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상스님의 목탁소리
법상스님의 목탁소리

상주 대원정사 일요법회(13:30), 부산 목탁소리 토요법회(13: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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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거촌 할아버지의 겨울

앙상한 나뭇가지 위에 새 한 마리 외로이 앉아 있다. 우거지던 초록의 생기도 사라지고, 중년의 마지막 아름답던 단풍마저 떨어지고, 앙상하게 남은 나뭇가지 위로 새 한 마리 삶을 기대고 섯다. 바람이 차다. 찬 바람이 숲에서부터 불어 와 살결을 스치우고는 다시 숲으로 돌아가곤 한다. 온 몸이 겨울을 맞는다. 새벽녘 추위는 더욱 사납다. 그래도 이 정도 추위는 낭만적이고 서정적이다. 철거촌 다 쓰러져 가는 방안 한 켠에서 외로이 홀로 스러지는 생명 붙잡고 마지못해 살아가는 할아버지는 고장난 오랜 연탄 보일러를 붙잡고 아침부터 연신 이리저리 살펴보며 씨름을 하고 있었다. 고쳐도 그만 말아도 그만이 아니라 이건 완전히 목숨이 달린 문제다. 그래서 그런지 할아버지의 눈빛은 외롭지만 필사적이다. 문을 열고 밖을 바..

나를 설레게 하는 삶을 찾으라

내가 정말 좋아하는 것은 무엇일까, 내가 정말 하고 싶고, 그것을 하면 행복하며 몰두하게 되어 시간 가는 줄도 모르는, 진정 나를 가슴 뛰게 하는 것을 찾아 보라. 그것을 하는 것이야말로 내 삶의 목적이며 사명이다. 누구나 저마다 자기다운 삶의 길이 있다. 물론 그것이 반드시 거창할 필요는 없으며, 꼭 직업으로 선택해야 하는 것도 아니다. 중요한 것은 자기다운 삶을 찾아내고, 그 길 위에서 행복하게 그것을 행하고 체험함으로써 남의 길이 아닌 자신의 길을 걷는데 있다. 모르겠다면 잠시 삶을 돌아보라. 삶은 끊임없이 힌트를 보내주고 있다. 혹시 자원봉사를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대학시절 자원봉사 동아리에서 권유받았지만 이런저런 이유로 거절하지는 않았는가? 이상하게 주위에서 양로원이며 복지시설 자원봉사를 가자는 ..

출가를 결심하고 출가하기까지

출가를 결심했지만 아직 신경 쓰이는 일들이 많습니다. 가볍게, 편하게 가야하는데 왜 이리 걸리는게 많은지 모르겠습니다. 혼자서 결정하고 주위에 통보할 일만 남았습니다. 마침 어제 저녁에 기회가 되어서 어머님께 얘기를 꺼냈습니다. 그래도 집에서 유일하게 절에 다니시고 제일 이해해 주실 거라는 생각에 큰 걱정은 없었습니다. 그런데 엄마가 많이 놀라셨어요. 밤새 잠 못 주무시고, 출가는 안 된다고만 말씀하시네요. 그냥 절에만 다니라고 했지 누가 너보고 스님하라고 했냐시며 슬퍼하십니다. 어찌 그런 일을 상의도 없이 통보만 하느냐고. 그리고 아침부터 온 식구이 성화네요. 이렇게까지 일줄은 생각지 않았는데 솔직히 당황스럽습니다. 불교에 대해 전혀 알지 못하는 우리 식구들을 어떻게 설득해야 할까요? 부모님 설득시킬 ..

회사만 가면 불안해 미칠지경입니다

회사에 출근하면 긴장되고 불안해서 미칠지경입니다. 늘 집중이 안 되고 주변에 더 신경을 쓰다보니 말이 헛나오고 그러면 더 긴장이 됩니다. 회의에서도 항상 말실수 하면 어쩌나 하고 걱정됩니다. 대학 때 자기소개를 하다가 크게 실수한 뒤로 계속 이러고 삽니다. 어쩌면 좋을까요? 과거에 끄달려 있다 보니 현재를 사는 것이 아니라 과거가 현재를 뒤덮고 있습니다. 그것은 근원적으로는 현재로 돌아왔을 때만 치유됩니다. 과거와 완전히 결별하고, 오직 지금 이 순간의 전혀 새로운 삶을 시작해야만 합니다. 무슨 말을 할 때 실수하면 어쩌지 하고 걱정된다고 하셨는데요, 실수하는 것을 잘못 된 것이라고 판단하지 마세요. 실수를 받아들이세요. 실수를 자연스럽게 받아들일 수 있고, 그게 큰 문제인 것이 아니라고 여기십시오. 실..

실연의 아픔, 기도하면 될까요?

깊이 사랑하던 여인과 만난 지 얼마 안 되 헤어졌습니다. 저는 취업도 못한 상태였거든요. 시험에 떨어지던 날 그녀와 이별했습니다. 그리고 그녀는 다른 사람을 사귀게 되었고 저는 도저히 참을 수가 없었습니다. 도저히 그녀와의 인연을 끝낼 수가 없어서 기도를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인연이 아니더라도 인연의 틀을 움직여서라도 다시 그녀를 만나고 싶습니다. 어떻게 기도해야 할까요? 참 답답하고 힘드실 것 같습니다. 지금과 같은 상황이 바로 법우님께서 그 여자분께 '사로잡혀 있는' 완전히 '속박당하고 있는' 집착상황입니다. 집착의 속성이 뭔지는 아실겁니다. 그것은 사람을 눈멀게 합니다. 집착하고 있으면 다른 아무것도 안 보이고, 오직 집착의 대상에만 사로잡혀 완전히 속박당하고 결박당하게 됩니다. 진정한 사랑은 무엇..

절수행에 대한 궁금증들

절 수행 중에 기도의 내용이 매일 바뀌고 어떤 때는 절 하는 중에도 계속 바뀝니다. 오히려 번뇌가 더해가는 느낌이랄까요? 어떤 마음으로 절을 해야 하는지요. 아무 생각 없이 절만 해도 되는지요? 절 하는 도중에 무슨 기도를 한다거나, 무슨 발원을 생각한다거나 그러지 마시고, 그저 절만 하세요. 생각, 바람, 기원 등의 마음도 다 놓아버리고 다만 절만 하면서 절하는 나 자신을 관하시기 바랍니다. 다만 발원 할 내용이 있으면 마음을 비우는 기도를 한 뒤에 기도 끝에 하면 됩니다. 마음이 비워진 뒤에 그 텅 빈 마음에서 이타적인 발원이 나오면 거기에 힘이 붙습니다. 그러나 기도 중에 계속 발원을 하면 오히려 생각이 많아지고 그 발원에 힘도 안 붙어요. 오직 무념으로 생각 없이 관하며 절하시기 바랍니다. 또 어..

삶이 원래 괴로운 거라고?

누구나 삶이란 원래 괴롭고 순탄치 않으며 근근이 버텨내야 하는 것으로 생각한다. 고통은 당연히 겪어야 하는 것이다. 우린 나날이 행복한 삶 보다는 늘 문제가 있고, 그 문제와 힘겹게 싸우며 사는 삶을 오히려 정상적으로까지 여긴다. 과연 그럴까? 결론부터 말하면, 그렇지 않다. 삶은 아무런 문제가 없다. 모든 것은 완전하며 넘치는 환희와 사랑으로 가득차 있다. 핵심은 삶을 바라보는 인식, 의식에 있다. 깨어난 의식으로 보면 모든것은 완전하지만, 분리와 무지, 아집에 물든 의식으로 보면 모든것이 문제가 된다. 세상을 차별없이 보는 통합적 인식에서 삶은 풍요와 자비와 완전한 환희로움 그 자체다. 삶이 문제가 아니라 삶을 보는 의식과 방식이 문제를 만들어 낸다. 바깥의 세상이 아니라, 그것을 보는 내면의 관찰,..

죄의식에 사로잡히지 말라

죄의식에서 놓여나라. 죄란 사실 실체적인 죄가 아니라 다만 실수였을 뿐이다. 아니 조금 더 적극적으로 해석한다면 그 또한 배움의 일환이었을 뿐이다. 선행을 통한 배움 뿐 아니라 악행을 통한 배움도 본질에서 본다면, 똑같이 필요한 삶의 가르침이다. 우리는 선행을 통해서뿐 아니라 악행을 통해서도 배워야 한다. 선행 뿐 아니라 악행도 경험해야 하는 것이다. 선악을 둘로 나누어 놓고, 그 가운데 선행만을 좋은 것이라고 판단하고, 악행은 나쁜 것이라 규정지은 뒤 죄의식을 뒤집어 쓸 필요는 없다. 잘못과 실수를 인정은 하되, 죄의식에 사로잡히지는 말라. 죄의식의 부담에서 자유로워져라. 죄의식에 대한 부담과 두려움과 절망은 오히려 죄에 대한 의식을 더욱 강화해 동일한 죄를 끌어들이는 힘으로 작용할 뿐이다. 우리는 삶..

삶의 목적을 완수하는 법

삶의 목적은 매 순간의 삶을 충분히 경험하는데 있다. 삶을 사는 것이야말로 삶의 이유다. 주어진 삶은 경험되어지기 위해 온 것이다. 우리가 할 일은 주어진 순간순간의 삶을 온전히 경험하고 느끼고 살아내는것이 전부다. 좋다고 집착하지도 싫다고 미워하지도 않은 채, 거부하거나, 두려워하지 말고, 그 어떤 판단도 가하지 않은 채 있는 그대로의 삶을 그대로 인정하고 받아들여 충분히 경험되어지도록 하라. 판단, 두려움, 거부, 욕망, 화, 생각, 분별 없이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그것이 일어나도록 허용하고, 온전히 경험되고 느껴질 때 바로 그 순간의 목적은 완수되고 삶은 눈부시게 빛난다. 매 순간의 삶을 고스란히 느끼고 경험할 때 존재는 끊임없는 새로움으로 깨어난다.

마음껏 삶을 경험하고 배우라 - 내가 확장되는 즐거움

금강경에서는 아상을 타파하라고 말한다. 아함경의 가르침에서는 무아를 깨닫는 것이야말로 진리에 이르는 길임을 설하고 있다. 아상이라는 것은, 고정된 실체가 아니기 때문에 도대체 집착할 가치가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불교의 이른 아상타파의 가르침을 일부 왜곡되게 해석하거나, 왜곡해서 받아들이는 경우를 종종 보게 된다. 아상을 타파해야 한다고 하고, '내가 작아지는 즐거움'을 누리라고 하며, 무아, 무심, 무상, 무집착, 무소유를 말하는 불교의 공사상, 무아사상을 허무주의라고 폄하하는 이들도 있다. 또한 실제 불자들 사이에서도 불교를 공부하면 집착도 다 버려야 할 것 같고, 성공도 별 의미가 없는 것 같고, 모든 것이 무의미하게 느껴진다고 하소연하기도 한다. 그야말로 공에 치우친 것이다. 그래서 중도의..

원하는 것을 이루는 4가지 방법

화엄경에서는 ‘일체유심조’라고 하여 일체 모든 것은 마음이 만들어 낸다고 했는데,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것을 받아들이기 어려워한다. 여기 일체유심조의 가르침을 도울 수 있는 4가지 방법, 그리고 왜 그동안 그 원리가 내 삶에는 적용되지 않았는가에 대한 원인이 있다. 만약 마음먹은 대로 삶을 창조하고 싶은데 그것이 잘 되지 않는다면 다음의 네 가지 중에 무언가 잘못된 부분이 있는지를 살펴보기 바란다. 우선 첫째로, 우주법계는 너와 나의 차별이 없는 동체대비라는 진리의 장이기 때문에, 내가 상대방에게 하는 모든 것이 바로 내가 나 자신에게 하는 것과 다르지 않음을 알아야 한다. 내가 남들에게 행하는 것이 고스란히 내가 나 자신에게 하는 것으로써 나의 창조에너지로 바뀌는 것이다. 남들에게 ‘너 좀 망해 봐라’ ..

남편 하는 일이 너무 힘들어요

현실적으로 남편하는 일이 너무 힘이 듭니다 .부처님 앞에 일 잘되게 해달라고 하기가 죄송스럽지만 집에 와서 남편과 아이들 얼굴을 보면 부처님께 내 욕심을 담은 기도를 하고 싶기도 합니다. 바라는 기도, 기복적인 기도를 해도 될까요? 기도를 한다는 것은 무언가 세속적인 빌 것이 있다는 말인데, 사실은 빌게 되면 오히려 그것을 얻지 못하게 되기 쉽습니다. 예를 들어 ‘남편 하는 일이 잘 되게 해 주세요’ 하고 빌었다면 사실 마음의 이면에 무엇이 연습되고 있는지를 보세요. 그 이면에는 '지금 남편 하는 일이 잘 안 됩니다. 그러니 앞으로 미래에는 더 잘 되게 해 주세요' 하는 것입니다. 즉 잘 되게 해 달라는 말 이면에 우리는 사실 '남편 일이 잘 안 된다'는 말을 법계를 향해 계속해서 뿜어내고 있는 것입니다..

무상과 무아면 누가 깨닫나요?

불교에서는 무상과 무아라고 합니다. 항상 하는 것이 없고 나라고 할 만한 것이 없다고 하는데요, 그렇다면 무엇이 있어 해탈을 하는지요? 해탈을 하는 '나'도 없습니다. 해탈이라는 것은 '나'에 얽매여 있던 삶에서 벗어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깨어있음이 있을 뿐이지, 깨달은 자는 없다고 하는 것입니다. 깨달은 자가 '자신이 깨달았다'는 상에 얽매여 있다면 그것은 아직 자아가 남아 있고, 아상이 다 없어지지 않은 것이겠지요. 다시 말하면 '깨달은 자'가 없다는 것은 깨달은 자라는 육신이나 존재 자체가 없다는 말이 아니라 스스로 자아에 갇힌 생각이 없다는 말이고, 무아와 무상을 완전히 자각한 채 고정적인 실체관념을 비워버렸다는 뜻입니다. 불교에서 말하는 공이나 무아는 '없다'는 말이라기 보다는, '연기한다'는 ..

공하다면, 참회도 용서도 필요 없나?

내가 없는 것이라면 참회해야 할 나도 없는 것 아닌지요? 모든 것이 공하다면 용서를 구할 필요도 없지 않을까요? 또 내가 없는 것이라면 무엇에 감사할 대상도 없어지는 것이 아닌가요? 업도 없는 것인지요? 만약 말씀하신대로 그렇게 결정짓고 살게 된다면, 그것이 바로 무기공에 떨어지는 거예요. 무애하게 살아야 한다면서 참회도 안 하고, 감사도 안 하고, 악업도 마구 지으면서 업을 받을 나도 없다고 한단 말입니다. 주로 그런 경우는 무아, 공, 연기, 중도에 대한 이해가 올바르지 않기 때문인 경우가 많아요. 머리로만 이해해도 그렇습니다. 무아는 밑도 끝도 없이 그냥 '내가 없다'라고 하는게 아니예요. 이렇게 내가 있잖아요. 그런데 왜 없다고 했느냐? 그건 이런 내가 없어서 없다고 한 것이 아니라, 고정된 실체..

자신과의 싸움에서 집니다

어디에서 보니 '남에게서 보는 것은 내안에도 있다'는 말이 있데요. 모든 경계가 나의 과보로서 온것이라고 생각하면 '내 업의 나툼'이라고 하는 것은 이해가 됩니다만, 그런 경계를 내안에도 가지고 있다는 점에 대해서는 잘 이해가 가지를 않습니다. 바깥 경계에서 나타나는 모든 것이 내 안에 비춰져서 내 안에 비춰진 바깥 경계를 우리는 인식하거든요. 그러니 사실은 바깥 경계를 인식하는게 아니라 내 안에 비춰진 경계를 인식하는 것입니다. 바깥 경계는 좋거나 나쁘거나 하지 않지만 우린 그 경계를 가지고 좋다고 나쁘다고 분별하잖아요. 그 자체가 바깥 경계를 보는 것이 아니라 내 내면에 비춰진 바깥 경계를 보고 있는 것이다, 즉 그게 바로 내 내면을 보고 있는 것이란 뜻입니다. 외부경계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지 못하..

안주할 곳은 없다 끊임없이 변하라

진리를 깨닫고자 하는가. 그렇다면 진리와 하나 되어 흐르라. 그러면 어떻게 진리와 하나 되어 흐를 수 있는가. 변한다는 진리, 무상이라는 진리와 하나 되어 흐르면 된다. 변화를 받아들이며 온몸으로 온 마음으로 변화의 흐름에 몸을 맡겨라. 변화를 두려워하지 말라. 그 흐름을 벗어나려 하지 말라. 변화는 진리이다. 그러니 변화를 붙잡으려하지 말라. 이 세상 그 어디에도 영원히 안주할 수 있는 곳은 없다. 변화한다는 사실이야 말로 온전한 진리다. 그러므로 변화를 두려워해서는 안 된다. 어디에도 머물러 있지 말라. 몸도 변하고, 마음도 변하며, 감정도 변하고, 사랑도 미움도 변한다. 사상이나 견해도 끊임없이 변하고,욕구나 욕심도 변한다. 명예나 권력, 지위도 언젠가는 변한다. 변화는 자연스러운 것이다. 아름다운..

삶은 그 자체로 우주적 이치, 크게 긍정하라

우연히 일어나는 일은 없다. 그것은 분명한 이유를 가지고 있다. 분명하게 짜인 인과의 연극, 법계의 연극 각본에 따라 꼭 그때, 그 장소에 그일이 일어나게 되어 있다. 모든 사건은, 그것이 너무 아프고 괴로운 일일지라고 그것이 그 순간의 최선이기 때문에 일어나는 것이다. 그것이 괴로운 일일지라고 우리를 돕기 위한 우주 법계의 배려다. 즉 지금 그 일이 일어나지 않았다면 다음에 더 큰 일로 우리를 괴롭혔을 수도 있다는 것이다. 그렇기에 그 모든 것은 진리의 일이라고 하는 것이다. 우주는 늘 어머니의 품처럼 한없는 사랑과 자비로 우리를 돕고 있다. 다만 나쁜 일, 괴로운 일, 아픈 일들이 일어나는 것은 우리 스스로 만들 뿐이다. 사실 어떤 괴로운 일이 일어났다고 하더라도 그건 괴로운 일이 아니라 다만 그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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