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혜를 공부할 때 - 법구경 19, 20게송
법상스님의 목탁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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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구경과 마음공부

지혜를 공부할 때 - 법구경 19, 20게송

목탁 소리 2009. 8. 28. 08:19



19.
경전을 아무리 많이 외우고 설하더라도
행동으로 옮겨 실천하지 않는 사람은
남의 소만 세고 있는 목동일 뿐
참된 수행자라 할 수 없다.

20.
경전을 아무리 적게 외우고, 적게 설하더라도
행동에 옮겨 법을 실천하며
탐욕과 성냄과 어리석음에서 벗어나 바른 지혜와 평안을 얻고
생사를 비롯한 그 어떤 것에도 집착을 두지 않는 이는
참된 수행자라 할 수 있다.



불교의 지혜공부와 세상의 지식공부는 똑같이 배운다는 점에서는 같지만 그것은 전혀 다른 방향의 실천을 이끈다는 점에서 확연한 차이가 난다. 불교의 지혜는 비우도록 이끄는 가르침이고, 세상의 지식은 쌓도록 이끄는 가르침이다. 불교의 경전에 담긴 지혜의 가르침은 배우면 배울수록 더 많이 비우고, 놓도록 이끎으로써 마음이 평화로와지지만, 세상의 수많은 지식들은 배우면 배울수록 더 많이 벌고 싶고, 욕심을 채우도록 이끎으로써 우리의 욕망을 더욱 커지게 만든다.
그렇기에 불교 경전에 담긴 지혜를 공부하는 이는 공부하면 할수록 더 욕심이 비워지고, 집착이 놓여지며, 그에 따라 삶이 고요해지고 평화로와지지 않을 수가 없다. 그러나 불교 공부를 세속의 지식 공부 하듯이 하는 이는 여전히 불교경전의 지혜를 통해 삶의 욕망을 도모하고자 할 뿐, 마음을 비우지는 못한다.

내가 아는 불교학과 교수님들 가운데 많은 분들은 불법을 공부함으로써 나날이 행복해지고, 마음이 평화로와지고 있다고 말하지만, 몇몇 교수님들은 불법을 공부함으로써 좀 더 높은 교직에 오르고자 하거나, 더 유명한 교수가 되고자 하거나, 부업으로 경전의 가르침을 팔아 더 부유해지기를 원하기도 한다. 이것은 불교의 목적을 완전히 망각한 일이지만, 우리 사회에서는 분명 후자의 교수님들, 후자의 수행자들, 후자의 불자들이 많이 있다. 비우는 가르침을 공부함으로써 더 높은 자리에 오르려 한다는 것이야말로 아이러니다.
또 많은 불자들은 어떠한가. 경전 공부 한 것을, 교리 공부 한 것을, 기도나 수행 한 것을 어떤 실적인 듯, 자기 과시인 듯, 자랑인 듯 내세우고 있지 않은가. 아무리 경전을 많이 본들 그것이 현실의 삶 속에서 실천되어지지 않는다면 아무 소용이 없다. 경전 공부도 했고, 백일기도도 했고, 절에도 열심히 다닌다는 사람의 현실의 삶이 남들 보기에 전혀 공부하지 않은 사람보다도 못하다면 그것은 오히려 불교를 욕되게 하는 것이며, 가르침을 욕되게 하는 것이 아닐까.

모든 경전은 우리의 욕심과 집착과 헛된 야망을 놓아버리도록 이끌어 줌으로써 우리 마음에 평안과 고요와 자비의 씨앗을 뿌린다. 우리가 경전을 대할 때는 오직 그 가르침에 나를 완전히 열어 놓고, 완전히 비우고 그것을 온전히 흡수 할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한다. 그러면 경전이 저절로 나를 이끌어 갈 것이다. 거기에 나를 완전히 비우고 맡기면 된다.

그러나 여기에 아상이 개입된다면, 경전을 공부하면서도 나를 드러내고야 만다. 경전 공부하는 것은 나를 비우기 위함인데, 경전을 얼마나 많이 공부했고 말고 하는 것이 더 중요하게 되는 것이다. 나는 금강경도 공부했고, 반야심경도 공부했고, 지장경, 화엄경, 법화경까지 다 공부했으며, 어떤 스님 경전 강의는 재미있고, 또 다른 스님의 경전 강의는 너무 지루하고, 이런 판단과 분별이 앞서게 되는 것이다. 그것은 경전공부를 통해 내 아상을 강화시키는 것밖에 되지 못한다. 왜 그 많은 경전을 다 보아야만 하는가. 단 하나의 짧은 경전을 보더라도 우리는 충분히 평화로와질 수 있다. 백 권의 경전을 보고 그 많은 독서량에 스스로 흡족해 자랑하는 사람보다 차라리 한 줄의 부처님 가르침을 직접 실천으로 옮기는 것이 더 근원적이다. 차라리 내 앞의 거지에게 내가 먹을 빵을 나누어 주는 것이 더 깊은 수행자다.

‘나는 경전을 많이 공부한 사람이다’라는 아상이야말로 얼마나 대단해 보이는가. 얼마나 지혜로와 보이고, 얼마나 마음공부를 많이 한 것 같아 보이며, 얼마나 비움과 평온을 실천하는 것처럼 보이는가. 그러나 왜 경전을 많이 보았다는 것이 우리의 실적이 되어야 하는가. 경전 공부의 실적은 얼마나 더 비워졌고, 고요해졌고, 놓여졌느냐에 있지, 얼마나 더 쌓았으며, 더 배웠고, 더 많이 아느냐에 있지 않다. 참된 경전은 글자를 보는 것이 아니라, 마음을 보는 것이요, 참된 수행은 경전을 보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삶을 여실하게 관찰하여 보는 것이다.


부처님 당시에 귀족 가문 출신의 절친한 두 친구가 함께 출가를 했다. 젊은 수행자는 경전을 통달해 강사스님이 되었으며 온갖 절의 책임을 맡아 사무를 돌보느라 바쁜 시간을 보냈다. 반면 나이 많은 수행자는 오직 수행에 매진하여 깨달음을 얻어 아라한이 되었다. 깨달음을 얻은 자는 스스로 깨달음을 얻었다는 사실을 잊는다. 아라한과를 증득한 것을 자랑하거나, 위대하게 생각하지도 않는다. 그러나 깨달음을 얻지 못한 채 수행의 실천 없이 경전만을 공부한 자에게 수많은 경전공부는 자신의 정체성을 결정짓는 아주 좋은 아상이 된다. ‘나는 위대한 강사스님이다’ ‘나는 모든 경전에 통달했다’ ‘그로인해 나는 절의 높은 직위의 스님이 되었다’ 모든 것이 그에게는 자랑스럽고 스스로의 모습에 흡족하다. 이렇듯 아상이 커질수록 상대방에 대한 우월의식도 커지게 마련이다.

어느날 모처럼 함께 출가한 도반인 두 스님이 만나게 되었는데, 젊은 강사 스님이 도반이 아라한이 된 줄도 모르고 자신의 학문을 자랑하려고 했다. 아라한인 도반은 묵묵히 듣고 있을 뿐이었다. 이를 알고 부처님께서 두 스님께 경전에 대한 어려운 질문을 던지신다. 젊은 스님은 대답을 하지 못하였으나, 늙은 아라한은 명확한 답변을 한다. 이에 부처님께서는 위의 두 게송을 설하셨다.

단 하나의 가르침이라도 듣고 실천하는 것이, 백 가지 가르침을 듣고 실천하지 않는 것보다 낫다는 것이 오래된 이 불가의 아름다운 전통이다. 아무리 법랍(法臘)이 높을지라도, 아무리 출가 년수가 오래 된 노승일지라도 갓 깨달음을 얻은 사미에게, 혹은 깨달음을 얻은 신도님께 가르침을 하심하는 마음으로 배워야 한다. 그렇기에 이 불법문중에서는 많이 배우고 적게 배웠다거나, 더 나이가 많고 적다거나 하는 일체의 차별이 없다. 오직 실천 행의 차이가 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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