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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07.12.04 기도하기 힘들 때는 (1)
  2. 2007.11.09 연기를 보면 진리를 본다 - 연기법 강의(1)




생활을 수행으로 바꾸고자 하는 초심 수행자들이
종종 '기도'에 얽매이는 경우를 봅니다.

삶을 되돌아 보며
이따금 명상을 해 보고도 싶고
절에 가서 기도에 동참해 보고도 싶으며,
때로는 수련회에 참여해 자신을 찾고자 노력도 해 봅니다.

그러나 일과 수행
일상과 수행자의 삶이란
언제나 마음 먹은대로 되어지지만은 않는 법입니다.
놀고 흥청이던 이전의 오랜 습(習)들이
고요해지고자 하는 수행심을 방해하기 일수입니다.

그래서 많은 이들은
집에서 기도를 하고자 합니다.
108배도 해 보고,
금강경도 독경해 보고,
아침 저녁으로 예불이며 참선도 해 보고 그럽니다.

그렇지만 마음처럼 쉽지 않습니다.
굳게 마음먹었던 108배며, 금강경 독경이
첫 날 마음 같지 않고
절에서의 마음 같지 않게
왜 그리 길게 느껴지고 힘겹게 보이는지 모릅니다.

매번 그런 식입니다.
기도하겠다 하고는 몇 일 못 가서,
아니 하루도 못 하고 주저앉기 일수입니다.

108배에 또 금강경 독경에 목숨 걸 필요는 없습니다.
오직 불, 법, 승 삼보님 전에 나를 낮추고 귀의하는
그 맑고 향기로운 지극함이면 충분합니다.

업식(業識)이 이겨내지도 못하는
108배며, 그 긴 금강경을 독경하려 하니 어렵습니다.
하루 한 번이라도 부처님과 부처님의 가르침을
떠올리는 것 만으로도 기도가 될 수 있습니다.

경전을 하루 한 두 구절씩 읽고 명상하는 것이며,
반야심경을 아침 저녁으로 독경하는 것,
아침 저녁 108배 대신 3배, 혹은 7배를 하는 것도 좋습니다.

108배가 어려우면 지극한 마음으로 천천히
단 5분간 관세음보살을 염하며 절하는 것도 좋습니다.
아침 저녁으로 정좌 하고 앉아 108번 지극하게
관세음보살을 염불하심도 좋을 듯 합니다.

108염주나 작은 단주를 들고 다니며
시간 날 때마다 '관세음보살' 염불하시는 것도
참 좋은 일상 기도입니다.
하루 단 10분, 아니 5분만 시간 낼 수 있어도 됩니다.
하루도 거스르지 않고 마음을 낼 수 있다는 것이 중요합니다.

3.7일간 108배를
혹은 100일간 금강경 1독씩을 원 세워놓고
몇 일 못가서 그만 두는 것 보다
몇 배 이상 좋은 기도일 수 있을 것입니다.

자신의 근기(根器)에 맞는
스스로의 기도방법을 찾으시면 됩니다.
처음엔 그리 시작해야 합니다.
어렵지 않게 기도를 집에서나 일상에서 편히 할 수 있는
그런 포근한 기도가 되어야 합니다.

기도를 열심히 할 뿐,
기도에 집착이 되어선 안됩니다.
기도가 되려 걸림의 대상이 되어선 안됩니다.

내가 죽는 날까지 지켜낼 수 있는
아주 작은 생활 기도를 원 세워 보시길 바랍니다.
어떤 바쁜 날이라도, 일상에 찌든 날이라도, 설령 휴가철이라도
쉽게 마음내어 지킬 수 있는 작은 기도를 말입니다.

그것은 기간을 정해두고 그 날만 기도하면 된다는,
또 절에 갈 때만 마음 곱게 먹고 기도하면 된다는
그런 어리석은 마음을 일깨우는 큰 정진력, 생활 수행력이 될 것입니다.

그러나 처음에 이렇게 쉽고 자신에 맞는 기도를 하더라도
이것만이 전부인 것은 아닙니다.
어느 한 순간 크게 마음을 내어
발심(發心) 할 인연이 된다면
육신의 집착과 게으름, 즉 몸뚱이 착심을
큰 발심으로 이겨 낼 수도 있어야 합니다.

그 때는 3일이고, 7일이고, 3.7일, 혹은 100일, 1000일씩
크게 신심내어 업식과의 한 판 전쟁을 벌이는 것입니다.
그 때는 결코 물러설 수 없는
자신과의 여여한 싸움을 벌이는 것입니다.

이렇듯
기도도 근기에 맞아야 합니다.
현재 자신의 상황에 맞아야 합니다.

무조건 힘든 것, 육신을 괴롭히는 것만이 좋은 기도인 것도 아니며,
그렇다고 집착않기 위해 너무 편한 기도만을 추구해서도 안됩니다.
그 양 극단에 치우치는 것이 바로
부처님 당시 '고행주의'와 '쾌락주의'의 단면인 것입니다.
부처님 당시에도 그 두 가지 사이에서 많은 이들이
고민을 하였던 듯 합니다.

물론 부처님의 결론은
어디에도 치우치지 않는 중도(中道) 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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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법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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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진성 2020.06.05 10:01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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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기를 보면 진리를 본다

부처님이 깨달은 진리는 무엇일까. 그것은 연기법이다. 부처님이 해탈, 열반을 성취하셨다고 했을 때 그것은 곧 진리를 깨달았다는 말이고 바로 그 진리가 연기법인 것이다. 수많은 불교 교리가 있고, 불교 경전이 있으며, 부파불교에서 대승불교로, 또 인도에서 중국, 한국, 일본, 그리고 현재 전 세계로 불교가 전파되면서 수많은 논서와 강론 등을 낳아왔지만 그 모든 이치를 한 마디로 하자면 연기법이라고 정리 해 볼 수 있다.

그래서 『중아함경』상적유경에서는 ‘연기를 보면 곧 진리를 본 것이요, 진리를 보면 곧 연기를 본 것이다.’라고 말하고 있다. 연기를 보는 것이야말로 부처님이 깨달은 진리를 보는 것이다. 삼법인, 사성제, 팔정도, 무상, 고, 공, 무아, 자비, 일체법, 12연기, 업과 윤회 등의 근본불교 교리에서부터 부파, 대승불교 교리에 이르기까지 연기법을 벗어나는 교리나 사상은 없다. 모두가 연기법의 각론이며, 연기법을 쉽게 설명하기 위한 수많은 방편들에 불과하다.

이 말을 다르게 표현하면 연기법을 깨닫게 되면 온 우주의 모든 이치를 확연히 깨닫게 되어 더 이상 그 어떤 의혹도 남아있지 않고 환히 다 알 수 있다는 말이다. 『우다나』에서는 ‘성자가 참으로 진중하게 사유하여 일체의 존재가 밝혀졌을 때, 모든 의혹은 씻은 듯 사라졌다. 그것은 연기의 진리를 알았기 때문이다.’라고 말하고 있다. 이 세계와 우주에 대한, 또 나라는 존재에 대한, 그리고 나고 늙고 병들고 죽는 이치에 대한 그 모든 의심과 의혹들은 비로소 연기법의 진리를 깨달았을 때 모든 것이 확연해진다.

이 말은 다시 말하면 부처님께서도 연기법이라는 진리를 깨달으신 것이지 부처님께서 별도로 연기법을 만든 것이 아니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즉, 연기법은 부처님이 오기 전에도 있었고 설령 오지 않으셨더라도 언제나 이 우주의 법칙이요 진리로써 항상 하고 있는 진리란 의미다.

『잡아함경』12권에서는 ‘연기법은 내가 만든 것도 아니며, 다른 사람이 만든 것도 아니다. 그러나 연기법은 여래가 세상에 출현하든지 안 하든지 항상 존재한다. 여래는 이 법을 깨달아 해탈을 성취해서 중생을 위해 분별하여 설하며 깨우칠 뿐이다.’라고 하셨다. 이처럼 연기법은 부처님께서 만들거나 아니면 다른 누군가에 의해 만들어진 교설이 아니라 이 우주를 운행하는 법칙으로써 언제나 존재하고 있었던 것이다. 단지 부처님은 이러한 우주적인 진리를 바로 보고 깨달아, 중생들이 이해하기 쉽게 설명하기 위한 방편으로‘연기법’이라고 편의상 이름 붙여 주신 것에 불과하다. 그러니 연기법은 다만 방편으로 설해진 말에 불과한 것이지 연기법이라는 언어에도 집착해서는 안 된다. 이처럼 부처님께서는 연기법을 깨달아 아셨고, 연기법을 실천하는 분이며, 이러한 연기법을 중생을 위해 수많은 교리로써 분별하여 설하고 깨우쳐 주고 계시는 분이다.

그렇다면 도대체 연기법이란 무엇인가. 연기법이 무엇이기에 부처님께서 이토록 역설하셨으며, 그 가르침이 2,500여 년을 이어왔고, 지금에 이르러서는 전 세계의 모든 이들이 주목하고 있는 종교요 가르침이 되고 있는가. 물론 연기법을 간단하게 ‘이것이다’라고 결론짓기는 어렵다. 수많은 교리 해설서를 보더라도 경전의 말씀을 풀어 놓으면서 주석을 달고는 있지만 그것을 읽는다고 연기법을 확연하게 깨달을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연기법적인 삶을 살게 되는 것도 아니다. 또한 그러한 가르침을 읽고 나더라도 연기법에 대한 어떤 확연한 답을 얻지 못하는 수도 있다.

나 또한 대학 다닐 때 처음 접해 보았던 불교교리서나 경전해설서를 보면서 연기법이 진리라는 것은 알겠는데, 도대체 왜 이 연기법이 불교를 대표하는 교리이며, 이것이 진리의 핵심인지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물론 좋은 말씀이기는 한데, 불교를 대표할 정도로, 이 세계와 우주를 운행하는 근본 원리요 법칙으로써의 깊은 뜻을 담고 있는 것 같지는 않은 것 같은 느낌이랄까. 그것은 풀리지 않는 숙제처럼 내 안에 화두로써 자리잡고 있었고, 아마도 그 의심이 지금까지 이렇게 불교공부를 할 수 있게 해 준 원동력이 아니었나 싶기도 하다.

아마도 이 생각은 나 혼자만의 생각이 아닐 것이다. 불교를 처음 공부하는 대다수 사람들의 공통된 의문이 아닐까 싶다. 아마도 부처님 당시에도 이런 고민을 하던 제자들이 많았던가 보다. 『증일아함경』권46에 보면 아난 존자가 연기와 십이연기에 대한 법문을 듣고는 부처님께 여쭙는다. ‘제가 보기에는 연기법이 그리 깊은 뜻이 있어 보이지는 않습니다’라고 한 질문에 부처님께서는 ‘아난아, 그런 말을 하지 말라. 십이연기는 매우 깊고 깊은 것이니 보통 사람이 능히 깨칠 수 있는 법이 아니다.’라고 답변하고 계신다. 이처럼 연기법은 언뜻 보기에 도무지 종잡을 수 없는 법처럼 보인다.

여기에 수많은 수행자며 학자들의 공통된 어려움이 있다. 연기법을 과연 어떻게 설명해야 수많은 사람들에게 분명하고도 온전하게 전달할 수 있으며, 그 깊이와 통찰력을 고스란히 담아낼 수 있을까. 이것이야말로 역사 이래로 수많은 스님들께서, 또 수많은 수행자며 학자들이 고민해 온 내용일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결코 쉬운 문제가 아니다. 사실 불교를 잘 모르는 수많은 이들이, 혹은 불교를 믿고 신행하는 초심 불자들이라도 ‘불교는 이것이다’라고 분명하게 설명하고 실천할 수 있는 이는 많지 않을 것이다.

도대체 불교는 너무나도 방대하고, 교리들도 다양하며, 경전도 수없이 많아서 어떤 것이 불교를 단적으로 선명하게 드러내 주는 것인지 막연한 경우가 많다. 그러다 보니 대부분의 불자들은 ‘불교가 어떤 종교인가?’하는 질문을 받고 주저하게 된다. 도대체 어떤 교리를 어떻게 설명해 주어야 할까 고민하게 된다. 그뿐 아니라 스스로도 막연하고 정리가 되어 있지 못하다.



연기의 의미

그러면 이제부터 연기법이 과연 어떤 법인가를 차근 차근 공부 해 보자. 연기법에서 보는 관점에 의하면, 이 세상에는 일정한 법칙이 있다. 언뜻 보기에는 아무렇게나 제 멋대로 존재하는 것 같은 것들도 모두 다 일정한 법칙 속에 존재한다. 이 세상을 보면 불확실한 일들이 많고, 불확정적인 것들이 많으며, 복잡다단하고, 언뜻 보기에는 정신없어 보일 정도다. 이런 복잡한 세상을 수많은 사람들이 다양한 삶의 방식을 이루며 살아가고 있다.

심지어 어떤 경우에는 불합리한 것 같고, 불평등한 것 같으며, 진리는 없는 것 같은 자괴감을 느낄 법한 일들도 벌어지곤 한다. 어떤 사람은 태어나자마자 부잣집 아들로 태어나 열심히 일하지 않고도 온갖 부귀영화를 누리고 살아가는가 하면 또 어떤 사람은 태어나면서부터 못 사는 나라에 가난한 이로 태어나 기아와 전쟁으로 아귀다툼을 벌이다 죽어가는 이들도 있다. 같은 나라에 태어나 살더라도 어떤 이는 교묘한 술수와 이기적인 방법으로 성공하는 이가 있는가 하면, 정직하고 따뜻한 마음을 가지고 부지런히 사는 사람이 실패하는 경우도 많다. 그렇다면 이런 세상에 진리는 없는 것인가. 진리가 없기 때문에 이런 불평등이 벌어지고, 불합리한 일들이 벌어지는 것인가. 그렇지 않다. 여기에는 또 다른 이치가 숨어 있다. 이 모든 존재며 상황들을 가능케 하는 우주적인 법칙이 숨어 있다. 그것이 바로 연기법이다.

먼저 ‘연기’란 말의 의미를 정리해 보자. 연기의 어원은 팔리어에서 온 것인데 이는‘Paticca Samuppada’라고 하여 ‘Paticca’는 ‘~때문에’, ‘~로 말미암아’라는 뜻이고, ‘Samuppada’는 ‘일어나다’는 의미이다. 즉 연기는 ‘~로 말미암아 일어나다’, ‘~때문에 생겨나다’는 의미이다.

연기의 산스크리트어 또한 ‘pratitya samutpada’로써 ‘pratitya’는 ‘~때문에’, ‘~의해서’, ‘~로 말미암아’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고, ‘samutpada’는 태어남, 형성, 생김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어, 마찬가지로 ‘~로 말미암아 생기는 것’임을 알 수 있다. 즉 이 세상의 모든 존재는 독자적으로 저홀로 생겨나는 것이 아니라 무언가로 말미암아 생기고, 무언가에 의해서 의존해서 생기는 것이란 뜻이다. 이는 그 어떤 원인이나 조건을 말미암아 생겨나는 것이란 의미다.

『잡아함경』13권 335에서 이 연기법의 전형으로 평가되는 경구를 볼 수 있다.

이것이 있으므로 저것이 있고,
이것이 생함으로 저것이 생한다.
이것이 없으면 저것도 없고,
이것이 사라지면 저것도 사라진다.

‘이것이 있으므로 저것이 있고, 이것이 생함으로 저것이 생한다.’는 것은 일체 모든 존재며 상황은 과연 어떻게 생겨나는가 하는 생성과 발생을 설명하고 있으며, ‘이것이 없으면 저것이 없고, 이것이 사라지면 저것도 사라진다.’는 것은 일체 모든 존재와 상황은 어떻게 소멸하는가를 설명하고 있다. 또한 ‘이것이 있으므로 저것이 있고 이것이 없으면 저것도 없다’는 것은 연기의 공간적인 표현이며, ‘이것이 생함으로 저것이 생하고 이것이 사라지면 저것도 사라진다’는 것은 연기법의 시간적인 표현으로 볼 수 있다.
Posted by 법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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