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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상스님의 목탁소리

상주 대원정사 일요법회(13:30), 부산 목탁소리 토요법회(13: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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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천하지 않으면 소용없다

중생들 가운데 부처님의 가르침을 듣고서도 번뇌를 끊지 못하는 이가 있다. 법을 듣고도 탐내고 성내고 어리석은 것은 무슨 까닭인가? 듣는 것만으로는 부처님의 진실한 가르침을 알 수 없으니, 그것은 남의 약은 잘 지어주면서도 제 병은 못 고치는 것 같고, 남의 보물을 세면서 자신에게는 반 푼의 소득도 없는 것 같으며, 귀머거리가 음악을 연주해도 자신은 못 듣는 것과 같고, 소경이 그림을 그려 보이지만 자신은 못 보는 것과 같다. 이처럼 가르침을 배우고도 실천수행하지 않으면 아무리 똑똑해도 소용없다. [화엄경] 부처님의 가르침을 듣기만 하고, 스님들의 가르침을 듣기만 하고, 책을 찾아 읽기만 하고, 또 인터넷 속에서 수많은 자료며 설법등을 읽기만 하는 사람, 그래서 머리 속으로 굴리고 따지고 해석하기에만 정신..

절제하며 게으르지 말라

생활의 즐거움만을 쫓아 구하고 모든 감관을 보호하지 않으며, 먹고 마심에 정도가 없고, 마음이 게으르고 겁이 많으면, 악마는 마침내 그를 뒤엎는다. 바람이 약한 풀을 쓸어 넘기는 것 처럼. 생활의 즐거움만을 구하지 않고 모든 감관을 잘 지키며, 먹고 마심에 절도가 있고, 항상 정진하여 믿음이 있으면, 악마는 그를 뒤엎지 못한다. 마치 바람 앞에 우뚝한 산 처럼. [법구경] 생활은 조금 불편해야 좋은 것이다. 너무 편하면 게을러지고 자신의 빛을 잃는다. 눈귀코혀몸뜻을 가만히 내버려 두고 보호하지 않으면 이내 그 육신의 감각은 좋은 것만을 가리게 되고 욕망에 뒤덮인다. 그러면 나아가 먹고 마시는 일에 절제가 없어지고 몸은 게을러 져 어떤 일도 스스로 해 나갈 수 없게 되며 나약해지고 겁이 많아지게 마련이다...

현재에 즉각 반응할 뿐

지금 이 순간은 언제나 완전하다. 거기엔 아무런 문제도 없다. 우린 다만 매 순간의 온전한 경계에 '즉각적으로' 대응하기만 하면 될 뿐, 그 외에 해야할 건 '아무것도 없다.' 현재라는 순간순간의 영감과 직관에 따라 그저 자연스럽게 반응하기만 하면 되는 것이다. 앞차가 갑작스레 끼어드는 위험천만한 순간에 우리가 할 수 있는건 오직 그 순간 즉각적으로 반응해 재빨리 피하는 것밖에 없지 않은가. 사실 눈앞으로 차량이 돌진 할지라도 그 순간은 완전하다. 그것은 다만 중립적인 상황일 뿐이다. 우린 그 순간을 문제상황이라고 해석하고 좌절할 필요가 없다. 거기엔 계산도 필요 없고, 고민도 분별도 해석도 필요치 않다. 그저 즉시 반응할 뿐! 우리들의 삶에도 언제나 이 법칙은 유효하다. 과거를 후회하거나 미래를 근심할..

스트레스를 받을 때

적당한 스트레스는 필수불가결한 삶의 요소다. 스트레스 없는 삶을 꿈꾸지 말라. 스트레스로 인해 괴로워하며, 스트레스를 없애려는 바로 그 마음이 더 큰 스트레스를 만들어 내는 주범이다. 사실은 스트레스 받는 상황, 그 상황을 받아들여 다루어 나갈 때 지혜가 싹튼다. 스트레스를 향해 두 손을 활짝 열고 미소 지으며 어서 오라고 손짓 해 보라. 스트레스를 '받는' 대신에 '받아들여' 보라. 스트레스를 받으면 괴롭지만 받아들이면 즐겁고, 스트레스를 받으면 더 커지지만 받아들이면 줄어든다.

진정 원하는 일을 찾으려면

내가 진정 원하는 일, 나다운 일이 무엇인지 모르겠습니다. 내가 진정으로 원하고 해야 하는 삶의 몫이 무엇일까요? 애써 찾아야 되는건지요? 내가 진정 원하는 일, 나다운 일이 무엇일까요? 나다운 일은 어디에 가서 애써 찾는 것이 아닙니다. 그저 나로써 살아가는 문제입니다. 즉 인위적이지 않은 자연스러운 삶을 말합니다. 내가 나다운 삶을 찾으려고 애쓰는 순간 이미 그 마음은 자연스러움을 잃게 되고, 곧 나다움을 잃게 되는 것입니다. 그저 인연 따라 나에게 주어진 삶을 온전히 받아들이고 거부하지 않으며 자연스럽게 사는 것입니다. 또한 나답게 산다는 것은 내 안의 생각이나 감정을 나라고 착각하고 생각과 감정에 끄달려 사는 것이 아니라, 그 모든 것을 '지켜보는 자'로써 사는 것을 말합니다. 내 안에서 올라오는..

차에 고사를 지내야 하나?

어제가 길일이라고, 차를 산 친구는 차에다 고사를 지내고 사무실을 낸 언니는 사무실에서 고사를 지내데요. 제 생각엔 왜 고사를 지내는지 궁금합니다. 저는 고사 안 지내도 차사고 한 번 안 났거든요. 돼지 머리를 올려놓고 입에 지폐를 집어놓고 절을 하고 축원하는 것도 올바른 것일까요? 고사를 지내야 하느냐 말아야 하느냐? 본질에서 본다면 그게 다 필요 없는 것일 수 있습니다. 그런데 고사라는 말의 의미나 고사를 지내는 방식이나 그 마음이 조금 달라진다면 고사를 지내는 것도 그리 나쁘다고 할 수만은 없을 수도 있습니다. 즉 고사를 지내는데, 돼지 머리를 사다 놓고 돈 코에 쑤셔 넣고 뭐 그러면서 절을 하는 것 보다는, 차를 샀거나, 집을 샀거나 간에 차에서, 집에서 신묘장구대다라니 독송을 몇 독이고 해 주거..

시기 질투심에 괴로울 때

저는 사촌이 땅을 사면 배가 아파요. 시기 질투 욕심이 줄지 않습니다. 겉으론 표현 못하면서 속으론 무지 힘들어 합니다. 저 좀 도와주세요. 바뀌고 싶어요. 시기질투 안하고 싶어요. 사촌이 땅을 사서 배 아픈 것, 그 배 아픈 마음 그 마음이 나라고 우리는 종종 착각을 합니다. 누구나 사촌이 땅을 사고, 남이 잘 되면 배가 아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중요한 사실은, 그 배 아프고 질투 나는 그 마음은 내가 아니란 사실입니다. 다만 그 마음이 ‘나’인 것으로 착각해서 거기에 집착하고 실망스러워하고 그러면서 부정적이고, 혼탁한 에너지와 업을 끊임없이 발산하며 살고 있는 것이 문제지요. 질투 나는 마음 그것은 ‘내 마음’이 아니라 내가 나라고 착각하는 모양, 착각하는 상일 뿐입니다. 그렇다면 그것이 나인 줄로..

절수행에 대한 궁금증들

절 수행 중에 기도의 내용이 매일 바뀌고 어떤 때는 절 하는 중에도 계속 바뀝니다. 오히려 번뇌가 더해가는 느낌이랄까요? 어떤 마음으로 절을 해야 하는지요. 아무 생각 없이 절만 해도 되는지요? 절 하는 도중에 무슨 기도를 한다거나, 무슨 발원을 생각한다거나 그러지 마시고, 그저 절만 하세요. 생각, 바람, 기원 등의 마음도 다 놓아버리고 다만 절만 하면서 절하는 나 자신을 관하시기 바랍니다. 다만 발원 할 내용이 있으면 마음을 비우는 기도를 한 뒤에 기도 끝에 하면 됩니다. 마음이 비워진 뒤에 그 텅 빈 마음에서 이타적인 발원이 나오면 거기에 힘이 붙습니다. 그러나 기도 중에 계속 발원을 하면 오히려 생각이 많아지고 그 발원에 힘도 안 붙어요. 오직 무념으로 생각 없이 관하며 절하시기 바랍니다. 또 어..

기도 중 생기는 온갖 경계가 두려워요

기도를 오래 하다보니 기도하는 중에 온갖 경계를 만납니다. 마장이라고 해야하는건지 모르겠네요. 다 말로 표현할 수 없지만 때때로 두렵고 무서워 기도를 포기해야 하나 하는 생각도 듭니다. 기도 중 생기는 마장은 어떻게 해야할까요? 어떤 수행을 하든 다양한 수행중의 경계를 만날 수 있게 되는데, 그 경계를 만난다고 할지라도 중요한 것은 그 경계에 얽매이지 않고, 집착하지 않고 다만 그러한 경계가 수행 중에 나타나고 생활 중에 나타나고, 꿈 속에서도 나타나고 있다는 것을 한 발자국 떨어져서 가만히 분별 없이 지켜보기만 하시면 됩니다. 중요한 것은 그 경계가 즐겁고 신비하다고 좋아하여 집착하려 하거나, 다시 한 번 느끼려고 하거나, 또 무섭고 두렵다고 해서 미워하고 밀쳐내려 하거나 하지 말고, 그저 있는 그대로..

오락가락 하는 기도, 괜찮은가요?

제가 처음 다니던 절에서는 관음경을 독송했는데요, 이사를 와서 나가게 된 절에서는 대비주 기도를 합니다. 또 요즘은 어떤 인연이 되어 금강경 독송을 하고 있습니다. 물론 때때로 직장생활 중에는 관세음보살 염불을 합니다. 이렇게 오락가락하는 기도가 맞는지요? 우선 수행의 인연이 처음에는 관음경이 되어다가, 다라니가 되고, 또 금강경 독송으로, 관음정근으로 바뀌어 가고 있다고 하셨는데요, 그것은 그렇게 인연 따라 이 절 저 절 다니다보면 수행법도 바뀌게 될 수도 있습니다. 수행법이 바뀌는 것은 전혀 문제될 것은 없습니다. 왜 그런고 하니, 그런 모든 수행법의 그 이면에는 깊은 바탕과도 같은 지관(止觀)의 수행이 깔려 있기 때문입니다. 불교가 불교일 수 있는 이유는 바로 지관의 수행 때문입니다. 기도니, 보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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