육도 중 인간계만이 유일하게 깨달음을 얻을 수 있는 곳이다.

인간계에 태어났다는 것은 억 겁에 없을 소중한 기회를 얻은 것이다.

고작 돈, 명예, 권력을 얻으려고 애쓸 시간이 없다.

고를 벗어나 지혜를 배우고 성장하며, 깨달음에 이르는 것,

그것이 바로 당신이 지구별에 온 목적이다.

 

 

초기 경전에 보면 인간들이 천상세계에 살다가 내려오게 되었다는 이야기가 나온다. 인간계는 이 우주에서 아주 독특한 존재들이 살아가는 곳이다. 육도윤회의 세계 중 인간계만이 업을 적극적으로 지을 수 있고, 또한 수행을 통해 깨달음에 이를 수도 있는 곳이다.


그런 이유 때문에 고해(苦海)라고 불리는 고통스런 삶의 환경에도 불구하고 천상세계의 하늘 신들은 인간으로 태어나기를 희망한다고 한다. 천상세계의 즐거움만을 계속해서 누리다보면 그것도 지루해지는 것이다.


그러다보니 ‘정말 이것이 다일까?’, ‘무언가 또 다른 높은 삶의 길이 있지 않을까?’ 하고 의문을 품는 이들이 생긴다. 마음을 내는 자에게는 그 길이 보일 수밖에 없듯이, 그런 의문을 품은 이들에게 한줄기 희망적인 땅이 보이는 것이다. 그곳이 바로 지구별이라는 인간계다. 


인간계의 특징은 첫째는 괴로운 고해바다라는 점인데, 그것을 다 상쇄하고도 남을 또 하나의 특징이 있으니 그것이 바로 그 고통스러운 삶을 통해 지혜를 배우고 깨달아 갈 수 있다는 점이다. 인간계는 인토(忍土), 혹은 감인토(堪忍土)라고 하여 고통을 감내하고 참아내는 세계라는 뜻인데, 그렇다고 무조건 나쁜 곳이기만 한 곳은 아니다.


바로 그 고통의 목적, 참고 인내해야 하는 이유가 바로 그 고통을 통해 깨달음으로 나아갈 수 있기 때문이다. 쉽게 말해 아주 획기적으로 빠르게 공부의 진화가 일어나고, 깨달음에 이르는 공부의 진도가 빠른 곳이 인간계다. 


우리도 아프리카의 오지나, 네팔의 히말라야로 여행을 떠나곤 하지 않는가. 힘든 줄 뻔히 알면서도 그것을 통해 무언가를 배우고 깨닫기 위해 여행을 하는 것이다. 바로 천상세계의 신들이 인간계로 한 생 여행을 떠나오는 이유도 비슷하다.


천상세계에서 수백, 수천 년을 즐겁게 사는 것 보다, 차라리 인간계의 100년도 안 되는 짧은 시간동안 ‘고통을 통한 깨달음’을 얻을 수 있는 길을 택하는 천신들이 많아질 수밖에 없는 것이다. 


게다가 인간계의 100년이 도리천의 하루이고, 인간계의 1,600년이 타화자재천의 하루다. 천상의 신들이 보기에 인간계에서 100년 동안 고통을 받고 오더라도 타화자재천 신들에게는 한 시간도 안 되는 짧은 시간에 불과하다. 그러니 한 시간도 안 되는 짧은 시간의 고통이라는 여행을 통해 놀라운 깨달음을 얻을 수 있다면 인간계에 안 올 리가 없을 것이다.


그러나 희망한다고 다 올 수가 없다보니 인간계의 티켓을 번호표를 뽑아가며 수천 수 만년 이상을, 아니 수 억 겁을 기다리고 기다려 겨우 올 수 있는 영광스러운 가능성의 땅, 성장과 깨달음의 땅, 그곳이 바로 이 지구별인 것이다.


이것을 불경에서는 맹구우목(盲龜遇木), 인신난득(人身難得)이라고 하여 인간 몸을 받아 태어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를 설명하고 있다. 이토록 인간으로 태어나는 것이 어렵다.


그런데 우리 모두는 그 어려운 일을 이렇게 해 냈다! 그 수많은 경쟁률을 뚫고 오랜 기다림을 뚫고 드디어 이 땅에 왔다. 이 깨달음이라는 가능성이 현실이 되는 가슴 벅찬 희망의 땅 인간계에 드디어 도착한 것이다! 


왜 내려왔을까? 그냥 저냥 먹고 살려고, 혹은 남들과 경쟁에서 이기려고, 혹은 돈 많이 벌어 보려고 온 것이 아니다. 우리는 이 생로병사의 고통스런 삶을 통해 지혜를 배우고 깨닫기 위해 왔다. 인간계에서 깨달음과 지혜를 얻기 위해서는 고해라는 괴로움의 바다를 건너야 하는 것이다.


고통을 통해 깨달음에 이르는 길, 그것이 바로 우리가 인간계에 온 이유다. 고통스럽다고 신세를 한탄하고 있지는 않은가? 사는 것이 너무 힘겹다고 원망하고 있지는 않은가? 너무 원망하거나 비탄에 빠져 있지 말라. 바로 그것을 통해 배우고 깨닫고자 당신이 여기에 와 있는 것이다. 이 땅에 온 이유가 바로 고통을 통해 깨닫고자 하는 것이다.


주어진 삶의 고통을 받아들일 때, 그것을 통해 깨어날 수 있는 놀라운 기회가 동시에 주어져 있다. 그것은 고통처럼 보이는 놀라운 성장과 깨달음의 기회인 것이다. 그러니 이 100년도 안 되는, 타화자재천에서 보면 1시간도 안 되는 짧은 시간을 허망하게 낭비만 해서는 안 될 것이다. 아니 그럴 시간이 없다. 


고통 너머, 그 뒤뜨락에 담긴 삶의 의미를 살펴보라. 이 고통의 시간 속에서, 고를 넘어 삶의 배우며 성장하고, 깨달음에 이르는 것, 그것이야말로 당신이 이 지구별에 온 목적이다.

 

목탁소리 공식 홈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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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상스님 신간, '눈부신 오늘' 북티저 

 

 

 


눈부신 오늘

저자
법상 지음
출판사
마음의숲 | 2015-05-20 출간
카테고리
시/에세이
책소개
“화난 인생이 하는 말에 귀를 기울여보세요.”영원하지 않기에 소...
가격비교 글쓴이 평점  

 

 

 

 

"즐거움은 선업을 받는 것이니 좋고,

괴로움은 악업을 녹이는 것이니 좋다.

깊게 보면 언제나 좋은 일만이 일어난다.

 

우리 안에

지난 과거의 업장이

선업 50%, 악업 50%가 있다고 생각해 보자.

 

생각지 못한 행복한 일들이 계속 일어나고,

승승장구를 한다는 것은 과거에 지어 놓은 선업을 받고 있음을 의미한다.

 

선업이 50%에서 30%나 20%로 줄어들고 있다는 것이다.

반대로 괴로운 일이 생기고,

자꾸만 실패하는 것은 악업이 풀려나가고 있음을 뜻한다.

악업이 50%에서 30%나 20%로 줄어드는 것이다.

 

결국 즐거운 일은 선업이 줄어드는 것이고,

괴로운 일은 악업이 줄어드는 것이다.

 

즐거운 일이 생기면 선업이 줄어들기 때문에

결과적으로 내 안에는 선업 보다 악업이 더 많아질 것이니

즐거운 일보다 오히려 괴로운 일이 생기는 것을 환영할 일이다.

 

긍정적으로 본다면

즐거운 일이 생기면 선업을 받으니 좋고,

괴로운 일이 생기면 악업을 녹이니 더 좋은 일이다.

 

이처럼 우리 삶에는 언제나

‘좋은 일’ 아니면 ‘더 좋은 일’만 일어나고 있다.
날마다 해피엔딩 아닌가."

 

 

 

[숫타니파타]에서는 말한다.

 

“자녀가 있는 이는 자녀로 인해 기뻐하고,

소를 가진 이는 소로 인해 기뻐한다.

사람들은 집착으로 기쁨을 삼는다.

그러니 집착할 것이 없는 사람은 기뻐할 것도 없다...

 

자녀가 있는 이는 자녀로 인해 근심하고,

소를 가진 이는 소 때문에 걱정한다.

사람들이 집착하는 것은 마침내 근심이 된다.

집착할 것 없는 사람은 근심할 것도 없다.”

 

자녀가 있으면 자녀로 인해 기쁘고, 돈이 있으면 돈 때문에 기쁘고, 차가 있으면 차로 인해 기쁘다.

그러나 이 모든 소유에서 오는 기쁨은 항상 하지 않으며 근원적이지 않다. 언젠가 소유물은 없어지고 만다. 소유한 것이 소멸되었을 때 그에 따른 괴로움이 동반된다.

그러나 소유하더라도 소유에 대한 집착이 없을 때 그 때 참된 기쁨은 언제나 그 자리에 있다.

사람들이 집착하는 것은 우선 당장에 달콤할지 모르지만, 그것은 마침내 근심이 되고 만다.

집착으로써, 소유로써 행복을 찾고자 한다면 그것은 그 이면에 행복의 크기만 한 불행의 씨앗을 키우고 있는 것에 불과하다.

자식이 있으면 자식 때문에 기쁘지만 또한 자식으로 인해 괴롭고, 돈이 있으면 돈 때문에 기쁘지만 돈 때문에 괴롭기도 하다.

모든 소유의 기쁨은 곧 괴로움으로 바뀐다. 이것은 영원한 진리이다.

세상의 모든 집착을 놓으라. 소유하고 있으면서도 그 소유물에 집착하지 말라.

집착 없이 소유한다면 세상을 다 소유해도 상관없다. 언젠가 소멸되었을 때 마음에 아무런 파장이 없을 것이기에.

집착이 없으면 근심도 없다.

 

 

 

[법상스님의 날마다 해피엔딩]

"동물과 대화를 나누는 것으로 공인까지 받았다는

호주의 트리샤 맥카라는 분의 기사를 읽은 적이 있는데,

그녀의 말을 빌자면

‘인간은 원래 텔레파시 능력을 태어날 때부터 가지고 있었지만,

언어생활에 익숙해지면서 이 능력은 퇴화돼 버렸다’고 한다.

뿐만 아니라

『무탄트 메시지』에서도 참사람 부족 사람들은

‘인간은 본래 텔레파시로 의사소통을 하도록 창조되었다’고 말하며

실제 생활에서 자신의 마음을 감추지 않고 거짓을 없앰으로써

부족 사람들은 텔레파시로 의사소통을 자유로이 하는 장면이 소개되고 있기도 하다.

그뿐인가.

『물은 답을 알고 있다』나, 『식물의 정신세계』같은 책에서는

물이나 식물 또한 인간의 마음을

그대로 전달받고 영향을 받는다는 기록과 과학적인 증명을 담고 있다.

이처럼 사람들은 본래부터 사람들 서로 간 뿐만 아니라

동식물이나 자연의 무정물과도

미세한 마음의 공감과 대화를 텔레파시로써 나눌 수 있었다고 한다.

 

그렇게 마음을 나눌 수 있을 만큼

감성적인 예민한 감각이 발달되어 있었고,

자연 속에서 신의 소리, 진리의 소리를 들을 수 있을 만큼 순수하고 청명했다.

그러나 인류역사 속에서

어느 때부터인가 그 모든 능력을 상실하고 말았다.

그건 우리 스스로 작고 미세한 감각의 소중함을 버린 채

외부의 자극적이고 강렬한 것들에만 정신이 팔려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다시 마음을 돌이켜

정신을 내면의 미세한 느낌에 집중하고,

외부의 소박한 자연에 집중하며 관찰할 수 있다면

다시금 그 본래의 능력을 찾는 것은 당연한 일일 것이다.

나도 처음엔 수필가들이 얘기하는

눈 녹는 소리며 바람 스치는 소리,

낙엽 떨어지는 소리가 서걱이며 온산을 놀라게 한다는 그런 표현들을

그저 시적인 표현 정도로만 여겼다.

 

그런데 그동안 우리가 귀를 닫아 놓고 살아서 그렇지

가만히 귀 기울여 보면 정말 그 소리가 성성한 깨우침으로 귓전을 맑게 스치운다.

조용한 가을 낙엽이 떨어지면 뒷산 전체가 서걱이고,

산 속 나무 그늘에 덥석 누워있다 보면

바람 지나가는 소리가 사람들 지나가는 소리만큼이나 선명하게 들리고,

초봄의 산사에는 눈 녹는 소리가 꿈틀거리듯 세속에 찌든 귀를 맑게 씻어준다.

이러한 자연의 소리는 아주 작은 것이라 사소하게 여길지 모르지만

그건 결코 작은 소리에서 그치는 게 아니다.

그 소리를 듣는다는 것은

우리가 그런 작은 것도 느낄 수 있을 만큼 깨어있다는 말이기도 하고,

그만큼 내 마음이 맑게 비워져 있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법상 합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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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상스님의 날마다 해피엔딩]

가을입니다.
언젠가 가을 단풍을 하염 없이 바라보다 바라보다

성에 차지 않아 문득 지리산 종주길에 올랐었는데요,

그 때 적어 놓았던 지리산 여행기를 함께 나눕니다.

"[나는 왜 너가 아니고 나인가]에서

어느 인디언은 살다가 기가 달리면

울창한 숲으로 들어가 나무를 꼭 껴안으면서

나무의 기운을 받아들인다고 하지 않던가.

그렇게 끌어안고 있으면 난 포근함을 느낀다.

어릴 적 어머님 품에서나 느껴보았음직한 그런 포근함을

이 울울창창한 산속 한 그루 외로운 나무 곁에서 느끼는 것이다.

나무를 안아 본 사람은

이 말에 고개를 끄덕일 수 있으리라.

내가 나무를 안고 있을 때

나무는 아마도 한없는 행복감에 젖어들 것이다.

[식물의 정신세계]에서는

식물도 인간처럼 생각하고 느끼고 기뻐하고 슬퍼한다고 말하고 있다.

예쁘다는 말을 들은 난초는 더욱 아름답게 자라고,

볼품없다는 말을 들은 장미는 자학 끝에 시들어 버리며,

떡갈나무는 나무꾼이 다가가면 부들부들 떨고,

홍당무는 토끼가 나타나면 사색이 된다고 말하고 있다.

끌어안는다는 것은

사람에게 있어서나 자연에게 있어서나

얼마나 포근하고 따뜻한 일인가.

 

내가 산에 안기고 산은 또 내게 안기고

그랬을 때 우린 비로소 서로 서로 본래 자리로 돌아가려는

숭고한 귀의(歸依)의 의미를 느끼게 되는 것이리라.

이렇게 한 발 한 발 가을을 향해 걷고 있다 보니

시간의 흐름이 보인다.

아래쪽에는 푸르른 나무들이 울창하더니

얼마를 걷다보니 색색의 단풍들이 흐드러지고,

저기 노고단 위쪽엔 벌써 낙엽을 밟아야 할 만큼 늦가을이 와 있겠다.

 

내일 아침 일어나면 서리에 얼음도 얼겠지.
한발 한발 늦가을 아니 초겨울로 또 한 발 걸음을 옮기자..."

가을 단풍과 함께하는 지리산 종주 산행기 전문 사진과 함께 읽기
http://moktaksori.net/568

 

"아. 지리산이란!

한발 한발 걸을수록 그 아름다움에 목이 메여온다.

첫째날부터 와~ 하는 탄성을 자아내고

가슴 탁 트이는 지리산의 당당한 우뚝 섬을 바라보고는

설레는 아름다움을 충분히 느꼈다고 생각했었는데,

이 지리산이란 녀석은 한 발 한 발 내딛을수록

그 아름다움과 웅대함이란 점차적으로 끝도 없는 최고조를 향해 내달린다...

이렇게 촛대봉 돼지바위 위에 홀로 앉아

이 아름다운 자연과 내 속 뜰의 본래 향기가

내 생각이나 판단, 기억, 이미지, 과거를 거치지 않고

직접적인 대화를 나누고 있다...

이 순간,

우리는 아무런 판단을 하지 않아도 좋다.

그 어떤 과거의 기억을 애써 불러들여 비교하지 않아도 좋고,

어찌 어찌한 아름다움이라고 멋들어진 수식어를 생각하지 않아도 좋다.

그저 지금 있는 그대로

지금 이 느낌을 그대로 느끼고 하나가 되면 그것으로 충분하다...

이런 자연 속에 혼자 살면

내 안에 맑은 샘이 흐를 것 같다.

그저 혼자있음, 그 하나 만으로도,

우리 안의 영혼은 맑고 향기롭게 빛을 놓아줄 것이다.

 

다만 혼자있음의 외로움에 발버둥치며

이리 저리 휩쓸리지만 말고 다만 지켜볼 수 있기만 하다면...

별빛을,

저 산이며, 사소한 풀들,

그 속의 풀벌레 소리,

가을 낙옆 떨어지는 소리,

이런 작은 행복을 느낄 수 있는 사람은

세상에 몇 안되는 선택받은 사람일 것이다.

사실 우리가 느끼는 행복들 중에 으뜸은

‘나’만 느낄 수 있는 행복이 아니라,

언제 어디에서나 우리 모두가 누구나 느낄 수 있는 행복들이다.

돈, 명예, 권력, 지위, 학벌, 지식, 이성 등

뭐 이런 것들에서 오는 ‘나의 행복’들이 아니라,

별, 하늘, 달, 나무, 산, 풀벌레, 낙엽...

뭐 이런 항상 있어왔고,

언제까지나 그 자리에 충만하게 있는,

없어질 수도 없고, 애써 만들려고 애쓸 것도 없으며,

또 돈으로 살 수도 없고 또 살 필요도 없는,

이런 데서 오는 ‘우리 모두의 행복’이야말로 참행복이 아닐까.

그런데 문제는

이런 정말 행복한 것들에는 별 관심이 없고,

아주 사사롭고 척박한 가짜 행복에만 다들 목을 메고 사니 말이다.

이런 작은 행복을 느낄 수 있는 사람은

정말이지 세상에 몇 안되는 선택받은 사람들일 것 같다.

 

그 선택은 누가 하는가.

바로 내가 하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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