육근청정의 빛나는 순간 - 육근과 육경(2)
법상스님의 목탁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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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근청정의 빛나는 순간 - 육근과 육경(2)

목탁 소리 2014. 12. 31. 17:51

 

 

 

 

부처의 육근과 중생의 육근

 

우리의 육근은 끊임없이 외부 경계에 따라 끄달리고 휘둘리곤 한다. 그러나 반드시 그래야만 하는 것일까? 언제가지고 외부 경계에 끄달리며 마음을 오염시켜야 하는 것일까? 외부 경계는 실체적으로 번뇌를 야기하는 티끌과 같아서 언제나 우리 마음을 오염시키는 것들일까? 그렇지 않다. 외부 경계에는 아무런 잘못이 없다. 아무런 문제도 없다. 언제나 여여하게 오고 갈 뿐이다. 있는 그대로 자연스럽게 오고 갈 뿐이다. 문제는 그러한 중립적인 현상에 대해 분별하고, 해석하며, 끄달리고, 오염되는 우리 마음에 있다.

 

겨울이 춥고, 여름이 더우며, 비 오는 날도 있고, 바람 부는 날도 있는 것은 자연스러운 자연의 이치일 뿐이다. 그러나 사람들은 겨울은 좋고 여름은 싫다거나, 반대로 겨울은 싫고 여름은 좋다거나, 바람 부는 날은 좋고 비 오는 날은 싫다거나 하며 외부 경계를 자기 식대로 해석하고 점수를 매기기 좋아한다. 어떤 새소리는 아름답게 느끼지만 한밤 중에 부엉이나 올빼미 소리에서는 음침하고 무서운 것을 연상하기도 한다. 어떤 사람은 홍어의 푹 삭은 냄새와 맛을 좋아하지만 또 어떤 사람들은 죽어도 못 먹겠다고 도망친다. 사랑하는 이와 손을 맞잡을 때는 한없이 설레지만, 음침한 한 밤중에 낯선 이가 손을 잡으면 까무라칠 수도 있다.

 

이처럼 외부 경계는 그것 자체로써 고정된 실체적인 좋고 나쁜 분별이 있는 것이 아니라, 언제나 내 쪽에서 자기 식대로 받아들이면서 온갖 문제도 만들어내고, 애착도 만들어낸다. 똑같은 경계가 어떤 사람에게는 한없는 행복감으로 또 다른 사람에게는 엄청난 괴로움으로 느껴질 수도 있는 것이다. 또한 같은 경계를 언제, 어떤 상태일 때 마주하느냐에 따라서 괴롭거나 행복해지기도 한다.

 

아이들이 뛰어 노는 소리를 보고만 있어도 행복해지지만, 때로는 그 소리를 듣기 싫어 화를 내고 짜증스러워하기도 한다. 우리가 마음이 열려 있고, 행복할 때는 그 어떤 경계도 다 받아들일 수 있고, 행복한 것이 되지만, 마음이 닫혀 있고, 괴로울 때는 평소에는 좋게 느끼던 경계들도 괴롭게 받아들여 지기도 하는 것이다.

 

이처럼 우리의 육근은 외부의 경계를 대상으로 언제나 똑같이 감지하는 것이 아니다. 자신의 내적 상태에 따라 동일한 외부 경계도 어떨 때는 좋게 느껴지고, 어떨 때는 나쁘게 느껴지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중생의 육근이다. 있는 그대로의 중립적인 대상 경계를 자기 식대로 해석하고, 판단하고, 분별하여 좋다거나 나쁘다고 받아들이는 것이다.

 

그렇다면 부처님의 육근은 어떨까? 부처님의 육근은 청정하기 때문에, 언제나 외부의 경계를 있는 그대로 중립적, 중도적으로 바라볼 뿐이다. 좋거나 나쁘게 바라보거나, 자신의 마음 상태에 따라 외부 경계를 다르게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언제나 ‘있는 그대로’ 바라볼 뿐이다. 비가 오든 눈이 오든, 겨울이든 여름이든, 그 어떤 소리든, 향기든, 맛이든, 감촉이든 다만 있는 그대로의 경계를 있는 그대로 분별없이 감지할 뿐이다. 분별없이 바라보기 때문에 좋거나 나쁘다고 판단하지 않으며, 판단하지 않기에 마음이 오염되지 않는다. 분별없이 바라보게 되면 다만 ‘볼 뿐’이지, ‘보는 나’와 ‘보이는 대상’을 나누는 분별도 쉬게 된다. 그저 볼 뿐, 내가 대상을 본다는 분별이 없으니, 나와 너를 둘로 나누지 않는다. 나와 세상을 나누지 않고 동체로써 하나가 되는 것이다. 내가 곧 세상이고, 세상이 곧 나와 다르지 않다.

 

이런 상태를 ‘육근청정’이라고 말한다. 스님들이 축원할 때, 육근청정을 발원하는 것 또한 이런 이유 때문이다.

이러한 육근은 살아있는 동안은 지속되는 기능이다. 중생에게도 부처에게도 육근은 동일하게 있다. 다만 부처는 눈으로 색을 볼 때 있는 그대로 보고, 귀로 소리를 들을 때 다만 들릴 뿐 헤아려 분별하지 않으며, 코로 냄새를 맡고 혀로 맛을 보고 몸으로 감촉을 느낄 때에도 아무런 분별없이 있는 그대로를 있는 그대로 감지할 뿐이다. 그렇기에 이러한 오근으로 받아들인 대상 경계를 마음(의근)이 종합적으로 인식할 때에도 분별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받아들인다. 의근, 즉 마음이 대상을 인식할 때 좋거나 나쁘다는 차별 없이, 옳다거나 그르다는 분별없이, 순수하고도 투명하게, 청정하게 그 대상을 있는 그대로 인식할 뿐이다. 이러한 육근청정의 상태를 경전에서는 육근을 잘 조복 받는다고도 하며, 육근을 수호한다거나 육근을 잘 지키는 것이라고 표현하기도 한다. 이처럼 육근을 잘 수호하고 지켜 청정하게 유지하는 것이야말로 불교수행의 중요한 부분이다.

 

 

육근청정의 빛나는 순간

 

사실 우리들의 육근이라고 해서 언제나 오염되어 있는 것은 아니다. 우리의 일상은 육근청정과 육근오염의 두 가지 상태가 반복되고 있다. 물론 대부분은 오염되어 있다가 깨어있는 순간 육근청정의 빛나는 순간을 때때로 마주하게 되기도 한다.

 

예를 들어 우리가 여행을 떠나 새벽 일출을 마주하는 순간이나, 산 모퉁이를 돌아 드디어 정상에 섰을 때 그 장엄한 툭 트인 장관을 마주할 때 처럼 생각이 멎고 ‘아!’ 하며 감동하는 순간, 우리는 눈으로 세상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게 된다. 안근청정의 상태에 머물러 있는 것이다. 이처럼 눈으로 대상을 바라볼 때 생각이 개입되지 않고, 욕구나 분별이 개입되기 이전 그저 말문이 콱 막혀 ‘있는 그대로를 있는 그대로’ 보는 바로 그 순간이야말로 안근청정의 상태가 된다. 바로 그 때는 안근과 색경의 분별이 없다. 일상에서는 내 안에 보는 ‘눈’이 있고, 내 밖에 보이는 ‘대상’이 있어서 내가 경치를 바라본다고 생각하지만, 이런 안근청정의 순간에는 보는 나와 보이는 대상이라는 나뉨, 분별이 사라진 채 객관과 주관이 둘이 아닌 하나가 되는 것이다. 이 세상과 내가 둘이 아닌 하나가 되는 것이다. 이 순간에는 나도 없고 세계도 없으며, 그저 ‘볼 뿐’이다.

 

그러나 연이어 생각이 개입되기 시작한다. 예전에 보았던 일출과 비교하면서 ‘예전에 보았던 일출보다 못하군’, ‘히말라야 산보다 별로야’ 혹은 ‘이 아름다운 풍경을 어떻게 하면 사진에 잘 담을 수 있을까’, ‘잘 찍어서 사진전에 출품해야겠다’는 등 분별과 비교, 해석 등이 일어나기 시작한다. 그러면서 곧장 욕망이 개입되고, 우리는 그 순수한 ‘존재’의 순간을 버리고, ‘소유’적 사고방식을 시작하는 것이다. 바로 그 순간, ‘나’와 ‘세상’을 나누는 분별이 시작되는 것이다. ‘보는 나’가 있고, ‘보이는 대상’이 있으며, 내가 이 바깥의 경계를 어떤 방식으로든 가지고 싶어지게 된다. 안근이 오염되기 시작하는 것이다.

 

이근, 소리도 마찬가지다. 우리가 음악을 들을 때 어떤 순간 음악에 몰입이 되어 아무런 생각 없이 그저 음악과 하나 되는 순간을 경험하게 된다. 그 때가 바로 이근청정의 순간이다. 그러나 연이어 다른 음악과 비교하고, 생각이 일어나기 시작하면서 이근이 오염되기 시작한다.

 

비근, 향기도 마찬가지다. 불가에서는 예로부터 스님들께서 차 한 잔을 앞에 두고도 명상에 깊이 잠기곤 했다. 차의 향기를 분별없이 있는 그대로 느껴보며, 그 향기와 하나 되어 그 안에 스며드는 것이다. 오랜 소나무 숲을 거닐 때, 꽃밭을 거닐 때면 진하게 전해져 오는 숲과 꽃의 향기에 젖어 나를 잊고 그 향기와 하나 되는 것이다. 비가 내린 뒤 어느 날 소나무 숲길을 산책하다가 그 빗물 머금은 소나무 숲의 진한 향기에 빠져들었던 기억들이 바로 그런 순간을 의미한다.

 

사찰에서 발우공양을 할 때, 혹은 사찰음식을 시연할 때 보면 음식을 먹는 행위가 단순히 먹는 것이 아니라, 입으로 음식을 가져 가 가만히 음미하며 씹는 것을 관찰하고 지켜보는 것을 통해 공양이 곧 명상의 순간이 됨을 깨닫게 된다. 입을 잘 관찰하며, 음식물의 종류에 따라 끄달리지 않은 채 음식을 먹을 수 있다면 그것이 곧 설근청정의 순간이 되는 것이다.

 

스님들은 좌선과 경행을 늘 반복하곤 한다. 걷기 명상을 통해 발바닥이 땅과 접촉하는 그 지점을 있는 그대로 관찰하며 걷는 것이다. 바로 그 순간 신근이 청정해지는 것이다.

 

무엇보다도 육근청정의 대미는 의근청정이 장식한다. 생각 없음, 무심(無心)의 경지에서 무한한 영감과 창조적 작업들이 나타난다. 우리의 생각은 하루에 5만에서 6만 가지에 이르는 종류의 생각들이 끊임없이 이어진다고 한다. 그런 생각의 홍수 속에서, 생각을 조작해서 얻을 수 있는 것은 사실 그리 많지 않다. 이 세상을 바꾼 위대한 발명이나 발견 등은 생각으로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생각을 내려 놓고 무심히 지켜보는 가운데 번뜩이는 아이디어로 밝혀진 것들이라고 한다. 생각을 쉬고 ‘지금 이 순간’에 다만 존재하고 있을 때 의근청정의 아름다운 순간이 빛을 발하게 되는 것이다.

 

이와 같이 사실 우리들은 종종 육근청정의 순간과 마주하게 된다. 음악가들은 음악을 통해 이근청정에 이르고, 여행자들은 여행을 통해 안근청정에 이르며, 조각가들은 조각 삼매에 빠져들면서 신근청정에 이를 수 있는 것이다. 육근이 외부 대상인 육경에 오염되지 않도록, 잘 수호해 나가는 것이야말로 불교 수행의 중요한 분기점이 된다.

 

 

육근청정의 수행

 

이것이 바로 육근청정의 수행이다. 우리 몸의 여섯 가지 감각기관과 기능, 그 활동에 대해 놓치지 말고 관찰할 수 있어야 한다. 육근이 육경을 접촉하는 순간에 관찰의 빛을 놓아야 한다. 눈이 세상을 바라볼 때, 바라보면서 어떤 생각과 판단, 분별들이 이어지는지를 잘 관찰해 보라. 눈으로 바깥 대상인 색경을 바라볼 때, 아무런 판단도 없이 다만 있는 그대로 바라보기만 할 수 있는지를 한번 시험해 보라. 나무 한 그루, 꽃 한 송이를 아무런 판단 없이 지켜볼 수 있는가? 푸르른 하늘과 떠 있는 구름을 말없이 지켜보라. 차 한 잔이 저홀로 식어가는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라.

 

과연 우리는 얼마 동안이나 생각과 분별을 일으키지 않은 채로 지켜볼 수 있을까? 단 5분, 아니 단 1분 만이라도 아무런 생각과 판단 없이 꽃 한 송이를 관찰할 수 있는지 시도해 보라. 평소에 얼마나 많은 생각들이 우리의 육근을 오염시켜 왔는지를 안다면 까무라치고 말지 모른다.

 

숲 속에 들어 가 자연의 소리들을 있는 그대로 들어 보라. 새소리며, 바람소리, 풀벌레 소리들을 그 소리를 따라가며 판단하거나 생각, 비교, 분별하지 말고 있는 그대로 들어 보라.

 

한 끼의 식사를 할 때, 그 음식의 향기와 맛을 고스란히 음미하면서 먹어 보라. 배 부르기 위해 먹지 말고, 그저 그 순간 향을 느끼고, 씹기 위해 씹어 보라.

 

하루 중 자주 몸을 관찰해 보라. 어깨에 얼마나 힘이 들어가고 있는지, 손발에 땀이 나는지, 머리가 뜨거워지거나 무거워지지는 않는지, 몸이 가벼운 느낌과 무거운 느낌을 관찰해 보라. 차 한 잔 마실 때 두 손에 전해져 오는 따뜻한 찻잔의 온기를 충분히 느껴보라. 기름진 음식을 먹거나, 폭식했을 때 몸이 어떻게 반응하는지를 가만히 관찰해보라. 거기에 좋다거나 나쁘다거나, 잘했다거나 잘못했다거나 하고 분별할 필요는 없다. 다만 있는 그대로 눈, 귀, 코, 혀, 몸, 뜻의 여섯 곳을 주시해 보라.

 

육근, 여섯 문을 잘 관찰함으로써 여섯 도둑이 들어오는 것을 잘 막아낼 수 있다. 뿐만 아니라 온갖 공덕과 각가지 장엄이 저절로 이루어질 것이다. 진리에 이르는 수많은 길을 낱낱이 성취하게 될 것이며, 이렇게 수행하는 이는 머지않아 부처를 증득하게 되리라.

 

이 말은 곧 ‘관심일법 총섭제행(觀心一法 總攝諸行)’이라는 달마스님의 일갈을 의미한다. 마음을 관찰하는 그 한 가지 법이야말로 그 모든 숭고한 수행법과 마음 쓰는 법을 총섭하는 것이다.

 

[붓다수업] 중에서

 


붓다 수업

저자
법상 스님 지음
출판사
민족사 | 2013-12-13 출간
카테고리
종교
책소개
지금은 붓다 시대, 웰빙, 힐링, 뉴에이지, 영성, 치유, 명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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