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주의 역설, 버릴 때 더 큰 것을 얻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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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 로부체(Lobuche, 4930m)는 오랜 명상에서 깨어나듯 성성하고 적적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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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쩌면 인간을 제외한 모든 존재가 언제나 명상 속에서 적묵한 자신의 삶을 자기답게 살고 있는지 모른다. 산하대지도 그렇거니와 들짐승과 새와 작은 벌레조차 자신의 질서 안에서 자연스럽게 제 갈 길을 오롯이 걷고 있다. 오직 사람들만이 온갖 욕심과 집착과 소유의 굴레에 갇혀 자기답고 자연스러운 순연한 삶의 길을 잃고 있다. 그 애애하고 온전하며 자유로운 삶의 길을 다시 되돌리고자 하는 의지가 명상, 수행이라는 전통을 만들어냈다.

그런데 이 명상 수행의 길은 우리가 생각하는 다른 모든 것들에 대한 성취의 길과는 전혀 다른 길이다. 완전히 세상과는 거꾸로 가는 길이다. 다른 모든 성취들은 우리의 노력과 의지를 통해 얻어질 수 있겠지만 이 길은 그런 인위적인 노력과 의지와 시도와 그 어떤 애씀으로도 얻어질 수 없는 것이다. 오히려 이 길을 걷고자 한다면 명상으로 무언가를 얻고자 하는 그 모든 바람과 의지와 성취욕과 추구를 완전히 버려야 한다. 그뿐 아니라 세속적인 모든 집착과 욕심과 소유욕 또한 던져버려야 한다.

적당히 쥐고 있으면서 명상의 생활도 적당히 함께 해 나간다는 것은 실현 불가능한 일이다. 둘 중 하나는 사라져야 다른 하나가 들어선다. 물론 실제적으로 돈도 명예도 직장도 가족도 다 버려야 한다는 것은 아니다. 다만 마음에서 머무는 바가 없어야 하고, 집착을 놓아야 한다는 의미다. 즉 지금 가지고 있는 소유물이 주는 즐거움을 누릴지라도 언젠가 있을 상실의 두려움 없이 그것을 즐기고 쓸 수 있어야 한다. 물론 그렇게 되면 자연스럽게 그 소유물을 이웃과 함께 나누는 데서 오는 기쁨 또한 저절로 생겨날 것이다. 또한 지금 가지고 있는 명예, 지위, 직장, 가족, 사랑의 즐거움을 충분히 받아들이되 그것들은 언젠가 소멸되고 만다는 무상의 속성을 깨닫고 있기 때문에 거기에 얽매임 없이, 잃는 데 대한 불안감 없이 그것을 누리고 쓸 수 있다. 사실 그랬을 때 비로소 삶이 주는 풍요와 소유와 즐거움을 더욱 생생히 누리고 느낄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집착 없이 그 모든 것을 행할 때, 비로소 마음에 걸리는 것 없이 자유롭게 이 우주의 본래적 풍요를 마음껏 가져다 쓸 수 있게 된다. 그 때 우주는 더 큰 것을, 더 많은 것을 당신에게 가져다 줄 것이다. 그것이 바로 이 우주의 역설이다.

붓다 이후로 왜 그토록 많은 사람들이 수행을 하고 명상을 해 오건만 모두가 붓다가 되지 못하는가. 왜 아직도 사람들은 괴로움에 허덕이는가. 왜 아직도 세상은 어둡고 힘겹기만 한가. 그것은 둘 다를 잡고 있기 때문이다. 세속적인 만족, 소유, 집착, 애욕을 그대로 둔 채 명상을 이어가기 때문이다. 세간적인 바람과 출세간적인 바람 둘 다를 한꺼번에 얻을 수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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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상이란 곧 무집착을 의미한다. 수행이란 곧 무소유, 무소득(無所得), 무집착, 무아(無我)를 의미한다. 명상은 애쓴다고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모든 집착과 소유와 애박(愛縛)과 아상(我相)이 놓아진 자리에서 저절로 꽃처럼 피어나는 것이다. 그래서 명상의 진척이 이루어지길 바라지 말고 내 안의 욕심과 집착을 먼저 살필 수 있어야 한다. 집착이 타파된 자리, 모든 바람이 사라진 자리, 바로 그 자리에서 명상은 시작된다. 아니 저절로 찾아온다.

출가자들은 출세간적인 깨달음에의 욕구와 집착이 명상이 일어나는 것을 방해하고, 재가자들은 세간적인 욕구와 집착이 명상을 방해한다.

나는 지금 무엇을 붙잡고 있는가. 무엇을 놓지 못해 나에게 명상의 축복이 깃들지 않는가. 놓아버리고 싶고 비워버리고 싶어도 도대체 내가 붙잡고 있는 집착의 실체가 무엇인지 모른다. 내가 붙잡고 있는 것, 그것은 무엇인가.

앞에서 말한 대로 그것은 돈일 수도 있고 명예나 권력, 소유욕, 사랑, 사람일 수도 있다. 그런데 그 모든 것의 뿌리에 하나의 근원이 있다. 바로 그 하나를 잡고 있기 때문에 다른 모든 것이 뒤따르는 것이다. 그 하나는 바로 ‘나’다. 나라는 생각, 나라는 상(相), 나라는 집착, 내 것이라는 소유욕, 내가 옳다고 하는 아집이다. 내가 부자가 되고 싶고, 내가 잘 살고 싶고, 내가 남들에게 인정받고 싶고, 내가 남보다 더 높은 자리에 오르고 싶으며, 내 집도 남들 것보다 컸으면 좋겠고, 남보다 더 많이 소유하고 싶으며, ‘내 생각’ ‘내 견해’대로 사람들이 따라 와 주었으면 좋겠다. 어쨌든 우리 삶의 목적은 ‘나’를 세상에 더 크게, 더 널리 드러내는 일이다.

그것을 위해 어떤 이는 돈으로써 나를 드러내려 애쓰고, 또 어떤 이는 권력으로써 자신을 드러내려고 하며, 또 어떤 이는 예술로, 자신의 재능을 키움으로써 자신을 드러내려 한다. 학생들은 공부를 잘 함으로써 자신을 드러내야 하고, 운동선수들은 운동을 잘 함으로써, 직장인은 진급을 함으로써, 예능인들은 더 많은 인기를 얻음으로써, 학자는 더 많은 지식을 머릿속에 집어넣음으로써 자신을 드러내려 한다. 이 모든 것이 바로 ‘아상을 키우려는 시도’이고, ‘나를 세상에 드러내려는 시도’이며, ‘에고를 강화하려는 욕구’에 다름 아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 삶의 원동력이요, 에너지가 된다.

그러나 이 모든 ‘나를 드러내고 아상을 강화하려는’ 시도는 언젠가 분명히 크게 좌절될 수밖에 없는 운명을 타고났다. 그것이 모든 아상의 종말이다. 아상이란 본래부터 실체가 없기 때문에 그것은 언젠가는 사라져 갈 수밖에 없는 운명이다. 우린 모두 언젠가 이 세상과 작별을 고해야 할 것이 아닌가. 젊었을 때 아무리 부귀 영화를 누리고, 명예와 권력을 휘두르며, 인기와 존경을 받았다고 할지라도 그것은 한 때일 뿐이다. 분명한 사실은 언젠가 그 모든 것은 사라지리라는 것이다. 이것이 모든 성인들이 말했던 무상(無常)과 무아(無我)의 소식이다. ‘집착을 버리라’ ‘에고를 버리라’ ‘마음을 비우라’는 모든 가르침의 바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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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작아지는 것을 즐거워하라

그러면 이제 어느 정도 삶의 실마리가 풀리고 있다. 그러나 실마리가 풀림과 동시에 딜레마에 봉착한다. 내가 그동안 움켜쥐려고 애써왔던 그 모든 것들을 놓아버리라니 도저히 그럴 수가 없는 것이다. 어찌 그럴 수가 있겠는가. 내 삶의 목적이었던 것을 어떻게 쉽게 놓아버릴 수 있겠나. 그러나 놓아버리지 않으면 우리의 삶은 지금까지 그래왔던 것처럼 아상의 노예가 되어 주변 상황에 끊임없이 휘둘리는 주체적이지 못한 삶을 빠져나오지 못한다. 그것은 부자유이고 억압이며 결박이고 혼돈이다.

자, 그럼 이제 어쩌겠는가. 그냥 이대로 살다가 갈 것인가, 아니면 전혀 새로운 삶으로 바꾸어 볼 것인가. 그렇다. 답은 한 가지, 자유롭고 걸림 없는 평화의 삶을 택하는 것이 모든 인류의 공통된 길이다.

그러면 답은 나왔다. 아상과 아집, 소유와 집착으로 인해 괴로운 삶이 시작되었다면 바로 그것을 놓으면 된다! 어떻게 놓을 것인가? 지금까지의 삶과는 거꾸로 가는 것이다. ‘나’를 드러내려는 모든 노력을 ‘나’를 소멸시키려는 노력으로 바꾸면 된다. ‘나’를 확장하려는 노력을 ‘나’를 축소시키는 것으로 바꾸면 된다. 아니 아상의 소멸과 축소는 어차피 예약되어 있는 것이니, 그것은 노력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다만 그것을 받아들이면 되는 것이다. 확장되고 드러날 때라도 그것이 거짓이고 환상임을 깨달아 머지않아 이 모든 것이 축소되고 소멸될 것임을 분명히 보는 것이다.

다시말해 내가 이 세상에서 축소되는 데 대한 두려움을 버리면 된다. 내가 작아지는 것 같은 느낌, 나의 가치가 줄어드는 것 같은 느낌, 내 입지가 좁아지는 것 같은 느낌, 아상의 소멸, 에고의 소멸을 즐거운 마음으로 받아들이라. 내가 작아지는 것은 본질적 차원에서는 매우 좋은 일이다. 내 가치가 줄어드는 것 같은 느낌, 나에 대한 사람들의 대접이나 평가가 축소되는 것 같은 느낌, 그것이야말로 우리가 흥미롭게 받아들여야 할 즐거운 일이다. 그것이 바로 진리의 길에서는 거꾸로 온전한 길인 것이다. 완전히 다른 차원의 길이지만 그래서 받아들이기 쉽지 않겠지만 그것이야말로 무아(無我), 무집착(無執着)의 길, 모든 붓다와 성인들이 걸어 간 요확하고도 명료한 길이다.

그렇다고 해서 억지로 나를 죽이려고, 축소시키려고 애쓸 필요는 없다. 진리는 모든 인위적인 노력을 거부한다. 지금 다니는 회사를 그만 둘 필요도 없고, 현재의 높은 지위를 일부러 포기할 필요도 없으며, 소유한 것을 억지로 전부 버릴 필요는 없다. 소유하되 소유에 대한 애착과 집착만을 거두면 되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그 소유를 보다 아름답게, 본질적으로 잘 쓸 수 있는 지혜가 열린다. 그뿐 아니라 소유하되 소유물에 도리어 소유되지 않는다. 그 소유물이 언젠가 떠날지라도 괴롭지 않다. 물론 그 모든 소유물은 언젠가 반드시 떠날 수밖에 없는 운명이다. 명예나 지위 또한 거기에 얽매이지 않고 그 자리에서의 몫을 행할 때 비로소 그 지위에 걸맞은 참된 지혜와 사랑 가득한 온전한 행위가 뒤따른다.

거기에 ‘나’라는 아상과 아집과 이기는 사라진다. 보통 사람들은 자기 지위에서 ‘나’ ‘내 이익’을 개입시킴으로써 순수하게 그 지위에서 해야 할 몫을 온전히 해내지 못하고 있다. 모든 일의 중심에는 ‘나’ ‘내 이익’과 얼마나 부합하는가 하는 이기가 깔려 있는 것이다. 사실 가만히 살펴보면 우리가 하는 모든 행위․말․생각의 중심에 ‘나’라는 아집과 이기가 숨 쉬고 있다. 이 행동이 나에게 어떤 도움이 될까, 이 말이 나에게 어떤 이익을 가져올까가 저절로 개입되는 것이다.

이러한 모든 ‘나’ 중심적인 일상에 완전히 새로운 차원의 삶을 가능케 하는 것이 바로 ‘나’의 소멸, 에고의 축소다. 내가 축소되는 즐거움, 에고가 깨지는 통쾌함, 그것이야말로 본질적인 즐거움이다. 그것이야말로 부처님께서 깨달으셨던 본질적인 법락(法樂)이며,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고 신께서 우리 인간들에게 하고자 했던 가르침의 핵심이다.

내 것을 이웃과 나눌 때 행복하다. 물론 한 편으로는 내 것이 축소되니 괴롭겠지만 그 세속적 차원을 넘어서 조금 더 깊은 차원에서 우리는 아이러니하게도 행복과 풍요를 느낀다. 바로 그것이 아상이 소멸되는 즐거움의 단적인 예다.

아상의 소멸, 에고의 축소, 내가 줄어드는 것을 즐거워하라. 그렇게 되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삶이 지금까지와는 전혀 다르게 변한다. 삶이 당당해진다. 걸림 없이 자유로워진다. 주변의 눈치를 살필 것도 없고, 윗사람에게 애써 잘 보이려고 아부를 떨 것도 없다.

예를 들어 진급이나 부유함은 아상을 강화시킨다. 더 높은 자리에 오르고, 더 유명해지고, 더 영향력이 강해질수록 아상은 더욱 성장하며 평화와는 더욱 더 멀어지기 쉽다. 그러니 아상의 축소를 즐거워하는 수행자라면 일부러 돈을 안 벌거나, 일부러 진급에서 떨어질 필요는 없을지라도 자연스럽게 그렇게 되는 상황을 걱정할 일은 아니다. 자연스럽게 진급이 안 되거나, 영향력이 줄어들거나, 아상이 축소되게 된다면 그것은 즐거운 일이니 흡족하게 받아들이면 된다. 그것은 오히려 영적인 차원에서는 매우 반길 만한 일이다.

스님들처럼 일부러 버리지는 못할지언정 자연스럽게 버릴 수 있는 고맙고도 감사한 순간이 온다면 그것을 행복하게 받아들일 수는 있다.

그러니 어떤가. ‘아상의 축소’ ‘에고의 소멸’을 거부하지 않는 이는 모든 일상이 자유롭고 걸림 없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 어디에도 집착하는 것이 없기 때문이다. ‘반드시 이렇게 되어야만 한다’거나, ‘반드시 내 손에 넣어야 겠다’거나, ‘반드시 내가 가질 거야’, ‘반드시 저 자리에 오를 거야’라는 그 어떤 집착도 욕망도 바람도 없기 때문에 언제나 지금 놓여 있는 그 자리에서 충만하고 충분한 완전한 삶을 누릴 수 있는 것이다. 사실 우리의 삶은 언제나 완전하고 완벽하다. 늘 풍요롭고 충만하다. 나의 욕심과 집착만 없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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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땅히 모든 것을 잃어라

모든 사람들의 공통적인 마음 밑바탕에는 두려움이 깔려 있다. 그것은 아상이 소멸될까 싶은 두려움, 즉 내가 축소될까 싶은 두려움이다. 내 돈이 사라질까 싶은 두려움, 내 가치가 떨어질까 싶은 두려움, 내 지위가 떨어질까 싶은 두려움, 내 인기나 입지가 축소되면 어쩌나 하는 두려움, 사람들 사이에서 잊혀 질까 싶은 두려움 등이다. 그리고 바로 그 두려움 때문에 사람들의 삶은 자유롭지 못하다. 늘 눈치를 봐야 하고, 남들에게 잘 보이려 애써야 하고, 남들에게 책잡힐 일을 하지 않아야 하며, 윗사람 눈치도 봐야 한다. 그러나 아상의 소멸을 즐거워하는 수행자는 더 이상 두려움이 있을 수 없다. 삶에 진정한 자유가 깃든다.

아상이 소멸되든, 내가 줄어들든 상관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렇게 에고의 소멸을 신경 쓰지 않고 사는 사람에게는 도리어 충만한 삶이 깃든다. 또한 도리어 더 높은 성공과 부와 힘이 그를 기다린다. 그것이 바로 ‘비워야 채워지는 도리’이다. 그것이야말로 삶의 아이러니다. 비워야 채워지고, 놓아야 잡히며, 무소유가 전체를 소유하는 것이 된다.

그러니 어떠한가.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 여기 그에 대한 삶의 나침반이 있다. 에고의 축소를 즐기라. 아상의 소멸을 즐거워하라. 내가 작아지는 것을 두려워하지 말라. 그것을 즐겁게 받아들이라.

에고의 축소, 외부적인 확대와 성장의 축소는 영적인 진보와 바로 연결된다. 성장, 발전, 부, 명예, 권위, 인기, 영향력이 높아질수록 아상은 함께 높아진다. 그것은 진리 차원에서는 절망이다. 외부적인 목적들의 성장을 줄이는 대신 아상의 꺾임, 에고의 축소를 즐거워하라. 사람들이 인정 안 해주는 것을 다행히 여기라. 관심이 축소되는 것을 행복하게 받아들이라. 남들에게 대단한 사람으로, 성공한 사람으로, 인정받는 사람으로, 능력 있는 사람으로, 지혜로운 사람으로 보이려는 의도야말로 아상의 뚜렷한 출몰이다. 있는 듯 없는 듯한 사람, 전혀 위대해 보이지 않는 평범한 사람, 전혀 영적으로 보이지 않는 사람으로 세상에 드러나는 것은 아주 좋은 일이다.

강한 나무는 폭풍이 불어오면 부러지지만 약하고 여린 풀들은 바람이 부는 대로 몸을 누일 뿐 부러지지 않는다. 장자는 굽은 나무가 산을 지킨다고 했고, 노자는 굽은 나무가 되어야 온전히 제 수명을 다할 수 있다고 했다. 곧은 나무, 쓸모 있는 나무는 다 베어가 제 수명을 마치지 못한다. 또한 노자는 굽은 나무의 비유를 들며 “성인은 자기를 내세우는 일이 없기 때문에 그의 존재가 뚜렷해진다.”고 했다. 예수도 말한다. “온유한 자에게 복이 있나니 저희가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이다.”, “마음이 가난한 자에게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이다.” 또한 중국 당나라 조주 선사는 무엇이 도(道)인가를 묻는 남전보원 선사에게 “평상심이 곧 도다.”라고 답했다.

다만 있는 그대로의 자신을 있는 그대로 자연스럽게 드러내라. 무엇이 두려운가? 대단해 보이지 않는 것, 권위를 상실하는 것, 소유를 잃는 것, 지금까지의 성취를 잃는 것, 영향력을 잃는 것, 그것을 마땅히 잃어라. 즐겁게 그 축소와 상실과 소멸을 받아들이라. 상실과 축소는 실패가 아닌 새로운 눈뜸의 이정표다.

진정 삶의 행복을 원하는가. 참된 평화와 자유를 꿈꾸는가. 정말 삶에서 깨어나기를 원하는가. 그렇다면 나의 소멸, 에고의 상실을 두려워 말라. 당당하게 걸림 없이 무소의 뿔처럼 나에게 주어진 길을 우직하게 걸어가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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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신 번쩍 드는 고락샵의 새벽

고락샵에서의 여운이 이러한 아상 소멸의 이치를 사자후처럼 내면의 울림으로 깃들게 했다. 그것은 매우 실제적이고 강렬한 메아리였고 무설(無說)의 설법이었다. 금강경을 지난 10여 년간 되풀이해 왔지만 이렇게 또렷한 소리로 강렬하게 심연을 적신 적은 없었다. 이것은 진정 온 존재로 읽는 금강경의 소식이다.

내면의 소리, 그 청연한 지혜의 소리를 들은 적이 있는가? 그 내밀한 속 뜰의 소리는 언제나 우리 안에서 간절한 통곡처럼, 애잔한 울음처럼, 혹은 여린 떨림처럼 투명하게 울려오고 있다. 그러나 그 소리는 우리의 가슴이 온갖 잡다한 것들로 꽉 차 있을 때는 전혀 들을 수가 없다. 집착과 욕망과 일과 성취와 돈과 명예와 온갖 바람과 추구들로 복잡하게 얽혀 있는 한 내면의 순령한 깊은 울림은 그저 아무런 의미도 가져오지 못할 뿐이다. 아니 그랬을 때 그 소리와 울림은 전혀 들리지 않는다. 세속적인 소음이 그 소리를 차단시키는 것이다. 그것들이 비워지고 놓아질 때, 비로소 소리 없는 소리, 그 우레와 같은 침묵의 소식은 맑은 종소리처럼 내밀한 영혼의 귓전을 스친다. 이 로부체 새벽의 시린 바람처럼, 이 설산이 녹아 흐르는 개울물의 차고 고징한 여울처럼, 그렇게 내 안의 참된 주인의 소식이 졸졸졸 가슴으로 홀연히 흘러들어 온다.

로부체의 새벽은 명정하다. 밝아오는 돋을볕의 품이 다습고도 온온하다. 정신이 번쩍 드는 아침. 지텐은 역시 먼저 출발하고 나는 쉬엄쉬엄 이 풍경을 충분히 느끼며 걷는다.

로부체 입구 산 아래 작고 허름한 오두막 한 채가 수윤한 그림처럼 놓여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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롯지도 아니고 그저 이곳에 몸 붙이고 사는 4,930m 현지 원주민이자 그야말로 히말라야 설인이다. 집 아래는 맑은 물이 흐르고 뒷산 얕은 곳에는 작은 풀숲이 초원처럼 펼쳐져 야크 몇 마리 먹이는 데는 지장이 없어 보인다. 야크만 있으면 우유도 버터도 해 먹고, 야크 똥으로 추위도 녹이고, 저 아랫녘에서부터 짐도 운반해다 쓸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적적한 고지 살림에서 작은 위로와 벗도 된다.

아, 저 작고 낡은 집 한 채가 왜 이리도 마음을 짠하게 만드는지. 인간의 삶, 생명력이란 얼마나 눈물겨운 것이고 신미하고 찡한 것인지를 가만히 서 있는 저 초비(草扉)가 토닥이며 말해 주는 듯하다. 그 집 앞으로 여행자도 지나가고, 짐꾼들도 지나가고, 야크 떼도 지나가고, 물도 구름도 바람도 순순히 지나간다. 무엇이든 그 집 앞을 지나는 것은 모두 그림이 되고, 음악이 된다. 우뚝한 설산도 집 뒤에 서서 그 살가운 삶의 이야기를 지켜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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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곡을 따라 걷는다. 아침 햇발이 개울 물낯에 부딪혀 쨍하고 반짝이는 모습이 한 폭의 활화(活畫)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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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곡 가에 앉아 유장히 흘러가는 것들을 하릴없이 바라본다. 하늘이 어쩌면 저렇게 푸르를 수 있는지, 햇살은 어쩌면 저렇게 농롱히 반짝일 수 있는지, 물길은 또 얼마나 감성을 충만하게 적시어 주는지, 바람은 또 얼마나 소담하게 불어 와 살결을 어루만져 주는지, 물소리는 또 얼마나 고량한 울림으로 한 편의 음악을 연주해 주는지, 심지어 이 오롯한 풍경 속을 헤치고 지나가는 순례자들과 짐꾼들마저 이 풍경화 한 켠에서 자연스러운 조화를 이루며 흐르고 있다. 아! 아름답다 못해 가슴이 저리다. 발이 차마 떨어지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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뒤를 몇 번이고 돌아보면서 고개를 온 몸을 이리저리 몇 바퀴 휘휘 돌려 이 만목황량의 시린 풍경을 가만 가만 느껴본다. 이 순간 이 자연과 내가 하나가 되는 것이 아니라 그저 오직 보여 지는 것만이 있을 뿐이다. 내가 있고 보여 지는 대상이 있는 것이 아니라 그저 거기에 그것들이 홀연히 ‘있을 뿐’이 아닌가. 세상을 향해 오감이 활짝 열어 재껴지면서 압도하듯 감성이 몇 배로 증폭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착각에 빠진다. 히말라야의 묵중한 우주가 이 작은 한 존재 위로 공명하듯 밀려들어온다. 하나 속에 전체가 뛰어들지만 모조리 흡수하고도 모자람이 없듯 감성이 광대역으로 확장된다. 발걸음이 양털구름처럼 가볍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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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곡이 끝날 즈음 두 갈래 길이 나타난다. 물론 그냥 보아서는 이것이 길인지, 두 갈래 길이긴 한 것인지를 도무지 분간할 수 없는 그냥 길 없는 길이다. 이럴 때 포터나 가이드가 없으면 지켜 섰다가 뒤에 오는 이들에게 물어야 할 판이다. 다행히 며칠 전 이 길을 지날 때 눈여겨보면서 물길 따라 오른쪽 길이 종라(Dzonglha, 4830m)와 촐라패스(Cholapass, 5330m)로 가는 길임을 지텐에게 미리 들어둔 터라 혼자밖에 없는 갈림길에서 능숙히 비탈진 협로로 접어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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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말라야, 내가 작아지는 즐거움](불광출판사, 법상) 중에서

Posted by 법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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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 목적지에서 최악의 악천후를 만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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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의 웅성거림을 듣고 오늘이 드디어 칼라파타르(Kala Patthar, 5550m)를 오르는 날임을 안다. 칼라파타르! 벌써 몇 년 전부터 그 이름을 되새기며 바로 오늘을 그리워해 왔다. 칼라파타르라는 어떤 특정지명이나 장소를 그리워했다기보다는 그 상징이 가지는 어떤 향기를 기다려왔던 것이리라. 칼라파타르는 내게 상징적인 곳이다. 물론 칼라파타르 이전에 히말라야와 안나푸르나, 에베레스트라는 이 곳 네팔의 설산은 그저 산이기에 앞서 나에게 있어 존재계의 밑뿌리, 깊은 심연의 고향과도 같은 숭고한 귀의처요, 설산 고행의 붓다나 밀라레빠의 모든 신비들이 꽃처럼 피어나는 곳, 그래서 깨어남의 자궁과도 같은 그런 것들을 상징한다. 그 상징 속의 대표적인 곳으로 내가 꼭 이 생이 끝나기 전에 밟아 봐야겠다고 누누이 생각하고 발원해 왔던 그곳이 바로 칼라파타르가 아니던가.

 

나는 지금 바로 그 투명한 서원이 움트는 그 상징의 산 아래 서 있다. 바로 그 산 아래, 세상이 깨어나기 이전, 정확히 나에게 허락된 이 시간, 이 공간에 나는 서 있는 것이다. 우주법계가 나를 위해 준비한 바로 그 시간과 공간의 때라는 것을 고스란히 받아들인다.

잠시 밖에 나가 보니 아직 어둔 밤중이고 그 어떤 날보다도 시린 추위와 살을 에는 칼바람, 심지어 싸락눈발까지, 설산을 밟은 이후로 가장 혹독한 날씨가 ‘정말 올라가려고?’ 하는 눈빛으로 시험이라도 해 보겠다는 듯 적막감을 선사한다. 함께 있던 여행자들도 나갔다 들어오더니 오늘은 도저히 안 되겠다고 그냥 다시 눕곤 한다. 이런 주변 상황과는 상관없이 이런 저런 판단 없이 그저 당연하다는 듯 몸이 알아서 준비를 한다.

가지고 온 모든 옷가지들을 최대한 끼워 입고 양말도 두 겹에 모자와 장갑까지, 몸에 단단히 동여맬 수 있는 가능한 모든 것들이 동원된다.

 

드디어 롯지 문이 열린다. 지텐은 칼라파타르를 오르지 않고 먼저 내려가 로부체에 롯지를 예약하기로 했다. 저기 멀리 칼라파타르 언덕 중턱 즈음에 십여 명 쯤 되어 보이는 랜턴의 행렬이 있는 것을 보니 다행히도 나 홀로 이 경한한 악천후를 뚫고 가는 것은 아니구나 싶은 안도감이 든다. 멀리 그 흐릿한 불빛을 따라 길 없는 황무한 길을 헤치며 묵묵히 걷는다.

점퍼의 모자를 눌러 썼더니 그 위로 싸락눈이 탁탁거리며 거센 바람과 함께 와 닿는 소리가 제법 거칠다. 아무리 칼라파타르라고는 하지만 오늘 날씨는 지난 일주일간 예상 가능했던 그런 날씨와는 분명히 무관해 보인다. 그야말로 요즘 같은 투명한 가을날에 있어서는 정말 예상하기 어려운 모처럼의 악천후라는 것을 뒤늦게 알았다.

 

어둠 속에 눈보라와 거친 바람과 속살까지 후벼 파는 추위를 온몸으로 마주하며 한 발 한 발 그 거센 악천후 속으로 늠연하게 걸어 들어간다. 마치 태풍의 한 가운데로, 잠시 뒤 어떤 일이 일어날지 모를 그런 미지의 소용돌이 속으로 홀홀 뛰어드는 사람처럼 묵묵히 칼라파타르를 오른다.

출발하며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추위가 늠렬하다. 사실 10월이면 그리 춥지 않고 낮에는 덥기까지 하다며 아무 걱정 없이 다녀오면 된다는 말을 듣고 추위에 대한 대비를 별로 해 오지 않은 탓에 추위 대비책이라는 것이 얇은 여름옷들을 몇 개 더 끼워 입고 점퍼 하나를 입은 정도에 불과하다. 나중에 봤더니 다른 서양인 트레커들은 8,000미터급 정상을 오르는 수준의 최신 등산용품을 완벽하게 챙겨왔다.

그럭저럭 추위는 견뎌보겠는데 장갑이 작고 얇은 터라 손과 손목 부분에 드러난 하얀 속살이 찢어지는 듯 시리다. 추워서 그런지 발 한 발자국 떼기도 여느 때 같지 않다. 몸도 한결 더 무겁다. 그동안의 행군에서 온 무리감이 한꺼번에 몰려오는 듯하다. 그도 그럴 것이 지금까지의 고도 중에 가장 높은 봉우리가 아닌가. 내 생애에서 한 번도 오른 적이 없는 최고 높이의 5,550m를, 그것도 이 추위와 강풍, 싸락눈을 뚫고 앞도 안 보이는 이 어둔 새벽녘 길을 홀로 걷는 것이 아닌가.

 

몸에 느껴지는 고통의 무게감이 지금껏 살아온, 걸어 온 여타의 다른 그것들에 비할 수 없을 정도로 섬뜩하게 다가온다. 사람 몸이 이렇게 무거울 수도 있고, 호흡이 이렇게 버거울 수도 있으며, 한 발을 내딛는다는 것이 이렇게 엄청난 것일 수 있다는 것을 새삼 깨닫는다. 한 발자국 내딛는 것이 고개를 하나 넘는 것만큼이나 힘에 부친다. 생각처럼 몸이 말을 안 듣는다. 생각 같아서는 고작 몇 걸음도 안 되는 거리를 단번에 내디뎌주마 싶은데, 몸이 전혀 따라 주지를 않는다. 세 걸음, 네 걸음을 연달아 내디딜 수가 없다. 한 걸음 걷고 크게 한 숨 몰아쉬고, 또 다음 걸음을 걷고 다시 멈춰 한 숨을 거칠게 몰아쉬는 이 더딘 일을 무던히 반복하고 있다.

이 단순한 호흡과 걷기의 무한 반복을 지켜보며, 또 한 발자국 떨어져 이 전체적인 상황을 바라본다. 그런데 이 모든 상황 속에서도 그 춥고 시리고 힘든 불편감과 고통의 느낌들이 저기 남의 얘기처럼 저만치 떨어져 있다. 힘든 상황과 나 자신 사이에 어떤 거리감, 공간감이 놓여 있다. 힘들고 춥긴 한데 그것이 내 문제가 아니라 거기 그런 한 상황, 한 존재가 다만 걷고 있을 뿐이다. 손과 손목 부분의 시린 느낌이 가장 강하게 보인다.

계속해서 천천히 아주 천천히, 아마도 내 생애에서 가장 느린 걸음으로 한 걸음 한 걸음 저어가고 있다. 조금씩 어두커니 서광이 밝아온다. 역시나 날이 밝아도 기존의 예상 가능하던 그런 밝아옴이 아니다. 보통 이곳은 새벽부터 점심 전까지는 구름 한 점 없는 티 없이 맑은 하늘, 그 푸르른 색감을 도저히 흉내 낼 수도 표현할 수도 없을 만큼 청명한 하늘을 보곤 했는데 오늘은 신명부터 온통 안개로 뒤덮여 있다. 저 먼 설산이 평일 오후보다도 더 안 보인다.

 

시야가 좁다. 먹먹한 구름과 음음한 하늘, 서릿바람과 된추위가 전부다. 처음 여행을 계획할 때, 내 목적은 칼라파타르에 있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다른 날들은 좀 날씨가 좋지 않을지라도 칼라파타르에 오르는 날 만큼은 화창해지기를 바랐다. 심지어 칼라파타르 오르는 날 상황이 좋지 않으면 며칠을 더 묵더라도 이곳의 청명한 풍광만은 놓치고 싶지 않았다. 그런데 지금까지 약 7일을 걸어오는 동안 단 하루도 흐리거나 궂은 날씨가 없더니 바로 오늘, 어제 오후까지만 해도 그렇게 투명하던 하늘이, 거짓말처럼 푹 꺼져 버리는 게 아닌가. 이게 무슨 운명의 장난이란 말인가! 그냥 칼라파타르 정상에 올라앉아 와락 울어버려야 할 바로 그 최악의 상황을 맞은 것이다.

그런데다가 추워 죽겠다. 장갑이 얇은데다가 짧아서 손목까지 덮어주지 못해 칼라파타르에서 손목을 움직이는데 완전히 얼어붙었다. 이 심각한 통증! 이게 뭐람! 하늘도 무심하시지.

아! 그러나 이 최악의 상황 조건이 별 문제가 되지 않는다. 거기 그냥 그런 상황이, 가치중립적인 그저 하나의 상황이 놓여 있을 뿐이다. 좋고 나쁜 아무런 분별이 붙을 이유가 없는 그저 자연스러운 하루가 이어지고 있을 뿐이다.

 

칼라파타르가 내게 부여하던 하나의 상징체계가 무너지고 있다. 칼라파타르, 그 이름이 내게 주던 상징성이 무너진 자리에 그저 지금 이 순간이라는 자리와, 이 쿰부히말 전체의 설산들이 나아가 이 우주 전체의 모든 공간들의 절대성과 신비함이 들어선다.

칼라파타르는 어제의 그 낭카르창과 다르지 않고, 저 아래의 고락샵과 다르지 않으며, 남체나 루클라, 카투만두나 아니 매일 오르내리던 우리 절 이름 없고 길도 없는 뒷산 오솔길과 다르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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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전한 신비의 순간, 완벽한 날들

 

받아들임과 온전한 수용이라는 것이 어떤 명상의 방법이라거나 마음으로 억지로 받아들여 인정해 주는 그런 부자연스러운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그저 지금 이 순간 숨을 쉬듯, 구름이 흘러가듯, 자연스럽게 이 모든 상황이 수용되고 받아들여지는 그런 무위(無爲)의 어떤 것이 아닌가.

모든 순간은 아름답다. 모든 날씨는 담염하다. 모든 곳이 칼라파타르요, 쿰부이고 히말라야다. 모든 순간이 더 이상 자유로울 수 없는 샨티, 평화로움 그 자체다.

언제나 우리 삶에는 매 순간 완전하고도 완벽한 날들, 순간들이 계속되고 있다. 아무리 궂은 날씨라고 하더라도, 내 계획과는 완전히 어긋나는 일들이 일어난다고 할지라도 사실 그 모든 일들, 사건과 날들은 나에게 있어 최고의 순간들이다. 내게 주어진, 나를 위해 정확하고도 정교하게 만들어진 더 큰 질서의 이치대로 내가 바로 그 자리에 바로 그 순간 놓이게 된 것이다!

 

나를 위해 이 우주에서 준비해 놓은 엄청난 축제요, 선물들이 매 순간 내 앞에 펼쳐지고 있다. 이 얼마나 엄청난 일인가. 이 얼마나 멋진 일인가! 우주는 언제나 나를 위해 대 법계의 조화로운 선율을 소려하게 연주하고 있다. 그 음악은 단지 귀로만 들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눈으로도, 귀․코․혀․몸․뜻으로 온 존재로써 듣고 볼 수 있는 소리 너머의 소리요, 연주 너머의 연주다. 이것은 완전한 긍정의 세계다. 완전히 새로운 차원의 순려한 세계인 것이다.

우리는 이 드넓은 세계 속에서 언제나 충만한 사랑과 감사, 그리고 만족과 지혜로써 살아갈 수도 있고, 그와는 반대로 바늘 하나 꽂을 자리도 없는 좁아터진 암막한 세계 속에서 허우적거릴 수도 있다. 그 모든 것은 내 밖에 있는 세계의 문제가 아니라 내 안의 자각(自覺)의 문제다.

세계는, 우주는, 상황은 아무런 잘못이 없다. 심지어 나 자신에게도 아무런 문제는 없다. 거기 세계가 있고, 삶이 있고, 매일매일 벌어지는 사건들이 있으며, 그 속에 어떤 한 존재가 우주적인 흐름을 타고, 우주의 완전한 도움과 보살핌을 받으며 무한한 자비로써 살려지고 있다. 물론 우리는 그 존재에게 ‘나’ 혹은 ‘너’라고 이름 붙이기를 좋아한다. 또한 그 ‘나’가 거기 있는 자연스럽고도 합당한 하나의 상황에 좋거니 나쁘거니, 옳거니 그르거니 하고 분별과 해석을 붙인다. 그렇게 붙인 해석에 스스로 얽매여 집착하거나 혐오하거나, 붙잡으려 애쓰거나 버리려 애쓰면서 공연히 문제를 만들어내며 살아가고 있을 뿐이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계의 실상이다. 세상은 언제나 있는 그대로다. 모든 것이 있는 그대로 있어야 할 바로 그 곳에 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나’라는 아상은 있는 그대로를 있는 그대로 보지 못하고 자기 색안경에 걸러 왜곡해서 본다. 그러면서부터 모든 문제가 시작된다.

진리는 쉽고도 단순한 곳에 있다. 깨달은 각자(覺者), 인류의 성인, 그들은 그 단순함을 깨쳐 본 것이다. 즉 그들과 우리의 차이점은 한 가지다. 그들은 있는 그대로를 있는 그대로 보고, 우리는 있는 그대로를 자기 식대로 왜곡해서 볼 뿐이다. 그래서 결국 삶의 문제는 다시 ‘보는(觀)’ 문제로 되돌아온다.

인식의 문제, 자각의 문제, 깨어있음의 문제, 올바로 ‘보는’ 문제, 그것이야말로 온전한 삶을 위한 조건의 모든 것이다. 올바로 볼 때 모든 문제는 더 이상 문제가 아니다. 올바로 보는 순간 이 우주는 당신 앞에 본연의 무한한 자비와 평화, 경외와 참된 지혜를 보여 줄 것이다.

 

우리가 해야 할 것은 바로 이 ‘올바로 보는’ 것이 전부다. 그것이 바로 불교에서 최종적인 깨달음을 위한 가장 중요한 여덟 가지 길의 첫 번째인 ‘정견(正見)’이다. 보되 치우침 없이, 집착 없이, 분별과 차별과 해석과 나뉨 없이 있는 그대로의 실상을 있는 그대로 보는 것이다. 그랬을 때 이 우주는 어느 하나 빼놓지 않고 낱낱이 실상이요, 진실이 되고, 진리가 된다. 그 어떤 모습도 진리의 모습, 실상이 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법화경』의 제법실상(諸法實相)의 이치다.

그리고 바로 그 ‘보는’ 문제를 지적하면서 ‘바로 보는 길’을 제시하는 모든 것이 바로 수행법이요, 명상의 길이다. 그것이 관(觀)이며, 지관(止觀)이자 정혜(定慧)이고, 위빠사나이며, 모든 수행법이 이 ‘보는 방법’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지금 이 순간 나의 보는 방식, 거기에 삶의 모든 것이 달려 있다. 거기에 내 전부를 걸라. 돈에 내 삶의 전부를 걸 의미가 있을까? 노후 준비에 내 청춘을 다 바칠 이유가 있을까? 명예, 권력, 지위, 사랑, 소유에 내 삶을 전부 걸기에는 무언가 부족하지 않은가! 바로 여기 있다. 그토록 찾아 왔던 내 삶의 전부를 걸 바로 그것이 이것이다. 대장부는 바로 이것에 삶을 건다. ‘지금 여기’에.

내 삶의 전부를 바로 지금 이 순간의 ‘바라봄’에 건다는 것이야말로 내게 주어진 삶을 완전한 책임감과 온전한 지혜로 살아가는 것이다. ‘지금 여기’야말로 모든 삶의 원천이요, 에너지의 근원이고, 진실을 발견할 유일한 통로다.

‘지금 여기’에 모든 것이 달려 있다. 이미 지나간 과거도 ‘지금 여기’에 있으며, 아직 오지 않은 미래 또한 ‘지금 여기’에 다 있다. 이것은 양자물리학에서도 밝혀낸 것이기도 하다. ‘지금 이 순간’의 봄이 내 삶의 모든 것을 결정한다.

 

내 미래를 알고 싶은가? 지금 하고 있는 일이 잘 될 것인가, 망할 것인가, 지금 이 사업을 계속 확장할 수 있을까, 나의 명예와 지위가 얼마나 더 올라 갈 것인가, 그 모든 것은 삶을 살고 있는 ‘바로 지금 이 순간’을 어떻게 사느냐에 달려 있다. 다시 말해 지금 이 순간을 어떻게 ‘보느냐’, 어떻게 자각과 깨어있음으로 지금 여기를 살아가고 있느냐에 전적으로 달려 있다. 현재가 모든 미래를 만들어내기 때문이다.

내 삶의 창조자는 ‘지금 여기’다. 바로 보는 순간순간이 늘어갈수록 우리의 삶은 생기를 찾고 잃어버린 창조성의 근원을 찾으며, 지혜와 사랑이 삶을 통해 저절로 춤추게 됨을 경험한다. 그것은 직접 맛본 사람만이 알 수 있는 생생한 자각의 세계다. 결코 허황되거나 형이상학적이라거나 뜬구름 잡는 식의 말을 위한 말이 아니다. 이것은 신비주의가 아니라 지금 여기의 생생한 현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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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라파타르 롯지의 아침 풍경

 

칼라파타르 바위 산 꼭대기, 바람 잔잔한 바위 틈 사이에 앉아 숨을 돌린다. 바위짬 사이로 간간이 불어오는 칼바람을 온 몸으로, 온 감각으로 삼킨다. 이것이 지금 여기의 생생한 현실이요, 이 평범함 속에 비범함이 있고, 이 피부에 와 닿는 현실감 속에서 삶의 신비는 피어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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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전히 바람은 차다. 제 몸에서 나온 손과 손목을 제 몸이 알아서 거둔다. 몸이 손을 품자 차차 따뜻한 온기가 사랑처럼 일어나 언 손목을 녹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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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상에 오르니 그래도 외국인 여행자들이 몇몇 눈에 띈다. 에베레스트가 안 보인다고 이놈의 구름과 날씨가 된통 욕을 얻어먹고 있다. 그나마 가까운 설산들은 날이 밝으면서 제법 희뿌옇게나마 그 뒤태를 내비쳐 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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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라오던 중 연세가 지극하신 한국인 어르신 한 분은 거의 100여 미터를 남겨두고 되돌아 가셨다고 한다. 2주에서 3주 정도의 긴 시간 동안, 그것도 많은 돈을 들이고 많은 준비를 한 끝에, 아마도 최소 1~2년 이상은 준비한 끝에 올라오셨을 칼라파타르였을 터다. 그런데 그 마지막 100미터를 남겨두고 돌아간다는 것이 상상이 되는가? ‘그 정도면 거기까지 힘들여 갔는데 조금 더 힘내서 올라가지’ 싶은 생각이 들 것이다. 그러나 현실은, 칼라파타르의 현실은 그렇지 않다. 그 어르신의 되돌린 발걸음이 십분 이해가 되고도 남음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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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고도에서 오들오들 떨고 있노라니 따뜻한 차 한 잔 생각이 간절하다. 어떻게 올라 온 칼라파타르인데 한참 앉아 머물다 내려가야지 싶어도 이 추위와 바람을 몸이 견뎌 내지를 못하고 내려가라는 신호를 보낸다. 터벅터벅 묵직하게 최대한 느릿느릿 올라오던 그 길을, 내려갈 때는 너무도 가벼운 발걸음으로 내딛는다. 날이 밝으니 한결 걷기가 수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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롯지로 들어서니 힘이 빠져 축 처져 있는 몸이 더 생생히 느껴진다. 롯지의 아침은 늘 그렇듯 분주하다. 칼라파타르를 다녀 온 사람, 아예 날씨를 보고 포기한 사람, 이미 어제 낮에 다녀오고 하산을 준비하는 사람, 내친김에 에베레스트 베이스캠프까지 다녀오려고 준비하는 사람, 그리고 새벽부터 걸어서 로부체에서 막 도착한 사람에, 아침을 먹는 사람들까지 겹쳐서 롯지 안은 시장통을 방불케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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빵 한 조각 시켜 먹는 것이 이렇게 복잡할 줄은 몰랐다. 포터가 있을 때는 주로 포터가 알아서 주문해 주고 배달까지 해 줄 뿐만 아니라 가격 결산까지도 포터와 모든 것을 끝낸다. 롯지 또한 포터 이름으로 주문 받고 계산하고 모든 것을 포터 책임제로 운영하고 있는 듯 보인다. 어떤 롯지는 손님을 데리고 오면 포터에게 공짜로 재워주고 식사도 제공을 한다는데, 요즘 들어 그 원칙이 깨지면서 포터에게도 현지인 가격으로 저렴하게나마 식사비를 받는다고 한다. 포터들은 식당에서 돈을 지불하고 또 소개시켜 준 여행사에 얼마씩 떼이고 이래저래 직접 받는 돈은 그리 많지 않아 보인다.

 

다행인 건지 오히려 포터들에게는 더 큰 짐인지 몰라도 마오이스트(Maoist, 마오쩌뚱주의, 모택동사상)가 집권을 하고부터는 포터들도 똑같은 사람인데 식당 방에서 자지 말고 무조건 트레커들과 똑같이 도미토리나 방에서 자도록 해야 한다고 정부 방침으로 못을 박았다고 한다. 물론 좋은 말이고, 그래야 하는데, 아직은 시행 초기라 방도 더 부족하고, 포터들도 그만큼 방값까지 더 내야 하는 부담이 가중되다 보니 아직까지는 암암리에 예전처럼 그냥 식당 방에서 다함께 자는 곳이 많다고 한다.

 

포터 지텐이 방을 잡는다고 로부체로 내려가고 없으니 아침 밥 하나 시켜 먹기가 너무 어렵다. 에베레스트를 등반하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꼭 들르는 곳인데 롯지는 몇 개 없다 보니 특히 이런 아침은 더없이 번라한데다가, 모든 시스템을 포터와 가이드를 중심으로 하다 보니 여행자가 직접 주문하고 누군지 확인해서 음식을 받아내고, 지텐이 하던 내 장부를 찾아 체크하는 그 단순한 일에도 시행착오가 생긴다.

이처럼 포터는 꼭 짐만 들어주는 것이 아니라 롯지나 식당에서도 큰 몫을 하고 있고, 특히 비상 조난 시나 갑작스런 고산병, 혹은 길을 잘못 드는 데서 오는 어려움 등 많은 부분을 보살펴주고 있는 것이다. 고락샵 롯지의 분주한 아침 시간이 지텐에 대한 고마움을 더욱 느끼게 해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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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 식사를 어렵게 마치고 한참을 롯지에 앉아 몸도 녹이고, 쉬고 있다. 이후 일정은 그저 내리막길로 2시간 남짓 거리에 있는 로부체까지만 가서 묵으면 된다. 내일 또한 로부체에서 내리막으로 3시간 거리의 종라까지만 가면 되는 비교적 가벼운 코스다. 대부분의 여행자들이 칼라파타르를 오르고 난 뒤 체력을 비축하기 위해서, 또 그 다음날 있을 촐라패스와 이어지는 고쿄리에 대한 휴식 내지는 체력 안배 차원으로 그렇게 가벼운 코스를 잡는다고 하는 일상적인 순서를 따른 것이다.

 

걸을 때 정신은 우주와 연결된다

 

아침 식사 후 느긋하게 고락샵 롯지를 출발한다. 오늘은 하루 종일 궂은 날씨가 계속되려나 보다. 그래도 날이 밝고 나니 궂은 날씨라고 해야 구름이 끼어있는 정도지, 비나 눈이 오는 것은 아니고 낮시간부터는 그리 춥지도 않아 오히려 걷기에는 제격인 날씨라고 볼 수도 있겠다. 로부체까지의 짧은 내리막길이 아쉽다.

이렇게 산에 와서 걷다 보니 오전의 걷는 시간이 오후의 쉬는 시간보다 더 간절하고, 더 생기 넘치며, 설레임으로 가득한 시간이 된다. 오히려 오후가 되어 쉬는 시간이 되면 그 다음날 있을 일정에 대한 기대로 부풀어 오른다. 그래서 오후에도 가까이 마을길이나마 산책의 길을 걷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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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에 와서 더욱 걷는다는 것에 대해 많은 생각을 하게 된다. 걷는다는 것이야말로 그 자체로 완전한 행이 아닐까. 걷는 그 순간에 우리는 완전히 걸음 속에서 존재한다. 가부좌를 틀고 앉아 있는 것 못지않게 오랜 수행자들이 왜 그토록 걷기 수행, 경행(經行)을 강조했는지를 알 것 같다. 마음과 몸이 둘이 아니다 보니 몸의 자세에서 마음의 집중이며 명상의 힘이 크게 좌우될 수밖에 없다. 그래서 될 수 있으면 비뚤게 앉아 있기보다는 꼿꼿하게 가부좌를 틀고 앉아 허리를 곧게 펴고 앉는 것이다. 그런데 이런 결가부좌 못지않게 많은 수행자들은 걷기 수행을 강조해 왔다. 걷는 행위, 그 자체만으로도 오롯한 정신의 기틀이 서게 되기 때문이다.

명상할 시간이 없다면 될 수 있는 한 많이 걸으라. 온갖 생각의 짐을 짊어지고 걷지 말고 그냥 걸으라. 생각과 함께 걷는 것이 아니라 다만 홀로 걸으라. 그렇게 텅 빈 걸음을 내디딜 때 비로소 이 우주와의 진정한 관계성이 회복되고 지난 시간을 살아 온 나의 삶이 분명하게 보여 지기 시작할 것이다. 걸으며 애써 수행이나 명상을 하려고 애쓸 필요는 없다. 무언가를 자주 하려는, 성취해 내려는 그런 마음으로 인위적인 ‘걷기 명상’을 해서는 안 된다. ‘걷기 명상’은 진정한 명상이 아니요, 오직 다만 ‘걸을 뿐’이 되었을 때만이 참된 명상과 연결될 수 있다.

 

그저 자연스럽게 걸으면 된다. 혹시 걷는 동안 부자연스러운 생각들, 기억들, 계획들이 떠오른다면 그 순간 걸음은 평화를 잃게 되고, 그렇게 되면 우리의 의식은 곧장 발길을 돌려 집으로, 회사로, 컴퓨터 앞으로, 무언가 일거리 앞으로 나아가게 될 것이다. 걸으면서는 그저 걷기 그 자체로 걸으면 된다. 걷는 것 자체가 목적이 되도록 하라. 그러나 생각이 끼어드는 순간 걷는 목적은 저만큼 달아나고 곧장 또 다른 목적이 떠오를 것이다. 바로 그것을 주의하면서 걸으면 된다. 올라오는 생각이나 기억, 계획, 즉 과거와 미래들을 ‘지금 여기의 걷기’로 되돌려 놓는 것, 그것이 걷기 명상의 전부다. 다만 걷되 생각에 지배되지 않고, 과거나 미래에 끌려가지 않으며, 오직 텅 빈 걸음을 내딛는 것이다. 그렇게 되었을 때 ‘대지를 맨발로 걸으면 우리의 정신은 우주로 연결된다’는 아메리카 인디언의 말처럼 걷는 그 행위 속에 정신적인 각성과 우주적인 교감이 함께 한다.

어디 그 뿐인가. 걷기는 무엇보다도 가장 기본적으로 몸의 건강을 돕는다. 그야말로 세실 가테프가 그의 책 『걷기의 기적』에서 말한 것처럼 ‘걷기는 완벽한 운동’이다. 가테프는 이렇게 표현하고 있다. ‘걷기는 온몸을 자극하여 인체에 전반적인 영향을 미친다. 몸에 조금만 신경을 써도 모든 계통(호흡계, 신경계, 순환계 등)과 기관(심장, 신경, 폐 등)은 조화를 이루며 작용한다. 불행하게도 가끔 우리는 이런 기관들을 따로 떼어 놓고 생각한다.’

그런가 하면 나빠진 간을 맨발 걷기로 완치한 뒤 걷기 예찬론자가 된 박동창씨는 그의 책 ‘맨발로 걷는 즐거움’에서 맨발 걷기의 효과를 무수히 설파해 놓았다. 그 가운데 약간을 요약 정리해 보면 다음과 같다. ‘맨발로 걷게 되면 금새 무좀도 사라지고, 창백했던 발에 선홍빛 혈색이 돌게 된다. 또한 걸을 때 발을 땅에 디디면 혈관이 수축과 팽창을 반복하게 되어 혈액펌핑 기능이 강화되고, 그래서 통상 발은 제2의 심장이라 일컬어지기도 한다. 걷기는 혈액순환을 위한 가장 쉽고도 확실한 방법이다. 걷기는 장기의 활동 증진을 가져와 우리 몸에 오랫동안 쌓여 있던 침전물과 독소, 노폐물들을 배출시키고 배변활동도 증가시킨다. 또한 성기능 저하와 조루 현상도 어느 정도 해결해 주고 생리불순의 여성들이 걷기로 생리현상이 재개되었다는 보고도 있다. 또한 동맥경화 등의 심혈관 질환에도 효과를 보이며 콜레스테롤 수치 개선에 효과가 월등하다. 또한 걷기의 또 다른 괄목할 만한 치유효과는 간 기능 개선이다. 간암으로 1개월의 여생을 선고받은 한 노인은 맨발 걷기를 통해 간을 완벽히 재생시키기도 했다. 또한 세계당뇨학회의 회장은 당뇨병 극복의 가장 권장할 만한 운동으로 걷기를 꼽았다.’

 

이처럼 걷기는 정신의 건강 뿐 아니라 몸의 건강에도 뛰어난 효과를 보인다고 한다. 요즘 걷기로 몸을 치료했다는 보고들이 잇따르자 전 세계적으로 걷기 열풍이 불고 있다. 우리 나라에도 제주도 올레길, 지리산 둘레길과도 같은 걷기를 위한 트레킹 코스가 제법 유행하고 있기도 하다.

꼭 지리산이나 제주도, 혹은 히말라야가 아니라도 좋다. 출퇴근길을 호젓하게 걷는 시간으로 바꿀 수도 있고, 매일 같이 퇴근 후 술을 마시기 보다 뒷 산을 산책해도 좋을 것이다. 만약 그렇게 된다면 우리는 그 작은 변화 속에서 어쩌면 전혀 다른 새로운 차원으로 도약을 하게 될 지도 모른다. 그만큼 걷는다는 것은 또 다른 차원으로의 여행이 될 수도 있다.

‘걷는 즐거움’ 그 거연한 시간 속에서 로부체 숙소로 향한다. 가만 보니 구름 속 설산 또한 색다른 아름다움이 있다. 길옆으로 투명한 설산 계곡의 물이 흐르고 물소리가 귓전을 맑혀준다. 발아래 흙길, 돌길의 투박한 촉감이 발바닥을 간지럽힌다.

 

아! 이 순간처럼만 삶의 모든 순간을 살아낼 수 있다면 더 이상 특별한 삶의 방식 같은 것은 필요조차 없을 것이다. 이런 시간은 더욱 빠르게 흐른다. 아니 시간 자체가 사라진다. 잠깐, 아주 잠깐 동안을 걸은 것 같은데 벌써 로부체 롯지에 도착한다.

지텐이 미리 잡아 놓은 싱글 룸에서 슬리퍼를 갈아 신고 숙소 앞을 흐르는 맑은 개울가로 나가 발을 담근다. 모처럼 좀 씻으려는데 완전히 저 설산의 눈이 방금 녹아 흐른 것처럼 그 쨍한 시림을 말로 표현할 수가 없다. ‘악악’ 소리까지 질러대며 씻고 있자니 곁에 앉아 있던 포터와 짐꾼들이 쳐다보며 웃어댄다. 이 찬물을 두 손 가득 퍼 담아 휙 하고 던졌더니 도망치고 웃고 반격을 준비하느라 한바탕 웃음꽃이 피어난다. 씻고 났더니 정신까지 번쩍 든다. 또 하루 평화로운 오후가 음악처럼 흐른다.

 

[히말라야, 내가 작아지는 즐거움](불광출판사, 법상) 중에서

Posted by 법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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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1011_02 순례를 다녀왔더니 사람들이 묻는다. 히말라야 그 높은 고지까지 갔다 오면서 왜 추억이 될 만한 작은 조약돌 하나 가져오지 않았느냐고, 아니면 갠지스강에서 물 한 방울 담아 오지 않았느냐고. 그러나 그곳은 무언가를 가져오거나, 얻어 오는 곳이 아니라 내려놓고 오는 곳이다. 그래서 성지를 여행하는 여행자는 언제나 비우고 비워 작아져 돌아오지, 무언가를 키우고 얻어서 돌아오는 것이 아니다.
  바로 그 순간, 우리는 여행을 통해 자기 자신답게 사는 길이 무엇인지를 깨닫게 되고, 막막한 삶을 어떻게 살아나가야 할지에 대해 내 안의 신께 직접 답변을 듣게 되기도 한다. 모든 해답은 내 안에있다. 끊임없이 에고의 확장을 위해 살아가는 일상에서는 그 답을 찾을 수 없다가 비로소 여행을 떠나 길 위를 걷는 과정 속에서 ‘내가 작아지는 즐거움’과 함께 삶의 해답을 찾는 방법을 깨닫게 되는 것이다.
  이처럼 여행은 우리가 삶에서 깨달아야 할 귀한 선물을 얻게 해준다. 우린여행자가 되는 동시에 순례자가 되고 구도자가 된다. 특히 홀로 걷는 여행은 또랑또랑한 지혜로써 삶을 빛나게 한다. ‘대지를 맨발로 걸으면 우리의 정신은 우주로 연결된다.’고 했던 아메리카인디언의 말처럼 홀로 걷는 그 행위 속에 정신적 각성과 우주적 교감이 형성된다. 그래서일까. 티베트의 위대한 성자 밀라레빠(Milarepa, 1052~1135)는 “여행을 떠나는 것만으로도 깨달음의 반은 성취한 것.”이라는 말을 남기고 히말라야로 떠났다. 히말라야로의 순례는 그에게 깨달음의 원천이었으며, 이 우주속에서 끊임없이돌고 도는 윤회라는 여행의 종지부와도 같았다. 그는 괴로워하는 이들에게 “모든 것을 버리고 히말라야로 떠나라.”고 외친다.
  여행을 통해 자신을 비우고, 삶의 의미를 깨닫고자 하는 여행자라면 ‘얻어 오는 여행’이 아닌 ‘비우고 오는 여행’을 권하고싶다. 그러려면 여행지에 대한 정보를 배우고, 남들이 어떻게 여행했는지를 얻어 듣고, 온갖 여행기와 전문서적들을 탐구하면서 지식을 쌓는 방식의 준비는  별도움이 되지 않는다. 일체 모든 것을 내려놓고, 아무것도 모르고 떠나되, 다만 여행지에서 만나게 될 모든 것을 향해 나를 활짝 열어둘 수 있는 천진한 마음을 챙기면 된다. 기존에 알고 있던 지식에 걸러서 해석하는 것이 아니라 마치 어린아이가 세상을 처음 경험하듯 청연한 눈으로 초롱초롱 여행지를 경험하고 느끼며 새롭게 바라보는 마음이 필요하다.
  어떤이는 ‘아는 대로 본다’고 했지만, 과연 우리가 무언가를 볼때 ‘아는’ 절차가 반드시 필요할까? 지식이 많다는 것은 그것을 볼때 지식으로 걸러 본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것은 오히려 있는 그대로의 대상을 제한한다. 드넓은 자유로움에 족쇄를 채우는 것이다. 지식과 정보는과거 일 뿐이지만 ‘바라봄’은 오직 지금 여기의 생생한 현재다. 우리가 그동안 해왔던 여행이 이러한 지식과 정보에 기반을둔 ‘아는’ 여행, 즉 과거로의 여행이 아니었던가. 지식사회에서는 ‘아는 만큼 본다’는  것이 옳을지 모르겠지만 자유로운 순례자에게는 그저 ‘보는 만큼 느끼는 것’일뿐이다. 말을 잊게 하는 여행지의 풍경속에서그저 말과 생각을 잊은 채 그것과 하나되어 침묵할 수 있을 뿐이다.h1011_03
  여행지에서 홀로 오래도록 걷다보면 저절로 생각이 멎는 것을 경험한다. 마음을 비우고 떠난 여행지는 매순간이 새롭고, 모든 것이 걸러지지 않은 첫 ‘봄’이기 때문이다. 그렇게 텅빈 열린 마음으로 새롭게 바라볼 때 비로소 삶에 대해, 나 자신에대해 전체적으로 볼 수 있는 적력한 자각과 통찰이 열린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여행을 통해 새로운 삶의 가능성에 눈 뜨고, 비로소 어떻게 살아야하는가에 대한 자기다운 독자적 삶의 방식을 깨닫곤 하는 것이 아닐까.
  청명한 가을이다. 어떤가. 홀로여행을 떠나 보는 것이. 지리산도 좋고, 올레길도  좋고, 산사의숲길도좋으며, 인도도, 히말라야도좋다. 한사람의 순례자가 되어 홀로 고요한 내면으로의 여행을 떠나보자..

- 행복한 동행 11월호, /특집/여행의 기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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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부체 가는 길]

고도가 오르면 물가도 오른다

조금 힘들긴 하겠지만 고락샵에 도미토리를 미리 잡아 놓았으니 서두를 것 없이 로부체에서 천천히 점심을 먹고 느긋하게 출발을 하기로 한다.

로부체 음식값은 고락샵과 함께 이 에베레스트 지역 일대에서 가장 높다. 150~250루피(70루피=1천원)면 먹던 음식 값이 300~400루피까지 상승을 했고, 양동이 2개를 주는 더운 물 샤워도 남체에서는 200루피 하던 것이 여기에서는 400루피로 뛰는 등 다른 모든 가격들도 두 배 이상씩 뛰었다. 특히 전기는 히말라야 고지대의 열악한 전기 사정상 어쩔 수 없어 카메라 베터리 충전도 남체에서는 100루피 하던 것이 무려 400루피로 네 배나 뛰었고, 각종 따뜻한 음료들도 한 잔에 20~30루피 하던 것들이 죄다 70~90루피로 뛰었다.

[로부체 롯지, 트레커들의 걸망, 이것 하나면 2주간의 트레킹도 충분하다]

그렇다고 한들 이것을 가지고 비싸다고 투정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직접 여기까지 올라온 사람들의 입에서 어떻게 그런 말이 나오겠는가. 여행자들은 여기까지 올라오는 것만으로도 제 몸 가누기 힘들 정도이고, 그나마 올라온 사람은 행운이며, 많은 사람들이 여기까지도 못 오고 고산병에 서둘러 내려가기 바쁜 사정을 생각했을 때, 이곳까지 그 무거운 짐을 짊어지고 올라오는 짐꾼들의 노고에 비한다면 그리 비싸다고 할 수 없는 가격이다. 5,000고지가 넘는 이 척박한 곳에서 몸을 녹이는 따뜻한 차 한 잔을 마시고, 맛있는 음식을 먹을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그저 감사할 뿐이다.

때때로 맛깔스런 달밧(네팔의 주식, 한국의 백반처럼 밥과 커리, 반찬 등이 나와 손으로 비벼먹는 음식)을 만날 때면 이 높은 곳에서 이런 호사를 누릴 수 있다는 사실 자체만으로도 감격스럽기까지 하다.

[로부체 롯지 풍경]

딩보체 이후로 모든 전기는 완전히 태양전지에 의존한다. 그러다 보니 모든 롯지며 식당이 늘 어둡다. 롯지 방에는 당연히 전기가 들어오지 않아 저녁을 먹고 나면 방에 돌아와 그윽한 어둠을 즐기기 제격이다. 이곳에서의 밤은 그야말로 밤 같고 밤답다. 밤이 밤 같아야 하는데, 우리들의 밤은 오히려 낮보다 더 현란한 빛의 소음으로 굉굉하다. 두 눈도, 온 몸의 감각도 밤에는 깊은 어둠 속에서 휴식을 취할 수 있어야 한다. 어둔 밤, 소리와 빛이 사라지는 순간, 비로소 우리는 자연의 연유한 내성과 달빛 별빛의 또글또글한 깊이를 명상하듯 온전히 느낄 수 있는 것이다. 가뭇가뭇 잊고 지냈던 무수한 밤의 이야기를 비로소 여기에서 새록새록 떠올리며 깊은 어둠과 만귀잠잠의 침묵을 호사롭게 누리고 있다.

마을들도 밤이면 모두 최소한의 불만을 밝히기 때문에 저녁을 먹고 허영거리며 산책을 나가 하늘에 별을 보는 재미가 아주 그만이다. 인위적인 전깃불이며 가로등이 많은 곳에서는 별들이 이처럼 정채롭게 반짝일 수가 없다.

[로부체 롯지, 이불을 따스한 햇살에 널어 말리고 있다]

하나의 방식일 뿐, 더 나은 방식은 아니다

점심을 먹고 나오니 기분이 한결 상쾌하다. 지텐은 밥을 먹자마자 먼저 가서 방을 잡고 기다리겠다고 고락샵으로 서둘러 출발을 했고, 나는 천천히 이 시간을 즐기며 슬겅슬겅 걸어 오른다. 걷기 위해, 혹은 도착하기 위해 걷는 것이 아니라, 그저 매 순간 그 자리에서 현존하기 위해 걷다 보니 걷다 서다 앉기도 하고 때로는 물가 풀섶에 드러눕기도 하며 걷는 듯 마는 듯 제자리걸음의 속도로 저어간다. 어차피 빨리 도착해 봐야 거기서 또 오후 시간을 산책하게 될 터이니 그저 가볍게 산책한다는 마음으로 고락샵을 향해 다박거리며 걷는다.

[로부체 롯지의 풍경, 한 무리의 순례자들이 로부체를 지나고 있다]

이 텅 빈 길 위로 때때로 짐꾼들과 야크가 뒤섞여 한가로운 오후를 거닐고 있다. 맑은 물이 흐르고, 구름도 유유한한하게 흘러가고, 내 발걸음도 마음도 함께 따라 흐른다. 모든 것이 흐르고 흐르고 흘러간다. 잠시도 머물러 주저앉아 있는 것은 없다. 또 언제까지고 머물러 있을 수 있는 것도 이 지구별에는 없다. 모든 것은 끊임없이 변하는 가운데 놓여 있을 뿐!

그 어떤 것도 언제까지고 멈춰 있을 수는 없는 것이다. 이렇게 끊임없이 흘러가는 세월 속에서 유난히 그 흐름을 멈추려 하고 붙잡아 두려 애쓰는 것이 하나 있으니, 그것이 바로 인간의 마음이다.

잠시도 쉬지 않고 역동적으로 흐르며 변해가는 세월 속에서 사람들의 마음은 모든 것을 멈추고 싶어 안달이다. 내 사랑도, 내 소유도, 내 생명도, 내 젊음도, 내 자식도, 내 돈과 명예, 이 모든 것들을 어디로 달아나지 못하도록 꽉 움켜쥔 채 도무지 놓아주려 하지 않는다. 그러나 세상 이치가 놓아주려 하지 않는다고 변화의 이치를 거부할 수는 없으니 언젠가 그 모든 것들은 내 곁을 떠날 수밖에 없다.

아무리 꽉 붙잡고 내게서 멈춰 서도록 하고 싶어도 그 어떤 것 하나 영원히 붙잡을 수 있는 것은 없다. 모든 것은 잠시 왔다가 인연이 다하면 그저 그렇게 표연히 흘러갈 뿐이다. 그래서 수많은 성인들의 말씀은 공통적으로 ‘집착하지 말라’ ‘붙잡지 말라’ ‘마음을 비워라’ ‘욕심을 버려라’ ‘변화를 받아들이라’ ‘거부하지 말고 현실을 수용하라’고 하는 것이 아닌가. 그 변화의 흐름을 거부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수용하고 받아들일 때 우리 삶에 매우 의미 있는 중대한 변화와 성숙이 깃드는 것이다.

이렇게 내가 몸담고 살아가던 세상에서 뚝 떨어져 보니 그 속에 살면서는 전혀 볼 수 없었던 것들을 보게 된다. 놓고 산다, 비우고 산다 하면서도 나도 모르는 사이에 붙잡게 되는 것들, 집착하고 있던 것들, 수많은 욕심의 실체들이 미세하게 숨겨져 있었다는 사실이 드러난다.

가만 생각해 보면 비운다고 하고 어느 한 가지 집착을 비우면 그 비워진 자리에 나도 모르는 사이에 아주 미묘한 또 다른 것들이 들어 차 있는 것을 보게 된다. 예를 들어 ‘집착과 소유를 비우고 살자’ 하는 생각을 실천하는 순간 물질적인 소유를 어느 정도 버린 그 틈으로 ‘나는 잘 비우고 사는 사람이다’ ‘청빈과 가난의 정신을 실천하는 사람이다’ 하는 마음이 생겨나고, 나아가 그래서 ‘나는 너희들 꽉 채우고 욕심 부리며 사는 사람들과는 달라’ 하는 일종의 우월감 같은 또 다른 채움과 욕심과 아집이 깃드는 것이다. 또한 ‘마음을 비우고 명상을 실천하자’ 하는 생각과 실천의 바탕에는 나는 잘난 수행자라는, 명상가라는 그렇기에 번뇌와 망상으로 물든 일반인들과는 다르다는 또 다른 번뇌 망상이 자리 잡곤 하는 것이다.

사실 이것은 어쩌면 더 큰 욕심이며, 더 큰 아상일 뿐, 전혀 수행과 비움이라는 아름다운 전통에는 완전히 반하는 일이 아닌가. 이런 어리석음들이 그 동안 내 삶에서 벌어진 무명(無明)의 연극이었다는 것이 생생하게 드러나면서 나 자신을 발가벗기고 있다.

지혜로운 이는 옳거나 그른 것이 없다. 자신이 가는 길이 다른 길 보다 더 옳거나 더 나은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안다. 남들보다 더 잘 수행해 나간다거나, 더 영적으로 성숙했다거나, 더 지혜롭다는 생각을 하고 있다면 오히려 그 생각은 곧 영적인 미숙함을 드러내는 생각일 뿐이다. 아무리 타인들보다 더 옳고 바르고 청정한 길을 간다고 하더라도 그로인해 그렇지 못한 사람들을 폄하하는 마음이 생겨난다면 그것은 참된 길이 아니다. 선각자는 자신이 선택한 길이 하나의 선택일 뿐임을 아는 것일 뿐이지, 남들이 선택한 것보다 더 나은 길이거나, 옳은 길이라고 여기지는 않는다.

무소유와 청빈을 선택하는 것은 그저 하나의 선택일 뿐이다. 그것이 옳고 부유하게 사는 것은 그르다거나, 청빈하게 사는 나는 잘 사는 것이고 부귀영화를 누리며 사는 사람들은 못 사는 사람이라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전혀 청빈과는 어울리지 않는다. 무소유와 청빈을 선택하되 그것만이 옳은 길이라는 생각은 위험하다. 집착하지 않으며 살되 무집착에도 집착하면 안 된다. 집착을 버리고, 욕망을 버리고 살되 그렇게 사는 것을 우월하다거나, 영적이라거나, 으쓱한 마음으로 여길 필요는 없다. 더욱이 그런 삶이 남들보다 더 현명하고 지혜롭다고 여김으로써 그렇게 살지 못하는 상대방을 낮출 이유는 없는 것이다.

어떤 길도 전적으로 옳거나 그른 길은 없다. 어떤 직업도, 어떤 삶의 방식도, 어떤 종교도, 어떤 가르침이나 이념도 전적으로 옳은 것은 없다. 내 것만이 옳다는 생각이야말로 가장 틀린 생각이다. 내 생각이란 그저 하나의 생각일 뿐이지, 더 옳은 생각인 것은 아니다. 내 종교 또한 그저 하나의 종교일 뿐이지, 유일한 진리인 것은 아니다. 내 삶의 방식 또한 수많은 삶의 방식 가운데 하나일 뿐이지, 가장 우월한 방식인 것은 아니다. 아무리 좋은 가르침일지라도 그것만이 절대라고 생각하고, 그것만이 옳다고 생각하는 순간 그것은 어긋난다. 아무리 훌륭한 가르침도 그것은 그저 하나의 훌륭한 가르침일 뿐이지, 가장 훌륭한 가르침인 것은 아니다.

만약 우리가 부처님을 유일무이한 가장 우월한 성인으로 생각한다면, 그럼으로써 다른 많은 영적 스승들을 그 아래로 깔아뭉개기를 서슴지 않는다면 그것이야말로 부처님을 파멸로 이끄는 것이다. 부처는 우월하거나 열등한 것을 모른다. 비교를 모르고, 판단을 모르고, 선악을 모르며, 높고 낮음을 모른다. 부처는 판단하거나 평가하거나 비교하는 분이 아니라 다만 있는 그대로 관찰하는 분이다. 옳고 그르다고 판단하는 것이 아니라, 다만 그 모든 것을 전체적으로 관찰하실 뿐이다. 관찰에는 분별이 붙지 않는다. 모든 분별과 차별과 평가와 심판을 놓아버린 자리가 바로 부처의 자리이기 때문이다.

이 시대에 가장 필요한 가르침이 바로 여기에 있지 않을까. 세상은 온통 분열되고, 나뉘어 있다. 종교간, 이념간, 국가간, 인종간, 계층간에 온통 차이와 차별과 분열로 치닫고 있다. 이 모든 다툼과 나뉨이 어디에서 왔는가? 그것은 바로 ‘내가 옳다’는 데서 생겨났다. 이 세상 사람들은 ‘옳은 것’을 위해서는 그 어떤 것을 희생시킬지라도 끝까지 쟁취하려는 성향이 있다. 정의를 위해서, 선을 위해서, 옳은 것을 위해서는 상대방을 죽이고, 행복과 풍요와 심지어 목숨을 포기할지라도 끝까지 고수해야 한다고 여긴다.

쉬운 예로 종교전쟁을 보라. 내 종교가 옳다는 생각, 그 하나의 생각이 틀렸다고 생각하는 다른 종교를 향해 총을 겨누고, 심지어 자신의 목숨을 내던지면서까지 그 ‘옳은’ 것을 위해 싸운다. 그리고 우리는 이처럼 옳은 것을 위해 싸우고, 옳은 것을 위해 싸우다 죽고, 옳은 것을 위해 상대방을 죽이는 행위에 대해서는 높이 평가한다.

그러나 옳은 것을 절대적으로 반드시 지켜내려는 생각은 틀렸다. 전적으로 옳은 것은 없기 때문이다. 물론 전적으로 틀린 것도 없다. 두 나라의 전쟁은 자신의 나라 입장에서 보면 언제나 옳다. 양 쪽이 다 자신만이 옳다. 종교전쟁 또한 자신의 종교 입장에서는 언제나 자신이 옳다.

옳고 그르다는 판단은 결코 우리를 평화에 이르게 하지 못한다. 진리는, 옳고 그른 것이 없기 때문이다. 옳고 그르며, 맞고 틀리다는 그 판단 너머에, 무분별의 지켜봄 속에 참된 진리는 움튼다.

반짝이는 삶을 엿보다

맑게 흐르는 빙하 개울을 따라 완만한 오르막을 터벅터벅 천천히 한 시간 남짓 걸어 오르다 보면 이제부터 본격적으로 산을 타고 오르게 된다. 사실 산이랄 것도 없이 언덕을 몇 개 넘으면 되는데 눈에 보이는 사실과 온몸으로 느끼는 느낌이 완전 다르다. 눈에 보이는 것은 야트막한 언덕 몇 개이지만 몸이 느끼는 느낌으로 따진다면 지리산 가파른 노고단을 화엄사부터 걸어 오르는, 혹은 설악산의 오색온천에서부터 대청봉까지 걸어 오를 법한 그런 무게감이 허벅지와 종아리, 그리고 벅찬 호흡에서 느껴진다. 한 무리의 중무장한 트레커들이 줄지어 언덕길을 따라 오르고 있다.

가쁜 발걸음을 잠시 멈추고 고개를 드니, 숨을 거칠게 몰아쉬며 오르는 나와는 전혀 다르게 묵직한 야크들이 평화로이 이 설산과 조화를 이루며 한적하게 풀을 뜯고 있다.

히말라야의 짐꾼들은 여전히 분주한 발걸음을 옮기고 있다. 언덕 위에 오르니 시야가 툭 터지며 장쾌한 풍경이 펼쳐진다. 일찌감치 오르던 트레커들도 힘에 부치는지 잠시 휴식을 취하고 있다.

지도에서 보면 빙하지대라고 표시되어 있는 부분들이 빙하는 다 녹아버리고 속살을 훤히 드러내고 있다. 지구가 더워지고 있다는 것이 높은 곳에서는 더욱더 분명하게 드러난다.

한참을 여유작작하게 길 위에서 흘쩍이다 보니 순례자들의 행렬도 눈에 띄게 뜸해졌다. 거의 모든 여행자들이 새벽 일찍부터 서둘러 점심 전에 그 날의 목적지까지 도착하고 점심 이후에는 롯지에서 가벼운 산책이나 독서를 하며 쉬다보니 이런 늦은 시간에 히말라야의 모든 길은 유벽해진다. 덕분에 이 소적하고 너른 산길을 아무런 간섭도 받지 않은 채 덩그러니 홀로 누리고 있다. 아무리 걸어도 인적이 없다보니 문득 이 적막공산 음음한 행성 위에 나 혼자만 삶을 걷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독존적 외로움이 가슴 한 켠을 스친다. 말 그대로 산공야정(山空野靜). 순간 허우룩하면서도 텅 빈 고독이 내면에 낮게 깔리며 가슴벽을 두드린다.

이 순간의 걸음 걸음이 나를 깊이 깨어나게 하고, 살아있게 만든다. 삶을 진하게 경험한다. 루소는 걷는 여행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내 생애를 통해 그토록 깊이 생각하고, 살아있음을 느끼고, 본연의 내 모습을 되찾았던 적은 없었다. 감히 말하건대, 오로지 내 발로 직접 걸었던 여행을 통해서만이 그 모든 것을 경험할 수 있었다.’ 루소의 말처럼 두 발로 직접 걷는 여행, 그것이야말로 비로소 삶을 진하게 경험하게 해 주며 본연의 자기 자신에게 다가서게 만든다.

언덕길을 따라 걷고 걸어 드디어 칼라파타르 바로 아래 작은 마을 고락샵이 보인다. 서너 개의 롯지가 옹기종기 모여 있고 거대한 산군들이 그 주위를 에워싸고 있다. 도미토리 한켠에 배낭을 풀고 롯지 주변을 유보한다.

[고락샵, 롯지의 저녁식당 풍경]

[칼라파타르 아래 고락샵 한 롯지의 메뉴판]

한 발 한 발 명상 수행을 하듯 저절로 명징함이 발걸음에 묻어난다. 활짝 깨어있다는 표현, 혹은 명징한 알아차림이라는 것이 바로 이런 것인가. 그러고 보면 이곳까지 올라오는 동안 하루하루의 발걸음은 점차 높은 곳으로 고도를 높일수록 점점 느려지곤 했고, 생각 또한 걸음과 같은 속도로 느려져 갔다. 평소 같았으면 생각이 자리 잡고 틀어 앉아 온갖 이야기들을 만들어냈을 내면의 공간이 분주함과 번잡함 대신 깨끗이 비질을 막 끝낸 도량의 뒤뜰처럼 투명해지곤 했다. 그러면서 알 수 없는 깊은 내면의 향기가 감도는 듯한 지미한 단서들이 감지된다. 이번 만행과 순례는 분명 진담한 어떤 것이 아니다.

어둑어둑한 불빛 아래에서 여행자들은 저마다의 이야기들로 시간 가는 줄 모른다. 가볍게 저녁 식사를 마치고 뜰로 나온다. 한 겨울 살을 엘 것 같은 추위가 내면의 저 깊은 곳까지 뚫고 들어오는 것만 같다. 초저녁 도미토리는 기척이 없다. 가방만 던져 놓고 모두들 식당으로 향한다. 덕분에 호젓하고 어두운 매트리스 위에서 아무런 방해도 받지 않은 채 가부좌를 틀고 앉는다.

고락샵의 밤은 어둡다. 롯지 한켠 구석지고 눅눅한 매트리스 위에 한 존재가 그렇게 앉아 있다. 이곳이 그리고 이 순간이 그렇게 앉아 있는 한 존재에게 투명하게 부서지며 반짝임의 아름다움을 선사한다. 존재의 아름다움, 내가 지켜보며 함께 살아오던 한 존재의 진실이 조금 아주 조금 어젯밤에 보았던 푸른 달빛처럼이나 천천히 그리고 밝게 떠오른다.

모든 것은 한 순간! 바로 그 현존의 순간, 내 존재의 뿌리를 뒤흔드는 무엇인가가 스치고 지나간다. 선명한 무언가가 심연의 언덕에 가 닿는다. 무언지 알 수는 없지만 그 어떤 것이 지나간 뒤 그 선명하고 명징한 파장이 너무도 또렷하게 지속되어 도무지 누울 수도 없고, 누워도 잠 한 자락 잘 수가 없다. 몸은 피곤한데 잠을 잘 수가 없다. 밤이 새도록 계속된다.

도미토리 십여 명 남짓 자는 방이 얼추 10시가 넘도록 인기척이 오가고 이야기며 부스럭거리는 소리들이 들려오지만 그건 그냥 그렇게 들려 올 뿐이다. 그리고 나는 이렇게 시간을 멈춰 세우고는 그 자리에 앉아 있다. 어떻게 지나갔는지 모를 시간이 흐르고 뜬 눈으로 새벽을 맞는다.

새벽을 알려주는 부스럭거림들이 곳곳에서 들려온다. 도미토리 여기저기에서 플래시가 켜지고 웅성거리는 소리를 듣고서야 비로소 하룻밤이 허허롭게 지났음을 안다. 그렇게 억겁 같은 혹은 찰나 같은 하룻밤이 투명하게 보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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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광출판사에서

아래와 같이

'히말라야 내가 작아지는 즐거움'

이벤트를 실시합니다.


'히말라야 포토제닉'이라고 하여,

'히말라야 내가 작아지는 즐거움' 책을 들고 포즈를 취하여 사진을 찍은 뒤에

그 사진을 아래 주소의 출판사 이벤트 페이지에 올려 주시면 됩니다.

책을 들고 여럿이 함께 찍거나,

특정한 페이지를 들고 찍거나,

다양한 형식으로 형식에 제한 없이

'히말라야 내가 작아지는 즐거움'을 소재로 사진을 찍어

올려주시면 된다고 합니다.


서점에 가서 책을 들고 기념촬영을 해도 되고,

많은 사람이 함께 책을 들고 찍으면 더 가산점이 있다고도 하네요.


기간은 7월 21일 부터 8월 20일까지라고 하고,

상품으로

1등은 아이폰4를 드린다고 하네요.

2등은 '히말라야 내가 작아지는 즐거움'으로 10명에게 드리고,

3등은 5천원권 도서상품권을 20명에게 드린다고 합니다.


아마도 예상에, 그리 많은 사람이 동참하지는 않지 않을까 싶으니까,

법우님들께서 동참하시면

상품을 받을 확률이 아주 높아지지 않을까 싶습니다.^^


아래의 링크 주소에 들어가셔서

공모 상세정보를 살펴보시고,

이벤트에 동참하시기 바랍니다.


불광출판사 '히말라야 내가 작아지는 즐거움' 포토제닉 이벤트 공모 내용

아래 주소 클릭


http://www.bulkwang.or.kr/event/book/himal.php?page=1#write_hom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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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독과 침묵 속의 새벽길

 

드디어 오늘부터는 모든 고산에의 적응을 마쳤다고 보고

한없이 원 없이 오르는 날들이 남아있을 뿐이다.

안나푸르나도 다녀왔고,

물론 그 전에 인도 북부의 라다크, 판공초에서 5,000고지를 몇 번 넘어도 봤고,

또 이렇게 지금껏 일주일 동안 5,000고지 이상을 오르기 위한

느릿느릿 고산적응 산행을 계속 해 온 터다. 

 

이제 본격적으로 고도를 올리며

내가 가야 할 바로 그 곳들을 두 발로 휘적휘적 걸어올라 줄 차례다.

첫 새벽처럼 설레는 마음으로 이른 청신(淸晨)의 길을 나선다.

 

 

 

어제 출발하던 바로 그 언덕길을 걸어올라 이제 새로운 길로 들어선다.

어제처럼 오늘도 타보체피크, 촐라체, 아라캄체,

니제카 피크, 로부체피크 등의 봉우리들이

내가 가야 할 방향 앞으로 병암(屛巖)처럼

그 우뚝 선 백발의 봉우리들을 한껏 드높이며 장중하게 버티고 서 있다.

 

찬 새벽 공기를 가르며 겨울옷과 장갑, 모자까지

단단히 몸에 붙여 메고 새롭게 시작하는 마음으로

차분하고도 초엄한 솜씨로 한발 한발 나아간다.

 

눈앞에 보이는 모든 것은 이미 수목한계선을 넘은 지 오래라

초원이요, 벌판이며, 흙먼지길이거나 소설(素雪)의 해쓱해쓱한 설산이 전부다.

이런 낯선 황량함이 왠지 모르게 고향처럼 따뜻하게 느껴지기까지 한다.

 

 

이 웅려하고도 시린 풍경 앞에서

내 눈은 찬란히 부셔오고 감각은 새록새록 깨어나며

발걸음 하나조차, 멀리서 들려오는 새소리나

설산 너머 어디쯤에선가 들려오는 침묵이 무너지는 소리조차

다 들려오는 듯 민예하게 활짝 열려 있다.

 

 

‘이것이 정작 현실이란 말이냐.’

마치 꿈속을 거니는 듯,

아늑한 영겁 전에 이미 이 길을 뒤 뜰 처럼 거닐었던 듯

새로우면서도 익숙하고, 시리면서도 따스하며,

외로우면서도 꽉 차 있는 느낌!

철저한 고독감 속에 그러나 온 존재와 함께 하고 있는 듯한 이 느낌! 느낌!

 

이런 선연한 길 위를 내 존재를 이끌고 이렇듯 두 발로

그것도 아무도 없는 이 적막의 새벽길을 걸을 수 있다는 것 자체가

신비요, 경이에 가까운 체험이 아닌가.

 

걸으며 모든 생각을 잊는다.

모든 기억과 기대, 바람과 희망도 내가 알 바가 아니다.

과거와 미래 따위는 더 이상 입에 담을 흔적조차 없다.

모든 사고의 기초가 붕괴된 듯, 텅 빈 대지 위, 텅 빈 하늘 아래,

텅 빈 한 존재가 다만 미끄러지듯 나아가고 있을 뿐!

 

걷다보니 햇살이 발길을 비추고, 하나 둘씩 짐꾼들이 스쳐간다.

제 몸보다 더 크고 높고 무거운 짐을 이마에 짊어지고

몸을 최대한 앞으로 낮게 기울인 채 목에 힘을 딱 주고

시선은 오직 땅에 고정,

때때로 그 힘겨운 눈을 치켜뜨며 몇 미터 앞 길을 주시하며 묵묵히 나아간다.

 

 

 

 

그 노련한 시선과 여행자의 눈길이 마주칠 때

그들은 어김없이 미소 짓는다.

그 힘들고 고된 짐의 무게에 짓눌려 마음도 무거울 거라는 생각은

단지 여행자들의 상념에 지나지 않는다는 듯

이 설산에서 만난 대부분의 포터나 짐꾼들은

그 순수한 눈빛에 수줍은 미소를 품고 있다.

 

때때로 짐꾼들의 풍경은

이 히말라야 속의 또 다른 설산이요 산맥처럼

이미 이 풍경 속의 한 자락을 형성하는 또 다른 살아있는 자연 그 자체다.

 

 

 

검은 새들의 불규칙한 움직임처럼,

저 아무렇게나 흩뿌려진 고산 야생화들의 생명력처럼,

저 설산 주위로 붙었다 떨어지고 사라졌다 생겨나기를 반복하는

감감 도는 구름의 출몰처럼,

저들 셀파 족들의 걸음 걸음 속에는

또 다른 히말라야가 맥박처럼 흐르고 있다.

 

사람이면서 인위적이기를 거부하고

자연 그대로의 삶을 택한, 말하자면 자연주의자,

그러나 그것 또한 듣기 거북한 하나의 거추장스런 수식일 수밖에 없는

‘그저 거기, 그 사람들’의 이야기가 자연스럽게 펼쳐지는 곳,

그곳이 바로 히말라야다.

 

한 무리의 트레커들이 내려오고 있다.

안나푸르나에서는 줄로 홀로, 혹은 둘이서 오는 여행자들을

많이 만날 수 있었는데 반해

이 곳 에베레스트 지역에서는

주로 이처럼 팀을 이루어 찾아 오는 사람들이 많다.

 

 

 

 

4,800 고지를 흐르는 생명수

 

두사(Duda, 4503m) 마을을 지난다.

마을이라고 해야 집 두어 채가 전부인데다

그곳조차 지금은 사람이 살고 있기는 한 건지, 전혀 인기척이 없다.

아마도 그저 목장 주인이 때때로 야크를 데리고 풀 뜯으러 올 때나 잠시 들러

바람을 피해 차 한 잔을 마실 수 있는 정도의 공간이 아닐까 싶다.

 

 

 

그리고 두사에서 약 30분 쯤 더 걸으니

산산한 작은 계곡을 감돌아 토클라(Thokla, 일명 Dughla, 4620m)가 나온다.

 

 

토클라 또한 롯지 두세 곳이 모여 있는 작은 마을이다.

이를테면 딩보체나 페리체에서 로부체로 가기 위해

잠시 쉬어 차나 한 잔 마시고 가는 간이역인 셈이다.

 

 

 

토클라 롯지 앞 빈 의자에 잠시 앉는다.

몇몇 여행자와 포터, 그리고 짐꾼들이 야외 식당에 잠시 걸터앉아

풍연한 휴식을 취하고 있다.

 

 

 

롯지 뒤로는 바로 설산이 휘몰아쳐 있다.

바람에 펄럭이는 룽다 조차 잠시 쉬어가는 곳,

새들만 바삐 먹이를 찾느라 롯지 주변을 배회하고 있다.

 

 

너무 오래 지체할 수는 없다.

잠시 호흡을 고르며 배낭도 풀지 않고 잠시 쉬었다가

다시 출발!

이십 여 미터를 오르다

고개를 돌려 다시금 토글라를 바라본다.

 

 

이제부터는 다소 가파른 오르막 하나를 넘어야 한다.

숨을 고르고는 이제 다시 출발! 4,600 이상의 고도에서

오르막길을 오른다는 건 아무래도 호흡에 벅찬 일이다.

단숨에 200미터를 올라 4,800고지를 밟아주겠다던 야무진 계획이

호흡에서 턱턱 막힌다.

 

한두 걸음 걷고 잠시 멈춰 서서 호흡을 고르고,

몇 걸음 걷고 거친 숨을 헉헉거리며 쏟아내면서

느린, 아주 느린 발걸음을 꼬무작거리며 꾸준히 옮긴다.

우리나라 같았으면 그야말로 단숨에 뛰어 올랐을

평범한 언덕 정도인데 보는 것처럼 만만하진 않다.

 

 

 

포터 지텐은 벌써 저 멀리 달아났다.

지텐은 언제부턴가 출발하고 나면

으레 알아서 다음 코스에 먼저 가서 쉬면서 기다리고 있다.

고지로 올라갈수록 현지인들과의 호흡 차이가 금방 드러난다.

그야말로 체력 차이라기보다는 호흡 차이가 아닌가 싶다.

저들은 이 숨쉬기 힘든 고지에서 아주 헐하게 산을 오른다.

 

가파른 비탈길을 도드밟아 꼭대기에 올라서니

초르텐들이 줄지어 서 있고,

룽다가 여기저기에서 외로운 진혼곡을 부르듯 처연하게 흩날린다.

 

 

이들 초르텐은 이 쿰부지역 설봉을 오르다가 명을 달리 한

세계 각국의 히말라야 등반 대원들을 위한

추모와 명복을 비는 개개인의 무덤 내지는 묘탑이다.

 

 

 

 

 

 

잠시 숙연해진다.

내 마음만 숙연해 지는 것이 아니라

공기도, 룽다도, 바람도, 흙과 바위도,

이곳에서는 모든 것이 숙엄하게만 느껴진다.

 

로부체 방향으로 백여 미터 더 걸으니

장쾌한 시야가 터지며 또 다른 호장한 풍경을 빚어낸다.

 

 

 

좌우 설산을 배경으로 계곡이 흐르고

이제부터는 계곡 옆길을 따라 걷는다.

햇빛에 반짝이는 계곡물이 완전히 살아있는 그 어떤 생명력을 연출해 낸다.

 

 

흐르는 물을 바라보면 그 안에서 어떤 생명을 본다.

그것은 단순한 하나의 물이 아니라

무언가 모를 생동하는 깊은 존재의 숨결 같은 것을 포함하고 있다.

흐르는 물이 다 그렇지만 유독 이곳에서 만난 계곡물에서는

더없이 강렬한 생명의 연주를 감지한다.

어찌 안 그럴 수 있겠는가.

4,800고지 이 높은 곳을 흐르는 생명의 물이 아닌가.

 

나는 때때로 흐르는 물 앞에 서곤 한다.

그것을 보고 있노라면 내 안의 아주 내밀하고 깊은 무언가를 보는 것처럼

일상적이지 않은 그 어떤 새로운 박동이 느껴진다.

완전히 살아 생동하는 그 어떤 우주적 흐름과도 같은,

혹은 내 안에서 흐르고 있는 수대(水大)의 여린 움직임의 감각과도 같은.

 

천천히 걸음을 옮긴다.

 

 

 

히말라야의 맑고도 시린 호흡소리가 귓전에 들려오는 듯하다.

내 호흡과 히말라야의 호흡이 일치를 보는 듯,

이 생기어린 주변 환경과 걸음과 호흡이 마치 하나가 된 듯,

걷는다는 사실도 잊고 걷는다.

 

모든 것이 조화롭고 순화롭다.

유장한 침묵이 흐른다.

이 묵연한 선정을 따라 내 존재도

자연스레 본래의 커다란 침묵과 공명을 이룬다.

평소 같았으면 끊임없이 솟구쳐 오르며 머릿속을 복잡하게 했을

생각이라는 목소리들이 이 고요한 풍경 앞에 넋을 잃었는지

끼어 들 틈을 잃었다.

 

저 산 아래에서는 매일같이 내 존재를 복잡하게 휘어잡던 온갖 것들이

제자리를 찾고 질서를 찾아가는 듯하다.

모든 것이 있는 그대로다.

있어야 할 바로 그 자리에서 모두가 충분히 제 몫의 삶을 살아내고 있다.

 

나 또한 이 길 위를 걷고 있음으로써

내 몫의 삶을 표연히 살아내고 있는 것이 아닌가.

지금 이 순간 내 존재의 몫은 길 위를 그저 걷는 것에 있다.

그것이야말로 지금 여기에서 100% 순수하게 현존하는 것이다.

 

내가 그 어떤 엄청난 성취를 할 때나,

대단한 일을 이루어냈을 때보다도

그저 지금 이렇게 걷고 있음으로써

오히려 완전히 삶을 연소하고 있다는 생생한 존재감이 깃든다.

단순히 걷는다는 행위 속에서

이렇게 충장하고 꽉 찬 삶을 이루어 낼 수 있다는 것을 새삼스레 배운다.

 

우리 삶에 있어 정작 중요한 것은

‘어떤’ 행위를 하느냐보다

그 행위를 ‘어떻게’ 하느냐 하는 데 있지 않나 싶다.

 

행위 자체도 물론 중요하겠지만

아무리 성스러운 행위일지라도 그 행위 하는 자의 마음속에

삿된 생각이 끼어들어 있다면

그것은 먼저 우주에서 알고 그 행위를 성스러움에서 배제시키겠지만,

아무리 사소한 행위를 하고 있을지라도,

심지어 겉으로 보기에는 악행을 저지르는 것으로 보일지라도

그 행위자가 온전히 깨어있음으로써 그 행위를 하고 있다면

그것은 바로 모든 진리에서의 방식과 일치하는 것이다.

행위 자체보다 행위의 바탕을 이루는 마음의 의도가 중요한 것이다.

 

 

 

계획은 언제든 변경될 수 있다

 

물길을 따라 한두 시간 걸었나 싶더니

거짓말처럼 이 처연한 땅 위에 계곡 옆으로 작지만 빼어난 풍경의 마을,

로부체가 나타난다.

 

 

 

 

6,000미터 로부체 피크를 비롯해

7,000, 8,000미터의 거대한 지붕들을

마치 뒷산 거느리듯 연꽃처럼 옴팡진 곳 꽃술자리 한 가운데

로부체 마을이 꽃처럼 피어나 있다.

 

이 마을이 바로 오늘 하루를 신세질 곳인데,

서너 곳 있는 롯지는 이미 이른 아침에 다 차서 방이 없단다.

사정을 알고 봤더니 요즘 같은 성수기 빅시즌에는

단체 트레커들이 자신의 포터를 전날이나 당일 새벽부터 로부체 마을에 먼저 보내

방들을 전부 잡아 놓는다고 한다.

 

더구나 로부체는

에베레스트 베이스캠프와 칼라파타르를 오르기 위한

전진기지와 같은 곳이라

다양한 루트로 올라 온 사람들이

거의 전부 이곳에서는 꼭 하룻밤을 묵는 것이 상례로 되어 있다 보니

더욱 방 잡기가 힘든 곳이다.

 

그런 사정이다 보니 이 곳 로부체뿐만 아니라,

고락샵, 종라, 고쿄 등 정상 부근 사람들이 붐비는 전초기지로서의 마을들은

항상 방 잡는 일이 전쟁과도 같다고 한다.

 

 

 

 

마침 우리 지텐이 잠시 기다려 보라며 어딘가로 전화를 걸더니

로부체 위로 두세 시간 거리, 내일 하루 묵기로 계획된 고락샵에

마침 도미토리 침대 딱 한 자리가 남았다고 그곳이라도 가겠느냐고 묻는다.

 

그마저도 누가 고산병으로 부랴부랴 내려가는 바람에

조금 전에 취소된 자리라고 한다.

당연히 따지고 생각할 겨를 없이 고락샵에 가서 묵기로 한다.

 

조금 힘들긴 하겠지만,

어제 5,000고지의 낭카르창 피크를 다녀왔으니

고산 염려는 안 해도 될 거라는 지텐의 말을 듣고

조금 더 힘을 내기로 했다.

 

사실 고락샵까지 안 가고 오늘 하루 로부체에서 자고

내일 고락샵에서 자기로 계획한 이유는

거리가 멀거나, 힘들어서가 아니라 고산 적응을 위한 계획이었다.

 

지금부터의 높이에서는

고산병에 특별히 신경을 써야 한다는 것이 대부분 여행자들의 조언이다.

그래도 어쩌겠는가.

이렇게 된 바에야 모든 것을 하늘에 맡기고,

법계에 맡기고 그저 인연 따라 갈 수밖에.

 

어쩌면 이것이 더 깊은 차원의 나와 연결된 우주 법계의 지성이

나를 위해 준비한 본연의 계획이었을지 모른다.

언제나 나의 생각, 인간의 판단과 계획보다는

보이지 않는 더 깊은 차원의 세계에서

준비한 더 깊은 계획에 맡기고 산다는 것이야말로

내 삶의 중요한 방식이기도 하다.

 

그저 믿고 맡기며 자연스러운 우주의 이치대로 흐르는 것이다.

종교적으로 표현한다면

‘너의 일과를 하느님께 맡기라’고 했던 성경의 가르침이나,

‘부처님께 모든 것을 맡기라’ 혹은

‘아상을 버리고 집착을 버리라’는 가르침,

노자가 말했던 ‘무위자연’의 이치 또한 바로 그것이다.

 

내가 계획했던 모든 것은 어디까지나 잠재적인 가안(假案)의 계획일 뿐,

‘절대’ 바꿀 수 없는 계획은 없다.

언제든 그 계획은 바뀔 수 있다.

유연하고도 활짝 열려 있는 마음으로

미리 잡아 놓은 계획에 집착하지 않는다.

 

여행의 일정도 그렇고, 삶의 여정에서도 마찬가지다.

내일, 아니 당장에 다음 순간 벌어질 일에 대해

내가 무엇을 결정적으로 정할 수 있단 말인가.

‘이렇게 되어야만 한다’고,

‘혹은 이 계획대로 되야만 한다’고 고집하게 되면

그렇게 되지 않았을 때 괴롭다.

 

그러나 계획은 있되 그 계획에 집착하지 않고

자연스러운 이치에 나를 맡기다 보면 괴로울 일이 없다.

아니 오히려 내 앞에 펼쳐질 수많은 가능성에 대해

활짝 마음을 열어 둠으로써

전혀 새로운 차원의 삶과 마주할 투명한 기회를 만들 수 있다.

 

보통 ‘이렇게 되어야 한다’고 정해 놓으면 스스로 정한 그 틀에 갇혀

새로운 가능성으로 눈을 돌리지 못한 채,

그 틀 안에서의 비좁은 삶만을 반복적으로 되풀이하게 될 뿐이다.

 

그런 사람에게 삶은 진부하고 반복적인

그냥 그런 통속적인 것일 뿐이다.

그러나 어떤 정해진 방식에 자신을 가두지 않고,

내 앞에 펼쳐질 무궁무진한 가능성의 삶에 나를 활짝 열어두고,

그 어떤 것이 오더라도 다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는 사람에게는

매 순간 순간의 삶이 새롭고 창조적이며

나아가 영적인 차원과 접촉할 수 있는

깨어남의 세계로 발을 내딛는 것이기도 하다.

 

계획이 변경되었지만 그것은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는다.

혹시 고산병이 걸리더라도 그 또한 새로운 하나의 가능성이자,

새로운 체험의 하나로 받아들이려는 마음이 있다면,

그래서 최종적인 목적지의 하나였던

칼라파타르에 오르지 못하는 경우가 생길지라도

그리 좌절할 바는 아닌 것이다.

 

그것은 실패가 아니라 다른 방식으로의 성공이다.

사실 우리의 삶은 매 순간순간 성공만이 있을 뿐이지 실패란 없다.

더 깊이 들어간다면 실패도 성공도 없고

다만 우리 생각이 성공이라고 혹은 실패라고 해석하고 판단하는 것일 뿐이다.

 

판단과 해석을 놓아버리면

모든 것이 아름답고 모든 것이 성공적이다.

사실 모든 실패는 실패했다는 생각일 뿐이지 실패가 아니다.

 

이 고지대에서도

봄처럼

아름다운 노오란 꽃이

생명력을 뽐내고 있다.

[히말라야, 내가 작아지는 즐거움]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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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법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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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SC_7571

 

어제 맥드로드 간지에 도착해,

숙소를 정하고,

목욕을 하고 났더니

얼마나 시원하고 나른해 지던지.

저녁을 간단히 먹고는 푹 쉬었다.

 

그리고 그 다음날 아침이 되어,

가장 먼저, 달라이라마가 주석하고 계시는

다람살라의 남걀사원을

제일 먼저 돌아보기로 한다.

 

나른한 한낮,

스님들은 공부를 하시고,

혹은 졸고 계시는 것인지,

아니면 명상에 들어 계시는 것인지…

 

맥그로드 간지의 남걀사원은

달라이라마가 주석하는 곳이기도 하지만,

티벳의 망명 임시정부가 있는 곳이기도 하다.

 

그러다 보니 이 남걀사원은

불교 사찰이기도 하면서,

한 나라의 심장부인 국가기관이 다 들어있는 정부청사이기도 하고,

티벳에서 목숨을 걸고 히말라야를 넘어 이 곳으로 모여 든

티벳의 아이들을 교육시키는 교육기관이기도 하고,

또한 스님들의 교육기관이기도 하는 등

이 한 곳의 사원에서 다양한 기능이 이루어지고 있다.

 

아래 사진은,

학교 교실이다.

남루하고 허름한 교실 한 중간에

하얀색 칠판이 있고,

그 위에

티벳의 전륜성왕이자 관세음보살의 화신인

달라이라마 성하의 사진이 걸려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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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실에서 바깥을 바라보니,

고산지대 맥간의 풍경이 펼쳐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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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다른 교실로 가 보니,

이 곳은 아마도 스님들께서 교육 받으시는 곳,

강원, 승가대학 같은 곳이 아닐까 싶다.

앞의 교실과는 달리

좌식으로 앉아서 공부할 수 있도록 해 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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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금 더 가까이 다가가

위 교실 옆에 걸려 있는 달라이라마 성하의

사진을 사진기에 담아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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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깥에서 바라본

학교 교실의 풍경.

교실 앞에는 복도 난간이 있고,

그 난간 위로 스님들의 가사가 걸려 있다.

 

저 멀리 옥상 쪽에는

한참 전부터 어린 스님들과 학생들이

어우러져 한바탕 시끌벅적거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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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로 이 교실들은

외부인들은 출입 금지인데,

한국에서 온 스님이라고 잠시 좀 볼 수 있도록

양해를 얻고 들어가서 살펴 본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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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실에서 나와 안쪽 큰법당 쪽으로 들어가니,

마침 ‘Free Tibet’을 염원하는 법회가 열리고 있었다.

많은 티벳인들이 모여 법당 안은 들어갈 수도 없고,

이렇게 법당 바깥에까지 티벳인들이 모여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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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처 법당 안으로 들어가지 못한 비구니 노스님 두 분께서

법당 뒤쪽 공터에 걸터 앉아

법회에 동참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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곳곳에는 스님들의 모습이 눈에 띈다.

비구니 스님이신지, 비구 스님이신지,

언뜻 보아서는 가늠이 잘 안 되는,

잘 생기신 스님께서 앉아

무언가를 골똘히 사유하고 계신다.

삼삼오오 스님들도 모여 앉아 이야기 꽃을 피우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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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회를 마친 뒤

뒤쪽에 앉아 조용히 법회에 참석하셨던

노스님 두 분이 사원을 빠져 나가시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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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당 뒤쪽으로 한 청년은

‘Free Tibet’이라고 쓰여 있는

목덜이인지, 천을 어깨에 둘러 메고

법회를 지켜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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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회에 참석 중인 티벳인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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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당을 빠져 나와

반대편 교실 쪽으로 걸어가자니,

어려 보이는 스님들께서

난간에 걸터 서서 오고 가는 이들과 눈인사를 나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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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ree Tibet’이 쓰여 있는

옷을 입고

과자를 먹고 있는 아이들도 눈에 띄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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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법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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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정에서 도착의 기쁨을 알리듯
타르초가 흩날린다.

세상은 이대로 완전하다.


어느 하나 정확히 제자리 아닌 것이 없고,
그 모습 아닌 것이 없다.
이대로 시간이 멈추어 버린 듯 모든 것이 적연하다.
시공의 의미가 사라지고 심온하고도 묵직한 침묵이 내려 앉는다.

 

침묵의 소리를 들어 본 적이 있는가!
신묵의 그 무게감,
그 소리 없는 소리는
우리의 내면이 때때로 딱 멈추는 순간,
그런 흔치 않는 순간에 오는지 가는지도 모르게 찾아 왔다가
아무런 흔적도 남기지 않고
내면의 뜰을 텅 비우고는 사라진다.

 

바로 이런 순간에 그 소리가
고요한 대지 위로 잔잔한 선율처럼 들리는 듯도 하고,
내 생에에서의 그 모든 삶의 역사와 기억들조차
모조리 흡수해 아무것도 남기지 않게 만들고 가는 듯도 하다.

 

지금 이 순간의 고요함과 마주한다.

적연부동(寂然不動)!
아무런 방해나 거리낌 없이
이 대자연과 직접적으로 대면한다.
비교할 그 어떤 것도 없이
이 자체로써 있는 그대로의 고스란한 아름다움에 매료된다.

 

작고 소박한 것들이

새삼스레 투명하고 반짝이는 별처럼

진한 의미와 향기로 다가온다.

소소한 이름모를 꽃에 시선이 머문다.

이 작은 것 속에서

희말라야의 모든 크고 웅대한 것들을 본다.

 

 


 

 

바람이 좋다.
가벼운 소소리 바람이 불어 와
내 존재 위에 덕지덕지 남아 있을
무겁고 탁한 어떤 덩어리들을 툭툭 털어내 주는 듯 하다.

 

존재의 무게감이 사라지고,
그동안 심각해 하고 심중하게 느끼던 모든 삶의 절심했던 순간들이
그저 한 편의 재미난 연극처럼 가벼워짐을 느낀다.

입가에 한 줄기 홀연한 미소가 스친다.


가볍다.
홀홀하다.
모든 삶이 아름답다.
지금 이 자리에서 더 이상 필요한 것도, 바랄 것도 없다.

 

 

 

 

사실 희말라야를 오기 전
내 스스로 분명하게 느낄 수 있을만한
내면의 그 어떤 말할 수 없는 순수지속의 직관적인 무언가가 감지되었다.

알 듯 모를 듯 직관적인 알아차림!


삶의 홀연한 어떤 순간에는
어떤 말로도 설명할 수 없는 침묵의 소리가 들려오곤 한다.
생각이 오랜 번잡함을 가볍게 내려놓을 때,
해야 할 일들이 문득 사라지고 한가로워질 때,
그냥 그냥 지금 이대로 좋은 삶의 어느 조용한 오후에
한 줄기 햇살처럼 묵직한 내면의 소리가 들려오곤 하는 것이다.

 

희말라야에 오기로 결정이 되기 훨씬 전부터
내면에서는 희말라야를 꿈꾸고 있었다.
오랜 전생부터 이미 그렇게 되기로 결정되어 있었던 것처럼
이제 그 때가 오고 있노라고 말해 주는 어떤 소리가 있었다.

 

그리고 그것은 단순한 여행이나 산행이 아닌
이번 생에서 나에게 주어진 오랜 영적 순례의 길이 아닐까 싶은
어떤 강한 힘을 담고 있는 명증이기도 했다.
그리고 그 힘은 계속해서 덩치를 키우고 있었고,
떠나기 직전 내 삶에서 몇 번 일어나지 않았던
매우 선명한 꿈 한 자락이 투명한 메시지를 가지고 찾아왔다.

 

그리고 지금,
이렇게 이 모든 것이 현실로 소응되어

히말라야의 품 속 한 가운데 서 있다.

지금 이 순간,

바람이 분다.

 

삶의 그 어떤 순간보다도 깊은 관찰과 자각이
호흡과 걸음 속에서 햇살처럼 부서진다.

발걸음은 다시 내리막 길을 걷고 있다.


내려가다 보니
오르면서 보지 못했던 많은 여행자들의 발길이
하늘로 하늘로 무거운 걸음을 옮기고 있다.

 

 

 

 

첫날부터 몇 번이고 마주쳤던 이들도 제법 눈에 띈다.
프랑스에서 온 중장년의 아주머님 두 분과 그녀들의 가이드, 포터,
뉴질랜드에서 포터 한 명과 함께 온 여자 대학원생,
똑같은 유니폼을 입고 다녀 같은 회사 동료인 줄만 알았던
인도인 중년의 아저씨 삼총사,
또 일본에서 온 대졸 후 사회초년생이 되기 전
희말라야를 걷고 싶었다는 젊은 여성분,
델리의 붉은성 앞에서 잠깐 말을 걸었다가
라다크의 곰파에서 한 번 더 보고
어제 딩보체의 한 롯지 앞에서 다시 만났던 반가운 인연의 싱가포르 한 청년,
그러고 보니 시끌시끌 중국인 7인방은
어제 롯지에서 오늘 올라올 것이라고 하더니 보이지 않는다.

 

특히 오랜 여행 중이라면 더 그렇겠지만,
여행을 하다보면 한 번 마주쳤던 사람을
전혀 새로운 도시나 나라에서 또 다시 보게 되는 경험을 종종 하게 된다.
그럴 때의 그 반가움이란
고향 사람을 만난 것 이상이나 반갑고 정에 겹다.

 

두 번째 만나면,
또 혹시나 세 번까지 연이어 낯선 곳에서 만나게 되면
그것으로 벌써 친구가 되고 벗이 되곤 한다.
이것이야말로 여행이 주는 또 다른 즐거움이요
사람 사이의 풋풋한 정겨움이다.

 

길을 따라 내려가다가
나는 곰파를 보고 싶어 길 없는 가파른 절벽 같은 길로 발걸음을 돌린다.


곰파가 언제부터인지 스님이 살지 않고 있는데다가
문도 굳게 잠겨 있어 인적이 끊긴지가 오래되었다 보니
곰파로 가는 길도 없어진지 오래다.

 

특별히 불교에 관심이 있지 않고서는
어지간해서는 이 곰파를 보러
일부러 길 없는 길을 헤쳐가는 사람은 없다고 한다.
지텐도 사실 이 곰파는 처음 가 본다고.
어려운 부탁을 흔연하게 잘 들어준 지텐에게 고맙다.

 

한참을 길 없는 길을 헤매며
먼지 폴폴 날리는 마른 흙길을 해집고
곰파가 있는 방향을 향해서 걷는다.


곰파 가까이 오니 작은 스투파와 룽다만이
이곳이 인적은 없을지라도 여전히 곰파임을
그 힘찬 펄럭임으로 웅변해 주고 있는 듯하다.

설산 위로 푸두둥거리는 룽다의 표연한 움직임이
사자좌에 딱 중심 잡고 앉아
사자후를 토해내는 선사의 기상과도 같이 걸지다. 

 

 

 

 

 

 

바람과 룽다는 한생명이다.
바람이 룽다를 비로소 룽다이게 하듯,
이 척박한 산정에서는 룽다가 바람을 비로소 바람이게 해 준다.

 

곰파와 스투파를 지켜주는 건 룽다와 바람 뿐인 줄 알았는데
저기 곰파 뒤에서부터 4,000고지를 제 삶의 안락한 터전으로 알고
오랜 세월 살아오며 적응했을
이름모를 설산의 새들이 까맣게 일제히 날아오른다.

 

인적드문 곰파에 집을 짓고 절을 지키며 살아왔을 새들이
모처럼 찾아 온 인기척에 놀라기라도 한 걸까?
휘~익 쉭쉭거리며 창공 위를 높게 날아올랐다가
쏜살같이 곤두박질치기를 반복한다.

 

길도 없는 가파른 절벽 같은 산사면을 타고
곰파 쪽으로 미끄러져 간다.
곰파 쪽으로 난 길이 없는 것을 보니
그간 얼마나 사람들의 발길이 뜸했는가를 알겠다.


그리 크지 않은 곰파가 좌우로 나뉘어
오랜 역사를 증명하듯 고풍스럽고 소담한 모습으로
설산의 영봉들과 아름다운 조화를 이루며 서 있다.

 

 

 

 

가까이 가 보니 역시나 금당(金堂)의 문은 자물쇠로 굳게 잠겨 있고,
그 어떤 사람의 흔적도 남아 있지 않다.

 


아쉬운 일!
아마도 그 옛날, 설산고행의 붓다는 아닐지라도,
저 티벳의 밀라레빠나 파드마 삼바바가 설산을 순례하며 수행을 했을 법한
이 영기 어린 도량에 눈밝은 푸른 납자(衲子)는 고사하고
오랜 노승 한 분 뵐 수 없다는 것이야말로 얼마나 아쉬운 일인가.

 

혹시 모르지. 저 굳은 자물쇠를 보니
저 안에 말로만 듣던 3년, 6년, 10년 결사의 죽음도 불사하는
희말라야의 무문관 수행자가
이제 곧 밝아 올 깨침의 태양을 관조하며
평화로운 내관(內觀)을 행하고 있을지도.

 

밀라레빠는 10세기 티베트의 성자로
7세에 아버지가 돌아가신 뒤 백부가 모든 재산을 강탈해 가자
흑마술을 배워 친척을 몰살시킨다.
그 뒤 이러한 잘못을 깊이 뉘우쳐 참회하고
38세의 나이에 희말라야로 떠난다.
설산에서의 오랜 수행 뒤 8년 만에 집으로 돌아왔지만
어머님은 돌아가신 뒤였고 누이동생도 거지가 되어 있었다.


거지가 된 누이에게, 어머니의 뼈로 베개를 만들어 누워
밀라레빠는 진리의 노래를 부른다.

 

‘누이여, 세속의 욕망으로 괴로워하는 자여, 내 노래를 들으라.
황금 첨탑과 우아한 비단 옷,
이 모두를 가지는 것이 무슨 소용이랴.
나는 이 모든 것을 버리고 길을 떠났다.
누이여, 너 또한 모든 욕망을 버리고 희말라야로 가자.
나와 함께 눈 쌓인 희말라야로 가자.
사람은 언제 죽을 지 알 수 없으니
더 이상 지체 할 시간이 없다.
누이여, 너 또한 생사의 수레바퀴에서 벗어나고자 한다면
세속의 모든 욕망을 떨쳐 버리고 저 눈덮인 희말라야로 가자.’

 

희말라야는 바로 이 곳 오랜 곰파를 의미할 수도 있고,
눈덮인 설산을 의미할 수도 있으며,
무집착과 무욕(無慾)이라는 텅 빈 내면의 수미산일 수도 있다.

 

희말라야는 곧 출세간을 의미하고, 무집착을 의미하며,
청정한 무욕을 상징한다.
도량, 곰파, 사찰 또한 청정한 출세간의 수행 공간이자
집착과 욕망을 버린 절대청정을 상징한다.

 

희말라야 5,000고지의 낭카르창 봉우리 바로 아래,
아무것도 없는 무욕의 땅에 박회(迫懷)와 청정의 상징, 
티벳 사원 곰파가 홀연히 서서,
밀라레빠의 그 옛날 사자후의 외침을 전하기라도 하는 듯
시공을 초월하여 10세기가 넘은 지금
이 순간에까지 한 여행자의 내면에 빛을 놓는다.

 

 

 

 

 

 

아주 낯설고도 생기어린,
어떤 말로 표현되지 않는 느낌,
영감 같은 것이 가만 가만 도량 앞에 선 내 내면의 뜨락에
툭툭 치듯 노크를 한다.

 

이 척박한 먼지 나는 산비탈에서
신비롭게도 도량 주위에만 졸졸 흐르는 생명수가 흐르고,
그 주위로 초록의 생명들이 또 꽃들이 거짓말처럼 내 시선을 잡아끈다.

 

 

 

 

 

이래서 이곳에 오랜 곰파가 설 수 있었구나.
대자연이 품어주는 곳,
이 황량한 곳들 가운데 유독 이 산자락, 이 터에만
이렇게 생명을 품어 주도록
그렇게 법계에서는 이미 계획을 세워 놓고 있었던 것이다.


다만 그 법계의 숭고한 뜻을 이을
이 시대의 눈밝은 수행자가 아직 나타나지 않은 것일 뿐!

이런 곳에 앉아 설산을 붓다로, 면벽으로 여기며
‘내가 누구인가’를 들고 관조를 이어간다면
그 어떤 게으른 수행자가 제 허투른 정신을 깨고
이 외외당당한 쿰부 설산의 협조를 받지 않을 수 있을건가.

 

다시 숙소로 내려 온 시각은 점심 즈음,
간단히 점심을 먹고 오후 내내 별다른 하는 일 없이
이 평안한 휴식의 공간 속에서 푹 쉬어 본다.
쉰다기 보다는 그저 이 설산의 품 속에 나를 내맡긴 채
하는 일 없이 그냥 소요하는 것이다.

 

쉰다는 이 행위야말로 얼마나 본질적이며 숭고하고 아름다운 일인가!
아니, 쉰다는 것은 행위가 아니다.
행위가 끊어진 자리,
그야말로 ‘아무것도 하지 않는 시간’인 것이다.


그 텅 빈 시간을 가지고 누리는 것이야말로
현대를 사는 우리들에게 어쩌면 가장 필요한
삶의 덕목과도 같은 것인지 모른다.

쉼을 모르는 시대, 휴식이 없는 사람들,
아무것도 하지 않고 쉰다는 것이
죄악처럼, 게으름처럼 비쳐지기 쉬운 요즘 같은 세상에서
정작 필요한 건 아무 목적 없는 무조건적인 쉼이 아닐까.

 

몸만 쉬는 것이 아니라 정신도 생각도
심지어 감정의 흐름도 잠시 멈추어두고
그 모든 내적인 흐름을 잠시 그쳐보는 것이다.
나아가야 할 때 물론 나아가야 할 줄 알아야 하겠지만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그쳐야 할 때 그칠 줄 아는 것에 있다.
그만 둬야 할 때 그만 두지 못하는 것이야말로 가장 큰 장애다.

 

요즘 많은 사람들은 인생이란 전쟁터에서
‘더 빨리’, ‘더 많이’, ‘더 높이’ 성공하기 위해
초를 다투는 속도전을 매일같이 치러내기에 바쁘다.
이런 세상에 휴식과 쉼이라는 “느리게 그치는” 차원의 이야기가
얼마나 귓전을 두드릴 수 있겠느냐마는
바로 그 차원이야말로 이런 속도전에 미쳐가는 세상 속에서
우리가 비로소 살아남아 온전히 ‘존재’하도록 해 주는 더없이 귀한 가치다.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더 많이 소유하느냐’
혹은 ‘더 빨리 성취하느냐’에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지금 이 순간이라는 신성한 차원 속에서
‘얼마나 더 존재하느냐’에 달려 있다.

 

행복한 휴식과 함께 어느덧 날이 저문다.

눈부시게 하얗던 설산 봉우리가

진한 주황빛으로 물들며

내 마음 한 켠도 짠하게 진하게 물들이고 있다.

 

 


 

 

 

 

 

그리고...

진한 어둠이 찾아온다.
세상은 온통 암흑이다.


저녁 식사를 마치고 칫솔질을 하러 나가는데
저쪽 반대편 롯지 간판께 어딘가에 대낮처럼 밝은,
아마도 한국의 도심에서도 찾아보기 힘들 법한
무한 촉광의 가로등이 눈부시게 빛나고 있는 것이 아닌가.

 

그런가 보다 하고 칫솔질을 하다가 생각해보니
아무래도 이 딩보체 전기 사정을 감안했을 때
저토록 마을 전체를 밝힐만한 무한 광촉의 가로등이라는 건 미심적지 않은가.
더욱이 이 곳은 4,400고지 시골 고산 마을에,
오직 전기라고는 태양광 전지판 네쪽이 전부인 가난한 롯지가 아닌가.


입가에 치약 거품을 잔뜩 베어문채
문득 고개를 들어 눈부신 가로등을 바라본다.

 

아! 아! 아니었구나!
이건 가로등이 아니구나.
무한달빛!
달빛이 어찌 이렇게 밝고 눈부실 수 있단 말이냐.

 

아무리 보름날 어디 한 구석 찌그러들지 않은 만월이라 한들
어찌 이토록 밝을 수 있단 말인가.
도저히 믿어지지 않아 혼잣말로 달님께
이 형언할 수 없는 월화(月華)에 대해 묻고 또 묻는다.

 

롯지 문 밖으로 나가 뒷산 산길을 따라 조금 더 걸어 오른다.
도저히 믿어지지가 않아서다.
저 어둔 산골짝까지 따라오는가 보자.
아! 아! 이 야밤 어둠 속에 둘러 싸여 있어야 할
마을과 설산과 계곡과 바위들이
온통 풍요로운 달빛의 생명을 나누어 받아
또렷하게 노오랗게 투명히 빛나고 있다.

 

이것이 정작 내가 알고 그간 밤마다 사귀어 오던
바로 그 달님이 벌이는 축제가 맞단 말인가!
내가 이전에 보아오고 느껴오고 누려오던 그윽한 달빛 어쩌구 하던
그 묘사에 백배 천배 감성을 더 보태면
지금 이 순간을 오롯이 비춰낼 수 있을까?

 

아! 본래 달빛의 저작이
이 정도의 클라이막스를 이끌어 낼 저력이 있었던 것이다.
1,000고지, 기껏해야 2,000고지를 조금 넘는 달빛,
강원도 양구 금강산 1만 2천 봉의 유일한 남쪽 봉우리
가칠봉 철책을 스치던 새벽 1시,
그 그윽하게 산맥과 철책과 초병의 군모를 밝히던 그 달빛이
4,400고지로 올라오니 이토록 투명해지고 뚜렷해져 있는 것이로구나.

 

달빛쇼크!
오늘밤 달빛에게 뒤통수를 한방 얻어맞은 기분!
가슴이 뜨거워진다.
두 손, 두 발바닥에 땀이 찬다.
이것이야말로 희말라야 대자연과 달님이 합작해내는 진정한 달빛 소나타!
아니 대장엄의 달빛 오케스트라!

 

잠자리에 누웠는데, 눈도 감았는데
여전히 덩그러니 희고 밝은 토경(兎景)이
순수한 빛을 내 앞에 켜 두고 있다.

 

소소한 밤,
환하디 환한 잠 속으로 들어가
희고 고운 달빛 아래에서
설산을 무대삼아 한바탕 무애춤을 휘청여 보자.

[히말라야 내가 작아지는 즐거움]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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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법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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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처음으로 5,000고지 이상의 봉우리를 오르게 된다.

거창하게 말하면 내 인생에서 가장 높은 고지를 올라 가 보는 것이다.

4,400고지 딩보체에서 5,086고지 낭카르창까지,

무려 600밑를 수직으로 올라 내 몸이 5,000미터 고지에서

어떻게 반응하는지를 가만히 살펴보는 것이다.

사실 600미터라고 하는 것이

한국에서 그 높이를 오른다면 두 시간도 안 되는

짧은 시간에 훌쩍 오를 수 있는 높이라고 볼 수도 있다.

그러나 500고지에서 1,100고지,

1,000고지에서 1,600고지 정도를 오르는 한국의 산과

4,400고지엣 5,000고지를 오르는 이곳의 고도는

그 차원을 달리한다.

무엇보다도 공기가 부족해 숨쉬기가 불편하다.

벌써 딩보체에서도 조금만 몸을 움직이고 나면 숨이 차 옴을 느낀다.

그러다보니 여기서 고도를 높여 산을 오른다는 것은

다리의 문제거나 체력의 문제가 아니라

숨의 문제, 호흡의 문제와 더 연관이 깊다.

더구나 어제도 700미터 고도를 한꺼번에 높이지 않았는가!

사실 낭카르창 피크가

5,086이라는 무게감의 고도를 생각하기 전에

언뜻 보기에는 그저 딩보체라는 작은 마을의

산책하기 좋은 뒷산 정도의 느낌 정도랄까.

보기에는 그렇게 만만한 뒷산 정도로 보일 뿐이다.

사실 출발할 때 뒷산을 가르키며

‘저 곳이 낭카르창’이라는 말을 들을 때까지만 해도

아주 가벼운 마음으로,

그야말로 하루 쉬며 산책을 즐기는 마음이었다.

가벼운 마음으로 천천히, 아주 천천히 롯지를 나선다.

새벽 6시 30분,

아직 햇살은 저 위쪽 산 중턱까지 내려왔을 뿐,

딩보체 마을은 산 그늘에 뒤덮여 차가운 침묵 속에 잠겨 있다.

그 고요한 마을을 지텐과 둘이 조용히 빠져나온다.

손발이 시려오고, 몸은 으실으실하다.

햇살이 비치기 전까지 추위와의 일전은 계속된다.

먼저 딩보체 마을 뒷산 작은 언덕을 오른다.

 

 

장쾌하고 장엄한 설산의 풍경이

어디서 튀어나온 것인 양 툭 붉어져 나오고

이 명미한 풍광에 모든 감각과 생각이 마비가 된 것처럼

멍하니 얼어붙는다.

 

 

이것이 바로 희말라야구나!

꿈속에서 그려오던 바로 그 풍경이,

희말라야 책자 어디에선가 보았을 법한

바로 그 풍경들이 내 눈앞에 아무런 거리낌 없이 1대 1로 마주친다.

마지막 언덕을 오르는 발자국과 함께 터져나온 탄성이

이윽고 무던한 현묵으로 바뀌고

이 신새벽 희말라야의 침묵과 하나가 되는 듯

거기 그것과 여기 나 사이의 간격이 함몰되는 느낌이다.

언덕을 오르자마자 5분도 안 되었나 싶은데

저기 눈앞 발치에서 빛나던 조하(朝霞)의 축복이

산그림자를 밀쳐내면서 금새 내 이마 위로 쏟아져 내린다.

아! 눈부시다. 따스하다.

잠시 눈을 감고 이 다사로움을 느껴본다.

찌릿찌릿 아주 작은 따스함의 줄기가

언 손과 언 발, 온 몸에 미세한 감각으로 축복을 내린다.

이 축복을 혼자서 누리기 미안할 즈음,

독일 여행자 4명이서 서둘러 언덕을 오르며 느낌씨를 연발한다.

 

 

간단히 인사를 나누고

이 대장엄 은령(銀嶺) 극락의 향기를 미쳐 누리기도 전에

그들이 먼저 앞장서 낭카르창의 품을 향해 저벅저벅 오른다.

이 언덕 위에서 언덕 아래쪽의 초원길을 따라 발걸음을 돌리면

우리가 내일 가야 할 로부체로 향하는 길이고,

오른쪽 가파른 봉우리를 향해 발길을 돌리면

바로 낭카르창의 고지를 만나는 길이다.

아직 우리 둘과 독일인 팀을 빼고는 전혀 사람의 흔적이 없다.

그들이 걷는 길을 밟아 천천히 고도를 높인다.

그야말로 오르다가 넘어지면 굴러 떨어질 것 같은

급격한 오르막의 연속이다.

빨리 오르면 두 시간이지만,

고도적응을 위해 천천히 아주 천천히 쉬엄쉬엄 오르기로 한다.

물론 숨이 가빠 빨리 오르고 싶어도 몸이 뜻에 따라 주지 않는다.

앞에 오르는 저들도 마찬가지다.

거북이를 연상시키듯 느릿느릿한 걸음으로 가는 느낌만 내며 걷는다.

아주 조금을 올랐을 뿐인데도

눈앞에 펼쳐지는 전망은 확연하게 달라지고 있다.

 

 

더욱이 산그림자 길게 드리운 어둠이 차차 그 세력을 줄이면서

햇발에게 다시 만나자는 인사라도 하듯 빨리 사라지고

딩보체 마을 전체가 따스하게 기지개를 켜며 깨어난다.

 

 

조금 더 오르니 저기 반대편 언덕 너머에

페리체 마을이 조금씩 보이기 시작한다.

 

 

걸어오르다 뒤를 돌아 주저앉아

거친 호흡과 저 거친 산군을 바라본다.

왼쪽으로는 지금까지 걸어오며 자주 만났던

아마다블람, 캉테가, 탐세쿠 봉우리가 차례로 줄지어 서 있고,

 

 

정면으로는 남체바자르 방향으로 꽁대 봉우리가

그리고 바로 오른편으로

타보체(Taboche, 6495m), 촐라체(Cholatse, 6335m),

아라캄체(Arakamtse, 6423m), 로부체(Lobuche, 6119m)

등의 봉우리가 줄을 서듯 차례로 도열을 해 있다.

 

 

타보체부터 시작되는 산봉우리의 도열을 따라

네 번째 봉우리와 다섯 번째 봉우리 사이에

바로 내가 칼라파타르(Kala Pattar, 5550m) 순례 이후 넘어야 하는

이번 산행의 최대 고비 촐라패스(Cho La Pass, 5368m)가 있다고

지텐이 귀뜸해 준다.

아! 저 웅부한 산군의 봉우리 사이를 통과해야 한단 말인가!

그러나 그건 그 때 일이고

지금으로서는 바로 이 낭카르창 피크가

내 앞에 놓여있는 다음 발걸음의 최후 목적지다.

이 고지를 오르고 2~3일 후 칼라파타르를 오르고

또 다시 악명 높은 촐라패스를 지나,

고쿄(Gokyo, 4750m)의 고쿄리(Gokyo Ri, 5340m)를

또 다시 올라야 한다는 것은

어디까지나 생각이 만들어내는 미래에 대한 불안감일 뿐이지,

그것은 지금 이 순간 전혀 내 앞의 실재가 아니지 않은가.

지금 이 순간은 오직 다음 발자국이 내 목적의 전부다.

왜 오지도 않은 미래의 모든 힘겨움을

벌써부터 짊어지고 가야 한단 말인가.

가 보지도 않은 미지의 그 고지들을

애써 생각으로 오르며 힘겨워 할 필요는 없다.

삶이란 한치 앞의 미래가 어떻게 될 지 그 누구도 장담할 수 없다.

저 봉우리에 내 발길이 먼저 닿을 지, 다음 생이 먼저 닿을 지,

그것도 아니면 고산병으로

다음 발자국에서 발길을 돌려야 할지 어찌 안단 말인가.

우리가 삶에 대해,

앞으로 다가 올 우리의 미래에 대해 고민하는 것도

이러한 종류의 근심이 아니던가!

미래에 어떤 일이 벌어질지는 아무도 모른다.

아무리 치밀한 계획을 세워둔다 할지라도

그것은 어디까지나 생각 속의 계획일 뿐,

그것이 그대로 미래가 되는 것은 아니다.

엄밀히 말해 미래는 오지 않는다.

그것이 오는 순간 이미 그것은 현재가 되지 않는가.

우리가 여기는 미래에 대한 모든 걱정과 근심, 불안감은

전혀 실체가 없는 것이다.

공연히 무거운 짐을, 쓸데없는 짐을 짊어지고 가는 것일 뿐이지!

무거운 바윗덩이를 짊어지고 가는 이가

너무 무거워 현자들에게 묻는다.

“어떻게 하면 좀 가볍게 갈 수 있을까요? 삶의 짐이 너무 무겁습니다.”

현자는 답한다.

“놓아라, 그 바윗덩이를 놓으라”

그러나 바윗덩이는 내 삶의 전부다.

그것을 소유해야 무언가 의지가 되고,

언제일지 모르겠지만 이것이 아주 유용하게 쓰일 것 같다.

그러나 그것은 아무런 실체도 없다.

그저 바윗덩이일 뿐이다. 무겁기만 한!

우리의 미래에 대한 모든 근심과 불안,

노후준비와 아이들 교육자금과 해야 할 모든 미래의 걱정들은

바로 이 바윗덩이와 같은 것이 아닐까?

그것이 전부인 양 여기서부터 무겁게 짊어지고 가야 할 만한 것이 아니다.

오직 지금 이 순간의 현재를 온전히 가볍게 살아가는 것이야말로

미래에 대한 가장 힘 있는 최선의 준비가 된다.

바윗덩이는 사실 아무 필요가 없다.

그것의 무게는 지금 이 순간의 삶을 온전히 누리지 못하도록

방해만 할 것이다.

지금 여기에서 활발하게 찬연하게 빛나는

순간순간의 신비를 느끼고 바라보기에

우리가 짊어진 짐은 너무 무겁다.

무거운데 신경 쓰느라 볼 것을 못 보고 있는 것이다.

여행자의 과도한 등짐의 무게가

여행 그 자체의 즐거움을 반감시키는 것 처럼.

지금 여기에 과거와 미래의 모든 것이 고스란히 담겨있다.

지금 이 순간 속에서 미래가 결정된다.

미래에 대한 근심, 걱정, 계획이

미래를 결정짓는 실제적인 무언가가 아니다.

지금 이 순간을 어떻게 사느냐 하는 현재의 의식 속에서

미래의 모든 것들이 결정된다.

그러니 진정한 미래에 대한 준비는

바로 현재의 순간을 100% 깨어있는 정신으로

누리고 살아내는 것에 있다.

내가 순간순간 살고 있는 ‘지금 이 순간’의 영적인 의식의 수준이

바로 다음 순간과 다음 주와 다음 달,

다음 해와 다음 생을 결정짓는 결정적인 요소다.

만약 현재를,

미래를 생각하며 계획하고 구상하고 근심 걱정하는데 보내게 된다면

그 사람의 미래를 만드는 장소인 현재가 온전하지 못하기 때문에

그 미래도 불안하게 될 수밖에 없다.

생각은 아상(我相)의 작용이요

아상은 그 어떤 본질적이고 평화로운 삶을 약속해주지 못한다.

현재라는 최대의 에너지 저장고이자 지혜의 저장고이고

모든 근원적인 힘이 나오는 순간을

본질적이지 않는 생각으로 채워넣지 말라.

과거나 미래 따위를 떠올리고 생각하고 구상하며 계획하고 짜맞추느라

그것의 근원이 되는 ‘지금 이 순간’을 망가뜨리지 말라.

이것이야말로 우리 삶의 아이러니요 역설이다.

장밋빛 미래를 위해 계획하고 구상하던 온갖 생각들이

사실은 바로 그 미래를 파괴하고 있는 것이다.

생각에 휘둘려 공연히 괴로워하지 말고,

오직 지금 이 순간을 깨어있는 정신으로 100% 불사르라.

마음을 관하는 순간, 생각은 사라지고

무심(無心), 무념(無念), 깨어있음의 덕목이

존재라는 초원 위에서 아름답게 꽃피어난다.

이것이야말로 우리 존재 근원의 힘이요, 지혜이고, 사랑이다.

산에 와서도 인간 근원의 어리석음의 뿌리인 아상이

지금 이 순간의 현존을 가로막는다.

산밑에서 걸어오르기 시작할 때

우리 마음은 곧장 산 정상에 올라있다.

걷는 그 순간은 그다지 중요치 않다.

빨리 걸어 올라 정상에 도착하는 것만이 목적이다.

그러나 그런 순간 우리는 지금 여기에 있지 않다.

마음은 미래에 가 있고, 다른 장소에 가 있다.

몸은 여기에 있는데 마음은 다른 시간, 다른 공간에 가 있는 것이다.

이렇게 몸과 마음이 분리되어 있을 때 현존은 그 빛을 잃는다.

산 중턱을 걸을 때, 그 사람의 목적은

산 정상에 도착하는 것이 아니라

바로 다음 발자국을 걷는데 있어야 한다.

오늘이 산행 6일 째인데,

빨리 올라야 할 봉우리를 다 정복하고 난 뒤에

내려오는 날을 기다린다면

나의 산행은 그 본연의 빛을 잃고 말 것이다.

지금 이 순간의 무거운 발걸음을 완전히 받아들이고

이 느낌을 온전히 흡수한다.

나는 지금 이 자리, 산봉우리 중턱에 서서 거친 숨을 몰아쉬며

한 발 한 발 내딛고 있을 뿐이다.

이 산은 눈에 보면 금방 닿을 것 같은데

금새 닿을 것 같던 그 지점에 서면

또 다시 새로운 봉우리가 나타나곤 한다.

 

 

아! 역시 호흡이 만만치가 않다.

산 중턱을 너머서면서부터는

몇 걸음 걷다 서서 호흡을 몰아쉬기를 반복한다.

오르막을 오를 때 일반적으로는

한 숨을 둘로 쪼개

들숨에 왼발, 날숨에 오른발을 일치시키며 걷게 되면

그리 힘을 많이 들이지 않고

오르막의 즐거움을 만끽하게 되곤 한다.

그 때 걸음은 그대로 명상이 되고,

호흡과 걸음이 하나의 물결을 이루어 존재 위의 수면을 파도친다.

그런데 위로 올라갈수록

한국에서나 얕은 곳에서는 딱딱 들어맞던

내 나름의 산행방법이 도저히 들어맞지가 않는다.

한 숨에 한 발로 바꾸고 나니

이제 다시 숨이 제자리를 찾는다.

들숨에 발을 들어올리고 날숨에 발을 내리면서

한 호흡에 한 발을 내딛는 것이다.

들숨과 날숨을 길게 쉬면서 한 발을 걷다보니

그 속도는 현저히 떨어지지만

그런 거북이 걸음이 이 높은 고도에서는 내 몸의 상태와 일치가 된다.

점차 올라갈수록 그 드높던 설산들이

나와 어깨를 나란히 하고 있는 듯한 착각을 일으킬 정도로

시야가 높아진다.

이 높은 고도에도 생명은 빛을 뿜고 있다.

이 작은 생명들이

이 위대하고 장대한 설산을 지키고 있구나 싶은 생각이 든다.

이처럼 우주는 가장 작은 것 속에 가장 큰 것이 녹아들어 있다.

 

 

잠시 걷고 쉬고 걷고 쉬기를 반복할 수밖에 없다.

호흡이 가쁜 건 이 곳에서 붙박혀 살아 온 지텐도 어쩔 수 없나보다.

쉴 때마다 머물러 앉거나 누워

매일 보면서도 오히려 보면 볼수록 경이롭다는 듯

지텐도 설산 앞에 깊은 휴식을 취하는 명상가가 된다.

 

 

설산을 배경으로 타르초가 불어온다.

바람과 타르초는 한 몸이다.

 

 

발 아래 딩보체 마을이 까마득하다.

 

 

추쿵 마을이 뛰면 한 달음 밖에 안 되어 보일 정도로 가깝게 느껴진다.

하늘은 그야말로 구름 한 점 볼 수 없을 만큼 짙푸르고 파랗다.

 

 

유유한 걸음으로 몇 번이고 걷다 쉬기를 반복한 끝에

결국 정상에 도착.

독일인들과 거의 동시에 정상에 올라서 기쁨을 함께 나눈다.

 

 

한 친구가 고도계를 들어 보이며,

정확히 지도에 나온 고도 그대로 5086을 가르켜 보이며

5,000고도를 돌파한 뿌듯함과 흥분을 감추지 않는다.

 

 

서로가 서로를 향해 대단하다며 엄지 손가락을 우뚝 세워주면서

함께 이 기쁨을 나눈다.

한참을 그렇게 낭카르창의 품 속에 몸과 마음을 기대고

희말라야의 호흡을 따라 숨을 쉰다.

바람이 분다.

오고 간다.

햇살이 좋다.

시선이 고정되고 마음은 멈춘다.

 

[히말라야, 내가 작아지는 즐거움]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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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법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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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틀 머문 남체에 벌써 정이 든 것인지,

발걸음을 떼려니 꽁대와 남체바자의 풍광이 시선을 잡아 끈다.

 

 

매 순간 순간의 현실에 나를 활짝 열어 둔다.

진정 열려있음이란 어떤 것인지를 비로소 진하게 느낀다.

이 대자연의 모든 것이 그 어떤 걸러짐도 없이 파도치듯 안으로 밀려들어오고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란 그저 그것들을 받아들여 충분히 느끼는 것 뿐이다.

남체에서 텡보체(Tengboche, 3860m)까지의 첫 번째 구간은

어제 에베레스트 뷰 호텔에서 보았던 바로 그 길로

두세 시간 동안 계속해서 입을 다물지 못하게 하는 웅대한 파노라마가 펼쳐진다.

 

 

아! 이것은 자연이 만들어 내는 장엄한 예술작품이요

엄중한 오케스트라이고 설산의 대서사시다.

발걸음과 호흡과 눈에 비친 대자연이

괭하고도 영령한 조화를 이루며 이 모든 것들과 하나가 되어 걷는다.

아! 그렇다.

이것은 걷는다기 보다는 그렇게 하나가 되는 과정이 아닌가.

아무런 간섭도 받지 않고 홀로 걷는다는 것은

자연과 하나되는 조화요 교감이고,

우주적인 근원과 연결되는 기도요 수행이기도 하다. 

헨리 데이빗 소로우는

'확신하거니와 내가 만약

산책의 동반자를 찾는다면,

자연과 하나가 되어 교감하는 어떤 내밀함을 포기하는 것이 된다.'

라고 말했다.

 

 

안 클레르 콜라타 수녀님의

산책과 자연과의 교감, 그리고 기도와 수행의 일치성에 대한

다음과 같은 언급에 나는 전적으로 동의한다.

'나는 산책길에서 아주 오랫동안 쉬곤 합니다.

풀 위에 앉거나 누워서 꼼짝도 하지 않고 가만히 있으면,

온몸이 이 거대한 우주에 완전히 동화되는 것 같아요.

그럴 때 나는 높은 곳을 향해 기도합니다.

아마도 하나님과 함께 조용한 시간을 보내고 싶어서겠죠?

걷기와 기도, 이 두가지는 깊은 관련이 있습니다.

산책할 때 내쉬는 숨은

내게 기도와 같은 것입니다.'

이처럼 홀로 자연의 길을 걷는다는 것은

곧 자연과 하나 되는 불이(不二)의 깨우침이며,

그것은 달리 말하면 신과의 대면이고,

어머니 대지의 품속에서 함께 호흡하는 기도이자

면벽 스님들의 지고의 참선이며,

구도자의 수행과 다르지 않다.

설산을 배경으로

하얀 설산과도 같은 스투파(탑)가 우뚝 서 있다.

 

 

여행자는 길을 걷다

스투파 앞에서 예를 올린다.

이 장엄한 스투파 앞에서 모든 종교는 하나다.

종교의 틀이라는 것조차 조잡한 하나의 형식이 아닐까 하는,

그리하여 모든 진리는 하나로 통하는 것이 아니냐 하는

장대하고 너른 사유가 희말라야에서는 저절로 피어오른다.

아마다블람과 스투파의 미묘한 조화.

 

 

왼편으로는 에베레스트를

오른편으로는 탐세쿠, 아마다블람, 눕체 등의 영봉을

함께 걷는 구도의 도반처럼 곁에 두고 녹계의 하늘길을 걷는다.

 

 

한 두 시간 쉬엄 쉬엄 걸으면 사나사가 나오고,

두어 채의 롯지와 기념품 판매하는 곳에 이른다.

잠시 롯지 마당에 앉아 휴식을 취하면서 롯지의 툭 트인 전망을 바라본다.

 

 

이 곳까지 함께 걸어 온 많은 여행자들이

이 곳 사나사에서부터 고쿄로 가는 팀과 에베레스트 방면의 팀으로 나뉜다.

사나사를 지나다 보면 좌측 오르막길로 쿰중 가는 길이 보이고,

조금 더 가면 삼거리가 나온다.

이 삼거리에서 고쿄와 에베레스트의 두 갈래 길이 나온다는 것을 안내하는

반가운 이정표를 만날 수 있다.

 

 

희말라야를 다니면서 어지간 해서는 갈림길이라도 이정표를 발견하기가 쉽지 않은 것을 생각해 보면

이런 이정표를 볼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중요한 갈림길임을 대번에 알 수가 있다.

위쪽 산 중턱을 가로지르는 오르막이 고쿄로 가는 길이고,

아래쪽 숲길이 에베레스트와 칼라파타르로 가는 길이다.

남체에서부터 사나사를 지나 점심을 먹을 곳인 푼키텡가(Phunki Tenga, 3250m)까지는

평탄하거나 완만한 내리막이다.

가벼운 발걸음이 마음까지 경쾌하게 만든다.

설산 봉우리 중에도 단연 눈에 띄는 아마다블람을 가까이 곁에 두고 함께 걷는다.

 

 

아! 비로소 나는 지금 이 길 위에

아무런 기대도 없이, 아무런 바람도 없이

그저 그저 걷고 있을 뿐이다.

과거와 미래의 모든 것들이 놓여지고

지금 이 순간 내 앞에는

바로 다음의 발걸음과 한 호흡의 들숨과

눈앞에 펼쳐진 하이얀 산맥의 현존만이 강물처럼 흐른다.

 

 

아! 이 느낌!

이 현존,

모처럼 잊혀졌던 그 무언가들이 다시금 새록새록 존재 위를 흐른다.

푼키텡가 조금 못 미처 타싱가(Thasinga, 3600m)를 지나니

동네 아이들이 숲속을 놀이터로,

꺾어진 나뭇가지를 시소삼아 올라 타고 노느라 정신이 없다.

 

 

마을길을 지나 설산 초오유에서 발원한 두드코시를 지나는 다리를 건넌다.

두드코시는 우유란 뜻의 두드와 강이란 뜻의 코시가 합쳐진

우유빛을 띄는 빙하 녹은 물로

빙하물은 미세한 광물입자들을 함유하고 있어 빛과의 산란작용에 의해

우유빛 바탕에 푸른 에머럴드 색을 동시에 띈다고 한다.

 

 

이 두드코시가 언뜻 보기에는 그저 작은 산골의 골짜기 같지만,

이 강이 흘러 흘러 인도인의 영혼의 고향, 갠지즈강으로 뻗어나가고

최종적으로 인도양까지 흘러들게 되는 장대한 역사를 만들어내는 발원지인 셈이다.

 

 

두드코시를 건너 푼키텡가에서 점심을 먹으려는데

자리가 꽉 찬 터라 저쪽 구석자리에 홀로 앉아 계시는 지긋한 어르신께

옆 자리 함석을 여쭙는다.

그런데 지금까지 산에서 한 번도 보아오지 못했던 한국분이 아닌가!

“한국 분 아니세요?”

하는 물음이 얼마나 반갑던지.

춘추가 60이 넘으셨는데 이렇게 정년 퇴직 후에 산으로 산으로 떠도신다고 한다.

퇴직 후 지난 몇 년간 세계 도처를 여행하시다

요즘은 네팔의 설산에 반해 안나푸르나, 랑탕에 이어 이렇게 에베레스트까지 오시게 되었다고.

희끗희끗한 연세에 홀로 저렇게 여행할 수 있다는 것이 아름답게 느껴진다.

물론 그만한 경제적 여유도 있어야 하니

특별한 소수 특권층이나 가능한 것이라고 혀를 차는 사람들도 주위에 있다고 하던데,

이 어르신의 대답은

“물론 그것도 전혀 틀린 말은 아니지만,

돈이 있어도 못 오는 사람도 많고,

또 조금만 절약하면 인도나 네팔 같은 나라는 한국에서 지내도 그 정도의 돈은 쓸 정도”

라고 항변하신다.

나이가 들면 누구나 인생의 근원적인 어떤 것을 찾게 되듯

지긋한 연세에 이렇게 순례의 길을 나서는 사람들이

늘고 있다고 한다.

그런 분들에게 길을 떠난다는 것은

단순한 여행이 아닌 숭고한 영적인 순례의 길이 된다.

홀로 두 발과 몸뚱이 하나에 의지해서

낯선 길을 떠난다는 것은,

그 자체만으로 구도의 한 과정이며,

스와미 람다스의 말대로

'신과 자신을 찾아가는 것'이기도 하다.

불교 뿐 아니라 기독교, 유대교, 회교 등

거의 모든 종교에서 순례는 구도의 한 부분으로 여겼다.

기독교 순례자들은

예수의 자취를 따르고자 예루살렘을 향해 걸었고,

이슬람교도들은 알라의 집으로의 순례라는 뜻의 하지(Hajj),

즉 메카로의 순례를 의무적으로 행해 왔으며,

티벳인들 또한 라싸로 삼보일배의 순례를 떠나왔다.

또한 전 세계에서 불교 신자들이

부처님의 탄생, 출가, 성도, 열반지인 4대 성지를 향해

지금도 순례를 멈추지 않고 있다.

특히 티벳의 성산 카일라스는

우주의 중심인 수미산을 상징하는 곳이며,

불교, 힌두교, 자이나교, 라마교 등

주요 종교인들의 공통적인 성산이라 불리는 곳으로,

그 종교 뿐 아니라 요즘에는

세계의 수많은 사람들에게 거룩한 순례지로

일생에 꼭 한번쯤은 다녀오고자 하는

순례의 정점에 있는 곳이기도 하다.

이처럼 순례라는 것은

모든 종교를 초월해 근원에 이르기 위한,

깨달음에 이르기 위한 하나의 수행 방법이요,

종교적 실천의 핵심을 이루고 있기도 하다.

그렇기에 이렇게 특정 종교를 믿지 않는 사람들조차

누구나 한 번쯤은 거룩한 곳으로의 순례를 꿈꾸는 것이 아닐까.

그것은 어쩌면 누구나 자신의 근원으로의 귀향을 향해

나아간다는 점에서

인간 성품의 근간을 이루는

정신적 유전 요소인지도 모르겠다.

어르신과의 짧은 대화 속에서,

순례에 대한 의미를 찾게 된다.

순례자가 꼭 종교적이거나 영적일 필요는 없으며,

반드시 자연과의 교감과

신비에 대한 뚜렷한 체험 내지 신념이 있을 필요는 없다.

그저 산이 좋고, 여행이 좋고, 홀로 걷는 것이 좋으며,

새벽에 떠오르는 태양 앞에서 숨을 멈추고 바라볼 수 있는

작은 감수성이 있다면 그것을 애써 종교적이니 영적이니 순례니 하는

용어로 가두지 않더라도 그 본질에서는

결국 같은 길 위의 구도자가 되는 것이 아닐까.

어르신께서는 히말라야를 걸을 때 가장 행복하다.

그동안 오랜 삶 속에서 깨닫지 못했던 아름다움의 의미에 대해

비로소 진하게 경험하게 된 것이다.

그러면서 이 아름답고 진한 풍광의 경험과 느낌들을

아내나 자식들과 나누고 싶지만 그게 잘 안 된다.

아내나 자식들과 함께 오고 싶어 아무리 설득을 해도

“그 험한 산에 힘들게 왜 가느냐?”고 한다네.

그런 거 보면 모든 것은 제 마음이 동해야 하지

아무리 좋은 것도 저 싫다면 그만이다.

 

 

그래서 때때로 삶을 힘겨워 하는 사람들에게

이런 저런 방법 같은 것을 알려줘도 그것이 전혀 먹혀들지 않는다.

자기 자신만의 관점과 견해와 좋고 싫은 어떤 견고한 틀이 있어서 그렇다.

그래서 진정으로 길을 찾고자 하는 사람은

먼저 자신을 비우고 활짝 열 수 있어야 한다.

가슴의 창이 닫겨 있으면

그 창으로 지혜도, 행복도, 풍요로움도 들어갈 수 없다.

닫혀진 마음에는

늘 자신의 기존 관점이나 색안경으로 걸러진 선택적인 것들만 들어올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스승을 찾아갈 때는

언제나 빈 마음이어야 하고,

자신을 완전히 내려 놓고

‘내가 옳다’고 여겨 온 모든 울타리를 걷어 치우고 친견을 해야 하는 것이다.

그러지 않고 자기 고집, 아상과 아견을 꽁꽁 움켜쥔 채 찾아간다면

붓다나 예수를 만날지라도 거기에 소통과 참된 이해는 깃들지 않는다.

그 때 우주는 당신을 도울 수 없다.

늘 충만한 우주의 도움을 당신은 스스로 닫음으로써 받지 못하는 것이다.

그래서 붓다께서는 “인연 없는 중생은 붓다고 구제하기 어렵다”고 했다.

잠시의 대화를 뒤로한 채

점심을 마치신 어르신은 포터와 가이드를 영솔하며 먼저 길을 나서신다.

점심을 먹고 이 곳 롯지에서 파는 상점을 잠시 돌아 보며 숨을 돌린다.

 

 

이 곳 푼키텡가부터 텡보체까지는

무려 고도 600미터를 단숨에 올라야 하는 가파른 오르막 구간이다.

천천히 발걸음을 옮긴다.

오른 무릎의 통증은 여전하다.

오르막을 천천히 아주 천천히 걸어 오르며

오른 무릎으로 주의력을 옮긴다.

한발 한발 내딛을 때마다 찌릿찌릿한 느낌이 그곳에서 감지된다.

그것을 탓하지 않고, 걱정하지 않고, 빨리 나으라고 재촉하지 않고

다만 그 작은 통증을 가만히 지켜보며 걷는다.

지켜보는 동안 그 통증은 사실 ‘통증’이라는 이름과는 어울리지 않는

그저 단순한 어떤 느낌일 뿐이다.

공연히 그 하나의 생생한 느낌에 ‘통증’이라는 이름을 붙이지 않기로 한다.

그렇게 걷다보면 그것은 싫은 어떤 느낌이 아니라

그저 그것이 거기에 있을 뿐이다.

오히려 지켜보는 가운데 생기로운 생명력 같은 무엇을 느끼게도 되고,

그것을 통해 내면으로 들어가는 통로 같은 것을 느끼게도 된다.

그 하나의 통증이 오히려 명상의 통로가 되는 것이다.

Posted by 법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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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Favicon of http://www.californiareads.org/includs.asp BlogIcon fake rolex 2014.05.28 12:23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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