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이 오는 소식이 이젠 재법 바람결에서도 느껴진다. 벌써 지난 달부터인가 봄꽃하며 봄나물 또 봄바람소식, 숲속으로부터 소리없는 소리로 봄소식을 듣는다 했더니, 지난 주 금요일에 서울 용산에 원광사를 갔다가 법당 앞 뜰에 거짓말처럼 화사하게 피어오른 매화꽃을 보았다. 저쪽 남쪽지방 지리산 아래 섬진강을 따라 매화꽃이 이제 막 시작이란 얘기를 얼핏 들었는데 거짓말이지 거짓말이지 봄꽃소식은 아랫지방부터 슬그머니 올라오는 맛이라는데 아랫지방에서도 꽃망울을 막 틔운 꽃이 이 텁텁한 서울 땅에서 이렇게 아름다운 모습으로 피어오르다니... 뜻하지 않던 행복감에 내 안에서도 따뜻한 봄바람에 매화꽃 한송이 움트는 듯 하다. 동백과 함께 겨울 잔설을 뚫고 솟아오르는 모습이 매화의 기상을 더없이 성성하게 해 준다고 하던데, 그야말로 지난 주 폭설 이후로 봄이 좀 늦으려나 싶은 염려는 기우였구나 싶다. 한동안 매화꽃 앞에 서서, 그냥 그냥 매화꽃을 마주하고 있었다. 활짝 핀 매화꽃 사이로 아직은 몽우리를 안으로 안으로 살찌우며 화알짝 필 날을 기다리는 꽃봉우리 다음 주 쯤이면 그야말로 매화가 만발이겠다. 주지스님 말씀이 지금부터 한 15일 정도가 매화꽃차가 한창이라며 그 예쁜 매화꽃을 따다가 차를 우려 마시는 그 운치를 말씀하시는데 아이고 참 가슴이 얼마나 시려오던지... 이런 것이 우리 삶의 참 행복이 아니겠나 싶은 마음이 순간 새삼스레 스친다. 사람들은 좀 더 잘 살아보겠다고, 좀 더 많은 돈 벌어 보겠다고, 좀 더 좋은 차에, 좋은 집에, 좋은 직장에, 좋은 학벌에 수많이 찾아 나서고 또 헤매고 그러지만 정작 그런 욕망과 욕망의 성취에서 오는 행복을 행복이라 할 수 있을까. 그런 건 그냥 들뜸일 것 같다. 우리가 저 한 송이 꽃이 피어오를 때 우리 안의 뜰을 가만히 살펴보게 된다면 바로 그 때 우리 안에서 꽃봉우리가 움트면서 그다지 들뜬다거나, 그렇게 오감으로 느낄 만큼의 행복감은 아닐지라도 은은하게 풍겨오는 꽃내음 같은 참행복을 누구라도 느낄 수 있는 것이다. 그런 행복은 너무 작기도 하고, 너무 미미하여 좀처럼 보여지지 않을지라도, 그것이 우리 삶의 가장 큰 행복 가운데 하나이다. 그 행복을 느낄 수 있는 사람만이 삶이 무엇인지, 인생이 무엇인지 느낄 수 있지 않을까. 내 인생의 행복은 이렇게 온다. 마음 속에 너무 들어 찬 게 많고, 너무 이룰 것이 많고, 너무 복잡한 일이 많으며, 너무 욕망과 집착이 많으면 감각적이고 들뜨는 행복만 보이고 찾게 되지 이런 행복감을 감히 느껴볼 수 없지만, 그냥 단순하게 비우고 살면 이런 행복감이 주는 그 평화의 참의미를 알 것 같다. 원광사 앞 뜰에 피어난 매화를 뒤로하며 돌아오는 길이 얼마나 많은 아쉬움으로 남았는지. 돌아오는 내내 눈앞에 꽃망울이 아른거리고 내 가슴은 봄의 생기로움으로 가득했다. 일요일 법회 때에도 매화 소식을 어린애처럼 전해주고 나서는 그 다음날 가슴 속에 담아둔 매화향의 그리움을 따라 지리산 자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지리산은 언제 가더라도 어머님 품 속 같은 숭고함으로 내 가슴을 아련하게 파고드는 산이다. 지난 해에도, 또 그지난 해에도 지리산 자락 산수유 소식이며 매화 소식 또 쌍계사 벚꽃 소식을 들으면서 내일 내일 미루다가 결국엔 못 가고 말았던 터라 미루고 미루다가 올해도 또 한 해를 넘길까 싶어 바로 길을 나섰다. 남원에서 구례읍 쪽으로 가다보면 온통 길 주위가 노오란 산수유로 가득하다. 산에 피는 생강나무하고 비슷하게 생겼는데, 보통 이렇게 산아래마을에는 산수유가 피고, 산에는 생강나무가 핀다고 언젠가 들은 적이 있다. 이 곳 지리산 산수유마을 말고도 경기도 이천 백사면에 산수유마을이 또 있다고 하니 4월 초 쯤에 서울 사시는 법우님들은 꼭 한번 찾아가 보시길... 특히 이천 산수유는 원적산 기슭 도립리 마을 끝자락 산기슭의 산수유 군락이 특히 아름답다고 한다. 아마도 산수유는 이번 주 보다는 다음 주(3월 넷째주) 쯤이 만개할 때라고 하지만, 이렇게 약간 덜 피었을 때 막 아름다운 꽃송이를 피우기 위해 마음을 다해 봄을 맞이할 때 그 첫 생기로움의 모습 또한 그 운치가 남다르다. 새봄을 가장 먼저 알리는 꽃으로는 단연 매화고 또 산수유다. 동백이 봄꽃의 강렬한 아름다움을 품고 있다고는 하지만 동백은 봄꽃이기도 하지만 오히려 겨울 꽃이라고 부르는 편이 좋을 지도 모른다. 지난 1월 제주도에 갔을 때, 우리 사는 동네에는 옴짝달싹 할 수 없는 추위며 눈이 몇 십년 만인지, 백년 만에 왔다는 소식에 움츠렸던 마음을 1월의 동백이 성스러운 기연으로 녹여 주었던 것을 기억하기 때문이다. 동백이 활짝 피어오른 때에 그 위로 하이얀 눈이 살짝 내려앉은 모습은 아직 보지는 못하였지만 설레는 마음으로 마음 속에서 봄이오는 마음으로 품고 있다. 산수유와 매화는 그 색이며 생김새가 전혀 다르지만 똑같이 이른 봄에 봄소식을 알리는 전령사라는 점도 그렇고, 잎이 피기 전에 먼저 꽃을 틔운다는 점도 닮은꼴이다. 잎을 다 떨구고 한겨울을 보내며 그 위에 눈꽃을 피워올리던 가지들이 눈꽃이 녹아내리는 소식과 함께 잎을 기다릴 것도 없이, 온연한 봄을 기다릴 것도 없이 불쑥 그 천연한 꽃들을 피워내는 것을 보면 이 대자연의 나툼이 그야말로 관음보살의 화신일거란 생각에 수긍이 간다. 대자연의 모습은 그대로 부처님의 나툼이고 관음의 나툼이며 하느님의 나툼이고 불성이고 신성이 그대로 꽃을 피우는 신성한 연주다. 산수유 가득한 봄길을 걷고 있자니 내 생명의 봄이 행복한 몸짓으로 나를 부르는 듯 하다. 지리산 아랫마을 사람 손길로 덜 더렵혀진 고색이 창연한 가파른 계곡, 개울 물소리, 오랜 집 몇 채, 나른한 봄 햇살을 쬐며 집앞에 나앉은 할머님 모습. 그리고 그 계곡을 노오랗게 수놓고 있는 산수유꽃의 향연. 산수유마을의 절정은 아무래도 상위마을 묘봉골 개울 좌우로 수채화처럼 펼쳐진 산수유와 맑게 흐르는 청아한 물소리에 있다. 개울가를 걷고 있자니 지난 해 봄에나 보았던 또다른 봄꽃들이 손짓을 한다. 꼭 용이 하품을 하는 것 같은 모양을 한 광대나물도 한겨울 긴긴 겨울잠을 자고 일어나 하품을 하는 듯 눈길을 끌고, 봄에 길가에나 밭둑에서 많이 보았던 손톱보다 작은 크기의 앙증맞은 별꽃도 꼭 일년 만이다. 역시 남쪽 지방엔 봄이 빠르게 온다. 노오란 마을 노오란 정겨운 나무 사이를 걷고 있자니, 어릴 적 유치원복 입고 성모유치원 다니면서 신부님 수녀님과 뛰어놀던 기억이 어름어름 떠오른다. 점심공양 맛있게 먹고나서 매화마을 찾아 가는 길. 대학 때 산을 올랐다가 내려오면서 잠시 들렀던 쌍계사엘 잠시 들렀다. 산수유마을에서 구례읍 쪽으로 가다가 하동쪽으로 가는 19번 도로를 옮겨 타고 달리면 왼쪽으로는 지리산자락의 아름다움이 오른쪽으로는 섬진강의 아련함에 매료되지 않을 수 없다. 화엄사 천은사 이정표를 지나 연곡사 피아골 이정표도 지나 쌍계사 즈음에 와서는 도무지 그냥 발을 옮길 수가 없었다. 19번 국도에서 쌍계사 이정표를 보고 지리산 쪽으로 들어오다보면 이제 여기서부터 벚꽃의 화사한 터널이 이어지는데, 물론 지금은 3월 중순이라 벚꽃까지 보기에는 아직 이르다. 그렇더라도 아쉬워 할 것은 전혀 없다. 내가 참 좋아하는 곳이 또 이곳인데, 이 계곡은 좌우측 가파른 산비탈로 야생의 얕은 차나무가 그야말로 다향의 그윽함으로 배어나오는 곳이다. 차나무며 차나무 사이 사이에 드문 드문 피어오른 매화꽃에 길 곳곳에 운치있게 지어진 찻집들까지 그리고 물소리 봄바람소리까지 곁들여진 가만히 생각만 해도 입가에 미소가 띄어지는 부처님 품속이다. 아직 차를 딸 때는 많이 이르다는 것이 일반적일 터인데 차밭 한가운데로 차따는 아낙 둘이서 올 해의 첫 차를 우리기 위해 그 여리디 여린 차잎을 따고 있다. 이제 한 달여가 지나면 우전에 쓸 찻잎을 따는 손길이 많이 빨라지고 더없이 정성스러워질 것이다. 그 때가 되면 이 계곡은 그야말로 물이 오를대로 오른 초록의 숨결로 고동을 친다. 봄이 되어 산빛이 초록으로 물든다는 표현을 난 처음 이 곳에서 새삼 찐하게 느끼게 되었다고 하면 곡우 전후 이 곳의 초록빛 아름다움이 조금은 상상이 가려나. 그런 곳이다. 차 계절이 되면 이 차 고장의 풍경은 더없는 초록의 아름다움을 선사한다. 그런 좋은 곳, 맑은 곳에 그 차향이며, 벚꽃길, 매화향과 지리산의 이름에 견주어도 전혀 손색이 없는 도량 쌍계사가 자리하고 있다. 좁은 계곡 다리를 건너 터벅터벅 걸어오르다 보면 차밭의 풍경도 풍경이지만 육중한 몸매를 자랑하는 굴참나무 몇 그루가 먼저 눈에 들어오고, 일주문에서부터 펼쳐지는 삼나무의 쭉쭉뻗어 오른 기상하며 좌측 선방쪽 대숲의 청청한 기운도 그렇고 도량 곳곳에 아기자기 심어 놓은 온갖 꽃과 나무가 고풍스런 도량과 참 잘 어우러져 있다. 도량을 걷는 마음이 꿈결 속을 거니는 듯 나지막한 설렘으로 가득하다. 도량 곳곳에 피어오른 꽃들도 참 대견하고... 범종루 앞에 한 그루 화사히 피어오른 매화, 대웅전 앞에 강렬하게 피어오른 동백, 팔상전 뒤로 한 그루 풍성하게 피어있는 산수유, 선방 뒤안에는 노오란 산수유와 하이얀 매화 두 그루가 오랜 연인처럼 혹은 깊은 도반처럼 그렇게 조화롭게 서 있고, 도량 곳곳에 하얀 백의관음 매화꽃이 사뿐히 내려앉아 있다.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도량을 거닐다 보니 벌써 늬엇늬엇 해가 서쪽으로 기울고 있다. 그제서야 아차 싶은 마음에 매화마을 생각이 났다. 섬진강을 따라 내려가는데 좌우로 산비탈을 수놓고 있는 차나무며 매화꽃들이 서산으로 지는 저녁 노을을 받아 더욱 황홀경으로 물들이고 있다. 아름다움에 취해 한참을 내려가는데 서쪽 산으로 떨어지는 저녁노을을 받아 반짝 반짝 빛나는 섬진강 물결 위로 배 한 척 지난다. 매화마을에 막 도착하니 마을 전체가 떠들썩 하고 평일이고 저녁인데도 많은 사람들로 가득하다. 알고 봤더니 매화축제를 한다고 이번 주가 한참 매화의 절정이라고 한다. 섬진강이 유유히 흐르고 산과 마을 전체가 온통 하이얀 매화꽃으로 가득. 이런 말을 듣고 머리 속으로 상상만 해 가지고는 도무지 이런 풍경을 연출할 수 없을 것 같다. 3월의 지리산은 도무지 알 수가 없다. 이러니 내 마음이 지리산에 흠뻑 빠지지 않을 수가 없는 것도 당연한거지... 매화꽃으로 가득하다는 표현보다는 하늘나라에서 매화의 신들이 잠시 내려앉은 듯, 어쩌면 2,500여 년 전 부처님 회상에서 1,250인의 부처님 제자들과 온갖 천신들이 법석을 베풀었던 그런 회상이 흡사 이렇게 아름다웠을까. 매화마을을 훤히 바라보며 산 위쪽으로 걸어오르다 보면 매화와 매화열매인 매실을 잘 담궈 놓은 장독들이 그 뒤로 매화꽃들과 잘 조화를 이루고 있다. 한쪽 곁에 외떨어진 장독과 그 옆의 작은 매화나무도 어진 풍경을 연출하고 있다. 한참을 그러고 있는데 나도 모르게 매화마을 이 성연한 하늘 위로 어둠이 내려앉고 있다. 꿈결 속을 거닌 듯, 부처님 회상에 나들이를 다녀온 듯, 노오란 또 하이얀 봄꽃과 함께 한 하루가 짠한 그리움으로 스치운다. |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