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강경 제20분 이색이상분 강의
법상스님의 목탁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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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강경과 마음공부

금강경 제20분 이색이상분 강의

목탁 소리 2009. 10. 5. 15:35



제 20, 이색이상분
형상과 모습을 여의다


離色離相分 第二十
須菩提 於意云何 佛 可以具足色身 見不 不也 世尊 如來 不應以具足色身 見 何以故 如來 說 具足色身 卽非具足色身 是名具足色身 須菩提 於意云何 如來 可以具足諸相 見不 不也 世尊 如來 不應以具足諸相 見 何以故 如來說 諸相具足 卽非具足 是名諸相具足


“수보리야, 너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구족한 몸을 갖춘 것만을 보고 부처라고 할 수 있겠느냐?”
“아닙니다. 세존이시여. 구족한 몸을 갖추었다고 여래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여래께서 말씀하시는 구족한 몸은 곧 구족한 몸이 아니라 그 이름이 구족한 몸이기 때문입니다.”
“수보리야, 너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가히 구족한 [32상]상을 가졌다고 하여 여래라 할 수 있겠느냐?”
“아닙니다. 세존이시여. 구족한 상을 갖춘 것을 여래라 볼 수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여래께서 말씀하시는 모든 상이 구족되었다는 것은 곧 구족된 것이 아니라 그 이름이 구족된 상일 따름이기 때문입니다.”

이색이상이라는 것은 형상과 모습을 여읜 자리에 부처님은 계시다는 것을 의미하고 있다. 우리는 여전히 부처님을 형상과 모습으로써 생각하곤 한다. 전국의 어느 사찰을 가 보더라도 부처님의 모습이 형상으로써 잘 모셔져 있는 것을 본다. 그리고 우리는 그 법당의 형상불에 예배한다. 물론 그것이 완전히 잘못되었으니 다 그만두어야 한다는 말이 아니다. 그것은 어디까지나 방편일 뿐임을 완전히 자각할 수 있어야 한다는 말이다. 법당에 모셔진 형상의 부처님은 어디까지나 색이고 상일 뿐이다. 본질은 색과 상을 떠나 있다. 법당에서 절하고 예불을 올리면서도 항상 이 참된 본질을 잊어서는 안 된다. 이 분에서는 부처님을 또 진리를 형상이나 모습으로써 바라보지 않을 수 있도록 이끌고 있다.


“수보리야, 너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구족한 몸을 갖춘 것만을 보고 부처라고 할 수 있겠느냐?”
“아닙니다. 세존이시여. 구족한 몸을 갖추었다고 여래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여래께서 말씀하시는 구족한 몸은 곧 구족한 몸이 아니라 그 이름이 구족한 몸이기 때문입니다.”
“수보리야, 너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가히 구족한 [32상]상을 가졌다고 하여 여래라 할 수 있겠느냐?”
“아닙니다. 세존이시여. 구족한 상을 갖춘 것을 여래라 볼 수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여래께서 말씀하시는 모든 상이 구족되었다는 것은 곧 구족된 것이 아니라 그 이름이 구족된 상일 따름이기 때문입니다.”


여래는 구족한 색신의 몸을 갖추었으며 32상 80종호를 구족하고 계신다고 알고 있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방편일 뿐이다. 부처님의 상호를 말로 표현하는 순간 사실은 그것과는 멀어지고 만다. 그 말이 부처님을 그대로 나타내 줄 수는 없다. 말로 표현되는 순간 벌써 어긋나고 마는 것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말로 언어로 표현하지 않는다면 수많은 중생들에게 어떻게 부처님과 가르침을 전해줄 수 있단 말인가. 그래서 부처님의 진리성을 표현하다 보니 어쩔 수 없이 말로 나타내지 않을 수 없었고 그것을 표현한 말이 바로 구족한 몸이고 구족한 상이라고 표현한 것이다. 그러니 구족한 상이나 구족한 몸이라는 것은 곧 구족된 것이 아님을 말한다. 구족되었다는 이름일 뿐 ‘구족’이라는 언어 자체가 구족은 아니기 때문이다. 그래서 구족은 곧 구족이 아니다. 다만 그 이름이 구족일 뿐인 것이다.

부처님은 이와 같이 형상과 모습을 떠나서 계신다. 부처님을 어떤 모습을 가지신, 어떤 형상을 구족하신 존재로써 생각지 말라. ‘부처님은 어떤 분이실까?’ ‘부처님은 인자하신 할아버지 같은 분이실거야?’ ‘부처님은 남자인가 여자인가?’ ‘부처님은 어떻게 생기셨을까’ ‘부처님의 몸은 얼마나 아름다우실까?’ 아직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가? 아직도 형상과 모습으로써 부처를 구하고 있는가? 부처님은 형상이나 모습이라는 틀에 갇혀 있는 분이 아니다.

부처님이란 진리 그 자체이며, 생명 그 자체이고, 우주 그 자체이며, 허공 그 자체이고, 완전한 무(無)요, 공(空) 그 자체이다. 크고 작은 것도 아니고, 잘나고 못난 것도 아니며, 남자도 여자도 아니고, 그 어떤 한정이나 표현으로도 나타낼 수 없다. 물론 이렇게 표현하고 있지만 이 말들이 부처님을 나타낼 수는 없다. 다만 표현을 그렇게 했을 뿐 이 표현은 더 이상 부처님이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습관적으로 부처를 틀 속에 가두느라고 애를 쓰고 있다. 법당에 계신 부처님의 모습을 보라. 대부분이 비슷비슷하다. 비슷한 모습으로 부처님의 상을 만들어 놓았다. 그러다 보니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법당의 부처님의 모습을 부처님이라고 믿고 있다. 은연중에 그렇게 믿고 있다. 그러나 법당의 부처님 형상 안에만 부처님이 담겨 있을 수가 있을까? 그리스도교의 예수상이나 성모마리아상을 생각해 보라. 그 상은 부처가 아닌가? 왜 그 상을 보면 거부감을 느끼고 불상을 보면 흡족한 마음을 가지는가. 절에 가서 불상을 보고 탱화를 보면 편안한 느낌인데 교회의 예배당은 그렇지 않다고 생각하지는 않았는가. 그것이 바로 부처를 색과 상으로 관념화하고 있다는 반증이다.

부처는 어떤 특정한 색과 상에 갇히지도 않지만 그렇다고 어떤 특정한 색상에서 벗어나 있지도 않다. 법당의 불상도 부처요, 예수상이나 성모마리아상 또한 부처일 수 있다. 어디 그 뿐인가. 저 하늘의 구름도 부처요, 바람도, 흙도, 자연도, 저 산과 바다 또한 부처의 몸이다. 나무와 풀꽃들과 새와 들짐승에서부터 곤충이나 미생물들에 이르기까지 생명 있고 없는 일체 모든 것, 형상 있고 없는 일체 모든 것은 그대로 부처를 담고 있다.

부처는 형상이 아니다. 불상 안에만 부처가 있는 것이 아니다. 마찬가지로 부처는 불교 안에만 있는 것도 아니다. 불경 안에만 부처의 진리가 있는 것이 아니다. ‘불교’라는 종교 안에만 부처가 있다거나, 진리가 있는 것일 수 없다. 불교는 다만 온 우주의 진리를, 법을, 도를, 참을 이름하여 ‘불교’라고 이름 붙였을 뿐이지 ‘불교’라는 이름이 불교인 것은 아니다. 그러니 ‘불교’라는 틀에서 벗어날 수 있어야 한다. 불교는 불교가 아니라 다만 이름이 불교인 것일 뿐이다.
그것이 불교의 특성이다. 그것이 바로 모든 불교 신자들의 자유로움이요 유연함이다. 그것이 진리의 전일성(全一性)이요, 전체성이다. 불교는 불교만을 고집하지 않는다. 불경만을 진리라고 고집하지 않는다. 고집하지 않고 집착하지 않고 어느 한 쪽으로 치우치지 않은 것이 바로 불교다. 불교이기 때문에 진리를 담고 있는 것이 아니라 이 세상의 진리를 불교라고 이름지었을 뿐이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많은 불교 신자들은 ‘불교’ 속에 갇혀 있고, ‘부처’ 속에 갇혀 있다. 불교라는 이름에 갇혀 있고, 부처라는 형상에 갇혀 있다. 갇혀 있으면 자유롭지 못하고 자유롭지 못할 때 대립과 갈등이 일어난다. 타종교 신자들과 갈등을 만들어야 할 이유가 무엇인가. 불교만이 진리이고 다른 가르침은 불교보다 열등하다는 상을 만들어 낼 이유가 무엇인가.

불교는 불교를 종교로 내세우는 종교가 아니다. 불교는 진리를 종교로 내세우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불교’라는 종교 속에, 혹은 ‘조계종’이라는 교단 속에, ‘불경’이라는 경전 속에만 불교가 있는 것이 아니다. 성경 속에 혹은 코란 속에 혹은 도덕책 속이나 소설책 속에, 혹은 할머니 할아버님의 말씀 속에, 노자나 장자의 고전 속에, 인디언들의 말들 속에, 어린 아이의 행동 속에, 목사님과 신부님들의 말씀 속에도 진리는 담겨있다. 불교는 담겨있다.
물론 그렇다고 모든 말들이, 모든 고전들이, 모든 종교의 가르침이 모두 다 진리라는 것은 아니다. 이 말의 핵심은 ‘불교’ 속에서만 진리를 찾을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불교 안에만 진리가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어디에도 진리가 있을 수 있음을 받아들여야 한다는 말이다. 물론 불교는 순수한 진리의 보고라는 점은 어쩔 수 없는 진실이다. 그러나 다른 가르침 속에도 불교는 담겨있다. 어떤 종교는, 어떤 사상은 다른 이름을 내걸고 있지만 그대로가 진리를 담고 있으며 부처의 가르침을 담고 있는 것도 있다.

그러니 불교가 불교이기 때문에 믿어서는 안 된다. 불교가 진리이기 때문에 믿어야 한다. 불교이기 때문에 불교를 믿는다는 것은 목적이 오직 ‘불교’에 가 있다는 말이고 그랬을 때 ‘불교’ 그 자체에 갇히거나 집착되기 쉽다. 그러나 진리이기 때문에 믿는다는 말은 ‘불교’라는 이름이나 틀을 믿는것이 아니라 그 안에 담긴 진리성을 믿는다는 말이기 때문에 참된 진리를 믿는자는 거기에 어떤 이름을 가져다 붙이더라도 그것이 진리를 대변하고 있다면 마땅히 믿을 수 있는 열려있는 유연성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그것이 진리라면 노자나 장자를 공부해도 좋고, 성경을 공부해도 좋으며, 인디언의 가르침이나, 옛 어르신의 가르침이라도 전혀 편견이나 색안경을 끼고 바라보지 않을 수 있다. 그러나 말에 갇히고, ‘불교’에 갇히고, 어떤 틀에 갇혀 있는 사람은 일단 다른 종교, 다른 사상, 다른 사람의 가르침이 오면 일단 내 안의 문을 자물쇠로 콱 틀어 잠그고 본다. 그뿐 아니라 그러한 가르침을 색안경을 끼고 바라본다.

연예인이 TV에 나와서 ‘하느님께 감사합니다’ 한 마디 했다고 치자. 그래서 뭐 어쨌단 말인가. 그것이 왜 우리의 질투심을 유발하고, 그것이 부처님이 아닌 것에 왜 서운함을 느껴야 하는가. 참으로 하느님을 이해한 사람이라면 그는 부처님을 이해하고 있는 것이다. 참으로 성경을 온전하게 지혜로써 이해한 사람이라면 그는 성경 안에서 불경을 진리를 이해한 사람일 수 있다. 다만 우리가 걱정해야 하는 것은 ‘하느님’이라고 했을 때 그 하느님을 잘못 믿고 잘못 이해하며 하느님이란 상에 갇혀서, ‘기독교’란 상에 갇혀서 믿는 사람을 측은한 자비심으로 바라봐야 한다.

물론 성경 특히 구약 속에 수많은 오해의 구절들이 있고, 말 그대로 이해했을 때 진리를 무색하게 할 만한 구절들이 많이 있다. 코란도 마찬가지다. 그 가르침을 잘못이해하거나, 근본적으로 그 경전들이 만들어질 때의 시대적 상황, 편집한 사람들의 잘못 등이 후대에 큰 악영향을 끼친 그런 부분들에 대해서는 많은 반성과 성찰이 있어야 할 것이다. 그런 어리석음들이 전 세계적으로 얼마나 많은 전쟁을 일으켰으며, 얼마나 많은 사람들을 불행으로 이끌어 갔는가. 그러나 문자의 틀에 갇히지 않고, 문자라는 방편, 언어라는 방편이 가지고 있는 치명적인 오류들을 올바로 이해함으로써 그 종교의 그 경전의 언어 이전에 담긴 참 진리를 온전하게 이해했던 수많은 성인들, 종교인들은 여전히 그 모든 종교들의 순수성과 진리성의 전통을 이어왔다. 바로 그들은 성경을 문자에 치우치지 않고 이해한 사람들이다. 성경의 수많은 말들이 말이 아니라 다만 이름이 말이었음을 온전하게 알고 있었던 사람들이다. 언어가 가지는, 형상이 가지는 모순과 오류들을 이해한 사람들이다. ‘예수’라는 몸이나 상에 치우치지 않고, ‘성경’이라는 상에 치우치지 않고 이해한 사람들이다.

물론 불교 또한 마찬가지다. 참된 불교의 정신을 이끌어 온 사람들은 ‘불교’라는 틀에 갇힌 사람들이 아니라 그 틀을 뛰어넘은 사람들이다. 불교가 불교가 아님을 바로 보고, 부처의 형색이 형색이 아님을 바로 본 사람들이 바로 그 진리의 정신을 이어오고 있다. 바로 그 정신, 그 진리의 참된 정신을 있는 그대로 내포하고 있는 경전이 바로 ‘금강경’인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불교의 보배요, 불교 정신을 이어 온 요체다. 그리고 지금 우리는 이렇게 금강경이 아니기 때문에 참으로 금강경인 이 금강경을 받아들임 없이 받아들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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