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부체 가는 길]
고도가 오르면 물가도 오른다
조금 힘들긴 하겠지만 고락샵에 도미토리를 미리 잡아 놓았으니 서두를 것 없이 로부체에서 천천히 점심을 먹고 느긋하게 출발을 하기로 한다.
로부체 음식값은 고락샵과 함께 이 에베레스트 지역 일대에서 가장 높다. 150~250루피(70루피=1천원)면 먹던 음식 값이 300~400루피까지 상승을 했고, 양동이 2개를 주는 더운 물 샤워도 남체에서는 200루피 하던 것이 여기에서는 400루피로 뛰는 등 다른 모든 가격들도 두 배 이상씩 뛰었다. 특히 전기는 히말라야 고지대의 열악한 전기 사정상 어쩔 수 없어 카메라 베터리 충전도 남체에서는 100루피 하던 것이 무려 400루피로 네 배나 뛰었고, 각종 따뜻한 음료들도 한 잔에 20~30루피 하던 것들이 죄다 70~90루피로 뛰었다.
[로부체 롯지, 트레커들의 걸망, 이것 하나면 2주간의 트레킹도 충분하다]
그렇다고 한들 이것을 가지고 비싸다고 투정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직접 여기까지 올라온 사람들의 입에서 어떻게 그런 말이 나오겠는가. 여행자들은 여기까지 올라오는 것만으로도 제 몸 가누기 힘들 정도이고, 그나마 올라온 사람은 행운이며, 많은 사람들이 여기까지도 못 오고 고산병에 서둘러 내려가기 바쁜 사정을 생각했을 때, 이곳까지 그 무거운 짐을 짊어지고 올라오는 짐꾼들의 노고에 비한다면 그리 비싸다고 할 수 없는 가격이다. 5,000고지가 넘는 이 척박한 곳에서 몸을 녹이는 따뜻한 차 한 잔을 마시고, 맛있는 음식을 먹을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그저 감사할 뿐이다.
때때로 맛깔스런 달밧(네팔의 주식, 한국의 백반처럼 밥과 커리, 반찬 등이 나와 손으로 비벼먹는 음식)을 만날 때면 이 높은 곳에서 이런 호사를 누릴 수 있다는 사실 자체만으로도 감격스럽기까지 하다.
[로부체 롯지 풍경]
딩보체 이후로 모든 전기는 완전히 태양전지에 의존한다. 그러다 보니 모든 롯지며 식당이 늘 어둡다. 롯지 방에는 당연히 전기가 들어오지 않아 저녁을 먹고 나면 방에 돌아와 그윽한 어둠을 즐기기 제격이다. 이곳에서의 밤은 그야말로 밤 같고 밤답다. 밤이 밤 같아야 하는데, 우리들의 밤은 오히려 낮보다 더 현란한 빛의 소음으로 굉굉하다. 두 눈도, 온 몸의 감각도 밤에는 깊은 어둠 속에서 휴식을 취할 수 있어야 한다. 어둔 밤, 소리와 빛이 사라지는 순간, 비로소 우리는 자연의 연유한 내성과 달빛 별빛의 또글또글한 깊이를 명상하듯 온전히 느낄 수 있는 것이다. 가뭇가뭇 잊고 지냈던 무수한 밤의 이야기를 비로소 여기에서 새록새록 떠올리며 깊은 어둠과 만귀잠잠의 침묵을 호사롭게 누리고 있다.
마을들도 밤이면 모두 최소한의 불만을 밝히기 때문에 저녁을 먹고 허영거리며 산책을 나가 하늘에 별을 보는 재미가 아주 그만이다. 인위적인 전깃불이며 가로등이 많은 곳에서는 별들이 이처럼 정채롭게 반짝일 수가 없다.
[로부체 롯지, 이불을 따스한 햇살에 널어 말리고 있다]
하나의 방식일 뿐, 더 나은 방식은 아니다
점심을 먹고 나오니 기분이 한결 상쾌하다. 지텐은 밥을 먹자마자 먼저 가서 방을 잡고 기다리겠다고 고락샵으로 서둘러 출발을 했고, 나는 천천히 이 시간을 즐기며 슬겅슬겅 걸어 오른다. 걷기 위해, 혹은 도착하기 위해 걷는 것이 아니라, 그저 매 순간 그 자리에서 현존하기 위해 걷다 보니 걷다 서다 앉기도 하고 때로는 물가 풀섶에 드러눕기도 하며 걷는 듯 마는 듯 제자리걸음의 속도로 저어간다. 어차피 빨리 도착해 봐야 거기서 또 오후 시간을 산책하게 될 터이니 그저 가볍게 산책한다는 마음으로 고락샵을 향해 다박거리며 걷는다.
[로부체 롯지의 풍경, 한 무리의 순례자들이 로부체를 지나고 있다]
이 텅 빈 길 위로 때때로 짐꾼들과 야크가 뒤섞여 한가로운 오후를 거닐고 있다. 맑은 물이 흐르고, 구름도 유유한한하게 흘러가고, 내 발걸음도 마음도 함께 따라 흐른다. 모든 것이 흐르고 흐르고 흘러간다. 잠시도 머물러 주저앉아 있는 것은 없다. 또 언제까지고 머물러 있을 수 있는 것도 이 지구별에는 없다. 모든 것은 끊임없이 변하는 가운데 놓여 있을 뿐!
그 어떤 것도 언제까지고 멈춰 있을 수는 없는 것이다. 이렇게 끊임없이 흘러가는 세월 속에서 유난히 그 흐름을 멈추려 하고 붙잡아 두려 애쓰는 것이 하나 있으니, 그것이 바로 인간의 마음이다.
잠시도 쉬지 않고 역동적으로 흐르며 변해가는 세월 속에서 사람들의 마음은 모든 것을 멈추고 싶어 안달이다. 내 사랑도, 내 소유도, 내 생명도, 내 젊음도, 내 자식도, 내 돈과 명예, 이 모든 것들을 어디로 달아나지 못하도록 꽉 움켜쥔 채 도무지 놓아주려 하지 않는다. 그러나 세상 이치가 놓아주려 하지 않는다고 변화의 이치를 거부할 수는 없으니 언젠가 그 모든 것들은 내 곁을 떠날 수밖에 없다.
아무리 꽉 붙잡고 내게서 멈춰 서도록 하고 싶어도 그 어떤 것 하나 영원히 붙잡을 수 있는 것은 없다. 모든 것은 잠시 왔다가 인연이 다하면 그저 그렇게 표연히 흘러갈 뿐이다. 그래서 수많은 성인들의 말씀은 공통적으로 ‘집착하지 말라’ ‘붙잡지 말라’ ‘마음을 비워라’ ‘욕심을 버려라’ ‘변화를 받아들이라’ ‘거부하지 말고 현실을 수용하라’고 하는 것이 아닌가. 그 변화의 흐름을 거부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수용하고 받아들일 때 우리 삶에 매우 의미 있는 중대한 변화와 성숙이 깃드는 것이다.
이렇게 내가 몸담고 살아가던 세상에서 뚝 떨어져 보니 그 속에 살면서는 전혀 볼 수 없었던 것들을 보게 된다. 놓고 산다, 비우고 산다 하면서도 나도 모르는 사이에 붙잡게 되는 것들, 집착하고 있던 것들, 수많은 욕심의 실체들이 미세하게 숨겨져 있었다는 사실이 드러난다.
가만 생각해 보면 비운다고 하고 어느 한 가지 집착을 비우면 그 비워진 자리에 나도 모르는 사이에 아주 미묘한 또 다른 것들이 들어 차 있는 것을 보게 된다. 예를 들어 ‘집착과 소유를 비우고 살자’ 하는 생각을 실천하는 순간 물질적인 소유를 어느 정도 버린 그 틈으로 ‘나는 잘 비우고 사는 사람이다’ ‘청빈과 가난의 정신을 실천하는 사람이다’ 하는 마음이 생겨나고, 나아가 그래서 ‘나는 너희들 꽉 채우고 욕심 부리며 사는 사람들과는 달라’ 하는 일종의 우월감 같은 또 다른 채움과 욕심과 아집이 깃드는 것이다. 또한 ‘마음을 비우고 명상을 실천하자’ 하는 생각과 실천의 바탕에는 나는 잘난 수행자라는, 명상가라는 그렇기에 번뇌와 망상으로 물든 일반인들과는 다르다는 또 다른 번뇌 망상이 자리 잡곤 하는 것이다.
사실 이것은 어쩌면 더 큰 욕심이며, 더 큰 아상일 뿐, 전혀 수행과 비움이라는 아름다운 전통에는 완전히 반하는 일이 아닌가. 이런 어리석음들이 그 동안 내 삶에서 벌어진 무명(無明)의 연극이었다는 것이 생생하게 드러나면서 나 자신을 발가벗기고 있다.
지혜로운 이는 옳거나 그른 것이 없다. 자신이 가는 길이 다른 길 보다 더 옳거나 더 나은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안다. 남들보다 더 잘 수행해 나간다거나, 더 영적으로 성숙했다거나, 더 지혜롭다는 생각을 하고 있다면 오히려 그 생각은 곧 영적인 미숙함을 드러내는 생각일 뿐이다. 아무리 타인들보다 더 옳고 바르고 청정한 길을 간다고 하더라도 그로인해 그렇지 못한 사람들을 폄하하는 마음이 생겨난다면 그것은 참된 길이 아니다. 선각자는 자신이 선택한 길이 하나의 선택일 뿐임을 아는 것일 뿐이지, 남들이 선택한 것보다 더 나은 길이거나, 옳은 길이라고 여기지는 않는다.
무소유와 청빈을 선택하는 것은 그저 하나의 선택일 뿐이다. 그것이 옳고 부유하게 사는 것은 그르다거나, 청빈하게 사는 나는 잘 사는 것이고 부귀영화를 누리며 사는 사람들은 못 사는 사람이라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전혀 청빈과는 어울리지 않는다. 무소유와 청빈을 선택하되 그것만이 옳은 길이라는 생각은 위험하다. 집착하지 않으며 살되 무집착에도 집착하면 안 된다. 집착을 버리고, 욕망을 버리고 살되 그렇게 사는 것을 우월하다거나, 영적이라거나, 으쓱한 마음으로 여길 필요는 없다. 더욱이 그런 삶이 남들보다 더 현명하고 지혜롭다고 여김으로써 그렇게 살지 못하는 상대방을 낮출 이유는 없는 것이다.
어떤 길도 전적으로 옳거나 그른 길은 없다. 어떤 직업도, 어떤 삶의 방식도, 어떤 종교도, 어떤 가르침이나 이념도 전적으로 옳은 것은 없다. 내 것만이 옳다는 생각이야말로 가장 틀린 생각이다. 내 생각이란 그저 하나의 생각일 뿐이지, 더 옳은 생각인 것은 아니다. 내 종교 또한 그저 하나의 종교일 뿐이지, 유일한 진리인 것은 아니다. 내 삶의 방식 또한 수많은 삶의 방식 가운데 하나일 뿐이지, 가장 우월한 방식인 것은 아니다. 아무리 좋은 가르침일지라도 그것만이 절대라고 생각하고, 그것만이 옳다고 생각하는 순간 그것은 어긋난다. 아무리 훌륭한 가르침도 그것은 그저 하나의 훌륭한 가르침일 뿐이지, 가장 훌륭한 가르침인 것은 아니다.
만약 우리가 부처님을 유일무이한 가장 우월한 성인으로 생각한다면, 그럼으로써 다른 많은 영적 스승들을 그 아래로 깔아뭉개기를 서슴지 않는다면 그것이야말로 부처님을 파멸로 이끄는 것이다. 부처는 우월하거나 열등한 것을 모른다. 비교를 모르고, 판단을 모르고, 선악을 모르며, 높고 낮음을 모른다. 부처는 판단하거나 평가하거나 비교하는 분이 아니라 다만 있는 그대로 관찰하는 분이다. 옳고 그르다고 판단하는 것이 아니라, 다만 그 모든 것을 전체적으로 관찰하실 뿐이다. 관찰에는 분별이 붙지 않는다. 모든 분별과 차별과 평가와 심판을 놓아버린 자리가 바로 부처의 자리이기 때문이다.
이 시대에 가장 필요한 가르침이 바로 여기에 있지 않을까. 세상은 온통 분열되고, 나뉘어 있다. 종교간, 이념간, 국가간, 인종간, 계층간에 온통 차이와 차별과 분열로 치닫고 있다. 이 모든 다툼과 나뉨이 어디에서 왔는가? 그것은 바로 ‘내가 옳다’는 데서 생겨났다. 이 세상 사람들은 ‘옳은 것’을 위해서는 그 어떤 것을 희생시킬지라도 끝까지 쟁취하려는 성향이 있다. 정의를 위해서, 선을 위해서, 옳은 것을 위해서는 상대방을 죽이고, 행복과 풍요와 심지어 목숨을 포기할지라도 끝까지 고수해야 한다고 여긴다.
쉬운 예로 종교전쟁을 보라. 내 종교가 옳다는 생각, 그 하나의 생각이 틀렸다고 생각하는 다른 종교를 향해 총을 겨누고, 심지어 자신의 목숨을 내던지면서까지 그 ‘옳은’ 것을 위해 싸운다. 그리고 우리는 이처럼 옳은 것을 위해 싸우고, 옳은 것을 위해 싸우다 죽고, 옳은 것을 위해 상대방을 죽이는 행위에 대해서는 높이 평가한다.
그러나 옳은 것을 절대적으로 반드시 지켜내려는 생각은 틀렸다. 전적으로 옳은 것은 없기 때문이다. 물론 전적으로 틀린 것도 없다. 두 나라의 전쟁은 자신의 나라 입장에서 보면 언제나 옳다. 양 쪽이 다 자신만이 옳다. 종교전쟁 또한 자신의 종교 입장에서는 언제나 자신이 옳다.
옳고 그르다는 판단은 결코 우리를 평화에 이르게 하지 못한다. 진리는, 옳고 그른 것이 없기 때문이다. 옳고 그르며, 맞고 틀리다는 그 판단 너머에, 무분별의 지켜봄 속에 참된 진리는 움튼다.
반짝이는 삶을 엿보다
맑게 흐르는 빙하 개울을 따라 완만한 오르막을 터벅터벅 천천히 한 시간 남짓 걸어 오르다 보면 이제부터 본격적으로 산을 타고 오르게 된다. 사실 산이랄 것도 없이 언덕을 몇 개 넘으면 되는데 눈에 보이는 사실과 온몸으로 느끼는 느낌이 완전 다르다. 눈에 보이는 것은 야트막한 언덕 몇 개이지만 몸이 느끼는 느낌으로 따진다면 지리산 가파른 노고단을 화엄사부터 걸어 오르는, 혹은 설악산의 오색온천에서부터 대청봉까지 걸어 오를 법한 그런 무게감이 허벅지와 종아리, 그리고 벅찬 호흡에서 느껴진다. 한 무리의 중무장한 트레커들이 줄지어 언덕길을 따라 오르고 있다.
가쁜 발걸음을 잠시 멈추고 고개를 드니, 숨을 거칠게 몰아쉬며 오르는 나와는 전혀 다르게 묵직한 야크들이 평화로이 이 설산과 조화를 이루며 한적하게 풀을 뜯고 있다.
히말라야의 짐꾼들은 여전히 분주한 발걸음을 옮기고 있다. 언덕 위에 오르니 시야가 툭 터지며 장쾌한 풍경이 펼쳐진다. 일찌감치 오르던 트레커들도 힘에 부치는지 잠시 휴식을 취하고 있다.
지도에서 보면 빙하지대라고 표시되어 있는 부분들이 빙하는 다 녹아버리고 속살을 훤히 드러내고 있다. 지구가 더워지고 있다는 것이 높은 곳에서는 더욱더 분명하게 드러난다.
한참을 여유작작하게 길 위에서 흘쩍이다 보니 순례자들의 행렬도 눈에 띄게 뜸해졌다. 거의 모든 여행자들이 새벽 일찍부터 서둘러 점심 전에 그 날의 목적지까지 도착하고 점심 이후에는 롯지에서 가벼운 산책이나 독서를 하며 쉬다보니 이런 늦은 시간에 히말라야의 모든 길은 유벽해진다. 덕분에 이 소적하고 너른 산길을 아무런 간섭도 받지 않은 채 덩그러니 홀로 누리고 있다. 아무리 걸어도 인적이 없다보니 문득 이 적막공산 음음한 행성 위에 나 혼자만 삶을 걷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독존적 외로움이 가슴 한 켠을 스친다. 말 그대로 산공야정(山空野靜). 순간 허우룩하면서도 텅 빈 고독이 내면에 낮게 깔리며 가슴벽을 두드린다.
이 순간의 걸음 걸음이 나를 깊이 깨어나게 하고, 살아있게 만든다. 삶을 진하게 경험한다. 루소는 걷는 여행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내 생애를 통해 그토록 깊이 생각하고, 살아있음을 느끼고, 본연의 내 모습을 되찾았던 적은 없었다. 감히 말하건대, 오로지 내 발로 직접 걸었던 여행을 통해서만이 그 모든 것을 경험할 수 있었다.’ 루소의 말처럼 두 발로 직접 걷는 여행, 그것이야말로 비로소 삶을 진하게 경험하게 해 주며 본연의 자기 자신에게 다가서게 만든다.
언덕길을 따라 걷고 걸어 드디어 칼라파타르 바로 아래 작은 마을 고락샵이 보인다. 서너 개의 롯지가 옹기종기 모여 있고 거대한 산군들이 그 주위를 에워싸고 있다. 도미토리 한켠에 배낭을 풀고 롯지 주변을 유보한다.
[고락샵, 롯지의 저녁식당 풍경]
[칼라파타르 아래 고락샵 한 롯지의 메뉴판]
한 발 한 발 명상 수행을 하듯 저절로 명징함이 발걸음에 묻어난다. 활짝 깨어있다는 표현, 혹은 명징한 알아차림이라는 것이 바로 이런 것인가. 그러고 보면 이곳까지 올라오는 동안 하루하루의 발걸음은 점차 높은 곳으로 고도를 높일수록 점점 느려지곤 했고, 생각 또한 걸음과 같은 속도로 느려져 갔다. 평소 같았으면 생각이 자리 잡고 틀어 앉아 온갖 이야기들을 만들어냈을 내면의 공간이 분주함과 번잡함 대신 깨끗이 비질을 막 끝낸 도량의 뒤뜰처럼 투명해지곤 했다. 그러면서 알 수 없는 깊은 내면의 향기가 감도는 듯한 지미한 단서들이 감지된다. 이번 만행과 순례는 분명 진담한 어떤 것이 아니다.
어둑어둑한 불빛 아래에서 여행자들은 저마다의 이야기들로 시간 가는 줄 모른다. 가볍게 저녁 식사를 마치고 뜰로 나온다. 한 겨울 살을 엘 것 같은 추위가 내면의 저 깊은 곳까지 뚫고 들어오는 것만 같다. 초저녁 도미토리는 기척이 없다. 가방만 던져 놓고 모두들 식당으로 향한다. 덕분에 호젓하고 어두운 매트리스 위에서 아무런 방해도 받지 않은 채 가부좌를 틀고 앉는다.
고락샵의 밤은 어둡다. 롯지 한켠 구석지고 눅눅한 매트리스 위에 한 존재가 그렇게 앉아 있다. 이곳이 그리고 이 순간이 그렇게 앉아 있는 한 존재에게 투명하게 부서지며 반짝임의 아름다움을 선사한다. 존재의 아름다움, 내가 지켜보며 함께 살아오던 한 존재의 진실이 조금 아주 조금 어젯밤에 보았던 푸른 달빛처럼이나 천천히 그리고 밝게 떠오른다.
모든 것은 한 순간! 바로 그 현존의 순간, 내 존재의 뿌리를 뒤흔드는 무엇인가가 스치고 지나간다. 선명한 무언가가 심연의 언덕에 가 닿는다. 무언지 알 수는 없지만 그 어떤 것이 지나간 뒤 그 선명하고 명징한 파장이 너무도 또렷하게 지속되어 도무지 누울 수도 없고, 누워도 잠 한 자락 잘 수가 없다. 몸은 피곤한데 잠을 잘 수가 없다. 밤이 새도록 계속된다.
도미토리 십여 명 남짓 자는 방이 얼추 10시가 넘도록 인기척이 오가고 이야기며 부스럭거리는 소리들이 들려오지만 그건 그냥 그렇게 들려 올 뿐이다. 그리고 나는 이렇게 시간을 멈춰 세우고는 그 자리에 앉아 있다. 어떻게 지나갔는지 모를 시간이 흐르고 뜬 눈으로 새벽을 맞는다.
새벽을 알려주는 부스럭거림들이 곳곳에서 들려온다. 도미토리 여기저기에서 플래시가 켜지고 웅성거리는 소리를 듣고서야 비로소 하룻밤이 허허롭게 지났음을 안다. 그렇게 억겁 같은 혹은 찰나 같은 하룻밤이 투명하게 보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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