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상스님 즉문즉설' 카테고리의 글 목록 (2 Page)
법상스님의 목탁소리

상주 대원정사 일요법회(13:30), 부산 목탁소리 토요법회(13: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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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상스님 즉문즉설 78

저는 왜 장애인으로 태어났을까요? (큰 고통을 받는 이유)

우리는 전생의 업 때문에 그것을 풀기 위한 적합한 조건을 선택하여 태어났다고 하던데요, 그렇다면 저는 왜 장애인으로 태어난 것일까요? 전생에 중죄를 저질러서입니까? 그렇다면 이 장애를 안고 그냥저냥 살아가는 것 자체가 전생의 업을 씻는 과정인 것인지, 아니면 이 장애를 극복해내어 뭔가 이뤄내야지만 선업을 쌓아 전생의 업보가 씻기는 것인지요? 장애를 안고 살아가는 것, 그 자체가 사실은 나 자신이 선택한 내면의 깊은 선택이기에, 나 자신이 책임져야 할 문제입니다. 책임져야 한다는 것은 내 바깥에 이 장애로 태어나게 한 누군가에 대해, 심지어 신이나, 부처나, 진리 조차도 욕하거나, 탓하거나, 원망하지 않고, 다만 있는 그대로 수용하고 받아들이는 것을 의미합니다. 부정하지 않고 받아들이게 되었을 때, 그 받..

화엄성중, 관음보살은 진짜로 있나요?

화엄성중이 진짜로 있나요? 관음보살님께서 진짜로 중생을 구제해 주실까요? 아미타부처님의 서방 극락 정토가 실제로 존재하나요? 영가천도는 진짜 가능한 것인지요? 이 모든 것들이 단순한 방편에 불과한 것인지, 아니면 실제로 존재하는 것인지가 궁금합니다. 사실 방편법을 말하려고 한다면, 우리가 입을 벌려 하는 모든 말들이 방편법입니다. 근본법을 말하고자 한다면, 그 어떤 말도 꺼낼 수도 없고, 어떻게 말로는 표현할 수가 없습니다. 표현함과 동시에 방편법이 되어 버리니까요. 그래서 사실은 부처님의 모든 가르침은 방편법문입니다. 본질에 가까이 간 법문들도 있지만, 그 또한 엄밀히 말한다면 세속제(世俗諦)인 언어를 빌어 설명할 수밖에 없는 한계를 가지고 있지요. 극락세계도, 영가천도도, 화엄성중도, 불보살의 가피도..

초심을 유지하려면/짜증이 날 때는?

초심은 어떻게 지킬 수 있을까요? 성경 필사를 통해서 넘치는 감사의 마음을 경험하였는데, 어느 순간부터 감사의 마음은 줄어들고 의무적으로 필사를 하는 모습이 되어버린 후 마음이 너무나도 차가워져서 사랑과 자비의 마음이 사라진 줄 알았습니다. 그러던 중 불교와 절 수행, 스님의 말씀을 통해서 내 마음 안에 사랑과 자비의 마음을 다시 보았습니다. 첫 사랑을 처음 보았을 때와 같은 그 마음, 그 초심을 겨우 찾았는데, 이제 다시는 잃고 싶지 않아요. 어떻게 하면 초심을 유지할 수 있을까요? 그러게요. 그 초심을 잘 유지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어요. 그런데 우리 마음이 잘 그렇지 못하죠. 계속 변하고 바뀌어요. 그런데 그런 변하는 마음 또한 자연스러운 마음입니다. 변하는 마음에 대해 시비를 걸 필요도 없고, ..

진정 원하는 일을 찾으려면

내가 진정 원하는 일, 나다운 일이 무엇인지 모르겠습니다. 내가 진정으로 원하고 해야 하는 삶의 몫이 무엇일까요? 애써 찾아야 되는건지요? 내가 진정 원하는 일, 나다운 일이 무엇일까요? 나다운 일은 어디에 가서 애써 찾는 것이 아닙니다. 그저 나로써 살아가는 문제입니다. 즉 인위적이지 않은 자연스러운 삶을 말합니다. 내가 나다운 삶을 찾으려고 애쓰는 순간 이미 그 마음은 자연스러움을 잃게 되고, 곧 나다움을 잃게 되는 것입니다. 그저 인연 따라 나에게 주어진 삶을 온전히 받아들이고 거부하지 않으며 자연스럽게 사는 것입니다. 또한 나답게 산다는 것은 내 안의 생각이나 감정을 나라고 착각하고 생각과 감정에 끄달려 사는 것이 아니라, 그 모든 것을 '지켜보는 자'로써 사는 것을 말합니다. 내 안에서 올라오는..

차에 고사를 지내야 하나?

어제가 길일이라고, 차를 산 친구는 차에다 고사를 지내고 사무실을 낸 언니는 사무실에서 고사를 지내데요. 제 생각엔 왜 고사를 지내는지 궁금합니다. 저는 고사 안 지내도 차사고 한 번 안 났거든요. 돼지 머리를 올려놓고 입에 지폐를 집어놓고 절을 하고 축원하는 것도 올바른 것일까요? 고사를 지내야 하느냐 말아야 하느냐? 본질에서 본다면 그게 다 필요 없는 것일 수 있습니다. 그런데 고사라는 말의 의미나 고사를 지내는 방식이나 그 마음이 조금 달라진다면 고사를 지내는 것도 그리 나쁘다고 할 수만은 없을 수도 있습니다. 즉 고사를 지내는데, 돼지 머리를 사다 놓고 돈 코에 쑤셔 넣고 뭐 그러면서 절을 하는 것 보다는, 차를 샀거나, 집을 샀거나 간에 차에서, 집에서 신묘장구대다라니 독송을 몇 독이고 해 주거..

절수행에 대한 궁금증들

절 수행 중에 기도의 내용이 매일 바뀌고 어떤 때는 절 하는 중에도 계속 바뀝니다. 오히려 번뇌가 더해가는 느낌이랄까요? 어떤 마음으로 절을 해야 하는지요. 아무 생각 없이 절만 해도 되는지요? 절 하는 도중에 무슨 기도를 한다거나, 무슨 발원을 생각한다거나 그러지 마시고, 그저 절만 하세요. 생각, 바람, 기원 등의 마음도 다 놓아버리고 다만 절만 하면서 절하는 나 자신을 관하시기 바랍니다. 다만 발원 할 내용이 있으면 마음을 비우는 기도를 한 뒤에 기도 끝에 하면 됩니다. 마음이 비워진 뒤에 그 텅 빈 마음에서 이타적인 발원이 나오면 거기에 힘이 붙습니다. 그러나 기도 중에 계속 발원을 하면 오히려 생각이 많아지고 그 발원에 힘도 안 붙어요. 오직 무념으로 생각 없이 관하며 절하시기 바랍니다. 또 어..

기도 중 생기는 온갖 경계가 두려워요

기도를 오래 하다보니 기도하는 중에 온갖 경계를 만납니다. 마장이라고 해야하는건지 모르겠네요. 다 말로 표현할 수 없지만 때때로 두렵고 무서워 기도를 포기해야 하나 하는 생각도 듭니다. 기도 중 생기는 마장은 어떻게 해야할까요? 어떤 수행을 하든 다양한 수행중의 경계를 만날 수 있게 되는데, 그 경계를 만난다고 할지라도 중요한 것은 그 경계에 얽매이지 않고, 집착하지 않고 다만 그러한 경계가 수행 중에 나타나고 생활 중에 나타나고, 꿈 속에서도 나타나고 있다는 것을 한 발자국 떨어져서 가만히 분별 없이 지켜보기만 하시면 됩니다. 중요한 것은 그 경계가 즐겁고 신비하다고 좋아하여 집착하려 하거나, 다시 한 번 느끼려고 하거나, 또 무섭고 두렵다고 해서 미워하고 밀쳐내려 하거나 하지 말고, 그저 있는 그대로..

오락가락 하는 기도, 괜찮은가요?

제가 처음 다니던 절에서는 관음경을 독송했는데요, 이사를 와서 나가게 된 절에서는 대비주 기도를 합니다. 또 요즘은 어떤 인연이 되어 금강경 독송을 하고 있습니다. 물론 때때로 직장생활 중에는 관세음보살 염불을 합니다. 이렇게 오락가락하는 기도가 맞는지요? 우선 수행의 인연이 처음에는 관음경이 되어다가, 다라니가 되고, 또 금강경 독송으로, 관음정근으로 바뀌어 가고 있다고 하셨는데요, 그것은 그렇게 인연 따라 이 절 저 절 다니다보면 수행법도 바뀌게 될 수도 있습니다. 수행법이 바뀌는 것은 전혀 문제될 것은 없습니다. 왜 그런고 하니, 그런 모든 수행법의 그 이면에는 깊은 바탕과도 같은 지관(止觀)의 수행이 깔려 있기 때문입니다. 불교가 불교일 수 있는 이유는 바로 지관의 수행 때문입니다. 기도니, 보시..

남편 일이 너무 힘든데, 바라는 기도해도 될까요?

현실적으로 남편하는 일이 너무 힘이 듭니다 .부처님 앞에 일 잘되게 해달라고 하기가 죄송스럽지만 집에 와서 남편과 아이들 얼굴을 보면 부처님께 내 욕심을 담은 기도를 하고 싶기도 합니다. 바라는 기도, 기복적인 기도를 해도 될까요? 기도를 한다는 것은 무언가 세속적인 빌 것이 있다는 말인데, 사실은 빌게 되면 오히려 그것을 얻지 못하게 되기 쉽습니다. 예를 들어 ‘남편 하는 일이 잘 되게 해 주세요’ 하고 빌었다면 사실 마음의 이면에 무엇이 연습되고 있는지를 보세요. 그 이면에는 '지금 남편 하는 일이 잘 안 됩니다. 그러니 앞으로 미래에는 더 잘 되게 해 주세요' 하는 것입니다. 즉 잘 되게 해 달라는 말 이면에 우리는 사실 '남편 일이 잘 안 된다'는 말을 법계를 향해 계속해서 뿜어내고 있는 것입니다..

벌레가 너무 무서워요

저는 어릴적부터 벌레를 너무 많이 무서워합니다. 새벽 좌선 중에 갑자기 벌레를 보고 놀라 너무 무서워서 살충제를 쏘아 죽였습니다. 벌레에 대한 혐오감과 두려움을 극복하기가 너무 어려워요. 어떻게 하면 좋지요? 한 마리의 벌레가 있습니다. 그 벌레는 그저 벌레일 뿐입니다. 나무처럼, 구름처럼, 한 송이의 꽃처럼, 혹은 강아지나 예쁜 토끼처럼 하나의 존재일 뿐입니다. 그것은 무분별이고, 무차별입니다. 좋을 것도 없고 나쁠 것도 없고, 무서울 것도 없고 그렇다고 애착할 것도 없고, 그저 그렇게 거기에 있을 뿐입니다. 문제는 곤충이나 벌레 그 자체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그것에 대한 내 안의 해석, 분별, 판단, 경험 등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법우님께서 느끼는 그 공포나 무서움은 벌레 자체의 문제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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