 그 사실을 제가 알고서는

너무나도 어처구니가 없고 너무나도 황당했습니다.

너무나도 훌륭하시고 아름답고 정말 괜찮은 분이셨거든요. 겸손하고...

 

그런데 그분의 삶은 25년 동안 그렇게 자기 자신을 억누르면서,

그 말 한마디 때문에. 그 상대방이 자기 머릿속에서 만들어 놓은 그 관념에,

한 마디 툭 내뱉은 그 말에 25년을 사로잡혀서 살았단 말이죠.

 

뭐 그 정도까지는 아니겠지만 우리의 삶도 별반 다를 게 없습니다.

남들이 나를 어떻게 판단하는지가 트라우마처럼 내 안에 상처가 돼서 남아요.

그 성격이란 게 그래서 형성되는 것 아니겠습니까?

참 그런 건 변하지 않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그런 것이 진실이 아니다는 사실을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우리는 그렇게 누군가로부터 인정받아야만 인정받는 존재가 아니고,

사실은 모든 사람들의 부처의 차원에서는,

부처의 자리에서는 언제나 나를 사랑하고 있단 말이죠.

다만 그 사람의 망상 차원에서만 나를 사랑하지 못하고 있는 것일 뿐이지.

 

심지어 우리 겉에 드러난 이 망상의 의식은 사람들을 좋아하고 싫어하지만,

우리 근원에 있는 부처의 의식에서는 모든 사람을 차별 없이 사랑하고 있습니다.

심지어 패륜아라고 느끼는 뭐 무슨, 뭐라고 그러지요?

연쇄 살인범조차 우리 근원의 부처의 자리에서는 사랑하고 있단 말이에요. 한 치의 차별 없이...

우리의 망상 차원에서나 사람들을 좋아하고 싫어하는 판단분별이 있는 것이지.

우리는 인정을 구하면서 오히려 스스로를 모독하고 있는 것과 다르지 않습니다.

 

나는 그 누군가에게 사랑받을 만한 가치가 있기 위해서

뭔가를 노력해야 되는 존재가 아니다.

있는 그대로의 존재 자체로 이미 우리는 사랑받을 만하고,

더 사랑받을 만하기 위해서 노력해야 하는 존재가 아니다.

 

있는 그대로 완전한 존재인데,

 ‘나는 사랑받을 만하지 못해. 나는 인정받을 만하지 못해. 나는 능력 없어.’

이런 한 생각에 사로잡혀 있기 때문에 그러한 현실을 끌어들이고 있는 겁니다.

내 삶이 그러한 현실에 노출되어서 그 말은 곧 우주법계를 향해서,

‘우주법계 법신부처님, 하나님 저는 인정받을 만한 존재가 안 됩니다.

사랑받을 만한 존재가 못 됩니다. 그러니 그런 삶을 나에게 가져다주십시오.’ 그것과 똑같아요.

 

나 스스로 나를 인정받을 만하지 않고 사랑받을 만하지 못하다고 느끼니까

그런 것을, 자꾸 그 에너지를 자꾸 세상으로 내보내게 되고,

그러니까 우주법계에서는 뭘 보내주느냐 하면,

자꾸 나한테 욕하는 사람, 나를 인정하지 못하는 사람, 나를 사랑하지 않는 사람을

자꾸 내 인생에 등장시키는 겁니다.

 

왜? 내가 내 인생의 창조주이니까.

우리는 언제나 내가 내 인생의 부처이기 때문에

나와 이 우주법계가 공동 창조하는 공동창조자입니다. 

 

내가 한 생각 일으키는 것으로 우주법계는

‘오케이! 내가 그 말을 들어줄게.’ 하고 그냥 만들어주는 거예요. 삶을....

 

그러니까 머릿속에 망상 분별하는 삶을 살게 되면

망상분별하게 되는 이 생각을 우주법계로 투영하게 되고,

우주법계는 아무런 분별심이 없어요.

뭐가 되었든 그 생각을 내보내면 그대로 되돌려 준단 말이에요.

그것이 '인과응보'입니다.

'업의 법칙'입니다.

 

내가 그런 생각을 내보내면 그 생각이 현실로 돼서 돌아오는 겁니다.

그것으로 인해 이렇게 꿈과 같은 세상이 만들어지는 것이고요.

그 이면을 지탱하는 또 다른 어떤 연결된, 상호 둘이 아닌 것이 있단 말이죠.

그래서 이렇게 나옵니다.

 

“나는 우리 모두가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모든 사람과 살아있는 존재들만이 아니라, 밖으로 넓어지고 넓어져

우주 안의 모든 것에 이르기까지 다 하나로 엮여 있는 통합체였다.

모든 사람과 동물, 식물, 곤충, 산과 바다, 무생물, 우주까지.

 

나는 전체 우주가 살아있으며,

모든 생명과 자연이 다 의식을 지니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모든 것이 무한한 전체에 속해 있는 것이다.

나는 전체 생명과 떼려야 뗄 수 없이 복잡하게 얽혀 있었다.

우리는 모두 그 통합체의 일면들이다.

우리는 모두 하나이며, 우리 각자는 집단적 전체에 영향을 주고 있다.

 

매순간 속에 무한한 가능성이 들어 있고, 시간의 한 지점이란

내가 그때까지 해온 모든 결정과 선택, 생각들의 정점과도 같은 것이었다.

내 수많은 두려움 그리고 나의 엄청난 힘이 바로 이 병으로 표현된 것이었다.“

 

이 세상이 모두 다 생물과 무생물 할 것 없이

우주 전체가 하나로 연결되어 있다는,

상의상관성, 연기법을 저절로 이 차원에서 깨닫게 된 겁니다.

우리는 나누어져 있는, 따로따로 나누어져 있는 개별적인 존재가 아니었다는 겁니다.

 

둘로 나눌 하등의 이유가 없는

‘너다 나다, 맞다 틀리다, 옳다 그르다, 내 것 네 것’ 나눌 수 있는

이런 존재가 아니었고 전체가 하나로 엮여 있는 통합체였다.

그냥 모두를 전체로, 하나로 인식한단 말이죠.

그런 차원에서는 어떤 차별이 있고, 분별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

 

너와 내가 둘이 아닌 이런 차원에서는 무한한 전체 속에 있는,

그럼으로써 나라는 존재가 무아 전체에 그대로 영향을 주고 있고,

또 모든 이들의 삶과 배움과 깨달음이 그대로 나에게 영향을 주고 있다.

상대방의 깨달음은 곧 나의 깨달음과 똑같습니다. 다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부처님께서 깨달음을 얻고 나셔서,

모든 부처님은, 모든 깨달은 자는 혼자 있지 않고,

자비심을 내어서 모든 중생을 깨닫게 한단 말이죠.

모든 중생의 깨달음이 그대로 나의 깨달음과 다르지 않습니다.

 

내가 상대방을, 힘든 사람을 돕고,

힘들고 괴로운 일이 있을 때 그 사람을 깨닫게 하고, 그 사람에게 도움을 준다는 것은

곧 내가 나 자신에게 도움을 주는 것과 전혀 다르지 않은 현실입니다.

 

내가 상대방을 욕하고 미워할 때

그것은 곧 나 자신을 욕하고 미워하는 것과 한 치도 다름이 없는 사실이라는 것이죠.

 

"나는 어떤 것도 찾아다닐 필요가 없었다.

어떻게 하면 그 일을 이룰 수 있을지 방법을 알려고 애쓸 필요도 없었다.

나는 그저 그 일이 펼쳐지게끔 허용하기만 하면 되었다.

이런 허용의 상태에 이르기 위해 내가 해야 할 일은 단 하나,

오직 ‘내 자신이 되는 것’뿐이었다.

나는 깨달았다.

지금까지 그 지난한 삶 동안에 내가 해야 할 일은 기실 단 하나뿐이었다는 것을.

그것은 바로 결함이 있다는 그 어떤 느낌이나 판단 없이 그저 내가 되는 것이었다.

동시에 우리의 본질은 그 핵심이 순수한 사랑으로 되어 있다는 것을 나는 알게 되었다.

우리는 순수한 사람 그 자체이다.

그러니 사랑이 되는 것과 본연의 자기 모습이 되는 것은 하나이며, 같은 것이다."

 

나는 이 진리를 찾아서 여기저기 뛰어다닐 필요가 없고,

어떻게 하면 이 방법에 이를 수 있을까를 헤매고, 노력하고, 찾고,

인도를 찾아가고, 무슨 수미산을 찾아가고, 스승을 찾아가고

그렇게 막 뛰어다닐 필요가 없다는 말이죠.

지금 이 자리에서 내 삶이라는 것 그 자체가 나의 스승입니다.

 

내 삶이 이러이러한 특정한 방식,

나다운 방식, 나만의 방식으로 내 삶이 펼쳐진다는 것,

그것 자체가 나를 깨닫게 하기 위한 최적화된 나만의 스승이란 말이죠.

그것에 나를 허용하기만 하면 된다는 겁니다.

"내맡기고, 허용하고, 그 일이 펼쳐지도록 허용하기만 하면 되었다."

그 허용의 상태, 내가 온전히 나 자신으로 되는 것을 받아들이고, 수용하고, 허용하는,

"그것을 하기 위해서 내가 할 일은 단 하나, 오직 내가 나 자신이 되는 것뿐! "

 

허용한다는 것은 뭐예요?

이렇게 못난 자신을 허용하는 겁니다.

나 자신이 되는 것,

남들처럼 되려고 애쓰지 않는 거예요.

 

지금의 나 자신으로 사는 것을 그대로 허용해주는 겁니다.

내가 좀 못났더라도, 내 인생이 좀 힘들더라도 그것을 허용해 주는 거예요.

힘든 일이 있더라도 그것을 허용해주고,

그것을 통해 내가 진정 나 자신이 될 수가 있고,

그것을 통해 놀라운 깨달음이 그 활짝 열려 있는 허용의 가슴을 통해서

놀라운 깨달음이 들어오고 놀라운 자비와 사랑이 들어옵니다.

 

우리는 부처라는 것은 곧, 자비와 지혜를 얘기하거든요.

사랑과 지혜를 얘기합니다.

무한한 지혜는 곧 무한한 사랑, 자비와 다르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이 무한한 자비를, 무한한 사랑 이것과 하나가 되기 위해서,

무한한 진리를 깨닫기 위해서 우리가 할 수 있는 것,

그것은 오직 하나,

'나를 나 자신으로서 존재하도록 허용해주는 것.'

 

그렇다고 해서 이 말은 오만과 독선을 가지고

내 식대로 남들의 말에는 귀 기울이지 않고,

내 방식대로 고집하고 집착을 해서 내 식대로만 살라는 얘기가 아닙니다.

 

허용한다는 것은 뭐겠어요?

내 삶에 등장하는 모든 것을 허용한다는 거예요.

 

누군가가 나에게 와서 나의 단점을 이렇게 딱 지적해주고,

 ‘다 좋은 데 이러이러한 점은 참 잘못된 것 같습니다. 요런 점은 좀 바꾸면 좋을 것 같습니다.’

지적해 준다면 그 사람이 나에게 왜, 그 많은 사람 가운데

그 사람이 나에게 와서 그 얘기를 했을까요?

 

그것을 허용한다는 것은

독선을 가진 게 아니라 거기에 마음을 열고 있기 때문에

그 말에 휘둘리지 않을지언정 그 말을 귀담아듣는 겁니다.

아, 저 얘기가 도대체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남의 말에 귀 기울이지 않게 되면 누구나 정말 오만해지고 독선해집니다.

 

그런데요, 잘 나가는 사람일수록, 높은 자리에 있는 사람일수록 그래지기가 쉽습니다.

남들에게 존중받고 존경받는 사람일수록 그래지기가 쉽습니다.

 

왜냐하면 높은 자리에 올라간 사람들이나 이런 사람들은

내가 잘나서 이만큼 올라갔다고 생각해요.

내가 잘나서 이만큼 왔기 때문에 내 방식이 옳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너희들이 아무리 얘기를 하고 조언을 해도 너희들이 그 자리까지 올라가 봤어?

지금 이 자리에 올라와 봤어? 내가 올라왔잖아. 그러니 내 방식이 옳은 거야.’

이렇게 생각한단 말이에요.

 

이것은 높은 자리에 있는 사람만이 아니라 부모님들도 마찬가지예요.

자식이 잘 컸잖아요? 내 자식이 뭐 정말 좋은 대학 다니고, 직장도 좋은 데 다니고 잘 컸습니다.

그럼 이 부모님은 생각하느냐 하면,

내 자식이 잘 큰 것은 나 때문이다. 내 육아 방식이 옳았기 때문이다고 생각합니다.

내가 키운 방식이 옳았기 때문에 물론 그럴 수도 있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을 수가 많습니다.

 

그것은 자식이 잘나서 그런 것이지, 자식이 자기 업이 잘나서 그런 것이지

내가 육아 방식이 잘나서 그런 것이 아닐 수도 있단 말이에요.

 

왜냐하면요, 똑같은 성격을 가진 부모님이 계셔요.

자식을 정말 꼼짝 못 하게 만들고, 그냥 윽박지르고, 화내고, 혼내고,

얘가 자기 말을 한 번도 표현해보지 못하고,

아주 그냥 뭐 공포 분위기 속에서, 위압감 속에서

그런 부모님 밑에서 살아왔던 아이들이 여럿 있는데,

그 아이들 가운데 어떤 사람은 그 가운데 정말 잘 살고,

어떤 사람은 거기에 억눌려가지고 막 희생자인 것처럼 사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심지어 동일한 부모님 밑에서 자란 자식들 가운데도

전혀 업이 달라서 다르게 성장한 아이들도 있습니다.

 

내가 잘나서 잘 키운 게 아니란 말이죠.

 ‘내 방식이 옳기 때문에 잘 키웠다.’라고 집착하면 안 됩니다.

그 아이의 업이 그것을 다 이겨내고 극복할 수 있을 만한

그 아이의 고귀한 어떤 심성이 있었기 때문에 그런 것이지.

 

똑같은 병이 와도요,

어떤 사람은 그 병을 대수롭지 않게 이겨내고

금방 탁 털고 일어난 사람이 있고요,

 

또 어떤 사람은 보니까 그 병을 이겨내긴 했는데,

이겨내고 나서 후유증이 엄청 심하게 와서 그 강박증 같은 것이 온 사람도 제가 봤어요.

 

똑같은 병인데, 그 병 이후로 강박증이 걸려서

하루에도 수십 번씩 막 손을 씻고 이렇게 하는,

다른 사람은 그 병이 걸려도 그렇지 않은데,

그 사람은 그 병이 걸린 다음에 그런 강박장애 같은 것들이 생겨났다.

 

동일한 사건이 벌어지고 동일한 일이 벌어져도

우리는 똑같은 결론을 얻는 것은 아닙니다. 다 달라질 수가 있다.

 

 아까 그 얘기로 돌아가서요,

그래서 내가 잘났다는 생각, 그 생각은 정말 오만하고 교만한 생각이기 쉽습니다.

다음에 한 두 구절 말씀을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이것을 깨달은 이후로 더 이상은 이른바 문제라는 것들이 그렇게 크게 보이지 않았다.

사람들은 삶을, 그리고 자기 문제를 너무 심각하게 받아들이고 있는 것 같았다.

내가 전에 그랬듯이 말이다.

예전에 나는 내 드라마는 물론 다른 사람의 드라마에도 끌려들어 갔다.

하지만 임사 체험을 하고 나서는 그저 살아있다는 것,

여기서 나를 표현할 기회를 한 번 더 얻었다는 것만으로도 행복했다.

이제 더는 이 위대한 모험에 단 1분도 허비하고 싶지 않았다.

될 수 있는 한 가장 많이 내가 되고 싶었고,

살아 있는 이 기분 좋은 순간을 조금도 놓치지 않고 음미하며 즐기고 싶었다.

 

정말이지 그 온갖 잡다한 세상사,

미래나 돈, 직장, 집, 집안일, 걱정 따위에 빠져들고 싶지 않았다.

이런 것들이 사소해 보였다.

특히 내 앞에 어떤 과정이 펼쳐지고 있는 중이라는 확신이 들었기 때문에 더욱 그러했다."

 

우리가 느끼는 문제라는 것들,

온갖 세상사, 집안일, 걱정, 근심 이런 것들이 사실은 그렇게 심각할 것이 없는 것이죠.

이 진리의 차원에 봐서는.

왜?

그 모든 것이 사실은 내 머릿속에서 만들어 낸 한 편의 드라마이고,

머릿속에서 만들어 낸 어떤 한 편의 어떤 망상일 뿐이니까.

그 망상을 붙잡고 막 심각해 필요가 뭐가 있겠습니까?

머릿속에서 등장하는 그 망상을 붙잡고 막 힘들어하고 괴로워하고 이럴 필요가 뭐가 있겠어요?

 

그런데 우리는 지금까지

그 망상을 붙잡고 싸우는 일만을 지금까지 하며 살아왔단 말이에요.

절에서 뭔가 마음공부 하려고 마음 내는 이 순간을 빼고는 그것과의 씨름입니다.

내 머릿속에 있는 망상과의 씨름!

 

성공하면 망상에서 성공해 놓고 성공했다고 하고,

망상에서 실패하면 실패했다고 하고,

꿈과도 같은 것을 허망한 망상을 만들어내고 무너뜨리고 그런 삶을 살아왔다는 것이죠.

 

혜민스님이 말하시는 것처럼,

사실 남들은 그렇게 관심이 없어요.

우리가 성공하든 실패하든.

 

어떤 분이 그 얘기를 하시더라고요.

자신은 정말, 정말 정말 힘들여서 1차, 2차, 3차 진급까지 다 떨어지고,

어렵게 어렵게 4차에 겨우겨우 막차에 진급을 딱 해가지고 자신이 너무 기특하고,

너무 막 정말 뿌듯하고 내가 정말 대단한 사람이 된 것 같고,

와, 정말 어렵게 어렵게 진급을 했더니 내가 정말 정말 너~무 행복하더래요.

 

그래가지고 지휘관 딱 나가가지고 사람들이 전부 다 나를 정말 대단하게 생각할 거라고

마음속에 생각하고 딱 갔는데, 지휘관으로 딱 갔는데,

그 누구도 나를 대단하다고 생각하지 않고 그냥 당연하게 생각하는 거예요.

왜 그러겠어요?

그 밑에 사람들은 당연히 지휘관으로 누군가 와야 되는데 누군가 올 사람이 온 거예요.

대단해서 온 게 아니고, 그야 대단하니까 어쨌든 지휘관으로 왔겠죠.

쉽게 말해 감안하고 보는 겁니다.

어차피 이 사람이 이 계급을 단 사람이라고 감안하고 보는 것이지

이 사람이 대단하다고 생각 안 해요.

그런데 그 사람 마음속에서는

'누구든 나를 대단하다고 생각해야 돼'하고 생각하고 살지만

그렇게 대단하다고 생각 안 합니다. 남들은.

내가 아무리 위대한 일을 했어도 대단하다고 생각 안합니다.

 

여러분 주변에 친구들하고 밥 먹다 얘기해보세요.

'야, 우리 아들이 어디 가서 무슨 상을 타왔고, 우리 딸은 반에서 몇 등을 했고,

이번 무슨 시험에서 몇 등을 했고, 어디 가서 무슨 상도 타왔다.’ 신나게 해 보세요.

신나는 사람은 딱 한 사람, 말하는 사람!

혼자 신이 날 뿐이지 남들은 같이 신나해 주지 않습니다.

남들은 별 관심이 없어요.

오히려 좀 재수 없게 느낄 수도 있고, 기분 나쁘게 느낄 수 있을 뿐이지.

자기만 신나는 일이죠.

 

남들은 우리에게 관심이 별로 없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남들이 나를 어떻게 생각할까'

'내가 실패하면 남들이 나를 어떻게 생각할까'

'내가 진급 못 하면 남들이 나를 어떻게 생각할까'

'여기서 내가 버틸 수 있을까?’

 

다 망상입니다.

남들은 그렇게 생각 안 해요.

왜냐하면, 진급하는 사람은 한 2, 30프로고, 못하는 사람이 태반인데,

못하는 사람은 당연한 것이고 한 사람이 대단한 것이지

그 사람 수준 떨어진다고 생각하거나 전혀 그러지 않습니다.

자기 망상 속에서 그러는 것이죠.

 

아무리 세상에 큰일이 벌어져도

내 일이 아닐 때 우리가 그렇게 큰 관심 갖습니까?

기껏 해 봐야 그냥 인터넷 들어가서 댓글 한마디, 욕 한마디 다는 게 다지,

연예인들이 댓글 다는 것 보고 죽고 싶다고 하는데,

뭐 그럴 필요도 없는 거예요.

 

욕하는 댓글 달아도 그 사람들은,

인터넷에서 욕하는 댓글을 다는 사람들 심리상태가 자존감이 뚝 떨어져 있어서

누군가에게 이 괴로운 마음을, 뚝 떨어진 자존감을 욕을 해서라도 뭔가 풀고 싶은 거예요.

그런데 자신이 없으니까, 남들 앞에 가서 욕을 하면 내가 욕 얻어 먹을까봐 자신이 없는 거예요.

하도 쪼그라들어 있는 사람이니까.

 

그러니까 인터넷에서 그냥 안 보이는 익명성을 기대가지고

그렇게 욕을 한마디 하고 그러면서 자기위안을 얻고,

그러한 정말 수준 떨어지는 망상,

남들이 가지고 있는 그 망상에 내가 휩쓸려서 괴로워할 필요가 뭐가 있습니까?

그 말 한마디에 휘둘릴 필요가 뭐가 있어요.

 

저도 지금 한 15년째 인터넷에서 글을 쓰고 하는데,

제 글에 댓글 달면서 욕하는 사람 없었겠습니까?

온갖 기상천외한 욕을 다 들어봤죠. 저도...

 

심지어 타 종교 어디에서는 제 글을 고소까지 했었습니다.

제가 그렇게 욕하고 이런 게 아닌데,

모 성직자분이

“불교 믿는 사람은 다 가난하고, 불교 믿는 나라는 다 가난하다.”

이렇게 얘기를 했길래 거기에 반박하는 얘기를 요목조목,

데이터를 대가면서 왜 아니다 그 얘기만 딱 했어요.

 

그랬을 뿐인데 이 글을 시정, 변경해달라고 고소를 하고 막 이랬더라고요.

그런 일들도 있고, 온갖 욕도 다 들어왔습니다.

그것은 그 사람의 망상이 만들어낸 그것이고,

물론 그것을 제가 수용하지 않는 것은 아닙니다.

 

그런 것을 제가 무시는 하지만 마음속에서

‘아! 이렇게 생각한 사람도 있을 수 있겠구나.’ 하면서 조금 더 겸손해져요.

조금 더 ‘아, 타 종교인들에 대한 배려를 조금 더 해야 되겠구나.

’아! 불교를 알지 못하는 사람을 위해서 조금 더 쉽게 또 이야기를 해야 되는구나.

내 말만, 내 감정에 빠져가지고 내 좋다고

내 혼자만 막 그 얘기를 그냥 한다는 게 좋은 게 아닐 수 있구나.‘

 뭐 이런 것도 깨닫고 그러기야 하지만,

깨달음은 내가 얻을지 말지언정 거기 휩쓸려 갈 필요는 없단 말이에요.

그 망상에 끄달려 갈 필요는 없단 말이죠.

 

이 세상은, 우주법계는 그 어떤 것으로도 우리를 판단하지 않습니다.

저마다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망상덩어리가 우리를 판단할 수 있을지언정

우주법계는 우리를 판단하지 않습니다.

 

진리의 세계에서는 우리를 단 한 번도 판단하지 않습니다.

판단하는 것은 내 망상이 스스로 판단할 뿐이지.

'내가 나쁜 놈이다, 좋은 사람이다, 죄를 지었다, 선을 행했다'

 이게 다 망상이고 우리 판단일 뿐이지

우리 망상과 우리 판단이 그런 현실을 끌어올 뿐이지

우주법계는 우리에게 벌을 주는 그 순간조차 벌주고 싶은 마음이 없어요.

 

그냥 나 스스로 벌을 끌어당겼으니까 그 맞는 것을 깨달으라고,

내가 그 잘못한 것을 올바르게 깨달으라고

그 벌이라고 보여지는 그런 인과응보를 보내줄 뿐이지,

그 순간에조차 우리를 괘씸하게 여기지 않는다는 말이에요. 부처님은, 진리는.

 

우리를 어떻게 하면 깨닫게 해줄까 그것만이 오직 관심사인 겁니다.

제가 여러 가지를 좀 봐 왔지만, 중간 삭제하고 한 두 개만 더 말씀을 드리고 마치겠습니다.

아, 너무 좋은 말들이 너무 많아서 뭘 얘기를 해드려야 하나 싶은 생각이 드네요.

이런 얘기가 있습니다. 요거 하나 말씀드리면 되겠네요.

 

“스스로 자신을 어떻게 느끼는지가

실제로 삶의 조건을 결정하는 가장 중요한 지표이다.

다시 말하면 스스로에게 진실한 것이

긍정적이 되려고 노력하는 것보다 훨씬 더 중요하다.

나를 화나게 하는 것들에 대해 부정적인 느낌이 들 때

나는 그 느낌을 그대로 허용한다.

감정을 꼭꼭 담아두는 것보다

그런 감정을 생생히 경험하는 것이 훨씬 낫기 때문이다.

이것은 지금의 내 느낌에 저항해 싸우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그냥 ‘허용’한다는 말이다.

판단 없이 허락하는 바로 이 행위가 자기 사랑의 행위이다.

 

오늘 하루 일진이 사나웠다든가

한 주 내내 일이 잘 안 풀렸다든가 하는 건 중요하지 않다.

그럴 때 내가 나 자신에 대해 어떻게 느꼈는지가 더 중요하다.

힘든 시간을 맞고 있다 하더라도 그 광정을 신뢰하는 것,

그래서 불안이나 슬픔, 두려움을 억누르기보다

그 감정들이 지나갈 때까지 있는 그대로 느끼는 걸 겁내지 않는 것이 더 중요하다.

중요한 것은 나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자신이 지금 느끼고 있는 그 느낌, 그 감정이 일어날 때

화가 나거나, 슬픔이 일어나거나, 고통이 일어나거나, 우울함이 일어나거나

그 어떤 느낌이라 할지라도 그것이 일어날 때

그 느낌을 거부하려 하고 그것을 감당하지 않으려고 하는 것,

감당하지 않으려고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죠.

 

그 감정, 그 느낌을 있는 그대로 허용하고, 수용하는 것,

그래서 그 감정이 왔다가 가기를 허용하는 겁니다.

나에게 왔다가 경험되어지고 가라고 허용해 주는 거예요.

내버려 주는 것. 그게 놀라운 효과를 발휘합니다.

 

여러분들 어떤 힘든 일 있을 때, 아픈 일 있을 때, 고통이 있을 때

이걸 습관적으로 거부하려는 게 이게 시스템이 되어 있어요. 우리한테는...

그런데 그 시스템이 되어있는 것을, 습관적으로 거부하려는 마음을 탁! 관찰하고서

 ‘아, 거부하지 말고 허용해보자.’

그 아픔이 올 때, 그 아픔을 충분히 느껴주는 거예요. 거부하지 않고.

‘그래, 느껴줄게.’ 하고 느껴주는 겁니다.

한 번 해보세요. 아주 묘~한 즐거움이 있습니다.

분명히 나는 지금 큰 문제 상황 속에 놓여 있는데도 불구하고

묘한 즐거움이, 묘한 어떤 기쁨이

나를 이끌고 가고 있다는 것이 느껴지면서 마음이 평화로워지는 것을 느낍니다.

 

‘아, 이 문제가 문제가 아니구나.’ 라는 것을 느끼게 되면서

그것과 함께 할 때 아프지만 아프지 않단 말이에요.

그 슬픔을 나는 충분히 경험하고 있는 중이지만

그 슬픔이 더 이상 나를 지배하지는 않게 됩니다.

 ‘내가 지금 이 순간 그것을 경험하고 있다.’라는 그 사실이 귀할 뿐이고,

그랬을 때 그것은 충분히 느끼고 있지만 고요함을 느끼게 된단 말이에요.

 

“삶이 어떤 방향으로 흘러갔으면 좋겠다는 욕구가 강하게 들 때.

만일 내가 그것을 공격적으로 추구한다면

그로 인해 나는 우주 에너지에 맞서 싸우게 될 것이다.

그것을 손에 넣으려고 애쓰면 애쓸수록

나는 내가 뭔가 잘못하고 있다는 것을 더 많이 알게 된다.

 

그에 반해 허용하는 것은 힘이 들지도 않는다.

허용이라는 것은 ‘놓아버림’에 가깝다.

‘놓아버린다는 건’ 모든 것이 하나이므로

내가 얻고자 하는 그것이 이미 내 것임을 깨달았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네, 뭐 이 정도로 여러분에게 우선 말씀을 드리고요, 한 번 기회가 되신다면

『그리고 모든 것이 변했다』라는 책, 아니타 무르자니라는 지은이가 쓴 책인데요.

한번 읽어보시면 아주 아름다운 어떤 한 편의 글이 될 겁니다.

 

이처럼 지금의 시대에는요,

다양한, 다양한 방식으로 깨달음이 찾아옵니다.

꼭 불교적인 방식으로만이 아니라, 꼭 불교적 전통 속에서만이 아니라

기독교적 전통 속에서도, 천주교적 전통 속에서도,

이슬람, 어떤 신비주의 전통 속에서도, 유대인들 사이에서도

종교를 뛰어넘어서 종교가 없는 사람들 속에서도 온갖 다양한 방식을 통해서,

큰 깊은 절망감 속에 우리가 속칭 말하는 정신병이라고 알려져 있는

그런 어떤 깊은 침체와 우울감 속에 빠져 있던 사람이 일순간 깨어나기도 하고요,

 

이렇게 죽음을 체험했던

이런 암이라는 어떤 죽음을 체험했던 이런 극한 상황 속에 갔다가

그 속에서 뭔가 어떤 깨어남이라고도 할 수 있고,

아니면 성품을 확인한다고 할 수도 있고,

다고 할 수도 있고 이런 일들이 경험되기도 하고,

 

또 이렇게 여러분,

계속해서 법회에 다니고, 법당에 다니면서 계속해서 법을 듣는단 말이에요.

법이 어떤 것인지, 부처님 가르침이 어떤 것인지,

삶을 어떻게 사는 것이 법답게 사는 것인지, 여법하게 사는 것이지를 공부한단 말이에요.

 

이렇게 계속해서 반복해서 듣다보면,

여러분들 어차피 법문 한 두 번 듣고 말거 아니잖습니까?

계속해서 꾸준히 꾸준히 꾸준히 법을 듣다보면

어느 한순간 이것이 이제 딱 무르익게 되면 어느 한순간 기연을 만나게 된단 말이죠.

깨달음의 인연을 만나게 된단 말입니다.

 

그것은 법문을 듣다가 그냥 탁 찾아올 수 있고,

그냥 자연을 관찰하다가 찾아올 수 있고,

아들, 딸이 그냥 이름을 부르는데 휙 돌아보다가 뭔가 이런 어떤 체험이 찾아올 수도 있고,

그 모든 것은 어떤 상황, 어디에서 올지 모른단 말이에요.

 

모든 것을 마음을 열고 있을 때 찾아옵니다. 중요한 것은...

허용하고 있을 때 찾아옵니다.

마음을 닫고 있어서 선택적으로만 받아들일 때는 안 찾아와요.

왜냐하면 우리는 습관적으로 이 머릿속에서 망상 지어놓은 것,

시스템화 시켜 놓은 이 망상시스템,

이것대로만 사니까 이것대로만 사는 이상은 그게 안 찾아옵니다.

 

부처님 법은 다른 것 없습니다.

이 망상으로 만들어 놓은 이 삶을 대하는 시스템,

뭘 보면 보자마자 바로 바로 분별하는 시스템,

좋고 나쁨을 분별하는 이 시스템의 방식, 이 방식을 내려놓으라는 거예요.

 

이걸 내려놓은 공부를 조금 조금씩 하다 보면

어느 순간 이게 탁 내려놔지는 그 순간이 찾아올 수 있다는 말이죠.

그래서 우리가 이렇게 꾸준히 공부를 하고, 법문을 듣고

이게 얼마나 귀한지를 우리가 알아야 됩니다.

이러지 않고서는 이렇게 법과 자꾸자꾸 접촉하지 않고서는,

인연을 자꾸자꾸 맺지 않고서는,

선근을 자꾸 짓지 않고서는

어느 생에 계속 퇴보할지언정 어느 생에 앞으로 나아갈 수 있겠어요.

 

그래서 가슴을 활짝 열고 삶 자체를 허용하고,

모든 것을 수용하고 받아들이면서

법문을 꾸준히 들으면서, 법을 귀담아 들으면서

‘언젠가 내가 반드시 깨닫고야 말겠다.’는 발심을 일으키고

하루하루를 순간순간에 충실하며 살게 된다면 매 순간 순간 부처님이 법문하고 있으니까,

 

저만 여러분에게 일주일에 한 번만 딱 법문하는 게 아니고,

아들이 법문하고 있고,

딸이 법문하고 있고,

집이 법문하고 있고,

나무가 법문하고 있고,

바람이 법문하고 있고.

하늘의 햇살이 법문하고 있고,

더위가 법문하고 있고,

모~든 것이 그 자체로서 실상으로

내 삶 자체가 법문을 하고 있단 말이죠. 매 순간.

 

그래서 이러한 다양한 방식의

무한한 가능성을 가슴을 활짝 열고 공부를 하면 좋겠다.

그것이 바로 불법이다.

그런 차원에서 제가 법당에 와서 왜 그렇게 뭐 얄궂은 그런 책이나 뭐 이런 걸 얘기하십니까?

 

불교는 불교 안에 갇히는 게 불교가 아닙니다.

불교라는 틀에서 벗어나서

모든 것이 불법인 줄 아는 것이 그게 바로 진정한 불법입니다.

그래서 지금 저는 불교 아닌 것을 갖다가 불교를 설명하는 것이 아니고

온갖 불교를 지금 다양한 방식으로 설명하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 여기까지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부처님의 가르침을 우리가 '연기법'이라고 알고 있습니다.

부처님 가르침의 그 핵심을 보통 이야기할 때 '연기법'이라고도 이야기 하고,

또 뭐 중도 또는 공사상 혹은 또 이제 무아, 뭐 이렇게 이야기를 하거든요.

이것이 부처님의 가르침의 가장 중요한 어떤 핵심들인데요.

이것을 좀 간단하게 좀 풀어서 말씀을 드리면, 

우리가 지금 눈으로 보고 있는 모든 것들,

또 귀로 들리고, 맛봐지고, 접촉하고,  생각의 대상들도 마찬가지고요.

 

일체 모든 '있다'라고 생각하는 모든 것들,

우리가 이렇게 감지할 수 있는 일체 모든 것들은

그것 자체로 만들어진 게 하나도 없다는 거죠.

그것 자체로써 어떤 주재자가 없고,

뭔가 어떤 실체적인 것이 하나도 없다는 겁니다.

 

다만 인연 따라서 그렇게 잠깐 만들어졌을 뿐이라는 겁니다.

인연 따라 잠깐 그렇게 생겨났을 뿐이다.

본래 실체가 있는 어떤 알갱이 같은 것이 있는 것이 아니고 아무 흔적도 없이,

그러나 이 세상 이것이 무엇이냐?

이것은 다만 인연 따라 만들어졌을 뿐이다.

 

'인연 따라 만들어졌다' 라는 것은

서로가 서로에게 의지해서, 기대어서 만들어졌다는 겁니다.

독자적으로 혼자 딱 태어난 것은 아무것도 없다.

마치 '불'이라는 것이 없지만

성냥갑과 성냥이 있으면 이렇게 딱 켜준다 라는 인연에 따라서

없던 불이 갑자기 생겨난 것과 똑같이

이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은 이렇게 태어났단 말이죠. 이렇게 만들어졌다.

이렇게 인연 따라 잠깐 만들어졌다가 인연이 다하면 사라지는 겁니다.

 

태양을 한 번 떠올려 보세요. 머릿속에...

햇살이 나를 따뜻하게 내리쬐는 상상을 한 번 해 보십시오.

제가 이렇게 말을 한 인연 따라 여러분 머릿속에서는 태양이 상상이 되고,

햇살이 내리쬐는 상상이라는 것이 만들어졌을 뿐인 거죠.

인연 따라 그렇게 만들어졌을 뿐입니다.

 

이 세상 모든 것이 바깥에 진짜 있는 걸까요?

내가 인지하지 않는 이상, 의식하지 않는 이상 그것은 있다고 볼 수가 없습니다.

간밤에 산에 뭐 큰눈이 오거나 해서 나무가 하나가 쓰러졌다, 그래서 쿵! 하는 소리가 들렸다.

들렸을지라도 우리가 그것을 듣고 본 사람이 아무도 없다면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은 것이죠.

 

이와 같이 이 세상의 모든 것은 서로 의지하고 의존해서,

인연들이 직접적인 원인인 인(因)과 간접적인 원인인 연(緣)들이 상호화합해서,

탁!, 이 '소리'라는 게 없는데,

짝~(손뼉을 치시며)이렇게 손바닥이 두 개가 짝~하고 부딪치니까

부딪친다는 인연 따라 소리라는 결과가 탁 만들어지지 않습니까?

이것이 인과법입니다.

'인(因)'을 맺어주면,

'과(果)'가, 결과라는 '과(果)', 소리가 들린다.

이와 같이 세상은 모두 만들어졌다.

 

'나'라고 해서 별게 없다는 말이죠. 나라고 해서...

내 몸뚱이라고 해서 특별히 나란 어떤 주재자가 있어서

전생에서 '나'란 어떤 놈이 있었고,

이생으로 이렇게 옮겨왔고,

미래와 다음 생에는 또 다른 어떤 걸로 옮겨갈,

뭔가 옮겨갈 하나의 알갱이도 없단 말입니다.

하나의 실체도 없다.

다만 인연 따라 변화해갈 뿐인 것이지.

어떻게 인연을 맺느냐에 따라서 계속해서 바뀌고 변해가는 것뿐입니다.

정해진 것은 하나도 없다는 것이죠.

 

불교의 어떤 업설이라고 하는 것도

완전히 정해진 실체를 이야기하지 않지 않습니까?

끊임없이 변화하는 것이죠.

 

그러니까 우리가 뭐 '점을 보러 간다, 뭐 업장이 두터워서 그렇다.'

물론 그게 다 틀린 말은 아니지만,

인과응보의 어떤 법칙에 의해서 그런 것들이 있긴 있지만,

그것은 계속해서 바뀌는 것이고, 변화하는 것일 뿐입니다.

 

그러니까 정해진 업이라는 것은 없죠.

바뀌는 업이 있을 뿐이지. 변화하는 업이 있을 뿐이죠.

그러니까 ‘내 팔자가 이래서 난 이렇게밖에 못 산다.' 이건 다 거짓말입니다.

‘난 원래 명이 길어서 나는 오래 오래 산다.’ 이건 있을 수 없는 얘기죠.

자기가 부주의하게 살면 아무리 명이 긴 사람일지라도

고속도로에서 그냥 뛰어내리거나 한다면 거기서 죽을 수밖에 없는 거겠죠.

몸을 함부로 굴리면 병이 날 수밖에 없는 것이죠.

'원래부터 정해져가지고 몸이 건강하게 타고나서 죽을 때까지 건강하게 살 거다.'

이런 건 없습니다.

 

부처님도 상한 음식을 드시면 배탈이 나는 분이란 말이죠.

이와 같이 인과응보의 어떤 인연법에 따라서, 연기법에 따라서

모든 것은 인연 따라 연해서 만들어진다, 기대어서 만들어진다.

홀로 독자적으로 만들어진 것은 아무것도 없단 말이죠.

그러니까 전부 다 모든 다른 것과 기대어서, 의존해서

그것이 있음으로  내가 있을 수밖에 없는 겁니다.

이 세상 만물이 있는 것이기 때문에 내가 있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러기 때문에 실체라는 것은 없죠.

실체라는 것은 없습니다.

그 어떤 것도 실체라는 것은 없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인연 따라 만들어진 것,

그것이 딱 보면 진짜처럼 보인단 말이에요.

이 세상 모든 것은 인연 따라 잠시 잠깐 만들어진 허망한 허상에 불과한데,

꿈과 같은 것에 불과한데 우리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진짜처럼 보이니까.

가짜처럼 보여야 되는데 이게 너무 생생하게 진짜같이 보인단 말이죠.

 

‘인연 따라 만들어졌다.’는 말은 벌써 공하다는 소리거든요.

‘인연 따라 만들어졌다’ 이 소리는 ‘텅 비었다, 무아다’ 이 소리예요.

그러니까 인연 따라 만들어진 텅 비어 있고,

무아인 이 대상이 그렇게 보이지 않는단 말이에요.

진짜처럼 보입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이제 마음속에 이게 진짜라는 상을 짓는 겁니다.

눈으로 보이는 것은 보인다는 상을 짓는 거예요.

이걸(컵을 가리키시며) 보고 ‘컵’이라고 우리가 상을 짓는 거예요.

이건 컵이다. ‘컵 뚜껑’이고, ‘컵’이다. 이렇게 상을 짓는단 말이에요.

다른 컵을 딱 보면, 다른 컵을 딱 보고서 예전에 컵을 봤던 기억을 더듬어서

'아, 이것을 컵이라고 내가 배웠지'

 어린애가 태어나자마자는 아무런 상이 없죠.

'이 세상이 실체다, 허망하다 ' 뭐 이런 것도 없습니다.

'너다, 나다'라는 것도 없고,

'사람이다 짐승이다' 라는 것도 없고,

'내 편,네 편'도 없고. '엄마, 아빠' 구분도 없죠.

 

어린애기가 엄마인 줄 압니까?

직관으로 안다고 하지만,

눈앞에 보이는 게 그냥 보이면 보인다는 걸로 알 뿐이지,

이게 엄마고 아빠고, 뭐 내 친척이고,

나랑 먼 사람이고. 나를 해치는 사람인지 어찌 알겠습니까?

갓난아기는 칼을 갖다 들이대도 생글생글 웃을 뿐이죠.

아무런 분별이 없단 말입니다.

아무런 차별이 없어요.

그냥 세상을 전체로 인식한단 말이죠.

 

그러다가 이제 '이거는 컵이다,

이러한 것은 사람이고, 이러이러한 말을 하는 사람은 착한 사람이고,

이러이러한 행동을 하는 사람은 나쁜 사람이다.' 이렇게 배워 익힌단 말이에요.

배워 익히면서 온갖 '상'을 공부하기 시작합니다.

이걸(컵) 하나의 상으로 만들어서 ‘컵’이라고 상을 짓고,

모든 것을 상을 지어서 딱 기억을 한단 말이죠.

 

그러니까 우리는 이 기억하는 것 때문에 다 문제가 됩니다.

과거에 배운 것을 기억하다 보니까,

'상으로 맺어서 기억한다'라는 것은 뭐냐 하면,

명색으로 기억한다, 즉 이름을 부여해서 기억한다고 말이죠.

 

 

 

우리가 컴퓨터 파일에  입력을 하고, 그것을 저장하려고 할 때,

이름이 없으면 저장이 될 수가 없잖아요.

이름이 있어야지만 저장이 됩니다.

 

그것처럼 우리가 세상을 '상'으로 '상'을 지을 때는, 모양을 지을 때는

이름을 부여해서 모양을 짓습니다.

'책이다, 볼펜이다.' 이렇게 이름을 지어야

그게 이제 내 안에 딱 기억되기 쉽단 말이죠.

 

근데 이렇게 이름을 지어놓는다는 것은

이걸(볼펜) 하나의 어떤 특정한 대상으로 규정짓는다는 것을 의미해요.

‘볼펜이다’ 이러면 이건 볼펜을 봤고, 볼펜을 알기 때문에

볼펜이라고 이것을 이름을 딱 지은 것 아니겠습니까?

이것과 흡사한 어떤 규정을, 규준을 가진 것들 모두를

우리는 ‘볼펜이다’ 이렇게 이름한다 말이죠.

 

다음번에 뭔가 나타났을 때,

옛날에 내가 '볼펜'이라고 그랬던 것을 기억하고는

“그건 볼펜이야.” 이렇게 얘기한단 말이죠.

 

어떤 사람을 난생 처음 본 사람인데,

“이 사람 느낌이 어떻습니까?” 물어보면 우리는 다 나름대로 판단해요.

‘아, 성격이 좀 드러워 보인다'. '이 사람 좀 사람 좋아 보인다’ 이렇게 생각합니다.

 

그게 어디서 나온거냐 하면,

상을 짓지 않고 있었다면, 기억이 없었다면,

이름으로 정해놓은 상이 없었다면 그 사람을 그렇게 판단할 수가 없었을 거예요.

 '옛날에 나를 차버린 첫 사랑과 닮았다.' 그럼 좀 재수 없게 느껴지기도 하고,

그러면서도 마음이 좋게 느껴지기도 하고, 이런 상을 내는 거죠.

'나한테 사기 쳤던 사람과 똑같다.' 그럼 아주 기분 나쁘게 느낄 수도 있고.

 

이것처럼 자동으로 우리 머릿속에서는

옛날에 우리가 배워오고 경험했던 것을 탁 돌이켜 가지고

현재를 그걸로 분별하고 해석해서 이야기합니다.

 

이와 같이 우리 안에서 인식이 되다보니까

이 허망한 세상을, 인연 따라 만들어진 이 허망한 꿈과 같은 세상을

우리는 이름 짓고 상을 짓다보니까 이게 이제 진짜라고 믿기 시작하는 겁니다.

모양이 있는 것은 진짜라고 인식한단 말이죠.

진짜가 아닌데도 우리는 진짜라고 인식하기 시작합니다.

 

그러다보니까 이 '상' 속에서, 이 '상'을 짓는 속에서

온갖 문제들을 만들어내기 시작합니다.

어떤 상이 만들어지냐 하면,

‘돈을 벌어야 된다.

어느 정도의 아파트는 살아야 된다.

차는 어느 정도로 굴려야 된다.

경제력은 이 정도는 가져야 된다.

내 자식은 어느 정도의 대학은 가야 된다.

이런 건 잘 생긴 사람이고, 이런 건 못 생긴 사람이다.

내가 늙어가면서 자꾸 쭈글쭈글해지면 안 된다.’

이런 온갖 생각들을 만들어 놓는 거예요.

 

어린 아이는 아무런 상이 없죠.

어린 아기들은 비싼 차, 안 비싼 차도 없고,

좋은 집 살 필요도 없고,

잘 생기고 못 생긴 사람의 기준도 없어요.

 

제 친구 중에 정말 잘 생긴 친구가 몇 있었는데,

같이 다니면 이 친구들 너무 잘 생겼잖아요.

그런데 이렇게 아주 꼬마 애기, 아주 어린애기가 식당에 갔는데 있더라고요.

저 중학교 땐가, 고등학교 땐가 그런데

제가 그때 무슨 일 때문에 교복을 입고 있었는데,

교복이 양복처럼 넥타이가 탁 돼있지 않습니까?

 

제가 그 교복을 딱 입고 있었고, 정장처럼 교복을 딱 입고 있었어요.

그날 딴 친구들은 그냥 티셔츠 한 장 입고 있었어요.

그런데 그 애기한테 한 친구가 대뜸

“형아 중에 누가 제일 잘 생겼어?” 이랬더니 대번에 저를 탁 찍더라고요.^^

그게 얘네들한테는 얼굴이 잘 생기고, 못 생긴 기준이 없는 겁니다.

그냥 양복 입고, 뭔가 이렇게 멀끔하게 차려 입으면 그냥 그게 잘나 보이는 거라.

특정한 상이, 대략적인 자신들의 어떤 얄팍한 상밖에 없으니까.

 

자기가 어떤 방식으로 상을 맺고 있느냐에 따라서 그게 달라지는 겁니다.

저 아프리카 어느 나라에 가면 뚱뚱할수록 예쁘고 섹시하다고 느낀단 말이죠.

미얀마 어디 가니까 목이 길면 긴 여성일수록 예쁘고 섹시한 여성으로 느껴진단 말이죠.

어떤 사회에서, 어떤 곳에서 사느냐에 따라서 그 맺어진 상은 저마다 다른 겁니다.

 

옛날에 태어났다면 지금처럼 대학 가야지만 좋고,

비싼 아파트에 살아야지만 좋다는 생각은 안하겠죠.

우리나라같이 좁은 땅덩어리에서나

평수 넓은 아파트 사는 걸로 좋다고 생각하지,

땅 넓은 나라들에서는 아파트 산다는 것은 기형적인 것으로 좀 이해할 수도 있죠.

땅을 밟고 살아야 되는 걸로 이해할 수 있고.

 

옛날 인디언 원주민들은 백인들이 침입해가지고 막 내쫓아낸 다음에

이 사람들은 그래도 집을 좀 주고서 살게 해줘야 되겠다 해가지고

원주민들한테 집을 하나씩 다 줬다는 거예요.

마당 있는 집을 하나씩 다 줬더니만, 원주민들이 전부 다

방에 들어가서 안 자고, 마당에 나와서 땅에서 자더라는 겁니다.

그 사람들에게는 집이라는 게 그냥 ‘흙’이 집인 거예요. 흙 위에서 자는 게...

 

 

 

그러니까 '상'에 따라서,

우리가 어떤 상을 머릿속에 딱! 짓고 있느냐에 따라서

행복과 불행이 결정됩니다.

 

'대학교 어느 정도를 가야 된다’라는 상이 있는 사람에게는 그것보다 못 가면 괴롭고,

‘돈을 얼마큼 벌어야 된다’는 상이 있는 사람은 그것보다 못 하면 괴롭지 않습니까?

 

이처럼 가만히 생각해 보면,

우리가 괴로워하는 모든 것은 내가 상으로 만들어 놓은 것에 불과하다.

가짜로 만들어놓은 것에 불과합니다.

 

근데 그 상이라는 것의 실체가 공한 것이고,

인연 따라 잠시 만들어진 것일 뿐인데도 불구하고,

진짜가 아닌데, 그걸 진짜라고 탁 마음속에서 규정지은 거예요.

 

인연 따라 만들어진 연기적인 현실일 뿐인데,

인연가합의 꿈과 같은 현실일 뿐인데 이걸 ‘진짜다’라고 여기고,

진짜니까 거기서 '내가 훌륭하다'라고 생각하는 가치를

붙잡으려고 막 기를 쓰고 노력한단 말이죠.

그것이 거짓인 줄 모르고.

 

돈 많이 벌고,

맛있는 음식 먹고, 비싼 것 많이 사고,

내가 할 수 있는 것을 최대한 줄이고,

자연 그대로 사는 것을 최소화시키고 내가 원하는 대로만

여름에는 항상 에어컨을 틀고 살고, 겨울에는 항상 따뜻하게 살고,

설거지도 내가 하기 싫으니까 뭐 어디다 넣으면 바로 해 주는 게 있고,

청소도 그냥 알아서 해 주는 것도 있고,

이런 식으로 우리는 ‘편하면 좋다’라고  생각을 하지만

그렇게 하다가, 그렇게 돈을 많이 벌어서 원하는 대로,

가정부도 쓰고, 나는 완전히 편하게만 살고,

먹고 싶을 때 먹고, 마시고 이렇게만 살다가

그게 좋은 줄 알았는데 렇게 살다가 빨리 죽는 경우도 많지 않겠습니까?

 

뭐가 옳은지 그른지를 모른 상태에서 그 상에 얽매여서,

그 상이라는 것이 진짜도 아닌데,

사실 이 세상에 ‘진짜, 가짜’가 없단 말이죠.

‘옳다, 그르다’는 게 없단 말입니다.

 

내가 지금 가지고 있는 이 상이 진짜 옳은지 그른 건지 우리는 알지도 못하고

‘옳다’라고 착각하면서 그걸 믿고서 그냥 사는 겁니다.

‘내 생각이 옳다’라는 착각 속에.

 

‘돈을 많이 벌여야 된다’라는 게 진실인지 아닌지 우린 알 수 없습니다.

그 사람에게는 좀 덜 버는 게 훨씬 아름다운 일일지도 모르는데,

그 사람은 남들처럼 해야지만 된다고 착각하고 있는 것일 수도 있죠.

 

체질에 따라 또는 사람에 따라,

그 사람의 업에 따라 다 다르지 않습니까?

저마다 옳고 그른 게 다른 거예요.

 

어떤 사람은 이게 옳은 것이 다른 사람에게는 저게 옳을 수도 있다는 말이죠.

어떤 사람은 담배를 피워도 팔십, 구십까지 막 쌩쌩하게 사시는 분도 계시단 말이에요.

그것을 보고 ‘저 사람도 저런데 나도 괜찮겠지’하고 담배를 피우다가

폐나 간이 안 좋은 사람은 더 빨리 죽을 수도 있단 말입니다.

 

‘옳다 그르다’라고 생각하는 우리가 관념지은, 상으로 만들어낸 모든 것이

진실인지 아닌지 우리는 단 하나도 알 수 없습니다.

본래 옳고 그른 게 정해져 있는 게 아니기 때문에.

내가 내 머리로, 내 상으로 ‘옳다, 그르다’라고 판단한 것에 불과하기 때문에.

‘절대선, 절대악’은 없습니다. 내가 그렇게 규정해 놓은 것뿐이지.

 

 

그래서 사실은요, 이 세상이라는 곳은

자기가 규정짓는 대로, 내가 규정한 방식대로,

저 마다 자기다운 방식대로 살아가는 것뿐이지,

'진짜 옳게 산 사람이 누구이고, 그르게 산 사람이 누구냐?'

이런 것은 없습니다. 그냥 저마다의 삶이 있을 뿐이지.

‘어느 것이 정답이다’ 이런 건 없단 말이죠.

자기다운 삶이 있을 뿐이죠.

 

근데 우리는 머릿속에 상으로 ‘이것은 옳고, 이것은 그르고,

이것은 정답이고, 이것은 틀린 것이고,

이런 삶을 살아야 하고, 이런 삶은 살면 안 되고’

이걸 너무 많이 정해놓고 내 스스로 만든 틀 속에

이것이 진짜인줄 알고 빠져가지고 내 스스로 괴로워하는 겁니다.

 

내가 머릿속에서 ‘우리 아들 이 정도 대학은 가야돼’ 해놓고

거기 못 갔다고 막 괴로워하고 울고불고, 인생 실패한 것처럼 여긴단 말이죠.

이거는 백퍼센트, 백퍼센트 내가 만든 거지, 누가 만든 게 아닙니다. 사회에서 만든 것도 아니고.

 

'남들이 뭐 손가락질 할까봐 괴롭다?'

이것은 다 내가 만든 상에 불과합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겪고 있는 괴로움은 딴 사람이 만든 게 아니란 말이죠.

 

우리가 겪는 괴로움은 남들이 만들어준 게 아니라

내가, 내가 기어이 붙잡아서 괴로움을 만든 거에 불과합니다.

그래 놓고 부처님께

‘내 괴로움을 없애 달라.'

'이 괴로움을 좀 가져가 주십시오.'

이 괴로움을 어떻게 하면 없앨 수 있겠습니까?’

 

남들한테 가서 아무리 털어놔본들 이 괴로움을 없앨 수가 있겠는가.

내가 만들어 놓은 틀 속에서의 상이 허망하다는 것을 깨닫고,

'이 상이 거짓이구나.’ 라는 것을 깨닫기 전까지는

언제까지고 우리는 행복해질 수가 없는 겁니다.

 

무엇을 깨기 전까지는?

내가 만들어 놓은 내 머릿속에서의 허망한 상, 허망한 착각, 허망한 망상

이것을 깨기 전까지는 우리는 행복과는 요원하다.

 

이것만 없으면, 이 망상 덩어리만 없으면

우리는 이 자리에서 완전하단 말이죠.

이 자리에서 완전하다. 완전한 부처다.

보고, 듣고, 맛보고, 냄새 맡고 하는

이 모든 경계가 그대로 부처님의 경계란 말이죠.

그대로 진리다. 진리 아닌 것이 하나도 없다.

 

우리가 착각하는 것이  

‘내가 중생이기 때문에 부처가 되려면 열심히 노력하고, 

닦고 닦아서 열심히 수행을 해서 부처가 돼야 된다.’ 이렇게 생각하는 겁니다.

이건 허망한 착각일 뿐이다.

 

우리는 이미 부처인데,

망상을 가지고,  내 스스로 꿈과도 같은 허망한 착각을 가지고

‘내가 중생이다’라고 생각하고,

'이렇게 이렇게 이렇게 사는 것만이 올바로 사는 것이다' 라고 규정을 지어놓고,

그대로 살면 좋은 것이고, 그대로 못 살면 불행하다고 머릿속에서 해석해 놓고

내 스스로 벌주고, 내 스스로 칭찬하고,

내 스스로 잘했다라고 그러고 내 스스로 잘못했다 그러고,

벌도 내가 내리는 것, 내 스스로에게 내가 내리는 형벌입니다. 모든 벌은.

 

우주법계는 우리를 판단하지 않아요.

우주법계는 우리를 판단하거나 벌주거나

미워하거나 용서하거나 이럴 아무런 이유가 없습니다.

 

부처나 신은 그런 게 아니란 말이에요.

판단해 가지고 누구를 '옳다, 그르다' 재판해가지고 다음 생애에

지옥 보낼지 천당 보낼지를 결정짓는 그게 부처가 아니고 그게 신이 아닙니다.

그것은 내가 할 뿐입니다. 내가!

오~직 내가 할 뿐입니다.

망상으로 만든 게 나니까, 창조주가 나니까 그것을 깨어 없애는 것도 나죠.

 

그러니까 사실 우리는 열심히 닦아가지고 부처가 돼야 되는,

지금은 어리석은 중생이지만 언제가 부처가 돼야 되는 이런 존재가 아닙니다.

이미 완성된 존재이지.

이미 부처 그 자체이고, 더 이상 갈 게 없고,

닦아서 뭔가를 잡아야 될 게 없다는 말이에요.

 

허망한, 뭐 모양이 있는 것 같으면,

상이 있는 것 같으면 거짓으로 만들어 놓은 상이니까

상이 있는 것 같으면 그걸 열심히 노력해 얻을 수 있죠.

 

공부 잘하려면 노력해야지 공부 잘 할 수 있지 않습니까?

돈을 벌려면 노력해야 돈을 벌 수 있잖아요.

상으로 만들어진 모든 것은 노력해야지 그걸 얻을 수 있습니다.

가짜로 만든 거니까 가짜의 노력이 필요한 거예요.

 

그런데 부처라는 것은,

도라는 것은,

깨달음이란 것은

이미 완성되어 있는 것이기 때문에 그 어떤 상도 있는 게 아니에요.

 

상이 있고, 어떤 물건 같은 것이면 잡으려고 노력해야 되지요.

근데 물건 같은 게 아니니까 잡으려고 노력할 필요도 없고,

이미 구족되어 있는 거니까 뭔가를 노력해가지고 얻어야 될 게 아니다라는 것이죠.

 

그래서 마조스님은

“도는 어떻게 닦는 것입니까.” 하고 한 스님이 물었는데, 이렇게 답합니다.

 

“도는 닦는데 있는 것이 아니다. 닦아서 이룰 수 있는 도라면

그것은 다시 무너지기 마련이니 이것은 성문의 도일 뿐이다.

그렇다고 닦지 않는다면 그것은 그냥 평범한 범부일 뿐이다.”

 

도는 닦는다고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죠.

닦아서, 열심히, 열심히 닦아가지고 노력해서 이루어진 도라면

노력해서 얻는 것은 노력 안 하면 무너지는 겁니다. 그렇죠?

 

열심히 공부해 가지고 얻은 도는 공부 안 하면 사라진단 말이에요.

의사들도 들어보니까 의사가 됐다고 끝나는 게 아니라고 하대요.

훌륭한 의사가 되려면 끊임없이 새로운 의학 이런 것들을

공부하고, 공부하고 또 해야 된다고 그러더라고요.

이처럼 공부해서 얻어야 되는 거면 끝까지 공부를 해야 된단 말이에요.

안 하면 무너지는 겁니다.

 

그런데 이 ‘깨달음’이란 것, ‘도’라는 것은 완성하고 뭐 자시고하는 게 아니라,

이미 완성되어 있는 것이기 때문에 노력해서 얻는 게 아닙니다.

 

노력해서, 닦아서 얻을 수 있는 것이라면 그것은 무너지기 마련이죠.

근데 이 우주법계의 진리는 무너지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노력해서 닦는 것이 아니다.

 

그럼 이렇게 얘기한다고 닦지 않으면 그건 그냥 범부일 뿐이다.

‘닦지 않아도 안 된다. 닦아도 안 된다.’

이 말이 웃기는 말처럼 들리지만 이게 아주 진실한 말인 겁니다.

그래서 함이 없이 해야 한다.

과도하게 집착하지 않되 내가 마음속에 정말

'내가 이 법을 알아야 되겠구나'

'이 진리를 알아야 되겠구나.' 이렇게 허망한...

 

여러분, 이제 가만히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가 왜 수행을 해야 하냐 하면,

억울하지 않습니까?

너무 억울하고 답답한 일이...

아... 참 정말 살면 살수록 억울하고,

정말 침통하고, 깝깝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만날 넘어지는 데서 넘어지거든요.

넘어지지 않아도 되는데 넘어지고,

남들이 나한테 뭐라고 뭐라고 한 마디 나쁜 말을 했단 말이에요.

그 한 마디에 내가 걸릴 필요가 전~혀 없단 말이에요.

전혀 필요가 없는데,

왜? 그 사람이 부처도 아니고,

정말 모든 걸 완전히 아는 사람이라서

내가 정말 잘 알지도 못한 일을 딱! 결정해주는 사람이라면

그 사람 말 한 마디가 나에게 그대로 와서 꽂혀야 되겠죠.

 

그런데 그 사람은 자기 자신도 자기 자신을 제대로 모르는 사람이거든요.

더 중요한 것은 ‘옳고 그르고’가 없습니다.

부처님이 온다고 우리에게

 “너 이것은 잘했고, 너 이것은 잘못했어.” 이런 말 하지 않습니다.

옳고 그른 게 없기 때문에.

 

남들의 말이 나를 규정지을 아무런 근거가 되지 못합니다.

남들의 말에 휘둘릴 아무런 이유가 없는데도 불구하고

우리는 지금까지 계속 휘둘리며 살아왔잖아요.

억울하지 않습니까?

억울하면서, 너무 어이가 없으면서도

이걸 알면서도 계속해서 이렇게 휘둘린단 말이에요.

 

뭔가 안 좋은 일이 생기면 그걸로 인해서 무너지고, 쓰러지고, 괴로워하고,

시간이 지나면서 그때 이제 담담해지면

또 이제 깨어난 것 같고,

그 괴로움에서 벗어난 것 같고,

괴로워하다가 시간이 지나서 그게 또 흔적이 없으면

괴로움에서 벗어난 것 같고, 이러한 내 머릿속...

 

여러분, 가만히 생각해보면 어떻습니까? 그 괴로움이.

머릿속에서 만들어냈다가 머릿속에서 없앴다가

 ‘잘 닦아서 없앴다’ 이렇게 착각하는 것 아니겠어요?

모든 게 그렇습니다.

 

자식이 대학교를 ‘서울대 갔으면 좋겠다’라고 집착을 딱 했는데, 서울대를 못 갔습니다.

그때는 막 괴로워 죽으려고 했다가 적당한 대학을 갔어요.

그럼 어쩔 수 없이 막 괴로워 괴로워 괴로워하다가,

몇 년을 괴로워하다가 이제는 포기해야 되겠구나 싶어서 마음속에 탁 내려놨습니다.

 

그러고 나서 뭐라고 그러냐 하면,

“야~ 내가 수행을 했더니 역시 마음이 닦이더라. 집착이 좀 내려놔집니다. 수행을 하니까.”

본인이 스스로 그렇게 대학을 거기를 가야 된다고 만들어놓고,

그게 또 어느 정도 담담해지니까

“아, 내가 수행을 해서 닦아가지고 그 마음을 내려놨습니다. 집착을 버렸습니다.”

이렇게 얘기한단 말이죠.

 

이러한 허망한 착각만을 해왔고,

허망한 착각 속에서 괴로워해 왔고,

이 괴로움이 허상인줄 모르고 지금까지 살아온 게 얼마나 억울해요.

얼마나 억울합니까!

더 억울한 것은 이런 삶을 앞으로 우리는 계속 살아야 된다는 거예요.

앞으로도 계속 이런 삶을 살아야 됩니다.

 

누가 욕하면 괴롭고,

남편이 돈 많이 갖다 주면 행복하고,

돈 없으면 괴롭고,

좋은 집에 못 살면 괴롭고,

성적이 나쁘면 괴롭고,

이 허망한 착각 속에 빠져 있는,

이 허망한 착각, 아무것도 아닌 꿈과도 같은 것에 일희일비하면서

앞으로 죽을 때까지 우리는 살아야 됩니다.

 

얼마나 억울해요?

‘그런 삶을 난 살면 안 되겠구나. 내 이런 삶을 이제 청산하고 진짜 뭔가 딱 중심 잡힌 삶을 살자.’

그 마음을 내는 게 ‘발심’하는 겁니다.

 

내가 한 번 깨달아봐야 되겠구나.

내가 ‘도’가 무엇인지, ‘부처님 법’이 무엇인지를 내가 한 번 알아봐야 되겠구나.

이걸 알지 못하고서는 영원히 내가 이 억울하고, 깝깝하고

정말 내 스스로 괴로움을 만들어내고,

그 속에 빠져서 또 괴로워하는 이런 허망한 삶을 살 수밖에 없겠구나.

 

이런 삶이 뭐가 즐거운가.

이 사람이 한 마디 하면 거기에 막 크게 휘둘리고,

이게 뭐가 재밌는가.

 

이런 삶을 내가 정말 살아야 되겠나?

자식하고 만날 싸우기나 하고...

그 예쁜 아이하고 만날 치고 박고 싸운단 말이죠.

그런 삶을 살아야 되겠는가.

 

‘내가 한 번 도를 깨달아봐야겠구나.’

이런 마음을 딱 내기만 하면 됩니다.

우리가 사실은 가장 중요한 게 이 마음이지, 사실은 다른 건 할 게 없습니다.

 

도를 닦을 필요는 없고,

‘한 번 내가 해봐야 되겠구나.’

이 마음을 내는 게 중요하단 말이에요.

다 ‘마음’으로 하는 겁니다. 마음으로.

 

이 마음을 내면 마음이 우주법계에 울리기 때문에, 전파가 되기 때문에

이 마음 하나가 우주 전체이니까.

그러니까 이 마음과 맞는 것들이

유유상종으로 자~연스럽게 따라오게 됩니다.

 

법이 따라오게 되고,

스승을 만나게 되고,

도반을 만나게 되고,

나도 모르게 이 법과 자꾸 인연이 맺어진단 말이죠.

그러니까 억지로 인연이 맺어지지도 않았는데,

억지로 막 뭐 하려고 해도 오히려 집착이 돼서 깨달음이 더디어진다는 거죠.

 

 

 

 

마조스님은 또 이렇게 얘기합니다.

"어떻게 도를 깨달을 수 있는가." 하는 질문에

 

“자성 본래 그대로 완전하다.

다만 선이니 악이니 하는데 막히지 않을 수만 있다면 그를 수행인이라 할 수 있다.”

 

자성 본래 그대로 완전한데,

'선이다 악이다', '맞다 틀리다', '옳다 그르다'

이렇게 나누는 마음, 여기 막히기 때문에 우리가 수행을 못하는 것이죠.

이 나누는 마음만, 분별하는 마음만 놓아 버리면 그게 바로 수행입니다.

 

왜냐하면 분별하는 마음은 어디에서 나와요?

이 상에서 나옵니다.

과거에 만들어 놓은 상과 지금 만들어 놓은 이 현실과

비교, 대조, 분별, 분석, 분별하는데서 괴로움이 생긴단 말이에요.

 

여러분들이 괴로운 건 뭐겠습니까?

대학교, 뭐 서울대 못 가서 괴롭다?

이것은 서울대 가는 사람과 비교하니까 괴로운 거잖아요.

돈을 못 버니까 괴롭다?

돈을 많이 번 사람과 비교하니까 괴로운 것이고,

칭찬 듣는 사람과 비교하니까 내가 괴로운 것이고,

건강한 사람과 비교하니까 내가 괴로운 것이고.

이 비교 분석하는 마음, 이 마음만 탁! 놓아버리면 그 자리가 바로 도의 자리입니다.

 

그래서 신심명(信心銘)에서도 그럽니다.

지도무난 유혐간택(至道無難 唯嫌揀擇) 단막증애 통연명백(但莫憎愛 洞然明白)’

 

‘지극한 도는 어렵지가 않으니 다만 간택하지 않으면 된다.

간택을 꺼릴 뿐이다.

선택하지만 않으면 된다.

그래서 싫어하거나 좋아하지만 않으면 통연명백하겠다.

막힘없이 분명하고 밝아진다. ’이 소리입니다.

 

‘좋다, 싫다’, ‘옳다, 그르다’는 것만 가려서 분별하지만 않으면 통연명백해진다.

깨달음은 드러난다.

 

‘호리유차(豪釐有差)하면 천지현격(天地懸隔)이라.’

털끝만큼이라도 차별이 있으면 하늘과 땅 차이로 벌어진다.

 

둘로 나누기 시작하면,

옳다 그르다, 맞다 틀리다,

너랑 나랑 분별하고, 따지고 이런 것만 나누기 시작하면

그냥 중생으로, 중생이 되어 버리는 겁니다.

그러나 이 ‘나누는 것’만 없으면 바로 부처가 된다.

부처 자리에 올라간다.

 

머리를 가지고 비교 · 분석, 분별하고,

나누고, 판단하고 이걸 지금까지 해왔는데,

그것 때문에 괴로운 줄 모르고,

내 스스로 괴로운 일 힘들여서 분별하고,

힘들여서 상을 만들어 놓고,

힘들여서 그 상 속에 빠지고, 힘들여서 그 상을 깨야 되고,  

이런 허망한, 말도 안 되는 착각에 빠져서 사는 이런 삶을 정리해야 되는데,

이런 삶을 사는 게 힘든 게 아니고, 이건 이렇게 사람이 사는 게 힘든 거죠.

이걸 깨는 게 힘든 게 아니죠. 그냥 하던 것만 멈추면 되니까.

 

뭔가 해야 되는 것이 아니라 하지 말아야 되는 겁니다.

하지만 않으면 되는 겁니다.

지금까지 하던 것을 그냥 멈춰서 하지 않으면 된다.

판단하고 분석하고, 분별하는 것,

망상부리는 것을 멈추기만 하면 되니까 얼마나 쉽습니까?

‘힘들여 하는 것을 힘들여 하지 마라’는 이 세상에서 제일 쉬운 가르침을 가지고

“불교는 너무 어려워요”라고 하는 이런 말도 안 되는 이야기를 우리는 하고 있단 말이죠.

 

중생이 만 가지 분별을 하면 법도 만 가지 법이 있습니다.

중생에 따라서 맞는 법을 설해줘야 되니까.

그러니까 법이 만 가지, 수 만 가지가 생긴 것이지,

중생이 복잡하게 꽈 놓고 꽈 놓고 꽈 놓으니까,

그걸 풀어 주고 풀어 주고 풀어주려니까

복잡하게 꽈진 사람에게 복잡하게 얘기해서 풀어줘야 되잖아요.

그러니까 ‘불교가 어렵다’ 이렇게 착각하는 것이지. 그냥 단순한 겁니다.

 

 

 

 

“도는 닦을 것이 없으니 다만 물들지만 말라.”

'물들지만 말라' 아까 말한 이 상을 혼자서 만들어 놓는 것, 그게 물드는 겁니다.

만들어 놓고 그 속에 빠져가지고 이러니 저러니 하는 것.

 

“무엇이 물듦인가?

일어나고 사라지는 마음으로 무언가를 조작하여 하려고 하는 것,

그것이 바로 물듦이다.”

 

일어나고 사라지는 마음으로,

이게 좋다 나쁘다 판단하고 분별하는 마음으로 뭔가 조작해서 하려고 하는 것,

더 잘해보려고 하고, 더 어떻게 해 보려고 하고, 이렇게 해보려고 하는 것 그게 물듬이다.

 

“도가 무엇인지 알고자 하는가? 평상심이 바로 도다.”

마조 어록에 나오는 얘기이죠.

 

"평상심이 바로 도다."

"평상심은 무엇인가?

인위적인 조작이 없고,

(인위적으로 우리가 ‘맞다, 틀리다, 옳다 그르다’ 조작하는 것이 없고)

옳고 그름이 없고, 붙잡거나 버리는 일이 없고,

(옳고 그름이 있고, 내 편 네 편이 있으니까 내가 좋아하는 것은 붙잡으려고 하고,

 싫어하는 것은 버리려고 하지 않습니까? 그것이 없고)

끊어지거나 항상함이 없고, 범부와 성인이 없는 것이다."

 

이 둘로 나뉘는 것만 탁! 없어지면 그것이 바로 평상심 아니겠습니까?

우리는 평상심을 쓰지 않고 온갖 망상을 부리면서 막 만드는 ‘조작’에 마음을 쓰고 살잖아요.

유위법을 쓰고 산단 말이에요. 유위심으로...

 

근데 평상심이라는 것은 무위법입니다.

아무것도 조작하지 않는 것,

지금까지 조작하면서 살던 마음을 탁! 그치는 것.

 

조주 스님이 남천스님에게 물었습니다.

“무엇이 도입니까?”

“평상심이 바로 도다.”

 

“어떻게 닦아갈 수 있습니까?”

“닦으려고 들면 벌써 어긋난다.”

 

닦으려고 들면 벌써 어긋난다.

 

“닦지 않고 어떻게 도를 알 수가 있겠습니까?”했더니,

“도는 알고 모르는 데 있지 않다.

안다고 하는 것도 허망한 알음알이일 뿐이고,

모른다고 하는 것은 캄캄한 무기(無記)일 뿐이다.

만약 의심하는 것 없이 도를 참으로 통달한다면

허공처럼 툭 트여 거칠 것 없이 되니 어찌 옳고 그름을 따질 것인가.”

 

억지로 뭔가 알아야 될 게 있고, 모르는 게 있고 이렇다면

알아야 될 것을 알려고 막 노력하는 짓을 해야 되지 않습니까?

알고 모르는 데 있지 않다.

 

탁!(죽비를 탁 치시며), 이 소리를 듣지 못하는 사람이 어디 있어요?

저를 지금 보지 않고 있는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다 보고 있단 말이죠.

이 보이고 들리는 모든 것이 그대로 '도'다.

이게 이해가 안 되죠?

보이고 들리는 게 어찌 모든 게 도입니까?

 

우리가 분별해서 걸러서 보니까

이게 도가 아닌 것처럼 보일 뿐이지,

분별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보면 그것 자체가 ‘도’다.

 

 

 

 

황벽스님이 배휴스님에게 말했습니다.

“부처님과 중생은 한 마음일 뿐이고 조금도 다르지 않다.

이 마음은 본디 나거나 죽은 적이 없고, 푸르거나 누렇지도 않다.

정해진 틀이나 모양도 없고, 있고 없음에 속하지도 않으며,

(이 우리가 불성이라고 하는, 깨달음이라고 하는 자리가 이렇다는 거예요.)

 

새롭고 낡음을 따질 것도 없다. 길지도 짧지도 않고, 크지도 작지도 않다.

그것은 모든 한계와 분량, 개념과 언어, 자취와 상대성을 뛰어넘어 있는 것이니

지금 여기 있는 바로 이것일 뿐이다.

 

이 자리는 생각을 움직였다 하면 곧 어긋나 버리니,

이것은 마치 허공과 같아서 끝이 없고 재볼 수도 없다.

지금 이 자리는 바로 이것일 뿐이다.”

 

눈에 보이고 귀로 들리고, 맛봐지고, 감촉 느껴지고 하는

모든 이 두두만물이 우리가 단 한 번도, 단 한 순간도 쓰고 살지 않음이 없는,

이것이 없으면 우리는 살 수도 없는 바로 이것이다.

 

이것이라고밖에 할 수가 없다는 말이죠.

‘불성’이라면 ‘불성’이라는 데 집착하고,

‘주인공’이러면 ‘주인공’이라는 데 집착을 하니까 뭐라고 딱! 말할 수가 없단 말이죠.

 

왜냐하면, 본래 금강경에서도 말했지만,

‘도’도 없고, ‘불성’도 없고,  ‘진리’도 없고, 뭐 말할 것도 없는 것이죠.

뭔가 어떤 이름을 붙이려면

뭔가 이름이라는 구체적인 어떤 경험이나 경험된 거나

어떤 형상이나 물질이 있어야 그걸 이름을 붙이지 않습니까?

이름도 모양도 아무것도 없는 건데,

거기에 이름을 붙일 수가 있습니까?

그냥 ‘이것’이라고 어쩔 수 없이 할 뿐이지.

 

이것은 마치 뭐와 같으냐 하면,

인형극을 할 때 보면요,

인형극을 할 때 이렇게 앞에 이렇게 무대가 있고,

그 위에서 사람이 이렇게 인형들을, 줄을 당기면서 인형들을 움직이게 합니다.

그러면서 인형들 둘이서 사랑도 하고 이별도 하고,

밥도 먹고, 움직이기도 하고, 뛰어놀기도 하고 인형들이 마음껏 뛰어논단 말이죠.

 

그 인형이 우리라고 봤을 때, 이 중생이라고 봤을 때,

그 인형이 저 혼자 움직입니까?

인형은 분명히 움직이고 있죠.

먹고, 자고, 말하고, 사랑도 하고 이별도 하고 이러고 있단 말이에요.

 

근데 인형 그것이 전부가 아니잖습니까?

인형이 실체입니까?

인형극 하는데 움직이고 있지만,

인형만 들여다보면 진짜같이 움직이니까 신기하게 보이잖아요.

그러니까 애들이 신기해가지고 좋아하지 않습니까?

 

우리가 그것과 똑같아요.

그 인형이 움직이는 것을 보고 ‘이게 진짜구나’ 이렇게 착각하는 거예요.

“인형 뒤에서 사람이 해주는 거야.” 해도 애들은 안 믿어요.

인형이 지금 진짜 움직이는지 안단 말이죠.

근데 어른들이 “야, 그거 쟤가 진짜 하는 게 아니라니까,  사람이 뒤에서 움직이는 거야.”

근데 얘들은 안 믿습니다. 끈도 잘 안 보이니까.

 

그와 마찬가지로 우리 중생들이  

그 인형이, 이게(나) 인형일 뿐인데,

무아이고 인형일 뿐인데,

진짜라고 집착해가지고, 착각해가지고

인형극 속에서 헤어지니까 괴로워 죽으려고 하고,

인형극 속에서 옆에 있는 어떤 인형은 좋은 집에 살고,

나는 나쁜 집에 사니까 괴롭다고 생각한단 말이죠.

 

그래서 부처님께서, 깨달은 도인이

‘야, 이건 다 인형일 뿐이다. 이게 진짜가 아니다. 이 인형을 움직이는 뭔가가 따로 있다.’

그것이 따로 있단 말이죠.

그렇게 얘기해도 우리 중생들은 믿지 않습니다.

"여기 이렇게 (내가) 분명히 있는데, 이게 어찌 없습니까? "이렇게 얘기한단 말이에요.

 

인형이 진짜가 아니라, 인형 뒤에 이걸 움직이는 다른 사람이 있는 것처럼

우리가 이렇게 먹고, 마시고, 말하고, 행동하고 이러고 살고 있지만,

이 몸이 하는 게 아닙니다.

이 뇌가 하는 게 아닙니다.

뇌가 시켜서 몸이 하는 게 아닙니다.

몸도 내가 아니고, 뇌도 내가 아니고,

마음도 내가 아닙니다. 심장도 내가 아니고...

 

‘색수상행식이 다 공하다’ 이러잖아요.

‘오온개공’이라 이러지 않습니까?

오온으로 이루어진 나라는 존재가 공하다는 말이죠.

진짜 내가 아니다.

색도 몸도 공하고, ‘수상행식’이라는 느낌이나

생각이나 욕망이나 의식이나 이게 다 공하다. 진짜가 아니다.

 

우리의 의식을 ‘나’라고 생각하고 살았지 않습니까?

이 감정을, 이 생각을, 이 몸을 나라고 생각하고 살았잖아요.

그런데 그것은 그냥 이 인형극에 있는 인형일 뿐이라는 거죠.

인형을 움직이는 누군가가, 뭔가가 있단 말이죠.

그 뭔가가 누구입니까?

그 뭔가가 무엇입니까?

 

무엇인지는 모르지만

내가 이렇게 ‘움직이고 있다’ 라는 사실 자체는

움직이고 있는 뭔가가 있다는 게 아니겠어요?

움직이고 있는 뭔가가 있으니까

지금 내가 이렇게 움직이고 있는 것 아니겠어요.

 

보고, 듣고, 맛보고, 이 설법을 듣고 있지 않습니까?

이 설법을 듣고 있는, 듣고 있는 그것은 이 몸뚱이가 아닙니다.

이 껍데기, 이 내가 아닙니다.

 ‘나’라는 건 무아죠. 실체가 아니에요.

이 내가 아닌, 나라고 할 수 있는 게 아닌 ‘이것’이 있단 말이죠.

이것일 뿐이다.

지금 여기 있는 바로 이것일 뿐이다.

 

 

 

다른 비유로 들면,

우리가 TV를 볼 때는 보면 TV 영상이 화려하게 나오지만,

TV 속에 온갖 사람도 있고, 드라마도 있고, 모든 것들이 TV속에 다 나오잖아요.

TV를 보면서 TV에 사로 잡혀서 보게 되면 TV드라마에서 나쁜 놈이 나타났는데,

막 진짜 나쁜 놈이라고 그러면서 막 욕을 하고....

 

그래서 실제 배우, 연기자를 만났는데,

이 연기자들이 그러데요. 나쁜 연기를 하는 사람인데

“길거리 다니다 보면 나를 보고 진짜 나쁜 놈인 줄 알고 진짜 욕하는 사람이 있다.”고.

이런 어리석은 사람이 있으면 되겠습니까? 그것은 연기일 뿐인데,

그런데 우리는 연기일 뿐인지 모르고

진짜인 줄 알고  그 연기자를 욕한다면 말이 되겠습니까?

 

TV에 보이는 그게 진짜가 아니죠.

어찌 보면 TV에 보이는 그것은 그냥 뭐랄까요,

이 허공에 지금 떠다니는 이 전자파, 이 전자파를

그냥 그림도 없고, 색도 없고, 모양도 없고, 크기도 없는 이것을

그냥 딱 붙잡아다가 재생시키면 바로 TV에 그 모든 것이 나타나는 것 아니겠어요?

TV 화면에 드러나는 그 사람들 그게 진짜가 아니고,

화려한 영상이 진짜가 아니고,

뒤에 있는 전자파라는 것이 그것을 다 만들어 내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것을 등장하게 하는 것 아니겠어요?

 

꿈을 꿀 때, 꿈속에 나타나는 등장인물들이 진짜가 아니고,

꿈을 꾸는 자가 따로 있지 않습니까? 꾸는 자가...

꿈속에서 '수행을 통해 가지고 꿈을 깨야지' 한들,

그 꿈속에서 행하는 일 밖에 안 되는 겁니다.

 

그러니까 사실은 ‘수행을 통해 뭔가 깨달아야 되겠다’ 이것은

 ‘꿈속에서 꿈을 꾸고 있는 것과 다르지 않다’ 말이죠.

'연극 속에서 연기하는 사람이 그렇게 연기한다.'라는 것을 이야기하는 그런 것밖에 아닌 것이죠.

 

우리가 눈을 보려면, 눈은 눈을 볼 수 없죠.

눈을 감고 있으면 눈이 보이는가요? 안 보입니다.

눈을 떠도 눈이 안 보입니다.

눈을 감아도 안 보이고 눈을 떠도 안 보입니다. 눈은...

어떻게 하면 눈을 볼 수 있을까요?

 

이것과 흡사합니다.

불성은, 불성은 언제나 작용하고 있어요.

눈은 언제나 보고 있지 않습니까?

눈은 모든 것을 보고 있잖아요? 언제나 보고 있잖아요.

근데 눈이 눈을 못 봐요.

 

우리가 ‘불성을 봐라.’ 하는 것은

눈이 눈을 보는 것과 똑같은 말이죠.

불성은 언제나 이렇게, 언제나 이렇게 드러나 있단 말이죠.

언제나 드러나 있습니다.

근데 불성을 우리는 볼 수가 없죠. 그죠?

눈이 눈을 볼 수 없는 것처럼...

 

그렇다면 눈이 눈을 어떻게 하면 볼 수 있을까요?

눈이 눈을 본다는 것은 뭔가 보는 순간에

‘어! 보는 뭔가가 있구나.’ 하는 것이 그냥 확인되는 것 아니겠어요?

보여지니까 '보는 작용을 하는 눈이라는 것이 있다.' 라는 것을 아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우리는 눈으로 바깥에 있는 사물, 대상만을 본단 말이에요.

이건 컵이고 뭐고, 내가 좋아하는 것, 싫어하는 것,

바깥대상만을 보니까 정작 눈의 작용을 못 본단 말이죠.

눈이 있음을 확인하지 못한단 말이죠.

 

언제나 우리는 보고 있지만 눈을 확인하지 못하고 있다가

어느 날 딱 보다 보니까,

‘아! 보여지는 대상이 있으려면 보는 뭔가가 있어야 되는 것이구나.’

‘아! 보는 작용, 그게 눈이라는 게 있는 것이구나.’ 라고 탁 알게 된단 말이죠.

 

그래서 “도가 무엇입니까?”

 “뜰 앞의 잣나무다.” 이러면 눈의 작용을, ‘눈이 본다’라는 작용을 보려면

뭐를 보여줘야지만 눈의 작용을 볼 수 있는 겁니까?

특별히 뜰 앞의 잣나무를 보여줘야지만

눈의 작용이 ‘본다’라는 작용을 깨닫게 해 줄 수 있는 건가요?

아니죠. 뜰 앞의 잣나무를 보게 해줘도 괜찮고,

“마른 똥막대기다.” 똥막대기를 보게 해줘도 괜찮습니다.

“차나 한 잔 마셔라.” 차 한 잔 마시게 해줘도 괜찮단 말이죠.

보고, 듣고, 느끼고, 맛보는 육근의 모든 작용 속에 그것이 드러나 있으니까.

 

그러니까 한 대 딱 때려줘도 괜찮고,

할! 하고 소리를 쳐도 괜찮고,

선문답의, 그 모든 선문답 중에 어떤 방편을 써도 괜찮단 말이죠.

 

눈에 보이는 것을 뭘 봐도 보는 작용만 보면 되는 것 아니겠습니까?

근데 이렇게 보여주게 딱딱 짚어주면

그 보여주는 그 대상을 보고 ‘거기 뭔가 도가 있나?’ 하고,

 

“뜰 앞의 잣나무다” 이러면 뜰 앞의 잣나무를 뚫어지게 쳐다보면서

‘뜰 앞의 잣나무 속에 뭔가 도가 있구나, 숨겨져 있구나’

이렇게 생각을 해 버리면 이거는 어긋난다.

 

내가 보고, 듣고, 맛보는 그건 이 몸이 하는 게 아니다.

몸이 하는 게 아닌 건 분명합니다.

그것을 찾는 것, 그것이 불교인데,

그것을 찾는데 어떻게 찾느냐?

생각으로 찾으면 찾을 수가 없다.

 

생각을 딱 끊어진 자리에서

그 찾고자 하는 어떤 하나의 어떤 발심, 마음, 그 마음이 있어야 되고,

찾아야 되는데 궁금하긴 하지만 모르지 않습니까? 모르잖아요.

‘오직 모를 뿐’하는 ‘모르겠다’하는 화두가 들린단 말이죠.

 

그게 의심입니다. 화두고 공안(公案)이고 의정(疑情)이고.

그 모르는 것으로 똘똘 뭉쳐 있으면서 찾고자 하는 마음이 강하게 매진될 때

그게 이제 화두가 타파되고, 한순간 확~ 그어서 확인하는 길이 열린다는 것이죠.

이것이 선에서 말하는 ‘자기 성품을 본다’라는 어떤 방법이고, 하나의 구조입니다.

 

그래서 언제나, 법정스님도 그러시잖아요.

 “언제나 ‘나는 누구인가?’ 하고 늘 질문을 해라.”

 

늘 자기 자신이 뭘 하더라도 내가 누구인지,

이걸 누가 이렇게 이 몸을 이끌고 가는가?

이렇게 생각을 일으키는가?

이렇게 보고, 듣고, 맛보는가? 하는 것을 늘 질문을 던지는 겁니다. 자기 자신에게...

 

그러니 늘 뭔가 모르게 이걸 확연하게 알게 되기 전까지는

깝깝하고, 답답하고, 알아야 될 것 같고, 풀어야 될 것 같고,

이걸 내가 풀어야 되는데, ‘이생에는 풀어야 되겠다’ 하고

이런 마음을 간직하고 살으란 말이에요. 간직하고...

그것을 간직하고 있는 사람이 수행자입니다.

 

절 잘하고, 염불 잘하고, 기도 잘하는 게 수행자가 아닙니다.

이 의심이 없는 사람은 수행자가 아닙니다.

 

 ‘뭔가 내가 이걸 알아야 되겠구나.

이 허망한 망상에 쓸려 다니는 이런 착각 속에서 괴로움에,

가짜 괴로움에 빠져서 혼자 헐떡이는 이런 삶을 내가 정리하고 청산해야 되겠구나.’

이런 마음을 가진 사람이 수행자죠.

 

그렇게 마음을 딱!,

그 마음을 간절하게 가지고 다니다 보면

그게 이제 인연이 무르익는단 말이죠.

그래서 그 인연이 저절로 우리를 공부시켜줍니다.

그 발심이 저절로 공부시켜 준단 말이에요.

 

제가 가만히 되돌아온 삶을 보니까 그래요.

제가 막 어거지로 뭔가 하려고 했을 때 오히려 안 되는데,

그렇게 그냥 턱 내맡기고 ‘내가 공부하겠다’라는

어떤 간절한 발심만을 가져갈 때 저절로 우주법계가 공부시켜 줍니다.

 

서점에 가면 나에게 딱 맞는 책을 탁! 손에 쥐게 해주고,

TV를 딱 켜면 나에게 딱 필요한 법문이 나오게 되고,

불교TV, 불교방송을 딱 틀면 그게 나에게 딱 맞는 법문을 들려주고,

친구를 만나고 도반을 만나도 아주 그 적절한 도반을 만나게 돼서

혹은 불교를 전혀 모르는 사람이라도

그 사람이 내뱉은 한 마디 말이 나에게 큰 어떤 화두처럼 다가오기도 하고,

저절로 우주법계가 스승을 가져다주고,

도반을 가져다주고, 공부할 거리를 가져다줍니다.

 

어느 순간 그냥 확 ~ 발심이 강해져서

‘내가 정말 공부하겠다.’라는 의지가 갑자기 막 불타오르는 때도 생긴단 말이죠.

그런 의심을 딱 품고 있다 보면 어느 순간 탁! 드러납니다.

 

그러니까 이 공부에는 너무 집착하고 욕심 부릴 것도 없어요.

'이렇게 그냥 내가 꾸준히 공부해나가겠다,

내가 당장 내가 깨닫지 않더라도

이렇게 이 공부자세로, 수행자의 마음으로

내가 이걸 한 번 풀어보겠다는 마음으로 살겠다.'

그게 수행자입니다.

 

그런 수행의 마음을 가지고 세상을 살아가는 것이 아주 중요하고,

그런 마음으로 살아가는 것 자체가 화두이고,

그게 이 짜잘한 세상에서의, 세속에서의

어지간한 짜~잘한 문제들은 문제 같지도 않게 만들어 버려요.

 

이 큰~의식을 가지고 있는 사람에게 이 짜잘한 게 고민이 되겠습니까?

그것은 그냥 스쳐지나가는, 잠깐 잠깐 휩쓸릴 수는 있겠지만

그냥 다시 회복한단 말이에요,

돌아온단 말이죠. 복원력이 생긴단 말이에요.

 

'내가 '본분사(本分事)'가 뭔지를,

내가 본분사가 뭔지를 깨달아야 되는데,

이런 짜잘한, 허망한 생각이 만들어 놓은 착각에 빠져서

이렇게 끄달려 갈 필요가 없겠나, 있겠나?’

이런 마음이 들어서 바로 다시 내 본분으로 돌아온단 말이죠.

 

내 본분은 뭔가?

나를 찾는 게 내 본분이다.

이거는 불교가 아닙니다. 종교도 아니고,

당연한, 당연한 삶의 사명이고, 누구나 해야 되는 것이죠. 누구나!

이렇게 허망하게 괴롭게 사는 게 싫은 사람이라면 누구나 해야 되는 문제입니다.

 

네, 오늘은 여기까지 말씀드리겠습니다.

 

 

 

반갑습니다. 부처님께서 우리에게 가장 중점적으로 법을 설해 주셨던 가르침이

무아에 대한 가르침입니다. 무아라는 것은 쉽게 말하면 우리가 삶을 살면서 나라는 존재는

이 몸에 한정된 존재인 것으로 착각을 하고 이 마음, 이 생각에 한정된 것으로

보통 우리는 착각을 하면서 이 세상을 삽니다. 그래서 누구나 자기 능력을 한정 짓고 있어요.

 

나는 요 정도의 능력있는 사람이다. 내 능력은 이 정도고 나는 이 정도의 실력을 가지고 있고

이 정도의 부와 재능과  능력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다.
그리고 상대방은 어떻다 이렇게 얘기를 하면서 산단 말이죠. 그래서 누구나 자기 자신을 이렇게 한정 짓고 사는 것에 익숙해져 있는데 무아에서 본다면 본래 나라는 자아에 실체가 없다는 겁니다.


'이 정도가 나야, 뭐 이정도를 갖춘 사람이 나야, 이 몸뚱아리가 나야,  내 IQ, EQ 이런 것들이 나야' 라고

생각하는 이런 모든 것들이 나의 실체인 것이 아니다.

그래서 이제 대승불교에 오면 '야, 그렇다면 무아가 아닌데 부처님께서 깨달음을 얻으셨다.
그렇다면 이것을 어떤 용어로 해줘야 좋지 않을까? 그래야 이해하기 쉽지 않을까?' 해서

방편으로 대아다, 참나다, 본래면목이다 뭐 이런식으로 설명을 합니다.


그 말은 뭐냐하면, 대아라는게 뭐냐하면 이 몸에 갇혀있는 이 소아적인 나라는 것을 넘어서는

무한히 확장된 나가 있다는 소리입니다.

우주법계와 둘이 아닌 그야말로 뭐라고 말로 표현할 수도 없는 그런 나의 무한한 어떤 가능성, 부처가 될 수 있는
무한한 가능성 이런 것이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그것을  2,500년 전에 부처님이 그런 가능성이 있었으니 우리도 언젠가는

그렇게 될 수 있겠지 이렇게만 생각하고 살 것인가? 그렇지 않다라는 것이죠.
지금 이 자리에서 내가 어떻게 무아를 실천하고, 내가 어떻게 나라는

어떤 협소한, 축소된 소아적인 나라는 것에서 놓여나는 그런 삶을 살 수 있을 것인가를

구체적인 현실 속에서 실천할 수 있어야 되는 겁니다.


이러한 몇가지 과학에서 설명을 잠깐 먼저 드리면 세계적인 정신의학자라고 하는

스텐리블록이라는 박사는 나를 넓히면 넓힐 수록 고통이 저절로 줄어드는 현상을

발견했다고 알려져 있는데요.
쉽게 말하면 이런 겁니다.


두통이 왔어요. 그래서 머리가 아프다. 그런 두통이 있는 사람에게

두통을 가만히 관찰하라고 한 다음에 '지금 네 머리가 요만한 머리가 아니라

1미터로 확장됐다고 상상을 해봐라.' 그렇게 상상을 시키는 거에요.
그랬더니 조금 더 두통이 감소해요. ' 네 머리가 이제는 이 법당만큼 커졌다고 상상을 해봐라.'

그 다음에 이 학교만큼 커졌다고 상상을 해보고 이제 점점 더 이 머리를 커졌다라고,

확장되었다고 상상을 시키는 겁니다.


그렇게 상상을 한 것 밖에 없는데도 불구하고 벌써 두통이 사라진다라는 것을

많은 사람에게서 발견하게 됐다라는 겁니다.

즉 내 뇌는 내 머리는 여기에 한정되었다라고 생각할 때는 여기가 아팠는데

'나는 여기에 한정된 존재가 아니야. 나는 무한히 확장되는 존재야'라고 생각을 바꿨을 뿐인데

그 두뇌가 사라지게 되었다라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또 러시아 심리학자 블라디미르 라이코프라는 박사는 

렘브란트라는 유럽의 유명한 미술가가 있는데요.

어떤 사람에게 최면을 건 다음에 이 사람은 그림을 전혀 못 그리는 사람이죠.

이 사람에게 최면을 걸어서 나는 렘블란트라고 상상을 하도록 시켰더니

그 사람이 렘브란트 뺨치는 그림을 그렸다는 것이죠.

 

즉 우리는 그런 재능이 없는 사람이라고  보통 생각을 하고 삽니다.

어쨋든 최면을 걸었든 아니면 상상을 했든 '나는 그러한 능력이 없는 사람이야'라고 생각하고

일반적으로 사는데 이렇게 최면을 걸었더니

그 사람이 내 몸에선 도저히 나올 수 없는 놀라운 그림을 그렸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느냐하면 어떤 원리인지는 모르겠지만

우리는 내 몸과 마음에 제한되는 의식과 마음을, 능력을 가지고 세상을 산다고 여기지만

그것을 뛰어넘는 어떠한 알 수 없는 더 큰 힘과 가능성과 능력과 지혜를

우리는 가지고 있을 수도 있다라는 것을 의미합니다.

내가 이렇게 비좁은 나에 갇혀있다라는 것만 확장해 버리면, 내려놓아 버리면

또 다른 가능성이 나에게 올 수도 있다라는 것을 의미하는 거죠.

 
라이코프 효과라고 해서 이미 자신이 오래 전에 죽은 천재라고 상상을 하면,

상상을 했을 뿐인데 그 천재가 가지고 있던 천재적인 능력이 나에게도 온다고 그럽니다.
라이코프효과라고 그러는데 예를 들어 대학생들이 시험보기 전에

나는 대학교수다 이렇게 상상만 해도 성적이 오른다는 거죠.


또 어떤 대학교에서는 동양인 서양인이 함께 수업을 받고 있는데

그 교수님이 시험보기 전에 오늘 볼 이 시험은 전통적으로는 동양사람들이 성적을 월등하게 잘 받는다.

서양인들에 비해서. 이렇게 얘기하고 시험을 봤더니 실제 아무 연관성이 없는데도 불구하고

동양인 학생들이 훨씬 더 좋은 성적을 받았다라는 것.


내가 그렇다라고 상상을 했을 뿐인데 그것이 내 삶에 현실로 드러난다.
마음 하나 바꿨을 뿐인데 생각과 상상을 하나 조금 바꿨을 뿐인데도

이러한 일들이 일어난다라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 말은 무얼 의미하냐하면 우리가 나라는 개념에, 나라는 어떤 몸과 마음이라는 것에

나를 제한하고 한정해 놓았을 때는 그 정도 밖에 능력을 발휘할 수 없지만

그 나라는 틀을 깨고 티워버렸을 때 무한한 가능성과 능력이

나에게 드러날 수가 있다라는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는 무아라는 그 자체는 '내가 없다' 이렇게만 우리가 이해할 것이 아니라

그것은 나라는 것에 가두지 않았을 때 나를 활짝 열었을 때,

사실은 자신의 능력이라는 것도 자기 규정입니다.

자기 스스로 내 능력을 규정시키는 대로 규정되는 거에요.


모든 건 삼귀유심이고 만법유식이라고 모든 것은 마음에서 나오는 것이라고 하는 것처럼 

내 마음에서 내 능력이 어떻다라고 스스로 규정하는 삶을 살 수 있을 뿐입니다. 

내 마음속에서 '나는  이러한 가능성에 도전하지 않을 거야.

나는 요 정도 밖에 안되니까 요 정도만 하면 돼.'라고 여기는 사람은

스스로를 그 정도의 경험에 경험치로만 가두는 것이지요.

그렇게 가두게되면 우리는 그런 사람밖에 될 수가 없는 겁니다.

 

그럼 어떻게 하면 나라는 존재를 가슴을 활짝 열어서 우주법계 전체에 있는

대아라고하는 불성이라고 하는 것과 내가 둘이 아니게 바뀔 수 있느냐.
즉, 나의 무한한 가능성을 어떻게 하면 되찾을 수가 있느냐 하는게 중요한 관건이겠죠?
나를 가두지 않고 나를 확장하고 활짝 열어놓는 방법. 몇 가지 방법이 있을 수 있는데요.


첫 번째가 우선 자연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자연과 교감하는 삶을 사는 겁니다.

즉 우리는 평소에 일상적일 때는 자연이 변화되는 모습을 잘 가슴에 못 담고 살아요.
왜냐하면 할 일이 많고 바쁘고 정신없고 하니까 온갖 내 눈앞에 꽃 한송이가

아름다운 것이 있다 할지라도 그 꽃 한 송이의 아름다움을 느끼고, 누리고,

감동하지 못 할 만큼 가슴을 열지 못하는 거지요.

가슴이 열려있으면 보일 텐데 보질 못하고 사는 겁니다.

 

법당 앞에 저 꽃잔디가 작년에 비해 올해 더 많이 퍼져서 자라고 있더라구요.

또 이 숲이 지난 달과 지금은 놀랍게 다름니다.

지금의 산을 보면 완전 초록도 아닌 아주 연초록의, 어떤 초록의 생명들이 막 올라와서

그 어릴 때보다도 아주 그 산의 빛깔이 아주 아름답습니다.

특히 아침 나절이나 저녁 나절에 그 산을  숲을 바라보면요.
정말 놀랍다고 밖에 표현할 수 밖에 없는, 햇볕에 아주 반짝반짝 빛나는

그런 어떤 놀라운 빛깔들을 가슴 속에 담게 되거든요.
그런데 그렇게 자연을 가슴에 담기 시작할 때 우리 가슴이 무한히 확장되는 것을 느낍니다.


여러분 콘크리트 건물 속에서 일하다가 직장상사 밑에 사람, 또 아파트 안에서  갖혀 있을 때는

자식들에게 화도 많이 내고 직장 사람들에게도 막 짜증도 내고 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산에 가서 등산하는 사람들이 막 짜증내는 거 쉽게 보셨습니까?
잘 짜증 안내죠? 등산하는 사람들은 그냥 처음 보는 사람들에게도 '안녕하세요?'하고 인사한단 말이죠.
특히나 저 지리산을 가면 더 그래요. 왜냐하면 거기는 2박3일, 3박 4일 종주를 하다보니까

아예 세속의 생각을 탁 내려놓고 난 어차피 2,3일 동안 산에 있을 거야.

탁 내려놓고 있다보니까 가슴이 열립니다.

 

자연과 하나가 되면 가슴이 열려 있을 수 밖에 없어요.

그러면 너도 나도, 너다 나다라는 분별이 사라지기 때문에 모든 사람이

다 친구같이 반갑게 느껴지고 그냥 인사하고 싶고 누가 시켜서 그러지 않아도

아마 여기서는 시켜도 잘 안 나올 거예요.

그런데 자연에 가면 굳이 시키지 않아도 그렇게 가슴이 열린다.

우리가 가슴이 닫히면 어떤 일이 벌어지냐하면 나라는 거에 축소가 되면

우리는 항상 가슴이 열렸다 닫혔다 하지 않습니까?

 

가슴이 딱 닫힐 때는 부하직원이나, 자식 중에 누가 막 떠들고 말을 할 때 그

것조차 듣기 싫어가지고 좀 조용히 못하냐고 소리지르고
자식들에게도 소리 지르고 그렇지만 가슴이 확 열려서 뭔가 기쁨에 넘치고 이럴 때는

그 어떤 소란을 피워도 다 받아들일 수 있을 만큼 가슴이 열린단 말이죠. 

 

이런 일이 있었답니다. 미국에서 어떤 초등학교가 그 주 전체에서 성적이 꼴지였는데
불과 한 일년만에 그 주 전체에서 일등이 되었고 학생들의 성적이 평균 점수가 20% 이상 상승을 했다.
그래 이것이 뭔가 싶어서 조사를 했더니 다른 거는 하나 바뀐게 없어서

도저히 성적이 올라가는 개연성이 없더라는 겁니다.


자세히 알고 봤더니 한가지 바뀐게 있더라는 겁니다. 그게 뭔가 봤더니

그전에 있던, 이사하기 전에 있던 학교에 있을 때는 성적이 안나왔다가 이사하고 성적이 잘나왔는데

다른 점이 뭔가 봤더니 이사하기 전에 학교는 창문이 거의 없다시피 할 정도로

조그만 창문만 있더랍니다. 그런데 이사 간 학교는 넓은 창문으로 바깥의 자연을

마음껏 바라볼 수 있는 학교더랍니다.

 
그런데다가 이사하기 전에는 그 조그만 창문에 빛이 들어오니까

그것도 커튼을 치고 불을 켜고 수업을 하는 경우가 많았는데 이제는 그럴 필요가 없으니까

창문을 활짝 열고 수업을 하고 그러다 보니까 아이들이 창밖으로 드넓은 자연을

보다 많이 바라보게 되었다.

 

그런데 주변에서 그 시험 결과를 가지고 설마 그거 가지고 성적이 그렇게 좋다는 게 말이 되느냐.

그래서 캐나다에 있는  엘버타 교육청에서 5개 학교에서 똑같은 실험을 했다 그래요.
그런데 동일한 결과가 나왔을 뿐 아니라 더 놀라운 결과가 나왔답니다.
성적만 좋아진 게 아니라 아이들의 키도 더 커지고요.

충치 발생율도 그렇지 않은 학교에 비해서  더 줄었다는 겁니다.


아까 얘기한 학교가 캘리포니아 포커스라는 초등학교라 그러구요.

이런 이야기를 듣고 나서 고등학생들도 과연 가능한가 해서
백한개 고등학교를 대상으로 이런 실험을 했는데 같은 결과을 얻었으면서

그 결론에 이렇게 나와 있다 그럽니다.

 

아이들이 창밖으로 바라봤을 때 창밖에 식물들이 나무들이 많으면 많을 수록,

그리고 자주자주 내다보면 내다볼수록,
그리고 창문이 크면 클수록 대학 진학율도 높아지고, 그뿐 아니라 아이들 성격도 좋아지고

건강도 더 좋아지고 더 드넓은 아이로 성장을 하더라는 겁니다.

그것이 자연의 어떤 작은 부분을 바라볼 때 우리는 그 속에서 우리가 알 수 없는,
우리가 미쳐 느끼지 못 할지라도 자연을 자주자주 많이 바라보게 되었을 때

내 가슴은 더욱 더 넓어지고 작은 것에 집중하는,
작은 것에도 가슴을 여는 그런 것들이 연습이 되는 것이죠.


서울에서 보니까 어느 아파트가 한강이 내려다보이면 한강을  조망하는데 1억이 더 비싸고

같은 아파트라도 또 이쪽에서 남산이 보이면 또 1억이 올라간다는 얘기를 들었는데요.
아파트 하나를 구한다 할지라도 그야말로 창이 있고 숲이 보이고,

자연이 보이고, 드넓은 이런 곳에서, 드넓은 것을 굽어 볼 수 있을 때 

그럴 때 아이들도 더, 뭐랄까 의식도 확장이 되고 가슴이 더 넓게 바뀌고

집안에서 싸움도 좀 덜 일어나고 이러지 않을까?

 

제가 옛날부터 이런 얘기를 했었을 텐데 내가 이 걸 보고

'아,  내가 이래서 이런 느낌이 들었나' 하는 느낌이 드는데요.
저는 어릴 적 부터 항상 자연을 너무 좋아하던 것이 이제 언덕위를 좋아했습니다.
이상할 정도로 언덕을 좋아해서 높은 곳에 올라가서 굽어 보는 것을 좋아하고

지리산에 가면 한상 그 윗자락에 올라가면 항상 그 자리에 자릴 펴고 앉아서

하염없이 바라보고, 뭐가 있어도 창문이 넓은 곳을 좋아하고
우리 보살님들하고 밥을 먹으러 가도 될 수 있으면 창 넓은 대로 가자고 그렇게 하는 이유가

왠지 모르게 뭔가 그런게 좋은데 그런 것들이 우리 누구나 근원에서는 있다는 것이죠.

 

이렇게 자연을 바라보고 그런 것 만으로도  우리의 어떤 영감이 깨어나고
나에게 도저히 없는 능력이라고 생각했던 어떤 창의성 이런 것들이 속속 나타날 수 밖에 없다.
칸트도 보면 매일 한 3시 반쯤 되면 항상 어김없이 산책을 했다 그러고요. 

그 산책을 하지 않으면 새로운 아이디어가 떠오르지 않았다고 그럽니다.


루소나 에머슨이나 키에르케고르 같은 사람도 항상 산책 속에서 창의성이나 영감 같은 것을 얻었다.
그래서 산책을 할 때마다 메모지를 들고 다녔다 그러지요.
이런 얘기가 있습니다. 우리가 의식을 제한시켜 놓았을 때 비좁은 공간에 제한시켜 놓았을 때

우리도 의식도 작은 사람이 되지만 넓은 것을 보았을 때 의식도 확장을 하는데요.

 

이런 비유를 들 수가 있습니다.
금붕어들을 작은 어항에 가두어 두면 덩치가 5센치 이상으로 잘 안 큰답니다.
그런데 이 금붕어들을 호수에다가 풀어 놓으면 덩치가 25센까지 커진답니다.

강에다가 탁 풀어놓지 않습니까? 그러면 길게는 1미터까지 크기도 한답니다. 

이를테면 부모님들이 여행을 자식들을 보내거나, 외국 배낭여행을 하고 싶은 사람이
나도 모르게 떠나고 싶은 마음이 있거나  이런 것들도 하나의 이런 것일 겁니다.  

 

내가 비좁은 곳에서 비좁은 것을 보기 보다는 보다 드넓은 자연을 보고

드넓은 세상을 보고 했을 때 뭔가 모를 어떤 나라는 것이 제한이 확장되는

그런 어떤 결과로 이어지지 않는가 그런 생각이 듭니다.

이것처럼 내가 조금 더 자연과 가까이 하고 자연을 많이 바라보고 자연의 소리를 듣고 그랬을 때
내가 확장되고, 그런 것을 떠나서도 마음이 너무나도 고요해지고 평화로워지는 것을 느낍니다.


또 하나, 두 번째로는 나를 열고 나를 확장하는 방법은 뭐냐하면

주변에 나눔과 베품, 사랑을 실천하는 겁니다.
왜 그렇겠어요? 내 것만 알고 남을 주지 않고 꽉 쥐려고 하는 마음 자체가

나를 내꺼 안에다가 한정하는 마음 아니겠습니까?
나만 잘 먹고 잘 살자하는  마음 아니겠어요?

근데 내 것을 남들에게 나누는 마음은 어떤 마음이겠습니까?
나를 확장하는 마음입니다. 나는 이렇게 비좁은 내가 아니다.

이 세상 전체와 내가 도움을 주는 모든 존재들과 나는 둘이 아니다.
확장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내가 비좁은 자기 틀에 갖혀있는 사람은 결코 나를 위해 나를 희생해서 도울 수 없습니다.
물질도 베풀 수 없고 마음도 베풀 수 없다. 사랑을 베푸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상

대방을 있는 그대로 사랑해 주는 것은 그야말로 내가 확장되는 것과 같다.

나라는 자아에 나를 가두지 않는 겁니다.

그 사람들을 보면서 보다 더 사랑해 주고 더 아낌없이 나누고 베풀어 주었을 때

내가 확장되는 것을 우리는 경험하게 된다.


그래서 나의 무한한 능력이 늘어날 수 밖에 없겠죠.

내 것만 알겠다고 가두는 사람은 더 부자가 될 수 없습니다.
그런데 베풀고 나누는 사람은 점점 더 부자가 될 수 밖에 없겠죠.

왜냐하면 우주 법계가 그 사람은 나라는 틀에 갇힌 사람의 내 복만 받는 것이 아니라

우주 법계의 무량대복을 가져다 쓸 수 있는 사람으로 바뀌기 때문에.

 

또 세 번째는요. 조금 비슷한데 집착을 하지 않는 사람입니다.

집착이라는 것이 바로 아집이라고 해서 내 것을 가지겠다라는 집착아니겠어요?

내것을, 소유욕 같은  이런것들을 집착이라고 한단 말이죠.
집착하는 사람들은 곧 내 것만이 내꺼다라고 착각을 하는 겁니다.

나라는 틀 속에 나를 가두는 사람이죠.
그러니까 더 많은 것을 가질 수가 없습니다.


집착을 하게 되면 무한한 어떤 가능성과 창의력 같은 것도 상실이 되어버립니다.
성적을 잘 받아야겠다라고 집착하는 사람은 성적을 더 잘 받을 수가 없게 되고

돈에 대한 집착을 과도하게 하는 사람은 돈을 더 많이 벌 수가 없게 되고,

사람에 대한 집착도 마찬가지죠.

어떤 사람을 내가 반듯이 사귀어야 되겠다 .
이런 집착을 가진 사람은 그 사람의 마음을 얻을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집착의 크기는 상대방을 두렵게 만들거든요.

마음이 멀어지게 만들 수 밖에 없거든요.
나를 사랑하는 사람은 내가 좋은데, 나를 집착하는 사람에게는 매력이 없어집니다.


물질도 다 마찬가지다. 이게 삶의 이치입니다.

모든게 내가 집착하는 것은 오히려 더 멀어지게 마련이다.
집착하지 않을 때 오히려 더 그것이 나에게로 더 올 수 가 있다.

그 이유가 집착하게 됐을 때 나라는 소아적인 자기 개념의 틀속에 갇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집착을 내려 놓게 되었을 때 나라는 틀. 나다 너다 하는 틀이 놓여지고 그랬을 때
무한한 가능성이 나에게 파도쳐 들어오는 겁니다. 더욱 큰 것이 우리에게 들어오죠.


또 네 번째는요.  이 또한 아주 제가 꼭 드리고 싶은 중요한 얘기인데요
뭐냐하면 내가 세상을 살아간다. 내가 잘 살겠다. 내가 뭔가를 해내겠다.

이런 내가라는 마음을 탁 내려 놓는 겁니다.
그럼  내가라는 마음을  내려놓으면 어떻게 되느냐?


어떻게 말로 표현해야할지는 모르겠지만 이것을 불성이라고도 하고 대아라고도하고,

참나라고도 하고, 본래면목 자성청정심이라고도 하고 무한한 이것이다라고도 할 수 있고

뭐라고 이름 할 수 없는 그 주인공 한 마음, 일심이라고도 할 수 있는

그러나 그것은 실체인 것은 아닌, 아트만과 같은 어떤 실체적인 것을 얘기 하는 것은 아니지만
어쨋든 부처가 부처가 될 수 있는 무한한 가능성.

우리가 부처가 될 수 있는 무한한 어떤 가능성에 그 한 마음이 있다는 것이죠.

뭐 있다 그래도 어긋나고 없다 그래도 어긋나겠지만

그렇게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그 자리가 있단 말입니다.

 

즉, 아까 우리는 나를 제한 했을 때는 요 정도 능력 밖에 없지만 

나를 제한하는 마음을 놓아 버렸을 때 무한한 능력과 창의성과 직관과 영감이

끊임없이 파도쳐 들어오는 것처럼 그러한 나라는 존재에 갇혔을 때 필 수 있는

나의 능력을 넘어서는 무한하게 확장할 수 있는 그 어떤 가능성이 나에게 있다는 말이죠.

쉽게 말해 불성이 있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어떻게 하면 써 먹을수 있느냐 .

우리가 나로서 살지 않고 불성과 주인공, 참나, 본래면목을 깨달아야지만,

그 자리에 탁 부합해야지만 그것을 써 먹는 것이 아니다. 어떻게 하면 되는가?
내 스스로 나라는 것을 내려 놓고 맡겨버리는 겁니다.

내 안에 있는 근원의 자리에 불성이든 한마음이든 주인공이든  그 자리에 내 맡기는 겁니다.

 

완전히 내 맡기고 사는 거에요. 내가 산다. 내가 잘나서 이렇게 돈을 벌었다.
그것도 아닙니다. 잘나도 내가 잘난게 아니고 못나도 내가 못난게 아니고

그냥 그 자리에서 하는 것이다.

난 이 생에  잠깐 이 껍데기 이 육신이라는 껍질을 백년도 안 되는 세월동안 잠깐 와서

이 생을 경험하고 가는 것에 불과합니다.


그런데 꿈을 꾸는 자에 불과한데 좋은 꿈을 꾼들 악몽을 꾼들 그게 뭐 그렇게 대단한 거 겠습니까?
좋은 꿈을 꾼다고 해서 내가 대단한 사람이라고 착각을 해서도 안돼고

나쁜 꿈을 꿨다고 해서 내가 별볼일 없는 사람이구나하고 나약해져도 안된다.

좋은 우월감도 다 부처님께 내 맡기고 열등감도 부처님께 탁 내 맡기고 나는 그저 지금 이 순간순간
미래에 대한 걱정도 내 맡기고 그 어떤 고민 근심 걱정할 필요가 없죠.


근심걱정 하는 것은 내가 있기 때문에 그래요. 나가 있기 때문에.

나라는 자아, 아상에 갇혀있기 때문에.
내가 있으면 거기서 두려움이 생기고 괴로움이 생긴다.

사실 나라는 존재가 할 수 있는게, 나라는 에고와 아상이 할 수 있는 것은 너무나 제한돼있죠.


뭐하나 제대로 아는게 사실은 잘 없습니다. 어떻게 분명히 아는 게 있다고 할 수 있겠어요.

우리는 다 안다고 생각하지만 이것처럼 어리석은 교만한 마음이 없죠,
불교에서는 하심하라고 하는 이유가 아는 게 없습니다. 사실은.


세계에 살아있는 3대 생불이라고 불렸던 달라이라마, 틱낫한, 우리나라의 숭산 큰 스님이 계시는데

숭산 큰 스님의 가르침은 오직 모를 뿐이라는 이 한 마디로 요약이 됩니다.

수행자들에게, 제자들에게 이 생을 사는 데 있어서 오직 모를 뿐이라는  마음으로 살아야지

안다고 생각하면 어긋난다.


우리가 아는 게 뭐가 있겠습니까?

하다못해 오늘 법회 끝나고 집에 갈 때 A라는 길로 가는 게 좋은지 B라는 길로 가는 게 좋은지

어디 들렸다 가는 게 좋은지 바로 집에 가는 게 좋은지를 알 수 있습니까?


우리는 알 수 없어요. 바로 A라는 길로 갔는데 그 길로 가다가

교통 사고가 날지 어찌 알 수 있겠습니까? 차라리 뒤로 돌아가는 게

나은 거 일 수도 있는데 그 사실을 알 수 없죠. 그냥 맡기고 가는 것이지.

내가 계산해서 머리 굴려서 갈 필요가 없다.


맡기고 가면 우주 법계가 알아서 나를 이끌고 간단 말입니다.

어떤 큰 중요한 결정 앞에 놓여있습니다. 내가 사업을 확장할 것인가 말아야 할 것인가

확장하는 게 좋은 지 안 하는 게 좋은 지 어찌 알겠습니까?

확장했다가 망할 수도 있고 안했다가 오히려 더 성공할 수도 있는데,

자식을 A라는 대학에 보내는 게 좋은지, B라는 대학에 보내는 것이 좋은지 알 수 없습니다. 우리는.


왜냐하면 저마다 자기의 다르마가 있기 때문에 그래요. 자기 삶의 길이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A라는 길만이 전적으로 옳은 것도 아니고 B라는 길이 틀린 것도 아니고 저마다 자신의 삶이 오는 겁니다.
자신에게는 자기의 삶이 오는 거에요.
그래서 자기답게 사는 것이 이 삶의 목적입니다.


자기답게 살아야 되는데 어디 정확한 옳은 정답이 있겠습니까? 

공무원이 옳다거나 대학교 졸업한 학생이 공무원 하는 게 옳다거나 아니면

사업을 시작하는 게 옳다거나 어떻게 양단의 결론을  내 줄 수가 있겠어요.
우리는 그 사소한 하나도 결론 내릴 수 없는 어리석은 존재입니다. 모르는 존재입니다.
오직 모를 뿐의 존재들이다.

 

그런데 안다고 생각하고 교만심을 필 수가 없다는 것이죠.
그래서 나는 모른다. 오직 모를 뿐 하고 나는 모르니까

부처님께 나라는 작은 소아는 아무 것도 알 수 없으니까 부처님께 내맡기고 가는 겁니다.

그런데 법화경에서 제법실상이라고 했단 말이죠.
지금 이 순간에 펼쳐지는 모든 법은 다 실상이다. 참된 모습이다.
그러니 모든 것을 내맡기고 그저 우리는 그 순간순간 사는 겁니다. 즉 한 순간순간 사는 겁니다.


초사리도 그 순간순간을 최선을 다해 사는 거에요.

내가 미래에 대한 걱정도 아상에서 오니까  내려 놓고 다 내맡기고 그냥 순간순간을 살면 됩니다.

배고플 때는 그냥 밥을 먹고 배 부르면 안먹고 맨날 하듯이 심심하다고 티비 켜고
스마트폰 보고 맨날 똑같은 삶만을 계속해서 반복할 것이 아니라

그냥 순간에 내가 어떤 것을 해야 될 것인지 내 근원에서, 내 마음에서

진정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귀를 기울이면서 살 필요가 있다.

그렇게 되면 과거나 미래에 대한 두려움이 없겠죠.

 

저는 일년 후에 어떻게 좀 안 좋은 일이 있으니까, 일년 후에 내가 다른 안 좋은 곳으로 가게 됩니다.

아니면  일 년 후에 내가 퇴사를 하게 됩니다.

내가 지금 부터 고민, 걱정해야 되지 않겠습니까? 
준비는 해야 되겠죠 . 필요할 때 마음을 내가 의도적으고 써서

내가 이것을 이렇게 저렇게 해야겠다고 생각을 할 때는 생각을 가져다 쓰는 것이 잠깐 가져다 쓰는 겁니다.

 

그런데 일년 후에 있을 그 두려움 때문에 일년 내내 두려움에 떨 필요는 없습니다.

어찌 알겠어요. 우리는 일년 후에 '내가 이렇게 됩니다. 안 좋아집니다.'라고 생각 하지만
아무도 알 수 없습니다. 일년 후에 좋아질지 안 좋아질지는.
더 좋아질 수 도 있단 말이죠 . 모든 가능성은 언제나 놓여있습니다.

내가 제한하지 않는다면 무한한 가능성이 내 앞에 있어요.

제한되고 고정된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그런데 내가 내 마음 안에서 나는 언제나 이 생에서 의식이 확장하겠다.

즉 삼귀의 부처라는 근원의 진리로 향해 가겠다.
즉, 점점 더 나는 깨달음을 얻어 가겠다라는 자기 중심만 있다면

깨달음으로 얻어가는 방식이 경험을 통해서 있지 않겠습니까?

다양한 경험을 통해서 우리는 깨달음 을 얻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무한한 다양한 경험을 내가 막진 않겠다.
그 가능성을 열어두겠다. 내 앞에 있는 나라는 존재가 할 수 있는 무한한 가능성에

내 마음을 열어 두겠다라는 마음만 가지고 있으면 우주 법계에서

더 놀라운 일들을 나에게 맡길 수도 있습니다. 내 스스로 제한하지 않으면.


'나는 요 정도 밖에 진급을 못 할 사람이야.' 라고 스스로 제한하는 사람에게는 방법이 없죠.
그러나 더 많은 어떤 방식이든 좋다. 이게 진급의 방식도 좋고 다른 일을 하는 방식도 좋고 그 무엇도 좋다.
하다못해 보살님들이 '왜 제가 오십 육십 칠십이 되었는데

그때 새롭게 영어나 제2외국어나 이렇게 새롭게 시작하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
무언가 새로운 것에 도전해 보고 공부해보고 이것도 아름다운 방법이지요.


제가 아는 어떤 장군분이 전역하면서 중국어를 공부 시작했다고 그랬잖아요? 
그래서  제가 저 분이 전역하면서 저 나이에 중국어를 새로 시작한다는 게 조금 의하했는데

몇 년 있다가 뵈었는데 중국분하고 자유자재로 대화를 나누고 계시는 걸 보고 깜짝 놀랐습니다.

이 시간동안 나는 이 나이에 뭐했나하고
여러분 보시기에 우스울 그런 생각을 나도 하고 있었는데 저 분은 저 연세에 시작해서
똑같이 몇 년 지났는데 저렇게 놀랍게 하고 계시는구나.


새로운 것을 시도하게 되면 노화도 안온다고 하죠. 뇌가 녹슬지 않는다 그럽니다.
뇌가 녹슨다는 관념이 있을 뿐이지 실제 뇌는 죽을 때 까지 성장한다고 그럽니다.
요즘 뇌과학에서 발힌 것입니다. 내 스스로 나는 이제 성장이 멈춘다.

깨달음이 멈춘다라고 가둬놓지만 않으면
나는 이 정도에서 더 나아갈 수 없다라고 가둬 놓지만 않으면 나는 늙었으니 어쩔 수 없다.

이런 생각으로 가둬놓지만 않으면 모든 것이 재생됩니다.

몸의 세포도, 뇌도. 칠십 팔십 되셔서도  히말라야 올라가는 분도 계십니다.
그 분에게만 가능한 것이 아니다.

 

우리가 집단적으로 전 지구적으로 인류 모든 사람의 공통된 의식에서
'한 백살 쯤 넘으면 누구나 죽어'라는 관념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인류의, 사람들의 나이도 그 정도로 제한 되고 있는 것이지. 그것을 깨게 되기 시작하면,

그 깨는 어떤 순간을 맞기 시작하면 전체적으로 이 인류가 갑자기 수명이 더 늘어날 수도 실제 있습니다.


어떤 큰 병이 있으신 분들, 예를 들어 불치병이라고 알려진 병이 있는데

그 병을 치유할 수 있는 놀라운 신물질이 개발했다라는 기사가 신문에 나기만 했을 뿐인데

전 세계적으로 그 병이, 실제 활용화 되지는 않았는데, 그 병이  기사만 났을 뿐인데

그 날짜부터 해서 전 세계적으로 그 병이 있는 사람들이 놀랍게 호전이 되기 시작했다라는 결과도 있습니다.


이것처럼 우리가 스스로 제한하기 때문에 우리는 나라는 작은 소아 속에 갇히는 것일 뿐입니다.
그러한 나를 확장할 때 나를 제한하는 모든 것들을 내려 놓을 때 보다 자연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보다 이웃 사람들과 나누고 베풀고 내 것에 대해서 집착하고 소유욕에 사로 잡혀 있지 않고,

나를 내려 놓고 모든 것을 부처님께 탁 내맡기고  삶을 살 때 그래서 근심 걱정없이

모든지 부처님께서 이끌어 가는 데 무슨 걱정이냐 하고 탁 내맡기고 살 때

우리가 얼마나 무한하게 확장하겠습니까?

 

그리고 이 모든 것이 가능하게 하는 마지막 한 가지 방법이 바로 명상을 하고

좌선을 하고 참선을 하고 수행을 하게 될 때

우리는 수행하고 있는 그 순간 나라는 것을 잊게 된단 말이죠.
무아라는 것을 느끼게 된다. 나라는 것을 탁 잊게 되는 순간을 직접 느끼고 체험하게 되면

그 순간에 나라는 것이 탁 내려놓아 진다.


전에 제가 말씀 드린 것처럼 이 사격 선수들이 사격을  할 때 10점 만점에 탁 하고 꽂히는 순간에 보면

언제나 명준 직전에 예외없이 두뇌가 번쩍 하는 순간이 있었다는 겁니다.

즉, 주파수가 뇌의 주파수가 알파파로 순간 탁 변했을 때는 어김없이
10점 만점을 맞었다는 거에요.

그야말로 알파파라는 자체가 모든 잡념이나 이런 것들을 완전히 탁 순간 놓여진

깊은 명상의 상태, 무아의 샹태 그런 겁니다.

 

또 음악가가 됐든 의사가 됐든 경영자나 조종사가 됐든 자신이 할 수있는

최고의 능력을 발휘하는 순간에는 언제나 마음이 턱 놓이는, 텅 비어버리는

나란 없다라는 잡념이 놓여지는 어떤 무아의 그런 순간을 탁 경험한다고 그래요.


노벨상 수상자의 90%는 꿈꾸는 상태였거나 혹은 명상하는 중에 놀라운 힌트와 영감을 얻어서

그 놀라운 노벨상이 될만한 것을 발견했다고 합니다.

생각으로 가능한 것이 아니다. 생각을 넘어서는 무아에 접촉했을 때 얻게되는

더 놀라운 것이 있다라는 것이죠.


이와 같이 우리는 내가 내 스스로 한정하고 제한하지 않는다면

우리 안에는 무한한 나를 확장 할 수 있는, 나를 제한된 공간 속에 가두지 않을 수 있는

무한한 자원들을 우리 안에 가지고 있다.

 

그것을 어디에서는 내면에 있다, 불성은 내 안에 있다  이렇게 얘기 하기도 하고
어디에서는 우주 법계에 가득히 있는데, 우리 뇌는 안테나와 같아서

우주 법계에 있는 무한한 자원을 언제든지 수신해서 쓸 수 있다.
이렇게 표현을 하기도 하는데  너와 내가 사실은 둘이 아닌 것이죠.

내 내면에 있다라는 거, 밖에 있다라는 게 둘이 아닌 얘깁니다.


자성불과 법신불은 둘이 아닌기 때문에. 안팎이 둘이 아니기 때문에 내 안에 있다라는 것이고

우주 법계 전체에 편만해 있다라는 것이고
나라는 존재가 바로 깊은 어떤 명상의 상태로서 우주 전체에 편만해 있고

과학에서도 나라는 존재가 진동을 할 때 진동이 끝나는 골에서 마루로 바뀌는

그 순간의 지점에서는 모든 진동은 우주법계 전체에 편만하다라는 것을 발견했답니다.


내 몸도 마음도 한 생각 일으킬 때 미국에도 가 있을 수도 있고 안드로메다에도 가 있을 수 있다.

우리는 본래 편만한 존재라는 얘깁니다.
편만한 순간이 우리에게는 언제나 있다라는 겁니다.
그래서 홀로그램이라는, 과학자 들이 뭐라고 얘기하느냐 하면 손톱의 때 속에 있는 진동을 읽을 수만 있다면

이것이 시간과 공간을 초월해서 편만하기 때문에 손톱 밑의 때 속에서 안드로메다에서

지금 무슨 일이 벌어지는 지를 알 수 있고
2500년 전에, 3000년 전에, 수만 년 전에 지구에서 어떤 일이 벌어졌는지도

알 수 있다라고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시공을 초월해 편만한 그런 존재이기 때문에. 일념즉시 무량겁이고 구세십세 호상즉이라고 하고
또 한 티끌 속에 전체를 머금었다고 하고 일즉일체 다즉일이라고 하는

법성게 가르침처럼 우리는 여기 안에 갇히는 이런 어떤 존재가 아니다라고

스스로 그렇게 굳게 믿고 있기만 해도 순간순간 그 능력을 발휘할 수가 있습니다.


하다못해 어떤 중요한 발표가 있다, 시험이 있다 할 때 그 직전에 내가 하는 게 아니다.

부처님께 탁 내맡기고 '그냥 알아서 하십시오' 하고 탁 내 맡겼을 때,

제가 이자리에 잠시 앉아서 좌선을 하고 이 자리를 올라오지 않습니까?
잠깐 앉아서 언제나처럼. 언젠가 부터 그런 습관이 생겼었는데 언제나처럼 잠시 앉아서

제 자신에게 그렇게 합니다. '저는 부처님 법을 알 수 없습니다.

부처님 법을 저는 어떻게 전하는지도 알 수 없고 다 알 수 없습니다.
부처님께서 내 안에 있는 근원에서 알아서 법을 전하십시오.

저를 빌어서 알아서 우주법계의 진리가 흘러 나오도록 저 자신을 허용합니다.

저 자신을 활짝 열어 놓습니다.'

 

그리 됐을 때 설법을 하고 나서 내려 왔는데 어느 날은 내가 내 머리속에서는

그런 생각이 한 번도 힌트를 얻어 본 적이 없던 것들을 이야기하고 내려오는 그런 때를 발견하거든요.

그건 제 머리속에서 나온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우리 머리속을 뛰어 넘을 수 있는 무한한 차원의 어떤 것들과

우리는 언제나 접촉할 수 있고 이것이 뭐 대단한 사람들이나 그런 게 아니고

누구나 일상적으로 수행자로 사는 것이 가능합니다.

 

그래서 여러분 자신을 지금까지 살아오던 삶의 습관, 삶의 방식, 나라는  존재,

여기에 가두어 두지 마시고 지금까지 가두어 놓았던 모든 것을 완전히 열어 놓고
나라는 존재를 활짝 열고 무한한 확장이 가능하게 나를 허용하시기 바라겠습니다.




반갑습니다.

지금 나눠드리는 종이들을 받아보시고 첫 번째, 두 번째, 세 번째 부분을 채워보시기 바랍니다.
밑에 세개는 안하셔도 되구요. 첫 번째, 두 번째, 세 번째를 한 번 적어보는 겁니다.
첫 번째는 지금 현재 내가 가지고 있는 문제점이나 또는 내가 해결하고 싶은 문제들이나

또는 불안한 부분이나 두렵거나, 고민하는 것들이 있다. 혹은 이걸 좀 해결했으면 좋겠다.
'아, 내가 좀 이것만 해결되면 내 생에 참 행복할 것 같다.

나를 가장 괴롭히는 문제는 바로 이 문제다.' 하는 것들을 첫 번째 네모난 박스에 간단하게 적어 보는 겁니다.

 

나를 괴롭히는 문제는 한두 가지, 세 가지다 하면, 세 가지 칸이 있으니까 세 가지를 다 적어도 좋습니다.
만약에 그런 문제점이나, 괴로움이나, 불안 이런 게 없다면 혹은 그것보다 더 크게

나를 지금 짓누르는 것들 보다도, 문제가 있거나 그런 것 보다도, 내가 원하는 게 있는데

그 원하는 걸 얻지 못하는 게 내가 힘들다. 난 이걸 너무 얻고 싶고 가지고 싶고 무엇 무엇이 되고 싶다.

이런 게 있다면 내가 되고 싶은, 내가 누구인지 무엇을 바라고 싶고, 무엇을 얻고 싶은 지를

한 번 적어보는 겁니다. 그것이 가장 중요하니까 그것을 한 번 적어보세요.
저한테 보여줄 수 있는 분이 계시면 앞으로 제출해 주시면 좋겠습니다.

 

네, 여러가지 문제들이 있는데요. 몇 가지를 한 번 보면서 이야기를 좀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제가 대충 읽어보니까 우선 서너 가지 있는 것 중에 하나를 가지고 말씀을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우선 자신이 괴롭다고 생각하고, 문제라고 생각하는 것 중에 하나가 이런 게 있습니다. 이것이 좀 많네요.
건강에 대한 두려움, 건강 염려증 같은 몸이 아파오고 이런 것들이 있다.
그리고 이것이 생길 때 '야 내가 이러다가 죽으면 안되는데. 우리 가족들 내가 잘못되면 어떻게 될까?'

이런 것들이 있고 하여간 다양한 고민들을 적어 주셨어요.

 

우리가 문제가 있을 때 문제에 대해서 어떻게 우리는 보통 여기느냐하면 예를 들어 건강이 염려가 된다.
내가 항상 불안하고 좀 몸이 아파질 거 같고, 나빠질 거 같고  몸에 병이 오면 어쩌지 이런 불안한 마음들.
우리는 아마 병 뿐만이 아닐 겁니다. 뭔가 정신적인 문제를 가지고 있거나

온갖 불안감 이런 것들이 계속 있기가 쉬운데요. 이런 게 나에게 있다면 보통 우리는

이것을 없애기 위해서 이 괴로움이 생길 때 주로 하는 행동들이 있습니다.

뭐냐하면 건강이 염려되는 마음이 일어난다. 일어나면 우선 그것을 모든 사람들은 받아들이지 않죠.

 

러다 보니까 여기서 벗어나려고 하거나, 건강을 걱정하는 마음에서 벗어나려고 하거나

아니면 극복하려고 하거나, 도망 치려고 하거나, 싸워서 이기려고 하는 방식을 택합니다.

그러니까 건강하려고 하는 반응으로써, 이를테면 많은 사람들이 먹는 것에 대해서

예민하게 가려 먹는다거나 건강 관련된 책자들을 사본다거나 매일같이 운동을 한다거나

몸에 좋다라고 하면 다 찾아서 한다거나 그러다보니까 때로는 운동을 해야 하는데

못하면 더 신경이 예민해 질 수도 있고 안좋은 음식을 먹고 싶은 욕망때문에 먹고 나면

막 스스로를 자책하면서 '너 또 스스로 정한 이 룰을 지키지도 못했구나.' 하면서

스스로를 막 혼내면서 이러기도 할 겁니다.

 

이렇게 극복하려는 어떤 방법을 취하는 거. 혹은 아예 도망치려고, 뭐 생각하지 않으려고

밀쳐내보고 한다거나 이러겠죠.
이것들은 주로 극복하는 방법을 쓰려고 하겠죠. 그런데 뭔가 건강이 걱정되는 마음이 올라왔다.

그러면 아주 중요한 것이, 모든 게 마찬가지입니다. 여기서 여러분들이 써준 모든 것들은

마찬가지로 우리는 어떤 방법을 쓰냐하면 그 고(苦)가 이거다라고 딱 정해졌으면

그 고에 대해서 우리가 쓰는 방식이 있습니다. 지금까지 쓰던 방식이 있어요.

 

그것은 언제나 둘 중에 하나입니다. 이것을 극복하려 하거나 회피하려 하거나,

즉 이것을 좋아하는 것에 대해서는 좋은 쪽으로 바꾸기 위해서 집착하고 욕망합니다.

혹은 이것이 더 나빠지면 안되는데 하고 두려워합니다.

그러니까 모든 경계는 좋아서 끌어당기거나 싫어서 내치거나 둘 중에 하나의 방식으로

우리는 언제나 마음을 쓰고 있고 행동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두 가지 방식 모두 공통점은 뭐냐하면 그 문제를 수용하지 않는다는 겁니다.

그 문제를 받아들이지 않는다는 거에요.  우리가 알아야 될 우리 부처님 가르침에서,

삶의 공부에서 가장 알아야 될 핵심이, 제가 누누히 말씀드리지만

또 불교에서 말하는 수행이라는 것의 핵심이 뭐냐하면 불교는 고, 집, 멸, 도 잖아요.

고라는 것을 밝혀 냈으면 고의 원인이 뭔지를 알고 그것을 소멸하는 겁니다.

그럼 핵심은 뭔가하면 고가 있을 때 이것을 고라고 생각해서 문제라고 생각해서

이것을 붙잡으려고 하거나, 없애려고 하거나 이 두 가지 극단으로 우리 마음이 옮아 가는 데

거기에 문제가 있습니다.

 

좋아하거나 싫어하거나, 좋아해서 너무 집착하려 하거나 싫어해서 밀쳐내려 하거나 거부하려 하는 것.
이것이 우리 모든 문제의 시작입니다. 그냥 그 문제가 있었을 때 문제라고 낙인 찍지 않고

그냥 처음에 나왔던 그 일 자체를 해석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받아들인다면 그것은 아무 문제가 되지 않아요.
그리고 문제가 왔다 하더라도 그 문제는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때 바로 해소가 되어버립니다.

우리가 잘못 알고 있는 것이 뭐냐하면 문제가 있을 때 그 문제를 해결하려면 엄청난 수행을 통해서,

아니면 어떤 병원 치료를 통해서, 아니면 심리치료를 수 회를 거쳐 가면서 해야지만

그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라고 여깁니다.


공짜는 없다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천 배를 백일 동안 하던가 염불이나 독경이나 수행을

치열하게 하던가 그것을 통해서만 그것을 해결할 수 있다라고 생각해요.
그것을 극복할 수 있다고 생각하죠. 왜냐하면 우리 자체가 어떤 하나의 문제가 생겼을 때

그 문제를 극복의 대상으로 보니까. 이게 모든 문제의 시작입니다.

 

부처님 말씀은 뭐냐하면 어떤 문제가 생긴 것은 그것은 극복해야 할 대상이 아닙니다.

그것은 우리가 수용해야 할 대상입니다. 왜 수용해야 할 대상이냐하면 그것 자체가 진리로써 온 것이기 때문에,
제법실상으르써, 그것 자체가 지금 이 순간 나에게 꼭 필요한 문제의 해결로써 온 것이기 때문에.
문제로써 온 것이 아니라 문제의 해결로써 온 겁니다. 그러니까 그 문제 자체가 이미 해결 그 자체이다.
문제 자체가 이미 답입니다. 이 말은 뭐냐하면 문제가 일어난 목적은, 그 일어난 그 자체를

온전히 일어난 것으로써 수용하고 받아들여서 그것과 함께 할 때, 이것이 답이구나,

진리구나라고 여기고 이것이아말로 나를 깨어나게 할 수 있는 가장 중요한 진리구나.

나에게 문제를 해결해 줄 수 있는 가장 큰 진리구나 하고 그것을 받아들일 때 그 문제가 해결된다.

 

그러니까 모든 문제는 문제가 아니라 실상으로써, 진리로써 온 겁니다.

우리가 번뇌 즉 보리라는 이야기를 경전에서 많이 하는데요. 번뇌가 나타났다.

그것은 번뇌이기 때문에 찾아온 것이 아니라 번뇌 즉 보리다.
번뇌가 즉 깨달음이다. 번뇌 그 자체가 답으로써 온 것이다 이 소리입니다.
번뇌로써 온 것이 아니고 망상으로써 나를 괴롭히기 위해서, 죽이기 위해서 찾아온 것이 아니고

그 번뇌 자체가 진리다. 그 말은 무엇이겠어요?

 

번뇌 그 자체를 거부할 때 번뇌는 게속됩니다. 여러분 모든 문제를 생각해보세요.

그 문제를 거부하려 하거나 회피하려 하거나 도망치려 하거나, 싸워 이기려고 할 때

그 문제는 해결되지 않습니다. 더 길게 지속 될 뿐입니다.
놀라운 것은 우리가 뭘 받아들이고 어떻게 받아들여야 되는지를 몰라서 그렇지

내가 받아들이겠다고 마음을 탁 돌이키면 그 자리에서 그때부터 문제 해결은 시작됩니다.

우리 생각은 엄청난 노력을 통해서만 깨달음을 얻고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고 착각하는데 그렇지가 않다.

모든 문제는 인식의 전화입니다. 마음만 바꾸면 그자리에서 해결이 되는 문제다.


대부분 그렇습니다. 마음만 바꾸면 해결이 돼버려요.

내가 어떤 욕심과 욕망이 있었는데 그 욕심과 욕망을 붙잡고 있는  순간은

그 문제는 해결되지 않지 않습니까? 그런데 이 것을 탁 내려놓음과 동시에 

거기에 대한 문제의 해결이 바로 그 자리에서 되지 않습니까?

그것과 똑같다. 마음만 바꾸면, 마음만 탁 돌이키면, 바꾸어 먹으면

그 자리에서 모든 문제는 풀려버립니다.

 

그런데 그 마음을 바꿀 때 우주 법계가 그 마음에 함께 응한다는 말이죠.

그러니까 내 마음만 풀리면 우주 법계의 상황 자체가 바뀌어 버립니다.

건강 염려증이 왔다. 건강 염려증이란 건 뭐냐하면 건강은 좋아해서 붙잡고 싶고,

건강은 욕망한다 말이에요. 건강에 대해서 집착하고 욕망한다는 말입니다.

병에 대해서는 싫어서 더 거부하려고 하고 밀쳐내려고 하고.
그러니까 건강 염려증이 문제라는 것이 무엇이냐 하면 건강은 집착해서 붙잡고 싶고

병은 밀쳐내서 버리고 싶어하는 마음입니다.

 

이것이 바로 문제인 겁니다. 건강은 집착해서 붙잡고 싶은 마음.

병은 밀쳐내고 싶은 마음 이것이 문제이지. 병 그 자체는 아무 문제가 아닙니다.

병이라는 것은 여러분을 괴롭히기 위해 찾아온 것이 아니라 여러분을 돕기 위해 찾아왔다.

병이라는 것은 나를 깨닫게 하기 위해 찾아왔고 나를 돕기 위해 찾아왔고

나를 온전하게 만들어 주기 위해서 찾아온 것입니다.

하다못해 병이 없으면 우리 몸에 쌓이고 쌓인 온갖 스트레스며 탁한 기운들이 병이 있기 때문에

병으로 인해서 풀려 나갈 수 있거든요.

 

한 번 앓고 일어나면, 툭툭 털고 일어나면 개운해지지 않습니까?

리고 우리 안에 업이 있든 뭔가 병으로 나온다라는 것은 아주 고마운 일이고

그 병으로써 치유되기 위해서 나온 거니까.

즉, 병이 오는 목적은 우리를 괴롭히기 위해서 오는 것이 아니라 병 자체로

우리를 치유하기 위해서 찾아오는 겁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 사실을 모르니까, 그 사실을 받아들이지 않으니까 병을 거부하려고 하는 겁니다.


병 그 자체는 진리이고 우리를 돕기 위한 저 넘어에서, 부처님 나라에서, 진리의 세계에서

우리를 돕기 위해서 무한한 자비심으로써 우리에게 보내준 선물과도 같은 것이다.

그 말은 뭐냐하면 그 병을 받아들이는 마음만 내면 그 병에서 벗어나기가 빨라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