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월은 만물이 생동하는 달이다. 한겨울 침묵을 지키며 저마다 자신의 빛을 안으로 비추던 숲의 생명들이 봄햇살을 맞아 그 침묵을 깨고 피어오르는 계절. 이런 날은 누구나 그러하겠지만 겨울 동안의 오랜 추위와 침묵을 깨고 자연 생명의 리듬에 맞춰 설레는 마음으로 길을 떠나고 싶은 그런 때다. 때때로 이렇게 쉽게 길을 떠날 수 있는 내 처지가 그렇지 못한 많은 이들에게 미안함으로 다가오기도 한다. 떠나고 싶지 않은 사람이 어디 있으랴. 요즘들어 ‘가난한 삶’이라는 것이 하나의 화두처럼 내 삶에 숙제로 다가오면서 이러한 나의 잦은 길 떠남이 가난의 정신에 위배되는 것 같아 스스로에게 몇 번이고 되묻기도 하고 또 길 위에서의 씀씀이를 최소한의 필요로 줄이고자 면밀히 살핀다. 지금은 내가 해야 할 소임이 있다 보니 걸망 하나 둘러 매고 날짜 기약도 없이 가난한 길을 나서지 못하는 형편이지만, 마음속에서는 내 식대로의 진짜 만행을 꿈꾸곤 한다. 일정한 거처가 없는 것이 참된 만행이고, 참된 만행이야말로 모든 수행자의 삶이고 길이며 집이다. 거처가 없다는 것은 어느 한 곳도 머물러 있을 곳이 없다는 말이고, 그것은 꼭 어떤 공간 개념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닌 오래도록 정착하여 마음 둘 곳이 없어야 한다는 말이기도 하다. 마음이 어느 한 곳에 머물러 있게 되면 고여 있는 물이 썩고 말듯 우리 마음도 이내 퇴색되고 그 빛을 잃어가게 마련이다. 머문다는 것은 집착을 의미하고 집착은 곧 괴로움이기 때문이다. 그렇게 보았을 때 참된 만행이라는 것은 괴로움을 떨치기 위한 수행의 과정인 것이다. 몸이 길을 떠나는 것은 작은 만행이다. 마음이 어느 한 곳에 머물지 않을 수 있도록 날마다 아니 매 순간 새로울 수 있도록 마음이 길을 떠나는 것 그것이 참된 만행이다. 나의 길떠남이 그러한 마음의 길이 되고 있는지 오늘도 길 떠남에 앞서 스스로에게 물어본다. 길을 나설 때는 어느정도 어느 곳을 갈 것인지 미리 정해 놓고 가는 것이 대부분이지만 내 여행길은 보통 딱 정해 놓고 가는 길은 아닌 경우가 많다. 그저 발길 닿는 대로, 마음 가는 곳으로 그 때 그 때 가고 싶은 곳으로 가는 쪽이 더 자유롭다. 딱 정해 놓고 그 곳을 가려는 마음이 너무 커버리면, 또 일정별로 코스와 시간을 딱 정해 놓고 그 시간표대로 움직이려고 애쓰다 보면 내가 주체적으로 여행을 하는 것이 아니라 여행 일정에 되려 내가 휘둘리는 일이 생기게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어느 한 곳이 좋으면 그냥 좋은대로 하루 종일 있을 수도 있고, 또 눈에 거슬리고 귀에 거슬리는 풍경이거나 요즘 같아서는 너무 화려하게 치장을 했거나, 자연 그대로를 잃어버리고 너무 개발이 되었다거나 하는 등의 풍경에서는 나도 모르게 빨리 발길을 돌리고 싶어지기도 한다. 다니다 보면 그 명성과 유명세를 듣고 찾아간 곳에서 오히려 실망감을 안고 돌아오는 곳도 있고, 전혀 생각지도 못했던 곳에서 도리어 큰 행복감과 만족을 얻게 되는 곳도 있게 마련이다. 후자의 대표적인 경우가 선암사를 가는 길에 이정표를 보고 문득 들른 경남 사천의 다솔사. 아마도 작년 여름인가 도반들과 함께 대흥사 가는 길에 문득 들렀던 월출산 도갑사도 그런 경우에 속한다. 이름도 낯설고, 혹시나 싶어 들른 곳에서 생각지 못한 풍경을 만날 때 그 행복감은 한층 배가가 되곤 한다. 물론 상대적으로 큰 기대를 품고 찾아간 도량에서 눈살 찌푸리는 풍경을 만나고 나면 그 실망감 또한 한층 깊은 것은 말할 것도 없다. 어쨌든 봄꽃향기를 느끼기 위한 길 위에서 이름이 마음에 들어 문득 들른 이번 만행의 첫 번째 도량 다솔사에서 생각지 못한 평화로운 봄소식은 이번 여행의 느낌을 더없이 설레게 해 주었다. 우선 톨게이트를 벗어나 절을 찾아가는 길에서부터 여기 저기 우거져 있는 대숲의 모습이 인상적이었고, 절 아래 초입에서 일주문까지 오르는 길 또한 오른쪽으로는 시원스레 쭉쭉 뻗어오른 소나무 숲과 왼쪽길로는 마찬가지로 훤칠하게 솟아오른 삼나무 숲이 도량의 첫 느낌을 시원하고 청정하게 만들어 주었다. 그런데 막상 경내를 거닐다 보니 도량의 아기자기한 풍경 또한 마음을 잔뜩 흔들어 놓고 있다. 가만히 보니 이 도량은 대웅전이 있을 자리에 적멸보궁이 들어 서 있다. 요즘은 5대 적멸보궁 외에도 전국의 곳곳에 부처님 진신사리를 모신 적멸보궁이 많이 있던데 이 곳 다솔사도 적멸보궁으로 법당에는 부처님께서 입적하시는 모습의 열반상이 보이고 그 위로 투명한 유리 사이로 사리탑이 눈에 들어온다. 보궁에서 참배를 하고 보니 여느 적멸보궁처럼 뒤쪽 사리탑이 훤히 내다보이게 창을 달아 놓았지만 부처님을 모시지 않은 다른 보궁과는 다르게 열반상을 하고 계신 와상의 부처님이 모셔져 있다. 적멸보궁 뒤쪽에는 사리탑이 있으며 사리탑 뒤쪽으로 차밭이 생기롭게 펼쳐져 있다. 차밭이 처음 눈에 들어오자니 우연히 찾아 간 곳에서 어머님을 만난 것처럼 오랜 도반을 만난 것처럼 평안하면서도 그윽한 마음의 향을 느끼게 된다. 알고 봤더니 다솔사 또한 빼놓으면 서러울 차의 도량이다. 차에 대한 책을 우리나라에 처음 내 보인 효당스님의 ‘한국의 다도’란 책도 이 도량에서 처음 선보인 것이라고 한다. 다솔사 차는 ‘죽향차’라고 하여 제조방법부터 좀 독특하다. 차잎을 가마솥에서 여덟 번 덖고 옹기에 넣어 일주일간 숙성시킨 뒤 대나무에 넣고 황토로 막아 철판 위에서 아홉 번 굽는다. 또한 덖을 때는 참솔 장작만을 사용하고 장작불을 땐 황토방에서 숙성을 시킨다고 한다. 다솔사 사리탑 뒤쪽으로 펼쳐져 있는 차밭에서 직접 딴 차잎으로 스님과 신도님들께서 이 모든 작업을 수작업으로 제작하기 때문에 그 맛이 더욱 깊고 정성이 담겨 있다고 한다. 이러한 정성이 담기다 보니 많이 만들기는 어려운가 보다. 한 해에 우전과 세작을 다 합쳐도 50g 짜리 2,000통 정도밖에 못 만든다고 하고, 그렇게 만든 차도 거의 전국의 절에 선물로 보내거나 다솔사에서 스님들이 마시다 보니 일반인들이 죽향차를 쉽게 구하지는 못할 수 밖에 없다. 다솔사의 경내 서점에 가야 조금 구할 수 있는데다 그것도 다 팔리면 다음 해를 기다려야 한다니 죽향차 맛을 음미해 보기가 참 어려울 것 같다. 이러한 죽향이 만들어지는 차밭으로 발길을 옮겼다. 차밭 곳곳에는 벌써부터 아기자기 예쁜 야생화들이 앞다투어 피고 있다. 내 봄맞이 만행의 시작을 환하게 열어준 꽃들... 중부지방에서는 아직 봄꽃들을 맞기에는 조금 이른 때에 아랫지방으로 만행을 온 이유도 피어오른 봄꽃들에서 봄소식을 전해듣기 위해서였다. 그런 내 마음을 이 꽃들이 잘 알아준 것인지, 아니면 나의 그런 마음이 다솔사로 이끌어 준 것인지는 잘 모르겠다. 스님들께서 일부러 심으신 것 같다는 착각을 일으킬 정도로 온갖 종류의 야생화들이 너무나도 앙증맞게 피어올랐다. 그야말로 꼭 1년 만에 보는 야생화 군락, 봄꽃들이다. 처음 눈에 들어오는 꽃이 양지꽃. 뱀딸기하고도 똑같이 생겨 구분이 조금 어려운 꽃인데 노오란 꽃잎을 활짝 열어 보여주었을 때 그 기쁨을 어떻게 표현해야 좋을까. 혹시나 싶어 고개를 이리 저리로 돌려 보니 생각지 못했던 온갖 이른 봄꽃들이 활짝 피어올라 내 마음을 온통 물들이고 있다. 양지꽃 옆에서 본 꽃이 제비꽃, 그리고 먼저번 산수유마을에서 보았던 별꽃도 보이고, 광대나물은 군락을 이루며 지천으로 펼쳐져 있다. 눈에 보일 듯 말 듯 작디 작은 참꽃마리도 피어올랐고, 윗 지방에서는 한참 냉이를 먹고 있는데 이 곳에서는 냉이꽃도 벌써 피었다. 꽃다지하며, 민들레도 도량 곳곳에 무리지어 피어있다. 원추리 새순도 연초록이 찐하게 솟아있고, 명자꽃들도 이제 막 꽃봉오리를 열어재끼고 있으며, 빠알간 동백도 막바지 생명에 온 힘을 기울이고 있다. 그야말로 봄이 생동하며 내려앉아 있다. 아마도 이 도량 다솔사에만 이른 봄꽃들이 먼저 내려앉지 않았을까 싶을 만큼 벌써 다솔사는 봄의 한 가운데에 와 있다. 날씨도 조금 전까지 우울하여 비가 올 것만 같더니 거짓말처럼 다솔사에 들어오자마자 햇살을 내비쳐 주고 있다. 적멸보궁 앞에서는 다회가 열려 누구든지 들어 와 다솔사 차 맛 보고 가라고 친절하게 안내까지 해 주고 있다. 그 유명한 죽향차인가 싶어 한 잔을 마셨는데 아쉽게도 보이차지만 이런 만행길에서 차 한 잔 마실 수 있다는 건 참 행복한 인연이고 평화로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차 한 잔 따뜻하게 마시고는 다시 발길을 돌려 선암사로 향한다. 이 이른 봄 선암사를 향하는 이유는 매화의 향이 그리워서다. 물론 매화 뿐 아니라 산수유며 동백 그 밖의 봄꽃들이 화알짝 수놓은 모습 하며, 다른 절과는 다르게 고색 창연한 도량의 운치가 바라보는 이로 하여금 마음까지 고요하게 해 준다. 매화하면 단연 선암사를 꼽는다. 매화마을이나 남쪽지방의 다른 사찰들도 이 즈음이면 매화의 향연이 한창일 때이지만 선암사 매화처럼 운치있고 고풍스런 도량과 잘 어우러져 조화를 이루는 곳은 흔치 않다. 매화마을에는 온 산이 다 매화 천지라 그냥 말문이 턱 막힐만큼 우리의 시선을 잡아끌지만 그 많은 매화꽃에도 불구하고 그 향에서는 선암사 매화에 미치지 못한다. 모르긴해도 매화마을에서는 매화꽃 필 무렵의 관광자원과 매화꽃이 지고 난 뒤 매실을 수확해야 하다 보니 거름도 듬뿍 주어야 하고, 비료며 병충해 예방이며 뭐다 뭐다 해서 인위적인 노력이 많이 들어가지 않을 수 없을것이다. 그러다 보면 매화 본연의 향기며 매화 자신의 색과 빛을 많이 잃게 되지 않을까 싶다. 모든 자연이 그렇듯 자연은 자연 그대로 놓아두었을 때 제 빛을 한껏 발한다. 그러나 선암사를 비롯한 남쪽지방 사찰의 매화는 그런 인위적인 노력이 아무래도 덜하지 않을까 싶다. 실제로 지난 주 지리산 화엄사를 들렀을 때 각황전 아래 한 그루 피어난 매화나무에서 얼마나 진한 매화향을 들었었는지 모른다. 그럴진대 선암사의 매화야 더 말할 나위도 없다. 빛바랜 고풍스런 도량의 모습에 곳곳에 피어오른 매화꽃을 보고 있노라면 그냥 말문이 딱 막혀버린다. 도량 오른쪽으로 차밭 가는 길목에 펼쳐진 매화꽃 터널은 그야말로 극락세계가 예 아닌가 싶을 정도. 이런 곳에서는 촐싹거리며 바삐 구경다닐 것이 아니라 한 발 한 발 차분히 걸으며 마음으로 그 향기를 들을 수 있어야 한다. 때때로 가만히 앉아 두 눈을 감고 가녀리게 내 품으로 안기는 매화향기를 온몸으로 느껴볼 수 있어야 한다. 좌선을 하듯, 호흡을 관해 보듯, 들이고 내는 숨을 바라보며 그 숨을 따라 함께 오고 가는 매화향을 차분한 가슴으로 느낄 수 있어야 한다. 이런 느낌, 이런 풍경, 그리고 이런 향기는 자주 접하는 것이 아니니까. 이러한 아늑한 풍경일수록 어떻게 바라보는가 하는 점이 중요하다. 이런 순간은 내 안의 깊은 울림을 관찰해 볼 수 있는 아주 소중한 기회가 되기 때문이다. 보통 사람들은 선암사 매화가 유명하다더라고 하면 매화꽃이 만발할 무렵 바삐 시간을 내서 훌쩍 다녀가곤 한다. 그런데 막상 와서 보고 느끼다 보면 사진에서 본 것보다, 혹은 지난 해 와서 보았던 것 보다 더 별로라거나, 또는 무언가 생각했던 것보다 못하다고 느끼는 수가 많다. 왜 그럴까? 무엇이 좋다고 하면 그것을 보러 가면서 마음속에서는 무언가 감각적으로 강렬한 느낌이나 자극을 바라게 마련이다. 그런데 막상 딱 가서 보면 분명 좋기는 좋고, 아름답기는 아름다운데 육근을 자극할만한 그 어떤 감각적이라거나 자극적인 느낌이 아니거든. 그러다 보니 막상 가서는 여기저기 찾느라고 바삐 걷고 뛰다가 혹은 사진 몇 장 펑펑 찍다가 그냥 뒤돌아 오곤 하는 것이다. 그것은 왜 그렇겠는가. 정말 좋은 느낌은 감각적으로 강렬하게 다가오거나 하는 자극적인 느낌이 아니다. 오히려 자극적이고 아주 감각적인 좋은 느낌은 금새 육근을 마비시키거나 싫증나게 만든다. 금새 끓어올랐다가 금새 식게 만들고 만다. 그 때 뿐이지 그 때가 지나고 나면 그 여운이 향기로운 향내가 되고, 은은한 종소리가 되어 메아리 치지 못한다. 그러나 정말 좋은 느낌은 은은하고 가녀리며 차분하면서도 뼛속 깊은 곳에까지 울리면서 나도 모르는 순간에 알게 모르게 다가온다. 그러면서 훗날 문득 그 때를 회상하게 되었을 때 아련함과 설레임으로 내 가슴을 한껏 물들이면서 수를 놓곤 한다. 그래서 내 생각엔 정말 좋은 느낌, 좋은 곳은 그 때 보다도 시간이 지나면서 내 마음을 더욱 훈훈하게 해 주고 그립게 해 주는 그런 곳이 아닌가 싶다. 조용하고 고요한 숲 속에서 끼륵끼륵 풀벌레 울음소리를 들을 때의 느낌은 웅웅거리는 선술집이나 노래방 같은 데서 요란하게 울려대는 노랫소리와 견줄 수 없는 것과 같다. 후자는 그 순간 감각적이고 자극적이지만 향기가 없고 여운이 없다. 그러나 전자의 그것은 당장에 감각적이고 자극적이지는 않더라도 육근을 조용히 관하면서 그에 비친 대상을 차분히 바라보고 있노라면 나도 모르는 사이에 내 안 깊은 곳에까지 은은하지만 경이로운 감성을 자아낸다. 그래서 매화꽃 한창인 선암사를 걸을 때에도 그 어떤 감각적인 바램은 그냥 편안히 놓아버리고 그저 온몸과 온몸의 감각을 내맡기고 편안하게 느끼며 천천히 걸을 수 있어야 하는 것이다. 이렇듯 한동안 고요한 마음으로 도량을 거닐다 보면 내 마음은 어느덧 편안하게 쉬고 있다. 마음을 쉰다는 것이야말로 수행자의 가장 중요한 일과이다. 수행 수행 하고 고집하면서 수행을 잘 하려고 많이들 애를 쓰는데, 사실은 수행 잘 하려고 애쓰는 것이 수행이 아니다. 그저 잘 쉬면 그것이 수행이다. 잘 쉴 줄 알아야 하고, 참된 휴식을 얻을 줄 알아야 하는 것이다. 이렇듯 도량은 모든 이들을 쉬게 해 주는 곳이다. 영혼에 맑은 휴식을 주는 것 그것이야말로 도량의 참된 기능이다. 그런 점에서 매화꽃 필 무렵 선암사의 품은 어머님 품처럼이나 포근하고 편안하다. 이렇듯 도량은 모든 사람을 품어주는 곳이다. 스님이든 신도든, 불교신자든 타종교 신자든, 괴로운 사람이든 즐거운 사람이든, 나쁜 사람이든 좋은 사람이든, 따뜻한 말과 생각과 행동으로 일체 모든 이들을 그윽하게 품어주는 것이 도량의 본연의 기능이다. 도량 한 쪽에서는 스님들의 운력이 한창이다. 그 옆으로 사연 많은 이들의 마음 속 바램들이 기와에 고스란히 아로 새겨져 있다. 선암사도 이제 얼마 안 있으면 차 계절이 돌아오고, 차 따는 스님들의 분주함이 이 도량을 한층 생기있게 만들어 줄 것이다. 선암사 차 맛은 지허스님 덕분에 보긴 했지만 차 한 통 주문을 해야지 하고는 작년에 못 해 놓았던 것이 후회가 되어 올 해에는 꼭 한 통 주문을 해야지 싶다. 어느덧 산그림자가 도량을 뒤덮고 있다. 대웅전 그림자가 길게 늘어졌다. 도량은 이제 더 깊은 침묵으로 서서히 잠이 들 것이다. 이 어둠을 뒤로 하며 터벅 터벅 걸어 나오는 발걸음이 가벼웁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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