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온과 수온무아 - 오온(4)
법상스님의 목탁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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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기본 교리강좌

수온과 수온무아 - 오온(4)

목탁 소리 2015. 2. 25. 23:28

 

 

 

 

(2) 수온과 수온무아

 

수온의 의미와 종류

 

앞에서 십팔계가 ‘촉’하게 되면 그에 따라 수상행이라는 오온이 연기한다고 했다. 안이비설신의라는 주관계가 색성향미촉법이라는 객관계를 만나면 그에 따라 식과 수상행이 생기는 것이다. 여기에서 안이비설신과 색성향미촉은 ‘색’이며, 의와 법은 ‘마음’이다. 즉, 안이비설신이라는 우리 오관에서 각각 색성향미촉의 대상을 만날 때 수상행식이라는 마음작용이 생겨나며, 의와 법이 만날 때 즉 마음 내부에서도 수상행식이 일어날 수 있다.

 

눈으로 무언가를 볼 때, 귀로 어떤 소리를 들을 때, 코로 냄새 맡고, 혀로 맛 보고, 몸으로 촉감을 느낄 때 우리는 그 대상에 대해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좋거나 나쁜 어떤 특정한 느낌으로 받아들인다.

 

비오는 날에 대해 어떤 사람은 눈으로 비를 보고, 귀로 빗소리를 들으며, 습기 머금은 축축한 느낌을 몸으로 감촉하면서 ‘싫은 느낌’을 느낄 수도 있고, 또 어떤 사람은 이런 비를 ‘좋은 느낌’으로 받아들일 수도 있다. 똑같은 사람을 어떤 사람은 좋다고도 느끼고, 어떤 사람은 싫다고도 느낀다. 특정 동물을 볼 때에도 어떤 사람은 좋은 느낌을 가질 수도 있고, 어떤 사람은 싫은 느낌을 가질 수도 있다.

 

이처럼 대상을 받아들일 때 우리는 대상 자체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자기 식대로 받아들이고 느낀다. 즉 감정을 섞어서 감정적으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그런데 이 감정이라는 것은 어디까지나 주관적일 수밖에 없다.

 

이처럼 어떤 대상을 받아들일 때는 언제나 좋거나 싫거나 그저 그런 느낌 중 한 가지로써 받아들인다. 이것을 삼수(三受)라고 하여, 싫은 느낌을 고수(苦受), 좋은 느낌을 낙수(樂受), 좋지도 싫지도 않은 그저 그런 느낌을 불고불락수(不苦不樂受)라고 한다.

 

이 가운데 주로 우리가 인지하는 느낌은 고수나 낙수이고, 불고불락수는 거의 받아들이지 않고 잊어버리기 쉽다. 뚜렷하게 좋거나, 아주 싫은 느낌은 잘 기억되지만, 그저 그런 느낌들은 쉽게 잊혀지고 기억에서 버려진다고 해서 불고불락수를 ‘버린다’는 의미에서 사수(捨受)라고도 부른다.

 

 

 

 

내부의 수온과 외부의 수온

 

이와 같이 세 가지 느낌이 일어날 때 우리는 이 느낌이 나의 마음 속에서 일어나다 보니 이 느낌을 ‘내 마음’, ‘내 느낌’이라고 여긴다. 느끼는 마음을 자아라고 여기는 것이다. 이것이 수온이다.

 

그런데 오온은 나에 한정해서 부를 때 오취온이라고 했고, 일반적으로는 오온이라고 했다. 예를 들어 색온은 오취온으로 보면 ‘내 육신’이 색온이고, 내 바깥의 대상으로써의 색온은 세계를 구성하는 물질계라고 할 수 있다. 쉽게 말하면 ‘나’를 중심으로 해서 내부의 오온은 오취온이고 외부의 오온은 오온이다. 색온에서 본다면, 내부의 오취온은 육신이고, 외부의 오온은 물질 세계다. 그래서 내부에 있는 주관으로써의 안이비설신과 외부에 있는 객관으로써의 색성향미촉을 색온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이처럼 수온도 내부의 오취온으로써의 수온은 내가 느끼는 좋고 나쁜 감정이다. 감정과 느낌이 일어날 때 그것을 내 마음이라고 여기는 것이다. 그런데 그렇게 느낄 때 외부에도 그렇게 느낄 수밖에 없는 특정한 느껴지는 대상이 존재한다고 여기는데, 이것이 바로 외부로써의 수온이다. 즉, 수온은 두 가지인데, 내부에서 느끼지는 감정을 수온이라고 하여 ‘나’로 여기고, 외부에서 느껴지는 대상에 대해서도 외부에 실제 존재하는 것으로 생각한다는 점에서 수온이라고 하는 것이다. 외부 세계에는 좋다고 느껴지는 대상도 있고, 싫다고 느껴지는 대상도 있다고 여기는 것이다. 이처럼 내 안에도 느낌, 감정이 있고, 내 밖에도 느껴지는 감정적 대상이 있다고 착각하는 마음을 수온이라고 한다.

 

처음 오온에 대해 배울 때, 나도 이 세상도 모든 것은 오온으로 이루어져 있다고 배우면서 조금 의아해 했던 기억이 있다. ‘나’는 오취온으로써 물질적인 색과 정신적인 수상행식으로 이루어져 있다고 하면 충분히 이해가 갔지만, 이 세상이라는 내 외부의 대상 세계도 오온으로 이루어져 있다고 하니 색으로 이루어진 것은 알겠는데 수상행식으로도 이루어져 있다는 말이 이해하기 어려웠다.

 

이 말은 곧 외부의 대상 세계에 대해서 마음으로 받아들일 때, 느껴지는 대상, 생각되는 대상, 의지와 욕구를 일으킬 대상, 인식되는 대상으로써의 외부 세계가 실재한다고 여겨지는 것이 바로 외부세계의 수상행식인 것이다. 십이입처와 십팔계는 어디까지나 안이비설신의라는 주관이 객관세계를 만날 때 인식되어지는 것들만을 ‘일체’로 인식하는 것과 맥을 같이 하는 것이다.

 

즉, 십이처에서는 안이비설신의와 색성향미촉법만을 ‘일체’라고 했는데, 우리의 감각기능에서 받아들일 수 있는 대상만을 일체라고 한 것이다. 그렇다면 오온 또한 이 일체의 범주에 포함되어야 한다. 그렇기에 오온에서 수온이란, 내가 느끼는 내적인 느낌과 외부에 느껴진다고 여기는 감각적 대상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안이비설신이라는 색온은 색성향미촉이라는 색온을 대상으로 접촉하고, 의 즉 마음은 색성향미촉법 전체를 대상으로 접촉함으로써 느끼고 생각하고 욕망하고 인식하면서 그렇게 느끼고 생각하고 욕망하고 인식하는 내부의 마음을 수상행식이라고 부르고, 그렇게 느껴지도록 만든 외부에 느끼고 생각하고 욕망하고 인식할 만한 마음이 실재 존재한다고 여기는 것이 외부의 수상행식이다.

 

그럼으로써 우리는 ‘나’도 색수상행식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외부세계도 색수상행식으로 구성되어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오온이라고 여기는 나와 세상의 모습이다.

 

 

 

수온무아

 

그렇다면 수온은 실체적으로 존재하는 것일까? 그렇지 않다. 수온은 주관적인 감정일 뿐이다. 동일한 대상을 보고도 사람에 따라 좋게 느끼기도 하고 나쁘게 느끼기도 하며, 같은 사람일지라도 어떤 상황이냐에 따라 좋게도 나쁘게도 느낀다.

 

비오는 날을 좋아하는 사람은 상황에 관계 없이 언제나 비오는 날이 좋아야 하겠지만 꼭 그런 것만은 아니다. 비를 좋아하는 사람일지라도 소풍날이나, 중요한 행사를 할 때 비가 온다면 그 비는 싫은 느낌으로 느껴질 것이다.

아무리 맛있는 음식일지라도 너무 배가 부를 때는 맛도 없게 느껴지고 싫게 느껴지는 것도 마찬가지다. 만약 특정 음식을 대하는 내 느낌이 항상 고정되어 있고, 실체적이라면, 그 음식을 먹을 때는 언제나 맛있는 느낌이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 배가 고플 때는 맛있고 좋은 느낌이었다가, 배가 불러 올 때는 그저 그런 느낌으로 바뀌고, 과도하게 배가 부른데도 억지로 먹어야 한다면 그것은 괴로운 느낌으로 바뀌고 말 것이다. 이처럼 우리가 느끼는 느낌은 인연 따라, 상황 따라, 조건 따라 계속해서 흐르면서 변화하는 것이지 정해진 어떤 실체적인 느낌으로 고정되어 있는 것은 아니다.

 

또 같은 조건 속에 놓여 있다고 하더라도 내 내적인 마음 상태에 따라 느낌이 달라지기도 한다. 사랑하는 연인과 헤어졌을 때는 아무리 맛있는 음식이 앞에 있어도 전혀 맛을 느낄 수 없다. 평소와 달리 입맛도 사라지고, 평소에 아름답던 것들도 전혀 아름답지 않다. 아름답던 세상이 온통 어둡고 부정적으로 보인다. 거꾸로, 세상에 아무것도 행복할 것도 없고, 즐거울 것도 없다고 여기던 부정적인 사람일지라도 어느 날 마법같이 깊은 사랑에 빠지게 된다면, 세상 모든 것이 아름답고, 무엇을 하고, 무엇을 보더라도 생기가 넘치고 행복에 겨워 질 수도 있다.

 

이처럼 느낌은 인연 따라 언제나 변화하는 것일 뿐, 고정되게 실체적으로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상황에 따라, 조건에 따라 끊임없이 변화하는 것이라면 그것을 어떻게 ‘내 마음’이라고 할 수 있겠는가!

 

이처럼 내가 느끼는 ‘느낌’을 ‘내 마음’이라고 할 수 없는 것처럼 외부에 좋거나 싫은 느낌이 실재한다는 생각도 마찬가지다. 특정한 외부 대상이 언제나 나에게 좋은 느낌을 가져다 준다고 할 수 있을까? 어떤 사람과 사랑에 빠졌을 때는 그 사람의 모든 점이 다 사랑스럽게 느껴지지만, 그 사람이 배신을 하고 떠났다면 사랑은 곧 배신과 증오로 바뀌고 만다. ‘그 사람’은 고정된 실체로써 좋은 느낌 혹은 나쁜 느낌으로 정해져 있는 것이 아니라, 인연 따라 좋은 사람도 되었다가 나쁜 사람으로도 바뀔 수 있는 것이다.

 

비오는 날을 어떤 사람은 좋아하고 어떤 사람은 싫어하는 것 또한 ‘비가 내린다’는 상황 자체에 고정된 좋다거나 싫은 느낌이 정해져 있지 않음을 알려준다. 비라는 대상 자체에 고정되게 좋다는 느낌이 정해져 있다면 비는 누구에게나 좋은 대상일 것이다. 그러나 비라는 외부의 대상은 고정되게 좋거나 싫은 것으로 정해진 것이 아니다. 비오는 날을 싫어하던 사람도, 우연히 내린 비 때문에 사랑하던 사람과 한 우산을 쓰고 빗 속을 거닐게 되었다면, 그 비가 얼마나 고맙고 감사하게 느껴지겠는가. 이처럼 특정한 사람이나 특정 대상 자체에 어떤 특정한 느낌과 감정이 고정되게 실체적으로 존재할 수는 없는 것이다.

 

이처럼 수온, 즉 느낌은 내가 느끼는 느낌도 고정되게 정해진 것이 아니며, 외부의 대상 또한 좋거나 싫다라고 느낌이 정해져 있는 것이 아니다. 내부의 수온과 외부의 수온이 모두 실체가 없이 인연 따라 좋다거나 싫게 느껴질 뿐인 것이다.

 

이뿐 아니라 시대에 따라서나, 나라에 따라서, 문화적 배경에 따라서도 다르게 느껴진다. 어떤 시대에서는 좋은 느낌이던 것이 다른 시대에서는 나쁜 느낌으로 바뀌기도 하며, 어떤 나라에서는 좋은 느낌인 것이 다른 나라에서는 나쁜 느낌으로 다가오는 것도 있다.

 

어떤 아프리카 부족은 뚱뚱한 정도가 미(美)의 기준이 된다고 한다. 뚱뚱한 여인일수록 남자들에게 사랑을 받는다. 뚱뚱한 여자를 보면 사랑스럽게 느끼고, 좋은 기분을 느끼는 것이다. 반대로 한국에서는 삐쩍 마른 사람을 아름답게 느끼지 않는가. 이처럼 ‘느낌’이나, ‘감정’은 고정된 실체인 것이 아니라, 시대며 나라, 종교며 문화적 배경에 따라서도 달라질 수밖에 없다.

 

 

 

안이비설신의와 수온무아

 

안이비설신의라는 주관계가 색성향미촉법이라는 객관계를 접촉할 때 좋거나 싫은 느낌이 일어나는데, 이 느낌에는 고정된 실체가 없다.

 

눈으로 똑같은 음식을 볼 때, 그 음식을 좋아하는 사람에게는 좋은 느낌이 일어나지만, 싫어하는 사람에게는 싫은 느낌이 일어난다. 그 음식 자체에 고정된 좋은 느낌이 있다면 모든 사람에게 좋은 느낌이 일어나야 하겠지만, 그렇지 않기 때문에 사람들에 따라 느낌이 다른 것이다. 또한 같은 음식을 먹을 때라도 배가 부를 때는 맛이 없게 느껴지고, 배가 고플 때는 더욱 맛있게 느껴지는 것을 볼 때, ‘느낌’이라는 것은 실체가 없음을 알 수 있다.

 

귀로 소리를 들을 때도 마찬가지다. 누군가가 ‘통통하다’ 혹은 ‘건강미가 넘친다’라고 말했을 때, 그 소리를 듣고 어떤 사람은 좋아하겠지만, 어떤 사람은 ‘뚱뚱하다’는 말로 알아듣고 싫은 느낌을 느낄 수도 있다. 같은 소리지만 듣는 이에 따라, 또 내가 뚱뚱할 때 듣느냐, 가냘플 때 듣느냐에 따라 느낌이 다른 것이다. 염불소리도 불자들이 들으면 좋은 느낌이겠지만, 불교를 싫어하는 타종교인이 듣는다면 싫은 느낌으로 다가올 수도 있다.

 

코로 냄새를 맡을 때도 마찬가지다. 청국장 냄새는 한국인이 맡으면 좋은 느낌이지만, 외국인들에게는 나쁜 느낌일 수도 있다. 절집 음식 중에 고수나물이라는 것이 있다. 처음 절에 갔을 때 향이 짙은 고수나물은 그 독특한 향 때문에 즐겨 먹는 음식이 아니었다. 그런데 계속 먹다 보니 그 독특한 향을 즐기게 되었다. 싫은 느낌의 향기가 어느덧 좋은 느낌의 향기로 바뀐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향수를 진하게 뿌리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도 있고, 그 향수를 자신을 대표하는 향기처럼 매일같이 뿌리고 다니는 사람도 있지만, 또 어떤 사람들은 그렇게 인위적인 향수 냄새가 진하게 풍길 때 오히려 역한 느낌을 받기도 한다. 냄새와 향기에는 실체적인 정해진 느낌이 있지 않기 때문이다.

 

혀로 맛을 보는 것도 그렇다. 한번은 네팔의 산중마을에서 스님들과 함께 머물었을 때인데, 음식 중에 고수나물이 나왔기에 계속 더 달라고 하며 몇 접시를 먹고 났더니, 주인이 이 나물을 이렇게 잘 먹는 사람들은 처음 봤다며 의아해하기도 했다. 이처럼 같은 냄새와 맛이지만 그것은 좋은 느낌이 되기도 하고, 싫은 느낌이 되기도 하며, 언제든 뒤바뀔 수도 있다. 특정 음식을 좋아하다가 싫어지기도 하며, 싫어했지만 좋아지기도 하는 것과 같다.

 

몸으로 감촉을 느낄 때도 마찬가지다. 더운 여름날 땀이 흘러내릴 때는 찝찝하고 짜증스런 느낌을 느끼기도 하지만, 그보다 더한 사우나에서는 오히려 ‘시원하다’고도 하지 않는가. 나는 인도에 다녀온 뒤부터는 다녀오기 전에 비해서 무더운 여름의 더위에도 불구하고 덥기 때문에 느끼는 스트레스는 훨씬 덜해 짐을 느낀다. 훨씬 더 더운 곳에서 무거운 가방을 짊어지고 하루 종일 걸었다 보니, 그것에 비해 한국의 더위는 그 강도가 상대적으로 훨씬 약하게 느껴진 것이다. 이처럼 같은 더위일지라도 똑같이 덥게 느껴지는 것은 아니다. 춥고 덥다는 감촉에도 고정된 실체가 있지 않기 때문이다.

 

사랑하는 사람과 처음으로 손이 맞닿을 때는 그 어느 때보다도 가슴이 두근거리며 행복한 느낌이 일어나지만, 싫어하는 사람이 억지로 손을 잡으려 한다면 짜증스러운 느낌이 들 수도 있다. 또한 같은 정도의 달리기를 할지라도 축구경기를 하며 골을 한 골 넣었을 때는 아무리 뛰어도 힘든 줄을 모르지만, 기합으로 운동장을 몇 바퀴 돌게 되었다면 그것은 전자에 비해 훨씬 괴로운 느낌이 들 것이다.

 

생각도 마찬가지다. 똑같은 월급을 받을지라도 어떤 사람은 많이 받는다고 느끼며 행복해 하고 풍요를 느끼는가 하면, 어떤 사람은 너무 조금 받는다고 투덜대며 불행과 궁핍을 느낄 것이다. 같은 아파트에 살면서도 어떤 사람은 이렇게 좋은 아파트에 산다고 행복해하지만, 어떤 사람은 더 좋은 아파트에 살지 못하는 것 때문에 스트레스를 받고 있을지도 모른다.

 

이와 같이 우리는 언제나 눈귀코혀몸뜻으로 색성향미촉법을 접촉하면서 ‘느낌’과 ‘감정’을 느끼며 살아간다. 그러나 이 느낌과 감정이라는 것은 고정된 실체적인 마음이 아니다. 동일한 상황에서 좋은 느낌을 느낄 것인지, 싫은 느낌을 느낄 것인지는 내 스스로 결정하고 선택할 수 있다. 느낌이 정해져 있다면 동일한 상황 하에서 우리는 똑같은 느낌을 느낄 수밖에 없겠지만, 느낌은 고정된 실체적 감정이 아니기 때문에 우리가 주인이 되어 느낌을 선택할 수도 있다.

 

뒤에 나오겠지만, 상온과 행온, 또한 식온을 어떻게 작용시키느냐에 따라 우리는 우리 마음의 주인이 될 수 있다. 외적인 상황의 수동적인 피해자가 되는 것이 아니라, 어떤 상황 속에서도 그 상황과는 별개로 내 스스로 외적인 상황의 주인이 되어 무엇을 느낄지를 선택할 수 있는 것이다.

 

빅터프랭클은 나치 강제수용소에서 부모, 형제, 아내를 모두 잃고 모든 자유를 빼앗기고, 모든 가치를 파멸당한 채 굶주림과 혹독한 추위, 핍박과 공포 속에서도 삶의 의미를 잃지 않고 그 안에서 의미있는 삶을 발견하고 행복감을 느낄 수 있었다. 모든 자유가 강탈된 수용소에서 오직 남은 것이라고는 주어진 상황에서 자신의 태도를 선택할 수 있는 자유밖에 없음을 깨달았고, 그 이후 그는 수용소에서의 최악의 상황에서도 의미를 찾을 수 있었다. 나치 수용소에서의 최악의 공포스럽고, 괴로운 상황을 내 마음의 태도를 바꿈으로써 그 속에서 조차 주어진 행복을 누리며 살아갈 수 있었다.

 

이처럼 외적인 상황이 그 삶의 느낌을 전적으로 결정하는 것은 아니다. 마음의 태도를 어떻게 쓰느냐에 따라 외적인 상황과는 상관 없이 주도적으로 행복한 느낌을 가질 수도 있다. 그것이 가능한 이유는 바로, 그 느낌과 감정에는 고정된 실체가 있지 않기 때문이다.

 

[붓다수업] 중에서

 

 


붓다 수업(법상 스님의 불교 교리 콘서트)

저자
법상 스님 지음
출판사
민족사(도) | 2013-12-13 출간
카테고리
종교
책소개
지금은 붓다 시대. 웰빙, 힐링, 뉴에이지, 영성, 치유, 명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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