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왜 장애인으로 태어났을까요? (큰 고통을 받는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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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상스님 즉문즉설

저는 왜 장애인으로 태어났을까요? (큰 고통을 받는 이유)

목탁 소리 2013. 2. 12. 08: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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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전생의 업 때문에

그것을 풀기 위한 적합한 조건을 선택하여 태어났다고 하던데요,

그렇다면 저는 왜 장애인으로 태어난 것일까요?

전생에 중죄를 저질러서입니까?

그렇다면 이 장애를 안고 그냥저냥 살아가는 것 자체가

전생의 업을 씻는 과정인 것인지,

아니면 이 장애를 극복해내어 뭔가 이뤄내야지만

선업을 쌓아 전생의 업보가 씻기는 것인지요?

 

장애를 안고 살아가는 것,

그 자체가 사실은 나 자신이 선택한 내면의 깊은 선택이기에,

나 자신이 책임져야 할 문제입니다.

 

책임져야 한다는 것은

내 바깥에 이 장애로 태어나게 한 누군가에 대해,

심지어 신이나, 부처나, 진리 조차도

욕하거나, 탓하거나, 원망하지 않고,

다만 있는 그대로 수용하고 받아들이는 것을 의미합니다.

 

부정하지 않고 받아들이게 되었을 때,

그 받아들임 자체야말로 장애로 태어난 것에 대해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의 선택이요

장애를 대하는 가장 지혜로운 삶의 방식이 될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장애라는 방식을 통해 내가 세상을 배우고,

깨우칠 수 있는 방법입니다.

 

장애로 태어난 것에 대해 어쩔 수 없이 신세 한탄이나 하면서

그럭저럭 살아가는 것은

장애가 우리에게 주는 교훈을,

정신적 성장의 가능성을 거부하는 것에 불과합니다.

 

반드시 장애를 극복하기 위해 피나는 노력을 해야 하는 것은 아닙니다.

장애를 극복하기 위해 노력한다는 자체가

장애라는 현실을 받아들이지 못한다는 반증입니다.

장애라는 그 사실을 다만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장애가 나에게 주는 긍정점

특히 장애를 통해 내가 이 생에서 배울 수 있는 점 등을 받아들이고,

장애를 통해 깨달음에 다가갈 수 있는

아주 아름답고도 특별한 기회로 바꿀 수 있습니다.

 

바로 그러한 대 긍정의 받아들임,

그 자체가 바로 장애의 극복이 될 것입니다.

 

또한 반드시 중죄를 저질러야지만

장애인으로 태어나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장애를 통해 좀 더 성숙하고 깨달음에 나아갈 수 있는

아주 중요한 배울 어떤 것이 있기 때문에

깊은 차원에서 그렇게 선택할 수도 있는 것입니다.

 

어쩌면 당신은 다른 사람들 보다

더욱 삶을 대하는 태도가 더 용기 있는 것일 지도 모릅니다.

모든 고통스런 상황은 삶을 성숙하게 만듭니다.

더욱 고통스러울수록 더 많은 깨달음의 가능성,

더 깊은 지혜를 깨닫는 가능성이 담겨 있는 것이지요.

 

그렇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은

여러 생 동안 작은 고통을 받고, 즐거움도 받아가면서

수많은 생을 깨달아야 할 지혜를,

용기 있는 소수의 사람들은

한 생 동안에 큰 고통의 과보(장애 등)를 한꺼번에 받음으로써

불과 한 생 만에 큰 지혜를 깨닫겠다고 용기 있게 결정하는 것이지요.

 

이는 장애 뿐 아니라,

모든 삶 속의 고통스런 일들로 괴로워하는

모든 경우에 적용됩니다.

예를 들어, 큰 병이 났거나, 재산을 탕진하였거나,

큰 손해를 입었거나, 업신여김을 당하거나 하는

모든 상황도 마찬가지인 것입니다.

 

그러니 '내가 과거에 죄업이 많아서 장애로 태어났나?'

하는 생각은 놓아버리세요.

그것은 오히려 죄의식을 강화할 뿐입니다.

 

여러분은 '과거에 지은 죄가 많아서'

그 고통을 받고 있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통해 지혜를 깨닫기 위해서'

잠시 그 고통스런 상황과 마주하고 있을 뿐입니다.

 

그것 자체가

본래 부처였던 우리가

잠시 중생으로 착각하게 헤매던 삶을 청산하고,

다시금 부처로 되돌아가는

성스러운 '되돌아감', 귀의의 한 모습인 것입니다.

 

겉으로 보기에 그것은 '고통'의 모습이지만,

사실은 그 '고통의 꿈'을 통해

본래의 나를 깨달아 가게 하기 위한

이 우주법계의 감사하고도 지혜로운

삶이라는 연극의 시나리오나 무대장치 같은 것일 뿐입니다.

그것은 진짜 같이 보이지만 사실은 가짜지요.

 

장애인이라는 것이 나의 진짜 실체인 듯 하지만,

그것은 나의 실체가 아니에요.

아주 짧은 100년도 안 되는 시간 동안

우리는 이 생에서 장애인의 역할을 잠시 맡기로 하고

인생이라는 지혜와 자비를 배우는 수련의 장에

잠시 내려 와 있는 천사적인 존재,

불성이라고 표현되는 완전한 부처의 존재입니다.

 

이 생에서 보면 길고 긴 100여 년의 세월일지 모르지만,

천상세계에서 보면 한 10여 분도 되지 않는

짧은 시간 동안

인간계에 내려가서 잠시 고통을 받는 대신

큰 깨달음을 얻고 오겠노라고 용기 있게 결심한

지혜로운 존재인 것이지요.

 

그래서 인간계를 '고해(苦海)'라고 합니다.

인간계란 '괴로움의 바다',

즉 괴로움을 통해 지혜와 자비를 배워가는 학교이며,

인생수업의 배움터인 것입니다.

 

그러니 장애라는 현실은 바꿀 수 없을지라도,

내 안에 내재되어 있는,

장애라는 문제를 더이상 문제시하지 마세요.

그로인해 스스로 죄의식에 사로잡히거나,

남들보다 못한 존재로 스스로를 비하하거나,

나는 왜 이렇게 태어난거지 하고 거부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장애는 하나의 문제가 아니라,

그저 단순한 하나의 다른 점일 뿐입니다.

 

사람들은 꼭 장애가 아닐지라도

자신만이 가지는 남들과 특별한 점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그 특별한 점을

자기다움으로써 아름답게 승화시키고 긍

정으로 해석하는가 하면,

또 어떤 사람은 그 특별한 점을

남들보다 못한 점이라고 비하하고, 부정적으로 해석함으로써

그 특별한 상황이 가져다 주는 배움의 기회를 잃어버리기도 합니다.

 

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점은

부정적으로 해석하면 바로 내가 해석했던

그 부정적인 일들을 만들어내는 것과 다르지 않다는 점입니다.

 

긍정적으로 해석하고, 배움의 기회, 지혜를 얻는 기회, 

깨달음과 성숙의 기회로 해석하게 될 때

비로소 그 특별한 점이 우리에게 주고자 하는 모든 지혜를

우리는 마땅히 흡수하고 내면화하여 받아들이게 되는 것입니다.

 

장애는 장애가 아니라 이름이 장애일 뿐입니다.

그것 자체가 문제가 아니라

거기에 대한 나의 해석이 문제인 것이지요.

 

장애로 인해 괴로워하기 보다는,

장애로 인해 얻게 되는 

놀라운 깨달음과 

매 순간의 삶의 지혜를

충분히 깨달아 가시기를 바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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