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이 만들어낸 세상 - 십이처(3)
법상스님의 목탁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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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기본 교리강좌

마음이 만들어낸 세상 - 십이처(3)

목탁 소리 2015. 1. 25. 13:15

 

 

 

 

마음(의입처)이 만들어낸 세상

 

청정한 육근으로 인식되는 세상은 괴로울 것이 없지만, 육근이 오염되고, ‘나’라는 관념이 개입되게 되면 육근에 대한 의식이 육내입처로 바뀌면서 괴로움이 생겨난다. 이것이 고의 원인이라고 했다. 여기에서는 12연기의 지분 중 하나인 육입(육내입처)이 왜 괴로움의 원인인지를 배웠을 것이다.

 

그러면 육근이 오염되면서 어떻게 육입처의 의식으로 왜곡되는지를 살펴보자. 앞에서 안이비설신 오근이 각자 자신의 대상을 인식한 것을 가지고 의근(마음)은 종합하여 사람, 동물, 과일, 산과 들 등 삼라만상으로 인식하며, 나아가 행복, 질투, 고요, 기쁨 등의 정신적인 것들 또한 인식하게 된다고 했다. 의근의 대상은 물질적 정신적인 모든 것, 존재와 비존재의 모든 것을 대상으로 지각하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에서 의근의 활동을 살펴보면, 의근은 외부에 있는 것 그 자체를 있는 그대로 인식하는 것이 아니라, 외부에 있는 대상들을 오근의 도움을 받아 자기 식대로 인식하는 것이다. 왜 그럴까? 앞서 설명한 것처럼 보고 듣고 냄새 맡고 맛보고 감촉을 느끼는 존재를 ‘나’라고 착각함으로써 ‘내가 있다’는 아상을 만들어내기 때문이다. 즉, 의근에 아상이 개입되어 의입처로 바뀌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가 똑같은 장소에서 똑같은 것을 보았더라도 사람에 따라 각자 그 장소에서 인식한 것이 다르고, 느낌도 다를 수밖에 없는 것이다. 외부의 사물 그 자체를 인식한 것이 아니라, 내 방식대로 조합되고 종합된 ‘의입처가 만들어 낸 대상’을 인식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면, 의입처는 자기 방식대로 세상을 만들어 놓고, 자기가 만들어 낸 그 대상을 인식하는 것이다.

 

이 말은, 우리가 인식하는 모든 대상은 외부에 존재하는 대상 자체가 아니라, 우리 마음이 만들어 낸 것에 불과함을 의미한다. 외부의 육경 또한 이처럼 내 바깥에 독자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마음이 만들어 낸 것이며, 외부라고 여겨지고 있는 또 다른 내면의 세계인 것이다. 이와 같이 실제 존재하는 것이 아닌, 우리 마음이 만들어 낸 환영의 가짜 존재, 인연화합의 존재를 존재라는 말 대신 ‘법’이라고 부른다고 했다.

 

이렇게 말하면 어떤 사람은 외부의 세계가 어떻게 내가 만들어낸 것인가 하고 의문을 가질 것이다. 외부에는 독자적인 외부의 세계가 있고, 그 독자적인 외부 세계를 사람들이 저마다 다르게 인식할 뿐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그러나 외부세계가 진짜로 실체적으로 있는 것은 아니다. 이미 양자역학에서도 이 세상 만물은 진동하는 에너지이며 파동일 뿐이고, 실체적인 것은 아무 것도 없다고 증명하고 있다. 그렇기에 그 모든 외적인 대상들은 그것 자체의 고유한 성질을 가지지 않으며, 그것을 보는 이의 마음상태에 따라, 인연 따라 다르게 나타나는 것일 뿐이다. 실재로 그런 상태로 있기 때문에 그렇게 보이는 것이 아니라, 내가 마음에서 그런 것을 보고자 했기 때문에 그렇게 보이는 것일 뿐이다. 어떤 의도로 보느냐에 따라 이 무한한 가능성의 파동으로 이루어진 세계는 내가 의도했던 그 부분대로 보여지게 되는 것이다. 그러니 사실은 나(육근)도 이 세상(육경)도 또한 내가 내면에서 인연 가합으로 조작하여 만든 것일 뿐이다.

 

만약에 내 바깥에 고정된 실체로써의 세상이 있어서 우리가 그것을 보는 것이라면, 누가 보든 보이는 세계는 같아야 할 것이다. 그러나 가시광선만을 볼 수 있는 인간의 안근으로 보는 세상과 자외선까지 볼 수 있는 물고기나 꿀벌이 보는 세상은 결코 같을 수가 없다. 물고기들은 자외선을 볼 수 있기 때문에 우리 인간의 눈에는 똑같이 생긴 물고기지만 물고기들은 물고기마다의 자외선의 얼룩무늬로 서로를 구분할 수 있다고 한다. 또한 뱀은 눈 아래 있는 골레이세포라는 특수한 신경 세포를 통해 적외선을 감지한다고 하니, 적외선을 감지하는 뱀이 보는 세상은 우리가 보는 세상과는 같을 수가 없다. 또한 천안이 열린 수행자라면 우리들의 눈에는 보이지 않는 천상신들의 세계나, 화엄성중의 세계, 영가들의 세계까지를 다 볼 수도 있을 것이다.

 

만약에 세상이 정해진 하나의 모습으로 실체적으로 존재한다면, 이렇게 보는 이들에 따라 다르게 보이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세상이라는 것 자체가 정해진 실체가 아니며, 보는 것에 따라서 보여지는 것일 뿐이기에, 즉 보는 이의 마음에서 연기한 것일 뿐이기에 서로 다르게 보이는 것이다. 이 세상은 하나의 거대한 파동이며 무한한 가능성의 에너지일 뿐이다. 거기에는 모든 것이 다 구족되어 있고, 모든 가능성이 다 내포되어 있다. 그러나 우리들은 그 모든 것이 다 갖추어 져 있는 무한 가능성을 세계를 자기의 의식 수준에서만, 자기라는 내적인 필터를 통해 걸러서 볼 뿐인 것이다. 즉, 우리의 육입처라는 제한되고 한정된, 허망한 의식을 통해서만 육경이라는 세계를 바라볼 수 있을 뿐인 것이다. 그렇기에 이 세상은 보는 자에 따라서 어떻게도 보여질 수 있는 무한 가능성의 장이다. 그래서 육입처라는 허망한 착각의 의식이 소멸되게 되어 육근이 청정해진다면, 부처님이 세상을 보는 것 처럼 육안만이 아닌 천안, 법안, 불안을 모두 구족하게 될 것이다. 부처님의 눈, 불안(佛眼)은 안입처라는 허망한 분별에 갇힌 의식이 아니기 때문에 있는 그대로의 무한 가능성의 세계를 있는 그대로 볼 수 있는 것이다.

 

결론적으로 깨닫지 못한 우리가 보는 세계는 있는 그대로의 세계가 아니다. 세상에 대해 알았다고 말하는 순간, 사실은 정말 있는 그대로의 세상을 안 것이 아니라, 나에게 이해된 세상, 나에게 파악되어진 제한된 세상을 안 것에 불과하다. 양자역학에서도 있는 그대로의 전자를 있는 그대로 관찰할 수는 없으며, 언제나 측정하는 관찰자나 관찰도구 등 관찰되어지는 조건에 의해 영향을 받는다는 사실을 밝혀냈다. 모든 과학적 연구 또한 아무리 객관적이고 과학적인 연구라 할지라도, 사실은 특정 조건과 상황 속에서의 진실일 뿐이지 있는 그대로의 진실은 아닌 것이다.

 

결론적으로 ‘일체’란 육내입처와 육외입처인 십이입처를 말할 뿐이다. 즉 나에게 감지되고, 인식되어진 것만을 일체라고 말할 수 있을 뿐이다. 부처님께서는 ⟪잡아함경⟫에서 “일체란 12처이니 안과 색, 이와 성, 비와 향, 설과 미, 신과 촉, 의와 법이다. 만약 누군가가 고타마가 설한 이 일체 이외에 다른 일체를 설하겠다고 한다면, 그것은 다만 말일 뿐, 물어도 알지 못하며 의혹만 증가할 뿐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인식의 대상이 아니기 때문이다.” 라고 말씀하셨다.

 

육내입처로써 우리가 직접 인식하지 못하는 것은 다만 개념적으로만 있는 존재일 뿐 실재가 아니다. 그것은 다만 말일 뿐이며, 끊임없는 논쟁만 만들어 낼 뿐이고, 의혹만 증가시킬 뿐이다. 거기에는 어떤 소득도 없다. 그것은 육내입처의 인식 대상이 아니기 때문이다.

 

 

  

 

 

 

신도 불성도 윤회도 없다

 

그렇기 때문에 십이입처의 가르침에서 본다면, 바라문교에서 말하고 있는 아트만이나 유일신교에서 말하는 하느님, 심지어 불교에서 말하는 불성, 여래장이라는 것 또한 사실은 십이입처에 속하는 것이 아니기에, 다만 말뿐인 개념적 존재일 뿐 ‘일체’의 범주에 넣을 수 없다. 대승불교에서는 방편으로 여래장, 불성, 주인공, 참나, 진아, 대아, 본래면목 등을 설정해 두고 있지만 사실 이 모든 것들은 어떤 말로 표현을 하든 십이입처에 포섭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이 우리의 안이비설신의에서 인식되지 못한 범부 중생들에게 있어서는 적어도 없는 것이다. 실재적으로 있는 것이라고 할 수 없다.

 

초기불교의 무아는 그 어떤 것도 실재적으로 ‘있다’라고 규정하지 않는다. 바로 이 무아, 연기, 공을 뒷받침하기 위한 교리가 바로 초기불교의 모든 교리들이고 이 십이입처의 교리 또한 무아를 뒷받침하고 있다. 십이입처의 가르침에서 본다면, 불성이든, 본래면목이든, 여래장이든 그 모든 것들은 다만 말일 뿐 실체적인 것이 아니다.

마찬가지로 윤회의 가르침 또한 십이입처의 가르침에서 본다면 범부중생들에게는 실재로 있는 것이 아니다. 전생이나 내생이 있는가? 지옥이나 천상이 있을까? 알 수 없다. 십이입처에 포섭되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의 인식 주관인 육내입처로 인식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불성도, 여래장도, 전생도 내생도, 지옥도 천상도 모두가 없는 것일까? 없다면 왜 경전에 등장하는 것일까? 여기에서 중도의 실천이 필요한 것이다. 없다고 고집할 것도 없고, 있다고 고집할 것도 없으며, 있는 것도 아니고 없는 것도 아니라고 해서도 안 된다. 없다고 하지만 있고, 있다고 하지만 없다.

 

예를 들어 보자. 만약 어떤 사람이 주머니 속에 귀한 보석(불성)을 넣고 다녔지만 한 번도 보지 못한 채 평생을 거지처럼 살다가 죽었다고 치자. 이 사람에게 보석은 있었는가? 없었는가? 십이입처의 가르침에 의한다면 있었다고 할 수 없다. 인식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실은 있었다. 그렇다면 무엇이 정답일까? 있는 것일까 없는 것일까? 있다고 해도 틀렸고, 없다고 해도 틀렸다. 있다는 사실에만 집착해도 잘못이고, 없다는 사실에만 집착해도 잘못이다. 어떤 한 가지를 고집하여 집착하게 되면 그것은 현실을 있는 그대로 본 것이 아니다. 있다는 말로도 없다는 말로도 표현할 수 없다. 언어도단이며, 우리는 침묵할 수밖에 없다. 이러한 관점으로 보는 것이 바로 중도적 견해다. 당신에게 불성은 있는가 없는가? 침묵할 수 있을 뿐이다.

 

윤회는 어떨까? 전생과 다음생은 있는 것인가 없는 것인가? 십이입처에서 본다면 윤회는 없다. 내 의식에서 감지되지 않기 때문이다. 그저 사유에 의해서 개념적으로 알려진 것일 뿐이다. 즉 우리의 의식에서 윤회는 없다. 그러나 부처님에게 윤회는 구체적인 현실이다. 그렇기에 부처님께서는 윤회에 대한 법은 설할 지언정 우리에게 윤회를 믿으라고 강요하지 않는다. 중생들에게 그것은 허망한 말 뿐인 것임을 알기 때문이며, 논쟁만 일어날 뿐 아무런 소득이 없는 것임을 알기 때문이다. 그리고 윤회라는 것 또한 깨닫고 보면 한낱 꿈속의 일처럼 허망한 것이기 때문이기도 하다. 윤회를 무수히 했을지라도 그 윤회의 삶 자체도 비실체적인 꿈이며 신기루 같은, 인연 따라 만들어졌다가 인연 따라 소멸하는 아지랑이와 같은 것일 뿐이다.

 

 

 

 

 

일체(십이입처)는 일체가 아니다

 

또 다른 비유를 들어보자. 만약 어떤 사람이 밤중에 길을 걷다가 나무 그림자를 귀신으로 착각해서 소스라치게 놀라고 두려움에 떨었다. 그 길이 지름길인줄 알지만 귀신이 두려워 한동안 그 길로 다니지 못하였다. 실제 있지도 않은 귀신을 있다고 생각한 어리석은 착각 때문에 힘들게 먼 길을 돌아 다니다가 어느날 실제 귀신이 아니었으며 자신이 착각한 것임을 깨달았다. 그렇다면 그 귀신은 실제 있는 것일까 없는 것일까? 물론 없는 것이다. 그러나 그 사람의 의식 속에서는 분명 있었고, 삶에 막대한 영향을 끼쳤다. 실재는 없는 것이지만 육내입처에는 분명 거짓으로 있었던 것이다.

 

우리의 어리석은 무명 역시 이와 같다. 우리는 아직 깨닫지 못한 어리석은 중생이라고 생각하면서, 무명이라는 실체적인 어떤 것이 내 안에 있어서 나의 깨달음을 방해한다고 생각하겠지만, 사실 무명이라는 것은 실체적인 어떤 것이 아니라 단순한 착각일 뿐이다. 즉 이 착각은 십이입처에서는 분명 있는 것이기에 ‘일체’라고 할 수 있지만, 그 십이입처라는 의식 자체가 허망한 망상이기 때문에 망각 속의 ‘일체’인 것이다.

 

이처럼 십이입처에 포섭되지 않는 것은 일체라고 할 수 없다. 그러나 십이입처 또한 허망한 의식일 뿐이다. 어차피 나도 내 바깥의 세계도 모두가 다 환영에 불과하다. 비실체적이고 공한 환영의 세계를 우리는 허망한 착각 속에서 파악하고 있는 것일 뿐이다. 그렇기에 내가 볼 수 있고, 경험할 수 있으며, 인식할 수 있는 만큼의 자아와 세계만이 내게 알려진 존재계인 것이다. 그러나 그 일체라는 존재계 또한 실체가 아니다. 진짜가 아니다. 그것이 전부인 것은 아니다. 그러나 적어도 지금 이 순간 나의 의식수준에 있어서는 그것이 전부(일체)인 것이다.

 

이와 같이 십이입처를 일체라고 하는 것은, 십이입처만이 실체적인 전부이기 때문에 일체라고 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의식 속에서 파악할 수 있는 ‘전부(일체)’인 것이기 때문에 일체라고 한 것이다. 그러나 반어적으로 우리가 일체라고 생각하는 모든 것이 정말 실체적인 ‘일체’ 모든 것인 줄로 착각해서는 안 된다. 나의 의식 수준에서 감지된 ‘제한된 일체’임을 알아야 한다.  

 

[붓다수업]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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