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행온과 행온무아
행온의 의미
행온은 의지 작용, 형성 작용을 말한다. 무언가를 행하려는 의지, 의도, 의향 등을 나타내는 것이며, 하고자 하는 욕구나 바람의 의미도 담고 있다. 이것은 업을 일으키는 형성력이 된다. 그래서 업(業)과 행(行)이라는 용어는 같은 의미로 쓰이기도 한다.
십팔계가 촉하면 수상행이 나타난다고 했는데, 눈이 무언가를 보았을 때 수온으로 좋고 나쁜 느낌을 느끼고, 상온으로 그것이 무엇인지를 개념화하여 사유하고 나면, 행온에서 좋은 것은 더 가지고 싶고, 싫은 것은 멀리하고 싶은 의지, 욕구가 일어나는 것이다.
배고픈 상황에서 눈으로 사과나무를 보았을 때, 수온은 배가 고프다는 인연 따라 그 사과에 대해 좋은 느낌을 일으키고, 상온은 그것을 먹을 수 있는 ‘사과’라고 개념 지어 지각하고, 행온은 사과를 따 먹고자 의도, 의지를 내는 작용을 의미한다.
이처럼 십팔계가 촉할 때 수상행이 나타나는 것처럼, 수상행의 마음작용은 함께 일어나면서 식의 분별, 인식 작용을 돕는다. 그래서 아비달마 불교에서는 식을 심법으로, 수상행을 심소법으로 나누어 분류하기도 한다.
그런데 이 행온은 항상 복수로 나타나는 것으로, 엄밀히 말한다면 ‘의지작용을 필두로 하는 수많은 심리현상들’을 의미한다. 행온은 수, 상, 식을 제외한 모든 정신작용을 다 포함한다. 청정도론에서는 50가지의 심리현상을, 구사론에서는 46가지 심리현상을 행으로 들고 있다. 예를들면 의도 뿐 아니라 주의, 집중, 의욕, 탐욕, 성냄, 믿음, 양심, 수치심 등이 모두 행온에 속한다.
그러나 이 중에도 특히 의도, 의지작용이 행온의 주요한 심리작용이다 보니 행온은 주로 의지, 의도로써 쉽게 이해되고 있다.
이러한 의지작용이 내 안에서 일어나면서 업을 지어 가다 보니, 우리는 이러한 의지작용을 가진 ‘의도하는 나’가 있다고 착각한다. 이러한 내 안에서 일어나는 ‘의도하는 마음작용’이 바로 행온이다.
행온은 이처럼 의지작용, 형성작용을 말한다고 했는데, 교리적으로 살펴보면, ‘유위를 조작한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유위를 조작하는 존재가 내 안에 있다고 생각하고 바로 그 유위를 조작하는 마음인 행온을 나의 일부로 여기는 것이다. 유위란 ‘만들어진 것’, ‘조작된 것’을 뜻한다. 유위법은 ‘일체 모든 존재’, ‘일체 모든 만들어진 것’을 의미한다. 쉽게 말해 유위를 조작한다는 것은 의도를 일으켜 삶을 만들어낸다는 것을 뜻한다. 그래서 행온을 의지, 형성작용이라고 한 것이다.
뒤에 식온에서 다시 언급하겠지만, 이렇게 행온이 유위를 조작해 만들어 놓으면 식온은 행온이 만들어낸 유위를 인식한다. 그런데 식온은 유위를 인식할 때 이름과 형태를 부여해 인식한다. 이름과 형태를 명색이라고 한다. 즉, 식온은 행온이 만들어낸 유위를 명색으로 인식하는 것이다. 어렵더라도 뒤에서 다시 살펴보니 여기에서는 이 정도에서 넘어가도록 하자.
행온무아
상윳다 니까야에서는 ‘행온들을 자세히 관찰하고 깊이 조사해보면 그것들은 텅 빈 것으로 드러나고 허망한 것으로 드러나며 실체가 없는 것으로 드러난다. 비구들이여, 이러한 행온에 무슨 실체가 있겠는가?’라고 함으로써 행온 또한 비실체적인 무아임을 설하고 있다.
우리가 일으키는 의도와 의지, 욕구와 바람 등을 생각해 보자. 그것은 결정론적으로 정해진 것일까? 예를 들어 내가 공부를 열심히 해서 공무원이 되고자 의도를 일으켰다. 열심히 공무원 준비를 하다가 뜻밖의 인연으로 새로운 사업을 시작하게 되었다거나, 회사에 취직하게 될 인연이 생겨났다. 만약 어릴적부터 공무원이 되는 것이 꿈이었던 사람이라고 할지라도 이렇듯 인연이 생기게 되면, 자신의 본래 의도를 버리고 새로운 꿈을 향해 새로운 의지와 욕구를 불태울 수도 있게 마련이다.
어떤 스님은, 출가 전에 너무도 열심히 수행을 하기에 ‘출가하는 것이 어떤가?’ 하고 물었더니 “절대 출가는 안 한다”고 하더니, 1~2년 쯤 후에 스스로 출가를 결정했다.
이처럼 우리는 절대 안 할 것 같다가도 그것을 하기도 한다. 부와 풍요, 성공만을 위해 달려가던 사람도 어느 순간 그러한 삶이 허망한 것임을 깨닫고는 가진 부와 재산을 다 나누어 주고 수행자의 길을 걷기도 한다.
이처럼 의지라는 것은 내 안에 고정되게 존재하는 ‘나’가 아니다. ‘의도하는 나’가 정해져 있지 않다. 어떤 특정 방향으로의 삶을 의도하고 고집하며 욕구를 일으키는 ‘나’가 정해져 있다면, 언제까지고 그런 삶만을 고집하게 되겠지만, 살펴본 바와 같이 언제든 우리 마음은 인연 따라 욕구도 달라지고, 의도도 달라지게 마련이다.
내 안에 ‘부자가 되려는 의지’, ‘성공하려는 의지’가 고정된 실체로써 정해져 있어서, 나는 부자가 되고, 성공하려고 노력하는 자아라는 생각에 집착해 있을지 모르겠지만, 그 또한 언제든 변할 수 있는 것이다.
이 사실을 안다면, 어떤 특정한 한 가지 의지나 욕구를 끝까지 고집할 필요가 없다. 우리가 삶에서 괴로워하는 수많은 일들을 가만히 살펴보면, 내 의도, 내 욕구, 내 바람만을 끝까지 고집하고 집착하는데서 오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가. 자기가 원하는 방식대로 일이 되어야 한다고 고집하게 되면, 다른 의도를 가진 사람들과 다투게 되고, 사고가 한 가지 방향으로만 제한되어 꽉 막힌 채 의식이 닫히고 갇혀 버린다.
보통 사람들은 한 가지 생각이 옳다고 여기고, 그런 방식대로 일이 되어야만 한다고 자기 의도에 고집하게 되면 그 방식 이외의 다른 방식이나 다른 길은 모두 틀렸다고 여기기 쉽다. 그 방식대로 일을 처리하는 것만이 나의 길이라 여기고, 내가 의도한 방식이 바로 ‘나’라고 여긴다. 행여 다른 사람이 나의 방식을 틀렸다고 하면서 다른 방식을 제안한다면, 우리는 내가 공격 받았다고 생각한다. 사실은 공격 받은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은 단지 다른 방식을 제안했고, 내 방식이 옳지 못하다고 여겼을 뿐이다. 그러나 우리는 내 안에 있는 ‘의도, 의지, 욕구’를 ‘나’라고 여기며 나와 동일시하기 때문에 내가 잘못된 것 같이 여기고, 내가 공격 받는 것처럼 착각하는 것이다. 그는 단지 그 공허하고 변하기 쉬운 ‘의도’ 하나가 잘못되었다고 말했을 뿐인데도 말이다. 이것이 바로 ‘의도’를 ‘나’라고 여긴다는 증거다. ‘의도’는 하나의 인연 따라 생겨난 비실체적인 마음일 뿐, 그것이 ‘나’인 것은 아니다. ‘의도하는 나’는 없다.
업(業)도 내가 아니다
행온은 또한 형성하는 힘으로써 ‘업’을 짓게 하는 의도적 행위라고 했다. 보통 우리는 업을 지으면 그것은 내 안에 저장되고, 지금까지 짓고 쌓아 온 업의 무더기들이 바로 나라고 여긴다. 과거에 악업을 지었다면 그로인해 언제까지고 죄의식에 사로잡힌다. 악업을 짓고 죄를 지은 실체적인 ‘나’가 있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그러나 제일의공경의 ‘업보(業報)는 있으나 작자(作者)는 없다’라는 관점에서 본다면, 업의 과보는 있을지언정 업을 지은 ‘나’라는 고정된 실체적인 존재는 있을 수 없다.
업보는 있으나 작자는 없다는 말을 잠시 살펴보자. 업을 짓게 되면 반드시 그에 따르는 과보는 받게 된다. 그러나 실체적 존재로써 업을 짓는 자가 있고 받는 자가 있지는 않다는 말이다. 예를 들면 촛불이 처음 탈 때의 불꽃과 시간이 흐른 뒤에 타는 불꽃은 전자와 후자가 같은 불꽃이라고 할 수는 없다. 그러나 전혀 다른 불꽃이라고도 할 수 없다. 전자와 후자는 끊임없이 흐르며 이어지는 변화 속에서의 연결성은 있지만(업보), 독자적이고 실체적인 어떤 실체(작자)로써 있는 것은 아니다. 업보는 있되 작자는 없는 것이다. 우유가 발효되어 치즈가 되었다면, 그 둘 사이를 연결하는 흐르는 연결성은 있지만, 즉 업보는 있지만, 실체적인 어떤 존재 즉 작자는 없다.
이번 생에 한국의 남자로 태어났지만 다음 생에 미국의 여자로 태어났다고 생각해 보자. 그렇다면 그는 같은 존재인가 다른 존재인가? 한국의 남자가 진짜 ‘나’인가, 미국의 여자가 진짜 ‘나’인가? 그 둘 사이를 이어줄 고정된 실체적 존재는 있을까? 그 둘은 같지도 않고, 그렇다고 다르지도 않다. 같다고 해서도 안 되고, 그렇다고 다르다고 해서도 안 된다. 그 전생과 후생의 둘 사이의 관계는 항상하는 것도 아니고 단멸하는 것도 아닌 불상부단(不常不斷)이고, 둘은 같지도 그렇다고 다르지도 않은 불일불이(不一不異)의 관계다. 이것이 중도적 시각이다. 이처럼 모든 존재는 중도적으로, 즉 연기적으로, 비실체적으로 있을 뿐, 고정된 실체적 존재로써 있는 것은 아니다.
한국의 남자가 보시를 행했고, 그 과보로 다음 생의 미국의 여자가 부자가 되는 복을 받았다고 생각했을 때, 이것이 바로 업보가 있는 것을 의미한다. 이처럼 업을 지으면 반드시 그에 따른 결과인 과보는 있다. 그러나 실체적인 업을 짓는 ‘자’와 업을 받는 ‘자’는 동일한 어떤 존재로써 있는 것은 아니다. 이처럼 동일한 실체적인 존재로서 짓는 자와 받는 자가 있는 것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짓는 자와 받는 자가 전혀 다른 것도 아니다. 중도적이고 연기적인, 끊임없이 흐르는 무상과 무아를 바탕으로 짓고 받기 때문에 짓기도 하고 받기도 하지만, 즉 업보는 있지만, 실체적인 짓고 받는 자, 즉 작자는 없다는 것이다.
바라문교에서는 업을 짓는 자와 받는 자에게는 아트만이라는 고정된 실체적 자아가 있어서 동일한 근원적 자아인 아트만이 짓고 받는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이 생각은 육신이 죽어도 계속 이어지는 실체가 있다는 상견(常見)이며, 그 실체적인 자아는 과거 현재 미래의 삼세에 늘 있는 것이라는 주장이 유견(有見)이지만, 부처님께서는 불상부단의 단상중도와 유무중도를 설하심으로써 고정된 실체를 부정하고 중도를 드러내셨다.
촛불도 사람도 마찬가지로, 전자와 후자는 ‘끊임없이 흐르면서 이어지는’ 것이기는 해도, 전자와 후자를 동일한 어떤 실체적 ‘존재’로 생각해서는 안 된다.
‘업보는 있되, 작자는 없다’의 실천
보통 우리는 ‘저 사람 어때?’ 하고 물으면, ‘좋은 사람이야’ 혹은 ‘별로야’라고 답변하곤 한다. 사람들은 이런 식으로 우리의 의식 속에서 착한사람이거나 나쁜 사람으로 분류된다. 그러나 착한 사람이라고 생각했지만 그 사람이 나에게 와서 나쁜 짓을 행했다면 그 사람은 나에게 나쁜 사람이 되고 만다. 그 사람에게 ‘착한사람’이라는 고정된 실체가 있다면 그는 어떤 짓을 해도 영원히 착한 사람이겠지만, 그에게는 착한 사람이라는 고정된 실체가 있어서 착한사람으로 불리는 것이 아니라, 착한 행위를 했을 때 착한 사람으로 불리는 것일 뿐이다. 착한사람이 먼저가 아니라 착한행위가 먼저인 것이다. 착한행위(업)를 하면 착한사람(보)이 되는 것이지, 착한사람(작자, 실체적 존재)이라는 실체가 있는 것은 아니다. 즉 업보는 있되, 작자는 없다.
이것은 실천적인 삶의 중요한 가르침을 전해준다. 보통 우리는 사람들을 착하거나 나쁜 어떤 사람으로 규정짓고 실체화하기를 좋아한다. 상온으로 개념화하는 것이다. 나쁜 놈, 도둑놈, 배신자, 착한 사람, 수행자, 보시하는 사람 등으로 규정짓곤 한다. 그렇게 규정 짓고 나면 우리는 그 규정된 개념에 실체성을 부여한다.
한 번 배신을 한 사람은 계속 배신을 할 것이라고 여기면서 배신자라는 꼬리표를 계속해서 달아주는 것이다. 업보는 있되, 작자는 없다라는 이치에서 본다면, 사실 배신자라는 실체는 없다. 다만 배신(업)이라는 행위를 했을 때 배신자(보)이라는 말을 듣고, 배신자 취급을 받는 과보를 받을 뿐이다. 그 사람은 배신을 했을 때 배신자인 것이지, 배신을 하지 않을 때는 배신자가 아닌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한 번 배신을 한 사람은 계속해서 배신을 할 거라고 여겨 언제까지고 편견을 가지고 그 사람을 배신자라고 낙인찍고는 한다. ‘업보는 있되 작자는 없다’는 이치에서는 배신을 한 것은 과거의 일이고, 현재는 배신을 하지 않았다면, 그를 배신자로 낙인 찍어서는 안 된다. 배신자라는 ‘작자’는 없기 때문이다. 만약에 계속해서 배신자라고 그를 낙인 찍어 놓고 배신자라는 곱지 않은 시선으로 바라본다면, 그 사람은 개과천선해서 바뀔 수 있는 가능성이 있음에도 더욱 더 바뀌기 어려워 질 것이다.
그러나 배신자라고 낙인 찍지 않고, 있는 그대로의 한 존재로써 바라봐 준다면 그는 더 이상 배신하지 않을 수도 있다. 과거에 잘못 한 번 하지 않은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그런데 그 한 번의 잘못으로 실체적인 배신자, 도둑놈, 나쁜놈이 되어 버린다면 이 세상에 나쁜놈 아닌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무한한 용서와 행위의 종교
과거를 내려 놓고, 용서해 주고, 참회함을 통해서 언제고 우리는 전혀 다른 존재가 될 수 있는 것이다. 심지어 앙굴리마라는 99명을 죽인 살인자였지만, 이후에 부처님께 귀의하여 수행을 한 결과 아라한이 되었다. 작자가 있다면 그는 여전히 살인자이겠지만, 작자가 없기 때문에 그는 불교의 수행교단에 들어와 살인자가 아닌 한 명의 수행자요 아라한이 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진리를 알지 못하는 일반 중생들은 여전히 그를 한 명의 살인자가 스님 행세를 하는 나쁜 놈으로 편견을 가지고 바라보았다. 그래서 탁발을 나갈 때마다 돌을 던지고, 욕설을 퍼붓고, 구타를 가하기도 했다. 이와 같이 부처님의 가르침 앞에서는 그 어떤 악행이라 할지라도 다 용서받을 수 있고, 참회가 가능하다. 이것이 바로 부처님의 무한한 자비와 참회와 용서의 방식이다.
우리는 부처님 앞에서 그 어떤 죄의식에도 실체적으로 사로잡히지 않아도 된다. 아무리 큰 잘못을 한 사람일지라도, 세상 모두가 그를 미워하고 증오하고 비웃는다 할지라도, 부처님 전에 와서는 크게 안심해도 좋다. 이 불가의 방식은 전혀 과거를 문제 삼거나, 과거의 잘못을 문제 삼는 가르침이 아니다. 과거는 과거로 이미 지나갔고, 과거의 살인자도 죄인도 ‘작자는 없다’는 가르침에 의하면 지금은 더 이상 살인자도 아니며 죄인도 아닌 것이다. 물론 그에 따른 과보는 받아야 하겠지만, 그러나 용서받을 수 있으며, 전혀 새롭게 다시 태어날 수 있는 것이다.
모든 실체적 사고방식을 가지고 있는 종교나 사상, 철학 등에서는 이것이 쉽지 않겠지만, 불교의 가르침에서는 이것이야말로 자연스러운 삶의 방식이다. 억지로 용서하려고 해서 용서하는 종교가 아니라, 진리가 본래 그러하기 때문에 그를 용서하는 것은 너무나도 자연스럽고 진리에 합일하는 방식인 것이다.
이는 ⟪숫타니파타⟫의 “태생에 의해 바라문이 되는 것은 아니다. 태생에 의해 바라문이 안 되는 것도 아니다. 행위로 인해 바라문이 되고, 행위로 인해 바라문이안 되기도 하는 것이다. 행위에 의해 농부가 되고, 행위에 의해 기능인이 되며, 행위에 의해 장사치가 되고, 또한 행위에 의해 고용인이 된다. 행위에 의해 도둑이 되고, 행위에 의해 무사가 되며, 행위에 의해 제관이 되고, 행위에 의해 왕이 된다. 현자(賢者)는 이와 같이 행위를 사실 그대로 본다. 그들은 <연기(緣起)>를 보는 자이며, 행위와 그 과보를 잘 알고 있다. 세상은 행위로 말미암아 존재하며, 사람들도 행위로 인해서 존재한다. 살아 있는 모든 것은 행위에 매어있다. 마치 달리는 수레가 쐐기에 의해 매어 있듯이.” 라는 가르침을 떠올리게 한다.
불교는 이처럼 작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행위가 중요하다. 실체적 자아, 실체적 바라문이나, 실체적 왕이나, 실체적 도둑이 있다고 보는 것이 아니라 그 행위에 의해 모든 것이 결정지어진다고 본다. 아무리 과거에 잘못을 지었을지라도 지금 이 순간 그의 행위에 의해 그는 매 순간 다시 새롭게 태어날 수 있는 존재인 것이다.
[붓다수업]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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