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라파타르, 목적 없이 다만 걸을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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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말라야 명상순례

칼라파타르, 목적 없이 다만 걸을 뿐

목탁 소리 2011. 8. 11. 11:19

최종 목적지에서 최악의 악천후를 만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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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의 웅성거림을 듣고 오늘이 드디어 칼라파타르(Kala Patthar, 5550m)를 오르는 날임을 안다. 칼라파타르! 벌써 몇 년 전부터 그 이름을 되새기며 바로 오늘을 그리워해 왔다. 칼라파타르라는 어떤 특정지명이나 장소를 그리워했다기보다는 그 상징이 가지는 어떤 향기를 기다려왔던 것이리라. 칼라파타르는 내게 상징적인 곳이다. 물론 칼라파타르 이전에 히말라야와 안나푸르나, 에베레스트라는 이 곳 네팔의 설산은 그저 산이기에 앞서 나에게 있어 존재계의 밑뿌리, 깊은 심연의 고향과도 같은 숭고한 귀의처요, 설산 고행의 붓다나 밀라레빠의 모든 신비들이 꽃처럼 피어나는 곳, 그래서 깨어남의 자궁과도 같은 그런 것들을 상징한다. 그 상징 속의 대표적인 곳으로 내가 꼭 이 생이 끝나기 전에 밟아 봐야겠다고 누누이 생각하고 발원해 왔던 그곳이 바로 칼라파타르가 아니던가.

 

나는 지금 바로 그 투명한 서원이 움트는 그 상징의 산 아래 서 있다. 바로 그 산 아래, 세상이 깨어나기 이전, 정확히 나에게 허락된 이 시간, 이 공간에 나는 서 있는 것이다. 우주법계가 나를 위해 준비한 바로 그 시간과 공간의 때라는 것을 고스란히 받아들인다.

잠시 밖에 나가 보니 아직 어둔 밤중이고 그 어떤 날보다도 시린 추위와 살을 에는 칼바람, 심지어 싸락눈발까지, 설산을 밟은 이후로 가장 혹독한 날씨가 ‘정말 올라가려고?’ 하는 눈빛으로 시험이라도 해 보겠다는 듯 적막감을 선사한다. 함께 있던 여행자들도 나갔다 들어오더니 오늘은 도저히 안 되겠다고 그냥 다시 눕곤 한다. 이런 주변 상황과는 상관없이 이런 저런 판단 없이 그저 당연하다는 듯 몸이 알아서 준비를 한다.

가지고 온 모든 옷가지들을 최대한 끼워 입고 양말도 두 겹에 모자와 장갑까지, 몸에 단단히 동여맬 수 있는 가능한 모든 것들이 동원된다.

 

드디어 롯지 문이 열린다. 지텐은 칼라파타르를 오르지 않고 먼저 내려가 로부체에 롯지를 예약하기로 했다. 저기 멀리 칼라파타르 언덕 중턱 즈음에 십여 명 쯤 되어 보이는 랜턴의 행렬이 있는 것을 보니 다행히도 나 홀로 이 경한한 악천후를 뚫고 가는 것은 아니구나 싶은 안도감이 든다. 멀리 그 흐릿한 불빛을 따라 길 없는 황무한 길을 헤치며 묵묵히 걷는다.

점퍼의 모자를 눌러 썼더니 그 위로 싸락눈이 탁탁거리며 거센 바람과 함께 와 닿는 소리가 제법 거칠다. 아무리 칼라파타르라고는 하지만 오늘 날씨는 지난 일주일간 예상 가능했던 그런 날씨와는 분명히 무관해 보인다. 그야말로 요즘 같은 투명한 가을날에 있어서는 정말 예상하기 어려운 모처럼의 악천후라는 것을 뒤늦게 알았다.

 

어둠 속에 눈보라와 거친 바람과 속살까지 후벼 파는 추위를 온몸으로 마주하며 한 발 한 발 그 거센 악천후 속으로 늠연하게 걸어 들어간다. 마치 태풍의 한 가운데로, 잠시 뒤 어떤 일이 일어날지 모를 그런 미지의 소용돌이 속으로 홀홀 뛰어드는 사람처럼 묵묵히 칼라파타르를 오른다.

출발하며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추위가 늠렬하다. 사실 10월이면 그리 춥지 않고 낮에는 덥기까지 하다며 아무 걱정 없이 다녀오면 된다는 말을 듣고 추위에 대한 대비를 별로 해 오지 않은 탓에 추위 대비책이라는 것이 얇은 여름옷들을 몇 개 더 끼워 입고 점퍼 하나를 입은 정도에 불과하다. 나중에 봤더니 다른 서양인 트레커들은 8,000미터급 정상을 오르는 수준의 최신 등산용품을 완벽하게 챙겨왔다.

그럭저럭 추위는 견뎌보겠는데 장갑이 작고 얇은 터라 손과 손목 부분에 드러난 하얀 속살이 찢어지는 듯 시리다. 추워서 그런지 발 한 발자국 떼기도 여느 때 같지 않다. 몸도 한결 더 무겁다. 그동안의 행군에서 온 무리감이 한꺼번에 몰려오는 듯하다. 그도 그럴 것이 지금까지의 고도 중에 가장 높은 봉우리가 아닌가. 내 생애에서 한 번도 오른 적이 없는 최고 높이의 5,550m를, 그것도 이 추위와 강풍, 싸락눈을 뚫고 앞도 안 보이는 이 어둔 새벽녘 길을 홀로 걷는 것이 아닌가.

 

몸에 느껴지는 고통의 무게감이 지금껏 살아온, 걸어 온 여타의 다른 그것들에 비할 수 없을 정도로 섬뜩하게 다가온다. 사람 몸이 이렇게 무거울 수도 있고, 호흡이 이렇게 버거울 수도 있으며, 한 발을 내딛는다는 것이 이렇게 엄청난 것일 수 있다는 것을 새삼 깨닫는다. 한 발자국 내딛는 것이 고개를 하나 넘는 것만큼이나 힘에 부친다. 생각처럼 몸이 말을 안 듣는다. 생각 같아서는 고작 몇 걸음도 안 되는 거리를 단번에 내디뎌주마 싶은데, 몸이 전혀 따라 주지를 않는다. 세 걸음, 네 걸음을 연달아 내디딜 수가 없다. 한 걸음 걷고 크게 한 숨 몰아쉬고, 또 다음 걸음을 걷고 다시 멈춰 한 숨을 거칠게 몰아쉬는 이 더딘 일을 무던히 반복하고 있다.

이 단순한 호흡과 걷기의 무한 반복을 지켜보며, 또 한 발자국 떨어져 이 전체적인 상황을 바라본다. 그런데 이 모든 상황 속에서도 그 춥고 시리고 힘든 불편감과 고통의 느낌들이 저기 남의 얘기처럼 저만치 떨어져 있다. 힘든 상황과 나 자신 사이에 어떤 거리감, 공간감이 놓여 있다. 힘들고 춥긴 한데 그것이 내 문제가 아니라 거기 그런 한 상황, 한 존재가 다만 걷고 있을 뿐이다. 손과 손목 부분의 시린 느낌이 가장 강하게 보인다.

계속해서 천천히 아주 천천히, 아마도 내 생애에서 가장 느린 걸음으로 한 걸음 한 걸음 저어가고 있다. 조금씩 어두커니 서광이 밝아온다. 역시나 날이 밝아도 기존의 예상 가능하던 그런 밝아옴이 아니다. 보통 이곳은 새벽부터 점심 전까지는 구름 한 점 없는 티 없이 맑은 하늘, 그 푸르른 색감을 도저히 흉내 낼 수도 표현할 수도 없을 만큼 청명한 하늘을 보곤 했는데 오늘은 신명부터 온통 안개로 뒤덮여 있다. 저 먼 설산이 평일 오후보다도 더 안 보인다.

 

시야가 좁다. 먹먹한 구름과 음음한 하늘, 서릿바람과 된추위가 전부다. 처음 여행을 계획할 때, 내 목적은 칼라파타르에 있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다른 날들은 좀 날씨가 좋지 않을지라도 칼라파타르에 오르는 날 만큼은 화창해지기를 바랐다. 심지어 칼라파타르 오르는 날 상황이 좋지 않으면 며칠을 더 묵더라도 이곳의 청명한 풍광만은 놓치고 싶지 않았다. 그런데 지금까지 약 7일을 걸어오는 동안 단 하루도 흐리거나 궂은 날씨가 없더니 바로 오늘, 어제 오후까지만 해도 그렇게 투명하던 하늘이, 거짓말처럼 푹 꺼져 버리는 게 아닌가. 이게 무슨 운명의 장난이란 말인가! 그냥 칼라파타르 정상에 올라앉아 와락 울어버려야 할 바로 그 최악의 상황을 맞은 것이다.

그런데다가 추워 죽겠다. 장갑이 얇은데다가 짧아서 손목까지 덮어주지 못해 칼라파타르에서 손목을 움직이는데 완전히 얼어붙었다. 이 심각한 통증! 이게 뭐람! 하늘도 무심하시지.

아! 그러나 이 최악의 상황 조건이 별 문제가 되지 않는다. 거기 그냥 그런 상황이, 가치중립적인 그저 하나의 상황이 놓여 있을 뿐이다. 좋고 나쁜 아무런 분별이 붙을 이유가 없는 그저 자연스러운 하루가 이어지고 있을 뿐이다.

 

칼라파타르가 내게 부여하던 하나의 상징체계가 무너지고 있다. 칼라파타르, 그 이름이 내게 주던 상징성이 무너진 자리에 그저 지금 이 순간이라는 자리와, 이 쿰부히말 전체의 설산들이 나아가 이 우주 전체의 모든 공간들의 절대성과 신비함이 들어선다.

칼라파타르는 어제의 그 낭카르창과 다르지 않고, 저 아래의 고락샵과 다르지 않으며, 남체나 루클라, 카투만두나 아니 매일 오르내리던 우리 절 이름 없고 길도 없는 뒷산 오솔길과 다르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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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전한 신비의 순간, 완벽한 날들

 

받아들임과 온전한 수용이라는 것이 어떤 명상의 방법이라거나 마음으로 억지로 받아들여 인정해 주는 그런 부자연스러운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그저 지금 이 순간 숨을 쉬듯, 구름이 흘러가듯, 자연스럽게 이 모든 상황이 수용되고 받아들여지는 그런 무위(無爲)의 어떤 것이 아닌가.

모든 순간은 아름답다. 모든 날씨는 담염하다. 모든 곳이 칼라파타르요, 쿰부이고 히말라야다. 모든 순간이 더 이상 자유로울 수 없는 샨티, 평화로움 그 자체다.

언제나 우리 삶에는 매 순간 완전하고도 완벽한 날들, 순간들이 계속되고 있다. 아무리 궂은 날씨라고 하더라도, 내 계획과는 완전히 어긋나는 일들이 일어난다고 할지라도 사실 그 모든 일들, 사건과 날들은 나에게 있어 최고의 순간들이다. 내게 주어진, 나를 위해 정확하고도 정교하게 만들어진 더 큰 질서의 이치대로 내가 바로 그 자리에 바로 그 순간 놓이게 된 것이다!

 

나를 위해 이 우주에서 준비해 놓은 엄청난 축제요, 선물들이 매 순간 내 앞에 펼쳐지고 있다. 이 얼마나 엄청난 일인가. 이 얼마나 멋진 일인가! 우주는 언제나 나를 위해 대 법계의 조화로운 선율을 소려하게 연주하고 있다. 그 음악은 단지 귀로만 들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눈으로도, 귀․코․혀․몸․뜻으로 온 존재로써 듣고 볼 수 있는 소리 너머의 소리요, 연주 너머의 연주다. 이것은 완전한 긍정의 세계다. 완전히 새로운 차원의 순려한 세계인 것이다.

우리는 이 드넓은 세계 속에서 언제나 충만한 사랑과 감사, 그리고 만족과 지혜로써 살아갈 수도 있고, 그와는 반대로 바늘 하나 꽂을 자리도 없는 좁아터진 암막한 세계 속에서 허우적거릴 수도 있다. 그 모든 것은 내 밖에 있는 세계의 문제가 아니라 내 안의 자각(自覺)의 문제다.

세계는, 우주는, 상황은 아무런 잘못이 없다. 심지어 나 자신에게도 아무런 문제는 없다. 거기 세계가 있고, 삶이 있고, 매일매일 벌어지는 사건들이 있으며, 그 속에 어떤 한 존재가 우주적인 흐름을 타고, 우주의 완전한 도움과 보살핌을 받으며 무한한 자비로써 살려지고 있다. 물론 우리는 그 존재에게 ‘나’ 혹은 ‘너’라고 이름 붙이기를 좋아한다. 또한 그 ‘나’가 거기 있는 자연스럽고도 합당한 하나의 상황에 좋거니 나쁘거니, 옳거니 그르거니 하고 분별과 해석을 붙인다. 그렇게 붙인 해석에 스스로 얽매여 집착하거나 혐오하거나, 붙잡으려 애쓰거나 버리려 애쓰면서 공연히 문제를 만들어내며 살아가고 있을 뿐이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계의 실상이다. 세상은 언제나 있는 그대로다. 모든 것이 있는 그대로 있어야 할 바로 그 곳에 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나’라는 아상은 있는 그대로를 있는 그대로 보지 못하고 자기 색안경에 걸러 왜곡해서 본다. 그러면서부터 모든 문제가 시작된다.

진리는 쉽고도 단순한 곳에 있다. 깨달은 각자(覺者), 인류의 성인, 그들은 그 단순함을 깨쳐 본 것이다. 즉 그들과 우리의 차이점은 한 가지다. 그들은 있는 그대로를 있는 그대로 보고, 우리는 있는 그대로를 자기 식대로 왜곡해서 볼 뿐이다. 그래서 결국 삶의 문제는 다시 ‘보는(觀)’ 문제로 되돌아온다.

인식의 문제, 자각의 문제, 깨어있음의 문제, 올바로 ‘보는’ 문제, 그것이야말로 온전한 삶을 위한 조건의 모든 것이다. 올바로 볼 때 모든 문제는 더 이상 문제가 아니다. 올바로 보는 순간 이 우주는 당신 앞에 본연의 무한한 자비와 평화, 경외와 참된 지혜를 보여 줄 것이다.

 

우리가 해야 할 것은 바로 이 ‘올바로 보는’ 것이 전부다. 그것이 바로 불교에서 최종적인 깨달음을 위한 가장 중요한 여덟 가지 길의 첫 번째인 ‘정견(正見)’이다. 보되 치우침 없이, 집착 없이, 분별과 차별과 해석과 나뉨 없이 있는 그대로의 실상을 있는 그대로 보는 것이다. 그랬을 때 이 우주는 어느 하나 빼놓지 않고 낱낱이 실상이요, 진실이 되고, 진리가 된다. 그 어떤 모습도 진리의 모습, 실상이 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법화경』의 제법실상(諸法實相)의 이치다.

그리고 바로 그 ‘보는’ 문제를 지적하면서 ‘바로 보는 길’을 제시하는 모든 것이 바로 수행법이요, 명상의 길이다. 그것이 관(觀)이며, 지관(止觀)이자 정혜(定慧)이고, 위빠사나이며, 모든 수행법이 이 ‘보는 방법’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지금 이 순간 나의 보는 방식, 거기에 삶의 모든 것이 달려 있다. 거기에 내 전부를 걸라. 돈에 내 삶의 전부를 걸 의미가 있을까? 노후 준비에 내 청춘을 다 바칠 이유가 있을까? 명예, 권력, 지위, 사랑, 소유에 내 삶을 전부 걸기에는 무언가 부족하지 않은가! 바로 여기 있다. 그토록 찾아 왔던 내 삶의 전부를 걸 바로 그것이 이것이다. 대장부는 바로 이것에 삶을 건다. ‘지금 여기’에.

내 삶의 전부를 바로 지금 이 순간의 ‘바라봄’에 건다는 것이야말로 내게 주어진 삶을 완전한 책임감과 온전한 지혜로 살아가는 것이다. ‘지금 여기’야말로 모든 삶의 원천이요, 에너지의 근원이고, 진실을 발견할 유일한 통로다.

‘지금 여기’에 모든 것이 달려 있다. 이미 지나간 과거도 ‘지금 여기’에 있으며, 아직 오지 않은 미래 또한 ‘지금 여기’에 다 있다. 이것은 양자물리학에서도 밝혀낸 것이기도 하다. ‘지금 이 순간’의 봄이 내 삶의 모든 것을 결정한다.

 

내 미래를 알고 싶은가? 지금 하고 있는 일이 잘 될 것인가, 망할 것인가, 지금 이 사업을 계속 확장할 수 있을까, 나의 명예와 지위가 얼마나 더 올라 갈 것인가, 그 모든 것은 삶을 살고 있는 ‘바로 지금 이 순간’을 어떻게 사느냐에 달려 있다. 다시 말해 지금 이 순간을 어떻게 ‘보느냐’, 어떻게 자각과 깨어있음으로 지금 여기를 살아가고 있느냐에 전적으로 달려 있다. 현재가 모든 미래를 만들어내기 때문이다.

내 삶의 창조자는 ‘지금 여기’다. 바로 보는 순간순간이 늘어갈수록 우리의 삶은 생기를 찾고 잃어버린 창조성의 근원을 찾으며, 지혜와 사랑이 삶을 통해 저절로 춤추게 됨을 경험한다. 그것은 직접 맛본 사람만이 알 수 있는 생생한 자각의 세계다. 결코 허황되거나 형이상학적이라거나 뜬구름 잡는 식의 말을 위한 말이 아니다. 이것은 신비주의가 아니라 지금 여기의 생생한 현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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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라파타르 롯지의 아침 풍경

 

칼라파타르 바위 산 꼭대기, 바람 잔잔한 바위 틈 사이에 앉아 숨을 돌린다. 바위짬 사이로 간간이 불어오는 칼바람을 온 몸으로, 온 감각으로 삼킨다. 이것이 지금 여기의 생생한 현실이요, 이 평범함 속에 비범함이 있고, 이 피부에 와 닿는 현실감 속에서 삶의 신비는 피어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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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전히 바람은 차다. 제 몸에서 나온 손과 손목을 제 몸이 알아서 거둔다. 몸이 손을 품자 차차 따뜻한 온기가 사랑처럼 일어나 언 손목을 녹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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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상에 오르니 그래도 외국인 여행자들이 몇몇 눈에 띈다. 에베레스트가 안 보인다고 이놈의 구름과 날씨가 된통 욕을 얻어먹고 있다. 그나마 가까운 설산들은 날이 밝으면서 제법 희뿌옇게나마 그 뒤태를 내비쳐 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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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라오던 중 연세가 지극하신 한국인 어르신 한 분은 거의 100여 미터를 남겨두고 되돌아 가셨다고 한다. 2주에서 3주 정도의 긴 시간 동안, 그것도 많은 돈을 들이고 많은 준비를 한 끝에, 아마도 최소 1~2년 이상은 준비한 끝에 올라오셨을 칼라파타르였을 터다. 그런데 그 마지막 100미터를 남겨두고 돌아간다는 것이 상상이 되는가? ‘그 정도면 거기까지 힘들여 갔는데 조금 더 힘내서 올라가지’ 싶은 생각이 들 것이다. 그러나 현실은, 칼라파타르의 현실은 그렇지 않다. 그 어르신의 되돌린 발걸음이 십분 이해가 되고도 남음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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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고도에서 오들오들 떨고 있노라니 따뜻한 차 한 잔 생각이 간절하다. 어떻게 올라 온 칼라파타르인데 한참 앉아 머물다 내려가야지 싶어도 이 추위와 바람을 몸이 견뎌 내지를 못하고 내려가라는 신호를 보낸다. 터벅터벅 묵직하게 최대한 느릿느릿 올라오던 그 길을, 내려갈 때는 너무도 가벼운 발걸음으로 내딛는다. 날이 밝으니 한결 걷기가 수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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롯지로 들어서니 힘이 빠져 축 처져 있는 몸이 더 생생히 느껴진다. 롯지의 아침은 늘 그렇듯 분주하다. 칼라파타르를 다녀 온 사람, 아예 날씨를 보고 포기한 사람, 이미 어제 낮에 다녀오고 하산을 준비하는 사람, 내친김에 에베레스트 베이스캠프까지 다녀오려고 준비하는 사람, 그리고 새벽부터 걸어서 로부체에서 막 도착한 사람에, 아침을 먹는 사람들까지 겹쳐서 롯지 안은 시장통을 방불케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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빵 한 조각 시켜 먹는 것이 이렇게 복잡할 줄은 몰랐다. 포터가 있을 때는 주로 포터가 알아서 주문해 주고 배달까지 해 줄 뿐만 아니라 가격 결산까지도 포터와 모든 것을 끝낸다. 롯지 또한 포터 이름으로 주문 받고 계산하고 모든 것을 포터 책임제로 운영하고 있는 듯 보인다. 어떤 롯지는 손님을 데리고 오면 포터에게 공짜로 재워주고 식사도 제공을 한다는데, 요즘 들어 그 원칙이 깨지면서 포터에게도 현지인 가격으로 저렴하게나마 식사비를 받는다고 한다. 포터들은 식당에서 돈을 지불하고 또 소개시켜 준 여행사에 얼마씩 떼이고 이래저래 직접 받는 돈은 그리 많지 않아 보인다.

 

다행인 건지 오히려 포터들에게는 더 큰 짐인지 몰라도 마오이스트(Maoist, 마오쩌뚱주의, 모택동사상)가 집권을 하고부터는 포터들도 똑같은 사람인데 식당 방에서 자지 말고 무조건 트레커들과 똑같이 도미토리나 방에서 자도록 해야 한다고 정부 방침으로 못을 박았다고 한다. 물론 좋은 말이고, 그래야 하는데, 아직은 시행 초기라 방도 더 부족하고, 포터들도 그만큼 방값까지 더 내야 하는 부담이 가중되다 보니 아직까지는 암암리에 예전처럼 그냥 식당 방에서 다함께 자는 곳이 많다고 한다.

 

포터 지텐이 방을 잡는다고 로부체로 내려가고 없으니 아침 밥 하나 시켜 먹기가 너무 어렵다. 에베레스트를 등반하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꼭 들르는 곳인데 롯지는 몇 개 없다 보니 특히 이런 아침은 더없이 번라한데다가, 모든 시스템을 포터와 가이드를 중심으로 하다 보니 여행자가 직접 주문하고 누군지 확인해서 음식을 받아내고, 지텐이 하던 내 장부를 찾아 체크하는 그 단순한 일에도 시행착오가 생긴다.

이처럼 포터는 꼭 짐만 들어주는 것이 아니라 롯지나 식당에서도 큰 몫을 하고 있고, 특히 비상 조난 시나 갑작스런 고산병, 혹은 길을 잘못 드는 데서 오는 어려움 등 많은 부분을 보살펴주고 있는 것이다. 고락샵 롯지의 분주한 아침 시간이 지텐에 대한 고마움을 더욱 느끼게 해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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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 식사를 어렵게 마치고 한참을 롯지에 앉아 몸도 녹이고, 쉬고 있다. 이후 일정은 그저 내리막길로 2시간 남짓 거리에 있는 로부체까지만 가서 묵으면 된다. 내일 또한 로부체에서 내리막으로 3시간 거리의 종라까지만 가면 되는 비교적 가벼운 코스다. 대부분의 여행자들이 칼라파타르를 오르고 난 뒤 체력을 비축하기 위해서, 또 그 다음날 있을 촐라패스와 이어지는 고쿄리에 대한 휴식 내지는 체력 안배 차원으로 그렇게 가벼운 코스를 잡는다고 하는 일상적인 순서를 따른 것이다.

 

걸을 때 정신은 우주와 연결된다

 

아침 식사 후 느긋하게 고락샵 롯지를 출발한다. 오늘은 하루 종일 궂은 날씨가 계속되려나 보다. 그래도 날이 밝고 나니 궂은 날씨라고 해야 구름이 끼어있는 정도지, 비나 눈이 오는 것은 아니고 낮시간부터는 그리 춥지도 않아 오히려 걷기에는 제격인 날씨라고 볼 수도 있겠다. 로부체까지의 짧은 내리막길이 아쉽다.

이렇게 산에 와서 걷다 보니 오전의 걷는 시간이 오후의 쉬는 시간보다 더 간절하고, 더 생기 넘치며, 설레임으로 가득한 시간이 된다. 오히려 오후가 되어 쉬는 시간이 되면 그 다음날 있을 일정에 대한 기대로 부풀어 오른다. 그래서 오후에도 가까이 마을길이나마 산책의 길을 걷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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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에 와서 더욱 걷는다는 것에 대해 많은 생각을 하게 된다. 걷는다는 것이야말로 그 자체로 완전한 행이 아닐까. 걷는 그 순간에 우리는 완전히 걸음 속에서 존재한다. 가부좌를 틀고 앉아 있는 것 못지않게 오랜 수행자들이 왜 그토록 걷기 수행, 경행(經行)을 강조했는지를 알 것 같다. 마음과 몸이 둘이 아니다 보니 몸의 자세에서 마음의 집중이며 명상의 힘이 크게 좌우될 수밖에 없다. 그래서 될 수 있으면 비뚤게 앉아 있기보다는 꼿꼿하게 가부좌를 틀고 앉아 허리를 곧게 펴고 앉는 것이다. 그런데 이런 결가부좌 못지않게 많은 수행자들은 걷기 수행을 강조해 왔다. 걷는 행위, 그 자체만으로도 오롯한 정신의 기틀이 서게 되기 때문이다.

명상할 시간이 없다면 될 수 있는 한 많이 걸으라. 온갖 생각의 짐을 짊어지고 걷지 말고 그냥 걸으라. 생각과 함께 걷는 것이 아니라 다만 홀로 걸으라. 그렇게 텅 빈 걸음을 내디딜 때 비로소 이 우주와의 진정한 관계성이 회복되고 지난 시간을 살아 온 나의 삶이 분명하게 보여 지기 시작할 것이다. 걸으며 애써 수행이나 명상을 하려고 애쓸 필요는 없다. 무언가를 자주 하려는, 성취해 내려는 그런 마음으로 인위적인 ‘걷기 명상’을 해서는 안 된다. ‘걷기 명상’은 진정한 명상이 아니요, 오직 다만 ‘걸을 뿐’이 되었을 때만이 참된 명상과 연결될 수 있다.

 

그저 자연스럽게 걸으면 된다. 혹시 걷는 동안 부자연스러운 생각들, 기억들, 계획들이 떠오른다면 그 순간 걸음은 평화를 잃게 되고, 그렇게 되면 우리의 의식은 곧장 발길을 돌려 집으로, 회사로, 컴퓨터 앞으로, 무언가 일거리 앞으로 나아가게 될 것이다. 걸으면서는 그저 걷기 그 자체로 걸으면 된다. 걷는 것 자체가 목적이 되도록 하라. 그러나 생각이 끼어드는 순간 걷는 목적은 저만큼 달아나고 곧장 또 다른 목적이 떠오를 것이다. 바로 그것을 주의하면서 걸으면 된다. 올라오는 생각이나 기억, 계획, 즉 과거와 미래들을 ‘지금 여기의 걷기’로 되돌려 놓는 것, 그것이 걷기 명상의 전부다. 다만 걷되 생각에 지배되지 않고, 과거나 미래에 끌려가지 않으며, 오직 텅 빈 걸음을 내딛는 것이다. 그렇게 되었을 때 ‘대지를 맨발로 걸으면 우리의 정신은 우주로 연결된다’는 아메리카 인디언의 말처럼 걷는 그 행위 속에 정신적인 각성과 우주적인 교감이 함께 한다.

어디 그 뿐인가. 걷기는 무엇보다도 가장 기본적으로 몸의 건강을 돕는다. 그야말로 세실 가테프가 그의 책 『걷기의 기적』에서 말한 것처럼 ‘걷기는 완벽한 운동’이다. 가테프는 이렇게 표현하고 있다. ‘걷기는 온몸을 자극하여 인체에 전반적인 영향을 미친다. 몸에 조금만 신경을 써도 모든 계통(호흡계, 신경계, 순환계 등)과 기관(심장, 신경, 폐 등)은 조화를 이루며 작용한다. 불행하게도 가끔 우리는 이런 기관들을 따로 떼어 놓고 생각한다.’

그런가 하면 나빠진 간을 맨발 걷기로 완치한 뒤 걷기 예찬론자가 된 박동창씨는 그의 책 ‘맨발로 걷는 즐거움’에서 맨발 걷기의 효과를 무수히 설파해 놓았다. 그 가운데 약간을 요약 정리해 보면 다음과 같다. ‘맨발로 걷게 되면 금새 무좀도 사라지고, 창백했던 발에 선홍빛 혈색이 돌게 된다. 또한 걸을 때 발을 땅에 디디면 혈관이 수축과 팽창을 반복하게 되어 혈액펌핑 기능이 강화되고, 그래서 통상 발은 제2의 심장이라 일컬어지기도 한다. 걷기는 혈액순환을 위한 가장 쉽고도 확실한 방법이다. 걷기는 장기의 활동 증진을 가져와 우리 몸에 오랫동안 쌓여 있던 침전물과 독소, 노폐물들을 배출시키고 배변활동도 증가시킨다. 또한 성기능 저하와 조루 현상도 어느 정도 해결해 주고 생리불순의 여성들이 걷기로 생리현상이 재개되었다는 보고도 있다. 또한 동맥경화 등의 심혈관 질환에도 효과를 보이며 콜레스테롤 수치 개선에 효과가 월등하다. 또한 걷기의 또 다른 괄목할 만한 치유효과는 간 기능 개선이다. 간암으로 1개월의 여생을 선고받은 한 노인은 맨발 걷기를 통해 간을 완벽히 재생시키기도 했다. 또한 세계당뇨학회의 회장은 당뇨병 극복의 가장 권장할 만한 운동으로 걷기를 꼽았다.’

 

이처럼 걷기는 정신의 건강 뿐 아니라 몸의 건강에도 뛰어난 효과를 보인다고 한다. 요즘 걷기로 몸을 치료했다는 보고들이 잇따르자 전 세계적으로 걷기 열풍이 불고 있다. 우리 나라에도 제주도 올레길, 지리산 둘레길과도 같은 걷기를 위한 트레킹 코스가 제법 유행하고 있기도 하다.

꼭 지리산이나 제주도, 혹은 히말라야가 아니라도 좋다. 출퇴근길을 호젓하게 걷는 시간으로 바꿀 수도 있고, 매일 같이 퇴근 후 술을 마시기 보다 뒷 산을 산책해도 좋을 것이다. 만약 그렇게 된다면 우리는 그 작은 변화 속에서 어쩌면 전혀 다른 새로운 차원으로 도약을 하게 될 지도 모른다. 그만큼 걷는다는 것은 또 다른 차원으로의 여행이 될 수도 있다.

‘걷는 즐거움’ 그 거연한 시간 속에서 로부체 숙소로 향한다. 가만 보니 구름 속 설산 또한 색다른 아름다움이 있다. 길옆으로 투명한 설산 계곡의 물이 흐르고 물소리가 귓전을 맑혀준다. 발아래 흙길, 돌길의 투박한 촉감이 발바닥을 간지럽힌다.

 

아! 이 순간처럼만 삶의 모든 순간을 살아낼 수 있다면 더 이상 특별한 삶의 방식 같은 것은 필요조차 없을 것이다. 이런 시간은 더욱 빠르게 흐른다. 아니 시간 자체가 사라진다. 잠깐, 아주 잠깐 동안을 걸은 것 같은데 벌써 로부체 롯지에 도착한다.

지텐이 미리 잡아 놓은 싱글 룸에서 슬리퍼를 갈아 신고 숙소 앞을 흐르는 맑은 개울가로 나가 발을 담근다. 모처럼 좀 씻으려는데 완전히 저 설산의 눈이 방금 녹아 흐른 것처럼 그 쨍한 시림을 말로 표현할 수가 없다. ‘악악’ 소리까지 질러대며 씻고 있자니 곁에 앉아 있던 포터와 짐꾼들이 쳐다보며 웃어댄다. 이 찬물을 두 손 가득 퍼 담아 휙 하고 던졌더니 도망치고 웃고 반격을 준비하느라 한바탕 웃음꽃이 피어난다. 씻고 났더니 정신까지 번쩍 든다. 또 하루 평화로운 오후가 음악처럼 흐른다.

 

[히말라야, 내가 작아지는 즐거움](불광출판사, 법상)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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