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공부 생활수행' 카테고리의 글 목록 (42 Page)
법상스님의 목탁소리

상주 대원정사 일요법회(13:30), 부산 목탁소리 토요법회(13: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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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공부 생활수행 457

지금 여기에서 깨어있으라

부처님께서는 마음을 과거나 미래로 흘려보내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과거나 미래에 대한 온갖 망상들이 우리의 마음을 크게 흔들고 있음을 자주 명상하곤 합니다. 이미 지나간 과거를 회상하면서 슬퍼하거나 후회를 하고, 오지도 않은 미래에 대해 헛된 상상을 함으로써 그 생각의 늪에 빠져 괴로워하기도 합니다. 그러한 과거나 미래로 흐르는 온갖 망상들을 다시 되돌려 지금 이 자리에서 그대로 내려놓는 것이 수행의 첫 걸음이란 것을 잘 알지 못하는 듯 합니다. 물론 현재의 마음이야 언급할 필요가 없이 그대로 관찰하고 내려놓는 작업이 필요함은 물론입니다. 이것이 바로 금강경에서 말하는 과거심불가득, 현재심불가득, 미래심불가득의 가르침 입니다. 과거, 현재, 미래는 고정된 바가 없습니다. 그저 가만히 흐를 뿐입니다. 흐르는..

열린 종교를 말하다

나의 신앙적 정체성은 무엇인가. 물론 나는 불교신자다. 불교 수행자이다. 그러나 동시에 나는 기독교 신자도, 천주교 신자도, 이슬람교며 힌두교의 신자도 될 수 있다. 내가 불교 수행자라는 이유가 나를 기독교 신지가 되지 못하도록 만들 이유는 어디에도 없다. 또한 그렇다고 나의 이러한 종교적 생각이 나의 불교적인 신앙 정체성을 흔들어 놓을 아무런 이유도 없는 것이다. 참된 불교적 정체성이라는 것은 바로 이러한 것이다. 이렇게 활짝 열려있으며 어디에도 갇혀 있지 않는 것. 그것이 바로 불교적인 삶이고, 지혜로운 삶이다. 불교는 불교 그 자체에 고집하지 않는다. 불교라는 것은 다만 이름붙인 것일 뿐이다. 진리를 그렇게 이름 지은 것일 뿐이다. 물론 사람들은 이 이름이나 틀 속에 스스로 갇히길 좋아하고, 그러한..

변하는대로 변하게 내버려두라

부처님 가르침의 핵심은 일체 모든 것은 끊임없이 변한다는 진리, 즉 무상(無常)의 진리이다. 일체 모든 존재는 끊임없이 변한다. 잠시도 머물러 있지 않고 찰나 찰나로 흐른다. 어느 한 순간도 멈출 수 있는 것은 없다. 변화를 멈출 수 있는 존재는 없다. 어떻게 멈출 수 있단 말인가. 아무리 노력하고 애를 써도 변한다는 진리를 멈출수는 없다. 진리가 그러하기 때문이다. 진리가 그렇듯 끊임없이 변화해 가기 때문이다. 고정된 진리는 하나도 없다. 끊임없이 변화할 뿐. 변화한다는 그 사실만이 변치않고 항상할 뿐. 진리와 하나되어 흐를 수 있다면 우리 자신이 그대로 진리가 된다. 우리 자체가 곧 진리의 몸이 되어 버린다. 진리를 깨닫고자 하는가. 그렇다면 진리와 하나되어 흐르라. 그러면 어떻게 진리와 하나되어 흐..

집착을 버리는 것, 그것이 우리가 해야 할 전부다

hpDZfPGLshppTMnffi1nI0qa8i3 무언가를 나누어 주거나 또 무언가를 받을 때, 참 기분이 좋다. 줄 때도 기분이 좋고, 받을 때도 기분이 좋다. 그런데 주었을 때 좋은 기분하고 받았을 때 좋은 기분은 좀 다르다. 주었을 때 기분이 좋은 이유는 무얼까. 무언가를 주게 되면 ‘내 것’이 소멸되기 때문에 괴로워야 할텐데 좋은 것은 무엇때문인가. 그것은 우리 안의 참나, 다시 말해 온 우주 법계의 참성품이 둘이 아닌 하나로써, 대아(大我)로써 존재하기 때문이다. 주는 자도 받는 자도 주는 것 또한 모두가 하나의 성품이니까 무엇을 주고 받고도 없이 그냥 좋은 것이다. 즉 주었을 때 좋은 기분은 가만히 살펴보면 근원적인 기쁨이라고 할 수 있고, 받았을 때 좋은 기분은 보통 세간적인 기쁨이라고 할 ..

완전히 새로운 나를 만난다

어제의 나는 내가 아니다. 어제의 내가 시간이 흐름으로써 오늘의 내가 되었고, 10년 전의 어릴 적 내가 세월이 흘러 성장한 어른이 되었다는 것은 순전한 어리석음이고 착각에 불과하다. 어제의 나는 그저 어제의 나일 뿐이고, 오늘의 나는 그저 독자적인 오늘의 나일 뿐이다. 어제의 내가 변해 오늘의 내가 된 것이 아니라, 어제의 나는 어제의 나로써 존재했고, 오늘의 나는 오늘의 나로써 전혀 새롭게 존재한다. 조금 전의 나는 내가 아니다. 그저 ‘지금 이 순간’ 찰나로 존재하는 내가 있을 뿐이다. 조금 전의 나라는 존재와 지금 이 순간의 나라는 존재는 전혀 다른 존재다. 물론 이것을 보는 데는 두 가지 시선이 있을 수 있다. 지금의 나에서 어제의 나를 보고 10년 전의 나를 볼 수도 있다. 그러나 그것은 연기..

힘 있는 대장부로 살라

수행자는 힘이 있습니다. 내면의 힘이 당당하게 버티고 있기 때문에 삶의 그 어떤 경계라도 쉽게 수행자를 뒤흔들 수 없습니다. 입시철이 다가오거나, 진급철이 다가오거나, 이런 저런 어려운 일이 닥치면 백일 기도다 뭐다 해서 열심히 기도하시는 분들이 봅니다. 이런 때를 계기로 진실된 마음 내어 기도를 하는 것은 참 좋은 일입니다. 그런 세속적인 바램(욕망)들로 인해 마음 공부를 할 수 있는 인연이 되기 때문이지요. 그렇다고 하더라도 우리는 그런 기도의 의미를 명확히 알고 있어야 할 것입니다. 입시기도나, 진급기도 같은 기도는 그 목적이 '합격'이나 '진급'에 있지 않습니다. 이 사실을 명확히 하고 정진을 시작해야 하는 것입니다. 대부분 사람들은 입시기도나 진급기도를 할 때 합격하기 위해서, 진급하기 위해서 ..

그냥 이대로 푹 쉬라

무엇을 하면서 있는 것이라거나, 무엇을 위해 있는 것이라거나, 왜 있다거나, 어떻게 있다거나, 어느 자리에 있다거나, 어느 때에 있다거나 그런 것 말고 그~냥 그~냥 아무 이유 없이 그냥 있을 수 있습니다. 우린 모두 지금 이 자리에 그냥 이렇게 있지 않아요. 그냥 그거면 충분한 겁니다. 자꾸 더 이상을 바라지 마세요. 이유를 붙이지도 말고, 잡다한 것은 그냥 놓아버리고 그냥 이렇게 있어 보세요. 무엇을 하면서 있지 말고, 무엇을 꿈꾸지도 마세요. 보거나, 듣거나, 냄새 맡거나, 맛 보거나 감촉을 느끼거나, 생각을 일으키거나 그러지 않더라도 우리의 내면은 충분하니까요. 세상이 바빠졌다고 나까지 바빠질 필요는 없습니다. 세상이 번잡스러워 지다 보니 또 그 속에 너무 익숙해 지다 보니, 평온과 고요한 침묵을..

자기한정과 무한능력의 주인공

본래 우리의 능력은 한계가 없는 법입니다. 우리는 보통 자기 자신에 대한 나름대로의 평가를 내려놓고 살아갑니다. '나의 능력은 이정도야' 라고 스스로 자기 한정의 관념의 선을 그어 놓기 마련입니다. 그리고는 그 능력 밖의 일에 대해서는 도저히 상상할 수 없는 일로 덮어놓는 경우가 많습니다. 누구나 나 자신은 내가 가장 잘 알고 있다고 그렇게 생각하고 세상을 살아갑니다. 자기 자신의 능력을 스스로 어느 선까지만 규정지어 놓고는 스스로가 만들어 놓은 그 자기한정의 관념에 노예가 되어 버립니다. 우리가 '내 능력은 이 정도야' 라고 할 때 그 정도의 능력은 바로 스스로 짓고 있는 그 자기한정의 관념에서 나온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스스로를 얼마만큼 한정 지어 두느냐에 따라 정말 자신의 능력의 범위가 결정될 ..

고독, 우울감에서 벗어나기

우린 누구나 이따금씩 고독이나 허무, 허탈감을 느끼곤 합니다. 세상살이가 지독히 괴로워서도 아니고, 똑 부러지게 허무할 이유가 있는 것도 아니지만 우린 이따금씩 알 수 없는 허무감과 고독에 빠져듭니다. 확연하게 붙잡을 만한 행복이 있는 것도 아니고, 무언가 심연에 큰 설레임을 가져올 이벤트를 꿈꾸는 것도 아니고, 살다보니 똑같이 반복되는 일상의 진부감에 사로잡혀 이따금씩 내가 지금 무얼하며 살고 있는지, 내가 가고 있는 곳은 어디인지, 딱히 잡히질 않는 경우에도 여지없이 그런 해답 없는 허무감은 우릴 덮치곤 합니다. 누구나 그런 고독감은 있게 마련입니다. 누구나 인생의 그 어느 때에 지독한 허무감과 한바탕 싸움이라도 벌여야 할 때가 있나 봅니다. 특히나 요즘같이 싸늘해지는 가을이면 더욱 마음을 휘젖고 다..

세상을 보는 눈, 무한관점

아미타 부처님은 시간적으로 한량없는 수명(壽命)과 공간적으로 한량없는 광명(光明)으로 우리 앞에 나투시기에 무량수불(無量壽佛) 혹은 무량광불(無量光佛)이라 이름하기도 합니다. 무량수 무량광의 시공(時空)을 무량한 마음으로 무한히 나투시고 계십니다. 눈 깜짝할 사이에 억겁(億劫)의 시간, 삼천대천세계의 공간을 나투시며 어리석은 중생교화에 무량심(無量心)으로 응하고 계십니다. 그러나 무량수 무량광 아미타 부처님의 무한한 마음 나툼은 이미 내 안에 고스란히 담겨져 있음을 알아야 할 것입니다. 우리네 중생들은 그 무량수 무량광으로 펼쳐진 무한법계 속에서 살아가지만 그 무량법계를 무량심으로 살아가지 못합니다. 시공의 어느 한 귀퉁이로 좁혀진 유한한 마음으로 세상을 살아가기에 그 속에서 괴로움, 답답함, 조급함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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