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의 나는 내가 아니다.
어제의 내가 시간이 흐름으로써
오늘의 내가 되었고,
10년 전의 어릴 적 내가
세월이 흘러 성장한 어른이 되었다는 것은
순전한 어리석음이고 착각에 불과하다.
어제의 나는
그저 어제의 나일 뿐이고,
오늘의 나는
그저 독자적인 오늘의 나일 뿐이다.
어제의 내가 변해
오늘의 내가 된 것이 아니라,
어제의 나는 어제의 나로써 존재했고,
오늘의 나는 오늘의 나로써 전혀 새롭게 존재한다.
조금 전의 나는 내가 아니다.
그저 ‘지금 이 순간’ 찰나로 존재하는 내가 있을 뿐이다.
조금 전의 나라는 존재와
지금 이 순간의 나라는 존재는 전혀 다른 존재다.
물론 이것을 보는 데는
두 가지 시선이 있을 수 있다.
지금의 나에서 어제의 나를 보고
10년 전의 나를 볼 수도 있다.
그러나 그것은 연기를 설명할 때 사용하는 방법이고,
또 무상을 설명할 때,
그리고 한생명의 법신을 설명할 때 사용하는 방법이다.
지금 내가 말한
조금 전의 나와 지금의 내가
전혀 다른 존재라고 한 말은 또 다른 표현방법이다.
이것은 관념적이거나 교리적인 방법이 아닌
실천적이며 수행적인 표현방법이다.
물론 교리적으로 보았을 때,
휴지 한 장 속에서 햇살도 볼 수 있고,
나무도 볼 수 있고, 물도, 바람도, 대자연도 볼 수 있으며,
나아가 온 우주의 모든 존재며 인류까지도 볼 수 있다.
나라는 존재 안에서
시간과 공간을 초월한 무량수 무량광의 전체 생명을 다 볼 수 있다.
그것은 불성이라는 모든 존재의 근본바탕 위에서,
또 그 위에 연기법으로 신기루처럼 만들어진 꿈같은 세계로써
전체를 다 볼 수 있다는 말이다.
그러나 수행자는
지금 하고 있는 말의 깊은 의미를 잘 보아야한다.
우유가 발효가 되어 치즈가 되었다면
치즈는 치즈고 우유는 그저 우유일 뿐,
지금 치즈 속에 우유는 더 이상 없다.
오직 전혀 새로운 치즈만이 존재할 뿐이다.
흐르는 강물을
내가 한 모금 마셨을 때
강물은 더 이상 강물이 아니며,
사과 나무에서 사과를 따 먹었을 때
그것은 더 이상 사과일 수 없는 것이다.
물도 사과도 내 몸의 일부로 변화하였을 뿐이다.
변화한 것은 더 이상 변화하기 이전의 존재는 아니다.
만약 변화한 것 또한 변화하기 이전의 존재와 같다고 한다면
세상 모든 사람이 웃을 것이다.
그 말은 내가 곧 강물이고,
내가 곧 사과이다라는 말과 같기 때문이다.
다시말해 내가 죽어 다음 생에 축생으로 태어났다고 했을 때
다음 생에 태어난 축생, 짐승을 나라고 끝까지 우기는 바와 다를게 없다.
바로 이 점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변한 것은 변하기 전의 것과는 다른 것이다.
그런데 세상의 모든 것은 변화한다.
그것도 아주 빠르게, 찰나 찰나 변화해 간다.
단 1초도 변하지 않는 것은 없다.
어제의 나와 오늘의 나는 같은 것 같지만
분명 어제의 나와 지금의 나 사이에는
엄청난 변화의 물결이 휘몰아쳐 지나갔다.
그러므로 어제의 나는 그저 어제의 나일 뿐이고,
오늘의 나는 어제와는 다른 또다른 존재일 뿐이다.
일체 모든 존재는 연기되어진 존재이면서,
동시에 전혀 독자적인 별도의 존재들이다.
모든 존재는 큰 하나의 존재이며 한성품이면서,
또한 전혀 다른 독립된 존재이다.
같으면서 다르고, 다르면서 같다.
역설적으로 들릴지 모르지만 진리가 그러하다.
이 둘 사이를 잘 오갈 수 있어야 한다.
앞의 것이 필요할 때 뒤의 것을 갖다 붙이거나,
뒤의 것이 필요할 때 앞의 것을 갖다 붙이는
어리석음을 범해서는 안된다.
지금은 뒤의 것을 얘기하고 있다.
조금 전의 나와 지금의 나가 전혀 다른 존재이고,
지금의 나와 미래의 내가 전혀 다른 존재라는 말은
어디에도 고정된 ‘나’라는 것은 없다는 말이다.
찰나 찰나로 전혀 새로운 존재가
끊임없이 생겨나고 있을 뿐,
어디에도 고정된 실체로써 변치않는 ‘나’는 없다는 말이다.
여기에서 어리석은 이는 공허감을 느낄지 모르지만,
지혜로운 이는 참된 자유를 보게 된다.
내가 없다는 말처럼 자유로운 말은 없다.
조금 전 실수했던 나, 욕을 얻어먹은 나, 죄 지은 나는
지금의 나와는 전혀 다른 나일 뿐이다.
그러니 조금 전에 있었던 전혀 다른 존재의 일을 가지고
지금까지 붙잡고 늘어져서 괴로워할 일은 어디에도 없다.
마찬가지로 내일 있을 시험이나 걱정거리나 문젯거리,
혹은 미래에 있을 삶의 문제며 먹고 사는 문제는
지금 이 순간 나와는 전혀 상관이 없는 문제다.
지금의 나는 오직 지금의 독자적이고 온전한 나일 뿐,
내일의 나나 어제의 나는 지금의 내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오직 지금 이 순간의 나에 대해 집중하는 일이다.
지금 이 순간의 일에 대해 마음을 다해 사는 일 뿐이다.
그것만이 실속있는 일이고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의 일이기 때문이다.
그러면서도 ‘지금 이 순간’의 나에 대해서도
집착할 것도 없고, 괴로워할 것도 없다.
그야말로 찰나 찰나로 전혀 새로운 존재가 생겨나는 마당에
또한 그러한 존재들은 전혀 새로운 존재인 마당에
어느 한 찰나를 꼬집어 ‘나’라고 못박을 수 있단 말인가.
어느 순간의 ‘나’를 치장하고 꾸미고
더 낳게 만들고, 더 배불리고,
심지어 더 빨리 깨닫게 할 것인가.
결국엔
‘나’라는 것은 어디에도 없다.
그저 이 온누리 법계에는
오직 부처님 성품만이 인연을 따라
꿈처럼, 신기루처럼, 연기처럼 피어올랐다 사라지길 반복할 뿐이다.
이 세상 그 어떤 것도 실체가 없다.
그렇기 때문에 이 세상 모든 것은 전부가 하나이면서
전부가 낱낱이 독자적으로 전혀 다른 존재이기도 한 것이다.
일체 모든 존재는 저마다의 존재방식을 가지고 있다.
무엇이 옳고 그른 것도 없고,
더 좋고 나쁠 것도 없는
오직 자신의 모습으로 법신 부처님을, 진리를 표현하고 있을 뿐이다.
바람은 바람대로 진리의 표현이며,
구름은 구름대로,
꽃은 꽃대로,
산은 산대로, 바다는 바다대로,
또 사람은 사람대로
저마다 독자적이지만 온전한 진리의 성품을 나투고 있다.
자신만의 독자적이고 독립적인 방식으로
부처님의 모습을, 하느님의 모습을
이 세상에 나투어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그렇듯 전혀 다른 존재이지만
그 안에 일체 모든 존재를 다 포함하고 있고,
일체 모든 존재를 다 포함하고 있기 때문에
한 티끌 속에서도 전체를 볼 수 있는 것이다.
그러니 어떠한가.
어디에서 ‘나’를 찾을 것이며,
또 어디에서 ‘진리’를 찾을 것이고,
또 어떤 곳에서 ‘부처’를 ‘신’을 찾을 것인가.
오직 지금 이 순간일 뿐이다.
그렇다고 붙잡을 것도 없는,
변화의 과정 속에서 찰나찰나 전혀 다른 존재의 모습을
끊임없이 나투고 있는 진리만이 우리와 함께 할 뿐이다.
그러니 얼마나 자유로운가.
얼마나 걸릴 것이 없는 삶인가.
지나간 과거를 떠올리며 괴로울 것이 무엇인가.
다가올 미래를 계획하며 답답해 할 것이 무엇인가.
못난 내 모습이며 능력이며 재력을 가지고
괴로워할 것은 또 무엇인가.
어제 나와 싸운 이웃을 보고 괴로워할 것이 무엇인가.
미워할 일이 무엇인가.
노후를 걱정하며 조바심 낼 것은 또 무엇인가.
과거도 없고 미래도 없다.
과거의 나는 내가 아니고, 미래의 나도 내가 아니다.
오직 지금 이 순간
부처의 나툼만이 있고, 진리의 나툼만이 있을 뿐이다.
진리가 내 방식대로 찰나찰나 생겨나고 사라질 뿐이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날마다, 아니 매 순간 순간 새롭다.
새롭게 태어나는 것이며 새롭게 죽는 것이다.
전혀 새로운 삶만이 끊임없이, 역동적으로 박진감 넘치게 전개되고 있다.
그렇기에 한없이 걸림없는 대자유만이 있다.
찰나 찰나 새롭다면
거기에 그 어떤 괴로움의 흔적도 없다.
괴로움이 달라 붙을 ‘나’가 없는데,
‘존재’가 없는데
어찌 괴로움이라는 것이 있을 수 있겠는가.
오직 순간 순간
새롭게 태어나라.
그 새로운 순간 순간을
다만 마음을 다해 살아갈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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