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온과 상온무아 - 오온(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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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온과 상온무아 - 오온(5)

목탁 소리 2015. 3. 1. 13: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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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상온과 상온무아

 

수온과 상온의 상호피드백

 

만약에 이처럼 고정된 실체로써의 ‘느낌’이 정해져 있지 않다면, 우리는 왜 좋거나 싫은 느낌을 느끼는 것일까? 싫은 느낌을 느끼며 괴로워하고, 좋은 느낌을 느끼며 행복해하는 것일까? 이상에서 살펴본 것처럼 좋은 느낌도 고정된 실체가 없다는 것을 안다면 거기에 얽매이고 집착하며 애착할 필요가 없을 것이고, 싫은 느낌도 고정된 것이 아님을 안다면 거기에 얽매여 괴로워하고 아파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대부분의 모든 대상에 대해 특정 느낌을 투영시키고 개입시킨다. 그런데 가만히 살펴보면 싫은 느낌이 일어나는 것은 그 대상 자체에 실체적인 ‘싫은’ 어떤 것이 있어서 괴로워하는 것이 아니다. 다만 내가 알고 있던 다른 어떤 대상에 비해서 싫은 것일 뿐이다. 이처럼 모든 좋은 느낌과 싫은 느낌은 ‘비교’에서 시작된다.

 

연봉 5,000만원은 사람에 따라 싫은 것일 수도 있고, 좋은 것일 수도 있다. 5천만 원에 행복해 하는 사람도 있고, 괴로워하는 사람도 있다. 예를 들어, 다른 사람은 나와 비슷한 일을 하면서도 1억원의 연봉을 받는다면 반 밖에 못 받는 나의 처지가 나를 괴롭게 만들 것이다. 그러나 남들을 다 3천만 원 밖에 못 받는데 나만 5천만 원을 받는다면 5천만 원으로 인해 행복한 느낌을 느끼게 될 것이다. 실제 설문조사를 했더니, 남들이 다 6천만 원을 받을 때 나만 5천만 원 받는 것 보다, 차라리 남들이 다 3천만 원을 받을 때 나만 4천만 원 받는 것이 더 좋다고 응답했다고 한다.

 

이렇듯 비교하는 마음이 다음에 공부하게 될 상온(想蘊)의 작용이다. 수온과 상온은 감성과 이성, 감정과 사유, 감각적인 것과 이지적인 것으로써 늘 함께 작용하며 서로를 피드백하며 견고하게 만든다. 느낌으로 인해 생각이 견고해지고, 특정 방식으로 견고해 진 견해나 사유로 인해 그 대상은 더욱 견고한 느낌을 부여받는다.

 

어떤 사람의 행동에 감동을 받아 좋은 느낌을 받았다면, 그 사람에 대해 좋은 사람이라는 생각과 개념을 저장해 둘 것이고, 다음에 그 사람을 만났을 때 어떤 특정 행동에 대해 나를 위해서 한 좋은 행동일 것이라고 생각하기 쉬울 것이다. 반대로 겉으로는 좋은 척하지만 이기적인 행동을 한 사람을 만나 나쁜 느낌을 받았다면, 상온은 그 사람에 대해 ‘나쁜 사람’으로 개념 지을 것이고, 다음번에 만났을 때 그 사람의 행동을 보고 부정적으로 해석할 여지가 더욱 커질 수밖에 없다.

 

또한 상온이 개념화하고 사유하고 비교, 판단하는 것은 수온의 감각적인 정보에 의지한다. 느껴지는 모든 대상에 대해 비교하고 사유하며 개념화하는 것이 아니라, 불고불락수처럼 좋은 것도 아니고 싫은 것도 아닌 버려지는 느낌들을 제외한 선명하고도 강력한 좋은 느낌과 싫은 느낌들에 한해 받아들여 개념화하고 사유하는 것이다.

 

이처럼 수온의 기초자료에 의해 상온을 쌓게 되고, 다시 상온의 작용을 통해 더 수온이 증폭되고 확장되면서 상호 피드백하며 마음의 작용을 만들어 가는 것이다.

 

십팔계가 촉할 때 수상사라는 마음작용이 일어난다고 했는데, 이처럼 수온과 상온은 함께 일어나기도 하고, 따로 일어나기도 하면서 서로 서로를 도와 되먹임 고리를 연결시키며 수온은 상온을 돕고, 상온은 수온을 도우면서 마음의 실체성을 더욱 강화시킨다. 상온의 도움을 받아 수온이 ‘내 느낌’이라고 여기고, 수온의 도움을 받아 상온이 ‘내 생각’이라고 여기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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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온의 의미

 

위에서 본 것처럼 우리 마음의 중요한 두 가지 기능이 바로 수온과 상온이다. 수온이 감성이라면 상온은 이성이고, 수온이 감각적이며 감성적이라면 상온은 지성적이고 이지적이다. 쉽게 표현하면 수온은 느낌으로 상온은 생각으로 단순화시켜 이해할 수도 있다. 처음으로 오온을 공부할 때는 이렇게 느낌과 생각이라고 쉽게 이해하는 편이 더 좋을 수도 있겠다.

 

그런데 상온은 단순히 생각이나 사유, 이성과 지성이라고만 할 수는 없다. 그런 개념들을 포괄하고는 있지만 엄밀히 이해한다면, 표상작용이라는 용어가 가장 적절하다. 표상(表象)작용의 사전적 의미는 ‘추상적인 사물이나 개념에 상대하여 그것을 상기시키거나 연상시키는 구체적인 사물로 나타내는 일, 드러내어 나타내다’라고 나와 있다.

어떤 대상을 보고 과거에 저장되어 있던 경험과 지식들의 데이터베이스를 기억해 내 눈앞의 대상에 대해 이름과 특징, 모습, 개념 등을 설명할 수 있다면 그것이 바로 표상작용이다.

 

눈귀코혀몸뜻으로 색성향미촉법을 접촉할 때 수상사가 생긴다고 했는데, 눈으로 사람을 보고 ‘김 아무개’라고 아는 것도 표상작용이며, 꽃을 보고 ‘장미꽃’, ‘할미꽃’ 이라고 알 수 있는 것도 표상작용이고, 귀로 소리를 들으면서 ‘어떤 가수의 어떤 제목의 노래’라고 아는 것도, 코로 냄새를 맡으며 ‘된장찌개 냄새’인지, ‘카레 냄새’인지를 아는 것, 혀로 맛보며 ‘짠맛인지 단맛인지’를 아는 것, 몸으로 촉감을 느끼며 ‘거친지 부드러운지’를 아는 것 등이 모두 표상작용이다.

 

이해를 돕기 위해 다른 말로 표현한다면, 생각을 구상하는 기억의 연상작용이라고 할 수도 있다. 생각이 일어나려면 과거의 모든 기억들이 조합되고, 연상되어져야 한다. 그 수많은 기억들은 시간의 순서대로 입력되어 있다가 순서대로 생각되어지는 것이 아니라, 두서없이, 맥락도 없이 마구잡이로 생각이라는 수면 위로 올라온다. 바로 그렇게 올라오는 과거의 기억들, 표상들을 구상하고 연상해내어 이름 붙이는 작용을 상이라고 한다.

 

이처럼 이미 과거에 보고 듣고 경험해 아는 기억과 지식 등을 가지고 현재 눈앞에 있는 대상을 드러내어 나타내는 작용이 바로 표상작용이며 상온의 작용이다. 표상작용이 일어나려면 과거의 경험을 통해 개념을 만들어 놓은 지식과 언어적 개념들의 데이터베이스가 마련되어 있어야 한다. 그 수많은 정보와 지식, 개념들을 비교하고 총괄하여 현재 눈앞에 보이는 대상에 대해 이성적으로 드러낼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넓게 보면 비교, 판단, 추리, 총괄, 개념화하는 모든 이성적 사유나 생각들을 상온이라고 할 수 있다.

 

국화꽃은 그 품종이 2,000여 가지가 넘으며, 국화과에는 2만여 종과 940여 속이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어떤 꽃을 보고 자세히 국화꽃 품종 중에 어느 품종에 속하는지는 알 수 없을지라도 ‘국화꽃’의 일종이라고 대략적으로 알 수 있는 것도 표상작용을 통해서다. 그것이 국화꽃인지를 알려면, 먼저 그 꽃을 다른 꽃들과 비교, 판단, 대조해 봄으로써 국화꽃과 비슷한 부류에 들어 와 있는지를 먼저 살펴야 한다. 만약 국화꽃에 대한 개념이 전혀 없는 사람이라면 아무리 비슷한 꽃을 보더라도 그냥 ‘꽃’이라고만 할 뿐, 국화꽃의 일종인지 조차 모를 것이다. 그 사람의 표상 속에는 국화꽃에 대한 정보가 없는 것이다.

 

이렇게 비교와 판단을 통해서 국화꽃이라고 알고 있었던 개념들을 중심으로 이 꽃이 그전에 알고 있던 국화꽃과 비슷한지 아닌지를 판단해 국화꽃과 비슷한 속성이나 모습들을 추려낸다. 이를 추상작용이라고 하는데, 추상이란 ‘개별 사물의 공통된 속성이나 관계 따위를 뽑아내는 것’을 의미한다.

 

추상작용과 함께 추리작용도 일어난다. 추리는 ‘알고 있던 사실을 바탕으로 알지 못하는 사실을 미루어 생각하는 것’이다. 이렇게 추상, 추리작용을 통해 국화꽃의 범주에 들어오는 것이라고 결론적으로 종합, 총괄한다. 과거의 지식이나 표상이 많은 사람이라면 이것이 구체적으로 국화과 엉겅퀴속의 큰엉겅퀴라고 총괄적인 결론을 도출해 낼 것이다.

 

혹은 그 이름을 도저히 알아낼 수 없어서 식물백과를 살펴봄으로써 결국 이 꽃은 국화과의 취나물속의 각시취라고 밝혀지게 되었다면, 이는 새로운 표상을 개념화시켜 알게 된 것을 의미한다. 이 또한 표상작용이다.

 

이상에서와 같이 표상작용과 비교, 판단의 작용, 추상과 추리, 종합과 총괄, 새로운 표상과 개념화 등이 모두 상온의 범주에 포함된다. 비교, 판단, 추리, 총괄, 개념화 등을 통해 현재 내 앞에 있는 대상을 지각하는 것이기에 상온을 지각작용이라고도 한다. 이런 지각, 표상작용을 통해 나아가 보다 깊은 이념, 철학, 과학 등 다양한 사상을 확장시켜 연구할 수도 있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상온은 꼭 물질적 대상만을 사유의 대상으로 하는 것은 아니다. 선과 악, 미추(美醜), 장단(長短), 행복과 불행, 지혜와 자비, 평화와 자유 등 정신적인 이성적 언어개념들 또한 상온의 대상이 된다. 어떤 행위를 보고 선행인지 악행인지를 비교, 대조, 총괄, 추리를 통해 이성적으로 판단하고 사유하는 것이다.

 

인간이 동물과 다른 점이 바로 이 상온일 것이다. 색온, 수온은 동물들에게도 있을 수 있지만, 상온, 즉 이성적으로 사유하고 개념 짓는 활동은 사람들만이 할 수 있는 능력인 것이다.

 

이렇게 이야기하니 너무 복잡하고 오히려 더 정리가 안 되는 느낌이 들 수도 있겠다. 그래서 쉽게 이해를 하기 위해 이러한 모든 상온의 작용을 통틀어 개괄적으로 설명할 수 있는 단어가 ‘생각’, ‘사유’ 혹은 ‘이성’이라고 부를 수 있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표상작용이지만, 개괄적으로 ‘생각’이라고 쉽게 이해할 수도 있다.

 

상온도 마찬가지로 내부의 상온과 외부의 상온이 있다. 내 안에서 일어난 사유와 생각, 표상작용 등을 오취온으로써 내부의 상온이라고 하며, 그 상온이 일어날 때 외부의 대상에 표상이 실체적으로 존재한다고 여기는 것이 외부의 상온이다. 즉 눈앞의 꽃을 보고 노란색 국화꽃이라고 지각할 때, 사실은 과거에 배우고 개념지어 놓았던 노랗다는 언어적 개념과 국화꽃이라는 지식과 정보들을 끄집어 내어 비교, 추상해 봄으로써 총괄적으로 ‘노란색 국화꽃’이라는 표상이 일어난 것일 뿐이다. 그런데 외부의 꽃을 보고 그런 개념이 일어난 것을 보고, 외부에 ‘노란색 국화꽃’이라는 고정된 실체적 존재가 있다고 착각하는 것이다. 노란색 국화꽃이라는 고정된 상온이 내 밖에 실제로 존재한다고 여기는 것이다. 내 바깥에 노란색 국화꽃이 실제로 존재하기 때문에 내가 그것을 ‘노란색 국화꽃’으로 지각했다고 믿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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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온무아

 

그렇다면 상온은 언제나 고정되어 있는 실체적인 것일까? 앞서 설명한 것과 같이 표상, 개념화의 정신작용은 과거 기억된 정보의 데이터베이스를 비교, 추리, 총괄함으로써 드러내고 나타낸 것에 지나지 않는다. 실제 내 안에 ‘생각하는 나’가 있거나, ‘사유하는 나’가 있거나, ‘지각하는 나’가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눈앞의 대상을 보면 언제나 ‘이것은 국화꽃이고, 저것은 소나무고, 저것은 자동차고, 이 사람은 아무개다’라고 표상지어 알기 때문에 내 안에 그러한 표상작용, 개념작용, 지각작용이 고정되게 실존하는 것으로 착각한 것이다.

 

아마도 과거에 알게 된 정보나 지식들이 잘못된 것이었다면, 삶을 통해 끊임없이 수정하고 변화시켜 갈 것이다. 똑같이 노란색인 줄 알았는데 새롭게 아이보리색이라는 언어적 개념을 배우게 되었다면, 내 안의 표상 데이터베이스에는 아이보리색이 하나 추가된다. 그 전에는 비슷한 색을 모두 노란색이라고 여겼지만, 이제부터는 노란색과 아이보리색을 구분하게 될 것이다. 과거에는 무슨 색이냐고 했을 때 ‘노란색’이라고 말했겠지만, 이제부터는 ‘아이보리색’이라고 답하게 될 것이다. 이처럼 상온이라는 것은 고정되게 실체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인연 따라 끊임없이 변화해 가는 것이다.

 

이성적으로 사유하며 생각하고 개념 짓는 능력이 내 안에 존재한다고 여기는 것이 바로 상온이다. ‘생각하는 나’, ‘사유하는 나’를 나의 존재라고 여기는 것이다. 데카르트가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라고 말했던 것 또한, 이러한 상온을 보고 실체적인 ‘나’가 존재한다고 여긴 것이다. 그러나 부처님 말씀에 의하면 이 상온은 무아(無我)다. ‘생각하는 나’가 실제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십팔계가 접촉한다는 인연 따라 생겨난 인연가합의 연기적 존재인 것이다.

 

내 안에 상온이라는 사유와 생각하는 정신작용이 실제한다고 여기는 것처럼, 우리는 내 바깥 세계에도 실질적인 생각의 대상, 표상의 대상, 사유의 대상들이 실존한다고 여긴다. 앞서 설명한 것처럼 사실은 바깥 세계에 그런 언어적 개념을 가진 사유의 대상들이 실제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정신적인 사유의 대상도 마찬가지다. 선과 악, 정의와 사랑, 길고 짧은 것, 굵고 가는 것, 아름답고 추한 것 등이 실재로써 존재한다고 여기지만, 그런 것은 우리 안에서 만들어낸 개념적 가설일 뿐, 실체적으로 고정되게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어떤 사람이 아름다운지 아닌지는 그 사람이 진짜로 아름다운 사람이라는 실체가 정해져 있어서 우리가 단지 그를 아름답게 느끼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을 보는 수많은 사람들, 문화들, 나라들에서 서로 다르게 판단할 수 있는 것일 뿐이다. 어떤 사람은 아름답다고 여기지만 다른 사람은 추하다고 여길 수도 있는 것이다.

 

보통 사람들은 상온을 통해 사유와 생각, 나아가 사상과 이념과 철학 등을 만들어내고, 그렇게 스스로 만들어낸 이념과 사상 등이 실체적 진실이라고 여기며, 사로잡히고 집착함으로써 나와 다른 생각을 가진 사람들과 다투고 논쟁을 벌인다. 그러나 상온무아의 가르침에 의하면, 이러한 사유와 생각, 사상과 이념 등은 절대적인 진실이 아니다. 내 생각만이, 내 종교와 이념만이 절대적으로 옳다고 여기며 집착하고, 타인의 생각과 사상, 이념은 절대적으로 틀렸다고 여김으로써 심지어 이념적, 종교적 전쟁까지 일어나지 않는가. 보수와 진보의 갈등, 종교적 갈등, 이념적 갈등, 인종적 갈등, 지역적 갈등 등 이 모든 갈등들은 사실 우리가 어떤 하나의 특정 생각, 사고, 이념들만을 ‘절대적으로 옳다’고 여기는 집착에서 생기는 것이다. 그 집착은 상온이 고정된 실체가 아니며, 집착할 만한 것이 없는 ‘무아(無我)’임을 모르는데서 오는 것이다.

 

이처럼 상온이 무아임을 안다면 사회적인 모든 갈등이 해소되고, 대립을 넘어 화합과 조화로써 서로가 서로를 수용하고 용납하며 활짝 열린 정신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평화와 대적정의 무쟁사회를 이루어 낼 수 있을 것이다.

 

 

상을 타파하라

 

이처럼 개념작용, 표상작용인 상온은 비실체적인 것이지만, 실체적인 것으로 착각하여 상온을 ‘나’라고 생각함으로써, 많은 집착과 욕망, 번뇌를 야기시킨다. 내 안에는 생각하고 사유하는 ‘나’가 있다고 여김으로써 ‘나’에 집착하고, 내 바깥에는 생각되는 대상이 존재한다고 여김으로써 ‘세계’에 집착하게 만든다.

 

그렇기 때문에 이 상은 타파해야 할 것으로 경전에서는 설하고 있다. 상온은 말 그대로 허망한 상으로써, 우리가 만들어낸 개념작용이며 표상작용일 뿐이므로, 거기에 얽매여 그것이 실재한다고 집착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물론 개념 짓고 표상작용을 일으키며, 비교, 총괄, 사유하는 작용을 일체 하지 말라는 뜻은 아니다. 필요할 때는 당연히 표상작용을 일으키고 생각하고 사유함으로써 인생을 살아가야 한다. 그러나 중요한 점은, 그렇듯 생각과 사유를 하며 살아갈지라도 그것이 본질적으로는 실체가 아니며 무아이므로 그 생각과 사유에도 집착할 필요가 없음을 깨달아야 한다.

 

비교가 필요할 때는 비교하고 대조해야 하겠지만, 남들과의 비교 속에서 열등감과 우월감이라는 양 극단의 감정이 생겨나고, 그로인해 괴로움이 생겨남을 통찰할 수 있어야 한다. 남들과 비교해서 가난하다고 해서 궁핍한 마음으로 살아갈 필요는 없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이 비교하는 생각에 집착함으로써 남들보다 가난하면 괴롭다고 결론짓고 괴로운 삶을 살게 되는 것이다. 상을 타파함으로써, 즉 상온이 무아인 줄 알아 집착하지 않음으로써 남들과의 비교에서 오는 열등감과 괴로움에서 벗어날 수 있는 것이다.

 

추상과 추리도 마찬가지다. 실제 있지도 않은데 있는 것으로 오인하여 추측하고 추리하며 추상함으로써 우리는 머릿 속에서 무수한 괴로운 일들을 만들어내곤 한다. 회사 사람 두 명이 모여서 내 욕을 하는 것을 들었다. 그들은 어쩌면 단순히 가벼운 마음으로 욕을 했을지도 모르지만, 그 욕을 들은 사람은 그 상황에 추측과 추상을 더한다. 두 번째 화살을 맞는 것이다.

 

‘우리 회사 사람들이 모두들 모이면 이렇게 내 뒤에서 나를 욕하는 것 아닐까? 어쩌면 나를 회사에서 퇴출시키려는 걸지도 몰라. 난 다음 승진에서 분명히 떨어지고 말거야! 그러면 자식과 아내 얼굴은 어떻게 보지? 어떤 직업을 가져야 할까? 이 나이에 나를 받아줄 회사는 아마도 없을거야. 난 실패한 인생이야.’

 

이런 식으로 생각은 무수한 추측과 추론과 상상의 나래를 펴며, 전혀 현실적이지 않은, 전혀 필요도 없고 쓸모도 없으며 소모적이기만 한, 더욱이 나를 괴로움으로 빠뜨리는 이런 추측 속에서 스스로 괴로움을 만들어 내는 것이다.

 

우리는 이런 식으로 상온을 끊임없이 확대 재생산해 냄으로써 스스로를 곤경에 빠뜨리고, 괴롭히곤 한다. 생각이라는 것이 언제나 이런 식으로 뜬금없고, 맥락도 없으며, 말도 안 되게 확대해석을 하는 특기를 가지고 있다. 이 얼마나 어리석은 일인가.

 

이런 비교, 판단, 추상, 추리, 표상과 개념화 등을 통해 종합적으로 현실을 총괄하는 사유 또한 상온의 역할이다. 그러나 앞의 비교와 추상 등이 무상하고 무아인 비실체적인 것들이다 보니 그 정보들을 가지고 종합하고 총괄하는 사유작용 또한 ‘있는 그대로의 실재를 있는 그대로 본 것’이라고 할 수 없다. 거짓된 정보를 가지고 잘못된 종합, 총괄을 하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우리는 그런 사유적 결론을 실재라고 착각함으로써 괴로움에 빠진다.

 

이처럼 상온은 비실체적인 것으로써, 전혀 집착할 것도 못되고, 실재라고 착각해서도 안 된다. 상을 타파해야 하는 것이다. 이러한 가르침이 대승불교의 금강경에서는 이러한 타파해야 할 상으로 아상, 인상, 중생상, 수자상을 설하는 방향으로 이어진다. 구마라집의 금강경에서는 상(相)으로 번역하고 있지만, 다른 번역에서는 모두 상(想)으로 번역하고 있다. 즉, 결과적으로 ‘생각하는 나’, ‘사유하는 나’, ‘개념 짓고 표상하는 나’를 설정함으로써 이 안에 ‘나’가 있다는 아상에 사로잡히게 되고, 내 바깥에서 ‘생각하는 대상’이 있다는 상에 사로잡힘으로써 인상, 중생상, 수자상에 빠지게 되는 것이다.

 

금강경에서는 상의 타파야말로 공의 반야 지혜를 깨닫는 매우 중요한 수행임을 일깨우고 있듯이, 상온을 실체화하여 사로잡혀 집착하는 것이야말로 타파해야 할 중요한 공부의 과정이다.

 

[붓다수업]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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