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식온과 식온무아
식온의 의미
앞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안이비설신의라는 주관계가 색성향미촉법이라는 객관계를 만나 접촉할 때 수상행이 일어난다고 했으며, 십팔계에서는 안이비설신의가 색성향미촉법을 만나면 안식, 이식, 비식, 설식, 신식, 의식이 일어난다고 했다. 즉, 안이비설신의가 색성향미촉법을 만날 때 수상행식이 함께 일어나는 것이다. 이처럼 수상행식은 늘 함께 일어난다.
여기에서 식온(識薀)이란 일반적으로 식별, 분별, 의식, 알음알이, 대상을 아는 마음 정도로 이해할 수 있다. 심의식(心意識)이 동의어라고 보았을 때, 식온은 쉽게 말해 ‘마음’이라고 할 수 있는데, 이 마음은 ‘대상을 아는 것’이며, 의식하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가 대상을 의식하고 알 때는 ‘있는 그대로’ 아는 것이 아니라, 자기 식대로 주관적으로 분별하고 식별해서 알게 된다. 그래서 보통 식온은 대상을 ‘분별해서 아는 것’으로 이해된다.
눈앞에 무언가가 갑자기 나타났다고 했을 때, 우리는 즉각적으로 무언가가 눈에 나타났음을, 즉 안근이 색경을 접촉했음을 알게 된다. 이처럼 눈이 색이라는 대상을 보고 눈에 대상이 보인다는 것을 아는 마음이 바로 안식이다. 마찬가지로 귀에서 소리가 들리는 것을 아는 마음이 이식이고, 코에서 냄새 맡아지는 것을 아는 마음이 비식이다. 마찬가지로 설식, 신식, 의식이 일어난다.
이처럼 안이비설신의가 색성향미촉법을 접촉하자마자 즉각적으로 무언가가 감지되었음을 아는 마음을 ‘식’이라고 부르고, 여섯 가지이므로 육식이라고 부른다.
그런데 이렇게 즉각적으로 대상이 나타났음을 아는 작용으로써의 안이비설신식인 전오식이 있지만, 여섯 번째 의식도 있다. 의식은 물론 눈앞의 대상을 즉각적으로 아는 작용도 의식이라고 부르지만, 전오식의 도움을 받아서 종합적으로 분별해서 아는 작용도 포함된다. 이처럼 안식, 이식, 비식, 설식, 신식과 함께 작용하여 그 대상을 분별하여 아는 마음을 뒷날 유식의 가르침에서는 오구의식(五俱意識)이라고 부른다.
그런데 앞서 안이비설신의가 색성향미촉법을 접촉할 때 수상행이 생겨난다고 했는데, 이 말은 식이 일어날 때 수상행 또한 함께 일어남을 의미하는 것이다. 즉, 수상행의 도움을 받아 식이 일어나는 것이다. 앞의 설명처럼 수상행의 도움을 받기도 전에 먼저 즉각적으로 대상이 감지되었음을 단순하게 아는 작용도 식온이라고 부를 수 있지만, 보통 식온이라고 하면 수상행의 도움을 받아 함께 작용하여 대상을 분별해서 아는 마음을 의미한다.
전오식에서 말하는 ‘식’은 바로 이처럼 수상행의 도움을 받기 전에 대상을 즉각적으로 아는 ‘의식’으로써의 ‘식’을 말한다면, 수상행의 도움을 받아 대상을 분별해서 아는 의식의 작용을 ‘분별’, ‘식별’이라고 부른다. 이처럼 식이란 ‘의식’이라는 의미와 ‘분별’이라는 의미를 함께 가지고 있다.
예를 들면 대상을 단순히 인식하고 알기도 하지만, 수온의 도움을 받아 대상을 ‘느껴서 알고’, 상온의 도움을 받아 대상을 ‘개념화하고 생각해서 알며’, 행온의 도움을 받아 대상에 대해 ‘의지를 일으킴을 통해서 알게’ 되는 것이다. 즉 우리가 어떤 대상을 인식할 때는 그냥 단순히 아는 의식도 있지만, 수상행의 도움을 받아 분별해서 아는 의식도 있는 것이다.
우리가 대상이 있음을 아는 것은 그 대상이 느껴지고 생각되기 때문이며, 그 대상에 대해 어떤 의도가 일어나기 때문에 그 대상이 있음을 아는 것이다. 이처럼 대상에 대해 느끼고 생각하고 의도하는 것을 통해 대상을 다른 대상과 분별하여 의식하는 것이 바로 식온의 작용이다.
이와 같이 식온은 ‘대상을 분별해서 아는’ 마음을 의미한다. 그래서 분별심이라고도 한다. 쉽게 말하면, 우리가 ‘마음’이라고 부르는 것의 가장 주된 기능이 바로 식온이다. 그래서 보통 식을 마음이라고 부른다. 그래서 초기불교의 부처님의 가르침을 상세하게 주석을 달고 연구를 한 아비달마 불교에서는 식을 ‘심왕(心王)’이라고 하고, 수상행 등을 ‘심소(心所)’라고 부름으로써, 식이야말로 마음의 대표임을 드러내고 있다.
마치 국왕이 명령을 내리면 신하들은 무조건 복종해야 하는 것처럼, 식은 심왕으로 국왕에 비유할 수 있고, 수상행은 심소로써 국왕의 명령에 따라 움직이고 국왕을 돕는 것처럼 심왕의 작용을 돕는다. 심소라는 명칭도 신하가 국왕에 소속된 것처럼 심왕이 심소를 소유한다고 하여 심소유법(心所有法)을 줄여 쓴 것이다.
[성유식론]에서는 ‘심소는 항상 심왕에 의지하여 작용을 야기하며, 심소는 항상 심왕과 더불어 상응하면서 활동하고, 심소는 항상 심왕에 소속된다’고 설명하고 있다. 이처럼 식온은 항상 수상행이라는 심소 즉 마음부수와 함께 활동하며, 수상행의 도움을 받아 대상을 분별하여 아는 작용을 말한다.
수상행과 식의 이해
앞에서 행온과 식온에 대해 간략하게 살펴보았는데, 요지는, 수온과 상온을 가지고 행온이 유위를 조작하고 그 조작된 유위를 명색으로 종합적으로 분별해서 인식하는 것이 식온이라고 했다.
쉽게 예를 들어 보자. 처음 어떤 여인을 보았는데, 느낌과 생각이라는 마음의 데이터에서 좋은 느낌과 좋은 생각이 일어나는 그 여인을 사랑하기 시작한다. 유위를 조작한 것이다. 즉 ‘사랑’이라는 없던 것을 만들어 낸 것이다. 이것이 행온이다. 수온과 상온을 가지고 행온이 사랑을 만들어 낸 것이다. 그렇게 사랑하게 된 여인은 이름과 모습 즉 명색으로 인식한다. 내가 사랑하게 된 여인은 어떤 이름을 가졌고, 어떤 모습을 가진 존재라고 식온이 인식하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식의 대상은 명색이라고 하는 것이다.
이와 같은 방식으로 우리는 사랑하는 현실을 만들어 낸다. 그 전에는 이 세상에 무수히 많은 여인들이 있었지만, 내 마음 속에 사랑하는 감정이나 사랑하는 대상이 생기지는 않았다. 그러나 수온과 상온이 좋은 느낌과 생각을 일으키고 행온이 사랑하는 의도를 일으킴으로써 결국 식온은 그 평범하던 여인을, 내가 사랑하는, 다른 사람과는 달리 이 여인은 내가 특별히 사랑하는 대상이라고 분별하여 인식하게 되는 것이다. 어떤 이름을 가졌고, 어떤 모습을 가진 누구라고 명색으로 인식하는 것이다.
그렇게 인식된 여인은 이제 더 이상 다른 여인과는 같지 않다. 다르게 분별하여 인식되는 것이다. 그러다가 그 여인과 헤어지고, 뒤에 다시 다른 여인을 만났다고 해 보자. 그러면 우리는 예전에 만났던 여인과 지금 만나는 여인을 나도 모르게 비교하고 분별하여 어느 여인이 더 좋고 나쁜지를 분별하여 인식하게 될 것이다. 이처럼 식온은 대상을 의식할 때 분별하여 인식한다. 분별해서 아는 것이다.
이처럼 식온은 수온, 상온, 행온의 작용을 통해 종합적으로 대상을 분별하여 인식하는 마음이다.
유식에서의 이해
이렇게 식온에 대해 설명하였지만, 많은 사람들은 ‘식온’에 대해서 이해하기 어려워한다. 그래서 잠시 대승불교의 유식사상에서 나오는 육식에 대한 설명을 짚고 넘어가고자 한다. 유식사상에서 말하는 육식의 의미를 공부하고 나면 식온이 어떤 마음인지 조금 더 쉽고 선명하게 다가올 것이다.
유식불교에서는 이러한 ‘식’을 전오식처럼 자신에게 주어진 대상만을 분별한다고 해서 자성분별(自性分別)이라고도 하며, 과거를 회상하거나 미래를 계획하는 등의 분별작용을 한다고 해서 수념분별(隨念分別)이라고도 부른다. 과거를 회상하거나 미래를 계획하려면 수상행의 도움이 필수적이다. 과거의 느낌들, 과거의 개념작용 내지 사고들, 미래 계획을 위한 의지 등 수상행의 도움을 받아야만 수념분별이 가능한 것이다. 이처럼 수상행의 도움을 받아 식은 수념분별을 일으키기도 한다.
또한 계탁분별(計度分別)이란 착각을 하여 대상을 인식하는데 오류를 일으키는 분별작용을 말한다. 이 또한 수상행온의 도움을 받아야 한다. 대상에 대한 과거의 잘못된 느낌이나, 잘못된 개념화나 생각, 잘못된 의지작용으로 인해 대상을 착각하여 분별하는 데 오류를 일으키는 것이다.
또한 이러한 식온의 헤아림과 분별작용의 특징에 따라, 전오식처럼 눈앞에 나타난 사물에 대해 기본적인 분별심을 일으켜 헤아리는 작용을 현량(現量)이라고 하고, 육식의 작용인 상온 등의 도움을 받아 비교, 분석, 판단하는 작용을 비량(比量)이라고 하며, 대상을 판단하여 잘못 헤아린다고 하여 비량(非量)이라고도 한다.
유식불교에서는 육식의 역할에 따라 다양한 이름으로 부르기도 한다. 대상을 의식할 때 단독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항상 안이비설신식과 함께 작용하여 대상을 분별한다고 하여 오구의식(五俱意識)이라고 하며, 꿈 가운데 나타나는 의식은 몽중의식(夢中意識)이라 불리고, 객관세계의 대상과는 상관없이 내면에서 단독으로 분별하는 의식을 독두의식(獨頭意識)이라고 한다. 또한 이러한 모든 의식에서 나타나는 착각과 잘못된 분별, 장애와 번뇌 등을 모두 정화함으로써 나타나게 되는 청정하고 맑은 의식을 정중의식(定中意識)이라고 부른다.
이처럼 유식에서는 육식을 물질, 정신세계 할 것 없이 모든 것을 대상으로 수많은 광범위한 의식작용을 일으킨다고 하여 광연의식(廣緣意識)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분별심과 식의 성장
[잡아함경] 39경에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다.
“식은 네 가지에 머물면서 반연(攀緣)한다. 네 가지란 무엇인가? 식은 색 가운데 머물고 색을 반연하며 색을 즐기면서 살아가고 커 간다. 또한 식은 수상행 가운데 머물고 수상행에 반연하며 수상행을 즐기면서 살아가고 커 간다.”
쉽게 말하면, 식은 색수상행에 머물면서 의지하고, 색수상행을 즐기면서 살아가고 커 간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래서 식을 사식주(四識住) 즉 네 가지 식이 머무는 장소라고 하며, 이 사식주가 바로 색수상행이다. 이처럼 식은 색수상행에 머물면서 의지하고 즐기면서 커 간다.
앞에서 식은 안이비설신이 색성향미촉을 만날 때 즉각적으로 눈에 보이는 것을 아는 의식, 귀에 들리는 것을 아는 의식이라고 했는데, 이렇게 식은 아는 의식이지만, 십이입처에서 수상행이 생겨나면서 수상행의 도움을 받아 대상을 분별하는 의식이라고도 했다. 즉 식은 즉각적으로 대상을 아는 의식이면서 동시에 수상행의 도움을 받아 대상을 분별하는 분별심이기도 한 것이다.
여기에서 식이 수상행에 머물면서 의지하고 즐기면서 살아가며 커 간다는 점이 바로 식의 증장을 알려주는 중요한 부분이다. 식은 수상행에 머물면서 수상행의 도움을 받아 대상을 분별하면서 커 가는 것이다. 즉각적으로 아는 작용인 ‘의식’이 수상행의 도움을 받아 분별하는 ‘분별심’이 되고, 수상행의 도움으로 대상을 분별해서 아는 의식은 또 다시 대상과의 접촉을 통해 수상행을 일으키는 것이다. 이렇게 또 다시 수상행의 도움으로 분별심도 커가는 것이다.
결론적으로 십이입처에서 발생한 식이 색수상행의 도움을 받아 다시 새로운 식으로 성장, 증장하고, 새로운 분별심인 식은 또 다시 성장한 의식으로써 색수상행을 통해 또 다시 분별심이 커 가는 것이다. 이처럼 식은 십이입처에 의해 발생했지만, 색수상행에 의존해서 성장하고 커 간다. 이러한 식이 커간다는 가르침이 훗날 대승불교 유식사상의 종자설, 아뢰야식 사상으로 발전하는 근거가 된다.
예를 들어 보자. 대학교 1학년 때 내가(색) 누군가에게 좋은 느낌을 받아(수) 사랑에 빠지고, 그녀만을 생각하며(상), 온통 그녀를 나의 여인으로 만들려고 의도, 사랑하려는 의도(행)를 일으켰다면, 그러한 색수상행의 작용을 일으키는 존재를 ‘나’라고 착각하여 ‘나’라고 알고, 의식하는 마음이 식인 것이다. 그런데 그녀에게 퇴짜를 맞고 아픔도 겪으면서 군대를 다녀 온 뒤 다시 성숙해진 마음으로 대학교 2학년 때 똑같이 내가(색) 그녀를 사랑하게 되었고(수), 온통 그녀만을 생각하며(상), 그녀와 꼭 사귀어야겠다고 의도(행)를 일으켰다면, 1학년 때 일으킨 식과 2학년 때 일으킨 식은 같은 마음(식)일까? 이것은 같은 마음이 아니다. 식은 그저 인연 따라, 즉 십이입처라는 인연 따라 식이 발생했을 뿐인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1학년 때 그녀를 사랑하던 의식과 2학년 때 그녀를 사랑하는 의식이 같은 의식이라고 여긴다. 내 안에 동일한 마음, 동일한 의식이 계속 존재하고 있어서, 그 식이 시간이 흐르더라도 대상을 인식한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 식은 육내입처와 육외입처가 만난다는 인연 따라, 즉 십이입처에서 연기한 것일 뿐이다. 지속적인 의식, 지속되는 마음이 내 안에 머물면서 계속해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즉 식온무아(識薀無我)인 것이다.
그런데 여기에서 2학년 때 그녀를 사랑하는 마음(식)과 1학년 때 그녀를 사랑하는 마음(식)은 같은 것이 아니다. 1학년 때 사랑하던 마음 보다 2학년 때는 그녀를 보는 느낌도 다르고, 그녀에 대한 생각도 달라졌고, 그녀를 사랑하는 의도도 달라졌을 것이다. 1학년 때 그녀를 짝사랑 해 본 경험을 통해, 색수상행을 통해 그녀에 대한 인식, 분별도 달라지고 사랑한다는 것에 대해 수상행식이라는 경험을 통해 많이 배우게 되었을 것이다. 아마도 1학년 때의 실수를 2학년 때는 더는 하지 않게 될 것이다. 사랑도 그만큼 더 성숙한 것이다. 이것이 바로 색수상행에 의지해 식이 성장하게 된 것을 의미한다. 이와 같이 우리는 삶의 경험을 통해, 즉 육내입처와 육외입처의 접촉과 거기에서 나타나는 수상행의 발생을 통해 우리의 의식은 성장한다. 분별심도 더욱 커지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식의 성장이다.
식온무아
이와 같이 ‘분별해서 아는 작용’인 식온은 고정되고 실체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닌, 인연 따라 조건에 의해 생겨나고 사라지는 것일 뿐이다. 식온무아인 것이다.
경전에서도 “의식은 조건에 의존하여 발생한다. 조건이 없으면 의식은 생겨나지 않는다. 어떤 조건에 의존하여 의식이 발생하는가? 눈과 색에 의존하여 발생한 의식을 눈의 의식이라고 한다.” 라고 하며, 다른 귀코혀몸뜻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로 설명하고 있다. 이는 십이입처에서 육식이 생겨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처럼 식온은 눈귀코혀몸뜻이 색성향미촉법을 만난다는 조건에 따라 생겨나고 사라지는 것일 뿐이다. 눈이 어떤 대상으로써의 색을 보았기 때문에 보는데 따른 의식이 발생하는 것이지, 보지 않고 대상을 분별하여 알지는 못할 것이다. 귀로 소리를 들을 때 비로소 그 소리를 의식하고 분별하여 알 수 있는 것이다. 이처럼 식은 십이입처를 인연으로 조건에 의해 발생하는 연기적인 것이다.
이처럼 식은 연기적인 조건발생일 뿐이다. 그런데 보통 사람들은 우리 안에 ‘의식하는 존재’, ‘의식하는 나’가 있다고 여긴다. 우리 안에 식, 즉 마음이 있다고 여기는 것이다. 앞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우리 안에 마음이라는 어떤 실체가 있어서 그것이 눈귀코혀몸을 통해 대상을 인식한다고 여기는 것이다. 내가 대상을 분별해서 알고 인식하는 것을 보고, 내 안에 ‘인식의 주체’가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앞에서 살펴본 것처럼 식은 색수상행에 머물고 커 가며 성장할 수는 있지만, 그렇다고 지속적으로 머물면서 성장하는 실체적인 자아로써의 ‘의식의 주체’가 있는 것은 아니다. 많은 사람들은 식이 성장하고 커간다고 하니, 그것을 보고 의식의 주체로써의 영속적인 식이 있을 것이라고 착각하는 것이다.
이 식, 즉 마음을 참나, 아트만처럼 영속적이고 고정불변의 어떤 실체로써 받아들이면 안 된다. 특히, 이 식을 아트만처럼 잘못 알아듣고, 고정된 윤회의 주체로 여겨 이번 생에서 죽고 다음 생에 태어나면서 윤회를 반복할 때마다 계속 이어지는 어떤 실체로 여기면 안 되는 것이다. 이런 식의 이해가 바로 브라만교에서 주장하는 아트만이고, 불교는 이러한 실체적인 아트만 사상을 타파하기 위해 무아(無我)를 설했음을 기억해야 한다.
물론 재생연결식이라고 하여, 다음 생에 윤회를 할 때 옮겨가는 식을 설정하고 있지만, 이 재생연결식 또한 아트만처럼 영속적이고 불변하는 실체적인 것이 아니라, ‘업보는 있으나 작자는 없다’라는 장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그 연결되는 흐름으로써의 인연 따라 생겨난 식일 뿐이다.
분별심을 버려라
이처럼 식온은 고정된 실체적인 마음이 아닌, 허망한 분별심일 뿐이다. 우리는 이 허망한 분별심으로 이 세상을 분별하여 의식한다. 분별심이라는 것은 나누어서 인식한다는 말인데, 우리 안에는 식이라는 마음이 있고, 그 식의 대상을 세계라고 나누어서 인식하는 것이다. 이렇게 식의 대상이 되는 것을 명색(名色)이라고 부른다. 이와 같이 식은 나와 세상을 나누어서 인식하고, 일체 모든 식의 대상들 즉 명색을 서로 나누고 분별해서 의식한다.
스님들의 법문이나 불교 서적들을 살펴보다 보면 늘 많이 듣는 말이 ‘분별심을 버려라’, ‘알음알이를 놓아버려라’일 것이다. 이 분별심, 알음알이가 바로 식이다. 앞에서 식온은 무아라고 했다. 식은 고정된 실체가 아니라 인연따라 변화하는 것일 뿐이다. 인연따라 변화하는 모든 존재를 유위법이라고 한다. 즉, 분별심이나 알음알이를 버리라고 하는 이유는 그것이 고정된 실체가 아니라 인연따라 변화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 말은 아무런 분별심이나 알음알이를 전혀 내지 말라는 말이 아니라, 그 마음을 일으켜 쓰되 그것이 실체인 줄 집착하지 말라는 의미다.
어떤 사람을 보고 우리는 좋은 사람이라거나 나쁜 사람이라고 분별하여 의식한다. 어떤 음식을 보고도 몸에 좋은 음식이라거나 나쁜 음식이라고 분별한다. 날씨를 보고도 좋은 날씨 혹은 나쁜 날씨라고 분별한다. 사람들의 피부색깔을 보고 상대를 편견을 가진 채 분별하여 인식하기도 한다. 어느 대학을 나왔느냐에 따라 상대방을 분별하여 인식한다.
우리는 이러한 분별심을 ‘내 마음’이라고 여기면서, 내 안에 변함없이 존재하는 의식활동이라고 믿는다. 그 분별심에 고집하고 집착하는 것이다. 그럼으로써 모든 괴로움이 생긴다. 그 의식이 인연 따라 허망하고 무상하게 생겨나고 사라지는 헛된 분별심임을 알지 못하고 그 분별심에 집착하는 것이다. 그러한 분별심들은 실체적으로 옳다거나 그르다거나, 좋다거나 나쁜 고정된 것이 아니지만, 우리는 그렇게 분별하여 의식하는 마음을 보고 그것이 고정된 내 마음인 것으로 착각하는 것이다.
사람들을 좋거나 나쁜 사람이라는 분별심을 가지고 대하게 된다면, 있는 그대로를 있는 그대로 보지 못하기 때문에 나의 편견어린 시선으로 상대방을 해석해서 보게 된다. 나쁜 사람이라고 생각해서 꺼려하고, 시비 걸고, 미워하던 사람이 훗날에 알고 보니 참으로 좋은 사람이었고, 나를 위해 큰 도움을 줄 사람이었을지 어찌 알겠는가. 만약 분별심이 없이 사람을 대할 수 있다면, 그 사람을 편견어린 시선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있는 그대로’ 보아 줄 수 있을 것이다. 그 사람의 외모나, 경제력이나, 얼굴색이나, 학벌이나, 지위를 따지고 분별해서 인식하는 것이 아니라, 분별심을 놓아버리고 텅 빈 마음으로 있는 그대로의 한 존재로 바라봐 주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식온이 무아인 줄을 아는 지혜로운 이의 세상을 보는 참된 인식일 것이다.
[붓다수업]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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