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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상스님의 목탁소리

상주 대원정사 일요법회(13:30), 부산 목탁소리 토요법회(13: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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괴로움의 원인과 아상 - 십이처(2)

육내처와 아상의 발생 앞서 설명한 바와 같이 안이비설신의 육근은 육경을 대상으로 인식한다. 그런데 육근이 청정할 때는 육경을 대상으로 왜곡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볼 수 있게 된다. 자기 식대로 해석하거나 판단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외부의 대상을 보기 때문에 안팎이 둘로 나뉘지도 않고 분별과 차별도 없으며 그렇기에 괴로움을 만들어내지 않는다. 상대방이 나에게 뚱뚱하다고 말할지라도 그저 뚱뚱한 것을 뚱뚱하다고 했구나 하고 분별없이 받아들이면 괴로울 것이 없다. 뚱뚱하다는 말 그 자체는 중립적이다. 살이 안 쪄서 괴로워하는 사람이 있다면 오히려 그 말은 듣기 좋은 칭찬처럼 들릴 것이고, 아프리카의 뚱뚱한 것이 미의 기준이라는 부족에서는 최고의 찬사가 될 수도 있다. 그러나 그 중립적인 말을 내 식대로 해석하여..

육근과 십이처의 이해 - 십이처(1)

육근과 십이처의 이해 앞에서 육근은 눈귀코혀몸뜻이라는 우리의 감각기관을 비롯한 감각기능, 감각활동이라고 했다. 우리는 육근을 통해 외부의 대상을 인식하여 받아들인다. 그런데 이렇게 우리 안의 감각기능인 육근을 통해 외부의 대상인 육경을 인식하다 보니, 내 안에 육근이 진짜로 있고, 내 밖에는 육경이 진짜로 있는 것 같은 착각을 가지게 된다. 내 안에 육근이 진짜로 있고, 내 밖에 육경이 진짜로 있는 것이 아니라, 다만 인연 따라 그 기능과 활동을 할 뿐이지만 우리는 그러한 감각활동을 하는 존재를 ‘나’로 그 감각의 대상을 ‘세계’로 나누어 분별하게 되는 것이다. 이 때, 육근이라는 인연 따라 생겨난 감각기능과 활동을 ‘나’라고 여기는 잘못된 착각을 육내입처 혹은 육내처라고 하고, 그 감각 대상을 ‘세계’..

육근청정의 빛나는 순간 - 육근과 육경(2)

부처의 육근과 중생의 육근 우리의 육근은 끊임없이 외부 경계에 따라 끄달리고 휘둘리곤 한다. 그러나 반드시 그래야만 하는 것일까? 언제가지고 외부 경계에 끄달리며 마음을 오염시켜야 하는 것일까? 외부 경계는 실체적으로 번뇌를 야기하는 티끌과 같아서 언제나 우리 마음을 오염시키는 것들일까? 그렇지 않다. 외부 경계에는 아무런 잘못이 없다. 아무런 문제도 없다. 언제나 여여하게 오고 갈 뿐이다. 있는 그대로 자연스럽게 오고 갈 뿐이다. 문제는 그러한 중립적인 현상에 대해 분별하고, 해석하며, 끄달리고, 오염되는 우리 마음에 있다. 겨울이 춥고, 여름이 더우며, 비 오는 날도 있고, 바람 부는 날도 있는 것은 자연스러운 자연의 이치일 뿐이다. 그러나 사람들은 겨울은 좋고 여름은 싫다거나, 반대로 겨울은 싫고 ..

경계에 끄달리지 말라 - 육근과 육경(1)

육근과 육경의 이해 일체법을 이해하는데 있어 가장 먼저 알아야 할 순서는 육근(六根)과 육경(六境)에 대한 이해이다. 보통 육근은 우리 몸의 여섯 가지 감각기관이고, 육경은 각각의 여섯 가지 감각기관에 대응하여 감각되어지는 외부의 감각대상이라고 알고 있다. 먼저 간단히 살펴보면, 육근은 눈, 귀, 코, 혀, 몸, 뜻으로 안이비설신의(眼耳鼻舌身意)이며, 육경은 그 대상인 색성향미촉법(色聲香味觸法)이다. 각각 여섯 가지 감각기관은 그에 따르는 감각대상을 가지고 있다. 눈(안근)은 색(색경)을 대상으로 하며, 색은 빛깔과 모양을 지닌 모든 대상을 의미한다. 사람, 산과 들, 나무와 짐승들, 달과 별 등 눈으로 볼 수 있는 모든 것이 ‘색’이다. 귀(이근)는 소리(성경)를 그 대상으로 하고, 코(비근)는 향기(..

일체법이란 무엇인가 - 십이처와 십팔계

일체법이란 무엇인가 앞에서 연기법과 삼법인을 살펴보며, 이 세상의 모든 법은 인연 따라 화합된 존재로써 항상하지 않으며, 고정된 실체로써의 자아가 있지 않다는 점을 살펴보았다. 우리가 ‘나’라고 생각하는 것은 사실 고정된 실체로써의 ‘나’가 아니고, 내 바깥에 있다고 생각하는 ‘세계’, ‘대상’이라는 것 또한 실체로써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내적인 ‘자아계’도 공하고, 외적인 ‘대상계’ 또한 텅 비어 공한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나’라는 것이 존재한다고 여기고, 내 바깥에는 ‘세계’가 있다고 생각하며 살아가고 있다. 그렇다면 우리는 왜 있지도 않은 ‘나’와 ‘나의 대상’을 있다고 착각하며 살게 되었을까? 우리가 ‘있다’고 여기는 것은 도대체 무엇이며, 그것은 정말로 있는 것일까? 초기불교의 ..

열반에 모든 것을 맡기라 - 삼법인 강의(16)

열반에 모든 것을 맡기라 - 열반적정의 생활실천(2) 그러나 우리는 안타깝게도 비움의 삶을 살지 못하고 채움의 삶을 살려고 애쓴다. 그렇기에 우리 삶은 더욱 채워짐으로써 조금씩 윤택하고 아름다워지는 것이 아니라, 더욱 더 많은 채움을 얻고자 끊임없이 전 속력을 향해 질주하는 삶이 되고 있다. 그 질주는 멈추지 않는다. 빨리 달려야 더 빨리 완전한 채움에 이를 수 있고, 남보다 더 많이 채워 부자가 될 수 있으니까. 그러나 부처님은 말한다. 그 무서운 질주를 멈추고 삶을 바라보라고. 이처럼 우리의 삶은 두 가지의 길이 있다. 비움의 길 혹은 채움의 길. 비움의 길은 진리의 길이며 부처님의 길이요, 채움의 길은 중생의 길이며 무지의 길이다. 부처님께서는 끊임없이 비움에 이르는 길을 우리의 내면에서 설법하고 ..

괴로움을 다루는 중도적 방법

언제나 우리의 인생에서는 ‘어떤’ 일이 일어날 뿐이지 좋은 일이나 나쁜 일이 일어나는 법은 없다. 다만 ‘어떤 일’들이 우리의 정신의 지평을 넓혀주기 위해, 우리의 심심한 일상에 지혜의 기회를 던져 주기 위해 꿈처럼 잠시 그렇게 왔다 그렇게 갈 뿐이다. 그렇기에 삶을 조종하려 들지 말라. 삶을 내 방식대로 통제하려 들지 말라. 내가 원하는 삶만을 살고자 애쓰지 말라. 그런 삶은 없다. 내 앞에 일어나는 삶을 아무런 조건 없이 받아들이라. 좋고 나쁜 것을 분별하여 선택적으로 받아들이지 말고, 전체적으로 통째로 받아들이고 환영하며 감사하라. 안정적이고 평탄한 삶만을 추구하려는 생각이 모든 문제를 부른다. 순탄한 삶만을 바라는 생각이 도리어 순탄하지 못한 삶을 만들어 낸다. ‘이런 삶’을 살아야 한다고 고정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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