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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도순서(아래에 법요집 있음) : 예불 – 반야심경 – 광명진언 – 참회게 - 이산혜연선사 발원문 – 불교경전 독송선집 – 참회진언 - 좌선 – 정근 - 축원

* 아래에 법요집을 옮겨놓았으니, 프린트하여 따라하셔도 되오며, ‘혼자하는 기도수행법’ 법요집을 구입하여 함께하셔도 됩니다. 다음카페에도 기도 법요집 파일이 있으니, 드래그하여 다운 받으실 수 있습니다.

* ‘혼자하는 기도수행법’ 구입 : http://www.yes24.com/Product/Goods/65...

[예불] 계향 정향 혜향 해탈향 해탈지견향 광명운대 주변법계 공양시방 무량불법승 헌향진언(獻香眞言) 『옴 바아라 도비야 훔』(3번) 지심귀명례 삼계도사 사생자부 시아본사 석가모니불 지심귀명례 시방삼세 제망찰해 상주일체 불타야중 지심귀명례 시방삼세 제망찰해 상주일체 달마야중 지심귀명례 대지문수사리보살 대행보현보살 대비관세음보살 대원본존 지장보살마하살 지심귀명례 영산당시 수불부촉 십대제자 십육성 오백성 독수성 내지 천이백제대아라한 무량자비성중 지심귀명례 서건동진 급아해동 역대전등 제대조사 천하종사 일체미진수 제대선지식 지심귀명례 시방삼세 제망찰해 상주일체 승가야중 유원무진삼보 대자대비 수아정례 명훈가피력 원공법계 제중생 자타일시성불도

[반야심경] 마하반야바라밀다심경 관자재보살 행심반야바라밀다시 조견오온개공 도일체고액 사리자 색불이공 공불이색 색즉시공 공즉시색 수상행식 역부여시 사리자 시제법공상 불생불멸 불구부정 부증불감 시고 공중무색 무수상행식 무안이비설신의 무색성향미촉법 무안계 내지 무의식계 무무명 역무무명진 내지 무노사 역무노사진 무고집멸도 무지역무득 이무소득고 보리살타 의반야바라밀다고 심무가애 무가애고 무유공포 원리전도몽상 구경열반 삼세제불 의반야바라밀다고 득아뇩다라삼먁삼보리 고지반야바라밀다 시대신주 시대명주 시무상주 시무등등주 능제일체고 진실불허 고설반야바라밀다주 즉설주왈 아제아제 바라아제 바라승아제 모지사바하 (3번)

[광명진언] 옴 아모가 바이로차나 마하무드라 마니 파드마 즈바라 프라바릍타야 훔(10번)

[참회게] 원멸 사생육도 법계유정 다겁생래제업장 아금참회계수례 원제죄장실소제 세세상행보살도(반배) 원멸 사생육도 법계유정 다겁생래제업장 아금참회계수례 살생중죄금일참회 투도중죄금일참회 사음중죄금일참회 망어중죄금일참회 기어중죄금일참회 양설중죄금일참회 악구중죄금일참회 탐애중죄금일참회 진애중죄금일참회 우치중죄금일참회 백겁적집죄 일념돈탕진 여화분고초 멸진무유여 아석소조제악업 개유무시탐진치 종신구의지소생 일체아금개참회 죄무자성종심기 심약멸시죄역망 죄망심멸양구공 시즉명위진참회 참회진언(懺悔眞言) 『 옴 살바 못자모지 사다야 사바하』(3번) 원제죄장실소제 세세상행보살도(반배) 원하건데 사생육도 일체모든 중생들이 다겁생에 지은죄업 소멸되기 바라오며 내가지금 머리숙여 지심으로 참회하니 원하건데 모든죄업 남김없이 소멸되어 세세생생 보살도를 행하고자 하나이다 원하건데 사생육도 일체모든 중생들이 다겁생에 지은죄업 소멸되기 바라오며 내가지금 머리숙여 지심으로 참회하니 살생으로 지은죄업 오늘모두 참회하고 도둑질한 죄업들도 오늘모두 참회하고 삿된음행 부정한죄 오늘모두 참회하고 거짓말한 망어죄도 오늘모두 참회하고 꾸며낸말 기어죄도 오늘모두 참회하고 이간질한 양설죄도 오늘모두 참회하고 험담해온 악구죄도 오늘모두 참회하고 탐욕으로 지은죄업 오늘모두 참회하고 화를내어 지은죄업 오늘모두 참회하고 어리석어 지은죄업 모두참회 하옵니다 백천만겁 쌓은죄업 한순간에 소멸되니 마른풀이 불에타듯 소멸되게 하옵소서 아득히먼 옛날부터 제가지은 모든죄업 크고작은 일체업장 탐진치로 말미암아 몸과입과 뜻을따라 무명으로 지었으니 제가이제 마음다해 지심참회 하옵니다 죄는본래 자성없어 마음따라 일어나니 죄의마음 사라지면 죄업또한 사라지고 죄와마음 모두멸해 두가지다 공해지면 이와같은 뉘우침을 진참회라 하나이다 참회진언(懺悔眞言) 『 옴 살바 못자모지 사다야 사바하』(3번) 이제저의 모든죄업 남김없이 소멸되고 지난세월 과거업장 장애들도 사라지며 마른풀이 불타듯이 한순간에 사라져서 티끌하나 남김없이 모두소멸 되었나니 청정해진 마음으로 새로웁게 태어나서 삼보님께 의지하고 마음공부 정진하여 세세생생 보살도를 행하고자 하나이다. 원하건데 모든공덕 법계두루 회향하니 일체중생 모두함께 본래면목 확인하고 자성불을 깨달아서 견성성불 하여지다 원이차공덕 보급어일체 願以此功德 普及於一切 아등여중생 당생극락국 我等與衆生 當生極樂國 동견무량수 개공성불도(반배) 同見無量壽 皆共成佛道

[이산혜연선사 발원문] 시방삼세 부처님과 팔만사천 큰법보와 보살성문 스님네께 지성귀의 하옵나니 자비하신 원력으로 굽어살펴 주옵소서 저희들이 참된성품 등지옵고 무명속에 뛰어들어 나고죽는 물결따라 빛과소리 물이들고 심술궂고 욕심내어 온갖번뇌 쌓았으며 보고듣고 맛봄으로 한량없는 죄를지어 잘못된길 갈팡질팡 생사고해 헤매면서 나와남을 집착하고 그른길만 찾아다녀 여러생에 지은업장 크고작은 많은허물 삼보전에 원력빌어 일심참회 하옵나니 바라건대 부처님이 이끄시고 보살님네 살피시어 고통바다 헤어나서 열반언덕 가사이다 이세상의 명과복은 길이길이 창성하고 오는세상 불법지혜 무럭무럭 자라나서 날적마다 좋은국토 밝은스승 만나오며 바른신심 굳게세워 아이로서 출가하여 귀와눈이 총명하고 말과뜻이 진실하며 세상일에 물안들고 맑은행실 닦고닦아 서리같은 엄한계율 털끝인들 어기리까 점~잖은 거동으로 모든생명 사랑하며 이내목숨 버리어도 지성으로 보호하리 삼재팔난 만나잖고 불법인연 갖추오며 반야지혜 드러나고 보살마음 견고하여 제불정법 잘배워서 대승진리 깨달은뒤 육바라밀 행을닦아 아승지겁 뛰어넘고 곳곳마다 설법으로 천겹만겹 의심끊고 마군중을 항복받고 삼보를 뵙사올제 시방제불 섬기는일 잠깐인들 쉬오리까 온갖법문 다배워서 모두통달 하옵거든 복과지혜 함께늘어 무량중생 제도하며 여섯가지 신통얻고 무생법인 이룬뒤에 관음보살 큰자비로 시방삼세 다니면서 보현보살 행원으로 많은중생 건지올제 여러가지 몸을나퉈 미묘법문 연설하고 지옥아귀 나쁜곳엔 광명놓고 신통보여 내모양을 보는이나 내이름을 듣는이는 보리마음 모두내어 윤회고를 벗어나되 화탕지옥 끓는물은 감로수로 변해지고 검수도산 날쎈칼날 연꽃으로 화하여서 고통받던 저중생들 극락세계 왕생하며 나는새와 기는짐승 원수맺고 빚진이들 갖은고통 벗어나서 좋은복락 누려지다 모진질병 돌적에는 약풀되어 치료하고 흉년드는 세상에는 쌀이되어 구제하되 여러중생 이로운일 한가진들 빼오리까 천겁만겁 내려오던 원수거나 친한이나 이세상의 권속들도 누구누구 할것없이 얽히었던 애정끊고 삼계고해 벗어나서 시방삼세 중생들이 모두성불 하여지다 허공끝이 있사온들 이내소원 다하리까 유정들도 무정들도 일체종지 이뤄지다 나무 석가모니불 나무 석가모니불 나무 시아본사 석가모니불

[불교경전 독송 선집] 

정구업진언 수리수리 마하수리 수수리 사바하(3)

오방내외안위제신진언 나무 사만다 못다남 옴 도로 도로 지미 사바하

개경게 무상심심미묘법 백천만겁난조우 아금문견득수지 원해여래진실의

개법장진언 옴 아라남 아라다(3)

 

대지는 깨끗한 것도 받아들이고 더러운 똥과 오줌도 받아들인다. 그러면서도 깨끗하다 더럽다는 분별이 없다. 수행하는 사람도 마음을 대지와 같이 해야 한다. 나쁜 것을 받거나 좋은 것을 받더라도 조금도 좋아하거나 싫어하는 분별을 내지 말고 오직 자비로써 중생을 대해야 한다.

증일아함경

 

좋은 도반, 좋은 선지식(善知識), 좋은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있다는 것은 수행의 전부를 완성한 것과 다르지 않다.

잡아함경

 

비구니들이여, 네 가지 법을 갖춘 훌륭한 제자는 진리의 흐름에 들어간 사람이며, 그는 더 이상 나쁜 곳에 떨어지지 않고 깨달음의 길로 결정되어 나아가게 된다. 무엇이 네 가지인가?

첫째 훌륭한 제자는 부처님에 대한 확고한 믿음을 가진다.

둘째, 훌륭한 제자는 가르침에 대해 확고한 믿음을 가진다. 가르침은 부처님에 의해 잘 설해졌고, 지금 현재 직접 볼 수 있는 것이고, 시간을 초월하며, 와서 보라고 할 만한 것이고, 유익한 것이고, 지혜로운 이들에 의해 직접 체득된 것이다.

셋째, 훌륭한 제자는 승가에 대한 확고한 믿음을 가진다. 부처님과 제자들의 모임인 승가는 훌륭한 길을 수행하며, 정진한 길을 걷고, 진리의 길을 가며, 합당한 길을 닦아 간다. 이러한 승가는 이 세상에서 그 어느 것과도 비교할 수 없는 공덕의 복밭이다.

넷째, 훌륭한 제자는 계행을 갖춘다. 이 계행은 훌륭한 이들이 칭찬하는 것으로써 깨어지지 않고, 흠 없고, 얼룩지지 않고, 자유로우며, 지혜로운 자에 의해 찬탄되며, 삼매로 이끄는 것이다.

상윳따 니까야

 

수행을 할 때 좋은 결과와 이익을 가져오도록 하는 한 가지가 있으니, 그것은 호흡을 있는 그대로 관찰하는 것이다. 어떻게 호흡을 있는 그대로 관찰할까?

숲이나, 나무 아래, 빈 집에 가서 가부좌를 하고 앉아 몸을 바로 세우고, 들어오고 나가는 호흡을 있는 그대로 관찰한다. 숨을 길게 들이쉴 때는 숨을 길게 들이쉰다고 알아차리고, 숨을 길게 내쉴 때는 숨을 길게 내쉰다고 알아차린다.

이와 같이 호흡에 대한 마음챙김을 발전시키고 연마하면 커다란 결과와 이익을 얻는다.

상윳따 니까야

 

소문으로 들었다고 해서, 대대로 전승되어져 내려온다고 해서, ‘그렇다 하더라라고 해서, 성전이나 경전에 쓰여 있다고 해서, 논리적이라고 해서, 추론에 의해서, 이유가 적절하다고 해서, 우리가 사색하여 얻은 견해와 일치한다고 해서, 유력한 사람이 한 말이라고 해서, 혹은 이 분은 우리 스승이기 때문에 그대로 따르지는 말라.

앙굿따라 니까야

 

그는 나를 욕하고 때렸다.

그는 나를 이기고 내 것을 빼앗았다.

이런 생각을 품는 사람에게 원한은 끝나지 않는다.

원한은 원한으로 갚을 때 결코 가셔지지 않는다.

원한은 자애에 의해서만 가져지나니

이것은 영원한 진리이다.

법구경

 

좋아하는 사람도 두지 말라.

싫어하는 사람도 두지 말라.

좋아하는 사람은 만나지 못해 괴롭고,

싫어하는 사람은 만나서 괴롭다.

법구경

 

내게는 업보가 닥치지 않겠지 하고

작은 악을 가볍게 여기지 말라.

방울물이 모여서 항아리를 채우나니

작은 악이 쌓여 큰 죄악이 된다.

내게는 업보가 오지 않겠지 하고

작은 선을 가볍게 여기지 말라.

방울물이 모여서 항아리를 채우나니

조금씩 쌓은 선이 큰 산을 이룬다.

법구경

 

지나간 과거에 매달리지도 말고,

아직 오지 않은 미래를 기다리지도 말라.

오직 현재의 한 생각만을 굳게 지켜보아라.

그리하여 지금 할 일을 다음으로 미루지 말고 다만 하라.

참되게 굳은 관찰로 현재를 살아가는 것,

그것이 순간순간을 살아가는 최선의 길이다.

법구경

 

만일 현명하고 잘 협조하며

행실이 올바르고 지혜로운 도반을 얻게 되면,

모든 어려움을 극복할 수 있으리니,

기쁜 마음으로 생각을 가다듬고 그와 함께 가라.

수행자는 참으로 도반 얻는 행복을 기린다.

자기보다 뛰어나거나

동등한 친구와는 가까이 지내야 한다.

그러나 만일 이러한 벗을 얻을 수 없으면

허물을 짓지 말고 무소의 뿔처럼 오직 혼자서 가라.

숫타니파타

 

온갖 점을 치는 일이나

해몽, 관상 보는 일을 완전히 버리고,

길흉화복의 판단을 버린 수행자는

세상에서 바르게 살아갈 것이다.

좋아하는 것이나 좋아하지 않는 것이나 다 버리고

아무것에도 집착하거나 매이지 않고

온갖 속박에서 벗어난다면,

그는 세상에서 바르게 살아갈 것이다.

숫타니파타

 

어떤 교리나 신조에 붙잡혀 있는 사람은

그것만이 최고라고 주장하면서

다른 견해는 열등하다고 헐뜯는다.

성자는 이것 아니면 안 된다는 극단적 견해가 없다.

그에게는 그 어떤 교리나 신조가 주는 위안이

더 이상 필요가 없으며,

그 어떤 교리나 신조에도 사로잡히지 않는다.

숫타니파타

 

자녀가 있는 이는 자녀로 인해 기뻐하고,

소를 가진 이는 소로 인해 기뻐한다.

사람들은 집착으로 기쁨을 삼는다.

그러니 집착할 것이 없는 사람은 기뻐할 것도 없다.

자녀가 있는 이는 자녀로 인해 근심하고,

소를 가진 이는 소 때문에 걱정한다.

사람들이 집착하는 것은 마침내 근심이 된다.

집착할 것 없는 사람은 근심할 것도 없다.

숫타니파타

 

태어나면서부터 천한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니며,

태어나면서부터 귀한 사람이 되는 것도 아니다.

그 사람의 행위에 의해서

천한 사람도 되고 귀한 사람도 되는 것이다.

숫타니파타

 

사람들은 흔히 깨끗하고 더러움에 차별을 둔다. 그러나 사물의 본성은 깨끗한 것도 더러운 것도 없다. 우리 마음이 집착하기 때문에 깨끗한 것을 가까이하고 더러운 것을 멀리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집착하는 마음, 편견을 떠나면 모든 존재는 깨끗하다.

반야경

 

세존이시여, 보살마하살이 어떻게 반야바라밀(般若波羅蜜)을 닦아야 합니까?”

일체의 정신적, 육체적인 것을 전부 공이라고 관하면 그것이 반야바라밀을 닦는 것이다.”

반야경

보적아, 만약 보살이 청정한 국토를 얻으려거든 먼저 그 마음을 청정히 가져야 한다. 그 마음이 청정하면 국토가 청정해지느니라.

유마경

 

사리불이여, 앉아 있다고 해서 좌선이라 하지는 않습니다. 무릇 좌선이란 삼계에 몸과 마음을 나타내지 않는 것입니다. 마음이 안에도 머물지 않고 밖에도 머물지 않는 것이 좌선입니다. 번뇌를 끊지 않고 열반에 드는 것이 좌선입니다.이처럼 좌선하는 사람이라야 부처님이 인가할 것입니다.

유마경

 

번뇌의 바다에 들어가지 않으면 일체지의 보물을 얻을 수 없다.

유마경

 

만약 사람들이 과거 현재 미래의 모든 부처를 알고자 하거든 마땅히 법계의 성품을 비추어 볼지니 일체 모든 것은 마음으로 지어졌음이라.

화엄경

 

마음은 화가와 같아서 능히 온갖 세간을 그려내나니 오온이 마음 따라 생기어서 만들어내지 못하는 법이 없네.

화엄경

 

오직 하나의 진실한 법계(一眞法界)가 있을 뿐이다.

화엄경

 

널리 일체 중생을 돌아보니 한 사람도 빠짐없이 부처님의 지혜덕상을 갖췄건만 다만 망상과 집착으로 인해서 증득하지 못할 뿐이다.

화엄경

 

처음 보리심을 낸 보살의 공덕은 삼세의 모든 부처님과 동등하니, 삼세 부처님 경지와 같고, 삼세 부처님 공덕과 같으며, 한 부처님 몸과 무한한 몸이 궁극적으로 같아, 진실한 지혜를 얻을 것이요, 처음 발심할 때 시방의 부처님께서 함께 칭찬하실 것이며, 내지 온갖 세계를 진동하고 성불하심을 나타내 보일 것이다.

화엄경

 

선남자여, 여래의 공덕은 시방에 계시는 일체 모든 부처님께서 셀 수 없는 겁()을 지내면서 계속하여 말씀하시더라도 다 말씀하지 못하느니라. 만약 이러한 공덕을 성취하고자 하거든 마땅히 열 가지 넓고 큰 행원(行願)을 닦아야 하나니 열 가지라 함은 무엇인가?

첫째는 예경제불원(禮敬諸佛願)이라, 모든 부처님께 예배하고 공경하는 것이요, 둘째는 칭찬여래원(稱讚如來願)이라, 모든 부처님을 칭찬 찬탄하는 것이며, 셋째는 광수공양원(廣修供養願)으로, 널리 공양하는 것이며, 넷째는 참회업장원(懺諸業障願)으로, 업장을 참회하는 것이고, 다섯째는 수희공덕원(隨喜功德願)으로, 남의 공덕을 따라 기뻐해 주는 것이고, 여섯째는 청전법륜원(請轉法輪願)으로, 법을 설해주시기를 청하는 것이고, 일곱째는 청불주세원(請佛住世願)으로, 부처님께서 이 세상에 오래 머무시기를 청하는 것이고, 여덟째는 상수불학원(常隨佛學願)으로 부처님의 수행을 따라 배우고 실천하는 것이며,아홉째는 항순중생원(恒順衆生願)으로 항상 중생의 뜻에 따라 수순하는 것이고, 열 번째는 보개회향원(普皆廻向願)으로 지은 일체 모든 공덕을 일체 중생에게 회향하는 것이니라.

화엄경

 

내 것이라고 집착하는 마음이

갖가지 괴로움을 일으키는 근본이 된다.

온갖 것에 대해 취하려는 생각을 하지 않으면

훗날 마음이 편안하여 마침내 근심이 없어진다.

화엄경

 

사리불이여, 무엇을 부처님은 오직 일대사인연(一大事因緣)으로 세상에 출현한다고 하는 것인가?

부처님께서는 중생들로 하여금 부처님의 지견을 열어서() 청정함을 얻게 하고자 세상에 출현하시며, 중생들로 하여금 부처님의 지견을 보여주고자() 출현하시고, 중생들로 하여금 부처님의 지견을 깨닫게 하고자() 출현하시며,중생들로 하여금 부처님의 지견에 들어가게 하고자() 세상에 출현하신다. 사리불아 바로 이것 때문에 부처님께서는 일대사인연으로 세상에 나오신다.

법화경

 

눈앞에 보이는 일체 사물이 그대로 본래부터 열반의 모습이다. 불자가 삶 속에서 도를 실천하면 오는 세상에 부처를 이루리라.

법화경

 

어린이들이 소꿉장난으로 나뭇가지나 붓이나 손톱으로 불상을 그린다 해도 이 같은 공덕이 점차 쌓이고 큰 자비심이 갖추어져 결국 이들도 모두 성불하였으며, 보살이 되어 한량없는 중생을 제도하였느니라. 어떤 사람이 절을 한 번 하거나, 합장만 한 번 하거나, 불전에 공양하더라도 최상의 도를 이루고 일체 중생을 제도하게 되느니라. 또 어떤 사람이 산란한 마음으로라도 탑에 들어가서나무불(南無佛)’하고 염불 하더라도 모두 다 성불하였느니라. 부처님이 생존해 계실 때나 열반에 드신 뒤에라도 부처님의 법문을 들은 이들은 모두 다 이미 성불하였느니라.

법화경

 

너희는 삼계의 불난 집에 머무르기를 즐기지 말라. 쓰레기 같은 색성향미촉을 탐내지 말라. 만약 탐내고 사랑하는 마음을 내어 집착하면 그 불에 타고 말리라. 그러나 너희가 속히 삼계에서 나오면 마땅히 깨달음을 얻으리라. 내가 이제 너희를 위하여 이 일을 책임지고 보증하노라. 결코 헛되지 아니하리니, 너희는 다만 부지런히 공부하라.

법화경

 

비유컨대 비록 바닷물이라도 억겁의 세월 동안 퍼낸다면 그 안에 든 진귀한 보배를 얻을 수 있듯이, 만약 사람이 정진하여 도를 구하면 마땅히 원하는 결과를 얻고 말 것이니, 어떤 것이든 발원하면 성취된다.

무량수경

내가 설하는 진아(眞我)는 바로 불성이다. ‘란 곧 여래장이며, 일체 중생에게 불성이 있다는 것이 바로 참나다. 다만 이 참나는 많은 번뇌에 둘러싸여 있어 자신이 스스로 보지 못할 뿐이다. 마치 가난한 여인이 자기 집 창고에 황금보배가 있음을 알지 못하는 것과 같다.

열반경

 

일체 중생이 모두 불성이 있어 본래 부처인 것이나, 집착에 의하여 모든 속박과 번뇌를 받는다. 만일 한 생각 집착을 놓아버리고 본래부처 자리로 돌아갈 때,곧 모든 부처님과 똑같이 해탈하여 차별이 없게 된다.

열반경

 

선남자여, 깨달은 보살은 생사를 싫어하지도 않고, 열반을 좋아하지도 않으며,지계(持戒)하는 사람을 공경하지도 않지만 파계(破戒)하는 이를 싫어하지도 않는다. 오래 수행한 이를 존경하지도 않지만, 초심자를 가벼이 여기지도 않는다.모든 것이 이미 원만히 깨달아 있는 원각(圓覺)이기 때문이다. 중생은 본래 성불해 있는 것이요, 생사와 열반이 지난밤의 꿈과 같다.

원각경

 

아난아! 이 가깝고 먼데 있는 모든 물질의 성질이 비록 여러 가지로 다르지만 똑같이 너의 청정하게 보는 성품으로 볼 수 있는 것이니, 여러 가지 보이는 사물의 모양은 차별이 있을지언정 그것을 보는 성품은 다름이 없으니, 이 보는 성품의 오묘하고 밝음이 진실로 너의 참된 성품이니라.

능엄경

 

허망한 허깨비 같은 물질이 그 성품은 오묘한 깨달음의 본체이다. 이처럼 오온,육입, 십이처, 십팔계도 허망하게 생겼다 사라지는 것이지만, 본래는 여래장이어서 밝고 원만하고 참다운 성품이다.

능엄경

 

진실한 이치는 오직 마음뿐 경계는 없느니라. 대혜여, 만약 경계가 환과 같아 자기 마음에서 나타나는 것임을 알면 곧 삼계의 괴로움과 무지와 애욕의 업이 소멸한다. 여래장은 청정상이지만 객진번뇌에 오염되어 부정한 것이 때 묻은 옷 속에 있는 것과 같다.

능가경

 

중생은 어리석어 대상에 집착한다. 과거로부터 쌓아온 습기로 인해 모든 현상이 자기 마음에서 생겨난 것임을 알지 못한다. 의식의 본질을 바로 알아, 모든 현상이 자기 마음에서부터 생겨난 것임을 철저히 깨닫는다면 집착하는 주관과 집착되는 대상의 대립을 떠나 분별이 없는 세계에 이를 수 있다.

능가경

 

달을 가리켜 보이는데 달을 보지 않고 손가락을 보는 것과 같이, 경전의 문자를 볼 뿐 자신의 진실을 보려고 하지 않는다.

능가경

 

승만부인의 십대원은 다음과 같습니다.

첫째, 깨달을 때까지 계율을 범하지 않겠습니다. 둘째, 선배와 스승에게 교만하지 않고 공경하겠습니다. 셋째, 모든 중생에게 성내지 않겠습니다. 넷째, 타인을 질투하거나 소유물을 탐하지 않겠습니다. 다섯째, 마음과 물질에서 인색한 마음을 내지 않겠습니다. 여섯째, 나를 위해 재물 모으지 않고 중생 위해 쓰겠습니다. 일곱째, 중생을 위해 사섭법을 실천하겠습니다. 여덟째, 고독, 병자, 빈곤 등 고통 받는 중생을 구제하겠습니다. 아홉째, 범계자를 깨우치고 불법으로 인도하겠습니다. 열 번째, 불법 수지하여 잊지 않고 잘 간직하겠습니다.

승만부인의 세 가지 서원은 첫째, 중생이 안온하길 힘쓰고 정법(正法) 지혜 얻기를 발원, 둘째, 정법 지혜 얻어 중생 위해 법을 설하길 발원, 셋째, 정법을 섭수(攝受)하고 수호하며 지켜나가길 발원입니다.

하나의 큰 서원은 보살이 세운 수많은 서원은 곧 하나의 큰 대원에 속하는데,그것은 섭수정법(攝受正法)’입니다. 즉 정법을 온전히 받아들이는 일입니다. 이것이야말로 큰 서원입니다.”

승만경

 

불안(佛眼)으로 일체중생을 관찰하니 탐진치 삼독 등 온갖 번뇌에 빠져 있어도 여래의 지혜와 안목과 법신이 갖추어져 있다. 일체 중생의 몸이 비록 여러 고통스런 세계를 윤회하며 익힌 번뇌 속에 있어도 여래장은 언제나 오염되지 않는다. 부처의 덕상(德相)이 완전히 갖추어져 있어서 부처와 전혀 차이가 없다.

여래장경

 

원이차공덕 보급어일체 아등여중생 당생극락국

동견무량수 개공성불도

[참회진언] 옴 살바 못자모지 사다야 사바하 [좌선]

[관세음보살 정근] 나무보문시현 원력홍심 대자대비 구고구난 대성자모 관세음보살 ......(계속) 관세음보살멸업장진언 『옴 아로늑계 사바하』(3번) 구족신통력 광수지방편 시방제국토 무찰불현신 고아일심귀명정례

[축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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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법상

 

육군사관학교 화랑호국사
14년도 불교아카데미 '금강경과 명상수행' 강좌 수강생 모집

 

“금강경과 마음공부” 저자 법상스님 직강으로 실시됩니다!


■ 금강경 강좌 및 명상수행 실수(금강경 강좌 + 명상수행 실수)


 ❏ 일 시 : 2014.3.7.(금)∼7.4(금) 매주 금요일 오전 10:00~12:00
 ❏ 장 소 : 서울 노원구 공릉동 육군사관학교 화랑호국사
 ❏ 동참보시금(교재비) : 30,000원, 동참보시금은 입학 당일납부!
 ❏ 문의/전화접수 : 화랑호국사 02-972-7747, 이메일 접수 : buda1109@daum.net
 ❏ 접수는 전화나 이메일로 ‘이름, 핸드폰번호, 주소, 차량번호, 차종’만 알려주세요.
   (차종/차량번호 등은 육사 위병소 통과 시 필요하며 아카데미 수강생은 위병소 바로 통과됨)
 ❏ 시간일정 : 10:00~10:30 : 명상 강의 및 실수, 10:40~12:00 : 금강경 강의

 

▣ 불교아카데미 강사 약력 : 법상스님

 

  

 

조계종 원로의원 불심도문 큰스님 은사로 출가,

동국대 및 동 대학원 졸업,

목탁소리(www.moktaksori.kr) 지도법사,

『생활수행이야기』『날마다 해피엔딩』『금강경과 마음공부』등 10여 권 저술,

‘05년 올해의 불서 『반야심경과 마음공부』 선정,

현 군승(軍僧)으로 육군사관학교 화랑호국사 주지,

목탁소리 불교아카데미 학장,

2014년 불교교리 책 '붓다수업' 출간

BBS 불교방송 '목탁소리 법상스님의 날마다 해피엔딩 문자서비스'

 

▣ 법상스님 강의 후기
❏ 온 몸으로 들었다. 2시간을 숨도 제대로 못 쉴 정도로, 집중하여 들은 강의. 이 강의는 온 몸의 세포
   들이 기억하고 있는 것이 틀림없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뭔지 모를 감동으로 차 있는걸 보면 [무애안]
❏ 아카데미가 횟수를 더 할수록 삶을 바라보는 관점이 완전히 바뀌어 행복의 확신이 듭니다.[뭉게구름]
❏ 이 좋은 강의를 많은이들이 들었으면하는 소망이 생겼다. 이런 강의 어디서 들을 수 있을까. [여래심]
❏ 스님 강의를 들으면 세상만사 온갖 시름이 일시에 확 걷히는 느낌입니다. [jikeunhye]
❏ 희유합니다. 감격스럽습니다. 환희심이 솟고 막연하던 가르침이 와 닿습니다. [죄많은중생]
❏ 공부하면 할수록 무한한 진리에 온 몸이 전율을 일으킵니다. 환희심에, 가슴 가득 충만함에 나도 모
   르게 기쁨의 눈물을 흘렸고 친구에게 달려가 이야기 해주기도 했습니다. [관음행]
❏ 스님 모시고 공부할 수 있는 것, ‘세상 어디에 이처럼 아름다운 순간이 있을까’ 싶습니다.  [원행선]
❏ 가르침에 날이 갈수록 붓다의 깨달음에 귀의 하고픈 마음이 절로 일어납니다. 살아 오면서 이 정도로
    저의 마음의 강한 울림이 있었던 적은 없었으니깐요. 아카데미를 다니면서 저의 인식에 많은 변화가
    일어나고 있다는 걸 느낍니다. [권효임]
❏ 내가 무슨 복이 많아서 이 시간, 이 자리에 있나 생각하면 매번 울컥합니다. "살다 보니 우리에게도
    이런 행운이 있구나"했습니다. [청송]

 

대한불교조계종 군종교구 육군사관학교 화랑호국사
서울시 노원구 공릉2동 사서함 77-1호 02-972-7747

 

 

법우님들, 설 명절은 잘 보내셨는지요.

이렇게 또 다시 새로운 한 해가 시작되고 있습니다.

 

하루하루 시간은 흐르고, 나이도 먹어가는데,

자신의 영적인 성숙과 깨달음 또한 나이만큼 깊어가고 있는지,

나의 삶은 하루가 다르게 더욱 행복해지고 풍요로와지고 있는지를

한번쯤 냉정하게 되돌아 보아야 할 것 같습니다.

 

이것은 삶에서 그 어떤 성취보다 더 중요한 일이고,

그 어떤 다른 일들 보다 우선적으로

스스로에게 던져야 할 질문이 아닌가 싶습니다.

 

만약 이 질문에 '그렇다'고 대답하기 어렵다면,

스스로의 내면적인 삶의 여정을 위한

지혜의 양식을 선물해 주는 것은 어떨까요?

 

여기 여러분들의 내적인 깨어남과 지혜의 완성,

그리고 실질적인 생활 속의 명상수행과

대승불교의 핵심 가르침이요

모든 불교 종단의 소의 경전을인 금강경을 통해

삶을 돌아보고 영적인 성장을 실천해 갈 수 있는

마음공부의 기회가 놓여 있습니다.

 

아무리 좋은 인연이 있더라도,

심지어 부처님께서 내 곁에 와 계신다고 할지라도,

인연을 스스로 선택해 맺지 않는 사람에게는

아무런 연연의 열매가 맺히지 않을 것입니다.

 

저 또한 2014년까지만 이 도량에 머물고,

내년에는 다른 곳으로 거처를 옮기게 되오니,

혹시 함께 공부하고자 마음내신 분이 계신다면,

불교아카데미 '금강경과 명상실수' 강좌를 권해 드립니다.

 

지난 한 해 불교아카데미에서는

불교입문과 역사, 교리와 사상, 문화와 예절 등을 비롯해

반야심경 과정까지 공부를 해왔습니다.

 

올 해 새롭게 개설될 '금강경과 명상수행' 강좌에서는

대승불교의 핵심요체이며,

모든 불교종단의 소의 경전이고,

불법의 가르침의 대의가 잘 나타나 있는

금강경을 통해 삶의 의미를 찾아갈 뿐 아니라,

금강경 강의에 앞서 30분씩

명상 수행을 배우고 직접 수행해 봄으로써

장기적으로 어떻게 수행해 나가야 하는지.

명상수행은 어떻게 실천하는 것인지에 대해

구체적으로 배워보고자 합니다.

 

사실 그동안 많은 사람들이

불교하면,

기도하고, 절하고, 염불하고, 독경하는 등의 실천을

불교의 전부라고 생각하기 쉬웠지만,

이런 모든 기도법들은 하나의 방편이었지,

결국에 우리가 돌아가야 할

근원적인 공부는

바로 명상이요, 수행이고, 참선인 것입니다.

 

그런데 많은 분들이

기도하는 방법은 대충 알겠는데,

명상 수행은 도대체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고 말하곤 합니다.

 

또한 불자들 가운데에서도

매일 명상과 참선을 실천하는 이들은,

염불이나 절, 독경을 실천하는 이들에 비해 매우 적은 실정입니다.

 

이에 이번 '금강경과 명상수행' 과정에서는

금강경 공부를 통해 삶을 어떻게 살아갈 것인지에 대한 지혜의 완성을 돕고,

명상실수를 통해 생활 속에서 직접 실천 가능한

명상수행의 방법을 배워 나갈 수 있도록 할 예정입니다.

 

10시~10시30분 : 명상수행 및 실습

10시30분~12시 : 금강경 강의

 

13년도에도 서울, 경기도 각지 뿐 아니라 

멀리 인천, 대전, 충북 등에서도 2~3시간에 걸리는 길을

매주 빠지지 않고 참석하며 공부하신 많은 분들이 계셨는데요,

시간을 억지로 내서라도,

이번 한 생을 살아가며 한번쯤 꼭 자기 자신을 위해 투자해 볼 가치가 있는,

아니 누구나 자기 자신의 삶 그 자체를 위해서라도

한번쯤 공부해 볼 필요가 있는 공부가 아닌가 생각됩니다.

 

작년에 공부를 하지 않으셨거나,

기초가 전혀 없으시고, 불교를 전혀 모르는 분이라도

전혀 상관 없이 누구든 참석하여 들으실 수 있습니다.

 

그럼 법우님들의 많은 참석을 바라오며,

아래에 내용을 참조하여,

접수 해 주시기 바랍니다.

 

동참금(교재비)은 일괄 첫째날 3월 7일

현장에서 받도록 하겠사오니,

일단은 인원을 220명에 한정해서 접수받고자 하오니,

접수를 먼저 해 주시기 바랍니다.

Posted by 법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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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보는가?
누가 말하고, 생각하고, 보고, 듣고, 맛보고, 행동하는가?

과연 이 '보는 놈'이 누군가?

볼 때는 보이지만,
보지 않을 때는 보이지 않는다.
고정된 성품을 가진 실체적 '보는 자'가 있다면,
마땅히 언제나 무언가를 보아야 할 것이다.
그러나 볼 때만 보이지,
보지 않을 때는 보이지 않은 채로 있다.

단지 볼 때만
'보는 자'가 있고,
'보여지는 대상'이 있을 뿐이다.
그렇다면 보지 않을 때
'보는 자'는 어디에 있으며,
'보여지는 대상'은 어디에 있는가?

본다는 인연따라
보여지는 것이 존재할 뿐,
본래 자리에서는
'보는 자'도 없고,
'보여지는 것'도 없으니.

다시 묻는다!

'보는 자'가 누구인가?
'행하는 자', '말하는 자', '생각하는 자'가 누구인가?
고정된 실체로써의 '생각하는 자'가 있었다면,
언제나 생각되어지는 것도 있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생각할 때만
생각하는 자가 있고,
생각의 대상이 있지 않은가.
그렇다면 생각하고 있지 않을 때
생각하는 자는 어디에 있는가?

온 곳도 없고,
간 곳도 없으며,
다만 인연 따라 잠시 잠깐
보고 듣고 냄새맡고 맛보고 접촉하며 생각할 뿐
'보는 자,
듣는 자,
냄새맡는 자,
맛보는 자,
접촉하는 자,
생각하는 자'는 없다.

이것이 바로,
무아의 소식!

'나'는 없다.
'보는 놈'은 없다.

인생을 살고 있지만
'사는 자'는 없다.

없지만
볼 때는 보고,
들을 때는 들으며,
생각할 때는 생각하는 그 자를 찾으라.

없으면서도 있고,
있으면서도 없는,
'보는 자'를 돌이켜 찾아 '보라'

이뭣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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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법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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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쉽게 오픈마인드라는 말을 듣곤 한다.
마음을 닫지 말고 활짝 열라고 한다.
그러면, 마음을 닫지 말고 활짝 열라는 것은 무슨 의미인가?
마음을 여는 것이 마음공부에 어떤 작용을 하는지 살펴보자.

문을 닫으면 어떤 일이 일어날까?
아무것도 문 안으로 들어 올 수가 없다.
다만 문 안의 주인이 선택적으로
받아들이고 싶은 것들만 문을 열고 받아들이는 것이다.

그러나 문을 활짝 열어 두고 있으면
내가 선택적으로 받아들이고 거부하는 것이 아니라,
그저 바깥의, 우주의 모든 것들이
자유로이 내 존재의 집 안으로 들어오고 나가게 된다.
그 모든 무한한 지혜와 사랑과 힘들이
자유로이 오고 갈 수 있는 것이다.

즉, 마음을 닫고 있다는 것은
아무것도 받아들이지 않는다는 말이 아니라,
내가 좋아하는 것만,
내게 이득되는 것만,
분별하고 판단하여
선택적으로 받아들인다는 것을 의미한다.

반면에 마음을 활짝 연다는 것은
그 어떤 분별도 일으키지 않고,
좋아하는 것을 애착하거나, 싫어하는 것을 거부하지도 않고
다만 있는 그대로 모든 것을 받아들이고
수용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문을 닫고 있을 때는
‘나’라는 아상과 에고가 중심이 되어,
문을 열 것인지 닫을 것인지를 결정한다.
나에게 도움이 되면 열고,
도움이 되지 않으면 닫으며,
내 입맛에 맞는 것, 내 견해와 일치하는 것은 열고
내 입맛에 안 맞거나, 내 생각과 다른 것은 닫는 것이다.

즉, 문을 닫고 있을 때는
아상에 갇히게 된다.
‘나’라는 아상과 에고가 세상을 살아가는 것이다.

그러나 문을 열고 있을 때
아상은 타파되고
내가 아닌 우주법계의 질서와 차원이
나를 이끌어 가는 것이 된다.

즉 문을 닫는 것은
아상이 나를 이끌고 가게 하는 것이고,
문을 열 때
비로소 온전한 ‘내맡김’이 이루어지는 것이다.

문을 열고
이 우주법계의 진실에 삶을 내맡길 때,
나는 전혀 힘들이지 않고
자연스러운 무위로써 살게 된다.

그 때 모든 지혜와 힘이
무한한 자비로써 나를 돕기 시작한다.
우주법계의 도움을 받는다는 것은
엄청난 속도로 깨어나게 됨을 의미한다.
아니 완전히 열었을 때
비로소 그 자리가 바로 삶의 완전성,
원만구족과 온전함이 깃드는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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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재는 본래 완전하고,
모든 것이 구족된 존재이고,
완전히 깨달아 있는 존재인데,
‘나’라는 아상과 이기가
문을 닫고 막아 섬으로써
그 완전성과 원만구족과 깨어남과 자비가
들어오지 못하게 막고 있었던 것이다.

그렇게
존재 근원의 깊은 차원의 질서에 내맡기지 못하고,
마음을 열지 못하고
평생을 살아오다,
문득 깨달아 문을 활짝 열게 되면
우주적 깨달음과 완전성이
허물어진 벽과 툭 트인 문을 통해
고스란히 들어오게 되는 것이다.

마음의 문을 닫으면
깨어남은 더뎌진다.
지혜도 자비도 내게 들어오지 못한다.

오직 있는 건,
아상 뿐!

아상만이 나를 집어 삼키고,
아상이 시키는 대로,
이기와 에고가 시키는 대로의 삶만을
반복적으로 살게 되는 것이다.

그런 삶은 전혀 새롭지 않다.
언제나 비슷한 패턴의 삶이 반복된다.
아상은 새로운 변화와 혁신을 싫어하고,
과거에 안주하며, 안정만을 쫓는다.

아상의 기준에서
문을 선택적으로 분별하여 열고 닫기 때문에,
언제나 비슷한 것만을 열어 받아들이는 것이다.

사람들 앞에 나서기 싫어하는 사람은
대중 앞에 나서는 결정은 죽어도 못 한다.
병이 나서 죽을 지경이 될지라도
병원과 현대의학만을 신봉하는 사람은
대체의학이나 명상과 기도를 통한 치유는
다분히 기복적이고 비과학적인 것이라 매도하며
전혀 마음을 열지 않는다.

어느 한 종교만을 절대적으로 옳다고 믿거나,
어느 한 집단, 사상, 이념, 가치만이 옳다고 믿는 이는
마음을 활짝 열고
자신과 다른 사상, 종교, 이념, 가치를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마음을 닫은 이에게는
계속적으로 똑같은 진부한 일상만이 반복될 뿐이다.
무언가 새로운 변화를 원한다고 하면서도
마음을 열지는 못하는 것이다.
당장에 마음만 열면
내가 원하는 그 모든 것이
언제든 들어 올 준비를 하고 문 밖에서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알지 못한다.

마음을 열고자 한다면,
먼저 내 마음 속에서 반복되는
좋고 싫다는, 옳고 그르다는, 맞고 틀리다는
분별과 차별심을 잘 관찰하고 내려 놓을 수 있어야 한다.

그런 두 가지 극단적인 분별이 있으면
좋고 옳고 맞는 것만을
선택적으로 받아들여 문을 열게 되고,
싫고 틀리고 그른 것은
문을 닫고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이다.

우리 삶에서는
좋은 것도 유효하고 싫은 것도 유효하다.
옳은 것과 그른 것이란
내 생각의 틀일 뿐 실체가 아니다.
역경 속에서도 배울 수 있고,
순경 속에서도 깨달을 수 있는 것이다.

그렇기에 역경과 순경을,
행복과 불행을,
맞고 틀리는 모든 것을,
그 양 쪽 모두를 향해
완전히 문을 열고 받아들일 수 있어야 한다.

이 말을 그저 우유부단하게
아무런 선택도 하지 않고,
모든 게 다 맞다고 여기면서,
바보가 되라는 말로 여겨선 안 된다.

분별하지 않고 받아들이는 것은
좋고 나쁜 선호 조차 버리라는 것은 아니다.
좋아할 수도 있고, 싫어할 수도 있지만
좋아해도 너무 집착하지 않고,
싫어해도 너무 증오하지 않으면서
그 두 가지 모두를 마음을 열고 받아들일 수 있다는 것이다.

그 두 가지의 경계 모두를 받아들여
그 양 변을 통해 깨달아 갈 수 있는 가능성을 닫지 말라는 것이다.
역경을 통해 부처를 이룰 수 있는 것이지,
순경계에서만 깨달음을 이룰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우리 삶은 순역의 좋고 나쁜 모든 경계가
균형 있게 조화를 이룸으로써
그 양 쪽 모두에서 영적인 진보, 깨달음을 맞이할 수 있어야 하는 것이다.

마음을 활짝 열고
우주법계가 나를 위해 준비해 둔
찬란하고도 눈부신 삶이라는 축제를 온전히 즐기라.
우주법계는 언제나 완벽하고도 충만한 지혜와 자비로써
당신의 삶을 조화롭게 균형 잡아 줄 것이다.

마음의 문을 닫음으로써,
선택적으로 좋은 것들만 받아들임으로써,
우주법계가 내게 무한히 공급해주고 있는
진리의 법비를 뿌리치지 말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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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신부처님께서는, 신성의 하느님과 성령은
언제나 무한한 지혜와 자비로써
우리를 완전한 진리에 도달하기 위한
나에게 딱 걸맞는
완벽한 인생의 시나리오와
삶의 교과과정을 언제나 준비해 두고 있다.

그것도 저마도 모든 사람들에게,
맞춤식으로 정확히 필요한 일들을 균형 있게 내보내 줌으로써,
자신의 삶에서 배워야 하고 깨달아야 할 바로 그것을
깨닫게 해 주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사람들의 삶이 다 똑같지 않고 다 다른 것이고,
또 같은 사람이라 할지라도
인생의 어느 때에는 잘 풀리며 행복해 하다가,
또 어떤 때에는 안 풀리며 괴로워지기도 하는 것이다.

그런 균형 있는 삶과 인생의 교육 과정을 통해
우리는 곧 깨달음의 바다로 나아가고 있는 것이다.
귀의(歸依)라는 구도의 과정을 걷고 있는 것이다.
본래 부처였고, 본래 진리였으며, 본래 청정한 수행자인
바로 그 본향인 자성의 귀의처로 향하고 있는 것이다.

귀의하는 것, 깨달음으로 나아가는 것이야말로
우리 모두가 지향해 가고 있는
삶의 방향이요, 인생의 목적인 것이다.

그리고 그 귀의의 숭고한 여정은
언제나 부처님의 가피, 신의 가호,
우주법계의 자비롭고도 완벽한 도움이
매 순간 함께 하고 있는 것이다.

바로 그 온전한 도움이 바로 인생이라는 수업이다.
저마다에게 딱 걸맞는 이 세상에서 오직 하나 밖에 없는
나 자신만을 위한 맞춤식 인생수업이
바로 나의 인생인 것이다.

그러니, 그것을 온전히 받아들임으로써,
모든 인생의 수업을 온전히 이수해야지,
내가 선택적으로 원하는 수업만을 들음으로써,
좋아하는 수업만 선별해서 들음으로써,
균형과 조화로운 영적 진보와
성스러운 귀의로 가는 구도의 길을
에둘러 멀고 먼 길로 돌아 갈 필요는 없지 않은가.

완전히 열고 받아들이면
수업의 진도는 급격히 빨라지고,
깨달음에로의 당도는 멀지 않지만,
마음을 닫고 선택적으로 받아들이면
지지부진하게 깨어남의 속도는 느려지는 것이다.

그 수업을 완전히 이수해야지만
다음 단계로 넘어갈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삶을 받아들이고 수용했을 때
괴로움도, 병도, 아픔도, 스트레스도, 역경도
빨리 소멸된다고 하는 것이다.

거부하고 두려워하며
받아들이지 않으려고 발버둥치면 칠수록
그 거부하던 것은 계속되고 지속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거부하면 거부하는 것이 계속된다.
결국 포기하고 받아들이게 될 때까지.

그러니 어떤가.
삶을 거부하지 말고,
마음을 활짝 열고
나에게 주어진 인생을 온전히 받아들이며
놀이하듯 즐기며 살아내라.

설사 그 인생의 길에
굴곡진 역경이 놓여질지라도
‘괴로운 삶’이라고 해석하고 판단함으로써,
그리고 그 괴로운 삶을 거부함으로써,
그 인생의 수업을 이수 못한 채
다음 생에까지 나머지 공부를 할 필요는 없지 않은가.

자살하는 사람이 바로 나머지공부의 대표적 사례다.
주어진 역경을 못 견디고 거부하고 저항한 나머지
자살을 선택하게 된다면,
그는 곧장 그 수업을 끝마치기 위해
그 역경을 다시 선택해서 삶을 부여받는 것이다.
이 생에 거부하고 저항하던 에너지를 듬뿍 양분으로 받아
다음 생에서는 지금보다 더 힘겨운 수업을 이수해야 하는 것이다.

마음을 활짝 열고,
주어진 삶을 받아들임으로써,
완벽하고도 아름다운 삶을
마음껏 누리고 느끼며
놀이하듯 가지고 놀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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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법상

 

삶을 획기적으로 변화시키고,

풍요로우며, 긍정적이고, 감사할 일로 넘쳐나는,

무엇보다도 무한한 사랑이 꽃피어나는

생활 속에서 실천 가능한 명상법이 있어 화재다.

 

불교의 기본적인 가르침으로 연기법이라는 것이 있다.
연기법이란 이 세상 모든 것이 서로 연결되어 있으며,
홀로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수많은 인연들이 화합함으로써
연하여 일어난다는 이 세상의 법칙을 말한다.

어떤 한 가지 일이 일어나더라도
그것은 홀로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이 우주법계의 장엄한 동참에 의해서 일어나는 것이다.

이른 봄에 피는 꽃 한 송이 조차
저홀로 피는 것이 아니라
이 우주법계의 일체 모든 존재가 참여하고 도운 것이다.

연기법의 관점에서 본다면
지금 우리 삶 위에 놓여 있는 일체 모든 존재며
존재가 만들어내는 상황들은
하나도 예외없이 우주법계의 도움을 받아
수많은 얽히고설킨 인연관계 속에서 일어나는 것이다.

나무에 초록의 새순이 돋아나는 것조차
그 나무 혼자서 초록을 틔우는 것이 아니라
흙과 물과 바람과 햇살과
나아가 일체 모든 존재가 크고 작은 연관관계 속에서
크고 작은 도움을 주었기 때문에
거기에서 그렇게 싹을 틔울 수 있었던 것이다.

우리가 먹는 쌀 한 톨 조차
그 안에는 무수히 많은 유정 무정의 일체 모든 존재들이
도왔고 참여했기에 가능한 것이다.

하물며 지금의 나라는 존재는 어떠한가?
내가 이렇게 먹고 자고 입고 살아가는 것,
그것 또한 내가 잘나서, 내가 돈 잘 벌어서
이렇게 잘 살고 있는 것이 아니다.

그 또한 조금 깊이 연기적으로 사유해보면
일체 모든 사람들과 하늘 바람 구름 햇살을 비롯한
이 우주법계 전체가 어머님의 품처럼 나를 돌보며
먹여 살리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어떤가.
우리는 과연 그러한 법계의 도움에 어떤 마음을 가져야 하겠는가?
우리는 지금까지 그러한 우주법계의 크고 작은 도움들을
아주 당연하게 생각해 오면서
오히려 더 많은 도움을 주지 않는데 대해
탓하고 미워하며 원망만 하고 살아오지는 않았는가?

그 일체 모든 존재의 무량한 베풂에
무한한 감사를 느끼며 살기 보다는
더 많이 주지 않음을 원망하며 살고 있는 것이
바로 우리가 살아가는 보편적인 모습이다.

그러나 이러한 연기법을 이해하는 이라면
마땅히 이러한 연기적인 우주의 도움을
매 순간 감사하며 고맙게 여기고 살아야 한다.
그러한 감사의 삶이야말로
우리가 우주의 은혜에, 법계의 도움에 보답하는 삶인 것이다.

이것이 바로
우리의 삶에서 ‘감사’가 중요한 이유다.

이러한 연기적인 ‘감사’의 실천은
생각하고 따져봐서 감사할만한 이유가 있을 때 감사하는 것이 아니라,
그냥 무조건적인 감사, 밑도 끝도 없이 대책 없는 감사를
온 우주에 펼쳐내야 하는 것이다.

우리의 생각은
이 우주의 드넓고도 깊은 차원의 전방위적인 도움을
도저히 다 헤아리고 알아차릴 수 없다.
어떻게 생각으로 그것을 다 보고 알 수 있겠는가.

그 우주법계의, 일체 모든 존재의 도움과 은혜는
우리가 생각할 수 있는 그것보다
상상할 수 없을 만큼 훨씬 더 넓고 깊다.
그것은 시작을 알 수 없는 영겁의 생과
전생에서의 업장과 인연들 전체를 아우르는,
시공을 초월하는 작용으로써 우리를 무한히 돕고 있으며,
우리를 살려주고 있다.

여기에서 우리가 반드시 짚어 보아야 할
아주 중요한 삶의 핵심 키워드가 있다.

 



이러한 무한히 살려주는 연기의 법칙이 우주 법계의 방식이라면
그 우주법계의 진리와 하나되는 길,
법계의 진리를 깨닫고, 우주의 힘을 끌어 쓸 수 있는
근원적인 힘이 바로
‘감사’에 있다는 것을 알아차리는 것이다.

내게 주어진 삶에 대해,
나라는 존재에 대해,
지금 나에게 갖추어진 상황과 조건에 대해,
완전히 받아들여 수용하고,
나아가 그 모든 것들에 대해
‘감사’의 에너지를 뿜어내고 방사하는 것,
그것이야말로
이 우주의 크나큰 도움에 보답하고
작게나마 회향할 수 있는 길인 것이다.

더구나 우주법계에서는 언제나 우리를 위해
모든 것을 내어주고 도와 줄 준비를 항상 마치고 있다.
언제든 우리가 그 도움을 요청하고,
그 은혜를 받아들일 준비만 되어 있다면
우주법계는 모든 것을 내어 준다.

그래서 우주법계는 언제나 우리를 돕는 일만 하며,
항상 우리를 돕고자 하는 자비로운 방식으로
우리에게 100% 힘을 실어주고 있다고 하는 것이다.

그러나 일반적인 사람들은 우주법계의 도움을
마땅히 뿌리친다.
뿌리칠뿐더러 우주법계의 도움에 대해
여전히 부족하다고 아쉬워하고 원망하며
심지어 증오하는 것도 서슴지 않는다.

그러면 어떻게 그 우주법계의 도움을 고스란히 받을 수 있는가?
먼저 첫째는 나를 열어놓아야 한다.
우주법계의 도움이 아무런 걸림 없이 나에게 도달할 수 있도록
나를 열어두고 허용해야 한다.
마음을 닫아두면 들어 올 수가 없다.
마음을 활짝 열고 모든 것을 받아들이고 수용하는 것이다.

그것만으로도 우주법계의 자비롭고도 밝은 힘은
나에게 와 닿으며 나를 변화시키고
내 주위를 변화시킨다.

그러나 여기 그 우주법계의 도움을
조금 더 적극적인 방식으로 받아들이고,
심지어 법계를 감동시키고 움직여
나에게 더 많은 도움이 올 수 있도록 하는 방법이 있다.

그것은 바로
끊임없이 ‘감사’하는 것이다.
감사한다는 것은
우주법계가 나를 돕고 있다는 사실을 완전히 받아들이고
나아가 그 사실에 대해 고마워한다는 뜻이다.
일체를 받아들이되 대 긍정으로 감사로써 받아들인다는 뜻이다.

지금 나에게 주어진 모든 상황에 대해
충분히 만족스러우며 충분히 감사하다는 뜻이다.
충분히 누리고 있으며, 충분히 느끼고 있다는 뜻이다.

바로 이것이
이 우주법계로 인해
더 많은 감사와 더 많은 도움을
우리에게 오게 만드는 핵심적인 에너지이고,
마음 하나로 세상의 주인이 되는 방식이며,
이 우주법계와 하나 되는 진리의 방식이다.

만족과 감사는
그냥 단순한 도덕적인 덕목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진리의 언어요, 참된 말 즉 진언(眞言)이다.

단순하다.
모든 것에 대해 감사하라.
만나는 모든 존재, 모든 사람, 모든 상황에 대해
감사한 마음을 느끼라.
그것이 어렵다면 그저 ‘감사’를 외치라.
그저 ‘감사합니다’ 하고 말하라.
이 세상 모든 존재를 향해
밑도 끝도 없는 무조건적인 감사를 외치라.

나 자신을 향해,
이 세상과 우주를 향해,
법신 부처님을 향해,
풀 한 포기와 나무 한 그루를 향해,
그리고 자동차와 집과 하늘과 구름과
읽고 있는 책과 신고 있는 신발과
버스 기사님, 청소부 아저씨,
심지어 미워하는 사람이나, 싫어하는 물건이나
원수처럼 증오하는 대상에게까지
무작정 대책 없는 ‘감사’를 외치라.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이것이 바로 붓다의 오랜 방식이며,
예수의 오랜 방식이기도 하고,
인류 모든 성인들의 방식이며,
호오포노포노를 비롯한 수많은 성인과 명상가와 영적인 교사들의
공통적인 방식이기도 하다.

보통 사람들은 절에 가거나 교회에 가면
‘부자 되게 해 주세요’
‘진급하게 해 주세요’
‘좋은 성적 나오게 해 주세요’
하며 비는 기도를 하곤 한다.

그러나 비는 것은 진리의 방식이 아니다.
빌게 되면 사실은 거꾸로를 연습하게 된다.
부자가 되게 해 달라는 말은
돌아켜 보면 가난과 결핍을 연습하는 말이다.
부자가 되게 해 달라고 비는 마음은 가만히 살펴보면
지금 현재 내가 가지고 있는 돈으로는 만족스럽지 못하다는 말이 아닌가.
그것은 결국 내 안에 가난과 결핍과 부족을 연습하게 되고,
우주법계는 내가 마음에서 연습한 것을 고스란히 보내주게 될 것이다.

그래서 모든 종교에서 말하는 기도의 참된 의미는
‘감사의 기도’에서 찾을 수 있는 것이다.
참된 기도는 비는 것이 아니라 감사하다고 외치는 것이다.
부족과 결핍에 집중하는 마음에서
감사와 만족에 집중하는 마음으로 전환시키는 것이야말로 참된 기도다.

평소에는 당연하게 생각했던 모든 상황을
당연하게 바라보지 말고 새롭게 감사한 상황으로 바꾸라.
모든 상황, 모든 사람, 모든 소유물, 모든 존재에게 감사하라.

내가 받고 있는 현재의 연봉과 월급에 대해 완전히 만족하며 감사를 느끼라.
내 남편, 내 아내, 내 자녀들에게 온전히 감사하라.
더 나은 조건의 직업, 더 나은 성적을 가져오는 자식,
더 나에게 잘 해주는 아내, 더 많은 돈을 벌어오는 남편을 바람으로써
결핍과 부족과 불만족에 에너지를 집중하지 말고
그 모든 상황이 내포하고 있는 긍정과 만족과 감사한 것들에 마음을 모으라.

우주는 항상 우리 마음이 만들어낸 것을 100% 가져다 준다.
일체유심조, 우리의 마음은 그림을 잘 그리는 능숙한 화가와도 같아
마음에서 그린 것은 분명히 현실로 나타나게 되어 있다.
그것이 우주의 창조원리다.

내 마음이 부족과 결핍에서 만족과 감사로 바뀌게 되면
내 마음의 그릇이 감사하고 만족스러운 것으로 바뀌니까
우주법계는 내 마음의 요구를 100% 들어주게 된다.
전에는 부족과 결핍을 가져다 주다가 감사할 일들로 삶을 수놓게 된다.

진언을 외듯이 ‘감사합니다’라는 말을
하루에 100번에서 1,000번 정도 반복해 외우라.
모든 상황에서 ‘감사합니다’라는 진언을
관세음보살 염불하듯, 아미타불 염불하듯 할 수 있는 모든 순간 외치라.
이 작은 외침이 우리 삶에 경이로운 변화를 가져다 줄 것이다.

아침에 잠자리에서 깨어나는 순간 ‘감사합니다’라고 말하라.
모든 상황에 ‘감사합니다’,
어떤 사람을 만나더라도 ‘감사합니다’
심지어 나를 욕하고 비난하는 사람에게도 ‘감사합니다’라고 말하라.
최악의 상황에 처하더라도 언제나 계산하거나 따지지 말고 ‘감사합니다’라고 말하라.
도저히 ‘감사합니다’라는 말이 나오지 않는 상황이나
증오하고 미워하는 원수에게도 ‘감사합니다’라고 말하라.

그래야 하는 이유가 있다.
우주법계는 항상 나를 돕기 위한 일만을 준비하고 있기 때문이다.
우주법계의 본질적인 에너지는 언제나 넘치는 자비와 사랑이다.
겉으로 보기에는 그것이 괴로운 상황이고, 꼬이는 상황이며,
답답하고 힘겨운 상황일지라도
법계에서는 나의 업장을 소멸시켜주기 위해서,
혹은 나를 조금 더 성숙시켜 주기 위해서 그 일을 벌인 것이다!
더 깊은 차원에서는 모든 상황이, 모든 최악의 조건이
나를 위해 법계에서 준비한 최상의 자비로운 상황으로 바뀐다.

아무리 힘들고 괴롭고 답답한 상황일지라도
사실은 우주가 그것을 통해 나를 돕기 위해 만들어 놓은
인생의 오묘한 장치인 것임을 완전히 대긍정으로 받아들이라.
그러한 대긍정의 받아들임의 표현이 바로 ‘감사합니다’ 라는 외침이다.

‘감사합니다’라고 계산하고 따지지도 말고 무조건적으로 외쳐야 하는 이유가
바로 이 우주의 근원적인 파장은 언제나 무한한 자비와 사랑이기 때문이다.
우리의 어리석은 생각이나 얕은 의식에서는 감지하지 못할지라도
우주법계는 언제나 우리를 넘치는 사랑과 자비로 이끌어 주고 있다.
바로 그 사실에 대해 감사하는 것이다.
이 정도면 감사할 이유로 충분하지 않은가!

 



여기에서 아주 중요한 또 하나의 배움이 있다.
감사해야 하는 이유가 바로 사랑과 자비라는 바탕이기 때문이라는 점이다.
모든 종교와 사상, 성자와 현자들의 가르침에서
사랑과 자비를 그 가르침의 근원적 원리로 이야기하지 않는 이들은 없다.
이 우주의 바탕, 깊은 차원의 근원을 이루는 에너지는
끊임없이 넘쳐흐르는 자비와 사랑의 에너지 파장에 있다.

그렇기에 우리가 이 우주의 근원적인 진리와 이치와 합일을 이루려면,
우주의 진리를 깨닫고자 한다면,
우주적인 삶의 방식과 조화를 이루고자 한다면
우리의 삶의 방식 또한 사랑과 자비를 실천하는 방식으로 바뀌어야 한다.

자비와 사랑이 넘쳐흐르는 삶,
그것이야말로 우리를 깨닫게 하고, 신에 이르게 하며
근원적인 차원과 연결해 주는 유일한 삶의 목적이다.

불교에서도 수행을 통해 해탈이라는 깨달음에 이르는 것을
그 목적으로 하고 있는데,
깨달아야 하는 이유가 바로
일체 중생을 자비로써 사랑으로써 구제해 주어야 하기 때문이다.
즉 깨달음이 먼저가 아니라 중생구제라는 동체대비가 먼저 있다.

금강경에서도 ‘어떻게 마음을 머물러야 하고 다스려야 합니까?’ 하는 질문에
‘존재하는 일체 모든 구류중생들을 열반에 이르게 하리라 하고
마음을 내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즉 일체 중생을 참된 행복과 평화인 열반으로 이끄는 것이야말로
우리가 수행을 하고, 마음을 다스리는 이유인 것이다.

결국 부처는 자비 그 자체이고, 신은 사랑 그 자체이다.
이 우주에는 오직 자비와 사랑 밖에 없는 것이다.
부처가 되고 싶다면, 신에게 가까이 가고 싶다면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오직 사랑과 자비를 나누는 것밖에 없다.
사랑을 연습하고, 자비심을 연습하는 것이야말로
삶에서 가장 중요한 핵심적 진리이다.

오랜 불교 경전인 『숫타니파타』에서도
이러한 자비의 중요성을 간파하여
자비심을 연습하는 수행법으로 자비관(慈悲觀)을 말하고 있다.

“수행자는 세상을 향해 이렇게 외쳐야 한다.
살아있는 모든 것은 다 행복하라. 평안하라. 안락하라.
어떤 생물일지라도, 강하거나 약하거나
가까이 있거나 멀리 있거나 태어났거나 앞으로 태어날 것이나
살아있는 모든 것은 다 행복하라. 평안하라. 안락하라.

남을 속여도 안 되고, 경멸해서도 안되며,
화를 내어 남에게 고통을 주어서도 안 된다.
마치 어머니가 목숨을 걸고 외아들을 지키듯이,
살아있는 모든 것에 대해서 한량없는 자비심을 발하라.

온 세계에 대해서 무한한 자비를 행하라.
위로 아래로 옆으로 장애도 원한도 적의도 없는 무한한 자비를 행하라.
서 있을 때나 길을 갈 때나 앉아 있을 때나 누워있을 때
잠들지 않는 한 이 자비심을 굳게 가져라.”

이것이 바로 자비와 사랑을 연습하는 오랜 방법이다.
이 세상 모든 존재를 향해 행복하라 안락하라 평안하라 하고 외치는 것이다.
세상을 향해, 모든 존재를 향해 자비심을 연습하는 것이다.
위로 아래로 옆으로 장애도 원한도 적의도 없는 무한한 자비를 연습하는 것이다.
온 세계를 향해 무한한 자비를 행하며
잠들지 않는 한 이 자비심을 굳게 지키는 것이다.

이 오랜 자비관을 삶 속에서 연습하고 실천하는
아주 쉬운 방법 중에 하나가 바로
‘사랑합니다’ 하고 외치는 것이다.

살아있는 모든 존재에게 ‘사랑합니다’ 하고 외치라.
어머니가 외아들을 바라보는 마음으로 온 우주를 향해 ‘사랑합니다’라고 외치라.
위로 아래로 옆으로 원한도 적의도 없는 무한한 사랑을 외치라.
잠들지 않고 깨어있는 한 이 사랑의 외침을 실천하라.

‘감사합니다’라고 외치는 것 처럼
‘사랑합니다’라고 외치면 된다.
모든 상황에, 모든 사람에게, 눈 뜨고 있는 모든 순간에
‘감사합니다’ ‘사랑합니다’라고 외쳐보라.

이 두 가지 단어야말로
이 우주의 진리를 우리 삶의 한복판으로 끌어당기는
특별한 에너지를 가진 참된 말, 진언(眞言)이다.

이 특별한 에너지를 가진 진리의 언어를
매일 매일 매 순간순간 염불하듯 독송해 나간다면
우리의 삶은 경이로운 변화를 시작하게 될 것이다.
감사할 일들이 넘쳐나고,
세상은 사랑으로 물들 것이다.

우주의 법칙에서 중요한 것은
보내는 것대로 받는다는 점에 있다.
나에게서 나가는 것을 고스란히 받는 업보의 원리다.

돈을 베풀면 돈을 얻게 되고,
병든 사람을 간호하면 건강을 얻게 되며,
나이든 분들을 공경하면 장수를 얻게 된다.
인색함을 내보내면 들어오는 것도 인색해지고
성냄과 다툼을 내보내면 싸울 일들이 줄을 선다.

마찬가지로
감사를 내보내면 감사할 일들이 넘쳐나고,
사랑을 내보내면 사랑할 일들이 많아진다.
감사와 사랑이 한없이 나를 향해 파도쳐 들어오는 삶을 상상해 보라.
그런 삶이 바로 정토고 극락이며 천상세계가 아니겠는가.

이 우주의 근원적인 진리의 에너지 파장을 담고 있는
핵심적인 언어인 ‘감사’와 ‘사랑’의 진언을
조금 더 수행과 연결지어 쉽게 실천할 수 있는 아름다운 방법이 있다.

그것은 바로 ‘호흡관’이다.
숨이 들어올 때 ‘감사합니다’ 하고 외치고,
숨이 나갈 때 ‘사랑합니다’ 하고 외치는 것이다.
이름하여 ‘감사와 사랑의 호흡관’이다.

호흡관이란 호흡이 들어오고 나가는 것을 관찰함으로써
마음을 호흡에 모아 집중하고 관찰하는 오랜 수행방법이다.
호흡을 관찰하는 이 수행법은
불교에서뿐 아니라 모든 명상법에서도
필수적이면서도 근원적인 수행법으로 잘 알려져 왔다.

들어오고 나가는 호흡을 알아차림으로써
온갖 망상과 번뇌를 비우고, 탐진치 삼독을 비우고
지금 이 순간이라는 현재에 깨어있는 수행법이다.

호흡은 오직 ‘지금 여기’에서의 일이며 과거나 미래의 일이 아니다.
호흡을 관찰함으로써 우리는 과거나 미래로 끊임없이 끄달리는 마음을 다스려
지금 이 순간이라는 본질로 통하는 통로와 연결될 수 있다.

호흡은 언제나 자연스럽게 우리 삶과 연결되어 있다.
살아있는 동안은 언제나 호흡과 함께 한다.
그렇듯 자연스럽게 삶과 연결되어 있는 호흡에
우리의 의식의 빛을 쏘아 줌으로써 의식적으로 호흡을 알아차리는 것이다.

바로 이 수천년을 이어 온 수행의 전통인 호흡관에
감사와 사랑의 진언을 연결시키는 수행법,
그것이 바로 ‘감사와 사랑의 호흡관’이다.

숨을 들이쉬면서 ‘감사합니다’ 라고 말하고,
숨을 내쉬면서 ‘사랑합니다’라고 말하는 것이다.
혹은 숨을 들이쉬면서 ‘감사’라고 짧게 말하고,
숨을 내쉬면서 ‘사랑’하고 짧게 말해도 좋다.

호흡이 들어올 때 ‘감사합니다’, 호흡이 나갈 때 ‘사랑합니다’라고 말하며
지금 이 순간의 호흡에 집중하여 관찰하는 것이다.
이렇게 호흡에 집중할 때 우리는 ‘지금 여기’에 온전히 존재한다.
과거나 미래로 혹은 생각이나 망상에 끄달리는 것에서 벗어나
지금 이 순간과 함께 연결된 호흡에 깨어있는 것이다.

‘지금 여기’라는 텅 빈 명상의 장에 머물면서
우주와 연결된 그 현재의 순간을 통해
감사와 사랑의 파장을 우주로 보내는 것이다.

나라는 존재는 언제나 우주 전체와 연결되어 있다.
그러나 평소에 우리는 우주와의 연결고리를 잃고 헤맨다.
평소에 끊어져 있던 바로 그 우주와의 소통을 연결해 주는
유일한 때가 바로 ‘지금 여기’라는 때이고,
그 현재라는 통로를 통해 우리는 우주 전체와 연결되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 우리는 ‘지금 여기’에 영민하게 깨어있어야 한다.
우리 삶에서 ‘지금 여기’를 반영해 주는 가장 투명한 것이 바로 호흡인 것이다.
우리는 호흡관찰을 통해 지금 여기라는 우주와의 연결고리와
조화로운 소통을 시작할 수 있는 것이다.

그렇게 텅 빈 마음으로 지금 여기의 호흡에 머물면서
감사와 사랑의 진언을 우주로 보내는 것이다.
그러면 무엇이 나에게 돌아오겠는가?
그것은 바로 우주법계의, 진리세계에서 보내주는
무한한 감사와 사랑의 창조 에너지이며,
그것을 통해 우리는 우주법계와 하나되는 차원에 연결되는 것이다.

감사와 사랑의 호흡관을 통해
우리는 ‘지금 여기’라는 명상의 장과 연결되고,
또한 감사와 사랑이라는 우주적인 아름다운 파장과 연결되는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근본법과 방편법을 아우르는 수행법이다.

본질적인 진리에 다다르는 수행법이자,
삶을 풍요로운 감사와 사랑의 에너지로 가득 차게 만드는
현상계와 본체계를 아우르는 수행법인 것이다.

숨을 들이쉬면서 ‘감사합니다’라고 외치라.
숨이 들어오면서 이 단순한 숨을 들이마시는 것조차
무한한 감사로써 들어온다고 느끼는 것이다.
숨을 내뱉을 때 ‘사랑합니다’라고 외치라.
숨이 들어왔다가 내 몸을 스치고 내 밖으로 나가면서
모든 존재를 향한 사랑으로 나가는 것이다.

단순한 공기, 호흡 한 자락 조차
나에게 들어올 때는 감사함으로 들어오고
나를 스쳐 나갈 때는 사랑으로 나가는 것이다.

이 호흡관을 통해 호흡만
감사함으로 들어오고 사랑으로 나가는 것이 아니라,
나아가 모든 것이 감사로 들어오고 사랑으로 나가도록 하는 것이다.

물질이든, 음식이든, 호흡이든, 말 한마디든, 행동이든, 생각이든,
그것들이 나에게 들어올 때는 ‘감사’한 마음으로 받아들이고,
내 존재와 함께 파도치고 흘러 나갈 때는 무한한 ‘사랑’으로 내보내는 것이다.

음식을 먹을 때도, 밥 한 공기 물 한 모금을 먹을 때도
그냥 먹는 것이 아니라 감사하게 받아들여 먹고
음식을 통해 힘과 에너지를 쌓은 뒤
그 힘으로 세상에 사랑과 자비의 일을 행함으로써 내보내는 것이다.

누군가가 나에게 한 마디 말을 하더라도
그 말을 받아들일 때는 좋은 말이든 나쁜 말이든
‘감사’한 마음으로 받아들이고,
다시 말이 나갈 때는 ‘사랑’스러운 말, 애어(愛語)로써 나가도록 하는 것이다.

이처럼 감사의 숨을 들이쉬는 의미는
나라는 존재에 흘러들어오는 모든 것은 ‘감사’하게 받아들이고,
사랑의 숨을 내뒤는 의미는
나라는 존재에서 나가는 모든 것은 ‘사랑’으로 흘러나가게 하는 상징을 담고 있다.

다시말해 내 삶에 등장하는, 내 삶에 나타나는 모든 상황, 조건, 사람 등
일체 모든 것들을 감사로써 받아들이고,
내가 이 세상에 내보내는 모든 행동, 말, 생각, 파장 등
일체 모든 것은 사랑을 내뿜고 자비를 방사하는 의미로 확장되는 것이다.

‘나에게 들어오는 모든 것은 감사로 받아들이고,
나에게서 나가는 모든 것은 사랑으로 나갑니다’ 하고 외치는 것이다.

이렇게 ‘감사와 사랑의 호흡관’을 10번만 해도 에너지가 바뀌는데,
하루에 10번씩 10번을 반복해 100번 이상을 실천한다면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경이롭게 에너지가 바뀌게 된다.

어떻게 생각해 보면 이 수행법이 아주 단순한 것 같은데,
우리의 내면세계는 아주 민감하기 때문에
이 사소하고 단순한 것 같은 수행법에
우리의 생각으로는 판단하기 어려운 신비로운 힘이 붙게 되는 것이다.

말은 그 자체로써 에너지를 가지고 있다.
그냥 헛소리처럼 지껄이는 말이라도 일정한 양의 파장이 형성된다.
『물은 답을 알고 있다』라는 책에서도
찌그러진 물의 결정에 ‘감사’와 ‘사랑’이라는 말을 외쳤을 때
순식간에 물의 결정이 얼마나 아름다워지는지를 밝히고 있다.
그야말로 가장 아름답게 바뀌는 언어가 바로 ‘감사’와 ‘사랑’이라는 단어라고 한다.

우리 몸이 70% 이상이 물로 이루어져 있으니
우리가 한 번 ‘감사합니다’ ‘사랑합니다’ 하고 외칠 때
그 몸의 모든 결정이 한꺼번에 아름답게 바뀔 것이고,
우리 몸을 구성하고 있는 모든 세포 하나하나가
싱그럽고 이상적인 세포로 바뀌게 될 것이다.

하루에 100번만 감사와 사랑의 호흡관을 실천해도
우리의 인생이 아름답게 바뀐다.
조금 민감하게 깨어서 지켜보는 사람은 직접적으로 느낄 것이다.
이 작은 실천으로 생각지도 못했던 기적같은 일이 벌어지기도 한다.

모든 상황에 ‘감사와 사랑의 호흡관’을 연결해 보라.
잠자리에서 깨어나는 순간 즉각 호흡을 관찰하며
들숨에 감사, 날숨에 사랑을 붙여보라.
세수를 하고 양치질을 하면서 옷을 입으면서도
감사와 사랑의 부드러운 호흡으로 깨어나라.
운전 중이나, 지하철 안에서도,
일하다가 잠시 짬나는 시간 동안에도,
언제나 의식적으로 호흡을 관찰하며 감사와 사랑을 연습하라.

버스를 기다리는 시간, 신호등에서 대기하는 시간,
커피를 뽑아 마시는 시간, 중요한 발표를 앞두고 두근거리는 순간,
앞 차가 끼어들기를 하는 순간, 누군가에게 욕을 얻어먹는 순간 등
이 수행을 통해 하루 중에 만날 수 있는 모든 시간을
수행의 순간, 명상의 순간, 삶에서 깨어나는 순간으로 바꿀 수 있다.

사실 우리가 생각하는 것처럼 수행이란 그리 거창하기만 한 것이 아니다.
몇 시간을 고통을 참아가며 좌선해야만 얻을 수 있는 것도 아니고,
3,000배나 1만배를 통해서 선정을 얻는 것도 아니다.
우리는 이 작은 감사와 사랑의 호흡을 통해
즉각적으로 직접적으로 삶 속에서 명상과 수행을 실천할 수 있다.

그리고 수행이란 사실 그런 것이다.
이처럼 삶 속에서 삶과 하나되는 것이다.
삶과 동떨어진 수행은 참된 수행이 아니다.
좌선하고 앉아 있을 때만 고요하고
일어나 다시 삶 속으로 들어갈 때 흩어진다면
그것을 어찌 참선이라고, 명상이라고 이름할 수 있겠는가.

하루 중 만날 수 있는 모든 상황에 대해 감사하라, 사랑하라.
원수같은 사람에게 도저히 감사한다, 사랑한다는 말을 못 하겠다면
내 안에 무언가 좋지 않은 업이 그 원수를 만나게 한 것이므로
내 안에 있는 바로 그 업에다 대고 감사와 사랑을 외치라.

괴롭고 답답하고 힘겨운 그 상황을 만들어 낸
내 안의 꽉 막힌 어떤 에너지를 향해
무한한 감사와 사랑의 부드러운 호흡을 보내주라.
그랬을 때 막힌 기운은 뚫리고, 거친 업은 눈 녹듯 활짝 녹아내리게 된다.

몸에 병이 있는 사람일지라도
그 병을 미워하고 바이러스를 죽여 없애려는 마음을 내지 말고,
그 대신 그 병과 바이러스를 향해
감사와 사랑의 따뜻한 호흡을 보내주라.

불교적인 방식은 암세포도 사랑하는 방식이고 자비로 감싸주는 방식이며
암세포 조차도 감사하게 받아들이는 방식이다.
내 업이 암세포라는 방식으로 밖으로 나와 줌으로써
업이 풀리고 소멸될 수 있는 절호의 기회가 왔구나 하고
고맙다고 받아들이고 사랑으로 감싸주는 방식이다.

암세포 또한 동체대비로써 나와 싸울 적이 아니라
사랑으로써 품어 주어야 할 세포인 것이다.
감사와 사랑의 힘을 호흡관을 통해 매 순간순간 암세포에게 보내줄 때
그 수행은 우주법계를 감동시키고 작동시킴으로써
작게는 내 안의 모든 세포들이 치유의 작업을 시작하도록 하고
넓게는 암을 치유할 수 있는 의사나 치유자를 보내주는 작업을 시작하기도 한다.

이처럼 명상적이고 수행자적인 방식은
세상 모든 것을 사랑으로 안아주는 방법이다.
심지어 암세포 일지라도 사랑으로 품어주고 안아줌으로써
우리 안에는 사랑의 기적이 일어나게 되는 것이다.

이처럼 모든 좋지 않은 상황, 경계, 대상은
미워하고 싸워서 이겼을 때는 잠시 꺽일 뿐이지만,
감사로 받아들이고 사랑으로 녹여냈을 때는
완전히 그 근원까지 녹아내려 치유가 된다.

이처럼 감사와 사랑의 호흡관은
온 우주의 근원과 연결되어 있는 나의 본연의 힘을 이끌어 내어
온 우주가 함께 나를 도와주는 작용을 시작하게 해 준다.
내 안의 모든 세포가 나를 위한 사랑의 도움을 시작할 뿐 아니라,
주변의 분위기, 일의 흐름 등을 바꿈으로써
우주 전체가 나를 돕는 일에 전체적으로 나서기 시작하는 것이다.

이 신비롭고도 경이로운
그러나 지극히 단순한 명상을 삶 속에서 실천하라.
당장 실천하지 못할 무슨 이유가 있겠는가.

매일 절이나 교회에 나가야 하는 것도 아니고,
가부좌를 틀고 몇 시간을 앉아야 하는 것도 아니며,
몇 시간씩 방석위에서 절을 해야 하는 것도 아니다.
무슨 준비물이 필요한 것도 아니고,
부작용이 있는 것도 아니며,
시간과 장소에 그 어떤 제약이 있는 것도 아니다.

그저 마음내어 지금 당장 시작할 수 있는
아름다운 수행법이다.

잠시 모든 것을 멈춰보라.
지금 당장 시작하라.

들어오는 숨을 지켜보며
‘감사합니다’
나가는 숨을 지켜보며
‘사랑합니다’

들숨에 감사
날숨에 사랑





Posted by 법상

고독과 침묵 속의 새벽길

 

드디어 오늘부터는 모든 고산에의 적응을 마쳤다고 보고

한없이 원 없이 오르는 날들이 남아있을 뿐이다.

안나푸르나도 다녀왔고,

물론 그 전에 인도 북부의 라다크, 판공초에서 5,000고지를 몇 번 넘어도 봤고,

또 이렇게 지금껏 일주일 동안 5,000고지 이상을 오르기 위한

느릿느릿 고산적응 산행을 계속 해 온 터다. 

 

이제 본격적으로 고도를 올리며

내가 가야 할 바로 그 곳들을 두 발로 휘적휘적 걸어올라 줄 차례다.

첫 새벽처럼 설레는 마음으로 이른 청신(淸晨)의 길을 나선다.

 

 

 

어제 출발하던 바로 그 언덕길을 걸어올라 이제 새로운 길로 들어선다.

어제처럼 오늘도 타보체피크, 촐라체, 아라캄체,

니제카 피크, 로부체피크 등의 봉우리들이

내가 가야 할 방향 앞으로 병암(屛巖)처럼

그 우뚝 선 백발의 봉우리들을 한껏 드높이며 장중하게 버티고 서 있다.

 

찬 새벽 공기를 가르며 겨울옷과 장갑, 모자까지

단단히 몸에 붙여 메고 새롭게 시작하는 마음으로

차분하고도 초엄한 솜씨로 한발 한발 나아간다.

 

눈앞에 보이는 모든 것은 이미 수목한계선을 넘은 지 오래라

초원이요, 벌판이며, 흙먼지길이거나 소설(素雪)의 해쓱해쓱한 설산이 전부다.

이런 낯선 황량함이 왠지 모르게 고향처럼 따뜻하게 느껴지기까지 한다.

 

 

이 웅려하고도 시린 풍경 앞에서

내 눈은 찬란히 부셔오고 감각은 새록새록 깨어나며

발걸음 하나조차, 멀리서 들려오는 새소리나

설산 너머 어디쯤에선가 들려오는 침묵이 무너지는 소리조차

다 들려오는 듯 민예하게 활짝 열려 있다.

 

 

‘이것이 정작 현실이란 말이냐.’

마치 꿈속을 거니는 듯,

아늑한 영겁 전에 이미 이 길을 뒤 뜰 처럼 거닐었던 듯

새로우면서도 익숙하고, 시리면서도 따스하며,

외로우면서도 꽉 차 있는 느낌!

철저한 고독감 속에 그러나 온 존재와 함께 하고 있는 듯한 이 느낌! 느낌!

 

이런 선연한 길 위를 내 존재를 이끌고 이렇듯 두 발로

그것도 아무도 없는 이 적막의 새벽길을 걸을 수 있다는 것 자체가

신비요, 경이에 가까운 체험이 아닌가.

 

걸으며 모든 생각을 잊는다.

모든 기억과 기대, 바람과 희망도 내가 알 바가 아니다.

과거와 미래 따위는 더 이상 입에 담을 흔적조차 없다.

모든 사고의 기초가 붕괴된 듯, 텅 빈 대지 위, 텅 빈 하늘 아래,

텅 빈 한 존재가 다만 미끄러지듯 나아가고 있을 뿐!

 

걷다보니 햇살이 발길을 비추고, 하나 둘씩 짐꾼들이 스쳐간다.

제 몸보다 더 크고 높고 무거운 짐을 이마에 짊어지고

몸을 최대한 앞으로 낮게 기울인 채 목에 힘을 딱 주고

시선은 오직 땅에 고정,

때때로 그 힘겨운 눈을 치켜뜨며 몇 미터 앞 길을 주시하며 묵묵히 나아간다.

 

 

 

 

그 노련한 시선과 여행자의 눈길이 마주칠 때

그들은 어김없이 미소 짓는다.

그 힘들고 고된 짐의 무게에 짓눌려 마음도 무거울 거라는 생각은

단지 여행자들의 상념에 지나지 않는다는 듯

이 설산에서 만난 대부분의 포터나 짐꾼들은

그 순수한 눈빛에 수줍은 미소를 품고 있다.

 

때때로 짐꾼들의 풍경은

이 히말라야 속의 또 다른 설산이요 산맥처럼

이미 이 풍경 속의 한 자락을 형성하는 또 다른 살아있는 자연 그 자체다.

 

 

 

검은 새들의 불규칙한 움직임처럼,

저 아무렇게나 흩뿌려진 고산 야생화들의 생명력처럼,

저 설산 주위로 붙었다 떨어지고 사라졌다 생겨나기를 반복하는

감감 도는 구름의 출몰처럼,

저들 셀파 족들의 걸음 걸음 속에는

또 다른 히말라야가 맥박처럼 흐르고 있다.

 

사람이면서 인위적이기를 거부하고

자연 그대로의 삶을 택한, 말하자면 자연주의자,

그러나 그것 또한 듣기 거북한 하나의 거추장스런 수식일 수밖에 없는

‘그저 거기, 그 사람들’의 이야기가 자연스럽게 펼쳐지는 곳,

그곳이 바로 히말라야다.

 

한 무리의 트레커들이 내려오고 있다.

안나푸르나에서는 줄로 홀로, 혹은 둘이서 오는 여행자들을

많이 만날 수 있었는데 반해

이 곳 에베레스트 지역에서는

주로 이처럼 팀을 이루어 찾아 오는 사람들이 많다.

 

 

 

 

4,800 고지를 흐르는 생명수

 

두사(Duda, 4503m) 마을을 지난다.

마을이라고 해야 집 두어 채가 전부인데다

그곳조차 지금은 사람이 살고 있기는 한 건지, 전혀 인기척이 없다.

아마도 그저 목장 주인이 때때로 야크를 데리고 풀 뜯으러 올 때나 잠시 들러

바람을 피해 차 한 잔을 마실 수 있는 정도의 공간이 아닐까 싶다.

 

 

 

그리고 두사에서 약 30분 쯤 더 걸으니

산산한 작은 계곡을 감돌아 토클라(Thokla, 일명 Dughla, 4620m)가 나온다.

 

 

토클라 또한 롯지 두세 곳이 모여 있는 작은 마을이다.

이를테면 딩보체나 페리체에서 로부체로 가기 위해

잠시 쉬어 차나 한 잔 마시고 가는 간이역인 셈이다.

 

 

 

토클라 롯지 앞 빈 의자에 잠시 앉는다.

몇몇 여행자와 포터, 그리고 짐꾼들이 야외 식당에 잠시 걸터앉아

풍연한 휴식을 취하고 있다.

 

 

 

롯지 뒤로는 바로 설산이 휘몰아쳐 있다.

바람에 펄럭이는 룽다 조차 잠시 쉬어가는 곳,

새들만 바삐 먹이를 찾느라 롯지 주변을 배회하고 있다.

 

 

너무 오래 지체할 수는 없다.

잠시 호흡을 고르며 배낭도 풀지 않고 잠시 쉬었다가

다시 출발!

이십 여 미터를 오르다

고개를 돌려 다시금 토글라를 바라본다.

 

 

이제부터는 다소 가파른 오르막 하나를 넘어야 한다.

숨을 고르고는 이제 다시 출발! 4,600 이상의 고도에서

오르막길을 오른다는 건 아무래도 호흡에 벅찬 일이다.

단숨에 200미터를 올라 4,800고지를 밟아주겠다던 야무진 계획이

호흡에서 턱턱 막힌다.

 

한두 걸음 걷고 잠시 멈춰 서서 호흡을 고르고,

몇 걸음 걷고 거친 숨을 헉헉거리며 쏟아내면서

느린, 아주 느린 발걸음을 꼬무작거리며 꾸준히 옮긴다.

우리나라 같았으면 그야말로 단숨에 뛰어 올랐을

평범한 언덕 정도인데 보는 것처럼 만만하진 않다.

 

 

 

포터 지텐은 벌써 저 멀리 달아났다.

지텐은 언제부턴가 출발하고 나면

으레 알아서 다음 코스에 먼저 가서 쉬면서 기다리고 있다.

고지로 올라갈수록 현지인들과의 호흡 차이가 금방 드러난다.

그야말로 체력 차이라기보다는 호흡 차이가 아닌가 싶다.

저들은 이 숨쉬기 힘든 고지에서 아주 헐하게 산을 오른다.

 

가파른 비탈길을 도드밟아 꼭대기에 올라서니

초르텐들이 줄지어 서 있고,

룽다가 여기저기에서 외로운 진혼곡을 부르듯 처연하게 흩날린다.

 

 

이들 초르텐은 이 쿰부지역 설봉을 오르다가 명을 달리 한

세계 각국의 히말라야 등반 대원들을 위한

추모와 명복을 비는 개개인의 무덤 내지는 묘탑이다.

 

 

 

 

 

 

잠시 숙연해진다.

내 마음만 숙연해 지는 것이 아니라

공기도, 룽다도, 바람도, 흙과 바위도,

이곳에서는 모든 것이 숙엄하게만 느껴진다.

 

로부체 방향으로 백여 미터 더 걸으니

장쾌한 시야가 터지며 또 다른 호장한 풍경을 빚어낸다.

 

 

 

좌우 설산을 배경으로 계곡이 흐르고

이제부터는 계곡 옆길을 따라 걷는다.

햇빛에 반짝이는 계곡물이 완전히 살아있는 그 어떤 생명력을 연출해 낸다.

 

 

흐르는 물을 바라보면 그 안에서 어떤 생명을 본다.

그것은 단순한 하나의 물이 아니라

무언가 모를 생동하는 깊은 존재의 숨결 같은 것을 포함하고 있다.

흐르는 물이 다 그렇지만 유독 이곳에서 만난 계곡물에서는

더없이 강렬한 생명의 연주를 감지한다.

어찌 안 그럴 수 있겠는가.

4,800고지 이 높은 곳을 흐르는 생명의 물이 아닌가.

 

나는 때때로 흐르는 물 앞에 서곤 한다.

그것을 보고 있노라면 내 안의 아주 내밀하고 깊은 무언가를 보는 것처럼

일상적이지 않은 그 어떤 새로운 박동이 느껴진다.

완전히 살아 생동하는 그 어떤 우주적 흐름과도 같은,

혹은 내 안에서 흐르고 있는 수대(水大)의 여린 움직임의 감각과도 같은.

 

천천히 걸음을 옮긴다.

 

 

 

히말라야의 맑고도 시린 호흡소리가 귓전에 들려오는 듯하다.

내 호흡과 히말라야의 호흡이 일치를 보는 듯,

이 생기어린 주변 환경과 걸음과 호흡이 마치 하나가 된 듯,

걷는다는 사실도 잊고 걷는다.

 

모든 것이 조화롭고 순화롭다.

유장한 침묵이 흐른다.

이 묵연한 선정을 따라 내 존재도

자연스레 본래의 커다란 침묵과 공명을 이룬다.

평소 같았으면 끊임없이 솟구쳐 오르며 머릿속을 복잡하게 했을

생각이라는 목소리들이 이 고요한 풍경 앞에 넋을 잃었는지

끼어 들 틈을 잃었다.

 

저 산 아래에서는 매일같이 내 존재를 복잡하게 휘어잡던 온갖 것들이

제자리를 찾고 질서를 찾아가는 듯하다.

모든 것이 있는 그대로다.

있어야 할 바로 그 자리에서 모두가 충분히 제 몫의 삶을 살아내고 있다.

 

나 또한 이 길 위를 걷고 있음으로써

내 몫의 삶을 표연히 살아내고 있는 것이 아닌가.

지금 이 순간 내 존재의 몫은 길 위를 그저 걷는 것에 있다.

그것이야말로 지금 여기에서 100% 순수하게 현존하는 것이다.

 

내가 그 어떤 엄청난 성취를 할 때나,

대단한 일을 이루어냈을 때보다도

그저 지금 이렇게 걷고 있음으로써

오히려 완전히 삶을 연소하고 있다는 생생한 존재감이 깃든다.

단순히 걷는다는 행위 속에서

이렇게 충장하고 꽉 찬 삶을 이루어 낼 수 있다는 것을 새삼스레 배운다.

 

우리 삶에 있어 정작 중요한 것은

‘어떤’ 행위를 하느냐보다

그 행위를 ‘어떻게’ 하느냐 하는 데 있지 않나 싶다.

 

행위 자체도 물론 중요하겠지만

아무리 성스러운 행위일지라도 그 행위 하는 자의 마음속에

삿된 생각이 끼어들어 있다면

그것은 먼저 우주에서 알고 그 행위를 성스러움에서 배제시키겠지만,

아무리 사소한 행위를 하고 있을지라도,

심지어 겉으로 보기에는 악행을 저지르는 것으로 보일지라도

그 행위자가 온전히 깨어있음으로써 그 행위를 하고 있다면

그것은 바로 모든 진리에서의 방식과 일치하는 것이다.

행위 자체보다 행위의 바탕을 이루는 마음의 의도가 중요한 것이다.

 

 

 

계획은 언제든 변경될 수 있다

 

물길을 따라 한두 시간 걸었나 싶더니

거짓말처럼 이 처연한 땅 위에 계곡 옆으로 작지만 빼어난 풍경의 마을,

로부체가 나타난다.

 

 

 

 

6,000미터 로부체 피크를 비롯해

7,000, 8,000미터의 거대한 지붕들을

마치 뒷산 거느리듯 연꽃처럼 옴팡진 곳 꽃술자리 한 가운데

로부체 마을이 꽃처럼 피어나 있다.

 

이 마을이 바로 오늘 하루를 신세질 곳인데,

서너 곳 있는 롯지는 이미 이른 아침에 다 차서 방이 없단다.

사정을 알고 봤더니 요즘 같은 성수기 빅시즌에는

단체 트레커들이 자신의 포터를 전날이나 당일 새벽부터 로부체 마을에 먼저 보내

방들을 전부 잡아 놓는다고 한다.

 

더구나 로부체는

에베레스트 베이스캠프와 칼라파타르를 오르기 위한

전진기지와 같은 곳이라

다양한 루트로 올라 온 사람들이

거의 전부 이곳에서는 꼭 하룻밤을 묵는 것이 상례로 되어 있다 보니

더욱 방 잡기가 힘든 곳이다.

 

그런 사정이다 보니 이 곳 로부체뿐만 아니라,

고락샵, 종라, 고쿄 등 정상 부근 사람들이 붐비는 전초기지로서의 마을들은

항상 방 잡는 일이 전쟁과도 같다고 한다.

 

 

 

 

마침 우리 지텐이 잠시 기다려 보라며 어딘가로 전화를 걸더니

로부체 위로 두세 시간 거리, 내일 하루 묵기로 계획된 고락샵에

마침 도미토리 침대 딱 한 자리가 남았다고 그곳이라도 가겠느냐고 묻는다.

 

그마저도 누가 고산병으로 부랴부랴 내려가는 바람에

조금 전에 취소된 자리라고 한다.

당연히 따지고 생각할 겨를 없이 고락샵에 가서 묵기로 한다.

 

조금 힘들긴 하겠지만,

어제 5,000고지의 낭카르창 피크를 다녀왔으니

고산 염려는 안 해도 될 거라는 지텐의 말을 듣고

조금 더 힘을 내기로 했다.

 

사실 고락샵까지 안 가고 오늘 하루 로부체에서 자고

내일 고락샵에서 자기로 계획한 이유는

거리가 멀거나, 힘들어서가 아니라 고산 적응을 위한 계획이었다.

 

지금부터의 높이에서는

고산병에 특별히 신경을 써야 한다는 것이 대부분 여행자들의 조언이다.

그래도 어쩌겠는가.

이렇게 된 바에야 모든 것을 하늘에 맡기고,

법계에 맡기고 그저 인연 따라 갈 수밖에.

 

어쩌면 이것이 더 깊은 차원의 나와 연결된 우주 법계의 지성이

나를 위해 준비한 본연의 계획이었을지 모른다.

언제나 나의 생각, 인간의 판단과 계획보다는

보이지 않는 더 깊은 차원의 세계에서

준비한 더 깊은 계획에 맡기고 산다는 것이야말로

내 삶의 중요한 방식이기도 하다.

 

그저 믿고 맡기며 자연스러운 우주의 이치대로 흐르는 것이다.

종교적으로 표현한다면

‘너의 일과를 하느님께 맡기라’고 했던 성경의 가르침이나,

‘부처님께 모든 것을 맡기라’ 혹은

‘아상을 버리고 집착을 버리라’는 가르침,

노자가 말했던 ‘무위자연’의 이치 또한 바로 그것이다.

 

내가 계획했던 모든 것은 어디까지나 잠재적인 가안(假案)의 계획일 뿐,

‘절대’ 바꿀 수 없는 계획은 없다.

언제든 그 계획은 바뀔 수 있다.

유연하고도 활짝 열려 있는 마음으로

미리 잡아 놓은 계획에 집착하지 않는다.

 

여행의 일정도 그렇고, 삶의 여정에서도 마찬가지다.

내일, 아니 당장에 다음 순간 벌어질 일에 대해

내가 무엇을 결정적으로 정할 수 있단 말인가.

‘이렇게 되어야만 한다’고,

‘혹은 이 계획대로 되야만 한다’고 고집하게 되면

그렇게 되지 않았을 때 괴롭다.

 

그러나 계획은 있되 그 계획에 집착하지 않고

자연스러운 이치에 나를 맡기다 보면 괴로울 일이 없다.

아니 오히려 내 앞에 펼쳐질 수많은 가능성에 대해

활짝 마음을 열어 둠으로써

전혀 새로운 차원의 삶과 마주할 투명한 기회를 만들 수 있다.

 

보통 ‘이렇게 되어야 한다’고 정해 놓으면 스스로 정한 그 틀에 갇혀

새로운 가능성으로 눈을 돌리지 못한 채,

그 틀 안에서의 비좁은 삶만을 반복적으로 되풀이하게 될 뿐이다.

 

그런 사람에게 삶은 진부하고 반복적인

그냥 그런 통속적인 것일 뿐이다.

그러나 어떤 정해진 방식에 자신을 가두지 않고,

내 앞에 펼쳐질 무궁무진한 가능성의 삶에 나를 활짝 열어두고,

그 어떤 것이 오더라도 다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는 사람에게는

매 순간 순간의 삶이 새롭고 창조적이며

나아가 영적인 차원과 접촉할 수 있는

깨어남의 세계로 발을 내딛는 것이기도 하다.

 

계획이 변경되었지만 그것은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는다.

혹시 고산병이 걸리더라도 그 또한 새로운 하나의 가능성이자,

새로운 체험의 하나로 받아들이려는 마음이 있다면,

그래서 최종적인 목적지의 하나였던

칼라파타르에 오르지 못하는 경우가 생길지라도

그리 좌절할 바는 아닌 것이다.

 

그것은 실패가 아니라 다른 방식으로의 성공이다.

사실 우리의 삶은 매 순간순간 성공만이 있을 뿐이지 실패란 없다.

더 깊이 들어간다면 실패도 성공도 없고

다만 우리 생각이 성공이라고 혹은 실패라고 해석하고 판단하는 것일 뿐이다.

 

판단과 해석을 놓아버리면

모든 것이 아름답고 모든 것이 성공적이다.

사실 모든 실패는 실패했다는 생각일 뿐이지 실패가 아니다.

 

이 고지대에서도

봄처럼

아름다운 노오란 꽃이

생명력을 뽐내고 있다.

[히말라야, 내가 작아지는 즐거움]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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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법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