육근과 십이처의 이해 - 십이처(1)
법상스님의 목탁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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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기본 교리강좌

육근과 십이처의 이해 - 십이처(1)

목탁 소리 2015. 1. 5. 22:52

 

 

 

육근과 십이처의 이해

 

앞에서 육근은 눈귀코혀몸뜻이라는 우리의 감각기관을 비롯한 감각기능, 감각활동이라고 했다. 우리는 육근을 통해 외부의 대상을 인식하여 받아들인다. 그런데 이렇게 우리 안의 감각기능인 육근을 통해 외부의 대상인 육경을 인식하다 보니, 내 안에 육근이 진짜로 있고, 내 밖에는 육경이 진짜로 있는 것 같은 착각을 가지게 된다. 내 안에 육근이 진짜로 있고, 내 밖에 육경이 진짜로 있는 것이 아니라, 다만 인연 따라 그 기능과 활동을 할 뿐이지만 우리는 그러한 감각활동을 하는 존재를 ‘나’로 그 감각의 대상을 ‘세계’로 나누어 분별하게 되는 것이다.

 

이 때, 육근이라는 인연 따라 생겨난 감각기능과 활동을 ‘나’라고 여기는 잘못된 착각을 육내입처 혹은 육내처라고 하고, 그 감각 대상을 ‘세계’라고 실체적으로 생각하는 허망한 착각을 육외입처 혹은 육외처라고 한다. 이 육내입처와 육외입처를 합쳐 십이처라고 부른다. 육내입처는 안입처, 이입처, 비입처, 설입처, 신입처, 의입처이고, 육외입처는 색입처, 성입처, 향입처, 미입처, 촉입처, 법입처이다.

 

즉 육근은 인연 따라 생긴 우리 안의 여섯 가지 감각기능과 감각활동을 의미하고, 육내입처는 그 육근을 보고 ‘나’라고 착각하는 어리석은 의식을 뜻한다. 육근이 대상을 감지하는 것을 보고 내 몸 안에 외부 대상을 감각하는 자아가 실재적으로 있다고 느끼는 마음이 바로 육내입처다.

 

단순히 보는 기능과 활동은 안근이라고 하지만, 보는 자아가 있어서 세상을 보는 것이라고 착각하는 의식을 ‘안입처’라고 하는 것이다. 단순히 듣는 기능과 활동은 이근이라고 하지만, 듣는 존재를 ‘나’라고 착각하는 허망한 의식이 ‘이입처’인 것이다.

 

남들이 나에게 욕설을 할 때 이근에서는 그저 그 소리를 들을 뿐이다. 욕설이라는 소리의 인연이 생겨나면 인연따라 이근은 그 소리를 듣는 기능을 수행하는 것이다. 그러나 듣는 존재를 ‘나’라고 착각하는 순간 상대가 ‘나’를 향해 욕설을 퍼 부었다는 어리석은 착각이 생겨나고, 상대방에게 욕을 얻어먹은 ‘나’, 욕설을 듣고 상처받은 ‘나’라는 자아관념이 만들어진다.

 

이와 같이 소리를 들음으로써 그 소리를 듣는 ‘나’라는 자아관념이 생겨날 때 이것을 ‘이입처’라고 하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무언가를 봄으로써 ‘보는 나’라는 자아관념이 생겨나고, 들음으로써 ‘듣는 나’가, 냄새 맡음으로써 ‘냄새 맡는 나’, 맛 봄으로써 ‘맛 보는 나’, 대상과 접촉함으로써 ‘접촉하는 나’, ‘감촉을 느끼는 나’, 생각을 함으로써 ‘생각하는 나’가 있다는 허망한 착각이 일어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육내입처인 것이다.

 

바로 이런 육내입처에서부터 자아관념, 잘못된 허망한 아상이 생겨난다. 대승불교의 금강경에서 끊임없이 외치고 있는 아상타파도 이러한 육내입처의 가르침에서 시작되고 있는 것이다.

 

데카르트는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라고 함으로써 내 안에서 생각하는 어떤 존재가 실재로 존재하고 있다고 허망하게 착각을 함으로써 육입처 중에도 의입처의 잘못된 의식을 지니게 된 것이다. 내 안에 생각하는 어떤 것은 실재로 있는 것처럼 느끼기 때문에 그 생각하는 ‘나’는 분명히 존재하는 것이라고 착각한 것이다. 부처님 말씀에 의한다면 육입처는 인연 따라 생긴 것이기에 인연이 멸하면 사라지는 허망한 것일 뿐이다. 그러나 데카르트는 ‘생각하고 있는 나’를 실제 존재하는 것으로 착각한 것이다.

 

육입처의 가르침에 의하면, 데카르트가 있다고 여긴 ‘생각하는 나’는 인연 따라 생겨난 공한 것으로 의입처에 불과한 것이다. ‘보는 나’, ‘듣는 나’, ‘냄새 맡는 나’, ‘맛보는 나’, ‘촉감을 느끼는 나’, ‘생각하는 나’가 실제로 있다고 착각하는 허망한 의식이 바로 육입처다.

 

부처님의 육근이 청정하지만, 중생들은 육근이 오염되어 있다고 했는데, 바로 육근이 오염되어 있는 상태에서 나타나는 의식이 바로 육내입처인 것이다. 부처님은 육근이 청정하지만, 중생들은 육근이 오염되어 있다. 청정과 오염의 차이는 있지만 육근은 부처든 중생이든 누구나 가지고 있다는 점에서는 동일하다. 감각기능과 감각활동은 부처이든 중생이든 누구나 죽을 때까지는 할 수밖에 없는 활동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경전에서는 육근이 수명이라는 인연에 의지해 머문다고 했다. 즉 살아있는 동안, 수명이 지속되는 동안 육근은 소멸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수명을 인연으로 육근이 나타나는 연생법(緣生法)에 불과한 것이다. 연생법이란 인연 따라 생겨난 허망한 존재를 의미한다.

 

반면에 육내입처는 중생에게는 있지만, 부처에게는 없다. 육내입처는 감각기관이거나 감각기능이 아니라 감각기능을 보고 ‘나’라고 착각하는 허망한 의식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뒤에 나올 12연기에서도 육입처는 소멸되어야 할 것을 보고, 육입처가 멸하면 나아가 생노병사의 모든 괴로움이 소멸한다고 말하고 있다. 결국 육내입처는 소멸되어야 할 허망한 의식이지만, 육근은 잘 지키고 수호하여 청정하게 지켜야 할 것이다.

 

 

 

 

일체는 곧 십이처

 

부처님께서는 바로 이 십이입처를 ‘일체(一切)’라고 말씀하셨다. 잡아함경에서는 “일체는 십이처에 포섭되는 것이니, 곧 눈과 색, 귀와 소리, 코와 냄새, 혀와 맛, 몸과 감촉, 뜻과 법이다. 만일 이 십이처를 떠나 다른 일체를 말하고자 한다면 그것은 다만 말 뿐인 것일 뿐, 물어 봐야 모르고 의혹만 더해 갈 것이다. 왜 그런가 하면 그것은 경계가 아니기 때문이다.”라고 하여 십이처 외에 일체를 말할 수 없다고 말씀하고 계신다.

 

우리가 일체제법이라고 말하거나, 일체 모든 것이라고 말할 때 바로 그 ‘일체’가 바로 십이입처라는 것이다. 즉 십이입처를 빼고 다른 그 무엇을 일체라고 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이 말은 곧 나의 다섯 가지 감각활동으로 감지되는 대상들, 나의 마음으로 지각되는 것들만을 ‘일체’라고 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내 눈앞에 보이는 대상, 내 귀로 듣는 소리, 코로 냄새 맡아지는 것, 혀로 맛보아지는 것, 몸으로 접촉되는 것, 마음으로 생각하는 것들 이외에 다른 것을 ‘있다’라고 말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불교 인식론의 특징이다.

 

예를 들어 본다면, 지난 밤 뒷산 깊은 곳의 나무 한 그루가 거친 바람에 큰 굉음을 내며 쓰러졌지만 본 사람도 들은 사람도 아무도 없다고 생각해 보자. 그렇다면 그것은 일어난 일일까 일어나지 않은 일일까? 불교 인식론인, 일체법의 가르침에서 본다면 그것은 일어나지 않은 일이다. 육내입처에서 자각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물론 언뜻 보면 이것은 타당하지 않은 듯 보인다. 그러나 이것이야말로 이 세상의 이치를 분명하게 드러내 주고 있는 가르침이다.

 

사람들은 같은 길을 함께 걸어 갔을지라도 사람들마다 보는 것은 다 다르게 마련이다. 어떤 사람에게는 보이는 것이 다른 사람에게는 보이지 않는다. 사랑하는 사람은 수많은 군중 속에서도 뚜렷하게 보이게 마련이지만, 그 사람에게 관심을 가지지 않는다면 두 눈을 뜨고 있으면서도 다만 군중만을 볼 뿐, 그 사람은 볼 수 없는 것이다. 누군가를 사랑하게 되었다면, 그 사람이 눈 앞에 있을 때 가슴이 두근 두근 뛰며, 그 때부터는 모든 일을 할 때에도 마음속에는 그 사람을 인식하며 모든 것을 판단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그 사람을 사랑하지 않는 그저 평범한 사람에게 그 사람의 존재는 내면에 아무런 파문도 남기지 못할 것이다. 내가 어떻게 인식했느냐에 따라 그 사람은 나에게 큰 영향을 미치게 될 수도 있고, 흔적을 남기지 못할 수도 있다.

 

이는 흡사, 우리 눈에는 가시광선만 보이지만, 자외선이나 적외선을 보는 곤충들은 같은 세상을 보면서도 전혀 다른 세상으로 인식하는 것과도 같다. 우리에게 자외선이나 적외선의 세계는 없는 것이다. 육내입처로 인식되지 않기 때문이다.

 

이처럼 불교에서는 매 순간 경험되어지는 것만을, 내 육입처로 인식되어지는 것만을 법(존재)이라고 정의한다. 물론 육내입처와 육외입처 자체도 실제로 ‘있는’ 어떤 것이 아니라, 인연 따라 허망하게 생겨난 것들이다. 이와 같이 부처님께서 일체라고 하는 것은 실체가 있는 어떤 것을 이름 하는 것이 아니라, 인연 따라 허망하게 마음에서 연기하여 나타난 것을 일체라고 부르고 있는 것일 뿐이다.

 

사실 사람들은 저마다의 자기 육내입처로써 자기가 만들어 놓은 외부의 세계(육외입처)를 인식하고 경험하며 살고 있을 뿐이다. 내가 세상이라고 여기는 것과 다른 사람이 세상이라고 여기는 것은 엄밀히 따져 같을 수가 없다. 모든 외부 대상은 저마다 보는 사람에 따라 다 다르게 지각되어지는 것이다. 그러니 엄격히 따진다면, 이 세상이라는 실재적 존재가 하나 있어서 사람들마다 그것을 느끼고 인식하는 것이 아니라, 백 명의 사람이 있다면 백 가지 종류의 세계가 있는 것이다. 저마다 자기 육입처로써 육외입처라는 세계를 지각하기 때문이다. 쉽게 말하면, 나도 이 세상도 모두 독립적으로 실체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마음 속에서 연기하여 존재하는 인연가합의 존재일 뿐이다. 마음에서 허망하게 만들어 낸 것들일 뿐이지, 실재로 존재하는 것은 아니란 의미다.

 

그래서 부처님께서는 십이처로 지각되지 않는 형이상학적 질문에 대해서는 침묵하셨다. 그것은 실체가 아니기 때문이다. 세상은 영원한가 무상한가, 몸과 영혼은 있는가 없는가, 여래는 사후에 남아 있는가 남아 있지 않는가 하는 문제들에 대해서는 침묵하셨다. 이러한 질문들은 세상, 영혼, 여래라는 것이 독립적 실체로써 존재하고 있을 때 가능한 질문들이다. 그러나 십이입처의 가르침에서 본다면 이 모든 것은 외부에 실체적으로 존재하는 어떤 것이 아니라 마음에서 연기한 것일 뿐이다. 육입처에서 허망하게 만들어진 것일 뿐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러한 질문들은 애초부터 질문 자체가 성립되지 않는 것이다.   

 

[붓다수업] 중에서

 

 


붓다 수업

저자
법상 스님 지음
출판사
민족사 | 2013-12-13 출간
카테고리
종교
책소개
지금은 붓다 시대, 웰빙, 힐링, 뉴에이지, 영성, 치유, 명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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