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이 흔들리고 시들고 넘어지는 이유 #도덕경39장
법상스님의 목탁소리

상주 대원정사 일요법회(13:30), 부산 목탁소리 토요법회(13: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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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이 흔들리고 시들고 넘어지는 이유 #도덕경39장

목탁 소리 2025. 4. 2. 20:12

[상주 대원정사 일요법회 법문]

- 영상 법문으로 듣기 : https://www.youtube.com/live/ZmTT6pR0bgE?si=c6r2ikFxsNiZ68i7

네, 반갑습니다. 네, 오늘은 이제 도덕경 39장입니다. 옛날에 하나를 얻은 것들이 있다, 하늘은 하나를 얻어서 맑고, 땅은 하나를 얻어서 평안하고, 신은 하나를 얻어서 신령하고, 골짜기는 하나를 얻어서 가득 차고, 만물은 하나를 얻어서 자라나고, 왕과 제후는 하나를 얻어 천하의 모범이 되고, 이 모두가 하나의 하늘은 그것을 맑게 하는 것이 없으면 갈라질 것이고, 땅은 그것을 평안하게 하는 것이 없으면, 신은 그것을 신령하게 하는 것이 없으면 없어질 것이고, 골짜기는 그것을 가득 차게 하는 것이 없으면 마를 것이고, 온갖 것, 그것을 잘 자라게 하는 것이 없으면 없어져 버릴 것이고, 왕과 제후는 그들을 모범되게 하는 것이 없으면 넘어질 것이다, 아, 이렇게 말했습니다.

아, 옛날에, 뭐 옛날에 어떤 시간을 얘기를 하는 게 아니에요. 본래 이 도는 진실은 무시무종이에요. 그러나 그냥 옛날이라고 말을 했어요.

이, 이 하나를 얻은 것들이 있다 이랬는데, 음, 여기는 하늘, 땅, 신, 골짜기, 만물, 왕과 제후를 말했지만, 본래 이것들은 그냥 하나하나 모양을 얘기를 했지만, 일체 모든 존재가, 산하대지 모든 것이 그대로 하나를 얻었단 말이에요. 얻었다, 이렇다라고 할 수 없죠. 얻었다고 하면 이것이 따로 있고, 하나가 따로 있고, 내가 하나를 얻은 게 되잖아요.

그러니까 이 하나뿐이란 말이야, 하나뿐이. 하나뿐인 여기에서 만물이 여기서 나왔단 말이에요. 어, 그래서 그냥 여기서는 하나를 얻은 것이 있다, 이렇게 말했어요.

그 하나는. 하늘은 하나를 얻어서 맑다, 땅은 하나를 얻어서 평안하다. 그러니까 이거 하나를 얻은 이 법계는 본래 맑단 말이에요.

하늘만 맑은 것이 아니고 본래 맑고 청정합니다. 우리 사람도 마찬가지, 하늘만 맑은 것이 아니라 이 하나를 얻으면 우린 본래 얻어 있어요. 이 하나를 확인하면, 이 하나를 깨달으면 우리 마음이 티 없이 맑죠.

여기서 오염되는 게 없으니까. 하늘 위에 그 어떤 먹구름이 껴도 우리가 여기서 바라보는 입장에서는 구름이 하늘 가리니까 하늘이 어두워졌다라고 말하지만, 구름 위로 올라가면 언제나 늘 맑은 하늘이 항상 있잖아요. 근데 구름처럼 잠시 가려진 것처럼 보이잖아요.

그러니까 둘로 나누면 이렇게 가려진 것처럼 보일 수 있으나 본바탕은 이 하나이기 때문에 언제나 맑은 거예요. 또 땅은 하나를 얻어서 평안하다. 우리가 이 하나, 이게 본래 얻어져 있구나라는 걸 깨닫게 되면 이게 지극히 평안한 일이란 말이에요.

이거 말고 우리가 그럼 평안이 깨지는 건 왜 그럴까요? 평화, 평안이 깨지는 것은 둘로 나누기 때문에 깨져요. 너와 내가 둘이 아닌 줄 깨닫는다면 너와 싸울 필요가 없죠. 근데 그것이 깨지고 이 하나가 깨져서 둘이 돼 버리면 상대방과 싸워야 돼요.

적과 아군이 둘로 나뉘고 좋고 나쁜 것이 둘로 나뉘니까 계속 좋아지기 위해 노력해야 됩니다. 맑아지기 위해 노력해야 되고 이것과 저것을 비교하고 분별하고 끊임없이 마음이 혼란스럽죠, 그러니까 진정한 평화가 있을 수 없어요. 항상 싸우는 상태예요.

돌로 나뉘면 저들이 나를 언제 공격하면 어쩌지, 잘못되면 어쩌지 하는 두려움 때문에 신은 하나를 얻어서 신령하다 이랬어요. 뭐, 영묘하다 이런 말을 쓰기도 하고, 그 신이라는 게 따로 있어서 이렇게 말하는 게 아니에요. 사람들이 신, 신 하니까 그 신을 어떻게 생각해요? 신령하다, 우리가 알 수 없다 이거죠.

우리 머리로 알 수 없다. 이 신, 이것을 뭐 진실, 진리를 신이라고도 표현할 수 있어요. 이것은 우리가 머리로 이해할 수 있는 게 아니에요.

신령스러움은 왜냐면 이것이 모든 것을 다 하지만, 이것을 우리가 볼 수가 없으니까, 우리 눈으로는 볼 수도 없고 만질 수도 없고 알 수도 없고, 그러나 이렇게 모든 것을 다 드러내고 있으니까, 이것을 우리가 알 수 있는 방법, 눈, 깊고 혐오듯이 색, 성, 향, 미, 촉, 법을 접촉하는 12처, 18개의 방식으로는, 분별의 방식으로는 알 수 없어요. 그, 이것은 뭐 있다, 없다고도 할 수 없는 텅, 고요한 청정하게 맑은 것인데도 불구하고 모든 것을 다 드러내니까 이걸 신령하다고 했단 말이에요. 골이는 골짜기는 이거 하나를 얻어 가득 차다.

이 도덕경에서는 뭐, 이 도를 뭐 골짜기니, 뭐 신묘한 암컷이니, 뭐 이런 식의 표현을 그냥 비유로들은 거예요. 우리는 우뚝 솟은 산만 보고 산에다가만 보통 이름을 짓죠. 무슨 뭐 천왕봉에 무슨 봉우리 뭐 이런 것들, 그런 것, 그런 걸 올라 산으로.

올라가도 골짜기가 목표인 사람 없잖아요. 골짜기를 통해서 어떻게든 산 정상을 찍고 와야 된다라고 목표 설정을 하잖아요. 사람들은 전부 다 그렇게 봉우리를 좋아하지만, 그 봉우리와 봉우리 사이에 있는 그 골짜기에서 만물을 잉태하는, 만물을 생성하게 하는 물이 거기서 다 흘러내리고 모든 생명이 거기에서 시작되잖아요.

그래서 모든 이 법이란, 이 도라는 것은 모든 것을 이렇게 잉태하는, 거기서 생겨난 모든 생명, 물, 이런 것들이 흘러흘러 바다로 가고, 또 흘러흘러 바다로 가는 과정에서 모든 삼남만상, 모든 존재들이 그 물을 먹고 또 자라고, 그 모든 어떤 존재를 잉태하는 어떤 그런 본질과 같은 거란 말이죠. 그것을 이렇게 꽉 차게 해 주는 게 뭐냐, 골짜기는 텅 비지만 꽉 찼단 말이에요. 그게 바로 이 하나이기 때문에 그렇다, 돌로 다니지 않기 때문에 그렇다, 이렇게 말했어요.

그래서 우리도 이 골짜기와 같아서 하나도 부족한 게 없습니다. 가득 차 있단 말이에요. 우리의 본성은 언제나 가득 차 있어요.

온전히 가득 차 있어요. 조금 전에 했던 이 신은 하나를 얻어 신묘하다 그랬는데, 우리가 신이라, 우리들 또한 신묘하단 말이에요. 나라는 존재 같이 신묘한 게 어디 있어요? 나라고 할 만한 게 아무것도 없는데도 불구하고, 왜 나라고 할 만한 건 생겨나고 사라지는 거잖아요.

고정된 게 아니란 말이에요. 그런데도 불구하고 신령하게 이렇게 살아서 무엇이든 다 한단 말이에요. 이게 신령한 것이고, 또 골짜기처럼 우리는 지금 내 생각을 일으켜서 가난하다, 없다, 부족하다라고 한 생각 일으키니까 없는 것처럼 착각하고 있지만, 사실은 이 골짜기와 같이 모든 것을 잉태하고 있는 생명의 실상이고 근본 바탕이란 말이죠.

가득 차 있어요, 하나도 부족한 것이 없다. 만물은 이 하나를 얻어서 자라난다. 우리가 어떻게 자라나죠? 만물만 그런 게 아니에요.

우리가 어떻게 자라나요? 내가 잘라서 자라난다고 생각하거든요. 당연히 내가 잘라서 돈을 벌죠, 내가 잘라서 공부도 잘하고, 내가 잘라서 직장 생활도 하고 인생을 살지오라고 생각하지만, 내가 잘라서 이렇게 자라나는 게 아니에요. 이것이 우리를 살게 해요.

이것이 우리를, 이 마음 하나가 법 하나가 더 하나가 우리를 이렇게 살아 있게 한단 말이에요. 데이, 살아 있게 하는 나를 자라나게 하는 이 근본이 뭐냐 말이죠. 이게 이 도, 마음, 불성 하는 이것이 이렇게 우리에게 손을 들게 하고, 이 소리를 듣게 하고, 배고프면 밥을 먹게 하고, 졸리면 자게 하고, 키 크게 하고, 여러분, 여러분 키 1cm라도 크게 하거나 1cm라도 줄일 수 있나요? 내가 하는 게 아니에요.

이것이 다 우리를 자라나게 해요. 이렇게 이 하나가 만물을 자라나게 하고 왕과 재후 이랬는데, 아이 세상에 있는 뭐 임금 이런 사람을 얘기한다기보다는 여기서 왕과 재후는 하나를 얻어 천하의 모범이 된다. 이것은 인간들 가운데 가장 으뜸인 사람, 가장 높은 사람, 이런 거예요.

그게 물질적으로 높거나, 뭐, 이게 임금 같은 그런 지위가 높거나, 그런 것이 아니라 옛날에는 그러겠죠. 옛날에는 진짜 왕, 임금은 가장 지혜로운 분이라고 생각했겠죠, 아마. 아주 그 옛날 같으면, 그래서 왕과 재우라는 건 인간들 가운데, 그 불교에서도 그런 말을 해요.

여기도 이제 요걸 답집을 형상한 건데, 어, 왕이 앉는 자리와 부처님이 앉는 자리만 인간과 다르다고 해서 그 위에 이렇게 맛집을, 이렇게 집 안에 또 다른 집을 이렇게 한단 말이죠. 옛날에 비, 눈, 놀, 햇볕이 너무 때 옆에서 이렇게 양산을 세워 주는 이런 것들을 또 형상하는데, 그만큼 이제 우리가 이렇게 높게 받드는 사람이다, 뭐 이런 식의 상징인데, 그런 것처럼, 아, 세간의 왕, 또 출세간의 왕, 이런 걸 상징한 거 같아요. 그래서 왕과 재우라는 것은 이 하나를 얻은 사람을 말한단 말이에요.

이 하나를 얻은 사람은 천하의 모범이 되죠, 세상의 어른이 됩니다. 사람이 이것을 얻으면 진정한 왕이 된단 말이에요. 부처님이 법왕이라고 하듯이, 법의 왕이라고 하듯이, 이 모두가 하나의 덕이다, 이 하나에서 나왔단 말이에요.

그러니 하늘은 그것을 맑게 하는 것이 없으면 갈라질 것이고, 이 하나가 없으면 이 세상 만물이 이렇게 있을 수가 없어요. 땅은 그것을 편안하게 하는 것 없으면 흔들릴 것이고, 신은 그것을 영묘하게 하는 것 없으면 씻을 것이고, 골짜기는 그것을 가득하게 하는 것 없으면 마를 것이고, 그러니까 우리가, 이게 우리가 이 하나를 깨닫지 못한 중생들은 이렇다 소리예요. 하나를 깨닫지 못한 중생들은 이 하나가 없기 때문에 다 갈라져 있잖아요.

네, 네 편, 내 편, 이 나라, 저 나라, 내 가족, 남의 가족, 좋은 사람, 나쁜 사람, 둘로 나누어 가지고 끊임없이 싸우는 세계가 중생들의 세계잖아요. 이 하나를 몰라서 그래요. 내가 저들을 짓밟고 일어서면 내가 성공할 거라고 생각하는 거예요.

저들을 짓밟는 것은 곧 나를 짓밟는 건 줄 모르는 거죠. 둘로 쪼개는 것, 나누는 것, 갈라 놓는 것, 그것이 곧 나를 죽이는 건지 모른단 말이에요. 세상과 내가 둘이 아닌 줄 모르니까 내 기준으로, 내 생각대로 좋다, 나쁘다, 옳다, 그러다, 이 둘로 딱 항상 갈라치게 한단 말이에요, 세상을.

그래 놓고 그 자기 생각에서 만들어 놓은 둘, 둘의 세계에서 어느 편들지 생각하고, 어느 편이 올바른지 생각하고, 내 편은 옳고 저쪽 편은 틀리고 그렇게 한단 말이죠. 그 자기들 편 먹고 이렇게 싸운단 말이에요. 그래서 어느 편인지 불분명한 사람을 싫어해요.

명확하게 이 편인지 저 편인지 확실하게 해, 이래 얘기해요. 이 되게 웃기죠? 그 종교인들한테도 여러분, 이렇게 두 가지, 이렇게 정치 성향 두 가지가 있다 그러면 이쪽이나 이쪽에 있는 사람들은 "우리 편이야, 저쪽 편이야? 정체를 분명히 해!" 이렇게 원해요. 그래서 "나 이 편이에요." 하면 좋아하고 열광을 해요.

"야, 훌륭한 종교인 나왔다!" 이러고 열광을 해요. 나. 저쪽 편이다, 이러면 "저, 저런 놈들이 종교인을 하니 뭐가 되겠냐?"고 하고 싸운단 말이에요.



그러니까 무엇이든 이렇게 나누려고 한단 말이에요. 그리고 나뉠 수가 없는데 어떻게 해요? 이념 따라 이렇게 이쪽이 맞는 것도 있고, 이념 따라 저쪽이 맞는 것도 있는데, 이념 따라 그냥 상대적으로 "아, 이럴 수 있구나, 저럴 수 있구나, 이게 맞구나, 요건에선 또 이게 맞구나" 이렇게 얘기할 순 있지만, 어떻게 이것이 절대적으로 맞거나 저것이 절대적으로 틀리거나 이럴 수가 있어요? 그러니까 우린 이렇게 편 먹는 걸 좋아하는 거예요. 편이 없으면 싫어하죠.

이게 하나를 몰라서 그래요. 하나를 모르면 이것이 없으면, 이것을 맑게 하는 것이 없으면 갈라질 것이다. 그러니까 중생들의 세간이 이렇게 갈라져 있는 거예요.

온갖 것들이 갈라져 가지고 젊은 층과 나이 든 층이 탁 갈라져 가지고 싸워요. 이번에 무슨 연금 가지고도 또 싸우고, 또 요즘엔 또 여성과 남성이 갈라져서 싸워요. 어떻게 그 여성과 남성을 둘로 나눠 싸울 수 있어요? 무슨 페미 논쟁으로 막 그냥 세상이 지금 젊은 친구들은 그 논쟁 때문에 시끌시끌하대요.

서로가 서로를 적인 것처럼 몰아세우기도 하고, 정치적으로도 그렇고, 종교적으로도 그렇고, 모든 사사건건 안건에 대해서 전부 다 둘, 둘로 나눠 가지고 어느 편인지를 가지고 나눠서 싸우는 이 갈라치기하는 세상이 바로 이 하나가 없어서 그렇단 말이죠. 땅은 그것을 편안하게 하는 것 없으면 흔들릴 것이고, 그러니까 우리가 항상 흔들려요, 혼란스러워요. 내 생각도 혼란스럽죠, 흔들리죠.

이 편에 있었는데, 이 편이 항상 맞는 게 아니거든요. 저 편에 있어 보니 저 편이 또 항상 맞는 게 아니거든요. 어느 편에 들어가 있어도 항상 흔들려요.

그건 진실이 아니니까, 분별이니까. 분별이라는 것은 망상이기 때문에 그래요. [1]임시적으로만 옳거나 임시적으로만 틀릴 수 있어요. 조건적으로만, 상대적으로만 옳거나 상대적으로만 그럴 수 있어요. 절대 선, 절대 악이라는 건 없어요, 어디에도.

근데 자기는 그런 것이 있을 거라고 생각하고 그쪽 편을 먹었단 말이에요. 근데 그쪽이 잘못됐을 때 흔들려요. 내가 잘못 생각한 건가, 혼란을 느껴요.

왜냐면 분별에 기대어 있으면 이쪽 극단에 가 있든 저쪽 극단에 가 있든 그건 중도가 아니에요. 있는 그대로를 있는 그대로 바라보는 이 하나님의 안목이 없습니다. 그러니까 항상 이쪽으로 갈까 저쪽으로 갈까 항상 흔들리는 거예요.

내가 요로 가야 되나, 저로 가야 되나? 요 편을 먹어야 되나, 저 편을 먹어야 되나, 어느 게 나한테 이익이 될까, 이렇게 끊임없이 흔들릴 수밖에 없어요. 왜냐하면 논리로 따지면 요쪽도 논리가 맞고 저쪽도 논리가 맞고, 이쪽 논리 가지고 논문 100편을 천편을 쓸 수 있고요, 저쪽 논리 가지고 논문 천편을 쓸 수 있어요. 또 논리라는 게 그렇게 허망한 거예요.

논리라는 건 분별심을 막 조합해 이리저리 조합해 낸 거예요. 신은 그것을 영묘하게 하는 것 없으면 시들 것이다. 이 하나를 깨닫지 못하면 우리는 시들어요.

왜 시들까요? 이 이 하나인 줄 모르고, 어디로 하나가 아니고 둘이면 내가 지금은 부족하고 더 성공적인 때가 있다고 생각하잖아요. 그래서 그걸 향해 쫓아가고 달려가고 나아가고 애써야 되고 노력하고 집착해야 되잖아요. 취해야 될 것이 있고 버려야 될 게 있어요.

취해야 될 것을 취하기 위해서 추구하고 노력을 해요. 근데 나보다 항상 더 잘하는 사람이 있으면 항상 진이 빠져요. 힘이 빠지고 하루 종일 가지려고 노력하고, 하루 종일 내가 싫어하는 것을 없애려고 노력하고 애쓰고, 그러니까 매일같이 반만 되면 시들어요.

기운이 빠지고 싸우느라고, 취사 간택하느라고 힘을 다 써 버려 가지고, 그러니까 이렇게 시든 시들어 버리는 사람이 된단 말이야. 항상 살아 있지 못하고, 항상 깨어 있지 못하고, 항상 생생하지 못하단 말이야. 아기들 보세요, 아기들.

여러분, 간난 아기가 엄마한테 삐져 가지고 기분 나빠 가지고 한 2틀 3일 떨어져 있는 거 봤어요? 아기가 신기하지 않나요? 아기는 그러진 않잖아요. 음, 강아지 고양이도 좀 그렇지 않나요? 이 강아지 고양이들 또 약간 떨어질 때가 있긴 있는데, 그때 또 금방 잊어버리죠. 금방 잊어버리든지, 또 좀만 잘해주면 또 금방 또 꼬리를 흔들고, 분별이 없어 그래요, 분별이.

우리 사람은 분별을 취해 가지고 그 분별에 끌려다니느라고 괴롭죠. 그러니까 항상 갈라지고 흔들리고 시들, 시드는 게 우리 중생이란 말이에요. 이 하나가 없어서 그래요.

모든 원인이, 또 골짜기는 그것을 가득하게 하는 것 없으면 마를 것이고, 이게 풍요롭지 못하단 말이에요. 이렇게 말라 비틀어져 있단 말이에요, 중생들은. 몰래 이렇게 갖춰져 있는데, 무엇이든 충분히 나를 살아있게 하는 모든 것이 충분한데, 먹을 것 실컷 먹고 마실 것 실컷 마시고 잠 잘 것 실컷 잠을 자도 말라간단 말이에요.

마음이 매말라 있기 때문에, 마음이 괴롭기 때문에, 내가 원하는 걸 더 못 가졌다 생각하니까. 근데 그걸 갖고 나서도 또 말라가요. 난 100억을 벌 거야, 10억을 벌 거야 했는데, 그 10억을 벌고 나면 윤택해져야 되잖아요? 윤택해지지 않아요.

10억을 벌고 나면 내 주변에 30억 이상 가지고 있는 부자들만 쫙 포진이 있거든요. 사람은 자기보다 조금 어떻게든 길을 써 가지고 자기보다 조금 나은데 줄을 되고 싶거든요. 그럼 내 주변에 나보다 또 더 나은 사람 있으니까 또 헐벗고 굶주리고 시들시들해져요.

내가 또 없는 것 같아요. 그래서 또다시 100억을 목표로 달려가요. 겨우겨우 100억을 벌고 나면 내 주변에 또 다 200, 300억 부자들이 있단 말이죠.

그니까 옛날에 어떤 거사님이 좀 욕심을 부려서 우리가 여력이 안 되는데도 불구하고 부자 동네에 교육시키겠다고 고등학교는. 좋은 데 보내자 해서 이사를 가서 그 아이를 그 부자 동네에 가서 입학을 시켰더니, 보살님이 회사가 있는데 뜨하고 뭐가 오길래 봤더니 백화점에서 700만 원을 긁었다는 얘기를, 그 놀라 가지고 "이거 뭐냐?" 그랬더니 딸 머리끝에서 발끝까지 새 학기 맞아서 싹 입히는데 700만 원이 들었다는 얘기를 했다는 얘기, 저 이 얘기들은 게 한 10몇 년 됐어요, 벌써. 그 이게 왜 이랬냐고, 왜 이런 짓을 했냐고 그랬더니 "이 학교 다니려면 이 정도 생각한 거 아니냐?"고, "여기서 기본이다, 이 정도 이 학교 다니려면 욕 먹지 않고 다니려면 기본이다." 거기가 어딘지 모르겠지만 뭐 드라마 보면 그런 데가 있긴 있나 보죠.

그럼 보세요, 거기 가도 끝나는 게 아니잖아요. 거기서 그거 맞추고 살려고 막 길을 써야 되잖아요, 시들어요. 남편은 그 카드 보면서 시들시들해진단 말이에요.

온갖 것은 그것을 잘하게 하는 것 없으면 없어져 버릴 것이다. 이 이 모든 것이 이 마음, 이 진실 이거 하나에 있어서 우리가 이렇게 살아 있는 거예요. 이게 진짜 생명이에요.



그런데 우리는 살아 있어도 살아 있는 게 아니에요, 죽어 있어요. 그래서 뭐 저 불교에서 그런 얘기 많죠, 뭐 이렇게 뭐 이제 관을 매고 가는데 한 한 사람의 관을 여섯 명이 들고 가는데 여섯 명의 죽은 사람이 하나의 살아 있는 뭐 존재를 매고 간다, 이런 표현도 하고요. 살아 있어도 산 게 아니다, 하루 깨어 있는 마음으로 살면 이게 천 년의 보배가 되는데, 100년을 살아도 분별하고 살면 그건 산 게 아니라 죽은 것이다, 이런 말 하거든요.

그래서 우리가 어, 마음 챙김을 하고 깨어 있어라고 하는 것이, 깨어 있다는 게 뭐예요? 깨어 있다는 게 깨어서 살아 있다는 거거든요. 그러면 그전엔 뭐 하고 있었다는 얘기예요? 죽어 있었다는 얘기거든요. 즉, 분별하고 있는 건 죽어 있는 거예요.

생각 속이라, 생각 속에서, 생각이라는 환상 속에서, 꿈 속에서, 분별 망상의 꿈 속에서 사느라고, 분별 망상의 꿈 속에서 시들시들 죽어 있는 거예요. 진짜 살아 있지 못한 거예요. 진짜 살아 있는 이 살아 있음이 이렇게 그냥 마음껏 생생하게 살아 있는데도 불구하고, 이 살아 있으면은 관심이 없단 말이에요.

죽어 있는 거에만 관심을 가지고, 네, 서로서로 앞다퉈 죽고 죽이면서 살고 있잖아요. 그러니 온갖 것을 자하게 하는 이거, 이 마음 하나가 이게 살림살이어서 이거면 충분해요. 이거면 살아 있는데 아무 문제가 없어요, 충분해요.

그런데 이것을 모르니까 없어져 버린다, 죽어 버린다. 그래서 우리는 있어도 있는 게 아니에요, 가짜로 있는 거예요. 망상 속에서 죽어 있는 것과 똑같아요, 없어져 버린단 말이에요.

우리가 진짜 살아 있는 이 생명, 진짜 자기가 죽었단 말이에요. 뭐 하느라고? 애고, 아상 쫓아다니느라고, 가짜 나에게 밥 주고 사느라고, 가짜 나만 애지중지하고 사느라고, 가짜 나를 살리느라고 진짜 내가 죽었단 말이에요. 그니까 진짜.

나는 없어져 버렸죠. 왕과 재후는 그들을 모범되게 하는 것 없으면 넘어질 것이다. 이 하나가 없으면 우리는 넘어져요.

삶에서 고꾸라집니다. 뭐가 고꾸라지고 넘어지는 걸까요? 그 괴로워 한단 말이야. 괴로운 게, 그 괴로움 속에 무너져 내린단 말이에요.

본래 이 하나의 눈을 뜨면 본래 괴로운 게 없어요. 모든 것이 다 평등하게 일인데, 성공하는 거, 실패하는 게 똑같은 하나의 일이에요. 우린 그것이 성공인지 실패인지 알 수 없어요.

돈을 날린 일이 성공인지 실패인지 알 수 없고, 자식이 내가 원하는 A라는 회사를 취직하지 못하고 B나 C에 취직한 것은 좋은 일인지 나쁜 일인지를 알 수 없습니다. 근데 우리는 생각은 결론을 내요. "나는 A를 원했는데 C를 갔어.

너는 실패했어." 하고, 알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자기 분별의 생각을 믿고 따라간단 말이에요. 그러니까 넘어지죠. A라는 회사에 집착하지 않았으면, A라는 회사를 못 가서 무너졌어, 넘어졌어, 이런 일이 없잖아요.

아예 애초에 원하되 원하는 바가 없었으면, 집착하는 바가 없었으면, 그 C라는데 갔으면, 그건 A를, A라는 것에서 실패했기 때문에 넘어졌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C에 간 게 아닌 거예요. 내 인연이 C여서 C를 간 거예요. 가장 완전한, 자연스러운, 부드러운, 온전하게 내가 가야 할 그 자리에 정확하게 간 거거든요.

전혀 넘어진 게 아니에요. 근데 우리는 그걸 넘어졌다라고 생각하고 해석하잖아요. 내가 얼마를 돈을 벌고 싶었는데 못 벌었단 말이에요, 그럼 그 실패라고 생각하잖아요.

가장 정확하게 한 성공인데, 자식에게 어느 정도 성적표를 받아와라고 정해 버리면, 집착해 버리면, 그걸 못 받아오면 실패했다고 넘어졌다고 생각한단 말이에요. 왜 이렇게 넌 하나 제대로 하는 게 없니라고 한단 말이에요. 그 아이는 언제나 가장 완전하게 자기 몫을 온전하게 해내고 있었는데, 1등은 1등의 자리가 자기 자리고, 중간 등수는 중간 등수가 정확히 자기 자리고, 꼴찌는 꼴찌가 정확히 자기 자리예요.

내가 분별하지 않으면, 뭔가를 이래야 돼, 저래야 돼라는 그 생각에 묶여 있지 않으면, 우리는 삶에서 무너져 내릴 수가 없습니다, 넘어질 수가 없습니다. 그냥 인연 따라 일어나야 할 일이 일어날 뿐이에요. 그리고 이 세상의 모든 사람은, 모든 이 몸뚱아리는, 이 몸뚱아리는 생멸법이거든요.

생멸법의 특징은 생주이멸, 성주계공, 생로병사예요. 즉 생겨나면 머물렀다가, 머물면서 이렇게 좋고 나쁜 일들이 이렇게 흘러요. 좋고 나쁜 일들이 막 이렇게 일어나요.

그러면서 머물러 있다가 변해 가요. 이렇게 좋았다 나빴다, 좋았다 나빴다 하는 과정 속에서 변해 가다가 죽어요, 사라져요. 그게 모든 존재의 당연한 삶의 법칙이에요, 법칙.

그러니까 살면서는 항상 승승장구만 하면 사는 건 말이 안 되는 거예요. 항상 들숨만 쉬면서 살 수 있을까요? 항상 밤없이 낮만 있으면 살 수 있을까요? 들숨과 날숨이 교차해야 돼요. 이게 고동치는 생명의 파장이에요.

성공과 실패가 언제나 왔다 갔다 해야 되는 거예요. 그게 성공이 기쁨만 있으면 거기서 기쁨을 못 느껴요. 실패를 한번 경험하고 나서 기쁨을 경험할 때, 그때 기쁨이 진짜 기쁨이 돼 버려요.

태어나면서부터 항상 돈이 많았으면 돈이 생긴 건 기쁜 게 아니에요. 근데 돈이 없어 봤던 사람이 돈이 생기면 더 기쁜 것처럼, 이렇게 왔다 갔다 하는 과정 속에서 성공도 있고 기쁨도 있고 모든 것이 이게 생명이란 말이에요. 그러니까 이것은 이상한 게 아니라 당연한 거죠, 당연한 거잖아요.

그래서 우리가 삶에서 내 뜻대로 되기도 하고 안 되기도 하고, 성공도 하고 실패도 하고, 어떤 일이 이루어지기도 하고 안 이루어지기도 하고, 이런 다양한 일들이 일어나는 거예요. 근데 그 모든 것이 내가 해석해서 판단, 분별해서 이건 성공, 이건 실패라고 해석하지 않으면 그것이 성공이거나 실패일까요? 나는 들숨만 쉴 거야라고 하면 날숨은 실패죠. 나는 낮만 경험할 거야라고 하면 밤이 오면 밤마다 실패겠죠.

나는 성공만 할 거야라고 하면 실패가 왔을 때 잘못된 거라고 느끼겠죠. 근데 그 생각이 없으면 어떨까요? 들숨이 올 때는 들숨을 받아들이고, 날숨이 올 때는 날숨을 받아들이면서 아무 문제가 없어요. 봄, 여름이 올 때와 가을, 겨울이 올 때 아무 문제가 없어요.

내가 생각으로 나는 가을, 겨울은 싫어라고 할 때 겨울이 오면 너무너무 괴롭잖아요. 근데 그 생각이 없고, 없으면 있는 그대로 봄, 여름, 가을, 겨울을 다 받아들이잖아요. 우리 삶도 똑같단 말이에요.

돈이 있을 때와 없을 때는 그냥 봄, 여름과 똑같단 말이에요. 돈이 있으면 돈이 있음을 받아들이고, 돈이 없으면 돈이 없음을 받아들인단 말이죠. 그거는 문제거나 성공, 실패가 아니라, 그 해석을 하지 않으면 그냥 봄, 여름이 있고 가을, 겨울이 있듯이 돈이 있을 때가 있고 돈이 없을 때가 있고, 또 이 자연에는 풀도 있고 나무도 있고 곤충도 있고 짐승도 있듯이 인간계에도 남자도 있고 여자도 있고, 키가 큰 사람도 있고 작은 사람도 있고, 돈 버는 재주 있는 사람도 있고 말 잘하는 사람도 있고, 뭐 머리를 잘 쓰는 사람도 있고 몸을 잘 쓰는 사람도 있고, 저마다 자기마다 특출난 게 있잖아요.

사자는 으르렁거리는 걸 잘하고 토끼는 풀 뜯어 먹는 걸 잘하고 하듯이, 저마다 각자 다른 걸 잘해야만이 세상이 이렇게 유지가 되잖아요. 완벽하게 필요하잖아요, 모든 역할이. 의사는 없어도 돼요.

우리가 사실은 본래 자연 의사가 있기 때문에. 근데 농부가 없으면 안 될 수도 있거든. 이, 이 뭐 이것도 또 참 본별이다만서도요, 좋고 나쁘고 옳고 그르고 높은 그런 직업이 없잖아요.

그런 계층이 없어요. 그러한 모양이 없습니다. 모든 모양이 다 필요해요.

모든 것이 다 필요해요. 모든 사람이 다 필요해요. 이런 사람도 있고 저런 사람도 있어야 돼요.

그러면 자기는 가장 자기다움을 받아들일 때 아름다운 거예요. 그러니까 기가 막히게 법정 스님께서 20몇 년 전에 했던 책 중에 제가 정말 가슴이 와닿고 너무 좋았던 글귀가 그거였어요. "나는 부처님처럼 사는 것을 원하지 않는다.

나는 그저 나답게 살고 싶다." 나답게 사는 방식으로 옳다고 여기는 건 아니다. 그러나 나는 나답게 살았을 때 가장 자연스럽고 가장 편안하고 그럴 뿐이다. 제가 그 당시 법정 스님은 스님으로서의 이상적인 모습이라고 정해 놓은 다음에 나도 법 스님처럼 살고 싶어서 막 따라가려고 길을 썼단 말이에요.

이것저것 따라해 봤어요. 그 쉽지가 않더라고요. 근데 가만히 보니까 모든 스님들이 전부 다 법정 스님처럼 "산에만 산에는 꽃이 피네." 하면서 산에만 숨어서 살면 부처님 법은 누가 전하고, 그 당시 저처럼 또 장병들에게 누가 또 이렇게 법회를 하고, 아, 나는 그걸 따라갈 필요는 없구나.

법정 스님이 이 말 하신 거구나. 나는 그냥 나답게 사는 것이 그것이 법이구나. 가장 자기답게 살 때 가장 조화롭잖아요.

가장 애쓰지 않잖아요. 가장 편안하잖아요. 부드럽게 삶이 저절로 이루어진단 말이에요.

그것이 지혜로운 삶이죠. 근데 우리가 애를 애날 때, 분노할 때, 뭐 이럴 때 막 복잡하고 혼돈스럽고, 여기서 말하듯이 삶에서 흔들리고, 갈라치게 하고, 시들고, 마르고, 없어져 버리고, 넘어지는 경우는 언제냐 하면 항상 생각할 때예요. 생각 속에 있으면 항상 이런 일이 벌어져요.

여러분, 이렇게 스마트폰 보다 보면 항상 그 스마트폰에 있는 내용에 대해서 생각하게 되거든요, 자동적으로 얘가, 그 얘가 생각하다 이것만 보고 있으면 자꾸 생각을 하고 있고, 생각을 따라가고 있으면 항상 뭔가 갈라지고, 흔들리고, 시들고, 마르고, 없어져 버리고, 넘어져요. 불안해요, 혼란스러워요, 뭔가 문제가 많아요. 어떤 상황 속에 끌려가서 그걸 생각하고 해석할 때 혼란스러워요.



근데 문득 그 모든 것을 탁 내려놓고 그냥 가만히 있으면, 지금 있는 것과 함께 있으면, 지금 뭐가 있어요? 맑은 공기를 이렇게 들이쉬고 내쉴 수 있어요. 이, 이 손에, 뺨에 비춰지는 이 따스한 햇살을 그냥 온전히 누릴 수 있는 이 기쁨 속에 그냥 이렇게 있을 때, 이 봄날에 차가 오면서 따스한 이 바람을 온몸으로 이렇게 마주하면서 있을 때, 이 파란 하늘을 그냥 이렇게 경험하며 그냥 있을 때 괴롭지 않아요, 혼란스럽지 않아요, 그 고요합니다, 아무 문제가 없어요. 근데 다시금 생각 속으로 빠져 들어가면 곧장 막 괴로워 죽겠단 말이에요.

이게 삶의 비결입니다, 비법입니다. 생각으로 빠져들지 않으면 되고, 생각으로 빠져들었을 때 나를 탓할 건 없어요. "아, 또 너 왔구나, 에고, 아상, 분별심, 너 또 시작했구나, 네가 뭐 맨날 하는 게 그거니까, 오케이, 냅둬, 냅두세요." 왜? 걔도 이 법에서 나왔단 말이에요, 걔도 법의 자식이에요.

그니까 걔는 개 역할이 있어요, 이 몸이라는, 이 몸을 유지하는 역할이야, 걔는, 왜? 이 몸이 자기라고 굳게 믿으면서 이 몸이 나야라고 하면서 괴로워도 있어야 얘가 유지가 돼요. 얘가, 그러니까 걔는 이 사법계 현실 세계를 유지하기 위해서 필요해요. 그러니까 걔는 살아가게 냅두세요.

그리고 걔 도와줘야 돼, 걔도. 걔가 배고프면 먹도록 도와줘야 돼요. 음, 걔가 나쁜 놈 아니에요.

그럼 분별한다고 해서 "나를 너는 맨날 분별만 하냐?" 하고 막 미워할 필요 없어요. 그 잘하고 있는 거예요, 그냥 깨달으면 돼요, 알면 돼요. 에고가 왔을 때, 에고는 지금 할 일 하는구나 하고 인정해 주세요.

내가 거기에 같이 맞장 치면서 끌려다니지만 않으면 돼요. 거기 사로잡히지만 않으면 돼요. 그걸 과도하게 믿지만 않으면 돼요. [2]그러므로 천한 것은 귀한 것을 근본으로 하고 높은 것은 낮은 것을 바탕으로 한다. 이 세상 모든 것은 본래 천한 것도 없고 귀한 것도 없어요. 높은 것도 없고 낮은 것도 없고요, 큰 것도 없고 작은 것도 없고요, 인생은 좋은 인생도 없고 나쁜 인생도 없어요.

훌륭하고 훌륭하지 않은 게 없어요. 본래, 본래 이 하나의 자리에서는 본래를 깨달으면 그냥 이렇게 텅 빈 이 아름다움이 아름다움이라고 말할 수도 없어요. 뭐가 없어요, 그냥 공적한 텅 빈 이 하나의 그냥 진실뿐이란 말이야.

여기 뭐 하나 붙을 수가 없어요. 좋다 나쁘다라는, 둘로 나뉘는 분별이 일체 없단 말이에요. 근데 우리가 분별의 세계로 빠져 버리면, 하나를 놓쳐서 분별의 세계로 빠져 버리면 이 세상이 창조가 돼 버려, 본래.

없는데, 이 세상 온 세상에 이거 하나밖에 없었으면 이거는 뭐가 아니에요. 이건 길다, 짧다도 할 수 없어, 이거밖에 없으면. 이거 하나밖에 없었는데, 이게 어떻게 길거나 짧을 수 있어요, 이거 하나밖에 없는데.

근데 인연 따라 갑자기 여기에 다른 것이 두이 딱 생겨 버리면, 갑자기 얘는 이거의 상대에서 작다라는 것이 생겨나지요. 나는 키가 작다가 탄생하잖아요, 이렇게 분별하면 작은 뭐가 있다라고 탄생이 된단 말이에요. 그럼 얘는 나는 크는 얘처럼 키가 크고 싶어라고 한 생각 일으키면 괴롭겠죠.

그럼 저기 목표가 돼서 자기는 공핍하고 키가 작고 못난 존재가 되겠죠. 근데 또 이런 존재가 와 버리면, 어 나는 키가 큰게 돼 버리고, 그럼 나는 키가 큰게 맞아요, 작은게 맞아요? 크다도 없고 작다도 없는 가운데 인연 따라 상대적으로 이것이 있음으로써 저것이 있고, 저것이 있으므로 이것이 있는 연기적으로만, 연기적으로만 있는 거잖아요. 그러니까 큰게 없으면 작은 것도 없고, 작은게 없으면 큰 것도 없죠, 그 양변이 다 없단 말이죠.

본래 진실이 그래요. 근데 우리는 이 하나를 놓치고 둘 셋으로 쪼개게 되면 곧장 쪼개는 의식이 생겨요, 둘로 나누는 의식, 그걸 분별 의식이라고 해요, 둘로 나누어서 구분하는 의식. 그니까 그 분별 의식에서 내가 분별해서 만든 세상이 탄생한단 말이야, 큰 거, 작은 거, 옳은 거, 끄은 거, 사람과 동물, 이 존재와 저 존재, 온갖 것들이 탄생한단 말이에요.

분별의 세계 속에서 만법 유식, 만법이 오로지 자기 분별 의식으로 탄생한단 말이에요. 근데 그건 실제하는 게 아니에요, 의식에서 만들어진 거예요. 그렇게 분별로, 의식으로 만들어 놓으면 좋은 건 취하고 싫은 건 버리려고 해요.

올바른 건 취하고 나쁜 건 버리려고 하고, 둘로 나누면 항상 적과 아군, 둘로 나눠서 하나 취하고 하나 버리려고 한단 말이에요. 그럼 세상을 내 뜻대로 통제해야 돼요, 취할 건 가져야 되고 버릴 건 없애 버려야 돼요. 삶이 힘들어져요, 해야 될 일이 많아져요, 유의 조작이 넘쳐나요, 세상 사람들과 싸워야 돼요.

그렇게 되면 싸워야 되니까, 나와 너, 적과 악은 둘이 아니고, 본래 싸울 필요 없는, 나눌 필요 없는 그 어떤 일도 없는 이 진실을 놓친단 말이죠. 그러니까 이것은 저것을 미워하고, 저것은 이것을 미워하는 일밖에 못 해요. 그 모든 것은 서로 연애에서 일어났을 뿐이라는 걸 깨달으면, 본래 없는데 텅 빈 가운데 그냥 인연 따라 일어났을 뿐이라는 걸 알면, 이것이 있으므로 저것이 일어났을 뿐이라는 걸 알면, 아, 저것이 없으면 이것도 없구나를 알아요.

저 사람이 있으므로 내가 있어서, 저 사람이 없으면 나도 없단 말이에요. 나만 살고 저들은 다 죽이겠다, 이게 가능할까요? 옛날에 이 둘로 나뉘는 이분법의 극치, 어리석음의 극치가 인류를 그런게 심각하게 논의되고 실천돼 썼다 그러잖아요. 불과 얼마 안 된 시기에, 얼마 전에까지, 얼마 안 된 몇십 년 100년 뭐도 안 된 시기에 인류 인간들을 열등하고 우등한 유전자로 나눠 가지고, 열등한 유전자는 다 제거해 버리자, 그리고 우월한 유전자끼리만 살아서 지구별을 아름답게 만들자, 뭐 이런 뭐 우악 같은 이런 말도 안 되는 게 있었다는 거죠.

그리고 기준을 누가 나눌 거예요? 뭐, 뭐 나치인가요? 그들은 그 기준을 자기, 자기, 자기 피 같은 사람들 살리고 나머지 다 죽여야 된다 믿고, 또 종교적인 사람들 어때요? "우리 종교 믿는 사람은 우월이야, 살리고 나머지는 다 죽여야 돼." 해서 종교 전쟁을 일으킬 수도 있고, 그렇게 해서 만약에 우월한 유전자만 80억 인구 가운데 40억을 딱 제거했어요. 열등한 유전자 40억을 제거하면 그 40억은 우월한 사람께 남은 건가요? 그 40억 중에 나머지 20%, 20억은 또 열등한 유전자가 돼 버려요. 그럼 그 20억은 또 죽여야 돼요.

그럼 나머지 20억이 남고, 그 20억이 남으면 또 10억을 제거해야 되고, 10억이 남으면 또 5억을 제거해야 되고, 언제까지 갈까요? 둘이 남을 때까지, 그 둘이 남으면 그중에 또 우등과 열등이 생겨요. 이게 얼마나 말도 안 되는 어리석음이에요. 근데 인류 역사는 이러한 말도 안 되는 어리석음이 지배해 왔던 세계예요.

그것도 그게 옳다라는 망상을 모른 채, 그러니까 전쟁을 일으켜서 저들은 죽여도 된다, 우리 같이 훌륭한 존재가 아니기 때문에, 이런 생각을 했잖아요. 피부 색깔 때문에 저들은 노예를 부려도 된다고 생각했거나, 이게 둘로 나누는 어리석음에서 온단 말이죠. 그래서 이 세상 모든 것은 이렇게 자기 분별 의식에서 인연 따라 연기적으로, 그런 것, 그런 것 같이 보이는 옳은 것처럼 보이고, 그런 것처럼 보이는 큰 것처럼 보이고, 작은 것처럼 임시적으로만 보이는 그런 것들이 있을지언정, 정해진 옳고 정해진 그름이 정해져 있지 않아요.

그 모두가 한 몸이에요. 그게 진정한 자비심이고, 진정한 사랑이고, 동체의 대비심이에요. 그 누구도 미워하지 않아요.

그 누구도 이 진리에서는 소외되지 않습니다. 우리 종교만 사랑해, 이거 엄청난 폭력이고 엄청난 어리석음이죠. 우리 종교 믿는 사람만 사랑할게, 싹 뽑아 가지고 저 극락 천상 천당으로 보낼게, 얼마나 큰 어리석음이고 얼마나 큰 무명이에요, 어리석음이에요, 얼마나 큰 폭력이에요, 그게 사랑이에요? 우리 종교 믿는 사람만 선민 사상을 잘못 이해해서 이스라엘인들만 하나님은 사랑해, 이 가장 어리석은 생각이죠.

그러니까 나중엔 그건 어리석은 생각이었다, 하나님은 그런 분이 아니었다, 이렇게 해석하잖아요, 다시. 그래 놓고 예를 들어 또, 아, 그게 사람만 사랑해였다면 동물은 막 죽어도 된다고 생각한단 말이에요. 동물은 사람을 위해서 막 희생돼서 인간의 먹이가 돼도 된다고 또 생각한단 말이죠.

그것 또한 나누는 거예요. 이렇게 둘로 나뉘는 것이야말로 어리석음의 시작이에요. 근데.

아직까지 이 세상이 둘로 나누는, 이 둘로 나누어서 하나를 취하고 하나를 버리고 어느 편에 들어야 되고 이런 것에서 놓여나지를 못하잖아요, 아직도. 그래서 이 하나에 깨어나는 사람들, 이 하나를 어, 이제 공부하는 사람들, 그런 사람들이 점점 늘어나야 이 세상에 진정한 평화가 올 수가 있습니다. 이것이 진정한 평화거든요.

이런 까닭으로 왕과 제후는 스스로를 고와 같은 사람, 짝 잃은 사람, 보좌할 것 없는 사람이라고 부른다 그랬어요. "그와 같다, 혼자 있다." 이거예요. 혼자, 짝 잃은 사람, 짝이 없다, 혼자 있다.

이 하나뿐이다, 막 이거예요. 온 세상, 온 우주가 다 분별하는 눈으로 보면 다 나뉘어 있지만, 둘, 셋, 넷, 다섯, 만법으로 쪼개진 것 같지만, 이 마음을 깨달으면 이 하나를 확인하면 홀로 있단 말이에요. "천상천하 유아독존"이란 말이에요.

고정, 정상에 나 홀로 있는 듯하단 말이죠. 둘이 아니기 때문에. 그래서 요렇게도 표현할 수 있단 말이죠.

그와 같은 사람, 짝 잃은 사람, 보살 것 없는 사람, 특별할 것 없는 사람. 이건 특별함이 아니에요. 우리가, 우리는 사람은 특별함을 좋아하잖아요.

특별함은 진실, 진리가 아니에요. 특별함은 특별하지 않은 것들을 딛고서 특별함이 되는 거거든요. 그 흔하디흔한 거예요, 그냥.

평범한 이 모든 것이 진실이 아닌 게 없단 말이에요. 이것이 바로 천한 것, 흔한 것을 근본으로 삼는 것이 아니겠느냐. [3]뭐, 천한 것을 근본으로 삼는다고 하지만, 아까. 말하듯이 어떤 천한 것만이 옳다, 이런 얘기를 하는 게 아니에요. 천한 것은 곧 천한 것에 의지해서 귀한 것이 나온다, 이런 연기적인 진실을 깨닫는 얘기예요.

그래서 어디에도 머물지 않는, 어느 극단에도 치우치지 않는, 그러니 어디 특별한 거 하나를 막 귀하다고 여겨서 잡는 게 아닌 거예요. 그럼 모든 것이 전부 다 평등해진단 말이죠. 그래서 이렇게 말해요.

"지극히 영예로운 것, 지극히 특별한 것은 특별하고 영예로운 것이 아니다. 구슬처럼 아름다운 옥이 되려 하지 말고 거친 돌처럼 되라." 이런 얘기를 하거든요. 우리는 전부 다 지극히 특별한 사람이 되고 싶잖아요.

막 영예로운 사람, 남들보다 더 많이 가지고 더 특별하고 더 고귀하고 더 괜찮은 사람, 그런 게 되고 싶어서 남들을 딛고 일어나고 밟고 일어나고 좋은 평가를 받으려고 애쓰고 더 특별해지기 위해서 막 길을 쓴단 말이에요. 근데 그 특별한 것은 특별한 것이 아니에요. 자기가 특별해지고 나서, 부처가 되고 나서, 그 대단한 부처가 되고 나서 이 공부가 끝나는 게 아니에요.

한 명의 돌도 아닌 부처가 되고 나서 이 세상의 우두머리로 딱 올라서는 그런 공부가 아니에요. 부처가 되고 나면 그럴 내가 사라지는 거예요. 가장 위대하고 가장 고귀한 존재가 되는 것임과 동시에 가장 천한 게 되는 거예요.

그것이 둘이 아닌 것에 깨어나는 거예요. 그러니까 부처는 저 아무리 고귀한 것 속에도 있고 가장 발밑에 풀 한 포기 속에도 있어요. 있고, 가장 고귀한 거, 가장 천한 것 속에 두루두루 불성이 있다 하는 이유가 뭐겠어요? 그 똘아이 짓 한다는 소리예요.

근데 우리는 뭔가 뛰어난 사람이 되고 싶고, 고귀하고 영예롭고 명예가 있고, 이런 존재가 되고 싶어 하잖아요. 더 많이 갖고, 그거 위해서 평생을 노력하잖아요. 모든 사람이 지금보다 더 많은 것, 딴 사람보다 더 많이 갖는 것, 더 위대해지는 것, 이거를 위해서 평생 애쓰고 노력하면서 목매고 살잖아요.

진리 아닌 거, 이걸 반야심경에서 전도 몽상이 됐다, 말 뒤집힌 허망한 망상으로 완전 180도 뒤집혀 가지고 반대, 진리와 반대인 것만 쫓아다니며 살았단 말이죠, 우리가. 더 특별해지는 거, 있는 그대로의 심심하고 평범한 아무것도 아닌 그거는 지금 완성형이잖아요. 지금의 나, 있는 그대로의 나, 그 누구와도 비교하지 않으면 높을 것도 없고 낮을 것도 없죠.

인연 따라 상대적으로 분별해 보면 높을 수도 있고 낮을 수도 있지만, 왜 나보다 낮은 것과 비교하면 높고, 높은 것과 비교하면 낮잖아요. 그러니까 분별의 세계로 들어가면 높을 수도 있고 낮을 수도 있는 사람이지만, 분별하지 않으면 푸른 풀대로, 나무는 나무대로, 하늘은 하늘대로, 사람은 사람대로 모든 존재가 저마다 있는 그대로죠. 판단 분별할 수 없죠.

아, 문제가 없어요. 있는 그대로 흔할 것도 없고 귀할 것도 없어요. 천할 것도 없고 귀할 것도 없어요.

못날 것도 없고 잘날 것도 없어요. 그러니까 제가. 불교 공부하면서 처음에 불교 공부를 열심히 해 가지고 불교에서 가장 뛰어난 사람이 되고 싶었었거든요, 학교 다닐 때.

그래서 불교 공부를 정말 열심히 했어요. 그 1, 2학년 때는 불교 활동하느라고 공부를 안 하니까 교수님한테 좀 찍혔어요. 그냥 내가 이걸 만회해 보리라 하고 2학년 때 불교 뭐 회장하던 걸 다 때려치고 이제 3학년 때부터 불교 공부를 정말 열심히 해 가지고 모든 불교학과 교수님들한테 이제 좋은 점수를 받고 인정받고 "야, 너 2학년 때 맨날 뭐 일만 해 가지고 그러더니만, 아 이제 정신 차려 열심히 하네." 이 소리를 듣고 그래 좋았던 기억이 나요.

그냥 그러고 싶었던 거예요. 불교 공부를 해 가지고 불교의 가장 뛰어난 존재가 되고 싶었단 말이에요. 그리고 그게 점점 점점 이제 성공적이었어요.

그래서 불교에서는 "야, 내가 그래도 괜찮은 사람이네."라고 이렇게 어깨 으쓱하게 할 만한 일들이 막 벌어지니까 점점 기뻤어요. 수행도 뭔가 성취되는 거 같았어요. 좋았단 말이에요.

근데 공부를 하면 할수록 그것과 나, 그것과 이 공부하는 전혀 반대였구나가 분명해지는 거예요. 내가 으쓱하면 으쓱할수록 공부는 점점 더 부족해진다라는 걸 스스로 드러내는 것과 다르지 않더라고요. 불교 공부를 잘해서 으쓱해진다라는 말 자체가 완전히 거꾸로 온 거예요.

그럴 내가 사라지는 거예요. 가장 못난 사람과도 똑같아지는 거예요. 가장 잘난 사람이 와도 전혀 기적을 필요 없는 것이고요.

이 세상 모두가 완전히 평등해요. 아무리 잘난 사람이 와도 기죽을 일이 없는 거예요. 아무리 못난 사람이 와도 거기서 의기소침할 일이 하나도 없는 거예요.

잘난 척할 수가 없단 말이에요. 제가 처음에 군에 갔을 때요, 계급 사회잖아요, 군대는. 그러니까 이 계급 높은 사람이 20대 초반이, 중반이잖아요.

계급 높으신 분들을 보면 뭔가 막 이렇게 막 있어 보이고, 뭐 말을 한 마디 해도 뭔가 모르게 그 뒤에 뭔가 이렇게 탁 숨을 듯이 있는 거 같고, 뭔가 이렇게 지혜도 있는 거 같고, 뭐 뭔가 이렇게 훌륭해 보이고, 처음에는 그랬던 기억이 나요. 처음에 이제 이렇게 이 작은 부대 있다가 큰 부대 처음에 이렇게 딱 갔는데, 어, 이 막 투스타 쓰 분들 이렇게 만나고, 또 그분들은 또 스님, 목사님, 신부님, 그 부대 한 분밖에 없으니까, 그 되게 그냥 편하게 이렇게 지내는데, 어, 처음에 그분들이 이렇게 거리감이 느껴지는 거예요. 그렇게 계급 사회에서는요, 우리가 마음속에서 이게 진짜 계급이 있다라고 느껴지거든요.

여러분, 요즘에 이렇게 TV에서 막 쓰리스타분들 막 나와 가지고 막 청문하면서 막 깨지고 하는 걸 보면서 "쓰리스타도 별거 아니네." 쉽잖아요. 실제 군에 가서 그분들이 저 하늘의 별이라니까요. 그분들이 그렇게 그래 보이지 않는다니까요.

그게 상이란 말이에요. 그게 제가 군에 있으면서 상이라는 걸 제일 강렬한 그 그 상을 봤다 봤다니까요. 이게 세상에서.

말하는 상이구나. 그, 이런 계급이라는 상이 군대만 있겠습니까? 사회, 회사 더 하면 더 했지. 왜 군대에서는 그 시간 2년 같이, 1년이냐, 2년 같이 살면 떠나가요.

또 두 번 다시 별 볼 일이 별로 없어요. 그냥 꾹 참고 그냥 1년만 버티자 하면 끝나요, 기분 나쁘면. 근데 회사에서 사장한테 찍혔으면 어때요? 평생이 괴로운 거 아니에요? 그 얼마나 더 이게, 이게 더 심할 수 있겠어요.

그런데 이 하나님을 보면 그럴 일이 없어요. 그렇다고 해서 막하진 않아요. 더 존중할 거 존중하고, 인정할 거 인정하고, 하지만 그러면 내 마음에서 부담감, 무게감이 없단 말이야.

사람에 대한 두려움, 뭔가 뭐, 이런 게 없어요. 제가 20대 중반 처음 가서 2년 차 때가 우리 큰 스님을 모시고 이제 소개 법회를 하는데, 와서 큰 스님 그 당시만 해도 지금도 그렇지만 막 카리스마 넘친단 말이에요. 완전 뭐, 법문하실 때 보면 진짜 카리스마가 넘쳐요.

근데 우리 부대 그 지혜가 한 분이 너무 센 분이라 막 밑에 산모들 막 호통치고, 막 화도 내고, 막 무시무시했던 분이었단 말이에요. 근데 그분이 종교는 다르지만 우리 큰 스님 오신다 그러니까 와 가지고 참석을 했어요. 그다음 주에 이제 갔더니 찬잔하잖아, 서 들어갔더니만, 와, 스님 저는 태어나서, 제가 어지간한 저는 배포가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살았고, 제 어지간이 저는 저 높은 사람 앞에서도 크게 이죽지 않고 사는 사람인데, 와, 저는 진짜 와, 그래서 큰심이라.

봐요, 이러면서, 와, 큰 스님 앞에 탁 있는데, 제가 한없이 쪼그라들고, 한없이 뭔가 모르게 경외해감 같은 게 들면서, 와, 사람이 막 한없이 내가 막 요만해지는 거 같은 느낌이 들더라는 얘기를 하더란 말이죠. 우리는 그런 걸 느낀다니까요. 어떤 사람도, 어떤 사람도 이 중생 세관에서는 둘이라고 생각하니까, 분별에 확 휩싸여 있으니까, 분별해서 결코 벗어나지 못한단 말이에요.

그러면 높은 사람이 따로 있고, 낮은 사람이 따로 있다고 생각해요. 높은 사람에게 쩔쩔 매는 사람일수록 낮은 사람에게 더 함부로 해요. 근데 둘이 아닌데 눈 뜨는 사람만이 높은 사람 앞에 가도 인연 따라, 이게 이제 중도예요.

중도는 뭐냐면, 인연 따라 그 사람에게 주어진 역할로서는 존중해 줘요. 근데 마음에서 벌벌 떨진 않아요. 또 인연 따라 그, 뭐랄까, 이제 청소하는 분들에게는 청소를 맡겨요.

그러나 마음으로 그걸 하찮는 사람이다, 이런 생각을 하지 않는단 말이죠. 음, 높고 낮음에 없단 말이에요. 그러나 그 역할은 있지만, 인연 따라 주어진 역할은 있지만, 이 세상 모든 것이 마찬가지예요.

아무리 잘난 것, 우월한 것과 못난 것, 열등한 것이 다르지 않아요. 못난 것, 열등한 것이 없으면 잘난 것도 있을 수 없어요. 나의 괴로웠던 일이 없으면 나의 성공도 있을 수 없어요.

그래서 나의 고통을 나의 성공과 둘이 아니게 바라볼 수 있는 눈이 열려요. 그래서 괴로움도 버리지 않고 성공도 버리지 않아요. 괴로움도 밀쳐내려 하지 않고, 성공도 과도하게 집착해서 쫓아가려고 하지 않아요.

왜? 성공은 성공대로의 역할이 있고, 실패는 실패대로의 몫이 있단 말이에요. 그러니까 내가 지금 실패한다면, 내가 원하는 거 얻지 못했다면, 그래야 되는 때인 거예요. 그걸 통해 내가 배우고 깨달아야 할 아주 귀중한 중도적 지혜가 있는 거예요.

그러니까 그걸 버리지 않아요. 내 인생이 못났고, 부끄럽고, 가진 거 없고, 볼품 없어 보여도, 그것에 죽지 않아요. 그것을 내 스스로도 마이너스라고, 내 스스로도 나쁘다고 나에게 점수 매기지 않아요.

판단 분별하지 않습니다. 있는 그대로의 자기를 있는 그대로 사랑해 주고, 있는 그대로의 못난 그대로를 온전히 존중해 줘요. 여러분, 내가 못 났어요.

인연 따라, 인연 따라 못난 것도 억울해 죽겠는데, 세상 사람들이 나를 못 났다고 보는 것도 억울해 죽겠는데, 그건 억울한 것도 아니에요. 더 비참한 건 뭔지 아십니까? 이 세상 모든 사람이 나를 비참하게 바라보는데, 나조차 나를 못난 놈으로, 비참한 사람으로, 사랑받지 못할 사람으로 바라본다는 거, 그게 가장 큰 괴로운 일이에요. 가장 크게 어리석은 일이고, 세상 사람이 다 내 마음의 나툼인데, 세상 사람이 나를 못 나쁘게 보면 뭐 어때요? 그게 그 사람이 나를 나쁘게 보는 게 아니라, 내가 저 사람이 나를 나쁘게 보내라고 생각한 거 아니에요? 자격 지심에 있는 사람은요, 우리가 봤을 때는 그냥 그냥 본 거예요.

그 사람이 기분이 나빠서, "저 기분이 그날 나빴나 봐." 그래서 그날 그냥 음식을 대충 툭 던지듯이 온 것뿐이에요. 근데 그냥 자존감이 있고 사랑이 가득한 사람은 "그냥 그런가, 저분 오늘 좀 기분이 안 좋은가 보다." 하고 그냥 나 신경 안 쓴단 말이야. 자격 지심에 큰 사람은 "봤어? 저 사람이 지금 나 무시했지?" 이 생각해요.

"저 사람이 언제 우리를 무시했어요?" "무시 안 했는데." "아니야, 무시했어. 네가 눈동자 제대로 못 봤을 거야." 이렇게 믿어요. 그러면 A라는 사람은 "아니요, 무시 안 했어." 했는데 B라는 사람 무시했다고 생각하잖아요? 그럼 그 사람 무시했을까, 안 했을까요? 그건 그 사람에게 달렸을까요, 자기에게 달렸을까요? 자기가 해석한 거예요.

그런데 무시했다라는 해석이 맞다라고 믿기 시작하고 그걸 오해 덩어리로 축적해 놓은단 말이야. 그 분별 의식을 축적해 놓으면 그게 맞다라고 할 만한 증거들이 세상에서 자꾸 나와요. 왜냐면 사람들이 "무시했지?" 이러면 옆에 사람들도 괜히 좀 그러기 싫으니까 "어, 그런 거 같기도 하고." 이렇게 자꾸 들어 줘요.

그리고 무시 안 했다려면 더 화를 내니까 "알았어, 알았어. 무시한 거 같아." 그럼 "거봐, 세상 사람들 다 내가 맞다고 하잖아." 그리고 이제 조금이라도 눈동자가 이상하면 그 사람은 그냥 길거리 지나갔을 뿐인데 "어, 지나간 사람, 저 사람 나 지금 꼬아보고 지나갔지." 이렇게 생각할 수도 있어요. 그러니까 길거리 지나가는 사람이 날 이상하게 봤다는 걸로 가서 폭력을 저지른 사람이 있잖아요, 쌓여서 그래요.

그 분별 의식이 자기 식대로 하는 해석이 쌓이고 쌓이고 또 쌓이다 보면 그런 말도 안 되는 해석을 세상 사람들에게 투사해 버리는 거예요. 그게 다 자기 생각이에요. 그러니까 이 세상 모든 사람이 나를 어떻게 여기느냐는 전혀 중요하지 않아요.

그 마음대로 알아요. 내 마음도 내 마음, 내 마음 하나 다스리면 되지, 그 사람의 마음까지 우리가 다스릴 수 없어요. 내 마음 다스리는 것도 못 해 가지고 우리가 이렇게 고생하는데, 아이 세상 80억 인구의 마음까지 우리가 다 다스릴 수가 있겠어요? 불가능한 건 애초에 할 필요가 없어요.

내버려 두세요. 그들이 나를 욕하든 말든 그들의 마음이니까 내 마음만 다스리면 돼요. 그게 세상을 다스리는 거예요.

그래서 이 세상 모든 사람이 나를 미워해도 내가 나를 미워하지 않으면 나는 충분히 사랑받는 거예요. 어디로부터? 온 우주로부터, 진리로부터. 본래 이 세상은 그 누구도 배제하지 않아요.

진리는 그 누구도 사랑을 배제하지 않아요. 이 사랑과 자비에서는 그 누구도 소외되지 않아요. 심판의 하나님, 심판하는 염라대왕, 그런 거는 누가 만들었어요? 중생이 자기랑 똑닮은 하나님, 자기랑 똑닮은 염라대왕을 중생의 머릿속에서 창조한 거예요.

자기가 평생을 심판하고 있잖아요, 사람들을 분별하면서 판단하고 심판하고 있잖아요. 그러니까 내가 죽고 나면 저기 나랑 똑 닮은 하나님이 나를 심판하려고 기다리고 있을 거야, 요렇게 상상하는 중생들의 상상력이 만들어 낸 거예요. 심판하는 하나님은 실제는 심판하는 하나님이 아니고요, 심판은 자기 생각이 하는 거고 진짜 하나님, 진짜 신은 뭐라겠어요? 무한한 사랑이고 무한한 자비로 있는 그대로, 있는 그대로 바라봐 주는 분별없이 보는 지관, 분별을 멈추고 있는 그대로 보는, 있는 그대로 보는 이 무분별심의 하나님, 무분별심에 무한히 사랑해 주는 분이에요.

진리는 신은, 그래서 신이 사람을 창조한 게 아니라 사람이 신을 창조했다는 표현을 쓰는 거예요. 사람이 자기 머릿속에서 자기 닮은 하나님을 창조했잖아요. 그러니까 자기 생각으로 생각 가능한, 유추 가능한 하나님만을 만들어 내는 거예요.

그거는 하나님이에요? 생각으로 만든 거죠. 그게 어떻게 하나님이에요? 그러니까 우리가 신은 없더라고 할 때는 인간이 만든 그 신은 없다는 소리예요. 인간 후, 인간이 머리로 파악 불가능한 불가사이한, 여서 말하듯 신묘한 영묘한 이런 분만이 진정한 신이고, 이 신이 진리는 사람이 머리로 파악할 수 없는 거예요.

그런 인간이 만든 신은, 그런 건 없죠. 인간이 다 만들어 낸 거지. 알 수 없는 신만이 있어요.

그가 알 수 없어요, 신을 인간이. 그러니까 우리가요, 살면서 뭔가 엄청나게 대단한 존재가 되기를 꿈꿔 왔잖아요? 혹은 지금보다 더 나은 사람, 남들한테 욕 먹지 않는 사람, 뭔가 특별한 사람이 되기 위해서 애썼잖아요. 그 마음이 없으면 어떨까요? 그 마음이 없으면 지금 내가, 이 평범한 내가 세상에서 가장 특별합니다.

평범한 것이 가장 특별한 거예요. 자기답게 사는 것이 부처님이 여러분을 이 세상에 이렇게 출연시킨 이유거든요. 가장 자기답게 사는 걸 통해서 자기다운 삶의 모습을 이 세상에 이렇게 비추는 걸 통해서 가장 자기 다운 걸 부처님은 보고 싶은 거예요.

쉽게 말하면 진리는 여러분이 누구처럼 법정 스님처럼, 뭐 대사 스님처럼, 아니면 막 훌륭한 누구처럼, 누구처럼 살기를 원해서 여러분을 이 땅에 보낸 게 아니고 여러분이 이 세상에 둘도 없는 나, 남들보다 못해 보이는 나, 아, 남들보다 뭐 머리가 뛰어나지도 않고 몸이 막 뛰어나지도 않고 기술이 뛰어나지도 않고 특별한 재능이 있는 것도 아니고 어디 가든 뭐 별나, 그게 부처님이 나에게 원하는 거예요. 그런데 그것은 내가 애쓰는 게 아니잖아요. 노력해야 될 게 아니잖아요.

이미 드러나 있잖아요. 그것으로서 최선을 다하면 돼요. 이것으로서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하면 돼요.

내가 할 수 있는 만큼의 최선, 매 순간순간 지켜서 열심히 사는 거예요. 그냥 더 많은 걸 과도하게 원하거나 욕심 내서가 아니고 그거면 충분하단 말이에요. 그리고 그것은 이미 주어져 있어요.

본래 자기가 주어져 있잖아요. 그런데 있는 그대로의 자기, 이 심심한 자기는 싫고 조금 더 특별해지려고, 조금 더 남처럼 더. 많은 걸 가지려고, 얻으려고, 되려고 하는 그 생각 때문에 내가 나를 괴롭히고 있죠.

내가 나를, 이 평상심이 평범한 자기를, 자기라는 부처를 죽이고 있죠. 항상 맑고 평안하고 신령하고 가득하고 언제나 자라나고 있고, 언제나 천하의 모범이 되고 있는 자기를, 이 하나를 없애고 있는 그대로의 자기를 없애고 뭔가 자꾸 분별해서 치사 간택하는 것 때문에 자꾸 내 마음이 둘로 갈라지고 마음이 항상 불안, 초조하고 흔들리고 마음이 항상 시들시들하고 항상 [음악] 가난하고 말라 있고, 또 진정한 자기를 없애고 거짓된 아상, 에고만 살아남겨 두는 그런 사람이 돼 버리고 언제나 하는 일마다 넘어진단 말이에요. 넘어질 수가 없어요.

넘어지는 게 일어난 거예요. 또 일어난 게 넘어진 거예요. [4]둘이 아니에요. 왜 그럴까요? 넘어지는 그 넘어지는 걸 통해서 넘어지는 거기에서 삶을 배우는 거예요. 넘어지는 게 있어야 일어나는 게 있거든요.

그 넘어지는 게 지금은 넘어져야 되는 때기 때문에 넘어지는 거예요. 그러니까 넘어지는 게 곧 일어나는 거예요. 넘어져야 여러분 일어나 있는 사람이 일어날 수 있어요.

넘어지는 사람만 일어날 수 있어요. 넘어지는 게 곧 일어나는 거예요. 성공하는 사람이 성공하잖아요.

성공은 반드시 실패를 뒷백으로, 경험으로 하고 있어요. 성공했어 하는 거 있잖아요? 그 성공은 반드시 사라질 거예요. 내가 먼저 떠나든, 그 성공이 먼저 떠나든, 대그룹 회장님도 평생 쌓아 놓으니, 어마어마한 그룹 재산을 남겨 놓고 떠나잖아요, 죽잖아요.

죽기 전에 수많은 의사들, 최고 의사들 데려다가 나 살려 했는데 못 살리잖아요. 때가 되면 못 살려요, 그 누구도. 근데 때가 안 되면 지옥 같은, 그 누구 의사들이 죽어도 못 살린다고 하는 상황 속에서도 살아남는 기적 같은 일이 벌어지잖아요.

의사가 다 두 손 두 발 들었는데 기적같이 살아나는 사람이 세상에는 많아요. 그리고 우연같이 살아는, 죽을 인연인데 우연같이 살아나는 사람도 많아요. 제가 전에 그 말씀드렸잖아요.

이렇게, 어, 사고가 일어나서 이렇게 못, 총을 빵빵 쏘면 못이 확 박히는, 그걸 빵 쐈는데, 그 쏜 게 없어진 거예요. 잘못 쏴 가지고 그게 사람 머리에 확 박혔단 말이죠. 근데 이걸 죽어도 어쩔 수 없다 하는 서명하고 뺐단 말이에요.

뺐는데 정말 몇 밀리 차이로 기적같이 살아났다. 이게 그 사람을 살리려고 하면 그 사고가 나를 비켜 가게 만들어요. 전쟁 통에도 살아남잖아요.

총알이 빗발쳐도 살아남잖아요. 차가 제가 빙판에 한 바퀴 굴러도 병원조차, 어디 멍든 데조차 없을 정도로 그냥 멀쩡할 수도 있고, 별거 아닌 것이 나를 죽게 만들 수도 있어요. 세상은 의사가 하는 일이 아니에요.

사람을 살리고 죽이는 일이 법이 한단 말이에요, 법이. 그렇다고 해서 의사를 무시하라는 얘기도 아니고, 병원 가지 말라는 얘기도 아니에요. 인연 따라 할 수 있는 모든 걸 최선을 다하면 돼요.

그게 중도적 지혜예요. 현실적으론, 현실적으로 할 수 있는,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해서 현실에서 나를 돕기 위해서 노력하는 거예요. 그러나 출세간의 지혜에서는 근원에 내맡기고 있는 거예요.

근본에 내맡기고 있는 거예요. 이것이 진정한 지혜다. 네, 오늘 여기까지 말씀드리겠습니다.

상반하십시오.. [5]

 

[법문 요약 정리]

1. 🌌 하나가 주는 평안과 진리

  • 도덕경 39장에서는 하늘, 땅, 신, 골짜기 등 모든 것이 하나를 통해 존재하며, 이 하나 없이는 존재가 흔들릴 수 있음을 설명한다. [1-3]
  • 사람들도 이 하나의 깨달음을 통해 마음이 맑고 평안해지며, 둘로 나뉘는 생각에서 벗어나 진정한 화합을 이룰 수 있다. [1-15]
  • 또한, 인간들 사이의 갈등과 분쟁은 이 하나를 깨닫지 못하기 때문에 발생하며, 진실을 이해하지 못하고 선과 악을 나누려는 경향에서 기인한다. [1-107]

1.1. ️ 하나의 본질과 맑음

  • 하늘, , , 골짜기, 만물, 왕과 제후는 모두 하나의 존재에서 비롯되며, 각각 하나를 얻어 그 상태를 유지한다. [1-3]
  • 이 하나는 분리된 상태가 아니라 모든 존재의 본질적 연결성을 나타낸다. [1-9]
  • 하늘과 땅은 본래부터 맑고 평안하며, 사람도 본래 깨끗한 마음을 가지고 있다. [1-14]
  • 우리의 마음이 오염되지 않으면, 본래의 조화롭고 맑은 상태를 유지할 수 있다. [1-18]
  • 구름은 밖에서 가리워질 뿐, 본래의 맑은 하늘은 그 아래에 항상 존재한다. [1-20]

1.2. 하나의 본질과 인간의 본성

  • 인간은 본래 하나로 연결되어 있으며, 이를 깨달을 때 진정한 평화평안을 경험할 수 있다. [1-24]
  • 그러나 둘로 나누어지면 상대와 싸우거나 비교하게 되어 내면의 혼란이 지속된다. [1-26]
  • 신령함은 모든 것을 포함하나, 인간의 이해로는 알 수 없는 진실이다. [1-33]
  • 인간의 본성 또한 완전하게 가득 차 있으며, 부족함이 없다고 주장된다. [1-49]
  • 우리는 잘못된 인식으로 인해 가난함이나 부족함을 느끼지만, 실제로는 모든 생명의 근본 바탕을 지니고 있다. [1-57]

1.3. 만물의 성장과 인간의 본질

  • 만물은 하나의 원리를 통해 자라나며, 인간도 이 원리에 따라 성장한다. [1-59]
  • 인간은 자신의 노력으로 자라난다고 생각하지만, 사실 근본적인 원리는 우리의 마음에 의해 결정된다. [1-61]
  • 이 원리는 우리가 필요한 것을 자각하고 행동하도록 이끌며, 예를 들어 키를 작게 하거나 크게 하는 것이 우리 힘으로는 불가능하다는 점을 강조한다. [1-66]
  • 왕과 재후는 단지 물질적 지위가 아닌, 세상의 모범이 되는 사람으로서 하나를 얻은 인물을 지칭한다. [1-68]
  • 진정한 왕은 이 기본 원리를 이해하고 실현하는 사람이며, 부처님도 법의 왕으로서 이의 중요성을 표현하고 있다. [1-77]

1.4. 세상과 나의 구분, 그리고 갈라짐의 원인

  • 하늘과 땅, 그리고 모든 만물은 하나라는 존재가 없으면 유지될 수 없고, 이를 깨닫지 못한 중생들은 분열된 상태로 살아간다.[1-79]
  • 중생들은 편을 나누고 서로를 싸우게 하며, 이러한 이분법적 사고가 자기 자신을 죽이는 것임을 인식하지 못한다.[1-82]
  • 사람들은 자신의 기준으로 세상을 판단하고, 올바른 편을 선택하는 데 치중하지만, 이로 인해 서로의 갈등이 심화된다.[1-88]
  • 종교인들조차도 정체성을 명확히 하려 하며, 자신의 편을 드러내지 않으면 비판받는 경향이 있다.[1-91]
  • 결국, 사람들은 무엇이든 나누는 경향이 있으며, 이러한 분열이 사회적 갈등을 초래한다.[1-97]

1.5. 이념의 갈라짐과 혼란의 원인

  • 이념에 따라 서로 다른 주장을 인정하지만, 절대적으로 맞거나 틀린 것은 없다는 주장이다.[1-98]
  • 갈라짐은 중생들이 서로의 무지를 기반으로 하며, 이러한 갈라짐은 여러 세대와 성별 간의 갈등을 초래한다.[1-101]
  • 최근에는 여성과 남성의 갈등이 심화되어 있으며, 이는 페미니즘 논쟁에 기인한 것일 수 있다.[1-104]
  • 정치, 종교처럼 다양한 사안에서 갈라치기 문화가 존재하며, 이는 '하나'의 부재와 관련이 있다.[1-106]
  • 이념에 상관없이 모든 것이 불안정하고 흔들리며, 이는 진실이 아닌 분별에 기인한다.[1-107]

2. 🌪️ 인생의 흔들림과 고요함의 비결

  • 절대적인 이 존재하지 않으며, 개인의 입장에 따라 상대적인 관점만이 있을 뿐이다.[2-3]
  • 마음의 고통과 시들음은 분별심에 의존할 때 발생하며, 이것이 인간을 괴롭게 만들고 흔들리게 만든다.[2-28]
  • 성공과 실패는 서로 교차하며, 양쪽 모두를 받아들일 때 비로소 삶의 무너짐을 피할 수 있다.[2-106]
  • 인간은 자신의 기준으로 결과를 해석하며 미래에 대한 집착으로 인해 현재를 놓치고 갈팡질팡하게 된다.[2-82]
  • 마음을 비우고 현재를 온전히 경험하는 것이 삶의 비결이며, 그것이 진정한 생명력을 유지하는 방법이다.[2-157]

2.1. 상대적 관점과 그로 인한 혼란

  • 옳고 그름은 임시적이고 상대적으로 존재할 수 있으며, 절대적인 기준은 없다. [2-1]
  • 개인은 자신이 지지하는 관점이 잘못될 때 혼란을 겪게 된다. [2-4]
  • 분별심에 의존할 경우 중도를 찾기 어려워 극단적인 입장에 흔들리게 된다. [2-7]
  • 끊임없이 자신의 선택이 이익이 될지를 고민하며 흔들리게 되는 이유는 두 입장 모두 논리적 정당성을 가질 수 있기 때문이다. [2-9]
  • 논리는 허망한 개념으로, 다양한 조합을 통해 만들어진 결과물일 뿐이다. [2-12]

2.2. 시들음의 원인과 인간의 본성

  • 신은 영묘함이 없으면 모든 것이 시들게 된다는 사실이 강조된다. [2-14]
  • 시들음은 하나를 깨닫지 못할 때 발생하며, 사람들은 부족함을 느끼고 성공을 쫓는다. [2-15]
  • 따라서 사람들은 노력하고 애쓰며 집착하지만, 이러한 경쟁에 지쳐 시들게 된다. [2-17]
  • 인간은 끊임없이 힘을 소모하며, 생동감을 잃고 시들게 되는 경우가 많다. [2-21]
  • 아기와 동물들은 쉽게 감정을 잊지만, 사람들은 분별에 의해 괴로움을 겪으며 갈라지고 흔들린다. [2-25]

2.3. 마음의 메마름과 끊임없는 욕망

  • 모든 원인은 마음의 괴로움에서 비롯되며, 사람들은 마음이 말라가기 때문에 풍요로워지지 못한다. [2-31]
  • 충분한 물질적 자원을 가지고 있음에도 마음을 채우지 못해 메마른 상태가 지속된다. [2-33]
  • 많은 목표를 세우고 성취하더라도, 언제나 자신보다 더 나은 사람들로 인해 만족감이 결여된다. [2-36]
  • 부유한 지역에서 교육을 받기 위해 이사한 아이의 예에서 볼 수 있듯이, 그곳에서도 사회적 기준을 맞추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해야 한다. [2-43]
  • 결과적으로, 이러한 경쟁 속에서 사람들은 시들어 가며 정신적인 고통을 경험하게 된다. [2-47]

2.4. 진정한 삶의 의미와 마음의 상태

  • 모든 것은 잘하게 하는 것이 없으면 없어져 버린다. 그러므로 우리의 마음, 진실이 존재의 근본이다.[2-49]
  • 살아 있어도 살아 있지 않다, 즉 마음챙김이 없으면 영혼이 죽어있는 것과 같다.[2-52]
  • 분별하며 살 경우, 진짜 살아있지 못한 것이며, 생각과 환상에 갇혀 시들어 간다.[2-56]
  • 살아있음을 느끼지 못하고, 죽어 있는 것에만 관심을 두고 서로 상처주며 살아간다.[2-61]
  • 진짜 자아가 죽고, 가짜 나를 살리느라 진짜 생명력이 소멸된다.[2-68]

2.5. 삶의 고난과 집착의 관계

  • 왕과 재후가 모범적인 행동을 하지 않으면 결국 넘어질 위험이 있다는 점이 강조된다.[2-71]
  • 고꾸라진다는 것은 삶에서 겪는 괴로움으로, 이는 본래 괴로운 것이 아님을 깨닫게 된다.[2-73]
  • 성공과 실패는 본질적으로 동일한 일이며, 우리는 그것을 명확히 알 수 없는 상황 속에서 스스로 결론을 내린다.[2-77]
  • 집착이 없었다면 실패로 인식된 상황도 자연스러운 흐름으로 받아들일 수 있으며, 결국 내 인연에 맞는 길을 간 것이라는 해석이 가능하다.[2-84]
  • 내가 원하는 바에 대한 집착이 없고, 분별하지 않으면 삶에서 경험하는 위기와 어려움을 겪지 않게 된다.[2-94]

2.6. 삶의 변화를 받아들이기

  • 모든 존재는 생멸법에 따라 생겨나고 변해가며, 결국 사라지는 과정에 있다.[2-96]
  • 삶에서는 성공과 실패가 교차하며 있어야 진정한 기쁨을 느낄 수 있다.[2-106]
  • 내가 성공과 실패를 어떻게 해석하느냐에 따라 내 삶의 만족도가 달라지며, 그 해석을 하지 않으면 자연스럽게 받아들일 수 있다.[2-112]
  • 모든 사람과 존재는 저마다의 역할이 필요하며, 이는 온전한 세상을 유지하기 위해 모두가 필요하다는 것을 의미한다.[2-124]
  • 생각에 빠져있지 않고 현재 순간을 온전히 경험할 때, 우리는 내면의 고요함과 자연스러움을 느낄 수 있다.[2-157]

3. 🌌 인생의 본질과 분별의 어리석음

  • 모든 사물은 본래 천한 것과 귀한 것의 구분이 없고, 사람의 판단에 의해 만들어진 상대적 개념에 불과하다.[3-1]
  • 우리는 분별의 세계에 빠져 사물과 존재를 둘로 나누고 구분하기 때문에 갈등과 고통이 발생하며 이는 실재가 아니다.[3-23]
  • 인류의 역사에서 열등과 우열의 구분은 엄청난 비극과 폭력을 야기해 왔으며, 이는 인간의 어리석음을 반영한다.[3-33]
  • 모든 존재는 상호연결되어 있고, 본래의 진리를 깨닫게 되면 서로 미워할 이유가 없음을 알게 된다.[3-31]
  • 특별함을 추구하는 것은 실재가 아닌 평범함의 기반 위에서만 존재할 수 있으며, 진실은 흔해 빠진 것에서 찾을 수 있다.[3-68]

3.1. 모든 존재의 본질에 대한 통찰

  • 천한 것과 귀한 것은 서로 근본적 관계를 가지며, 높은 것과 낮은 것 또한 서로를 바탕으로 한다. [3-1]
  • 모든 존재는 본래 천한 것과 귀한 것이 없으며, 높은 것과 낮은 것, 큰 것과 작은 것의 구분이 존재하지 않는다. [3-2]
  • 삶에 대한 평가인 좋은 인생과 나쁜 인생, 훌륭함과 훌륭하지 않음의 개념이 없다. [3-4]
  • 본래의 진리를 깨닫게 되면, 텅 빈 아름다움이 단순한 개념으로 남지 않으며, 하나의 진실로 존재한다. [3-5]
  • 좋고 나쁨으로 나누는 분별의 개념이 일체 존재하지 않는다. [3-7]

3.2. 분별의 세계와 상대성의 이해

  • 분별의 세계에 빠지면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상대적으로 창조된 것처럼 느껴지게 된다. [3-9]
  • 상대적 개념인 길이나 짧음은 단일한 객체가 있을 때는 의미가 없지만, 다른 기준이 생기면 생겨난다. [3-10]
  • 예를 들어, 나는 작다는 생각이 들어 괴롭고, 키가 큰 것이 목표가 되면서 자신을 공핍한 존재로 여기게 된다. [3-15]
  • 그래서 객체의 크기와 같은 상대적 개념은 주어진 인연에 따라 성립하며, 이는 연기적 의식에서 파생된다. [3-17]
  • 따라서, 큰 것이 존재하지 않으면 작은 것도 존재할 수 없으며, 둘 다가 사라지는 관계이다. [3-17]

3.3. 의식의 분별과 진실의 왜곡

  • 우리의 분별 의식은 세상을 둘로 나누고, 이 분별로 새로운 세계가 만들어진다. [3-20]
  • 이 분별의 세계에서는 만법이 오로지 자기 분별 의식으로 탄생하며, 이는 실제가 아닌 의식에서 생성된 것이다. [3-22]
  • 분별에 의한 취사 선택으로 인해 사람들은 좋은 것만 취하고 싫은 것은 버리려 하며, 이는 세상을 통제하려는 시도로 이어진다. [3-24]
  • 이러한 결과로 삶은 힘들어지고, 많은 일이 생기며, 타인과의 갈등이 커지게 된다. [3-27]
  • 결국, 우리는 본래 싸울 필요가 없는 진실을 놓치고, 서로를 미워하게 되는 연애의 흐름 속에 갇히게 된다. [3-28]

3.4. ️ 인간의 이분법적 사고와 그 어리석음

  • 인간은 서로의 존재에 의해 성립하며, 이분법적으로 나뉘는 것은 어리석은 생각이다.[3-31]
  • 과거에 인류는 열등한 유전자를 제거하자는 극단적인 주장으로 분열했다.[3-33]
  • 이러한 기준을 누가 정할 것인지는 불분명하며, 나치나 종교적 믿음을 가진 사람들은 우월성을 주장하며 전쟁을 일으킬 수 있다.[3-34]
  • 인구를 제거하는 과정에서 결국 열등한 유전자가 남게 되어 또 다른 제거가 반복되고, 이때마다 새로운 기준이 생기게 된다.[3-35]
  • 이러한 인류의 역사는 어리석음이 지배해 온 비극적인 역사임을 강조한다.[3-39]

3.5. 모든 존재의 연결과 진정한 사랑

  • 모든 것은 자기 분별 의식에 따라 인연적으로 연결되어 있으며, 정해진 옳고 그름이 존재하지 않는다.[3-42]
  • 진정한 자비심과 사랑은 모든 존재가 하나임을 인식하는 것에 기초한다.[3-43]
  • 특정 종교나 신념집단만 사랑한다는 생각은 폭력적이고 어리석은 것으로 여겨진다.[3-47]
  • 동물에 대한 비인간적인 대우는 또한 나누는 행위로, 이는 어리석음의 시작이다.[3-50]
  • 세상이 이분법적 사고에서 벗어나 하나로 깨어나는 것이 중요한데, 이러한 변화가 진정한 평화를 가져올 수 있다.[3-55]

3.6. 특별함과 평범함의 진실

  • 왕과 제후는 스스로를 짝 잃은 사람, 즉 혼자라고 부르며, 이는 혼자의 상태를 강조하는 표현이다.[3-58]
  • 모든 것이 나뉘어 있지만, 진리를 깨닫는 순간 홀로 있는 감각을 확인할 수 있다.[3-62]
  • "천상천하 유아독존"이라는 표현은 나 혼자가 고정된 상태에 있다는 의미를 내포한다.[3-63]
  • 특별함은 진실이 아니며, 평범함을 통해서만 이루어질 수 있는 것이라고 주장한다.[3-70]
  • 따라서 흔한 것, 즉 평범한 것들이 진실에 가까운 본질을 갖고 있다는 점을 강조한다.[3-73]

4. 🌱 특별함의 함정과 본래의 나

  • 천한 것에 의지해 귀한 것이 나온다는 개념을 통해 모든 것이 평등하다는 진리를 깨달아야 한다. [4-3]
  • 특별함을 추구하는 것은 옳지 않으며, 그런 특별함은 본질적으로 특별하지 않다는 주장이다. [4-7]
  • 부처가 되는 과정에서 자아가 사라지고, 가장 고귀한 존재가 동시에 가장 천한 존재가 되는 경험을 해야 한다. [4-15]
  • 진정한 고통과 성공은 서로의 관계를 이해하는 것으로, 고통 없이 성공을 바라면 성장은 없다. [4-93]
  • 자신을 사랑하고 있는 그대로 존중하는 것이 중요하며, 남에 대한 비판적 시각보다 자신의 내면을 다스리는 것이 우선이다. [4-107]

4.1. 천한 것의 가치와 진정한 존재

  • 천한 것을 근본으로 삼는 것은 모든 것이 평등하다는 진실을 깨닫는 과정이다.[4-1]
  • "지극히 영예로운 것, 지극히 특별한 것은 특별하고 영예로운 것이 아니다"라는 메시지가 있다.[4-7]
  • 사람들은 남들보다 더 특별하고 고귀해지려는 욕망으로 애쓰지만, 이러한 특별함은 진정한 가치가 아니다.[4-9]
  • 부처가 되는 것은 가장 고귀한 존재가 되는 것과 동시에 가장 천한 존재가 되는 것을 의미한다.[4-15]
  • 많은 사람들은 더 많은 소유와 위대함을 추구하며 평생을 노력하는 경향이 있다.[4-20]

4.2. 있는 그대로의 나

  • 진리가 아닌 것을 추구해온 삶은 무의미하며, 오히려 진리와 반대되는 것에 사로잡혔음을 인식할 필요가 있다.[4-22]
  • 현재의 나, 즉 있는 그대로의 나가 특별함 없이 완성형임을 받아들여야 한다.[4-23]
  • 누구와 비교하지 않을 때 현재의 자아는 높고 낮음이 없는 상태로 존재하게 된다.[4-24]
  • 상대적인 비교를 통해 높고 낮음을 판단할 수 있지만, 비교를 하지 않으면 모든 존재는 그 자체로 존재한다.[4-25]
  • 결국, 존재의 본질은 분별하지 않는 상태에서 더 이상 문제 삼을 것이 없음을 나타낸다.[4-27]

4.3. ‍️ 불교 공부의 본질과 깨달음

  • 불교 공부를 통해 가장 뛰어난 존재가 되고 싶었던 경험이 있다. [4-33]
  • 그러나 대학 시절 불교 활동으로 성적이 나빠져 교수님의 눈살을 찌푸리게 되었고, 이후 3학년부터는 공부에 집중하게 되었다. [4-35]
  • 불교 공부의 성취가 늘어남에 따라 자아가 부풀어 가는 동시에 이러한 성공이 오히려 공부와 반대의 의미임을 깨달았다. [4-38]
  • 수행의 성과와 자아의 식별이 상반된 위치에 있으며, 결국 모두가 완전한 평등 속에 존재함을 인식하게 된다. [4-49]
  • 잘난 척이나 기죽을 필요가 없는 세상이라는 점을 강조하며, 누구나 똑같은 수준에 있다는 깨달음을 얻었다. [4-48]

4.4. 🪖 군대의 계급 사회와 그와의 거리감

  • 군대의 계급 사회에서는 높은 계급의 사람들이 20대 초반이나 중반에 많이 위치해 있으며, 이들은 처음에는 위엄있게 느껴질 수 있다. [4-53]
  • 큰 부대에서는 높은 계급자들과의 거리가 느껴져 이들이 스님, 목사님, 신부님 등으로 편하게 지내는 모습이 상징적으로 나타난다. [4-56]
  • 군대에서의 경험을 통해 높은 계급의 존재가 실제로는 별것이 아니라고 느껴지게 되며, TV에서의 이미지와는 다르게 그들이 특별하지 않다는 인식이 생긴다. [4-58]
  • 계급의 상은 군대뿐만 아니라 사회와 회사에서도 존재하며, 이런 상에 의해 사람들의 인식이 좌우된다. [4-65]
  • 군대의 1년 또는 2년의 경험이 끝나면 그 관계가 끊어지지만, 회사에서는 사장에게 찍히면 평생 괴로울 수 있는 점에서 군대의 상과 회사의 상은 차원이 다를 수 있다. [4-66]

4.5.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에서 느끼는 겸손

  • 하나님을 만나면 사람에 대한 부담감이나 두려움이 사라진다. 따라서 존중할 것은 존중하고 인정할 것은 인정하게 된다.[4-70]
  • 특정 상황에서 큰 스님을 만나게 되었을 때, 자신의 정체성을 잃고 극심한 경외감을 느끼는 경험이 있었다.[4-74]
  • 사람들은 높은 사람과 낮은 사람을 구분하여 생각하기 때문에 서로 다른 태도를 보인다; 높은 사람에게 쩔쩔 매는 사람은 낮은 사람에게 함부로 대하는 경향이 있다.[4-82]
  • 눈을 뜬 사람은 높은 사람 앞에서도 겸손하게 존재하며, 인연에 따라 각자의 역할을 인정하되 마음속에서는 두려움을 느끼지 않는다.[4-84]
  • 사회의 모든 역할은 존중받아야 하며, 높고 낮음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이 중요하다.[4-88]

4.6. 실패와 성공의 관계 이해하기

  • 못난 것열등한 것이 없으면 잘난 것도 존재할 수 없으며, 이들은 서로 연결되어 있다.[4-91]
  • 개인의 괴로움이 없으면 성공도 없기에, 고통과 성공을 분리하지 않고 서로 존중해야 한다.[4-93]
  • 현재의 실패는 자신이 배워야 할 귀중한 교훈이므로, 실패를 부정하지 않고 받아들여야 한다.[4-97]
  • 다른 사람들이 자신을 어떻게 바라보든, 그 시각은 중요하지 않으며, 자신의 마음을 다스리는 것이 우선적이다.[4-123]
  • 특별한 존재가 되려는 노력 대신, 현재의 평범함을 인정하고 사랑함으로써 진정한 자아를 찾는 것이 중요하다.[4-150]

5. 🌱 넘어짐과 일어남의 삶의 교훈

  • 넘어지는 경험을 통해 삶을 배우는 것이며, 넘어짐이 있어야 일어남이 발생한다는 주장이 제기된다.[5-2]
  • 실패는 성공의 중요한 과정이며, 성공 뒤에는 반드시 많은 실패가 있다는 점을 강조한다.[5-10]
  • 죽음이라는 불가피한 순간 속에서도, 때가 되지 않았다면 생존할 수 있는 기적적인 사례들이 존재한다고 설명한다.[5-13]
  • 사람의 생명은 의사나 밖의 상황이 아닌 에 의해 결정된다고 주장하며, 이는 의료 행위를 무시하지 말라는 의미로 해석된다.[5-27]
  • 최선을 다하며 살아가는 것과 근원적인 자연의 흐름에 맡기는 중도적 지혜가 진정한 지혜라고 강조한다.[5-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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