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주의 역설, 버릴 때 더 큰 것을 얻는다
새벽, 로부체(Lobuche, 4930m)는 오랜 명상에서 깨어나듯 성성하고 적적하다.
어쩌면 인간을 제외한 모든 존재가 언제나 명상 속에서 적묵한 자신의 삶을 자기답게 살고 있는지 모른다. 산하대지도 그렇거니와 들짐승과 새와 작은 벌레조차 자신의 질서 안에서 자연스럽게 제 갈 길을 오롯이 걷고 있다. 오직 사람들만이 온갖 욕심과 집착과 소유의 굴레에 갇혀 자기답고 자연스러운 순연한 삶의 길을 잃고 있다. 그 애애하고 온전하며 자유로운 삶의 길을 다시 되돌리고자 하는 의지가 명상, 수행이라는 전통을 만들어냈다.
그런데 이 명상 수행의 길은 우리가 생각하는 다른 모든 것들에 대한 성취의 길과는 전혀 다른 길이다. 완전히 세상과는 거꾸로 가는 길이다. 다른 모든 성취들은 우리의 노력과 의지를 통해 얻어질 수 있겠지만 이 길은 그런 인위적인 노력과 의지와 시도와 그 어떤 애씀으로도 얻어질 수 없는 것이다. 오히려 이 길을 걷고자 한다면 명상으로 무언가를 얻고자 하는 그 모든 바람과 의지와 성취욕과 추구를 완전히 버려야 한다. 그뿐 아니라 세속적인 모든 집착과 욕심과 소유욕 또한 던져버려야 한다.
적당히 쥐고 있으면서 명상의 생활도 적당히 함께 해 나간다는 것은 실현 불가능한 일이다. 둘 중 하나는 사라져야 다른 하나가 들어선다. 물론 실제적으로 돈도 명예도 직장도 가족도 다 버려야 한다는 것은 아니다. 다만 마음에서 머무는 바가 없어야 하고, 집착을 놓아야 한다는 의미다. 즉 지금 가지고 있는 소유물이 주는 즐거움을 누릴지라도 언젠가 있을 상실의 두려움 없이 그것을 즐기고 쓸 수 있어야 한다. 물론 그렇게 되면 자연스럽게 그 소유물을 이웃과 함께 나누는 데서 오는 기쁨 또한 저절로 생겨날 것이다. 또한 지금 가지고 있는 명예, 지위, 직장, 가족, 사랑의 즐거움을 충분히 받아들이되 그것들은 언젠가 소멸되고 만다는 무상의 속성을 깨닫고 있기 때문에 거기에 얽매임 없이, 잃는 데 대한 불안감 없이 그것을 누리고 쓸 수 있다. 사실 그랬을 때 비로소 삶이 주는 풍요와 소유와 즐거움을 더욱 생생히 누리고 느낄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집착 없이 그 모든 것을 행할 때, 비로소 마음에 걸리는 것 없이 자유롭게 이 우주의 본래적 풍요를 마음껏 가져다 쓸 수 있게 된다. 그 때 우주는 더 큰 것을, 더 많은 것을 당신에게 가져다 줄 것이다. 그것이 바로 이 우주의 역설이다.
붓다 이후로 왜 그토록 많은 사람들이 수행을 하고 명상을 해 오건만 모두가 붓다가 되지 못하는가. 왜 아직도 사람들은 괴로움에 허덕이는가. 왜 아직도 세상은 어둡고 힘겹기만 한가. 그것은 둘 다를 잡고 있기 때문이다. 세속적인 만족, 소유, 집착, 애욕을 그대로 둔 채 명상을 이어가기 때문이다. 세간적인 바람과 출세간적인 바람 둘 다를 한꺼번에 얻을 수는 없다.
명상이란 곧 무집착을 의미한다. 수행이란 곧 무소유, 무소득(無所得), 무집착, 무아(無我)를 의미한다. 명상은 애쓴다고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모든 집착과 소유와 애박(愛縛)과 아상(我相)이 놓아진 자리에서 저절로 꽃처럼 피어나는 것이다. 그래서 명상의 진척이 이루어지길 바라지 말고 내 안의 욕심과 집착을 먼저 살필 수 있어야 한다. 집착이 타파된 자리, 모든 바람이 사라진 자리, 바로 그 자리에서 명상은 시작된다. 아니 저절로 찾아온다.
출가자들은 출세간적인 깨달음에의 욕구와 집착이 명상이 일어나는 것을 방해하고, 재가자들은 세간적인 욕구와 집착이 명상을 방해한다.
나는 지금 무엇을 붙잡고 있는가. 무엇을 놓지 못해 나에게 명상의 축복이 깃들지 않는가. 놓아버리고 싶고 비워버리고 싶어도 도대체 내가 붙잡고 있는 집착의 실체가 무엇인지 모른다. 내가 붙잡고 있는 것, 그것은 무엇인가.
앞에서 말한 대로 그것은 돈일 수도 있고 명예나 권력, 소유욕, 사랑, 사람일 수도 있다. 그런데 그 모든 것의 뿌리에 하나의 근원이 있다. 바로 그 하나를 잡고 있기 때문에 다른 모든 것이 뒤따르는 것이다. 그 하나는 바로 ‘나’다. 나라는 생각, 나라는 상(相), 나라는 집착, 내 것이라는 소유욕, 내가 옳다고 하는 아집이다. 내가 부자가 되고 싶고, 내가 잘 살고 싶고, 내가 남들에게 인정받고 싶고, 내가 남보다 더 높은 자리에 오르고 싶으며, 내 집도 남들 것보다 컸으면 좋겠고, 남보다 더 많이 소유하고 싶으며, ‘내 생각’ ‘내 견해’대로 사람들이 따라 와 주었으면 좋겠다. 어쨌든 우리 삶의 목적은 ‘나’를 세상에 더 크게, 더 널리 드러내는 일이다.
그것을 위해 어떤 이는 돈으로써 나를 드러내려 애쓰고, 또 어떤 이는 권력으로써 자신을 드러내려고 하며, 또 어떤 이는 예술로, 자신의 재능을 키움으로써 자신을 드러내려 한다. 학생들은 공부를 잘 함으로써 자신을 드러내야 하고, 운동선수들은 운동을 잘 함으로써, 직장인은 진급을 함으로써, 예능인들은 더 많은 인기를 얻음으로써, 학자는 더 많은 지식을 머릿속에 집어넣음으로써 자신을 드러내려 한다. 이 모든 것이 바로 ‘아상을 키우려는 시도’이고, ‘나를 세상에 드러내려는 시도’이며, ‘에고를 강화하려는 욕구’에 다름 아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 삶의 원동력이요, 에너지가 된다.
그러나 이 모든 ‘나를 드러내고 아상을 강화하려는’ 시도는 언젠가 분명히 크게 좌절될 수밖에 없는 운명을 타고났다. 그것이 모든 아상의 종말이다. 아상이란 본래부터 실체가 없기 때문에 그것은 언젠가는 사라져 갈 수밖에 없는 운명이다. 우린 모두 언젠가 이 세상과 작별을 고해야 할 것이 아닌가. 젊었을 때 아무리 부귀 영화를 누리고, 명예와 권력을 휘두르며, 인기와 존경을 받았다고 할지라도 그것은 한 때일 뿐이다. 분명한 사실은 언젠가 그 모든 것은 사라지리라는 것이다. 이것이 모든 성인들이 말했던 무상(無常)과 무아(無我)의 소식이다. ‘집착을 버리라’ ‘에고를 버리라’ ‘마음을 비우라’는 모든 가르침의 바탕이다.
내가 작아지는 것을 즐거워하라
그러면 이제 어느 정도 삶의 실마리가 풀리고 있다. 그러나 실마리가 풀림과 동시에 딜레마에 봉착한다. 내가 그동안 움켜쥐려고 애써왔던 그 모든 것들을 놓아버리라니 도저히 그럴 수가 없는 것이다. 어찌 그럴 수가 있겠는가. 내 삶의 목적이었던 것을 어떻게 쉽게 놓아버릴 수 있겠나. 그러나 놓아버리지 않으면 우리의 삶은 지금까지 그래왔던 것처럼 아상의 노예가 되어 주변 상황에 끊임없이 휘둘리는 주체적이지 못한 삶을 빠져나오지 못한다. 그것은 부자유이고 억압이며 결박이고 혼돈이다.
자, 그럼 이제 어쩌겠는가. 그냥 이대로 살다가 갈 것인가, 아니면 전혀 새로운 삶으로 바꾸어 볼 것인가. 그렇다. 답은 한 가지, 자유롭고 걸림 없는 평화의 삶을 택하는 것이 모든 인류의 공통된 길이다.
그러면 답은 나왔다. 아상과 아집, 소유와 집착으로 인해 괴로운 삶이 시작되었다면 바로 그것을 놓으면 된다! 어떻게 놓을 것인가? 지금까지의 삶과는 거꾸로 가는 것이다. ‘나’를 드러내려는 모든 노력을 ‘나’를 소멸시키려는 노력으로 바꾸면 된다. ‘나’를 확장하려는 노력을 ‘나’를 축소시키는 것으로 바꾸면 된다. 아니 아상의 소멸과 축소는 어차피 예약되어 있는 것이니, 그것은 노력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다만 그것을 받아들이면 되는 것이다. 확장되고 드러날 때라도 그것이 거짓이고 환상임을 깨달아 머지않아 이 모든 것이 축소되고 소멸될 것임을 분명히 보는 것이다.
다시말해 내가 이 세상에서 축소되는 데 대한 두려움을 버리면 된다. 내가 작아지는 것 같은 느낌, 나의 가치가 줄어드는 것 같은 느낌, 내 입지가 좁아지는 것 같은 느낌, 아상의 소멸, 에고의 소멸을 즐거운 마음으로 받아들이라. 내가 작아지는 것은 본질적 차원에서는 매우 좋은 일이다. 내 가치가 줄어드는 것 같은 느낌, 나에 대한 사람들의 대접이나 평가가 축소되는 것 같은 느낌, 그것이야말로 우리가 흥미롭게 받아들여야 할 즐거운 일이다. 그것이 바로 진리의 길에서는 거꾸로 온전한 길인 것이다. 완전히 다른 차원의 길이지만 그래서 받아들이기 쉽지 않겠지만 그것이야말로 무아(無我), 무집착(無執着)의 길, 모든 붓다와 성인들이 걸어 간 요확하고도 명료한 길이다.
그렇다고 해서 억지로 나를 죽이려고, 축소시키려고 애쓸 필요는 없다. 진리는 모든 인위적인 노력을 거부한다. 지금 다니는 회사를 그만 둘 필요도 없고, 현재의 높은 지위를 일부러 포기할 필요도 없으며, 소유한 것을 억지로 전부 버릴 필요는 없다. 소유하되 소유에 대한 애착과 집착만을 거두면 되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그 소유를 보다 아름답게, 본질적으로 잘 쓸 수 있는 지혜가 열린다. 그뿐 아니라 소유하되 소유물에 도리어 소유되지 않는다. 그 소유물이 언젠가 떠날지라도 괴롭지 않다. 물론 그 모든 소유물은 언젠가 반드시 떠날 수밖에 없는 운명이다. 명예나 지위 또한 거기에 얽매이지 않고 그 자리에서의 몫을 행할 때 비로소 그 지위에 걸맞은 참된 지혜와 사랑 가득한 온전한 행위가 뒤따른다.
거기에 ‘나’라는 아상과 아집과 이기는 사라진다. 보통 사람들은 자기 지위에서 ‘나’ ‘내 이익’을 개입시킴으로써 순수하게 그 지위에서 해야 할 몫을 온전히 해내지 못하고 있다. 모든 일의 중심에는 ‘나’ ‘내 이익’과 얼마나 부합하는가 하는 이기가 깔려 있는 것이다. 사실 가만히 살펴보면 우리가 하는 모든 행위․말․생각의 중심에 ‘나’라는 아집과 이기가 숨 쉬고 있다. 이 행동이 나에게 어떤 도움이 될까, 이 말이 나에게 어떤 이익을 가져올까가 저절로 개입되는 것이다.
이러한 모든 ‘나’ 중심적인 일상에 완전히 새로운 차원의 삶을 가능케 하는 것이 바로 ‘나’의 소멸, 에고의 축소다. 내가 축소되는 즐거움, 에고가 깨지는 통쾌함, 그것이야말로 본질적인 즐거움이다. 그것이야말로 부처님께서 깨달으셨던 본질적인 법락(法樂)이며,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고 신께서 우리 인간들에게 하고자 했던 가르침의 핵심이다.
내 것을 이웃과 나눌 때 행복하다. 물론 한 편으로는 내 것이 축소되니 괴롭겠지만 그 세속적 차원을 넘어서 조금 더 깊은 차원에서 우리는 아이러니하게도 행복과 풍요를 느낀다. 바로 그것이 아상이 소멸되는 즐거움의 단적인 예다.
아상의 소멸, 에고의 축소, 내가 줄어드는 것을 즐거워하라. 그렇게 되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삶이 지금까지와는 전혀 다르게 변한다. 삶이 당당해진다. 걸림 없이 자유로워진다. 주변의 눈치를 살필 것도 없고, 윗사람에게 애써 잘 보이려고 아부를 떨 것도 없다.
예를 들어 진급이나 부유함은 아상을 강화시킨다. 더 높은 자리에 오르고, 더 유명해지고, 더 영향력이 강해질수록 아상은 더욱 성장하며 평화와는 더욱 더 멀어지기 쉽다. 그러니 아상의 축소를 즐거워하는 수행자라면 일부러 돈을 안 벌거나, 일부러 진급에서 떨어질 필요는 없을지라도 자연스럽게 그렇게 되는 상황을 걱정할 일은 아니다. 자연스럽게 진급이 안 되거나, 영향력이 줄어들거나, 아상이 축소되게 된다면 그것은 즐거운 일이니 흡족하게 받아들이면 된다. 그것은 오히려 영적인 차원에서는 매우 반길 만한 일이다.
스님들처럼 일부러 버리지는 못할지언정 자연스럽게 버릴 수 있는 고맙고도 감사한 순간이 온다면 그것을 행복하게 받아들일 수는 있다.
그러니 어떤가. ‘아상의 축소’ ‘에고의 소멸’을 거부하지 않는 이는 모든 일상이 자유롭고 걸림 없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 어디에도 집착하는 것이 없기 때문이다. ‘반드시 이렇게 되어야만 한다’거나, ‘반드시 내 손에 넣어야 겠다’거나, ‘반드시 내가 가질 거야’, ‘반드시 저 자리에 오를 거야’라는 그 어떤 집착도 욕망도 바람도 없기 때문에 언제나 지금 놓여 있는 그 자리에서 충만하고 충분한 완전한 삶을 누릴 수 있는 것이다. 사실 우리의 삶은 언제나 완전하고 완벽하다. 늘 풍요롭고 충만하다. 나의 욕심과 집착만 없다면.
마땅히 모든 것을 잃어라
모든 사람들의 공통적인 마음 밑바탕에는 두려움이 깔려 있다. 그것은 아상이 소멸될까 싶은 두려움, 즉 내가 축소될까 싶은 두려움이다. 내 돈이 사라질까 싶은 두려움, 내 가치가 떨어질까 싶은 두려움, 내 지위가 떨어질까 싶은 두려움, 내 인기나 입지가 축소되면 어쩌나 하는 두려움, 사람들 사이에서 잊혀 질까 싶은 두려움 등이다. 그리고 바로 그 두려움 때문에 사람들의 삶은 자유롭지 못하다. 늘 눈치를 봐야 하고, 남들에게 잘 보이려 애써야 하고, 남들에게 책잡힐 일을 하지 않아야 하며, 윗사람 눈치도 봐야 한다. 그러나 아상의 소멸을 즐거워하는 수행자는 더 이상 두려움이 있을 수 없다. 삶에 진정한 자유가 깃든다.
아상이 소멸되든, 내가 줄어들든 상관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렇게 에고의 소멸을 신경 쓰지 않고 사는 사람에게는 도리어 충만한 삶이 깃든다. 또한 도리어 더 높은 성공과 부와 힘이 그를 기다린다. 그것이 바로 ‘비워야 채워지는 도리’이다. 그것이야말로 삶의 아이러니다. 비워야 채워지고, 놓아야 잡히며, 무소유가 전체를 소유하는 것이 된다.
그러니 어떠한가.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 여기 그에 대한 삶의 나침반이 있다. 에고의 축소를 즐기라. 아상의 소멸을 즐거워하라. 내가 작아지는 것을 두려워하지 말라. 그것을 즐겁게 받아들이라.
에고의 축소, 외부적인 확대와 성장의 축소는 영적인 진보와 바로 연결된다. 성장, 발전, 부, 명예, 권위, 인기, 영향력이 높아질수록 아상은 함께 높아진다. 그것은 진리 차원에서는 절망이다. 외부적인 목적들의 성장을 줄이는 대신 아상의 꺾임, 에고의 축소를 즐거워하라. 사람들이 인정 안 해주는 것을 다행히 여기라. 관심이 축소되는 것을 행복하게 받아들이라. 남들에게 대단한 사람으로, 성공한 사람으로, 인정받는 사람으로, 능력 있는 사람으로, 지혜로운 사람으로 보이려는 의도야말로 아상의 뚜렷한 출몰이다. 있는 듯 없는 듯한 사람, 전혀 위대해 보이지 않는 평범한 사람, 전혀 영적으로 보이지 않는 사람으로 세상에 드러나는 것은 아주 좋은 일이다.
강한 나무는 폭풍이 불어오면 부러지지만 약하고 여린 풀들은 바람이 부는 대로 몸을 누일 뿐 부러지지 않는다. 장자는 굽은 나무가 산을 지킨다고 했고, 노자는 굽은 나무가 되어야 온전히 제 수명을 다할 수 있다고 했다. 곧은 나무, 쓸모 있는 나무는 다 베어가 제 수명을 마치지 못한다. 또한 노자는 굽은 나무의 비유를 들며 “성인은 자기를 내세우는 일이 없기 때문에 그의 존재가 뚜렷해진다.”고 했다. 예수도 말한다. “온유한 자에게 복이 있나니 저희가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이다.”, “마음이 가난한 자에게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이다.” 또한 중국 당나라 조주 선사는 무엇이 도(道)인가를 묻는 남전보원 선사에게 “평상심이 곧 도다.”라고 답했다.
다만 있는 그대로의 자신을 있는 그대로 자연스럽게 드러내라. 무엇이 두려운가? 대단해 보이지 않는 것, 권위를 상실하는 것, 소유를 잃는 것, 지금까지의 성취를 잃는 것, 영향력을 잃는 것, 그것을 마땅히 잃어라. 즐겁게 그 축소와 상실과 소멸을 받아들이라. 상실과 축소는 실패가 아닌 새로운 눈뜸의 이정표다.
진정 삶의 행복을 원하는가. 참된 평화와 자유를 꿈꾸는가. 정말 삶에서 깨어나기를 원하는가. 그렇다면 나의 소멸, 에고의 상실을 두려워 말라. 당당하게 걸림 없이 무소의 뿔처럼 나에게 주어진 길을 우직하게 걸어가라.
정신 번쩍 드는 고락샵의 새벽
고락샵에서의 여운이 이러한 아상 소멸의 이치를 사자후처럼 내면의 울림으로 깃들게 했다. 그것은 매우 실제적이고 강렬한 메아리였고 무설(無說)의 설법이었다. 금강경을 지난 10여 년간 되풀이해 왔지만 이렇게 또렷한 소리로 강렬하게 심연을 적신 적은 없었다. 이것은 진정 온 존재로 읽는 금강경의 소식이다.
내면의 소리, 그 청연한 지혜의 소리를 들은 적이 있는가? 그 내밀한 속 뜰의 소리는 언제나 우리 안에서 간절한 통곡처럼, 애잔한 울음처럼, 혹은 여린 떨림처럼 투명하게 울려오고 있다. 그러나 그 소리는 우리의 가슴이 온갖 잡다한 것들로 꽉 차 있을 때는 전혀 들을 수가 없다. 집착과 욕망과 일과 성취와 돈과 명예와 온갖 바람과 추구들로 복잡하게 얽혀 있는 한 내면의 순령한 깊은 울림은 그저 아무런 의미도 가져오지 못할 뿐이다. 아니 그랬을 때 그 소리와 울림은 전혀 들리지 않는다. 세속적인 소음이 그 소리를 차단시키는 것이다. 그것들이 비워지고 놓아질 때, 비로소 소리 없는 소리, 그 우레와 같은 침묵의 소식은 맑은 종소리처럼 내밀한 영혼의 귓전을 스친다. 이 로부체 새벽의 시린 바람처럼, 이 설산이 녹아 흐르는 개울물의 차고 고징한 여울처럼, 그렇게 내 안의 참된 주인의 소식이 졸졸졸 가슴으로 홀연히 흘러들어 온다.
로부체의 새벽은 명정하다. 밝아오는 돋을볕의 품이 다습고도 온온하다. 정신이 번쩍 드는 아침. 지텐은 역시 먼저 출발하고 나는 쉬엄쉬엄 이 풍경을 충분히 느끼며 걷는다.
로부체 입구 산 아래 작고 허름한 오두막 한 채가 수윤한 그림처럼 놓여있다.
롯지도 아니고 그저 이곳에 몸 붙이고 사는 4,930m 현지 원주민이자 그야말로 히말라야 설인이다. 집 아래는 맑은 물이 흐르고 뒷산 얕은 곳에는 작은 풀숲이 초원처럼 펼쳐져 야크 몇 마리 먹이는 데는 지장이 없어 보인다. 야크만 있으면 우유도 버터도 해 먹고, 야크 똥으로 추위도 녹이고, 저 아랫녘에서부터 짐도 운반해다 쓸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적적한 고지 살림에서 작은 위로와 벗도 된다.
아, 저 작고 낡은 집 한 채가 왜 이리도 마음을 짠하게 만드는지. 인간의 삶, 생명력이란 얼마나 눈물겨운 것이고 신미하고 찡한 것인지를 가만히 서 있는 저 초비(草扉)가 토닥이며 말해 주는 듯하다. 그 집 앞으로 여행자도 지나가고, 짐꾼들도 지나가고, 야크 떼도 지나가고, 물도 구름도 바람도 순순히 지나간다. 무엇이든 그 집 앞을 지나는 것은 모두 그림이 되고, 음악이 된다. 우뚝한 설산도 집 뒤에 서서 그 살가운 삶의 이야기를 지켜보고 있다.
계곡을 따라 걷는다. 아침 햇발이 개울 물낯에 부딪혀 쨍하고 반짝이는 모습이 한 폭의 활화(活畫)다.
계곡 가에 앉아 유장히 흘러가는 것들을 하릴없이 바라본다. 하늘이 어쩌면 저렇게 푸르를 수 있는지, 햇살은 어쩌면 저렇게 농롱히 반짝일 수 있는지, 물길은 또 얼마나 감성을 충만하게 적시어 주는지, 바람은 또 얼마나 소담하게 불어 와 살결을 어루만져 주는지, 물소리는 또 얼마나 고량한 울림으로 한 편의 음악을 연주해 주는지, 심지어 이 오롯한 풍경 속을 헤치고 지나가는 순례자들과 짐꾼들마저 이 풍경화 한 켠에서 자연스러운 조화를 이루며 흐르고 있다. 아! 아름답다 못해 가슴이 저리다. 발이 차마 떨어지지 않는다.
뒤를 몇 번이고 돌아보면서 고개를 온 몸을 이리저리 몇 바퀴 휘휘 돌려 이 만목황량의 시린 풍경을 가만 가만 느껴본다. 이 순간 이 자연과 내가 하나가 되는 것이 아니라 그저 오직 보여 지는 것만이 있을 뿐이다. 내가 있고 보여 지는 대상이 있는 것이 아니라 그저 거기에 그것들이 홀연히 ‘있을 뿐’이 아닌가. 세상을 향해 오감이 활짝 열어 재껴지면서 압도하듯 감성이 몇 배로 증폭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착각에 빠진다. 히말라야의 묵중한 우주가 이 작은 한 존재 위로 공명하듯 밀려들어온다. 하나 속에 전체가 뛰어들지만 모조리 흡수하고도 모자람이 없듯 감성이 광대역으로 확장된다. 발걸음이 양털구름처럼 가볍다.
계곡이 끝날 즈음 두 갈래 길이 나타난다. 물론 그냥 보아서는 이것이 길인지, 두 갈래 길이긴 한 것인지를 도무지 분간할 수 없는 그냥 길 없는 길이다. 이럴 때 포터나 가이드가 없으면 지켜 섰다가 뒤에 오는 이들에게 물어야 할 판이다. 다행히 며칠 전 이 길을 지날 때 눈여겨보면서 물길 따라 오른쪽 길이 종라(Dzonglha, 4830m)와 촐라패스(Cholapass, 5330m)로 가는 길임을 지텐에게 미리 들어둔 터라 혼자밖에 없는 갈림길에서 능숙히 비탈진 협로로 접어든다.
[히말라야, 내가 작아지는 즐거움](불광출판사, 법상)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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