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려워하지 말라.

진실은,

두려워 할 것은 없다는 것이다.

두려워할 것은 세상 어디에도 없다.

다만 우리 스스로 두려움을 만들어 낼 뿐!

 

이 우주의 근원의 에너지는

언제나 사랑이요, 무한한 자비다.

실체라는 말 자체를 그다지 좋아하지 않지만

그 말을 써야 한다면,

우리가 유일하게 쓸 수 있는 것은

자비와 사랑이라는 말 뿐일 것이다.

 

자비와 사랑이야말로 이 우주의, 우리라는 존재의

근원적 실체다!

나라는 존재의

근원을 이루는 에너지 파장은

오직 ‘사랑’이요 ‘자비’일 뿐이다.

 

그 어떤 존재도,

그 어떤 신도,

그 어떤 염라대왕이거나,

그 어떤 진리의 다르마도,

당신을

두려움에 떨게 할 수는 없다.

 

그들은, 그 분들은,

성스러운 붓다며 신은,

우리 나약한 인간들을

시험에 들게 하지 않는다.

 

인간에게 벌을 주기 위해

온갖 지옥을 만들어 내거나,

온갖 고통을 만들어 내거나,

인간을 단죄하기 위한

온갖 다양한 틀을 만들어 내지 않았다.

인간이 두려움에 떨어야 할

그 어떤 장치도 만들어 내지 않았다.

 

인간답지 못한 인간,

도덕적이지 못한 인간,

신을 믿지 못하는 인간,

계율을 지키지 못하는 인간,

온갖 악행을 일삼는 인간,

성적으로 타락한 인간,

그 어떤 최악의 인간들을 처단하고 벌주기 위해

가장 고통스럽고, 가장 무시무시하며,

두려움에 벌벌 떨 만한

이름만 들어도 소름이 돋고 전율이 이는

그런 지옥을, 지하세상을 만들어 내지 않았다.

 

그것을 만들어 내는 것은

오직 우리 자신일 뿐!

오직 인간의 생각일 뿐!

인간의 욕심일 뿐!

 

부처는

다만 무한한 자비 그 자체이며,

신은

무한한 사랑 그 자체일 뿐이다.

 

그 분들은

인간을 단죄하고자 하는

그 어떤 의지도 계획도 가지고 있지 않다.

 

신은, 붓다는

오직 순수한 사랑일 뿐!

단죄하는 분이 아니다.

 

방편으로

계율을 율법을 지키라고,

죄를 짓지 말라고,

주의를 주기는 하셨을 지언정

그것을 어겼을 때

벌하기 위한

그 어떤 특단의 조치도 취하는 것에는

관심이 없는 분이시다.

 

다만 그 모든 인간의 악행들을

아무런 판단도 없이 지켜보실 뿐!

 

그 분들의 시선에서는

악행, 선행이라는 차별이 없다.

다만 사랑으로 지켜보실 뿐이다.

 

선악을 넘어선 분이

선악을 구분지어 놓고

그 가운데 악을 행한 자만을 단죄하고

선을 행한 자를 선물주기 위해

어떤 특별한 조치를 취한다고 생각하는가?

 

그것은 우리 인간들의 생각일 뿐이고,

우리 멋대로 지어낸 신에 대한, 절대자에 대한

바람이고 환상일 뿐이다.

 

신은, 붓다는, 절대자는

아무런 판단도 없이

일체 모든 이들을 위해

다만 오직 사랑과 자비만을 준비해 두고 있다.

 

아니 신은, 붓다는, 이 우주는

그 자체가 사랑이요, 자비일 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인간들의 의식 속에는

지옥도 있고,

두려움도 있고,

고통도 있으며,

무시무시하고 소름돋는

최악의 지옥이 있다.

 

가짜로 있다.

실체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의식 속에

인연 가합으로 존재할 뿐이다.

그것은 누가 만들어 냈는가?

 

그렇다.

신이 만들어 낸 것이거나,

붓다가 창조해 낸 것이 아니라,

바로 나 자신이,

우리 인간이 만들어 내었다.

 

가짜로.

생각으로 만들어 냈다.

그러나 생각은 에너지를 갖는다.

생각이 바탕이 되어 삶을 창조한다.

그러나 그렇게 창조된 가짜 세상일지라도

그것은 인간들에게 마치 진짜 같이 느껴진다.

 

고통도 진짜고,

지옥도 진짜고,

모든 것이 진짜처럼 생생하게 이어진다.

 

그러나 더 깊은 차원의 진실은,

그 모든 것은 거짓이라는 것이다.

그것은 없다.

오직 사랑만이 있고,

오직 무한한 자비와 연민만이 있을 뿐!

 

그러니

걱정하지 말라.

두려워하지 말라.

삶을 두려워하지 말고,

죽음을 두려워하지 말라.

 

두려워하면 두려워하는 바로 그것이 창조된다.

죽음을 두려워하는데 에너지를 쏟지 말고

삶을 사랑하는데 마음을 쏟으라.

두려워할 것이 없는 본연의 사랑이라는 세상에

생각으로 두려운 것들을 창조해 내지 말라.

 

세상이 당신에게 알려준,

종교가 당신에게 알려준,

사람들이, 선생님들이, 종교인들이 당신에게 알려 준

원죄에 속지 말라.

 

그것은 어디까지나 방편이었다.

삶은 두려워할 무엇이 아니다.

죽음 또한 두려워해야 할 무언가가 아니다.

그것은 무한한 사랑이다.

무한한 아름다움이며, 무한한 지고의 기쁨이다.

 

죄를 지으면 지옥 간다고 했던

그 가르침이

우리에게 두려움을 안겨 주었다.

 

계율을 범하지 말라는,

율법을 어기지 말라는

그 가르침이

우리에게 죄의식을 안겨 주었다.

 

그러나 거기에 속지 말라.

신이 우리를 단죄한다고?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고,

심판을 한 뒤 몇몇은 지옥으로 던져버린다고?

계율을 어기면 지옥에 간다고?

 

지옥은 없다.

죄 또한 없다.

그렇기에

두려워해야 할 그 어떤 것도 없다.

 

이렇게 말하면 사람들은 항변할 것이다.

그렇다면, 지옥이 없고, 죄 또한 없다면

잘못을 저질러도 되고,

악행을 저질러도 상관이 없다는 말인가?

 

물론 상관이 있다.

물론 지옥에 떨어진다.

큰 고통을 받게 된다.

그러나 그것은 신이 준비해 둔 것이거나,

부처님께서 만들어 놓은 곳이 아니며,

더욱이 그 곳은 실체적인 곳이 아니다.

 

똑같은 상황이

어떤 사람에게는 지옥을 경험하게 하는가 하면

어떤 사람에게는 천상을 경험하게 하지 않는가.

어떤 사람은 연봉 3,000만원이 괴로움이지만,

어떤 사람은 그것이 한없는 즐거움이지 않은가.

 

배가 터지도록 부른 사람에게

자장면 곱빼기는 고통을 가져오지만

배가 고픈 사람에게는

그것은 천국과 같은 말이기도 하다.

 

고통을 받지만

그 고통은 자신 스스로 만들어 낸 것일 뿐이다.

 

지옥에 떨어지지만

그 지옥은 실체적인 어떤 영역에 신이 만들어 둔

절대적인 영역이거나, 절대적인 곳이 아니라

다만 스스로 만들어 내고

스스로 그 곳에 빠져 괴로워하기로 선택한 그런 곳이다.

 

스스로 지옥을 만들어내지 않으면

우리는 결코 지옥을 경험할 수 없다.

그러니 있지도 않은 지옥을 생각으로 만들어내어

그곳에 떨어지면 어쩌지?

죽고 나서 지옥에 가는 건 아닐까?

하고 두려워하지 말라.

 

두려워함으로써 있지도 않은 지옥을

스스로 만들어 내지 말라.

 

우리가 두려움에 떨면

그 두려움으로 인해

두려운 세상을 창조한다.

지옥에 가게 될까봐 걱정 근심을 한다.

 

누구나 죄를 지었기 때문에

마음 속에는 지옥에 갈 것에 대한 두려움이 자리잡고 있다.

바로 그 두려움이 지옥을 창조해 낸다.

 

그러니 두려움에 떨지 말라.

두려움으로 인해 지옥을 창조해 내지 말라.

두려운 마음이 지옥을 만들고,

죄의식이 죄를 만든다.

 

마음 속에

지옥을 품지 말고,

두려움을 품지 말고,

죄의식을 품지 말라.

그것을 품음으로써 그것을 창조하지 말라.

 

대신에

마음 속에

무한한 사랑을 품으라.

무한한 동체대비의 자비로움을 품으라.

 

신은 무한한 사랑이며,

붓다는 무한한 자비로움이다.

 

죽음을 두려워하는 대신

죽음을 사랑하라.

죽음이 두려운 것이라고 말한 사람은

죽음을 경험해 보지 못했다.

오히려 죽음을 경험해 본 사람은

죽음은 경이로운 것이라고 말한다.

 

삶을 두려워하는 대신,

미래를 두려워하는 대신,

지은 죄를 두려워하는 대신,

삶을

자신을 무한히 사랑하라.

 

삶도 죽음도 경이롭다.

그 둘은 둘이 아니며

그것은 사랑이라는 동전의 양면이다.

 

우리가 아무리 달려갈지라도,

아무리 벗어나려고 애쓸지라도,

혹은 아무리 도달하려고 애쓸지라도,

우리는 언제나

사랑을 향해 달려갈 수 있을 뿐이다.

 

두려워하지 말라.

나 자신을 사랑하라.

네 이웃을 사랑하라.

주어진 삶을 사랑하라.

다가올 미래를 사랑하라.

진리를, 신을, 붓다를 사랑하라.

 

오직

다만

사랑이기만 하라.

 

두려움도,

고통도,

죄의식도,

근심 걱정도,

지옥도,

죽음도

모두

사랑으로 감싸 안으라.

사랑 안에 녹아내리게 하라.

 

본래부터 그것은 없던 것이고,

가짜일 뿐이니,

진짜로 가짜를 품어 안으라.

 

사랑할 때,

사랑이 창조된다.

아니 본래 사랑이었음을 보게 된다.

 

우리의 삶의 여정은

언제나 사랑으로부터 출발하여

사랑을 향해 도착할 뿐이다.

 

영적인 진보,

수행의 완성,

그것은 곧 잊고 있었던 사랑을 되찾고,

사랑이라는 근원의 고향으로 돌아가는

숭고한 귀의(歸依)의 여정을 뜻한다.

 

우리 모두는

머지않아

사랑과 하나될 것이다.

무한한 자비로움을 체험할 것이다.

 

두려움이라고 불리우는

가짜에 속아오던 것을 깨닫는 순간,

바로 사랑과 자비의 파장으로 춤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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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김미정 2010.04.29 08:35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너무나 좋은 글, 마음으로 읽고 있습니다.







어떤 보살님께서
불법이 담겨 있는 책들을 항상 가까이 놓아두고
자주 읽어본다고 하시는데
때때로 신기한 것을 경험한다고 하신다.

때때로 자식 문제로 고민이 있다거나,
남편과의 다툼이 있었다거나,
혹은 사회생활에서 흔히 마주칠 수 있는 고민들로
답답해 하면서 답을 찾다가
우연히 책의 아무 페이지나 펼쳐 볼 때,
종종 마침 바로 거기에 그렇게 궁금해 하던 답변이 쓰여져 있다는 것이다.
마치 나를 위해 설법한 것처럼 생생하게 말이다.

이런 일은 누구에게든 때때로 일어난다.
우리가 어떤 궁금한 것이 있어서 답을 찾고 있었는데,
마침 모처럼 켠 TV에서 그와 관련된 프로그램을 하기도 하고,
우연히 펼친 신문에서
평소 같으면 그저 지나쳤을 작은 기사 속에서 그 답을 찾게 되기도 한다.

또 우리가 새롭게 무언가를 공부하게 되었다고 했을 때,
그 전에는 그 공부한 것들이 전혀 눈에 띄지 않았다가
내가 무언가 새로운 것을 공부하자마자
갑자기 그런 내용들이 TV를 켜면 TV에서 나오고,
책을 보면 책에서 나오기도 하고,
어떤 사람이 우연히 그 얘기를 하기도 하고,
내가 이것을 공부하지 않았으면 망신당할 뻔 했구나 싶을 때도 있는 등으로
동시적으로 현실에 나타나게 되기도 한다.

아주 쉽게는 내가 누군가에게 전화를 하려고 수화기를 드는 순간,
바로 그에게 전화가 오는 것 또한 이런 작은 예일 수 있다.

이것을 칼 융은 동시성(同時性)으로 설명하고 있다.
칼 융이 한 여인을 치료하는데,
그 여인이 하루는 풍뎅이 꿈을 꾼 얘기를 하는 것이었다.
칼 융은 그것이 고대 이집트에서 환생을 상징한다는 것을 떠올리며
환자의 무의식이 심리적 재탄생을 겪을 때가 왔음을 직감하고 있을 때
창문 밖에 풍뎅이가 날아온 것이다.
물론 융은 그 때가 그곳에서 풍뎅이를 본 유일한 때였다.

이러한 ‘의미 있는 우연의 일치’를 동시성이라고 하는데,
이는 사실 더 깊은 차원, 감추어진 질서에서 보면 우연이 아니다.

물리학자 데이비드 피트는 이러한 융의 동시성이
‘감추어진 질서’를 뒷받침하는 증거라고 본다.
겉에 드러난 눈에 보이는 세계가 전부가 아니라
그 이면에는 감추어진 질서가 있으며,
그 감추어진 세계에서는 모든 것이 서로 연결되어 있다는 것이다.

봄의 견해에 따르면 만물이 비롯되는 근원인 감추어진 질서 속에서는
마음과 물질이 전혀 분리되어 있지 않으며,
서로 연결되어 있다고 믿는다.
모든 것은 연결되어 있는
‘더 깊은 차원’ ‘감추어진 차원’에서 다루어진 일이지
결코 우연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렇다. 이 세상에 우연은 없다.
우리 눈에 우연으로 보일 수는 있겠지만,
더 깊은 차원의 법계에서는 분명한 이유를 가지고 그 자리에 온 것이다.
우리의 깊은 차원은 인다라망 그물코처럼 우주 전체와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그 모든 것은 우연이 아닌 정확한 인연으로 바로 그 자리에 오게 된 것이다.

더욱이 그 감추어진 질서라 불리우는,
우주법계의 근원적 질서에서는 모든 것이 완벽하게 갖추어져 있다.
어떤 것도 부족함이 없다.

부처님은 새로운 진리를 만들어 내신 분이 아니라,
온 우주의 더 깊은 이면에 담겨 있던 본래 완전했던 진리를
다만 발견하신 분이라고 했다.

사실, 진리는 온 우주에 충만하게 꽉 차 있다.
그리고 우리는 그것을 동시성이라는 방식으로 때때로 체험하곤 한다.

우리는 질문을 던지면 언제든 진리의 차원에서 그 답을 들을 수 있다.
‘나는 누구인가’, ‘이뭣고’ 하고 질문을 던지고 답을 찾는
화두선의 방법 또한 이러한 바탕 위에서 성립되는 수행법이다.

그래서 피트는 동시성을 자연의 배후에 감추어져 있는
광대한 질서를 힐끗 엿볼 수 있게 하는 찰나적인 틈새라고 믿는다.

바로 그렇다.
이 겉에 드러난 몽환포영(夢幻泡影)의 세계 이면에
완전하고 충만한 진리가 투명하게 드러나 있다.

다만 우리의 아상과, 아집, 탐진치 삼독과 무명이
그것을 바로 보는 것을 제한할 뿐이다.
그러나 잠시라도 마음을 쉬고, 내면을 살펴 본다면
그 무한한 진리의 세계를 힐끗 엿보게 될 수 도 있을뿐더러,
그 세계와의 깊은 연결을 이룰 수도 있으리라.

삶의 본질에 이르고 싶다면,
깨달음을 얻고 싶다면,
마음을 비우고 질문을 던지라.

세속적인 질문에서부터 진리에 이르기까지,
그 모든 해답을 법계에서는 항상 준비해 두고 있다.
다만 우리가 보지 못할 뿐!

질문을 던지면 우주법계는 언제나 거기에 답을 할 것이다.
물론 그 답변은 꼭 현자의 입을 통해서만 나오는 것은 아니다.
책이나, 신문에서, 아이들의 말 한마디에서, TV에서나,
아니면 문득 내면에서 올라오는 직관을 통해서도 나올 수 있다.

그 모든 가능성을 열어두고,
마음을 닫아 걸지 않는다면,
활짝 열린 맑은 정신 안으로 진리가 문을 두드릴 것이다.

스승에게 묻는 것, 부모님께 묻는 것,
친구들에게 묻는 것도 좋은 방법이지만,
이제부터 우주법계의 진리 그 자체에 직접 질문을 던져보는 것은 어떤가.

내면의 진리, 우주법계의 진리에
질문을 던지는 것은 직접적이며 본질적이다.

또한 나를 위해 준비해 둔 법계 본연의 계획에 입각해
무한한 자비와 지혜로써 내리는 답변이 될 것이다.

에둘러 가던 버릇을 돌이켜 내면으로,
법계로 직접 노크 해 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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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실의 어려움으로 고통 받는 이들에게

아, 이렇게 비가 내리고 있네요. 비가 오니까 초록들이 더 싱그러움을 띄는 것 같고, 바람이 불고 비가 오면서 바람도 함께 불다보니까 창밖으로 나뭇잎들이 싱그럽게 오고가는 모습들이 얼마나 보기가 아름답고 생기로운지 모릅니다.

그때그때 사계절의 아름다움이 항상 우리 주변에는 있거든요. 그런데 때때로 고민이 있거나 괴로운 일이 있어서 상담을 하려고 찾아오는 분들이 계시지 않습니까? 그런 분들을 가만히 뵈면 찾아서 걸어 들어오는 그 얼굴에 아주 큰 고민과 번뇌와 안쓰러움이 얼굴 표정에도 묻어납니다.

그런 분들을 뵈면 제 마음이 참 안쓰럽고, 안타깝고, 아프거든요.

이렇게 아름다운 세상에 전혀 눈길 한번 줄 수 없고, 이 아름다음을 누릴 수 없는 가슴을 가지고 찾아오신 것에 대한 안타까움, 이런 것들이 자리하게 되곤 합니다.

그런 분들에게 이를테면 '수행을 하십시오'라고 하고, 당장 빚 독촉 때문에 시달리고 계시는 분한테 '수행하라'고 하거나, 당장 죽을병에 걸린 분이라던가 아니면 부부 관계가 안 좋거나 뭔가 자식이 당장 어려움에 처했거나 세속적인 큰 결정적인 어려움을 가지고 계시는 분에게는 대개 어떤 이야기를 해주어도, 어떤 좋은 부처님 가르침을 말해 드리더라도 그것이 귀에 잘 들리지 않습니다.

때때로 이런 이야기를 하는 사람들을 만납니다.

“수행해라, 기도해라 하는 이야기가 그냥 멀쩡한 사람들한테나 해당되는 얘기지 우리같이 힘들어 죽겠는 사람한테 그런 얘기 하면 되겠습니까, 우린 당장 먹고 살 길이 힘들고 당장 내 앞에 갑갑한 일들이 많은데 그 수행이 어떻고 하는 게 다 팔자좋은 사람들이나 하는 얘기 아닙니까?”

이런 말씀을 들을 때마다 불교의 근본법과 방편법이라는 것에 대해 생각하게 됩니다. 불교의 본질, 근본법에 입각해서 본다면 수행에 대한 담론으로 들어가야 될 것이지만 현실에서는 다양한 방편법들로 이야기 하지 않을 수 없는 일들이 많은 것입니다.

무슨 뜻인가 하면, 우리가 현실 생활 속에서 힘들고 고되고 괴로워하는 다양한 사연을 가진 다양한 사람들에게 부처님 가르침은 먼저 그것부터 어떻게 풀 수 있을지에 대해서 가르쳐주는 방편법으로써 다가서지 않을 수 없다는 말입니다. 다행히도 불교는 다양한 상황에 처해 고통 받고 있는 많은 이들을 위한 다양한 방편 법문을 준비해 두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러한 방편으로써 우선 그 사람의 힘든 일부터 보듬어 주고 그 사람이 살면서 당장에 최소한 필요한 의식주부터 잘 다스릴 수 있도록 해 드려야 할 때가 많습니다. 그래서 뭐랄까 부득이하게 본질적인 근본법보다는 방편법을 더 많이 이야기해야 하는 경우가 많이 생겨나게 되기도 합니다.

 

시크릿을 보는 불교적 관점

제가 오늘 드리고 싶은 말씀이 바로 방편법에 관련된 건데요, 조금 쉽게 말해서 내가 좀 잘 살고 싶고 뭔가 좀 남들만큼 살고 싶은 사람들, 정말 지금 나한테 있어서 나의 목을 콱 조이고 있는 이 힘들고 고된 문제부터 어쨌든 먼저 해결해야 되겠다 싶은 그런 분들에게 들려드리고 싶은 말입니다.

보통 쉽게 이야기하면, 어떻게 하면 삶이 행복해질 수 있느냐, 어떻게 하면 성공적인 삶을 살아갈 수가 있느냐 하는 것에 대한 부분이기도 합니다. 어쩌면 세속적인 성공과 관련된 이야기가 될 수도 있겠습니다. 그런 관련된 책들도 요즘에 많이 나오고 있습니다. 대표적으로 요즘에 『시크릿』이라고 해서 우리나라 뿐 아니라 세계적으로도 상당히 인기를 끌고 있는 책이 있습니다. 『시크릿』에서는 내가 마음 하나 일으키는 것으로서 내 삶을 창조해 낼 수가 있다, 내가 마음먹은 것을 세상에서 끌어당길 수 있다고 말합니다. 아주 희망에 찬 이야기지요. 이것이 불교의 아주 가장 기본이 되는 방편법 가운데 하나입니다.

이러한 가르침은 우리 삶에 있어서 아주 직접적이고 효과적인 도움이 됩니다. 그러나 그것을 뛰어 넘는 것이 부처님 가르침입니다. 생각을 조작해서 성공하는 삶, 생각을 조작해서 부자가 되는 삶, 물론 그것도 좋습니다. 왜냐하면 어차피 이 우주라는 것, 이 세상이 만들어진 창조의 원리는 무엇이냐 하면 나의 신구의(身口意) 삼업(三業)에 있는 것입니다. 내가 어떻게 생각하고 그 생각한 것을 어떻게 말로 내뱉고 또 그것을 어떻게 행동으로 옮기느냐 하는 것이 나의 세상을 창조하는 것인데, 그 근본에는 바로 생각이 있는 겁니다. 마음이 있는 것이지요. 이 생각을 가지고, 이 마음을 가지고 어떻게 써야지만 내 삶을 멋지게 만들 수 있느냐, 행복한 삶으로 바꿀 수 있고 성공적인 삶으로 바꿀 수 있느냐, 이것이야말로 우리에게 중요한 삶의 주제 가운데 하나입니다.

요즘에 아주 유행하는 『시크릿』이나 어떤 다양한 이런 류의 책들은 이 생각이라는 것이 실체가 있기 때문에 이 생각으로 모든 것을 만드는 것이니까 이 생각을 조작하고 움직임으로써 부자가 될 수 있다고 말합니다. 심지어 그런 관련된 책들 가운데 어떤 것은 가난을 미덕이라고 생각하고 청빈의 정신을 말하는 것을 자기는 참을 수가 없다, 용납이 안 된다, 이렇게까지 얘기하는 사람이 있던데요, 방편법에 너무 치우치게 되면 이런 오류를 범할 수 있게 됩니다. 즉 생각에 실체가 있어서 생각으로 부유함을 창조해 내고 부자가 되라, 성공해라, 여기까지를 얘기한단 말이죠. 그런데 그 부자와 성공에 너무 집착해 있는 모습을 그런 책들을 통해서 많이 보게 됩니다. 그래서 그런 것들의 한계 같은 것들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물론 그 정도 까지만 해도 많이 발전된 모습이라고는 보여집니다. 그렇게 우선 방편의 진리라도 우리가 전혀 모르고 있는 것 보다는, 그래서 괴로움 속에 허덕이고 사는 것 보다는 일단 일차적인 문제부터 해결하고, 내 삶에 딱 중심을 잡고 그리고 나면 이제 근본법을 향해 나갈 수 있는 토대가 마련되는 것이거든요. 그래서 제가 그동안은 많은 근본법에 대해서 말씀을 드렸던 것 같고 오늘은 이 방편의 가르침에 대해서 우리가 어떻게 하면 내 마음을 가지고 내 삶을 아름답게 바꿔낼 수 있느냐, 어떻게 내 삶을 정말 행복한 삶으로 바꿔내고 성공적인 삶으로, 부유하고 풍요로운 삶으로 바꿀 수 있느냐 하는 부분에 대해서 하나하나 자세히 말씀을 드릴까 합니다.

 

창조과정과 업보

불교에서는 앞에서 말씀드렸듯이 신구의 삼업으로서 이 세상을 만들어낸다 그랬습니다. 다시 말해 내가 생각한 그것이 하나의 에너지가 되어서 그것이 이 우주 법계로 진동을 해 나간다는 것이지요. 즉 내 생각으로 내 삶을 창조해 내는 것입니다.

우리 삶은 어떤 절대자가 만들어주는 것이 아닙니다. 누가 내 삶을 대신 만들어주는 것이 아니라 내가 내 삶을 설계하고 창조할 수 있는 자유의지가 주어졌기 때문에 자신 스스로 자신의 삶을 창조하고 변화시킬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화엄경』에서는 우리 마음은 그림을 잘 그리는 능숙한 화가와도 같아서 화가가 마음 먹은 대로 그림을 그릴 수 있듯이 우리가 마음먹은 대로 내 현실 세계라는 그림을 그려낼 수 있다고 얘기하고 있습니다.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라는 말이지요.

마음에서 일으키는 대로 현실세계를 그림 그리듯 그려나갈 수 있다 이 말은 어찌 보면 많이 들어본 듯한 그런 이야기인데요, 이것은 그저 내가 아는 이야기야 하고 덮어둘 이야기가 아닙니다.

우리는 이런 이야기를 들어 본적은 있을지언정 이것에 대해서 굳게 믿거나 진지하게 사유해보거나 그것이 정말 맞구나 라고 무릎을 쳐 본적은 사실은 별로 없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아, 그럴 수도 있겠다’ 정도로 생각할 뿐이에요. 우리는 어떤 생각을 가지느냐하면 생각한대로 이루어진다는 것은 말도 안 되는 소리다, 때때로 몇몇 가지는 생각한대로 이루어지는 수도 있지만 세상이 어떻게 생각한대로 이루어지느냐, 그렇게 안 된다, 이렇게 굳게 믿고 있습니다. 일체유심조가 아니라는 쪽으로 굳게 믿고 있단 말이에요.

그런데 사실은 여러분의 삶을 만들어내는 것은 여러분의 바로 그 생각입니다. 그 마음입니다. 내가 어떻게 마음을 쓰느냐에 따라서 내가 마음 쓴 대로 현실이 만들어지고 창조되는 것입니다. 또 마음 일으키는 것이 근본이 되어서 말로 가고 행동으로 감으로써 신구의 삼업이 바탕이 되어서 내 현실세계를 이루어냅니다. 그러니까 여러분들이 인간으로 태어났거나, 부자로 태어났거나 가난하게 태어났거나, 능력 있게 태어났거나 능력 없게 태어났거나 이 모든 현실의 모습이 내 과거의 신구의 삼업에 의해서 지금 만들어진 결과라는 말입니다.

업의 결과, 즉 업보(業報)로써 지금의 이 현실이 드러난 것입니다. 누가 만들어 주었겠어요. 내가 지은 업(業)에 따른 보(報)를 받는 것이 아니라면 도대체 누가 만들어 주었겠습니까.

모든 것이 그냥 신의 뜻대로 라든가 부처의 뜻대로 만들어졌다고 한다면 어찌 그렇게 부처나 신이 불공평할 수가 있겠습니까. 누구는 부유하게 태어나게 해 주고, 누구는 가난하게 태어나게 하고, 누구는 태어나자마자 한 살, 두 살, 세 살 밖에 안 되었을 때 기아로 죽어가도록 내버려 둔다는 말이지요. 이런 사람이라면 자유의지를 가지고 뭔가 새롭게 아름다운 삶을 살아볼 여지가 없습니다. 태어나자마자 바로 죽으니까 말이지요.

닭장에서 한 달 만에 죽어서 무슨무슨 치킨이며 온갖 닭고기, 통닭으로 우리 입에 들어가고 있는 닭들은 무슨 죄가 있어서 태어나자마자 아무 힘도 못써본 채, 파닥거리지도 못해본 체 그냥 한 달 만에 죽어가지고 그렇게 도살을 당해야 되느냐 하는 겁니다.

모든 것은 우리 마음이 만듭니다. 내가 만들지 결코 다른 사람이 만들어주지 않습니다. 이 마음의 힘이라는 것이 너무나도 엄청나고 어마어마합니다. 이것은 분명하게 우리가 알아야 되는 아주 확실한 불변의 이야기입니다. 물론 불교에서는 이 세상이 공한 것이다, 환영 같은 것이라고 이야기 합니다. 사실 이 세상은 공한 것이고 환영 같은 것이어서 실체가 없습니다.

그러나 그렇듯 실체가 없는 것이지만 실체가 없는 그 속에서 우리는 살고 있단 말입니다. 고통 받는 사람에게 그 고통은 실체가 아니야 라고 얘기할 수는 있겠지만, 그 사람은 그 고통이 당장 자신에게는 실체처럼 느껴질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니까 공(空)병에 걸려가지고, 깨달음 병에 걸려가지고 '모든 것이 다 공이야' 라고 쉽게 치부해 버리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은 내일 당장 죽더라도 상관이 없어야 합니다. 가난해지더라도 상관이 없고 고통 받아서 내일 당장 큰 병으로 죽어 가더라도 휘둘리지 않을 정도는 되는 사람이라야 그런 말을 할 자격이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그런 상황에 놓여 있느냐, 그런 깨달음에 놓여 있느냐 그 말입니다. 그렇지 않거든요.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이 방편법을 무시할 수가 없는 겁니다. 그러니 어떻게 해야 이 마음을 잘 쓸 수가 있는지, 이 마음이라는 것이 도대체 어떤 것인지를 알아야 이것을 어떻게 써야 되는지를 알 수가 있지 않습니까?

 

껍데기 마음, 표면의식, 거짓 나

그러니 그것에 대해서 조금 생각해 보자는 거죠. 우선 제가 아주 쉽게, 어렵게 하면 복잡해지니까 쉽게 마음을 두 가지 정도로 분류해 쉽게 설명해 보겠습니다. 이것 또한 방편입니다. 첫 번째 마음은 편의상 이렇게 이름을 붙여보겠습니다. ‘껍데기 마음’이라고 한번 이름을 붙여보겠습니다. 이 껍데기에 드러난 표면의식이 있다는 말입니다. 우리가 충분히 의식하고 있는 것, 내가 내 생각을 가지고 ‘아, 오늘 이런 생각을 했구나. 저런 생각을 했구나’ 하고 느끼는 마음, 이 생각으로 이렇게도 하고 저렇게도 하고 살아가는 것, 내가 생각을 쓰며 살아가는 그 표면의식, 껍데기에 들어가는 그 생각들, 그걸 이제 껍데기 마음이라고 한번 이름 붙여 보자는 겁니다.

우리는 항상 겉에 드러난 생각을 가지고 세상을 살고 있거든요. 그러다 보니 껍데기 마음, 이것을 가지고 세상을 만들어내고 창조해내고 있습니다. 이 겉껍데기 마음, 표면의식의 특징이 뭐냐 하면 끊임없이 생각이 올라온다는 겁니다. 생각이라는 것은 내 의지대로가 아니라 제 멋대로 우후죽순으로 올라옵니다. 이건 논리도 없고, 체계성도 없이 불쑥불쑥 튀어나오곤 합니다. 우리가 꿈 꿀 때 보면 갑자기 이 꿈의 장면에서 갑자기 다른 장면으로 막 그냥 휙휙 바뀌는데 논리적이지가 않고 막 왔다 갔다 하잖아요. 오락가락 합니다. 그걸 보면서 왜 그렇게 꿈은 말도 안 되게 오락가락할까 라고 생각하거든요. 그런데 사실은 우리의 생각이 그렇게 오락가락하죠. 가만히 내 생각을 지켜보다 보면, 이 생각이었다가 갑자기 저 생각으로 바뀌었다가 뜬금없이 또 다른 생각으로 바뀌었다가 정말 논리도 없고 맥락도 없는 아무 생각이나 마구잡이로 쏟아져 나옵니다. 논리가 없어요. 그런 생각을 가지고 우리는 그것이 내 생각이라고 착각하면서 나의 실체라고 착각하면서 그 생각을 부둥켜안고 살고 있다는 겁니다.

그 생각에 휘둘려서 살고 있습니다. 그 엄청난 온갖 생각들에 하나하나 그냥 휘둘려 가면서 에너지를 쏟아가면서 살고 있는 겁니다. 그런데 그 ‘겉껍데기로써의 나’는 주로 아상(我相), 아집(我執), 아견(我見)에 사로잡혀 있습니다. 아상, 에고에 갇혀서 언제나 나에게 도움 되는 일, 나한테 이익 되고 좋은 일들만을 계속 하고 있는 겁니다. 이 ‘나’라는 아상에 치우쳐진 껍데기 나는 어떻게 하면 나 자신에게 도움이 될까 하고 생각할 뿐 이타적인 마음이 거의 없습니다. 한 마디로 ‘아상에 밥 주는 일’만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즉 아상, 아집을 강화시키는 일에만 힘을 쏟는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 껍데기 마음, 표면의식은 항상 나한테 좋은 방향이 뭘까만 생각합니다. 아상에 갇혀 있어요. 이것을 아상, 에고 말고도 ‘거짓자아’ ‘거짓 나’ ‘가짜 나’ ‘껍데기 나’라고 말할 수도 있겠지요. 거짓 나는 어떤 일이 일어날 때, 순식간에 이것이 나에게 도움이 될까 해가 될까, 이 사람이 나에게 도움이 될까 해가 될까 하는 것을 그냥 자동적으로 계산을 해 버립니다.

그래서 사실 이 표면의식, 껍데기 마음, 아상, 생각이라는 것은 우리가 신뢰할 바가 못 됩니다. 신뢰할 바가 못 되고 진실 되지 못합니다. 항상 거짓을 꾸며내고 항상 이기적인 마음들만 꾸며내게 마련입니다. 물론 ‘나’에게 있어서는 아주 귀한 존재이고, 나를 돕고, 나를 가엽게 여기고, 언제나 나를 위해 희생하는 존재이니 나에게는 둘도 없는 귀한 존재이겠지만, 중요한 것은 그것은 근원적인 참나에 대한 이해가 없고, 이타적인 자비가 없으며, 이 우주법계가 둘이 아닌 하나 된 존재라는 이해가 없습니다. 오직 자기만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어리석은 사람이 보기에는 너무나도 사랑스러운 것이지만, 지혜로운 이가 보기에는 이타성이 결여된 자기밖에 모르는 이기주의자인 것입니다.

우리는 지금까지 이런 껍데기 마음, 표면의식에 휩싸여 왔는데, 여기에 휩싸여 살아서는 우리 삶을 온전하게, 아름답게, 지혜롭게 살아 낼 수가 없습니다.

 

더 깊은 마음, 근원의식, 참 나

그러나 우리 마음은 그 껍데기 마음이 다가 아닙니다. 우리의 내면 깊은 곳에는 더 깊은 차원의 깨어있는 마음, 참나, 근원적인 자아가 있습니다. 사실 앞에서 말한 겉에 드러난 표면의식의 생각들은 그야말로 빙산의 일각일 뿐입니다. 그 표면의식의 밑에 그 바다 그 엄청난 뿌리에는 히말라야와도 같은 엄청난 근원적인 뿌리가 잠재되어 있습니다. 드러난 것은 표면에 드러난 빙산의 일각밖에 안 보이지만 더 깊은 차원의 세계, 더 깊은 차원의 마음이 우리 안에는 내재돼 있는 겁니다. 그래서 이것을 이제 편의상 ‘더 깊은 마음’이라고 제가 이름을 붙여보겠습니다. 물론 이것 또한 근원의식이라고 불러도 좋고, 참나라고 불러도 좋고, 불성, 신성, 어머니 대지, 그 무엇으로 불러도 좋습니다. 대충 짐작하셨겠지만, 이 ‘더 깊은 마음’은 우리 내면의 깊은 마음, 참나이면서 동시에 이 우주법계 전체의 바탕을 이루고 있는 본질입니다. 다시 말해 ‘더 깊은 마음’은 나에 한정된 그런 것이 아니라 이 우주법계의 근원을 이루는 근간인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 안에 있는 더 깊은 마음의 특징은 어떤가 한번 살펴보겠습니다.

그것은 첫째로 나와 남이라는 분별이 없습니다. 내 안에 있는 ‘더 깊은 마음’은 나와 남이라는 분별이 없습니다. 이 우주법계 일체 모든 존재의 근원이니 어떻게 나와 남의 분별이나 차별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 반대로 겉에 드러난 표면의식의 특징은 물론 나와 남의 구분이 분명합니다. 나와 남의 분별이 있으니, 나와 너를 나누고, 내 편 네 편을 나누고, 나에게 이익이 되는지 안 되는지를 분별하며, 모든 대상물을 나누고 구분짓고 따로 떼어 생각하는 것이 특징입니다. 그런데 더 깊은 마음, 더 깊은 차원의 마음은 나와 남의 분별이 없으며, 일체의 모든 분별과 차별이 없습니다. 그렇듯 나다 너다 하는 마음의 분별이 없으니까 이기적인 마음이 일어나지가 않는 거예요. 상대가 곧 나와 다르지 않기 때문에 온 우주를 평등하게 보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내 이익만 챙기는 것이 아니라 온 우주의 모든 존재를 이타적인 사랑으로 바라봅니다. 그렇기에 항상 온 우주에게 이익이 되는 방향으로 모든 일을 하게 됩니다. 이처럼 나와 남의 분별이 없다는 것이야말로 더 깊은 마음의 주요 특성입니다. 그 말은 다시 말해 우리 마음의 본질은 우리 겉에 드러난 껍데기가 아니라 근본이기 때문에 우리 마음의 본질은 나와 남의 구분이 없다는 말과도 같습니다.

이 말은 무엇을 의미할까요? 보통의 나는 이 껍데기 마음을 가지고 세상을 살면서 나와 남을 끊임없이 분별합니다. 그러다 보니까 남에게 욕하고, 남이 잘되는 것에 시기하고, 질투하고, 자신을 드러내고 이익을 챙기기 위해 남들에게 해코지를 하고 산단 말입니다. 어떻게 하면 나의 이익을 위해서 남들을 깔아뭉갤 수 있느냐 이런 것에 교묘하게 머리가 돌아간단 말이에요. 조금 똑똑하고 세련된 지성을 가진 사람일수록 아주 세련된 방식으로 자기를 높이고 남들을 내려 누릅니다. 그러나 그 근본을 보자면 전부 나라는 상에 입각해 있는 것이 분명하다는 거죠.

 

상대에게 하는 것이 곧 나에게 하는 것

그러다보니까 우리는 보통 남에게 욕을 하고 시비를 걸고 하기를 좋아하는데 더 깊은 마음의 특성의 입장에서 본다면 사실 내가 남에게 욕하는 것은 곧 뭐를 의미하냐면, 내가 나 자신을 욕하는 것과 같습니다. 내 근본에 있는, 내 본질에 있는 마음에서는 나와 너의 분별이 없으니까 내가 남들한테 '너 이 죽일 놈, 나쁜 놈' 하면서 욕을 하면, 우리 본질의 마음에서는 어떻게 받아들이냐 하면 나와 남이 없으니까, 너 죽일 놈 나 죽일 놈이라고 하는 너나의 구분이 없으니까 본질의 마음에서는 뭘 인식하냐 하면 욕이라는 것만 인식하는 겁니다. 죽일 놈이라는 것만 인식하는 겁니다. 내가 남에게 죽일 놈 욕을 했다 하더라도 그것은 사실은 나 자신을 죽일 놈을 만드는 창조의 작업을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내가 남들에게 욕을 했다 했을 때, 못난 놈이라고 얘기하고 실패나 해버려라 하고 얘기 한다면 사실은 정작 내 마음은 나와 너의 구분이 없기 때문에 남에게 한 얘기지만, 남에게 한 나쁜 생각이고 나쁜 마음이지만 그것은 돌이켜 나에게 와서 화살이 꽂히는, 그래서 나의 현실을 창조해 내는 창조 작업으로 이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상대방을 욕하고, 탓하고, 시기하기 좋아하는 사람은 사실은 나 자신을 탓하고 욕하고 시기하고 있는 중인 것입니다. 그래서 그 사람은 나는 이런 부정적인 현실을 창조한 적이 없다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자신 스스로가 그 부정적인 현실을 창조한 것입니다. 우리가 ‘나는 하지 않았다’고 착각할 뿐이에요.

보통 사람들은 원하는 대로 이루어지지 않을 때, ‘나는 절대 실패를 창조한 적이 없습니다.’ 이렇게 얘기하거든요. 그런데 우리가 남들에게 욕하고 시비하고 실패하라고 얘기했던, 남들을 미워했던, 그 마음이 고스란히 나에게 와서 꽂히는 것입니다. 그런 방식으로 내가 나의 미래를 창조해 내고 있습니다. 나는 나의 미래를 그렇게 창조한 적이 없고 남에게만 욕을 했지 나에겐 안했다라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거꾸로 입니다. 그렇지가 않습니다. 내가 남에게 행하는 것은 고스란히 내가 나에게 행하는 겁니다. 그게 바로 본질적인 더 깊은 마음의 특징이에요. 거기에는 너와 나의 차별이 없습니다.

앞에서 ‘더 깊은 마음’은 이 우주법계 전체의 근간을 이루는 마음이라고 했습니다. 나의 근원이자 이 우주 전체의 근원인 것입니다. 그러니 거기에 너와 나의 분별이 있을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니 이 근원의 자리에서는 네가 바로 나이고 내가 바로 너인 것입니다. 그러니 상대방에게 행한 것이 곧 내게 행한 것입니다. 너와 내가 둘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이를테면 다른 사람에게 보시를 베푼다, 자비를 베푼다, 사랑을 베푼다, 그 사람이 힘들 때 옆에서 도움을 주고 상담을 해준다고 할 때, 사실 그것은 우리가 상대방을 돕는 것을 넘어서 내가 나 자신에게 베푸는 최고의 보시행위입니다. 내 인생을 풍요롭게 창조하고 내 인생을 행복하게 창조하고 내 인생을 부자로 창조하는 최고의 방법입니다. 내가 남에게 하는 것이 고스란히 나에게 돌아오니까 이 우주의 법칙은 내가 보낸 대로 받게 되어 있습니다. 나에게서 나가는 것이 고스란히 나에게로 돌아오게 되어있어요.

욕이 나가면 반드시 욕이 돌아옵니다. 칭찬이 나가면 칭찬이 돌아옵니다. 마음속에서 저 사람을 어떻게든 무너뜨려야지 하고 생각한다면, 나는 어떤 일이 있어도 무너져야지라고 생각하는 것과 다르지 않습니다. 바로 그렇게 생각할 때 이 우주법계는 어떤 방식으로든 우리를 무너뜨려 줍니다. 어떤 문제 때문에 근심 걱정하고 있다면 그것 또한 내가 나 자신을 향해서 끊임없이 근심 걱정하는 내용이 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초점을 어떻게 맞춰야 하느냐 이것이 중요합니다. 남이 잘 안되기를 바라는 것은 사실 내가 잘 안 되기를 바라는 거라고 했잖아요. 그러니까 남을 물고 늘어지면 안 됩니다. 남을 물고 늘어지면 내 바깥을 향한단 말입니다. 에너지의 방향이 자꾸 바깥을 향해 있으면 안 된단 말입니다.

예를 들어 내가 성공하고 싶다, 진급하고 싶다, 부자 되고 싶다 이랬을 때, 내가 진급하고 싶다는 생각은 차라리 낫지요, 나의 경쟁자가 어떻게든 사고를 쳐가지고 좀 무너져라 라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안 될 일입니다. 그것은 사실은 상대방을 무너뜨리는 게 아니라 나를 무너뜨리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동일한 말의 에너지라도 전혀 다릅니다. 부정적인 것을 상대방에게 보낼 때는 그것이 나에게 오는 것이구나 하는 것을 알아야 돼요.

그래서 상대방에게 보내는 연습을 하지 말고, 나를 향하는 연습을 해야 됩니다. 상대방을 향한 연습을 하게 되면 끊임없이 우리 마음은 부정적인 에너지를 쏟아 붓게 됩니다.

그런데 나를 향하게 마음을 쓰게 되면 항상 긍정적이 돼요. 내가 나 자신에게 욕하는 사람은 없거든요. 내가 나 자신이 잘못되길 바라는 사람은 없거든요. 그래서 우리 본래의 마음은 나와 너의 구분이 없습니다. 분별이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내가 남에게 하는 것이 고스란히 내가 나에게 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라는 이 사실을 우리가 잘 알고 있어야 합니다. 이 본래적인 마음의 더 깊은 마음의 특징을 안다면 우리의 삶이 바뀌어야 되겠죠. 상대방에게 하는 것이 고스란히 나에게 하는 것과 다르지 않으니 말입니다.

 

긍정적인 언어의 파장

또한 둘째로, 이것도 비슷한 얘기인데요 ‘더 깊은 마음’ ‘우주적 근원의 마음’은 완전한 무분별이기 때문에 좋다 나쁘다, 맞다 틀리다, 옳다 그르다 라는 것이 없습니다. 네 편 내편이 없어요. 또한 긍정 부정이라는 분별이나 차별이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결론적으로 말씀드리면, 우리가 단어를 사용할 때 부정적인 단어를 많이 사용하면 안 됩니다. 긍정적인 단어를 자꾸 사용할 줄 알아야 됩니다. 우주법계는 말하는 대로 그저 현실로 만들 뿐이지 긍정적인 것은 만들고 부정적인 것은 안 만드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우주에서는 긍정과 부정이 똑같은 창조에너지로 작용합니다. 쉽게 말해 우리가 말하는 것은 모두 구업(口業)으로 작용합니다. 즉 말이란 것은 에너지가 되어 특별한 파장으로 우주법계에 기록됩니다. 그리고 그렇게 기록된 것은 반드시 나 자신에게로 되돌아오게 되어 있습니다. 그렇기에 부정적인 에너지의 단어를 많이 사용하면 부정적인 현실이 창조되고, 긍정적인 단어를 많이 사용하면 긍정적인 현실이 창조되는 것입니다. 우주법계는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가리지 않고 모두 다 분별없이 내 입에서 나간 것을 전부 나 자신에게로 되돌려 주는 작용을 하기 때문입니다.

같은 상황을 보고 부정적인 단어로 얘기할 수가 있고 긍정적인 단어로 얘기할 수 있잖아요. 긍정적인 마음의 에너지를 뿜을 수가 있고 부정적인 마음의 에너지를 뿜을 수가 있습니다. ‘너 자꾸 거짓말 하면 나쁜 놈 된다.’ 이렇게 자식한테 이야기하잖아요? 그러면 부정적인 단어를 자꾸 연습시키는 겁니다. 이 말에는 ‘거짓말’이라는 말과 ‘나쁜 놈’이라는 부정적인 말들이 계속 연이어 반복됩니다. 이 똑같은 말을 이렇게 바꾸면 어떻게 될까요? ‘진실 된 말을 하면 아주 착한 사람이 된단다.’ 이렇게 얘기한다면 같은 의미이지만 긍정적인 단어의 연속으로 바뀝니다. ‘거짓말’ 대신 ‘진실 된 말’로 바뀌었고, ‘나쁜 놈’ 대신 ‘착한 사람’으로 바뀌었단 말이지요. 그 에너지는 엄청난 차이입니다. 그러니까 부정적인 단어를 쓰게 되면 그것이 고스란히 자식에게 가서 탁탁 박히게 되는거에요. 이것은 어찌 보면 사소한 말의 습관이지만, 이 평범한 말의 습관이 전혀 다른 과보를 우리에게 가져옵니다.

사실은 요즘 젊은이들이나 어르신들도 마찬가지겠지만 모든 사람들이 신기하게도, 정말 신기하게도 자기 자신의 숨겨져 있는 엄청난 잠재의식을 현실에서 전혀 써먹지 못하고 사는 게 현실 세계입니다. 여러분에게 엄청난 능력이 있는데 그것을 써먹지 못하고 살아요. 그 이유가 뭔지 압니까? 어릴 적에 우리가 부모님한테 들어왔던 습관 때문에 그래요.

'하지 마' '안 돼' '나쁜 사람 돼' '무조건 하지 마' '절대 안 돼' 이런 소리를 듣고 자라오다 보니까 우리는 자동적으로 인식이 되어 있는 겁니다. 우리 세포 하나하나에까지 ‘아, 나는 안 되는구나.’ ‘이렇게 하면 안 되는구나, 나쁜 것이구나’ 이런 것들만 인식이 되는 거예요. 좋은 것이 인식되지 않고 나쁜 것들이 자꾸 인식이 됩니다.

이를테면 불교에서도 그렇게 방편으로 말을 쓰긴 하지만 ‘무명(無明)에서 벗어나길 원합니다’ 라는 말을 쓰기보다는 차라리 ‘지혜가 충만하게 되기를 발원합니다’하는 모습이 발원문에 쓸 때 훨씬 아름다운 긍정의 표현입니다.

이런 식으로 우리 안에서 어떤 말을 하더라도 내 안에서 내가 쓰는 생각, 많은 패턴들이 얼마나 부정적인 방향으로 흐르는가 이것을 보십시오. 우리는 그것을 부정적인 것이라고 인식을 안 하거든요. 그러니까 이 우주 법계는 그렇다 아니다 라는 것이 없다는 겁니다. 긍정, 부정이 없습니다. 그러니까 내가 쓴 그 단어 자체가 나에게 와서 꽂히는 거예요. ‘나쁜 놈 되지 않기를 발원합니다.’ 이거는 나쁜 놈이라는 에너지를 내보내는 것입니다. ‘착한 사람 되기를 발원합니다.’ 쪽이 얼마나 더 듣기도 좋습니까.

 

근원에 믿고 맡기라

그리고 또한 세 번째는 ‘더 깊은 마음’은 이 우주 법계와 완전히 연결되어 있다는 점에서 출발합니다. 완전히 연결되어 있을뿐더러 즉 내안의 더 깊은 차원의 마음과 여러분 안에 있는 더 깊은 차원의 마음이 연결되어 있고 또 내 안에 있는 마음과 이 우주법계 전체에 있는 마음이 연기적으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연결만 되어있는 정도가 아니라 온 우주의 모든 정보, 모든 지혜, 모든 지식, 모든 에너지, 모든 업장까지 모든 것을 다 그 안에 구족(具足)하고 있습니다.

제가 지난번의 설법을 통해서 과학적으로 증명됐던 이야기들을 말씀 들렸을 것입니다. 그것처럼 우리 더 깊은 차원의 이 마음은 어마어마한 지혜의 저장고입니다. 엄청난 지혜와 어마어마한 정보와 엄청난 업력(業力)과 모든 우리가 원하고 추구하는 일체 모든 것이 완벽하게 구족되어 있습니다. 이 더 깊은 차원의 마음은 모르는 게 없습니다. 모든 것을 알고 있습니다.

보통 우리가 표면의식, 껍데기 마음에 의해서 세상을 살아가면 아집에 길들여진 그런 현실 세계를 살아갈 수밖에 없게 됩니다. 아상에 물든 삶을 살아갈 수밖에 없게 되요. 항상 보면 좀 문제 있는 삶을 살아가기가 쉬워집니다. 스스로 문제를 만드는 것이 생각이기 때문에 끊임없이 문제를 만들어 내는 삶을 살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분명 그런 표면의식으로 살지 않고 더 깊은 차원의 마음에 나를 일치 시키며 살아갈 수가 있습니다. 그리고 더 깊은 차원의 마음은 항상 완벽하고 모든 것을 다 알고 있고 온 우주와 연결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항상 나를 돕고 있습니다. 항상 나에게 끊임없는 자비를 보내고 있습니다.

그래서 더 깊은 차원과 내가 일치를 이룰 수만 있다면 그 근원의 마음이 나를 이끌고 갈 수 있고 우리 삶은 더 이상 문제를 만들어내는 삶이 아닌 기존에 만들어냈던 문제를 끊임없이 비우고 없애버리는 그런 삶을 살 수가 있게 됩니다. 내가 사는 삶이 아니라 내 안에 있는 어떤 부처가 나를 이끌고 가는 삶, 내 안에 있는 더 깊은 차원의 세계가 나를 이끌고 가는 삶을 살 수가 있게 됩니다.

불교에서는 때때로 ‘일체 모든 것을 맡겨라’ ‘너라는 아상이 모든 것을 하려고 하지 말고 근원의 부처님께 모든 것을 맡겨라’ ‘네 일이 아닌 부처님 일이다’라는 내맡김의 수행을 이야기 합니다.

내가 어떻게 세상을 잘 살아 보려고 애쓰지 말고, 아등바등하지 말고 모든 것을 근원의 주인공 자리에 맡기고 가라, 그랬을 때 될 것은 될 것이고 안 될 것은 안 될 것이다, 그러나 안 된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곧 표면에서 안 되는 것이지만 그것이 되기 위한 방법으로써 안 되는 것이다 라고 한단 말입니다.

우리의 지식은 당장 눈에 보이는 것에서 잘되어야지만 잘 되는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더 깊은 차원의 지혜는 더 큰 계획을 가지고 있습니다. 여러분이 지금 당장은 힘든 일을 겪더라도 마땅히 그것을 겪게 해줌으로써 그 사람을 더욱 더 한 단계 성숙시키기 위한 더 큰 계획을 가지고 있다는 말입니다. 그 계획을 우리는 다 알 수가 없어요. 구체적으로 어떤 계획인지, 이 일을 통해 내가 얻을 수 있는 것은 무엇인지, 어떤 업장이 녹아내리는지, 나의 영적 성숙에 구체적으로 어떻게 기여하는지를 다 알 수는 없습니다. 그리고 다 알려고 할 필요도 없습니다. 다만 오직 모를 뿐입니다. 우리는 그것을 다 알 수가 없어요. 이 우주법계의 모든 계획을 다 알 수 없습니다. 모르는 것에 대해서는 대응할 필요가 없습니다. 답답해할 필요가 없습니다. 모르는 것이 당연한 겁니다. 다만 어떠한 계획이 있구나, 더 깊은 차원에서 나를 위해서 준비해 놓은 또 다른 어떤 계획이 있구나 라고 굳게 믿고 내 안에 있는 근본에 모든 것을 턱 믿고 맡기고 갈 수 있어야 됩니다.

그러면 아상이 나를 끌고 가는 것이 아니라 더 깊은 차원의 진리가, 지혜가 나를 끌고 가게 되고 그렇게 됐을 때 나도 모르는 생각이 나를 이끌고 가는 것이 아니라 어떤 문제를 결정지을 때 생각으로서 판단하기 보다는 어떤 더 깊은 차원의 어떤 직관이나 어떤 영감 같은 것이 나를 이끌고 가도록 나를 완전히 열게 됩니다. 그러면 우리 안의 직관적인 힘이 나를 이끌고 가게 됩니다. 그리고 그 이끄심은 항상 정확해요.

 

우주는 서로 연결되어 있다

또 한 가지는요, 무엇이든지 더 깊은 차원의 마음은 모든지 완벽하게 갖추어져 있습니다. 사실 이 세상의 본질은 모든 것은 이대로 완벽하며 완전하다는 사실입니다. 우리 눈에 완전하게 보이지 않고, 불완전하게 해석되어서 그렇지 본질적인 무분별의 근원적 시각으로 본다면 삶은 언제나 완전합니다.

우리가 마음을 쓸 때 내 생각을 하나하나 쓰잖아요. 그러면 내 껍데기의 마음은 많은 생각을 하는데 더 깊은 차원에서는 내 껍데기가 만들어 놓은 내 생각들을 구현해 내는 작업을 합니다. 껍데기 마음이 일으킨 것을 현실로 창조하는 역할을 하는 것입니다. 껍데기에 드러난 이 생각은 그것을 현실로 이루는 힘이 없어요. 그런데 내가 생각한 것이 현실로 이루어질 수 있다고 얘기한 것은 내가 껍데기에서 생각하는 것 보다 더 깊은 차원에 있는 그 마음이 힘을 실어준다는 얘깁니다. 그래서 우리가 표면의식만 잘 다스릴 수 있으면 더 깊은 차원의 마음의 창조 에너지를 끌어 쓸 수 있는 겁니다.

그래서 불교에서는 마음을 다스려라, 번뇌를 놓아버려라, 집착을 버려라, 욕심을 버려라 하는 이유가 표면의식을 잘 다스리라는 이야기 입니다. 겉에 드러난 이 껍데기의 마음을 잘 다스리면, 그 겉에 드러난 껍데기 마음이 더 깊은 차원의 마음과 연결을 이룰 수 있기 때문입니다.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더 깊은 차원의 어마어마한 힘, 어마어마한 창조의 에너지 장을 우리 현실로서 가져올 수 있다는 겁니다. 그래서 내가 생각한 것이 현실로 이루어지는 일이 벌어지는 겁니다.

그러면 이러한 우리 마음의 어마어마한 힘과 에너지는 어떤 특성이 있을까요? 우리는 이 힘이 현실로 나타나도록 해야 하는데요, 우리 안에 잠재된 이 창조에너지를 우리는 때때로 현실에서 경험하기도 합니다. 때때로 이것은 우리의 표면의식이 아니라 내 안에 있는 어떤 더 깊은 차원의 마음이 나를 이끌고 가는 작업이었구나라고 느끼는 경우가 있습니다. 우리는 나도 모르게 어떤 직관적인 힘, 어떤 느낌을 딱 감지하거든요. 그럴 때 그것이 현실로 드러나는 것을 때때로 목격하게 됩니다.

나와 연결되어 있는 어떤 사람이, 나와 깊은 인연이 있는 어떤 사람이 뭔가 문제가 생겼을 때, 부모님이 자식에게 어떤 문제가 생겼을 때, 그날따라 무언지 모를 어떤 찜찜한 직관 같을 느낌들을 느낄 때가 있어요. 그것은 겉 표면의식이 그것보다 더 깊은 차원의 마음에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느낄 수 있는 것입니다.

 

동시성(同時性)

이를테면 융이 말하는 동시성(同時性)이라는 것도 이것과 좀 비슷한데요. 이 우주가 다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이를테면 우리가 어떤 궁금한 것이 있어서 무언가를 발견하고, 새롭게 무언가를 공부하게 되었다고 했을 때, 그 전에는 그 공부한 것이 눈에 띄지 않다가 내가 뭔가 새로운 것을 공부했을 때 갑자기 그런 내용들이 TV를 켜면 TV에서 나오고, 책을 보면 책에서 나오기도 하고, 어떤 사람이 우연히 그 얘기를 하기도 하고, 내가 이것을 공부하지 않았으면 망신당할 뻔 했구나 싶을 때도 있는 등으로 동시적으로 현실에 나타나게 된다는 거지요.

또 예를 들어 내가 뭔가 궁금한 것이 있습니다. 그것에 대해서 풀리지 않는 의문이 있는데, 이것에 대해 내 내면 안에 눈덩이처럼 커진 의문을 품고 있었는데 어느 날 갑자기 TV를 켰을 때 우연히 그 TV에서 거기에 실마리가 될 만한, 답변이 될 만한 소식을 들을 수가 있다거나, 누군가 우연히 만났던 사람이 한 마디 던진 말이 해답을 가져다 줬다거나, 우연히 책을 아무 페이지나 펼쳤는데 나에게 정말 필요한 대답이 탁 들어 있었다거나 할 수 있다는 말입니다.

어떤 보살님께서 그런 얘기를 하시더라고요. 불법이 담겨있는 책을 항상 가까이 놓아두고 때때로 읽어보고 있다는데, 우연히 뭔가 자식문제로 고민이 있거나 이런 저런 고민이 있을 때 중간에 아무 곳이나 책을 펼치면 신기하게도 마침 거기에 내가 오늘의 문제를 풀어 줄 만한 얘기가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두 번, 세 번 이어진다는 것이에요. '야 이거 참 신기하다.' 그래서 이분이 뭔가 풀리지 않는 일이 있을 때마다 그 책에다 손을 얹고서는 마음속으로 마음을 비운답니다. 마음을 말끔하게 비우고는 책을 넘긴대요. 그러면 물론 이것이 100% 다 맞지 않을 수 있겠지만 나에게 필요한 답변이 될 만한 경구들을 발견하게 되더라 이런 얘기들을 한단 말입니다.

이런 것이 우리는 우연이라고 볼 것이냐, 결코 그렇지만은 않을 수 있습니다. 그런 어떤 동시성의 원리가 실제 우리 현실에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 안에 있는 더 깊은 차원에서 이 우주 법계와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그 연결 되어진 상태에서 내가 궁금해 하는 것을 우주 법계가 나에게 답변해 주는 작업입니다.

이뿐이 아닙니다. 또 모처럼 누군가가 생각이 나서 그 사람에게 연락을 해야지 하고 생각을 했는데 그 사람에게 먼저 연락이 오는 경우도 있고, 내가 누구에게 전화를 하려고 막 누르려는데 그 사람도 나에게 전화를 하고 있는 그런 경우도 있을 수 있습니다.

 

심상화 기법(Visualization)

요즘 의학계에서는 심상화기법(Visualization)이라는 것을 많이 사용한다고 하는데요, 그게 뭐냐 하면 마음속으로 어떤 것을 상상하게 됐을 때 그 일이 현실로 신기하게도 이루어진다 하는 내용입니다. 암 환자들을 대상으로 방사선 치료를 받으면서, 방사선 치료로 인해 암세포들이 막 죽는 상상을 해라, 또 백혈구가 죽어 있는 그 암세포를 밖으로 막 떼어 내어 주는 그런 상상을 해라, 하고 마음속으로 상상하도록 만든다는 것이지요. 그렇게 심상화기법을 암 환자들에게 실행했더니 159명의 치료 불가능한 불치병 환자들 가운데 4년 후에 63명이 살아났다고 합니다. 이것은 일반적인 경우 평균치의 두 배가 넘는 경우라고 합니다.

그뿐 아니라 전 나사(NASA) 연구소의 연구원이자, 현재 캘리포니아 버클리에 있는 경기력 과학연구소장인 찰스 A, 가필드(Charles A. Garfield) 박사에 의하면 구소련의 최정상급 운동선수들을 대상으로 마음의 상상력과 실제 신체능력 간의 상관관계를 연구했다고 합니다. 먼저 운동선수들을 네 그룹으로 나눈 뒤 첫 번째 그룹은 연습시간의 100%를 훈련에만 전념시켰고, 두 번째 그룹은 75%의 시간은 훈련을 시키고, 25%의 시간은 그들이 하는 운동에서 바라는 성과를 그대로 이루는 모습을 상상하는데 쓰게 했습니다. 금메달 따는 장면, 승리하는 장면 등을 상상으로 생각하도록 심상화기법을 쓴 것이지요. 세 번째 그룹은 그 비율을 50 : 50으로 했고, 네 번째 그룹은 25 : 75로 했습니다. 그야말로 네 번째 그룹은 조금 모험에 가까웠지요. 한 시간을 연습시키고 세 시간을 앉아서 자신이 승리하는 장면을 떠올리게만 한 것입니다.

결과는 어떻게 나타났을까요? 1980년도 뉴욕의 레이크 프레스드에서 벌어진 동계올림픽에서 네 번째 그룹, 즉 세 시간을 마음속으로 승리한다고 생각하고 1시간만 운동했던 그 그룹이 가장 뛰어난 경기력 향상을 보였고, 그 다음이 세 번째, 그다음이 두 번째 그룹 순이었다고 합니다. 심상화기법은 쓰지 않고 운동만 했던 첫 번째 그룹은 운동량에 있어서는 훨씬 많은데도 불구하고 실제 결과에서는 심상화기법을 사용한 그룹보다 경기력 향상이 적었다는 것입니다. 가필드에 의하면 심상화기법이 신체의 움직임을 두뇌 속에서 홀로그램 방식으로 기록되도록 하기 때문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실제로 이러한 연구들 덕분에 요즘에는 운동선수들을 보면 이런 심상화 트레이너가 별도로 있을 정도라고 합니다.

 

플라시보 효과(Placebo Effect)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위약(僞藥) 효과, 즉 플라시보 효과도 일종의 이런 힘입니다. 보통 사람들은 몸이 아플 때 병원에 갔다 오면 낫곤 합니다. 그런데 병원 갔다 와서 나았다고 생각하는 그 사람들의 20~30% 정도만이 병원에서 치료에 의해서 나은 것이지 실제로 70~80%는 플라시보 효과일 것이라고 현대 의학계에서도 인정을 하고 있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상당 부분의 경우 내가 병원 갔다 왔으니까 낫겠지라고 생각하는 그 마음이 나를 낫게 해 준 것이지 실제 약이 나를 낫게 해 준 것이 아닐 수도 있다는 겁니다.

이런 위약효과의 연구는 아주 너무나도 많은데요. 예를 들어서 50년대에 협심증 환자들의 경우에는 수술을 해야 했답니다. 그런데 그 수술을 할 때 두 그룹으로 나누어서 한 팀은 정상적인 수술을 했고요, 다른 한 팀은 신체를 잠깐 조금만 절개를 했다가 수술했다고 하고 닫아 놓고는 그 사람에게는 수술이 잘 끝났다고 얘기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동일하게 똑같이 양쪽이 다 협심증이 치료되는 결과가 나타났다는 겁니다.

그런데 이러한 플라시보 효과가 온갖 병들, 두통, 알레르기, 감기, 천식, 사마귀, 통증, 구토, 위궤양, 우울증, 상당한 정신과적 증후군, 관절염, 당뇨병 심지어 암에 이르기까지 어지간한 것들이 플라시보 효과로 완쾌가 되더라하는 말입니다. 전에 말씀 드린 것처럼 심지어 말기 암 환자가 죽을 때가 됐는데 플라시보 효과로 위안을 주면서 신약이라고 하면서 이걸 먹으면 무조건 난다라고 했을 때 그 걸 멀고 완쾌가 되더라는 이야기도 있습니다.

19세기 유행을 했던 결핵이라는 병은 1880년부터 갑자기 없어지기 시작을 했다는데요. 그 결핵의 원인이 1882년 로베르트 코흐라는 박사에 의해 밝혀지고 그 사실이 세계적인 이슈가 되면서 이제는 약만 개발하면 된다는 아주 기쁜 소식에 들떠 그 신문기사만을 보고도 결핵환자들이 획기적인 감소를 했다고 합니다. 단지 원인만을 알아냈지 그것을 통해 약을 만드는 데는 약 50년이 소요될 수도 있다고 했는데도 불구하고 그 원인을 알아냈다는 희망적 기사만을 가지고 그 당시 10만 명당 600명이 결핵 환자였는데 200명으로 갑가지 대폭 감소를 했다는 것입니다. 10만 명당 400명이 그 소식만 듣고 나아버린 겁니다.

이것처럼 사실 우리 마음은 엄청난 힘을 가지고 있습니다. 마음을 어떻게 바꾸고 다스리느냐에 따라 불치병도 낫고, 온갖 질병이 나으며, 운동 경기력이 획기적으로 향상되고, 심지어 동시성이라는 방식을 통해 이 우주에서 내가 필요로 하는 정보를 끌어당겨 쓸 수도 있다는 말입니다. 그렇게 끌어 쓸 수 있는 방법만 안다면 좋은데, 문제는 여러분이 그 방법을 모른다는 것에 있습니다. 제가 앞에서 몇 가지 말씀을 드렸지만, 그 방법을 조금 더 구체적으로 말씀을 드려 보도록 하겠습니다.

 

마음내는대로 이루어지지 않는 이유

제가 교육을 하던 중에 사람들에게 『시크릿』이라는 책을 읽은 사람이 많기에 그 책의 내용 즉, 마음에서 일으킨 것은 현실로 이루어진다, 마음에서 어떤 것을 끌어당겼을 때 그것이 이 우주에 있는 것을 끌어 당겨서 이루어지게 만들어준다, 우리 마음의 힘이 그만큼 엄청난 것이다 하는 것에 대해서 얼마나 진짜라고 생각하는지를 물어보았습니다.

신기하게도 아니 어찌 생각해 보면 조금 당연하지만 한 10~20% 정도만 그럴 가능성이 상당히 있을 것이라고 믿는 반면에 나머지 80~90% 정도는 그럴 수도 있겠지만 말도 안 되는 소리다, 어떻게 그런 것이 가능하냐 하고 반문을 하곤 하였습니다. 될 수 있으면 마음을 긍정적으로 해 나가라고 권장사항 정도로 말해 놓은 책이 아니겠느냐라고 말하거나, 마음을 낸다고 100% 그것이 실제 현실로 일어난다는 것은 말이 안 된다, 만약 실제 그렇다면 우리 모두가 그걸 바라지 않는 사람이 어디 있느냐, 그러나 실제로 마음 낸 것을 현실로 만들 수 있는 사람은 거의 없지 않은가 하고 반문을 하더란 말입니다.

신기하게 대부분의 사람들이 우리 마음의 힘을 믿지 않습니다. 지금 여러분들처럼요. 그러니 어때요. 내 안에서 스스로 그런 힘이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우리가 생각한 그대로가 현실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안 믿기 때문에 그것이 현실로 되지 않아요. 이처럼 안 이루어지는 데는 다 이유가 있는 것입니다.

즉 우리는 우리의 마음으로 무엇이든 그려낼 수 있고, 창조해 낼 수 있는 큰 힘을 가진 존재들이지만 그것을 현실로 그려낼 수 있는 방법을 모릅니다. 그리고 그런 힘이 있다는 것을 전혀 믿지 못해요. 그러면 왜 그런 힘을 내가 쓸 수 없는지, 그 이유를 한번 살펴보도록 합시다.

 

사실은 많은 것이 이루어진다. 보지 못할 뿐!

우선 첫째는, 사실은 많은 일이 이루어지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마음 내는 대로, 여러분이 생각한 것의 상당수가 현실로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스스로가 살면서 깨어있지를 못해요. 내가 어떤 생각을 하는지 전혀 의식하지 못합니다. 여러분은 마음속에서 일어나는 생각들을 분명히 지켜볼 수 있는가요? 평소에 마음이 어떤 것을 일으키고 만들어내는지를 주의 깊게 살펴보고 있습니까? 그렇지 못합니다. 지켜보지 못해요. 내 안에서 어떤 생각이 일어나는지 조차 전혀 파악을 못하고 있습니다.

또 겉에 드러난 마음에서는 이런 생각을 했지만 깊은 속마음으로는 어떤 다른 생각을 하고 있는지를 내가 미처 캐치를 하지 못하는 경우도 많습니다. 그러다보니까 나는 생각지도 않았는데 이게 왜 벌어졌지 하고 착각을 하는거에요. 내가 분명히 생각을 한 것인데, 그러니까 내가 주의 깊지 못하기 때문에, 내가 일으킨 생각에 대해서 깨어있지 못하기 때문에 그것이 안 이루어졌다고 착각하는 것이지, 사실은 우리가 일으켰던 생각이 현실로 이루어지는 경우가 너무나도 많습니다. 아니 사실은 우리 안에서 일어난 것들만이, 창조한 것들만이 내 앞에 나타나고 있습니다.

그래서 항상 깨어있다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렇기에 내가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를 분명히 지켜봐야 합니다. 지켜보게 되면 ‘아, 이 생각이 이러한 현실을 창조했구나’라는 것을 보다 분명하게 알 수가 있습니다. 내가 내 삶을 어떻게 만들어 가고 있는지를 똑똑히 볼 수가 있는 것입니다.

 

보면 사라진다

또한 심지어 보다 분명하게 알 수 있을뿐더러, 분명히 지켜보는 것만으로 문제가 해결되기도 합니다. 만성 두통 환자분들이 있는데요. 만성 두통 환자들을 모아놓고 뭔가 실험을 하려고 두통 환자들에게 우선 어느 정도의 강도와 어느 정도의 빈도로 두통이 일어나는지 알아보려고 몇 가지를 조사해 보았습니다. 일단 치료할 수 있는 기초 작업을 하려고 얼마만큼의 강도로 머리가 아프냐, 그리고 얼마만큼 자주자주 머리가 아프냐를 조사하게 했습니다. 매일매일 얼마만큼 머리가 아프고 얼마만큼 자주 아픈지를 다 쓰게 했어요. 오늘은 얼마만큼 아프고 얼마만큼 자주 아프고 몇 번이나 아팠고 이런 것을 자세히 관찰하며 쓰게 했습니다.

그런데 신기한 일이 벌어졌어요. 그냥 그 빈도와 강도를 단지 조사해서 쓴 것 밖에 없는데 두통이 나아버린 겁니다. 사실은 기초 작업을 하려고 한 것인데 그 기초 작업만을 가지고도 두통이 나아버린 것입니다. 이처럼 만성두통이 일어난다는 것을 분명히 알아차리고 그것을 지켜보게 되었을 때 그것만으로도 두통이 해소되기도 합니다. 해소되기도 하는 것이 아니라 사실은 해소가 분명하게 됩니다.

 

끊임없이 오락가락 하는 마음

두 번째 이유를 살펴보겠습니다. 앞에서 제가 말씀 드린 것처럼 생각의 특성은 너무나도 엄청난 잡념을 가지고 있다는 점입니다. 우리에게는 쉴 새 없이 온갖 잡념, 온갖 생각들이 우후죽순으로 올라오고 있단 말이에요. 이게 밑도 끝도 없이 올라오고 있습니다. 잠시도 쉬지 않고 너무나도 많은 생각이 동시다발적으로 올라와요. 그러니까 어떻습니까? 우리 안에 있는 창조적인 마음의 에너지가 집중되지를 않는 겁니다. 온갖 잡다한 생각들마다 다 에너지를 실어줘야 되는 거예요. 그런데다가 우리 마음이 어떠냐하면 그 한 가지를 줄곧 밀고 가지도 않습니다. 이렇게 할까 하다가도 바로 마음이 바뀌어 저렇게 하고, 이 결정을 할까 하다가 금세 저 결정으로 바뀌곤 한단 말입니다. 사실은 수백 수천 번도 더 오락가락하면서 어느 한 쪽의 마음을 딱 선택하지 못합니다. 아침에 어쩌다 절에 나오시는 분들은 '절에 갈까? 에이, 가지말자. 에이, 그래도 가자.' 머릿속에서 이것 하나 결정하는데 열 번 백 번을 반복하다 오는 사람도 있단 말이에요. 그 정도로 무슨 한 가지를 판단 할 때도 우리 생각은 끊임없이 오락가락 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어떤 한 가지에 집중적으로 창조 에너지를 실어 주어야 그것이 실현이 될 것인데, 이랬다저랬다 하고, 오락가락 하니까 우주의 에너지가 제대로 실리지가 않는 것입니다. 아침에는 ‘하자’ 그랬다가 오후에는 ‘하지 말자’ 그랬다가, 또 10분 전에는 ‘가자’ 그랬다가 10분도 채 못 되어 ‘가지 말자’ 그런단 말입니다. 자장면 먹자 그랬다가 금방 짬뽕으로 바뀌듯이 말입니다. 중국집에 밥 한 끼 먹으러 가면서 발은 걷고 있지만 머릿속에서는 자장면이냐 짬뽕이냐를 가지고 수십 번도 넘게 반복한단 말 이예요. 이렇게 우리 생각이 날뛰는 원숭이처럼, 조금 심하게 말하면 정신병자처럼 오락가락합니다.

 

명상수행과 창조에너지

그래서 우리가 명상을 하거나 집중을 합니다. 무언가 한 가지에 집중함으로써 삼매에 빠지는 경험도 하고, 조용히 마음을 고요히 지켜보는 명상을 한단 말입니다. 명상을 하고 집중을 하게 됐을 때, 한 가지에 딱 집중을 하게 됐을 때 잡념이 사라지고 그 한 가지에만 집중을 하게 되잖아요. 그리 됐을 때 그것이 현실로 이루어질 수 있는 확률이 강력한 힘으로 바뀌게 됩니다. 어마어마한 힘으로 바뀌게 됩니다.

그런데 우리의 평소 상태는 온갖 잡념 상태이거든요. 복잡다단한 생각들, 문맥도 없고, 맥락도 없고, 주제도 없고, 명확한 방향도 없는 온갖 잡스런 생각들이 우리 머릿속을 끊임없이 휘청거리며 오고가는 상태입니다. 그런데 그런 잡념이 우후죽순처럼 올라오는 사이에 성공하게 해주십시오, 내가 부자가 되어야지, 내가 잘돼야지, 이렇게 생각한들 온갖 잡념 중에 하나밖에 안되니까 그것이 강력한 힘을 발휘하지 못해서 현실로 이루어지지 않는 것이다 이 말입니다.

이를테면 이 공기 중에는 모든 라디오 주파수가 다 떠돌아다니고 있잖아요. 그런데 우리가 주파수를 딱 맞추려면 제대로 맞춰야지만 하나의 주파수가 딱 잡히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제대로 주파수를 맞추지 않으면 지지직거리기만 한단 말입니다. 그런데 그 주파수를 제대로 딱 맞추면 소리가 분명하게 잘 들리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우리가 산란된 마음을 비우고 한 가지 마음의 원(願)으로서 딱 주파수를 맞췄을 때 그것이 내 안에 있는 더 깊은 차원의 마음과 딱 주파수가 연결이 되어서 그것이 현실로 이루어집니다.

‘설마 진짜 그렇게 되겠습니까?’ 하는 생각이 들 겁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그런 비움과 집중 속에 드러난 하나의 생각, 마음, 서원이 더 깊은 차원의 마음과 연결해 주는 아주 중요한 통로요 방법이 됩니다. 껍데기 마음이 비움과 집중을 만나 하나의 강력한 마음으로 바뀔 때 그것은 강력한 창조의 힘을 가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겉껍데기 마음을 어떻게 다스리느냐가 중요합니다. 다스리는 방법이 바로 집중과 관찰입니다. 깨어있음, 명상이라는 겁니다. 그것이 바로 지관(止觀)수행이죠.

예를 들어 여러분들 발원(發願)기도를 하잖아요. 이렇게 되기를 발원하고, 저렇게 되기를 발원한단 말입니다. ‘건강해지기를 발원합니다.’ 이런단 말이에요. 발원할 때 어떻게 하는 것이 가장 효과가 좋을까요? 막 시도 때도 없이 발원한다고 그것이 다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란 말입니다. 마음을 비운 다음에, 마음을 고요히 비운 상태에서 한 가지를 발원하고 마음을 냈을 때 그 발원은 큰 힘을 얻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때요. 기도하지 않습니까. 집에서 기도하고 참선하잖아요. 기도 끝에, 기도함으로써 마음을 비우고 수행함으로서 그 마음을 딱 비워놓은 다음에 그 청정해진 마음을 가지고 발원을 했을 때 발원에 강한 창조의 에너지가 붙는단 말입니다. 그래서 집에서 기도할 때도 발원문은 기도를 다 하고 난 제일 마지막 부분에 독송하라는 것입니다. 법회를 가도 사홍서원의 발원을 제일 마지막에 하잖아요. 마음을 비우고, 욕심과 집착을 비우고, 기도로써 마음을 고요히 한 끝에 발원을 하면 거기에 더 큰 힘이 붙습니다.

그것은 온갖 산란한 마음들 사이에서 일어난 생각이 아니라 마음이 고요해진 사이에 일어난 한 생각이기 때문에 그렇다고 했습니다. 마음이 고요해진다는 것은 내 겉에 드러난 껍데기 마음이 더 깊은 차원의 마음과 연결되어진 상태를 의미합니다. 이 우주법계의 근원의 마음과 연결되어 있는 상태를 의미해요. 그렇기 때문에 그렇게 마음이 비워진 상태에서 마음 하나를 딱 일으켰을 때 더 깊은 차원의 마음과 연결이 되고 온 우주 법계의 마음과 연결 되어서 우주 법계가 나를 도와주는 작업을 시작한다 이 말입니다.

그 일이 현실로 이루어지는 작업을 내 내면만 시작하는 게 아니라

온 우주 법계 전체가 나를 도와주는 작업을 시작하게 된다 이 말입니다. 그래서 뭔가 원을 세울 때는 마음을 고요히 한 상태에서 원을 세워야 됩니다. 그래서 이런 방식으로 마음을 일으킨다면 이것이 현실로 이루어질 수 있는 확률이 몇 천 배, 몇 만 배, 수십억 배 높아지게 되는 겁니다. 그 본연의 에너지를 완벽하게 쓸 수 있는 힘이 되는 겁니다.

그래서 수행력이 높은 수행자일수록 한 번 일으킨 마음이 금방 현실로 나타난다고 하는 것입니다. 수행력이 낮은 사람일수록 생각과 현실의 창조 사이가 멀어요. 창조가 될지라도 늦게 창조가 되는데 반해 마음이 청정한 수행자는 한 생각 일으킨 것이 곧장 우주법계와 연결이 되어 곧장 이루어지기도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라한과를 증득하면 과거의 수많은 업장들을 그 생에 다 해결하고, 그 한 생에 동안 받을 것 다 받고 완전한 반열반(般涅槃)에 이른다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우리의 수행력은 곧 창조의 힘과 다르지 않습니다. 수행하고 명상하는 사람은 무한한 창조에너지를 갖추고 있는 것입니다.

 

자기 한정의 관념을 타파하라

다음은 세 번째 이유입니다. 우리 마음이 엄청난 힘을 가진 존재인데 그것을 현실에서 이루지 못하는 또 하나의 이유가 있는데, 그것은 바로 앞에서 말씀드린 ‘믿음’에 있습니다. 왜 안 이루어지느냐 하면 제가 앞에서 말한 것처럼 안 믿거든요. 스스로 안 믿습니다. 자신의 능력을 안 믿어요. 스스로 자신은 능력이 없고, 부족하고, 어리석은 중생이라고 생각합니다. 스스로 부족하다고 생각하면 부족한 현실이 창조되고, 능력 없다고 생각하면 능력 없는 현실이 100% 창조되는 것을 모른단 말입니다. 그러니까 그 힘을 쓸 수 없는 것이 아니라, 내가 못 쓰는 쪽으로 창조하고 있으니까 사실은 못 쓰는 쪽으로 완벽한 창조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처럼 우리는 자신이 일으킨 마음의 힘이 얼마나 큰 것인지를 절대 안 믿습니다. 100%를 못 믿어요. 한 50%만을 믿거나 어떤 사람은 한 30%정도쯤 믿거나 이런단 말입니다. 내가 100% 믿으면 그것이 100% 힘을 발휘하고 50% 믿으면 50%만 힘을 발휘합니다.

이 말은 다시 말하면 자기 능력에 대해서 스스로가 ‘내 능력은 이 정도 밖에 안 돼’ 하고 자기 한정의 관념에 빠져 있다는 말이기도 합니다. 나는 이것밖에 안 된다, 나의 능력은 이 정도야 라고 한정 짓고 있단 말입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을 보면 자기 스스로 자신의 능력을 어느 정도의 틀 속에 제한하고 있습니다. 성공하고 싶어 하는 사람도 어떻게 성공하고 싶은지를 물어보면 ‘나는 그냥 조그만 식당하나 운영해서 적당히 먹고 살 정도만 되면 됩니다.’라고 말하곤 합니다. 기왕이면 좀 더 넓은 식당을 운영해서 부자 되면 그것으로 남들에게 복도 많이 짓고 그렇게 좋은 일을 많이 할 수 있지 않느냐 하고 물으면, ‘아닙니다. 저는 그 정도 능력은 안 되고요. 그냥 밥 벌어 먹을 정도나 할 수 있으면 좋은 거죠.’ 이렇게 생각해요. 더 큰 힘이 나에게는 없다, 이렇게 생각합니다. 재수해 가지고 공부하겠다는 사람들에게 목표가 어디냐 그러면 '그냥 서울에 있는 대학 정도 되면 됩니다.' 라고 합니다. 기왕 목표를 잡을 거면 서울대나 하버드대학을 목표로 잡지 왜 그 정도를 잡느냐 그러면 '해봐도 안 됩니다. 제 능력은 제가 아는데, 공부는 못한다는 걸 뻔히 아는데 그렇게 목표 잡아봐야 되겠습니까?' 그렇게 생각한단 말입니다.

물론 높은 목표에 집착하라거나, 부자가 되어야만 한다는 말은 아닙니다. 어떤 높은 목표에 집착하라는 얘기는 아닙니다만 내 스스로의 능력을 미리부터 한정 지을 필요는 없다는 겁니다. 스스로 선택한 가난과 청빈이라면 좋지만, 내 스스로 나는 안 되고, 가난하고, 못난 사람이라 어쩔 수 없이 가난하다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안 된다는 말입니다.

사실은 내 능력이 그것 밖에 되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능력을 완벽하게 한정 짓고 제한하기 때문에 내 능력은 내가 한정 지은 그것만큼 밖에 드러나지 못하는 것입니다. ‘내 능력은 요만큼 밖에 안 돼’라고 내 마음으로 딱 만들어 놨잖아요. 그러니까 우주 법계에서는 내 마음에서 만든 것을 100% 힘을 실어줍니다. 100% 이루게 해줘요. 그러니까 고만큼만 100% 이루어지는 거지요.

내가 공부 열심히 하면 한 50%는 서울대에 붙을 것도 같고 50%는 안 붙을 것도 같다, 그렇게 생각하면 붙을 확률이 반반 입니다. 그게 사실은 우주에서 100% 힘을 실어준 거예요. 내가 50%만 원했으니까 50%만 이루게 해준거에요.

마음의 힘, 의업(意業)의 힘을 믿지 않는 사람들이 있지 않습니까? 믿지 않는 사람은 어때요. 그게 100% 이루어진 겁니다. 내가 믿지 않는 만큼 안 이루어졌거든요. 그러니까 100% 이루어진 거 아니에요. 안 이루어지도록 믿었으니까 안 이루어 진 것이란 말입니다. 그러니 사실은 이루어 진 것입니다.

자기 스스로를 한정시키고, 제한시키게 되면 결코 자신이 만들어 놓은 그 울타리, 그 틀을 넘어설 수 없습니다. ‘나는 안 돼’ 하고 울타리를 쳐 놓으면 그 틀은 그 누구도 대신 깨줄 수 없습니다. 오죽했으면 부처님께서도 제자들에게 자기라는 틀을 깨주려고 노력을 했지만 스스로 울타리 친 그 틀은 부처님조차 대신해서 깨뜨려 주지 못했단 말입니다.

부처님께서 처음 출가를 하실 때 마부로 뒤따라왔던 찬나라는 마부가 나중에 출가해서 수행자가 됐는데 ‘지금은 이렇게 부처님의 제자들이 많지만 초기에 부처님이 출가하셨을 때는 나밖에 없었어. 너희들이 대단한 제자들이라고 으스대지만 내가 최고다. 너희들 중 누가 처음에 부처님 출가하셨을 때 옆에 있었느냐? 그때 부처님을 지켜준 건 오직 나뿐이었다. 내가 최고의 제자다.’ 이런 생각을 가지고 있었단 말입니다. 겸손하지를 못했지요. 찬나에게 부처님께서는 몇 번을 설득하고 타이르면서 그런 마음을 버려라 버려라 해 주셨는데 그 마음을 못 버렸습니다. 그래서 결국은 부처님 살아생전에 깨달음을 얻지 못했어요. 부처님께서는 열반하시면서 특단의 조치를 취한 끝에 그 이후에 깨달음을 얻게 됐습니다. 그 특단의 조치가 뭐냐 하면, 모든 제자들에게 저 찬나에게는 모두 침묵으로 대해라, 말도 응해주지 마라, 묵빈대처(默賓對處)하라고 했습니다. 사실 그 전에는 이런 묵빈대처의 방법은 도저히 어쩔 수 없는, 교화가 불가능한 외도들에게만 그런 방법을 쓰셨었거든요. 그러다 보니 찬나가 그 얘기를 듣고 너무 충격을 받아서 '아! 부처님께서 나에게 어떻게 이러실 수가 있지. 여기엔 뭔가 뜻이 있지 않겠는가. 내가 잘못이 이 정도로 컸단 말인가. 어리석었구나.' 하고 스스로 크게 뉘우친 끝에 결국 나중에 깨달음을 얻게 되었습니다.

이것처럼 자기 스스로 좋은 쪽이든 나쁜 쪽이든 ‘나는 이렇다, 나는 이런 사람이다’ 하고 자기가 만들어 놓은 틀이 있으면 부처도 그 틀을 깨주기가 어렵습니다. 여러분이 나의 능력을 한정 짓고 있는 이상 그 능력은 내 스스로가 깨야 되는 것이지 부처가 와도 여러분의 그 자기한정과 제한된 틀을 못 깨줍니다.

큰 스승을 만나면 깨줄 것 같잖아요. 그렇지 않습니다. 여러분이 멋모르고 스승만 찾아다닌다고 그 스승이 나에게 깨달음을 주는 것이 아닙니다. 진리는, 언제나 나를 바꿀 수 있는 것은 내 안에서 시작된다는 가르침입니다. 내면에 변하지 않는 이상 아무리 훌륭한 스승이 올지라도 외부에서 나를 변화시키기는 어려운 법입니다. 그러나 내가 활짝 열려 있어서 가르침을 받을 준비가 되어 있다면 내 옆에 있는 내 도반이 나의 훌륭한 스승이 될 수 있고, 나의 자식도 훌륭한 스승이 될 수가 있는 거예요. 그 때는 세상 곳곳에서 스승을 만나게 됩니다. 그래서 먼저 나를 열어두고 내 스스로가 ‘내 능력은 이것밖에 안 돼’, ‘나는 깨달음을 얻을 만큼 대단한 사람이 아니야’라고 한정 짓는 마음을 먼저 버릴 수 있어야 됩니다. 그래서 자신 스스로 자기를 가두는 마음을 버려야 해요.

 

상대에게 하는 것이 곧 나에게 하는 것

다음은 네 번째입니다. 마지막으로 이제 우리가 거꾸로 연습하는 겁니다. 우주는 마음에 뭔가 연습한대로 되돌려주려고 한다고 그랬잖아요. 우리가 방법을 모르는 거예요. 처음에 말씀 드린 것처럼 우주는 나와 너의 구분이 없는데, 나와 상대가 따로 떨어진 존재로 있는 줄 알고 상대방에게 욕을 하니까 사실 그것은 곧 나 자신에게 욕을 하는 것이나 다름없는 것입니다. 타인을 욕하고 공격하고 못났다고 낮추는 것이 곧 나를 욕하고 내 능력을 위축시키는 일이거든요. 저 사람 확 망해버려라 하면서 그 사람이 성공 하는 것에 대해 배가 아프다면, 사실 그 말은 나를 성공 못하게 하는 힘으로 작용합니다.

전에 몇 번 말씀 드린 것처럼 우리는 기도를 하고 뭔가 원하고 바라면서 기복적인 마음을 가지고 있지만 그렇게 무언가를 원하고 빌고 바란다는 마음 자체가 무언가 부족하다는 느낌을 가져다주는 것입니다. 몸에 지병이 있는 사람은 끊임없이 몸이 낫기를 바라고 원하면서 ‘몸 낫기를 바랍니다’ 하고 기도한단 말 이예요. 그런데 그렇게 되면 되레 몸이 점점 더 안 좋아질 수가 있습니다. 그 바람 자체가 ‘내 몸은 너무 좋지 않다’라는 사실을 자꾸만 느끼게 해 주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거부하는 것은 오히려 계속된다, 또 두려워하는 것은 오히려 지속된다고 하는 것입니다.

제가 관(觀)하라는 알아차림의 관 수행을 자주 말합니다. 마음을 관찰하고 깨어있으라고 얘기를 하는데 그 깨어있는 것이 잘 안 됩니다. 그런데 때때로 마음을 어떻게 관찰해야 할지 잘 모르겠다는 분들이 계시는데, 그런 분들에게 저는 그것을 있는 그대로 고스란히 느껴 보라고 말합니다. 가만히 그것을 느껴보라, 우울한 사람에게는 우울감에서 벗어나려고 애쓰지 말고 우울한 그 느낌을 느껴보고, 고독한 그 느낌을 느껴보라고 합니다. 화가 날 때는 그 화나는 느낌을 느껴보고 지켜보는 것입니다. 욱하고 화가 올라올 때 그 올라오는 화를 느껴보아라 하는 겁니다. 느낀다는 것 자체가 관(觀)한다는 것이고요. 그 관하고 느끼는 것, 그것에 우주 법계는 반응을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비는 마음은 무엇을 느끼게 해주느냐하면 우리에게 부족한 바로 그것을 느끼게 해줘요. 결핍된 것을 느끼게 해줘요. 그러니까 사실은 '부처님, 부자 되게 해주십시오.' 라고 빌지만 사실 그 말은 ‘지금은 부자가 아닙니다’ ‘나는 부족합니다’라는 것을 의미하는 뜻이 되고 그 결과 부족과 결핍을 연습하고 있는 것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하면 되느냐? 지금 있는 것에 대해 감사해 할 수 있어야 합니다. 돈이 필요한 사람은 지금 현재 받고 있는 연봉에 대해서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하고 감사하다고 말할 수 있을 때 그 돈에 대한 풍요로움을 느끼게 됩니다. 그랬을 때 돈에 대해서 긍정과 감사와 풍요로움이 느껴져요. 그러면 우주법계는 이 사람이 풍요로움을 느끼니까 풍요로움을 자꾸 가져다줍니다. 돈에 대한 풍요로움을 느끼는 사람에게는 돈을 가져다줘요. 내보내는 것이 돈으로 인해 풍요로운 마음을 내보내니 그 결과로써 들어오는 것도 풍요로운 결과가 들어오는 것입니다. 이 우주는 언제나 내보내는 것이 곧 들어온다는 법칙에 의해 움직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이게 바로 업보의 법칙 이예요. 생각으로 업을 지으면 그 과보를 받는 겁니다. 부유하고 풍요롭다는 생각, 의업을 세상으로 내보내면 거기에 따라 풍요롭고 부유한 현상세계가 그 과보로 들어오는 것입니다.

자식에게 불만이 많은 사람은 그 자식이 계속 불만스러운 행동을 하게 됩니다. 자식이 컴퓨터와 게임에 빠져 있잖아요. 그럼 너는 왜 만날 컴퓨터에 빠져있어 하고 화를 내고 탓을 한단 말입니다. 그러면 그 아이는 결코 그 컴퓨터에서 못 벗어납니다. 그 집착을 내가 놓아 버리기 전까지는. 오히려 거기에 대한 더 큰 집착이 생기게 됩니다. 오히려 그것을 탁 놔버릴 줄 알았을 때 그랬을 때 이 문제가 해결되기 시작합니다. 아이들이 은근히 마음속에 반발심이라는 게 엄청 커요. 부모님이 하는 이야기에는 일단 반발심부터 일어납니다. 그 반발심을 잠재우지 못하면 어떤 좋은 말도 거꾸로 들려요. 거꾸로 돌아간단 말입니다. ‘만화책 보지 마! 컴퓨터 하지 마! 게임 하지 마!’ 이 말이 오히려 게임을 더 해야겠다는 마음으로 자꾸 받아들여진다는 말입니다. 하지 말라고 하면 더 하고 싶고, 못 하게 하면 더 애틋한 마음이 생기는 것 아니겠습니까? 사랑하는 사람과도 떼어 놓으려고 애쓰면 애쓸수록 그 둘 사이의 사랑의 감정은 더 깊어가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게임하는 것이 무조건적으로 잘못된 것일까요? 이건 옳다 그르다하는 차원에서 말하는 게 아닙니다. 옳다 그르다 얘기한다면 게임하면 안 되겠죠. 그렇죠? 그러나 게임하면 안 된다는 부모님 마음의 집착 그 집착이 더 큰 문제입니다. 자식이 게임을 하기 때문에 문제가 되는 그 문제의 크기보다 너는 그 게임하면 안 되고 공부만 해야 돼 라는 부모의 집착이 사실은 더 문제고 더 큰 탁하고 부정적인 에너지를 가져 옵니다. 우주 법계를 더 어둡게 만든다 이 말 이예요. 그건 자식과의 관계회복도 어려워지게 하고 그렇게 되면 결코 자식은 부모님 말을 듣지 않고, 부모의 말에 힘이 실리지 않습니다. 하물며 『금강경』에서는 불교 그 자체에도 집착하면 그것은 더 이상 진리가 아니라고 말씀했습니다. 아무리 좋은 것일지라도 거기에 집착해서 그것을 고집하는 것이 도가 넘어서게 되면 그것은 더 이상 진리도 아니고, 지혜로움도 되지 못하는 것입니다.

 

창조하되 결과에 집착하지 말라

그러면 이상에서처럼 창조의 원리를 말씀드렸고, 왜 우리는 내가 원하는 대로 삶을 창조할 수 없는지 그 이유를 말씀드렸습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아주 중요한, 놓쳐서는 안 될 창조과정의 핵심적인 부분이 하나 더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창조하되 결과에 집착해서는 안 된다는 점입니다.

우리는 스스로 어떤 마음을 가짐으로써, 마음속에서 바라고 의도함으로써 현실을 창조해 낼 수 있는 힘이 있습니다. 그렇기에 이상에서와 같은 이이기를 듣고 많은 사람들이 힘을 낼 것입니다. ‘아, 나도 저렇게 마음을 잘만 쓰면 원하는 모든 것을 다 가질 수 있겠구나’, ‘나도 원하는 대로 돈도 많이 벌 수 있고, 지위나 권력도 얻을 수 있고, 능력도 키울 수 있겠구나’ 하고 좋아합니다.

그러나 그 마음의 이면에는 창조에 대한 바람, 집착이 있게 마련입니다. 무언가를 원하고 의도했는데 그대로 되지 않았을 때 괴롭게 마련 아니겠습니까? 많이 의도하고, 많이 바라고, 큰 에너지로써 창조한 것일수록 그것이 현실로 이루어지지 않았을 때 괴로움도 크게 마련입니다. 그것은 창조의 과정이 아니라, 오히려 거꾸로 괴로움을 창조해 내는 것이 되고 맙니다.

『금강경』에는 ‘응무소주 이생기심(應無所住 而生其心)’이라고 하여, 마땅히 마음을 내되, 머무는 바 없이 마음을 내라는 가르침을 주고 있습니다. 이것이 아주 중요합니다. 마음을 일으키지도 말고, 의도를 일으키지도 말고, 창조 작업을 하지도 말아야 한다는 것이 아닙니다. 아무런 판단도 하지 않고, 아무런 분별도 없이 그저 멍하니 바보처럼 살아야 한다는 것이 아닙니다. 또 그럴 수도 없습니다. 마음을 다 내고 살되 결과에 집착하지 말아야 한다는 말입니다. 마땅히 마음을 내고, 의도하고, 창조하고, 바라면서 살기는 할지라도 결과에 집착하지 말고 순수하게 마음을 낼 수 있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어떻게 그게 가능하냐고 묻겠지만 당연히 가능합니다. 사실은 이래도 좋고 저래도 좋다, 이런 삶도 괜찮고 저런 삶도 괜찮다, 이 결과도 좋고 저 결과도 좋다고 믿고 받아들이되, 다만 나는 이런 쪽을 선택하겠다고 할 수 있습니다. 다만 방향을 설정하는 겁니다. 그 방향이 다른 방향보다 더 좋아서가 아니라, 반드시 이 길 아니면 절대 안 되기 때문이 아니라, 다만 두 가지 평등한 길 가운데에서 어느 한 쪽을 자연스럽게 선택할 수 있다는 말입니다. 이 길도 좋고 저 길도 좋으나 나는 그저 이 길을 택했을 뿐입니다. 그러나 저 길로 접어들더라도 상관없단 말입니다. 어차피 어느 쪽으로 가든 내 표면의식대로는 안 되었을 지라도 더 깊은 차원의 우주에서는 나에게 정확히 필요한 바로 그것을 언제나 보내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언제나 이 우주법계는 정확히 필요한 일을 정확히 필요한 바로 그 순간에 보내주고 있습니다. 우주는 언제나 완전하고 완벽합니다. 사실은 나에게 일어나고 있는 바로 그 일이 지금 이 순간 나에게 가장 완전한 일이기 때문에 벌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깨달음을 얻은 자는 무언가를 창조하고, 무언가를 바라고, 기대를 가지고, 구하는 것이 아니라, 매 순간 순간 자신은 더 이상 그 무엇도 바랄 것이 없고, 얻을 것도 없고, 필요한 것도 없고, 창조할 것도 없이, 이대로 완전하고 완벽하다는 사실을 아는 자입니다. 그래서 창조하는 방법을 아는 것 보다 더 중요한 것, 더 본질적인 것은 매 순간 순간이 완전하다는 사실을 온전히 받아들이는데 있습니다. 이 부분은 뒤에 가서 다시 한 번 자세히 살펴보도록 하고 다시 이야기를 풀어가도록 하겠습니다.

 

감사와 사랑의 호흡관

그러면 이제 정리를 해야 할 시간이 오고 있는데요, 세상을 창조하는 방편의 가르침과 내맡기는 본질적인 가르침을 아우르는 아주 경이로운 수행방법 하나를 말씀드리면서 마칠까 합니다. 그것은 바로 ‘감사와 사랑의 호흡관’입니다.

숨을 들이쉬면서 ‘감사합니다’, 숨을 내쉬면서 ‘사랑합니다’ 라고 반복하는 거예요. 어떤 상황, 어떤 조건, 어떤 경계, 어떤 느낌, 어떤 괴로움이 일어나더라도 그 괴로움을 대상으로, 그 미운 사람을 대상으로, 내 안에서 일어나는 그 순간순간의 모든 마음들을 대상으로 숨을 들이쉬면서 감사합니다, 숨을 내쉬면서 사랑합니다, 아니면 숨을 들이쉬면서 감사, 숨을 내쉬면서 사랑하고 외치는 것입니다. 나에게 들어오는 모든 것들이 숨이 들어 올 때 감사함으로써 대긍정으로써 들어올 수 있도록 내 안의 에너지를 긍정으로 감사로, 풍요로움으로 만들어버리는 거예요. 나에게 그 어떤 것이 들어오더라도 그것은 감사할 재료가 됩니다.

자식이 컴퓨터에 빠져서 미쳐있습니다. 그거는 감사할 일이에요. 감사할 일이죠. 자식이 어느 날 갑자기 죽을병에 걸렸다, 그렇게 생각한다면 부모님 입장에서 그냥 공부 못해도 좋으니까, 컴퓨터 앞에서 게임만 할지라도 살아만 있으면 좋겠다 라고 생각할 거거든요. 그런데 왜 그런 일이 있고 난 다음에 그런 감사함의 결정을 할 것이냐 하는 말입니다. 지금부터 그 결정을 할 수가 있다는 거예요. 공부 잘하기를 바라지 말고 성적이 떨어지더라도 감사할 수 있습니다. 성적이 떨어졌다는 그 사실 때문에 스스로 충격을 받아서 스스로 공부할 수 있는 동력이 될 수도 있거든요.

우리가 알아야 할 한 가지 중요한 진실은, 분별하는 것은 좋은 쪽으로 분별할지라도 차라리 분별하지 않느니만 못하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면 부모님들은 이렇게 반문합니다. '스님, 자식들한테 자꾸 좋은 얘기를 해줘야지. 분별하지 않고 그냥 뭐든지 받아들여 주고 허허 웃기만 하면 되겠습니까?'라고 말이지요. 물론 안 될 수도 있지요. 옳은 것은 옳다, 그른 것은 그르다고 똑바로 얘기해 주는 것을 뭐라고 하는 것은 아닙니다. 제 말은 거기에 집착하면 안 된다는 말입니다. 아무리 좋은 것, 옳은 것이라 할지라도 거기에 집착해 빠져버리면 그것은 더 이상 옳은 것이 아니게 됩니다. 분별 자체를 하지 말라는 게 아니라 거기에 집착하면 안 된다는 겁니다. 그것은 자식과의 관계 회복을 불가능하게 만들어 버립니다. 그 말을 하되 그 말에 집착하지 않고 하면 자식이 나쁜 짓을 하게 되더라도 괜찮아요. 내가 내 생각에서 나쁜 짓이고, 그 아이의 행동에 대한 나의 해석이 나쁜 것이지 그것 자체가 나쁜 것이 아니거든요. 그래서 어떤 것이 되었든 들어 올 때는 ‘감사’하게 받아들이고 또 나에게서 나갈 때는 모든 것이 ‘사랑’으로 나갈 수 있도록 내가 내뿜는 호흡도 사랑의 호흡을 내뿜을 수 있도록, 또 나에게서 나가는 말 한 마디도 ‘사랑’으로 나갈 수 있고, 나에게서 나가는 행동 하나도 ‘사랑’이 가득한 행동으로 내보내고, 모든 마음의 에너지를 내보낼 때는 사랑의 에너지를 보태서 내보내는 것입니다. 육근(六根) 즉, 눈, 귀, 코, 혀, 몸, 뜻으로 들어오는 모든 것은 감사로써 들어오고, 심지어 누가 나한테 욕을 하더라도 감사하다고 받아들이는 거예요. 못 할 이유가 없지요.

감사할 이유를 찾으면 감사할 이유는 모든 것에 있습니다. 왜냐하면 우주 법계는 언제나 나를 돕고 있으며, 나를 성숙케 하기 위한 자비로운 일만을 벌이고 있기 때문입니다. 심지어 괴로운 일이 일어난다고 할지라도 그것은 나를 영적으로 성숙시키기 위한 더 큰 차원의 계획의 일환입니다. 물론 지금 당장 내 계산으로 따지면 나쁜 일일수도 있어요. 그러나 우주법계의 계산으로 따지면 사실은 모든 것이 근원적으로 좋은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바로 그 사실을 받아들이는 거예요. 그렇게 했을 때는 모든 것이 감사하게 받아들여질 수 있습니다.

그것은 육근(六根)으로 들어오는, 눈으로 보는 모든 것이 감사하게 느껴지고, 귀로 들리는 모든 소리가 감사하게 느껴지고, 코로 냄새 맡는 모든 것이 감사한 냄새가 되고, 맛보는 모든 음식을 감사하게 음미하게 되고, 감촉 느끼는 것, 생각하는 모든 것이 감사함으로써 들어오게 되고 나에게서 숨을 한번 들이쉬고 내 폐를, 내 오장육부를, 내 내면을 한번 거치고 나갈 때는, 그것이 아름다움으로 감사와 사랑과 자비심으로서 융화가 되어서, 그것이 뿜어져 나갈 때는 항상 사랑으로써 나갑니다. 자비로움으로써 나갑니다.

그랬을 때 나라는 존재가 어떻게 바뀌는지를, 얼마나 경이롭게 바뀌는지, 그냥 조금조금 바뀌는 게 아니라 얼마나 획기적으로 바뀌는지를 스스로의 존재로서 증명해 보시기를 바랍니다. 나라는 존재를 가지고 내가 얼마만큼 바뀔 수 있는 것인지 어떻게 내 인생 내 존재가 그렇게 바뀌어 갈 수 있는지를 스스로 증명해 내지 않으면 체험이 안 됩니다.

불교는 체험의 종교이지 그냥 껍데기 종교가 아닙니다. 이걸 내 스스로 체험하고 실천하지 않으면 그것은 현실이 되지 않습니다. 그것을 내 스스로가 실천하게 된다면 여러분 인생은 지금부터 경이로운 변화를 맞이하게 됩니다.

사람이 변하는 것은요, 사실은 부단한 노력을 통한다고 생각을 하지만 사실은 한 생각 바뀌면서 삶이 바뀌는 겁니다. 그 한 생각 바꾸기 위해서 부단한 노력이 필요한 거예요. 그런데 뭐 하러 부단한 노력을 통해서 혹은 아주 안 좋은 경험을 통해서나 고난을 격고 나서야 비로소 한 생각을 바꿉니까? 지금 이 자리에서 당장에 한 생각을 바꿀 수도 있습니다. 그 한 생각 바꾸는 아주 좋은 방법, 그래서 생각을 아름답게 바꾸는 방법, 방편적인 진리의 실천, 그것이 바로 ‘감사와 사랑의 호흡관’이고 그 감사와 사랑의 호흡관은 호흡과 함께 하는 것이기 때문에 ‘지금 이 순간’으로 나를 항상 데려오게 만듭니다. 그래서 본질적인 본질법, 근본법과도 연결이 되어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를 삶에서 풍요롭게 해 줄 뿐만 아니라 우리를 깨달음으로 이끕니다. 감사와 사랑의 호흡관에 대해서는 별도로 목탁소리 홈페이지나 저의 다른 글들에 나와 있으니 참고하시기 바라겠습니다.

여러분이 지금까지 생각했던 내 능력은 무능하다. 나는 능력이 없다. 이렇게 생각했던 모든 마음의 에너지들을 거둬들이고 이제부터 새롭게, 정말 멋지게 내 삶을 내 스스로 부처가 되어서 내 삶을 바꿔 나갈 수 있는 그런 엄청난 경이로운, 신비로운 그런 삶을 스스로의 존재로서 살아내 보시고 직접 체험해 보시기를 바라겠습니다.









Posted by 법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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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돈, 어떻게 벌것인가

                  - '10. 01. 31 일요법회

                            - 법상스님 설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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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오늘은요, 조금 색다르게 ‘돈 잘 버는 방법’, ‘돈 버는 방법’

이것을 좀 말씀드릴까 합니다. 아주 확실하고도 직접적인 돈 버는 방법입니다.

매번 법당에 오면 "비워라, 놓아라, 집착을 버려라, 욕심을 비워라" 이런 얘기만 한단 말이에요.

그랬더니 많은 분들이

“너무 서운하다” 이렇게 얘기를 합니다.

“어째, 불교는 자꾸 이렇게 비워라, 놓아라. 이런 얘기만 하느냐?, 너무 서운하다.” 이리 얘기한단 말이에요.

그래서 오늘은 돈 좀 버는 방법, 이것에 대해 말씀드릴까 싶은데요.

아~ 이렇게 말씀을 드리면 여러분들은 아마 그리 생각할 수 있습니다.

“야, 이거 너무 세속적이다. 너무 세속적이지 않느냐?”

“불교에서 어찌 그렇게 세속적인, 잡스러운, 돈 같은 그런 좀 추잡한 이야기를 입에 올리느냐”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도 있을 수 있습니다.

돈이, 어떻습니까? 과연 그럴까요? 돈이 그렇게 추잡한 겁니까?

돈이 잡스럽고 세속적인 것인가?

진짜 그런지 아닌지 오늘 한 번 탐구를 해보도록 하겠습니다.

 

불교는 ‘돈을 많이 벌어라, 돈을 많이 벌어서 행복해져라’ 이렇게 얘기하는 종교입니까?

아니면 ‘돈을 벌지 말고, 마음을 좀 비우고, 돈 없이도 가난하고 청빈하게 사는 걸로써도 만족하고 행복해라’하는 종교입니까?

불교는 ‘돈을 많이 벌어서 행복하라’는 종교인가, 아니면 ‘돈이 없어도 행복해라’는 종교인가?

어떤 종교일까요?

불교는 돈이 많고 적은 것은 상관이 없습니다.

그러니까 불교는, 말 그대로 ‘행복하라,’ 라고 말하는 것이지,

‘행복하라’고 얘기하는 그 주제에 관심이 있는 것이지, 돈이 많고 적은 것에는 관심이 없다.

그것은 하나의 선택의 문제입니다.

돈이 많음으로써 행복할 것이냐, 아니면 돈이 적더라도 그 속에서 만족과 평화를 느끼면서 행복할 것이냐?

돈이 많고 적은 것은 상관이 없다. 단지 우리는 행복한 것, 그게 중요하다는 것이죠.

물론 그동안 부처님도 그렇고 많은 인류의 성인들이

가난의 정신, 자족과 만족의 정신, 또 청빈의 정신을 많이 얘기하는데,

그 이유는 너무나도 많은 사람들이 돈에 집착하고,

돈을 벌고 돈에 의해서 행복하게 되고자 하는 것에만 중점을 잡아왔고,

너무 욕심과 집착을 많이 부려왔기 때문에

그것을 좀 중도적으로 바로잡아주고자 하는 마음에서 그런 이야기들을 많이 한 것이죠.

그러나 사실 돈이라는 것 자체는 중립적입니다.

 

돈이라는 것 자체가 어떻게 좋거나 나쁠 수 있겠어요? 돈이라는 자체는 좋거나 나쁜 것이 아니다.

만약에 ‘돈을 좋은 것이다’라고 할 수 있는가, 아니면 ‘돈은 나쁜 것’이라고 할 수 있는가를 한번 살펴보면요.

‘돈은 좋은 것이다’, ‘돈이 좋은 것이다’라고 생각한다면 어떻겠어요?

만약 돈이 좋은 것이라고 하면 왜 그토록 많은 사람들이 돈으로 인해서 타락하겠습니까?

돈으로 인해서 타락하는 사람들은 너무나도 많다.

아무리 훌륭했던 사람도 돈을 많이 벌게 되고, 돈을 너무 과도하게 축적하게 되면

점점 돈의 욕심에 막 휘둘리고 집착하고, 돈으로 인해서 타락하게 됩니다.

로또에 당첨되고 나면 잘 지내던 부부가 갑자기 이혼을 하게 되고, 서로가 서로를 헐뜯고,

서로가 이제 돈을 놔두고 투쟁의 대상이 된단 말이에요.

그러다가 심지어 로또 당첨된 사람들을 보면 자식이 부모를 죽이고, 부부가 서로를 죽이고….

이런 경우까지도 심지어는 있단 말입니다. 

돈이라는 게, 많으면 많을수록 행복하기 위해서 돈을 벌고자 하는 것인데,

돈에 대한 집착이 너무 과도하게 됐을 때, 그로 인해서 우리는 타락해지기가 쉽다.

예전에 미국에서 한 650억원 이라는 로또 금액에 당첨됐던 부부가,

당첨되자마자 얼마 안 있어 이혼을 하고,

그리고 얼마 후 대저택에서 막 으리으리하게 살다가, 숨진 채로 발견됐다고 그러거든요.

우리나라도 이런 경우는 너무나도 많다.

이 ‘돈이다.’ 라고 하면 심지어 정말 막 가족도 죽이고 하는 그런 세상이 될 정도란 말입니다.

그럼 과연 돈이 좋은 것인가? 그런 걸 본다면 돈은 좋은 게 아니죠.

또 그렇기 때문에 많은 성인들이, 현자들이, 또 부처님께서

가난의 정신을 찬양하고, 청빈의 정신을 찬양했다. 무소유를 주장하곤 했단 말이죠.

이렇게 본다면 돈이라는 것은 나쁜 게 분명해 보입니다.

오히려 가난한 나라들이, 부탄이라든가 방글라데시나, 티베트, 미안마 같은

가난한 나라의 사람들이 오히려 행복지수가 더 높단 말이에요.

그런 것을 보면 돈이 별 필요하지 않겠다, 라는 생각이 듭니다.

돈. 필요하지도 않고 돈은 좀 나쁜 것 같아요. 돈은 나쁜 게 분명해 보입니다.


그러나 반대로 과연 그러면 ‘돈은 나쁜 것'인가?

이게 '나쁜 것'인가?라고 생각한다면 또 거기에 대한 반론이 있을 수 있습니다.

돈이 나쁜 거라면, 왜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돈으로 인해서 행복해 할까?

여러분, 돈 있으면 행복하죠? 돈 있어 행복하지 않은 사람은 없단 말이에요. 

그 많은 사람들이 돈을 벌려고 하고, 돈으로 인해서 행복을 느끼고 누린단 말이에요. 

그리고 돈은 ‘나쁜 거’라고만 할 수 없는 것이, 돈을 잘 쓰게 된다면

그것은 너무나도 큰 행복과 평화로움과 부유함, 풍요로움을 이 세상에 가져다준다.

전 세계 제일가는 부자가 빌 게이츠라고 하는데, 2006년도에 빌 게이츠가

"자신의 일의 반만 하겠다.” 이렇게 말하다가 나중에는 거의 은퇴를 선언하면서

자기가 가지고 있는 전 재산을, 그야말로 재산의 상당 부분을 자선재단에 자선하겠다, 보시하겠다.

그렇게 해서 베푸는 일에 뛰어들기로 했단 말입니다.

그리고 이 빌게이츠는 전부터

“자신의 전 재산의 99%를 사회에 기부하겠다. 그리고 자식에게는, 자녀에게는 천만 달러씩만을 상속하겠다.”

그렇게 선언했습니다.

그렇게 자기가 전 세계에서 최고가는 갑부지만 99%를 사회에 헌납하겠다.(고 했습니다)

그 발표가 있고 나서 얼마 안 있다가 워렌 버핏이라고 세계에서 두 번째 가는 부자라고 하는데,

그 사람이 빌 게이츠가 만든 기부재단, 자선재단에

‘빌게이츠가 믿음이 가고 잘 할 것 같아서’라는 단순한 이유 때문에

자신의 전 재산의 80%인 370억 달러를 기부했다고 합니다. 워렌 버핏이 기부했다.

그렇게 기부했는데도 불구하고 이 사람들은 아직도 어마어마한 부자죠.

돈이 만약 이렇게 쓰여 진다면, 이렇게 우리가 가지고 있는 돈을 뭔가 부족한 사람들에게 나눌 수 있다면, 가난한 이들과 함께 나누고 베풀어 쓸 수 있다면,

과연 돈이 나쁘기만 한 것인가? 나쁘다고 할 수도 없단 말이에요.

돈이라는 것 자체는 사실은 중립니다. 돈은 좋은 것도 아니고 나쁜 것도 아니다.


어떤 부자가 있습니다. 그 사람은, 부자 그 자체만을 가지곤 그 사람이 훌륭한가, 훌륭하지 않은가를 판단할 수 없습니다.

‘돈이 많다’라는 사실 자체가 그 사람을 판단할 수 있는 어떤 특별한 결정적인 요건이 되지는 않는다.

돈 자체가 좋거나 나쁜 게 아니라, 돈에 대한 우리의 어떤 생각이나 판단이나 해석,

는  돈에 대한 욕심, 그것이 좋거나 나쁠 수가 있을 뿐이다. 

그럼 어떻게 해야 될까요? 돈을 벌어야 됩니까, 벌지 말아야 됩니까?

가난의 정신을 위해서 돈을 포기해야 됩니까, 아니면 돈을 벌어야 됩니까? 

이 돈을 버는 게 좋을까요, 아니면 돈 벌지 않고 가난하지만 자족하면서 만족하면서 사는 게 나을까요?

2

이건 어느 게 옳다, 어느 게 그르다, 어느 게 더 맞다, 더 좋은 것이다, 더 나쁜 것이다, 라고

정지을 수 있는 부분은 사실은 아니다.

이것은 어찌 보면 하나의 선택의 문제입니다.

부자를 선택해도 좋고, 가난과 청빈의 정신을 선택해도 좋다.

그런데 지금까지는 가난하게 사는 것, 청빈하게 사는 것, 뭐 그런 것에 대해서 얘기를 좀 많이 했어요.

그러다 보니까 이제 좀 식상하단 말입니다.

불교신자들이 “야, 이거 좀 가난한 것 말고, 좀 부자 되는 것 좀 가르쳐달라” 이렇게 얘기한단 말이에요.

그래서 오늘은 이번에는 돈을 좀 많이 벌면서도 행복할 수 있는 방법, 이것을 좀 말씀드려보겠다는 거죠.


그런데 이렇게 오늘처럼 ‘돈을 버는 것’에 대해서 이야기 할 때는,

아주 중요한 놓쳐서는 안 될 중요한 한 가지가 있습니다.

그게 뭐냐 하면….

돈을 많이 버는 쪽을 선택하더라도 좋을만한 정신적인 바탕이 돼 있어야 된다.

정신과 지혜가 우뚝 서 있어야지만 된다.

그렇지 않으면 이 돈을 많이 버는 것이 그 사람을 돕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을 무너뜨리게 될 수도 있다.

독이 될 수도 있다는 얘기입니다.

돈은 나쁠 수도 있고 좋을 수도 있다고 했는데,

돈을 나쁘게 하는 이유는 뭐냐 하면, 우리가 돈에 대해서 집착하고 욕심을 부리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서 돈을 나 자신을 위해서, 나 개인을 위해서 쓸 때, 돈은 나빠진다는 것이죠.

돈이라는 것이 우리 아상과 이기심과 아집을 위해 사용될 경우에, 돈은 나빠진다.

아상을 강화하기 위한 용도로, 아집을 키우기 위한 용도로 쓰여 질 때, 돈은 나쁘단 말이죠.

그러나 돈을 좋게 하는 것은 그 돈이 우리 아상을 타파하는 방향으로 사용되어 진다면, 돈은 좋단 말입니다.

다시 말해서 이타적으로 베풀고, 나누고, 보시하고, 타인을 돕는 용도로 사용된다,

사랑과 자비를 실천하는 용도로 사용되었다, 그럴 때 돈은 벌어도 좋다.

그러려면 어때요? 돈을 벌어서 행복하고자 하는 사람이라면 정신이 바탕이 돼 있어야 합니다.

정신적인 토대가 자리 잡고 있어야 된다. 

이 돈을 ‘나 개인만을 위해 쓸 것이 아니라 이타적으로 남을 위해 쓰겠다.’라는

그 토대가 되어 있는 사람에게는 돈을 버는 것으로써 행복한 그 상황도 좋은 상황이다. 

그러나 아상과 아집에, 이기심에 쌓여 있은 사람은 돈을 버는 것으로 인해서 행복한 상황이 오지 않는다.

오히려 그 사람에게는 돈이 독이 될 수가 있다.


그래서 오늘 설법에 앞서서 돈에 대한 우리의 관점의 두 번째가,

돈으로 인해서 나눔과 베품을 실천할 수 있고, 사랑과 자비를 실천할 수 있고,

내 아상 타파에 도움이 되는 방향으로 써야 된다. 그것이 토대가 되어야 된단 얘깁니다.


그러면 이제, 돈을 버는 방법을 한 번 알아보겠다는 말이죠.

이 세상을 움직이는 법칙이 있습니다, 법칙이.

그 법칙이 뭐냐 하면 ‘업보(業報)의 법칙’이다.

우리가 ‘업’을 지으면 그 업에 따른 ‘과보'를 받는다는 법칙입니다.

업보라는 것은, 인간이 즉 나라는 존재가 업을 지으면 세상은 즉 이 우주법계는 보를 가져 온다, 이겁니다. 

나를 중심으로 내가 업을 바깥으로 내보내면, 보 즉 과보라는 것이 나에게 다시 돌아온다.

이게 바로 업보의 법칙입니다.

그래서 업을 지을 수 있는 것은 나고, 보는 세상으로부터 옵니다. 나에게.

그럼 여기서 업은 뭐냐? 업이라는 것은 행위입니다, 행위, 행위.

다시 말해 ‘어떤 행위를 했느냐에 따라서 어떤 결과가 온다.’ 이거거든요. 어떤 과보가 온다.

돈에 대해서 얘기한다면, 어떤 행위를 했느냐에 따라서

돈이 들어올 것인가, 적게 들어올 것인가, 많이 올 것인가, 적게 들어올 것인가,

돈이 들어 올 것인가, 말 것인가가 결정된다는 소리입니다.

내 행위가 어떠냐에 따라서 돈이 들어오기도 하고 들어오지 않기도 한다. 이것은 업보의 법칙입니다. 

그러면 이 행위라는 게 뭐냐?

다시 말해서 이 업보의 관점에서 본다면 돈을 벌려면 돈을 벌만한 업을 지어야 된다.

그런데 그 근간이 되는 게 뭐냐 하면 바로 이 ‘의업(意業)이다’, 의업. 

업에는 세 가지가 있습니다.

‘신구의(身口意) 삼업(三業)’이라고 해서 몸으로 짓는 업이 있고, 입으로 짓는 업이 있고, 생각으로 짓는 업이 있다.

그런데 이 생각으로 짓는 업은 가장 토대가 되고, 근본이 되고, 근원이 되고, 근간이 됩니다.

나무로 치면 뿌리가 된단 말이에요. 근원이 되는 의업(意業).

이 생각이라는 것이 어떤 생각을 내가 가지고 있느냐에 따라서,

돈이 많이 들어올 것이냐, 돈이 들어오지 않을 것이냐가 결정이 된단 말입니다.

이 신구의(身口意) 삼업(三業)의 뿌리, 근본이 바로 의업(意業)이기 때문에

내가 어떤 생각을 하느냐, 돈에 대한 어떤 관점을 가지고 있느냐, 돈에 대한 어떤 견해를 가지고 있느냐에 따라서 돈이 많이 들어올 것인지, 말 것인지는 결정되는 것이다. 거기서 결정되는 것이다.


다시 말해 돈에 대한 나의 생각, 사고, 정신. 그것을 바꿔야지만 돈이 들어올 수 있도록 하는 방법이 된다.

다시 말해서 우리는요, 돈을 벌지 못하도록 하는 사고방식을 고수하고 있는 사람이 있고,

돈을 벌수 있도록 하는 사고방식, 의업을 고수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게 뭐냐 하면 이를테면

돈을 벌지 못하도록 하는 내 안에 있는 어떤 생각, 돈이 들어오지 못하도록 하는 내 안의 생각.

즉 다시 말해 업보의 관점으로 봤을 때 어떤 업을 짓느냐에 따라서 보가 결정되는데,

이 업이라는 것 중에 제일 중요한 게 의업이라고 했고, 의업, 즉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느냐에 따라서

보, 과보로 돈이 들어올 것인지, 말 것인지는 결정된단 말이에요.

그럼 그 어떤 생각이 돈을 들어오게 하느냐, 어떤 생각이 돈을 들어오지 못하게 하느냐, 나에게 돈이 들어오는 것을 막고 있느냐, 그런 생각이 있습니다.

돈이 안 들어오는 사람이 있다면, 자기 안에 돈이 들어오지 못하도록 하는 특별한 독특한 생각이 있습니다.

돈을 많이 버는 사람들은 돈을 끌어들일 수밖에 없는 생각에너지가 있다. 업이 있다.

그런 업을 짓고 있다. 생각에너지를. 


여러분, 돈이 나한테 들어오지 못하도록 하는 대표적인 업이 뭐냐, 의업이 뭐냐, 생각이 뭐냐?

이런 생각을 가지고 있으면 나에게 돈이 들어오지 않습니다. 

그런데 애석하게도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런 생각을 가지고 살아요.

그리고 그러기 때문에 부자가 되지 못하고 산다.

뭐냐 하면? 이를테면 첫째, 어떤 생각이 나에게 돈이 들어오는 것을 막느냐?

첫째는 뭐냐 하면, ‘나에게는 돈이 부족하다’라는 생각입니다. ‘나는 돈이 충분하지 않다’라는 생각이에요.

여러분, 자기가 충분히 쓸 만큼 돈이 충분하다고 생각합니까?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은 없다.

대부분 ‘아직은 부족하다’라고 생각합니다. ‘아직 더 필요하다’ 이리 생각해요.

‘아직 돈이 부족하다. 돈이 충분하지 않다’라고 생각한단 말이에요.

그러니까 내 의업으로 내 생각으로 ‘나는 돈이 부족해, 나는 돈이 충분하지 않아’ 라는 것을

이 우주법계로 내보낸단 말입니다.

업을 ‘나는 돈이 없다, 부족하다.’ 이것을 우주법계로 내보낸다는 말입니다.

이런 업을 짓는단 말이에요. 부족과 결핍의 업을 짓는단 말입니다.

‘나는 없다. 나는 돈이 부족하다.’ 이 생각을 우주로 보내니까, 어때요?

우주법계는 어떤 보를 가져오겠어요?

내가 내보내는 게 부족하고 결핍돼 있는 걸 내보내니까, 우주는 똑같은 것을 반사시키는 겁니다.

이 우주법계는 ‘내 생각의 스캐너’ 입니다. 복사기다.

내가 생각하는 것을 우주로 내보내면 그것이 그대로 나에게 다시 스캔되어져서 돌아온단 말이에요.

그러니까 부족한 에너지를 내보내니까, 어때요?

부족한 것이 들어온다. 그러니 돈을 많이 벌수가 없다.

내 스스로 부족하다고 생각하니까, 풍요롭다고 생각하지 않고 부족하다고 생각하니까,

부족하다는 생각에너지, 부족하다는 의업을 세상으로 내보내는 거예요.

그러니까 과보는? 부족한 과보가 들어올 수밖에 없다.

그러니까 여러분이 지금 받고 있는 월급이 ‘부족하다, 충분하지 않다’,

이리 생각하는 사람은 더 많은 월급을 받을 수도 없고

더 많은 돈을 얻을 근원적인 의업 자체를 생성시키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두 번째로, 비슷한 얘기인데요.

‘돈이 부족하다’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돈을 더 많이 원합니다.

'돈을 더 많이 벌어야 돼', 하고 돈을 원해요.

'돈을 더 많이 벌게 해 주세요', 하고 기도한단 말입니다. 빈단 말이에요. 빌고 원하고 기도한다. 

그런데 우리가 알아야 될 아주 특별한 것은, 원하는 것은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비는 것은 이루어지지 않는다.

 

3

‘원하고 빈다.’라는 것은, 빌게 됐을 때 ‘빈다’ 라는 것, ‘원하다’ 라는 것은

지금 결핍을 의미하는 것이기 때문에 그렇다.

내가 뭔가를 원한다, 돈을 원한다, ‘더 많은 돈을 벌게 해 주십시오’라고 빌었어요.

그 말은 지금 ‘나는 지금 돈이 없습니다,’라는 소리를 내보내는 것이잖아요. 생각의 토대가 그렇다.

의업. 이 생각의 토대라는 것은, 겉으로 드러난 것은 ‘돈을 더 벌게 해주세요,’ 이 말인데, 

그 토대는 뭐냐 하면, ‘나는 돈이 없습니다.’ ‘나는 돈이 부족합니다.’ 이것을 내보내는 것이다.

그래서 더 많은 돈을 원하는 마음, 이 마음이 우리를 가난하게 만듭니다.

‘더 많은 돈을 벌어야 되겠다.’, 라고 생각하는 마음이 우리를 가난하게 만든다.

‘돈 벌게 해주세요’ 하고 ‘돈을 더 많이 벌게 원합니다’ 라고 하는 마음이 우리를 가난하고 궁핍하게 만드는 생각에너지다. 의업이다. 

그러니까 돈을 더 벌게 해달라고 빌면 빌수록 우리는 가난해질 수밖에 없습니다. 

  

세 번째로, 우리 안에는요, 아까 처음에 제가 말씀드린 것처럼, 제가 법당에서

“오늘은 돈 버는 방법에 대해서 말씀드리겠습니다,”라고 했을 때,

어떤 사람들은, 수행자 불자 내지는 조금 더 신성하고 청정하고 성스러운 어떤 종교적인 사람일수록

어떤 생각을 하냐 하면,

“아니, 어떻게 스님이 저런 말씀을 할 수 있지? 법당에서 어찌 돈 버는 얘기를 할 수 있지?”

이런 생각을 가져요.  

그런 생각의 바탕에 뭐가 있습니까?

‘돈은 나쁘다’, ‘돈은 성스럽지 못하다’, ‘돈은 추잡스러운 것이다’ 이런 생각이 깔려 있습니다.

다시 말해 돈은 나쁘다는 생각, 돈은 좋지 않은 것이라는 생각, 세속적이고 추잡스럽고 성스럽지 못하다는 생각이, 우리 안에 깔려 있습니다. 근원에는. 

여러분의 생각의 사고에, 여러분의 의업에서, 여러분의 생각에서 ‘돈은 나쁘다’, 라는 생각이 있단 말이에요. ‘돈은 근원적이지 못하다. 돈이 없더라도 자유로울 수 있어야지!’ 이런 생각이 깔려 있단 말입니다.


네 번째는 그겁니다. 위의 두 가지 생각이 함께 있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돈이 없더라도 행복해야 해.' '돈은 그렇게 중요한 게 아니야'

그렇게 생각하지만 또 한편으로는 어때요? 한편으로는 돈을 요구하고 돈을 갈망합니다.

그러니까 여러분이 세상으로 내보내는 것이 한편으로는 돈을 더 벌고 싶은데,

한편으로는 '돈은 없어도 되는 거야', '돈은 좋은 게 아니야', '성스러운 게 아니야', 이런 에너지를 내보낸단 말입니다.  

그러니까 우주법계에서 봤을 때는 어때요?

이 우주법계는 그야말로 스캐너와 같다고 했습니다. 우리가 우주로 내보내는 생각을 고스란히 돌려준다.

그러나 우리는 돈이 나쁘다는 생각도 내보내고, 그런데 돈을 더 벌고 싶다는 생각도 내보내고.

우리의 돈에 대한 관점이 이중적입니다. 일관성이 없어요. 오락가락 합니다.

그러니까 우주법계에서 나한테 돈을 가져다주려는 마음도 있고, 또 주지 않으려는 마음도 있는 거예요.

이 우주법계도 우리에게 과보를 오락가락~ 하게 내보내주는 겁니다.

이런 생각들이 우리를 가난하게 만든다. 우리 안에 있는 생각들. 그 생각입니다.

이것은 좋고 나쁜 개념을 얘기하는 게 아닙니다. 그냥 있는 그대로의 현실을 얘기하는 거예요.

어느 게 더 좋다 나쁘다, 라는 개념이 아니고.


이를테면 또 어떤 생각이 있냐 하면 예를 들면 월급쟁이들은 이런단 말이에요.

“야, 돈이라는 게, 어떻게 내가 더 벌고 싶다고 더 벌어지냐?"

"나야 어차피 공무원이고 월급쟁이니까, 월급 받는 게 그게 다지”

“야, 땅을 파서 돈이 나오냐? 내가 생각하다고 돈이 더 나오냐?”

이런 생각을 가져요. 그런 생각을 가지면 어때요?

자기가 받는 월급 이상은 절대 받을 수가 없습니다. 나오지가 않아요.

그런데 사실은 어떻다? 내 안에서

“야, 나는 더 많은 돈을 벌수 없어. 나올 구멍이 없는데 어떻게 벌어”

이런 생각을 하는 사람은 내 머릿속에 돈이라는 것에 제한을 두는 것입니다.

내 월급 이상은 벌 수 없다고 딱 한정시키고 있어요. 그런 사람은 더 많은 돈을 벌 수 없습니다.

사실은요. 사실은. 땅을 파면 돈이 나옵니까?

땅을 파면 돈이 나올 수도 있다. 땅을 파면 돈이 나올 수도 있어요.

다시 말해서 전혀 생각지도 못했던, 전혀 생각지도 못한 방향에서 돈이 들어올 수도 있습니다.

또 전혀 생각지도 못했던 방향에서 나한테 있던 돈이 왕창 나가게 될 수도 있다.

그런데 내 안에서 ‘아, 요런 요런 틀 속에서만 돈을 벌 수 있어’라고 딱 고정지어 놓으면

그 틀 속 이외에는 돈을 벌 방향이 없어진다.

내 마음속에서 그것을 원했으니까, 그것을 딱 의업을 내보냈기 때문에 그렇다.


이런 다양한 어떤 생각들이, 이제 좀 핵심적으로 말하면 크게 두 가지 입니다.

돈에 대한 여러분의 편견, 이 돈을 끌어들이지 못하는 생각을 크게 말하면 두 가지다.  

첫째는, 나는 돈이 부족하다는 생각, 더 많은 것을 원한다는 생각. 이게 부족과 결핍을 창조해요. 돈이 더 없는 현실을 창조합니다. 

두 번째는, 돈은 나쁘다는 생각, 돈은 성스럽지 못하다는 생각, 수행자가 어떻게 돈을 가질 것이냐, 수행하는 사람들이 어찌 돈에 연연할 것이냐? 이런 생각.

그게 나쁘다는 생각은 아닙니다. 제가 그것이 나쁘다, 라고 얘기하는 게 아니에요. 그 생각이 다만 우리에게 돈이 들어오는 것을 막을 뿐이다.


아까 앞에서 한 번 더 짚었지만, 다시 한 번 짚어야 될 생각은 뭐냐 하면

돈은, 돈 그 자체는 좋은 것도 아니고 나쁜 것도 아니다. 돈은 좋은 것도 아니고 나쁜 것도 아니다.

돈을 쓰는 사람이 문제죠. 돈을 잘 쓰는 사람에게 돈은 좋은 겁니다.

돈을 잘 쓰는 사람은 오히려 돈을 많이 벌수록 이 세상을 위해서 좋은 일입니다.

그런데 지혜롭지 못한 사람은 돈이 없는 게 좋아요. 없을수록 좋아요.

돈이 없으면 그나마 나쁜 짓도 덜 하잖아요. 돈이 많으면 나쁜 짓도 더 대규모로 합니다.

그러니까 지혜롭지 못한 사람에게 돈이 없는 게 더 나을 수가 있다.

근데 오히려 지혜로운 사람에겐 돈이 많은 게 나을 수가 있다.

아까 그 토대, 이타적인 토대가 있는 사람에게는.


그래서 지금 말씀드린 것처럼 우리 생각, 의업.

돈에 대한 나의 생각 때문에 내가 돈을 벌지 못한다, 그럼 어떻게 하면 되겠어요?

돈에 대한 나의 생각을 바꾸면 됩니다. 의업을 바꾸면 돼요.

업을 바꾸면 현실, 과보가 바뀔 수밖에 없는 게 이 우주법계의 이치입니다. 

내가 생각의 에너지, 의업을 바꾸면 현실이 바뀐다.

가난한 사람이 자기 안에 있는 이 의업, 돈에 대한 내 생각,

‘생각이 가난하기 때문에 현실이 가난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는 그런 생각을 바꾸면, 현실이 바뀐다는 거예요.


그러면 답이 나왔죠? 그죠?  

생각만 바꾸면 여러분은 부자가 될 수 있단 말이에요.

부자가 될 수 있는 쪽으로 생각을 바꾸면, 여러분은 부자가 될 수 있다. 간단하단 말입니다.

그런데도 여러분들이 그다지 시원~한 그런 모습이 아닙니다.

뭔가 아주 막 희망에 차서 ‘야, 나도 이제 돈을 벌 수 있구나.’ 이런 신이 난 표정이 아니에요. 왜 그럴까요? 

“아니, 생각을 바꿔야지 현실이 바뀐다는 것 정도는, 사실은 저도 압니다.” 이렇게 얘기해요. 

“아니, 생각을 바꿔야지만 된다는 얘기는 저도 알지요”

“생각을 바꾸는 게 그게 힘든 거지. 어떻게 하면 생각을 바꿀 수 있는지, 그것을 가르쳐 줘야지, 생각을 바꿔라, 라는 얘기는 누가 못하겠습니까?” 이렇게 얘기 한다 말이에요.

맞죠? 생각을 바꿔야 된다는 것은 압니다.

돈에 대한 우리 생각을 바꾸면 현실도 바뀐다, 라는 건 알아요. 

그런데 우리에게 중요한 문제점은 뭐냐 하면 그 생각을 바꾸기가 어려워요.

여러분이 지난 여러분의 생애 동안 가져왔던 생각인데, 딱 못 박혀진 놓은 생각인데,

그 생각이 어떻게 하루아침에 바뀌느냐? 바뀌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그게 답답한 거예요. 

그럼 어떻게 하면 생각이 바뀌겠느냐? 의업을 바꾸려면 어떻게 해야 하느냐?

그 구체적인 방법을, 쉽게 말해서 부자가 되려면 어떻게 해야 되느냐에 대한

구체적이고 세부적인 방법을 말씀을 드린다.

 

이 말씀을 드리기 전에 먼저 우리가 알아야 될 게 있습니다. 그게 뭐냐 하면

신구의(身口意) 삼업(三業)에 관한 거예요.

어떤 업을 짓느냐에 따라서 어떤 과보가 나에게 온단 말입니다.

그럼 업은 어떤 종류가 있느냐를 먼저 알아야 된단 말입니다.

업은 세 가지로 나뉜다고 했어요. 신구의(身口意) 삼업.  

이 신구의 삼업 가운데 의업(意業)이 가장 토대가 되는 근원이 되고, 근간이 되고, 뿌리가 되는 에너지라고 했습니다.

의업이 딱 바뀌게 되면, 의업이라는 토대 위에 즉 그 뿌리 위에 신업과 구업이 바뀌게 됩니다.

그럼 내 운명이 바뀌고 내 삶이 바뀔 수밖에 없게 근원적으로 바뀌게 되는 거예요.   

본질이 바뀌게 되는 겁니다. 그러니까 젤 중요한 것은 의업을 바꾸는 겁니다.

4

그런데 이 의업이 근원적이긴 하지만, 보다 직접적이고 실질적이지는 못할 수도 있어요.

뭐보다? 신업이나 구업보다.

의업보다는 좀 더 직접적이고 좀 더 현실감각 있게 나오는 것이 뭐냐 하면?

그것이 바로 구업입니다. 의업보다는 구업. 

의업은 생각에너지예요. 사고에너지, 정신에너지입니다. 그러니 아직 정신의 에너지 일 뿐이에요.

그런데 구업(口業), 즉 입으로 말로 함과 동시에 소리에너지로 바뀌어요. 

생각 속에서만 존재하던 에너지가 소리의 파장으로 바뀝니다.

소리의 파장은 힘을 가지고 있다.

그 다음에, 이 소리의 파장인 말보다 더 강력하고 직접적인, 더 빠른 방법이 뭐냐 하면?

바로 신업(身業)이다. 신업. 몸으로 직접 행동하는 거다. 

마음속으로 생각만 가지고 있는 것보다 그것을 말로 하는 게 더 빨리 실천되지 않겠습니까?

그리고 말로만 하는 것보다, 몸으로 직접 가서 행동하는 게 더 직접적인 것이잖아요? 

그러나 근원적으로 생각이 바탕이 되지 않으면 말도 나오지 않고, 행동도 나오지가 않습니다.

그러면, 아까 다시 주제로 넘어가서요.

의업을 바꿔야 된다고 그랬어요. 생각을 바꿔야 된다, 생각을 바꿔야 된다고 그랬습니다.

그런데 생각은 안 바뀌어요. 생각을 바꾸고 싶은데, 생각은 바뀌지가 않습니다.

그럼 어떻게 하면 되느냐?

생각은 근원적이기 때문에 잘 안 바뀌어요. 근원적인 것은 뒤흔들기가 좀처럼 쉽지가 않지 않습니까? 

그럼 근원적인 것 말고, 뿌리 말고, 뿌리에. 뿌리에 양분을 주려면 시간이 걸리잖아요?

그런데 줄기나 가지나 열매를 맨들맨들하게 바꾸려면 어때요?

바로 눈에 보이니까, 바로 그냥 물을 뿌려서 씻든가 할 수 있단 말이죠. 눈에 보이니까.

그러니까 의업을 바꾸기 위해서는 어떻게 하면 되느냐?

의업은 근원적인 것이기 때문에 의업을 바꾸면, 이건 모든 게 끝난 겁니다. 

그런데 의업이 안 바뀐다. 그럼 어떻게 하면 되느냐?

신업과 구업을 먼저 바꾸면 된다.

왜냐면 신업은 직접적이고, 구업도 직접적이기 때문에.(그렇다.)

구업은 직접적이고, 신업은 더욱더 직접적이고 강력하기 때문에 그렇다.

신업을 바꾸면 즉, 행동을 바꾸고 말을 바꾸면 생각은 따라오게 된단 말입니다. 이건 중요한 얘깁니다. 

생각을 먼저 바꿔야 되는데, 생각이 잘 안 바뀐단 말입니다.

그럼 어떻게 하면 생각을 바꿀 수 있느냐?

행동을 먼저 바꿔라, 말을 먼저 바꿔라.

그러면 그것에 따른 생각이 토대로 정립이 되게 돼 있습니다.

신업과 구업을 먼저 행하면, 의업도 거기에 따르게 돼 있다.

웃으면 웃을 일이 생긴다, 이런단 말이에요.

먼저 웃어야 된다. 먼저 행동해야 된다. 그래서 우리가 먼저 행동한다.


예를 들어, 이제 돈에 대한 얘기를 했단 말이에요. 비유를 들어봅니다.

어떻게 하면 돈을 벌 수 있느냐?

돈에 대한 생각을 바꾸면 됩니다.

나는 부족하다는 생각이 아니라 풍요롭다는 생각, 돈은 나쁜 것이 아니라 돈은 좋은 것이다 라는 생각.

돈을 아름답게 썼을 때 돈은 좋은 것이라는 생각. 이렇게 바꾸면 되는데,

“아니 나는 지금 가난해 죽겠는데, 나는 지금 가난한데, 어떻게 내가 풍요로운 생각으로 바꿀 수가 있겠습니까?"

'나는 가난한데요.' 이런 의업 때문에 현실이 가난하게 됐다는 것을 모른단 말이에요.

여러분이 지금 가난합니다. 가난하지만 내가 부자가 되고 싶어요.

그럼 부자가 되려면 어떻게 해야 되느냐? 생각을 바꿔야 된다. 부자가 될 수 있도록 생각을 바꿔야 한다.

‘나는 풍요롭다’는 것을 알아야 된단 말입니다.

그런데 현실이 가난하니까, 풍요롭다 라고 의업을 바꿀 수가 없어요. 생각을 바꿀 수가 없어요.  

그럼 어떻게 한다? 신업과 구업, 즉 먼저 행동하고 먼저 말한다.

그러면 그 토대인 생각이 바뀝니다. 

어떻게 하면 되겠어요?

여러분이 만약에 부자라고 생각한다면, 풍요롭다고 생각한다면,

‘나는 부족합니다, 결핍되어 있습니다.’, 라고 생각하지 않고 풍요롭다고 여길 수 있다면, 어때요?

어떤 행동이 나오겠어요? 부자들은 어떤 행동을 하겠어요?

아까 제가 먼저 토대를 얘기했어요.

이타적인 쪽으로 돈을 쓰게 됐을 때 돈은 좋은 것이라고 했어요. 나만을 위해 쓰는 것이 아니라.   

이타적이고 나만을 위해 쓰지 않고, 사랑과 자비의 토대에서 돈이 많습니다.

이타적인 토대 위에 돈이 많아요. 그럼 여러분은 그 돈으로 뭐를 하겠습니까?

어떤 행동이 나오고, 어떤 말이 나오겠어요? 

베푸는 행동이 나옵니다. 돈이 많다면.

지극히 이타적인 사람이 돈이 많아요. 그럼 그 돈을 가지고 뭐를 하겠습니까?

베푼다. 베푸는 행동을 직접적으로 합니다. 

그리고 어디 가서도 “베풀어야 된다, 베풀어야 된다.”, 고 말하고.

어디 가서도 “제가 베풀겠습니다.”라고 말 한단 말이에요.

말하고 나면 어때요? 그러고 나면 돈이 따라 오는 겁니다.

제일 직접적인 게 뭐냐? 행동이다.

예를 들어 여러분, 어디에 힘든 분들이 계세요. 아이티 참사가 일어났다.

‘야, 내가 도와야겠다.’ 생각에서 몇날 며칠을 ‘도와야겠다, 도와야겠다.’, 생각합니다.  

생각에너지는 근원적이긴 하지만, 현실적이고 직접적이지는 못해요.

‘야, 내가 아이티 참사에 1,000만원을 보시해야겠다. 내가 100만원을 보시해야겠다.’고 생각했어요.

그 생각에너지는 바로 현실이 되는 에너지가 아닙니다.

그런데 머릿속에서만 계속 ‘100만원, 100만원, 100만원’ 돌고 있어요.

그런데 이것을 좀 더 구체적인 현실로 만들려면 어떻게 하면 되겠어요?

먼저 말하면 된다. 먼저 공표를 하는 겁니다. 약속을 하고, 약정을 하는 거예요. 

“제가 100만원 내겠습니다.” 먼저 말해놓으면 어때요?

말하고 난 다음에 따라가는 것은, 뭡니까?

말했으니까, 말에 책임을 져야 되니까, 입금한단 말이에요. 행동이 된단 말입니다.  

그렇게 말하고 나면 행동이 뒤따르는 거예요.

그런데 말하고 났지만 행동이 뒤따르지 않는 사람들도 때때로 있어요.

그런데 행동은 어때요? 신업은 어때요? 말보다 더 직접적입니다.

‘100만원 보시해야 되겠다’ 라고 생각해서 하는 것보다 말하는 게 더 나은데,  

말보다 더 빠른 것은 행동이다.

생각나자마자 바로 그냥 100만원 탁 갖다 주면, 그건 바로 행동한 것 아니겠습니까?

그래서 신업이 제일 직접적인 거예요. 

우리가 보통 ‘100만원 보시해야지’, 라고 생각하면,

의업의 에너지가 100만원 보시해야겠다, 고 생각해 놓고

그 다음날 어떤 생각이드냐 하면, 이 생각은 아상과 아집이 계속 우리를 끌어내립니다.

‘100만원 보시해야겠다.’고 생각했는데, 그 다음날 100만원 보시하려고 생각하면 머릿속에서 막 아상이 소리칩니다. 

‘야, 100만원이 얼마나 큰돈인데, 네가 거기다 그걸 갖다 주냐?'

'야, 한 50만원만 하자.’ 이런단 말이에요.

‘아, 맞아. 한 50만원만 하자.’ 이 생각이 들었다가 

조금 있다가 돈 입금하려고 은행에 걸어가면서 ‘한 30만원만 할까?’

은행 문 앞에 가서, ‘아, 한 20만원만 해야지’

하다가 은행 창고 앞에 가서 10만원을 꺼내 든단 말입니다. 

그래놓고선 정작 그 직원한테 얘기 할 때는 “한 5만원만 거기로 보내주세요”그런단 말이에요.

처음에 100만원을 생각했으나 계속 우리 머릿속의 생각은,

머릿속의 생각이라는 녀석은 계속 나 위주로 흐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아상을 충족시키는 위주로 흐르기 때문에 그렇다. 

그러니까 생각만 해서는 안 된다. 먼저 행동하고 말할 수 있어야 된다.

뭔가 보시해야 되겠다는 생각이 있으면, 바로 먼저 행동부터 해야 한다. 아님 말부터 하던가.

행동부터 하는 게 제일 좋고, 그게 안 되면 말부터 한다.


그래서, 이제 결론입니다.

부자가 되고 싶다, 돈을 많이 벌고 싶다, 그러면 생각을 바꿔야 해요.

‘나는 가난하다’는 생각 자체를 버려야 된다. 풍요롭다고 생각해야 돼요.

난 이대로도 충분하다. 풍요롭다. 즉 부족하다는 생각을 버려야 됩니다.

이 생각의 의업을 바꿔야 된다. '풍요롭다', 라는 생각으로 바꿔야 된다. 

그런데 이 생각을 바꾸기가 쉽지 않단 말입니다. 이 의업을 바꾸기가 쉽지 않아요.

의업을 바꾸기가 쉽지 않으니까, 어떻게 하면 의업이 바뀌어 지느냐?

먼저 신업과 구업을 바꾸고 나면 의업은 따라서 점점 바뀌게 된다.

그러니까 먼저 행동해야 된다.

불교에서는 이 신구의(身口意) 삼업이라는 게, 순서가 중요합니다. 

신업(身業)이 제일 직접적이라 맨 먼저 나왔어요. 구업(口業)이 그 다음으로 직접적이고, 의업(意業)은 그 근본적인 토대가 됩니다.

우리가 뭔가 업을 바꾸려면 신업부터 바꿔야 합니다. 이게 순서예요.

신업 바꾸고, 구업 바꾸고, 의업이 점점 따라 오는 거예요.  

의업은 토대가 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래서 불교에서는 그럽니다. “저질러라. 표현이 성불의 지름길이다” 먼저 저질러라 이럽니다.

누군가를 도와줘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면 먼저 저질러라.

‘오늘 법당 갈까 말까, 갈까 말까’,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냥 저질러서 신발신고 나와야 돼요.

머릿속에서 ‘가야지, 가야지, 오늘 좀 쉴까? 가지 말까?’

이렇게 머릿속에서 돌게 되면, 일단 못 간다.

일단 먼저 신업, 먼저 행동해야 된다.

그러고 구업으로 “야, 나 오늘 간다. 저 다음 주 가겠습니다.”

말이라도 해야 된다. 그러면 더 실천할 수 있는 확률이 커져요. 

생각만 가지고서는 안 된다.

그러나 물론 생각의 토대가 있어야 돼요. ‘법당을 가는 것이 좋다’는 그 토대가 의업으로서 있어야 된다.

 

5

마찬가집니다. 

돈을 많이 벌겠다. 그러면 돈에 대한 생각을 바꿔야 됩니다.

돈이 부족하다는 생각을 버려야 된다.

돈은 나쁜 것이라는 생각을 버려야 된다. 

돈이 좋게 쓰이면 좋은 것인데, 왜 나쁜 것입니까?

그러려면, 그 의업을 바꾸려면 신업과 구업이 먼저 바뀌어야 된다.

그래서 먼저 풍요롭다고 생각하고 신업을 저지르는 것입니다.

왜냐면 내가 내보내야만 들어오니까,

내가 다만 100원이 있으면 100원을 나누고, 먹을 게 있으면 먹을 걸 나누고, 책이 있으면 책도 나누고.

뭐든지 몸으로 그냥 저질러서 나눠야 된다. 이웃과 나눠야 된다.

나눈다는 행위 자체는 뭡니까? 내가 풍요롭다는 의지, 에너지를 이 우주법계에 내보내는 거예요.

풍요로워야 나눠질 수 있을 것 아닙니까?  

그러니까, ‘나눈다’, 라는 행위 자체는,

나는 풍요롭다는 것을 이 우주로 내보내는, 강력한 우주로 메시지를 내보내는 것이에요.

그래서 그 신업과 구업이 바탕이 되면 점차 이제 생각도 따라갑니다.


여러분, 돈이라는 건요. 돈이라는 것은,

그렇게 여러분이 쩔쩔매야 될 그렇게 엄청난 게 아닙니다.

돈 때문에, 돈 10원 한 장, 20원 한 장 때문에 막 그냥 쪼잔하게 쩔쩔매야 될 그런 것이 아니다.

내 생각 속에서 ‘돈을 벌기에는 너무 힘들 것이다’라는 생각이 있으면, 그 사람은 돈 벌기 힘들어져요. 

그런데 생각 속에서, 쉽게 말해 돈을 좀 우습게 보란 말이에요. 같잖게 보란 말이에요.

‘돈이라는 것은 아무 것도 아니야’.(이렇게 말입니다)

돈이라는 것은 하나의 에너지입니다. 그렇게 생각에너지를 바꾸면 돈이라는 물질에너지는 딸려 오는 겁니다.

100만원 벌기는 좀 쉽지만, 천만원, 일억 버는 것은 어렵다?

그것은 우리의 생각일 뿐이에요. 우리 생각일 뿐이다.

천만원을 버는 거든, 일억을 버는 거든, 10억을 버는 거든, 100억을 버는 거든, 사실은 다르지 않다. 

내 생각이 바뀌면 현실은 바뀐다.


음, 모르겠습니다. 저는 그런 생각이 있어요.

돈에 대해서 그렇게 막~ 막~ 그럴 필요는 없다.

왜냐하면 돈이라는 것은요, 내가 이타적으로 쓸 수 있고 분명히 지혜롭게 쓸 수 있다면,

돈은 언제든지 이 우주법계에서 끌어다 쓸 수 있는 겁니다. 언제든 우주법계에서 끌어 쓸 수 있다.

이게 바로 무량대복(無量大福)입니다.

우리 생각이, 복된 생각을 하게 되면 복된 신업, 의업, 구업을 가지고 있게 되면 현실은요, 무량대복이 생겨납니다.

무량대복이 뭐냐? 큰~ 복인데, 어떤 큰 복? 무량한 복.

돈이 백원, 이백원, 삼백원, 천원, 이천원, 만원, 백만원, 천만원이 아니고,

무량한 돈, 무량한 물질, 무량한 복을 끌어다 쓸 수 있는 복덕과 복력이 있단 말입니다.

이타적이고 뭔가 지혜로운 그 에너지, 그런 생각, 그것이 있는 사람에게는, 돈이라는 것은 이 우주법계에서 그냥 자연스럽게 끌어다 쓸 수 있는 부분입니다. 

내가 너무 개인적이고 이기적이고 아집과 아상에 얽매여 있게 되면 절대 끌어 쓸 수가 없죠.

내가 복을 지은 만큼만 받는 거죠.

그러나 그 아상을 넘어서면, 아집을 넘어서게 되면, 내가 우주법계의 그릇이 되기 때문에.

내가 개인적인 그릇이 아니라 이 우주법계 전체의 그릇이 되기 때문에, 나라는 상을 타파하면 우주 전체의 그릇이 되기 때문에, 우주법계의 복을 고스란히 갖다 쓸 수가 있다. 

이게 하나의 물질에 대한, 복에 대한, 우리의 관념, 생각이 그렇게 바뀌어야 된단 말입니다.

그렇게 바뀌면 법계의 복덕을 우리가 가져다 쓸 수가 있게 된다.

그래서 아까 말씀드렸습니다.

돈이 충분하지 않다는 생각, 나는 가난하다는 생각, 더 벌어야 된다고 빌고, 기도하고, 원하는 마음,

이 부족과 결핍을 연습하는 마음, 이것을 놔버려야 된다.

그리고 먼저 신업과 구업으로써 먼저 저질러야 된다. 먼저 베풀어야 된다.

먼저 베풀지 않고 어떻게 부자가 되겠습니까?

대부분 사람들은 그러거든요.

“내가 돈 많이 벌면, 그때 가서 베풀게요.”

부처님께 기도합니다.

‘부처님, 저 10억 벌게 해주세요. 10억 벌고 나면 제가 부처님께 보시하겠습니다.’

‘제가 얼마 보시할 테니까, 보시 많이 할 테니까, 돈 좀 많이 벌게 해주십시오.’ 

이건 완전 잘못된, 거꾸로다, 거꾸로. 

지금 나는 천만원 밖에 없어요. 그런데 부처님께,

‘내가 10억 벌게 해주면 내가 부처님께 보시하겠습니다.’ 이게 아니다.

내가 천만원 있으면, 먼저 백만원이든, 이백만원이든 먼저 보시하고 나면, 저절로 벌리는 거예요. 

왜? 먼저 보시한다는 게 뭐냐? 신업이 먼저 움직이는 겁니다.  

업이 움직여야 보가 따라오는 거예요. 업보가 그거 아니겠습니까?

업이 움직이지 않고 어떻게 보가 따라옵니까?

업도 짓지 않고, 부처님께 업을 거꾸로 준단 말이에요.

‘부처님, 저한테 10억을 벌게 해주십시오.’

이래 놓고 “왜 10억 안 벌리느냐,” 고 한단 말이에요.

그리고 “법사님, 화엄경에서 일체유심조 했다는데, 마음먹으면 현실로 이뤄진다고 했다는데,

나는 10억을 벌기로 마음먹었는데, 왜 10억이 안 벌려집니까?”

그 일체유심조라는 게, 마음으로 짓는다는 게 업을 얘기합니다. 의업. 업. 

어떤 방식으로 업을 짓느냐? 이것을 제대로 모르는 거예요.

비는 방법, 빌음으로써 반대로 지은 겁니다. 반대로.

그래놓고 내가 창조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일체유심조가 아니라고 생각한단 말이에요.

먼저 저질러서 신업을 짓지 않고, 구업을 짓지 않고, 의업을 짓지 않고 보를 바란다는 것입니다.

얼마나 어리석은 거예요?


제가 지금 한 말은, 여러분이 듣기에 어찌 보면 좀 황당하게 들릴 수도 있고,

어찌 보면 상당히 구체적으로 들릴 수도 있는데, 제가 했던 얘기들을 어떻게 받아드릴 것이냐에 따라서

여러분의 삶은 완전히 달라집니다. 

그래서 이 ‘충분하지 않다는 생각’, ‘부족하다는 생각’에서 벗어나고, 또 ‘이게 막 나쁘다는 생각’, 거기에 얽매일 필요가 없다.

너무 세속적인 사람은 어때요? 돈을 막 벌어야 된다는 데 너무 집착하고,

또, 너무 성스러운 사람은 어때요? 반대로 너무 돈은 나쁜 것인 거처럼, 돈은 무슨 독사인 것처럼, 돈 자체가 무슨 사탄이고 마귀인 것처럼 생각한단 말입니다. 그럴 필요도 없다.

올바로 쓸 수 있다면, 그 힘이 있다면, 그 지혜가 있다면, 왜 돈이 나쁜 거냐?

아까, 처음에 얘기했던 토대를 잘 생각하세요. 이타적인 토대 위에서 그렇다는 얘기입니다.

이기적인 생각으로, 돈을 벌고자 하는 욕심으로, 지금 이것을 적용했다가는 이것은 오히려 독이 된다.

부자가 되란 말입니다. 먼저 부자가 되어라.

먼저 풍요로워져라. 나란 존재 자체가 먼저 풍요로워져야 된다. 

그리고 먼저 업을 지어라. 먼저 행위를 해라.

먼저 몸으로 베풀고, 말로 베풀고, 생각으로 베풀고, 생각으로 부유하고 풍요롭다고 생각한다.

그렇게 하면 그 업의 토대 위에서 과보가 생겨난다.

부처님 가르쳐준 ‘업보라는 법칙’이 당연한 거예요. 

그래서 부자가 되시고, 개인적이고 아주 이기적인 부자가 되지 말고,

이타적이고 나누고 실천하고 베풀고, 이웃과 함께 할 수 있는 부자가 되어서,

여러분들이 많은 돈을 버셔서, 그 많은 돈으로 나 잘 먹고 잘 살지 말고,

남을 잘 먹고 잘 살게 해주기 위한 부자가 되라.

이웃에게 나누고 실천할 수 있는 부자가 되시라는 소리입니다.









Posted by 법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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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얼마 전에 아바타라는 영화를 보았는데 아주 인상 깊었던 대사가 두고두고 기억에 남는다. 제이크 설리가 전쟁에서 이길 수 있게 해 달라고 기도했을 때 여주인공 네이티리가 했던 말이다.
 “어머니 대지는 누구의 편도 들지 않아. 다만 삶의 균형을 맞출 뿐이지”


이처럼 진리는 너와 나의 구분이 없고, 안팎의 차별이 없다. 다만 균형을 맞출 뿐이다. 누군가의 돈을 훔쳤다면 에너지는 불균형이 된 것이다. 그 때 우주법계는 삶의 균형을 맞추기 위해 훔친자에게서는 앗아가고, 빼앗긴 자에게는 되돌려 주는 작용을 만들어 낸다. 욕을 했으면 욕을 받도록 균형을 맞추고, 사랑하면 사랑을 받도록 균형을 맞추는 것이다.

 나를 중심으로 나가는 것과 들어오는 것 사이에는 이처럼 정확한 균형이 맞을 수밖에 없다. 그것이 바로 우주가 하는 일이며, 진리가 하는 일이다. 누군가에게 따뜻한 말로 칭찬해 주고, 찬탄해 주어 보라. 무엇이 돌아오겠는가. 칭찬과 감사와 찬탄이 돌아온다. 칭찬해 주는데 욕이 돌아올 일은 없지 않은가.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우주의 법칙도 이와 같다. 내가 무엇을 이 세상으로 내보내느냐에 따라 무엇이 다시 내게로 들어올지가 결정되는 것이다. 감사함을 느낄 때 더 많은 감사할 일이 찾아오고, 불만을 느낄 때 더 많은 불만스러운 일이 찾아오며, 화를 내보내면 화낼 일이 들어오고, 만족하면 만족할 일들이 생기고, 무시하면 무시 받을 일이 들어오는 것이다. 이처럼 우주의 에너지는 언제나 균형을 맞출 뿐이다.

불교의 업보(業報)가 바로 이 점을 말하고 있다. 업보의 법칙은 육근(六根)과 육경(六境) 사이의 법칙인데, 나라는 존재인 육근이 무엇을 내보냈느냐에 따라 육경이라는 외부의 세상이 어떤 보를 끌어당기느냐 하는 법칙을 말한다. 이러한 업보의 법칙이 바로 삶의 균형을 맞추는 이치인 것이다. 즉 누군가가 돈을 훔쳐갔다면 우주는 얻은 자와 잃은 자의 균형을 맞추기 위해 필요한 보를 만들어 내는 것이다. 이처럼 업보라는 삶의 균형의 이치에서 본다면 내보내는 것이 곧 들어오는 것이다. 업이 곧 보와 다르지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더 많은 것을 세상으로 내보낼 생각보다는 더 많이 얻고 바라며 가지려고만 한다. 내보내야만 들어온다는 우주의 평등한 이치를 모른 채 내보내는 것 보다 들어오는 것에만 관심을 가진다. 어떻게 하면 더 많이 나누고, 베풀고, 보시하며, 내보낼 수 있을까를 고민하는 사람보다는 어떻게 하면 더 많이 벌고, 얻고, 빼앗고, 성취하고, 쌓을 수 있을까에 대해 고민하는 사람이 더 많지 않은가.

 한창 시크릿의 ‘끌어당김의 법칙’이 유행을 했지만 그것은 우주의 균형을 맞추는 작용 가운데 ‘내보내는 것’보다 ‘받는 것’에 중점을 둔 표현이다. 그렇기에 사람들의 열광을 얻어냈다. 아무래도 사람들은 나에게서 나가는 것 보다 들어오는 것에 더 관심이 많지 않은가. 그러나 끌어당기는 것에 중점을 두면 끌어당겨질 것에 대해 바라는 마음을 가지기 때문에 그 의도가 순수해 지기 어렵다. 보시를 할 때도 바라는 바 없이 하라고 하지 않는가. 그러니 우리의 중점은 끌어당겨질 것이 아니라 내보낼 것에 있다. 끌어당김의 법칙에 보다 ‘내보내는 법칙’에 더 힘을 쏟아야 한다. 무엇이 끌어당겨 질 것이냐를 계산하지 않고 순수하게, 사랑으로 다만 내보내기만 한다면 그것은 더 큰 힘을 가지게 될 것이다.

무언가를 끌어당길 필요 없이 모든 존재는 지금 이대로 완벽하다. 부족하면 끌어당겨서 더 채워야 하겠지만 완벽하다면 넘쳐나는 풍요를 내보내고 나눌 수 있다. 끌어당김은 목표 지향적이고 미래 중심적이지만 내보내는 것은 지금 여기라는 현재의 문제이고 더욱이 지극히 실천적인 수행의 방향이다.

 매 순간 내가 무엇을 이 세상으로 내보내고 있는가를 주의 깊게 살피라. 태어나서 죽는 그 날지 과연 얼마나 많은 것을 세상으로 내보냈는가? 얼마나 많은 것을 베풀고 보시하며 나누었는가? 내가 내보낸 것들로 인해 세상은 얼마나 밝아졌는가? 세상이 밝아질 때 곧장 내가 밝아지는데 성공한 것이다.











Posted by 법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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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로운 오후, 길을 걷고 있던 사람이
대형 광고판이 추락하는 사고를 당해 목숨을 잃었고,
또 다른 사람은 대형 마트에서 쇼핑을 하다가
광고판이 머리에 맞아 의식을 잃고 쓰려졌다는 보도가 있었다.

그 복잡하던 길, 복잡하던 마트에서
수많은 사람이 그 광고판 아래를 걷고 있었는데
왜 하필이면 불행하게도 그 사람에게, 그 순간에
그 광고판이 떨어지게 되었을까?

일부러 어떤 사람이 광고판 위에 서 있다가
그 사람을 맞추려고 했다고 하더라도 그것을 떨어뜨려
정확히 그 사람의 머리에 떨어지게 하기는 좀처럼 쉽지 않았을 것이다.

그것은 그저 단순한 우연이었을까.
불교에서는 우연이란 없다고 말한다.
그것 또한 그 사람의 인연이요 업이다.
다시말해 그 사람은 그 아래를 정확히 그 시간에 걷도록 되어 있었고,
그 때에 맞춰 그 광고판은 추락을 할 수밖에 없던 인연이었다.

사람의 목숨이 아무런 인연도 없이, 아무런 이유도 없이,
그 사람이 그 때 죽어야 할 업도 아닌데,
아무 이유 없이 우연으로 죽을 수는 없는 노릇이다.
생사라는 것은 정확하게 인연 따라 오고 갈 뿐이다.

그렇다면 의문이 하나 생긴다.
어떻게 그 광고판은 그 사람이 그 때 죽을 업이란 것을 알고
그 순간, 정확하게 그 사람을 맞췄단 말인가?

그 인과응보가 사람과 사람 사이의 인과관계라면 이해가 가지만,
사람과 물질 사이에서 어떻게 인과관계가 성립할 수 있는가?
그러나 사람과 물질 사이에서도 인과관계와 인연법은 성립한다.

이 우주의 법칙은, 이 법계의 인연법이라는 법칙은
인간에게만, 혹은 생명이 있는 유정물(有情物)에게만 한정되는 법칙이 아니다.
그것은 인간 뿐 아니라, 유정물 뿐 아니라
모든 무정물(無情物)에게까지 확장되는 우주의 법칙이다.

그것이 바로 우리가 유정물 뿐 아니라
무정물에게도 자비와 존귀함과 따뜻하고 지혜로운 마음을
보내야 하는 이유다.

예를 들어 자동차를 타고 가다가
그 차가 자체 엔진고장을 일으켜 시동이 꺼지면서
고속도로에서 차가 갑자기 서게 되었다고 생각해 보자.
그래서 대형사고가 났고, 많은 사람이 사망하거나 부상을 당했다.

그렇다면 그 사고에 연관된 많은 이들은
아무런 이유 없이 그저 우연으로 그 사고를 당했을까?
그렇지 않다.
그 사고가 날 만한 인연이 있었던 것이다.
사고가 날 인연을 가진 사람들이 마침 그 고속도로를
질주하고 있었던 것이다.

모든 것이 인연 따라 생기고 인연 따라 소멸한다.
우연은 없다.

그렇다면 고장 난 자동차 엔진이
모든 인연법과 인과응보를 환히 알고,
사고가 날 모든 사람들의 운명과 업을 따져 본 뒤
그 순간에 그 일을 치밀하게 계획하여 꾸며낸 것인가?

그렇다.
말하자면 그렇다는 것이다.
더 엄밀히 말해
그 자동차 엔진이 그런 일을 직접 했다기 보다는
이 법계의 인과응보라는 이치가 그 일을 계획하고
자동차 엔진은 거기에 협조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우리 모두는 큰 틀에서
인연법이라는 법계의 큰 진리의 흐름 속에서
나고 죽으며 삶을 살아가고 있을 뿐이니까.

이 쯤에서 가만히 생각해 보자.
광고판이나 자동차 엔진이 도대체 무엇이길래
사람을 죽이고 살리는 몫을 할 수 있단 말인가.

불교에서는 사람 뿐 아니라
동물과 식물, 나무와 풀과 개미와 이끼들조차
모두가 불성을 지니고 있다고 보며,
그들을 결코 인간 아래에 두는 일을 하지 않는다.
그들과 인간은 다르지 않다.

인간이 인간에게 죽음을 당할 수 있듯,
인간이 동물에게도 죽음을 당할 수 있고,
식물에게도,
심지어 위에서 보았듯 무정물에게도 죽임을 당할 수 있다.
그들과 인간은 인연법의 차원에서 서로 동등하다.

어떤 사람은 말한다.
“고장 나기 직전의 차였는데 주행 중에는 괜찮았고,
다행히도 집에 도착하자마자 차량이 고장 났다”고.
그래서 사고 없이 집까지 무사히 잘 왔다고 말이다.

또 어떤 사람은 반대로
아주 좋은 차를 타고 있었으면서도
차량이 문제를 일으켜 집까지 오는데
몇 시간이 더 걸렸을 수도 있다.

늦게 오는 것도 정확히 그럴 만한 인연이고,
사고 없이 빨리 오는 것도 그럴 만한 인연이다.

사업가가 아주 중대한 회사의 업무로
해외 사업가와의 미팅에서 차량 사고로 늦게 가는 바람에
그 큰 투자 사업을 망칠 수도 있다.
그렇다면 차량이 하필이면 왜 그 중요한 순간에 고장이 나는가.
차량 결함만 아니었어도 그 사업가는 대박이 났을 것인데.
그러나 정말 그랬을까.
차 고장만 아니었다면 완전히 대박이 났을까.
혹시 법계에서 그 사업이 대박이 나기에는 아직 이른 때라서,
아직 그 사람이 성숙하지 않았거나,
복이 부족했거나, 아직은 그 그릇이 작았거나 하는 이유로
차량 고장이라는 인연을 통해 그 사업을 뒤로 미룬 것은 아닐까.

그렇다면 바로 그 차는,
차의 고장난 엔진은
온전한 법계의 이치에 따라
아주 여법한 진리를 수행하게 된 것이리라.

사람만 법계의 이치를, 인과의 이치를 수행하는 것이 아니라
유정물만 그런 것이 아니라,
이처럼 무정물 또한 법계의 일부로써,
진리의 일부로써
바로 그 인연법이라는 우주적인 오케스트라의 연주에 동참하고 있다.

그러나 사람들은 그렇게 생각하기 보다는
모든 것을 차의 탓으로 돌린다.
흥분해서 차 바퀴를 발로 걷어 차거나,
혹은 그 차를 폐차시키고 새 차를 사는 것으로 울분을 풀곤 한다.

그러나 그것은 차의 문제가 아니라 순수한 내 문제다.
차가 바로 그 때 고장이 난 것은 우연이 아니라
우주적인 원인이 있었던 것이다.
이 법계 우주가 각본을 쓰고 그 차는 단지 조연을 했을 뿐이다.
아니 법계와 차와의 공동감독에 공동주연의 연극이라는 편이 옳겠다.

어쨌든, 주연이었든 조연이었든
내 사업을 망친 직접적인 몫을 한 녀석은 자동차다.
그러니 자동차를 실컷 미워해도 좋다.
그렇지만 자동차를 미워하는 만큼
법계의 일부분인 자동차도 나를 미워할 것이다.

손가락이 내 몸의 일부분이듯,
자동차는 이 우주법계의 일부분이다.
손가락이 아프면 나 또한 아프듯
자동차가 아프면 우주도 아프다.
손가락이 아파 내가 아프면 어떻게든 손가락에게
무슨 조치를 취해야 하지 않는가.
마찬가지로 자동차가 아프면 우주에서도
자동차를 아프게 한 원인제공자에게 어떤 조치를 취할 것이다.
바로 나에게.

그러니 자동차에게 분풀이를 할 필요는 없다.
그것은 우주에게 진리에게 분풀이를 하는 것이다.

이 글을 읽으며 ‘이게 도대체 무슨 소리인가’ 할 것이다.
무슨 소리인고 하니,
무정물 또한 인간과 유정물과 마찬가지로
동등한 존재이며, 존귀하고 신비로운 존재라는 말을 하고자 하는 것이다.

불교에서는 ‘유정무정 유형무형(有情無情 有形無形)’의 모든 존재가
다 불성(佛性)을 지니고 있다고 말하고 있다.
무정이란 나무나 돌 같이 감각이 없는 것을 말하며,
무형이란 형체가 없는 것을 말한다.
그 모든 것에 불성이 있다.

옛 스님들은
“푸른 대나무숲 모두가 진여(眞如)요,
피어 늘어진 노란 꽃은 반야(般若) 아님이 없다.”고 했다.

[보장론(寶藏論)]에서는
“불성은 모든 것에 가득하고 풀이나 나무에도 깃들어 있으며,
개미에게도 완전히 퍼져 있으며, 가장 미세한 먼지나 털끝에도 있다.
불성이 없이 존재하는 것은 하나도 없다.”고 말하고 있다.

또 『莊子』에는 다음과 같은 아름다운 문답이 있다.

동곽자가 장주에게 물었다.
"도(道)라고 불리는 것, 그것이 과연 어디에 있습니까?"
장주가 말했다.
"그것은 모든 곳에 존재한다."
동곽자가 말했다.
"그것이 있는 곳을 지적해주십시오."
"개미에게 있다."
"그렇게 비천한 것에 있습니까?"
"작은 풀에도 있다."
"그것은 더욱 비천하지 않습니까!"
"벽돌이나 기왓장에도 있다."
"어떻게 그렇게 비천한 곳에 있을 수 있지요?"
"오줌과 똥에도 있다"
동곽자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현대 과학에서도 유정물과 무정물을
정확히 구분 짓기 어렵다고 그 어려움을 호소하고 있다.
유정물, 다시말해 생명체는 DNA라는 복제 가능한 유전물질 지니고 있어
생식활동을 통해 자손을 만들어 내는 특징이 있다.
반면에 무정물, 무생물은 유전자를 지니고 있지 않다는 것이 상식이다.

그런데 90년대에 들어와 광우병의 원인체를 규명하면서 밝혀진
프리온이라는 원인물질이 유전자가 전혀 없는 단백질에 불과하지만
생물체내에서 증식하고 전파되어 확산된다는 것을 발견하면서부터
생물과 무생물의 구분은 전면적인 도전을 받게 되었다.

이 때 비로소 생명과학자들은
생물과 무생물, 유정물과 무정물이란 경계가 따로 없음을 깨닫게 된다.
유정, 무정이라는 것은 우리 인간의 분류이자 분별이었을 뿐이지,
본래 그렇게 나뉘어 진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것은 큰 한 바탕으로부터 비롯되어
여러 원인과 결과에 의해 만들어진 모양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이것을 밝힌 미국의 프루즈너 교수는 97년에 노벨상을 받았다.

유정물이나 무정물이라는 것은 단지 이름일 뿐,
그리고 그에 따라 우리 인간이 더 귀하고 천하다고,
더 우월하고 열등하다고 나누어 놓았을 뿐이지,
그 본 바탕에는 전혀 차이가 없다.

아무리 하찮다고 생각되는 무정물일지라도
그로인해 내가 죽음을 당할 수도 있고,
또한 그로인해 내가 큰 깨달음을 얻을 수도 있다.
옛 스님들은 무정물이 언제나 법을 설하고 있지만
그것을 듣는 것은 오직 성인들 뿐이라고 했다.

하찮다고 생각되는 발 아래의 꽃을
신비로운 마음으로 지켜보기 위해 고개를 숙임으로써
나에게 날아오던 화살을 피하게 될 수도 있고,
밤길에 차를 타고 가다가 불쑥 나타난
토끼 한 마리를 피하려다가 사고가 나게 될 수도 있다.
그리고 그 사소한 사건 하나가 내 운명을 갈라놓을 수도 있다.

내 운명을 변화시키는 것이
반드시 인간이기만 한 것은 아니다.
하찮다고 생각했던 무정물이 내 생사를 결정지을 수도 있고,
내 운명을 변화시킬 수도 있다.

이 우주의 모든 유정물과 무정물들이 모두
나와 연결되어 있다.

어느 하나도 하찮은 것이 없다.
더 귀하거나 천한 것은 없다.
더 중요하거나 덜 중요한 것은 없다.

내가 소중한 것 처럼, 사람이 소중한 것 처럼,
똑같이 나무와 풀과 산과 흙과
심지어 자동차와 의자와 집과 컴퓨터 또한 소중하다.

사랑하는 사람 앞에 섰을 때처럼,
존경하는 스승 앞에 섰을 때처럼,
부처님 앞에 섰을 때처럼,
그런 마음으로 모든 존재 앞에 서라.

유정물이든 무정물이든
모든 존재 앞에
세상에서 가장 존귀한 마음으로 다가 서라.

일체 모든 존재를 존중하며 감사하고
찬탄하며 존귀하게 여기라.
이 세상의 생명 있고 없는 모든 존재에게
무한한 공경심으로 엎드려 절하라.
매 순간 세상 만물에게 기도하라.

유정물과 무정물이 결코 다르지 않음을 안다면,
그 모든 것들이 인연법의 진리 안에서
동등한 입장으로 나와 인연을 짓고 있음을 안다면,
세상에는 더 이상 존귀하지 않은 것이 없음을 깨닫게 될 것이고,
바로 그 때 우리의 삶은 경이로운 변화를 맞게 된다.

이 세상을 향한 지고한 공경심!!
모든 존재를 향한 평등한 자비심!!
이것이야말로 모든 수행자의 이 세상을 향한 마음이다.

학창시절에 원소, 원소주기율표라는 것을 본 적이 있지 않은가.
그 때 나는 아주 큰 충격을 받았다.
그간 학교에서 가르쳤던 것은 인간이 우월하다는 것이었고,
도저히 인간과 자연, 인간과 무정물은 하늘과 땅 차이일 수밖에 없었는데,
인간과 자연, 유정물과 무정물을 이루는 근본 원소는
동일한 것이라는 것은 큰 충격이 아닐 수 없었다.

동일한 원소들이 ‘어떤 인연으로 모였느냐’에 따라
인간도 되고, 동물도 되고, 식물도 되고,
심지어 자동차도 되고, 빌딩도 되고, 집도 되고, 물도 된다.
이것은 유정물과 무정물이 그 어떤 차별도 있지 않다는 반증이 아닌가.
우리는 결국 동일한 것들이 모여서 겉모습의 차이를 만들어 낼 뿐이지,
근원적인 어떤 높고 낮거나, 귀하고 천하거나 하는 차별은 없다.

나는 때때로 많은 사람들 틈에서 호젓하게 벗어나
홀로 산 길을 걸을 때,
아니면 낯설고 인적 드문 여행지를 거닐 때,
그럴 때조차 혼자 있는 것이 아니라는
그 어떤 ‘존재’와 함께 하고 있다는 미세한 느낌을 받곤 한다.

우리가 완전히 혼자 있을 때조차 사실은 혼자 있는 것이 아니다.
이 우주와 함께 하고 있는 것이고,
내가 발딛고 서 있는 대지와 흙과 함께 있는 것이며,
내 눈에 보이는 모든 유정물, 무정물이
내 곁에서 따뜻한 도반으로 나를 지켜주고 있는 것이 아닐까.

아, 이 얼마나 가슴 벅찬 일인가.
이러한 통찰 속에서 우리의 삶은 매 순간이
공경심과 찬탄과 신비 속에 머문다.
어찌 이런 세상이 신비롭지 않을 수 있겠는가.
어찌 사소하거나, 하찮거나, 귀하지 않은 것이 있겠는가.

이러한 통찰은 우리의 삶을
모든 존재를 향해 활짝 열려 있게 해 주며,
모든 존재를 향해 존중과 찬탄과 감사와 공경심을 갖게 해 주며,
모든 존재를 평등한 부처로써 섬기고 시봉할 수 있게 해 준다.

자동차를 타고 멀리 출장을 갈 때
자동차를 향해 동료의식을 가지고, 도반의식을 가지고
존중하며 감사하고 공경스런 마음을 보내라.
내 마음이 자동차를 향한, 이 세상 모든 것들을 향한
한없는 자비심과 공경심으로 넘칠 때
오늘의 운행은 안전하게 법계에서 자동차와 공동으로 도울 것이다.

설령 오늘 자동차 사고가 날 업이었다고 할지라도
모든 존재를 향한 깊은 존중과 감사와 공경심으로
조금 더 주의 깊게 운전을 함으로써
그 차량사고의 인연이 소멸될 수도 있는 것이다.

물이나 식물도 사람 마음이 존중과 사랑과 자비로왔을 때
그 결정이 아름다워지고, 식물도 고요한 파장을 보낸다고 하지 않는가.
또한 사람 마음에 따라 세포와 원소의 차원에서도
큰 차이를 보인다고 한다.
그러니 모든 기도의 핵심인 감사와 존중과 공경심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이에게
그 주위의 모든 유정물, 무정물은
아름답고도 청정한 파장과 세포와 결정을 보여줄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러니 감사와 공경심으로 충만한 이가 운전하는 차량이
욕심과 화와 질투로 가득한 이가 운전하는 차량에 비해
사고가 날 확률은 크게 줄어들 수밖에 없는 것이다.

다시말해 우리의 마음자세가 운명을 바꾸고 업을 바꾼다는 말이다.
업장소멸이라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
불교는 운명론이나 숙명론을 거부하지 않은가.
그 이유는 그 어떤 업일지라도, 그 어떤 과보일지라도
마음에 따라, 기도와 수행과 복덕을 얼마나 어떻게 짓느냐에 따라
완전히 바뀔 수 있는 것이다.
받아야 할 업장을 뒤에 받을 수도 있고,
다른 방법으로 보다 미세하게 받게 될 수도 있는 것이다.

아침 공양을 하기 전에
물과 쌀과 야채와 수저와 식탁과 이 집에게 감사하라.
길을 걸으며 길가에 피어난 들꽃과
보도블럭과 신발과 내 눈에 들어오는 모든 것들에 무한한 공경을 보내라.
회사에서 일을 하면서도
컴퓨터와 의자와 책상과 볼펜과 자판기와 책들과
이 모든 것들이 나를 도와주고 있음에 감사하라.

이처럼 무정물조차 나보다 못할 것이 없는
법계의 스승이며, 도반이고, 소중한 길벗이라면
하물며 사람들 사이의 차별이겠는가.

더 귀한 사람, 더 천한 사람,
더 중요한 사람, 덜 중요한 사람의 구분은 무의미해진다.

아무리 위대한 성인일지라도,
바보나 정신병자에게 죽임을 당할 수도 있다.
목련존자는 신통력으로 무엇이든 할 수 있었지만
이 생에서의 인연이 다했음을 알고 이교도들의 돌에 맞아 죽었다.
그것이 바로 목련의 인연이었음을 바로 보고 받아들였던 것이다.

또한 반대로 아무리 하찮게 느껴지는 사람일지라도
그 사람에게서 내 인생의 가장 큰 깨달음을 얻을 수도 있다.
아주 나이 어린 어린이가 내 생명을 구해줄 은인이 될 수도 있고,
나의 원수였던 사람과 사랑에 빠질 수도 있다.

그러니 사실은 내 인생에 귀하고 천한 사람은 없다.
중요하고 중요하지 않거나, 좋거나 싫다고 정해진 사람은 없다.
모두가 똑같은 비중으로 존중받아 마땅한
내 삶의 부처요, 관음이고, 내 생명의 귀의처다.

귀한 사람에게 귀한 대접을 하는 사람은 평범하다.
그러나 천한 사람에게 그 본질을 알고 귀한 대접을 하는 사람이야말로
이 세상의 이치를 몸소 깨닫고 실천하는 수행자다.

나에게 중요하지 않은 사람에게
내 삶에 가장 중요한 사람에게 행하는 존중을 보내라.
나에게 별 도움이 되지 않을 사람에게
내가 도와 줄 수 있는 최고의 도움을 주라.

내가 대학생이었을 때
교수님들과 교직원 그리고 학생들을 대상으로
당시 아주 유명했던 큰스님께서 감동스런 법문을 해 주셨던 적이 있다.
법문을 들으며 꼭 질문 드리고 싶은 것이 있었지만
스님을 둘러싼 교수님들과 교직원분들의 눈치도 보이고
나 같은 한 명의 대학생의 질문이 거슬릴 것 같아 망설이다가
어렵게 나오시는 스님을 붙잡고 여쭈었던 적이 있었다.

그런데 그 스님께서는 자비어린 시선으로 오래도록
내 눈을 진지하고도 진심어린 눈으로 마주보아 주시면서
나의 질문에 스님의 모든 노력을 다해 답변해 주셨다.
그 때 나는 너무도 존중받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고
어린 내 마음은 스님을 향해 완전히 열려 있을 수 있었다.
어쩌면 아주 당연하지만 그 일은 오래도록 아주 특별한 경험으로 자리잡으면서
내 삶의 지침처럼 느껴졌다.

나는 지금 그 때 내가 했던 질문과 스님의 답변은 기억에 없지만,
그 때의 그 존중받는 느낌과
나에게로 향한 그 스님의 집중과 자비와 눈빛은
두고 두고 세상 사람들을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를 몸소 깨닫게 해 주신
살아있는 법문으로 나를 밝혀주고 있다.

살아있는 지혜라는 것,
깨달음의 실천이라는 것은 바로 그런 것이 아닐까.

지금 내 앞에 서 있는 사람에게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의 마음을 보내주는 것,
지금 내 앞에 있는 바로 그 존재에게
나의 모든 공경심을 바치는 것,
나와 함께 있는 모든 무정물들에게 조차
찬탄과 공경과 감사의 마음을 보내는 것,
그것이야말로 모든 수행자의 세상을 향한 차별 없는 열린 마음이다.

지금 내 앞에 있는 바로 그 사람이 부처다.
지금 내 앞에 있는 바로 그것이 부처다.










Posted by 법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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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처님과
하느님이 둘이 아니십니다.

불교 신자와
천주교 신자와
기독교 신자가
참으로 둘이 아닙니다.

부처님 가르침의 실천과
하느님 가르침의 실천이 둘이 아닙니다.

내 안에 계신 자성부처님
굳게 믿어
일체 모든 것을 맡기고 놓고 가는 것이
부처님 가르침의 실천입니다.

마찬가지로
내 안에 계신 하느님을
굳게 믿어
일체 모든 것을 맡기고 놓고 가는 것이
삼위일체 하느님 가르침의 실천인 것이지요.

하느님을 내밖에 그 어떤
동떨어진 대상으로 설정해 놓고
밖을 향해 믿음을 일으키지만 않으면
하느님과 부처님은 이름만 다를 뿐 '하나'가 됩니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
삼위일체 하느님을 믿고 일체를 당신께 맡기고 가야 합니다.

내 안에 충만한 성령이
그대로가 성부이며 성자인 것이지
그 셋을 어찌 서로 다르다 할 수 있겠어요.

성부와 성자 또한
성령으로써 내 안에 항상 충만한 것이며,
이 우주 법계에 아니 계신 곳 없이
모든 생명 모든 사람에게 항상 빛을 놓고 계십니다.

법신과 보신과 화신 삼신 부처님 또한
서로 다른 부처님이 아닌
내 안의 자성부처님으로서 '하나'인 것입니다.

'참 나'의 이름을
부처님이라고 부르면 어떻고,
또 하느님이라고 부르면 어떠할 것이며,
알라신이라고 부른들 무슨 상관이 있겠습니까

결국
부처님 하느님 알라신이란
이름만 다를 뿐,
같은 진리의 몸(法身)인 것입니다.

'진리는 하나인데
현자들은 여러 가지로 말한다'고 합니다.
다만 여러 가지로 말할 뿐
근본이 흔들리는 법은 없는 것이지요.

현자들이 여러 가지로 말한 것을 가지고
어리석은 우리들의 좁은 소견으로
분별하고 나누어 놓아서는 안 될 일입니다.

그러니
니 종교니 내 종교니 하면서
싸울 것도 없고,
내 가르침이 더 깊이가 있다고 고집할 것도 없으며,
내 가르침만이 나를 천당으로 가게 할 수 있고,
내 가르침만이 진리라고 할 것도 없는 것입니다.

진리란
고집하지 않음입니다.
어느 한 쪽을 고집하게 되면
벌써 진리에서 한참 멀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진리는
좋고 싫고, 옳고 그르다는 등의
일체 분별을 다 여의는 자리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들이 종교를 믿는 이유가
'불교이기 때문에'
'천주교, 기독교 이기 때문에'
믿는다고 해서는 안될 일입니다.

'진리이기 때문에' 믿어야지요.

그 말은
불교를 믿고 있지만,
천주교를 기독교를 믿고 있지만,
또 다른 참진리를 만난다면
당연히 그 참진리 또한 버려서는 안 된 다는 것을 의미하고,
나아가 더 밝은 진리를 만난다면
기존 종교에 대한 모든 집착을 버리고
새로운 밝은 진리를 따를 수 있어야 함을 의미합니다.

그래야 참 진리를 찾는 구도자이며,
수행자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래야만 고집이 아닌 맑은 믿음을 가질 수 있습니다.
'이 종교만이 옳다'는 고집을 가지고
'참된 믿음'이라 착각을 하지는 마세요.

참된 믿음이란
억척스러운 고집이 아니라
텅 비어 어느 것이라도 담을 수 있는
맑고 향기로운 열린 믿음일 것입니다.

마음이 어느 한 쪽에 머물러 고집스레 집착을 하게 되면,
다른 그 어떤 가르침도 들어오지를 못합니다.
진리란 어떤 방법으로든 설해질 수 있다는 것을
왜 알지 못하는 것인지요.

활짝 열린 탁 트인 마음이
모든 수행자의, 모든 구도자의 참마음일 것입니다.
수도자란 모름지기 그래야 합니다.

텅 비어 있기에 도리어 꽉 찬 그런 훤칠하게 트인 길로 가야지,
좁은 한 길만 고집하는 옹졸한 마음으로
어찌 만중생을, 숯한 어린 양들을 구할 것입니까.

불교 신자, 수행자 법우님들과,
기독교 천주교 신자, 수도자 형제 자매님들
참으로 우리 모두는 둘이 아닌 '하나'입니다.
우리 모두는 참 진리의 길을 걷는 '좋은 도반'입니다.

세계일화
세계는 한 송이 꽃으로 언제나 맑고 향기롭습니다.

'내 종교'라는 울타리에 갖혀
불교다, 기독교다, 천주교다 하고 금긋고 살았지만,
실은 같은 길을 걷고 있는 것인 줄
어찌 알았겠습니까.

같은 진리의 길을 걷는 도반이었음을 어찌 알았겠습니까.

이제
'나'도 놓아버리고,
'내 종교'도 놓아버리고,
'내 알음알이 진리'도 놓아 버리고,

대신
그 자리에
본래자리 밝으신 '자성부처님' '한마음 부처님'을 모시고,
그 자리에
내면의 참된 '삼위일체 하느님'을 모실 일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어리석은 중생으로,
어린 양으로 살아갈 것이 아니라
'자성부처님'께 모든 것을 믿고 맡기면서,
'삼위일체 하느님'께 모든 것을 믿고 맡기면서
당당하고 시원스레 살아갑시다.

부처님으로 살아가고,
하느님으로 살아갑시다.

내가 산다고 생각지 마세요.
자꾸 아상을 키우기만 해서는 안됩니다.

'나'라는 아상 대신에,
'자성부처님'께서,
그리고 '삼위일체 하느님'께서
살아가시도록 온전히 믿고 맡기시면 됩니다.

그렇게만 되면
세상 모든 이가 부처님이고 하느님이십니다.
그 믿음에서 '자비'가 나오고 '사랑'이 나오는 것이지요.

그 믿음 안에서
부처님의 자비와 하느님의 사랑은
세계일화의 맑고 향기로운 빛을 놓게 될 것입니다.

부처님의 자비와 하느님의 사랑 안에서
우린 모두 '하나'이며 '참사랑'이 되는 것입니다.








Posted by 법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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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홀로그램과 우주, 수행

     - 우주의 생성원리와 본질적 수행

.

                  - '09. 6. 21 일요법회

                            - 법상스님 설법

 

 

 




과학으로 본 시크릿, 과학으로 본 불교 

 

홀로그램의 이해

아마 여러분들께서 홀로그램이라는 단어를 들어보셨을 겁니다. 홀로그램이란 홀로그래피에 의해 생성된 어떤 대상 물체의 삼차원 입체상을 말하는데요, 아마도 때때로 현실의 대상과 똑같이 생긴 삼차원의 입체영상 같은 것들을 보았던 그런 기억이 누구나 있을 것입니다. 어떤 물질과 똑같이 생겼는데 막상 가서 만져보면 그저 투영된 허상일 뿐인 홀로그램 입체상 말입니다. 이 홀로그램을 어떻게 하면 이해하기 쉬울까 생각해보다 아주 쉽게 나온 한 가지비유가 있어서 그걸 한번 설명해 드릴까 합니다.

우리가 아주 큰 냄비를 하나 가지고 있다고 생각해 보세요. 아주 큰 동그란 냄비가 하나 있습니다. 물이 담겨 있는 냄비인데 거기에다가 세 개의 조약돌을 세 곳에 정삼각형으로 동시에 탁 떨어뜨립니다. 동시에 조약돌 세 개를 냄비에다 탁 떨어뜨리면 이게 풍덩 떨어지면서 파장을 형성하겠지요. 세 개가 나름대로 파장을 형성해 나간다 말입니다. 그 파장이 냄비 끝까지 나아가겠지요. 이것이 만약 호수였다면 그 파장은 어쨌든 호수 끝까지 퍼져갈 것입니다. 그러면서 어떤 현상이 벌어지느냐 하면 세 개의 파장이 서로 서로 간섭현상을 이루어낸다 말이지요. 그렇게 물의 표면에는 간섭현상의 무늬가 형성되는데, 우리가 간섭현상이 이루어 질 때의 그 냄비 물의 가장 위의 표면, 돌은 이미 떨어졌고 그 위 냄비의 표면을 얇게 급속으로 냉각을 시켜서 얼린다고 생각을 해 본단 말입니다.

급속으로 얼려서 냉각을 딱 시켰습니다. 냉각시킨 냄비의 물 표면만 얇게 잘라내 하나의 얼음판을 만들 수 있을 것입니다. 물결치는 간섭현상 무늬의 얼음판을 얻을 수 있다는 말이지요. 지금 우리에게 있는 것은 얼음판 하나뿐입니다. 조약돌이 어디에서 어떤 지점으로 몇 개가 떨어졌는지에 대해서는 우리는 알 수가 없고 단지 그 얼음판 하나만 볼 수 있을 뿐입니다. 그런데 그 얼음판의 한쪽 편에서 빛을 쏘아주면 반대편에서 빛을 바라볼 때 무엇이 나타날까요? 우리가 가지고 있는 것은 단지 얼음 판 밖에 없습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그곳에 빛을 쏘아 주었을 때 그 반대편에서 무엇이 나타나느냐하면 애초에 떨어뜨렸던 조약돌 세 개가 등장하게 됩니다. 어느 지점에, 어떻게 생긴 조약돌이, 정확히 세 개가 떨어졌다는 것까지의 모든 정보가 다 드러나는 것입니다. 조약돌의 입체상을 고스란히 볼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렇게 빛을 쏘아 주었더니 분명히 조약돌은 없고 얼음판만 있는데도 불구하고 그 조약돌의 입체상을 나타내 준다는 말입니다. 그 말은 겉에 있는 얼음판이 단지 간섭무늬의 파장의 형태일 뿐이지만 그 조약돌 세 개가 떨어졌던 그와 관련된 모든 정보를 정확히 기억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간섭무늬는 어떤 정보의 형태로써 그 판에 기억되고 저장되어 있다고 생각할 수 있는 것이지요.

이것도 참 신기한 노릇인데 이제 이 얼음판을 팍삭 깨어 봅니다. 얼음판이 완전히 조각이 나 버렸어요. 조각이 나 버렸는데 그 조각난 얼음판 중 하나의 작은 조각을 들고서 동일하게 똑같이 한쪽에서 빛을 쏘아 줍니다. 그 반대편에서 무엇이 보일까요? 아까 동그랬던 원판과 동일한 현상이 벌어집니다. 원래의 둥그런 큰 원판을 볼 때와 똑같이 작은 하나의 조각만을 가지고 빛을 쏘아주었음에도 불구하고 다른 쪽에 보이는 것은 처음과 똑같이 정확히 세 개의 조약돌의 모습이 그대로 투영되어져 보인단 말이지요.

 

우주가 하나의 홀로그램 허상

이게 바로 조금 쉽게 홀로그램을 설명할 수 있는 하나의 방법인데요. 다시말해 어떤 간섭무늬의 파장은 정확하게 그 입체의 정보를 기억하고 있다는 겁니다. 그런데 심지어 파장 전체가 아니라 그 파장의 일부분에 어떤 한 부분의 조각만 가지고도 그 전체의 정보를 알 수 있다는 얘기가 됩니다. 이것이 홀로그램을 이해할 수 있는 조금 쉬운 방법이라 할 수 있겠는데요, 현대 과학에서는 이러한 홀로그램의 삼차원 입체 영상과 동일한 방식으로 이 물질 우주가, 이 세계가 구성되어 있다고 말합니다. 즉 홀로그램의 삼차원 입체영상이 실재인 것 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실재가 아닌 환영이요 허상이고 마야이듯이 이 세상 또한 마찬가지라는 것이지요. 근본불교의 무아(無我)나 금강경에서 말하는 여몽환포영(如夢幻泡影)과 일치하는 견해인 것입니다. 이 세상이 겉으로 보기에는 실재하는 것 같고, 물질 우주가 실재로 존재하는 것 같이 보이지만 사실은 허상이며 꿈과 같고 환영과 같고 물거품과 같고 그림자와 같아 비실체적인 것이라는 말입니다.

홀로그램에서 보자면 이 우주가, 나와 여러분을 포함해서 우리 모두가, 이 세상 모두가 형성된 것이 사실은 그것 자체의 실체가 있는 것이 아니라 홀로그램이라는 어떤 비실체적인 것의 투영이요 허상이라는 것입니다. 우주적인 수많은 다양한 종류의 파동, 파장 속에 다양한 정보를 저장했다가 그 정보가 입력된 파장이 마치 실제 존재하는 현실의 모습인 것처럼 투영시켜 보여주는 것일 뿐인 것입니다. 우리 몸도 쪼개고 쪼개어 들어가면 분자, 원자, 양성자, 중성자, 원자핵, 전자 해서 계속 쪼개어 들어 가 보면 결국 파동으로 이루어졌다고 하지 않습니까? 이 물질 우주의 모든 존재는 파동으로 이루어진 것이고, 그 파동은 홀로그램처럼 모든 정보를 저장하고 있는 셈입니다.

이 말의 의미를 조금 더 확장해 보면, 아까 파장을 담고 있는 얼음판 조각 하나에서 조약돌 3개의 입체상을 볼 수 있었던 것처럼, 조각과 파장 하나에서 전체를 볼 수 있듯이, 나라는 존재 속에서 이 우주 전체를 볼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나 뿐만 아니라 이 우주를 구성하고 있는 그 어떤 물질이든, 사람이든, 생명이든, 공간이든 그 모든 것은 다양한 형식의 파동으로 이루어졌기 때문에, 결국 그 모든 것들 속에서 온 우주의 모든 전체 정보를 다 볼 수 있다는 말이 되는 것입니다.

뒤에 다시 말하겠지만 모든 파장은 우주 끝까지 전해져 간다고 합니다. 우리가 일으키는 생각의 파장 하나 조차 우주 끝까지 전해집니다. 그렇기에 우주는 그 모든 파장의 정보들을 한 조각 얼음이 그랬듯이 그 파장 안에 전체의 정보를 고스란히 내포하고 있는 것입니다.

부처님께서 이 우주의 이치를 깨닫기 위해서 우주가 시작하는 곳부터 끝나는 곳까지 다 쫒아 다니면서 낱낱이 조사하고 살펴보고 해석하고 연구하고 그래서 이 우주의 모든 이치를 깨달으신 것이 아니라 그저 이 자리에 앉아서 내 마음자리 하나 깨달았더니 우주 전체를 깨닫게 되었다고 그러잖아요, 그것과 다르지 않은 겁니다. 그러기 때문에 하나 속에서 전체를 볼 수 있게 되는 일이 벌어지는 겁니다. 하나가 전체를 내포하고 있다는 홀로그램의 이치를 주위에서도 종종 목격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보통 몸이 아프다 그랬을 때, 손만 딱 보면 손바닥 안에 우리 몸의 오장육부가 다 들어 있고 연결 되어 있다 그러잖아요. 그래서 수지침을 할 때도 몸의 어느 곳이 아프든 손바닥과 손가락에 침을 놓으면 그 몸의 아픈 부분도 곧 회복이 됩니다. 어릴 적에 언치거나 소화가 잘 안된다 싶으면 어머님께서 손의 특정부분을 눌러 주심으로써 금방 치유되는 것을 경험해 보았을 것입니다. 이처럼 손바닥 안에 우리 몸 전체가 고스란히 나타나는 것입니다.

우리 신도님 중 한 분은 귀를 연구하는 분이 계신데요, 귀, 작은 귀 요거 하나에 우리 몸을 구성하는 머리, 몸통, 사지와 그 속에 들어 있는 각종 장기에 해당하는 혈자리가 분포되어 있고, 오장 육부가 다 담겨있기 때문에 귀만 보면 그 보살님은 어지간히 다 아신다는 겁니다. 귀의 모습은 어머니 자궁 내에 거꾸로 들어 있는 태아의 자세와 같아 인체의 축소판처럼 우리 몸의 모든 것이 들어 있다는 것이지요. 이 보살님께서는 그 사람의 몸 상태가 어떤지, 어디가 아프지는 않은지, 체질은 어떤지, 정력은 어떤지, 심지어 성격이나 심성은 어떤지 여부까지 알아낼 수 있다고 하시데요.

또 다른 예로 DNA라는 것도 보면 하나의 어떤 작은 DNA속에 나라는 존재 전체의 모든 정보가 다 담겨 있잖아요. 머리카락 하나를 뽑아도 이론적으로 한다면 나라는 존재를 고스란히 다시 복재 해 낼 수 있다고 하지 않습니까.

이처럼 홀로그램에서는 이 세상이 고스란히 홀로그램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나에게 보여지는 모든 물질 세계는 사실 실체적인 물질인 것이 아니라 다양한 형태의 파장, 파동이라는 것입니다. 보통 물질은 입자와 파동으로 이루어져 있다고 하잖아요, 그런데 어떤 학자들은 이 우주는 입자라는 것은 사실은 존재하지 않고 항상 파동의 형태로만 있다가 우리가 그것을 관찰했을 때 관찰하면서 입자라는 것을 원하고 요구할 때 그때서야 비로서 입자의 모습을 나타내 준다고 얘기 합니다. 그러니까 모든 존재는 항상 수많은 가능성을 가진 파동의 모습으로 존재하다가 우리가 관찰 했을 때 비로소 입자의 모습을 나타내 준다는 것입니다. 어쨌거나 이 현실세계의 모든 것은 파동으로 이루어져 있다, 그리고 이 우주의 모든 공간이나 모든 물질이나 일체 모든 것들 일체 만유는 파동의 형태로 정보를 저장하고 있다 이겁니다.

사실 조금 더 깊은 차원으로 들어가면 이 우주에 파동 아닌 것은 없습니다. 생각의 에너지도 하나의 파동이구요. 라디오 전파 같은 것도 하나의 파동이고 전파, 전자파, 전자기파, 마이크로파, 음파, 지진파, 중력파, 빛 등 모든 것이 파동 아닌 것이 없습니다. 다양한 파동 파장들이 이 우주를 형성시키는 모습인 것이지요. 이렇게 볼 때 물질도 딱딱한 물질이 아니라 파동이 끊임없이 진동하는 그것들이 다만 물질처럼 우리 눈에는 보일 뿐인 것이지요. 홀로그램의 입체상처럼 진짜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허상인 것입니다.

허상이면서 그 허상을 이루는 하나의 파동은 이 우주의 전체 정보를 담고 있습니다. 나라는 존재 속에 우주 전체의 정보를 담고 있고, 한 티끌 속에도, 심지어 우리가 무정물이라고 생각하는 모든 것들 속에도 우주의 모든 정보가 고스란히 그 속에 담겨 있다, 그것을 포함하고 있다는 겁니다. 이것이야말로 불교의 연기법에 대한 과학적인 증명이라고 볼 수도 있겠는데요, ‘모든 것은 서로 연결되어 있다’는 연기적 사실과 실체가 없다는 무아, 공의 가르침, 일즉일체다즉일이나 일미진중함시방이라고 하는 화엄경의 가르침과도 일맥 상통하고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비국소성과 홀로그램, 그리고 연기법

이러한 우리가 우주 전체와 서로 연결되어 있다 하는 연기적인 사실을 양자물리학의 비국소성, 비국지성이라는 말로도 이해해 볼 수 있습니다. 잠시 비국소성과 홀로그램에 대해 살펴보겠습니다.

먼저 온 우주의 모든 존재가 연기적으로 연결되어 있음을 제시하고 있는 몇몇의 실험과 원리를 살펴보겠습니다. 일전에 『물은 답을 알고 있다』에서 이미 살펴본 바와 같이, 일본에서의 물의 결정 연구에서 걸프전쟁이 있었던 날 모든 물의 결정이 찌그러들었던 실험이나, 『식물의 정신세계』에서 식물을 연구하는 학자가 멀리 떨어진 다른 도시에서 교통사고가 날 뻔하던 바로 그 순간에 연구실에 있던 식물의 검류계 단추가 파르르 떨었던 실험을 되살려 보시기 바랍니다. 이러한 실험에서 살펴보면 공간적으로 멀리 떨어져 있는데도 불구하고 물 한 방울 조차 지구 반대편에서 있었던 사실을 분명히 알고 있었으며, 식물 또한 자신에게 물을 주고 키워주던 주인이 교통사고가 나던 바로 그 순간의 일을 분명히 알고 있었다는 사실이 물리적인 공간을 뛰어넘어 증명되고 있음이 밝혀졌습니다.

또 하나의 실험을 살펴보지요. 물리학자 라즐로는 거짓말탐지 전문가인 백스터와 함께 한 실험에서 진주만 전쟁 당시 해군 포병으로 참가했던 피실험자들 입에서 백혈구 세포를 채취하여 몇 십, 혹은 몇 백 km 떨어진 지점으로 옮겨 배양체에 거짓말 탐지기를 부착해 실험한 결과, 피실험자들에게 진주만 기습 TV 프로를 보여주자 마자 마치 피실험자에게 부착된 것처럼 세포들이 격렬하게 반응을 한 사실을 알아냈습니다. 이 실험 또한 우리 몸을 구성하고 있는 세포와 입자들 하나 하나는 공간적인 이격에도 불구하고 서로 연결되어 있음을 증명해 주는 수많은 실험들 가운데 하나에 불과합니다.

이처럼 수많은 실험에서 이러한 연기적인 연결성은 입증되었으며, 수많은 물리학자, 과학자들이 다양한 방법으로 이러한 연결성을 밝혀내었습니다. 이처럼 공간적으로 멀리 떨어져 있음에도 불구하고 서로 영향을 주고 받으며 연결시키는 상호작용의 능력 혹은 특성을 양자물리학에서는 ‘비국소성(non-locality)’, ‘비국지성’ 혹은 초공간성 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이러한 비국소성은 공간적으로 하나로 연결되어 있다는 차원을 넘어서서 시간적으로도 하나의 장으로 연결되어 있다고 봅니다. 이것이야말로 불교에서 말하는 상의상관성이라는 연기법의 세계, 일체 모든 것이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과학을 통해 증명해 보여주는 아주 작은 시작이 될 것입니다.

그리고 이야기 한 김에 조금 더 나아가 보지요. 이처럼 모든 것을 연결시키는 근본적인 차원의 에너지 장을 영점장(zoro-point energy) 혹은 정보장(field of information)이라고 말합니다. 영점장이란 양자물리학의 주요개념으로 허공이 텅 비어 있어서 아무것도 없는 것이 아니라 이러한 비국소성을 가능하게 하는 온갖 정보와 능력, 특성을 다 갖추고 있으며 우주의 모든 것을 연결시키는 장일 뿐 아니라 시간 공간을 초월하는 일체 모든 정보를 고스란히 담고 있는 장이기도 합니다. 이 영점장, 정보장을 불교식대로 표현하자면 연기법이라는 상의상관성, 업보, 인과응보가 펼쳐지는 장인 법계(法界)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법계 즉 영점장은 온 우주에 꽉 차 있으며 모든 물질, 정신, 세포, 원자, 유전자 등 일체 모든 세계와 존재계에 두루 가득 차 있는 근원적인 차원의 에너지 장이자 정보의 장인 셈입니다. 영점장으로써 일체 모든 존재는 시간적, 공간적으로 완전히 연결되어 있는 것이지요. 또한 앞서 말했듯이 이 영점장에는 공간적으로 이 우주의 모든 정보가 가득 차 있으며, 시간적으로 이 우주 역사와 인간 개개인의 모든 역사적 정보가 고스란히 다 담겨 있는 것입니다. 쉽게 말해 그 어떤 물질이든, 세포든, 허공의 공간이든, 마음이든 우리가 상상할 수 있는 모든 것의 아주 작은 일부분 조차 이 우주의 시공을 초월하는 일체 모든 정보, 업, 역사 등 그 모든 총체적인 정보를 담고 있다는 것입니다.

실제 1982년 알렌 아스펙트(Alain Aspect)가 파리에서 행한 실험에서 쌍둥이 광자가 우주 끝에서 다른 끝까지 연결되어 있음이 증명되었다고 합니다. 그러니 한 티끌 속에 시방세계를 머금고 있다는 일미진중함시방의 이치가 영점장과 비국소성의 원리를 통해 양자물리학에서 증명이 된 것이지요.

결과적으로 홀로그램 영상이라는 비실체적 현실세계가 영점장이라는 바탕 위에 나타나고 있는 것이 바로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계의 본 모습이라고 양자물리학에서는 보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모든 홀로그램 영상이라는 물질현실은 서로 서로가 따로 따로 나뉘어지는 것이 아니라 서로 깊이 연결되어 있으며 하나의 파동 속에 우주 전체의 모든 정보를 담고 있는 구조를 띄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대목을 『홀로그램 우주』라는 책에서는 다음과 같이 표현하고 있습니다. ‘홀로그램의 모든 부분들이 전체상을 담고 있는 것과 똑같이 우주의 모든 부분이 전체를 품고 있다. 이것은 우리가 접근할 방법만 안다면 왼손 엄지손톱 속에서 안드로메다 은하계를 발견할 수 있다는 뜻이다. 또 우리는 클레오파트라가 카이사르를 처음 만나는 장면도 찾아낼 수 있으리라. 왜냐하면 원리상으로는 모든 과거와 미래를 시사하는 모든 내용들이 시공간의 미세한 영역 구석구석에도 깃들여 있기 때문이다. 우리 몸의 낱낱의 세포들도 그 속에 우주를 품고 있다.’

 

업사상과 양자물리학

불교의 업사상을 보면 과거 전생에 지은 업을 이번 생에 받는다고 하는데, 이러한 사실 또한 영점장이라는 시공을 초월해 우주적인 일체 모든 정보를 담고 있는 근원적인 장으로 이해해 볼 수도 있는 것입니다. 예를들어 길을 지나가다가 갑자기 강풍이 불어 빌딩위에 메달려 있던 간판이 떨어졌고, 그 간판에 맞아 한 사람이 죽었다고 쳐 봅시다. 그것은 업입니까 아니면 우연입니까? 그 또한 업이라면 어떻게 그 사람이 지금 바로 그 순간 죽어야 할 업을 간판이 어떻게 알고 바로 그 순간에 정확히 그 사람을 맞출 수 있었을까요? 어떻게 하필 바로 그 순간에 강풍이 불어 간판을 휘청이게 했으며, 또 어떻게 간판을 지탱하고 있던 쇠고리가 바로 그 순간 끊어질 수 있었겠습니까? 이 모두가 철저한 인과응보를 완전히 계산하고 있는 영점장의 일이요, 법계의 계획이었을까요? 그렇습니다.

영점장, 정보장의 개념에 의하면 사람 뿐 아니라, 모든 물질 세계의 모든 원자 하나 하나, 그리고 이 우주의 모든 존재, 비존재의 일체 우주가 고스란히 영점장으로 가득합니다. 그리고 그 홀로그램의 영점장, 정보장에는 시공을 초월하는 우주의 정보가 하나도 빠뜨림 없이 다 담겨 있습니다. 바로 그 안에는 인간 개개인의 과거 전생, 그 전생을 넘어 시간적인 모든 정보와 업과 행위들의 정보 즉 업장이 낱낱이 담겨져 있다고 볼 수 있는 것입니다. 간판도, 바람 한 점도, 간판을 지탱하는 쇠고리도 물질적, 정신적 일체 모든 존재는, 이 우주의 모든 시공을 초월하는 정보와 일체 모든 존재의 업과 행위와 개개인의 업장까지를 모두 다 담고 있다고 볼 수 있는 것입니다. 바로 그 순간, 그 사람이 목숨을 다해야 하는 그 업장에 의해 우주 법계는, 즉 영점장에서는 바로 그 순간 강풍이 몰아치게 했고, 그 간판 또한 바로 그 순간 바로 그 자리로 떨어질 수밖에 없었던 우주적 영점장의 정보들의 정확한 운행 법칙에 따라 행동한 것입니다. 쉽게 말해 바로 그 순간 불어 온 강풍과 간판을 지탱하던 쇠고리와 간판, 이 모든 것이 그 안에 시공을 초월하는 우주적 정보인 파장의 형태로 담겨 있다가 바로 그 순간 법계의 인과응보적인 계획에 의해 모든 정보가 정확히 움직여 준 것입니다. 사람 개개인 뿐 아니라, 동식물과 심지어 돌과 건물 등의 물질적인 모든 것들 조차 전부 영점장이라는 시공을 초월하는 정보의 장을 공유하고 있습니다.

이상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지금 나라는 존재 안에는 이 우주 전체에 어떤 일이 일어나는 지에 대한 일체 모든 정보가 모두 담겨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시간적 공간적인 일체 모든 정보들을 이 자리에 내가 가지고 있는데 이것을 분명히 보는 분을 우리가 부처님이다 하는 것입니다. 또한 그러한 모든 정보를 완전히 자유자재로 꺼내어 쓸 수 있고, 꺼내 볼 수 있는 그 상태를 깨달음이다라고 이야기를 할 수가 있을 것입니다.

그러면 한 발 더 나아가기 위해 파장에 대해 조금 더 살펴보지요. 이 파장을 잘 사용하는 것으로 박쥐가 있는데요. 박쥐는 음파 탐지기 같은 기능을 몸 속에 가지고 있어서 높은 진동의 소리를 밤에 계속 발산을 한다고 합니다. 그 진동의 파장을 방출하다가 박쥐의 먹이가 되는 곤충이 그 파동에 감지가 되면 그 소리 파장이 곤충에게 전해졌다가 되돌아오는 반작용의 파장을 박쥐가 감지한다는 것입니다. 그럼으로써 ‘아, 저기에 내가 먹을 거리가 있구나’, ‘내가 먹을 만한 것이 있구나’ 라는 것을 알 수 있고 그 벌레가 얼마나 큰지, 어느 정도의 속도로 날아가고 있는지, 지금 어디쯤 날아가고 있는지 등의 정보들을 그 되돌아오는 파장을 통해서 다 알고 있는 것입니다. 심지어 그 박쥐는 파장이 전달 되었다 다시 되돌아 오는 그 파에 의해서 그 벌레나 곤충이 얼마나 맛있는 것인지 맛이 없는 곤충인지 조차 다 알고 있다고 합니다. 파장만 가지고도 파장 안에 모든 정보가 담겨 있다고 앞에서 얘기했는데요 박쥐 같은 경우는 일부분 그 파장 안에 담긴 정보를 해석하는 능력이 주어졌다고 볼 수가 있는 거지요.

아까 냄비의 얼음판이 파장속에 모든 정보를 담고 있다고 그랬고 이게 이차원인데 삼차원으로 본다면 우주의 모든 공간속에 온 우주의 시간적 공간적인 모든 존재, 모든 사람, 모든 역사, 모든 어떤 정보가 총체적으로 다 담겨 있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앞에서 제가 업보 이야기를 했지요. 지나가던 간판이 갑자기 강풍이 몰아쳐서 간판을 달고 있던 쇠고리가 떨어졌고 갑자기 거기에 맞아 죽었다 했을 때, 그 모든 것이 그 간판을 메달고 있던 그 쇠고리나 강풍이나 간판이나 이 모든 것이 정확하게 모든 물질속에는 시간적인 총체적인 모든 업의 정보가 담겨 있기 때문이라는 것을 말했습니다. 이처럼 이 우주 인류 모든 생명들이 지어왔던 업장, 업의 정보라는 총체를 우리 주위의 모든 물질세계나 생명, 공간, 바람, 꽃 한 송이나 나무 한 그루, 세포 하나와 원자, 전자 하나에 조차 그리고 저 하늘의 별 조차 모든 것을 다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이 우주 전체에 그 업이라는 것은 기록 되어 있다, 우리 안에 있는 아뢰야식에만 기록 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그 모든 업식이 이 우주 전체에 기록 되어 있다는 거지요.

그러니까 우리가 남들 몰래 혼자 저 깊은 산속에 가서 아무도 안 볼 때 죄를 지었다고 죄가 되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다면 그건 우리의 오판이요, 판단 착오인 것입니다. 사실은 주변의 일체 우주법계가 그대로 나를 지켜보고 있는 것입니다. 설사 아무리 완벽한 완전 범죄를 지었다 하더라도 그것을 지켜보는 이 시공이 있고 법계가 있는 것입니다.

 

마음이 물질세계를 창조한다

여기까지 잘 따라 왔나요? 그럼 다음 진도를 나가봅니다. 그런데 그렇다면 이 파장이 이 세상과 우주를 만들어 내는 근간이고 그 파장 속에 정보가 담겨 있다면 그러면 그 파장은 도대체 어떻게 만들어지겠는가 이것이 궁금해집니다. 그 파장이 어떻게 만들어 지는가를 알면 우주의 어떤 원리를 알 수 있는 거예요. 그러면 다시 양자물리학으로 넘어 가 봅니다.

고전물리학에서는 원자가 실제로 존재한다고 생각했던데 반해 양자물리학에서는 원자가 실제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일종의 환상임이 밝혀졌다고 했습니다. 원자보다 작은, 원자를 구성하는 기본입자인 아원자들은 고정된 물질로써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다양한 여러 가능성 즉 하나의 잠재적인 가능성으로써 존재하는 것으로 비춰졌습니다. 즉, 물리적으로 존재하는 물질은 근원적인 차원에서 정확하게 ‘어떤 것’이라고 규정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야말로 불교에서 말하는 ‘무아(無我)’, 공(空)의 원리의 일부를 과학에서 밝혀낸 것이라고 해도 좋을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날 물리학자들은 아원자를 단지 입자나 파동의 어느 한 쪽으로 분류해서는 안 된다고 보며, 그 양쪽에 속해 있는 단일범주의 어떤 것으로 분류해야 한다고 믿고 있습니다. 이와 같은 것을 양자라고 부릅니다.

그런데 일부 물리학자들에 의해서 이러한 양자들은 관찰되고 있을 때는 입자로 보이지만, 관찰되지 않을 때는 파동으로 존재한다는 사실이 밝혀졌습니다. 즉 ‘양자가 입자의 모습으로 나타나는 유일한 경우는 우리가 그것을 보고 있을 때’라는 것입니다. 앞서 말씀드린 바와 같이 이 세계를 구성하는 모든 것들은 파동으로 존재한다는 말입니다. 관찰자가 보고 있을 때는 물질이지만 보고 있지 않을 때는 에너지인 것이지요.

이것은 곧 관찰한다는 그 행위 자체가 양자에 영향을 미친다는 사실을 의미합니다. 과학자들이 어떤 특정 전자를 찾을 때마다 관찰자가 기대하던 바로 그 위치에 나타나곤 했습니다. 그리고 더 신기한 것은 관찰자가 어떤 의도와 생각을 일으키기만 해도 그 입자는 관찰자의 의도에 따라 반응했다고 합니다. 우리는 지금까지 물질적인 대상은 그 자체적인 것이라고 알고 있었는데, 이 실험에서 물질적인 객관적 대상이 사실은 그 대상을 바로 보는 사람의 주관에 따라 변하는 것이 확인된 것입니다. 이것은 곧 모든 물질, 사물을 구성하는 본질적인 요소가 그것 자체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보는 자라는 주관을 포함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쉽게 말해 사물을 보는 내가 바로 보이는 사물을 구성하는 아주 중요한 요소 가운데 하나라는 것이지요. 이것은 아주 충격적이고도 신선한 결과를 보여줍니다.

쉽게 말해 이 세상의 물질이라는 것은 우리의 의식이 만들어 낸다는 겁니다. 우리의 의지, 의식, 우리의 생각, 우리의 마음, 의업, 한 생각이 물질 세계를 만들어 내는 결정적인 요인이더라는 겁니다. 다시말해 물질은 고정된 물질일 뿐이지 내 의지로 물질을 바꿀 수 있겠는가 싶겠지만 그것이 가능하다는 말입니다. 단순한 기계 조차 우리가 그 기계를 향해 욕을 하고 화를 내며 부정적인 에너지를 보낼 때와 자비로운 에너지, 감사와 사랑의 말을 보낼 때는 전혀 그 결과의 양상이 달라진다는 것입니다. 예를들어 자동차를 타고 가는 운전자가 화를 내고 욕을 하며 부정적인 감정에 시달릴 때와 긍정적이고도 밝은 에너지로 넘칠 때 자동차가 사고 날 확률, 자동차가 고장 날 확률은 전자가 훨씬 높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자동차 엔진이 고장날지라도 집 앞에 다 도착해서 사고가 날 것이냐, 아니면 고속도로를 주행하는 중에 고장이 날 것이냐 하는 것이 우리의 마음에 따라, 의지와 마음 씀에 따라 달라진다는 과학적인 증거인 것입니다. 이처럼 내가 마음하나 일으켜서 물질 세계를 창조해 낸다는 것이 과학에서 명백하게 밝혀졌습니다.

이것은 우리가 사는 세상을 보더라도 그리 어렵지 않게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예를 들어 죽을 병에 걸렸거나, 큰 빚더미에 올라앉았거나, 큰 괴로움 속에 빠져 있는 사람이라면 그 사람이 보는 세상은 아무리 아름다운 풍경을 보고 아름다운 사람을 보더라도 그것이 아름다움으로 다가올 수 없을 것이겠지요. 그 사람에게 보여지는 세계는 전혀 아름답지 않을 것입니다. 부정적인 에너지와 비판적인 습관에 물들어 있는 사람이라면 그 사람이 보는 세상은 언제나 불평불만이 가득할 것이며, 그러한 부정적 에너지와 불평 불만과 비판의 습관은 계속해서 그 사람 앞에 나타난 물질세상에 영향을 미칠 것입니다. 처음에는 내 생각이 부정적이기 때문에 세상이 부정적으로 보였다면 비판적인 습관이 계속될수록 이제부터는 그 부정적인 마음이 세상을 어둡게 변화시키고, 이 우주의 부정적인 에너지를 끌어들임으로써 그 사람앞에 나타난 물질세계가 부정적이고 혼탁하며 온통 좌절과 고통스런 현실로 변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앞에서 이 세상 모든 것은 서로 연결되어 있음을 불교의 연기법과 영점장, 홀로그램, 비국지성이라는 이론을 통해 살펴보았습니다. 이것은 나라는 존재 안에, 심지어 나의 모든 세포 하나 하나에도 이 우주적인 시공을 초월하는 모든 정보와 가능성과 힘이 고스란히 주어져 있으며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내가 일으키는 의도적인 생각 하나 하나가 고스란히 내가 바라보는 물질세계에 영향을 미치며, 영향을 미치는 정도가 아니라 그 물질의 특성을 결정짓는 중요한 요소가 된다고 했단 말입니다. 즉 내 마음 하나로 내 밖에 있는 물질세계에 영향을 미칠 뿐 아니라, 그 세상을 창조하게 된다는 말입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 일체 모든 것은 마음이 만들어 냈다는 화엄경의 가르침을 떠올려 볼 수 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내가 일으키는 마음, 생각, 의도 하나 하나에 따라서 이 우주적으로 연결되어 있는 영점장의 모든 정보를 내가 얼마든지 가져다 쓸 수 있고, 내 것으로 만들 수 있다는 말이 됩니다. 이 우주는 영점장으로써, 연기법으로써 완전히 서로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나는 나와 연결되어 있는 이 우주의 모든 것을, 또 내 안에 영점장의 형태로 존재하는 우주의 모든 정보를 가져다 쓸 수 있는 것입니다.

다시 한 번 정리해 보면, 이 물질적인 세상은 원자로 만들어졌고, 그 원자는 고정된 실체가 없이 입자와 파동으로 바뀌며 그것은 물질이기도 하지만 에너지의 특성으로 언제든 변환될 수 있는 가능성의 장이라고 했습니다. 그 가능성의 장에서는 원자를 관찰하는 자의 주관성이 곧 그 원자와 물질을 구성하는 주요한 요소가 되는 것입니다. 물질과 에너지, 입자와 파동은 언제든 서로서로 변환될 수 있습니다. 즉 우리의 마음, 생각, 의도가 곧 현실의 물질세계화 될 수 있다는 말입니다.

예를 들면 유명한 심리학자 브루노 클로퍼의 보고에 따르면 도저히 살 가망성이 없는 림프절 말기 암이었던 라이트라는 환자에게 획기적인 신약을 시험 복용 시켰더니 라이트는 3일 만에 걸어다니더니 10일만에 퇴원을 했고 두 달 후에는 완전히 암으로부터 해방되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 신약이 사실 아무런 효능이 없다는 기사가 신문에 실리자 바로 병이 똑같이 재발이 되어 다시 입원을 했습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의사가 먼저번 것은 잘못된 약이었고, 이번에 고농축된 새로운 신약을 구입했으며 이것으로 치유가 가능하다고 확신을 심어 준 뒤 환자에게 약이 아닌 그저 증류수를 주사했습니다. 그런데 극적으로 종양 덩어리가 녹아내리고 가슴의 복수도 사라졌으며 두 달 간 아무런 증세도 보이지 않을 만큼 회복이 빨랐다고 합니다. 그런데 마찬가지로 이 약이 암 치료에 효과가 없다는 것이 의사협회로부터 발표가 되자마자 암은 다시 발병했습니다. 이것이 바로 플라시보 효과입니다.

마음에서 약을 먹었으니 나을 것이라고 굳게 믿으면 실제 약 때문이 아니라 그 자신의 믿음 때문에 낫게 된다는 것이지요. 이 플라시보 효과는 사실 우리가 알고 있는 것 보다 훨씬 큰 작용을 하며 광범위한 거의 모든 병에 적용된다고 합니다. 병으로 곧 죽을 것이라고 믿는 생각과 이제 약을 먹었으니 분명히 나을 것이라는 생각 사이에는 엄청난 간격이 존재하며, 후자 쪽으로 마음을 굳게 바꿈과 동시에 내 몸의 모든 세포 하나하나, 암 세포 하나하나가 완벽하게 치유의 작동을 시작하는 것입니다. 마음이 세포의 변환을 완벽하게 도울 수 있다는 말입니다. 그야말로 마음이 물질을 변화시키고, 마음이 우리 몸의 모든 세포를 기적적으로 변화시키는 것이지요.

물론 그 원자나 물질적인 세상 또한 영점장이라는 근원적인 바탕의 장 위에 그려진 환영과도 같은 것입니다. 원자나 전자는 단순한 하나의 물질이 아니라 영점장의 근원 바탕에 펼쳐진 하나의 총체이자 정보체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 세상을 이루는 물질세계를 내 의지에 따라서, 내 마음으로써 움직일 수 있고, 변화시킬 수 있으며, 창조할 수 있고, 때에 따라서는 영점장의 모든 정보들을 내가 끌어당겨 쓸 수 있기도 하다는 결론이 되는 것입니다.

 

마음이 세상을 창조하는 힘의 크기는?

그러면 이렇게 내 의식으로서, 내 의지로서, 내 생각으로서 파동을 만들어 낸다고 했는데 그 마음이 세상을 창조하는 힘의 크기는 얼마나 될까요? 즉 의식으로써 파동을 만들어 낸다고 했을 때 그 파동, 그 파장에 담긴 에너지가 어느 정도가 될까요? 만약 의식으로 만들어내는 파동이 가지고 있는 에너지의 힘의 크기를 측정할 수 있다면 우리 마음, 우리 의식이 가진 창조 에너지가 얼마나 큰 것인지를 간접적으로나마 측정해 볼 수 있을 것입니다.

물질을 쪼개면 쪼갤수록 우리는 에너지가 더 작아지고, 덩치가 큰 것일수록 더 큰 에너지를 가지게 될 것 같잖아요. 그런데 입자가 작으면 작을수록, 더 미세하게 쪼개면 쪼갤수록 더 엄청난 에너지를 가지고 있다고 그럽니다. 다시 말해서 물질을 쪼개서 기관, 기관을 쪼개서 세포, 세포가 분자가 되고 원자로 쪼개지고 전자와 양성자, 중성자로 쪼개지고 그리고 또 양자로 혹은 보존이니 중간자, 광자, 레톤 등 물리학에서는 쪼개고 쪼개고 쪼개서 더 이상 쪼갤 수 없는 부분까지 쪼개놓은 것을 이렇게 다양한 이름으로 부르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름을 무엇으로 붙이든 간에 쪼개고 쪼개서 단위가 작아지면 작아질수록 그 안에 든 에너지 힘의 양은 무한하게 커진다고 그럽니다.

그래서 우리가 원자력 발전소니 원자탄이니 하는 것을 생각해봐도 충분히 생각할 수 있는데, 그 원자의 힘, 원자핵이 가지고 있는 힘, 그 힘만 봐도 이것이 얼마나 어마어마 한지 우리가 알지 않습니까. 그런데 심지어 그 원자핵이 가지고 있는 원자력이나 원자탄, 이런 원자핵의 힘보다 더 작은 단계인 양자가 가진 힘을 살펴보면 그것에 비해 원자핵의 힘은 아주 미미하다 싶을 정도로 작다는 것입니다. 더 어마 어마하게 큰 힘을 그 양자는 가지고 있다는 겁니다. 그 정도로 물질은 쪼개고 쪼개면 쪼갤수록 작은 입자가 되고 작은 입자가 될수록 더욱더 어마 어마한 힘과 에너지를 가지고 있더라 이말입니다. 그러니 그것을 완전히 쪼개서 입자나 파동으로 바꾸게 된다면 그 파동이 가지고 있는 힘은 도저히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를 정도까지 어마 어마하다는 것입니다. 이 우주는 파동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이 파동이 가지고 있는 힘이 이만큼 어마 어마하다는 거지요.

이 힘을 양자물리학에서는 다음과 같이 이야기 합니다. 1cm³라는 작은 공간 안에 담겨 있는 파동의 힘이 1094erg라고 하는데요, 이것이 어느 정도냐 하면 우주에 담겨있는 전체 힘 보다 다시말해 우리에게 알려져 있는 우주 속의 모든 물질 에너지 총합보다 억만의 억만의

억만의 억만의 억만배 보다 많다 라는 것을 의미한다고 합니다. 1cm³ 안에 들어 있는 파장의 힘이 우리가 도저히 표현할 수 없을 만한 어마 어마한 힘을 가지고 있다, 그런데 그 파장이라는 것은 우리 의식에 의해서 만들어지고 움직인다 했습니다. 창조된다 했습니다.

그런데 내가 어떤 생각의 파장을 일으켰을 때, 어떤 생각을 일으켰을 때, 그것은 부정적인 파장이든 긍정적인 파장이든 내 안의 어떤 에너지이자 파장의 형태로 이 우주 끝까지 펴져나간다고 합니다. 그런데 또 하나 신기한 점은, 내가 화를 한번 버럭 냈을 때 그 부정적인 에너지의 파장이 우리가 아까 호수에서 돌을 던졌을 때 처럼 파장이 점점 넓게 퍼질 것 같잖아요. 그런데 내가 생각이라는 에너지를 탁 하나 일으켰을 때 사실은 지금 일으킴과 동시에 우주 끝까지 이미 퍼져나갔다고 말합니다. 파장이 일어남과 동시에 우주 끝에 이른다는 겁니다. 이 말은 조금 있다가 뒤쪽에서 다시 말씀 드리겠습니다.

어쨌든 이처럼 내가 생각을 일으킴과 동시에 온 우주 전체에 그 생각의 파장은 영향을 미친다는 겁니다. 내가 부정적이고 성내는 마음, 욕심, 화, 증오, 질투 이런 마음을 일으킬 때 그 파장은 1094erg의 힘으로서 이 우주에 알려진 물질 전체의 총합보다 억만의 억만의 억만의 억만의 억만의 억만배의 더 큰 힘으로 시간의 힘을 빌지 않고서도 즉각 우주 끝까지 미쳐 나간다 이 소리입니다. 우리가 쉽게 쉽게 생각하지만, 쉽게 쉽게 화도 내고, 쉽게 쉽게 싸움도 하고, 쉽게 쉽게 어떤 사람을 생각으로 죽이고 살리고를 반복하거나, 쉽게 생각으로 긍정적이거나 부정적인 세상을 마구마구 창조해 내지만, 사실 우리가 그렇게 쉽게 쓰고 있는 생각이라는 그 에너지가 얼마나 큰 에너지이고 더욱이 생각을 일으킴과 동시에 이 우주전체 끝까지 가 닿음으로써 그 에너지가 바로 내 삶을 창조해 내고 있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이 얼마나 엄청난 일들을 무의식인 생각으로 벌이고 있는 것입니까? 이 엄청난 일을 벌이는데도 불구하고 우리는 생각을 조심해서 쓰지를 못해요. 대충 대충 생각하고, 쉽게 쉽게 생각하고, 너무 안이한 마음으로 살고 있지는 않는지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래서 불교에서는 의식적으로, 깨어있는 마음으로 매 순간을 살아야 한다고 하는 것입니다. 생각을 관하고, 말을 관하고, 의지를 관찰하며, 느낌을 관찰함으로써 무의식적으로 판단하지 말고, 온전히 깨어있는 정신으로 매 순간을 살아야 한다고 하는 것입니다.

내가 "난 왜 이렇게 가난하지, 난 왜 이렇게 부족하지, 난 왜 이렇게 불쌍하지"라고 한 생각 일으킨 것이 어머 어마한 파장으로 실제 물질 세계에 가난한 삶을 창조해 내고야 말 것입니다. 어느 정도의 힘으로 가난을 창조하느냐 하면 1094erg라는 무지막지한 힘으로서 내 삶을 급격하게 창조해 내는 거란 말입니다.

이처럼 우리 마음의 능력은 무한한 것입니다. 일체유심조, 일체 모든 것은 내 마음이 만들어내는 것이지요. 그럴진데 마음 하나 바꾸어서 운명을 바꾸는 것이 왜 불가능합니까? 업을 뛰어넘는 것이 왜 불가능해요? 인간이 우주의 이치를 깨달아 붓다가 되는 것이 왜 불가능하겠습니까?

 

같은 생각의 주파수를 공명시킨다

그런데 여기에 또 하나 재미있는 공명의 법칙이라는 것을 소개 해 볼까 합니다. 이 우주는 같은 주파수의 파장은 같이 공감한다 그럽니다. 같은 주파수의 파장은 함께 공명을 한다는 것이지요. 쉽게 말해서 바이올린 두 개나 기타가 두개가 있다고 했을 때 도, 래, 미 같은 어떤 하나의 음을 탁 튕겼을 때 이것이 바이올린 두 개가 같이 조율이 되어 있다면, 이쪽 하나의 음을 튕겼을 때 동일한 음이 저 쪽에서도 같이 움직이는 현상이 벌어지는데 이것을 공명한다고 그럽니다. 다른 비유를 들어보면, 우리 벽에다가 자명종 시계를 이쪽 벽에 하나 저쪽 벽에 하나, 또 다른 벽에 하나 이런 식으로 벽면마다 시계 추가 움직이는 자명종 시계를 갖다 놓았다 말입니다. 그리고 전부 다 다르게 추를 움직이게 시켰어요. 어떤 건 왼쪽으로 가고 하나는 오른쪽으로 가고 왔다 갔다 왔다 갔다 다르게 움직였단 말입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고 나서 들어와서 그것을 살펴보면 어떻게 되어 있을까요? 그 자명종의 추는 모두가 다 정확히 같은 방향, 같은 움직임을 띄게 된다고 합니다. 물론 같은 자명종이고 시계추의 무게라거나 길이 등이 동일한 같은 조건이라면 말이지요. 처음에는 다르게 시작했더라도 그 작은 떨림의 파장이 서로에게 전달이 되어 공명하게 된 것입니다.

인류 역사 속에서도 그 공명이라는 것은 아주 광범위하게 펼쳐져 있다 그럽니다. 예를 들어 어떤 활자가 개발된 시점을 보면 거의 비슷한 시기에 전혀 연결 고리가 없는데도 불구하고 비슷한 시기에 활자가 계발되었다거나, 비슷한 발명품이 서로 다른 문화적 배경에서 비슷한 시기에 만들어졌거나, 또 다른 예로 세계사 차축의 시대라고 하는 부처님 당시의 시기에 붓다와 노자, 공자, 아리스토텔레스, 플라톤 등이 함께 정신사의 축에서 어깨를 나란히 하고 있는 것 등도 그와 비슷한 역사 속의 공명현상이라고 말해 봄직하다. 그 또한 일종의 정신적인 공명현상이라고 말할 수 있으리라는 것이지요.

우리가 집에서 혼자 기도할 때 기도의 힘을 받는 에너지와 절에서 많은 사람이 모여서 함께 동일한 기도를 함으로써 동일한 주파수의 파장을 일으켰을 때 그 기도의 힘이라는 것은 전혀 다를 수밖에 없지 않습니까? 내 힘이 별로 없더라도 기도 열심히 하는 도량에 가서 힘 있는 도반들, 법력이 선 스승님을 모시고 기도를 하고 수행을 한다 그랬을 때, 그 에너지, 그 주파수와 공명을 하게 된다는 겁니다. 깨달음을 얻은 자, 법이 선 자가 가까이 함께 있다면, 혹은 같은 시기를 살고 있다면 그 정신적인 공명의 힘을 우리도 받을 수가 있는 것입니다. 우리나라에 부처님 같은 큰 스승이 몇 분 계신다면 그것만으로도 이 지구라는 한국이라는 전체 땅 덩어리의 어떤 에너지의 힘이 전혀 다른 전환을 맞이하게 된다고 합니다. 그래서 깨달은 자가 하나 있는 그곳은 아주 수승한 파장, 깨달음의 파장과 서로 공명을 하기 쉽다 그래요. 시계추가 다르게 움직였지만 하나로 움직이듯이 하나로 결속해서 몰아가듯이 그 밝게 깨어있는 자의 파장이 있었을 때 그 주변은 그 파장과 일치를 이루게 된다, 쉽게 말해서, 깨닫기가 쉽다고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성격 나쁘고 아주 욕도 잘하고 화를 내기 좋아하고 이런 사람과 함께 지내다 보면 나도 모르게 닮아 가잖아요. 파장이 같아지는 겁니다. 파장의 주파수가 같아지는 거예요. 나는 그걸 배우고 싶지 않아도 욕을 그냥 맛깔나게 입에 딱 붙게 하는 사람 옆에 가서 며칠만 살게 되면 나도 모르게 그런 똑같은 욕이 툭툭 튀어 나오거든요. 의지하지 않았지만 그 파장이 나한테 공명이 되는 겁니다. 그래서 내 파장으로 바뀌어 버린 거예요. 그래서 부처님께서는 수행하는데 있어서는 나와 동등하거나 나보다 나은 도반과 함께 가라 이런 말씀을 하신 겁니다.

왜 이런 말을 하는고 하니, 내가 어떤 생각을 하나 일으키지 않습니까? 내가 어떤 한 가지 생각을 일으킬 때 그 생각은 우주 전체와 공명한다, 그 생각 하나는 우주 끝까지 일시에 전파 되어서 우주 전체에서 그 생각과 비슷한 주파수를 가진 에너지와 공명을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나와 비슷한 생각, 비슷한 주파수, 비슷한 파장을 가진 에너지를 끌어당기게 된다는 것입니다. 비슷한 것들은 서로 모인다고 유유상종이라 그러잖아요. 비슷한 것들 끼리 모이게 된다, 공명을 한다, 내가 기대를 하고 어떤 바람을 가지고 있게 되었을 때, 그 강력한 에너지를 보내게 되면 내 안에 있는 이 주파수 이 에너지와 동일한 주파수대의 사람, 동일한 주파수대의 물질, 상황, 조건들이 나와 함께 공명을 하고 그것이 나에게 힘을 보태주게 된다는 이야기입니다. 내가 기도를 하게 되면 내 주변에 있는, 내 지구상에 있는 기도하는 자의 주파수가 나에게 힘을 보태준다는 이야기입니다. 내가 짜증을 내고 화를 내고 욕을 하게 되고 범죄를 저지르게 되면 범죄를 저지를 자들의 주파수가 나와 일치를 이루게 된다는 이야기예요.

우리가 때때로 수행을 하다보면 어떤 경계를 경험하게 되거든요. 혹은 어떤 경우에는 어떤 존재, 어떤 정신적인 존재를 만나게 되기도 하고 다양한 어떤 경계를 만나는데, 그건 어떤 파장이 일순간 맞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예를들어 사람이 돌아가신 영가를 볼 수 있습니까? 못 보는게 당연하지요. 사람의 주파수와 영가의 주파수는 다르니까요. 그런데 그 주파수대가 일순간 어떤 이유로 인해 달라지게 되면 또 다른 어떤 존재나 영가와도 마주하게 되는 경우도 있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 주파수에 차이가 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수행 정진을 통해서 우리의 기운 주파수가 수승해지면 저 천상 세계의 아주 맑은 정신들과 어떤 공명을 가져올 수가 있게 되기도 합니다.

그만큼 내가 생각하는 그 의업, 어떤 하나의 의업을 일으키는 것, 그것은 이 우주 전체와 공명을 하게 되기 때문에, 그 힘을 주고 받기 때문에 에너지의 엄청난 힘으로서 나에게 영향을 미치는 겁니다. 그런데 어떻게 쉽게 쉽게 화를 내고 욕을 하고 짜증을 내고 욕심을 내고 이런 일들을 함부로 할 수가 있겠어요?

앞에서 입안의 혀 세포를 떼어 몇백 킬로미터 떨어진 곳에서 거짓말탐지기를 연결시켜 놓고 사람과 세포를 연구해 보았던 얘기를 했잖아요. 멀게는 약 500km까지 떨어진 곳에서도 배양된 세포와 사람의 손에 연결된 거짓말 탐지기가 정확히 같은 반응을 그것도 정확히 같은 시간에 보인다는 겁니다. 예를 들어 이것이 빛의 속도로 간다고 하더라도 사람이 먼저 반응을 보이고 연이어 먼 곳의 세포가 반응을 보여야 하잖아요. 그 곳에까지 가는 시간이 걸리니까 말이지요. 그런데 그게 아니더라는 겁니다. 그 둘의 반응 사이의 간격이 0초더라는 겁니다. 동일한 시간대에 같은 일이 벌어지더라는 이야기입니다. 그러니까 이것은 시간을 초월한다는 이야기예요. 우리가 생각 하나 일으킨 것이 저 우주 끝까지 가는데 엄청난 시간이 필요한게 아니라는 이야기입니다.

우리가 화엄경을 축소시켜 놓은 법성게를 보면 "무량원겁즉일념 일념즉시무량겁"이라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무량한 겁 이라는 어마 어마한 시간대가 바로 일념 가운에 있다, 한 생각 가운데 있다고 하거든요. 그것이 바로 이말입니다. 내가 일으킨 어떤 한 생각 하나의 파장이 우주 끝까지 전달 되는 데는 시간을 필요로 하지 않습니다. 곧바로 전달 된다 이 이야기입니다. 우리가 어떤 마음을 일으키게 되었을 때 그것이 영항을 미치는데는 시간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는 겁니다. 직바로 우주 전체와 연결되어서 영향을 미치게 된다는 겁니다.

예를들어 내가 몸이 안 좋아서 안 좋은 병에 걸렸습니다. 그래서 마음속으로 ‘아, 이것이 다 치유되었다’ 라고 스스로 그냥 믿고 ‘그래, 난 치유되었다’ ‘부처님께서 다 치유해 주셨다’ 라고 굳게 믿는 어떤 파장을 일으켰다 그러면 그 에너지가 모든 내 주변의 물질 세계 전체와 연결이 되어 있기 때문에 동시간대의 내 몸에 있는 암세포, 종양등 모든 세포, 내 몸에 있는 모든 물의 결정, 세포 하나 하나와 직접적으로 순간 연결이 되고 그뿐 아니라 내 바깥에 있는 모든 사람들에게까지 전달이 된다는 겁니다. 갑자기 그렇게 마음을 바꾸는 순간, ‘나는 죽으니까 내 인생이 끝이구나’ 라고 좌절하는 마음에서 한 생각 돌이켜서 밝은 마음을 일으킴과 동시에 갑자기 그날따라 외출했다 들어오는 남편이 평소와는 다르게 따뜻하게 대해 주거나, 공부도 안 하고 말도 안 듣던 자식이 나에게 스트레스를 덜 주게 되고, 병원에 갔더니 의사 선생님도 평소보다 더 관심을 보이며 잘 해주고, 우연히 TV를 틀었는데 불치병에서 극적으로 살아난 사람들 이야기가 나오거나, 마음을 비우고 이웃 사람들과 대화를 나누는 중에 뛰어난 대체의학자나 신의(神醫)라고 불릴 법한 사람과 인연이 되거나 하는 방식으로 우주법계가 나를 도와주게 된단 말입니다. 죽을 것 같다는 부정적인 생각에서 살 수 있으리라는 긍정적인 생각으로 바뀜에 따라 긍정적인 파동, 긍정적인 주파수와 공명을 하게 되고, 그 긍정적인 치유의 주파수와 공명된 다양한 치유의 방법들이 다양한 방식으로 나와 연결될 수도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의 의식, 마음, 생각, 의업이 가진 힘입니다.

그래서 내 생각이 우주를 만들어 낸다 하는 것은 무엇인가 하면, 생각이라는 것은 의업이구요 이 의업이 나아가서 구업으로 말로 바뀌고 구업이 나아가서 몸으로 행동으로 바뀌고 신업으로 바뀝니다. 이 생각 하나가 말과 행동을 결정하게 된다 이 말입니다. 그래서 생각과 말과 행동, 우리들의 생각과 말과 행동이 내 세상을 창조하는 겁니다. 나아가서 이 우주에 있는 모든 사람들의 말과 생각과 행동이 이 우주를 창조 해 내는 겁니다. 그 창조의 힘이라는 것이 너무나도 어마 어마하다 이 소리입니다.

 

마음 올바로 쓰는 법

이처럼 우리가 이 세상이 창조되는 이치를 알았습니다. 이 세상이 창조되는 이치는 바로 내가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하는 "신구의" 삼업으로서 창조를 하는데 이 신구의 삼업이 생각도 파장이요 말도 파장이고 몸의 행위도 파장이다, 파장으로서 이 우주 끝까지 퍼져나간다, 더욱이 파장이 퍼져 나가는데는 시간이 필요하지 않을 정도로 엄청난 속도로 퍼져 나갈 뿐더러 그 퍼져 나가는 그 힘, 그 힘이 1094erg로써 기존 알려진 모든 힘의 총합보다 억만의 억만의 억만의 억만의 억만배 보다도 더 큰 어마 어마한 힘으로써 시공을 초월해서 퍼져 나간다는 말입니다. 또한 우리가 접하고 있는 모든 파장에 담긴 정보는 우주의 모든 정보를 고스란히 담고 있으며, 우리의 업, 우리의 병, 치유방법에 이르기까지 그 모든 정보를 다 담고 있다고 하는 소식입니다. 이 얼마나 엄청난 세상입니까! 이 얼마나 엄청난 소식입니까!

어마 어마한 세상 속에서, 우리가 감히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이 엄청난 삶을 우리가 살고 있고 그러한 큰 힘으로서 마음을 쓰고 있는 겁니다. 우리가 생각했던 내가, ‘나’라는 작은 나가 아닙니다. 내가 알고 있던 내가, 내가 아는 나의 전부가 아닙니다. 나는 능력 없고, 나는 돈도 없고, 나는 재능도 없다고 생각했던, 나는 무능력 하다고 생각했던 나의 본질은 사실은 그렇지 않은 것입니다. 나의 생각이 ‘나는 능력없어’, ‘나는 공부도 못하고 운동신경도 없고 가난하다’고 내 스스로 한정짓는 마음, 그 생각이 나의 능력을 한정짓게 하는 겁니다. 1094erg라는 그 어마 어마한 힘으로 말이지요.

그 내 생각이라는 파장이 주는 어마 어마한 힘으로 한편으로는 부자가 되고 싶으나 한편으로는 ‘나는 가난해’ 라는 그 엄청난 에너지를 발산시키는 겁니다. 그 엄청난 에너지로 자기의 힘을 꽃 피우는데 쓰지 않고 자기의 힘을 스스로 한정짓는데 쓰고 있다 이 말입니다. 내 스스로 내 능력을 한정짓고 있으니까 그 엄청난 에너지를 가지고 나의 능력을 제한하는데만 쓰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식으로 우리의 잠재된 무한한 에너지를 허비하고 있습니다. 활짝 꽃 피우는데 쓰지 못하고.

‘부자가 되길 부처님께 비나이다’ 하고 아무리 빌어 봐야 그 비는 행위는 거지 마음을 연습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부자가 되고자 비는 마음은 사실 ‘나는 지금 가난합니다’ 라는 마음에 힘을 주는, 에너지를 주는 일이 됩니다. 지금 가난하니까 앞으로 올 미래에는 부자가 되게 해 달라는 말 아니겠어요. 그러니 비는 마음은 사실 구걸하는 마음이고, 그렇기에 비는 마음은 비는 방향과는 달리 거꾸로 결과를 맺게 하기 쉽습니다. 그래서 비는 기도를 하지 말고, 감사의 기도를 하라는 것입니다. 감사의 기도는 ‘지금 이대로 감사합니다’ 하는 거니까 더 이상 바랄게 없어요, 그냥 지금 이대로 충분하다, 감사하다 하는 겁니다. 그러니 어떤 파장을 연습하는거냐 하면 부유함의 파장, 부자의 파장, 풍요로움의 파장을 연습하는 것입니다. ‘부자되게 해 주세요’는 구걸의 파장, 가난의 파장을 연습하는거고, 오히려 ‘나는 지금 부족하고 결핍되어 있습니다’하는 파장을 엄청난 에너지 주파수로 이 우주를 향해 쏘고 있는 것입니다. 반대로 ‘지금 이 연봉에 대해 감사합니다’하는 것은 부유함과 풍요로움과 부자의 파장을 연습하는 것이겠지요.

지금까지 우리는 얼마나 허망한 일들을 벌여오고 있는지 가만히 자신을 돌아보시기 바랍니다. 어떻게 마음 써야 하는지, 마음 쓰는 거 하나 제대로 알지 못하고 이렇게 세상을 살아오지 않았습니까. 그래서 중생들이 어리석다고 하는 겁니다. 무명중생이라고 하는거예요. 똑똑하면 뭐 합니까. 지식만 늘였지 지혜는 바닥을 치는 헛똑똑이란 말입니다.

우리가 얼마나 어리석은지 또 다른 예를 들어 드릴까요? 병이 난 사람이 어디 한 가지 몸이 안 좋단 말입니다. 심장이 안 좋아요. 그런 사람이 마음 속으로 ‘아, 이 심장을 어떡하지’ ‘심장이 더 나빠지면 어떡하지’ 하고 항상 고민한단 말입니다. 항상 근심하고 걱정하고 뭘 먹어도 이게 심장에 좋은가 안 좋은가 따지고, 계속 심장이 안 좋다라는 것에 마음이 붙잡혀 있게 된단 말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겉으로는 ‘빨리 나아야 하는데’ ‘빨리 나아야 하는데’ 하고 바라겠지만 사실은 이 마음이 무엇을 연습시키냐 하면 ‘심장이 안 좋다’는 에너지, ‘심장이 나쁘다’는 주파수의 파장과 자꾸만 공명을 시키는 것입니다. 그러니 심장은 더 안 좋아질 수밖에 없습니다. 차라리 심장에 붙박혀 있는 그 노이로제 같은 마음에서 놓여나고, 그 마음을 비워버리면 되는데 오히려 더 나쁘게 마음을 연습한단 말입니다. 비우지 못하겠고 놓아버리지 못하겠다면 오히려 반대로 이 생각, 이 의업, 이 의지라는 것을 역이용하면 됩니다. 심장을 향해 ‘감사합니다 사랑합니다’라고 외치는 것입니다. 혹은 ‘심장이 건강해지게 되어 감사합니다’라고 해도 좋습니다. 감사와 사랑이야말로 이 우주의 모든 밝고 건강하며 청정한 모든 파장과 공명하는 최고의 진언이기 때문입니다.

뚱뚱한 사람이 ‘다이어트 해야 되는데’ 하는 그 한 생각에 집착하고 ‘먹지 말아야 하는데’하는 그 한 생각에 붙잡히게 되면 그 생각 때문에 안 먹어지게 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생각에 집착이 되어 음식에 대한 집착이 더 커지고 더 꾸역꾸역 먹게 되는 결과를 초래하고 맙니다. 이런식으로 우리는 엄청난 우리 안에 잠재되어 있는 힘을 가지고 거꾸로 쓰고 있는 겁니다.

 

성공과 부자, 그 너머의 이야기

그러면 이제 가장 중요한 막바지 결론에 다달았습니다. 이렇게 나의 생각, 말, 행동이라는 신구의 삼업으로서 이 우주를 창조해 내고 내 세상을 창조해 낸다고 했습니다. 이를테면 요즘에 씨크릿 이란 책이 아주 유명하고요, 부자가 되는 길, 성공하는 방법에 대해 이야기 하고 있는 책들이 우우죽순으로 쏟아져 나오고 있는데 그 많은 것 들이 이야기하고 있는게 지금 제가 말씀드린 여기까지 입니다.

생각의 힘으로 마음의 힘으로 부자가 되라, 마음에 부자를 그리면 부자가 될 수 있다, 마음의 힘은 엄청나기 때문에 마음의 힘으로 성공하려면 성공 할 수 있다, 그것을 마음에 그리면 그것이 현실로 이루어진다 하고 말하고 있지 않습니까? 여기까지도 물론 틀린 말은 아닙니다. 그러나 그 마음의 힘을 부자가 되는 쪽 성공하는 쪽으로 자꾸 돌리려고 애쓰는 것이 요즘 나온 수많은 책들의 한결같은 결론입니다. 그런데 거기에서 끝나느냐, 그렇지 않습니다.

예를들어 우리가 그 마음 에너지를 써서 부자가 됐어요. 성공했어요. 큰 인기를 누리는 연예인이 됐습니다. 그러면 거기서 우리 행복도 거기서 끝날까요? 부자가 된다는 것 자체가 곧 나의 행복을 의미하겠습니까? 좋은 집을 사고 좋은 차를 샀다, 그것이 곧 나에게 완전한 만족을 가져다 주고, 완전한 행복을 가져다 주고, 아주 자유로운 깨달음과 지혜를 가져다 줄까요? 그렇지가 않다는 겁니다. 그렇지 않은 것을 우리는 얼마나 많이 목격해 왔습니까? 그것이 다가 아닙니다. 부자가 다가 아니고, 성공이 전부가 아닙니다.

오히려 더 많이 소유하면 더 많이 소유할수록 우리 마음은 더 혼탁해 집니다. 혼탁해 지기 쉽습니다. 많은 것을 소유할 수록 우리는 더 삿된 마음으로 치닫기 쉽습니다. 욕심은 많으면 많을수록 더욱더 괴물과도 같은 엄청난 힘으로 우리를 장악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돈 조금 가지고 있는 사람은 그 집에 별 문제가 없잖아요. 서로 단결해서 어떻게 하면 밥이라도 한 끼 더 먹고 내 자식 굶기지 않으려고, 내 동생 더 먹이려고 애쓴다 이말입니다. 가족 전체가 아내는 남편 걱정 하고 남편은 아내 걱정 하면서 산다 말이지요.

전에 이런 말씀 드렸잖습니까. 아프리카 어디에 네 살 정도 된 아기가 쓰러져 죽어가고 있더란 말입니다. 사진기사가 가서 사진을 찍고는 미안했는지 초코파이 같은 먹을 것을 하나 던져 주었더니 그걸 들고는 그 힘없는 몸으로 걸어가서는 허름한 집안에 있는 다 죽어 있는 한 살 정도 아기를, 죽어 있는 냄새가 진동하는 아기를 끌어 안고서는 그 먹을 것을 자기가 먹지 않고 아기에게 물려주고 자기 동생이 이미 죽은 동생이지만 동생이 먹지 않으니까 턱을 잡아 가지고는 막 억지로 먹는 시늉을 해 주더라고 했습니다. 그 사진 한 장을 찍고 그 사진작가는 무슨 상을 탔다고 해요. 자기가 죽을 지경이 되면서도 네 살짜리 아기가 한 살된 동생을 위해서 자기는 죽더라고 그것을 나눠 주거든요. 없을 때 이런 어떤 본질적인 사랑, 자비, 인간애 같은 것이 나타납니다.

그런데 많은 것을 소유하면 소유할수록 더 무시무시한 일이 벌어지지요. 평범한 행복한 집안에서 로또가 당첨됨과 동시에 집안이 파탄나고, 남편이 아내와 싸우고 이혼하고, 부모가 자살하고 이런 일들이 벌어진단 말입니다. 이뿐인가요? 자식이 부모를 죽이고, 형제들끼리 서로를 죽이는 세상이 어디 상상 속에서라도 가능한 이야기겠어요? 평범한 사람들에게 이런 일은 상상 밖의 이야기이고, 도저히 생각으로조차 해 볼 수 없는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어때요? 높은 권력이나 많은 경제력 앞에서는 그런 일들이 자주 일어납니다. 아니 그런 권력 암투, 왕권을 둘러싼 죽고 죽이는 일들 같은 것들이 아주 자연스러운 일처럼 드라마 같은데서도 묘사되고 있잖아요. 권력이 없는 곳에서는 권력의 암투가 일어나지 않지요. 권력이 있는 곳에서는 부모형제가 서로 죽고 죽이는 일이 벌어집니다. 네팔에 갔을 때 보니까 왕족들이 모두 모인 자리에서 한 사람이 형제 자매, 부모, 친척들을 다 총으로 쏴 죽이고 자신이 왕이 되었습니다. 기가 막힌 일이지요. 이게 다 많이 가진 자들 속에서나 있을 법한 일들입니다.

그러면 이렇게 부자나 성공이나 권력 같은 것을 많이 소유하는, 그런 소유만이 전부가 아니라는게 분명해 졌습니다. 아니 큰 소유는 오히려 정신을 타락시키고, 도저히 인간을 인간이 아니게 만들기까지 합니다.

 

근원적인 실천은 무엇인가

그렇다면 어떤 것이 가장 올바른 것일까요? 어떤 것이 분명한 것일까요? 어떻게 사는 것이야말로 가장 지혜롭게 사는 것일까요? 과연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 것일까요?

우리가 생각하는 성공이라는 것은 사실은 그 성공 이면에 실패를 함께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가 전적으로 옳다라고 생각하는 것은 사실은 틀린 가능성을 내포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불교에서는 불법이 진리이지만, 불법이라는 진리에 집착한다면 그것은 더 이상 진리가 아니다, 아무리 옳은 것이라도 거기에 집착하는 순간 집착해서 그것만이 진리라고 고집하는 순간 그것은 진리의 기능을 상실하고 만다고 이야기합니다. 전적으로 옳다라는 것은 전적으로 틀릴 수도 있다는 얘기예요.

우리가 너무 미친 듯이 사랑에 빠지게 되면 사실은 사랑이라고 하지만 그 이면에 증오를 항상 내포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사람이 나를 떠나서 다른 남자에게 갔을 때 더 큰 괴로움과 좌절이 있는 것처럼 우리가 생각하는 행복이라는 것, 성공이라는 것, 사랑이라는 것, 옳다는 것, 이 모든 것은 극단적인 이면을 항상 함께 내포하고 있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그것은 근원이 아니라고 하는 거예요. 우리가 생각을 만들어 내는 것, 의업, 생각이 만들어 낸 모든 작용들은 옳고 그르거나 맞고 틀리거나 성공과 실패, 좋다 나쁘다 하는 그 이면에 극단적인 모습을 함께 가지고 있습니다. 그것은 근원적이지 못합니다. 그런데 바로 그 근원적이지 못한 양 극단의 분별심, 차별심을 가지고 우리가 이렇게 이 세상을 창조해 내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우리가 창조해 낸 현실에서는 늘 긍정과 부정이 함께 공존합니다. 즐거운 일 끝에는 괴로운 일이 기다리고 있고, 풍요로움의 바탕에는 가난의 그늘이 존재합니다. 과도한 부유함을 누리는 사람들이 있는 대신에 과도한 가난 속에서 기아와 병으로 죽어가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크게 성공하는 한 사람을 위해 더 많은 사람들은 실패를 맛보아야 합니다. 문명의 이기와 과학기술의 발전이 주는 편리함 이면에는 기상이변이나 환경오염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이렇게 과학 기술은 발전하고 아파트가 만들어지고 에어콘이 만들어지고 이 편리한 것들이 만들어 지는 것이 좋은거 아닙니까’ 라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그것은 다 근원적이지 못한 것입니다. 이 엄청난 과학 기술의 발전과 도시화, 산업화 이런 것들이 이 지구를 멸망으로 이끌고 있지 않습니까? 인위적인 어떤 에너지, 힘 그것이 성공적이라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사실 그것은 성공이 아니라 실패의 가능성을 함께 포함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지금 문명의 이 길을 누리고 있지만 그 이면에 지구가 언제 멸망할지 모르는 언제 지구가 기상이변으로서 나를 몰아칠지 모르는 두려움도 함께 껴안게 되었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하는 것이 근원으로 가는 것이냐, 본질적인 삶, 근원적인 삶과 일치하는 삶을 사는 것이냐, 그건 바로 맞다 틀리다, 옳다 그르다 하는 모든 분별에서 벗어나는 겁니다. 두 가지 양 극단의 선택 가운데 어느 한 쪽을 선택하는 그 습관적인 방식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그것을 2,500여 년 전 붓다는 중도(中道)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 중도의 삶에서는 어느 것도 더 중요하거나, 덜 중요한 것이 없고, 네 편과 내 편으로의 나뉨도 없으며, 절대적으로 옳고 그름도 없습니다. 이 우주의 모든 존재는 서로 연결되어 있으며, 서로가 서로를 살려주고 도와주며 사랑해주는 관계로써 상의상관적으로 존재합니다. 연기와 자비의 정신이 고스란히 인간 존재의 삶의 양식이 되는 것입니다. 인간과 자연이 서로 연결되어 있고, 자연이 없으면 인간도 없고, 꿀벌이 없으면 인간도 없고, 네가 없으면 나도 없다는 그런 상의상관적인 불이(不二)의 지혜만이 우리 모두를 한 가족으로, 한 생명으로 만들어줌으로써 동체대비의 사랑, 둘이 아닌 자비의 실천으로 생활방식을 이끌어 갑니다.

그러면 우리 인간이 어떻게 해야 그런 삶에 한 발자국 다가설 수 있을까요? 어떻게 해야 분별심과 차별심을 놓아버릴 수 있을까요? 그게 바로 한 발짝 떨어져서 내가 나라는 존재가 일으켜 내는 생각들, 움직임들, 행동들, 느낌들, 이 모든 것을 관찰해야 하는 이유인 것입니다. 한 발자국 떨어져서 객관이 되어 나를 지켜보십시오. 지켜봄은 그 무엇도 둘로 나누지 않습니다. 지켜봄은 어느 한 쪽을 선택하지도 않고, 어느 한 쪽을 고집하지도 않습니다.

불교에서 말하는 관(觀)수행, 지관(止觀), 비우고 관찰하는 그 지관의 수행, 알아차림의 수행, 깨어있음의 수행, 그 수행이야말로 나라는 이기적인 마음, 아상이 나를 이끌고 가는 것이 아니라 내 근원에 있는 말하자면 불성, 자성불, 주인공, 본래면목, 참나의 자리인 우주의 근원적인 힘이 나를 이끌고 가게 됩니다. 그러기 때문에, 항상 근원으로 우리를 이끌고 갑니다. 좋고 나쁜 쪽 가운데 좋은 쪽을 선택해서 이끌고 가는 것이 아니라 좋고 나쁨을 넘어서는 무분별의 근원적인 치유의 길로 우리를 안내합니다.

우리들의 생각으로는 판단할 수 없는, 보다 근원적인 것으로 나를 이끌고 갑니다. 물론 그것이 우리 생각으로 판단 했을 때는 언뜻 좋아 보이지 않을 수도 있어요. 그러나 본질적으로 근원적으로 갔을 때는 항상 완전한 근원적인 곳으로 우리를 이끌고 간다는 겁니다. 그래서 그 이면에 행복 이면에 불행, 사랑 이면에 증오 이런 것을 내포하지 않는, 다시말해서 어떤 상황이 오더라도, 어떤 인연이 오더라도, 내 삶에 어떤 일이 벌어지더라도 항상 여여(如如)할 수 있고, 항상 행복할 수 있고, 어떤 상황에서도 휘둘리지 않을 수 있고, 흔들리지 않을 수 있는, 자기 중심이 잡힌 그런 어떤 힘으로 나를 이끌고 가고 내 삶을 이끌고 가고 이 지구를, 이 우주를, 인류를 이끌고 가는 힘 이라는 겁니다.

그래서 한 발짝 떨어져서 내가 나를 이끌고 가는 것이 아니라, 내 안의 본래면목이 나를 이끌고 가려 하는 삶, 그래서 ‘내가 뭘 어떻게 해 보겠다’ 라는 생각을 버리고 완전히 내 맡기는 삶 그리고 다만 지켜보는 삶으로의 전환이 이루어집니다. 다만 지켜보는 자로 남게 되었을 때 우리 앞에 펼쳐지는 모든 삶의 모습들을 아주 흥미로운 눈으로서 아주 새롭고 흥미진진하며 그렇다고 거기에 집착하지 않는, 한 발짝 떨어진 여여한 마음으로 모든 일이 내 삶에 내 존재위에 삶이 그저 파도쳐 흘러갔다 흘러올 수 있도록 내버려두게 되는 것입니다. 그때서야 비로소 아상으로 삶에 개입하지 않게 됩니다.

질병과 괴로움 속에 깊이 빠져서 그것에서 울고 웃게 하지 않게 되고 항상 흥미롭게 새롭게 아주 조화롭게 삶을 충분히 누릴수 있게 된다는 겁니다. 삶을 아주 흥겹게 완전히 받아들이고 즐겁게 누리면서 아주 충분히 삶을 살게 됩니다. 그랬을때 아주 자연스러운 껄끄럽지 않고 인위적이지 않은 아주 자연스러운 삶이 내 삶 속에 저절로 등장을 하게 되면서 우리 삶의 모든 고통과 두려움과 번뇌와 괴로움은 놓여지게 되는 길에 들어가기 시작한다는 겁니다.

지금까지 제가 말씀 드린 것이 어찌보면 우리 삶의 근원 그리고 이 현상세계의 본질과 근원세계의 본질에 대해서 말씀을 드린 부분이예요. 이 부분을 조금 더 사유를 깊이 해 보시고 수행을 통해서 이 자리가 과연 어떤 자리인가를 스스로 직접 느끼고 체득할 수 있는 그런 계기로 삼았으면 좋겠습니다.









Posted by 법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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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은 목적 지향적인 경우가 많습니다.
오직 목적을 향해 나아갑니다.
목적을 성취하기 위해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말입니다.
오직 마음은 목적의 성취에 가 있습니다.

끊임없이 목적을 세우고 세우고 또 세우기만 하고 삽니다.
세워 둔 목적을 성취하였을 때라도
그 성취의 순간만이라도,
행복을 즐기질 못하는 것 같습니다.

목적을 세우는 이유는 목적이 성취되었을 때
행복하기 위해서이지만,
그 순간 조차 우리는 여유롭게 행복을 느끼지 못합니다.
목적을 성취하는 순간 또 다른 새로운 목적이 세워지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우리의 삶은
목적 세움과 목적 성취의 끊임없는 반복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멀리 있는 목적만을 지향하며 살다보면
지금 여기에 있는 ‘나’를 놓치며 살기 쉽습니다.
그 목적만을 따라 가다 보면
지금 이 순간을 온전히 느끼고 즐길 수가 없습니다.

수행이란 ‘지금 여기’에서 깨어있는 일이지
무언가를 성취하는 일이 아닙니다.
순간 순간이 그대로 목적이 되어야 합니다.
순간 순간이 그대로 내 삶의 가장 소중한 순간임을 깨달아야 합니다.
그것 말고는 없습니다.
무언가를 성취하려고 하지 말아야 합니다.

깨달음도 마찬가지입니다.
깨닫고자 애쓰면
깨달음에서 자꾸 멀어지는 일이 되고 맙니다.

깨달음은 언젠가 성취해야 할 대단한 무엇이 아니라,
지금 이 순간 온전히 깨어있음입니다.
목적을 지향하려 하지 말고,
지금 이 순간 순간이 그대로 목적임을 깨달으면 되는 것입니다.
목적 지향이 아닌 순간 순간 온전한 목적으로 사는 것이란 말입니다.

순간 순간을 온전히 깨어있게 되면
그 순간이 그대로 법신(法身) 부처님이 되는 것입니다.
지금 여기에서 어리석은 중생으로 살지 말고,
‘아상’으로 살지 말고,
부처님으로 살 수 있어야 합니다.
지금 여기에서 온전히 깨어있음이 바로 부처님으로 사는 일입니다.

그렇게 살 수 있게 되면
현실이라는 우리의 삶 속에서,
그 어떤 경계 속에서라도 우리는 깨달음을 느낄 수 있습니다.
온전히 지금 여기에서 깨침을 즐길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따로이 산사로 수련회를 떠나는 일 보다
어쩌면 매일 하고 있는 삶 속에서,
이를테면 아침에 일어나는 순간, 밥 먹는 순간,
운전을 하는 순간, 지하철을 타는 순간, 일 하는 순간들 속에서
충분히 큰 깨달음을 얻게 될 수 있게 됩니다.

운전을 할 때
어디 어디까지 도착하는 수단이 되지 않도록 하셔야 합니다.
운전 그 자체가 온전한 목적이 되어야 합니다.

도착하기 위해 운전을 하게 되면
내 마음은 도착지라는 목적에 가 있기 때문에
운전하는 순간 순간에는 마음을 빼앗길 수 밖에 없습니다.
그랬을 때 운전하는 순간의 나는 이미 내가 아닙니다.
나는 이미 목적지에 도착해 있기 때문입니다.

마음은 목적지에 가 있는데
몸은 도중에 있으니 얼마나 조급하겠습니까.
더구나 빨간 신호등에 자꾸 걸리거나,
차가 막히거나 했을 때,
마음은 이미 목적지에 있지만 몸이 따라가지 못하니
얼마나 화가 나고 조급할 것입니까.

운전하고 가는 순간 순간 그대로가 목적이 되어야 합니다.
그 말은 운전하는 그 자체에 온 힘을 기울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운전하는 순간 순간 알아차림을 놓쳐선 안 됩니다.

운전하는 순간 알아차리게 되면
내 마음은 ‘지금 여기’에 있습니다.
그랬을 때 비로소 온전히 운전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빨간 신호등이 켜 지고 차가 멈춰 서면
그 순간이 바로 내 수행을 살찌우게 하는 소중한 경계인 것입니다.
그 순간이 나에게 목적인 것입니다.
빨간 신호등이나, 차막힘이 짜증나고 조급하게 하는 경계였지만,
수행자에게는 그 경계가 가장 소중한 순간이 됩니다.

매번 차를 몰고 절을 나설 때 마다
나를 놓치고 있는 모습을 봅니다.
그래서 한 번은 운전 중에 일어나는 마음을 알아차리려는
오직 그 목적만을 위해 차를 몰아 보았습니다.

빨간 신호들이 나타나면 내 마음이 어떻게 변하는가,
차가 막히면 내 마음이 어떻게 움직일까,
하는 집중하여 바라보는 마음 연습을 하면서 말입니다.

그러다 보니
빨간 신호등이 켜 지면 조바심 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잘 되었구나’ ‘올 것이 왔다’ 싶은 것입니다.
목적이 빨간 신호등, 혹은 차막힘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조급할 것도 없고, 답답할 것도 없이
온전히 그 순간 알아차림만이 있을 뿐입니다.
빨간 신호등, 차막힘 그 자체가 목적일 때
우리의 마음은 평온합니다.

빨간 신호등에 걸리면
그 순간 조급한 내 마음을 알아차리는 것입니다.
그 순간 신호등 앞에서는 서 있는 그 자체가 목적이 되어야지
빨리 가는게 목적이 되어선 안 된다는 말입니다.

순간 순간 그 자체가 목적일 때
그 어떤 순간도 조급하거나, 괴롭거나, 답답하지 않게 됩니다.
목적이 다른 데 가 있을 때,
마음이 다른 곳에 가 있을 때,
그 때 몸과 마음이 따로 따로이니 괴로운 것입니다.
몸과 마음을 온전히 하나가 되도록 하여 온전히 알아차릴 뿐입니다.

걷는 것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가령 걸어서 목적지에 도달하려고 한다면
우리 마음은 걷는 데는 관심이 없고
오직 도착하는 데만 마음이 가 있게 마련입니다.
빨리 도착하는 일만이 가장 중요한 목적이 되는 것입니다.
걷는 일은 시원찮은 일이 되고 맙니다.

그러나 예를 들어 돈을 들여 수련장을 찾아가
‘경행’ 수행을 한다고 했을 때는 어떠합니까.
걷는 그 자체가 온전한 목적입니다.
걷는 그 자체가 가장 중요한 일이 됩니다.
걷는 동안 목적지에 도착하려고 애쓰지 않습니다.

아예 목적지가 없고
오직 걷는 그 자체만이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그랬을 때 우린 온전히 걷고 있는 것입니다.
비로소 걷는 법을 배우는 것입니다.

우리의 삶 속에 펼쳐진
그 어떤 일이라도 모두가 마찬가지입니다.
오직 ‘지금 여기’에서 그 순간 알아차림이
온전한 목적이 되어야 합니다.

그 말은 다시 말해
목적을 버리라는 말이기도 합니다.
‘목적 없음’이 목적이 되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마음이 즉한 순간 깨어있으면
그 순간 우리는 온 우주와 하나됩니다.
우리의 몸은 그대로 법신(法身)이 됩니다.

아무리 괴로운 일이 있더라도
순간이 괴로운 일은 거의 찾아보기 어렵습니다.
앞으로 일어날 일에 대한 괴로움이거나,
목적에 대한 두려움이거나,
이미 지나간 일에 대한 걱정이거나,
우리의 삶이라는 것이 거의 그렇습니다.

그러나 순간 순간을 온전히 깨어있게 되면
우리가 느끼는 괴로움의 거의 90%는 사라지게 됩니다.
그만큼 과거나 미래로,
혹은 우리 스스로 만들어 놓은 환영에게로
마음을 빼앗기는 일이 많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나머지 10%도 안되는 괴로움과 맞닥뜨렸을 때,
그 때도 온전한 알아차림으로 깨어있어야 합니다.
괴로운 ‘나’를 온전히 지켜보는 것입니다.

그랬을 때 그 괴로움 또한
고정된 실체가 없이 잠시 스쳐지나가는 인연임을 알 수 있게 됩니다.
그 즉한 순간의 괴로움을 잘 다스리는 것이 중요합니다.

욕을 얻어 먹는 순간,
상대에게 배신 당하는 순간,
억울함을 당하는 순간,
그 순간 순간들에 온전히 알아차리는 것입니다.

알아차리고 있으면 괴로움은 찾아볼 수 없습니다.
아무리 찾으려 해도 도저히 찾을 수 없습니다.
실체가 없기 때문입니다.
실체 없는 경계에 휘둘려 괴롭다고 느끼지만,
그 실체를 온전히 관해보면
우린 실체 없음(공)의 진실만을 발견하게 됩니다.

삶을 살아가며
순간 순간에 맞닥뜨리는(촉) 즉한 경계
그 순간의 경계가 가장 중요한 시점이 되도록 하세요.
지금 여기라는 이 순간 말고는 없습니다.
그 순간을 놓치면 내 삶 전체를 놓치는 것입니다.

우리가 살아갈 수 있는 때는
오직 ‘지금 여기’라는 순간 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과거를 그렇다고 미래를 살아갈 수도 없는 노릇이기 때문입니다.

일체 매 시간, 매 초가
내 앞에 펼쳐진 그 모든 경계가
그대로 나에게 가장 중요한 ‘목적’인 것입니다.
그러니 목적 성취를 위해 애쓸 필요는 없습니다.

오직 지금 이 순간 순간이 목적이며,
알아차리는 순간 순간이 그대로 성취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 ‘목적 없음의 목적’이고,
‘성취 없는 성취’만이 끊임없이 반복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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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법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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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만 기다리세요.
우리가 평생토록 해 왔던
기다림이 지겹지도 않으신가요?
이제 그만 기다림에 대한 환상을 놓아버리시기 바랍니다.

우리의 삶은 기다림의 연속입니다.
기다리고 기다리고 또 기다리다가
기다리던 일이 완성되면 또 다른 것을 기다리고
그것이 완성되면 또 다른 기다림의 대상을 만들어
우리의 기다림은 끝이 없이 계속됩니다.

초등학생은 중학생이 되길 기다리고
고등학생은 대학생이 되길 기다리며,
대학생은 좋은 취직 자리를 기다리고,
학생은 좋은 성적 좋은 학교를 기다리며,
직장인은 좀 더 인정 받기를 기다리고 진급하기를 기다리며,
수행자는 깨닫기를 기다립니다.

한 가지 일이 끝나기를 기다리고,
내 앞에 나타날 사랑을 기다리고,
빨리 졸업하기를 기다리며,
빨리 큰 돈을 벌기를, 큰 집, 좋은 차 사기를 기다리고,
더 나은 직장을, 지위를, 권력을 기다립니다.

출근하고 나면 빨리 퇴근하기를 기다리고,
평일에는 빨리 휴일이 오길 기다리고,
다음 휴가철을 기다리고,
수업시간에 쉬는 시간을 기다리고,
몇일 후에 있을 소풍이나 만남을 기다립니다.

뭔가 재미난 일을 기다리고,
가을엔 첫눈 오는 날을 기다리고,
겨울엔 만물의 태동을 기다리며,
봄엔 여름 휴가 때를
여름엔 가을 단풍구경 갈 때를 기다립니다.
물론 단풍이 떨어질 때 또다시 첫 눈을 기다리겠지요.

성공하기를, 부자 되기를, 행복하기를
깨달음의 순간을 기다립니다.

그렇게 그렇게 끊임없이 평생을 기다리고 기다리다가
우리는 결국 한번도 기다리지도 않았던 죽음을 만나게 됩니다.
죽음의 순간까지 달려가면서
한 순간도 기다림을 포기했던 적이 없었지요.
그러나 우리에게 온 것이라고는 한번도 기다리지 않았던
버림이고 죽음의 그림자일 뿐입니다.

삶 속에서 기다림의 결과로 얻어 낸
그 어떤 가치있는 것이라도
결국에 죽음 앞에서는 모두 다 무의미한 것일 뿐입니다.
모두 다 버리고 가야할 것들 뿐입니다.

우리가 죽음의 순간 유일하게 짊어지고 갈 수 있는 것은
살아오면서 우리가 별로 바라지 않았던
‘현재의 깨어있는 힘(지혜)’과 ‘사랑과 베품(자비)’입니다.

평생을 다음 순간만 바라고 살았지만,
더 낳은 순간만을 바라고 살았지만
죽고 나서 우리가 짊어지고 갈 수 있는 것이
‘기다림의 결과’가 아닌 ‘기다림 없는 순간에 깨어있는 힘’이라는 것은
참으로 우리의 기다림을 허탈케 하기에 충분합니다.

중요한 것은 ‘기다림’이 아닌
‘기다림의 놓음’입니다.
기다리지 않았을 때 지금 이 자리에서 현존할 수 있습니다.
기다림을 놓아버렸을 때 비로소 깨어있을 수 있습니다.

기다림이란
지금 이 순간을 원하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지금이 아닌 다음 순간을 원한다는 말이고,
현재가 아닌 미래를 원한다는 말이며,
지금의 내 모습이 아닌 다른 모습을 원한다는 말이고,
‘지금의 나 처럼’이 아닌 ‘다른 사람처럼’되길 원한다는 말이며,
내가 갖고 있는 것이 아닌 갖지 못한 것을 원한다는 말입니다.

이러한 기다림은
현재의 모습과 미래의 기대 사이의 갈등을 만들어 냅니다.
그 갈등이 바로 괴로움의 실체로 다가옵니다.
기다림이 많다는 것은
그만큼 지금 이 순간 만족하지 않는다는 말이고,
지금 이 순간 만족하지 않으면 우리의 삶은 고되고 괴로울 뿐입니다.

이런 우리의 기다림은 습관적입니다.
항상 무엇인가를 기다리지 않으면 견디질 못합니다.
그 기다림을 좋은 말로 ‘희망’이라고도 하고 꿈이라도도 하겠지요.
또 ‘목적의식’이라고 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우리 사람들의 삶의 방식이
그런 기다림을 당연하게 여기다 보니
이런 기다림을 ‘희망’이니, ‘꿈’이니, ‘목적의식’이니 하고
좋은 말처럼 꾸며 놓았긴 했지만
그렇더라도 여전히 기다림은 우릴 피곤하게 만들 뿐입니다.
여전히 기다림은 온전한 지금 이 순간의 깨어있음을 방해하고,
삶의 근원적인 본질에 다가가는 것을 방해할 뿐입니다.

그런 습관적인 기다림에
이젠 지칠 때도 되지 않았는가요?
그동안 우리들은 무언가를 기다리느라
얼마나 많은 시간을 낭비했습니까.
아니 어쩌면 우리 삶 전체를
이런 쓸모없는 기다림에 헛되이 소모하고 있는지 모릅니다.

기다림이란 낭비이고 불필요한 것입니다.
공연히 내적인 에너지를 소모할 뿐입니다.
기다릴 시간에
저지르는 편이 더 현명합니다.
지금 이 순간을 사는 편이 더 궁극적입니다.

현실적인 돈, 명예, 권력, 학벌, 지위, 성공 등은
기다림을 통해 얻게 될 수 있을지 모르지만,
그보다 더 근원적인 행복은
결코 기다림을 통해 얻을 수 없습니다.

현실적인 돈, 명예, 권력, 학벌, 성공이라는 것이
다 궁극적으로 행복을 위한 방편이 아니던가요?
그런 껍데기를 위한 기다림에 휘둘려서는 안됩니다.
바로 궁극적인 행복 속으로 뛰어들어야 합니다.

행복은 결코 기다린다고 오지 않습니다.
행복은 결코 미래에 있지 않습니다.
행복은 돈, 명예, 권력, 지위, 학벌, 성공 속에 있지 않습니다.

참된 행복은
다만 지금 이 순간에 존재할 뿐입니다.
지금 이 순간 깨어있음을 통해 드러날 뿐입니다.
지금 이 순간 완전한 자족을 통해 드러날 뿐입니다.

항상 행복은 이 자리에 있었을 뿐입니다.
‘지금 이 순간’에 늘 그렇게 있을 뿐이지요.
기다리는 마음은 이 자리에 있는 행복을 보지 못하게 만듭니다.
이 자리를 봐야 하는데
다른 자리를 찾고 기다리고 있으니 어떻게 볼 수 있겠어요.

기다림의 결과로 행복을 얻을 수는 없다는 말입니다.
오히려 그 기다림을 완전히 놓아버렸을 때
그 때 언제나 있어왔던 행복을 볼 수 있을 뿐.

지금 이 순간
내가 무엇이 되었든 간에,
내가 누구이든 간에,
내가 무슨 일에 종사하든 간에,
나의 직위, 직장, 학벌, 재산, 세속적인 성공에 상관없이
다만 지금 이 순간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충분히 인정하며 사랑하고 받아들이셔야 합니다.

‘나 자신’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세요.
그냥 지금 이 순간의 ‘나 자신’이면 되지
한참을 기다린 후에나 얻을 수 있는
‘다른 그 무엇’이 될 필요는 없다는 것입니다.

지금 이 순간의 내 모습에,
내가 가지고 있는 만큼의 소유물에,
이렇게 살아 숨쉬고 있음에
감사하고 존중하고 인정하고 받아들이시기 바랍니다.

지금 이 순간을 인정하고 받아들이며
또 다른 것을 기다리지 않을 수 있다면
우린 이 순간에 깨어있는 법을 터득할 것입니다.
그러고 나면 분명 머지 않아
맑은 행복과 평화로움이 우리 앞에 나타날 것입니다.

모든 종류의 기다림을 놓아버리세요.
다음 순간을 기다리지 마시고
오직 지금 이 순간이
기다림을 이룬 순간이 되도록 하세요.
지금 ‘이 순간’이 바로 ‘그 순간’이 되도록 하시기 바랍니다.
이 순간에 서 있으면
무언가를 기다릴 필요가 없습니다.

지금 이 순간
기다림을 놓아버리고
바로 이 자리에 서 있으시길...

Posted by 법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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