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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상스님의 목탁소리

상주 대원정사 일요법회(13:30), 부산 목탁소리 토요법회(13: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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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을 돌리면 모든 상황이 행복!

[임진강의 낙조] 우리의 삶에서 마음 씀씀이를 배우는 것은 참으로 소중한 공부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마음을 어떻게 쓰는가에 따라 같은 조건 속에서도 같은 환경 속에서도 어떤이는 지옥이 될 수 있지만 어떤이는 천상이 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마음을 자유롭게 쓸 수 있는 사람이 참으로 당당한 수행자입니다. 내 마음인데 내가 자유롭게 써야지 다른 경계에 이끌린다면 그건 내 마음 떳떳한 주인공이 아닌 노예의 나약한 마음일 것입니다. 이 마음을 자유롭게 쓰는 방법, '마음 돌리기'의 가르침을 깨우치게 된 작은 인연이 있었기에 적어 볼까 합니다. 한번은 논산 군법당 법회에 참석키 위해 은사스님을 모시고 고속도로를 달리고 있었습니다. 법회 시간은 다가오는데 갑자기 차가 밀리기 시작하는데 마음이 얼마나 조마조마하던지..

겸손, 공경, 하심의 수행

[설악산 봉정암] 나를 낮추고 하심(下心)하는 데서 나는 진정으로 한없이 높아짐을 알아야 합니다. 나를 내세우고 높이려고 애쓰는 것은 모든 이들에게 나는 정말 못난 놈이라고 드러내는 것과 다르지 않습니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괴로움은 대부분 '나다'라고 하는 아상(我相)에서 오는 것임을 알고 있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습니다. 직장 상사에게 내가 욕을 얻어 먹으니 괴롭고, 내 여자 친구가 나를 떠나갔으니 괴롭고, 내 돈을 잃어버렸으니 괴롭고, 내 명예를 잃어 괴로움에 빠지는 것입니다. 이처럼 우리의 마음은 참으로 '나'라고 하는 것에 노예가 되어 있습니다. 본래 '나'라고 하는 것은 무아(無我)입니다. 다만 잠시 인연 따라 왔다가 인연이 흩어지면 가는 것이 '나'의 진정한 모습입니다. 나무 막대기와 판자라..

감사와 사랑의 호흡관

인간은 누구나 행복을 추구하며 살아갑니다. 우리의 현실세계에 펼쳐지고 있는 경제, 정치, 문화, 철학, 의술, 종교행위등 인간의 모든 행위는 행복해지기 위해서입니다. 당연히 불교도 행복을 추구합니다. 그래서 예부터 스님들은 불교의 목적을 이고득락,안심입명 이라고 표현하였고, 초기경에서 부처님께서는 금생의 행복, 내생의 행복, 궁극적인 행복을 말씀하셨는데 궁극적인 행복은 불교가 궁극적으로 추구하는 깨달음, 해탈, 열반, 성불은 불교만이 제시하는 고귀한 가르침입니다. 오늘은 우리가 일상 생활속에서 가장 근원적인 행복을 실현할수 있는 ‘감사와 사랑의 호흡관찰’ 수행에 대하여 말씀드리겠습니다. 행복의 가장 중요한 여건은 매 순간 순간 나에게 찾아오는 상황을 감사하고 사는 것입니다. 진언처럼 ‘감사합니다’라는 말..

생활 속에서 깨어있으라

[정동진 바닷가에서...] 망상이 일어남을 두려워 말고 '알아차림'이 더딜까 두려워하라. 망상이 일어나면 곧 알아채라. 알아채면 없느니라. 지눌스님의 수심결에 나오는 말입니다. 스님께서 말씀하신 '알아차림'의 수행이야말로 모든 수행의 뿌리가 됩니다. 다른 말로 관(觀) 혹은 위빠싸나라고도 하여 요즘 대중적으로도 많은 호응을 불러 오고 있는 수행법이기도 합니다. 대기업의 사원 연수에서도 위빠싸나를 지도하여 마음을 맑히는 수행을 통한 능률 향상에 큰 이바지를 하고 있음은 잘 알고 있는 일입니다. 그만큼 '관'수행은 종교적인 벽을 넘어 너무도 대중적이며 보편적이고 과학적인 수행방법입니다. 우린 생활 속에서 나 자신을 놓치며 살아가기 쉽습니다. 아니 일생을 살아가면서 온전히 깨어있을 수 있는 시간이 얼마 되지 ..

금강경 3분 대승정종분 강의 - 대승보살의 나아갈 길

금강경과 마음공부 카테고리 종교 지은이 법상 (무한, 2007년) 상세보기 제 3, 대승정종분 대승의 바른 종지(대승보살의 나아갈 길) 大乘正宗分 第三 佛告須菩提 諸菩薩摩訶薩 應如是降伏其心 所有一切衆生之類 若-卵生 若-胎生 若-濕生 若-化生 若-有色 若-無色 若-有想 若-無想 若-非有想非無想 我皆令入無餘涅槃 而滅度之 如是滅度無量無數無邊衆生 實無衆生 得滅度者 何以故 須菩提 若菩薩 有我相人相衆生相壽者相 則非菩薩 부처님께서 수보리에게 말씀하셨다. “수보리여, 보리심을 발하여 보살의 길로 들어선 자는 마땅히 이와 같이 마음을 내어야 한다. ‘존재하는 일체 모든 중생의 종류인, 이른바 알에서 태어나는 것, 모태에서 태어나는 것, 습기에서 태어나는 것, 화현하여 태어나는 것, 형상이 있는 것, 형상이 없는 것, 생..

깨어있으라 - 법구경 21~23게송

2장 깨어있음 21. 깨어있음은 영원의 길이며 깨어있음에 나태한 것은 죽음의 길이다. 바르게 마음을 관(觀)하여 깨어있는 사람은 영원히 살지만 마음이 집중되지 않아 깨어있지 못한 사람은 죽은 것과 같다. 22. 이러한 진리를 온전하게 깨달아 항상 마음을 집중하여 관하는 수행자는 그 깨어있음 속에서 법열(法悅)을 누린다. 그는 언제나 성스러운 깨달음의 길 위에 서 있다. 23. 언제나 굳은 의지력으로 깨어있음의 명상을 수행하며 매사에 주의 깊은 자각으로 평화와 선정을 성취하나니 이러한 현자는 모든 번뇌와 속박에서 벗어나 마침내 저 자유로운 열반에 이르게 된다. 깨어있음이야말로 모든 수행자의 삶의 방식이요 영원한 동반자다. 삶 속에서 매 순간 순간 깨어있다는 것은 바로 그 순간의 삶을 100% 완전하게 살고..

지혜를 공부할 때 - 법구경 19, 20게송

19. 경전을 아무리 많이 외우고 설하더라도 행동으로 옮겨 실천하지 않는 사람은 남의 소만 세고 있는 목동일 뿐 참된 수행자라 할 수 없다. 20. 경전을 아무리 적게 외우고, 적게 설하더라도 행동에 옮겨 법을 실천하며 탐욕과 성냄과 어리석음에서 벗어나 바른 지혜와 평안을 얻고 생사를 비롯한 그 어떤 것에도 집착을 두지 않는 이는 참된 수행자라 할 수 있다. 불교의 지혜공부와 세상의 지식공부는 똑같이 배운다는 점에서는 같지만 그것은 전혀 다른 방향의 실천을 이끈다는 점에서 확연한 차이가 난다. 불교의 지혜는 비우도록 이끄는 가르침이고, 세상의 지식은 쌓도록 이끄는 가르침이다. 불교의 경전에 담긴 지혜의 가르침은 배우면 배울수록 더 많이 비우고, 놓도록 이끎으로써 마음이 평화로와지지만, 세상의 수많은 지식..

오는 것 오게 하고, 가는 것 가게 하라

모든 것은 오고 간다. 올 때가 되면 오고, 갈 때가 되면 간다. 그것이 진리의 모습이다. 그러니 진리를 깨닫기 위해 수행자가 할 수 있는 일은 올 때는 오도록 갈 때는 가도록 그대로 놔두고 다만 지켜보기만 하는 것이다. 모든 온 것은 그리 오래 머물지 않는다. 잠시 왔다가 잠시 머물러 가야할 때 갈 것이다. 생각도 잠시 왔다가 가고, 인생도 잠시 왔다가 가고, 돈도 잠시 왔다가 가고, 명예도, 권력도, 지위도, 사랑도, 행복도, 성공도, 실패도, 나라는 존재 또한 그렇게 잠시 왔다가 갈 것이다. 모든 것은 올 때가 되면 왔다가 갈 때가 되면 간다. 오고 감을 거부하지 말고 받아들이라. 그저 내 존재 위를 스쳐 오고 가도록 그저 내버려 두라. 행복이 온다고 잡으려 애쓰지도 말고 행복이 간다고 붙잡으려 애..

드러냄, 참된 관계의 시작

대인관계의 핵심, 그것은 바로 나를 활짝 열어 보이는 데 있다. 나를 있는 그대로 드러낼 수 있는가. 그렇다면 깊은 관계는 시작될 수 있지만, 여전히 나를 숨기려 하고, 치장하려 하고, 모든 것을 보여 줄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면 그대의 모든 관계는 피상적일 수 밖에 없다. 피상적인 관계를 맺는 사람과 함께하는 것은 즐거움이 아닌 부담이고 괴로움이다. 그 사람 앞에서는 끊임없이 연극을 해야 한다. 연극에서 실수는 용납될 수 없다. 실수하지 않으려면 계속해서 힘을 주고 에너지를 쏟아야 한다. 그런 관계는 자연스럽지 못하다. 억지스럽고 에너지만 끊임없이 낭비 될 뿐이다. 겉으로는 웃고 있을 지 몰라도 그 깊은 속에서는 웃고 있는 것이 아니다. 우린 언제나 습관처럼 세상을 향해 웃고는 있지만 과연 그 웃음이 ..

부자가 되기를 포기하는 지혜

실제 수많은 민족지 조사 연구 결과 고대사회, 원시사회는 최초의 풍요사회였다. 그들 원시인들은 하루에 서너시간만 일하고도 먹고 남는, 연간 필요소비량 이상의 잉여를 생산했을 뿐만 아니라 남는 시간에 놀라울 정도로 다양한 문화활동을 발달시켰다. 원시사회는 생계경제가 아니라 풍요의 잉여경제였다. 그것도 잉여를 끔찍한 대규모 전쟁이나 쓰레기로 낭비하는 현대 산업문명과는 달리 잉여를 이웃 공동체와 서로 나누고 자연으로 돌려보내는, 최적의 생계순환형 경제를 운영하고 있었다. 오히려 자본주의 초기의 산업 프롤레타리아트야말로 생계경제에 허덕이고 있었으며 오늘날 한국의 대다수 노동자들과 농민들, 전세계 대다수 인민들이야말로 자본주의 시장경제의 침략 아래 생계경제에 허덕이고 있다. [왜 자립경제인가]박승옥 중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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