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계는 아무런 잘못이 없습니다.
그대로 텅 비어 고요합니다.
여여하며 여법합니다.

그런 경계가 좋고 싫은 이유는
경계에 잘못이 있어서가 아니라
내 마음에 분별이 있는 탓입니다.

경계에 휘둘리는 마음 또한
내가 만들어낸 것이지
경계는 본래 휘둘리고 말고 할 것이 없습니다.

맑은 하늘에
인연 따라 구름이 모이고 흩어지듯
텅 비어 고요한 본래자리에
인연 따라 이런 저런 경계가 잠시 모이고 흩어지는 것일 뿐입니다.
좋고 싫은 경계가 오는 것이 아니라
그냥 무분별의 경계가 꿈처럼 잠시 일어났다 사라지는 것입니다.

경계가 일어날 때
그저 있는 그대로 바라보면
있는 그대로의 경계가 될 뿐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마음은
모인 경계를 가만히 두지를 않습니다.
있는 그대로 편견없이 바라보지를 못합니다.
거기에 이름을 붙이고, 모양을 짓고
좋고 나쁜 분별을 일으킵니다.

연이어 좋은 분별엔 애착[탐(貪)]의 마음을,
나쁜 분별엔 성내는 마음[진(嗔)]을 일으킵니다.
그런 두 가지 분별이 생기는 연유는
본래 나도 경계도 모두 공하고 허망함을 알지 못하는
어리석음[치(癡)] 때문입니다.
그 때부터 괴로움이 생겨나는 것입니다.

경계는 아무런 잘못이 없음을,
아무런 분별이 없음을
밝게 깨쳐 알 수만 있다면 거기에 휘둘릴 것도 없습니다.

한 여름에는 너무 더워 짜증이 나고 화도 나고 그럽니다.
그러나 ‘더위’는 그냥 더위일 뿐입니다.
‘그냥 있는 그대로 더위’일 뿐
좋고 싫다는 고정된 분별을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더위는 나쁘고 싫은 것이라든가
좋은 것이라든가 하는 분별이 없습니다.

그러나 그런 텅 비어 고요한 더위라는 경계에
우리는 온갖 분별을 부여하고
그렇게 스스로 부여한 분별 때문에 괴로워 합니다.

한 여름에 땀을 뻘뻘흘리며 일을 할 때는
더위라는 경계에 ‘짜증난다’ ‘미치겠다’ ‘쪄죽겠다’ 하며
나름대로의 싫은 마음을 덧붙입니다.
그러나 애써 찾아간 사우나에 들어가면
그보다 더한 더위에서도 ‘시원하다’ ‘피로가 확 풀린다’
하고 좋은 마음으로 분별을 몰아갑니다.

본래 ‘더위’라는 경계는 텅 비어 고요하기에
좋을 것도 싫을 것도 없습니다.
그냥 있는 그대로의 ‘더위’ 일 뿐입니다.
그러나 우리 마음에서 좋고 싫다는 분별을 일으키고
그렇게 스스로 만들어 놓은 분별 때문에 또 한번 괴로워합니다.

내 마음이 좋고 싫은 것이지
경계가 좋고 싫은 것은 아니란 말입니다.
모든 경계는 이처럼 아무런 잘못이 없고, 분별이 없지만
우리 마음은 작은 경계에도 끄달리고 휘둘리고 그럽니다.
그러니 제 혼자 만들고 그렇게 만든 분별로 인해
제 혼자 괴로워 하고 그러는 기가 막힌 세상입니다.

그러니 깨달은 이가 우리를 바라본다면
얼마나 우습겠습니까.
얼마나 기가 막히겠는가 말이지요.

어떤 사람은 밤하늘의 달을 보면서
한없이 북받쳐 오르는 우울함에 어쩔 줄 몰라하고,
또 어떤 사람은 달을 보면서 행복해 합니다.
똑같은 달을 보면서 괴로워하는 사람, 적적해 하는 사람,
누군가를 그리워하는 사람, 기뻐하는 사람 등 제각각입니다.

하늘의 달은 아무런 분별도 없고 잘못도 없습니다.
그냥 떠 있는 달일 뿐이지만,
우리 마음은 과거 달과의 연관된 기억이나 추억들로 인해
좋고, 싫고, 우울하고, 그리워하는 등의 분별을 일으킵니다.

육체적인 노동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일이라고 생각하면 힘들고 고된 일이 되지만,
운동 삼아 하는 일이라 생각하면 오히려 기쁜 마음입니다.
일은 힘든 것이고 운동은 즐거운 것이지만,
사실 이 두 가지는 모두 똑같이 육신을 움직이는 것일 뿐입니다.

애써 운동을 하느라고 헬스크럽에 가서 땀을 뻘뻘 흘리며
육체적 한계를 느낄 만큼 무거운 역기를 들고도 힘든 줄 모르고,
샤워 후엔 그렇게 개운하고 시원하여 힘이 난다고 합니다.
그러나 일을 할 때면 그보다 더 가벼운 것을 들고도
쉽게 피곤해지고 노곤해져 일이 끝나면 녹초가 됩니다.

같은 육체적 노동이지만
마음 따라 일도 되었다가 운동도 되는 것입니다.
마음 따라 괴로워 녹초가 되기도 하고, 되려 힘이 펄펄 나기도 합니다.
육신을 움직인다는 것은 똑같은 것입니다.
경계는 같지만 마음에서 일이다, 운동이다 분별하여
더 힘이 나게도 하고 녹초가 되게도 만드는 것입니다.

사람을 보고 좋은 사람, 미운 사람 하고 분별하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세상 누구라도 그 누군가에게
좋은 사람이 될 수도 있고, 미운 사람이 될 수도 있습니다.
내가 밉다고 그 사람이 미운 사람하고 고정된 것이 아니며,
내가 좋다고 그 사람이 좋은 사람하고 정해진 것이 아닙니다.
다 내가 만들어 놓은 분별일 뿐입니다.

그렇게 스스로 만들어 놓고는
좋은 사람 보면 애착을 하여 헤어짐을 괴로워하고,
미운 사람 보면 괴로워하여 만남을 괴로워하고,
그렇게 제가 만들어놓은 틀에 제가 걸려 괴로워합니다.
기막힌 중생놀음이라는 것이 이를 두고 하는 말입니다.

누군가에게 욕을 얻어먹으면 기분이 상합니다.
그러나 ‘욕’에도 좋고 싫음이 본래 없습니다.
내가 욕을 얻어먹거나
나와 가까운 사람이 욕을 얻어먹으면 기분이 상하지만,
미운 사람에게 누군가가 욕하는 것을 들으면 되려 통쾌합니다.

나와 얼마나 가까운가에 따라,
즉 아상이 얼마나 큰 대상인가에 따라
같은 욕설에도 우리 마음은 천차만별로 변화합니다.
그러니 ‘욕’ 그 자체가 좋거나 싫은 것은 아닙니다.
영화에서 나오는 그럴듯한 욕은 참 듣기 좋기도 합니다.
본래 정해진 바가 없기에
인연 따라 좋았다가 싫었다가 하는 것입니다.

세상 모든 경계가 이와 같을진데
어찌 좋고 나쁨이 따로 정해져 있겠습니까.
똑같은 경계일지라도
좋다고 분별할 수도 있고, 나쁘다고 분별할 수도 있으며,
사랑할 수도 있고, 미워할 수도 있으며,
힘 빠지는 일일 수도 있고, 힘 나는 일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니 이 모든 경계에 뭣하러 끄달립니까.
왜 아무런 잘못도 없는 경계를 탓하는가 말입니다.
‘괴로움’ 하고 딱 정해졌다면이야, 절대적 괴로움이라면이야
어쩔 수 없이 괴로움을 당해야 한다고 하지만,
우리 앞에 펼쳐지는 그 어떤 괴로움도 절대적일 수는 없습니다.
괴로움이기도 하고 즐거움이기도 한 것입니다.

선택은 내가 하는 것입니다.
괴로움도 즐거움도 내가 선택하는 일인 것입니다.
경계는 아무런 분별도 잘못도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선택 또한 하나의 분별입니다.
그러니 그냥 놓아버리면 됩니다.

그냥 내버려 두면 그대로 자연스러운 세상입니다.
아무것도 잡지 않으면 그대로 고요한 세상입니다.
좋고 싫고 분별하지 않으면 그대로 해탈의 경계인 것입니다.

가만히 있는 경계를
애써 좋다 나쁘다 분별하고,
행복하다 괴롭다 분별하여,
좋다고 잡으려 애쓰고 싫다고 버리려 애쓰느라
우리의 삶이 많이 번거로워 졌습니다.
그냥 내버려 두면 평화로운데 말입니다.
그냥 놓아버리면 본래자리 그대로인 것입니다.

아무런 잘못도 없는 경계를 애써 탓하지 마십시오.
조건이 별로라고, 환경이 별로라고
부모님이 별로라고, 남편이 별로, 친구 성격이 별로라고 탓하지 마십시오.
그들에게는 절대 아무런 잘못도 없습니다.
잘못이 있다면 그것은 전적으로 나에게로 돌릴 일입니다.
내 마음이 변하면 경계는 따라서 변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싫은 경계를 잡으면 괴로움이고,
좋은 경계를 잡으면 즐거움이지만,
그 마음 놓면 해탈입니다.
Posted by 법상




'나'는 없습니다(無我).
'나'는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습니다.

'나'가 없는 이유는
'나' 홀로 만들어진 것은 어디에도 없기 때문이며,
'나' 스스로 배워 익힌 것은 어디에도 없기 때문입니다.

이 몸도 내가 아니며,
마음, 생각 또한 내가 아닙니다.

이 몸이란 부모님을 의지해 태어난 것이며,
마음, 생각들이란
가정, 학교, 사회, 그리고
살아오며 부딪쳐온 이 모든 환경들로부터
배워 익혀 온 것들에 불과합니다.

어느 하나 내 스스로 만들어 놓은 것은 없습니다.
결코 찾을 길이 없습니다.

몸이란 부모님으로부터 물려받은 것입니다.
또한 몸을 구성하고 있는 육신의 지수화풍 또한
이 우주의 지수화풍을
잠시 인연에 맞게 빌어다 쓰고 있는 것일 뿐입니다.

여기 쌀이 있습니다.
분명 쌀과 나는 별개입니다.
그러나 물(수)과 열(화)의 인연을 지어주고나면
우리가 먹을 수 있는 밥이 됩니다.
밥은 밥이지만 우리가 밥을 먹고나면
밥은 더이상 밥이 아닌 '나'가 되는 것입니다.
살이되고 뼈가 되어 내 몸이 되는 것입니다.

물도 물이지만 마시고 나면 '나'가 되고,
과일도 과일이지만 먹고나면 '나' '내몸'이 되며,
공기도 공기지만 들이마시고 나면 '나'의 호흡이 됩니다.

본래부터 나였던 것은 어디에도 없습니다.
잠시 인연따라 나에게로 오면
그것을 보고 '나'라고 이름지어 집착하는 것일 뿐입니다.

지금 우리의 몸은 시간이 흐른 뒤까지
지금 이 모습, 이 세포 그대로의 나로 남아있지 않습니다.
끊임없이 '나'는 변화합니다.
어떤 살저름을 보고 나라고 이름지을 수 없습니다.

손가락이 잘렸다면 그 잘린 손가락을 보고
나라고 하겠습니까.
아니면 내가 아니라고 하겠습니까.

몸에서는 한치라도 '나'를 찾아볼 수 없는 노릇입니다.

그렇다면 내 마음, 생각, 가치관들이 '나'일까요?
내 마음은 어디에서 나왔으며,
생각이며, 가치관이며 선악관들은 어디에서 나왔습니까?

'내'이야기를 할 수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모두가 다른 사람의 말이거나,
배운 말이거나,
살아오며 환경에 의해 익혀온 이야기일 뿐입니다.

가정환경, 학교, 사회, 역사, 책, 사람들...
이 모든 주변 일체의 환경에 의해
내 마음, 내 생각이 만들어 진 것일 뿐입니다.

만들어지지 않은 순수한 생각을 꺼내어 보십시오.
만들어지지 않은 순수한 말을 꺼내어 보고,
만들어지지 않은 순수한 마음을 일으켜 보십시오.

입을 여는 순간 우리는 익혀온 말을 하고
익혀온 생각, 생각의 조각을 짜맞추는데 머리를 굴리게 됩니다.

익혀온 관습, 생각, 가치관, 선악관, 고정관념들이
우리의 머릿속을 온통 어지럽혀 놓았습니다.
모든 사람들의 생각이 다르고 성격이 다른 이유는
모든 사람들이 자라고 익혀온 환경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그 나름대로의 환경 속에서
나름대로 주워담았기 때문인 것입니다.

선악이며, 성격이나 몸매의 좋고 나쁨,
유식과 무식에서, 능력의 많고 적음, 근기의 우열...
이 모든 것들은 본래 있지도 않습니다.
본래 있지 않기 때문에 오히려 온 천지 가득한 것입니다.
그런 것을 우린 '나'라고 하는 통 속에
주워담는 것을 배워왔습니다.

나름대로 주워담고는
좋으니 나쁘니, 잘났느니 못났느니
행복하니 괴로우니, 크니 작으니, 똑똑하니 어리석으니...
숯한 분별을 일으킵니다.
그 분별 속에 우리네 중생의 어리석음이 있습니다.
그 놈만 놓으면, 나만 없어지면
그만 온갖 분별이 딱 끊어져 온통 환히 밝아지는 줄을 모릅니다.

그렇게 제 스스로 '만큼의 나'를 만들어 놓았습니다.
그래 놓고는 밖을 탓하고 삽니다.
그러니 본래 '내 생각' '내 마음' 또한 찾을 길이 없습니다.

그러면 성격이 나인가요?
성격 또한 환경에 의해 만들어 진 것이며
앞으로도 끊임없이 변해갈 것입니다.
지금의 성격이 '나'인 것 또한 아닙니다.

과연 무엇을 보고 '나'라고 이름 붙이시겠습니까?
어디에서 '나'를 찾으실건가요?

'나'는 없습니다.
'나'는 애초부터 존재하지 않습니다.

여기 수레가 있습니다.
바퀴가 수레인가요? 바퀴살이 수레인가요?
손잡이가 수레입니까?
수레는 어디에도 없지만
인연따라 잠시 수레라는 이름이 붙은 것 뿐입니다.

그렇기에 수레는 말이 없습니다.
아무런 분별이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렇게 만들어진, 인연따라 잠시 만들어진 것에
숯한 분별을 지어 형상화 하고,
상(相)을 지어 '나'라고 이름 붙입니다.

그때부터 '나'는 거짓 생명력을 지닙니다.
우리의 삶을 가만히 봅니다.
제 스스로 '거짓나'를 만들어 놓고
스스로 만들어 놓은 거짓나의 인연놀음에
울고 웃고를 숯하게 반복하며 어리석게 살아갑니다.

그러니 어디에 '나'를 붙이시겠습니까?
무엇을 '나'라고 하시겠습니까?
'나'가 본래 없을진데
무엇을 괴로워하며 무엇을 행복해 하시겠습니까?

'나' 없는 자리에
그 어떤 깨달음을 붙일 것입니까?
'나 없음'이면 그대로 깨달음인것을...
Posted by 법상



[보성 녹차밭]

방하착 방하착 하였 더니 묻습니다.
‘다 놓으면 다 해결됩니까’
‘놓는다고 다 된다는 것이 어찌 말이 됩니까’
하고 말입니다.

'놓으면 된다 된다 다 된다’
저는 그렇게 말 하고 싶습니다.

그러나 우리 세속의 관점에서 보았을 때 되는 것과
‘참’으로 되는 것은 차이가 있습니다.
우리 눈으로는 ‘되는 일’과 ‘안 되는 일’을 분간하기 어렵 습니다.

우리 중생의 마음에서야
편하고 쉽고 이기심이 충족되는 쪽으로 일이 흐르면
된다고 말하고 싶겠지만,
참으로 되는 것이란 그렇게 간단한 일만은 아니기 때문입니 다.

우리는 거짓나의 생활에 익숙해 있기에
거짓나의 마음이 충족되고, 거짓나가 행복하면 그만입니 다.
그러나 거짓나의 충족과 참나의 충족,
거짓나의 되는 것과 참나의 되는 것은,
어쩌면 때로는 상반되는 일처럼 보일지도 모릅니 다.

거짓나의 입장에서는 안 되는 일이고
답답하고 괴로운 일일지라도
본래 마음자리의 입장에서는 되는 일일 수도 있는 노릇입니 다.

된다는 말은 본래로 간다는 말입니다.
본래로 간다는 말은
본래 우리가 가지고 있던 참주인공,
본래 마음 자리와 하나된다는 말입니다.

본래 마음자리, 참주인공 자리는
아무것도 잡을 것 없는 지고의 맑음과 고요함
텅 비어 오히려 충만한 모습이라 합니다.
그렇기에 아무것도 가진 것 없는 무소유 속에
일체를 소유하고 있으며,
‘나’ 라고 내세울 것 없는 무아 속에
‘전체로서의 나’, 진아가 밝게 빛나고 있습니 다.

그러나 우리 중생의 마음은
무엇이든 끊임없이 붙잡으며 욕망을 충족시키고자
집착하는 것을 내 것으로 만들고자 한없는 노력을 기울입니 다.
끊임없이 붙잡으며 살아가는 삶이 우리 삶의 모습입니 다.

하나되는 본래 마음자리는
일체의 분별이 끊어진 자리이므로
되고 안되고도 없고, 잘나고 못나고, 잡고 놓음도 없는 자리입 니다.
일체 모든 존재가 바로 이 자리에서 나툰 것입니 다.
우리 모두의 본래 고향이며
우리가 가야할 곳, 추구하며 살아가는 궁극의 본향인 것입니 다.

그러니 우리는 마음자리를 바로 깨쳐야 합니 다.
그래야 모든 것이 본래 있던 제자리를 찾아 갈 수 있습니 다.

그렇다면 마음자리를 깨친다는 것은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요?
우리 마음은 무엇이든 ‘잡는’ 마음이 며,
본래 마음자리는 일체가 텅 빈 잡음 이전의 자리입니 다.
그러니 잡으며(집착) 살고, 잡음으로써 행복을 느끼며, 또한 잡아서 괴로운
그 일체의 잡음 즉, 집착심을 모두 텅 비우고 놓아버려
잡음이전의 본래 텅 빈 마음자리를 되찾아야 하는 것입니 다.
그것이 바로 마음자리와 하나되는 것입니 다.

그것을 ‘방하착’이라 이릅니다.
방하착, 놓았을 때 우리의 마음은 쉴 수 있습니 다.
잡아서 버겁고 무거운 마음을 놓음으로 가볍게 만들 수 있습니 다.
진정 놓았을 때 우리 마음은 본래로 가는 것입니 다.
본래 마음자리와 하나되는 것입니다.

본래자리와 하나되었을 때
일체 모든 삶의 의문이 ‘참’의 가르침으로 풀립니 다.
도저히 해답이 나올 것 같지 않던 의문들이 풀리게 됩니 다.
금방 죽을 것 같이 느껴지던 병의 고통이 며,
돈 없으면 못 살 것 같던, 경제력에 대한 집착이 며,
사람에 대한 집착,
명예, 지위, 권력, 학력, 배경, 대학, 이 성...
이 모든 집착들을 놓아버림으로써
본래 자리에서 나오는 확연한 해답을 체험해 볼 수 있습니 다.

놓는다는 것은 본래 마음자리와 하나됨이 며,
‘나’를 잡고 사는 아상의 굴레를 벗고 부처님 생명으로 산다 는 말입니다.
‘나’로 사는 것이 아니라 ‘자성 부처님’으로 사는 것입니 다.

괴로운 것도 부처님이 괴로운 것이요,
즐거운 것도 부처님이 즐거운 것이며,
돈, 명예, 권력, 지위, 계급, 철학, 이성, 지 식...
이 모든 것을 가지는 주체 또한 부처님이 되는 것입니 다.
그러니 사사로운 내 욕심으로 가지려고 애쓸 필요가 없습니 다.
일체 모든 것을 부처님께 돌려 놓으면 그만입니 다.
돌려 놓고 나면 본래 가야할 곳을 찾아 자연스럽게 가게 됩니 다.

본래 있던 자리로 가는 것입니다.
우리 기준에서 되고 안되며, 잘되고 잘못되는 것이 아닌
본래 마음자리에서 무분별의 지혜로운 판단으로
되는 쪽으로 간다는 말입니다.
그러니 안 되는 듯 보여도 걱정할 것 없 고,
되어지더라도 호들갑 떨 것 없습니다.
놓고 가면 그냥 그냥 살려지는 것입니다.
여여하게 함이 없이 되어지는 것입니다.

이렇게 살아야 합니다.
다 놓고 살아야 합니다.
잘하고 못하고 다 부처님 일이니 상관할 바가 아닙니 다.
다 놓고 살아야 본래마음이 사는 것입니 다.

어두운 중생마음으로 붙잡고 사니 힘이 듭니 다.
본래 마음자리로 살아 법계를 호령하는 수행자가 되어야 겠습 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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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법상



[대흥사 연못]

일이 잘 풀리지 않아 괴로우신가요?
이미 지나간 잘못되어진 일로 마음고생 하고 있진 않는가요?
앞으로 있을 막중한 일과 스트레스로 인해 답답하진 않으신가요?

우리들 살아가는 모습을 가만 지켜보면
'일'로 시작하여 '일'로 끝나게 마련입니다.
'일' 속에서 행복을 찾고 또한 괴로움을 느끼게도 됩니다.
일이야말로 우리 삶의 가장 중요한 의미가 됩니다.

어떤 일을 하는지, 적성에 맞는 일인지,
돈 벌이가 괜찮은 일인지, 일하는 환경이 좋은지,
하고 싶은 일을 하는지, 하기 싫은 일을 억지로 하는지,
일이 잘 풀리는지, 할 일이 많은지, 일이 힘든지 재미있는지...
온통 우리의 삶은 일, 일, 일 뿐입니다.
심지어는 노는 것 조차 '노는 일'이 되니 말입니다.

이런 속에서
일이 잘 될 때는 '행복'을 느끼고,
일이 잘 되지 않을 때는 '괴로움'을 느끼며 살아가게 됩니다.
그런 '일'의 홍수 속에서
울고 웃고를 연신 반복하며 살아가는 것이죠.

그런데 이렇듯 일을 하는 사람들의 관심은
'어떻게 일을 할 것인가'에서 시작하여
어떤 일을 할 것인지, 어디서 일을 할 것인지,
언제 일을 할 것인지, 왜 일을 할 것인지 하는 것들이 됩니다.

그러나 우리 수행자들은
너무나도 당연하여 한번 돌이켜 보지도 않던 문제
즉 '누가 일을 할 것인가'에 대하여 생각해 보아야 할 것입니다.
누가 일을 하다니 당연히 '내가' 일을 하는 것이 아닌가 할 것입니다.

그러나 생각해 봅시다.
내가 일을 한다고 했을 때 '나'가 누구입니까.
돌이켜 생각해 보았을 때
일에 괴로움과 즐거움, 시비와 분별, 잘하고 못함 등이 있는 이유는
거기에 '나'가 붙기 때문입니다.
내가 일을 한다고 하는 마음이 있기 때문입니다.
'내 일' 이라고 하는 아상이 있기 때문입니다.

내가 일을 하면
자동적으로 일의 결과에 대한 시비가 생겨납니다.
어떤 일을 하는지, 어떻게 일을 하는지,
언제 어디에서 왜 일을 하는지에 따라,
또한 누구와 하는지, 좋아서 하는지, 적성에 맞는지...
등등의 인연관계에 따라 숯한 시비와 분별이 생겨나게 됩니다.

밝은 수행자라면 그 어떤 일에도
'나'가 없어야 합니다.
나 없는 내가 함이 없이 일을 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말은 나를 쑥 빼놓고
일체의 모든 일을 부처님께로 되돌려 놓고 가야 함을 의미합니다.
'내 일'이 아닌 '부처님 일'이라는 굳은 믿음 말입니다.

그렇게 되면
일이 안 된다고 괴로워 할 것도 없고
잘 된다고 행복에 겨워 호들갑 떨 것도 없습니다.

물론 이렇게 말하면 이의를 달 사람이 있을 것입니다.
'어찌 부처님이 일을 한단 말인가.'
'기복으로 흐르는 일이 아닌가' 하고 말입니다.
누차 말씀드리지만 여기에서 부처님이란
우리들 내면 속의 본래자리, 참나, 주인공을 말함이며,
일체 법계에 편만하신 비로자나 법신 부처님을 말하는 것입니다.

우리들이 가지고 있는 가장 큰 병통이 바로
'내가 한다'는 아상입니다.
내가 한다는 아상이 있게 되면
나를 드러내고 싶은 마음, 더 잘하고 싶은 마음,
잘해서 인정받고 싶은 마음, 칭찬받고 싶은 마음,
남보다 못했을 때의 열등감, 보다 잘 했을 때 우월감에서
남을 얕보는 마음, 나 잘났다고 하는 거만함,
못하면 괴로운 마음, 마음대로 되지 않을 때의 답답한 마음...
등등 수없이 많은 분별심이 생겨나게 마련입니다.

그러다가 너무 큰 일이 터져 도저히 주체할 수 없을 만큼이 되면
우왕좌왕 괴롭다 괴롭다를 연발하며
심지어는 삶을 포기하는 경우까지 생겨나게 됩니다.

이 모든 일이 '내가 하는 일'이 되기 때문 에 생겨나는 일들입니다.
나의 일이란 언제나 그렇듯 이렇게 번거롭고 복잡합니다.
그래서 일체의 모든 일을 함에
'내 일' 이 아닌 '부처님 일'로 되돌려 놓으라는 것입니다.
'거짓 나의 일'이 아닌
참나의 본래자리에서 하는 일이라고 굳게 믿고 가는 것입니다.

본래로 세상의 모든 일들은 다 마음자리, 본 래자리에서 나온 일입니다.
주인공이라 해도 좋고, 한마음, 불성, 참나, 여래장, 참생명...
이름이야 뭐라해도 좋지만 그 한자리에서 나온 일임은 분명한 일입니 다.
주인도 없고, 내것 네것의 분별도 없고,
그저 텅 비어 있는 그 자리에서 나왔건만
우리들이 내것이라고 분별하고 잡으려 하고
내 일로 붙잡느라 정신이 없다보니 그로 인해 온갖 괴로움이 생겨나는 것입 니다.

그러니 본래 나온 자리, 그 근원으로 다시 돌이켜 놓으라는 것입니다.
'내가 한다'고 하는 어리석은 마음으로
온갖 시비분별과 갖은 숱한 일들을 만들어 놓았으니
여기에 또다시 내가 하게 되면 도리어 또 다른 업식만 더하는 꼴이 되고 맙 니다.

'나'만 쑥 빠지고 없어지면 됩니다.
나만 죽어버리면 됩니다.
더럽혀진 거울을 닦으면 맑고 깨끗한 거울이 저절로 드러나듯,
탐진치에 물든 '나'를 비워버리고 나면
저절로 본래자리 참성품이 밝게 드러나는 법입니다.
부처님 일로 돌려놓고 나면 저절로 부처님 일, 불사(佛事)가 되는 것입니 다.

'불교 수행을 한다', '내가 수행자다' 하지 만
정말 수행자가 해야 할 일은 정작 이것 하나 밖에 없습니다.
이렇게 간단한 한 가지 밖에 없습니다.
내가 하는 것이 아닌 부처님이 하시는 것이라는 굳은 믿음 말입니다.
그렇게 굳게 믿고 온전히 놓는 일 말입니다.

부처님께로 돌이켜 놓고 나면
이제부터 일체의 모든 일은 내 일이 아닌 부처님 일이 되어 버립니다.
그러니 근심 걱정할 것도 없고, 좋아 날 뛸 것도 없습니다.
잘 되는 것도 부처님 일, 못 되는 것도 부처님 일이니
내가 걱정할 일이 없는 것입니다.

본래의 참생명 주인공은 이렇듯 어디에도 걸 림이 없는 존재입니다.
그 밝은 주인공으로써의 삶을 살자는 것입니다.
어리석은 중생으로써의 삶을 접고 부처님으로써의 삶을 살자는 것입니 다.

'턱 놓고는 진짜 부처님 일로 되어졌을까?' 하고 걱정할 필요도 없습니다.
마음에서 돌이켜 놓았다 하면 이미 그렇게 되어진 것입니다.
자꾸 생겨나는 의심이 되려 한생각 돌이킨 부처님 마음을 주저앉게 만듭니 다.

부처님께 모든 것을 맡기고 바치고 온전히 공양을 올리는 일,
이보다 더 쉬운 일이 어디있겠습니까.
이렇게 쉬운 것이 부처님 법입니다.

억겁동안 중생마음을 닦고 닦아 언젠가 부처 마음 될 날을 기다리자니
얼마나 더디고 얼마나 답답한 노릇입니까.
이 몸 그대로, 이 마음 그대로
이 자리에서 놓고 나면 그대로 부처님인데 말입니다.
한생각 돌이키면 부처님인데 말입니다.

어렵게 생각할 것 하나도 없습니다.
'내가 한다'는 아상을 녹이기 위해 나를 비우고
대신에 밝은 참생명 부처님 본래자리로 일체를 던져버리자는 것입니다.
이 공부는 부처 되려고 닦는 공부가 아니라
이미 되어있는 부처 생명으로 살아가는 공부입니다.
부처님 되는 공부가 아니라 이미 부처님임을 믿는 공부가 되어야 한다는 것 입니다.

Posted by 법상



[두륜산 대둔사 부도탑]

'깨달음이란 무엇일까?'
'깨달음이란 어떤 것일까?'
모든 사람들이 참으로 궁금해 하는 문제일 터입니다.

많은 사람들은
깨달음에 대한 일종의 환상에 사로잡혀 있는 듯 합니다.
깨달음이라는 것은 '이러해야 한다'
'내가 알 수 없는 그 엄청난 무엇일 것이다'
라고 생각하며 깨달음에 대한 환상을 더해 가고 있는 듯 합니다.

깨달음과 자기 자신과의 사이를
너무 멀리 잡고 있는 느낌이 듭니다.
깨달음은 그 어떤 특정한 근기의 사람들의 전유물이라는 생각 말입니 다.

그러다보니 많은 사람들은
깨달음에 대해 관심은 있지만
'내 문제'라고 생각하고 있지는 않는 것 같습니다.
심지어 수행자라고 자부하는 이들마저도
'이번 생에는 복이나 짓고 그러다보면 다음 생 언젠가 깨칠 날이 있겠지'
하고 멀찌감치 거리를 두고 있는 경우를 많이 봅니다.

법회 때 한번은 질문을 던져 보았습니 다.
'성불(成佛)하는 것이 이번 생의 원(願)이신 분?' 하고 말입니다.
어느 정도 생각은 하였지만 이 정도로 안 계실 줄은 몰랐습니다.
많은 분들께서 입으로는 '성불하세요' '성불합시다' 하면서
실은 성불보다는 눈앞에 닥친 욕망의 충족에 더 큰 마음을 쓰고 살아갑니 다.

성불, 깨달음은 나의 문제가 아니라는 생각 때문입니다.
깨달음은 딴 세상의 일일거라는
특정한 사람들의 전유물일 것이라는 생각 때문이겠지요.
10년 씩 장좌불와하는 스님들이나,
수십 년 세속에서 벗어나 깨달음을 구하는 이들도 얻지 못하는데
어떻게 내가 얻을 수 있을까 하는 마음이 너무도 큽니다.

그러나 법우님, 생활수행자 도반님들!
깨달음에 대한 환상에서 이제 벗어나야 합니다.
깨달음은 '지금 여기'에서 바로 '나'의 문제가 되어야 합니다.

깨달음 그 자체는 환상도 아니요,
신비주의적인 그 어떤 오묘한 형상을 가진 것도 아닙니다.
우리 마음 속에서 상상하고 있는 그런 모습은 깨침이 아닙니다.

오히려 깨달음을 그렇게 어렵게 바라보고 있 는
그 시선이 나를 깨달음과 멀어지게 만드는
가장 큰 장애라는 것을 아셔야 합니다.

깨달음은 대단하고 엄청난 것일 것이며,
하늘이 열리고 온 우주가 개벽을 하고
천지가 내 안에 와락 들어와 안기게 될 것이라는
그런 환상적인 모습이 결코 아닙니다.

깨달은 이가 보는 세상은
우리가 보는 세상과는 전혀 다를 것이라는 생각은
우리들의 분별 망상일 뿐입니다.

깨달음이란
가장 단순한 일이며,
가장 평범하고,
가장 우리와 가까운 일일 터입니다.

그 어떤 엄청난 노력과 집중을 통해서만
얻어질 수 있는 것이 깨달음이라면
깨달음 그 자체가 우리를 진리에서 너무도 멀어지게 만들게 되는 것입니 다.

본래면목자리, 참나 주인공이란
멀리서, 밖에서 찾는 것이 아닌 바로 내 안에서 언제나처럼
은은한 시선과 미소로 우리의 내면을 지탱하고 있는 뿌리일 것입니다.
너무 가까이 있기에 오히려 찾을 수 없는,
눈이 다른 모든 사물을 볼 수 있지만
늘 함께 가장 가까운 곳에 있는 자신(눈)을 볼 수 없듯이 말입니다.

깨달음이란
보여지는 것을 있는 그대로
보고 듣고 느끼는 것 이외의 다른 것은 아닐 터입니다.
있는 그대로를 있는 그대로 보고 느끼고 받아들이는 것에 다름이 아닙니 다.

있는 그대로 보여지는 일체 법계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볼 수 있는(正見)'
바로 그것이 깨달음일 것입니다.

매우 평범하고 단순하면서도 가까운 것 말입 니다.
오히려 그렇게 단순한 것이기에
우리들의 깨달음에 대한 환상적 고정관념이
깨달음에서 우리 스스로를 점점 멀어지게 했는지 모를 일입니다.

있는 그대로의 현실을
자신의 잣대로 재고 분별하여 바라보는 이가 중생이고,
있는 그대로의 현실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는 이가 깨달은 이일 터입니다.

깨달음!
있는 그대로를 있는 그대로 본다는 것!
그러나 그것은 말처럼 그렇게 쉬운 일은 아닐 터입니다.

자신을 돌이켜 봅시다.
'나는 과연 있는 그대로를 있는 그대로 볼 눈을 가졌는가!'
'있는 그대로를 있는 그대로 보고 듣고 느끼고 받아들일 수 있겠는가!'
하고 말입니다.

애석하게도 우리들의 시야는 그러지 못합니 다.
천지 법계는 있는 그대로 언제나처럼 그렇게 여여한 모습으로 놓여있건만
우리의 시선은 온통 고정관념과 업식(業識)으로 물들어 있기 때문입니 다.
있는 그대로를 있는 그대로 바라보지 못하고
우리는 숯한 편견과 색안경을 낀 채 '자기잣대'로 삐뚫어지게 세상을 바라 봅니다.

어느 한 대상을 바라봄에도
자기잣대 만큼만 바라보고 자기만큼만 판단합니다.
내 식대로의 바라봄만이 있을 뿐입니다.

이를테면 한 사람을 바라봄에도
수백, 수천명이 바라보는 그 '한 사람'은 같지 않습니다.
사람은 여여히 그대로의 모습으로 한 사람이건만
바라보는 시선은 사람 수대로 수백, 수천이 되어 버립니다.

지금 이렇게 글을 쓰고 있는 글쓴이에 대해
읽고 계시는 분들은 어느 한 분이라도
똑같은 모습으로서의 글쓴이를 인지하지 못합니다.
읽고 계시는 분들 모두는 '자기의 잣대만큼의 글쓴이'를 인지할 뿐입니 다.

이 말은 곧
있는 그대로를 있는 그대로 보지 못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있는 그대로의 글쓴이는 오직 하나이건만
바라보는 이는 '있는 그대로의 글쓴이'를 천차만별의 잣대로 인지합니 다.

그처럼 우리의 눈은 정견(正見)의 바라봄이 되지 못합니다.
온통 자기가 쌓아 온 만큼의 업식따라 제 멋대로 바라봅니다.
온갖 분별심을 투영하여 대상을 바라봅니다.

'과연 나는 분별하지 않고 바라보고 있는 가'
하고 수행자는 언제나 스스로에게 반문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를테면 사람을 보더라도 생김새며 출신, 학벌 등과 상관없이
처음보는 그 사람을 여여한 마음으로 대할 수 있는가 하는 등의 것들 말입 니다.

깨달음의 시선은
무분별(無分別), 무소유(無所有), 무소득(無所得), 무집착(無執着)의
어디에도 걸림이 없는 편견 없는 맑은 시야입니다.

분별하지 않음이며,
소유하지 않음이며,
얻고자 하지 않음이고,
그렇기에 집착하지 않는 맑은 마음입니다.

대상에 대해 '이렇다, 저렇다' 분별하지 않 으며,
'내것이다, 네것이다' 소유의 관념을 짓지 않고,
아집 때문에 내것으로 얻고자 하지 않습니다.
어디에도 걸림이 없고 집착이 없는
'있는 그대로를 있는 그대로' 볼 수 있는 무분별의 맑은 시야입니다.

그저 일체의 모든 대상은
이름 지을 수도 없고, 분별 지을 수도 없고,
소유 할 수도 없으며, 집착 할 것도 없는
애써 말한다면 '그저 그런 것' 일 뿐입니다.
숭산스님의 말씀처럼 '오직 모를 뿐'입니다.

어떻게도 이름 지을수 없고 분별할 수 없기 에
'이것이 무엇인가(이뭣고)' '나는 누구인가' 했을 때
앞뒤가 꽉 막혀 버리고, 말을 꺼낼 수 없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화두'인 것입니다.
오직 '의문'만이 남게 되는 것입니다.

있는 그대로를 있는 그대로 본다는 것이
이렇듯 간단하면서도 어려운 것이기도 합니다.
그러니 깨달음을 추구하는 우리 생활수행자 밝은 도반들이 할 수 있는 일은
있는 그대로를 있는 그대로 보는 마음 연습을 해 나가는 일입니다.
그 연습은 바로 깨달음으로 가는 연습이며, 부처님 마음 연습이 됩니 다.

그러한 편견 없는 '바라보기'는 일체 대상 을 대함에 있어
'무분별' '무소유' '무소득' '무집착'으로 바라보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공(空)의 실천이며,
방하착(放下着)의 생활수행 실천이 되는 것입니다.

고정관념과 편견어린 시선을 버리고
분별하지 말고, 소유하려 들지 말고, 얻으려 들지 말고, 집착하지 않 음,
그래서 일체를 다 놓고 가는 방하착의 생활실천인 것입니다.
Posted by 법상



[서해안 고속도로를 달리며... 해가집니다.]

힘들고 답답할 때면
우린 내 주위를 탓하기 쉽습니다.

선배의 나쁜 성격을 탓하고,
후배들의 안일함을 탓하며,
사람들의 무능력을 탓하면서
'나'에 대해서는 상당히 관대한 우리의 모습을 봅니다.

정작 탓해야할 대상이 누구이며
관대해야 할 대상이 누구인지
올바로 보지 못하는 것은
참으로 안타까운 일입니다.

수행자의 진면목은
이 세상 모든 일은 '나'로부터 나온다는
지극히 평범한 진리를 올바로 알고 실천
할 줄 아는 모습에서 나옵니다.

탓해야할 '남'이란 있을 수 없습니다.
이기적인 동료들의 모습에서 나의 이기심을
볼 줄 알아야 하며
안일하고 게으른 이들의 모습을 보고 나의 나태함에
채찍질 할 수 있어야 합니다.

나를 욕하거나 헐뜯는 사람
나에게 발길질하는 사람들에게 까지도
다투려 들거나 화를 내어서는 않됩니다.

오히려
그렇게 거칠게 나타나는 환경, 조건.
이 모든 경계가
내 마음의 그림자라는 것을 알고
얼른 '내가 바뀌어야 겠구나'하고 생각해야 합니다.

이 모든 주위 환경 속에는 내가 수 억겁을 살아오며
지은 모든 업장, 인연의 연줄이 올올이
아로새겨 져 있습니다.

내가 한 말과 행동과 생각에 따라
나의 환경, 조건은 주어지는 것입니다.

지금 이 순간 내가 마음 먹은 생각, 행동,
나의 언어 하나 하나는 곧 현실이 될 수 있습니다.

우리의 마음은 능숙한 화가와 같아서 마음 먹은
대로 무엇이든 그려낼 수 있습니다.
현실이라는 종이 위에
몸과 입과 생각이라는 붓으로
마음 속에 가지고 있는 모든 것을 그려 낼 수 있습니다.

나의 마음은 능히 상대를 바꿀 수 있습니다.
나의 마음이 바뀌면
'상대'의 마음도 바뀌게 마련입니다.

모든 문제의 중심은 오직 '나'에 있습니다.
바꾸어야 할 '너'란 있을 수 없습니다.
내가 변하면 '너'가 변합니다.
내가 변하면 가정이 변합니다.
내가 변하면 사회가 변합니다.
내가 변하면 세계가 변하고 우주가 변합니다.

'남'을 위해 기도하십시오.
마음 속에 상대를 위한 지극한 원을 세우고
그들을 편견없이 바라보십시오.

그들이 바로 나의 부처님 이십니다.
나에게 욕하는 선배 부처님,
눈치만 살피며 게으른 후배 부처님,
열심히 공부하는 친구 부처님,
이 모든 분이 나를 이끌어 주는 부처님입니다.

부처님을 바꾸려고 하는 어리석음을 굴려
나와 함께 하는 내 주위의 모든 부처님을 공경해야 합니다.
그리고 이제 남은 것은
어리석은 '나'를 바꾸는 것입니다.


 

Posted by 법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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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주 단순하게 생각해서
누구나 잘 살기 위해 세상을 살아간다.
또 누구나 삶의 목적은 잘 사는데 있다.

그러나 과연 어떻게 사는 것이 잘 사는 길인가.
'이렇게 사는 것이 잘 사는 것이다'라는 정답이 있고 체크리스트가 있어서
매일같이 잠자리에 들기 전, 또 매 해를 보낼 때마다
그 표를 하나하나 내 삶과 대조해 보면서 체크해 볼 수 있다면 좋겠지만
우리 삶이라는 것이 그렇게 딱 정해진 것 만은 아니기에
그런 것이 있을리 만무하다.

그러나 조금 큰 틀에서 본다면
어떤 종교에서든, 어떤 사상이나 가르침에서든
공통적으로 적용될 법한 일반적인
‘잘 사는 방법’이 없는 것은 아닐 것이다.

이를테면 부처님도 하느님도
또 수많은 인류의 성자, 사상가들도 모두가 한결같이
'사랑을 베풀라' '자비를 베풀라' '이웃과 나누라' '보시하라'는
말씀을 하고 계신다.

그 본질은 어느 종교에서도 다르지 않다.
보시와 베풂이라는 그 본질은 진리의 영역이다.
베풀고 보시하는 길은 참된 삶을 살기 위해서라면
누구나 가야할 근본이 되는 가르침이요 진리인 것이다.

다만 각 종교별로, 사상가별로 그 구체적인 방법은 다를 수 있다.
십일조를 내든 자유롭게 보시를 행하든,
절이나 교회에 내든 불우한 이웃에게 내든,
사람에게만 사랑과 자비를 베풀든
풀이며 나무 산천초목에 이르기까지 모든 생명에게 베풀든,
그 구체적인 방법은 서로 다를 수 있는 부분인 것이다.

그런 점에서 자기답게 저마다의 개성으로써 실천 해 나가야 할
세부적인 부분 보다는
전체적인 진리의 본질로써
우리가 삶 속에서 어떻게 마음을 쓰고,
어떻게 참된 삶을 살아 나갈 수 있는가 하는
실천의 정신을 몇 가지 소개하고자 한다.

어느 종교에서든, 어느 사상에서든,
진리의 본질을 관통하고 있는 가르침이라면
대부분 수긍하지 않을 수 없을만한
그런 구체적인 수행방법을 언급함으로써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행복하게 잘 사는 사람이 되는 법'에 대한
최소한의 사유의 뜰을 제공해 주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몇 가지를 적어 보는 것이다.

매일 아침 저녁으로 이 목록을 펴 들고
하나 하나 내 마음과 비추어 보며
사유의 뜰을 넓혀 보는 것도 좋을 것이다.

혹은 매 순간 순간 시간 날 때도 좋고,
그것도 아니라면 어떤 괴롭거나 힘겨운 경계를 당해 마음이 휘둘릴 때
그 때 이 목록을 펴 보는 것도 도움이 될 수 있을 것이다.

모르긴해도 아래에 열거된 마음공부 목록만 잘 점검하더라도
어지간한 괴로움이나 경계는 충분히 이겨낼 수 있는
내적인 힘이 쌓일 것이라고 본다.

또 기독교나 혹은 또 다른 종교의 신자나 종교가 없는 분이더라도
이 목록의 가르침들은 대부분이 수용 가능한 것들일 것이다.

법정스님의 말씀처럼
사실 모든 종교의 가르침은 끊임없는 복습의 연장이다.
가르침의 본질은 이미 우리가 다 알고 있는 것일지 모른다.

마음을 비우고 이웃과 나누며 욕심과 집착을 버리는 것을
모르는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그러나 그런 가르침들이 항상 내 가까이에서 살아 움직이고
실천의 힘이 되며 내 존재 안에 숨쉬도록 하기 위해서는
끊임없는 복습만이 우리 내면에 힘을 실어 줄 수 있을 것이다.

아래의 목록은 한번 읽고 그만 두기 보다는
가까운 곳에 두고 '잘 사는 방법' 체크리스트처럼 활용할 수 있기를 바란다.

아울러 이 목록의 구체적인 이해와 방법들, 깊은 이해는
이 목탁소리의 글들을 읽어 내려가면서
하나씩 터득해 갈 수 있지 않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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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일체를 다 받아들이라. 수용하라.

내 삶에 등장하는 그 어떤 사건도, 사람도
모두 온전한 진리의 목적을 가지고 온다.
이 세상에는 정확히 필요한 일만이 정확히 필요한 바로 그 때에
정확히 필요한 만큼의 크기로 찾아온다.

또한 그 모든 것들은 좋은 것이든 싫은 것이든
모두가 나를 돕기 위한 목적을 가지고 내게로 온다.
그 모든 일들이 부처의 자비요 신의 사랑이다.

그렇기에 모든 것을 대 긍정으로 받아들일 수 있어야 한다.
좋다고 너무 붙잡지 않고 싫다고 버리려 애쓰지 않고
다만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면 괴로울 일이 없다.

삶을 전체적으로 받아들이라.

∎ 어떤 상황에 처하더라도 ‘이래도 좋고 저래도 좋다’고 말하라.
∎ 과거에 좋지 않았던 일들이 되돌아보면 큰 도움이 되었던 것은 없는가. 괴로운 상황이나 미운 사람이 내게 주는 긍정점을 찾아보라.
∎ 아무리 최악의 상황이더라도 ‘우주가 나를 돕고 있다’고 외치라.

2. 집착을 버려라. 놓아라. 비워라.

모든 괴로움의 원인은 집착에 있다.
집착이 있으면 반드시 그곳에는 괴로움의 씨앗이 있다.
돈도 명예도 사랑도 소유도 성공도 지식도 가치관도 집착할 것이 못 된다.
모든 수행의 핵심, 모든 행복한 삶의 핵심은 무집착에 있다.

변한다는 이치를 받아들이면 집착할 것이 없음을 알게 된다.
모든 집착을 놓는 자리가 부처자리요 영성이 충만해지는 자리다.
아상을, 집착을, 욕망을, 번뇌를, 소유를, 생각을 놓고 비워라.
비우면 채워지고, 놓으면 잡히며, 버렸을 때 전체를 잡을 수 있다.

텅 비면 충만하다.

∎ ‘지금 죽을 수 있는가?’ 죽을 수 없다면 이유를 10가지 적어보라. 그것이 바로 가장 큰 내 집착의 실체다.
∎ 괴로운가? 그렇다면 그 원인은 무언가에 대한 집착에 있다. 집착의 실체를 찾아보라.
∎ 내 욕망과 집착의 목록을 만들라. 욕망을 버리기 쉬운 것부터 지워본다.

3. 지금 이 순간에 깨어있으라. 관하라.

생각을 과거나 미래로 내보내지 말라.
오직 지금 이 순간을 지켜보라.
‘지금 여기’에 집중하라.
객관의 관찰자가 되어 나를 바라보라.
한 발자국 뒤에서 나를 지켜보라.

내 생각, 느낌, 몸, 호흡, 그리고 대상을 아무 판단 없이
다만 지켜보고 관찰하라.
지금 이 순간에 깨어있을 때
비로소 내 안 깊은 곳의 신성을 불성을 일깨우게 된다.
영성이 충만해지고 존재는 깊은 휴식에 든다.

깨어있는 관수행이야말로 깨달음의 요체다.

∎ 아침 저녁으로 10분 좌선에 들어 마음을 무심하게 바라본다.
∎ 하루 일과 중 ‘3분호흡관’으로, 들숨과 날숨에 숫자를 붙이며 호흡을 관찰한다.
∎ 화날 때 화부터 내지 말고 화내기 직전 호흡을 10번 크게 들이 쉬고 내쉬며 마음을 가라앉히고 난 뒤에 화를 내더라도 낸다.

4. 부처님께 하느님께 모든 것을 맡긴다. 자연의 흐름에 맡긴다.

내가 무엇을 한다는 생각을 버리라.
나는 없다. 오직 본연의 성품이 있을 뿐.
내가 한다고 하면 내가 괴롭고 즐겁지만
모든 것을 맡기면 괴로울 것도 즐거울 것도 없다.

늘 한결같이 살 수 있다.
모든 것을 맡기고 자연스럽게 살라.
자연의 흐름, 진리의 흐름에 내 몸을 맡기라.
일을 할 때도 자연스런 분위기와 흐름을 타고
자연스럽게 되어지는 것이 가장 좋다.

∎ 3번 이상 권유하고 시도해서 안 되는 것은 자연스럽지 않은 것, 포기할 수 있는 용기도 필요하다.
∎ 모든 것을 ‘내 일이 아닌 부처님 일’ ‘하느님 일’이라고 생각하고 맡긴다.
∎ 잘 되든 못 되든 상관하지 말고 당신이 하시는 일이니 더 큰 의미가 있을 것이라 생각하라.

5. 사랑과 자비를 베풀라. 나누어 주라.

‘내 것’이란 없다.
잠시 나에게로 흘러왔다가 흘러갈 뿐이다.
그것을 흐르도록 두라.
내 안에 가둬 쌓아두지 말라.

소유든, 사랑이든, 마음이든, 가르침이든 이웃과 함께 나누라.
끊임없이 자비와 사랑을 베풀라.
베풀되 베풀었다는 상 없이 베풀라.

베풀어도 사실은 베푼 것이 아니라
잠시 이쪽에서 저쪽으로 인연따라
정확히 필요한 곳에 가 닿을 뿐이다.

준다는 것은 곧 받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주면 받게 되고,
준 바 없이 주면 무한한 복을 받게 된다.

∎ 월급을 받으면 일정액을 떼어 순수하게 베풂을 위한 몫으로 정해두라.
∎ 돌려받을 수 없는 곳, 받을 수 없는 사람에게 베풀자.
∎ 매월 좋은 책을 10권씩 사서 버스기사, 회사 동료, 이웃들에게 아무 이유 없이 주자.

6. 적게 생각하고 많이 행동하라. 생각날 때 바로 저질러라.

될 수 있다면 머리를 적게 굴리는 것이 좋다.
생각은 본연의 진리를 막아선다.
생각과 판단을 줄이면 삶이 선명해지고 명료해진다.

많이 생각하기 보다는 많이 저질러라.
행동은 깨달음의 지름길이란 말이 있다.

∎ 도움을 주고 싶은 생각이 일어나면 바로 주라. 생각이 많으면 주지 못한다.
∎ 한 생각 번뜩이는 아이디어가 떠오를 때 바로 저질러라.
∎ 오랫동안 마음만 있었지 용기를 내지 못한 것이 있다면 저질러보라.

7. 내 생각을 남에게 주입하지 말라. 고집을 버리고 활짝 열려있으라.

어떤 한 가지 생각에도 전적으로 고집하지 말라.
언제든 바꿀 수 있는 유연성을 키워라.
어떤 가르침도, 어떤 사상도 다 받아들일 수 있을 만큼 가슴을 열어라.

어떤 사람에게도 배울 수 있는 자세를 가지라.
내 생각이 옳을 수 있다면 다른 사람의 생각도 옳을 수 있다.
내 생각을 상대에게 주입하지 말라.

∎ 전혀 새로운 분야의 책도 한번쯤 사서 읽어 보고, 나와 생각이 맞지 않는 사람의 말도 한번쯤 수용하는 자세로 들어보라.
∎ 나보다 못한 사람에게 배울 수 있는 점을 찾으라.
∎ 다른 종교의 성전을 읽어보라.

8. 부족하게 불편하게 산다. 아끼고 절약한다.

자식을 실패로 이끄는 가장 확실한 방법은
원하는 것을 다 해주는 것이라는 말이 있다.
가지고 싶은 것을 다 가지고 사는 것 보다
조금 불편하고 부족하게 절약하며 사는 가운데에서
사유의 뜰이 넓어진다.

몸이 불편하면 정신이 깨어나지만,
몸이 게으르고 편한데 익숙해지면 정신의 지평이 축소되고 만다.

또한 아끼고 절약하는 가운데 충만한 복이 깃든다.

∎ 집에 있는 쓰지 않는 것들을 모아 필요한 곳에 나누어 준다.
∎ 무언가를 살 때는 이것이 욕망에 의한 것인가 필요에 의한 것인가를 살피라. 사고 싶은 것을 바로 사지 말고 좀 나둬 본다.
∎ 아끼고 절약한 만큼을 돈으로 환산하여 저축하고 보시한다.

9. 매일 기도의 시간을 가진다. 수행과 명상을 실천한다.

기도만큼 이 세상에서 가장 순수한 행위는 없다.
물질은 육신에게 필요한 것이지만 기도는 정신에게 필요한 것이다.
물질은 이번 생으로 끝나는 것이지만 기도는 다음 생까지 이어진다.

아침 저녁으로 기도와 수행의 시간을 가지라.
아침의 기도는 낮 동안의 재앙을 없애주고
밤의 기도는 밤 동안의 재앙을 소멸시킨다는 말이 있다.

기도와 수행의 시간을 가지는 자에게 충만한 평화가 깃든다.

∎ 매일 아침 기도는 거르지 않는다.
∎ 기도의 본질은 감사다. 매 순간 순간 아무리 작은 일에도 감사의 기도를 드린다.
∎ 주 1회 이상은 자신이 믿는 종교의 성전에서 기도를 한다.

10. 적게 말하고 많이 들어라. 침묵하라.

말이 많아지면 그만큼 허물도 늘어난다.
입이 가벼우면 생각도 가벼워지고 행동 또한 가벼워져
자기 중심을 잡기 어렵다.
입이 화의 근원이고 번뇌의 근원이 된다.

침묵하는 자는 쉬 들뜨지 않으며 가볍지 않고 쉽게 행동하지 않는다.
내 생각과 견해를 상대방에게 말함으로써 인정받고자 하는 생각을 버리라.
침묵 속에 기도와 명상이 있고, 신과 부처와의 대면이 있다.

∎ 상대방의 말을 주의 깊게 경청하고 공감해 주라.
∎ 때때로 말하지 않는 ‘묵언’의 시간을 가지라. 묵언의 하루를 보내는 것도 좋다.
∎ 대화중에 말을 관찰하고, 내가 하루 종일 했던 말의 목록을 적어보라.

11. 자연의 먹거리로 소식하라. 자연치유력을 높인다.

인공적인 것, 가공된 것, 인간의 욕심이 개입된 먹거리는
곧 우리 몸을 혼탁하게 만드는 주범이 된다.
몸이 맑아져야 마음도 함께 맑아진다.

될 수 있다면 자연 그대로의 먹거리가 좋다.
자연의 생명이 담긴 음식은 곧 우리 몸의 자연치유력을 높여주어
온갖 병을 예방해 준다.

또한 음식을 먹을 때는 소식을 원칙으로 한다.
많이 먹을수록 식복이 다해 수명도 줄어든다.
많이 먹으면 정신이 둔해진다.

∎ 가족이 함께 주말농장이라도 찾아 가 자연의 먹거리를 직접 생산해 먹어본다.
∎ 가공식품, 인스턴트식품, 탄산음료 등을 먹지 않는 날을 정하라.
∎ 하루 한 끼 이상은 잡곡밥과 야채, 콩, 감자 등만으로 소식한다.

12. 홀로 있는 시간을 가지라. 외롭고 고독한 시간을 즐기라.

외롭게 홀로 존재한다는 것은
우리 안의 참나를 만나는 소중한 통로가 되며,
그 때 비로소 신과 부처와 대면할 수 있는 시간이 된다.

홀로 있다는 것은 곧 전체와 함께 있다는 것이다.
홀로 존재하는 시간이 많을수록 정신이 내 안에 뿌리를 내린다.

∎ 때때로 홀로 여행을 떠나라.
∎ 하루 중에 아무 생각 없이, 일 없이 다만 홀로 아무것도 하지 않는 시간을 가지라.
∎ 일주일에 몇 일은 집에서 TV를 꺼 두고 지내라.

13. 매일 숲길을 걸으라. 산책의 시간을 가지라.

숲길이나 산길을 홀로 걷는 산책의 시간은
더없이 소중한 자기와의 대면이며
걷는 일 자체가 경행의 수행이 된다.

걸음을 관찰하며 걸으라.
마음을 관찰하며 걸으라.
서서 두 발로 대지 위를 걷는 것이야말로
몸 건강에도 정신 건강에도 큰 도움을 가져온다.

아침 저녁 조용한 산책의 시간에
가장 창의적인 아이디어도 떠오르고,
자신을 되돌아 볼 수 있는 시간도 된다.

때때로 산을 찾으라.

∎ 아침이나 저녁 중 한 때를 정해 가까운 산으로 산책을 나서라.
∎ 주말이면 홀로 혹은 가족과 함께 산을 찾으라. 때때로 지리산을 홀로 종주해 보라.
∎ 숲길을 걸으며 발바닥에 마음을 모아 집중하고 그 느낌을 알아차린다.

14. 자연의 변화를 살핀다. 꽃이 피고 지는 것을 유심히 지켜본다.

자연이야말로 가장 진리와 합일을 이루며 사는 생명이다.
자연과 가까이할수록 우리 마음도 자연을 닮아가고
자연의 지혜를 배우게 된다.
자연의 변화를 지켜보는 일은 곧 마음을 비우는 일이 된다.

∎ 봄부터 겨울에 이르기까지 나무나 야생화를 하나 정해 유심히 관찰하라.
∎ 계절의 변화를 오감으로 느껴보고, 자연 관찰 일기를 적으라.
∎ 식물도감을 가까이 하고 식물의 이름을 알아본다.

15. 자기다운 삶을 살라. 누구처럼 살려고 애쓰지 말라.

남처럼 살려고 애쓰지 말고 독창적인 자기 자신의 길을 걸으라.
'나'라는 존재는 이 세상에 단 하나밖에 없는
유일무이한 진리의 표현이다.
진리가 '나'로써 표현되고 있는 것이다.

모든 사람들이 저마다 자기 자신의 길을 걷는 것이야말로
나로써 피어나는 진리를 꽃피워낼 수 있는 유일한 길인 것이다.

누구처럼 사는 것은 억지스럽지만
나답게 사는 것은 자연스럽고 쉽다.
자기다운 일을 하는 것이야말로
자신이 이 세상에 나온 진리의 목적을 이뤄내는 것이다.

∎ 내가 정말 하고 싶은 일, 나를 행복하게 만드는 일은 무엇인가. 그 일에 에너지를 쏟으라.
∎ 사소한 것일지라도 나의 긍정점을 100가지 이상 찾아보라.
∎ 무엇이든 남과 나를 비교하지 말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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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된 앎은 곧 존재를 변화시킨다.
수첩에 적거나 프린트를 하여
눈이 자주 가는 곳에 붙여 놓고 틈틈이 읽기라도 해 보라.
분명 삶에 변화가 찾아 올 것이다.

가랑비에 옷이 젖듯 은은히 삶 속에 스며들 것이다.
하나 하나의 목록이 어찌 생각해 보면 별 내용 아닌 듯 느껴질 지 모르지만
이 안에 우주의 신비로운 지혜의 소식이 담겨 있다.

모르긴 해도 수많은 종교나 사상, 철학, 성인들의 가르침이
이 속에 고스란히 녹아 있을 것이다.
물론 사람들에 따라 이것이 가지는 의미는 다르겠지만,
어떤 사람은 이 가르침들 안에 깨달음의 씨앗을 발견할 수도 있을 것이고,
또 어떤 사람은 삶을 평화롭고 행복하게 살아갈 수 있는
힘을 얻을 수도 있을 것이다.

그렇다고 억지로 실천하려고 애쓸 필요는 없다.
무슨 거창한 수행을 한다거나,
삶을 변화시키겠다거나 하는 노력을 기울일 것도 없다.

쉽고 단순하게 실천하는 것이 좋을 듯 하다.
다만 틈틈이 반복해서 읽고 사유해 보라.
이 목록이 가지는 좀 더 본질적인 의미를 삶 속에서 찾다보면
어느 순간 무릎을 탁 치게 만드는 작은 깨우침이 찾아 올 지 모른다.

이해되지 않거나, 구체적으로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지,
어떻게 현실에서 실천해야 할지 모르겠더라도 괜찮다.
점차 이해는 깊어질 것이다.

우리 안에 본연의 깨달음이 항상 자리하고 있음을 받아들이기 바란다.
자기 자신의 본래 능력을,
우리 안의 불성이며 신성을 너무 쉽게 무시하지 말라.
반드시 안에서 깨우침의 향기가 피어오를 것임을 믿어도 좋다.

다만 반복해서 읽고 사유해 보라.
그것도 어렵다면 그저 읽기만 해도 좋다.
반복해서 읽다보면 어느새 자신도 모르게 내면 깊은 곳에
몇몇 언어들이 생명력을 일으키며 물결을 일으킬 것이다.

수행이란, 마음공부란 사실 그리 어려운 것이 아니다.
그동안 우리들은 수행과 명상에 대한 너무 높은 울타리를 치고 있었다.
억지스런 노력과 애씀은 오히려 마음을 무겁게 만든다.
수행을 오히려 나와 멀어지게 만든다.

고행주의를 버리라고 했던 부처의 말은
이미 2,500여 년 전에 있어왔지만
그 오랜 시간이 흐른 지금까지도 여전히 수행은
고도의 고행과 노력을 감당해 낼 수 있는
소수의 사람들만 하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수행은 특별한 사람만 할 수 있는
어떤 고난도의 기술이 아니다.
가장 단순하고 쉬운, 너무 쉽고 단순해서 오히려 어렵게 느끼는 것이
수행이요 명상이다.

그러니 그동안 가져왔던 수행에 대한,
명상에 대한 벽을 깨라.

아주 자연스럽게, 아주 쉽고 단순하게,
아주 편안한 마음으로 긴장을 풀기 바란다.
그랬을 때 비로소 우리의 삶은 변화될 수 있다.
내 안의 깊은 휴식의 공간이 비로소 본연의 휴식을 취할 수 있게 된다.

법상,[부자보다는 잘 사는 사람이 되라],도솔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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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법상



[월출산 도갑사]

하나도 버릴 것 없는 세상입니다.
즐거움은 즐거움대로
괴로움은 괴로움대로
인연따라 온 것
인연따라 마음 열어 받아들이면 그만입니다.

인생 앞에 펼쳐질 그 어떤 경계일지라도
일체를 다 받아들일 수 있어야 합니다.
이 모두가 내가 지었기에 당연히 내가 받아야 하는
철저한 인과의 통 속입니다.

다가오는 크고 작은 경계들은
결코 나를 헤칠 수 없으며, 나를 이길 수 없습니다.
버리려고 애를 쓰면 쓸수록 다가오는 경계는
더욱 큰 힘을 발휘하여 나를 짓밟을 것입니다.
무소의 뿔처럼 거칠 것 없는 마음으로
일체를 다 받아들이십시오.

받아들이되 그 경계에 속아서는 안됩니다.
놀라지도 말고 두려워 할 필요도 없습니다.
받아들인 경계는
인연따라 잠시 생겨났기에 물거품과 같고 신기루와 같은
어설픈 환영일 뿐입니다.

괴로워하지 마세요.
두려워하지 마세요.
나약한 마음은
실체가 없는 경계들에게 자아의식을 강하게 심어줄 뿐입니다.
그 환영 같은 경계들을 실재하게 만들어 버립니다.
그렇게 되면 그 경계는
내 앞에 커다란 두려움의 존재로써 실재하게 될 것입니다.
본래 있지도 않은 경계를
애써 만들게 되는 결과를 가져오고 말 것입니다.

용광로와 같고 바다와 같은
밝은 참나 한마음속에 다 집어넣고 녹일 수 있어야 합니다.
그렇게 경계에 마음을 이끌리지 않고
비워버리게 되면
경계는 이제 더이상 고통도 기쁨도 아닙니다.
그저 스치는 하나의 작은 인연일 뿐입니다.
못 받아들일 이유가 하나도 없습니다.

지금의 모든 경계는
과거에 내가 지은 인연에 대한 과보이므로
이를 받아들이지 않는다는 것은
원인은 지어두고 과보는 받지 않겠다는 도둑의 마음입니다.


하나도 잡을 것 없는 세상입니다.
즐거움은 즐거움대로
괴로움은 괴로움대로
인연따라 온 것
그저 인연의 흐름에 맡겨 두어야 합니다.

인생 앞에 펼쳐질 그 어떤 경계일지라도
일체를 다 놓아 버릴 수 있어야 합니다.
'잡음'이 있으면 괴로움이 뒤따릅니다.
그저 인연 따라 잠시 왔다
잠시 스쳐갈 수 있도록 놓아두어야 합니다.

이 모두가 내가 인연 지었기에 당연히 내게로 돌아 온
철저한 인과의 통 속입니다.
그 결과에 또 다른 착(잡음)을 두어서는 안됩니다.

작은 마음으로 욕심 부려 잡게 되면
또 다른 괴로움이 시작된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이 세상 그 어떤 경계도
애착을 둘 만한 것은 없습니다.

그저 텅 빈 속에
신기루처럼, 때론 환영처럼
인연따라 잠시 일어났다 잠시 스쳐가는 것을
애써 착(着)을 두어 붙잡으려 하기에
애욕이 일고, 욕망이 일어
인연 다해 없어지면 괴로움을 느끼는 것입니다.

어느 하나 '착'을 두지 말고
텅 빈 한마음으로 놓아버려야 합니다.
이 용광로와 같은 한마음 속에
온갖 경계들을 다 집어넣고 녹일 수 있어야 합니다.
어떤 경계라도 '착'을 두어 붙잡고 있어서는 안 됩니다.

'착'을 두게 되면
애착에 따른 욕심이 생기게 되며
내 것으로 만들려는,
아상(我相)을 키우는 결과를 초래합니다.


결국
내 앞에 펼쳐지는 세상 모든 경계는
어느 하나 버릴 것도 없고 잡을 것도 없습니다.

경계가 괴롭다고 외면하고 버려서도 안되며
경계가 즐겁다고 착을두어 잡아서도 안됩니다.

인연따라 잠시 오듯
물 흐르듯 다가오는 경계
가만히 흐르도록 내버려 두어야 합니다.

다가오는 물이 싫다고
억지로 다른 쪽으로 물길을 돌리려 애쓸 필요도 없으며
(버릴 것도 없고)
너무 좋다고
물길을 틀어막아 가두어 둘 필요도 없습니다.
(잡을 것도 없다)

미운 것 '내것'의 울타리 밖으로 버리려 애쓰지 말고
좋은 것 '내것'의 울타리 속으로 끄집어 들이지도 마십시오.

오직
'내 것' 이란 울타리만 깨 버리면
버릴 것도 없고 잡을 것도 없습니다.
본래 모두가 내 것이며
모두가 내 것 아님이니...
'전체로서 하나'인
무량수 무량광 법신 부처님의 텅 빈 밝은세상...

그저 오면 오는 대로
가면 가는 대로
인연 따라 다가온 물의 흐름대로
그렇게 가만히 흘러가도록 내버려두면 되는 것입니다.

잡으면 잡아서 괴롭고
버리면 버려서 괴로운 것이 우리네 기막힌 삶입니다.

오직 중도(中道)!!
그 하나면 족합니다.

그저
턱! 놓아버리고
물 흐르듯 여여하게 흘러가는
유수(流水)같은 수행자가 되어야 합니다.
Posted by 법상



[우리나라 5대 적멸보궁 중의 한 곳, 영월의 사자산 법흥사입니다. 적멸보궁이란 온갖 번뇌망상이 적멸한 보배로운 궁이란 뜻. 신라 때 자장율사가 당나라 청량산에서 수행하던 중 문수보살로부터 석가여래의 진신사리와 가사를 전수받아 643년에 귀국한 뒤 이 절을 창건하여 진신사리를 봉안하였다고 합니다. 저기 보이는 법당 뒷 산 어디엔가 사리가 봉안되어 있다고 하데요. 또 하나, 법흥사는 우리나라에서 산림조류가 가장 많이 서식하는 곳으로 까막딱따구리, 수리부엉이를 비롯한 온갖 희귀한 천연기념물인 각종 철새와 텃새가 즐겁게 노래하는 도량으로도 유명합니다.]

현실이라는
지금 이 순간
내 앞에 일어나는
안팎의 일체 모든 경계는
재수 없게 어쩌다 생겨난 일이 아니요,
우연이나 숙명적으로 생겨난 일도 아니며,
그 어떤 절대자가 나를 시험해 보기 위해
만들어 낸 것 또한 아닙니다.

내 앞에 펼쳐진 모든 경계는
모두가 내가 만들어 낸 환영일 뿐입니다.
잠시 분별심 내어 만들어 낸
거짓된 신기루이며 한바탕 꿈일 뿐입니다.

인연따라 잠시 생기고 인연이 다하면
자연스레 소멸해 버리는 인연생(因緣生)이며 공생(空生)입니다.

그렇기에 일체는 다 공(空)하다 하는 것입니다.
일체는 다 인연생이라 하는 것입니다.

내가 과거에, 그리고 전생에 지어 온
일체의 모든 행위들이 원인의 씨앗이 되어
때가 되면 무르익어 열매가 열리듯
그렇게 때맞춰 과보를 가져오는 것일 뿐입니다.

그렇게 고정됨이 없이 만들어졌다가
그저 인연따라 흩어지는 것일 뿐입니다.

누가 인연 지어 주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짓고 내가 받는 것입니다.

쉽게 내 뱉었던 말 한마디,
머리 굴려 쥐어 짜낸 생각 하나 하나,
아무 생각 없이 한 행동 하나 하나가
0.1%의 에누리도 없이 우리의 현실을 만들어 냅니다.
어느 것 하나 우연이 없습니다.

수 억겁을 윤회하며
우린 참 많은 행위를 일으키며 살았습니다.
수많은 업을 짓고 살았습니다.

지금 우리의 마음 속엔
그 오랜 세월동안 지어 온
일체의 모든 업장이 고스란히 다 녹아 있습니다.
선한 마음으로 일으킨 신구의 세 가지 선업도 들어 있고,
악한 마음으로 일으킨 탐진치 3독심도 가득합니다.

누구 하나 선한 업만을 지은 이도 없고
누구 하나 악한 업만을 지은 이도 없을 것입니다.
누구나 선악의 모든 업을 짓고 살았습니다.

그렇기에
우리의 현실은 괴로움과 즐거움이 공존하는 것입니다.

선업만을 짓고 살았다면
물론 즐거운 일만 있을 것이고
악업만을 짓고 살았다면
물론 괴로운 일만 있을 테지만,
이 모든 선악의 일상이 우리의 과거이므로
내 앞에 펼쳐진 현실이나 미래 또한
괴로움과 즐거움의 수 없는 반복이 될 것입니다.

여기까지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공감을 합니다.
그러나 이와 같은 인과의 도리를
실천하는 이는 그리 많지 않습니다.

사람들은 절에 오며
좋은 일만 있게 해 달라고 기도를 합니다.
나쁜 일들은 부처님께서 다 거두어 주시고
늘 즐거운 일만 있게 해 달라고 기도를 합니다.

그러나
그건 아닙니다.

부처님 앞에서 당당해 져야 합니다.
떳떳해 져야 합니다.
'내가 지은 것 모두 내가 받겠습니다.'
하는 마음이 진실된 수행자의 마음입니다.
즐거움도 괴로움도 모두
받아들이는 것이 수행자의 자세입니다.

내 앞에 펼쳐진
일체의 모든 경계는
하나도 버릴 것이 없습니다.
다 이유가 있기에, 원인이 있기에 나온 것입니다.
짓지 않은 것은 절대 나올 수가 없습니다.

안팎의 일체 모든 경계를
다 받아들이는 것이 진정한 수행심입니다.

불교 교리의 핵심을 연기법, 인과법이라 말합니다.
대승불교에서는 '공'이라 말합니다.
큰스님네들은 연기와 공을 실천키 위해
'마음을 비워라'
'놓아라' 고 이야기 합니다.

어떻게 해야 연기, 공을 실천할 수 있고
어찌 해야 비울 수 있습니까.

모두를 버리고
현실에서 도피하는 것이 진정 비우는 것인가요?

비운다는 것은
공을 실천한다는 것은
연기를 실천한다는 것은

내 앞에 펼쳐진 일체 모든 경계를
있는 그대로 다 받아들여야 함을 의미합니다.

지을 때는 선도 악도 모두 닦치는대로 지어놓고
받을 때 되어선 좋은 것만 받겠다고 하니
중생심이란 얼마나 교활합니까.
괴로움은 받기 싫은데
지어 놓았으니 지은대로 자꾸 나오게 되고
그걸 받지 않으려고 하니 괴로운 것입니다.

내 앞에서 당당해 지세요.
있는 그대로 모두를 받아 들이세요.

나는 수행했으니
나는 기도 열심히 하고 있으니
괴로움이 비켜갈 것이란 어리석은 생각을 하지는 않으셨나요.
진정한 수행자라면
괴로움, 즐거움 이 모두를
다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당당히 싸워 몽땅 녹일 수 있어야 합니다.

기도, 수행 많이 한다고
괴로움이 비켜가는 것이 아닙니다.
다만 그 수행심으로 괴로움에 걸리지 않는 것입니다.
수행자는 괴로움 없는 이가 아니라
괴로움에 얽매이지 않는 이라고 하지 않던가요.

괴로움의 과보가 왔을 때
싫다고 비켜가면 그만인 듯 하지만
도리어 더 큰 과보가 되어 언젠가 내 앞을 가로막을 것입니다.
반드시 그렇게 되어 있는 것이 법계의 이치입니다.

그렇기에
다 받아들이고
그 모든 경계를 다 녹여 내셔야 합니다.
내 안에서 다 녹여 낼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의 마음은
용광로라고 하지 않던가요.
그 어떤 경계일지라도 나의 참생명 주인공 속에
몰록 놓고 나면 다 녹아들게 되어 있습니다.

까짓 하늘이 무너진다 해도,
그 어떤 경계가 두려움을 몰고 온다 해도,
묵묵히 관찰하고
다 놓고
다 비우고
다 받아들이세요

나의 참생명은
무엇이든 다 녹일 수 있는 부처님 이십니다.
Posted by 법상



[현재 한국에 하나밖에 안 남아 있는 목조탑, 국보 55호 법주사 팔상전, 법당 내부에 부처님의 일대기인 팔상성도가 그려져 있어 팔상전이라 이름하였습니다. 전체 높이는 상륜까지 65미터로 현존하는 한국 탑파중 가장 높은 것이지요. 어느 절이나 마찬가지이겠지만 절에 갈 때는 오후 5시 쯤 느즈막이 가도 좋습니다. 도량을 참배하다가 보면 저녁예불의 장엄한 모습을 잘 볼 수 있지요. 특히 요즘같이 낮이 긴 여름에는... ]

방하착(放下着)이야말로
무아(無我)의 진리...
연기(緣起)의 진리...
삼법인(三法印)의 진리...
사성제(四聖諦)의 진리...
중도(中道)의 진리...
공(空)의 진리...
이 모든 부처님의 가르침이 고스란히 녹아 있습니다.
이 모든 교리에 대한 충실한 실천수행입니다.

세상 모든 것은(一切, 森羅萬象)
다만 인연따라 잠시 왔다가 잠시 가는 것입니다.
수많은 인연 인연들이 서로 연(緣)하여 일어나고(起)
인연이 다하면 사라지고 그런 것입니다.[연기법]

인연이 만나 생(生)함이 있는 것과 같이
인연이 다하면 반드시 멸(滅)함이 있게 마련입니다.
이 세상 어는 한 물건도 멸하지 않는 것은 없습니다.[제행무상]

그러나 이렇듯 연기의 진리대로
인연따라 잠시 왔다 가는 것을
어리석은 중생들은 '내 것'이라 집착하여 붙잡으려 합니다.
잠시 내게 온 돈을 '내 돈'이라 하고
'내 명예' '내 권력' '내 지식' '내 가족' '내 사랑'...
이렇게 모든 것을 내 것으로 만들려고 합니다.[아상]

그러나 본래 내 것이란 어디에도 없습니다.[제법무아]
'나'라는 존재 또한 잠시 인연따라, 전생 업식따라 왔다 가는 존재일진대
'내 것이다' '내가 옳다' 하는 마음이야 말 할 것도 없습니다.

'나'라는데에 집착하니 '상대'가 생겨납니다.[인상]
내가 있고 상대가 있다는 분별심이 생겨납니다.
그 최초의 분별심은 이윽고
수많은 지엽적인 분별심을 몰고 옵니다.[중생상, 수자상]

그런 수많은 분별심들은 어느 한 쪽을 고정짓고 대상화 하여
생사(生死), 미추(美醜), 장단(長短), 귀천(貴賤), 증감(增減)...
이라는 수많은 극단의 분별상을 일으킵니다.

그러나 본래로 인연따라 길고 짧음이 있으며
아름답고 추함이 있고
귀하고 천함이 있는 것이지
혼자서 일어나지 않는 법입니다.

예를 들어 '나무젓가락은 길다.'와 같은 명제 또한
인연따라 전봇대 옆에 서면 짧아지고
이쑤시게 옆에 서면 길어지는 것이지
본래 길고 짧음이 있는 것은 아닙니다.

아름답고 추함 또한
고정되게 존재하지 않습니다.
세계에는 아름다움의 기준이 천차만별입니다.

뚱뚱한 여인이 아름다운 나라,
목이 길어야 아름다운 나라,
아랫 입술을 뚫어 길게 늘어질수록 아름다운 나라,
우리처럼 가늘고 눈코입 배치가 잘 되어야 아름다운 나라....
그러나 이 또한 우리의 기준으로 잘 배치된 아름다움이겠지요.

이렇듯 세상 모든 극단적인 분별들은 고정됨이 없이 돌아갑니다.
인연따라 장단, 귀추, 생사, 거래, 시종, 고저, 대소 등이
일어나는 것이지 절대 홀로 일어나지 않습니다.

다시말해 어느 것을 보고 길다 짧다 할 수도 없으며
잘났다 못났다 할 수도 없고
아름답다 추하다 할 것도 없습니다.
그렇기에 본래로 극단은 존재하지 않아 모두가 중도(中道)입니다.

중도의 중(中)은 '가운데'를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팔정도의 정(正)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바르다는 것은 연기법, 삼법인, 무아를 이와 같이 바로 볼 수 있는
옳고 밝은 지혜를 의미합니다.

이렇듯 어느 한 쪽으로 고정지을 수 없기에 중도이며
그렇게 되면 길다고 할 수도 짧다고 할 수도 없고,
깨끗하다 더럽다도 있을 수 없으며
있다 없다도 논할 수 없게 됩니다.
그렇기에 공(空)이라 하는 것입니다.

어느 하나 고정된 실체가 있지 않고
인연따라 연기하여 만들어진 것이기에 공이고
무아이며, 중도인 것입니다.

금강경에서는 이 세상 어느 한 물건이라도
이렇듯 연기이며 무아이고 중도, 공이기 때문에
꿈과 같고 환영과 같고 그림자 같고
물거품과 같고 번개와 같다고 했습니다.
모든 상은 공한 것이니
상이 상이 아님을 바로 보면 여래를 볼 것이라 했습니다.

이렇듯 어느 하나 집착할 대상이라곤 없습니다.[무집착, 무소득]
그렇기에 '집착을 놓아라' '마음을 비워라'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방하착(放下着)'을 이야기 하고 있는 것입니다.

방하착이야말로
이렇듯 모든 불교 교리에서 이끌어 낸 최고의 수행법입니다.

그럼 불교 교리의 집성인 사성제(四聖諦)를 통해
다시한번 방하착의 교리를 체계지워 설명코자 합니다.
사성제를 일컬어
경전에서는 코끼리의 발자국이
모든 짐승의 발자국을 포섭하는 것과 같이
모든 부처님의 가르침을 포섭하고 있는 가르침이라고 합니다.

사성제의 가르침에 의거하여 전체적으로 종합 정리를 해 보면
연기법(緣起法)에 의해 일체는 잠시 나고 사라지는 것이며
그렇기에 무아(無我)이고 무상(無常)하여 일체는 '고(苦)'인 것입니다.

이러한 연기는 다른 말로 공(空)을 의미하며
그렇기에 세상을 중도(中道)의 바른 시각으로 바라보아
지혜(智慧, 明)를 증득해야 합니다.
이러한 연기와 삼법인, 공, 중도의 시각으로 일체을 정견(正見)해 보니
세상은 괴로움[고성제(苦聖諦)] 아님이 없습니다.

괴로움의 원인을 보니
모두가 집착(執着)에서 옵니다.

연기, 삼법인[무아, 무상, 고], 공, 중도를 바로 정견하여
일체에 집착할 것이 없는 허망(虛妄)한 것임을 바로 보아야 하는데
그러지 못하고 공하고 허무한 것에 집착을 하니
온갖 분별망상이 일어나 신구의(身口意)로 업(業)을 짓게 되고
집착에 의해 끊임없이 윤회(輪廻)의 수레바퀴에서 허덕이는 것입니다.
이렇듯 모든 원인은 바로 '집착'에서 온다는 것이
바로 집성제(集聖諦)인 것입니다.

괴로움과 괴로움의 원인을 살펴보고 나니
괴로움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괴로움 소멸이란 지혜의 확신이 생겨납니다.
모든 일은 문제와 문제의 원인을 바로 알고 나면 풀리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문제(고)와 문제의 원인(집)을
지혜의 견해(연기, 삼법인, 중도, 공)로써 올바로 알고 나니
우리가 추구해야 할 문제의 해답이 열리는 것이니
그것이 바로 멸성제(滅聖諦)입니다.

괴로움과 괴로움의 원인
그리고 괴로움 소멸에 대한 확신을 얻고 나니
이제 괴로움의 원인을 소멸하는 길을 따라 정진하는 일만 남았습니다.
그 올바른 괴로움 소멸의 길이 바로 도성제(道聖諦)입니다.

부처님께서는 도성제를
여덟가지 길로 나누어 팔정도라는 길을 보여주셨습니다.

그러나 도성제를 가장 쉽게 풀어 이야기 한다면
방하착(放下着)이 됩니다.
괴로움의 원인을 제거하는 것이 바로
괴로움의 소멸이기 때문입니다.
방하착이 바로
집착(着)을 놓아버려라, 비워버려라,
소멸시켜 버려야 한다는 말이기 때문입니다.

불교 수행이라는 것은
괴로움의 원인을 바로 알아 그 원인을 소멸시키는 행위를 말합니다.
말 그대로 괴로움의 원인인 집착을 소멸시키는 방하착인 것입니다.
남방불교에서는 모든 수행의 핵심을 '무집착(無執着)'이라 이야기 합니다.
집착이 없어야 한다, 다시말해 집착을 놓아야 한다는 말입니다.

그간 수행을 너무 어렵게 생각한 감이 있습니다.
이렇게 쉬운 것이 바로 수행입니다.
둘러 가는 길이 아닌
곧장 올곧은 길로 가는 최고의 수행이 바로 방하착입니다.

일체(몸과 마음, 나와 너, 주관과 객관)
모든 경계의 근본 원인이 바로 '집착'이란 놈입니다.
그것을 놓고 가는 길이
참 수행자의 밝은 정도인 것입니다.
방하착인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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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법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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