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자 있어야 한다는 것은,
외로움과 마주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은,
철저한 고독과 마주한다는 것은,

한 편 바깥 세상에 대한
모든 기대와 관심을 다 놓아버리고
혼자서 걷는다는 말도 되지만,

또 한 편 그 내적인 의미는
내적인 고독, 내적인 침묵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내 안에서는
수많은 생각과 기억, 고정관념, 편견, 판단을 비롯한
수없이 많은 것들이 서로 다투고 있습니다.

혼자서 가만히 있는다고
다 가만히 있는 것이 아니예요.
다 혼자서 외로움을 느끼는 것이 아닙니다.

머릿 속에서 온갖 생각과 기억들이 춤을 춘다면
그 사람은 결코 혼자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온갖 과거로부터 온 생각과 기억 판단들과
함께 있는 것이지요.

혼자 있는다는 것은,
내면적으로 완전히 침묵한다는 것을 말합니다.

내적으로 침묵한다는 말은
과거로부터 배워왔거나 익혀왔거나 들어왔던
수많은 기억, 판단, 편견, 이미지, 사상, 고정관념, 생각들을
온전히 비워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한 생각 생각을 일으킨다면
그것은 이미 과거의 일들입니다.
기억 속에 저장되어 있던 수많은 복잡한 것들에
얽매여 있다면
결코 침묵하고 있지 않은 것입니다.

말 없는 것이 침묵이 아니예요.
내적인 침묵이 참된 침묵입니다.

과거의 기억을 들추어 내지 말고,
그 어떤 가르침이나 사상, 이데올로기도 따르지 말고,
누군가에게 혹은 어디에선가 배워온 것을 쫒지 말고,
지금 이 순간
고요 속의 즉각적인 통찰만을 따르면 됩니다.
온전히 내가 되라는 말입니다.

지금의 나를 돌이켜 보면,
만들어진 나, 교육되어진 나, 훈습되어진 나일 뿐
지금 이대로의 텅 빈 나가 되지 못합니다.

과거는 과거일 뿐,
지금까지 가져오지 마세요.
그랬을 때 우리는 온전히 내가 될 수 있습니다.
내적으로 완전히 침묵할 수 있습니다.

과거에 배운 것, 익혀온 것을 바탕으로
지금을 판단하지 말고
아무런 판단이나 기억도 일으키지 말고
오직 지금 이 순간
'있는 그대로를 있는 그대로 바라볼 뿐'이 되어야 합니다.

그것만이
완전한 내적 침묵 속을
거닐음도 없이 거닐고 있음입니다.
그것만이
내 안의 온갖 기억들을 비워낼 수 있는 길입니다.

무언가를 배우려고 하지 말고,
깨달음을 찾아 나서려 하지 말아야 합니다.
찾는다는 것은
이미 또다른 색안경이며 기억, 앎을 만드는 것일 뿐이고,
또다시 '교육되어진 나'를 만드는 일이 될 뿐입니다.

내 안에는 너무 많은 생각, 사상, 기억, 앎들이 있어요.
그로인해 우리는 침묵하지 못합니다.
그로인해 속 뜰의 나 자신을 마주하지 못합니다.
그런 것들이 우리를 가로막고 있어요.

참나를 찾기 위해서,
깨달음을 얻기 위해서,
또다른 스승을 찾아 나서고,
또다른 성전을 찾아 나선다고 하면
그것은 이미 또다른 사상을 배우고자 하는 것일 뿐이고,
내 안에 또다른 관념을 주입시키는 것밖에 되지 못합니다.

불교는 쌓는 공부가 아니라 비우는 공부입니다.
다만 방편으로 비우기 위해 쌓는 것을 가르칠 뿐이예요.
그동안 제가 한 말이
'비우기 위해 쌓는 것'을 말했다면
지금 제가 하는 말은
'비움' 그 자체를 말하고 있는 것임을 알아 주셨으면 합니다.

온전한 비움을 위해
내적인 완전한 침묵을 위해
우린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됩니다.
애써 찾아 나서지 않아도 됩니다.

그저
아무런 분별도 없이,
아무런 판단도 없이,
과거를 떠올리거나 미래를 계획함도 없이,
있는 그대로를 마음 모아 알아차리면 됩니다.

아무런 판단 분별 없이
'알아차림'만이 있을 수 있다면
바로 그 순간
알아차리는 나도 없고 알아차려지는 대상도 없습니다.

관하는 나가 없는 이유는
'나'라는 것은 과거의 산물이기 때문이고,
그 과거의 기억으로 걸러진 판단 분별 때문에 생기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온전히 관할 때 '관하는 나'도 없고, '관하여지는 대상'도 없습니다.

다른 것을 할 필요는 없습니다.
내 안팎에서 일어나는
일체 모든 생각이며 느낌을 있는 그대로 관하되,
옳다거나 그르다거나
좋다거나 싫다거나 하는 그 어떤 분별도 일으키지 말고,
다만 관하면서 그것과 하나되어 흐르기만 하세요.

이것이 바로 수행입니다.
궁극의 수행이며,
수행 아닌 수행인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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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20, 이색이상분
형상과 모습을 여의다


離色離相分 第二十
須菩提 於意云何 佛 可以具足色身 見不 不也 世尊 如來 不應以具足色身 見 何以故 如來 說 具足色身 卽非具足色身 是名具足色身 須菩提 於意云何 如來 可以具足諸相 見不 不也 世尊 如來 不應以具足諸相 見 何以故 如來說 諸相具足 卽非具足 是名諸相具足


“수보리야, 너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구족한 몸을 갖춘 것만을 보고 부처라고 할 수 있겠느냐?”
“아닙니다. 세존이시여. 구족한 몸을 갖추었다고 여래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여래께서 말씀하시는 구족한 몸은 곧 구족한 몸이 아니라 그 이름이 구족한 몸이기 때문입니다.”
“수보리야, 너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가히 구족한 [32상]상을 가졌다고 하여 여래라 할 수 있겠느냐?”
“아닙니다. 세존이시여. 구족한 상을 갖춘 것을 여래라 볼 수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여래께서 말씀하시는 모든 상이 구족되었다는 것은 곧 구족된 것이 아니라 그 이름이 구족된 상일 따름이기 때문입니다.”

이색이상이라는 것은 형상과 모습을 여읜 자리에 부처님은 계시다는 것을 의미하고 있다. 우리는 여전히 부처님을 형상과 모습으로써 생각하곤 한다. 전국의 어느 사찰을 가 보더라도 부처님의 모습이 형상으로써 잘 모셔져 있는 것을 본다. 그리고 우리는 그 법당의 형상불에 예배한다. 물론 그것이 완전히 잘못되었으니 다 그만두어야 한다는 말이 아니다. 그것은 어디까지나 방편일 뿐임을 완전히 자각할 수 있어야 한다는 말이다. 법당에 모셔진 형상의 부처님은 어디까지나 색이고 상일 뿐이다. 본질은 색과 상을 떠나 있다. 법당에서 절하고 예불을 올리면서도 항상 이 참된 본질을 잊어서는 안 된다. 이 분에서는 부처님을 또 진리를 형상이나 모습으로써 바라보지 않을 수 있도록 이끌고 있다.


“수보리야, 너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구족한 몸을 갖춘 것만을 보고 부처라고 할 수 있겠느냐?”
“아닙니다. 세존이시여. 구족한 몸을 갖추었다고 여래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여래께서 말씀하시는 구족한 몸은 곧 구족한 몸이 아니라 그 이름이 구족한 몸이기 때문입니다.”
“수보리야, 너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가히 구족한 [32상]상을 가졌다고 하여 여래라 할 수 있겠느냐?”
“아닙니다. 세존이시여. 구족한 상을 갖춘 것을 여래라 볼 수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여래께서 말씀하시는 모든 상이 구족되었다는 것은 곧 구족된 것이 아니라 그 이름이 구족된 상일 따름이기 때문입니다.”


여래는 구족한 색신의 몸을 갖추었으며 32상 80종호를 구족하고 계신다고 알고 있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방편일 뿐이다. 부처님의 상호를 말로 표현하는 순간 사실은 그것과는 멀어지고 만다. 그 말이 부처님을 그대로 나타내 줄 수는 없다. 말로 표현되는 순간 벌써 어긋나고 마는 것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말로 언어로 표현하지 않는다면 수많은 중생들에게 어떻게 부처님과 가르침을 전해줄 수 있단 말인가. 그래서 부처님의 진리성을 표현하다 보니 어쩔 수 없이 말로 나타내지 않을 수 없었고 그것을 표현한 말이 바로 구족한 몸이고 구족한 상이라고 표현한 것이다. 그러니 구족한 상이나 구족한 몸이라는 것은 곧 구족된 것이 아님을 말한다. 구족되었다는 이름일 뿐 ‘구족’이라는 언어 자체가 구족은 아니기 때문이다. 그래서 구족은 곧 구족이 아니다. 다만 그 이름이 구족일 뿐인 것이다.

부처님은 이와 같이 형상과 모습을 떠나서 계신다. 부처님을 어떤 모습을 가지신, 어떤 형상을 구족하신 존재로써 생각지 말라. ‘부처님은 어떤 분이실까?’ ‘부처님은 인자하신 할아버지 같은 분이실거야?’ ‘부처님은 남자인가 여자인가?’ ‘부처님은 어떻게 생기셨을까’ ‘부처님의 몸은 얼마나 아름다우실까?’ 아직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가? 아직도 형상과 모습으로써 부처를 구하고 있는가? 부처님은 형상이나 모습이라는 틀에 갇혀 있는 분이 아니다.

부처님이란 진리 그 자체이며, 생명 그 자체이고, 우주 그 자체이며, 허공 그 자체이고, 완전한 무(無)요, 공(空) 그 자체이다. 크고 작은 것도 아니고, 잘나고 못난 것도 아니며, 남자도 여자도 아니고, 그 어떤 한정이나 표현으로도 나타낼 수 없다. 물론 이렇게 표현하고 있지만 이 말들이 부처님을 나타낼 수는 없다. 다만 표현을 그렇게 했을 뿐 이 표현은 더 이상 부처님이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습관적으로 부처를 틀 속에 가두느라고 애를 쓰고 있다. 법당에 계신 부처님의 모습을 보라. 대부분이 비슷비슷하다. 비슷한 모습으로 부처님의 상을 만들어 놓았다. 그러다 보니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법당의 부처님의 모습을 부처님이라고 믿고 있다. 은연중에 그렇게 믿고 있다. 그러나 법당의 부처님 형상 안에만 부처님이 담겨 있을 수가 있을까? 그리스도교의 예수상이나 성모마리아상을 생각해 보라. 그 상은 부처가 아닌가? 왜 그 상을 보면 거부감을 느끼고 불상을 보면 흡족한 마음을 가지는가. 절에 가서 불상을 보고 탱화를 보면 편안한 느낌인데 교회의 예배당은 그렇지 않다고 생각하지는 않았는가. 그것이 바로 부처를 색과 상으로 관념화하고 있다는 반증이다.

부처는 어떤 특정한 색과 상에 갇히지도 않지만 그렇다고 어떤 특정한 색상에서 벗어나 있지도 않다. 법당의 불상도 부처요, 예수상이나 성모마리아상 또한 부처일 수 있다. 어디 그 뿐인가. 저 하늘의 구름도 부처요, 바람도, 흙도, 자연도, 저 산과 바다 또한 부처의 몸이다. 나무와 풀꽃들과 새와 들짐승에서부터 곤충이나 미생물들에 이르기까지 생명 있고 없는 일체 모든 것, 형상 있고 없는 일체 모든 것은 그대로 부처를 담고 있다.

부처는 형상이 아니다. 불상 안에만 부처가 있는 것이 아니다. 마찬가지로 부처는 불교 안에만 있는 것도 아니다. 불경 안에만 부처의 진리가 있는 것이 아니다. ‘불교’라는 종교 안에만 부처가 있다거나, 진리가 있는 것일 수 없다. 불교는 다만 온 우주의 진리를, 법을, 도를, 참을 이름하여 ‘불교’라고 이름 붙였을 뿐이지 ‘불교’라는 이름이 불교인 것은 아니다. 그러니 ‘불교’라는 틀에서 벗어날 수 있어야 한다. 불교는 불교가 아니라 다만 이름이 불교인 것일 뿐이다.
그것이 불교의 특성이다. 그것이 바로 모든 불교 신자들의 자유로움이요 유연함이다. 그것이 진리의 전일성(全一性)이요, 전체성이다. 불교는 불교만을 고집하지 않는다. 불경만을 진리라고 고집하지 않는다. 고집하지 않고 집착하지 않고 어느 한 쪽으로 치우치지 않은 것이 바로 불교다. 불교이기 때문에 진리를 담고 있는 것이 아니라 이 세상의 진리를 불교라고 이름지었을 뿐이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많은 불교 신자들은 ‘불교’ 속에 갇혀 있고, ‘부처’ 속에 갇혀 있다. 불교라는 이름에 갇혀 있고, 부처라는 형상에 갇혀 있다. 갇혀 있으면 자유롭지 못하고 자유롭지 못할 때 대립과 갈등이 일어난다. 타종교 신자들과 갈등을 만들어야 할 이유가 무엇인가. 불교만이 진리이고 다른 가르침은 불교보다 열등하다는 상을 만들어 낼 이유가 무엇인가.

불교는 불교를 종교로 내세우는 종교가 아니다. 불교는 진리를 종교로 내세우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불교’라는 종교 속에, 혹은 ‘조계종’이라는 교단 속에, ‘불경’이라는 경전 속에만 불교가 있는 것이 아니다. 성경 속에 혹은 코란 속에 혹은 도덕책 속이나 소설책 속에, 혹은 할머니 할아버님의 말씀 속에, 노자나 장자의 고전 속에, 인디언들의 말들 속에, 어린 아이의 행동 속에, 목사님과 신부님들의 말씀 속에도 진리는 담겨있다. 불교는 담겨있다.
물론 그렇다고 모든 말들이, 모든 고전들이, 모든 종교의 가르침이 모두 다 진리라는 것은 아니다. 이 말의 핵심은 ‘불교’ 속에서만 진리를 찾을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불교 안에만 진리가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어디에도 진리가 있을 수 있음을 받아들여야 한다는 말이다. 물론 불교는 순수한 진리의 보고라는 점은 어쩔 수 없는 진실이다. 그러나 다른 가르침 속에도 불교는 담겨있다. 어떤 종교는, 어떤 사상은 다른 이름을 내걸고 있지만 그대로가 진리를 담고 있으며 부처의 가르침을 담고 있는 것도 있다.

그러니 불교가 불교이기 때문에 믿어서는 안 된다. 불교가 진리이기 때문에 믿어야 한다. 불교이기 때문에 불교를 믿는다는 것은 목적이 오직 ‘불교’에 가 있다는 말이고 그랬을 때 ‘불교’ 그 자체에 갇히거나 집착되기 쉽다. 그러나 진리이기 때문에 믿는다는 말은 ‘불교’라는 이름이나 틀을 믿는것이 아니라 그 안에 담긴 진리성을 믿는다는 말이기 때문에 참된 진리를 믿는자는 거기에 어떤 이름을 가져다 붙이더라도 그것이 진리를 대변하고 있다면 마땅히 믿을 수 있는 열려있는 유연성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그것이 진리라면 노자나 장자를 공부해도 좋고, 성경을 공부해도 좋으며, 인디언의 가르침이나, 옛 어르신의 가르침이라도 전혀 편견이나 색안경을 끼고 바라보지 않을 수 있다. 그러나 말에 갇히고, ‘불교’에 갇히고, 어떤 틀에 갇혀 있는 사람은 일단 다른 종교, 다른 사상, 다른 사람의 가르침이 오면 일단 내 안의 문을 자물쇠로 콱 틀어 잠그고 본다. 그뿐 아니라 그러한 가르침을 색안경을 끼고 바라본다.

연예인이 TV에 나와서 ‘하느님께 감사합니다’ 한 마디 했다고 치자. 그래서 뭐 어쨌단 말인가. 그것이 왜 우리의 질투심을 유발하고, 그것이 부처님이 아닌 것에 왜 서운함을 느껴야 하는가. 참으로 하느님을 이해한 사람이라면 그는 부처님을 이해하고 있는 것이다. 참으로 성경을 온전하게 지혜로써 이해한 사람이라면 그는 성경 안에서 불경을 진리를 이해한 사람일 수 있다. 다만 우리가 걱정해야 하는 것은 ‘하느님’이라고 했을 때 그 하느님을 잘못 믿고 잘못 이해하며 하느님이란 상에 갇혀서, ‘기독교’란 상에 갇혀서 믿는 사람을 측은한 자비심으로 바라봐야 한다.

물론 성경 특히 구약 속에 수많은 오해의 구절들이 있고, 말 그대로 이해했을 때 진리를 무색하게 할 만한 구절들이 많이 있다. 코란도 마찬가지다. 그 가르침을 잘못이해하거나, 근본적으로 그 경전들이 만들어질 때의 시대적 상황, 편집한 사람들의 잘못 등이 후대에 큰 악영향을 끼친 그런 부분들에 대해서는 많은 반성과 성찰이 있어야 할 것이다. 그런 어리석음들이 전 세계적으로 얼마나 많은 전쟁을 일으켰으며, 얼마나 많은 사람들을 불행으로 이끌어 갔는가. 그러나 문자의 틀에 갇히지 않고, 문자라는 방편, 언어라는 방편이 가지고 있는 치명적인 오류들을 올바로 이해함으로써 그 종교의 그 경전의 언어 이전에 담긴 참 진리를 온전하게 이해했던 수많은 성인들, 종교인들은 여전히 그 모든 종교들의 순수성과 진리성의 전통을 이어왔다. 바로 그들은 성경을 문자에 치우치지 않고 이해한 사람들이다. 성경의 수많은 말들이 말이 아니라 다만 이름이 말이었음을 온전하게 알고 있었던 사람들이다. 언어가 가지는, 형상이 가지는 모순과 오류들을 이해한 사람들이다. ‘예수’라는 몸이나 상에 치우치지 않고, ‘성경’이라는 상에 치우치지 않고 이해한 사람들이다.

물론 불교 또한 마찬가지다. 참된 불교의 정신을 이끌어 온 사람들은 ‘불교’라는 틀에 갇힌 사람들이 아니라 그 틀을 뛰어넘은 사람들이다. 불교가 불교가 아님을 바로 보고, 부처의 형색이 형색이 아님을 바로 본 사람들이 바로 그 진리의 정신을 이어오고 있다. 바로 그 정신, 그 진리의 참된 정신을 있는 그대로 내포하고 있는 경전이 바로 ‘금강경’인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불교의 보배요, 불교 정신을 이어 온 요체다. 그리고 지금 우리는 이렇게 금강경이 아니기 때문에 참으로 금강경인 이 금강경을 받아들임 없이 받아들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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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처님 법은
세상과 거꾸로 가는 법이라 하였습니 다.

법에서는
수행하면 행복하고
몸뚱이 편히 놀리면 불행하지만

사람들이야
수행하기 힘들어 수행할 땐 괴롭고
몸뚱이 편히 놀리면 행복을 느끼거든 요.

수행할 때는
우선 몸뚱이 착심을 닦으면서
정진을 하다 보니
육신의 피로며
하기 싫은 마음들로 괴롭겠지만,

그 내면에는
나도 모르게 큰 힘이 쌓입니다.
세상을 당당하게 살아갈 수 있는
내면의 중심잡힌 힘이 붙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수행을 하지 않을 때는
몸과 마음을 놀리다 보니
당장에는 편하겠지만,

우리의 내면은
괴로워 눈물을 흘립니다.
그렇지만 우리는 그 눈물을 보지 못해 요.
그러다 보니
수행 안 해도 잘 살았다고 그럽니 다.

내면의 눈물이 흘러 흘러
밖으로 넘칠 때가 되어서야
수행 시작하겠다고 하고,
수행하지 않은 것을 괴로워 하지만
그 때는 이미 늦을 지 모릅니다.

수행은
일종의 준비입니다.

우리 눈에는 보이지 않지만
누구라도
언제 밖으로 터져 나올 지 모르는
벅찬 업장을 가지고 삽니다.

막상 터지고 나면
그 때 가서 막기가 너무 힘듭니 다.

그러니
수행하고 정진함으로써
미리 미리 준비하고
닦아내고
그러는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 마음을 보면 서,
시도 때도 없이 변화하는 마음들을 보면서,
우리 마음이 얼마나 나약한가
하고 생각해 봅니다.

세상에 변하지 않는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좋고 나쁘고를 계속 반복합니다.
그러다보니
우리 마음도 좋았다 나빴다,
수행 잘 되 었다, 안 되었다,
수행하고 싶었다가 하기 싫었다가,
행복했다가 괴로웠다가
그렇게 변화하는 것입니 다.

본래 '나'는 결코 변하지 않는
금강과도 같습니다.
그렇지만
끊임없이 변화하는 외부의 세계, 경계들로인해
우리 마음이 휘둘리기 때문에
그에 따라 우리 마음도 변화하는 것입니다.

휘둘리지 않으면
우리 마음 속에 좋고 싫고 가 없어집니다.

그러니 수행하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수행 잘되고 안되고는 본래 없습니다.
한마음 내면 그대로 수행입니다.

그러나 우리 마음이 외부로 자꾸 끄달리고
휘둘리기 때문에
수행 잘되고 안되고가 생기는 것입니 다.

수행이란
경계에 휘둘리는 이 마음을
잘 다스려
휘둘리지 않는 여여함을 찾고자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수행하면서
마음이 휘둘리면 그 놈과 결전을 벌여야 할 일입니다.
적당히 아상과 타협하면 안됩니다.
그러면 벌써 휘둘린 것 입니다.
수행과는 저만치 멀어지는 것입니다.

수행자는 모름지기 분발심을 내야 합니다.
'내가 왜 이런거 한다고 해서 이렇게 힘들어하는지 모르겠다'
'도대체 이거 왜 하는거지?'
'절 한다고 뭐가 달라져?'
하고 의심이 나는 것 이 바로 마장입니다.
내 안에서부터 일어나는 경계입니다.

안팎으로 다가오는 온갖 경계를
이겨내기 위해
수행자는 크게 분발심을 내어 정진해야 합니다.

정말 하기 싫고
죽겠고, 죽겠을 때
그 한 턱을 넘어서는 것이 수행입니 다.
그렇게 넘어서는 것이 아상을 녹이는 일입니다.

백척간두진일보 하라는 말은
딱 죽겠다 싶을 때 까지 하고는 죽기전에 그만두라는 말이 아닙니다.
딱 죽겠다 싶을 때까지 정진하고
그야말로 죽겠다 싶을 때
그냥 죽어버려야 한다는 말입니다.

그만큼 치열하게
아상과, 업장과 싸워이겨야
모름지기 수행자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어려우 니 수행이다' 정도로는 부족합니다.
그야말로 죽겠을 만큼, 죽을만큼 힘든것도 이겨내야
그래야 수행한다고 하지
적당히 타협하 는 일은 아상만 키우는 꼴이 될 뿐입니다.

법우님...
수행이 재미있으면 안됩니다.
수행 잘 될 때를 마땅히 경계할 노릇입니다.

수행 잘 된다는 말은 없습니다.
앞뒤가 꽉 막힐만큼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 고,
미칠 것 같고,
해답이 보이지도 않고,
그러는 속에 한 발 한 발 어렵게 어렵게 가는 것입니다.

3000배를 할 때
500배 정도 까지 참 재미있을 때는
수행이 덜 됩니다.
그러나 1000배, 2000배 넘어서서
정말 하기 싫은 마음 녹여 가면서
정말 도망치고 싶은 육신을 다독여 가면서 해야
그 때부터 온전한 수행이 되는 것입니다.

수행은
아상과 의 싸움입니다.
수행자는
전쟁터의 투사와도 같아야 합니다.
아상과 싸울 때는 한발자국도 물러서서는 안됩니다.
전쟁터 에서 한발자욱 물러섬은
그대로 죽음이기 때문입니다.

수행 하고 싶을 때는 하다가도,
내 마음 하기 싫다 고 안 하고,
내 마음 복잡하다고 미뤄 놓고,
오늘은 하루 종일 너무 바쁘고 노곤하다고 건너 뛰고,
이렇게 일찍 일어나면 낮 에 피곤할텐데 하는 그 마음 때문에
아침에 하고자 낸 마음 저녁으로 휙 바꿔 놓고,

회사에서 회식이 있었다고,
너무 늦게 집에 돌아왔다고,
오늘은 기분이 너무 찜찜하다고 안 해 버리면
언제
어느 때를 만나 수행하겠습니까.

좋은 때,
수행하기 참 좋을 때 수행하려고
미루는 사람처럼 어리석은 사람이 없습니다.
그것은 수행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정말 어려울 때,
참 수행하기 싫을 때,
그 때 하는 것이 수행입니다.

마음이 평온하고,
복잡한 일들도 어느정도 정 리되고,
경제적인 여유도 있고,
자식 대학가고, 취직하고, 결혼하고 나서 안정되면...
나이들어 한가로울 때,
돈 많 이 벌어 놓고 안정 될 때,
그 때...
그 때가서 수행해도 늦지 않는다는 말은
정말 수행이 무엇인지
전혀 감을 못 잡 고 있는 사람입니다.

수행은
바로 지금 여기에서!!!
가 아니면 도저히 할 수 없습니다.

좋을 때를 찾아 수행하고자 해선 안됩니다.
바로 지금!!
좋고 싫고를 놓아버리고
그냥 그냥 정진할 수 있어야 합니다.

법우님 들의 정진
힘이 붙으라고,
어쩌면...
법우님들께는 참 괴로울(^^) 이런 이야기 늘어 놓습니다.

정진
치열하게 합시다.

법우님들 힘 내세요...




마음은...
고요하시기 바랍 니다.

모든 이들의 마음은...
이내 맑고 평화롭기를 바랍니다.

경계란
흔들리라고 있는 것이 아니라,
온전히
밝게 받아들이라고 있는 것입니다.

일체를 다 받아들여야지요.
좋고 나쁨이 본래 없다고 합니다.

이래도 좋 고,
저래도 좋은
밝고 자유로운 수행자의 삶...

내 안에
밝은 주인공
살아 숨쉬고 있어야지 요...

한 뿌리에서 나온
한생명 한가족
하나...

아름다운 마음
향기로운 마음
맑고
밝 고
행복한 마음

그 마음
우리 모두의 마음이어야지요...

아름다운 날입니다.

내가 옳다라 는
생각이 너무 크면
아무리 진리라도
그것은 진리가 아닙니다.

고집이 생겨나기 때문이며,
그로인해
아상 이 커지기 때문입니다.

비우고 살면
다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맑게 텅 비우고 살면
그저
허허로운
평화로운 오후입니다.



Posted by 법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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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정안 2013.04.18 23:31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감사합니다. 요새 수행하기 싫어서 고민하고 있었는데 스님 법문에 많은 걸 배워갑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ㅠㅠ _()_


 

  홀로그램과 우주, 수행

     - 우주의 생성원리와 본질적 수행

.

                  - '09. 6. 21 일요법회

                            - 법상스님 설법

 

 

 



홀로그램과 법계 그리고 수행

  

홀로그램의 이해

아마 여러분들께서 홀로그램이라는 단어를 들어보셨을 겁니다. 홀로그램이란 홀로그래피에 의해 생성된 어떤 대상 물체의 삼차원 입체상을 말하는데요, 아마도 때때로 현실의 대상과 똑같이 생긴 삼차원의 입체영상 같은 것들을 보았던 그런 기억이 누구나 있을 것입니다. 어떤 물질과 똑같이 생겼는데 막상 가서 만져보면 그저 투영된 허상일 뿐인 홀로그램 입체상 말입니다. 이 홀로그램을 어떻게 하면 이해하기 쉬울까 생각해보다 아주 쉽게 나온 한 가지비유가 있어서 그걸 한번 설명해 드릴까 합니다.

우리가 아주 큰 냄비를 하나 가지고 있다고 생각해 보세요. 아주 큰 동그란 냄비가 하나 있습니다. 물이 담겨 있는 냄비인데 거기에다가 세 개의 조약돌을 세 곳에 정삼각형으로 동시에 탁 떨어뜨립니다. 동시에 조약돌 세 개를 냄비에다 탁 떨어뜨리면 이게 풍덩 떨어지면서 파장을 형성하겠지요. 세 개가 나름대로 파장을 형성해 나간다 말입니다. 그 파장이 냄비 끝까지 나아가겠지요. 이것이 만약 호수였다면 그 파장은 어쨌든 호수 끝까지 퍼져갈 것입니다. 그러면서 어떤 현상이 벌어지느냐 하면 세 개의 파장이 서로 서로 간섭현상을 이루어낸다 말이지요. 그렇게 물의 표면에는 간섭현상의 무늬가 형성되는데, 우리가 간섭현상이 이루어 질 때의 그 냄비 물의 가장 위의 표면, 돌은 이미 떨어졌고 그 위 냄비의 표면을 얇게 급속으로 냉각을 시켜서 얼린다고 생각을 해 본단 말입니다.

급속으로 얼려서 냉각을 딱 시켰습니다. 냉각시킨 냄비의 물 표면만 얇게 잘라내 하나의 얼음판을 만들 수 있을 것입니다. 물결치는 간섭현상 무늬의 얼음판을 얻을 수 있다는 말이지요. 지금 우리에게 있는 것은 얼음판 하나뿐입니다. 조약돌이 어디에서 어떤 지점으로 몇 개가 떨어졌는지에 대해서는 우리는 알 수가 없고 단지 그 얼음판 하나만 볼 수 있을 뿐입니다. 그런데 그 얼음판의 한쪽 편에서 빛을 쏘아주면 반대편에서 빛을 바라볼 때 무엇이 나타날까요? 우리가 가지고 있는 것은 단지 얼음 판 밖에 없습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그곳에 빛을 쏘아 주었을 때 그 반대편에서 무엇이 나타나느냐하면 애초에 떨어뜨렸던 조약돌 세 개가 등장하게 됩니다. 어느 지점에, 어떻게 생긴 조약돌이, 정확히 세 개가 떨어졌다는 것까지의 모든 정보가 다 드러나는 것입니다. 조약돌의 입체상을 고스란히 볼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렇게 빛을 쏘아 주었더니 분명히 조약돌은 없고 얼음판만 있는데도 불구하고 그 조약돌의 입체상을 나타내 준다는 말입니다. 그 말은 겉에 있는 얼음판이 단지 간섭무늬의 파장의 형태일 뿐이지만 그 조약돌 세 개가 떨어졌던 그와 관련된 모든 정보를 정확히 기억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간섭무늬는 어떤 정보의 형태로써 그 판에 기억되고 저장되어 있다고 생각할 수 있는 것이지요.

이것도 참 신기한 노릇인데 이제 이 얼음판을 팍삭 깨어 봅니다. 얼음판이 완전히 조각이 나 버렸어요. 조각이 나 버렸는데 그 조각난 얼음판 중 하나의 작은 조각을 들고서 동일하게 똑같이 한쪽에서 빛을 쏘아 줍니다. 그 반대편에서 무엇이 보일까요? 아까 동그랬던 원판과 동일한 현상이 벌어집니다. 원래의 둥그런 큰 원판을 볼 때와 똑같이 작은 하나의 조각만을 가지고 빛을 쏘아주었음에도 불구하고 다른 쪽에 보이는 것은 처음과 똑같이 정확히 세 개의 조약돌의 모습이 그대로 투영되어져 보인단 말이지요.

 

우주가 하나의 홀로그램 허상

이게 바로 조금 쉽게 홀로그램을 설명할 수 있는 하나의 방법인데요. 다시말해 어떤 간섭무늬의 파장은 정확하게 그 입체의 정보를 기억하고 있다는 겁니다. 그런데 심지어 파장 전체가 아니라 그 파장의 일부분에 어떤 한 부분의 조각만 가지고도 그 전체의 정보를 알 수 있다는 얘기가 됩니다. 이것이 홀로그램을 이해할 수 있는 조금 쉬운 방법이라 할 수 있겠는데요, 현대 과학에서는 이러한 홀로그램의 삼차원 입체 영상과 동일한 방식으로 이 물질 우주가, 이 세계가 구성되어 있다고 말합니다. 즉 홀로그램의 삼차원 입체영상이 실재인 것 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실재가 아닌 환영이요 허상이고 마야이듯이 이 세상 또한 마찬가지라는 것이지요. 근본불교의 무아(無我)나 금강경에서 말하는 여몽환포영(如夢幻泡影)과 일치하는 견해인 것입니다. 이 세상이 겉으로 보기에는 실재하는 것 같고, 물질 우주가 실재로 존재하는 것 같이 보이지만 사실은 허상이며 꿈과 같고 환영과 같고 물거품과 같고 그림자와 같아 비실체적인 것이라는 말입니다.

홀로그램에서 보자면 이 우주가, 나와 여러분을 포함해서 우리 모두가, 이 세상 모두가 형성된 것이 사실은 그것 자체의 실체가 있는 것이 아니라 홀로그램이라는 어떤 비실체적인 것의 투영이요 허상이라는 것입니다. 우주적인 수많은 다양한 종류의 파동, 파장 속에 다양한 정보를 저장했다가 그 정보가 입력된 파장이 마치 실제 존재하는 현실의 모습인 것처럼 투영시켜 보여주는 것일 뿐인 것입니다. 우리 몸도 쪼개고 쪼개어 들어가면 분자, 원자, 양성자, 중성자, 원자핵, 전자 해서 계속 쪼개어 들어 가 보면 결국 파동으로 이루어졌다고 하지 않습니까? 이 물질 우주의 모든 존재는 파동으로 이루어진 것이고, 그 파동은 홀로그램처럼 모든 정보를 저장하고 있는 셈입니다.

이 말의 의미를 조금 더 확장해 보면, 아까 파장을 담고 있는 얼음판 조각 하나에서 조약돌 3개의 입체상을 볼 수 있었던 것처럼, 조각과 파장 하나에서 전체를 볼 수 있듯이, 나라는 존재 속에서 이 우주 전체를 볼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나 뿐만 아니라 이 우주를 구성하고 있는 그 어떤 물질이든, 사람이든, 생명이든, 공간이든 그 모든 것은 다양한 형식의 파동으로 이루어졌기 때문에, 결국 그 모든 것들 속에서 온 우주의 모든 전체 정보를 다 볼 수 있다는 말이 되는 것입니다.

뒤에 다시 말하겠지만 모든 파장은 우주 끝까지 전해져 간다고 합니다. 우리가 일으키는 생각의 파장 하나 조차 우주 끝까지 전해집니다. 그렇기에 우주는 그 모든 파장의 정보들을 한 조각 얼음이 그랬듯이 그 파장 안에 전체의 정보를 고스란히 내포하고 있는 것입니다.

부처님께서 이 우주의 이치를 깨닫기 위해서 우주가 시작하는 곳부터 끝나는 곳까지 다 쫒아 다니면서 낱낱이 조사하고 살펴보고 해석하고 연구하고 그래서 이 우주의 모든 이치를 깨달으신 것이 아니라 그저 이 자리에 앉아서 내 마음자리 하나 깨달았더니 우주 전체를 깨닫게 되었다고 그러잖아요, 그것과 다르지 않은 겁니다. 그러기 때문에 하나 속에서 전체를 볼 수 있게 되는 일이 벌어지는 겁니다. 하나가 전체를 내포하고 있다는 홀로그램의 이치를 주위에서도 종종 목격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보통 몸이 아프다 그랬을 때, 손만 딱 보면 손바닥 안에 우리 몸의 오장육부가 다 들어 있고 연결 되어 있다 그러잖아요. 그래서 수지침을 할 때도 몸의 어느 곳이 아프든 손바닥과 손가락에 침을 놓으면 그 몸의 아픈 부분도 곧 회복이 됩니다. 어릴 적에 언치거나 소화가 잘 안된다 싶으면 어머님께서 손의 특정부분을 눌러 주심으로써 금방 치유되는 것을 경험해 보았을 것입니다. 이처럼 손바닥 안에 우리 몸 전체가 고스란히 나타나는 것입니다.

우리 신도님 중 한 분은 귀를 연구하는 분이 계신데요, 귀, 작은 귀 요거 하나에 우리 몸을 구성하는 머리, 몸통, 사지와 그 속에 들어 있는 각종 장기에 해당하는 혈자리가 분포되어 있고, 오장 육부가 다 담겨있기 때문에 귀만 보면 그 보살님은 어지간히 다 아신다는 겁니다. 귀의 모습은 어머니 자궁 내에 거꾸로 들어 있는 태아의 자세와 같아 인체의 축소판처럼 우리 몸의 모든 것이 들어 있다는 것이지요. 이 보살님께서는 그 사람의 몸 상태가 어떤지, 어디가 아프지는 않은지, 체질은 어떤지, 정력은 어떤지, 심지어 성격이나 심성은 어떤지 여부까지 알아낼 수 있다고 하시데요.

또 다른 예로 DNA라는 것도 보면 하나의 어떤 작은 DNA속에 나라는 존재 전체의 모든 정보가 다 담겨 있잖아요. 머리카락 하나를 뽑아도 이론적으로 한다면 나라는 존재를 고스란히 다시 복재 해 낼 수 있다고 하지 않습니까.

이처럼 홀로그램에서는 이 세상이 고스란히 홀로그램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나에게 보여지는 모든 물질 세계는 사실 실체적인 물질인 것이 아니라 다양한 형태의 파장, 파동이라는 것입니다. 보통 물질은 입자와 파동으로 이루어져 있다고 하잖아요, 그런데 어떤 학자들은 이 우주는 입자라는 것은 사실은 존재하지 않고 항상 파동의 형태로만 있다가 우리가 그것을 관찰했을 때 관찰하면서 입자라는 것을 원하고 요구할 때 그때서야 비로서 입자의 모습을 나타내 준다고 얘기 합니다. 그러니까 모든 존재는 항상 수많은 가능성을 가진 파동의 모습으로 존재하다가 우리가 관찰 했을 때 비로소 입자의 모습을 나타내 준다는 것입니다. 어쨌거나 이 현실세계의 모든 것은 파동으로 이루어져 있다, 그리고 이 우주의 모든 공간이나 모든 물질이나 일체 모든 것들 일체 만유는 파동의 형태로 정보를 저장하고 있다 이겁니다.

사실 조금 더 깊은 차원으로 들어가면 이 우주에 파동 아닌 것은 없습니다. 생각의 에너지도 하나의 파동이구요. 라디오 전파 같은 것도 하나의 파동이고 전파, 전자파, 전자기파, 마이크로파, 음파, 지진파, 중력파, 빛 등 모든 것이 파동 아닌 것이 없습니다. 다양한 파동 파장들이 이 우주를 형성시키는 모습인 것이지요. 이렇게 볼 때 물질도 딱딱한 물질이 아니라 파동이 끊임없이 진동하는 그것들이 다만 물질처럼 우리 눈에는 보일 뿐인 것이지요. 홀로그램의 입체상처럼 진짜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허상인 것입니다.

허상이면서 그 허상을 이루는 하나의 파동은 이 우주의 전체 정보를 담고 있습니다. 나라는 존재 속에 우주 전체의 정보를 담고 있고, 한 티끌 속에도, 심지어 우리가 무정물이라고 생각하는 모든 것들 속에도 우주의 모든 정보가 고스란히 그 속에 담겨 있다, 그것을 포함하고 있다는 겁니다. 이것이야말로 불교의 연기법에 대한 과학적인 증명이라고 볼 수도 있겠는데요, ‘모든 것은 서로 연결되어 있다’는 연기적 사실과 실체가 없다는 무아, 공의 가르침, 일즉일체다즉일이나 일미진중함시방이라고 하는 화엄경의 가르침과도 일맥 상통하고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비국소성과 홀로그램, 그리고 연기법

이러한 우리가 우주 전체와 서로 연결되어 있다 하는 연기적인 사실을 양자물리학의 비국소성, 비국지성이라는 말로도 이해해 볼 수 있습니다. 잠시 비국소성과 홀로그램에 대해 살펴보겠습니다.

먼저 온 우주의 모든 존재가 연기적으로 연결되어 있음을 제시하고 있는 몇몇의 실험과 원리를 살펴보겠습니다. 일전에 『물은 답을 알고 있다』에서 이미 살펴본 바와 같이, 일본에서의 물의 결정 연구에서 걸프전쟁이 있었던 날 모든 물의 결정이 찌그러들었던 실험이나, 『식물의 정신세계』에서 식물을 연구하는 학자가 멀리 떨어진 다른 도시에서 교통사고가 날 뻔하던 바로 그 순간에 연구실에 있던 식물의 검류계 단추가 파르르 떨었던 실험을 되살려 보시기 바랍니다. 이러한 실험에서 살펴보면 공간적으로 멀리 떨어져 있는데도 불구하고 물 한 방울 조차 지구 반대편에서 있었던 사실을 분명히 알고 있었으며, 식물 또한 자신에게 물을 주고 키워주던 주인이 교통사고가 나던 바로 그 순간의 일을 분명히 알고 있었다는 사실이 물리적인 공간을 뛰어넘어 증명되고 있음이 밝혀졌습니다.

또 하나의 실험을 살펴보지요. 물리학자 라즐로는 거짓말탐지 전문가인 백스터와 함께 한 실험에서 진주만 전쟁 당시 해군 포병으로 참가했던 피실험자들 입에서 백혈구 세포를 채취하여 몇 십, 혹은 몇 백 km 떨어진 지점으로 옮겨 배양체에 거짓말 탐지기를 부착해 실험한 결과, 피실험자들에게 진주만 기습 TV 프로를 보여주자 마자 마치 피실험자에게 부착된 것처럼 세포들이 격렬하게 반응을 한 사실을 알아냈습니다. 이 실험 또한 우리 몸을 구성하고 있는 세포와 입자들 하나 하나는 공간적인 이격에도 불구하고 서로 연결되어 있음을 증명해 주는 수많은 실험들 가운데 하나에 불과합니다.

이처럼 수많은 실험에서 이러한 연기적인 연결성은 입증되었으며, 수많은 물리학자, 과학자들이 다양한 방법으로 이러한 연결성을 밝혀내었습니다. 이처럼 공간적으로 멀리 떨어져 있음에도 불구하고 서로 영향을 주고 받으며 연결시키는 상호작용의 능력 혹은 특성을 양자물리학에서는 ‘비국소성(non-locality)’, ‘비국지성’ 혹은 초공간성 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이러한 비국소성은 공간적으로 하나로 연결되어 있다는 차원을 넘어서서 시간적으로도 하나의 장으로 연결되어 있다고 봅니다. 이것이야말로 불교에서 말하는 상의상관성이라는 연기법의 세계, 일체 모든 것이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과학을 통해 증명해 보여주는 아주 작은 시작이 될 것입니다.

그리고 이야기 한 김에 조금 더 나아가 보지요. 이처럼 모든 것을 연결시키는 근본적인 차원의 에너지 장을 영점장(zoro-point energy) 혹은 정보장(field of information)이라고 말합니다. 영점장이란 양자물리학의 주요개념으로 허공이 텅 비어 있어서 아무것도 없는 것이 아니라 이러한 비국소성을 가능하게 하는 온갖 정보와 능력, 특성을 다 갖추고 있으며 우주의 모든 것을 연결시키는 장일 뿐 아니라 시간 공간을 초월하는 일체 모든 정보를 고스란히 담고 있는 장이기도 합니다. 이 영점장, 정보장을 불교식대로 표현하자면 연기법이라는 상의상관성, 업보, 인과응보가 펼쳐지는 장인 법계(法界)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법계 즉 영점장은 온 우주에 꽉 차 있으며 모든 물질, 정신, 세포, 원자, 유전자 등 일체 모든 세계와 존재계에 두루 가득 차 있는 근원적인 차원의 에너지 장이자 정보의 장인 셈입니다. 영점장으로써 일체 모든 존재는 시간적, 공간적으로 완전히 연결되어 있는 것이지요. 또한 앞서 말했듯이 이 영점장에는 공간적으로 이 우주의 모든 정보가 가득 차 있으며, 시간적으로 이 우주 역사와 인간 개개인의 모든 역사적 정보가 고스란히 다 담겨 있는 것입니다. 쉽게 말해 그 어떤 물질이든, 세포든, 허공의 공간이든, 마음이든 우리가 상상할 수 있는 모든 것의 아주 작은 일부분 조차 이 우주의 시공을 초월하는 일체 모든 정보, 업, 역사 등 그 모든 총체적인 정보를 담고 있다는 것입니다.

실제 1982년 알렌 아스펙트(Alain Aspect)가 파리에서 행한 실험에서 쌍둥이 광자가 우주 끝에서 다른 끝까지 연결되어 있음이 증명되었다고 합니다. 그러니 한 티끌 속에 시방세계를 머금고 있다는 일미진중함시방의 이치가 영점장과 비국소성의 원리를 통해 양자물리학에서 증명이 된 것이지요.

결과적으로 홀로그램 영상이라는 비실체적 현실세계가 영점장이라는 바탕 위에 나타나고 있는 것이 바로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계의 본 모습이라고 양자물리학에서는 보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모든 홀로그램 영상이라는 물질현실은 서로 서로가 따로 따로 나뉘어지는 것이 아니라 서로 깊이 연결되어 있으며 하나의 파동 속에 우주 전체의 모든 정보를 담고 있는 구조를 띄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대목을 『홀로그램 우주』라는 책에서는 다음과 같이 표현하고 있습니다. ‘홀로그램의 모든 부분들이 전체상을 담고 있는 것과 똑같이 우주의 모든 부분이 전체를 품고 있다. 이것은 우리가 접근할 방법만 안다면 왼손 엄지손톱 속에서 안드로메다 은하계를 발견할 수 있다는 뜻이다. 또 우리는 클레오파트라가 카이사르를 처음 만나는 장면도 찾아낼 수 있으리라. 왜냐하면 원리상으로는 모든 과거와 미래를 시사하는 모든 내용들이 시공간의 미세한 영역 구석구석에도 깃들여 있기 때문이다. 우리 몸의 낱낱의 세포들도 그 속에 우주를 품고 있다.’

 

업사상과 양자물리학

불교의 업사상을 보면 과거 전생에 지은 업을 이번 생에 받는다고 하는데, 이러한 사실 또한 영점장이라는 시공을 초월해 우주적인 일체 모든 정보를 담고 있는 근원적인 장으로 이해해 볼 수도 있는 것입니다. 예를들어 길을 지나가다가 갑자기 강풍이 불어 빌딩위에 메달려 있던 간판이 떨어졌고, 그 간판에 맞아 한 사람이 죽었다고 쳐 봅시다. 그것은 업입니까 아니면 우연입니까? 그 또한 업이라면 어떻게 그 사람이 지금 바로 그 순간 죽어야 할 업을 간판이 어떻게 알고 바로 그 순간에 정확히 그 사람을 맞출 수 있었을까요? 어떻게 하필 바로 그 순간에 강풍이 불어 간판을 휘청이게 했으며, 또 어떻게 간판을 지탱하고 있던 쇠고리가 바로 그 순간 끊어질 수 있었겠습니까? 이 모두가 철저한 인과응보를 완전히 계산하고 있는 영점장의 일이요, 법계의 계획이었을까요? 그렇습니다.

영점장, 정보장의 개념에 의하면 사람 뿐 아니라, 모든 물질 세계의 모든 원자 하나 하나, 그리고 이 우주의 모든 존재, 비존재의 일체 우주가 고스란히 영점장으로 가득합니다. 그리고 그 홀로그램의 영점장, 정보장에는 시공을 초월하는 우주의 정보가 하나도 빠뜨림 없이 다 담겨 있습니다. 바로 그 안에는 인간 개개인의 과거 전생, 그 전생을 넘어 시간적인 모든 정보와 업과 행위들의 정보 즉 업장이 낱낱이 담겨져 있다고 볼 수 있는 것입니다. 간판도, 바람 한 점도, 간판을 지탱하는 쇠고리도 물질적, 정신적 일체 모든 존재는, 이 우주의 모든 시공을 초월하는 정보와 일체 모든 존재의 업과 행위와 개개인의 업장까지를 모두 다 담고 있다고 볼 수 있는 것입니다. 바로 그 순간, 그 사람이 목숨을 다해야 하는 그 업장에 의해 우주 법계는, 즉 영점장에서는 바로 그 순간 강풍이 몰아치게 했고, 그 간판 또한 바로 그 순간 바로 그 자리로 떨어질 수밖에 없었던 우주적 영점장의 정보들의 정확한 운행 법칙에 따라 행동한 것입니다. 쉽게 말해 바로 그 순간 불어 온 강풍과 간판을 지탱하던 쇠고리와 간판, 이 모든 것이 그 안에 시공을 초월하는 우주적 정보인 파장의 형태로 담겨 있다가 바로 그 순간 법계의 인과응보적인 계획에 의해 모든 정보가 정확히 움직여 준 것입니다. 사람 개개인 뿐 아니라, 동식물과 심지어 돌과 건물 등의 물질적인 모든 것들 조차 전부 영점장이라는 시공을 초월하는 정보의 장을 공유하고 있습니다.

이상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지금 나라는 존재 안에는 이 우주 전체에 어떤 일이 일어나는 지에 대한 일체 모든 정보가 모두 담겨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시간적 공간적인 일체 모든 정보들을 이 자리에 내가 가지고 있는데 이것을 분명히 보는 분을 우리가 부처님이다 하는 것입니다. 또한 그러한 모든 정보를 완전히 자유자재로 꺼내어 쓸 수 있고, 꺼내 볼 수 있는 그 상태를 깨달음이다라고 이야기를 할 수가 있을 것입니다.

그러면 한 발 더 나아가기 위해 파장에 대해 조금 더 살펴보지요. 이 파장을 잘 사용하는 것으로 박쥐가 있는데요. 박쥐는 음파 탐지기 같은 기능을 몸 속에 가지고 있어서 높은 진동의 소리를 밤에 계속 발산을 한다고 합니다. 그 진동의 파장을 방출하다가 박쥐의 먹이가 되는 곤충이 그 파동에 감지가 되면 그 소리 파장이 곤충에게 전해졌다가 되돌아오는 반작용의 파장을 박쥐가 감지한다는 것입니다. 그럼으로써 ‘아, 저기에 내가 먹을 거리가 있구나’, ‘내가 먹을 만한 것이 있구나’ 라는 것을 알 수 있고 그 벌레가 얼마나 큰지, 어느 정도의 속도로 날아가고 있는지, 지금 어디쯤 날아가고 있는지 등의 정보들을 그 되돌아오는 파장을 통해서 다 알고 있는 것입니다. 심지어 그 박쥐는 파장이 전달 되었다 다시 되돌아 오는 그 파에 의해서 그 벌레나 곤충이 얼마나 맛있는 것인지 맛이 없는 곤충인지 조차 다 알고 있다고 합니다. 파장만 가지고도 파장 안에 모든 정보가 담겨 있다고 앞에서 얘기했는데요 박쥐 같은 경우는 일부분 그 파장 안에 담긴 정보를 해석하는 능력이 주어졌다고 볼 수가 있는 거지요.

아까 냄비의 얼음판이 파장속에 모든 정보를 담고 있다고 그랬고 이게 이차원인데 삼차원으로 본다면 우주의 모든 공간속에 온 우주의 시간적 공간적인 모든 존재, 모든 사람, 모든 역사, 모든 어떤 정보가 총체적으로 다 담겨 있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앞에서 제가 업보 이야기를 했지요. 지나가던 간판이 갑자기 강풍이 몰아쳐서 간판을 달고 있던 쇠고리가 떨어졌고 갑자기 거기에 맞아 죽었다 했을 때, 그 모든 것이 그 간판을 메달고 있던 그 쇠고리나 강풍이나 간판이나 이 모든 것이 정확하게 모든 물질속에는 시간적인 총체적인 모든 업의 정보가 담겨 있기 때문이라는 것을 말했습니다. 이처럼 이 우주 인류 모든 생명들이 지어왔던 업장, 업의 정보라는 총체를 우리 주위의 모든 물질세계나 생명, 공간, 바람, 꽃 한 송이나 나무 한 그루, 세포 하나와 원자, 전자 하나에 조차 그리고 저 하늘의 별 조차 모든 것을 다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이 우주 전체에 그 업이라는 것은 기록 되어 있다, 우리 안에 있는 아뢰야식에만 기록 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그 모든 업식이 이 우주 전체에 기록 되어 있다는 거지요.

그러니까 우리가 남들 몰래 혼자 저 깊은 산속에 가서 아무도 안 볼 때 죄를 지었다고 죄가 되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다면 그건 우리의 오판이요, 판단 착오인 것입니다. 사실은 주변의 일체 우주법계가 그대로 나를 지켜보고 있는 것입니다. 설사 아무리 완벽한 완전 범죄를 지었다 하더라도 그것을 지켜보는 이 시공이 있고 법계가 있는 것입니다.

 

마음이 물질세계를 창조한다

여기까지 잘 따라 왔나요? 그럼 다음 진도를 나가봅니다. 그런데 그렇다면 이 파장이 이 세상과 우주를 만들어 내는 근간이고 그 파장 속에 정보가 담겨 있다면 그러면 그 파장은 도대체 어떻게 만들어지겠는가 이것이 궁금해집니다. 그 파장이 어떻게 만들어 지는가를 알면 우주의 어떤 원리를 알 수 있는 거예요. 그러면 다시 양자물리학으로 넘어 가 봅니다.

고전물리학에서는 원자가 실제로 존재한다고 생각했던데 반해 양자물리학에서는 원자가 실제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일종의 환상임이 밝혀졌다고 했습니다. 원자보다 작은, 원자를 구성하는 기본입자인 아원자들은 고정된 물질로써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다양한 여러 가능성 즉 하나의 잠재적인 가능성으로써 존재하는 것으로 비춰졌습니다. 즉, 물리적으로 존재하는 물질은 근원적인 차원에서 정확하게 ‘어떤 것’이라고 규정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야말로 불교에서 말하는 ‘무아(無我)’, 공(空)의 원리의 일부를 과학에서 밝혀낸 것이라고 해도 좋을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날 물리학자들은 아원자를 단지 입자나 파동의 어느 한 쪽으로 분류해서는 안 된다고 보며, 그 양쪽에 속해 있는 단일범주의 어떤 것으로 분류해야 한다고 믿고 있습니다. 이와 같은 것을 양자라고 부릅니다.

그런데 일부 물리학자들에 의해서 이러한 양자들은 관찰되고 있을 때는 입자로 보이지만, 관찰되지 않을 때는 파동으로 존재한다는 사실이 밝혀졌습니다. 즉 ‘양자가 입자의 모습으로 나타나는 유일한 경우는 우리가 그것을 보고 있을 때’라는 것입니다. 앞서 말씀드린 바와 같이 이 세계를 구성하는 모든 것들은 파동으로 존재한다는 말입니다. 관찰자가 보고 있을 때는 물질이지만 보고 있지 않을 때는 에너지인 것이지요.

이것은 곧 관찰한다는 그 행위 자체가 양자에 영향을 미친다는 사실을 의미합니다. 과학자들이 어떤 특정 전자를 찾을 때마다 관찰자가 기대하던 바로 그 위치에 나타나곤 했습니다. 그리고 더 신기한 것은 관찰자가 어떤 의도와 생각을 일으키기만 해도 그 입자는 관찰자의 의도에 따라 반응했다고 합니다. 우리는 지금까지 물질적인 대상은 그 자체적인 것이라고 알고 있었는데, 이 실험에서 물질적인 객관적 대상이 사실은 그 대상을 바로 보는 사람의 주관에 따라 변하는 것이 확인된 것입니다. 이것은 곧 모든 물질, 사물을 구성하는 본질적인 요소가 그것 자체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보는 자라는 주관을 포함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쉽게 말해 사물을 보는 내가 바로 보이는 사물을 구성하는 아주 중요한 요소 가운데 하나라는 것이지요. 이것은 아주 충격적이고도 신선한 결과를 보여줍니다.

쉽게 말해 이 세상의 물질이라는 것은 우리의 의식이 만들어 낸다는 겁니다. 우리의 의지, 의식, 우리의 생각, 우리의 마음, 의업, 한 생각이 물질 세계를 만들어 내는 결정적인 요인이더라는 겁니다. 다시말해 물질은 고정된 물질일 뿐이지 내 의지로 물질을 바꿀 수 있겠는가 싶겠지만 그것이 가능하다는 말입니다. 단순한 기계 조차 우리가 그 기계를 향해 욕을 하고 화를 내며 부정적인 에너지를 보낼 때와 자비로운 에너지, 감사와 사랑의 말을 보낼 때는 전혀 그 결과의 양상이 달라진다는 것입니다. 예를들어 자동차를 타고 가는 운전자가 화를 내고 욕을 하며 부정적인 감정에 시달릴 때와 긍정적이고도 밝은 에너지로 넘칠 때 자동차가 사고 날 확률, 자동차가 고장 날 확률은 전자가 훨씬 높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자동차 엔진이 고장날지라도 집 앞에 다 도착해서 사고가 날 것이냐, 아니면 고속도로를 주행하는 중에 고장이 날 것이냐 하는 것이 우리의 마음에 따라, 의지와 마음 씀에 따라 달라진다는 과학적인 증거인 것입니다. 이처럼 내가 마음하나 일으켜서 물질 세계를 창조해 낸다는 것이 과학에서 명백하게 밝혀졌습니다.

이것은 우리가 사는 세상을 보더라도 그리 어렵지 않게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예를 들어 죽을 병에 걸렸거나, 큰 빚더미에 올라앉았거나, 큰 괴로움 속에 빠져 있는 사람이라면 그 사람이 보는 세상은 아무리 아름다운 풍경을 보고 아름다운 사람을 보더라도 그것이 아름다움으로 다가올 수 없을 것이겠지요. 그 사람에게 보여지는 세계는 전혀 아름답지 않을 것입니다. 부정적인 에너지와 비판적인 습관에 물들어 있는 사람이라면 그 사람이 보는 세상은 언제나 불평불만이 가득할 것이며, 그러한 부정적 에너지와 불평 불만과 비판의 습관은 계속해서 그 사람 앞에 나타난 물질세상에 영향을 미칠 것입니다. 처음에는 내 생각이 부정적이기 때문에 세상이 부정적으로 보였다면 비판적인 습관이 계속될수록 이제부터는 그 부정적인 마음이 세상을 어둡게 변화시키고, 이 우주의 부정적인 에너지를 끌어들임으로써 그 사람앞에 나타난 물질세계가 부정적이고 혼탁하며 온통 좌절과 고통스런 현실로 변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앞에서 이 세상 모든 것은 서로 연결되어 있음을 불교의 연기법과 영점장, 홀로그램, 비국지성이라는 이론을 통해 살펴보았습니다. 이것은 나라는 존재 안에, 심지어 나의 모든 세포 하나 하나에도 이 우주적인 시공을 초월하는 모든 정보와 가능성과 힘이 고스란히 주어져 있으며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내가 일으키는 의도적인 생각 하나 하나가 고스란히 내가 바라보는 물질세계에 영향을 미치며, 영향을 미치는 정도가 아니라 그 물질의 특성을 결정짓는 중요한 요소가 된다고 했단 말입니다. 즉 내 마음 하나로 내 밖에 있는 물질세계에 영향을 미칠 뿐 아니라, 그 세상을 창조하게 된다는 말입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 일체 모든 것은 마음이 만들어 냈다는 화엄경의 가르침을 떠올려 볼 수 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내가 일으키는 마음, 생각, 의도 하나 하나에 따라서 이 우주적으로 연결되어 있는 영점장의 모든 정보를 내가 얼마든지 가져다 쓸 수 있고, 내 것으로 만들 수 있다는 말이 됩니다. 이 우주는 영점장으로써, 연기법으로써 완전히 서로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나는 나와 연결되어 있는 이 우주의 모든 것을, 또 내 안에 영점장의 형태로 존재하는 우주의 모든 정보를 가져다 쓸 수 있는 것입니다.

다시 한 번 정리해 보면, 이 물질적인 세상은 원자로 만들어졌고, 그 원자는 고정된 실체가 없이 입자와 파동으로 바뀌며 그것은 물질이기도 하지만 에너지의 특성으로 언제든 변환될 수 있는 가능성의 장이라고 했습니다. 그 가능성의 장에서는 원자를 관찰하는 자의 주관성이 곧 그 원자와 물질을 구성하는 주요한 요소가 되는 것입니다. 물질과 에너지, 입자와 파동은 언제든 서로서로 변환될 수 있습니다. 즉 우리의 마음, 생각, 의도가 곧 현실의 물질세계화 될 수 있다는 말입니다.

예를 들면 유명한 심리학자 브루노 클로퍼의 보고에 따르면 도저히 살 가망성이 없는 림프절 말기 암이었던 라이트라는 환자에게 획기적인 신약을 시험 복용 시켰더니 라이트는 3일 만에 걸어다니더니 10일만에 퇴원을 했고 두 달 후에는 완전히 암으로부터 해방되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 신약이 사실 아무런 효능이 없다는 기사가 신문에 실리자 바로 병이 똑같이 재발이 되어 다시 입원을 했습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의사가 먼저번 것은 잘못된 약이었고, 이번에 고농축된 새로운 신약을 구입했으며 이것으로 치유가 가능하다고 확신을 심어 준 뒤 환자에게 약이 아닌 그저 증류수를 주사했습니다. 그런데 극적으로 종양 덩어리가 녹아내리고 가슴의 복수도 사라졌으며 두 달 간 아무런 증세도 보이지 않을 만큼 회복이 빨랐다고 합니다. 그런데 마찬가지로 이 약이 암 치료에 효과가 없다는 것이 의사협회로부터 발표가 되자마자 암은 다시 발병했습니다. 이것이 바로 플라시보 효과입니다.

마음에서 약을 먹었으니 나을 것이라고 굳게 믿으면 실제 약 때문이 아니라 그 자신의 믿음 때문에 낫게 된다는 것이지요. 이 플라시보 효과는 사실 우리가 알고 있는 것 보다 훨씬 큰 작용을 하며 광범위한 거의 모든 병에 적용된다고 합니다. 병으로 곧 죽을 것이라고 믿는 생각과 이제 약을 먹었으니 분명히 나을 것이라는 생각 사이에는 엄청난 간격이 존재하며, 후자 쪽으로 마음을 굳게 바꿈과 동시에 내 몸의 모든 세포 하나하나, 암 세포 하나하나가 완벽하게 치유의 작동을 시작하는 것입니다. 마음이 세포의 변환을 완벽하게 도울 수 있다는 말입니다. 그야말로 마음이 물질을 변화시키고, 마음이 우리 몸의 모든 세포를 기적적으로 변화시키는 것이지요.

물론 그 원자나 물질적인 세상 또한 영점장이라는 근원적인 바탕의 장 위에 그려진 환영과도 같은 것입니다. 원자나 전자는 단순한 하나의 물질이 아니라 영점장의 근원 바탕에 펼쳐진 하나의 총체이자 정보체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 세상을 이루는 물질세계를 내 의지에 따라서, 내 마음으로써 움직일 수 있고, 변화시킬 수 있으며, 창조할 수 있고, 때에 따라서는 영점장의 모든 정보들을 내가 끌어당겨 쓸 수 있기도 하다는 결론이 되는 것입니다.

 

마음이 세상을 창조하는 힘의 크기는?

그러면 이렇게 내 의식으로서, 내 의지로서, 내 생각으로서 파동을 만들어 낸다고 했는데 그 마음이 세상을 창조하는 힘의 크기는 얼마나 될까요? 즉 의식으로써 파동을 만들어 낸다고 했을 때 그 파동, 그 파장에 담긴 에너지가 어느 정도가 될까요? 만약 의식으로 만들어내는 파동이 가지고 있는 에너지의 힘의 크기를 측정할 수 있다면 우리 마음, 우리 의식이 가진 창조 에너지가 얼마나 큰 것인지를 간접적으로나마 측정해 볼 수 있을 것입니다.

물질을 쪼개면 쪼갤수록 우리는 에너지가 더 작아지고, 덩치가 큰 것일수록 더 큰 에너지를 가지게 될 것 같잖아요. 그런데 입자가 작으면 작을수록, 더 미세하게 쪼개면 쪼갤수록 더 엄청난 에너지를 가지고 있다고 그럽니다. 다시 말해서 물질을 쪼개서 기관, 기관을 쪼개서 세포, 세포가 분자가 되고 원자로 쪼개지고 전자와 양성자, 중성자로 쪼개지고 그리고 또 양자로 혹은 보존이니 중간자, 광자, 레톤 등 물리학에서는 쪼개고 쪼개고 쪼개서 더 이상 쪼갤 수 없는 부분까지 쪼개놓은 것을 이렇게 다양한 이름으로 부르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름을 무엇으로 붙이든 간에 쪼개고 쪼개서 단위가 작아지면 작아질수록 그 안에 든 에너지 힘의 양은 무한하게 커진다고 그럽니다.

그래서 우리가 원자력 발전소니 원자탄이니 하는 것을 생각해봐도 충분히 생각할 수 있는데, 그 원자의 힘, 원자핵이 가지고 있는 힘, 그 힘만 봐도 이것이 얼마나 어마어마 한지 우리가 알지 않습니까. 그런데 심지어 그 원자핵이 가지고 있는 원자력이나 원자탄, 이런 원자핵의 힘보다 더 작은 단계인 양자가 가진 힘을 살펴보면 그것에 비해 원자핵의 힘은 아주 미미하다 싶을 정도로 작다는 것입니다. 더 어마 어마하게 큰 힘을 그 양자는 가지고 있다는 겁니다. 그 정도로 물질은 쪼개고 쪼개면 쪼갤수록 작은 입자가 되고 작은 입자가 될수록 더욱더 어마 어마한 힘과 에너지를 가지고 있더라 이말입니다. 그러니 그것을 완전히 쪼개서 입자나 파동으로 바꾸게 된다면 그 파동이 가지고 있는 힘은 도저히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를 정도까지 어마 어마하다는 것입니다. 이 우주는 파동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이 파동이 가지고 있는 힘이 이만큼 어마 어마하다는 거지요.

이 힘을 양자물리학에서는 다음과 같이 이야기 합니다. 1cm³라는 작은 공간 안에 담겨 있는 파동의 힘이 1094erg라고 하는데요, 이것이 어느 정도냐 하면 우주에 담겨있는 전체 힘 보다 다시말해 우리에게 알려져 있는 우주 속의 모든 물질 에너지 총합보다 억만의 억만의

억만의 억만의 억만배 보다 많다 라는 것을 의미한다고 합니다. 1cm³ 안에 들어 있는 파장의 힘이 우리가 도저히 표현할 수 없을 만한 어마 어마한 힘을 가지고 있다, 그런데 그 파장이라는 것은 우리 의식에 의해서 만들어지고 움직인다 했습니다. 창조된다 했습니다.

그런데 내가 어떤 생각의 파장을 일으켰을 때, 어떤 생각을 일으켰을 때, 그것은 부정적인 파장이든 긍정적인 파장이든 내 안의 어떤 에너지이자 파장의 형태로 이 우주 끝까지 펴져나간다고 합니다. 그런데 또 하나 신기한 점은, 내가 화를 한번 버럭 냈을 때 그 부정적인 에너지의 파장이 우리가 아까 호수에서 돌을 던졌을 때 처럼 파장이 점점 넓게 퍼질 것 같잖아요. 그런데 내가 생각이라는 에너지를 탁 하나 일으켰을 때 사실은 지금 일으킴과 동시에 우주 끝까지 이미 퍼져나갔다고 말합니다. 파장이 일어남과 동시에 우주 끝에 이른다는 겁니다. 이 말은 조금 있다가 뒤쪽에서 다시 말씀 드리겠습니다.

어쨌든 이처럼 내가 생각을 일으킴과 동시에 온 우주 전체에 그 생각의 파장은 영향을 미친다는 겁니다. 내가 부정적이고 성내는 마음, 욕심, 화, 증오, 질투 이런 마음을 일으킬 때 그 파장은 1094erg의 힘으로서 이 우주에 알려진 물질 전체의 총합보다 억만의 억만의 억만의 억만의 억만의 억만배의 더 큰 힘으로 시간의 힘을 빌지 않고서도 즉각 우주 끝까지 미쳐 나간다 이 소리입니다. 우리가 쉽게 쉽게 생각하지만, 쉽게 쉽게 화도 내고, 쉽게 쉽게 싸움도 하고, 쉽게 쉽게 어떤 사람을 생각으로 죽이고 살리고를 반복하거나, 쉽게 생각으로 긍정적이거나 부정적인 세상을 마구마구 창조해 내지만, 사실 우리가 그렇게 쉽게 쓰고 있는 생각이라는 그 에너지가 얼마나 큰 에너지이고 더욱이 생각을 일으킴과 동시에 이 우주전체 끝까지 가 닿음으로써 그 에너지가 바로 내 삶을 창조해 내고 있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이 얼마나 엄청난 일들을 무의식인 생각으로 벌이고 있는 것입니까? 이 엄청난 일을 벌이는데도 불구하고 우리는 생각을 조심해서 쓰지를 못해요. 대충 대충 생각하고, 쉽게 쉽게 생각하고, 너무 안이한 마음으로 살고 있지는 않는지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래서 불교에서는 의식적으로, 깨어있는 마음으로 매 순간을 살아야 한다고 하는 것입니다. 생각을 관하고, 말을 관하고, 의지를 관찰하며, 느낌을 관찰함으로써 무의식적으로 판단하지 말고, 온전히 깨어있는 정신으로 매 순간을 살아야 한다고 하는 것입니다.

내가 "난 왜 이렇게 가난하지, 난 왜 이렇게 부족하지, 난 왜 이렇게 불쌍하지"라고 한 생각 일으킨 것이 어머 어마한 파장으로 실제 물질 세계에 가난한 삶을 창조해 내고야 말 것입니다. 어느 정도의 힘으로 가난을 창조하느냐 하면 1094erg라는 무지막지한 힘으로서 내 삶을 급격하게 창조해 내는 거란 말입니다.

이처럼 우리 마음의 능력은 무한한 것입니다. 일체유심조, 일체 모든 것은 내 마음이 만들어내는 것이지요. 그럴진데 마음 하나 바꾸어서 운명을 바꾸는 것이 왜 불가능합니까? 업을 뛰어넘는 것이 왜 불가능해요? 인간이 우주의 이치를 깨달아 붓다가 되는 것이 왜 불가능하겠습니까?

 

같은 생각의 주파수를 공명시킨다

그런데 여기에 또 하나 재미있는 공명의 법칙이라는 것을 소개 해 볼까 합니다. 이 우주는 같은 주파수의 파장은 같이 공감한다 그럽니다. 같은 주파수의 파장은 함께 공명을 한다는 것이지요. 쉽게 말해서 바이올린 두 개나 기타가 두개가 있다고 했을 때 도, 래, 미 같은 어떤 하나의 음을 탁 튕겼을 때 이것이 바이올린 두 개가 같이 조율이 되어 있다면, 이쪽 하나의 음을 튕겼을 때 동일한 음이 저 쪽에서도 같이 움직이는 현상이 벌어지는데 이것을 공명한다고 그럽니다. 다른 비유를 들어보면, 우리 벽에다가 자명종 시계를 이쪽 벽에 하나 저쪽 벽에 하나, 또 다른 벽에 하나 이런 식으로 벽면마다 시계 추가 움직이는 자명종 시계를 갖다 놓았다 말입니다. 그리고 전부 다 다르게 추를 움직이게 시켰어요. 어떤 건 왼쪽으로 가고 하나는 오른쪽으로 가고 왔다 갔다 왔다 갔다 다르게 움직였단 말입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고 나서 들어와서 그것을 살펴보면 어떻게 되어 있을까요? 그 자명종의 추는 모두가 다 정확히 같은 방향, 같은 움직임을 띄게 된다고 합니다. 물론 같은 자명종이고 시계추의 무게라거나 길이 등이 동일한 같은 조건이라면 말이지요. 처음에는 다르게 시작했더라도 그 작은 떨림의 파장이 서로에게 전달이 되어 공명하게 된 것입니다.

인류 역사 속에서도 그 공명이라는 것은 아주 광범위하게 펼쳐져 있다 그럽니다. 예를 들어 어떤 활자가 개발된 시점을 보면 거의 비슷한 시기에 전혀 연결 고리가 없는데도 불구하고 비슷한 시기에 활자가 계발되었다거나, 비슷한 발명품이 서로 다른 문화적 배경에서 비슷한 시기에 만들어졌거나, 또 다른 예로 세계사 차축의 시대라고 하는 부처님 당시의 시기에 붓다와 노자, 공자, 아리스토텔레스, 플라톤 등이 함께 정신사의 축에서 어깨를 나란히 하고 있는 것 등도 그와 비슷한 역사 속의 공명현상이라고 말해 봄직하다. 그 또한 일종의 정신적인 공명현상이라고 말할 수 있으리라는 것이지요.

우리가 집에서 혼자 기도할 때 기도의 힘을 받는 에너지와 절에서 많은 사람이 모여서 함께 동일한 기도를 함으로써 동일한 주파수의 파장을 일으켰을 때 그 기도의 힘이라는 것은 전혀 다를 수밖에 없지 않습니까? 내 힘이 별로 없더라도 기도 열심히 하는 도량에 가서 힘 있는 도반들, 법력이 선 스승님을 모시고 기도를 하고 수행을 한다 그랬을 때, 그 에너지, 그 주파수와 공명을 하게 된다는 겁니다. 깨달음을 얻은 자, 법이 선 자가 가까이 함께 있다면, 혹은 같은 시기를 살고 있다면 그 정신적인 공명의 힘을 우리도 받을 수가 있는 것입니다. 우리나라에 부처님 같은 큰 스승이 몇 분 계신다면 그것만으로도 이 지구라는 한국이라는 전체 땅 덩어리의 어떤 에너지의 힘이 전혀 다른 전환을 맞이하게 된다고 합니다. 그래서 깨달은 자가 하나 있는 그곳은 아주 수승한 파장, 깨달음의 파장과 서로 공명을 하기 쉽다 그래요. 시계추가 다르게 움직였지만 하나로 움직이듯이 하나로 결속해서 몰아가듯이 그 밝게 깨어있는 자의 파장이 있었을 때 그 주변은 그 파장과 일치를 이루게 된다, 쉽게 말해서, 깨닫기가 쉽다고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성격 나쁘고 아주 욕도 잘하고 화를 내기 좋아하고 이런 사람과 함께 지내다 보면 나도 모르게 닮아 가잖아요. 파장이 같아지는 겁니다. 파장의 주파수가 같아지는 거예요. 나는 그걸 배우고 싶지 않아도 욕을 그냥 맛깔나게 입에 딱 붙게 하는 사람 옆에 가서 며칠만 살게 되면 나도 모르게 그런 똑같은 욕이 툭툭 튀어 나오거든요. 의지하지 않았지만 그 파장이 나한테 공명이 되는 겁니다. 그래서 내 파장으로 바뀌어 버린 거예요. 그래서 부처님께서는 수행하는데 있어서는 나와 동등하거나 나보다 나은 도반과 함께 가라 이런 말씀을 하신 겁니다.

왜 이런 말을 하는고 하니, 내가 어떤 생각을 하나 일으키지 않습니까? 내가 어떤 한 가지 생각을 일으킬 때 그 생각은 우주 전체와 공명한다, 그 생각 하나는 우주 끝까지 일시에 전파 되어서 우주 전체에서 그 생각과 비슷한 주파수를 가진 에너지와 공명을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나와 비슷한 생각, 비슷한 주파수, 비슷한 파장을 가진 에너지를 끌어당기게 된다는 것입니다. 비슷한 것들은 서로 모인다고 유유상종이라 그러잖아요. 비슷한 것들 끼리 모이게 된다, 공명을 한다, 내가 기대를 하고 어떤 바람을 가지고 있게 되었을 때, 그 강력한 에너지를 보내게 되면 내 안에 있는 이 주파수 이 에너지와 동일한 주파수대의 사람, 동일한 주파수대의 물질, 상황, 조건들이 나와 함께 공명을 하고 그것이 나에게 힘을 보태주게 된다는 이야기입니다. 내가 기도를 하게 되면 내 주변에 있는, 내 지구상에 있는 기도하는 자의 주파수가 나에게 힘을 보태준다는 이야기입니다. 내가 짜증을 내고 화를 내고 욕을 하게 되고 범죄를 저지르게 되면 범죄를 저지를 자들의 주파수가 나와 일치를 이루게 된다는 이야기예요.

우리가 때때로 수행을 하다보면 어떤 경계를 경험하게 되거든요. 혹은 어떤 경우에는 어떤 존재, 어떤 정신적인 존재를 만나게 되기도 하고 다양한 어떤 경계를 만나는데, 그건 어떤 파장이 일순간 맞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예를들어 사람이 돌아가신 영가를 볼 수 있습니까? 못 보는게 당연하지요. 사람의 주파수와 영가의 주파수는 다르니까요. 그런데 그 주파수대가 일순간 어떤 이유로 인해 달라지게 되면 또 다른 어떤 존재나 영가와도 마주하게 되는 경우도 있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 주파수에 차이가 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수행 정진을 통해서 우리의 기운 주파수가 수승해지면 저 천상 세계의 아주 맑은 정신들과 어떤 공명을 가져올 수가 있게 되기도 합니다.

그만큼 내가 생각하는 그 의업, 어떤 하나의 의업을 일으키는 것, 그것은 이 우주 전체와 공명을 하게 되기 때문에, 그 힘을 주고 받기 때문에 에너지의 엄청난 힘으로서 나에게 영향을 미치는 겁니다. 그런데 어떻게 쉽게 쉽게 화를 내고 욕을 하고 짜증을 내고 욕심을 내고 이런 일들을 함부로 할 수가 있겠어요?

앞에서 입안의 혀 세포를 떼어 몇백 킬로미터 떨어진 곳에서 거짓말탐지기를 연결시켜 놓고 사람과 세포를 연구해 보았던 얘기를 했잖아요. 멀게는 약 500km까지 떨어진 곳에서도 배양된 세포와 사람의 손에 연결된 거짓말 탐지기가 정확히 같은 반응을 그것도 정확히 같은 시간에 보인다는 겁니다. 예를 들어 이것이 빛의 속도로 간다고 하더라도 사람이 먼저 반응을 보이고 연이어 먼 곳의 세포가 반응을 보여야 하잖아요. 그 곳에까지 가는 시간이 걸리니까 말이지요. 그런데 그게 아니더라는 겁니다. 그 둘의 반응 사이의 간격이 0초더라는 겁니다. 동일한 시간대에 같은 일이 벌어지더라는 이야기입니다. 그러니까 이것은 시간을 초월한다는 이야기예요. 우리가 생각 하나 일으킨 것이 저 우주 끝까지 가는데 엄청난 시간이 필요한게 아니라는 이야기입니다.

우리가 화엄경을 축소시켜 놓은 법성게를 보면 "무량원겁즉일념 일념즉시무량겁"이라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무량한 겁 이라는 어마 어마한 시간대가 바로 일념 가운에 있다, 한 생각 가운데 있다고 하거든요. 그것이 바로 이말입니다. 내가 일으킨 어떤 한 생각 하나의 파장이 우주 끝까지 전달 되는 데는 시간을 필요로 하지 않습니다. 곧바로 전달 된다 이 이야기입니다. 우리가 어떤 마음을 일으키게 되었을 때 그것이 영항을 미치는데는 시간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는 겁니다. 직바로 우주 전체와 연결되어서 영향을 미치게 된다는 겁니다.

예를들어 내가 몸이 안 좋아서 안 좋은 병에 걸렸습니다. 그래서 마음속으로 ‘아, 이것이 다 치유되었다’ 라고 스스로 그냥 믿고 ‘그래, 난 치유되었다’ ‘부처님께서 다 치유해 주셨다’ 라고 굳게 믿는 어떤 파장을 일으켰다 그러면 그 에너지가 모든 내 주변의 물질 세계 전체와 연결이 되어 있기 때문에 동시간대의 내 몸에 있는 암세포, 종양등 모든 세포, 내 몸에 있는 모든 물의 결정, 세포 하나 하나와 직접적으로 순간 연결이 되고 그뿐 아니라 내 바깥에 있는 모든 사람들에게까지 전달이 된다는 겁니다. 갑자기 그렇게 마음을 바꾸는 순간, ‘나는 죽으니까 내 인생이 끝이구나’ 라고 좌절하는 마음에서 한 생각 돌이켜서 밝은 마음을 일으킴과 동시에 갑자기 그날따라 외출했다 들어오는 남편이 평소와는 다르게 따뜻하게 대해 주거나, 공부도 안 하고 말도 안 듣던 자식이 나에게 스트레스를 덜 주게 되고, 병원에 갔더니 의사 선생님도 평소보다 더 관심을 보이며 잘 해주고, 우연히 TV를 틀었는데 불치병에서 극적으로 살아난 사람들 이야기가 나오거나, 마음을 비우고 이웃 사람들과 대화를 나누는 중에 뛰어난 대체의학자나 신의(神醫)라고 불릴 법한 사람과 인연이 되거나 하는 방식으로 우주법계가 나를 도와주게 된단 말입니다. 죽을 것 같다는 부정적인 생각에서 살 수 있으리라는 긍정적인 생각으로 바뀜에 따라 긍정적인 파동, 긍정적인 주파수와 공명을 하게 되고, 그 긍정적인 치유의 주파수와 공명된 다양한 치유의 방법들이 다양한 방식으로 나와 연결될 수도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의 의식, 마음, 생각, 의업이 가진 힘입니다.

그래서 내 생각이 우주를 만들어 낸다 하는 것은 무엇인가 하면, 생각이라는 것은 의업이구요 이 의업이 나아가서 구업으로 말로 바뀌고 구업이 나아가서 몸으로 행동으로 바뀌고 신업으로 바뀝니다. 이 생각 하나가 말과 행동을 결정하게 된다 이 말입니다. 그래서 생각과 말과 행동, 우리들의 생각과 말과 행동이 내 세상을 창조하는 겁니다. 나아가서 이 우주에 있는 모든 사람들의 말과 생각과 행동이 이 우주를 창조 해 내는 겁니다. 그 창조의 힘이라는 것이 너무나도 어마 어마하다 이 소리입니다.

 

마음 올바로 쓰는 법

이처럼 우리가 이 세상이 창조되는 이치를 알았습니다. 이 세상이 창조되는 이치는 바로 내가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하는 "신구의" 삼업으로서 창조를 하는데 이 신구의 삼업이 생각도 파장이요 말도 파장이고 몸의 행위도 파장이다, 파장으로서 이 우주 끝까지 퍼져나간다, 더욱이 파장이 퍼져 나가는데는 시간이 필요하지 않을 정도로 엄청난 속도로 퍼져 나갈 뿐더러 그 퍼져 나가는 그 힘, 그 힘이 1094erg로써 기존 알려진 모든 힘의 총합보다 억만의 억만의 억만의 억만의 억만배 보다도 더 큰 어마 어마한 힘으로써 시공을 초월해서 퍼져 나간다는 말입니다. 또한 우리가 접하고 있는 모든 파장에 담긴 정보는 우주의 모든 정보를 고스란히 담고 있으며, 우리의 업, 우리의 병, 치유방법에 이르기까지 그 모든 정보를 다 담고 있다고 하는 소식입니다. 이 얼마나 엄청난 세상입니까! 이 얼마나 엄청난 소식입니까!

어마 어마한 세상 속에서, 우리가 감히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이 엄청난 삶을 우리가 살고 있고 그러한 큰 힘으로서 마음을 쓰고 있는 겁니다. 우리가 생각했던 내가, ‘나’라는 작은 나가 아닙니다. 내가 알고 있던 내가, 내가 아는 나의 전부가 아닙니다. 나는 능력 없고, 나는 돈도 없고, 나는 재능도 없다고 생각했던, 나는 무능력 하다고 생각했던 나의 본질은 사실은 그렇지 않은 것입니다. 나의 생각이 ‘나는 능력없어’, ‘나는 공부도 못하고 운동신경도 없고 가난하다’고 내 스스로 한정짓는 마음, 그 생각이 나의 능력을 한정짓게 하는 겁니다. 1094erg라는 그 어마 어마한 힘으로 말이지요.

그 내 생각이라는 파장이 주는 어마 어마한 힘으로 한편으로는 부자가 되고 싶으나 한편으로는 ‘나는 가난해’ 라는 그 엄청난 에너지를 발산시키는 겁니다. 그 엄청난 에너지로 자기의 힘을 꽃 피우는데 쓰지 않고 자기의 힘을 스스로 한정짓는데 쓰고 있다 이 말입니다. 내 스스로 내 능력을 한정짓고 있으니까 그 엄청난 에너지를 가지고 나의 능력을 제한하는데만 쓰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식으로 우리의 잠재된 무한한 에너지를 허비하고 있습니다. 활짝 꽃 피우는데 쓰지 못하고.

‘부자가 되길 부처님께 비나이다’ 하고 아무리 빌어 봐야 그 비는 행위는 거지 마음을 연습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부자가 되고자 비는 마음은 사실 ‘나는 지금 가난합니다’ 라는 마음에 힘을 주는, 에너지를 주는 일이 됩니다. 지금 가난하니까 앞으로 올 미래에는 부자가 되게 해 달라는 말 아니겠어요. 그러니 비는 마음은 사실 구걸하는 마음이고, 그렇기에 비는 마음은 비는 방향과는 달리 거꾸로 결과를 맺게 하기 쉽습니다. 그래서 비는 기도를 하지 말고, 감사의 기도를 하라는 것입니다. 감사의 기도는 ‘지금 이대로 감사합니다’ 하는 거니까 더 이상 바랄게 없어요, 그냥 지금 이대로 충분하다, 감사하다 하는 겁니다. 그러니 어떤 파장을 연습하는거냐 하면 부유함의 파장, 부자의 파장, 풍요로움의 파장을 연습하는 것입니다. ‘부자되게 해 주세요’는 구걸의 파장, 가난의 파장을 연습하는거고, 오히려 ‘나는 지금 부족하고 결핍되어 있습니다’하는 파장을 엄청난 에너지 주파수로 이 우주를 향해 쏘고 있는 것입니다. 반대로 ‘지금 이 연봉에 대해 감사합니다’하는 것은 부유함과 풍요로움과 부자의 파장을 연습하는 것이겠지요.

지금까지 우리는 얼마나 허망한 일들을 벌여오고 있는지 가만히 자신을 돌아보시기 바랍니다. 어떻게 마음 써야 하는지, 마음 쓰는 거 하나 제대로 알지 못하고 이렇게 세상을 살아오지 않았습니까. 그래서 중생들이 어리석다고 하는 겁니다. 무명중생이라고 하는거예요. 똑똑하면 뭐 합니까. 지식만 늘였지 지혜는 바닥을 치는 헛똑똑이란 말입니다.

우리가 얼마나 어리석은지 또 다른 예를 들어 드릴까요? 병이 난 사람이 어디 한 가지 몸이 안 좋단 말입니다. 심장이 안 좋아요. 그런 사람이 마음 속으로 ‘아, 이 심장을 어떡하지’ ‘심장이 더 나빠지면 어떡하지’ 하고 항상 고민한단 말입니다. 항상 근심하고 걱정하고 뭘 먹어도 이게 심장에 좋은가 안 좋은가 따지고, 계속 심장이 안 좋다라는 것에 마음이 붙잡혀 있게 된단 말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겉으로는 ‘빨리 나아야 하는데’ ‘빨리 나아야 하는데’ 하고 바라겠지만 사실은 이 마음이 무엇을 연습시키냐 하면 ‘심장이 안 좋다’는 에너지, ‘심장이 나쁘다’는 주파수의 파장과 자꾸만 공명을 시키는 것입니다. 그러니 심장은 더 안 좋아질 수밖에 없습니다. 차라리 심장에 붙박혀 있는 그 노이로제 같은 마음에서 놓여나고, 그 마음을 비워버리면 되는데 오히려 더 나쁘게 마음을 연습한단 말입니다. 비우지 못하겠고 놓아버리지 못하겠다면 오히려 반대로 이 생각, 이 의업, 이 의지라는 것을 역이용하면 됩니다. 심장을 향해 ‘감사합니다 사랑합니다’라고 외치는 것입니다. 혹은 ‘심장이 건강해지게 되어 감사합니다’라고 해도 좋습니다. 감사와 사랑이야말로 이 우주의 모든 밝고 건강하며 청정한 모든 파장과 공명하는 최고의 진언이기 때문입니다.

뚱뚱한 사람이 ‘다이어트 해야 되는데’ 하는 그 한 생각에 집착하고 ‘먹지 말아야 하는데’하는 그 한 생각에 붙잡히게 되면 그 생각 때문에 안 먹어지게 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생각에 집착이 되어 음식에 대한 집착이 더 커지고 더 꾸역꾸역 먹게 되는 결과를 초래하고 맙니다. 이런식으로 우리는 엄청난 우리 안에 잠재되어 있는 힘을 가지고 거꾸로 쓰고 있는 겁니다.

 

성공과 부자, 그 너머의 이야기

그러면 이제 가장 중요한 막바지 결론에 다달았습니다. 이렇게 나의 생각, 말, 행동이라는 신구의 삼업으로서 이 우주를 창조해 내고 내 세상을 창조해 낸다고 했습니다. 이를테면 요즘에 씨크릿 이란 책이 아주 유명하고요, 부자가 되는 길, 성공하는 방법에 대해 이야기 하고 있는 책들이 우우죽순으로 쏟아져 나오고 있는데 그 많은 것 들이 이야기하고 있는게 지금 제가 말씀드린 여기까지 입니다.

생각의 힘으로 마음의 힘으로 부자가 되라, 마음에 부자를 그리면 부자가 될 수 있다, 마음의 힘은 엄청나기 때문에 마음의 힘으로 성공하려면 성공 할 수 있다, 그것을 마음에 그리면 그것이 현실로 이루어진다 하고 말하고 있지 않습니까? 여기까지도 물론 틀린 말은 아닙니다. 그러나 그 마음의 힘을 부자가 되는 쪽 성공하는 쪽으로 자꾸 돌리려고 애쓰는 것이 요즘 나온 수많은 책들의 한결같은 결론입니다. 그런데 거기에서 끝나느냐, 그렇지 않습니다.

예를들어 우리가 그 마음 에너지를 써서 부자가 됐어요. 성공했어요. 큰 인기를 누리는 연예인이 됐습니다. 그러면 거기서 우리 행복도 거기서 끝날까요? 부자가 된다는 것 자체가 곧 나의 행복을 의미하겠습니까? 좋은 집을 사고 좋은 차를 샀다, 그것이 곧 나에게 완전한 만족을 가져다 주고, 완전한 행복을 가져다 주고, 아주 자유로운 깨달음과 지혜를 가져다 줄까요? 그렇지가 않다는 겁니다. 그렇지 않은 것을 우리는 얼마나 많이 목격해 왔습니까? 그것이 다가 아닙니다. 부자가 다가 아니고, 성공이 전부가 아닙니다.

오히려 더 많이 소유하면 더 많이 소유할수록 우리 마음은 더 혼탁해 집니다. 혼탁해 지기 쉽습니다. 많은 것을 소유할 수록 우리는 더 삿된 마음으로 치닫기 쉽습니다. 욕심은 많으면 많을수록 더욱더 괴물과도 같은 엄청난 힘으로 우리를 장악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돈 조금 가지고 있는 사람은 그 집에 별 문제가 없잖아요. 서로 단결해서 어떻게 하면 밥이라도 한 끼 더 먹고 내 자식 굶기지 않으려고, 내 동생 더 먹이려고 애쓴다 이말입니다. 가족 전체가 아내는 남편 걱정 하고 남편은 아내 걱정 하면서 산다 말이지요.

전에 이런 말씀 드렸잖습니까. 아프리카 어디에 네 살 정도 된 아기가 쓰러져 죽어가고 있더란 말입니다. 사진기사가 가서 사진을 찍고는 미안했는지 초코파이 같은 먹을 것을 하나 던져 주었더니 그걸 들고는 그 힘없는 몸으로 걸어가서는 허름한 집안에 있는 다 죽어 있는 한 살 정도 아기를, 죽어 있는 냄새가 진동하는 아기를 끌어 안고서는 그 먹을 것을 자기가 먹지 않고 아기에게 물려주고 자기 동생이 이미 죽은 동생이지만 동생이 먹지 않으니까 턱을 잡아 가지고는 막 억지로 먹는 시늉을 해 주더라고 했습니다. 그 사진 한 장을 찍고 그 사진작가는 무슨 상을 탔다고 해요. 자기가 죽을 지경이 되면서도 네 살짜리 아기가 한 살된 동생을 위해서 자기는 죽더라고 그것을 나눠 주거든요. 없을 때 이런 어떤 본질적인 사랑, 자비, 인간애 같은 것이 나타납니다.

그런데 많은 것을 소유하면 소유할수록 더 무시무시한 일이 벌어지지요. 평범한 행복한 집안에서 로또가 당첨됨과 동시에 집안이 파탄나고, 남편이 아내와 싸우고 이혼하고, 부모가 자살하고 이런 일들이 벌어진단 말입니다. 이뿐인가요? 자식이 부모를 죽이고, 형제들끼리 서로를 죽이는 세상이 어디 상상 속에서라도 가능한 이야기겠어요? 평범한 사람들에게 이런 일은 상상 밖의 이야기이고, 도저히 생각으로조차 해 볼 수 없는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어때요? 높은 권력이나 많은 경제력 앞에서는 그런 일들이 자주 일어납니다. 아니 그런 권력 암투, 왕권을 둘러싼 죽고 죽이는 일들 같은 것들이 아주 자연스러운 일처럼 드라마 같은데서도 묘사되고 있잖아요. 권력이 없는 곳에서는 권력의 암투가 일어나지 않지요. 권력이 있는 곳에서는 부모형제가 서로 죽고 죽이는 일이 벌어집니다. 네팔에 갔을 때 보니까 왕족들이 모두 모인 자리에서 한 사람이 형제 자매, 부모, 친척들을 다 총으로 쏴 죽이고 자신이 왕이 되었습니다. 기가 막힌 일이지요. 이게 다 많이 가진 자들 속에서나 있을 법한 일들입니다.

그러면 이렇게 부자나 성공이나 권력 같은 것을 많이 소유하는, 그런 소유만이 전부가 아니라는게 분명해 졌습니다. 아니 큰 소유는 오히려 정신을 타락시키고, 도저히 인간을 인간이 아니게 만들기까지 합니다.

 

근원적인 실천은 무엇인가

그렇다면 어떤 것이 가장 올바른 것일까요? 어떤 것이 분명한 것일까요? 어떻게 사는 것이야말로 가장 지혜롭게 사는 것일까요? 과연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 것일까요?

우리가 생각하는 성공이라는 것은 사실은 그 성공 이면에 실패를 함께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가 전적으로 옳다라고 생각하는 것은 사실은 틀린 가능성을 내포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불교에서는 불법이 진리이지만, 불법이라는 진리에 집착한다면 그것은 더 이상 진리가 아니다, 아무리 옳은 것이라도 거기에 집착하는 순간 집착해서 그것만이 진리라고 고집하는 순간 그것은 진리의 기능을 상실하고 만다고 이야기합니다. 전적으로 옳다라는 것은 전적으로 틀릴 수도 있다는 얘기예요.

우리가 너무 미친 듯이 사랑에 빠지게 되면 사실은 사랑이라고 하지만 그 이면에 증오를 항상 내포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사람이 나를 떠나서 다른 남자에게 갔을 때 더 큰 괴로움과 좌절이 있는 것처럼 우리가 생각하는 행복이라는 것, 성공이라는 것, 사랑이라는 것, 옳다는 것, 이 모든 것은 극단적인 이면을 항상 함께 내포하고 있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그것은 근원이 아니라고 하는 거예요. 우리가 생각을 만들어 내는 것, 의업, 생각이 만들어 낸 모든 작용들은 옳고 그르거나 맞고 틀리거나 성공과 실패, 좋다 나쁘다 하는 그 이면에 극단적인 모습을 함께 가지고 있습니다. 그것은 근원적이지 못합니다. 그런데 바로 그 근원적이지 못한 양 극단의 분별심, 차별심을 가지고 우리가 이렇게 이 세상을 창조해 내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우리가 창조해 낸 현실에서는 늘 긍정과 부정이 함께 공존합니다. 즐거운 일 끝에는 괴로운 일이 기다리고 있고, 풍요로움의 바탕에는 가난의 그늘이 존재합니다. 과도한 부유함을 누리는 사람들이 있는 대신에 과도한 가난 속에서 기아와 병으로 죽어가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크게 성공하는 한 사람을 위해 더 많은 사람들은 실패를 맛보아야 합니다. 문명의 이기와 과학기술의 발전이 주는 편리함 이면에는 기상이변이나 환경오염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이렇게 과학 기술은 발전하고 아파트가 만들어지고 에어콘이 만들어지고 이 편리한 것들이 만들어 지는 것이 좋은거 아닙니까’ 라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그것은 다 근원적이지 못한 것입니다. 이 엄청난 과학 기술의 발전과 도시화, 산업화 이런 것들이 이 지구를 멸망으로 이끌고 있지 않습니까? 인위적인 어떤 에너지, 힘 그것이 성공적이라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사실 그것은 성공이 아니라 실패의 가능성을 함께 포함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지금 문명의 이 길을 누리고 있지만 그 이면에 지구가 언제 멸망할지 모르는 언제 지구가 기상이변으로서 나를 몰아칠지 모르는 두려움도 함께 껴안게 되었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하는 것이 근원으로 가는 것이냐, 본질적인 삶, 근원적인 삶과 일치하는 삶을 사는 것이냐, 그건 바로 맞다 틀리다, 옳다 그르다 하는 모든 분별에서 벗어나는 겁니다. 두 가지 양 극단의 선택 가운데 어느 한 쪽을 선택하는 그 습관적인 방식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그것을 2,500여 년 전 붓다는 중도(中道)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 중도의 삶에서는 어느 것도 더 중요하거나, 덜 중요한 것이 없고, 네 편과 내 편으로의 나뉨도 없으며, 절대적으로 옳고 그름도 없습니다. 이 우주의 모든 존재는 서로 연결되어 있으며, 서로가 서로를 살려주고 도와주며 사랑해주는 관계로써 상의상관적으로 존재합니다. 연기와 자비의 정신이 고스란히 인간 존재의 삶의 양식이 되는 것입니다. 인간과 자연이 서로 연결되어 있고, 자연이 없으면 인간도 없고, 꿀벌이 없으면 인간도 없고, 네가 없으면 나도 없다는 그런 상의상관적인 불이(不二)의 지혜만이 우리 모두를 한 가족으로, 한 생명으로 만들어줌으로써 동체대비의 사랑, 둘이 아닌 자비의 실천으로 생활방식을 이끌어 갑니다.

그러면 우리 인간이 어떻게 해야 그런 삶에 한 발자국 다가설 수 있을까요? 어떻게 해야 분별심과 차별심을 놓아버릴 수 있을까요? 그게 바로 한 발짝 떨어져서 내가 나라는 존재가 일으켜 내는 생각들, 움직임들, 행동들, 느낌들, 이 모든 것을 관찰해야 하는 이유인 것입니다. 한 발자국 떨어져서 객관이 되어 나를 지켜보십시오. 지켜봄은 그 무엇도 둘로 나누지 않습니다. 지켜봄은 어느 한 쪽을 선택하지도 않고, 어느 한 쪽을 고집하지도 않습니다.

불교에서 말하는 관(觀)수행, 지관(止觀), 비우고 관찰하는 그 지관의 수행, 알아차림의 수행, 깨어있음의 수행, 그 수행이야말로 나라는 이기적인 마음, 아상이 나를 이끌고 가는 것이 아니라 내 근원에 있는 말하자면 불성, 자성불, 주인공, 본래면목, 참나의 자리인 우주의 근원적인 힘이 나를 이끌고 가게 됩니다. 그러기 때문에, 항상 근원으로 우리를 이끌고 갑니다. 좋고 나쁜 쪽 가운데 좋은 쪽을 선택해서 이끌고 가는 것이 아니라 좋고 나쁨을 넘어서는 무분별의 근원적인 치유의 길로 우리를 안내합니다.

우리들의 생각으로는 판단할 수 없는, 보다 근원적인 것으로 나를 이끌고 갑니다. 물론 그것이 우리 생각으로 판단 했을 때는 언뜻 좋아 보이지 않을 수도 있어요. 그러나 본질적으로 근원적으로 갔을 때는 항상 완전한 근원적인 곳으로 우리를 이끌고 간다는 겁니다. 그래서 그 이면에 행복 이면에 불행, 사랑 이면에 증오 이런 것을 내포하지 않는, 다시말해서 어떤 상황이 오더라도, 어떤 인연이 오더라도, 내 삶에 어떤 일이 벌어지더라도 항상 여여(如如)할 수 있고, 항상 행복할 수 있고, 어떤 상황에서도 휘둘리지 않을 수 있고, 흔들리지 않을 수 있는, 자기 중심이 잡힌 그런 어떤 힘으로 나를 이끌고 가고 내 삶을 이끌고 가고 이 지구를, 이 우주를, 인류를 이끌고 가는 힘 이라는 겁니다.

그래서 한 발짝 떨어져서 내가 나를 이끌고 가는 것이 아니라, 내 안의 본래면목이 나를 이끌고 가려 하는 삶, 그래서 ‘내가 뭘 어떻게 해 보겠다’ 라는 생각을 버리고 완전히 내 맡기는 삶 그리고 다만 지켜보는 삶으로의 전환이 이루어집니다. 다만 지켜보는 자로 남게 되었을 때 우리 앞에 펼쳐지는 모든 삶의 모습들을 아주 흥미로운 눈으로서 아주 새롭고 흥미진진하며 그렇다고 거기에 집착하지 않는, 한 발짝 떨어진 여여한 마음으로 모든 일이 내 삶에 내 존재위에 삶이 그저 파도쳐 흘러갔다 흘러올 수 있도록 내버려두게 되는 것입니다. 그때서야 비로소 아상으로 삶에 개입하지 않게 됩니다.

질병과 괴로움 속에 깊이 빠져서 그것에서 울고 웃게 하지 않게 되고 항상 흥미롭게 새롭게 아주 조화롭게 삶을 충분히 누릴수 있게 된다는 겁니다. 삶을 아주 흥겹게 완전히 받아들이고 즐겁게 누리면서 아주 충분히 삶을 살게 됩니다. 그랬을때 아주 자연스러운 껄끄럽지 않고 인위적이지 않은 아주 자연스러운 삶이 내 삶 속에 저절로 등장을 하게 되면서 우리 삶의 모든 고통과 두려움과 번뇌와 괴로움은 놓여지게 되는 길에 들어가기 시작한다는 겁니다.

지금까지 제가 말씀 드린 것이 어찌보면 우리 삶의 근원 그리고 이 현상세계의 본질과 근원세계의 본질에 대해서 말씀을 드린 부분이예요. 이 부분을 조금 더 사유를 깊이 해 보시고 수행을 통해서 이 자리가 과연 어떤 자리인가를 스스로 직접 느끼고 체득할 수 있는 그런 계기로 삼았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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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법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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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존재는
나와 연결되어 있다.
그저 피상적으로 조금 연결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아주 직접적이고도 가까이 서로 연결되어 있다.

그것이 바로 불교의 연기법이다.
연결되어 있다는 것은 무엇을 뜻하는가?
그것은 너와 내가 서로 통해 있다는 것이고,
너의 문제가 곧 내 문제라는 것이며,
세상의 문제가 곧 내 문제라는 말이기도 한 것이다.

아무리 작고 사소한 하나의 일이 생겼다 하더라도
그 일은 결코 작지 않다.
그 하나의 사건에는 무수히 많은 존재가,
나아가 이 우주법계가
크고 작은 다양한 방식으로 연결되어 있는 것이다.

일체 모든 존재와 존재가 연결되어 있으며,
그 중에도 내가 만나는 존재, 나와 마주하는 존재는
특별한 어떤 인연의 힘을 가지고
나와 특별한 끈으로 연결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나와 특별한 인연으로 연결되지 않았다면
그 사람은, 그 존재는, 그 사건은, 그 사물은
내 앞에 나타나지 않았을 것이다.

사실은 내 인생에서 벌어지는
그 모든 일들이,
내 인생에서 만나고 헤어지는
그 모든 사람과 존재들이
모두 내 내면에 있는 어떤 것들이다.

나의 내면에 존재하지 않는 것은
외적으로 투영되어 나올 수가 없다.
이 말은 다시 말하면
내면과 외부가 둘이 아니게 서로 연결되어 있다가,
내 안에 어떤 문제가 있으면
그것이 외부의 어떤 대상을 끌어당기게 되고
그럼으로써 내면의 어떤 문제가
겉보기에는 외적인 어떤 문제인 것처럼 드러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런데 이렇게 외적으로 투영되어 나오는 문제 또한
나와 전혀 관련이 없던 것이
투영되어 나오는 것은 아니다.
즉 나와 전혀 관련 없는 사람과 만나게 되는 것은 아니란 말이다.

나와 인연이 있었던,
과거 전생의 어느 시기에 나와 인연이 있었던,
혹은 업의 관계, 빚진 관계, 원수 관계,
복을 베푼 관계, 사제관계, 부자관계 등
다양한 관계 속에서 빚어진 업과 인연의 인다라망과 같은
복잡한 사슬 속에 놓여 있던 어떤 사람과 만나는 것이다.

즉 내 안에 화의 업이 올라오게 되면
과거 전생의 화와 원수관계 등에 놓여 있던 사람들이, 혹은 물질이나 존재들이
내 안의 화라는 직접적인 원인(인연 중에 ‘인’)에 의해
우주법계의 인연법으로써 내 앞에 나타나게 된다는 뜻이다.

우리 안에는 무수히 많은 인과와 업,
그리고 무수히 많은 생각과 기억과 관념들이 가득하다.
이번 생에서 만들어 낸 것들은 대개 기억과 관념으로 투영되어 존재하고,
지난 생에서 만들어 진 것들은 업이라는 모습으로 존재한다.

그리고 그것들은 이번 생의 것이든 지난 생의 것이든
우리가 분명히 인지하고 알아차릴 수 있는 형태로 존재하는 것은 극히 드물고
보이지 않는 세계를 형성하면서 존재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즉, 우리 앞에 나타난 어떤 하나의 사건에 대해
우리는 그 원인을, 그 무수히 많은 원인을 다 볼 수 없다는 말이다.

그 원인은 하나가 아니라 무수히 많은 무량수의 인연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오직 부처님만이 분명히 환히 볼 수 있지,
가섭존자 조차 낱낱이 살펴 알기 어렵다고 했다.

심지어 매 순간 순간 우리 주변에는
1500만 비트의 정보가 발생하는데 반해
우리가 자각할 수 있는 정보는 고작 15비트에 불과하다고
호오포노포노에서는 밝히고 있다.

이것을, 업의 차원에서 본다면
1500만 비트 정도의 차원이 아니라
그 몇 백배, 몇 천배 이상의 복잡다단한 인과의 그물코가
우리 삶의 현장에 매 순간 놓여 있는 것이다.

예를 들어 한 사람이 타고 가던 차를
뒤의 차량이 와서 접촉사고를 냈다고 치자.
그것은 언뜻 보기에는 앞차와 뒤차만의 인과관계인 듯 보인다.
그러나 업의 차원에서 본다면
이 단순해 보이는 하나의 사건 속에는
수백 수천만가지 이상의 엄청난 인과가 얽혀 있고,
수많은 존재와 존재들, 사람과 사람들이 연결되어 있다.

만약 이 두 차의 운전자가 병원에 갔다면
병원의 의사 간호사와도 연결되어 있으며,
집의 가족들, 친척들, 친구들이 모두 함께 걱정을 할 것이고,
병문안을 와야 할 것이고,
병문안을 오느라고 또 차를 타고 와야 하고,
음료수라도 사 와야 하니 슈퍼마켓에도 들러야 하고,
병문안을 오지 않았다면 다른 것을 했을 그 시간에
그 모든 사람들이 병문안 오기 위해 시간을 비웠어야 할 것이다.

어디 그 뿐이겠는가.
밥 한 톨이 내 앞에 오기까지
우주 법계가, 수백 수천만 이상의 사람들, 존재들이
밥 한 톨 먹는 것을 도왔다는 연기법의 이야기에서처럼
마찬가지로 수백 수천 수만가지 이상의 온갖 존재들이
이 접촉사고 하나와는 직간접적으로 연결되어 있는 것이다.

그리고 차사고가 난 두 당사자는
우연으로 그런 접촉사고가 났을까?
그렇지 않다.

그 사고 속에는 어떤 식으로든
내 안의 어떤 부분이
상대방 안의 어떤 업의 부분과 절묘하게 바로 그 순간에 만나서
그런 사고를 만들어 낸 것이다.

왜 하필이면 앞차가 5초만 빨리 왔어도
그냥 지나갈 수 있는 교차로에서 멈춰서게 되었으며,
왜 하필이면 뒤차의 운전자가 바로 그 순간에
주의가 흐려져 앞에 서 있는 차를 못 보고 그냥 들이받았겠는가?

그 또한 우리가 알지 못하는 차원에서는
분명한 이유가 있고, 업과 인과의 차원에서의 어떤 목적이 있는 것이다.
물론 그것은 좋고 나쁘고의 차원을 넘어 서 있다.

직장에서 상사가 별 것도 아닌 일에 화를 내는 바람에
오늘 하루 종일 기분이 나빴다는 상황을 가정 해 보자.
이 또한 상사와 나 사이에, 또 수많은 존재와 존재 사이에서
일어난 법계의 일인 것이다.

그로인해 그 상사는 기분이 조금이나마 풀어졌을 수도 있고,
그래서 오후에 있을 일의 성과가 좋아졌을 수도 있으며,
그로인해 나는 하루 종일 기분이 나빠져서
직장 동료들에게도 화를 내고, 집에 와서도 뾰로통 해 있으며,
오늘 했어야 할 일들을 다 끝마치지 못했을 수도 있다.
그러는 바람에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주었을 수도 있을 것이다.

이 상황은 단순히 그 상사와 나, 둘 만의 일이 아니다.
그로인해 영향을 받은 수많은 사람, 일들을 생각해 보라.
그 모든 것은 서로 연결되어 있으며,
또한 새롭게 연결되어져 있는 수많은 문제들을 양산해 낸다.

회사의 부장이 과장에게 화를 냈다는 그 하나의 사실,
그로인해 그 부서에 그 과에 분위기가 하루 종일 냉랭했고,
그 탓에 부하직원 한 명은 아침부터 몸이 좋지 않아 조퇴하려고 했다가
눈치보느라 조퇴도 못 하고 꼼짝 없이 회사에 갇혀 있는 바람에
병이 더 심해 져서, 저녁에 쓰러질 수도 있다.

그 하나의 상황은
크고 작은 수많은 또다른 상황들을 만들어 낸다.
사실 그 하나의 상황은
이 모든 사람, 상황들까지도 감안한 법계의 치밀한 계획이었을 수도 있다.

지금까지 한 말이 무슨 말인고 하니,
어떤 하나의 사건이나 문제가 발생했다고 하더라도,
내 앞에서 그 문제가 발생했다면,
나와 연관되어져서 그 문제가 발생했다면
그것은 나와는 상관 없는 ‘그 사람들’의 문제이기만 한 것이 아니란 말이다.

그것은 내 밖의 문제라고 생각되어지겠지만,
사실은 나와 연결된 문제이고,
조금 더 직접적으로 말하면 사실은 ‘내 문제’인 것이다.

법계의 계획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 보다
더 깊고 더 세세하며 더 치밀하다.
수많은 업과 기억과 생각과 수많은 정보들을
법계에서는 분명하게 보고 분명하고도 치밀한 계획으로
그 문제를 바로 그 순간에 바로 그 자리에서 만들어 낸 것이다.

그리고 그 문제와 연관된 사람들 또한
모두가 그 문제와 연관된 나름대로의 내면의 문제를
가지고 있던 사람들인 것이다.
그 문제와 관련된 어떤 문제가 있는 사람들만
그 문제 주변에 모여있을 수밖에 없다는 말이다.

이 말은 무엇을 의미하느냐 하면,
내 삶 속에서 일어나는, 혹은 내 삶 속에서 목격하는
그 모든 일들은
모두가 나와 직간접적으로 긴밀히 연결되어 있다는 말이다.
연결되어 있다는 말은 다시 말하면 나에게도 책임이 있다는 말이다.

그 문제가 내 외부의 문제인 것 같지만,
사실은 내 문제 아래에 놓여 있는 문제란 뜻이다.

내가 목격하는 모든 문제는,
내 앞에서 벌어지는 모든 문제는,
제3자의 문제라고 하더라도,
그것을 인식했다는 그 사실 하나만으로도,
나와 관계된 문제이며,
나아가 바로 ‘내 문제’라는 것이다.

내 안에 없는 것들은
결코 내 밖으로 투영되어 나오지 않는다는
법계의 이치가 바로 이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모든 것은 내면의 투영이다.
내 문제요, 내 책임이다.

그것은 또 다시 무엇을 의미하는가?
나에게서 나온 문제이기 때문에
그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사람도 나라는 것을 의미한다.

보통 우리는 어떤 사람이 문제나 고민을 가지고 올 때
그 고민을 들어 주고 답을 내려 주지만,
우리 내면에는 그것이 ‘네 잘못’이라는 전제를 깔고 있다.
그것은 ‘너의 문제’이고 나는 그 문제를 상담해 줄 뿐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사실은 그것은 그의 문제이기도 한 동시에
‘나의 문제’이기도 한 것이다.
내 안에 어떤 문제가 없다면
그 사람이 그 문제를 나에게 가져오지 않았을 것이다.
그것은 그 사람만의 문제가 아니라,
함께 풀어가야 할 우리 공동의 과제가 된 것이다.

왜 그런가?
세상은 완전히 서로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 많은 사람들 가운데
왜 하필이면 그 사람이 나에게 상담을 하려 왔겠는가?
나와의 공유된 업이, 인연이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그 상대방의 고민을 들으며
사실은 내 안의 업을 닦고 있는 것이다.
상대방의 문제를 치유해 준다는 것은
곧 내 안의 문제를 치유한다는 뜻이기도 한 것이다.

그래서 때때로 큰스님들께 상담을 하고 온 신도님들 중에는
특별히 큰스님께서 답을 주신 것은 없는 것 같은데,
다녀오고 났더니 문제가 풀리기 시작한다거나,
병으로 아파하던 환자가
큰스님을 친견하고 났더니 낫기 시작한다거나 하는
상식으로는 이해되지 않는 일들이 일어나곤 하는 것이다.

그것은 왜 가능한가?
큰스님과 심리상담가의 차이가 여기에 있는 것이다.
상담가들은 상대방의 문제를 상대방의 문제로 보고
상대방이 어떻게 치유를 하면 될지를 알려주는데 반해,
수행자의 방식은
상대방이 가져 온 문제를 상대방 문제라고 생각하지 않고
그것이 바로 내 문제라고 생각함으로써
내 닦을거리라고 받아들인다.

상대방과 나 사이에는 연기법이라는 법칙으로써
긴밀히 연결되어 있는 무언가가 있고,
그것이 그를 나에게 이끌었으며
그와 내가 만나는 순간 그 문제는 더 이상
그 사람만의 문제가 아닌
나 자신의 문제가 되는 것이다.

그래서 수행자는 상담을 하면서
자기 자신의 내면을 바라본다.
내 안에 어떤 업장, 어떤 문제가
저런 고민을 가진 상대방을 내 앞에 오게 했는가?

물론 그 답을 찾을 수는 없다.
왜냐하면 그 원인이 되는 이유는 한두가지가 아니며,
한 두 생에 걸친 원인이 아닌 몇 생에 걸친
수많은 업들이 복잡다단하게 얽혀 있거나,
수백 수천가지 이상의 크고 작은 인연들이
인다라망 그물코처럼 얽혀 있을 수도 있고,
조금 더 나아간다면
사실 그 원인은 이 우주 전체와 연결되어 있다.

그 수백 수천 수만가지 이상의
우주 법계와 연결되어 있는 전체적 연결고리를
어떻게 우리 중생의 눈으로 다 볼 수 있겠는가?
지금 이 순간 일어나고 있는 1500만 비트의 정보 중에서도
고작 15비트만을 인식하는 우리가,
수억만 종류 이상의 업과 인과의 소식을 어떻게 다
헤아려 알 수 있겠는가?
그것은 부처님께서만 아실 뿐이다.

그러나 중요한 사실은
그것이 무엇인지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분명한 것은 그 모든 원인은 내 안에도 있다는 사실이고,
그렇기에 내 안에 있는 그 원인을 닦고 비움으로써
상대방과 연결되어 있는 공업이 함께 닦여지면서
상대방과의 문제가 풀리기 시작한다는 사실이다.

이것이 바로 불교 의식이나 법회에서 행하는
축원의 비밀이다.
스님들이 축원을 해 준다고
내 문제가 해결될 수 있을까?

물론 가장 직접적이고 빠른 방법은
자기 자신이 직접 닦는 것이다.
그렇지만 나와 인연지어진 스님께서
마음을 비우고, 온전히 깨어있는 정신으로
나의 이름을 불러주고 축원을 해 준다면
당신의 마음 닦은 그 힘이 법계를 울리고
나와 연결되어진 내 안의 업도 함께 변화를 맞게 될 수 있는 것이다.

물론 이것은 수행자만 가능한 것이 아니라,
모든 사람들에게서 가능하며
실제로 수도 없이 일어나고 있는 기적들이
이러한 마음 마음, 발원과 기원의 힘들에 의한 것들이 많다.

이상에서 공부한 이 이치는
결과적으로 무엇을 말하고 있는가?
내가 만나는 모든 경계, 사건, 문제, 사람들은
사실은 온전히 내 문제며, 내 책임이라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상대를 탓할 일은 하나도 없다.
상대를 바꾸려고 애쓰지 말라.
그 문제를 상대의 문제로 돌리고,
그 잘못을 상대방의 잘못으로 돌리면서
상대방이 바뀌기를 바뀌는 한
그 문제의 본질은 흐려지고 만다.

그 문제를
내 내면이 투영된 ‘나의 문제’요, ‘나의 책임’이라고
자각하면서
나 자신으로 돌아올 때,
그 문제는 이제 본격적인 열쇠를 스스로 찾기 시작한다.

그러면서 나 자신을 관하고,
나 자신의 내면을 닦아갈 때
나와 연결되어 있는
상대방의 문제, 내 밖의 경계들이 닦여가기 시작하는 것이다.

문제를 바깥 탓으로 돌리지 말라.
내가 그 문제를 인식했다는 그 사실만으로도
충분히 그것은 내 문제요, 내 숙제다.

내 안에서 그 문제를 풀라.
내 안에서 세상의 모든 문제를 풀 수 있다.
정치문제, 경제문제, 사회적인 각종의 문제들, 부정부패들,
환경문제, 가정문제, 아들문제, 남편문제,
이 모든 문제들은 사실 내 안에서 벌어지는 ‘내 문제’다.

내 문제가 풀리고 나면
내가 사는 세상이 청정해진다.
마음이 청정하면 국토가 청정해 진다는 경전의 말씀은
이것을 두고 하는 말이다.

때때로 사회 변혁을 꿈꾸는 사회운동가들이
자기 자신의 변혁은 등안시 한 채,
부정부패로 얼룩지고 탐욕으로 점철된 시대를 나라를 개혁하고자 하지만
마음 같이 사회가 변하지 않는 것을 보면서,
오히려 그로인해 자신 안에 화를 키우고,
사회에 대한 불신과 미움과 증오를 키우다가
오히려 자신 몸에 병도 나고,
자신의 마음이 미움과 증오로 얼룩지곤 하는 것을 본다.

사회를 변화시키고
제도를 변화시키는 것도 물론 중요하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그보다 먼저 선결되어야 하는 것이
바로 자기 자신에 대한 변화이며,
자기 자신 마음을 다스리는 것이다.

내가 변하면 내가 몸담고 있는 세상이 변한다.
세상은 이미 깨달아 있기 때문이다.
세상은 법계로 언제나 청정해 있다.
다만 내 마음이 오염되고 물들어 있기 때문에
내 마음이라는 필터로 걸러서 본 나의 세상도 오염되어 있을 뿐이다.

깨닫고 보니
이 세상은 본래부터 깨달아 있었다는 말이 있다.
부처의 눈으로 세상을 보면
특별히 구제해야 할 중생은 없다는 말도 있다.

내가 깨달음을 얻는 순간,
이 우주는 동시에 함께 깨어난다.
내 업장을 닦고 소멸시키는 순간,
이 우주도 함께 어둠을 닦아내고 있는 것이다.

모든 문제를
바깥으로 돌리지 말고,
내 문제로 보고
나 자신을 닦으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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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법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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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신앙적 정체성은 무엇인가.
물론 나는 불교신자다.
불교 수행자이다.
그러나 동시에 나는 기독교 신자도, 천주교 신자도,
이슬람교며 힌두교의 신자도 될 수 있다.

내가 불교 수행자라는 이유가
나를 기독교 신지가 되지 못하도록 만들 이유는 어디에도 없다.
또한 그렇다고 나의 이러한 종교적 생각이
나의 불교적인 신앙 정체성을 흔들어 놓을 아무런 이유도 없는 것이다.

참된 불교적 정체성이라는 것은 바로 이러한 것이다.
이렇게 활짝 열려있으며 어디에도 갇혀 있지 않는 것.
그것이 바로 불교적인 삶이고, 지혜로운 삶이다.

불교는 불교 그 자체에 고집하지 않는다.
불교라는 것은 다만 이름붙인 것일 뿐이다.
진리를 그렇게 이름 지은 것일 뿐이다.
물론 사람들은 이 이름이나 틀 속에 스스로 갇히길 좋아하고,
그러한 틀 속에 보다 많은 신자들을 편입시키고자 애를 쓴다.

'이것은 불교다'라고 이름 지어 놓고,
그렇게 상을 만들어 놓고 거기에 갇혀 다른 것은 보지 못하고 있다.
그러나 그것은 불교가 아니다.
불교가 불교에 갇혔을 때는 이미 불교이기를 포기한 것이다.

『금강경』의 '불법은 불법이 아니다, 그러므로 불법이다'라는 유명한 게송은
이를 단적으로 말해주고 있다.
그 틀에서 빨리 빠져 나오라.

참된 불교 신자라면, 기독교나 천주교의 가르침,
성경의 가르침 속에서도 진리를 볼 수 있어야 한다.
또한 저 고대 인도인들이나 페르시아인,
또 아프리카나 호주, 아메리카의 원주민 인디언들에게서도,
공자나 노자에게서도, 저 들의 농부에게서도
또한 저 한 송이 가녀린 꽃송이에서도 진리를 볼 수 있어야 한다.

그 어떤 것도 무조건 금기시 하거나, 터부시 할 필요는 없다.
물런 어떤 사람들은 말할 것이다.
기독교 신자는 너무 편협학소 열려 있지 못하고,
불교를 너무 싫어한다거나,
혹은 성경을 읽어보면 너무 앞뒤가 맞지 않는다거나 논리적이지 못하다거나,
또는 어떤 특정한 성경의 구절과 이야기를 가지고 와서는
이렇기 때문에 이것은 불교와는 전혀 다른 것이며,
이것은 진리일 수 없다고 할 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렇게 따진다면 불교도 할 말은 없다.
논리적으로 따져서 불경의 게송이나 이야기 하나 하나를 반박한다면
할 말이 없기는 마찬가지다.

부처님의 일대기를 보면 부처님을 신격화 시킨다거나,
신이적인 모습으로 미화시킨 부분이 적지 않다.
그렇다면 이것을 가지고 문자 그대로 해석하여
불교도 진리가 아니라고 좌절할 것인가?

그렇지 않다.
그것은 진리 그 자체를 보고 있는 것이 아니다.
불경이나 성경 그 자체의 본 뜻을 파악하지 않고
피상적으로만 바라본 것일 뿐이다.
문자에만 치우쳐 가르침을 잘못 이해한 것이다.

그런 것들은 후대에 만들어 졌다거나,
후대 사람들이 부처님이나 예수님을 신격화 시켜놓은 것일 뿐,
거기에 내 온 존재를 내맡길 필요는 없다.
그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다.
정말 중요한 것은 그 깊은 곳에서 피어나오는 진리의 향기이며,
본질적인 가르침이다.

혹은 어떤 한 사람의 행위를 가지고 그 가르침을 판단하려 해서도 안된다.
어떤 사람은 불자인데 왜 저 모양인가?
저 사람은 교회도 열심히 다니는데 어떻게 저런 나쁜 성품을 가질 수 있는가?
그런 소수의 몇몇 사람들만을 바라보고 그 가르침 자체를 판단하지 말라.

부처님 당시에도 부처님 가르침을 잘 들은 제자들 가운데
부처님을 헐뜯는다거나 반역을 일으킨 자도 있었다.
부처님께서도 모든 사람을 다 깨달음으로 이끌지는 못하셨다.
부처님께서도 '원을 세우지 않는 자와 인연 없는 자는 교화하기 어렵다' 고 말씀하신 적이 있다.
사람을 보거나, 경전의 피상적인 사건 하나하나를 가지고
그 전체를 판단하려고 해서는 안 된다.

'크게 보아서' 기독교도 불교고 천주교도 불교다.
그 모든 이들의 그 모든 행위가 그대로 불교다.
불교는 어떤 특정한 종교 안에서 만의 진리가 아니기 때문이다.
불교란 삶 전체의 진리이며, 온 우주, 온 세계 모든 이들,
모든 존재들에게 공통이 되는 진리이기 때문이다.

어찌 불교가 불자들만의 진리일 수 있겠는가.
물론 이는 타종교 입장에서 본다면,
불교도 기독교이고 불교도 천주교란 말과 다르지 않겠다.
이렇게 말할 수 있는데는 물론 한 가지 전제가 붙는다.

그것은 불경을 또 성경을 '열린 지혜의 안목'으로
올바로 바라보았을 때 가능한 말이다.
성경을 꽉 닫힌 시각으로 바라보거나,
문자 그대로 해석하게 되면 성경에 담긴 참 뜻을 볼 수 없다.
즉, 집착 없이 텅 빈 마음으로 한없는 사랑으로 바라보았을 때 가능한 말이다.

다시말해 우리 불교 신자는 성경을 헐뜯고 미워할 것이 아니라,
성경은 무조건 잘못되었으며 나쁜 것이라고 할 것이 아니라,
법신의 관점에서, 불교적 관점, 활짝 열린 관점에서
성경을 해석할 수 있어야 한다는 말이다.
지금 이 글은 그러한 관점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부처님과 하느님은 분별이 없다.
당신들께서는 불교 신자를 늘리고자 애쓰지 않고,
기독교 신자, 천주교 신자를 늘리는데는 관심이 없으실 것이다.
그 어떤 틀에 가두는 것을 원치 않는다.
틀에 가두는 순간 진리도 진리의 빛을 잃고 말 것이기 때문이다.

진리는 어디에도 갇히지 않는다.
늘 활짝 열려있는 자세를 취한다.
활짝 열려있기 때문에 어떤 특정한 관점이 없다.
특정한 관점이 없는 관점이 바로 진리의 관점이다.

불교, 기독교, 천주교 하고 나누는 것은
훗날 사람들이 만들어 낸 것이지
정작 당신들께서는 그런 분별이 아무런 소용이 없다.

더 많은 분별과 분열만 일으킬 뿐,
진리에서는 그런 울타리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
하느님은 당신이 하느님이라고 고집하지 않으며
부처님은 당신을 부처라고 부르라고 고집한 적이 없다.

그 이름은 사람들이 붙인 것이고 편의상 붙인 것이지
당신들이 그렇게 불러주기를 바란 것이 아니다.
당신들이 불교를 제창하셨거나, 기독교를 만들어 낸 것이 아니다.
그래서 당신들이 불교의 교세를 확장하고자,
천주교의 교세를 확장하고자 애쓰신 적이 없다.

성경을 해석하는 많은 관점이 있다.
하느님을 바라보는 데도 여러 가지 신관이 있을 수 있다.
진리는 항상 그 자리에 온전하게 서 있고,
하느님은 항상 진리로써 그 자리에 있을 뿐이지만,
사람들이 하느님을 바라보면서 수많은 신관을 만들어 냈고,
수많은 성경의 해석을 만들어 냈다.

그러한 사람들의 해석 때문에, 관점 때문에 하느님을 믿는 사람들 사이에서도
피를 흘리는 수많은 전쟁도 일어났고, 싸움도 분열도 일어나게 되었다.
그러나 거기에 하느님은 아무런 잘못이 없다.
하느님은 늘 그 자리에 아무런 분별 없이 진리의 빛을 나투고 계셨을 뿐이다.
진리는 늘 그 자리에서 현현되고 있었을 뿐이다.
그 다툼을 하느님 탓으로 돌리지 말라.
그것은 사람들의 잘못이지 진리 그 자체의 잘못이 아니다.

성경에서는 말하고 있다.
"자신에 대한 집착은 막다른 골목에 이르게 하고,
하나님께 집중함은 탁 트인,
광대하고 자유로운 삶으로 우리를 이끈다"[로마서 8:6, THE MESSAGE]

자신에게 집착하고 자신이 만들어 놓은 견해에 집착하지 말라.
아집은 우리를 막다른 골목에 이르게 할 뿐이다.
자신이 만들어 놓은 관념, 견해에 집착하지 말고 다만 하나님께 집중하라.

우리 안에 또 밖에 충만한 하나님의 본질에 집중하라.
하나님의 진리 그 자체에 집중하라.
그랬을 때 삼매를 얻을 수 있고, 광대하고 자유로운 삶이 현현될 것이다.

물론 불경 또한 마찬가지다.
불경을 바라보는 사람들에 따라 온갖 불교가 나누어져 왔다.
소승과 대승, 현교와 밀교, 선불교 등 수많은 해석이 나뉘어져 왔다.
그러나 그렇게 나뉘면서도 진리 그 자체는
한 번도 나뉜 적이 없고, 변화한 적이 없다.

다만 사람들이 근거에 따라 수많은 가르침으로 나누어 놓았고
물론 그런데는 긍정적인 측면도 많지만,
몇몇 어리석은 이들은 그로 인해 수많은 다툼과 분열로 아파하기도 했다.
그렇더라도 본질에 있어서는 한 번도 나뉜 적이 없고, 변한 적이 없으며,
늘 그 자리에서 진리의 향기를 꽃피우고 있을 뿐이다.

사람이 분열되었다고 부처님도 함께 분열되어 어느 한 쪽의 편을 들지는 않았다.
하느님도 마찬가지다시다.

문제는 사람들에게 있다.
진리를 바라보는 사람들의 관점과 해석이 피를 낳았고, 전쟁을, 분열을 낳았다.
하느님을 바라보는 어떤 한가지 관점을 정해 놓고
그것을 진리로 고집하고 집착하면서부터 모든 문제는 시작되었다.

진리는 하느님 그 자체이지,
그 가르침에 대한 해석에 있지 않다는 것을 잊고 말았다.
요즘은 하느님을 바라보는 관점, 성경을 해석하는 관점,
또 신관들이 불교적인 법신의 관점의 그것처럼
활짝 열려 있는 해석을 많이 보게 된다.
기독교 안에서도 성경을 바라보는 관점이
활짝 열려 있으며, 불교적인 관점에서 해석하는 경향이 많아지고 있다.

물론 불교에서 말하는 법신은 어떤 하나의 해석이 아니다.
부처라는 것은 해석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진리의 당체 그 자체이다.

인간에게 선과 악을 내리는 그런 존재가 신이 아니다.
신에게는 선과 악이 없다.
선악을 초월한다.
그것이 하느님을 바로 보는 것이다.

하느님을 바라보는 관점을 지혜로써 바로 볼 수 있다면
그것 또한 그대로 진리이고,
그것 또한 그대로 부처님의 가르침과 다를 수 없다.
그랬을 때 성경 속에서 불경의 가르침을 볼 수 있고,
진리를 볼 수 있으며, 부처님을 볼 수 있다.

불경 속에서 성경의 가르침을 볼 수 있고,
하느님의 가르침을 볼 수 있다.
그랬을 때 하느님과 부처님은 다르지 않다.
관점을 버리고 무분별로써 있는 그대로의 하느님을 또 부처님을 볼 때
두 분은 서로 다른 두 분이 아니다.

물론 그렇다고 성경과 불경은 똑같은 것이며,
그러므로 모두가 똑같은 진리라고 말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다.
어차피 함께 살아가야 한다면
성경을 어떻게 바라볼 것인가 하는 문제에
우리가 접근해 갈 수 있어야 한다는 말이다.

 



지금처럼 성경을 편협하게 해석하고
옹졸하며 좁은 의미로만 해석하는 사람들이 많아진다면
그건 너무나도 아쉬운 일이다.
그렇다고 그것이 전부라고 생각할 것은 없다는 말이다.
그것을 진리의 관점에서 바라보고 해석할 수 있어야 한다.

문제는 항상 사람에게 있다.
사람들의 분별과 관점과 해석 그리고 집착에 있다.
부처님도 하느님도 항상 진리의 빛을 한없이 비추고 계실 뿐이다.
그러니 불자가 기독교를 싫어한다거나,
기독교 신자가 불교를 싫어한다거나 할 이유는 어디에도 없다.
서로 싸우고 배격하며 헐뜯을 아무런 이유가 없다.

근본에 있어서는,
어떤 종교를 믿는 것인가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어떻게 믿는가가 중요하다.
어떻게 치우치지 않으며 활짝 열린 시선으로 온전하게 믿는가 그 점이 중요하다.

내가 아는 목사님이나 신부님, 수녀님들 중에는
그야말로 활짝 열려있는 분들이 많다.
목사님이면서 불경도 공부하고, 법회에도 참석하시며,
그 속에 담긴 진리의 가르침에 깊이 깨우치며 감사하는 분도 계시고,
신부님이면서 불교의 가르침을 깊이 새기시면서
참선도 하고 불경도 외는 분도 계시다.
물론 스님들 가운데에도 성경을 진실된 마음으로 공부하고
예수님의 삶에 깊은 감명을 받는 분들도 많으시다.

종교를 신앙하는 데에도,
뭐랄까 이렇게 말하면 좀 이상하지만,
영적이고 정신적인 수준이 있다.
그리고 그 수준이 결정되는 가장 큰 잣대는
첫째, '열려 있음' 즉 '어느 한 쪽에 집착하지 않음'에 있고
둘째로, 한없이 큰 사랑에 있다.

집착을 버리는 것, 마음을 비우는 것,
이것이야말로 모든 종교며 사상에서 공통적으로 말하고 있는
공통적인 지혜의 일깨움이 아닌가.

하느님과 부처님 그 자체라는 진리에 마음을 둘 것이지,
자신이 만들어 놓은 하느님에 대한 또 부처님에 대한 수많은 해석과 견해를
진리라고 여겨 거기에 집착하면 안된다.

그리고 그렇게 집착을 버리고 활짝 열린 마음으로 마음을 비웠을 때,
바로 그 때 사랑과 자비는 한없이 넘쳐날 수 있다.
어느 한 쪽에 집착하여, 그 한쪽만을 사랑한다면 그것은 참된 사랑이 아니다.

기독교 신자라는 울타리를 쳐 놓고,
그 울타리, 그 가르침에만 집착을 하여,
그 속에 있는 이에게만 사랑을 베풀고,
나머지 다른 종교 신자는 모두가 사탄이며
올바른 종교를 모르는 사람이라고 한다면
그것은 반쪽짜리 사랑이지
온 우주 전체를 하나로 사랑하는 그런 참된 사랑이 아니다.

하느님은 그런 편협한 분이 아니시다.
하느님을 그런 편협하고 옹졸한 하느님으로 만드는
어리석은 일을 당장에 그만 두어야 한다.

하느님은 자신을 믿고 따르는 제자들만
별도로 편협하게 사랑하시는 분이 아니다.
오히려 반대로 사랑을 실천하는 자는 그 누구라도 하느님의 제자가 될 수 있다.

요한복음에서는 말하고 있다.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리라."[요한복음 13:35]

문제는 '하느님의 제자가 되는 것'이 아니라
'서로 사랑하는 것'이다.
서로 사랑한다면 그 사람은 하느님의 제자가 될 수 있지만
아무리 하느님을 사랑할지라도
이웃을 사랑하고, 온 우주를 사랑하지 못하며
단독으로 자기 종교 신자만을 사랑한다면
그 사람은 참된 하느님의 제자가 될 수 없다.

하느님께서 이스라엘인만을 단독으로 사랑하셨다고 해석하지 말라.
물론 구약을 있는 그대로 문자대로 해석하면 그렇게 느낄 수도 있지만
그것은 그 당시 사회 문화적인 배경에 힘입은
그 당시 사람들의, 유대인들의 해석일 뿐이지 본질은 그렇지 않다.

특히 신약보다도 구약을 문자 그대로 해석하게 되었을 때
수많은 오류를 범하기 쉽다.
구약의 하느님은 살생을 하고 폭력적이며
질투가 넘쳐나는 분으로 묘사되고 있다.
그것은 하느님 자체를 묘사한 것이 아니다.

그 당시 시대적 상황에서
그 당시의 사람들에게 그런 신이 필요했던 것이다.
하느님을 그대로 표현 한 것이 아니라,
자신들이 필요로 하는 하느님으로 묘사해 놓고 있을 뿐이다.

그 말에 현혹되지 말라.
그 말 너머에 있는 하느님의 진실을 찾으라.
하느님은 어느 한 부족 사람들만을 사랑하시는 분이 아니다.
하느님은 그 어떤 분별이나 차별도 있지 않다.
온 우주 법계의 본질이신 하느님께서
어찌 조악하게 한 부족만을 사랑하고
다른 부족을 죽이려고 안달할 수 있단 말인가.

그런 인간의 해석과 견해를 버려라.
그런 신관을 버려라.
문자 그대로 성경을 해석하려 들지 말라.

진리는 문자 그 너머에 있다.
문자를 가지고 진리를 그대로 나타낼 수는 없다.
문자는 항상 오류가 많다.
한 가지 말을 가지고 백 명의 사람은 백 가지 해석을 할 것이다.
그것이 언어, 문자, 말이 가지는 치명적인 오류다.

문자에 연연해 성경의 깊은 가르침을 자기식대로 해석하고,
그로인해 무리를 만들며, 그 해석만이 진리라고 집착하지 말라.
그렇게 만들어 놓은 자기대로의 해석을 가지고
상대방의 해석을 공격하며 싸우려 들지 말라.

분명히 기억하라.
하느님은 어떤 견해도 있지 않으신 분이시다.
어떤 특정한 견해나, 어떤 특정한 부족이나,
어떤 특정한 가르침에만 치우치시는 분이 아니다.
항상 하느님은 진리만을 말하며, 진리로써 살아가시는 분이다.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하리라."[요한복음 8:32]
진리가 우리를 자유케 하는 것이지
진리에 대한 해석, 견해가 우리를 자유케 해 주지는 못한다.

그렇게 나누는 것은 바로 우리들 인간이다.
내가 해석한 대로의 가르침이 아니라,
하느님 그 자체가 진리라는 것을 잊어서는 안된다.

참된 사랑은 내 종교, 네 종교라는 울타리를 두지 않는다.
선을 그어놓지 않는다.
모두가 똑같은 사랑의 대상이고,
모두가 똑같은 형제 자매며 똑같은 도반일 뿐이다.

내 종교를 믿어야지만 구원받을 수 있고,
내 종교를 믿어야지만 해탈하고 열반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어리석은 사람이고 좁은 사람이다.  

불교 안에서도, 기독교며 천주교 안에서도,
또 나아가 스님들 가운데에도 신부님이며 목사님들 가운데에도
그러한 편협하고 치우쳐진 낮은 수준의 종교를 신앙하는 분들이 물론 있다.

그런 분들과 함께 신행생활을 하는 신자들이라면
당연히 그것만이 당연한 것일 줄 착각할 것이고,
그렇게 신앙생활을 해야지만 잘 하고 있는 것이라는
착각 속에서 살게 될 것은 뻔하다.

1960년대 벌써 로마 교향 요한 23세는
세계 종교사에 획을 그을만한 획기적인 발언을 해서
종교인들을 놀라게, 혹은 경이롭게 한 적이 있다.

그것은 바로 불교, 힌두교, 이슬람교 등
타종교에도 진리가 있음을 천명한 것이다.
다른 종교에도 진리가 있으며 구원이 있을 수 있다는 말이었다.
물론 보수적인 사람들의 반발도 컸지만,
이 교황의 말씀 한 마디는 전 세계를 평화로 물결치게 할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종교 지도자들이 가장 중점적으로 해야 할 일은,
내 종교 신자를 늘리기 위해 노력하는 것이 아니다.
다만 진리답게 사는 사람들이 많아지기를 기도해야 한다.

즉, 그 말은 기독교, 천주교, 불교라는 틀 속에서
서로 많은 신자를 확보하기 위해서 싸워야 할 것이 아니라,
어떤 종교를 믿든 그 종교를 참되게 믿도록 이끌어야 한다는 점이다.

참되게 믿는다면 불교도 천주교도 기독교도
그 어떤 종교신자 일지라도 참된 진리로 나아갈 수 있기 때문이다.

간디는 힌두교였지만 참된 진리를 따랐기 때문에
힌두교를 버리지 않으면서도 불교도 기독교도 다 받아들일 수 있었고,
교황 요한 23세 또한 참된 진리를 따랐기 때문에
천주교를 버리지 않으면서도 어떤 종교도 다 받아들일 수 있었으며,
달라이라마 스님이며 틱냩한 스님, 숭산스님이며 청화스님 또한
불교를 버리지 않으면서도 모든 종교 안에서 진리를 볼 수 있었다.

참된 자비의 마음, 사랑의 마음이 있다면
한결같이 '모든 이'들을 '참된 행복'으로 이끌 수 있어야 한다.
내 종교인들만 행복으로 이끌려는 마음이라면
그것은 참된 자비이며 사랑이라 할 수 없다.
또한 모든 이들이 '참된 행복'에 이르도록 이끌어야 한다.

다만 궁극적인 참된 행복으로 가면 되는 것이지,
그것이 왜 '해탈'이거나 '천당'이어야만 하는가.
그 길을 왜 꼭 '예수'를 통해서만, 혹은 '불교'를 통해서만 갈 수 있단 말인가.
그 궁극의 행복의 자리, 깨침의 자리에 그 어떤 모양을 만들어 두지 말라.
불교적인 해탈과 기독교적인 천당은 결코 별도로 다른 곳에 있지 않다.

달라이라마 스님께서는 이 세상에 종교가 불교밖에 없는 것 보다는
오히려 여러 종교가 많은 것이 더 좋다는 말씀을 하셨는데,
깊이 공감이 되는 말씀이다.

왜 애써 내 종교 신자를 늘리기 위해 혈안이 되어야 하는가.
왜 내 종교를 늘리기 위해 다른 종교 신자들과 다투고,
심지어 전쟁까지 불사해야 하는가.
이것은 부처님도 하느님도, 보살님도 예수님도 정작 바라는 바가 아니다.

다만 '올바른 신앙'으로 이끄는 것이 중요하다.
그것이 불교가 되었든, 기독교가 되었든, 천주교가 되었든
그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얼마나 올바로 참되게 믿고 실천하는가 하는 점이 중요하다.

그러나 분명 성경을 열린 시각으로,
지혜의 시각으로 해석하기가 너무 어렵다.
성경 속에는 수많은 인간들의 견해가 너무도 많이 포함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성경 속에 나타나는 것을 문자 그대로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필요는 없다는 말이다.
그 속에서 인간들의 편협하고 옹졸한 견해, 생각들을 버리고
진리로써 해석하고 받아들이라.

이렇게 말하는 이유는, 절대 종교를 바꿀 수 없는 타종교 신자를 만나더라도
애써 개종하려 들지는 말라는 말이다.
그로인해 다툼과 시기와 전쟁을 일삼고자 한다면
그것보다는 그 종교 안에서 진리를 볼 수 있도록 이끌어 줄 수도 있음을 알라.
성경을 올바로 볼 수 있는 시각을 열어주는 것이 중요하다.
성경을 올바로 볼 수 있다면 그 속에서 불경을, 부처를, 진리를 볼 수 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도 '올바로' 믿고 실천하는 것이 중요하다.
올바로 믿고 실천하면 불교를 믿어도 기독교를 천주교를 믿어도
모두 구원을 받을 수 있고, 해탈에 이를 수 있지만,
'올바로' 믿지 않는다면 불교를 믿든 기독교 천주교를 믿든
모두가 지옥에 이를 수밖에 없을 것이다.

불경에도 이런 말이 있다.
'태생에 의해 성직자가 되는 것은 아니다.
태생에 의해 성직자가 안 되는 것도 아니다.
행위로 인해 성직자가 되기도 하고,
행위로 인해 성직자가 안 되기도 하는 것이다.
행위에 의해 농부가 되고, 행위에 의해 기술자가 되며,
행위에 의해 상인이 되고, 또한 행위에 의해 고용인이 된다.
행위에 의해 도둑이 되고, 행위에 의해 무사가 되며,
행위에 의해 신하가 되고, 행위에 의해 왕이 된다.'

더 중요한 것은
어떻게 믿고 실천하는가 하는 그 행위이지,
어떤 종교를 믿는가는 그 다음 문제다.

참되게 믿으면 기독교를 믿어도 불교를 믿는 것이지만,
올바로 믿지 않는다면 불교를 믿더라도 외도를 믿는 것이다.
반대로 참되게 믿으면 불교를 믿어도 기독교를 믿는 것이지만
참되게 믿지 않는다면 기독교를 믿더라도 사탄을 믿는 것일 뿐이다.
참되게 믿으면 그 사람 안에 본래 구족되어 있는 부처를 깨닫게 되고,
참되게 믿으면 그 사람 안에 하느님이 거하시게 된다.

다시 한 번 강조하지만,
종교를 믿는 사람들에게 있어 가장 중요한 것은
'어떤' 종교를 믿느냐가 아니라
'어떻게' 종교를 믿는가에 있다.

불교, 기독교, 천주교 어떤 종교라도 좋다.
어디에서도 진리를 찾을 수 있다.
부처님과 하느님은 다른 분이 아니기 때문이다.
다르다고 믿고, 다르다고 생각하는 것은 우리의 견해고, 관점일 뿐이지
'그 분'들의 입장이 아니다.

'그 분'들은 사실 '들'이 아니다.
'들'로써 둘로 혹은 여럿으로 나뉘는 분이 아니시다.

이 세상이 온전한 진리의 나툼이며,
온 우주 어디에도 법신의 숨결 아닌 것이 없을진데,
어찌 하느님은 법신이 아니고, 예수님은 법신이 아닐 수 있겠는가.
어떻게 신부님이나 수녀님, 목사님은 법신이 아니고
타종교 신자라고 법신으로써의 본래불이 아닐 수 있겠는가.

나누기 시작하면 천차만별로 갈라지지만
하나로 보기 시작하면
전체가 한 맛으로 귀일하게 된다.

그렇게 하라.
나누어 두고 보지 말라.
나눔으로써 더 옳고 그르며,
잘나고 못난 것을 나누고
그를 가지고 싸우며 다투고 심지어 전쟁을 일으키지 말라.

온 우주에 두두만물 진리의 나툼이며,
법신 부처님의 나툼일진데,
어디에서 타종교를 찾을 것이며,
어디에서 별도로 다른 신을 찾을 것인가.

부처를 부처라고 이름붙였듯이,
부처를 신이라고 이름붙일 수도, 해석할 수도 있는 것이다.
싸워서 좋을 것이 무엇인가.
나누어서 좋을 것이 무엇인가.
큰 진리의 관점에서 전체를 바라보라.

어떻게 믿고 신앙할 것인가.
어떻게 다른 종교인을 대하고, 다른 종교를 대할 것인가.
그것은 우리의 선택에 달려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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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쾌락만을 추구하고
다섯 가지 감각의 욕망을 다스리지 않으며
음식의 때와 양에 절제가 없고
게을러 정진하지 않는다면
온갖 삿된 마장에 휘둘려 마침내 쓰러진다.
바람이 연약한 나무를 쓰러뜨리듯이.

8.
쾌락을 추구하지 않고
다섯 가지 감각의 욕망을 잘 다스리며
음식의 때와 양에 절제가 있고
굳은 믿음으로 힘써 정진하면
그 어떤 삿된 마장에도 휘둘리지 않는다.
큰 바위산을 바람이 휘두를 수 없듯이.



수행자의 삶은 어떠해야 하는가. 여기 모든 수행자가 반드시 지켜야 할 정진의 덕목이 있다. 먼저 이 게송이 나오게 된 연유를 살펴보자.

부처님 당시에 두 형제가 있었다. 형은 수행자다운 위의와 신념과 정진이 투철했지만 동생은 성실히 수행하기는커녕 오히려 형을 속세로 환속시키기 위한 목적으로 뒤따라 출가를 했다. 그러다보니 동생은 끊임없이 육체적인 쾌락과 물질적인 즐거움을 추구하며 음식에도 절제가 없고, 수행 정진은 뒤로한 채 게으름만 피우다가 하루는 속가의 가족이 부처님과 제자들을 초청하여 공양을 올리는데 따라갔다가 결국 출가 전 아내의 권유에 못 이겨 그 길로 속세로 돌아가고 말았다.

반면에 형은 수행자다운 위의와 신념으로 마음집중 수행을 성실히 행하여 결국 삼법인을 깨닫고 아라한과를 성취하게 되었다. 후에 형 또한 출가 전 아내가 부처님과 제자들을 초청하여 공양을 올리려고 하자 많은 제자들이 동생처럼 형 또한 다시 환속하게 될 것을 염려하고 있을 때 부처님께서는 형은 환속한 동생과는 같지 않음을 말하시면서 다음의 게송을 설하셨다.

“쾌락만을 추구하고 다섯 가지 감각의 욕망을 다스리지 않으며 음식의 때와 양에 절제가 없고 게을러 정진하지 않는다면 온갖 삿된 마장에 휘둘려 마침내 쓰러진다. 바람이 연약한 나무를 쓰러뜨리듯이. 그러나 쾌락을 추구하지 않고 다섯 가지 감각의 욕망을 잘 다스리며 음식의 때와 양에 절제가 있고 굳은 믿음으로 힘써 정진하면 그 어떤 삿된 마장에도 휘둘리지 않는다. 큰 바위산을 바람이 휘두를 수 없듯이.”

이것은 출가한 수행자 뿐 아니라 모든 진리를 찾고 참된 삶을 얻고자 하는 이들에게 있어 중요한 수행의 덕목이요 삶의 덕목이라 할 수 있다. 지혜를 추구하는 이들에게 있어 가장 조심하고 절제해야 할 부분이 육체적인 쾌락의 탐닉과 감각적인 욕망을 다스리는 일이다. 육체적인 쾌락을 탐닉하는 것이야말로 수행, 진리, 법과는 정 반대의 길이다. 수행자란 몸과 말과 뜻으로 청정행을 닦는 이를 말하는데, 육체적인 쾌락이야말로 순결한 청정행을 더럽히는 요소이기 때문이다. 육체적인 쾌락은 곧 정신적인 쇄락을 가져오고 우리 몸도 마음도 녹슬게 만들어 청정한 수행자의 정신을 빼앗아간다.

다섯 가지 욕망이란 우리 몸의 다섯 가지 감각기관인 눈, 귀, 코, 혀, 몸의 욕망을 말한다. 눈으로는 더 좋고 아름다운 것을 보고 싶어하는 욕망, 귀로는 칭찬과 좋은 말을 듣고 싶은 욕망, 코로는 더 좋은 향기를 맡고자 하고, 혀로는 더 맛있는 음식을 먹고자 하며, 몸으로는 더 좋은 촉감을 느끼고자 하는 욕망을 말하는 것이다. 우리 몸의 다섯 가지 감각기관이 외부를 향해 치닫는 가장 원초적인 욕망이요 욕구를 말한다. 불교에서는 이 오관을 잘 다스리는 것이야말로 모든 수행자의 핵심적인 수행법 중 하나다. 눈귀코혀몸이 대상을 향해 어떤 욕망을 일으키는지를 오관을 잘 관찰함으로써 깨닫게 되고 그 치닫는 욕망을 다스릴 수 있는 것이다.

또한 세 번째로 수행자는 음식을 먹고 마시는 때를 가릴 줄 알아야 하고 그 양에 절제가 있어야 한다. 시도 때도 없이 입으로 먹을 것들이 들어가는 것이야말로 원초적인 욕망에 패배하는 것이다. 마음을 깨달아 우주의 주인이 되겠다는 사람이 먹고 마시는 가장 기초적이고 단순한 일에서부터 식욕이란 욕망에 쓰러지고 만다면 그는 더 이상 수행을 진전시킬 수 있는 토대를 무너뜨리는 것이다. 그러나 식욕이란 가장 단순하면서도 가장 우리를 무너뜨리기 쉬운 욕망이다. 누구나 식욕 앞에서는 굴복당하기 쉽다. 가장 쉬운 것이 가장 높은 것이 될 수 있다. 모름지기 수행자는 내 입으로 무엇이 들어가고 있는지를 잘 살필 줄 알아야 한다.

또한 한번이 되었든, 두 번이 되었든, 세 번이 되었든 음식을 먹는 때를 정하고 될 수 있다면 그 이외의 때에는 입과 위를 모두 쉬게 해 주어야 한다. 입과 식도와 위와 장이 끊임없이 움직이고 있다면 마음도 고요해지기 어렵다. 삶에 질서가 잡히기 위해서는 가장 먼저 먹고 자는 때에 질서가 잡혀 있어야 한다.

또한 때에 맞춰 먹는 것 못지않게 먹는 양에도 절제가 있어야 한다. 많은 양을 허겁지겁 배부르게 먹고 나서 가만히 몸과 마음을 살펴보라. 몸도 무겁고 마음도 덥수룩한 것이 오래도록 마음 집중이 되지 않는다. 몸이 무거우면 정신도 무거워진다. 때때로 많은 양을 먹고 난 뒤에 무겁고 멍한 나 자신을 가만히 지켜보고 있노라면 부끄럽고도 부끄럽다. 먹을 수 있는 만큼의 반만, 혹은 60~70%만 채우고 나면 식후의 잠시의 휴식과 함께 몸도 마음도 새로운 에너지로 깨어난다. 먹고 마시는데 절제가 있다면 삶에도 다른 모든 욕망에도 절제와 균형이 생긴다.

이러한 쾌락적인 즐거움과 감각적인 욕망, 그리고 먹고 마시는 일에 절제가 있게 되었다면 이제 수행의 절반은 이루었다. 그런 튼튼한 토대 위에 힘써 정진하기를 게으르지 않는다면 온갖 삿된 마장에 휘둘리는 일은 사라질 것이다. 마치 큰 바위산을 아무리 험한 바람도 휘두를 수 없듯이.

그러나 감각적인 욕망에 휩쓸리고 먹고 마시는 일에 절제가 없으며 게으르고 정진하지 않는다면 그 틈 사이로 온갖 마장이 스며들 것이다. 부처님의 깨달음을 방해했던 마왕 마라의 군대가 그대를 쓰러뜨릴 것이다. 마라의 군대가 쏜 불화살이 꽃비로 변해 부처님께서 앉아 계신 보리수를 수놓았듯이, 마라의 세 딸들이 쾌락과 감각적 욕망으로 유혹할 때 부처님께서는 이 모든 것이 마라의 유혹임을 바로 보셨듯이 쾌락과 감각적 욕망을 다스리고, 먹고 마시는데 절제가 있으며, 힘써 정진하기를 게으르지 않는다면 그 어떤 마라의 군대가 오더라도 삿된 마장에 휘둘리지 않을 것이다.

부처님께서 그러했기 때문에, 부처님께서 그 길을 바로 보여주셨고 먼저 걸어가셨기 때문에, 뒤따라가는 우리들 또한 그 바른 수행의 길을 따라 가면 되는 것이다.


Posted by 법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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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승사 산내암자 윤필암]

부처님과
하느님이 둘이 아니십니다.

불교 신자와
천주교 신자와
기독교 신자가
참으로 둘이 아닙니다.

부처님 가르침의 실천과
하느님 가르침의 실천이 둘이 아닙니다.

내 안에 계신 자성부처님
굳게 믿어
일체 모든 것을 맡기고 놓고 가는 것이
부처님 가르침의 실천입니다.

마찬가지로
내 안에 계신 하느님을
굳게 믿어
일체 모든 것을 맡기고 놓고 가는 것이
삼위일체 하느님 가르침의 실천인 것이지요.

하느님을 내밖에 그 어떤
동떨어진 대상으로 설정해 놓고
밖을 향해 믿음을 일으키지만 않으면
하느님과 부처님은 이름만 다를 뿐 '하나'가 됩니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
삼위일체 하느님을 믿고 일체를 당신께 맡기고 가야 합니다.

내 안에 충만한 성령이
그대로가 성부이며 성자인 것이지
그 셋을 어찌 서로 다르다 할 수 있겠어요.

성부와 성자 또한
성령으로써 내 안에 항상 충만한 것이며,
이 우주 법계에 아니 계신 곳 없이
모든 생명 모든 사람에게 항상 빛을 놓고 계십니다.

법신과 보신과 화신 삼신 부처님 또한
서로 다른 부처님이 아닌
내 안의 자성부처님으로서 '하나'인 것입니다.

'참 나'의 이름을
부처님이라고 부르면 어떻고,
또 하느님이라고 부르면 어떠할 것이며,
알라신이라고 부른들 무슨 상관이 있겠습니까

결국
부처님 하느님 알라신이란
이름만 다를 뿐,
같은 진리의 몸(法身)인 것입니다.

'진리는 하나인데
현자들은 여러 가지로 말한다'고 합니다.
다만 여러 가지로 말할 뿐
근본이 흔들리는 법은 없는 것이지요.

현자들이 여러 가지로 말한 것을 가지고
어리석은 우리들의 좁은 소견으로
분별하고 나누어 놓아서는 안 될 일입니다.

그러니
니 종교니 내 종교니 하면서
싸울 것도 없고,
내 가르침이 더 깊이가 있다고 고집할 것도 없으며,
내 가르침만이 나를 천당으로 가게 할 수 있고,
내 가르침만이 진리라고 할 것도 없는 것입니다.

진리란
고집하지 않음입니다.
어느 한 쪽을 고집하게 되면
벌써 진리에서 한참 멀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진리는
좋고 싫고, 옳고 그르다는 등의
일체 분별을 다 여의는 자리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들이 종교를 믿는 이유가
'불교이기 때문에'
'천주교, 기독교 이기 때문에'
믿는다고 해서는 안될 일입니다.

'진리이기 때문에' 믿어야지요.

그 말은
불교를 믿고 있지만,
천주교를 기독교를 믿고 있지만,
또 다른 참진리를 만난다면
당연히 그 참진리 또한 버려서는 안 된 다는 것을 의미하고,
나아가 더 밝은 진리를 만난다면
기존 종교에 대한 모든 집착을 버리고
새로운 밝은 진리를 따를 수 있어야 함을 의미합니다.

그래야 참 진리를 찾는 구도자이며,
수행자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래야만 고집이 아닌 맑은 믿음을 가질 수 있습니다.
'이 종교만이 옳다'는 고집을 가지고
'참된 믿음'이라 착각을 하지는 마세요.

참된 믿음이란
억척스러운 고집이 아니라
텅 비어 어느 것이라도 담을 수 있는
맑고 향기로운 열린 믿음일 것입니다.

마음이 어느 한 쪽에 머물러 고집스레 집착을 하게 되면,
다른 그 어떤 가르침도 들어오지를 못합니다.
진리란 어떤 방법으로든 설해질 수 있다는 것을
왜 알지 못하는 것인지요.

활짝 열린 탁 트인 마음이
모든 수행자의, 모든 구도자의 참마음일 것입니다.
수도자란 모름지기 그래야 합니다.

텅 비어 있기에 도리어 꽉 찬 그런 훤칠하게 트인 길로 가야지,
좁은 한 길만 고집하는 옹졸한 마음으로
어찌 만중생을, 숯한 어린 양들을 구할 것입니까.

불교 신자, 수행자 법우님들과,
기독교 천주교 신자, 수도자 형제 자매님들
참으로 우리 모두는 둘이 아닌 '하나'입니다.
우리 모두는 참 진리의 길을 걷는 '좋은 도반'입니다.

세계일화
세계는 한 송이 꽃으로 언제나 맑고 향기롭습니다.

'내 종교'라는 울타리에 갖혀
불교다, 기독교다, 천주교다 하고 금긋고 살았지만,
실은 같은 길을 걷고 있는 것인 줄
어찌 알았겠습니까.

같은 진리의 길을 걷는 도반이었음을 어찌 알았겠습니까.

이제
'나'도 놓아버리고,
'내 종교'도 놓아버리고,
'내 알음알이 진리'도 놓아 버리고,

대신
그 자리에
본래자리 밝으신 '자성부처님' '한마음 부처님'을 모시고,
그 자리에
내면의 참된 '삼위일체 하느님'을 모실 일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어리석은 중생으로,
어린 양으로 살아갈 것이 아니라
'자성부처님'께 모든 것을 믿고 맡기면서,
'삼위일체 하느님'께 모든 것을 믿고 맡기면서
당당하고 시원스레 살아갑시다.

부처님으로 살아가고,
하느님으로 살아갑시다.

내가 산다고 생각지 마세요.
자꾸 아상을 키우기만 해서는 안됩니다.

'나'라는 아상 대신에,
'자성부처님'께서,
그리고 '삼위일체 하느님'께서
살아가시도록 온전히 믿고 맡기시면 됩니다.

그렇게만 되면
세상 모든 이가 부처님이고 하느님이십니다.
그 믿음에서 '자비'가 나오고 '사랑'이 나오는 것이지요.

그 믿음 안에서
부처님의 자비와 하느님의 사랑은
세계일화의 맑고 향기로운 빛을 놓게 될 것입니다.

부처님의 자비와 하느님의 사랑 안에서
우린 모두 '하나'이며 '참사랑'이 되는 것입니다.
Posted by 법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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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주 단순하게 생각해서
누구나 잘 살기 위해 세상을 살아간다.
또 누구나 삶의 목적은 잘 사는데 있다.

그러나 과연 어떻게 사는 것이 잘 사는 길인가.
'이렇게 사는 것이 잘 사는 것이다'라는 정답이 있고 체크리스트가 있어서
매일같이 잠자리에 들기 전, 또 매 해를 보낼 때마다
그 표를 하나하나 내 삶과 대조해 보면서 체크해 볼 수 있다면 좋겠지만
우리 삶이라는 것이 그렇게 딱 정해진 것 만은 아니기에
그런 것이 있을리 만무하다.

그러나 조금 큰 틀에서 본다면
어떤 종교에서든, 어떤 사상이나 가르침에서든
공통적으로 적용될 법한 일반적인
‘잘 사는 방법’이 없는 것은 아닐 것이다.

이를테면 부처님도 하느님도
또 수많은 인류의 성자, 사상가들도 모두가 한결같이
'사랑을 베풀라' '자비를 베풀라' '이웃과 나누라' '보시하라'는
말씀을 하고 계신다.

그 본질은 어느 종교에서도 다르지 않다.
보시와 베풂이라는 그 본질은 진리의 영역이다.
베풀고 보시하는 길은 참된 삶을 살기 위해서라면
누구나 가야할 근본이 되는 가르침이요 진리인 것이다.

다만 각 종교별로, 사상가별로 그 구체적인 방법은 다를 수 있다.
십일조를 내든 자유롭게 보시를 행하든,
절이나 교회에 내든 불우한 이웃에게 내든,
사람에게만 사랑과 자비를 베풀든
풀이며 나무 산천초목에 이르기까지 모든 생명에게 베풀든,
그 구체적인 방법은 서로 다를 수 있는 부분인 것이다.

그런 점에서 자기답게 저마다의 개성으로써 실천 해 나가야 할
세부적인 부분 보다는
전체적인 진리의 본질로써
우리가 삶 속에서 어떻게 마음을 쓰고,
어떻게 참된 삶을 살아 나갈 수 있는가 하는
실천의 정신을 몇 가지 소개하고자 한다.

어느 종교에서든, 어느 사상에서든,
진리의 본질을 관통하고 있는 가르침이라면
대부분 수긍하지 않을 수 없을만한
그런 구체적인 수행방법을 언급함으로써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행복하게 잘 사는 사람이 되는 법'에 대한
최소한의 사유의 뜰을 제공해 주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몇 가지를 적어 보는 것이다.

매일 아침 저녁으로 이 목록을 펴 들고
하나 하나 내 마음과 비추어 보며
사유의 뜰을 넓혀 보는 것도 좋을 것이다.

혹은 매 순간 순간 시간 날 때도 좋고,
그것도 아니라면 어떤 괴롭거나 힘겨운 경계를 당해 마음이 휘둘릴 때
그 때 이 목록을 펴 보는 것도 도움이 될 수 있을 것이다.

모르긴해도 아래에 열거된 마음공부 목록만 잘 점검하더라도
어지간한 괴로움이나 경계는 충분히 이겨낼 수 있는
내적인 힘이 쌓일 것이라고 본다.

또 기독교나 혹은 또 다른 종교의 신자나 종교가 없는 분이더라도
이 목록의 가르침들은 대부분이 수용 가능한 것들일 것이다.

법정스님의 말씀처럼
사실 모든 종교의 가르침은 끊임없는 복습의 연장이다.
가르침의 본질은 이미 우리가 다 알고 있는 것일지 모른다.

마음을 비우고 이웃과 나누며 욕심과 집착을 버리는 것을
모르는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그러나 그런 가르침들이 항상 내 가까이에서 살아 움직이고
실천의 힘이 되며 내 존재 안에 숨쉬도록 하기 위해서는
끊임없는 복습만이 우리 내면에 힘을 실어 줄 수 있을 것이다.

아래의 목록은 한번 읽고 그만 두기 보다는
가까운 곳에 두고 '잘 사는 방법' 체크리스트처럼 활용할 수 있기를 바란다.

아울러 이 목록의 구체적인 이해와 방법들, 깊은 이해는
이 목탁소리의 글들을 읽어 내려가면서
하나씩 터득해 갈 수 있지 않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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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일체를 다 받아들이라. 수용하라.

내 삶에 등장하는 그 어떤 사건도, 사람도
모두 온전한 진리의 목적을 가지고 온다.
이 세상에는 정확히 필요한 일만이 정확히 필요한 바로 그 때에
정확히 필요한 만큼의 크기로 찾아온다.

또한 그 모든 것들은 좋은 것이든 싫은 것이든
모두가 나를 돕기 위한 목적을 가지고 내게로 온다.
그 모든 일들이 부처의 자비요 신의 사랑이다.

그렇기에 모든 것을 대 긍정으로 받아들일 수 있어야 한다.
좋다고 너무 붙잡지 않고 싫다고 버리려 애쓰지 않고
다만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면 괴로울 일이 없다.

삶을 전체적으로 받아들이라.

∎ 어떤 상황에 처하더라도 ‘이래도 좋고 저래도 좋다’고 말하라.
∎ 과거에 좋지 않았던 일들이 되돌아보면 큰 도움이 되었던 것은 없는가. 괴로운 상황이나 미운 사람이 내게 주는 긍정점을 찾아보라.
∎ 아무리 최악의 상황이더라도 ‘우주가 나를 돕고 있다’고 외치라.

2. 집착을 버려라. 놓아라. 비워라.

모든 괴로움의 원인은 집착에 있다.
집착이 있으면 반드시 그곳에는 괴로움의 씨앗이 있다.
돈도 명예도 사랑도 소유도 성공도 지식도 가치관도 집착할 것이 못 된다.
모든 수행의 핵심, 모든 행복한 삶의 핵심은 무집착에 있다.

변한다는 이치를 받아들이면 집착할 것이 없음을 알게 된다.
모든 집착을 놓는 자리가 부처자리요 영성이 충만해지는 자리다.
아상을, 집착을, 욕망을, 번뇌를, 소유를, 생각을 놓고 비워라.
비우면 채워지고, 놓으면 잡히며, 버렸을 때 전체를 잡을 수 있다.

텅 비면 충만하다.

∎ ‘지금 죽을 수 있는가?’ 죽을 수 없다면 이유를 10가지 적어보라. 그것이 바로 가장 큰 내 집착의 실체다.
∎ 괴로운가? 그렇다면 그 원인은 무언가에 대한 집착에 있다. 집착의 실체를 찾아보라.
∎ 내 욕망과 집착의 목록을 만들라. 욕망을 버리기 쉬운 것부터 지워본다.

3. 지금 이 순간에 깨어있으라. 관하라.

생각을 과거나 미래로 내보내지 말라.
오직 지금 이 순간을 지켜보라.
‘지금 여기’에 집중하라.
객관의 관찰자가 되어 나를 바라보라.
한 발자국 뒤에서 나를 지켜보라.

내 생각, 느낌, 몸, 호흡, 그리고 대상을 아무 판단 없이
다만 지켜보고 관찰하라.
지금 이 순간에 깨어있을 때
비로소 내 안 깊은 곳의 신성을 불성을 일깨우게 된다.
영성이 충만해지고 존재는 깊은 휴식에 든다.

깨어있는 관수행이야말로 깨달음의 요체다.

∎ 아침 저녁으로 10분 좌선에 들어 마음을 무심하게 바라본다.
∎ 하루 일과 중 ‘3분호흡관’으로, 들숨과 날숨에 숫자를 붙이며 호흡을 관찰한다.
∎ 화날 때 화부터 내지 말고 화내기 직전 호흡을 10번 크게 들이 쉬고 내쉬며 마음을 가라앉히고 난 뒤에 화를 내더라도 낸다.

4. 부처님께 하느님께 모든 것을 맡긴다. 자연의 흐름에 맡긴다.

내가 무엇을 한다는 생각을 버리라.
나는 없다. 오직 본연의 성품이 있을 뿐.
내가 한다고 하면 내가 괴롭고 즐겁지만
모든 것을 맡기면 괴로울 것도 즐거울 것도 없다.

늘 한결같이 살 수 있다.
모든 것을 맡기고 자연스럽게 살라.
자연의 흐름, 진리의 흐름에 내 몸을 맡기라.
일을 할 때도 자연스런 분위기와 흐름을 타고
자연스럽게 되어지는 것이 가장 좋다.

∎ 3번 이상 권유하고 시도해서 안 되는 것은 자연스럽지 않은 것, 포기할 수 있는 용기도 필요하다.
∎ 모든 것을 ‘내 일이 아닌 부처님 일’ ‘하느님 일’이라고 생각하고 맡긴다.
∎ 잘 되든 못 되든 상관하지 말고 당신이 하시는 일이니 더 큰 의미가 있을 것이라 생각하라.

5. 사랑과 자비를 베풀라. 나누어 주라.

‘내 것’이란 없다.
잠시 나에게로 흘러왔다가 흘러갈 뿐이다.
그것을 흐르도록 두라.
내 안에 가둬 쌓아두지 말라.

소유든, 사랑이든, 마음이든, 가르침이든 이웃과 함께 나누라.
끊임없이 자비와 사랑을 베풀라.
베풀되 베풀었다는 상 없이 베풀라.

베풀어도 사실은 베푼 것이 아니라
잠시 이쪽에서 저쪽으로 인연따라
정확히 필요한 곳에 가 닿을 뿐이다.

준다는 것은 곧 받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주면 받게 되고,
준 바 없이 주면 무한한 복을 받게 된다.

∎ 월급을 받으면 일정액을 떼어 순수하게 베풂을 위한 몫으로 정해두라.
∎ 돌려받을 수 없는 곳, 받을 수 없는 사람에게 베풀자.
∎ 매월 좋은 책을 10권씩 사서 버스기사, 회사 동료, 이웃들에게 아무 이유 없이 주자.

6. 적게 생각하고 많이 행동하라. 생각날 때 바로 저질러라.

될 수 있다면 머리를 적게 굴리는 것이 좋다.
생각은 본연의 진리를 막아선다.
생각과 판단을 줄이면 삶이 선명해지고 명료해진다.

많이 생각하기 보다는 많이 저질러라.
행동은 깨달음의 지름길이란 말이 있다.

∎ 도움을 주고 싶은 생각이 일어나면 바로 주라. 생각이 많으면 주지 못한다.
∎ 한 생각 번뜩이는 아이디어가 떠오를 때 바로 저질러라.
∎ 오랫동안 마음만 있었지 용기를 내지 못한 것이 있다면 저질러보라.

7. 내 생각을 남에게 주입하지 말라. 고집을 버리고 활짝 열려있으라.

어떤 한 가지 생각에도 전적으로 고집하지 말라.
언제든 바꿀 수 있는 유연성을 키워라.
어떤 가르침도, 어떤 사상도 다 받아들일 수 있을 만큼 가슴을 열어라.

어떤 사람에게도 배울 수 있는 자세를 가지라.
내 생각이 옳을 수 있다면 다른 사람의 생각도 옳을 수 있다.
내 생각을 상대에게 주입하지 말라.

∎ 전혀 새로운 분야의 책도 한번쯤 사서 읽어 보고, 나와 생각이 맞지 않는 사람의 말도 한번쯤 수용하는 자세로 들어보라.
∎ 나보다 못한 사람에게 배울 수 있는 점을 찾으라.
∎ 다른 종교의 성전을 읽어보라.

8. 부족하게 불편하게 산다. 아끼고 절약한다.

자식을 실패로 이끄는 가장 확실한 방법은
원하는 것을 다 해주는 것이라는 말이 있다.
가지고 싶은 것을 다 가지고 사는 것 보다
조금 불편하고 부족하게 절약하며 사는 가운데에서
사유의 뜰이 넓어진다.

몸이 불편하면 정신이 깨어나지만,
몸이 게으르고 편한데 익숙해지면 정신의 지평이 축소되고 만다.

또한 아끼고 절약하는 가운데 충만한 복이 깃든다.

∎ 집에 있는 쓰지 않는 것들을 모아 필요한 곳에 나누어 준다.
∎ 무언가를 살 때는 이것이 욕망에 의한 것인가 필요에 의한 것인가를 살피라. 사고 싶은 것을 바로 사지 말고 좀 나둬 본다.
∎ 아끼고 절약한 만큼을 돈으로 환산하여 저축하고 보시한다.

9. 매일 기도의 시간을 가진다. 수행과 명상을 실천한다.

기도만큼 이 세상에서 가장 순수한 행위는 없다.
물질은 육신에게 필요한 것이지만 기도는 정신에게 필요한 것이다.
물질은 이번 생으로 끝나는 것이지만 기도는 다음 생까지 이어진다.

아침 저녁으로 기도와 수행의 시간을 가지라.
아침의 기도는 낮 동안의 재앙을 없애주고
밤의 기도는 밤 동안의 재앙을 소멸시킨다는 말이 있다.

기도와 수행의 시간을 가지는 자에게 충만한 평화가 깃든다.

∎ 매일 아침 기도는 거르지 않는다.
∎ 기도의 본질은 감사다. 매 순간 순간 아무리 작은 일에도 감사의 기도를 드린다.
∎ 주 1회 이상은 자신이 믿는 종교의 성전에서 기도를 한다.

10. 적게 말하고 많이 들어라. 침묵하라.

말이 많아지면 그만큼 허물도 늘어난다.
입이 가벼우면 생각도 가벼워지고 행동 또한 가벼워져
자기 중심을 잡기 어렵다.
입이 화의 근원이고 번뇌의 근원이 된다.

침묵하는 자는 쉬 들뜨지 않으며 가볍지 않고 쉽게 행동하지 않는다.
내 생각과 견해를 상대방에게 말함으로써 인정받고자 하는 생각을 버리라.
침묵 속에 기도와 명상이 있고, 신과 부처와의 대면이 있다.

∎ 상대방의 말을 주의 깊게 경청하고 공감해 주라.
∎ 때때로 말하지 않는 ‘묵언’의 시간을 가지라. 묵언의 하루를 보내는 것도 좋다.
∎ 대화중에 말을 관찰하고, 내가 하루 종일 했던 말의 목록을 적어보라.

11. 자연의 먹거리로 소식하라. 자연치유력을 높인다.

인공적인 것, 가공된 것, 인간의 욕심이 개입된 먹거리는
곧 우리 몸을 혼탁하게 만드는 주범이 된다.
몸이 맑아져야 마음도 함께 맑아진다.

될 수 있다면 자연 그대로의 먹거리가 좋다.
자연의 생명이 담긴 음식은 곧 우리 몸의 자연치유력을 높여주어
온갖 병을 예방해 준다.

또한 음식을 먹을 때는 소식을 원칙으로 한다.
많이 먹을수록 식복이 다해 수명도 줄어든다.
많이 먹으면 정신이 둔해진다.

∎ 가족이 함께 주말농장이라도 찾아 가 자연의 먹거리를 직접 생산해 먹어본다.
∎ 가공식품, 인스턴트식품, 탄산음료 등을 먹지 않는 날을 정하라.
∎ 하루 한 끼 이상은 잡곡밥과 야채, 콩, 감자 등만으로 소식한다.

12. 홀로 있는 시간을 가지라. 외롭고 고독한 시간을 즐기라.

외롭게 홀로 존재한다는 것은
우리 안의 참나를 만나는 소중한 통로가 되며,
그 때 비로소 신과 부처와 대면할 수 있는 시간이 된다.

홀로 있다는 것은 곧 전체와 함께 있다는 것이다.
홀로 존재하는 시간이 많을수록 정신이 내 안에 뿌리를 내린다.

∎ 때때로 홀로 여행을 떠나라.
∎ 하루 중에 아무 생각 없이, 일 없이 다만 홀로 아무것도 하지 않는 시간을 가지라.
∎ 일주일에 몇 일은 집에서 TV를 꺼 두고 지내라.

13. 매일 숲길을 걸으라. 산책의 시간을 가지라.

숲길이나 산길을 홀로 걷는 산책의 시간은
더없이 소중한 자기와의 대면이며
걷는 일 자체가 경행의 수행이 된다.

걸음을 관찰하며 걸으라.
마음을 관찰하며 걸으라.
서서 두 발로 대지 위를 걷는 것이야말로
몸 건강에도 정신 건강에도 큰 도움을 가져온다.

아침 저녁 조용한 산책의 시간에
가장 창의적인 아이디어도 떠오르고,
자신을 되돌아 볼 수 있는 시간도 된다.

때때로 산을 찾으라.

∎ 아침이나 저녁 중 한 때를 정해 가까운 산으로 산책을 나서라.
∎ 주말이면 홀로 혹은 가족과 함께 산을 찾으라. 때때로 지리산을 홀로 종주해 보라.
∎ 숲길을 걸으며 발바닥에 마음을 모아 집중하고 그 느낌을 알아차린다.

14. 자연의 변화를 살핀다. 꽃이 피고 지는 것을 유심히 지켜본다.

자연이야말로 가장 진리와 합일을 이루며 사는 생명이다.
자연과 가까이할수록 우리 마음도 자연을 닮아가고
자연의 지혜를 배우게 된다.
자연의 변화를 지켜보는 일은 곧 마음을 비우는 일이 된다.

∎ 봄부터 겨울에 이르기까지 나무나 야생화를 하나 정해 유심히 관찰하라.
∎ 계절의 변화를 오감으로 느껴보고, 자연 관찰 일기를 적으라.
∎ 식물도감을 가까이 하고 식물의 이름을 알아본다.

15. 자기다운 삶을 살라. 누구처럼 살려고 애쓰지 말라.

남처럼 살려고 애쓰지 말고 독창적인 자기 자신의 길을 걸으라.
'나'라는 존재는 이 세상에 단 하나밖에 없는
유일무이한 진리의 표현이다.
진리가 '나'로써 표현되고 있는 것이다.

모든 사람들이 저마다 자기 자신의 길을 걷는 것이야말로
나로써 피어나는 진리를 꽃피워낼 수 있는 유일한 길인 것이다.

누구처럼 사는 것은 억지스럽지만
나답게 사는 것은 자연스럽고 쉽다.
자기다운 일을 하는 것이야말로
자신이 이 세상에 나온 진리의 목적을 이뤄내는 것이다.

∎ 내가 정말 하고 싶은 일, 나를 행복하게 만드는 일은 무엇인가. 그 일에 에너지를 쏟으라.
∎ 사소한 것일지라도 나의 긍정점을 100가지 이상 찾아보라.
∎ 무엇이든 남과 나를 비교하지 말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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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된 앎은 곧 존재를 변화시킨다.
수첩에 적거나 프린트를 하여
눈이 자주 가는 곳에 붙여 놓고 틈틈이 읽기라도 해 보라.
분명 삶에 변화가 찾아 올 것이다.

가랑비에 옷이 젖듯 은은히 삶 속에 스며들 것이다.
하나 하나의 목록이 어찌 생각해 보면 별 내용 아닌 듯 느껴질 지 모르지만
이 안에 우주의 신비로운 지혜의 소식이 담겨 있다.

모르긴 해도 수많은 종교나 사상, 철학, 성인들의 가르침이
이 속에 고스란히 녹아 있을 것이다.
물론 사람들에 따라 이것이 가지는 의미는 다르겠지만,
어떤 사람은 이 가르침들 안에 깨달음의 씨앗을 발견할 수도 있을 것이고,
또 어떤 사람은 삶을 평화롭고 행복하게 살아갈 수 있는
힘을 얻을 수도 있을 것이다.

그렇다고 억지로 실천하려고 애쓸 필요는 없다.
무슨 거창한 수행을 한다거나,
삶을 변화시키겠다거나 하는 노력을 기울일 것도 없다.

쉽고 단순하게 실천하는 것이 좋을 듯 하다.
다만 틈틈이 반복해서 읽고 사유해 보라.
이 목록이 가지는 좀 더 본질적인 의미를 삶 속에서 찾다보면
어느 순간 무릎을 탁 치게 만드는 작은 깨우침이 찾아 올 지 모른다.

이해되지 않거나, 구체적으로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지,
어떻게 현실에서 실천해야 할지 모르겠더라도 괜찮다.
점차 이해는 깊어질 것이다.

우리 안에 본연의 깨달음이 항상 자리하고 있음을 받아들이기 바란다.
자기 자신의 본래 능력을,
우리 안의 불성이며 신성을 너무 쉽게 무시하지 말라.
반드시 안에서 깨우침의 향기가 피어오를 것임을 믿어도 좋다.

다만 반복해서 읽고 사유해 보라.
그것도 어렵다면 그저 읽기만 해도 좋다.
반복해서 읽다보면 어느새 자신도 모르게 내면 깊은 곳에
몇몇 언어들이 생명력을 일으키며 물결을 일으킬 것이다.

수행이란, 마음공부란 사실 그리 어려운 것이 아니다.
그동안 우리들은 수행과 명상에 대한 너무 높은 울타리를 치고 있었다.
억지스런 노력과 애씀은 오히려 마음을 무겁게 만든다.
수행을 오히려 나와 멀어지게 만든다.

고행주의를 버리라고 했던 부처의 말은
이미 2,500여 년 전에 있어왔지만
그 오랜 시간이 흐른 지금까지도 여전히 수행은
고도의 고행과 노력을 감당해 낼 수 있는
소수의 사람들만 하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수행은 특별한 사람만 할 수 있는
어떤 고난도의 기술이 아니다.
가장 단순하고 쉬운, 너무 쉽고 단순해서 오히려 어렵게 느끼는 것이
수행이요 명상이다.

그러니 그동안 가져왔던 수행에 대한,
명상에 대한 벽을 깨라.

아주 자연스럽게, 아주 쉽고 단순하게,
아주 편안한 마음으로 긴장을 풀기 바란다.
그랬을 때 비로소 우리의 삶은 변화될 수 있다.
내 안의 깊은 휴식의 공간이 비로소 본연의 휴식을 취할 수 있게 된다.

법상,[부자보다는 잘 사는 사람이 되라],도솔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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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법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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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0.07.27 11:53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비밀댓글입니다

  2. Trigun 2011.05.03 10:54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멋진 글입니다. 퍼갑니다.





[가평 현등사와
봉화 청량사의 텃밭]

요즘 환경 문제가
전 세계적으로 크게 대두되고 있는 실정인데요,
그럴수록 더욱 부처님 가르침이
이 오염된 세상에 큰 가르침으로 다가오고 있습니다.

지구 환경을 살릴 수 있는
정신적 대안은 오직 부처님 가르침에 입각한
연기적 삶이요, 자비적인 삶이라는 것이
동서양을 막론하고
생태 불교를 공부하게 하는 이유입니다.

불교환경연대에서
백남석 법사님을 초청하여
'부처님 가르침과 생태운동'이라는
강의를 들었다고 하는데요,
다음은 그 강의 내용입니다.


'부처님 가르침과 생태운동'

사람들은 저마다 남들보다 많은 재물을 소유하고, 소비하려는 욕망을 지니고 있다. 그리고 이러한 욕망을 이루게 되면 행복해 하지만, 욕망을 이루지 못하거나 가진 것을 잃게 되면 괴로워한다.

우리가 소유하고 있거나 소유하고 싶어하는 것은 무엇 하나 영원한 것이 없는데도 불구하고, 내 것이라 집착하면서 근심걱정이 태산과 같다.
행복감은 재물로부터 오지 않으며, 온다 하더라도 일시적일 따름이다. 행복은 기대와 욕망의 충족으로 오기 때문에 밖으로 끝없는 욕망를 충족하기보다는 오히려 욕망를 일으키지 않거나 적게 갖을 때 보다 더 쉽게 얻을 수 있을 것이다.
경제가 발전하지 않은 방글라데시, 네팔, 부탄과 같은 나라의 행복지수가 가장 높다는 것이 이를 증명하고 있다.

사람들의 이러한 끝없는 욕망은 생산력 증대로 이어졌다. 특히 산업사회의 발달과 폭발적인 인구증가는 보다 폭넓고, 치명적인 환경영향을 야기했다. 공업의 발달은 인구의 도시집중을 가속화시켰고, 생산성의 증대와 이동수단의 발달은 원자재와 에너지의 수요를 크게 증가시켜 왔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우리가 살고 있는 지구는 사람들의 끝없는 욕망을 충족시켜줄 수 있을 만큼의 무한한 자원을 보유하고 있지 않다. 그럼에도 끊임없이 개발이라는 미명 하에 한정된 환경 자원을 오염시키고 파괴함으로써 모든 생명의 위기를 초래하고 있는 것이다.

‘황금에 눈먼 인류’라고 표현할 만큼, 사람들은 금을 갖고 싶어한다. 그런데 무수한 금광이 쏟아내고 있는 여러 가지 배설물은 심각하게 고민하지 않고 있는 실정이다. 네바다주에서 금 1온스(31.1035 그람)는 485,000원 하는데, 이 금을 얻기 위해 100톤 이상의 흙을 깎아 내며 30톤 이상의 암석을 채굴하고 있다. 세계적으로 하루에 50만 톤의 흙과 암석을 파낸다고 한다.
더 심각한 문제는 금을 분리하는데 수은과 시안화물을 사용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수은을 사용하는 아말감법과 암석가루를 시안화물 용액에 잠그는 시안법이 이용되고 있다. 이로 인해 식수가 오염되고, 광산주변은 사막화되어 가고 있다.

이미 지구는 심각한 환경 문제에 직면해 있음이 밝혀진 지 오래다. 한 번 배출된 이산화탄소는 대기 중에 100년 간 잔류할 수 있다고 한다. 계속 축적된 이산화탄소 층은 지구를 온실화 하여 해수면을 상승시켰고, 이로 인해 대형 홍수 등 기상이변이 늘어나고 있다.
또한 대기 중 오염 물질은 이미 남한의 300배 이상 되는 넓이의 오존층을 파괴하였고, 이로 인해 자연 생태계뿐만 아니라 질병에 대한 면역력까지 떨어지고 있다. 이미 주변의 많은 사람들이 대기 오염에서 비롯된 기관지, 피부 등의 질환을 앓고 있다.

그리고 산성비와 화학비료로 인하여 비옥한 토양이 사막화되어 가고 있을 뿐만 아니라, 무계획적이고 무차별적인 삼림훼손으로 많은 동식물이 멸종해가고 있다. 그러나 아직도 생태위기는 심각하게 받아들여지는 것 같지 않고, 난 개발은 계속해서 진행되고 있다.

모든 것은 인연의 그물로 연결되어 있다는 부처님의 가르침에 귀 기울이지 않고, 당장 눈으로 확인되는 직접적이고 즉각적인 결과가 없으면 자신과는 관계가 없는 일인 듯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제 환경 문제는 전 인류가 함께 고민해야 할 문제이며, 사고의 전환을 하지 않으면 풀 수 없는 문제가 되고 있다.

하나의 예를 들어 보자. 북극의 빙하는 1만 1천년 동안 녹은 적이 없다고 한다. 그러나 작년(2005년) 미국빙설자료센터(NSIDC)가 밝힌 자료를 보면, 최근 5년 동안에 북극빙하의 25%가 사라졌다고 하며, 앞으로 반세기 안에 빙하가 완전히 사라질 수 있다고 경고했다.
이로 인해 동토(凍土) 대에 묻혀 있는 메탄가스가 대기로 증발하는 사태가 발생할 수도 있다는 것이다. 메탄가스는 이산화탄소보다 20배나 강한 온실가스인데, 동토 대에는 전 세계 메탄 매장량의 4분의 1에 해당하는 7백억 톤이 매장되어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
메탄의 증발은 지구의 온난화를 더욱 가속화시키고, 이는 다시 더 많은 메탄을 방출하게 하는 악순환을 낳는다. 급격한 온난화에 따른 기상재해의 피해액은 헤아릴 수 없을 만큼 엄청날 것으로 추산된다.

수조 달러로 추산되는 북극의 자원을 노려 소위 선진국이라는 나라들이 앞다투어 치열한 각축전을 벌이고 있다. 그러나 녹아 내리는 북극은 인류에게 주는 것보다 잃는 것이 훨씬 많은 대재앙을 안길 수 있다.

이로 인해 러시아 북극권에 자리한 비코프스키라는 작은 어촌마을의 이벤크족 주민들은 최근 해마다 5-6m씩 마을 쪽으로 다가오는 해안선을 속수무책으로 바라 볼 수밖에 없는 현실을 안타까워한다.

조상 대대로 살아온 삶의 터전이 다음 대에는 바다에 잠길 것이 확실해지기 때문이다. 러시아에는 이런 마을이 457개에 이르고 있다고 한다. 그 뿐만 아니라 북극권의 가장자리에 위치한 페초라 탄전의 13만 명의 보르쿠타시 주민들도 요즈음 불안한 나날을 보내고 있다고 한다.
영구 동토층 위에 건설된 도시 건물의 80%가 지반이 녹으면서 붕괴 조짐을 보이기 때문이다. 북극의 온난화가 가속화되면서 4백만 명이 거주하고 있는 북극권 8개국의 삶의 터전이 사라질 운명에 처해 있다.

빙하가 녹기 시작하자 이를 걱정하며 대책을 마련하기보다는 전 세계 석유 및 가스의 4분의 1 이상이 매장된 것으로 추정되는 에너지 자원의 보고인 북극을 차지하려는 경쟁이 불꽃을 튀기고 있다. 노르웨이 북쪽 해안에서만 시추기지가 50여 개나 건설되었다. 작년(2005년) 북해에서 바렌츠 해를 거쳐 유조선으로 운반된 석유는 1억 4천 6백만 배럴이다

유엔은 2001년 보고서를 통해 북극 지역의 15%만 개발권에 있으나 2050년에는 80%로 늘어날 것이라고 예측했다. 생태계 파괴를 견디다 못해 얼음과 사냥만을 알던 에스키모족들은 지난해 변호사를 고용해, 미국 정부를 상대로 소송을 제기했다. 에스키모 마을 하나를 옮기는 데는 1억 달러(약 1천 55억 원) 이상이 든다고 한다.

북극처럼 아프리카의 호수도 문제가 심각하다. 677개에 달하는 아프리카 호수 대부분이 수자원을 부분별 하게 남용하고 있으며, 가뭄 등 기후 변화와 부적절한 댐 건설로 몸살을 앓고 있다는 것이다.

차드, 카메룬, 나이지리아, 니제르 4개국에 걸쳐있는 차드호는 현재 수량이 1960년대의 5% 정도에 불과하다고 추정되고 있다.

중국의 문제 한 가지를 살펴보면, 2004년 한해 동안 45억 개의 일회용 나무젓가락을 사용했다고 한다. 이 나무젓가락을 만들이 위해서는 잘 자란 나무 2천 5백만 그루가 필요하다고 한다.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불교적인 세계관을 바르게 정립하고, 이를 바탕으로 하여 생태계 위기를 극복할 수 있는 방안을 마련해야만 한다.


1. 선형인과율과 상호인과율

부처님 당시 바라문교도나 사문들은 ‘원인은 결과를 낳지만, 결과는 원인에 아무런 영향을 줄 수 없다’는 선형적 단일 방향의 인과율을 주장했다. 이러한 패러다임에서는 제일 원인이 무엇이냐가 매우 중요하다.

바라문교에서는 제일 원인이 창조주인 브라흐만이라 주장했고, 사문들은 다양한 요소라고 주장했기 때문에 대립하지 않을 수 없었다. 즉 바라문교에서는 세계가 브라흐만의 전변이라 했고(轉變說), 사문들은 다양한 요소들의 집합이라고 했다(積聚說).
이들의 주장처럼 세계가 불변의 자기 동일성을 지닌 실체로서 존재한다면 두 가지 주장 가운데 하나를 선택할 수밖에 없다. 이러한 이유로 바라문교도와 사문들은 대립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석가모니부처님은 이들이 주장한 행위의 주체인 자아의 존재를 부정했다. 그 이유는 인지하거나 행위 하는 자아는 실체로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며, 조건에 의해 나타났다가 사라질 뿐이라는 진리를 깨달았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부처님은 선형적인 인과율의 모순을 지적하면서, 모든 것들은 상호의존관계에서 존재한다고 하였다. 이를 일컬어 ‘연기법’이라고 한다.

연기법이라는 상호인과율에서는 자아와 세계, 인간과 자연, 정신과 물질 등을 주체와 객체라는 이원화된 별개의 실체로 보지 않고 행위를 통해 서로 영향을 주고받는 관계로 본다.

칼루파하나 박사가 지은 <싯다르타의 길>(재연스님 역)에 보면, 석가모니 부처님은 다음과 같이 말씀하고 있다.

“우리가 경험하는 모든 사물은 다양한 조건에 의지하여 발생된다. 새싹은 종자의 번식력과 유효한 습기, 흙의 정기에 의존하여 발생한다.
종자에서 움이 텄을 때, 우리는 새싹을 발생시킨 배경을 살펴보고 이러이러한 조건들이 싹을 틔웠다고 말한다. 만일 싹이 틔워지지 않았을 경우에는 이러이러한 조건이 결핍되었으며, 따라서 싹이 띄지 않았다고 단정한다. 이것이 바로 의존적 발생의 원리, 즉 연기의 법칙이다.
이것이 존재함으로써 저것이 생겨난다. 이것이 소멸함으로써 저것이 소멸된다. 이것이 바로 사물의 본성이 생성되는 방식이다.”


2. 인드라망의 생태계

부처님의 말씀처럼 생명의 본질은 상호의존성(interdependence)에 있다. 따라서 이 세계는 인드라망(因陀羅網), 즉 시작도 없고 끝도 없는 여러 조건의 연쇄적인 그물 망으로 표상 된다.
인드라망이란 제석천이 머물고 있는 궁전을 장엄하고 있는 망(網)을 가리키는데, 이 망(網)의 각각의 코에 달려 있는 보주(寶珠)들은 저마다 다른 모든 보주의 그림자를 비쳐 무한히 교차 반영된다.

이처럼 생태계는 생명의 그물(web of life)이라는 거대하고 복잡한 관계들의 연결망(network) 속에서 상호관련 되어 있다. 따라서 어떠한 생명이든 원래부터 타고난 자기 고유의 불변적인 어떤 것(본질, essence)이 아니며, 시간과 공간적 인연에 의한 잠정적인 어떤 것이다.

린 마굴리스와 도리언 세이건은 <생명이란 무엇인가>란 책을 통해,

“생물은 자기 완결적이고 자율적인 개체라기보다는 오히려 다른 생물과 물질과 에너지 그리고 정보를 교환하는 공동체이다. 우리는 숨 쉴 때마다 느리기는 하지만 역시 호흡하는 생물권의 나머지 생물들과 연결된다”고 했다.

여기 한 알의 콩이 있다고 가정할 때, 이 콩은 종자인가? 아니면 열매인가? 결론을 말하면 이 콩은 종자이자 열매인 것이다.

의상스님은 <법성게>를 통해 이렇게 말씀하고 있다.

법성원융무이상(法性圓融無二相) 제법부동본래적(諸法不動本來寂)
무명무상절일체(無名無相絶一切) 증지소지비여경(證智所知非餘境)
진성심심극미묘(眞性甚深極微妙) 불수자성수연성(不守自性隨緣成)
일중일체다중일(一中一切多中一) 일즉일체다즉일(一卽一切多卽一)


3. 나와 우주는 한 몸

모든 생명은 네 가지 요소로 이루어졌다고 하는데, 이를 사대(四大)라 한 다. 사대란 지(地), 수(水), 화(火), 풍(風)을 말하는데, 이는 곧 견성(堅性), 습성(濕性), 난성(煖性), 동성(動性)을 의미하고 있다.
이는 곧 사대의 요소가 없이는 생명이 존재할 수 없음을 가리키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소중함만 알고 사대의 소중함은 모르고 있다. 자신이 곧 사대임을 깨닫지 못한 결과인 것이다.

우선 사대 가운데 물에 관해 살펴보자. 물은 생명체 활동에 없어서는 안 될 존재이다. 단세포 생물부터 약 100조 개의 세포로 구성된 인간까지 예외가 없다. 35억 년 전 원시바다에 있던 호기성 원핵생물도 물과 이산화탄소로 광합성의 재료를 얻었다. 호기성 원핵생물은 현재 생명체의 모든 세포 속에 존재하는 미토콘드리아의 조상 격이라는 게 학계의 정설이다.

물이 없으면 생물이 생겨날 수 없는 까닭은 무엇일까. 물의 여러 가지 특성을 살펴보면 물은 생명활동에 직접적인 영향을 끼칠 뿐만 아니라, 생명체가 활동할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하는 데도 많은 영향을 미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물은 암모니아 다음으로 비열이 큰 물질이다. 물의 온도를 올리는 데는 높은 열이 필요하다는 뜻이다. 다시 말해 외부 온도가 변하더라도 물은 쉽게 온도가 바뀌지 않는다. 그래서 물이 주성분인 생물체도 외부 온도가 올라가거나 내려가도 그것의 영향을 덜 받고 일정한 체온을 유지 한다.

생명유지의 기본은 ‘항상성(恒常性)’이다. 외부 환경의 변화가 있을지라도 체내 조건을 일정하게 유지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와 같이 생명체의 체온 조절에도 물이 중요하다. 물 1그람을 수증기로 바꾸는 데는 약 500칼로리의 기화열이 필요한데, 더울 때 적은 땀이 증발하면서 많은 열을 빼앗아 가므로 체온을 쉽게 내릴 수 있다.

물의 비중이 섭씨 4도에서 가장 무거운 것도 의미가 크다. 대부분의 물질은 온도가 내려갈수록 무거워지지만 물은 4도에서 가장 무거워졌다가 온도가 떨어지면 도리어 가벼워진다. 그래서 물이 0도에서 얼어 얼음이 되면 가벼워지면서 물 위로 떠오르게 된다.
물이 표면부터 어는 것은 이 때문이다. 얼음이 물보다 무거웠다면 호수나 강바닥이 죄다 얼어붙을 뻔했다.

물은 다른 어느 액체보다 점도가 낮다. 물이 끈적끈적하고 걸쭉했다면 피가 모세혈관 속을 흐르지 못했을 것이다. 건강하려면 물을 많이 마시라고 한다. 그것은 피의 점도를 낮춰 잘 흐르게 하기 위함인 것이다. 어느 용매(溶媒)보다 소금을 잘 녹이는 것도 생명체에 중요하다. 소금은 세포막의 대사에서부터 신경에서 일어나는 흥분 전달 등에서 중요한 역할을 맡고 있다.
지구에 있는 물 가운데 민물(담수)은 고작 2.5%(나머지는 바닷물)에 지나지 않고, 그것도 빙하나 지하수로 묶여 있어 자유롭게 쓸 수 있는 물은 0.01%에 지나지 않는다고 한다.

유엔은 2006년 3월 16일 멕시코 수도 멕시코시티에서 개막된 제4차 물 포럼을 앞두고 ‘물-공유된 책임’이라는 보고서를 내놓았다. 584족의 방대한 이 보고서에는 전 세계에서 진행되고 있는 물 부족, 수질오염, 홍수피해 등 다양한 물문제가 담겨 있다.
이보고서는 특히 “21세기 들어 물 분쟁이 에너지 분쟁보다 많아질 것”이라고 경고했다.

“2030년이면 전 세계 30억 명이 물 부족을 겪을 것이다. 현재도 세계 인구의 20%인 11억 명이 더러운 물을 마시고 있다.”
“물 공급의 양극화도 심각해져 미국과 아프리카 잠비아의 1인당 물 소비량은 120배 이상 차이가 난다.”

‘세계 물의 날’인 3월 22일까지 계속된 이번 포럼에는 세계 각국의 정부 관리와 전문가, 비정부기구 관계자 1만여 명이 참석해 물 문제 해결 방안을 모색했다.
유엔 보고서는 지난 세기 세계 인구는 2배 증가한 반면 물 사용량은 6배나 늘었다고 밝혔다. 인구 증가에 맞춰 2030년까지 세계 식량공급이 현재보다 55% 늘어나면 물 사용량은 더 급격히 증가해 30억 명이 물 부족을 겪을 것으로 전망했다.
또한 11억 명(세계 인구의 20%)이 깨끗한 물을 마시지 못하며, 인구 대국인 중국과 인도의 물 위생 문제가 심각하다고 지적했다. 특히 선진국과 개도국 사이의 물 공급 양극화도 더 심화되고 있다는 것이다.

미국은 1인당 하루 500L의 물을 소비하지만 아프리카 잠비아는 4.5L, 말리는 8L에 불과하다. 유엔의 최소 권장량인 50L에 훨씬 못 미친다.
이와 함께 전 세계 도시 인구가 현재는 50%에 못 미치지만 2030년에는 75%가 넘을 것으로 보여 도시 빈민층에 대한 식수 공급 문제가 더욱 심각해질 것으로 내다봤다.

물은 또 식량 및 공업 생산과도 직결된다. 따라서 물을 확보하려는 국가 간, 지역 간 갈등은 점점 심각해지고 있다. 지구촌에서 갈등이 심각한 곳은 요르단 강과 나일 강이 흐르는 지역이다.
1967년 제3차 증동전쟁의 한 원인은 시리아가 요르단 강 상류에 댐을 건설하려 한 데 있었다는 분석도 있다. 1970년대 초반부터 시작된 이집트 수단 등 아프리카 8개국의 나일 강 쟁탈 분쟁은 아직도 계속되고 있다. 터키와 시라아, 이라크는 유프라케스 강을 두고 있다. 그리고 중국과 인도는 브라마푸트라 강을 두고 첨예하게 대립하고 있다.

21세기 들어 5만에서 30만 명의 희생자와 250만 명의 난민을 초래한 수단 다르푸르 대학살도 물 부족이 한 원인이다.
2개국 이상을 지나는 국제 하천은 50개국에 241개이고, 세계 인구의 40%가 인접국의 물에 의지하고 있다.

이 보고서는 경쟁적으로 댐을 쌓아 물을 확보하려는 나라 간 경쟁으로 강의 생태계가 파괴되고 수자원이 급속히 고갈되고 있다고 지적했다.

물뿐만 아니라 우리가 낭비하고 있는 종이를 놓고 보더라도 그러하다. 따라서 한 장의 종이가 곧 우주임을 알아 소중하게 다루어야 한다. 그 까닭은 한 장의 종이가 만들어지려면 우주의 모든 것이 동원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우주의 모든 에너지가 모여 한 장의 종이로 그 모습을 나타내 보인 것이다.

따라서 자신을 소중하게 생각한다면 다른 모든 것을 자신의 몸처럼 소중하게 생각하고 다루어야만 한다.

<법구경> ‘올바름의 장’에 보면,
부처님께서는 “살아있는 생명을 해치는 사람은 결코 위대한 성자가 될 수 없다. 이 모든 존재에게 연민의 마음을 느끼는 사람, 그 분이야말로 위대한 성자가 아니겠는가”라 하셨다.


4. 생태계 위기의 극복 방안

부처님께서는 사람의 목숨은 호흡(呼吸)하는 사이에 있다고 하셨다. 즉 숨을 내쉬고 들이마시는 사이에 목숨이 달려 있다는 말씀이다.

우리가 자주 사용하는 말 가운데 호흡과 같은 어순으로 사용되는 말이 있는데, 곧 매매(賣買), 수수(授受), 거래(去來) 등이다. 이 말은 글자 그대로 팔고 삼, 주고받음, 가고 옴이다.
이 말들의 공통적인 숨겨진 의미를 살펴보면 ‘받기 전에 먼저 주어야 한다’는 깊은 뜻이 담겨져 있다. 생각해 보자. 모두가 받기 전에는 주지 않겠다고 한다면 어느 누가 받을 수 있겠는가. 그러나 모두가 받기에 앞서 먼저 주려고 한다면 저절로 받게 될 것이다.

이러한 이치를 바로 깨달아 물과 공기와 토양을 이용하기에 앞서, 먼저 그 생명을 살리는 데 관심을 가지고 많은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중중무진으로 얽혀 있는 깊은 인연을 살펴 볼 때, 내가 살고자 하면 다른 생명들도 잘 살 수 있게 해야만 한다. 그 뿐만 아니라 생태계를 파괴하거나 교란하지 말고 영구 보존해야만 한다.

너와 내가 둘이 아닌 이치(不二)가 바로 여기에 있는 것이다. 생태계 문제는 이와 같은 방식으로 접근해야 한다. 지금은 생활형편이 어려우니 ‘좀더 풍족해지면 생태계문제에 신경 쓰겠다’ 거나, 남들이나 후손이야 어떻게 되든 나만 편하게 잘 살면 된다는 생각은 공멸로 가는 지름길이다.
자녀를 진정으로 사랑한다면 지금 보다 나은 생태환경을 물려줄 수 있도록 보존하고 아껴야만 한다. 그렇지 못하다면 최소한 지금 우리가 누리는 만큼이라도 누릴 수 있도록 유지시켜야 한다.
이와 같이 이 시대의 빈부간, 지역간, 국가간의 문제로만 보고 해법을 찾기보다는 미래세대와 세대간의 형평과 균형을 유지하려는 노력도 기우려 나가야만 한다.
Posted by 법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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