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20, 이색이상분
형상과 모습을 여의다


離色離相分 第二十
須菩提 於意云何 佛 可以具足色身 見不 不也 世尊 如來 不應以具足色身 見 何以故 如來 說 具足色身 卽非具足色身 是名具足色身 須菩提 於意云何 如來 可以具足諸相 見不 不也 世尊 如來 不應以具足諸相 見 何以故 如來說 諸相具足 卽非具足 是名諸相具足


“수보리야, 너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구족한 몸을 갖춘 것만을 보고 부처라고 할 수 있겠느냐?”
“아닙니다. 세존이시여. 구족한 몸을 갖추었다고 여래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여래께서 말씀하시는 구족한 몸은 곧 구족한 몸이 아니라 그 이름이 구족한 몸이기 때문입니다.”
“수보리야, 너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가히 구족한 [32상]상을 가졌다고 하여 여래라 할 수 있겠느냐?”
“아닙니다. 세존이시여. 구족한 상을 갖춘 것을 여래라 볼 수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여래께서 말씀하시는 모든 상이 구족되었다는 것은 곧 구족된 것이 아니라 그 이름이 구족된 상일 따름이기 때문입니다.”

이색이상이라는 것은 형상과 모습을 여읜 자리에 부처님은 계시다는 것을 의미하고 있다. 우리는 여전히 부처님을 형상과 모습으로써 생각하곤 한다. 전국의 어느 사찰을 가 보더라도 부처님의 모습이 형상으로써 잘 모셔져 있는 것을 본다. 그리고 우리는 그 법당의 형상불에 예배한다. 물론 그것이 완전히 잘못되었으니 다 그만두어야 한다는 말이 아니다. 그것은 어디까지나 방편일 뿐임을 완전히 자각할 수 있어야 한다는 말이다. 법당에 모셔진 형상의 부처님은 어디까지나 색이고 상일 뿐이다. 본질은 색과 상을 떠나 있다. 법당에서 절하고 예불을 올리면서도 항상 이 참된 본질을 잊어서는 안 된다. 이 분에서는 부처님을 또 진리를 형상이나 모습으로써 바라보지 않을 수 있도록 이끌고 있다.


“수보리야, 너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구족한 몸을 갖춘 것만을 보고 부처라고 할 수 있겠느냐?”
“아닙니다. 세존이시여. 구족한 몸을 갖추었다고 여래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여래께서 말씀하시는 구족한 몸은 곧 구족한 몸이 아니라 그 이름이 구족한 몸이기 때문입니다.”
“수보리야, 너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가히 구족한 [32상]상을 가졌다고 하여 여래라 할 수 있겠느냐?”
“아닙니다. 세존이시여. 구족한 상을 갖춘 것을 여래라 볼 수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여래께서 말씀하시는 모든 상이 구족되었다는 것은 곧 구족된 것이 아니라 그 이름이 구족된 상일 따름이기 때문입니다.”


여래는 구족한 색신의 몸을 갖추었으며 32상 80종호를 구족하고 계신다고 알고 있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방편일 뿐이다. 부처님의 상호를 말로 표현하는 순간 사실은 그것과는 멀어지고 만다. 그 말이 부처님을 그대로 나타내 줄 수는 없다. 말로 표현되는 순간 벌써 어긋나고 마는 것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말로 언어로 표현하지 않는다면 수많은 중생들에게 어떻게 부처님과 가르침을 전해줄 수 있단 말인가. 그래서 부처님의 진리성을 표현하다 보니 어쩔 수 없이 말로 나타내지 않을 수 없었고 그것을 표현한 말이 바로 구족한 몸이고 구족한 상이라고 표현한 것이다. 그러니 구족한 상이나 구족한 몸이라는 것은 곧 구족된 것이 아님을 말한다. 구족되었다는 이름일 뿐 ‘구족’이라는 언어 자체가 구족은 아니기 때문이다. 그래서 구족은 곧 구족이 아니다. 다만 그 이름이 구족일 뿐인 것이다.

부처님은 이와 같이 형상과 모습을 떠나서 계신다. 부처님을 어떤 모습을 가지신, 어떤 형상을 구족하신 존재로써 생각지 말라. ‘부처님은 어떤 분이실까?’ ‘부처님은 인자하신 할아버지 같은 분이실거야?’ ‘부처님은 남자인가 여자인가?’ ‘부처님은 어떻게 생기셨을까’ ‘부처님의 몸은 얼마나 아름다우실까?’ 아직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가? 아직도 형상과 모습으로써 부처를 구하고 있는가? 부처님은 형상이나 모습이라는 틀에 갇혀 있는 분이 아니다.

부처님이란 진리 그 자체이며, 생명 그 자체이고, 우주 그 자체이며, 허공 그 자체이고, 완전한 무(無)요, 공(空) 그 자체이다. 크고 작은 것도 아니고, 잘나고 못난 것도 아니며, 남자도 여자도 아니고, 그 어떤 한정이나 표현으로도 나타낼 수 없다. 물론 이렇게 표현하고 있지만 이 말들이 부처님을 나타낼 수는 없다. 다만 표현을 그렇게 했을 뿐 이 표현은 더 이상 부처님이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습관적으로 부처를 틀 속에 가두느라고 애를 쓰고 있다. 법당에 계신 부처님의 모습을 보라. 대부분이 비슷비슷하다. 비슷한 모습으로 부처님의 상을 만들어 놓았다. 그러다 보니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법당의 부처님의 모습을 부처님이라고 믿고 있다. 은연중에 그렇게 믿고 있다. 그러나 법당의 부처님 형상 안에만 부처님이 담겨 있을 수가 있을까? 그리스도교의 예수상이나 성모마리아상을 생각해 보라. 그 상은 부처가 아닌가? 왜 그 상을 보면 거부감을 느끼고 불상을 보면 흡족한 마음을 가지는가. 절에 가서 불상을 보고 탱화를 보면 편안한 느낌인데 교회의 예배당은 그렇지 않다고 생각하지는 않았는가. 그것이 바로 부처를 색과 상으로 관념화하고 있다는 반증이다.

부처는 어떤 특정한 색과 상에 갇히지도 않지만 그렇다고 어떤 특정한 색상에서 벗어나 있지도 않다. 법당의 불상도 부처요, 예수상이나 성모마리아상 또한 부처일 수 있다. 어디 그 뿐인가. 저 하늘의 구름도 부처요, 바람도, 흙도, 자연도, 저 산과 바다 또한 부처의 몸이다. 나무와 풀꽃들과 새와 들짐승에서부터 곤충이나 미생물들에 이르기까지 생명 있고 없는 일체 모든 것, 형상 있고 없는 일체 모든 것은 그대로 부처를 담고 있다.

부처는 형상이 아니다. 불상 안에만 부처가 있는 것이 아니다. 마찬가지로 부처는 불교 안에만 있는 것도 아니다. 불경 안에만 부처의 진리가 있는 것이 아니다. ‘불교’라는 종교 안에만 부처가 있다거나, 진리가 있는 것일 수 없다. 불교는 다만 온 우주의 진리를, 법을, 도를, 참을 이름하여 ‘불교’라고 이름 붙였을 뿐이지 ‘불교’라는 이름이 불교인 것은 아니다. 그러니 ‘불교’라는 틀에서 벗어날 수 있어야 한다. 불교는 불교가 아니라 다만 이름이 불교인 것일 뿐이다.
그것이 불교의 특성이다. 그것이 바로 모든 불교 신자들의 자유로움이요 유연함이다. 그것이 진리의 전일성(全一性)이요, 전체성이다. 불교는 불교만을 고집하지 않는다. 불경만을 진리라고 고집하지 않는다. 고집하지 않고 집착하지 않고 어느 한 쪽으로 치우치지 않은 것이 바로 불교다. 불교이기 때문에 진리를 담고 있는 것이 아니라 이 세상의 진리를 불교라고 이름지었을 뿐이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많은 불교 신자들은 ‘불교’ 속에 갇혀 있고, ‘부처’ 속에 갇혀 있다. 불교라는 이름에 갇혀 있고, 부처라는 형상에 갇혀 있다. 갇혀 있으면 자유롭지 못하고 자유롭지 못할 때 대립과 갈등이 일어난다. 타종교 신자들과 갈등을 만들어야 할 이유가 무엇인가. 불교만이 진리이고 다른 가르침은 불교보다 열등하다는 상을 만들어 낼 이유가 무엇인가.

불교는 불교를 종교로 내세우는 종교가 아니다. 불교는 진리를 종교로 내세우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불교’라는 종교 속에, 혹은 ‘조계종’이라는 교단 속에, ‘불경’이라는 경전 속에만 불교가 있는 것이 아니다. 성경 속에 혹은 코란 속에 혹은 도덕책 속이나 소설책 속에, 혹은 할머니 할아버님의 말씀 속에, 노자나 장자의 고전 속에, 인디언들의 말들 속에, 어린 아이의 행동 속에, 목사님과 신부님들의 말씀 속에도 진리는 담겨있다. 불교는 담겨있다.
물론 그렇다고 모든 말들이, 모든 고전들이, 모든 종교의 가르침이 모두 다 진리라는 것은 아니다. 이 말의 핵심은 ‘불교’ 속에서만 진리를 찾을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불교 안에만 진리가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어디에도 진리가 있을 수 있음을 받아들여야 한다는 말이다. 물론 불교는 순수한 진리의 보고라는 점은 어쩔 수 없는 진실이다. 그러나 다른 가르침 속에도 불교는 담겨있다. 어떤 종교는, 어떤 사상은 다른 이름을 내걸고 있지만 그대로가 진리를 담고 있으며 부처의 가르침을 담고 있는 것도 있다.

그러니 불교가 불교이기 때문에 믿어서는 안 된다. 불교가 진리이기 때문에 믿어야 한다. 불교이기 때문에 불교를 믿는다는 것은 목적이 오직 ‘불교’에 가 있다는 말이고 그랬을 때 ‘불교’ 그 자체에 갇히거나 집착되기 쉽다. 그러나 진리이기 때문에 믿는다는 말은 ‘불교’라는 이름이나 틀을 믿는것이 아니라 그 안에 담긴 진리성을 믿는다는 말이기 때문에 참된 진리를 믿는자는 거기에 어떤 이름을 가져다 붙이더라도 그것이 진리를 대변하고 있다면 마땅히 믿을 수 있는 열려있는 유연성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그것이 진리라면 노자나 장자를 공부해도 좋고, 성경을 공부해도 좋으며, 인디언의 가르침이나, 옛 어르신의 가르침이라도 전혀 편견이나 색안경을 끼고 바라보지 않을 수 있다. 그러나 말에 갇히고, ‘불교’에 갇히고, 어떤 틀에 갇혀 있는 사람은 일단 다른 종교, 다른 사상, 다른 사람의 가르침이 오면 일단 내 안의 문을 자물쇠로 콱 틀어 잠그고 본다. 그뿐 아니라 그러한 가르침을 색안경을 끼고 바라본다.

연예인이 TV에 나와서 ‘하느님께 감사합니다’ 한 마디 했다고 치자. 그래서 뭐 어쨌단 말인가. 그것이 왜 우리의 질투심을 유발하고, 그것이 부처님이 아닌 것에 왜 서운함을 느껴야 하는가. 참으로 하느님을 이해한 사람이라면 그는 부처님을 이해하고 있는 것이다. 참으로 성경을 온전하게 지혜로써 이해한 사람이라면 그는 성경 안에서 불경을 진리를 이해한 사람일 수 있다. 다만 우리가 걱정해야 하는 것은 ‘하느님’이라고 했을 때 그 하느님을 잘못 믿고 잘못 이해하며 하느님이란 상에 갇혀서, ‘기독교’란 상에 갇혀서 믿는 사람을 측은한 자비심으로 바라봐야 한다.

물론 성경 특히 구약 속에 수많은 오해의 구절들이 있고, 말 그대로 이해했을 때 진리를 무색하게 할 만한 구절들이 많이 있다. 코란도 마찬가지다. 그 가르침을 잘못이해하거나, 근본적으로 그 경전들이 만들어질 때의 시대적 상황, 편집한 사람들의 잘못 등이 후대에 큰 악영향을 끼친 그런 부분들에 대해서는 많은 반성과 성찰이 있어야 할 것이다. 그런 어리석음들이 전 세계적으로 얼마나 많은 전쟁을 일으켰으며, 얼마나 많은 사람들을 불행으로 이끌어 갔는가. 그러나 문자의 틀에 갇히지 않고, 문자라는 방편, 언어라는 방편이 가지고 있는 치명적인 오류들을 올바로 이해함으로써 그 종교의 그 경전의 언어 이전에 담긴 참 진리를 온전하게 이해했던 수많은 성인들, 종교인들은 여전히 그 모든 종교들의 순수성과 진리성의 전통을 이어왔다. 바로 그들은 성경을 문자에 치우치지 않고 이해한 사람들이다. 성경의 수많은 말들이 말이 아니라 다만 이름이 말이었음을 온전하게 알고 있었던 사람들이다. 언어가 가지는, 형상이 가지는 모순과 오류들을 이해한 사람들이다. ‘예수’라는 몸이나 상에 치우치지 않고, ‘성경’이라는 상에 치우치지 않고 이해한 사람들이다.

물론 불교 또한 마찬가지다. 참된 불교의 정신을 이끌어 온 사람들은 ‘불교’라는 틀에 갇힌 사람들이 아니라 그 틀을 뛰어넘은 사람들이다. 불교가 불교가 아님을 바로 보고, 부처의 형색이 형색이 아님을 바로 본 사람들이 바로 그 진리의 정신을 이어오고 있다. 바로 그 정신, 그 진리의 참된 정신을 있는 그대로 내포하고 있는 경전이 바로 ‘금강경’인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불교의 보배요, 불교 정신을 이어 온 요체다. 그리고 지금 우리는 이렇게 금강경이 아니기 때문에 참으로 금강경인 이 금강경을 받아들임 없이 받아들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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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19, 법계통화분
법계를 모두 교화하다


法界通化分 第十九
須菩提 於意云何 若有人 滿三千大千世界七寶 以用布施 是人 以是因緣 得福多不 如是 世尊 此人 以是因緣 得福 甚多 須菩提 若福德 有實 如來不說 得福德多 以福德 無故 如來說 得福德多

“수보리야, 너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만약 어떤 사람이 삼천 대천 세계에 가득 찬 칠보로써 널리 보시한다면 그 사람은 그 인연으로 많은 복을 얻겠느냐?”
“그렇습니다. 세존이시여. 그 사람은 그 인연으로 아주 많은 복을 얻을 것입니다.”
“수보리야, 만약 복덕이 진실로 있는 것이라면 여래가 복덕을 많이 얻는다고 말하지 않을 것이지만, 복덕이 본래 없는 것이므로 여래가 많은 복덕을 얻는다고 말한 것이다.”

법계통화란 법계를 모두 교화한다는 의미이다. 보통 법계를 다 교화하고자 하면 수많은 재물이 있어야 할 것 같고, 법계 즉 삼천대천세계를 가득 채울 수 있는 칠보가 있어야 그것을 널리 보시함으로써 법계의 모든 중생을 교화할 수 있다고 생각하곤 한다. 그것이 중생의 어리석은 생각이다. 그러니 사람들은 중생을 교화하기 위해서는 재물이 있어야 하고 돈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사람들에게 널리 베풀고자 하는 자비의 마음을 내었더라도 고작 할 수 있는 일이라는 것이 명절 때나 되어 불우이웃들에게 돈이나 물질적인 것들을 준비해 베풀어 주는 것 이상을 생각하지 못하곤 한다. 그리고는 그것을 드러내고자 하고, 언론에도 공개해야 하고, 자신의 선행을 자랑하고자 애를 쓴다. 물론 그러한 것 또한 유위의 복이 될 수는 있겠지만 그것이 진정 법계를 교화할 수 있는 무위의 공덕이 될 수는 없는 것이다. 똑같이 칠보로써 보시를 하더라도 중요한 것은 상을 여읜 무위의 보시가 될 수 있는가에 있다. 아상을 가지고 보시를 하면 삼천대천세계를 가득 채워 보시하더라도 유위복은 될 수 있을 지언정 무위의 복은 되지 못하지만, 상을 여읜 무위의 보시를 한다면 쌀 한 톨을 가지고도 법계를 전부 교화하고도 남을 수 있을 것이다. 이 장에서는 참으로 법계를 모두 교화하고자 한다면 무위의 보시, 상을 여읜 무위의 행이 되어야 함을 나타내고 있다.

“수보리야, 너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만약 어떤 사람이 삼천 대천 세계에 가득 찬 칠보로써 널리 보시한다면 그 사람은 그 인연으로 많은 복을 얻겠느냐?”
“그렇습니다. 세존이시여. 그 사람은 그 인연으로 아주 많은 복을 얻을 것입니다.”
“수보리야, 만약 복덕이 진실로 있는 것이라면 여래가 복덕을 많이 얻는다고 말하지 않을 것이지만, 복덕이 본래 없는 것이므로 여래가 많은 복덕을 얻는다고 말한 것이다.”


삼천대천세계에 가득 찬 칠보로써 널리 보시한다면 그 사람은 그 인연으로 많은 복을 얻겠는가 하는 부처님의 질문에 수보리는 그렇다고 답변한다. 사람들이 자신이 번 월급을 가지고도 남을 위해 다만 얼마씩이라도 보시를 한다면 그것이 큰 공덕이 될 것인데, 하물며 삼천대천세계에 가득 찬 칠보로써 널리 보시한다면 그 공덕은 얼마나 많을 것인가.

얼마 전에 한 거사님께서 당신은 매월 월급을 받아서 매달 정기적으로 어려운 이웃을 돕는데 쓰신다고 하면서 그렇게 매달 보시를 하기 전보다 이렇게 매달 보시를 하고 나니 그렇게 뿌듯하고 기쁘다고 하셨다. 액수가 중요한 것은 아니다. 그렇듯 보시하는 마음 그 자체가 순수하다. 보통 사람들은 어떤가. 자신의 재산 늘리기에만 여념이 없지 다른 사람에게 보시하려는 마음을 낼 수 조차 없을 만큼 자신의 이기에 혈안이 되어 있는 사람이 많이 있다. 그런 사람에 비한다면 이 얼마나 밝은 일이고 복덕이 되는 일인가. 아마도 그 사람은 큰 복덕을 받을 것이다. 베푼 것은 분명히 법계에 저축이 되었다가 내게로 되돌아 오기 때문이다. 이렇듯 작게나마 매달 베풀면서도 우리 마음은 얼마나 부자가 된 듯 기쁜가. 풍요로운가.

그러나 베푼 것에 대해 내 입으로 떠벌리고 다니면서 상을 낸다면 그 때는 그 공덕은 입을 벌려 얘기하면 할수록 사라지고 만다. 완전한 무위로써, 그 어떤 상도 내지 않는 무주상으로 보시를 했다면 그 작은 돈이 법계에 고스란히 저축도 되고 이자까지 저축이 될 것이지만 입을 벌려 이야기 함으로써 벌써 그 복은 유위로 전락하고 만다. 어쨌든 그렇게라도 보시하지 않은 것 보다는 보시하는 것이 큰 복덕이 된다. 그러니 다만 얼마씩 보시를 하는것도 이렇게 큰 복덕이 될진대 삼천대천세계를 가득 칠보로써 보시한다면 이 얼마나 큰 복덕이 되겠는가. 삼천대천세계의 모든 가난한 사람들, 모든 굶주린 사람들을 다 먹여 살리고도 남을 칠보로써 보시를 한다면 이 어찌 작은 복덕이라 할 수 있겠는가. 지금 세계에서는 이 순간에도 하루에 3만 5천 명의 어린 아이들이 기아로 죽어간다고 한다. 수많은 사람들이 전쟁으로 질병으로 기아로 죽어가고 있으며, 죽기 직전에 놓여 있다. 그런데 삼천대천세계 전체를 칠보로써 보시한다면 그 모든 생명을 다 살리고 먹이고도 남을 것이 아닌가. 이 어찌 작은 복덕이라 하겠는가. 수보리는 그 사람은 그 인연으로 매우 많은 복을 얻을 것이라고 답변하고 있다.

부처님의 답변도 그러하다. 그 인연으로 매우 많은 복을 얻을 것이다. 그러나 그 복덕이 진실로 있는 것이라면 부처님은 그렇게 답변하지 않으셨을 것이다. 복덕이란 것이 본래 없기 때문에 부처님은 많은 복덕을 받는다고 말씀하신 것이다. 다시말해 복덕이란 복덕이 아니며 다만 그 이름이 복덕일 따름이란 말이다. 즉 복덕이라는 것은 고정된 실체로써 있는 것이 아니라 다만 인연따라 꿈처럼 환영처럼 신기루처럼 만들어졌다 사라지는 것일 뿐이다. 그러니 꿈속에서야 복덕을 많이 짓고 받는 것이 있겠지만 그것이 다 꿈일 뿐이지 꿈을 깨고 보면 복덕이라는 것도 짓고 받는 다는 것도 모두 텅 빈 것이 아니겠는가.
삼천대천세계에 가득 찬 칠보로써 널리 보시한다면 그 복덕이 얼마나 많은 것인가. 그러나 그 복덕을 진실로 있는 것이라고 여겨 그 복덕에 집착하게 된다면 그것은 참된 복덕이 될 수 없다. 그것은 결코 많은 복덕이라고 말할 수 없다. 복덕이 진실로 있는 것이라고 여겼다면 수보리도 여래도 그 복덕을 많이 얻는다고 말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그 복덕이 본래 없는 것이므로 여래는 많은 복덕을 얻는다고 말한 것이다.

삼천대천세계에 가득 찬 칠보로써 보시했다고 하더라도 거기에 ‘내가 보시했다’는 상이 있다면, 그러한 유위의 보시, 유주상의 보시는 결코 많은 복이라고 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복덕이 진실로 있지 않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참으로 많은 복을 얻는다고 할 수 있는 것이다.

‘내가 많은 복을 지었다’라는 상에 빠져 있거나, ‘내가 삼천대천세계를 칠보로 가득 채웠다’는 상에 빠져 있다면 그것은 결코 많은 복이 아니다. 유위의 복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삼천대천세계를 칠보로 가득 채운 그 복이 무위가 되었을 때는 그야말로 법계를 다 먹이고도 남으며, 법계를 다 교화하고도 남는 복이 된다. 그랬을 때 그 복은 한량이 없다. 매우 많은 복을 얻을 수 있다. 그러나 그렇듯 많은 복을 얻을 수 있다고 한 이유는 그 복이 진실로 없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그 복이 함이 없는 복이며, 무위의 복이고, 그 양을 셀 수 없기 때문에 많다고 할 수 있는 것이다.

정말로 많은 것은 ‘얼마만큼’ 많다고 표현될 수 없다. 얼마만큼 많다고 했을 때는 벌써 그것보다 더 많은 것이 가정되어 있는 상태다. 그러니 정말 많은 것은 표현될 수 없다. 정말 많은 것은 어떤 틀이 없다. 어떤 틀을 정해 놓는 것은 유위요, 틀 없이 자유로운 것이 무위다. 그래서 정말 많은 복덕이 되기 위해서는 복덕이 본래 없는 것이라야 한다. 어떤 틀도 없는 것이라야 한다.

텅 빈 허공은 허공이라고 이름 붙였을 뿐이지 허공의 실체는 찾아볼 수 없다. 허공은 허공이 아니기 때문에 허공인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허공을 크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허공이라는 것이 실제 있는 것이라면, 그래서 어떤 실체를 찾아볼 수 있고 눈으로 그 크기나 모양을 확인할 수 있다면 그것을 크다고 말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허공은 실로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허공을 크다고 말할 수 있는 것과 같다.

복덕도 이와 같다. 그래서 부처님께서도 실로 복덕이 있지 않기 때문에 많은 복덕을 얻는다고 말씀하신 것이다. 복덕이라는 것을 우리 눈으로 볼 수 있고, 많은지 적은지를 판가름해 볼 수 있다면 그것을 가지고 많다고 할 수는 없을 것이다. 만약 복덕이 진실로 있는 것이라면 여래가 복덕을 많이 얻는다고 말하지 않았을 것이지만, 복덕이 본래 없는 것이므로 여래가 많은 복덕을 얻는다고 말한 것이다.

즉 유위의 복덕은, 아상에 갇힌 복덕은, 아무리 많다 해도 그것은 유위로써 많을 뿐이다. 즉 더 큰 복덕 아래에서는 작은 복덕일 뿐이다. 그러나 무위의 복덕, 아상을 완전히 소멸한 복덕은 그 크기를 젤 수 없기 때문에 참으로 클 수 있는 것이다. 유위의 복덕으로는 삼천대천세계를 칠보로 가득 채워 보시하더라도 많고 적음을 나누어 놓은 가운데 그 중 많은 쪽을 택하는 그런 상대적인 많음이지만, 무위의 복덕은 많고 적음도 사라진, 복덕이 있고 없음도 사라진 절대적인 많음일 수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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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12, 존중정교분
바른 법을 존중하라


尊重正敎分 第十二
復次 須菩提 隨說是經 乃至四句偈等 當知此處 一切世間天人阿修羅 皆應供養 如佛塔廟 何況有人 盡能受持讀誦 須菩提 當知是人 成就最上第一希有之法 若是經典 所在之處 則爲有佛 若尊重弟子


“또한 수보리야, 이 경이나 내지 이 경의 사구게 하나만이라도 설한다면 마땅히 알라. 이 곳은 일체세간의 천인과 사람과 아수라가 마땅히 공양하기를 부처님의 탑묘와 같이 할 것이다. 하물며 사람이 이 경을 받아 지니고 독송함에 있어서이겠는가.
수보리야, 마땅히 알라. 그러한 사람은 최상의 제일가는 희유한 진리를 성취한 것이다. 이 경전이 있는 곳은 부처님이나 존경받는 부처님의 제자가 있는 것과 같으니라.”


  이 분 존중정교분에서는 금강경이라는 이 바른 법이 그대로 부처님이나 부처님의 제자와 다를 것이 없기 때문에 이 경전을 부처님과 바른 제자를 존중함과 똑같이 존중하라는 뜻을 담고 있다. 이것이 삼보(三寶)이며, 삼귀의(三歸依)의 정신이다. 부처님과 부처님의 가르침과 부처님의 제자, 불법승(佛法僧) 이 세 가지는 서로 다르지 않다. 부처님을 존중하듯 부처님의 가르침과 부처님의 가르침을 훌륭히 수지 독송하여 희유한 진리를 성취한 제자들 또한 마땅히 똑같은 무게로 존중받아 마땅하다.

이 분에서는 이와 같이 이 경전의 바른 가르침이야말로 부처님과 존경받는 제자가 있는 것과 같음을 밝히면서, 이 경전을 수지 독송하게 되면 천인과 사람 아수라가 마땅히 부처님 탑묘와 같이 존중할 것이며, 결국 최상의 제일가는 희유한 진리를 성취할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다.


“또한 수보리야, 이 경이나 내지 이 경의 사구게 하나만이라도 설한다면 마땅히 알라. 이 곳은 일체세간의 천인과 사람과 아수라가 마땅히 공양하기를 부처님의 탑묘와 같이 할 것이다. 하물며 사람이 이 경을 받아 지니고 독송함에 있어서이겠는가.

요즈음도 그렇지만 오래전부터 금강경 독송의 신행은 계속되어 왔다. 금강경 전체를 독송하거나, 혹은 사구게(四句偈) 하나만이라도 계속 반복하여 독송하는 수행의 방법은 많은 불자들에게 쉽고 친근하며 어렵지 않게 실천할 수 있는 수행방법으로 자리 잡고 있다. 유독 다른 경전에 비해서 금강경 독송을 더 많이 선호하며 외우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 답이 바로 여기에 있다.

부처님께서는 수보리에게 명확하게 금강경 독경이라는 수행법에 대해 말씀해 주고 계신다. 이 경이나 내지 이 경의 사구게 하나만이라도 받아 지니고 독송한다면 일체 세간의 천인과 사람과 아수라가 마땅히 공양하기를 부처님 탑묘처럼 할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금강경 독송의 수행은 바로 이 분에서 이렇게 명확히 제시해 주고 계신 것이다.

탑묘(塔廟)란 부처님의 사리를 모신 탑을 말한다. 부처님께서 열반하시고 많은 중생들은 부처님을 그리워하고 신앙하게 되었다. 그러한 그리움은 탑이라는 신행대상으로 나타나 부처님을 대신하여 탑을 세우고 탑 주위에서 기도하며 수행하는 분위기가 형성되어 갔다. 탑묘는 그대로 부처님을 상징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탑묘에 수많은 사람들이 찾아오면서 공양하고 찬탄하고 찬양하며 불탑을 중심으로 대승불교의 신행활동이 시작되게 되었다.
그런데 이 탑묘를 중심으로 많은 사람들의 공양과 기도행렬이 계속되면서 탑묘는 대승불교의 새로운 구심점이 되었고 이 곳을 중심으로 대승의 보살들이 출현하게 되었다. 그러나 탑묘는 일종의 상징이다. 탑이나 사리가 어찌 부처님일 수 있겠는가. 그것을 부처님과 동일시하고 집착하게 된다면 그것도 하나의 상에 빠지는 일일 뿐이다. 그러나 방편으로 하나의 상징으로써 탑묘를 숭배하고 신앙하게 된 것이다. 부처님을 법신으로써 본다면 탑묘 뿐 아니라 이 세상의 일체 모든 것들이 모두가 부처님의 몸이 될 것이다.

부처님의 계신 곳은 사람 뿐 아니라 온갖 불법을 옹호하는 선신들이 함께 하게 마련이다. 여기에서 천, 인, 아수라는 바로 그 호법선신들을 대변하고 있다. 모든 존재는 육도를 윤회한다. 육도는 다시 지옥, 아귀, 축생이라는 삼악도(三惡道)와 천, 인, 아수라라는 삼선도(三善道)로 나뉜다. 지옥, 아귀, 축생의 중생들은 자신이 지은 전생의 악업을 받느라고 끊임없는 괴로움과 어리석음 속에서 산다. 그러므로 부처님을 공양한다거나 불법을 옹호하거나 기도하고 수행하는 등의 행위를 하지 못한다. 그러나 천, 인, 아수라는 과거세 지은 선한 업의 결과를 받기 때문에 부처님 도량을 옹호하고 공양한다.

그러면 천, 인, 아수라가 불법을 옹호하기 위해 불탑만을 찾을 것인가. 불탑은 부처님에 대한 하나의 상징일 뿐이다. 불탑이 부처님인 것은 그것이 법신이기 때문이지, 사리이거나 탑이기 때문인 것은 아니다. 그 곳이 부처님 가르침이 있는 곳이며, 가르침이 설하는 곳이기 때문에 공양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가르침이 있는 곳은 어디든 그곳이 불탑이다.
그렇기에 이 분에서는 사구게 하나만이라고 설한다면 그곳이 불탑이 되어 일체의 천, 인, 아수라가 마땅히 공양하기를 탑묘와도 같이 한다고 했다. 하물며 이 금강경 전체를 받아지니고 독송하는 공덕은 말할 나위도 없다.

산스크리트 경전의 원문에서는 금강경을 받아지니고 독송한다는 구마라집 역의 ‘수지독송’에 대해 좀 더 세심하게 다음과 같이 표현하고 있다.

“하물며 이 법을 완전히 갖추어, 마음에 새기고, 독송하고, 완전히 이해하며, 상세하게 설명하여 줌에 있어서이겠는가.”

사실 구마라집 역의 금강경에 등장하는 ‘수지독송’이라는 번역은 이러한 표현의 짧은 번역이다. 수지독송의 참된 의미는 이처럼 이 가르침을 완전히 갖추어 마음에 새기고 독송하고 완전히 이해하며 상세하게 남을 위해 설명해 주는 것 까지를 포함하는 의미인 것이다. 그러니 금강경 수지독송의 공덕이 크다고 입으로만 외우고 만다면 그것은 참된 의미의 수지독송이 아니며, 위타인설의 공덕이 크다고 타인에게 경전을 유포하기만 한다면 그 또한 수지독송의 참된 의미는 아닌 것이다. 참된 수지독송이 되려면, 금강경의 가르침을 완전히 갖추어, 마음에 새겨 완전히 이해할 수 있어야 하고, 그렇게 완전히 이해된 금강경을 끊임없이 독송함으로써 그 의미를 더욱 깊이 새길 수 있어야 한다. 그렇게 되었을 때 비로소 남에게 상세하게 설명하여 줄 수 있는 것이다.

수지독송의 뜻이 이와 같다고 하니 문득 의문이 들 것이다. 금강경 독송의 수행을 하고자 발심한 수행자들이 묻는 질문 중 한 가지는 ‘금강경의 뜻을 잘 모르는데 독송해도 되는가’ 하는 질문이다. 여기 금강경에서 설하고 있는 것은 무작정 독송만 하기 보다는 금강경의 가르침을 온전히 이해하고 새길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을 뜻한다. 그렇다면 과연 금강경의 뜻을 모르는 초심자 입장에서 금강경 독경은 아무 공덕도 없는 것이며, 할 필요도 없는 것인가? 그렇지 않다.

금강경 독경은 두 가지 수행 방편으로 이해될 수 있다. 첫 번째는 금강경이라는 방편을 통해서 모든 불교 수행의 핵심인 지관(止觀), 정혜(定慧)에 이르는 것이다. 모든 수행의 핵심은 마음을 비우고 관하는 것이다. ‘지(止)’의 수행은 마음을 멈춘다는 것으로, 탐진치 삼독이며, 번뇌, 욕심, 집착, 상념 등 끊임없이 계속되는 마음의 번잡함들을 다 멈추고 그쳐 말끔하게 비우는 것이며, ‘관(觀)’의 수행은 그렇게 멈춰진 고요한 마음을 있는 그대로 알아차리고 관찰하는 것이다. ‘멈추고 관한다’ ‘비우고 알아차린다’는 이 두 가지 수행이야말로 불교의 핵심 중에 핵심 수행법인 것이다. 성성적적(惺惺寂寂)이란 표현도 관수행을 통해 ‘성성’의 지혜에 이르며, 지수행을 통해 ‘적적’의 고요함에 이른다는 뜻이다. 모든 수행의 방편, 즉, 이를테면 염불, 참선, 간경, 주력, 간화선, 절, 사경 등 이 모든 수행이 지관에 이르기 위한 방편인 것이다. 마음을 비워라, 멈춰라 해도 잘 비워지지 않는다고 하고, 그 마음을 관하라, 깨어있으라 해도 잘 관해지지 않는다고 하니 ‘관세음 보살’ 염불이 되었든, ‘금강경’ 독경이 되었든, ‘옴 마니 반메홈’ 진언이 되었든, 절이 되었든, ‘화두’가 되었든 그 한 가지를 지관수행의 방편 삼아 붙잡고 정진해 나아가라는 것이다. 즉 잡념과 욕심과 번뇌를 다 버리기 힘들다고 하니 ‘금강경’이든, ‘관세음보살’이든, ‘화두’든 그 한 가지에 집중하고 관함으로써 다른 일체의 모든 잡념을 한꺼번에 끊고 깨어있을 수 있다는 뜻이다. 그래서 금강경 독경을 통해 얻을 수 있는 첫 번째의 수행은 바로 지관, 정혜, 적적성성의 깨달음인 것이다. 이러한 지관의 수행을 위한 방편으로 금강경을 독경한다면 금강경은 그야말로 방편일 뿐이다. 금강경의 뜻을 굳이 모른다고 하더라도 금강경을 독경하면서 마음을 금강경에 집중함으로써 마음을 비우고 독경하는 순간 순간 올라오는 잡념 등을 관찰해 나갈 수 있다면 그 또한 훌륭한 수행의 길이 되는 것이다. 이처럼 금강경 수행의 첫 번째 공덕은 독경수행을 통해 지관의 수행을 닦아 깨달음에 이르는 것이다.

반면에 두 번째의 공덕은 금강경이라는 부처님의 지혜가 담긴 가르침을 공부하고 완전히 갖추어 이해함으로써 얻을 수 있는 경전공부의 공덕이다. 이 두 번째의 공부에 있어서는 금강경의 온전한 이해가 반드시 필요한 것이다. 불교에서는 신해행증(信解行證)의 네 가지 단계로써 깨달음에 이른다고 보는데, 그 첫째는 굳은 믿음[信]을 바탕으로 두 번째 부처님의 가르침을 이해[解]하고, 세 번째로 이해한 가르침을 삶 속에서 실천하고 행[行]함으로써 네 번째로 결국 깨달음을 증득[證]할 수 있다고 본 것이다. 이 네 가지 신행의 단계, 경전 공부의 단계에서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해’ 즉, 바른 이해에 있다. 바른 사유를 통해 바로 이해해야지만 바로 실천할 수 있고 바로 깨달아 알 수 있기 때문이다.

부처님께서 열반하시기 직전 ‘자등명 법등명(自燈明法燈明)’ 하라고 하셨던 가르침을 보면 더욱 분명해진다. 자등명은 자신 스스로를 법의 등불로 삼아 자기 자신의 마음을 비우고 마음을 관찰함으로써 자기 안에서 깨달음을 얻으란 의미로 자력의 지관 수행을 통해 스스로 깨달음을 얻을 수 있다는 전자의 의미고, 법등명은 그렇게 스스로 자기 자신을 바로 비우고 봄으로써 법을 깨닫기 어렵기 때문에 부처님께서 진리의 가르침이 담긴 경전을 통해 깨달음을 얻을 수 있다는 후자의 의미를 담고 있다.

이처럼 금강경 수행은 두 가지로 나누어 볼 수 있지만, 이 두 가지가 서로 다른 것이라 여겨 따로 따로 생각해서는 안 된다. 즉, 금강경 독경 수행을 하면서도 금강경 공부를 통해 바른 이해와 실천이 함께해야 하고, 금강경 공부를 통해 이해와 실천을 함과 동시에 금강경 독경 수행을 통한 지관의 실천도 뒤따라야 하는 것이다.

그러니 처음 공부하는 초심자가 금강경의 뜻을 모른다고 독경수행은 하지 않겠다거나, 금강경 뜻을 다 공부한 뒤에 독경 수행을 하겠다거나 하는 것은 잘못된 생각이다. 또한 금강경 독경 수행을 통해 마음을 비우고 관하면 되는 것이지 금강경을 꼭 해석하고 이해할 필요가 있는 것이냐고 한다면 그 또한 잘못된 생각이다. 바른 수행자라면 금강경 독경을 통해 지관을 닦고, 금강경 해석과 공부를 통해 바른 이해와 실천을 함께 해 나가야 할 것이다. 불가에서 스님들이 처음 출가해 사미계를 받고 나면 비구계를 받기 전까지 5년 여 기간 동안 경전공부를 하는 강원이나, 지관의 참선공부를 하는 선원에서 공부를 필히 마쳐야 하는 것 또한 이 두 가지 수행이 그만큼 수레의 두 바퀴처럼 중요하기 때문인 것이다.


수보리야, 마땅히 알라. 그러한 사람은 최상의 제일가는 희유한 진리를 성취한 것이다. 이 경전이 있는 곳은 부처님이나 존경받는 부처님의 제자가 있는 것과 같으니라.”

그렇게 금강경을 완전히 갖추어 마음에 새기고 독송하고 완전히 이해하며 상세하게 남을 위해 설명해 준다면 그 사람은 최상의 제일가는 희유한 진리를 성취한 것이다. 단순히 사구게 하나만이라도 설한다면 그곳이 일체 세간의 천인, 아수라가 부처님 탑묘처럼 공양할 것인데, 하물며 이와 같이 금강경을 완전히 갖추어 마음에 새기고 독송하고 완전히 이해하며 상세하게 남을 위해 설명해 준다면 그 사람은 최상의 제일가는 희유한 진리를 성취한 것이다. 이러한 가르침이 있는 곳은 그대로 부처님이나 존경받는 부처님의 제자가 있는 것과 같다.

그러니 어떠한가. 가르침이 있는 곳, 그 가르침을 수지독송하는 이가 있는 곳, 그곳이 바로 부처님이 계신 곳이며, 부처님의 존중받는 제자들이 있는 곳과 다름이 없다. 조금 확대 해석한다면 금강경이 있는 곳이 그대로 법당이며, 금강경을 수지독송한다면 그 사람이야말로 부처님, 또 부처님의 존경받는 제자들과 다르지 않은 것이다.
금강경과 부처님, 부처님의 제자는 둘이 아니기 때문이다. 부처님과 부처님의 가르침, 그리고 부처님의 제자 이 셋은 서로 다르지 않다. 불법승 삼보는 하나다. 부처님의 가르침이 있는 곳이 그대로 부처님이 계신 곳이며 존경받는 제자가 있는 곳이다.

그러니 어떠한가. 꼭 절에 가야지만 부처님이 계신 것이 아니다. 집을 도량으로 만들고, 회사를 도량으로 만들며, 내 몸을 도량으로 만들려면 늘 금강경을 수지독송하면 된다. 부처님의 가르침[法]이 있는 곳은 언제나 부처님[佛]이 함께 하시며, 부처님의 존경받는 제자[僧]들이 함께하는 것과 다름이 없기 때문이다. 사실 승보(僧寶)라는 것이 스님들에 한정된 개념은 아니다. 불법승 삼보 가운데 승보는 부처님과 부처님의 가르침이라는 두 가지 보배를 바로 믿고 이해하며 실천하며 살아가는 바른 수행자를 말하는 것이다. 이러한 수행자에게는 승속의 제한이 없다. 깨달음에 어찌 승속이 별도로 존재할 수 있겠는가. 불교는 일체의 나눔과 차별, 분별을 모두 해체시켜 완전한 무차별로써 평등에 이르는 가르침이다. 사부대중이라는 것도 비구(比丘), 비구니(比丘尼), 우바새(優婆塞), 우바이(優婆夷)로 청정승가란 남녀스님과 남녀신도 사부대중을 아우르는 말인 것이다. 그러니 부처님 가르침을 바로 믿고 신행하며 실천하는 불자라면 그 사람이 바로 승보인 것이다. 결국 금강경을 수지독송하는 이가 바로 수행자요 승보이며 승보는 불보와 법보와 다르지 않은 것이니, 내 안에 불법승 삼보가 모두 구족되어 있는 것이다.

용성스님께서는 이를 동체삼보(同體三寶)라 하셨다. 즉 ‘자성연각즉불보(自性緣覺卽佛寶)요, 자성적멸즉법보(自性寂滅卽法寶)며, 자성청정즉승보(自性淸淨卽僧寶)’라고 하여 ‘내 마음을 깨달으면 부처님이요, 내 마음이 고요하면 법이며, 내 마음이 청정하면 수행자’라고 말씀하고 계신다. 내 마음 안에 불법승 삼보가 모두 구족되어 있다는 뜻이다. 그러니 ‘청정’한 마음으로 금강경 수지독송을 통해 ‘고요’한 마음에 이르르면 결국 ‘깨달음’을 얻게 되는 것이다.  

금강경을 수지독송하는 공덕은 이와 같이 한량이 없다. 그저 사구게 하나만을 설하기만 하더라도 그 공덕은 한량이 없는데, 스스로 이해하고 독송하며 남을 위해 설해주는 공덕은 말할 나위도 없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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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강경과 마음공부
카테고리 종교
지은이 법상 (무한, 2007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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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11, 무위복승분
무위의 복은 수승하다


無爲福勝分 第十一
須菩提 如恒河中所有沙數 如是沙等恒河 於意云何 是諸恒河沙 寧爲多不 須菩提言 甚多 世尊 但諸恒河 尙多無數 何況其沙 須菩提 我今 實言 告汝 若有善男子 善女人 以七寶 滿爾所恒河沙數 三千大千世界 以用布施 得福 多不 須菩提言 甚多 世尊 佛告 須菩提 若善男子 善女人 於此經中 乃至 受持 四句偈等 爲他人說 而此福德 勝前福德


“수보리야, 항하에 있는 모래 수만큼 많은 항하가 있다면 네 생각은 어떠하냐? 그 모든 항하의 모래가 얼마나 많겠느냐?”
수보리가 사뢰었다.
“매우 많습니다. 세존이시여, 모든 항하의 수만 하여도 셀 수 없이 많겠거늘 하물며 그 모래이겠습니까”
“수보리야, 내가 이제 진실한 말로 너에게 이르노니, 만약 어떤 선남자 선녀인이 칠보로써 저 항하강 모래 수만큼 많은 삼천대천세계를 가득 채워서 보시한다면 그가 얻는 복덕이 많겠느냐?”
수보리가 사뢰었다.
“매우 많습니다. 세존이시여,”
부처님께서 수보리에게 말씀하셨다.
“만약 선남자 선녀인이 이 경 가운데서 사구게 하나만이라도 받아 지녀 남을 위해 설해 준다면 이 복덕이 앞에서 말한 복덕보다 더 뛰어나리라.”


무위복승분에서는 함이 없는 무위의 복이 유위의 복덕에 비해 얼마나 뛰어난가를 설명하고 있다. 이 금강경의 핵심 가르침 하나만이라도 올바로 받아 지니도록 남을 위해 설해 준다면 그 무위의 복덕은 그 어떤 세속적이거나 물질적인 복덕보다 더욱 뛰어남을 설하고 있다.

이 말의 뜻을 잘 알 수 있어야 한다. 무조건 금강경의 사구게 가운데 하나를 남에게 잘 설명해 주는 것만으로 무위의 복덕이라고 할 수는 없다. 그것만을 가지고 무위의 복이 수승하다고 할 수는 없다. 그렇다면 경전 사구게를 수도 없이 많은 이들에게 알려줬다면 그것만으로 완전한 무위복을 성취한 것인가? 그렇지는 않다. 중요한 것은 내 스스로 받아 지니고 그것을 설해줄 수 있어야 한다는 점이다. 스스로 받아 지닌다는 것, 수지한다는 것은 스스로 그 가르침을 실천하고 깨달아 알아야 한다는 것을 말한다. 스스로 수지하지 못하고 다만 남을 위해 알려주기만 한다고 그것이 그대로 무위의 복이 될 리는 없다.

그러면 금강경의 가르침의 핵심은 무엇인가. 사구게의 핵심은 무엇인가. 그것은 아상을 버려야 한다는 것이며, 그 어떤 집착도 가져선 안 된다는 말이다. 일체 모든 상이 다 허망한 것임을 알아 어디에도 머무는 바 없이 마음을 내야 한다는 가르침이다. 이러한 금강경의 가르침을 수지한다는 것은 스스로 머무름이 없어야 한다는 말이다. 금강경의 핵심 가르침을 수지한 사람은 어디에도 머물지 않고, 집착하지 않으며, 아상이 타파되어 있다. 이러한 금강경의 뜻을 수지한 사람이 어찌 남을 위해 설해 주고도 스스로 설했다는 상에 갇혀 있을 수 있겠는가. 어찌 스스로 남에게 설해 주었다는데 머무는 마음이 일어날 수 있겠는가. 이렇듯 금강경 사구게의 뜻을 스스로 잘 수지하여 일체의 상이 타파되고, 머무는 바 없이 마음을 낼 수 있는 사람은 금강경의 게송을 남에게 설해주고도 설해주었다는 상이 남지 않는다. 그렇기에 사구게의 게송을 남을 위해 설해 주는 행위 자체가 무위의 복이 될 수 있는 것이다.

그렇지 않고 스스로 수지하지도 못한 채, 스스로 온전히 깨달아 알지도 못한 채, 아무리 많은 경전이나 사구게를 남을 위해 연설해 준다고 한들 그것이 유위의 복이 되기는 할 지언정 무위의 수승한 복이 되지는 못한다. 그러나 여기에서 금강경의 사구게 하나만이라도 스스로 수지하여 남을 위해 연설해 주었을 때는 무위의 수승한 복덕이 된다고 말하는 것은, 금강경의 사구게 자체가 무위의 행을 설하는 것이기 때문에 무위의 머무는 바 없는 행을 찬탄하는 것이라 하겠다.


“수보리야, 항하에 있는 모래 수만큼 많은 항하가 있다면 네 생각은 어떠하냐? 그 모든 항하의 모래가 얼마나 많겠느냐?”
수보리가 사뢰었다.
“매우 많습니다. 세존이시여, 모든 항하의 수만 하여도 셀 수 없이 많겠거늘 하물며 그 모래이겠습니까”
“수보리야, 내가 이제 진실한 말로 너에게 이르노니, 만약 어떤 선남자 선녀인이 칠보로써 저 항하강 모래 수만큼 많은 삼천대천세계를 가득 채워서 보시한다면 그가 얻는 복덕이 많겠느냐?”
수보리가 사뢰었다.
“매우 많습니다. 세존이시여,”
부처님께서 수보리에게 말씀하셨다.
“만약 선남자 선녀인이 이 경 가운데서 사구게 하나만이라도 받아 지녀 남을 위해 설해 준다면 이 복덕이 앞에서 말한 복덕보다 더 뛰어나리라.”


이 분에서는 금강경의 사구게를 수지하고 위타인설하는 공덕은 일체의 물질적인 유위의 복덕에 비해 더욱 뛰어난 무위의 복이 된다고 말함으로써 법보시의 공덕이 얼마나 수승한 것인가를 밝히고 있다.

여기에서 항하강은 인도의 갠지스강을 말한다. 항하사란 항하의 모래란 뜻이지만 셀 수 없이 많은 수량을 나타내기 위한 방편으로 사용되고 있다. 갠지스강의 모래의 수가 얼마나 셀 수 없이 많은가를 설하면서 그렇게 많은 항하강의 모래 수만큼 삼천대천세계를 칠보로써 가득채워 보시하는 무량한 물질적 보시보다도 금강경의 가르침을 스스로 수지하고 위타인설하는 복덕이 더욱 뛰어남을 비유를 통해 들어 보이고 계신다.

항하강의 모래 수만큼 셀 수 없이 많은 삼천대천세계를 칠보로써 가득 채운다면 그것이 얼마나 상상할 수 없을 만큼 많은 양의 물질적 보시가 될 것인가. 도저히 우리들의 상상으로는 헤아릴 수 없을 정도의 양이며 복이 될 것이다. 이렇게 많은 양으로 보시한다면 이는 분명 헤아릴 수 없을 정도의 복이 될 것이며, 그 복덕의 결과는 엄청난 양으로써 우리에게 보상을 가져다 줄 것이다. 이것은 엄연한 인과의 법칙이다.

천원을 보시하면 천원 만큼의 복이 되며, 만원을 보시하면 만원 만큼의 복이 된다. 백만원, 천만원을 보시하면 분명 그만큼의 복이 쌓여 언젠가는 그 결과로써 복된 삶을 보장받게 된다. 그러나 이러한 복은 유위의 복이다. 스스로 백만원을 보시하고 ‘백만원의 보시’란 상이 남게 된다면 그것은 유위의 복이다. 유위의 복은 계산이 철저하다. 백만원의 보시를 했다면 백만원의 결과를 받을 것이다. 그러나 이것이 무위의 행이 되었을 때 그 복덕은 가히 헤아릴 수 없는 결과를 가져온다. 행한 보시는 같은 백만원이지만 그 복덕의 결과는 무위인가 유위인가에 따라 천차만별로 달라진다.

이 분에서 부처님께서 말씀하시고자 하는 바를 잘 이해할 수 있어야 한다. 그 뜻은 두 가지로 나누어 이해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첫째는 무위와 유위의 복에 대한 이해이며, 둘째는 물질적인 복과 법보시의 차이에 대한 이해이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무위와 유위복에 대한 이해이다. 그것을 이 분에서는 무위를 법보시로, 유위를 물질적인 칠보의 보시로 대변시켜 놓았지만 그것이 다는 아니다. 왜 그러한가. 물질적인 보시를 하면서도 무위로써 행할 수 있고, 금강경 사구게를 들려주는 법보시를 하면서도 유위로써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중요한 것은 무엇을 보시하느냐가 아니라 무위로써 했느냐 하는 점이다.

바로 그 점을 잘 새길 수 있어야 한다. 여기에서 법보시 즉 금강경 사구게의 보시를 내세운 이유는 금강경 사구에 안에 담긴 의미가 바로 ‘무위’를 담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금강경 사구게를 남에게 설하는 것만 중요한 것이 아니라, 내 스스로 수지하여 무위의 참뜻을 이해하는 것이 더욱 중요하다고 말한 것이다.

다시말해 이 경의 깊은 속뜻을 바로 이해할 수 있어야지 겉으로만 이해해서는 그 참 뜻을 놓치기 쉽다는 말이다. 얼핏 들어서는 물질적인 수많은 보시보다 법보시가 더욱 중요하다는 말처럼 들린다. 그래서 사람들은 물질적 보시보다 금강경을 들려주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느낀다. 그러다보니 역사적으로 수많은 사람들에 의해 금강경이 배포되었다. 수많은 양의 금강경이 인쇄되고 사경되었으며 설법되어져 내려왔다. 물론 그 자체가 잘못되었다는 말은 아니다. 금강경의 배포와 위타인설은 물론 큰 복이 된다. 그러나 그것이 유위의 복에 멈춰서서는 안 된다. 단순히 금강경을 많이 인쇄하여 배포하고 많은 이들에게 읽히도록 하는 일은 유위의 법보시 밖에 되지 않는다. 그러나 금강경의 한 구절만이라도 스스로 밝게 이해하여 함이 없이 위타인설할 수 있다면 그 공덕이 앞의 공덕보다 더욱 뛰어나다. 금강경을 대량으로 인쇄하여 수많은 사람에게 나누어 주는 공덕보다 스스로 올바로 이해하고 수지하여 단 한 사람에게 그 뜻을 나누고 이해시키는 것이 더욱 큰 복덕이 된다는 말이다.

또한 이렇게 무위로써 금강경을 수지하고 위타인설할 수 있는 사람이라면 물질적인 보시를 하더라도 그대로 무위의 뛰어난 복덕이 될 수 있다. 그는 칠보가 아닌 그 어떤 것으로써 보시를 행하더라도 무위의 뛰어난 복덕을 성취한다. 문제는 물질적인 보시냐, 법보시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다. 칠보로써 삼천대천세계를 채워 보시하느냐, 게송 하나를 남에게 알려주느냐가 아니다. 그것이 무위가 될 수 있는가 하는 점이다. 그것이 무위가 될 수 있도록 이끌어 주는 것이 바로 ‘금강경의 게송’이다. 그렇기에 금강경의 게송 하나라도 일러주는 것이 뛰어난 복덕이 된다는 말이다.

사실 금강경을 올바로 이해하고 깨달은 자는 따로이 보시를 할 것도 없다. 금강경의 뜻을 스스로 수지하여 무위의 행을 할 수 있는 사람이라면 그의 존재 자체가 무위의 뛰어난 보시가 된다. 그에게는 보시라는 말 자체도 성립되지 않는다. 보시라는 말은 누군가가 누군가에게 무엇을 주는 행위가 아닌가. 그러나 참된 보시는 ‘누가’도 없고, ‘누구에게’도 없으며, ‘무엇’도 없는 것이다. 무위의 보시는 바로 이러한 삼륜이 청정한 보시이며, 무주상의 보시이다. 어디에도 머무름이 없는 보시이다. 그러나 이러한 보시에는 보시하는 ‘주체’도 사라지고, 보시를 받는 ‘대상’도 사라지며, 보시할 ‘것’도 사라진다. 이 세 가지가 사라진다면 ‘보시’라는 말 또한 필요 없는 군더더기가 될 뿐이다. 그는 다만 존재할 뿐이다. 그의 존재 자체가 그대로 보시를 대변하고 있으며, 지혜를 대변하고 있고, 깨달음을 대변하고 있다. 그의 존재 자체가 머무름이 없는 무위의 함이 없는 행위이다. 그것이 참된 보시이다.

참된 보시는 이와 같이 바른 지혜가 바탕이 된다. 지혜가 구족되지 않은 보시는 무위의 보시가 아니고, 무위의 복덕이 아니다. 보시가 그대로 지혜이며, 지혜가 그대로 보시이다. 그렇다면 지혜란 무엇인가. 지혜란 금강경의 가르침에 대한 온전한 이해이다. 즉 응무소주 이생기심의 지혜이며, 범소유상 개시허망의 지혜이고, 아상 타파에 대한 지혜, 금강경 사구게의 지혜이다. 금강경의 가르침, 금강경의 사구게를 온전히 수지한 이는 그 존재 자체로써 완전한 지혜의 완성이며, 완전한 복덕의 구족이다.
이 분에서는 바로 이 점을 밝히고 있다. 금강경 사구게 하나만을 온전히 수지하여 위타인설할 수 있다면 그것이 그 어떤 유위의 복덕보다 더 수승하다는 점을 밝히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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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6, 정신희유분
바른 믿음은 드물다.

正信希有分 第六
須菩提 白佛言 世尊 頗有衆生 得聞如是言說章句 生實信不 佛告須菩提 莫作是說 如來滅後 後五百歲 有持戒修福者 於此章句 能生信心 以此爲實 當知是人 不於一佛二佛三四五佛 而種善根 已於無量千萬佛所 種諸善根 聞是章句 乃至一念 生淨信者 須菩提 如來 悉知悉見 是諸衆生 得如是無量福德 何以故 是諸衆生 無復我相人相衆生相壽者相 無法相 亦無非法相 何以故 是諸衆生 若心取相 卽爲着我人衆生壽者 若取法相 卽着我人衆生壽者 何以故 若取非法相 卽着我人衆生壽者 是故 不應取法 不應取非法 以是義故 如來常說 汝等比丘 知我說法 如筏喩者 法尙應捨 何況非法

수보리가 부처님께 사뢰었다.
“세존이시여, 중생들이 미래세의 후 오백세에 정법이 쇠퇴한 시기가 되었을 때 이같은 말씀이나 글귀를 듣고 참된 믿음을 일으키기나 하겠습니까?”
부처님께서 수보리에게 말씀하셨다.
“그런 말을 하지 말라. 여래가 멸도한 뒤 후 오백세에도 능히 계를 지키고 복을 닦는 이가 있어서 이같은 글귀에 능히 신심을 내어 이것을 진실하게 여길것이다. 마땅히 알라. 이 사람은 한 부처님이나 두 부처님, 셋 넷 다섯 부처님께만 선근을 심은 것이 아니라, 이미 한량없는 천만 부처님께 수많은 선근을 심어 놓았으므로 이 글귀를 듣고 한 생각에 청정한 믿음을 낼 것이다.
수보리야. 여래는 다 알고 다 보나니, 이 모든 중생들이 이와 같은 한량없는 복덕을 얻을 것이다. 왜냐하면, 이 모든 중생들에게는 아상․인상∙중생상∙수자상이 없으며, 법이라는 상도 없고, 법이 아니라는 상도 없기 때문이다. 또한 상도 없고, 상 아님도 없기 때문이다.
무슨 까닭이겠는가. 이 모든 중생들이 만약 마음에 어떤 상을 취하면 곧 아상․인상∙중생상∙수자상에 집착하는 것이 된다. 왜냐하면, 만약 법의 상을 취하더라도 아상․인상∙중생상∙수자상에 집착하는 것이고, 법이 아니라는 상을 취하더라도 아상․인상∙중생상∙수자상에 집착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마땅히 법에도 집착하지 말고, 법 아닌 것에도 집착하지 말아야 한다. 이러한 뜻에서 여래는 항상 말하기를 ‘너희 비구들은 나의 법문이 뗏목의 비유와 같음을 알라’고 했으니, 법도 오히려 놓아버려야 하거늘 하물며 법 아님에 있어서 이겠는가.”

‘정신희유’란 ‘올바른 믿음은 희유하다’는 뜻으로써, 이 분은 앞에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던 모든 가르침에 대해 말세의 중생들이 바른 믿음을 낼 수 있겠는가 하는 수보리의 의문으로 시작되고 있다.


수보리가 부처님께 사뢰었다.
“세존이시여, 중생들이 미래세의 후 오백세에 정법이 쇠퇴한 시기가 되었을 때 이같은 말씀이나 글귀를 듣고 참된 믿음을 일으키기나 하겠습니까?”


앞의 제5분에서 부처님께서는 ‘범소유상 개시허망 약견제상비상 즉견여래’라는 가르침을 설하셨다. 이 세상에 무릇 모양이 있는 바 모든 것은 다 허망한 것이라고 하면서, 만약 그러한 사실, 즉 상이 상이 아니라는 진실을 바로 보면 곧 여래가 될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사실 이 가르침은 그동안 눈으로 보이고, 귀로 들리며, 코로 냄새 맡아지고, 혀로 맛보아지며, 몸으로 감촉되고, 뜻으로 헤아려 지는 모양 있는 대상들에 얽매여 살아 온 보통의 많은 사람들에게는 너무나도 엄청난 이야기가 아닐 수 없다. 모든 사람들이 나라는 몸뚱이를 비롯한 온갖 모양에 의지해 살아가며, 더 많은 것들을 소유코자 하고, 더 많은 지식들을 쌓고자 하며 살아왔는데, ‘나’라는 것도 허망한 허상일 뿐이고, 내가 소유코자 하는 물질이며, 배우고자 하는 공부며 가치관까지 일체 모든 상이 다 텅 비어 허망한 것이라고 말씀하고 계시는 것이다. 지금까지 살아 온 삶의 방식이 더 많은 상을 짓고, 상을 지은 것을 내 것으로 만들고자 하며, 그것을 향유하고자 하는 등 상에 의지해 살아왔는데, 이제와서 그것이 모두 허망한 것이라고 하면서, 모든 상을 타파하라고 설법을 하시니 일반적으로 본다면 이것은 너무나도 이 세상과 거꾸로 가는 당황스런 가르침인 것이다.

물론 이러한 가르침에 대해서 수보리는 깊은 깨달음을 얻으면서, 깊은 관찰과 사유를 통해 비교적 온전하게 받아들일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수보리에게도 이러한 가르침은 너무나 어렵고 깊은 깨달음이었기에 수보리는 문득 의심이 드는 것이다.
지금 이 자리에 모인 많은 부처님의 제자들이야 근기가 수승하고, 부처님께서 직접 가르침을 내려 주시니 어렵더라도 잘 믿고 의지하여 바른 믿음을 일으킬 수 있었지만, 만약에 정법이 쇠퇴할 미래세인 말세의 중생들이 더구나 부처님도 안 계실 때에 이러한 가르침을 들었을 때 과연 잘 믿고 따르며 실천할 수 있을까 하는 의문이 들었던 것이다. 수보리의 일체 중생을 향한 자비의 마음과 중생구제의 대서원이 잘 나타나 있는 대목이라 하겠다.
여기에서 구마라집의 번역에는 등장하지 않는 ‘미래세의 후 오백세에 정법이 쇠퇴한 시기가 되었을 때’라는 번역을 넣었는데, 이는 산스크리트 원문과 현장 역에서는 나타나는 것으로 이 곳에서는 이 문자이 들어가야 문맥이 더욱 자연스럽고 이해하기 쉽기 때문에 넣어 보았다. 물론 구마라집 번역에도 다음 경문을 보면 미래세의 후 오백세에 대한 언급이 나오고 있다.


부처님께서 수보리에게 말씀하셨다.
“그런 말을 하지 말라. 여래가 멸도한 뒤 후 오백세에도 능히 계를 지키고 복을 닦는 이가 있어서 이같은 글귀에 능히 신심을 내어 이것을 진실하게 여길것이다.


부처님께서는 확고하게 말씀하고 계신다. 여래가 멸도한 뒤 후 오백세가 지나더라도 분명히 계를 지키고 복을 닦는 이가 있어서 이러한 사구게 법문에 능히 신심을 내어 진실하게 여기는 사람이 있다고 말씀하고 계신다.

그러면 잠깐 ‘후 오백세’를 살펴보면, 이는 산스크리트 원문이나 현장역을 비롯한 한문본에서도 명백하게 설명되고 있지는 않으나, 금강경오가해에서 규봉스님께서 해석하신 바를 따라 부처님께서 멸도하신 후 2,500년 뒤를 말하는 것으로 일반적으로 해석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이는 한 부처님의 법이 전파된 뒤부터 1주기를 500년씩으로 하여 총 5주기, 즉 2,500년 동안 법의 수레바퀴가 굴러간다고 하는 설이다.
제1기는 해탈견고(解脫堅固)의 시대로, 부처님의 가르침으로 즉각 깨달음을 얻을 수 있을 만큼 정법이 가장 밝게 서 있는 때를 말하며, 제2기는 선정견고(禪定堅固)의 시대로, 1기 때처럼 즉각 깨달음을 얻는 이는 매우 드물지만 부처님의 가르침에 따라 수행 정진을 열심히 하는 시기다. 제3기는 다문견고(多聞堅固)의 시대로, 부처님께서 남겨주신 말씀인 경전을 읽고 외우며 부지런히 가르침을 배우는 사람들은 많지만 선정을 닦고 참된 수행을 해 나가는 사람은 드물어 부처님의 법력이 많이 감소되는 시기를 말하며, 제4기는 탑사견고(塔寺堅固)의 시대로써, 선정을 닦는 사람은 물론이고 경전을 읽고 외우며 배우려는 사람들조차 줄어드는 시대로 이 때에는 공부나 수행은 없고 오직 사찰과 탑을 세워 복과 공덕을 얻고자 하는 사람만 늘어나는 기복불교의 시대라고 할 수 있다. 제5기는 말기로써 투쟁견고(鬪爭堅固)의 시대로, 불법이 거의 쇠퇴하여 복을 바라며 절을 짓는 등의 불사까지도 사라지고 오히려 절의 재산을 갖고 싸우고 다투며, 불법을 팔아 서로 옳고 그름을 다투며 분열하는 시기다. 여기에서 말한 후 오백세란 이런 다섯가지 시기 가운데 뒤에 있는 오백세, 즉 제5기 말기를 말하는 것이라 볼 수 있다.

또 다른 설로는 정법(正法), 상법(像法), 말법(末法)시대의 3가지 구분법으로, 정법시대는 부처님 멸도 후 500년간으로, 부처님의 가르침대로 잘 수행하여 쉽게 깨달음을 얻을 수 있던 시기이며, 상법시대는 그 다음의 500년간으로, 부처님의 가르침을 잘 수행하지만 깨달음을 얻기 어려운 시기이고, 말법시대는 그 이후의 500년 간의 시대로, 부처님의 가르침은 있으나 수행도 없고 깨달음도 없어 불법이 쇠하는 시기를 말하는데, 이 가운데 말법시대를 후 오백세라고 한다는 설도 있으며, 또 학계에서는 역사적으로 금강경이 나온 시기를 고려했을 때 정법시대가 끝난 뒤의 상법시대가 후 오백세에 가장 적합하다는 설도 있다. 또한 정법, 상법, 말법시대 구분을 이처럼 일괄 500년으로 하지 않고 경전이나 논서 혹은 해석한 스님들에 따라서 500년에서 1,000년까지로 이야기 하는 경우도 있다.

그런데 이 부분은 그다지 중요한 부분이 아니라고 생각된다. 중요한 것은 그 안에 담긴 의미다. 다시 말해 후오백세라는 것은 어떤 한 시점을 지칭하는 것이 아니라, 부처님 가르침이 쇠퇴하여 사람들이 경전공부도 뒤로하고, 수행도 하지 않으며, 나날이 부패와 분열만이 있는, 그래서 많은 이들이 정법을 공부하기가 너무도 어려운 그러한 시대적 상황을 지칭하고 있는 것이라고 보면 된다.
수보리의 질문, 이러한 후 오백세가 되면 정법이 쇠퇴하여 수행하는 사람들이 없어지고 분열이 심해지기 때문에 그 때에도 지금처럼 부처님의 가르침을 듣고 이해하며 실천하여 깨닫는 사람이 있을 것인가 하는 질문에 대해 부처님께서는 단호하게 말씀하고 계신다. 이러한 후 오백세에도 능히 계를 지키고 복을 닦는 이가 있으며, 앞의 사구게인 ‘범소유상 게시허망 약견제상비상 즉견여래’라고 하는 등의 글귀에 능히 신심을 내어 이것을 진실하게 여길 것이라고 말씀하고 계시는 것이다.

계를 지키고 복을 닦으며, 부처님 말씀에 능히 신심을 내어 진실하게 여길 것이란 말은, 불교의 가장 기본적인 수행법인 삼학(三學)에 대해 말씀하고 계신 것이다. 계정혜(戒定慧) 삼학은 모든 수행자들이 실천해야 할 수행의 핵심으로 잘 알려져 있다. 계를 지키고, 최상의 복인 깨달음을 실천하는 선정을 닦고, 부처님의 말씀을 진실하게 깨달아 요달하여 지혜를 이루는 이 세 가지가 삼학의 기본 정신인 것이다. 여기에서도 부처님께서는 계를 지키고(戒) 최상의 복을 닦으며(定) 부처님 말씀에 능히 신심을 내어 진실하게 여김으로써 참된 지혜(慧)를 얻을 수 있을 것이라고 말씀하고 계심으로써 후오백세의 말법시대에도 삼학을 닦는 청정한 수행자가 있을 것임을 말씀하고 계신 것이다.


마땅히 알라. 이 사람은 한 부처님이나 두 부처님, 셋 넷 다섯 부처님께만 선근을 심은 것이 아니라, 이미 한량없는 천만 부처님께 수많은 선근을 심어 놓았으므로 이 글귀를 듣고 한 생각에 청정한 믿음을 낼 것이다.

왜 그럴까. 왜 부처님께서는 멸도 한 지 후 오백세가 되도록 불법이 멸하지 않고 부처님의 가르침을 따라 계정혜를 닦으며 정법을 수행하는 자가 있다고 말씀 하셨을까. 그 답변이 바로 이 구절에서 나온다. 아무리 많은 시간이 흐르더라도 부처님의 가르침은 꾸준히 남아 이 세상을 밝게 비출 것이다. 그 이유는 인연법 때문에 그러한 것이다.
우리가 지은 인연은 언제까지고 남아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부처님[佛]과 지은 인연, 부처님의 가르침[法]을 수행하면서 지은 인연, 또한 부처님의 가르침을 닦는 수많은 선지식[僧]과 지은 인연은 아무리 수많은 세월이 흐르더라도 계속해서 남아 있을 것이다. 선한 인연의 뿌리, 즉 선근을 심되 과거 전생 또 그 전생을 이어오면서 수많은 부처님과 그 인연을 심어 놓았기 때문이란 말이다.

수많은 부처님과 불법인연을 맺어 놓았기 때문에 이렇게 지금까지도 불법을 만나 수행할 수 있고 나아가 깨달음을 얻을 수 있는 것이다. 어느 한 생에 선근을 심었다고 해서 깨달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 수행자들에게 중요한 것은 끊임없이 정진하는 마음으로 선근을 심어 나가는 일이라 할 수 있다. 부처님과의 인연을 잘 가꾸는 일이 무엇보다 중요하다는 말이다. 그러한 부처님과 좋은 인연을 맺음으로써 아무리 험한 말법 시대가 오더라도 정법을 잊지 않고 수행해 나가며 깨달음을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면 어떻게 하면 부처님께 선근을 심어 놓을 수 있겠는가. 물론 부처님께서 출현하신 세상에 태어나 직접적으로 부처님과 인연을 짓고, 법문을 듣고, 가르침을 청함으로써 부처님과의 선근을 맺을 수 있다면 더할 나위 없이 좋을 것이지만, 그렇다고 지금 이 시대라고, 부처님이 계시지 않은 이 시대라고 부처님과의 선근을 맺을 수 없는 것은 아니다.

부처님이란 몸으로써 나투신 화신만을 의미하지는 않기 때문이다. 참된 부처님이란 법신을 의미한다. 법신이란 진리의 몸으로써 이 세상 삼라만상 모든 것들이 그 자체로써 진리이고 부처님의 몸이란 말이다. 이러한 법신을 바로 친견할 수 있어야 한다. 몸으로 나툰 부처님을 친견하는 것은 누구든 할 수 있는 일이지만, 겉모습으로써의 부처님을 친견했다고 하더라도 내 안의 부처님, 또 일체 삼라만상 속에 깃든 부처님을 바로 보지 못한다면 그 사람은 부처님을 본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참된 부처님은 법신이기 때문에, 언제 어디서든 진리를 가까이하려는 마음만 있다면 누구든 친견할 수 있고, 선근을 맺을 수 있는 것이다.

그 말은 이 세상 삼라만상 속에서 진리를 볼 수 있어야 하고, 일체 모든 존재와의 인연을 부처님과 인연 짓듯 해야 한다는 말과 같다. 사실은 우리가 몸과 말과 뜻으로 짓는 일체 모든 업연이 선하고 텅 비어 있을 때 그것이 바로 부처님과 인연을 짓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이 세상의 사람들과 인연을 짓는 것이지만, 그 업을 짓는 주체인 몸과 말과 뜻이 맑고 텅 비어 있을 수 있다면 그것은 진리를 바로 보고 살아가는 것이기 때문에, 단순한 이 세상과의 인연이 아닌 이 세상의 근본 당체인 법신과 인연을 짓는 것이기 때문이다.
부처님을 단순한 모습으로써, 화신으로써만 보면 안 된다. 그렇다면 부처님이 출현하지 않은 세상에 태어난 수많은 중생들의 마음은 얼마나 공허하고 실망감이 크겠는가. 이 금강경의 말씀을 듣고 자신이 부처님과 인연을 짓지 못함을 얼마나 가슴 아파 하겠는가. 지금 금강경에서는 그런 말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화신으로써의 부처님과 많은 인연을 짓고, 선근을 맺어야 한다, 그러니 부처님이 출현하지 않은 세상에 사는 수많은 중생들도 부처님의 출현을 기다려야하고 부처님이 출현하셨을 때 놓치지 말고 좋은 인연을 심으라는 그런 말이 아닌 것이다.

지금 이 자리에서 부처님과 선근을 맺을 수 있기 때문에 이렇게 말하고 있는 것이다. 이 세상 일체 모든 존재가 그대로 부처님이다. 일체 삼라만상을 그대로 부처님으로, 진리로 바로 볼 수 있어야 하고, 그러한 밝은 눈, 정견의 시야를 가질 수 있어야 한다. 그랬을 때 내 이웃과의 인연도 부처님과의 인연이 되고, 나무 한 그루와도 부처님과의 인연이 되며, 대자연과 일체 모든 존재와의 인연이 그대로 부처님과 맺는 선근 공덕이 될 수 있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심지어 불교라는 종교가 없는 나라에서도 부처님과의 선근공덕은 지을 수 있다. 사실 진리를 ‘불교’ 속에 한정짓게 되면 그것은 더 이상 진리가 아니며, 불교가 아니다. ‘불교’ 안에만 진리가 있고, 부처가 있다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잘못된 생각이다. 그저 불교에서는 진리의 가르침을 이름 지어 ‘법’이라고 하였고, 진리를 깨달은 자를 ‘부처님’이라고 이름 지었으며, 그 부처님을 올바로 따르고 수행하는 이를 ‘승’이라고 이름 지었을 뿐이며, 그러한 불법승 삼보를 믿고 수행하는 종교를 ‘불교’라고 이름 지었을 뿐이지, ‘불교’라는 이름 자체에 불교가 있는 것은 아니다. ‘부처님’이라는 그 이름 자체에 부처님이 있는 것은 아니란 말이다.

그렇기 때문에 불교라는 종교가 없는 나라에서도 진리는 있으며, 또한 부처도 있고, 참된 깨달음도 있는 것이다. 그래서 오랜 역사 속의 인물들을 살펴보면 ‘깨닫고 보니 그 내용이 불교였다’는 이야기를 많이 듣게 되는 것이다. 일체 모든 진리는 결국 하나로 통하게 되어 있다. 다만 불가에서는 그것을 편의상 이름지어 ‘불교’라고 한 것 뿐이지, ‘불교’라는데 집착하고 얽매여 그것만이 진리이고 그것만이 우리를 깨닫게 해 준다는 틀에 갇히라는 말은 아니다. 그러한 이야기는 금강경 전면에 계속해서 나타나는 가르침이다.

저 숲 속의 나무 한 그루, 풀 한 포기, 꽃 한 송이며 바람과 구름과 태양 그리고 흐르는 물이 그대로 부처님이다. ‘첩첩 쌓인 푸른 산은 부처님의 도량이요, 맑은 하늘 흰 구름은 부처님의 발자취며, 뭇 생명의 노랫소리 부처님의 설법이고, 대자연의 고요함은 부처님의 마음이니 불심으로 바라보면 온 세상이 불국토요 범부들의 마음에는 불국토가 사바로다’ 하는 말씀은 이 세상 그대로가 부처님이라는 것을 아름답고도 분명하게 표현해 주고 있다. 또한 ‘산하대지현진광(山河大地現眞光)’이라 하여 ‘산하 대지가 그대로 진리의 빛이다, 즉 부처님 생명이다’라고 말하고 있다. 수많은 선지식 스님들은 흘러가는 구름에게 설법을 듣고, 계절따라 변해가는 숲 속에서 진리를 터득하였다. 그것이 바로 부처님과 선근을 맺는 것이다. 대자연은 늘 그렇듯 똑같이 우리 앞에 있지만, 어떤 이에게 그 대자연은 진리의 나툼이며, 부처님 법신의 표현처럼 아름답고 평화로우며 조화로운 천상의 뜰이 될 수 있는 반면에 어리석은 이에게 대자연은 별다른 감응도 주지 못하고, 그저 약육강식의 치열한 전쟁터처럼 느낄 수도 있는 것이다. 그러니 어리석은 이에게 대자연은 업장만 늘리는 곳이지만, 지혜로운 이에게 대자연은 부처님과 선근을 맺는 공덕의 장이 될 수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해 우리의 삶 그 자체가 부처님과 인연을 맺는 선근 공덕의 장이라는 말이다. 따로 부처님이 출현하신 세계에서만, 혹은 절에 가서만, 스님들을 뵙고 법을 들었을 때만, 경전을 볼 때만 부처님과 선근을 맺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삶 속에서 끊임없이 부처님과 인연을 맺고 있음을 확연히 알고 우리의 모든 인연을 부처님과의 인연으로 바꿀 수 있어야 하는 것이다. 내 안에 번뇌를 버리고, 욕심과 탐욕을 버리고, 집착을 비우고, 텅 빈 마음으로, 맑고 청정한 마음으로 세상과 인연을 지을 수 있다면 그것이 바로 부처님과 선근을 맺는 것에 다름 아닌 것이다.
그래서 이렇듯 모든 삶 그 자체를 부처님과의 선근을 맺는 삶으로 산 사람은 이러한 경전의 글귀를 듣고 한 생각에 청정한 믿음을 낼 것이다. 내 안에서 진리를 체득한 사람, 혹은 삶 속에서 진리를 체득한 사람이 문득 경전을 보고 내가 깨달은 세계가 그대로 담겨 있는 것을 확인하고 났을 때 그 때의 환희심과 기쁨은 말로 표현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한 사람은 경전의 글귀 하나만을 듣고도 분명 한 생각에 바로 청정한 믿음을 일으킬 것이다.

또한 수많은 생을 부처님과의 인연을 지어왔고, 경전 공부를 하고, 선지식을 찾아 공부한 사람이라면 이번 생에 태어나서도 그 부처님과 지은 마음공부의 공덕과 선근은 없어지지 않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보다 더욱 쉽고 빠르게 이해하고 청정한 믿음을 일으키게 될 것이다.

수많은 신도님들을 대하다 보면 아무리 부처님 가르침을 쉽게 알려주려 하여도 잘 이해하지 못하고, 바로 믿지 못하는 경우도 있고 반대로 어떤 신도님들은 한 두번만 경전의 가르침을 말씀해 드려도 바로 이해하며 신심을 내는 분들도 있게 마련이다. 이것이 바로 오래도록 부처님과의 선근을 많이 심었는가 그렇지 않았는가의 차이다. 똑같은 설법을 하더라도 곧바로 발심하고 실천 수행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아무리 좋은 설법이라도 어떤 사람에게는 별다른 변화를 주지 못하는 경우도 많다. 이는 바로 선근의 유무에 있다. 선근이 있는 사람은 단 한 번의 설법에, 경전의 단 한 구절에도 발심하여 정진하지만, 선근이 아직 충분하게 맺어지지 못한 사람은 아무리 오래도록 부처님 말씀을 들려주더라도 소 귀에 경 읽기 처럼 아무런 깨달음을 주지 못할 수도 있다. 그렇더라도 그렇게 아무리 부처님 말씀을 들어도 잘 모르겠거나, 설법이 귀에 잘 들어오지도 않고, 수행해야겠다는 대신심이 일어나지 않더라도 꾸준히 법을 듣고 공부하다 보면 어느 순간 선근 공덕이 인연을 만나 빛을 발하는 순간이 찾아 올 수 있다. 대충 대충 법문을 듣고 공부를 했더라도 그것이 나도 모르게 내 안에 소중한 인연으로 자리잡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잘 모르더라도 모르는대로 꾸준히 공부하고, 신심이 나지 않더라도 그런대로 꾸준히 닦아 나가는 것이 잘 하는 것이라고 하는 것이다. 지금 당장은 아닐지라도 그것이 우리 안에 깊은 업식에 저장되어 있다가 어느 순간 결정적인 인연을 만나게 되면 한순간 불꽃이 타올라 뜨거운 신심으로 피어날 지 모를 일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지금 당장에 깨달음을 얻지 못하더라도, 부처님 가르침이 어렵게 느껴지더라도, 수행이나 기도에 힘이 붙지 않더라도, 우리는 끊임없이 부처님과의 선근을 맺는 일에 게을러서는 안 된다. 앞서 말했듯이 욕심을 비우고, 집착과 번뇌를 비우고 텅 빈 시선으로 이 세상을 바라보는 일이 부처님과 선근을 맺는 시작이며, 도량을 찾아 기도를 하고 스님들을 찾아 법을 들으며 경전을 읽고 좌선을 하는 이 모든 일이 또한 부처님과의 선근을 맺는 것이다. 경전 공부를 하면서, 설법을 들으면서도 지금 당장에는 이해하기 어렵고 모르겠더라도 퇴전하는 마음을 일으킬 것이 아니라 ‘이것이 부처님과의 선근을 맺는 것’이라는 믿음으로 끊임없이 공부인연을 맺으면 언젠가는 밝게 깨달아 알게 될 날이 있을 것이다. 그렇게 끊임없이 선근을 맺어 놓는다면 언젠가는 ‘이 글귀를 듣고 한 생각에 청정한 믿음을 낼’ 날이 분명 다가 올 것이다.

다음 경구로 넘어가기 전에 여기서 한 가지 짚고 넘어갔으면 하는 부분이 있는데, 바로 선근(善根)에 대한 의미를 살펴보는 일이다. 과거 수많은 부처님께 선근을 심었다고 해석을 하고 있는데, 여기서 일반적으로 생각하기에는 ‘착한 인연의 뿌리를 심었다’는 정도로 이해하고 있을 것이다. 구마라집과 현장의 번역에서도 똑같이 선근으로 되어 있다 보니 한글로 해석할 때도 악의 반대 개념인 선으로 해석하는 경향이 많이 있다. 즉 과거 수많은 부처님께 착한 인연의 뿌리를 심어 놓았다는 정도로 이해하는 것이다. 물론 이렇게 해도 해석하는데 큰 불편은 없겠지만 조금 더 주의 깊게 생각해 보면 부처님께 착한 법을 심었다는 것이 조금 의아하게 느껴지는 부분도 있다. 과연 어떤 것이 착한 것이고 어떤 것이 악한 것인가 하는 문제다. 진리에 있어서는 선악이 서로 나뉘지 않는다고 했는데 어찌 선근만을 문제 삼고 있는가. 물론 선에 대한 해석을 선악의 차별되는 개념으로 이해하지 않고 선악을 초월하는 절대선, 초월선의 개념으로 이해할 수도 있겠지만 각묵스님이 번역하신 산스크리트 원전 주해에 보면 선근은 단순한 악의 반대로서의 선을 이야기 하는 것이 아니라 ‘지혜로운 주의’로써 이해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조금 더 자세히 살펴보면, 선이란 산스크리트어로 꾸살라인데, 이는 꾸사라는 풀을 자른다는 의미로 이 풀은 억새풀처럼 억세고 날카로워 자를 때 마음을 주의집중하지 않으면 손을 베일 수도 있기 때문에 꾸살라는 의미가 ‘지혜로운 주의’ 혹은 ‘지혜로운 마음 주의집중’ 등으로 이해된다는 내용이다.

즉 선근이란 마음을 기울여 주의 집중하는 수행을 말하는 것이다. 이렇게 번역된다면 한량없는 부처님께 선근을 심었다는 말은 한량없는 부처님과 부처님의 가르침 또 선지식의 가르침에 마음을 기울여 주의집중하는 정념(正念)의 수행, 관(觀)의 수행 인연을 심었다는 말로 이해될 수 있다. 즉 수많은 부처님에게 악한 인연이 아닌 선한 인연을 심었다는 의미가 아니라, 수많은 부처님에게 지혜로운 주의 즉 마음을 주의 집중하여 분별없이 관하는 수행의 인연을 심었다고 이해할 수 있다. 다시 말해 ‘지혜로운 마음집중’이란 팔정도(八正道)의 정념이며, 근본불교 핵심 수행법을 망라한 37조도품(三十七助道品)의 사념처(四念處)에 해당되는 수행법으로 불교의 핵심 중에도 핵심 수행법이라 할 수 있다. 그래서 아함경에서는 ‘지혜로운 마음집중’인 사념처를 닦으면 생노병사에서 벗어나며, 모든 악견을 없애고, 나아가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는다고 했다. 또한 익히 들어 알고 있는 정혜쌍수의 혜, 지관겸수의 관 수행이며, 요즘 남방불교에서 잘 알려진 부처님 당시의 수행법인 ‘위빠싸나’가 바로 이 수행을 말하는 것이다.

이렇게 이해되었을 때 비로소 이 정신희유분의 가르침이 좀 더 선명하게 다가올 것이다. 과거 수많은 부처님과 마음집중의 수행인연을 지었으니 그 수행의 인연으로 인해 여래가 멸한 뒤 후 오백세에도 능히 계를 지키고 복을 닦는 이가 있어서 이같은 글귀, 즉 아상 인상 중생상 수자상을 타파하라는 가르침에 능히 신심을 내어 진실하게 여길 것이라는 의미로 이해할 수 있는 것이다.
이 부분, 선근, 선법에 대한 해석과 의미는 뒤에 23분 정심행선분에서 조금 더 구체적으로 설명하기로 하고 다음 게송을 보자.


수보리야. 여래는 다 알고 다 보나니, 이 모든 중생들이 이와 같은 한량없는 복덕을 얻을 것이다.

여래는 다 알고 다 본다고 하였다. 우리가 부처님과 선근을 얼마나 심고 있는지 부처님께서는 다 알고 다 보고 계신다. 그렇기 때문에 ‘한 생각에 청정한 믿음을 낼 것’이라는 것 또한 부처님께서는 다 알고 다 보고 계시는 것이다. 우리들의 그 어떤 생각과 말과 행동도 부처님께서 보고 계시지 않거나 알고 계시지 않는 것은 없다.
보통 우리들은 사찰을 찾아 기도를 드릴 때에도, 108배를 하면서도, 하나 하나 자신이 소원하는 바를 꼬박 꼬박 다 부처님께 말씀을 드리려 하고, 절을 하는 내내 ‘남편은 진급하게 해 주시고, 자식은 대학에 합격하게 해 주시고, 우리 가족 모두 건강하게 해 주시고, 화목하게 해 주시고...’ 그러면서 일일이 수많은 부탁을 드리곤 한다. 그래야지만 부처님께서 이 기도의 의미를 아시고 들어 주실 것이라 생각한다. 그러다 보니 기도하면서 내내 머릿속으로는 바라는 것들을 되새기느라 바쁘다. 한참을 말씀드렸다가도 조금 있다 보면 또 하나 생각나고, 집에 가다가도 또 하나 생각나고, 한참 후에 ‘아차 그것 하나 말씀 못 드렸구나’ 싶은 것도 생기곤 한다.

그러나 부처님께서는 우리가 말하지 않더라도 다 알고 다 보고 계신다. 우리들의 인연과 업도 다 보고 계시며, 우리의 바램도, 우리의 발원도, 우리의 말과 생각과 행동을 다 알고 다 보고 계신다. 내 안에서 일어나는 그 어떤 미세한 분별심 또한 부처님께서는 다 알고 다 보고 계신다. 왜 그런가. 내가 바로 부처이기 때문이다. 내 안에 자성부처님이 항상 함께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 그저 우리는 우리 안에서 일어나는 수많은 분별이며 바람들을 그저 텅 빈 마음으로 부처님께 다 공양올리고 바치고 비울 것이지 그것을 애써 다시금 되새기며 부처님께 말씀을 드린다면 번거로운 일이고, 오히려 참된 기도가 될 수 없는 것이다.

참된 기도며 수행은 번뇌를 비우고, 분별을 비우며, 바램도 놓아버리고 욕심도 놓아버리는 데서 온다. 부처님은 이미 다 알고 다 보고 계시는데, 애써 그것들을 다시금 되새길 필요가 뭐가 있겠는가. 다만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바로 그것을 그냥 놓아버리는 것이다. 그저 부처님께 다 바치고, 부처님께 다 맡기는 것이다. 그렇게 다 맡겨버렸을 때, 내 마음은 맑게 비워지고 텅 비어 참된 울림이 있게 된다. 그 때 비로소 부처님과 진짜 선근을 맺을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잔뜩 짊어지고 복잡한 때에는 부처님을 만날 수 없으며, 부처님 또한 우리의 바람을 들어줄 수 없다. 그 복잡하고 정신없는 바람과 소망들을 그저 부처님께 다 바치고 공양올린 뒤 내 마음을 평화롭게, 고요하게 텅 비울 수 있다면 그 때 비로소 참된 성취가 있을 것이고, 참된 공덕이 있을 것이다.

그러면 ‘이 글귀를 듣고 한 생각에 청정한 믿음을 낼 것’이라고 하였는데, 그 글귀는 구체적으로 무엇이겠는가. 바로 앞의 분에서 말했던 ‘범소유상 개시허망 약견제상비상 즉견여래’라는 게송을 말하는 것이다. 이러한 게송 한 구절을 보고 문득 청정한 믿음을 낸다는 것은 그야말로 한없는 복덕을 짓는 것에 다름이 아니다.
복덕 중에 가장 큰 복덕이 무엇이겠는가. 바로 진리를 깨닫는 것이다. 물질적인 것을 얻는다거나, 바람을 성취한다거나, 지식을 얻는다거나, 지위나 명예를 얻는다는 것들은 유루복(有漏福)으로 유한한 것들이지만, 청정한 믿음을 일으켜 진리를 깨닫는 일은 무루복(無漏福)으로 한도 끝도 없는 무량한 복인 것이다. 유루복들은 짓는 내가 있고 받는 내가 있다 보니 내가 지은 복 만큼만 받을 수 밖에 없고, 지은 복을 다 받고 나면 복의 텅 비고 말지만, 무루복은 ‘나’라는 아상이 없기 때문에 짓고 받는 주체가 공하게 되고, 그랬을 때 비로소 온 우주법계를 다 먹이고도 남을 만큼의 무량한 복이 생겨나는 것이다. 한 생각에 온 우주를 다 먹이고 남을 만큼의 복 그 정도는 되어야 수행자의 복이라 할 수 있지 않겠나.

산스크리트 원문에서는 이 부분을 다음과 같이 옮기고 있다. ‘수보리여, 그들 모두는 측량할 수 없고 셀 수 없는 공덕의 무더기를 쌓고 얻게 되리라’ 다시말해 ‘측량할 수 없고 셀 수 없는 공덕의 무더기’라고 하여 무량한 복을 언급하고 계신다.
그래서 ‘무릇 형상 있는 것은 모두 허망한 것이니, 만약 모든 형상이 형상이 아님을 보면 곧 여래를 보리라’는 한 글귀를 보고 깨달음을 얻어 한 생각에 이것이야말로 진리의 말씀이구나 하는 청정한 믿음을 일으킨다면, 한량없는 무량한 복덕을 얻을 것이라고 한 것이다. ‘나’라는 형상도 형상이 아니며, 무릇 일체 모든 형상이 형상이 아님을 바로 보았기 때문에, 복을 짓고 받는 주체도 사라지고, 그 때 비로소 일체 모든 존재가 바로 내가 되고, 이 세상 삼라만상 그대로가 나와 하나가 되는 것이다. 그렇게 ‘온전한 하나’가 되었을 때, 무량한 복은 오는 것이다. 아상이 있으면 무루복은 없다. 아상이 없는 텅 빈 깨달음 속에서 무루의 복, 무량대복은 오는 것이다.


왜냐하면, 이 모든 중생들에게는 아상․인상∙중생상∙수자상이 없으며, 법이라는 상도 없고, 법이 아니라는 상도 없기 때문이다. 또한 상도 없고, 상 아님도 없기 때문이다.

연이어 그 이유를 말씀하고 계신다. 이 글귀를 듣고 한 생각에 청정한 믿음을 낼 것이며, 그러한 중생들이 한량없는 복덕을 얻을 것이라고 하였는데, 그 이유는 이러한 중생들에게는 ‘아상 인상 중생상 수자상’이 없으며, 법이라는 상도 법이 아니라는 상도 없고, 또한 상도 없고 상 아님도 없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아상을 비롯한 일체 모든 상이 다 끊어졌기 때문이라는 말이다. 앞서 말했듯이 아상 인상 중생상 수자상이란 결국에 ‘아상’에 다름 아니라고 할 수 있다. ‘아상’이 끊어졌다는 것은 ‘나와 전체가 둘이 아닌 하나’가 되었다는 말이고, 그말은 다시 복을 짓고 받는 주체가 소멸되었다는 말이며, 그랬을 때 ‘전체의 복’이 곧 ‘나의 복’이 되기 때문에 한량없는 무루의 복이 생겨나는 것이다. 다시말해 이 말은 ‘일체의 모든 상’이 다 없어졌기 때문이라고 말하고 있다.

그런데 아상 인상∙중생상∙수자상이 없으며, 법이라는 상도 없고, 법이 아니라는 상도 없다고 한 이유는, 부처님 가르침인 사구게 글귀, 즉 법을 듣고 한 생각에 청정한 믿음을 내었는데 내가 청정한 믿음을 내어 무량한 복을 얻게 된 원인인 ‘법’에 대해서도 머물러 집착함이 있어서는 안 된다는 말을 하고 있는 것이다. 법으로 인해 청정한 믿음을 내었으니 자칫 법에 집착하기 쉽기 때문이다. 그래서 법이라는 상이 없어야 하는 것이다. 그런데 법이라는 상이 없다는 말은 자칫 법이 아니라는 상으로 바뀔 수가 있다. 그러나 그것 또한 또 다른 하나의 상에 불과하다.

그래서 부처님 가르침이 진리라는 상에 머물러 법에 집착해서도 안 되고, 또한 그것은 엄연히 우리를 깨달음으로 이끌어 주고, 청정한 믿음으로 이끌어 주기 때문에 법이 아니라는 상에 머물러서도 안 된다는 말이다. 어느 한 쪽에도 치우침이 있으면 진리가 아니다. 치우치지 않는 중도를 말하고 있는 것이다.
조금 더 쉽게 말한다면, 법이라는 상, 진리라는 상에 집착하여 ‘이것만이 진리다’라는 치우친 생각 때문에 역사 속에서는 큰 갈등과 심지어는 전쟁까지 일어나는 일이 있지 않는가. 많은 종교에서는 그 종교만이 구원해 줄 수 있으며, 그 종교의 가르침만이 진리라고 말하고 있고 실제 그런 ‘진리에의 집착’ 즉 ‘법이라는 상’ 때문에 얼마나 많은 다른 사람들이 핍박을 당하고 죽임을 당하고 지금 이 시대에까지도 수많은 갈등이 조장되고 있는가. 부처님께서는 이러한 ‘진리라는 집착’까지도 놓아버려야 한다고 말씀하고 계신다. ‘이것만이 진리다’라고 했을 때 그것은 더 이상 진리가 아니라는 말이다. 이것은 참으로 중요한 말이다. 일체 모든 집착과 고집은 그것이 진리가 아님을 뜻한다. ‘진리’ 또한 집착하고 머물게 되면 더 이상 진리가 아니게 된다는 말이다.

진리는 어디에도 있다. 불교에도 있고, 기독교에도, 천주교에도, 알라신에게도, 저 아프리카 오지에도, 인디언이나 원주민들에게도, 저 숲 속의 동물 식물에게도 진리는 있다. 지금 이 시대에 인류에게 가장 필요한 말이 바로 이 말이 아닌가. ‘내 종교만이 진리’라는 어리석은 생각을 이제 버려야 할 때다. 특히 현재의 한국 교회에서는 이 세계의 그 어느 나라보다도 뿌리 깊은 ‘배타주의’ ‘극단적인 근본주의’ ‘문자주의’에 빠져 있다고 하는데, 그러한 경향이 90%이상이라고 하는 말을 들었다. 반면 유럽이나 미국에서는 30%도 안 되는 소수의 사람들만이 그러한 배타적인 자세를 취하며 나머지 사람들은 ‘다원주의’로써 모든 종교들을 진리와 구원의 길에 함께 가는 동반자로 생각하고 함께 배우고 협력하는 관계를 가진다고 한다.

내가 잘 아는 한 목사님도 다원주의적인 입장에서 공부를 하고 계시는데, 현재 한국 교회의 현실에서 그러한 입장을 취하면서 성직자 활동을 하기란 너무나도 힘들고 어렵다는 말씀을 하시면서 성직의 길을 포기하려고 생각하시는 분이 계신다. [예수는 없다]라는 책에서도 그런 비슷한 이야기가 나오는데, 고 변선환 박사 같은 분은 유럽이나 미국 신학계에서 공부하면서, 지각있는 서양신학자 사이에 ‘기독교만’이라는 배타주의적 생각이 사라진 것을 발견하고, 한국에 가서 이른바 ‘종교다원주의’를 선창하다가 신학교 학장직은 물론 목사직까지 박탈당하는 ‘변’을 맞으셨다고 한다. 이 얼마나 어리석은 일이며, 자기가 생각하는 진리에, 종교에 집착하는 일인가. 참된 종교요 진리라면 어디에도 갇혀 있지 않아야 한다. 진리라는 종교라는 틀을 정해 놓고 그 틀 안에서만 진리를 찾고자 한다면 그것은 보편적인 진리가 될 수 없다. 어찌 어떤 특정 종교 안에만 진리가 있을 수 있겠는가. 금강경의 가르침에서처럼 진리 그 자체에 대해서도 집착하지 않을 수 있고, 경전이나 부처나 신 그 자체에 대해서도 집착하지 않을 수 있을 때 툭 트여 자유로운 완전한 해탈에 이를 수 있을 것이다.

나 또한 성경을 미진하나마 공부하고 있는데, 성경 속에서도 진리를 찾을 수 있고, 법을 찾을 수 있다고 확신하고 있다. 다만 그 성경을 보는 사람의 관점에서 다르게 해석하다 보니 성경만을 문자적으로 있는 그대로 믿게 되는 사람이 있을 수 있지만, 문자를 넘어서서 담겨있는 깊은 뜻을 바로 보고 해석할 수만 있다면 그 안에는 분명 진리의 숨결을 담고 있다고 본다. 실제 많은 스님들께서 성경에 대한 아름다운 해석을 해 놓고 있으며, 또한 목사님이나 신부님들도 불경에 대한, 금강경에 대한 깊이 있는 해석을 하고 계심을 볼 수 있다.
이 정도까지만 해 두고, 여기까지가 우리가 알고 있는 구마라집 한역의 금강경 번역인데, 현장 역이나 산스크리트 원문에서는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상도 없고 상 아님도 없기 때문이다’라고 말하고 있는 점을 좀더 살펴보자. 산스크리트 원문이나 현장역에서는 상이다 상이 아니다 하는 그런 관념 또한 치우침이기 때문에 놓아버려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아상도 없고, 법상도 없으며, 법상이 아님도 없고, 또한 상 그 자체도 없고, 상 아님도 없다고 함으로써 일체 모든 여지를 남겨두지 않고 모조리 불태워 버리는 것이다. 이처럼 부처님의 가르침은 일체 모든 집착과 모양으로부터 완전히 떠나 있다. 그야말로 어디에도 치우치지 않고 집착하지 않는 고요와 텅 빈 적멸이 있을 뿐이다.


무슨 까닭이겠는가. 이 모든 중생들이 만약 마음에 어떤 상을 취하면 곧 아상․인상∙중생상∙수자상에 집착하는 것이 된다. 왜냐하면, 만약 법의 상을 취하더라도 아상․인상∙중생상∙수자상에 집착하는 것이고, 법이 아니라는 상을 취하더라도 아상․인상∙중생상∙수자상에 집착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계속해서 부연설명을 하고 있다. 만약 마음에 ‘어떤 상’이라도 취하게 되면 이는 곧 아상․인상∙중생상∙수자상에 집착하는 것이 되기 때문에, 한 티끌도 남김이 없어야 하고, 마지막 한 가지의 ‘상’ 또한 다 불살라 버려야 한다는 말이다. 앞서 말했던 것처럼 법상도 비법상도 상도 비상도, ‘어떤 상’이라 할지라도 그것을 취하면 다시금 ‘아상․인상∙중생상∙수자상’에 집착하는 것에 다름이 아닌 것이기 때문이다.

만약 법의 상을 취하더라도 ‘아상․인상∙중생상∙수자상’에 집착하는 것이고, 법이 아니라는 상을 취하더라도 ‘아상․인상∙중생상∙수자상’에 집착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범소유상 개시허망 약견제상비상 즉견여래’라는 이 진리의 글귀를 듣고 ‘이것이 진리다’라고 법에 집착하게 된다면 그것 또한 결국에는 아상에 집착하는 것에 다름이 아닌 것이다. 앞서 말했듯이 법상도 또 다른 아상이기 때문이다. 이 세상의 모든 아상은 일체 모든 상의 근본이 되기 때문이다. 아상이 완전히 소멸되고 나면 이 세상 그 어떤 상도 함께 완전히 소멸될 것이지만, 만약 그 어떤 미세한 상이라도 생기고 나면 그것은 그대로 아상이 생기는 것과 다르지 않은 것이다.
‘이것이 진리다’라고 집착을 한다고 했을 때, 집착을 하는 주체가 바로 ‘나’다. 집착이 생겼다 하면 그것은 벌써 내가 사라지지 않은 것이다. ‘나’라는 상에 집착해 있는 것이며, 아상에 빠져 있는 것이다. 내가 없는 마당에, 나도 일체도 모두 공한 마당에, ‘진리다’라고 붙잡을 것이 어디에 있겠는가. 나도 공하고 진리도 함께 공한 것이다.
그러니 당연히 ‘법이 아니라는 상’을 취하더라도 그것은 다시 ‘아상․인상∙중생상∙수자상’에 집착하는 것과 다르지 않은 것이다.


그러므로 마땅히 법에도 집착하지 말고, 법 아닌 것에도 집착하지 말아야 한다. 이러한 뜻에서 여래는 항상 말하기를 ‘너희 비구들은 나의 법문이 뗏목의 비유와 같음을 알라’고 했으니, 법도 오히려 놓아버려야 하거늘 하물며 법 아님에 있어서 이겠는가.”

그렇기 때문에 법에도 집착하지 말아야 하고, 법 아닌 것에도 집착하지 말아야 한다. 일체 모든 ‘집착’은 다 떨쳐 버려야 하는 것이다. 진리도 놓아버렸을 때 진리이지 잡고 나면 그것은 진리가 아니다. 부처님도 놓아버려야 하고, 가르침도, 복도, 지혜도, 선정도, 깨달음도, 일체 모든 것을 놓아버렸을 때 비로소 전체를 다시 잡을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생각, 이러한 표현까지도 나아가 일체를 다 놓아버려야 하는 것이다.
이러한 뜻에서 부처님께서는 ‘너희 비구들은 나의 법문이 뗏목의 비유와 같음을 알라’고 했던 것이다. 부처님의 법문이 뗏목 같은 것이기에 강을 건넜으면 뗏목은 짊어지고 갈 것이 아니라 버리고 가야 한다는 말이다. 이 비유는 아함경에 나온 비유로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말한다.

부처님께서 강을 건너기 위해 제자들과 함께 기슭에 서 계셨는데 강에서 한 젊은이가 뗏목을 어깨에 이고 올라오려고 하고 있었다. 부처님께서 왜 그 무거운 것을 짊어지고 가려고 하냐고 물으셨더니 “이 뗏목 때문에 강을 건널 수 있었으니 이 뗏목은 내게 고마운 것이기 때문입니다.” 라고 대답했다. 이에 부처님께서는 그 젊은이의 어리석음을 지적하면서 불법을 뗏목에 비유하였다. “강을 건너고 난 뒤에는 뗏목을 버리고 가는 것이 현명한 것처럼 내 가르침도 그와 같아서 내 가르침대로 수행하여 생로병사의 고해바다를 잘 건넜거든 내 가르침도 버려야 하느니라” 라고 말씀하셨다.

앞서 말했듯이 부처님의 가르침 또한 방편에 불과한 것이다. 부처님께서는 ‘마음이 환(幻)이다’라는데 치우친 사람에게는 본래마음의 무한한 능력에 대해 말씀하심으로써 치유해 주셨고, ‘마음이 실체다’라고 치우친 생각을 가진 이에게는 마음의 공한 도리에 대해 말씀해 주심으로써 치유를 해 주고 계신다. 이처럼 부처님께서는 사람들에 따라 응병여약(應病與藥)으로 대기설법(對機說法)을 해 주신다. 그러니 어떤 한 가르침을 가지고 그것을 절대화하여 그것만이 진리라고 집착한다면 어리석은 일이 아닐 수 없다.

또한 보편적인 진리를 말씀하셨다고 하더라도 거기에 집착을 하면 이미 그것은 진리가 아닌 것이다. 진리는 집착하지 않음에 있는데 진리에 집착을 하면 ‘집착하지 않음’의 진리에서 멀어지는 것이기 때문이다. 거기에는 이 세상 그 어떤 것도 예외일 수 없다. 부처님의 가르침이라고 예외가 될 수는 없는 것이다.

이렇게 걸림 없고 자유로운 것이 진리의 참 모습이다. 그래서 부처님께서는 말씀하신다. ‘법도 오히려 놓아버려야 하거늘, 법 아님에 있어서 이겠는가’ 법도 놓아버려야 하며, 법 아닌 것들 또한 놓아버려야 비로소 걸림 없는 대자유를 얻을 수 있다.



Posted by 법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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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5, 여리실견분
진리의 참 모습을 보라.(참된 이치를 여실히 보라.)


如理實見分 第五
須菩提 於意云何 可以身相 見如來不 不也 世尊 不可以身相 得見如來 何以故 如來所說身相 卽非身相 佛告須菩提 凡所有相 皆是虛妄 若見諸相 非相 則見如來

“수보리야, 너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몸의 형상을 보고서 여래를 보았다고 할 수 있겠느냐?”
“할 수 없습니다. 세존이시여. 몸의 형상으로는 여래를 볼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여래께서 말씀하신 몸의 형상은 곧 몸의 형상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부처님께서 수보리에게 말씀하셨다.
“무릇 형상 있는 것은 모두 허망한 것이니, 만약 모든 형상이 형상이 아님을 보면 곧 여래를 볼 것이다.”


앞의 2분 선현기청분에서 수보리의 질문 “보리심을 발하여 보살의 길로 들어선 선남자(善男子)와 선여인(善女人)들은 그 마음을 어떻게 머물러야 하고, 어떻게 수행해 나가야 하며, 어떻게 그 마음을 다스려야 합니까?”에 대해 부처님께서는 그 마음을 다스리는 방법으로 대승정종분을 통해 네 가지 상에 머물지 않으면서, 함이 없는 마음으로 일체 모든 중생을 제도하여 멸도에 들게 하리라는 서원을 세우도록 이끄셨으며, 묘행무주분을 통해 머무는 바 없는 묘행을 실천함으로써 그 마음을 머물러야 함을 일깨우셨다.

이 분 여리실견분에서는 어떻게 수행해 나가야 하는지에 대한 부처님의 답변이 이어진다. 진리의 참된 이치를 여실히 볼 수 있도록, 여리실견 할 수 있도록 일체의 모든 상의 허망함을 일깨우며, 일체의 모든 상이 상이 아님을 바로 보도록 이끌어 줌으로써 결국 여래를 볼 수 있도록 수행의 나아갈 길을 제시하고 있는 것이다. 바로 이 여리실견분에서 금강경 내용의 핵심이라 할 수 있는 그 유명한 금강경의 사구게가 등장을 하며, 이 사구게의 법문을 통해 우리가 수행해 나가야 할 마음공부의 방향을 설정해 볼 수 있을 것이다.

마침 이 때 대승정종분에서 부처님께서 해 주신 법문에 대해 수보리는 ‘이렇게 머무는 바 없는 묘행을 실천하면 가히 생각으로 헤아릴 수 없는 복덕을 성취한다고 하셨으니, 이와 같이 실천하였기에 부처님께서도 깨달음을 얻으셨고, 저렇게 거룩한 32상의 상호를 구족하셨겠구나’ 하는 생각이 일어나고 있음을 부처님께서 관해 보시고 수보리에게 질문을 하고 있다.


“수보리야, 너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몸의 형상을 보고서 여래를 보았다고 할 수 있겠느냐?”
“할 수 없습니다. 세존이시여. 몸의 형상으로는 여래를 볼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여래께서 말씀하신 몸의 형상은 곧 몸의 형상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세상 모든 사람들은 형상에 얽매이고, 형상에 집착하며, 형상으로써 일체 모든 존재를 분별하며 어리석게 살아가고 있다. 여기서 말하는 형상이란 눈에 보여 지는 경계로써의 형상을 의미하기도 하지만 넓게 보면 앞의 묘행무주분에서 언급했던 온갖 경계, 즉 눈귀코혀몸뜻의 대상이 되는 색성향미촉법의 모든 경계를 의미한다고 할 수 있다. 즉 사람들은 눈에 보여 지는데 집착하고, 귀로 들려지는데 집착하며, 코로 냄새 맡고, 혀로 맛보고, 몸으로 감촉하는 모든 대상에 집착하고 분별하기 때문에 일체의 모든 괴로움이 시작되는 것이다. 바로 이러한 점을 바로 관해 볼 수 있도록 하기 위해 부처님께서는 질문하고 계신 것이다.

부처님께서는 나의 형상인 육신을 보고 부처라고 할 수 있겠는가를 묻고 있다. 사람들은 보통 일체 모든 대상의 형상을 보고 그것이라고 믿고 집착하고 있으며, 나아가 부처님 조차 형상으로써 바라보고 있다. 그러나 형상으로써, 육신으로써는 부처를 볼 수 없는 것이다. 지금 수보리 앞에 계신 부처님이라는 형상은 부처의 참 모습이 아니기 때문이다. 지금 앞에 서 계시는 부처님의 육신은 단지 지수화풍(地水火風) 사대가 모여 이루어진 인연가합의 형상일 뿐인 것이지 부처의 참 모습이 아니다. 지수화풍이 인연 따라 모여진 것은 언젠가는 인연 따라 흩어질 뿐이다. 인연에 의해 만들어 진 것은 모두가 항상 하지 않으며(無常), 고정된 실체가 있지 않고(無我), 괴로우며(苦), 텅 비어 실체가 없는 것(空)이다. 부처님의 형상 또한 지수화풍 사대가 인연 따라 만들어진 것이기 때문에 무상, 무아, 고, 공인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몸의 형상은 곧 몸의 형상이 아니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몸의 형상은 다만 지수화풍 사대가 임시로 모여 만들어진 가합이기 때문에 고정된 실체가 있는 것이 아니란 말이다.

부처님의 형상에 얽매이는 것은 요즈음 절의 불상에 집착하고 얽매이는 것과 다를 바가 없다. 절에 불상이 있고, 그곳에 절을 하는 이유도 불상이 부처님이기 때문에 그러는 것이 아니라, 온 우주 법계 어느 한 곳 부처님의 숨결 아닌 곳이 없기 때문이며 결국에는 불상의 모습을 뛰어넘어 그 이면의 참모습을 보기 위한 방편인 것이다. 부처님의 실체는 형상으로써의 육신 그 이면에 법신(法身)으로써 존재를 뛰어넘어 존재한다. 법신이란 형상이 아닌 진리 그 자체의 몸이며, 크고 작다거나 나고 죽는다거나 하는 모습이 아닌 진리의 당체이고, 온 우주 법계 대자연의 숨결 그 자체인 것이다. 그러니 진리 그 자체로써, 법으로써 부처님을 보아야지 눈앞에 보여 지는 형상으로써의 거룩한 모습으로 부처님을 보아서는 안 되는 것이다.

물론 눈앞에 계신 부처님의 육신을 무시하라는 말도 아니고, 형상은 아무 필요도 없는 것이라고 하는 말은 아니다. 형상을 통해 참 진리로 나아가는 방편으로 삼아야 한다는 것이다. 강을 다 건넜으면 뗏목을 버려야 하듯, 언제든 참 진리를 만났을 때 형상은 놓아버릴 수 있어야 하는 것이다. 이 말은 다시 말해 형상에 얽매이고, 집착하지 말아야 한다는 말이다. 부처라는 형상, 32상 80종호라는 형상의 거룩함에 얽매이고 집착해서는 안 된다는 말이다. 나아가 부처라는 형상 그 자체에도 집착해서는 안 됨을 연설하고 있으며, 부처의 눈귀코혀몸뜻이 부처의 실체라고 집착해서도 안 됨을 설하고 있다.

이처럼 불교에서는 교주인 부처의 몸에 조차 집착하지 말라고 설한다. 부처의 몸이라는 것도 부처의 몸이 아니라 다만 이름이 부처의 몸일 뿐이다. 인연가합의 공한 존재일 뿐이다. 이처럼 하물며 부처의 형상에도 집착하지 말라고 하는데, 그 이외의 다른 그 어떤 것에 집착하여 머물고 실체화할 수 있겠는가. 이렇듯 이 세상의 그 어떤 것에도 집착하지 않을 수 있을 때 비로소 우리의 정신은 제한 없는 무량한 자유와 평화를 얻는다.


부처님께서 수보리에게 말씀하셨다.
“무릇 형상 있는 것은 모두 허망한 것이니, 만약 모든 형상이 형상이 아님을 보면 곧 여래를 볼 것이다.”


여기에서 그 유명한 금강경의 제일 사구게가 등장하고 있다. 이 사구게야말로 금강경 전체를 아우르고, 일체 모든 경전의 진리를 아울러 담고 있는 불교의 핵심 경구라고 할 수 있다.
“범소유상 개시허망 약견제상비상 즉견여래”
불교를 공부하는 사람이라면 아마도 이 게송을 들어보지 않은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만큼 유명하고 중요하며 불교의 핵심사상을 요약해 놓은 게송이다.

‘범소유상’이란 ‘무릇 형상이 있는 모든 것’을 의미하는 것으로 일체제법, 일체의 모든 존재를 의미한다. 눈귀코혀몸뜻이라는 주체와 색성향미촉법이라는 대상 전체를 포함하는 개념이다. 다시말해, 눈귀코혀몸뜻과 눈에 보이는 모든 형상, 귀에 들리는 모든 소리, 코로 냄새 맡아지고, 혀로 맛보아지고, 몸으로 감촉되며 뜻으로 헤아려 지는 일체 모든 경계를 모두 포함하고 있는 말이다.

‘개시허망’이란 일체가 다 허망하다는 말이다. 다시 말해 범소유상이 다 개시허망이다. 이 세상에 형상 있는 바 모든 것은 다 허망하다는 말이다. 허망하다는 말은 공하다는 말이고 고정된 실체가 없어 텅 비어 있다는 말이다. 다시 말해, 불교에서 표현되어지는 현상계의 진리를 표현하는 것으로 무아(無我), 무상(無常), 고(苦), 공(空), 인연(因緣), 중도(中道), 무집착(無執着), 무소득(無所得)의 다른 표현이기도 하다.

삼라만상 형상 있는 일체 모든 것은 항상 하지 않으며[제행무상], 고정된 자아가 없고[제법무아], 괴롭다[일체개고]는 말이다. 또한 그렇기 때문에 텅 비어 공하며, 이렇게 눈에 보이는 형상이 있는 이유는 다 인연의 가합이라는 말이다. 인연이 가합되어 가짜로 존재할 뿐, 그 실체는 어디에도 없다. 그렇기 때문에 실체가 없으니 어디에도 집착할 것이 없고, 얻을 바가 없는 무집착, 무소득인 것이다. 그러니 크고 작은 것도 없고, 많고 적은 것도 없으며, 잘나고 못나고도 없고, 나고 죽고도 없고, 생사와 열반도 없는 그 어떤 극단도 있을 수 없는 중도의 세계를 표현한다고 할 수 있다.

그래서 이 사구게에 등장하는 ‘허망’이라는 단어는 ‘허무하다’거나 하는 등의 ‘허무주의’로 쓰인 말이 아니라 근본불교의 연기법과 삼법인의 진리를 의미하는 말과도 같고, 대승불교의 공사상이나 중도, 무집착이나 무소득과 같은 의미라고 볼 수 있는 것이다. 바로 범소유상은 개시허망이라는 이 점이 우리 앞에 놓여진 이 현상계의 본래 모습인 것이다. 그 어떤 것도 다 허망하여 어느 하나 참된 것이 없고, 항상[常]하거나 즐겁거나[樂] 고정된 자아가 있거나[我] 깨끗하지[淨] 못한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 다음 게송인 '약견제상비상 즉견여래‘ 라는 말, ‘만약 모든 형상이 형상 아님을 보면 곧 여래를 볼 것이다’라는 말이 나오게 된 것이다. 범소유상 개시허망인 것을 바로 알아 일체 모든 형상이 실제는 형상이 아니며 공하여 텅 빈 것임을 바로 깨닫게 되면 곧 여래를 볼 것이다, 즉 깨닫게 될 것이다 하는 말이다.

이 말이 바로 금강경의 핵심중에 핵심이며 나아가 부처님 가르침의 핵심 가운데 핵심이다. 우리 사람들이 괴로운 것은 모두 허망한 형상에 집착하고 있기 때문이다. 돈이 명예가 권력이 욕심이 집착이 자아가 나아가 부처 조차도 모두 허망한 것이요, 텅 빈 것이며, 고정된 실체가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그것이 실체적인 것으로 착각해 거기에 집착하니까 거기에서 모든 괴로움이 시작된다는 말이다. 그것이 모든 이들이 느끼는 괴로움의 원인이다. 가만히 생각해 보라. 우리가 괴로운 이유는 모두가 허망한 형상에 집착하고 있기 때문이다. 형상이 실체적인 형상이 아니라는 것을 보지 못하기 때문에 즉견여래 하지 못하고 괴로운 중생의 길을 걷고 있는 것이다. 돈이 없어 괴로운 것도 돈이라는 허망한 형상에 집착하고 있기 때문이며, 지위나 권력이 낮은 것도 지위나 권력이라는 허망한 형상에 집착하고 있기 때문이고, 성공하지 못한 괴로움도 성공이라는 허망한 형상에 집착하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무엇’ 때문에 괴로워하고 있다면 바로 그 ‘무엇’의 실체가 허망하다는 사실을 바로 깨달아 내가 목숨 걸고 쟁취하려 했던 바로 그 ‘무엇’이 사실은 그렇게 집착할 만 한 것이 아니었음을 알게 될 때 바로 그 ‘무엇’에 대한 괴로움은 끝이 나는 것이다. 그러나 사람들은 ‘그 무엇’에 대한 집착을 쉽게 포기하지 못한다. 사랑하는 대상에 대해서도 끝끝내 집착하고 내 소유로 만들고자 할 뿐 끝내 포기할 줄 모르고, 성공이라는 부유함이라는 삶의 목적에 대해서도 한 생각 돌이켜 마음을 비우고 집착을 포기할 줄 모른다. 바로 거기에서 모든 괴로움이 연기되는 것이다.

사실 이 세상은 내가 생각하는 것 처럼 내가 원하고 바라는 바로 ‘그것’을 쟁취해야지만 행복한 곳은 아니다. 내가 집착하고 있는 그 대상을 ‘내 것’으로 만들어야만 행복해지는 것이 아니다. 이 세상은 이미 완전히 행복한 곳이고, 완전히 풍요로운 곳이며, 완전한 깨달음과 완전한 고요함으로 충만한 곳이다. 이 세상의 모든 것은 다 허망하며 텅 비어 있기에 깨달음의 시선으로 본다면 이 세상은 지극히 고요하고 적적한 것이란 말이다. 우리의 행복은 집착한 것을 내 것으로 만들었을 때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무언가에 집착하고 있는 그 마음을 포기할 때 비로소 찾아 온다. 완전히 풍족한 세상에 살면서 스스로 부족하다고 느끼고, 아직 불행하다고 생각하는 바로 그 전도된 생각을 버리고 지금 이 자리에서 자족하며 있는 그대로 세상을 받아들일 때 행복은 찾아온다. 그랬을 때 비로소 이 세상이 본래 평화로운 곳이었다는 사실이 진실로써 내 안에 깃들게 된다. 본래불이라는 것이 그 말이다. 우리는 본래 부처요, 본래 무한히 행복한 자며, 완전한 평화의 존재다. 그러나 그러한 사실을 망각하고 어떤 것에 상을 일으키고 그 상에 집착하면서부터 모든 문제는 시작된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그렇게 스스로 상을 짓고 부수고, 행복을 만들고 없애고 그러는 지금 이 순간에도 본연의 세계, 이 진리의 법계에서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고 있다. 본래 이 세상에는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았고, 아무런 변화도 없으며, 그 어떤 무언가가 나타나지도 않았다는 말이다. 나타나지 않았으니 소멸될 것도 없고, 괴로워 할 아무것도 없다. 본래자리로 가면 일체 모든 것이 딱 끊이진 적멸의 자리일 뿐이다. 아무리 우리가 몇 백 생을 윤회하고 나고 죽고를 반복하더라도 본래의 입장에서는 아무일도 없었던 것이다.

우리가 하룻밤 꿈을 꿀 때, 힘든 일도 있고, 어려운 일도 있고, 나고 죽기도 하며, 온갖 일들이 벌어지고 그 안에서 아파하고 즐거워하며 온갖 행을 벌이고 있지만 딱 꿈을 깨고 보면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이 세상도 마찬가지다. 다만 꿈이었을 뿐 실체는 아무것도 없다. 우리가 거기에 얽매여 괴로워하고 답답해 할 아무 이유가 없다. 지금 이 현실 세계 또한 꿈인 것이다. 꿈이며 신기루고 환상이며 물거품인 것이다. 꿈 같은 것이 아니라 그대로 꿈이고 환상이다. 아무리 많은 일들이 벌어지고 설사 이 지구가 몇 번 멸망을 하고 빙하기가 도래했다고 하더라도 여전히 털끝 하나도 움직이지 않은 것이다. 여전히 본질에서는 적멸이고 지고한 평화만이 있을 뿐이다.

다만 우리가 이렇게 삶을 살아가며 나고 죽고, 괴로워하고 즐거워하는 이유는 우리들의 어리석음 때문이다. 본질에서는 아무 일도 없었음을, 이 현상세계의 모든 존재는 허망하여 어느 하나 실체가 없음을, 다만 인연이 거짓으로 모이고 흩어질 뿐임을 바로 보지 못하는 어리석음 때문이란 말이다. 범소유상이 개시허망하기 때문에 약견제상비상하면 즉견여래 한다는 이 진리에 대한 무명 때문인 것이다.

그 무명, 어리석음 때문에 우리는 ‘있다’고 생각하고, 있다는 생각이 ‘집착’을 불러온다. 그리고 집착은 괴로움의 원인이 되어 우리를 얽어맨다. 그러니 바른 깨달음만 있으면, 바른 지혜와 안목이 열리면 더 이상 괴로움은 괴로움이 아니다. 살아가며 일어나는 그 어떤 일도 더 이상 우리를 괴롭힐 수 없다.
그러한 지혜가 있다면 그 무엇이 우리를 괴롭힐 수 있겠는가. 여기에서 이 게송의 소중함을 볼 수 있는 것이다. 범소유상이 개시허망이고, 약견제상비상이면 즉견여래한다는 이 말 앞에 그 어떤 것이 우리를 괴롭힐 수 있겠는가. 일체 모든 것이 허망하다는 것을 바로 보면 바로 여래를 볼 것이다, 다시 말해 바로 대자유의 깨달음인 여래를 볼 것이라고 했는데, 더 이상 여기에서 군더디기 붙을 것이 무엇이 있겠는가. 이 게송에서 대자유인의 걸림 없고 여여한 삶을 볼 수 있다. 이렇듯 광대무변하며 성성적적 무량한 깨달음이 바로 금강경 제일사구게의 가르침이다.

여기에서 잠깐 산스크리트 원문과 현장역의 해석을 살펴보면 ‘약견제상비상 즉견여래’를 ‘상과 상이 아닌 두 가지 관점에서 여래를 보아야 한다’는 해석으로 해 볼 수 있다. 또한 여기에 나온 상이란 일상적으로 우리가 알고 있는 일체 모든 상을 의미하는 것이라기 보다는 부처님의 32상 이라는 상을 의미하는 것으로 보여진다. 따라서 참된 여래를 보고자 한다면 32상이라는 모양으로만 보아도 안 되고, 모양이 아닌 관점으로만 보아도 안 되며 상과 상이 아닌 두 가지 관점으로 치우침 없이 보아야 한다는 해석으로 이해할 수 있다. 이 말은 상에도 집착하지 말고, 상 아닌 데에도 집착하지 말도록 이끄는 것으로, 어느 한 쪽으로 치우친 견해에서 벗어날 것을 요구하고 있다. 이상에서처럼 모든 상이 허망한 것이므로 모든 상에 치우쳐 집착하지 말라고 하면 도리어 상에 집착하지 않는 대신 상 아닌 것을 새로이 만들어 집착하게 되는데, 상에도 집착하면 안 되는 것 처럼, 상 아닌 것에도 집착하면 안 된다는 말이다. 즉, 형상에 집착하면 안 되듯이 형상 없는 것에도 집착하면 안 된다는 말이다. 그런데 이러한 해석 또한 결국에는 구마라집의 ‘약견제상비상 즉견여래’라는 해석과 마찬가지로, 크게 볼 때 상도 타파하고, 상 아닌 상도 타파해야 한다는 점에서 두 해석이 크게 어긋나지는 않는다고 볼 수 있다. 즉 상을 타파해야 한다고 하니, 모든 상을 타파하면서 도리어 ‘상 아닌 것’을 새롭게 만들어 거기에 집착하는 것 또한 타파해야 할 것이란 얘기다. 상 아닌 것을 만드는 순간 그것 또한 또 다른 하나의 상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어쨌든 이 분의 결론이자, 금강경의 중요한 핵심 가르침은 아상 인상 중생상 수자상을 비롯해 일체 형상 있고 없는 모든 상에서 벗어나 깨달음에 이르도록 이끌고 있는 것임을 이 분에서 살펴 보았다.


Posted by 법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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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묘행무주분
머무름 없는 묘행(머무는 바 없이 보시를 하라.)

妙行無住分 第四
復次須菩提 菩薩 於法 應無所住 行於布施 所謂不住色布施 不主聲香味觸法布施 須菩提 菩薩 應如是布施 不住於相 何以故 若菩薩 不住相布施 其福德 不可思量 須菩提 於意云何 東方虛空 可思量不 不也 世尊 須菩提 南西北方 四維上下虛空 可思量不 不也 世尊 須菩提 菩薩 無住相布施福德 亦復如是 不可思量 須菩提 菩薩 但應如所敎住

“수보리야, 보살은 마땅히 경계(법)에 머무는 바 없이 보시를 해야 한다. 이른
바 색에 머무는 바 없이 보시할 것이며, 성ㆍ향ㆍ미ㆍ촉ㆍ법에 머물지 말고 보시 해야 한다. 수보리야, 보살은 이와 같이 보시해야 할 것이며, 상에 머물러서는 안 된다. 왜 그러한가? 만약 보살이 상에 머물지 않고 보시한다면, 그 복덕은 가히 생각으로 헤아릴 수 없기 때문이다.
수보리야, 너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동쪽 허공을 가히 생각으로 헤아릴 수 있겠느냐?”
“헤아릴 수 없습니다. 세존이시여.”
“수보리야, 남서북방과 네 간방과 위 아래 허공을 가히 생각으로 헤아릴 수 있겠느냐?”
“헤아릴 수 없습니다. 세존이시여.”
“수보리야, 보살이 상에 머물지 않고 보시하는 복덕도 또한 이와 같아서 가히 생각으로 헤아릴 수 없다. 수보리야, 보살은 다만 가르친 바와 같이 머물러야 한다.”

앞의 대승정종분이 금강경 가르침의 요지가 핵심적으로 잘 드러나 있다면, 이 제 4분인 묘행무주분(妙行無住分)은 제목에서도 알 수 있듯이 금강경의 실천적인 가르침이 잘 드러나 있는 분이라고 하겠다. ‘묘행무주’라는 이 분의 제목은 모든 수행자들이 마땅히 나아가야 할 실천의 행을 일컫는 말이며, 불교 수행의 핵심이 잘 드러나 있고 동시에 수행자들의 삶의 모습이 어떠해야 하는가 하는 점이 잘 드러나 있다고 할 수 있다. 묘행무주란 쉽게 말해 ‘머무는 바 없는 미묘한 행’이라는 말인데, 묘행과 무주는 같은 말의 다른 표현이다. 어떤 행에도 머무는 바가 없어야 묘행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묘행에서 ‘묘(妙)’ 자는 불교에서 종종 등장하는 말로 언어로 표현할 수 없을 때 언어를 뛰어넘어 그 이면의 ‘참 말’을 전하고자 할 때 보통 사용하는 말로써, 묘행이란 부처의 행, 즉 깨달은 이의 머무름 없는 행, 함이 없는 행을 의미하는 말이라고 할 수 있다. 행이면 행이지 함이 없는 행이 도대체 무엇인가 하겠지만, 바로 그처럼 언어를 뛰어넘는 ‘묘’한 말씀이기 때문에 묘행이라고 한 것이다. ‘함이 없이 행한다’는 것이 얼마나 묘한 가르침인가. 그러면 묘행은 어떠해야 하는가가 궁금해 질 터인데 그에 대한 답이 바로 ‘무주’인 것이다. 앞서 말했듯이 묘행은 ‘머무는 바 없는 행’ 즉, ‘무주’인 것이다. 함이 없이 행하고, 머무는 바 없이 실천하는 행이 바로 부처의 행인 것이다.

머무는 바 없다는 말은 집착함이 없다는 말이고, 바라는 바가 없다는 말이며, 아무런 분별도 없이 무분별의 행을 한다는 말이며, 나아가 과거나 미래에 걸리지 않고 오직 지금 이 순간의 깨어있는 행이란 뜻이다. 어떤 행을 하면서도, 그 행동에 이유가 없고, 목적이 없고, 그 행동을 했을 때 이렇게 되겠지 하고 바라지 않으며, 내 이익을 위해 머리 굴려 행동하지 않고, 과거의 기억이나 미래의 예측에 대한 연상작용에 의해 행동하지 않는다는 말이기도 하다. 무주의 행은 즉각적이면서도 전체적이면서 온전한 행을 말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 무주의 묘행은 온 우주 법계에 그대로 내맡기고 물 흐르듯 자연스럽게 흐르는 행인 것이다. 내가 하는 행이 아니라, 법계가 하는 행이고, 부처님이 하는 행인 것이다.

불교에서 ‘마음을 비워라’ ‘놓아라’ 하니까 많은 분들이 의문을 가진다. 다 비우고 놓으라고만 하니 그럼 어떻게 살라는 말이냐고 반문하곤 한다. 아무것도 하지 말고, 일도 하지 말고, 그냥 목석처럼 앉아 있으라는 말이냐고 말이다. 이 의문에 대한 해답이 바로 묘행무주에 있다. 즉, 아무 행도 하지 말라는 말이 아니라, 묘행을 하라는 말이며, 즉 머무는 바 없는 행을 하라는 말인 것이다. 돈도 벌고, 일도 하고, 사랑도 하고 할 것 다 하면서도 집착함이 없이 머무름이 없이 해야 한다는 말이다. 돈에 집착해서 돈을 벌지 말고, 사랑에 집착해서 사랑을 하지 말고, 일에 집착하여 일의 결과나 성취에 마음을 묶어 두어서는 안 된다는 말이다. 그것이 바로 집착함이 없는 행이고, 머무는 바 없는 행이며, 바로 무주묘행인 것이다.
그러면 본문의 내용을 살펴보도록 하자.


수보리야, 보살은 마땅히 경계(법)에 머무는 바 없이 보시를 해야 한다.

이 4분의 법문은 앞선 수보리의 질문 ‘어떻게 머물러야 하며, 어떻게 수행해야 합니까?’ 하는데 대한 답변으로 이해될 수 있다. 즉 머무는 바 없이 머물러야 하고, 함이 없는 행인 묘행의 실천 수행을 해야 한다는 말이다.

이 분에서 묘행은 구체적으로 ‘보시’를 의미하는데, 여기에서 갑자기 보시의 법문이 나오게 되니 조금 의문스러운 점이 있을 것이다. 무주의 묘행으로 보시를 이야기 하는 이유는, 보리심을 발하여 보살의 길로 들어선 선남자 선녀인들, 즉 보살마하살들이 마땅히 실천해야 할 바를 설법하고 있기 때문이라는 점을 이해해야 한다. 앞의 대승정종분에서 존재하는 일체 모든 중생들을 무여열반의 세계로 인도하여 완전한 멸도에 들게 해야 한다는 설법을 하셨는데, 이 말은 보살이기 때문에 상구보리는 거의 이루었으므로 하화중생이라는 보살의 대원을 세워 일체 모든 중생을 열반으로 이끌어야 한다는 설법이라고 하였다. 다시 말하면, 부처와 보살의 묘행은 근원에서 무주의 행으로 하나이지만, 방편으로 두 가지로 나뉘는데, 그 하나가 지혜 증득을 위한 깨달음의 실천 즉 수행이고, 다른 하나가 이타적인 보시의 실천인 것이다. 이것이 바로 상구보리 하화중생으로 이는 모든 보살의 두 가지 큰 서원이며, 완전한 깨달음을 이루신 부처님을 복과 지혜가 충만한 분으로 묘사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그러므로 보살을 보살일 수 있도록 해 주는 것은, 즉 보살이 부처가 되지 않고 남아 있는 유일한 이유는 바로 일체중생을 성불의 길로 이끌겠다는 회향의 발원, 보시의 발원 때문인 것이다. 그러니 보살에게 있어 유일한 묘행은 ‘보시’인 것이다. 보살이 보살일 수 있는 이유가 바로 모든 중생을 열반으로 이끌겠다는 하화중생의 발원, 즉 법보시의 실천이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부처님께서는 보살들에게 묘행이라는 보시를 설하고 계신 것이다.

앞서 대승정종분에서 일체 중생을 모두 열반으로 이끌어야 한다고 서원하라고 말씀을 하셨고, 이 분 묘행무주분에서는 그 서원을 실천하는데 있어서 중요한 점이 바로 머무름이 없는 실천행을 해야 한다는 점임을 상기시키고 있는 것이다. 보살들은 아직 완전히 100% 부처가 되지 않았기 때문에 언제든지 다시 수행의 퇴전이 올 수도 있는 것이다. 물론 그것은 아주 드문 일이 될 것이고, 아주 작고 미세한 분별과 번뇌일지 모르지만 그렇더라도 부처님께서는 대자대비의 마음으로 보살들이 서원을 실천하는데 있어서 행여나 퇴전하게 될지 모를 점을 짚어주고 계시는 것이다. 일체 중생을 깨달음의 길로 이끈다는 것이 바로 법보시인 것이며, 법보시야 말로 가장 온전한 보시다. 이러한 보살들의 하화중생이란 법보시의 실천에 있어 부처님께서는 머무는 바 없이 보시를 해야 한다고 설하고 계신 것이다. 행여나 있을지 모를 ‘내가 보시한다’ ‘내가 중생을 구제한다’ ‘내가 하화중생을 실천한다’라고 하는 작은 상조차도 다 놓아버려야 한다고 말씀하고 계신 것이다.

이 말은 다시 말해 ‘나’라는 상 없이 보시해야 한다는 말이기도 하다. 보시를 하면서, 또 일체 중생을 열반으로 이끌면서 ‘내가 한다’는 아상이 있다면 그것은 무주가 아니며 묘행이 아니기 때문이다. 주는 나(施輪)도 없고 받는 상대(受輪)도 없으며, 주는 것(物輪) 또한 다 청정한, 삼륜청정(三輪淸淨)의 보시, 묘행의 보시를 하라는 말이다. 그러므로 네 가지 상의 타파가 곧 바른 보시의 실천인 것이다. 사상이 타파되지 않고서는 참된 보시가 불가능해 지기 때문이다.

이렇게 보았을 때, 묘행 무주의 의미는 좀 더 깊이 있게 다가올 것이다. 묘행이란 실천의 가르침이며, 무주는 이론의 가르침이고, 묘행이란 보시의 실천행이며, 무주란 지혜의 실천행이고, 묘행이 하화중생의 가르침이면, 무주란 상구보리의 가르침이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무주와 묘행은 결코 다른 것이 아니다. 무주일때만이 묘행이 될 수 있고, 묘행이 그대로 무주를 의미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거의 깨달음에 이르러 하화중생의 원을 세운 보살마하살들에게만 이 보시의 법문이 중요한 것일까. 물론 그렇지 않다. 일체 모든 발심한 선남자 선녀인, 즉 우리들 같은 생활 수행자들의 모든 실천 수행 또한 머무는 바 없는 보시행이 되어야 한다. 깨달음을 얻는 것은 상구보리의 측면이고 상구보리가 체득되어 깨달음을 얻고 나면 저절로 하화중생의 발원, 즉 일체 중생을 향한 동체 대비의 마음이 바탕 된 보시행을 실천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다시 말하면 상구보리가 그대로 하화중생이란 말이다. 즉 깨달음이라는 것이 곧 보시의 실천과 다르지 않다. 지혜가 곧 자비인 것이다. 지혜가 생긴다는 말은 곧 일체 중생을 향한 자비의 마음, 보시의 마음이 생긴다는 뜻이다. 반대로 일체 중생을 향한 대자비의 마음, 보시의 마음을 일으키고 실천한다면 그 실천은 곧 지혜의 증장으로, 깨달음으로 이어질 것이다. 보시를 하되 진리의 보시를 하고, 중생을 깨달음으로 이끌기 위한 보시를 하며, 또한 보시를 하되 색성향미촉법 어느 곳에도 머무는 바 없이 텅 빈 마음으로 보시를 실천할 수 있다면 그 사람은 이미 깨달음의 발심을 실천하는 수행자인 것이다. 이처럼 보시와 수행은 둘이 아니다. 그런 점에서 부처님께서는 묘행무주의 실천행으로, 마음을 어떻게 머물며, 어떻게 수행해야 하는가 하는 답변에 묘행무주의 보시행을 설하고 계신 것이다.


이른바 색에 머무는 바 없이 보시할 것이며,
성ㆍ향ㆍ미ㆍ촉ㆍ법에 머물지 말고 보시를 해야 한다.


앞에서 보살은 마땅히 경계(境界)에 머무는 바 없이 보시를 행해야 한다고 했다. 경계라는 말을 구마라집은 법(法)이라고 번역을 했고, 현장스님은 사(事)라고 번역을 했는데, 이는 공히 경계를 의미하는 말로써, 여기 이어지는 경전의 내용에서처럼 색성향미촉법(色聲香味觸法)의 육경(六境) 혹은 육진(六塵)을 의미하는 것이다. 육경이란 육근(六根)의 대상을 의미하는 것으로, 육근은 안이비설신의(眼耳鼻舌身意), 즉 눈․귀․코․혀․몸․뜻을 의미한다. 다시 말해 육근은 우리 몸의 여섯 가지 감각기관이며, 육경은 여섯 가지 감각기관인 육근의 대상으로, 눈(眼根)으로 보여지는 대상인 모양과 빛깔을 색경(色境)이라 하고, 귀(耳根)로 들리는 대상인 소리를 성경(聲境), 코(鼻根)의 대상인 냄새를 향경(香境), 혀(舌根)의 대상인 맛을 미경(味境), 몸(身根)의 대상인 감촉을 촉경(觸境), 뜻(意根)의 대상인 온갖 생각을 법경(法境)이라고 하는 것이다.

우리 인간이 외부의 세계와 접촉할 때는 오직 이 여섯가지 주관적 기관이 여섯가지 객관적 세계를 접촉할 수 있는 것이다. 불교 공부를 하다 보면 경계라는 말을 많이 접하게 되는데 우리가 눈귀코혀몸뜻으로 접촉할 수 있는 모든 대상을 경계라고 하는 것이다.
이렇게 육근과 육경이 접촉한다고 하지만, 사실은 이 두 가지가 모두 공한 것으로, 잠시 인연따라 기관이 생겨난 것이며, 또한 인연따라 경계가 생겨나는 것에 불과한 것일 뿐이다.  눈귀코혀몸뜻은 항상하지 않고, 고정된 실체가 있는 것이 아니며 다만 잠시 인연따라 나툰 것일 뿐이다. 우리의 생이 끝나갈 때 우리의 감각기관인 육근 또한 함께 소멸될 것이기 때문이다. 100년도 안 되는 이 짧은 시간 동안 잠시 이 몸뚱이를 받아 이 세상에 왔다가 몸뚱이 유효기간이 다 되면 곧 법계로 흩어질 뿐, 그 어디에도 고정된 실체를 찾을 수 없는 것이다. 눈은 우리가 죽고 나면 곧 사라질 뿐, 본다는 기능도 사라지고, 눈 그 자체도 사라지는 것이며 귀코혀몸뜻 또한 마찬가지로 공한 것이다. 또한 육근의 대상인 육경 또한 고정된 실체가 있는 것이 아니고, 항상하는 것이 아니다. 이 세상에 변하지 않고 항상하는 것이 어디 있겠는가. 눈에 보여지는 것이든, 귀로 들려지는 것이든, 코로 냄새 맡아 지는 것이든, 혀로 맛보는 것이든, 몸으로 감촉이 느껴지는 것이든, 뜻으로 헤아려 지는 것이든 언제까지고 영원히 남아 있는 것은 어디에도 없다. 육근도 육경도 모두 제행무상이며, 제법무아이고, 공한 것이며, 다만 인연 가합으로 인해 신기루처럼, 꿈처럼, 환영처럼 잠시 생겼다가 사라질 뿐이다.
그렇기 때문에 경전에서는 색성향미촉법에 머물지 말고 보시해야 한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색성향미촉법이 항상하고 영원불멸하는 고정된 실체성이 있는 것이라면 마땅히 이러한 육경에 머물러 보시해야 한다고 말하겠지만, 공한 것이며 어디에도 집착하거나 머무를 만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그렇게 말하고 있는 것이다.

색에 머물러 보시를 한다는 것은, 보시하는 나와 보시받는 대상 그리고 보시하는 물건을 눈으로 분별하면서 보시를 한다는 말인데, 쉽게 말해, 우리 눈으로 보여지는 형상에 집착하여 보시를 하는 것으로, 잘난 사람, 못난 사람, 뚱뚱한 사람, 마른 사람, 착하게 보이는 사람, 착하지 않게 보이는 사람, 가난해 보이는 사람, 부자처럼 보이는 사람 등을 분별해서 그 모양에 따라 어떤 사람에게는 보시하고 어떤 이에게는 보시를 하지 않는다거나, 어떤 이에게는 많이 보시하고, 어떤 이에게는 적게 보시를 한다거나, 이 사람에게는 이만큼 보시하면 큰 보상이 따르겠다거나, 이 사람에게는 아무리 보시를 해도 덕 보는 것이 없겠다거나 하는 등의 분별을 지어내는 것을 의미한다고 할 수 있다. 또한 소리에 머물러 보시를 한다고 하면, 나를 칭찬하는 사람, 비난하는 사람, 혹은 말이 거친 사람, 말이 싹싹하고 부드러운 사람 등을 분별하여 그에 따라 보시의 유무와 많고 적음을 분별하는 것을 말한다고 할 수 있다.

우리 중생들은 보여지는데 얽매여 분별을 하고 집착을 하며, 들려지는데, 냄새 맡아지는데, 맛보아지는데, 감촉되어지는데, 또한 각종의 생각의 대상에 얽매여 분별을 하고 집착을 한다. 그렇듯 육경에 얽매이는 마음으로 보시를 한다. 그래서 이 묘행무주분에서는 빛과 소리 냄새 맛 감촉과 온갖 생각에 머물지 말고 보시를 해야 한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즉 일체가 공한 마음으로, 경계에 따라 분별되어지고, 계산되어지는 마음으로 보시를 할 것이 아니라 텅 빈 마음으로 보시를 실천해야 된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수보리야,
보살은 이와 같이 보시해야 할 것이며,
상에 머물러서는 안 된다.


앞에서 말했듯이 육근이든 육경이든 어디에 마음을 머물 것이며, 무엇에 집착을 할 수 있겠는가. 육경이라는 모든 대상 그 어떤 것도 우리가 집착할 만한 것, 마음을 머무를 만한 것은 없는 것이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우리는 육근과 육경을 구분하고, 나와 남을 구분하며 오랜 아상을 키워가기에 여념이 없다. 육근이 있고, 육경이 있으며 육근과 육경이 접촉한다고 생각하는 바로 거기에서 인간의 근본 무지인 아상이 생겨나는 것이다. 육근도 공했고, 육경도 공했을 진데 공한 것과 공한 것이 마주하여 접촉한들 무엇이 더 생겨날 것이 있겠는가. 그런데도 불구하고 육근과 육경을 실체화 시켜 놓고 거기에 마음을 빼앗겨 집착하게 되니 그때부터 아상이 생겨나고 온갖 괴로움이 생겨나는 것이다.

그러니 여기에서 경계에 머물지 말고 보시를 하라는 말은 무슨 의미이겠는가. 상에 머물러 보시해서는 안 된다는 말이다. 아상으로 보시하지 말라는 말인 것이다. 즉 ‘내가 한다’, ‘내가 보시한다’는 생각으로 보시해서는 안 된다는 말이다. 조금 구체적으로 말해 ‘내가 누구에게 무엇을 보시한다’는 생각을 다 놓아버려야 한다는 말이다. 즉 삼륜(三輪)이 청정해야 참된 보시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삼륜이란 시륜(施輪)과 수륜(受輪), 물륜(物輪)으로 베푸는 자, 받는 자, 주고 받는 것을 의미한다. 돌고 도는 바퀴인 륜(輪)의 의미는 이 세 가지가 모두 마치 수레바퀴가 돌고 도는 것처럼 고정불변하지 않는 것임을 내포하고 있다. 그러니 이 세 가지가 청정해야 한다는 말은 이 세 가지가 모두 공했음을 잘 알아야 한다는 말이다. 보시하는 나도 공했고, 보시를 받는 상대도 공하며, 보시하고 받는 것 또한 모두 공한 것이거늘, 누가 누구에게 무엇을 보시한다는 생각이 어디에 가서 붙을 것인가. 주고도 준 것이 없고, 받고도 받은 것이 없으며, 주고 받은 물건 또한 공했을 때 바로 묘행무주가 실천되는 순간인 것이다. 함이 없는 보시행, 머무는 바 없는 보시행 그것이 바로 무주의 묘행인 것이다.


“왜 그러한가?
만약 보살이 상에 머물지 않고 보시한다면,
그 복덕은 가히 생각으로 헤아릴 수 없기 때문이다.


상에 머물지 않고 보시하면, 그 복덕은 가히 생각으로 헤아릴 수 없다. 마음에 ‘내가 보시했다’고 하는 아상을 전제로 보시를 했다면, 그것은 거래이고, 장사는 될 지언정 복이 될 수는 없는 것이다. 내가 보시했다는 생각이 전제되어 상에 머무는 보시를 하면 ‘난 참 장한 일을 했다’거나, ‘내가 보시했으니 많은 칭찬과 존경을 받겠지’라거나, ‘이만큼 했으니 돌아오는 것이 있겠지’라거나, ‘이렇게 보시를 했으니 상대로부터 돌아오는 것은 없더라도 내 안에 많은 복이 지어지겠지’라거나 하는 등의 수많은 관념과 바라는 마음이 따라 붙게 마련이다. 그러나 그렇듯 바라는 마음으로 주었다면 그것을 어찌 보시라고 할 수 있겠는가. 주었으니 받아야 한다는 바라는 마음이 전제되는 순간 그것은 장삿속이나 거래는 될 지언정 참된 베풂은 될 수 없다.

아무런 바라는 바 없이, 아무런 분별 없이 베풀고도 베풀었다는 마음이 하나도 남아 있지 않았을 때, 그 때 비로소 보시는 무주상보시가 되어 보시바라밀로 승화될 수 있는 것이다. 주었으니 받겠지 하는 바라는 마음이 전제되고, 상에 머물러 보시를 하게 된다면 물론 인연법에 따라 준 만큼은 받을 수 있겠지만 그것은 복이 되지는 않는 것이다. 그러나 주고도 준 바가 없이 함이 없는 보시를 했을 때, 그 보시의 공덕은 도무지 생각으로 헤아릴 수 없이 큰 것이다.
무주상보시의 복덕을 가르켜 무량대복(無量大福)이라고 한다. 다시말해 상에 머물지 않고 보시하는 복을 무량대복이라고 한다는 말이다. 무량대복이란 말 그대로 복이 도무지 셀 수 없을 만큼 크다는 의미다. 복이 생각으로 헤아릴 수 없을 만큼, 셀 수 없을 만큼 크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겠는가? 너무 커서 크다는 말로도 표현할 수 없다는 말이다. 다시 말해 이 온 우주 법계 전체를 다 소유하고 있는 복을 말한다. 다 소유하고 있지만 어느 하나도 소유하고 있지 않은 것을 말한다. 무소유가 전체를 소유하는 것이란 말처럼 하나도 소유하고 있지 않기 때문에 전체를 소유하고 있는, 즉 정해져 있지 않고 셀 수 없기 때문에 오히려 전체가 되어버린 무량의 복을 의미하는 것이다.

우리는 보통 복이 많아야 돈도 많이 벌고, 사업도 잘 되고, 배고프지도 않을 것이라고 생각하곤 한다. 그러나 그것은 상에 머무는 보시, 바라는 바가 있는 보시를 많이 했을 때 받을 수 있는 결과인 유루복(有漏福)을 의미하는 것일 뿐이다. 보통 우리가 행하는 복이 대부분 유루의 복이다. 유루의 복을 지으니 받는 결과도 유루의 결과만 받을 수 밖에 없는 것이다. 그러나 상에 머무는 바 없이 보시를 하고, 바라는 바 없는 보시를 행하는 과보는 유루의 복이 아닌 무루(無漏)의 복이 되는 것이다. 무루복이란 앞서 말한 무량대복을 의미한다.
무량대복을 소유하면 가진 것 하나도 없이 온 우주를 소유하고 있는 것이며, 거지가 되어 들판을 거닐고 있을 때라도 하나도 부족한 것이 없는 것이다. 다시 말해 무량대복을 소유하고 있으면 마음 하나 일으켜 그 무엇이라도 다 얻을 수 있게 된다. 도무지 복의 양을 셀 수 없으려면 온 우주 법계와 하나가 되어야 하고, 그대로 법계가 되고 그대로 부처가 되어야 하는 것이다. 허공과도 같이 툭 트여 그 무엇이든 다 담을 수 있어야 하는 것이다.

이것은 이상적인 설법이 아니다. 바로 우리들에게 있어 가장 중요하고 또 가장 실천적인 가르침인 것이다. 상에 머물지 않는 보시를 행하면 누구든지 이런 무량대복, 무루복이 주어진다. 무량대복을 가진 수행자는 아무것도 없이 거지처럼 살더라도 필요에 의해 한마음 일으키면 이 법계에서 무엇이든 만들어 준다. 그러니 따로이 저축할 필요도 없고, 미래를 계획할 필요도 없고, 날마다, 아니 매 순간 순간 평화로울 수 있는 것이다. 소유의 관념에 얽매여 내 것을 늘리려고 애쓸 것도 없다. 언제든지 한마음 일으켜 법계의 모든 것을 다 가져다 쓸 수 있기 때문이다.

보통 사람들은 많이 보시하면 내 것이 없어지는 것이란 생각 때문에 선뜻 보시를 실천하지 못한다. 그러나 상에 머무는 바 없이 보시를 하면 내 것이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내가 온 우주를 소유함 없이 소유하게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것이 바로 ‘상에 머물지 않고 보시하면 그 복덕은 가히 생각으로 헤아릴 수 없다’는 법문의 참뜻인 것이다. 온 우주 법계가 그대로 내 것이고, 나와 다르지 않은 것이니, 따로이 ‘내 것’ ‘네 것’을 나눌 것도 없이 내가 곧 전체이고, 내가 곧 우주이며, 나와 남을 나눌 수 없는 전체로서의 하나, 한마음 참 부처를 이루는 순간인 것이다. 그런데 이렇게 툭 트여 한없이 자유로운 법계에 한 생각 잘못 일으켜 ‘내 것’을 나누고, ‘내 것이 아닌 것’을 나누어 이 세상에 있는 모든 것들을 ‘내 것’으로 편입시키려고 할 때, ‘내 것’으로 만들려고 노력할 때, 즉 아상이 생겨나는 순간 우리 안에 충만하게 존재하던 무량대복은 한순간 사라져 버릴 것이다.

날마다 베푸는 삶을 실천할 일이다. 누구를 만나든지 ‘뭐 줄 것 없을까’ 하고 고민할 일이다. 계산하고 따져 가면서 적당히 보시할 것이 아니라 인연따라 필요에 의한 보시라면 아무런 계산도 하지 말고 다 베풀 일이다. 부처님 가르침의 참으로 진실한 법문 한 가지 꼭 가슴에 새겨 실천할 일이다. 베푼다고 절대 가난해 지지도 않고, 많이 베푼다고 절대 못 살지 않으며, 오히려 필요에 의해 베풀어야 할 인연처가 생기면 턱 저질러 베풀었을 때, 그 마음에 바로 무량대복이 생겨 온 우주법계 전체가 내것이 되는 것이다. ‘내 것’과 ‘내 것 아닌 것’의 경계가 사라져 전체로서의 하나가 될 것이다. 그렇게 무량대복이 생겨나면 언제든 ‘욕심’이 아닌 ‘필요’에 의해 한마음 일으켰을 때 법계에서는 얼마든지 그것을 가져다 줄 준비를 하고 있을 것이다.

그래서 청정한 수행자들은 한마음 내어 무엇이든 자유자재로 법계를 굴려 쓰고, 법계에서 필요한 무엇이든 가져다 쓸 수 있으며, 참으로 법계의 주인이 될 수 있는 것이다. 맑고 청정한 도량, 청정한 수행자가 사는 곳은 그래서 ‘원만구족’한 것이다. 소유한 것이 많아서 원만구족이 아니고, 소유한 것은 하나도 없더라도 필요에 의해 가져다 쓸 수 있는 무량대복이 언제나 충만하기 때문에 원만구족인 것이다. 절에 쌀이 다 떨어져 없을 때 즈음이면 어디서든 쌀을 가져다 주는 사람이 나타나게 마련이고, 돈이 필요하면 또 어디서든 돈이 생겨나며, 사람이 필요하면 무량대복이 사람의 인연으로 화하여 주게 마련인 것이다. 수행자라면 이 정도는 되어야 하지 않겠는가. 이렇게 법계를 들었다 놓았다 하며 굴리고 자유자재하게 쓸 수 있어야 대장부 수행자라 하지 않겠나.
이것은 비단 스님들만의 또 치열하게 정진하는 수행자들에게만 해당되는 이치가 아니다. 상에 머물지 않는 보시, 무주상보시를 실천하는 그 어떤 사람도 당연스럽게 누릴 수 있는 법계의 선물이며, 이치이고 진리인 것이다.


수보리야, 너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동쪽 허공을 가히 생각으로 헤아릴 수 있겠느냐?”
“헤아릴 수 없습니다. 세존이시여.”
“수보리야, 남서북방과 네 간방과 위 아래 허공을 가히 생각으로 헤아릴 수 있겠느냐?”
“헤아릴 수 없습니다. 세존이시여.”
“수보리야, 보살이 상에 머물지 않고 보시하는 복덕도 또한 이와 같아서 가히 생각으로 헤아릴 수 없다. 수보리야, 보살은 다만 가르친 바와 같이 머물러야 한다.”


이어서 부처님께서는 허공의 비유를 들어 상에 머물지 않는 보시의 공덕을 말씀하고 계신다. 허공이야말로 툭 트여 도무지 잴 수도 없고, 셀 수도 없으며 우리의 관념으로는 도무지 상상할 수도 없는 것이다. 이처럼 허공을 생각으로 헤아릴 수 없는 것처럼 상에 머물지 않고 보시하는 복덕 또한 헤아릴 수 없다고 다시한번 비유로써 강조하고 계신 것이다.

보통 우리가 쉽게 들어 본 말이 사방(四方), 팔방(八方)일 터인데, 경전에서는 허공을 사방 팔방이 아닌 십방(十方)으로 이야기하고 있다. 보통 사방은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정방위인 동서남북(東西南北)을 의미하고, 팔방이라고 하면 여기 사방에다가 사방의 사이사이에 들어가는 간위인 동북, 동남, 서남, 서북을 더한 것으로, 경전에서의 사유(四維)가 바로 이 네 가지 간위를 뜻한다. 여기에 상하(上下)를 더하여 10방위가 되는 것이다. 보통 경전에서 자주 등장하는 시방세계(十方世界)가 바로 이렇게 10가지의 방위를 말하는 것으로, 다시 말하면 끝없이 넓어 셀 수도 없고 생각으로 헤아릴 수 없는 허공을 의미한다고 할 수 있다. 시방세계 허공을 가히 생각으로 헤아릴 수 없는 것처럼 무주상보시의 복덕 또한 생각으로 헤아릴 수 없음을 비유를 들어 설명한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이렇게 누차 무주상보시의 복덕이 크고 원만한 것임을 설명하고 있는데, 이러한 설법을 접하고 나면 누구나 무주상보시를 실천해야겠다는 생각을 할 것이다. 그러나 그 생각 이면에는 벌써 무주상보시를 해야만 무량대복을 얻을 수 있으리란 생각이 깔려 있지 않을까. 그러나 그 마음 조차 잘 관하여 놓아버렸을 때 참된 보시의 복덕을 얻을 수 있을 것입이다.

사실 무주상보시를 실천할 때는 복덕이라는 것 자체는 아무런 의미가 없어야 한다. 복덕이라는 말 자체도 필요 없는 말이 되어야 한다. 그저 보시 그 자체로써 의미가 있는 것이지 벌써 여기에 ‘복덕’이라는 말이 전제되고 나면 누구든 복덕을 위해 무주상보시를 실천하려고 애쓸 것이기 때문이다. 보시한다는 말도 필요 없고, 그저 필요한 것이 필요한 곳에 놓여진다고 생각하면 좋을 것이다. 어차피 이 우주 법계는 정확하게 필요한 일이 필요한 순간에 벌어지고 있으며, 필요한 것이 정확히 필요한 자리에 놓여지게 되어 있다.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인연의 인다라망은 펼쳐지고 있다. 그런데 그렇게 원만하게 펼쳐지는 법계에 공연히 한생각 분별심을 일으켜 ‘내가 누구에게 무엇을 보시한다’는 어리석은 생각을 하고 있는 것일 뿐이다. 그것만 다 놓아버리면 ‘보시’도 없고, ‘복덕’도 없고, 주는 ‘나’도 없고, 받는 ‘너’도 없으며, 주고 받는 ‘물건’도 없고, 오직 부처님의 성품이 이 법계에 여여하게 비추고 있을 뿐이며, 다만 인연따라 부처님이 가지가지 모습과 행으로써 나투고 있을 뿐인 것이다. 이 우주의 모든 것들은 저마다 있어야 할 그 자리에 인연법이라는 법칙에 따라 자리하고 있을 뿐이다. 언제나 그것이 있어야 할 자리에 그렇게 놓여 있다. 사람이 가졌다 버렸다 하거나, 주고 받거나 하는 것이 아니라 우주적인 인연의 법칙에 따라 있어야 할 그 자리에 그저 있는 것일 뿐이다. 그러니 준다 받는다는 말이 가당키나 하겠는가.

그러니 한생각도 분별할 것이 없다. 다만 여기에서는 방편으로써 복덕을 이야기 하고, 무주상보시를 이야기 하는 것이다. 무주상보시를 하고서도 이것이 복덕이라고 생각하면 벌써 복덕을 잃을 것이고, 복덕이라는 생각 조차 놓아버렸을 때 그 복덕은 실로 무량할 것이다. 이것은 흡사, 일체 모든 집착을 놓아버려야 오히려 얻을 것이고, 얻고자 하면 도리어 얻지 못하는 이치와 같으며, 무소유 했을 때 전체를 소유할 수 있을 것이고, 소유하고자 하면 도리어 소유할 수 없는 이치와 같다고 할 수 있다. 깨달음을 얻고자 애쓰면 벌써 깨달음은 저만치 달아날 것이지만, 깨달음 조차 놓아버리고 났을 때 이미 무시무종으로 언제나 깨달음과 하나 되어 있었던 것 처럼.



Posted by 법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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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3, 대승정종분
대승의 바른 종지(대승보살의 나아갈 길)

大乘正宗分  第三
佛告須菩提 諸菩薩摩訶薩 應如是降伏其心 所有一切衆生之類 若-卵生 若-胎生 若-濕生 若-化生 若-有色 若-無色 若-有想 若-無想 若-非有想非無想 我皆令入無餘涅槃 而滅度之 如是滅度無量無數無邊衆生 實無衆生 得滅度者 何以故 須菩提 若菩薩 有我相人相衆生相壽者相 則非菩薩

부처님께서 수보리에게 말씀하셨다.
“수보리여, 보리심을 발하여 보살의 길로 들어선 자는 마땅히 이와 같이 마음을 내어야 한다. ‘존재하는 일체 모든 중생의 종류인, 이른바 알에서 태어나는 것, 모태에서 태어나는 것, 습기에서 태어나는 것, 화현하여 태어나는 것, 형상이 있는 것, 형상이 없는 것, 생각이 있는 것, 생각이 없는 것, 생각이 있는 것도 아니고 생각이 없는 것도 아닌 것들을 내가 다 아무것도 남지 않는 무여열반(無餘涅槃)의 세계로 인도하여 완전한 멸도에 들게 하리라.’
그러나 이와 같이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중생들을 완전히 열반에 들게 했다 하더라도 실은 한 중생도 열반을 얻은 자는 없다. 왜 그러한가 수보리야, 만약 보살이 아상, 인상, 중생상, 수자상이라는 생각이 있으면 곧 보살이 아니기 때문이다.”


대승정종분은 ‘대승의 바른 종지(宗旨)’란 뜻으로 금강경이라는 이 경전의 가르침의 요지가 핵심적으로 잘 드러나 있는 부분이라 할 수 있다. ‘정종’이란 바르고 으뜸 된다는 뜻으로 이 부분이야말로 대승불교 경전인 금강경의 종지를 밝히는 핵심이 되는 장이다.
보통 대부분 경전의 구성을 보면 크게 세 부분으로 나뉘는데 서분(序分), 정종분(正宗分), 유통분(流通分)이 그것이다. 서분은 육성취(六成就)라고 하여 경이 설하여지게 된 연유를 여섯가지로 나타내고 있는 부분이며, 유통분은 정종분에서 설하신 교법을 제자들에게 부촉하여 후세에 널리 유통되도록 하기 위한 부분이고, 가장 중요한 핵심이 되는 본문이 바로 정종분이 되는 것이다. 그러니 이 세 번째 분의 명칭이 대승정종분인 것은 금강경의 본문인 정종분 가운데에서도 그야말로 정종인 부분, 즉 핵심 중의 핵심에 해당되는 부분이므로 그렇게 이름을 붙였다고 볼 수 있다.
이 부분이 금강경 전체의 핵심이 되는 부분이고 사실 이 제 3분 이후에 나오는 많은 설법들은 이 대승정종분의 내용을 풀어 해설한 것이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제 1분에서는 부처님 삶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보임으로써 가르침이 그대로 삶 속에서 녹아들어 있는 모습을 설함이 없이 행동으로 설하셨다면, 이 부분에서는 부처님께서 하고 싶으셨던 말씀을 설법하고 계신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면 부처님의 말씀에 귀 기울여 보자.


부처님께서 수보리에게 말씀하셨다.
“수보리여, 보리심을 발하여 보살의 길로 들어선 자는 마땅히 이와 같이 마음을 내어야(發心) 한다.


보살마하살에서 마하살이란 마하살타의 준말로 마하는 크다는 대(大)의 의미이며, 살타는 중생 혹은 유정(有情)의 의미로 마하살타는 큰 중생 즉 대유정 혹은 대사(大士)라고 번역되는 보살의 별칭이다. 보살마하살은 보살의 크고 위대한 덕을 높여 붙이는 존칭이라고 할 수 있다. 바로 앞 분 선현기청분에서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발한' 선남자 선녀인이 부처님께 질문하는 내용에 대한 답변이 이 분 대승정종분인데, 바로 이 부분 보살마하살과 앞 분의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발한 자라는 부분이 산스크리트 원본에서는 '보디사뜨와야나 삼쁘라스티따(bodhisattva-yana-samprasthitena)'라고 하여 같은 원어를 서로 다르게 해석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다시말해 보살마하살은 곧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발한 선남자 선녀인을 의미한다고 할 수 있다. 그렇기에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발한 선남자 선녀인은 그 마음을 어떻게 머물러야 하고, 어떻게 수행해 나가야 하며, 어떻게 그 마음을 다스려야 합니까?'라는 질문에 '모든 보살마하살은 마땅히 이와 같이 마음을 내어야 한다'고 답하고 계신 것이다. 여기서 잠깐 짚고 넘어가야 할 점은, 이와같이 아뇩다라삼먁삼보리 즉 최상의 깨달음을 얻겠다고 발심한 모든 선남자 선녀인들이 곧 보살마하살이라는 점이다. 즉, 이미 깨달음의 직전에까지 이른 보살만 보살이 아니라, 단지 최상의 깨달음을 얻겠다는 초발심을 낸 모든 남녀 신도들이 그대로 보살마하살일 수 있다는 점이다. 화엄경이나 법성게의 '초발심이 곧 바른 깨달음' '초발심시변정각'이라고 했던 말씀을 떠올리게 하는 대목이 아닐 수 없다. 그렇기에 금강경은 이미 상구보리라는 깨달음에 거의 이르러 하화중생을 실천하기 위한 보살들을 위한 설법인 동시에 최상의 깨달음을 얻겠다고 발심한 모든 남녀 신도들을 위한 설법일 수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이 마음을 내어야 한다'는 부분은, 의역에 중점을 둔 구마라집의 한역을 보면 ‘그 마음을 항복받아야 한다’고 되어 있는데, 문맥을 보더라도 그렇고, 빠알리어 경전이라거나 현장의 해석(發趣如是之心)을 참고하였을 때 ‘이와 같이 마음을 내어야 한다’는 ‘발심(發心)’으로 해석하는 것이 알맞다고 여겨진다. 물론 항복받는다는 의미나 마음을 내어야 한다는 것은 의미상 크게 어긋나지는 않으니 어떤 해석도 무방하다고 본다.
앞의 제 2분에서 수보리의 질문, 즉 ‘그 마음을 어떻게 머물러야 하고, 어떻게 수행해 나가야 하며, 어떻게 그 마음을 다스려야 합니까?’ 에 대하여 이 장 대승정종분에서 부처님은 ‘이와 같이 마음을 내어야 한다’고 답변하고 계신 것이다.


존재하는 일체 모든 중생의 종류인, 이른바 알에서 태어나는 것, 모태에서 태어나는 것, 습기에서 태어나는 것, 화현하여 태어나는 것, 형상이 있는 것, 형상이 없는 것, 생각이 있는 것, 생각이 없는 것, 생각이 있는 것도 아니고 생각이 없는 것도 아닌 것들을 내가 다 아무것도 남지 않는 무여열반(無餘涅槃)의 세계로 인도하여 완전한 멸도에 들게 하리라.

다시 말해 부처님 말씀은 일체 모든 중생들을 다 무여열반의 세계로 인도하겠다는 대 서원의 발심을 해야 한다고 말씀하고 계신 것이다. 모름지기 대승 보살의 몫은 하화중생의 마음을 내는 것이란 뜻이다. 그러면 부처님 답변의 의미를 살펴보기에 앞서 ‘일체 모든 중생의 종류’라고 말씀하신 아홉가지의 중생의 종류, 즉 구류중생(九類衆生)에 대해 먼저 그 뜻을 살펴보도록 하자.

우리들이 일상에서도 쉽게 사용하는 단어인 ‘중생’이란 과연 무엇을 의미하는지, 어디까지의 범위를 의미하는지 여기에서 자세히 설명이 되어 있음을 볼 수 있다. 보통 우리들은 우리 인간들만 중생이라고 생각하거나 혹은 짐승들까지를 중생으로 본다거나 하지만 경전에서는 이상에서 언급한 아홉가지의 종류를 모두 중생으로 분류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보통 구류중생 중 처음의 네 가지인 태란습화(胎卵濕化) 사생(四生)으로 분류하는 것은 온갖 중생들의 태생 방식에 따른 분류라고 할 수 있다. 난생(卵生)은 알에서 태어나는 것으로 조류 등 알에서 태어나는 일체 모든 것들을 말하며, 태생(胎生)은 모태(母胎)에서 태어나는 것으로 온갖 짐승들이나 사람 또한 이 곳에 속한다. 습생(濕生)은 습기(濕氣)에서 태어나는 것으로 모기, 지렁이, 온갖 벌레들이 이에 속하고, 화생(化生)은 모태나 알 등의 태어나는 원인을 빌리지 않고 스스로의 업력에 따라 화현(化現)하여 태어나는 것으로 천상의 신들이나 지옥의 중생들이 여기에 속한다.
그리고 그 다음의 두 가지 종류인 유색(有色), 무색(無色)의 분류는 형상의 유무에 따른 분류로서 유색은 모양과 빛깔을 가진 중생으로 욕계(欲界)와 색계(色界)에 사는 이를 가리키며, 무색은 모양과 빛깔이 없는 신들로써 무색계(無色界)에 사는 이를 가리킨다.
그리고 나머지 세 가지의 종류인 유상(有想), 무상(無想), 비유상비무상(非有想非無想)의 분류는 인식의 유무에 따른 분류로서 유상은 인식작용이 있는 중생으로 무상천과 비상비비상처천을 제외한 나머지에 사는 중생이고, 무상은 인식작용이 없는 중생으로 색계의 세 번째 하늘인 무상천[무상유정천]에 사는 중생이며, 비유상비무상은 인식작용이 있는 것도 없는 것도 아닌 중생으로 비상비비상처천[비유상비무상천]에 속하는 신들을 말한다.

이와 같이 부처님께서는 보리심을 발하여 보살의 길로 들어선 보살마하살의 수행자들에게 구류중생, 즉 일체 모든 중생들을 아무것도 남지 않는 무여열반의 세계로 인도하리라는 발원을 해야 한다고 설하고 계시는 것이다. 무여열반이란 무여의열반(無餘依涅槃)이라고도 하며 일체 모든 고통과 번뇌의 불길이 다 끊어져 마지막 육신까지도 소멸하여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은 궁극의 경지로서 완전한 열반을 의미한다고 할 수 있다. 이에 반해 유여의열반이란 일체의 번뇌를 끊어 없앴지만 아직 육신을 남겨 둔 열반을 말하는 것으로, 마지막으로 아무것도 남음이 없이 그 육신마저 없어졌을 때를 무여열반이라고 하는 것이다.

대승정종분이라 대승의 바른 종지가 담겨 있으며, 이 금강경의 핵심 요지를 잘 표현하고 있다는 이 분에서 아마도 금강경을 공부하는 많은 수행자들은 어떻게 수행해야 하는지, 또 어떤 방법으로 마음을 닦아가야 하는지에 대한 구체적인 법문을 기대했을 터인데 이러한 부처님의 답변이 한편 실망스러울수도 있을 것이고, 또 한편으로는 질문과 좀 맞지 않는 답변이 아닌가 하고 의문스레 생각되는 분이 있을 것이다.

아마도 이 경전이 대승불교가 아닌 근본불교의 경전이었다면, 또 ‘보리심을 발하여 보살의 길로 들어선 선남자 선녀인’들을 대상으로 설법하는 것이 아니었다면, 또 수보리를 위시하여 이미 부처가 되기 직전의 깨달음에 이르렀지만 열반적정의 ‘저 언덕’으로 가버리지 않고 ‘이 언덕’에 남아 하화중생의 서원을 세우려는 ‘보살의 길로 들어선’ 수행자들에게 행하는 법이 아니었다면 부처님의 답변은 분명 달라졌을 것이다. 아마도 지금 우리들처럼 금강경을 공부하고자 마음을 내는, 그러나 아직 깨닫지 못한 우리네 중생들을 대상으로 설법을 하셨다면 ‘어떻게 그 마음을 머물러야 하고, 어떻게 수행해 나가야 하며, 어떻게 그 마음을 다스려야 하는지’에 대하여 우리들 근기에 맞는 좀 더 자세한 설법을 들을 수 있었을른지 모른다. 그러나 수보리의 질문의 핵심은 ‘보리심을 발하여 보살의 길로 들어선’ 즉, ‘발아뇩다라삼먁삼보리심’한 이들 이라는 데에 초점이 맞춰졌다고 할 수 있다. 일반 사람들에게는 부처님께서 이미 수많은 설법을 하셨고, 수많은 가르침과 실천 방법에 대하여 이미 많은 법문을 해 주셨다. 다만 이 경전에서는 대승의 종지, 다시 말해 보리심을 발해 보살의 길로 들어선 대승불교의 수행자들에게 대승의 종지, 보살의 종지를 말해주고자 하셨음을 이해할 수 있어야 하겠다.

보살의 공통된 서원은 상구보리 하화중생이지만, 지금 질문하고 있는 수보리는 거의 깨달음을 이루신 분으로써 상구보리를 원만하게 성취하고 계신 분이다. 다만 완전한 깨달음을 얻어 열반의 저 언덕으로 가기를 잠시 미루고 이 언덕에서 하화중생의 발원을 실천하기 위해 남아 있는 것다. 또한 그러한 원력의 수행자를 대승불교에서는 보살, 혹은 보살마하살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그러다 보니 부처님께서는 수보리에게 따로이 상구보리를, 깨달음에 이르기 위해 어떻게 수행해야 하고, 어떻게 마음을 닦아야 하는지를 설법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다만 부처님께서는 수보리를 비롯하여 ‘보리심을 발해 보살의 길로 들어선 선남자 선녀인’들이 보살의 길을 온전하게 걷기 위해서는 하화중생의 발심이 보살에게 있어서는 생명과도 같이 중요한 것임을 당부하고 계신 것이다. 보살을 부처라 부르지 않고 보살이라 부르는 이유는 바로 이러한 일체 중생을 구제하겠다는 발심과 원력이 있기 때문임을 다시한번 상기시켜 주고 있는 것이라 하겠다. 다시 말해 일체 중생 제도의 서원이야 말로 보살을 보살일 수 있게 해 주는 보살의 요건이라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것이 바로 부처님의 대기설법인 것이다. 설법을 듣는 상대의 근기에 맞게, 그 내면의 깊은 뜻을 온전히 헤아려 그 핵심을 바로 짚어 주는 것이다.

그러다 보니 우리들 입장에서는 금강경의 핵심이라는 이 내용을 보고도 그다지 깊은 신심을 일으키지 못한다거나, 기대에 못 미치는 실망감을 안고 금강경을 덮어 버릴 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그렇게 속단하기는 아직 이르다. 어차피 부처님의 가르침이 담긴 많은 경전은 이와 같이 부처님과 어떤 특정한 제자들 사이에 이루어 졌던 대기설법들을 모아 기록된 것이다. 내게 한 설법이 아니니 나중에 내가 보살의 길로 들어섰을 때, 내가 수보리처럼 깨달음을 얻어 이 질문이 나의 질문이 될 때, 그 때 금강경을 다실 열어 봐도 되지 않겠나 하는 분별은 그냥 놓아버려도 좋다. 앞 장에서도 언급하였지만 금강경은 ‘보리심을 발하여 보살의 길로 들어선’ 수행자들을 위한 설법이기도 하면서 동시에 우리들 즉 보살이 되고자 노력하고 초발심을 일으킨 바로 현실의 우리들에게도 훌륭하고 온전한 설법이 된다. 경전은 있는 그대로의 진리를 표현하고 있기 때문이다. 다만 설법의 표현방식이 다를 수 있을 뿐이지 궁극에서 그 내용은 온전한 진리를 그대로 표현하고 있기 때문이다. 서로 다른 길로 올라가더라도 궁극에서는 정상에서 만나기 때문이다.

아마도 이런 실망감을 조금이라도 느끼셨던 분이시라면 이제부터 나오는 부처님의 설법에 귀를 기울여 주기 바란다. 이 부분이 제 3분의 설법의 핵심이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진리를 향해 정진하고 수행하는 수행자들이, 또 보리심을 발하여 보살의 길로 들어선 자들이 어떤 마음으로 수행해야 하며, 살아야 하고 발원을 성취해야 하는지에 대한 소중한 법문이 이어지고 있다.


그러나 이와 같이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중생들을 완전히 열반에 들게 했다 하더라도 실은 한 중생도 열반을 얻은 자는 없다.

이 대목이 이 제 3분의 핵심이면서 또한 금강경의 핵심이고, 나아가 모든 부처님 가르침의 핵심을 잘 나타내 주고 있는 부분이라 할 수 있다. 겉으로 드러난 말만을 바라보면 안 된다. 그 깊은 의미가 무엇을 말하고 있는지를 잘 관해볼 수 있어야 부처님 말씀을 바로 이해할 수 있다. 그러면 왜 이 부분이 불교의 핵심이라고 하는지 하나 하나 짚어 보자.
앞에서 부처님께서는 모든 보살의 길로 들어선 이들에게 동체대비(同體大悲)의 마음으로 일체 모든 중생을 다 제도해야 한다고 발원하라고 말씀하고 계신다. 이 말이 방편법(方便法)을 말하는 것이라면 지금 이 부분은 근본법(根本法)을 말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다 제도해야 한다고 했지만, 사실은 어느 한 중생도 제도되지 않았음을 깊이 통찰하여 관할 수 있어야 한다는 내용이다.
이 말은 수없이 많은 의미를 함축하고 있으며, 수많은 부처님의 가르침을 함축하여 전달하고 있다. 이 말 속에서 무분별(無分別), 무아(無我), 연기(緣起), 공(空), 중도(中道)의 이치가 고스란히 녹아 있기 때문이다.

중생들은 열반에 들지 못하고 수없이 많은 번뇌와 괴로움, 불행 속에서 헤매이고 있다. 그러나 그것은 다만 환상이며 거짓이고, 신기루이며, 꿈이고, 물거품과도 같은 것일 뿐, 이 세상 그 어떤 이들도 본질적으로 괴롭지 않다. 다만 꿈 속에서, 환상 속에서 헤매고 있을 뿐이다. 그러므로 다만 이것이 환상이고 신기루임을, 꿈임을 그저 알기만 하면(반야) 더 이상 얽매일 필요가 없는 것이다. 일체 모든 존재는 이미 제도되어 있고, 열반의 저 언덕에 이미 도착해 있는 것이다. 다만 환상과 같은 탐진치 삼독에 빠져 환상과 같은 괴로움에 허덕이며 환상과 같은 열반을 찾아 헤매고 있을 뿐인 것이다. 중생들의 불행이 환상이기 때문에 보살들의 구제 또한 환상이라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는 말이다.
모든 중생들은 이미 구제 되어 있다. 새삼스럽게 또다시 분별을 일으켜 누가 누구를 깨닫게 할 것도 없고, 구제할 것도 없는 것이다. 깨달음을 향해 나아가고, 행복을 향해 나아가고 있지만 사실은 이미 우리가 바라던 니르바나의 ‘저 언덕’에 도착해 있는 것이다. 다만 모를 뿐. 무명(無明), 즉 어리석음으로 인해 이 삶이 환상이라는 것을 깨닫지 못하고 있을 뿐이다.

그래서 부처님께서 하고자 하는 말씀은 일체 중생을 구제하겠다는 하화중생의 발원을 가져야 하지만 ‘함이 없이 해야 한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살아있는 모든 중생을 저 피안의 세계로 인도해야 하지만 사실 그들은 중생이 아니며, 이미 인도되어 있다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는 말이다. 중생을 구제한다는 착각에 빠져 있어서도 안 되고, 거기에 집착해서도 안 된다. 걸림 없이, 집착 없이 발원을 성취해야 한다고 말씀하고 계시는 것이며, 발원의 성취라는 것 또한 성취가 아님을 말씀하고 계신 것이다. 중생들이 느끼고 있는 불행과 괴로움이라는 것도 환상이지만, 더 나아가 제도되어야 할 중생도 환상이며, 제도해야 할 보살 또한 환상일 뿐인 것이다. 다시 말해, 일체 모든 존재는 고정된 실체가 아니며, 고정된 ‘자아’가 아니다. 제도해야 할 ‘중생’도 없고, 제도 해야 할 ‘나’ 또한 모두 공(空)하고, 무아(無我)인 것이다. 제도 하고 제도 받는 주체가 모두 공할진데 공한 가운데 일어난 불행이며, 괴로움이라는 관념이 어디에 붙을 수 있겠는가. 그러니 ‘내가 중생을 구제한다’는 생각이 얼마나 큰 허구에 불과한 것인가. ‘나’도 공이고 무아이며, 중생도 공이고 무아이며, 중생의 괴로움도 공하고 보살의 구제 또한 공한 것일 뿐이다.

나와 남을 분별할 것도 없고, 중생과 부처를, 생사와 열반을, 행과 불행을, 제도 받는 이와 제도하는 이를 분별할 것도 없이 이 세상은 본래부터 무분별이고 공이며 무아인 것이다. 그 어떤 한 쪽에도 치우치면 안 된다. 본래부터 극단은 있지 않다. 그렇기에 중도의 실천만이 무분별과 공 무아를 체득할 수 있게 해 준다. 다만, 이렇게 세상이 만들어지고 온갖 경계가 나타난 것은 다만 공한 가운데 꿈처럼 인과 연이 서로 화합하고 흩어지고를 반복할 뿐인 것이다. 인연화합의 법칙, 인과응보, 연기의 법칙에 의해 다만 꿈처럼 일어났다가 사라지고를 반복할 뿐이다. 그러니 무아라는 말, 공이라는 말, 중도라는 말은 다시말해 연기법의 실상을 달리 표현한 말이라고 할 수 있다. 고정된 실체적인 존재가 아닌 연기되어진 존재, 인연화합의 존재이기 때문에 공이고, 무아라고 말하는 것이란 말이다.

이러한 이치, 진리를 한 마디로 표현한다면 ‘무아(無我)’라고도 할 수 있다. ‘나’도 없고, ‘남’도 없고, 구제받을 사람도 없고, 구제시켜 줄 사람도 없으며, 그렇기에 온갖 번뇌며, 속박, 무명 또한 모두 고정된 실체적 관념이 아니며, 실제적 자아가 아니라는 것이다. 부처님 당시에도 그랬고, 대승불교가 출현할 당시에도 마찬가지로 많은 사람들은 ‘아트만’이라거나, ‘푸드갈라’ ‘지바’ ‘뿌루샤’ 등의 ‘자아개념’을 설정하여 그것을 ‘영원불멸의 근본적인 존재, 생명자리’로써 이해를 하고 있었다. 부처님 당시에도 브라흐만의 ‘아트만’ 사상에 갇혀 있는 많은 이들에게 올바른 이해를 주기 위해 ‘무아설’ ‘제법무아’를 말씀하셨지만, 수백년에 걸쳐 내려오면서도 여전히 사람들은 ‘고정된 실체적 자아’를 상정하기에 여념이 없었고, 그것은 온갖 부파와 사상가들 사이에서 온갖 다른 이름을 가지고 등장하여 집착의 대상이 되었던 것이다. 이에 석가모니 부처님께서 전통적인 아트만 사상을 무아로써 극복하셨던 것처럼, 대승불교 출현 당시 즉 금강경이 설해질 당시의 온갖 ‘자아’ 관념(푸드갈라, 지바, 뿌루샤, 아트만 등)들에 집착하고 있는 수많은 사상가며 수행자들에게 거기에서 벗어날 것을 간곡하게 당부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부처님의 가르침은 다음 구절에 가면서 좀 더 구체적으로 밝혀지고 있다.


왜 그러한가 수보리야, 만약 보살이 아상, 인상, 중생상, 수자상이 있으면 곧 보살이 아니기 때문이다.

바로 이 구절에서 금강경의 가르침은 절정을 이룬다. 앞서 말씀하신 ‘모든 중생을 열반에 들게 했다 하더라도 한 중생도 열반을 얻은 자는 없다’는 말에 대한 부가적인 설명이기도 하면서, 석가모니 부처님의 제법무아에 대한 회귀이고, 근본불교에 대한 회귀이면서 대승불교의 파사현정의 모습을 여실하게 보여주는 말씀이라 하겠다.
앞서 말했던 것처럼 금강경이 설해질 당시 수많은 수행자와 사상가, 종교가들은 너도 나도 할 것 없이, 심지어는 부처님 가르침을 따르는 부파에서 조차 고정된 ‘자아’관념에 사로잡혀 있었다. 쉽게 말해 ‘나’ ‘나의 것’ ‘내 생각’ ‘내 몸’ ‘자아(atman)’ ‘중생(sattva)’ ‘영혼(jiva)’ ‘개아(pudgala)’ 등의 관념을 만들어 놓고 그것이 나의 본질이라고 생각하며 집착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부처님의 가르침은 확고하다. 이 세상 그 어떤 것이라도, 우리가 생각할 수 있는 그 어떤 관념도 내가 아니며, 본질이라고 할 수 없고, 그러므로 거기에 집착해서는 안 된다고 말하고 계신 것이다. 일체 모든 관념과 모양 소견, 집착, 번뇌며 온갖 상(相)으로부터 벗어나야 한다고 말씀하고 계시는 것이다.
아마도 이 구절의 해석에 대해 금강경을 공부한 많은 분들도 궁금증을 시원스레 벗어버리지 못하지 않았을까 싶다. 아상, 인상, 중생상, 수자상에 대한 해석은 아마도 금강경이 설해진 때부터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사상가, 종교가, 철학가며 수많은 스님들에게 많은 의구심이 들게 했고, 그 결과 오늘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사람들에 의해 수많은 해석으로 분분하게 펼쳐져 왔다. 그러다보니 금강경을 해설해 놓은 책들마다, 금강경을 설법하시는 스님과 법사에 따라 아상, 인상, 중생상, 수자상의 해석은 제각기 다르며 통일되지 못한 실정이다. 물론 그 근본에 있어서의 내용이야 모두가 아상을 타파하는 무아의 실천, 연기, 공의 실천으로써 온전하게 전달되어 왔음은 다행한 일이다. 결국 다 다르게 해석될 수는 있지만 근본에 있어서 그 내용의 변질은 없었다고 본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아상, 인상, 중생상, 수자상에 대한 해석을 보다 분명하게 해 두는 작업은 두 말 할 나위 없이 중요하다. 이는 곧 금강경 나아가 반야경 전체에 대한 해석에도 큰 영향을 줄 수 있기 때문이다.

이 네가지 상, 사상(四相)에 대해 온전히 해석을 하기 위해서는 금강경을 설하게 된 역사적인 상황에 대한 어느 정도의 이해가 있어야 한다고 본다. 근본불교, 초기불교에서 석가모니 부처님께서는 당시의 육사외도라든가, 브라흐만의 아트만 사상들을 논파하기 위해 연기법과 공의 해석을 ‘무아’라는 점에 치중하여 설명하였음을 볼 수 있는데, 그것은 당시의 시대적 상황, 즉 아트만이나 자아관념에 집착해 있던 당시의 상황 때문이었음을 상기해야 할 것이다. 다시 말해 연기법과 공 무아 중도 등의 개념이 모두 동일한 근본의 의미를 가지고 있지만 당시의 시대적 상황에 비추어 무아라는 단어를 수시로 채택하여 설법을 하셨다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금강경을 설하는데 있어서도 당시의 시대적 상황의 이해는 필수적이다.
앞서 말했듯이 당시 대승불교가 막 태동할 때 많은 사상가며 불교 수행자들은 ‘자아’ ‘중생’ ‘영혼’ ‘개아’ 등의 온갖 실체적인 관념에 많이 집착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그것은 약간씩은 다른 의미일지라도 모두 ‘실체적 자아’관념, 다시 말해 ‘무언가 고정불변하는 실체가 있다는 견해’를 네 가지로 나누어 설명한 데 불과한 것으로, 이 네가지 의미는 거의 동의어라고 볼 수 있을 정도인데, 부처님께서는 이러한 실체적 자아 관념에서 벗어나야 할 것을 설하고 계신 것이다.

그러면 하나 하나 사상에 대하여 설명해 보도록 하자. 역사적인 상황에 비춰 설명하기 위해서, 잠깐 짚고 넘어가야 할 점은 금강경의 산스크리트 원문을 알아보는 일이다. 구마라집 역의 한문 원전은 아상, 인상, 중생상, 수자상의 순서로 나와 있지만, 산스크리트 원문에서는 그 순서가, 아상, 중생상, 수자상, 인상의 순서로 등장하며, 그 원문을 보면 ‘atman(아상)', 'sattva(중생상)', 'jiva(수자상)', 'pudgala(인상)'라고 되어 있음을 주의할 필요가 있다. 아마도 다른 책의 설명을 보았을 때, 순서가 바뀐 것은 한문으로 번역할 때의 리듬과 운율을 맞추기 위해서 아와 인을 붙여 놓았을 뿐 그리 중요한 의미는 없다고 보여진다. 여기에서는 통상적이고 일반적인 번역에 맞춰 구마라집 번역의 아상, 인상, 중생상, 수자상의 번역을 따르고 있지만, 산스크리트 원문과 현장의 번역을 참고하여 새롭게 해석한 각묵스님의 [금강경 역해]에 나오는 사상의 해석인 자아[아상, atman], 중생[중생상, sattva], 영혼[수자상, jiva], 개아[인상, pudgala]라는 해석을 채택하여 그 역사적 상황이 갖는 사상의 의미에 대해 살펴볼까 한다. 산스크리트 원문을 살펴보면 이 네 가지 상의 역사적 상황이 갖는 의미를 유추해 보기가 좀 더 쉬워지기 때문이다.

우선 ‘아상’의 원문인 'atman'[자아]은 인도 전통 종교인 브라흐만의 아트만 사상에 대한 부정이다. 이는 흡사 석가모니 부처님께서 아트만을 부정하기 위해 무아(無我)법을 말씀하신 것과 같은 의미로 이해될 수 있다. 아트만이란 고정된 실체적 자아 관념으로 브라흐만에서는 윤회의 주체라고 이해되고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해 부처님께서는 고정된 실체적 자아관념, 다시 말해 고정된 실체로써 ‘나’를 상정해서는 안 된다고 말씀하고 계신 것이다. 브라흐만의 아트만 사상에 빠져 집착하고 있던 사람들에게 아트만이라는 집착을 가져선 안 된다고 하는 설법이 바로 아상타파의 교설인 것이다.

두 번째 ‘중생상’의 원문인 ‘sattva’[중생]는 ‘존재하는 모든 것’ 혹은 ‘살아있는 모든 것’이란 의미로 깨달음을 성취하지 못한 모든 중생을 의미한다고 할 수 있다. 이 두 번째는 불교 내부적으로는 수행자들이 중생과 보살이라는 이원론적인 분별심에 빠져 있는 것을 지적하면서, 동시에 나는 살아있는 생명체로써 죽어있는 것들과는 다르다는 이원론적인 분별심에 빠져있는 것을 깨우쳐 주고 있는 부분이라 할 수 있다. 이는 위로는 깨달은 이와 견주면서 난 아직 깨닫지 못한 중생이라는 상에 빠져 보살과 중생을 나누고 분별하는 상에 빠져서는 안 된다는 말이고, 아래로는 난 살아있는 생명체로써 죽어있는 저 바위며 물 흙보다 우월하다는 분별상에 빠져서는 안 된다는 말로써 이해할 수 있다. 다시 말해 당시 시대 상황에 비추어, 중생과 보살을 나누고, 생명 있고 없음을 나누는 어리석은 이원론적 집착에서 벗어나라는 설법이 중생상의 타파인 것이다.

세 번째 ‘수자상’의 원문인 ‘jiva’[영혼]는 ‘목숨’ ‘생명’ ‘영혼’이라는 말로써, 자이나교에서 ‘생사를 초월해 있는 존재’ ‘순수영혼’이라는 의미로 자이나교의 가르침에 대한 부정을 의미하며, 지바라는 생사를 초월하고, 시간을 초월한 순수영혼이 실체로써 존재한다는 상에서 벗어날 것을 의미하고 있다. 다시 말해 시간을 초월하고, 생사를 초월하는 영원한 참생명이 있다는 상을 타파할 것을 말하고 있는 것으로, 자이나교 ‘순수영혼’설에 대한 반박의 교설이다. 자이나교의 ‘순수영혼’에 빠져 집착해서는 참된 보살이라고 할 수 없다는 의미다.

네 번째 ‘인상’의 원문인 ‘pudgala’[개아]는 ‘개인’ ‘인간’ 등을 의미하는 개념으로 쓰이나, 부파불교의 한 부파인 독자부(犢子部)에서는 윤회의 주체를 의미하는 말로 유위법과 무위법의 중간자적 존재라고 상정하고 있으며, 여기에서는 이러한 생사를 초월한 윤회의 주체인 뿌드갈라가 존재한다는 상을 가지지 말라는 말씀인 것이다. 초기불교의 교설을 살펴보면 윤회를 한다고 하면서 윤회의 주체로써의 실체가 있지 않다고 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즉 ‘업의 결과’는 있으나 ‘업을 짓는 자’는 없다라고 하여 윤회의 주체를 상정하고 있지 않다. 이 문제, 즉 윤회와 무아의 문제는 지금까지도 학계에서 모순이라는 논쟁이 진행중인데, 아마도 부처님 열반 후 훗날 부파불교 가운데 독자부에서 윤회와 무아의 모순을 고민하다가 윤회를 하려면 ‘실체적인 윤회의 주체’가 있어야 하지 않은가 하는 의문에서 ‘뿌드갈라’라는 윤회의 주체를 상정하기에 이르렀을 것이다. 여기에서는 인상의 설명인 본문에서 조금 벗어나는 듯 하지만 잠깐 무아와 윤회문제를 살펴보지 않을 수가 없는데, 이 금강경의 설법에서도 보듯이 독자부에서 말한 ‘윤회의 주체’를 상정하는 것이 잘못된 것이며, 그렇듯 윤회의 주체인 ‘뿌드갈라’(인상)를 상정하게 되면 그것은 곧 보살이 아니라고 하기 때문이다.

잠시 무아와 윤회 문제를 살펴보면, 불교에서는 윤회의 주체를 고정된 실체적인 것으로 보지 않는다는 점을 먼저 언급해 두어야 한다. 윤회의 주체라는 것을 이름하여 유식불교에서도 ‘아뢰야식’이라고 붙여 놓긴 했지만 그 아뢰야식이 고정된 실체적 관념으로 붙인 것이 아니란 점을 이해해야 한다. 아뢰야식은 그야말로 업들이 모여 있는 업장이요, 장식인데, 그 또한 끊임없이 변화하는 제행무상의 한 모습일 뿐이다. 우리는 수많은 생을 이어가며 수많은 업을 짓고 받는다. 그러면서 업은 수없이 변하고 변하는 가운데에 있다. 그러니 당연히 그 ‘업의 모임’인 업장, 아뢰야식도 변하는 것은 당연한 이치다. 그러니까 이번 생에는 사람으로 윤회를 했다가 다음 생에는 축생으로도 태어나고 지옥에서도 태어나고 천신으로도 태어나는 것 아니겠는가. 즉 아뢰야식이 윤회의 주체이지만 그 윤회의 주체 또한 변화하는 ‘무아’ ‘공’ ‘제행무상’ ‘연기’의 속성을 그대로 가지고 있는 것일 뿐이다. 그러니 어찌 윤회의 주체를 딱 정해 실체화할 수 있겠는가. 윤회의 주체를 가지고 고정적인 ‘나’라고 할 수 있겠는가. 그 ‘나’라고 하는 것 또한 끊임없이 변할 뿐인 것이다. 그런데 부파불교의 한 부파인 독자부에서는 생사를 초월한 윤회의 주체를 ‘뿌드갈라’라고 하여 실체화하고 있었던 것이다. 바로 그러한 뿌드갈라라는 상에 빠져 있는 어리석음을 타파하기 위해 인상을 설하고 있는 것이다.

이상에서처럼 아상[자아], 중생상[중생], 수자상[영혼], 인상[개아]라는 말은 모두가 고정된 실체적 존재로써의 ‘나’를 상정하지 말아야 할 것을 역설하고 있는 거의 동일한 개념, 동일한 의도로 쓰여지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즉 ‘나’의 본질은 실체가 없이 인연따라 오고 가는 ‘무아’적 존재요, 공한 것일 뿐 그 어떤 실체적 자아관념을 만들어 거기에 빠져 집착해서는 안 된다는 뜻인 것이다. 다만 이렇게 네 가지 상을 말하고 있는 것은 당시 시대적 상황에 비추어 부파나 종교별로 이름만 다를 뿐 더 많은 ‘실체적 자아관념’이 있었지만 그 가운데에서도 아상, 인상, 중생상, 수자상이 가장 보편적이고 널리 알려져 있는 관념이었기에 이 네 가지 상을 대표로 나열하고 있을 뿐인 것이다. 그러니 궁극적으로는 이 모두가 ‘실체적 자아관념’ ‘실체적인 나’를 내세우지 말라는 무아의 설법이요, 공과 연기의 설법인 것이다. 이렇듯 사상에 집착하면 보살이 아니라는 설법으로써 ‘나’라는 상에 빠지지 않도록 한 이유는 ‘나’라는 상이 일체 모든 상에 빠지는 근원이 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나’라는 상이 근본이 되어 일체 모든 상이 만들어 진다. 쉽게 말해서, ‘나다’ ‘내것이다’ ‘내가 옳다’ 라고 하는 아상이 있음으로써 나와 너를 둘로 나누는 분별도 있게 되고, 인간과 자연을, 또 생사와 열반을, 중생과 보살을 나누는 분별들을 비롯한 일체의 분별 망상이 시작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이 네 가지 상의 타파는 곧 ‘나’라는 상을 깨버리는 수행을 의미하며 이는 무아(無我)를 깨닫는 의미로 이해될 수 있다. 연기(緣起)되어진 존재이기 때문에 무아이고, 공(空)이라고 보았을 때, 사상의 타파가 곧 연기법을 깨닫는 것이고, 공성을 깨닫는 것으로 불법 수행의 요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바로 이 부분의 설법이 불교의 핵심이며, 금강경의 핵심이고, 정종분의 핵심이라고 앞서 말씀을 드린 것이다.

그러면 조금 더 구체적이며 실천적인 의미로서의 사상(四相)에 대하여 살펴보도록 하자.
첫째, 아상[자아, atman]라는 생각은 이 몸과 마음을 가지고 ‘나’라고 생각하는 것, 혹은 나의 본질적인 근원이나 윤회의 주체 등을 설정하여 ‘나’라고 생각하는 것을 말한다고 했다. 이것이 일체 모든 분별과 고통과 번뇌 그리고 모든 불행의 원인이 되는 근본의 어리석은 생각인 것이다. 아상으로 인해 일체 모든 괴로움이 시작되고, 분별이 시작되고, 집착과 애욕이 시작되는 것이다. 불교를 한 마디로 표현한다면 아상을 타파하는 것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아상의 타파는 중요한 불교 수행의 요체라고 할 수 있다. 아상의 타파가 바로 무아의 실천이고, 연기, 공의 실천이기 때문이다. 아상은 좀 더 세부적으로 ‘나다’ ‘내것이다’ ‘내가 옳다’고 하는 분별로 나누어 볼 수 있다.

현실적으로 보았을 때, ‘나다’하는 것은 이 몸뚱이와 이 마음이며 생각이 나라고 착각하는 분별이다. 몸뚱이는 이 우주법계의 지수화풍의 요소들이 인연따라 잠시 내 몸의 지수화풍으로 화했을 뿐 고정된 실체로써 이 몸이 영원불멸의 것은 아니다. 지금 이 순간 내 몸은 과거 10년 전 내 몸과 물질적인 세포로만 보았을 때 전혀 다른 물질에 불과하다. 몸이란 것은 신구의(身口意)로 지은 업(業)에 따라 이 우주 법계의 지수화풍의 요소들이 잠시 이 몸뚱이로써 인연화합한 것에 불과한 것이다. 100년도 안 되는 짧은 시간이 흐르면 이 몸은 없어질 터인데 고작 이것을 가지고 ‘나’라고 이름 짓겠는가? 결국 이 몸이 ‘나’인 것은 아니다. 또한 마음이나 생각 또한 마찬가지다. ‘내 성격’이며, ‘특기’ ‘적성’ ‘IQ'를 가지고 ‘나’라고 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생각이란 것도 인연따라, 상황따라 끊임없이 변화하는 것이며, 성격이나 특기, 적성이라는 것도 끊임없이 변하는 것이지 ‘내 성격’ '내 마음‘하고 딱 정해진 것은 어디에도 없는 것일 뿐이다.

다음으로 ‘내것이다’하는 것은 내가 소유하고 있는 일체 모든 것들을 내것이라고 착각하는 분별이다. ‘나다’ 하는 아상으로 인해 ‘내것’이라는 소유욕이 생겨난다. 그러나 소유라는 것은 엄청난 착각에 불과하다. 소유의 주체인 ‘나’라는 것이 공하였고, 무아일진데 어찌 소유의 관념이 생겨날 수 있겠는가. 영원히 소유할 수 있는 것이 이 세상에 하나라도 있다면 ‘내 것’이라고 해도 되겠지만, 이 세상 어디를 가도 영원히 내 것이라고 할 것은 아무데도 없다. 잠시 인연따라 나에게로 와서 쓰여졌다가 인연이 다하면 다시 흩어질 뿐인데, 그것을 가지고 사람들은 분별하여 ‘내 것’이 되었다가 ‘남의 것’이 되었다고 분별함으로써 괴로워하고 있으니 이 얼마나 어리석은 일인가. 이 우주 법계의 일체 모든 것들은 제 스스로 정확히 제 자리에 언제나 그렇게 있을 뿐이다. 누가 누구의 주인도 아니고, 누가 누구의 것도 아니고, 누구의 것이 되었다가 누구의 것으로 옮겨가고 그러는 것이 아니다. 법계의 입장에서 본다면 그저 늘 있어야 할 자리에 인연따라 정확하게 있을 뿐인 것을 사람들은 어리석은 아상으로 인해 ‘내 것’이라고 하며 쌓고 집착하는데 여념이 없는 것일 뿐이다. 그러니 살아가면서 ‘내 것’이 늘어나고 줄어드는 것도 아니다. ‘내 것’은 어디에도 없다. 애써 표현한다면 내 것이기도 하며 전체의 것이기도 한, 오직 우주 법계의 것이 있을 뿐이고, 무분별의 부처만 있을 뿐인 것이다.

여기에서 그치지 않고 우리의 아상은 정신적인 것에서도 여실히 나타난다. ‘내가옳다’고 하는 생각, 내 가치관이 옳다라고 여기는 어리석은 분별이 바로 그것이다. 아마도 오직 ‘내 생각’을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어디에도 없을 것이다. 우리가 ‘내 생각’이라고, ‘내 가치관이며 세계관’이라고 생각하는 일체 모든 견해들은 모두가 다른 사람의 것들일 뿐이다. 배운 것이거나, 보고 들은 것이거나, 책에서 읽은 것이거나, 그도 아니면 그 좁은 경험으로써 몇 번 체험했던 것에 대해 나름대로 해석을 붙인 것에 불과하다. 그런 것들을, 수도 없이 듣고 배운 것들을 내 식대로 조합하고 짜맞춘 것에 불과한 것일 뿐이다. 그래 놓고 그것을 ‘내 생각’이라고 고정 짓고, 그것만이 옳은 것으로 여기고 있으니 이 얼마나 어리석은 일인가. 내 안에서 순수한 ‘내 생각’을 찾아 보라. 그 어떤 견해도 순수하게 내 생각일 수는 없다. 또한 그 어떤 생각도 절대적으로 옳다거나, 그르다거나 하고 분별할 수는 없다. 옳고 그르다는 것, 맞고 틀리다는 것도 사실은 우리가 만들어 낸 상대세계에서의 분별일 뿐이지 우주 법계는 그저 그대로 여여하게 흐를 뿐, 어디에도 맞고 틀리는 것이 없이 그저 절대적으로 항상 옳을 뿐이다. 맞고 틀림을 나누어 놓고 그 중에 맞는 것을 택하는 맞음이 아닌 그저 아무런 분별도 붙이지 않은 절대선이며, 절대적으로 옳은 것이란 말이다. ‘내가 옳다’라는 것이 얼마나 어리석은 생각인 줄 알아야 한다.

이상에서처럼 우리 안에서 ‘나’와 ‘상대’를 나누는 일체 모든 분별에서 온전히 벗어나야 그 때 나도 없고 상대도 없는, 내 것도 없고 상대의 것도 없는, 내가 옳고 그를 것도 없는 무분별의 절대 깨달음을 맛볼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아상은 아상인 줄 알고, 타파해야 한다고 설파를 하면서도 막상 그 위에 ‘참나’를 세우고, ‘아트만’을 세우고, ‘자성불’을 세우면서 절대적이고 근원적인 실체적 존재로써의 ‘나’를 내세우고 있는 것을 많이 보게 된다. 부처님께서 자아, 중생, 영혼, 개아라는 단어들을 쓰시면서, 또 금강경의 현장 번역을 보면 사상 뿐 아닌 아홉가지의 상을 열거 하면서 까지 아상을 타파할 것을 말씀하시는 데는 그 안에 그 어떤 절대적인 ‘나’도 상정해서는 안 된다는 말씀을 하고 계시는 것이란 점을 간과해서는 안될 것이다. 앞에서 말했듯이 사상뿐 아니라 현장이 말하고 있는 아홉가지의 상은 모두 여러 가지 단어로써 절대적인 존재를 가설하는 것을 정형화한 것이라 할 수 있는데, 이렇게 궁극적인 존재를 상정하고 그것에 이름을 붙이는 그것이 바로 아상의 극치라고 말씀하고 계시는 것이다.

이 즈음에 이르면 많은 분들께서 깊은 수렁에 빠질 것이다. 지금까지 내가 부처가 되려고 수행하는 것이고, 자성불을 찾고, 참나, 진아(眞我), 본래면목, 일심, 한마음, 자성청정심을 찾으려고 이렇게 열심히 수행하는 것인데, 그것이 모두 아상에 불과하다고 하니 이 즈음에 이르러서는 금강경의 철저한 아상타파의 정신에 잠시 혼란스러움을 경험하지 않을까 싶다. 그러나 그런 혼란스러움을 잠시 비워두고 부처님께서 왜 이렇게 말씀을 하셨는지 우리가 그토록 찾아 헤매고 있는 ‘참나’에 대하여 조금 더 생각해 보기로 하자. 보통 우리가 참나를 말할 때, 그 참나는 참나가 아니라 참나라는 말일 뿐이고, 생각일 뿐이고, 참나라는 개념의 인식일 뿐임을 알아야 한다.
많은 선지식 스님들께서 참나를 찾으라고, 자성불을, 본래면목을 보아야 한다고 방편설법을 하시지만, 많은 제자들은 ‘도대체 참나가 무엇일까’ 하고 참나에 대하여 생각하고, 분별하고, 인식하려고 애를 쓴다. 그러나 참나는 생각되어질 수 없고, 말로 표현되어질 수 없으며, 우리가 인식할 수도 없는 언어 그 너머에 있고, 생각 그 너머에 있으며, 우리의 인식과 분별의 그 너머에 있고 없음을 넘어 서 있을 뿐이다. 행여 ‘생각 그 너머에 있는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참나’를 말로 표현했다고 했을 때 조차 그것은 그렇다고 말로 표현되어지고 있을 뿐이지 그것은 여전히 참나가 될 수 없다. 단지 ‘우리의 생각과 인식, 말을 초월해 있을 뿐’이라는 생각이 일어날 뿐인 것이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우리들 중생들의 마음에서는 무언가 표현을 하길 바라고, 논의 되길 바라고, 설하여 지길 바라는 것이다. 그러나 부처님께서는 그 자리는 표현할 수도 없고, 논의의 대상도 아니며, 생각할 수도 없는 것이기 때문에 그 자리에 대한 그 어떤 상도 내세우지 말 것을 당부하고 계신 것이다. 이 즈음에서는 ‘참나’라고 방편으로 세워 놓은 그 방편까지도 오직 일미(一味)의 진리로써 거두어 들이고 있는 것임을 알아야 하겠다.
세속제와 제일의제(第一義諦)라는 말이 대승불교 경전이 나온 이후에 논사들에게 설파되고 있는 점도 이러한 점, 이렇듯 말로 표현될 수 없는 그 자리에 대한 또 다른 표현으로 설명되고 있는 것이다. 결론적으로 그동안 방편으로 부처가 되어야 한다고, 자성불을 찾아야 하고, 본래 면목을 보아야 한다고 하셨던 그 말 또한 단지 말일 뿐 참 진리의 당처에서는 한참 멀어져 있는 것임을 진리의 말 아닌 말로써 표현하고 계신 것이라는 점을 살필 수 있어야 하겠다. 그렇기 때문에 이 말로 표현될 수 없는 참 진리의 자리를 도무지 표현할 수 없다 보니 유마경에서는 ‘침묵’으로써 말씀을 하게 된 것이고, 역대의 조사스님들께서는 사량 분별이 끊어진 말아닌 말 즉, ‘화두’로써 그 의미를 설하고 있는 것임을 알아야 하겠다.
결론적으로 우리가 쉽게 쓰는 말 ‘참나’니, ‘자성불’이니, ‘본래면목’이니, ‘한마음’이니 하는 이 모든 것들 또한 하나의 진리를 표현하는 ‘말’일 뿐이지, 그것 자체가 당처인 것은 아니니, 그러한 말에도 걸려서는 안 되며, 집착해서는 안 된다는 말씀을 하고 계신 것이다. 금강경의 표현대로 한다면 ‘자성불은 자성불이 아니라 다만 이름이 자성불일 뿐이다’라는 설법으로 마감할 수 밖에 없을 것이다. 그래도 여전히 ‘그래도 방편일 뿐이지만 자성불이 있긴 있는게 맞지요?’ 하고 질문하실 분이 계시겠지만, 그것마저도 다 놓아버려야 한다는 말씀을 지금 금강경에서는 하고 있는 것이다.
이상의 아상에 대한 타파의 법문이 금강경의 전체에 깔려 있으며, 아상의 다른 표현으로써 중생상, 수자상, 인상, 즉 자아, 중생, 영혼, 개아라는 사상(事狀)도 설정이 되게 된 것임을 이해하면서 다음의 중생, 영혼, 개아에 대해 차례로 살펴보도록 하자.

다음으로, 중생상[중생, sattva]이라는 생각이다. 앞서 설명했듯이 중생이라는 의미는 ‘깨달음을 성취하지 못한 모든 존재’를 의미하는 말로, 깨달은 이와 깨닫지 못한 중생을 분별하는 착각이면서, 동시에 살아있는 존재와 죽어있는 존재를 분별하는 착각을 의미한다. 중생상도 그 근원에서는 ‘나’라는 아상의 범주에 포함된다고 할 수 있다. 깨달음의 주체인 ‘나’라는 상을 상정해 놓기 때문에, ‘내가 깨달아야 한다’거나 ‘나는 아직 못 깨달았다’거나, 혹은 ‘나는 깨달았다’라는 상이 생겨나는 것이기 때문이다. 중생과 부처라는 것도 착각일 뿐, 깨달은 각자(覺者)의 눈에는 일체 삼라만상 모든 것이 부처의 현현일 뿐, 깨달은 것도 없고 깨닫지 못한 것도 없으며, 생명 있는 것도 없고 생명 없는 것 또한 없을 뿐이다. 오직 아무런 분별도 짓지 않은 텅 빈 자리에서 홀연히 여여하게 존재할 뿐인 것이다. ‘나’라는 생각, 아상이 타파되면 중생상도 자연스럽게 타파될 수 밖에 없는 상인 것이다.

다음은 수자상[영혼, jiva]이라는 생각으로, 목숨과 생명에 대해 집착하여 생사를 초월하는 그 어떤 영혼이나 지바가 있다는 생각에서 벗어날 것을 의미하고 있다. 사람들은 누구나 생사를 초월하고자 하고, 목숨과 생명이 끊어지는 것에 대한 두려움에서 벗어날 수 없다. 그러나 이 또한 ‘나’라는 것이 있다는 착각, 아상에서 시작되는 것에 불과하다. ‘나’가 있으니 내가 조금 더 오래 살고 싶고, 생사를 뛰어 넘고 싶고, 그 어떤 불생불멸의 초월적인 내재적 존재[영혼, 지바]를 꿈꾸는 것이다. 그러나 내가 없는 무아의 입장에서 본다면 나고 죽음도 있을 수 없고, 목숨의 길고 짧음 또한 꿈이며 환상에 불과한 것일 뿐이다.

네 번째는 인상[개아, pudgala]라는 생각으로, 이것 또한 앞서 말한 것처럼 윤회의 주체로서의 그 어떤 실체, 뿌드갈라가 존재하여 나고 죽음을 영원히 반복하더라도 이 실체는 영원히 존재할 것이라는 착각에서 벗어날 것을 의미하고 있다. 후대 유식사상에서의 아뢰야식과도 비슷한 개념이라고 하겠는데, 아뢰야식은 윤회의 주체이기는 하지만 그것은 상속한다고 하여 연속성은 인정하더라도 실체적 개념은 아니며, 아뢰야식 또한 무아(無我)라고 하는 반면에 당시 부파불교의 독자부에서는 윤회의 주체로써 생사를 초월한 주체인 뿌드갈라를 상정하였으므로 그것에 대한 타파를 말씀하고 계신 것이다. 보통의 해석에서는 개아(인상)를 나와 상대를 갈라놓는 분별심에 대한 타파, 혹은 내가 인간이라는 생각에 대한 타파라고 말하고 있는데 그것은 아마도 뿌드갈라의 어의(語義)가 ‘개인’ 혹은 ‘인간’을 의미하는 개념이었기 때문에 그런 해석이 가능했다고 생각되어진다. 어쨌든 개아라는 생각 또한 결국에는 ‘나’라는 상의 연장선 상에 있다고 할 수 있다는 것은 분명하다. 생사를 윤회하는 주체로서의 ‘개아’를 상정하는 것 또한 앞서 자아의 설명에서 말했듯이, 그것은 결국에 타파되어야 할 것임이 분명하고, 나와 상대에 대한, 혹은 내가 인간이라는 생각에 대한 분별로 보더라도 이것은 ‘나’라는 상이 있기 때문에 생겨나는 아상의 연장이라고 할 것이기 때문이다.

이상에서처럼 부처님께서는 일체 모든 ‘나’라는 상에 대해 철저하게 타파할 것을 요구하고 계신다. ‘나’라는 상이 근본이 되어, 일체의 모든 상이 생겨나기 때문에, 나라는 상을 타파하면 동시에 ‘나 아닌 다른 모든 것’에 대한 분별 또한 여읠 수 있기 때문이다.
제 3분에 대한 설명이 많이 길어졌는데, 그 이유는 앞서 말한대로 제 3분이야말로 금강경의 본문이 정종분 중의 정종분이며, 불교의 핵심이며 금강경의 핵심 사상을 단적으로 잘 보여주는 부분이기 때문에 그러하였으며, 앞으로 진행될 금강경 공부에서 이 부분의 내용들이 여러번 반복되고 다른 표현으로 드러나게 될 것이기 때문에, 자세한 설명을 약하고 전체적인 설명을 하였다. 좀 더 세부적이고 자세한 이해는 앞으로 나올 경문에서 살펴보기로 하고 제 3분을 마친다.


Posted by 법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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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언가를 나누어 주거나 또 무언가를 받을 때,
참 기분이 좋다.
줄 때도 기분이 좋고, 받을 때도 기분이 좋다.

그런데 주었을 때 좋은 기분하고
받았을 때 좋은 기분은 좀 다르다.

주었을 때 기분이 좋은 이유는 무얼까.
무언가를 주게 되면
‘내 것’이 소멸되기 때문에 괴로워야 할텐데
좋은 것은 무엇때문인가.

그것은 우리 안의 참나,
다시 말해 온 우주 법계의 참성품이
둘이 아닌 하나로써, 대아(大我)로써 존재하기 때문이다.
주는 자도 받는 자도 주는 것 또한 모두가 하나의 성품이니까
무엇을 주고 받고도 없이 그냥 좋은 것이다.

즉 주었을 때 좋은 기분은
가만히 살펴보면 근원적인 기쁨이라고 할 수 있고,
받았을 때 좋은 기분은
보통 세간적인 기쁨이라고 할 수 있다.
받았을 때 ‘내 것’이 늘어나는 것이니까.

받았을 때는 들뜨는 기쁨이지만
주었을 때의 기쁨은 그저 담담하고 맑다.

물론 주고 받고를 다 초월해 버렸다면
주는 것이든 받는 것이든 똑같이
근원적인 기쁨을 얻을 수 있겠지만
보통이 그렇다는 말이다.

다시 말하면
주었을 때 우리는 기쁨을 느낀다.
근원적인 통찰의 기쁨을 느끼는 것이다.
주었을 때
좀 더 근원의 마음자리를 느끼게 된다.
좀 더 본래의 마음자리, 참성품과 가까이 하게 되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생각하면 주었을 때 ‘내 것’이 소멸되니까
괴로워야 하겠지만
참으로 맑게 주었을 때는
‘큰 나(大我)’가 ‘큰 나’에게 주고 또 받는 것이기 때문에
결국 그것도 ‘큰 나’가 받는 것이니까 좋은 것이란 말이다.

이것이 우리가 베풀고 보시를 해야 하는 이유다.
보시가 단순한 복을 짓는 일을 뛰어넘어
깨달음의 씨앗이 되는 이유인 것이다.

보시를 했을 때,
그 베품의 행위로 인해 기쁨을 느낄 때,
우리가 내 본래자리 참성품과 하나됨을
아주 미세하게나마 느낄 수 있는 순간인 것이다.

물론 주고 나서, 베풀고 나서
좋은 느낌이 아닌 싫은 느낌일 수도 있다.
주고 나서 마음이 괴롭다거나
‘내 것’을 잃었다는데 아깝다거나 허탈감을 느낄 수도 있다.

그것은 집착이 남아 있기 때문이다.
집착이 남아 있는 베풂은 기쁠 수가 없다.
참된 베풂은 집착이 없는 데서 온다.

베풂이야 말로 무집착의 온전한 실천이다.
집착하지 않아야 맑게 베풀 수 있고,
또한 베풀었을 때 집착을 버릴 수 있다.

좀 단정적으로 말하면
베푸는 것이 집착하지 않는 것이다.

무집착이야 말로
모든 중생들의 괴로움을 풀어줄 수 있는 해답이다.
집착이 모든 괴로움의 씨앗이 되기 때문이다.

모든 괴로움의 씨앗은 집착이고,
집착을 놓아야 평화롭고 행복한 삶을 살 수 있으며,
바로 그 집착을 놓으려면 베풀어야 한다.

집착을 놓는 것이 모든 수행의 핵심이다.
집착을 버리는 것이
마음을 비우는 것이고,
공으로 나아가는 길이며,
반야 지혜를 얻는 깨달음의 길이다.

지혜가 무집착이고,
무집착이 보시이며,
보시가 복덕이니 이 넷은 하나로 귀일한다.

그렇기 때문에
보시와 지혜는 하나일 수 있는 것이다.
복과 지혜가 수레의 양 바퀴일 수 있는 것.

조금 달리 말하면
집착없는 행이야말로 베풂의 행위이다.
집착 없이 일을 할 때
그 일은 복덕을 증장시키며 지혜를 증장시킨다.

집착 없이 자식을 낳아 기르고,
집착 없이 회사에서 일을 하고,
집착 없이 사랑을 하며,
집착 없이 수행을 하고,
집착 없이 출가를 하고, 또 결혼을 하고,
집착 없이 길을 거닐었을 때,
집착 없이 삶의 길을 걷고 있을 때,
다시 말하면
함이 없이 무엇이든 행하고 있을 때,
그 걸음 걸음은 그대로 지혜가 되고 복이 된다.

모든 일에 집착이 없으면,
모든 행위 하나 하나에 집착이 없으면
그 모든 삶이 무량대복전이 되는 것이다.

수행 따로 하고,
복 따로 짓고
그러는게 아니라 집착없는 행위는
그대로 보시이고 그대로 지혜이며 그대로 복이 되는 것이다.

집착없는 행을 하려면
과거도 미래도 다 놓아버릴 수 있어야 한다.
과거를 기억은 할 지언정
연연해 하거나 붙잡고 늘어질 것은 없고,
미래를 계획은 할 지언정
연연해 하거나 집착할 것은 없는 것이다.

과거나 미래에 마음이 걸리게 되는 것
그것이 바로 집착이다.

그렇기에 집착없는 행은
오직 지금 이 순간에 존재함으로써 얻을 수 있다.
오직 지금 이 순간
과거도 미래도 놓아버리고
다만 이 순간에 존재할 때 집착은 없다.

아니 이 순간에 깨어있을 때
‘나’도 없고, ‘남’도 없고,
아무것도 없는 텅 빈 공(空)만이 남는다.
그랬을 때는 줘도 준 것이 아니고
받아도 받은 것이 아니며
주고 받은 것 또한 공한 삼륜청정의 보시가 이루어지는 것이다.

그렇게 지금 이 순간에 깨어있는 마음으로 사물을 볼 때
이 세상은 좋고 나쁠 것도 없고
옳고 그를 것도 없는 텅 빈 고요 그 자체다.

좋다 싫다, 옳다 그르다 하고 고집할 것이 없으니
그 마음의 모든 분별이 쉬게 된다.
모든 분별을 쉬고 텅 빈 시선으로 세상을 보게 되면
이 세상은 전혀 새로운 순간이 열린다.

이 세상은 이전에 알고 있던 세상도 아니고,
내 틀 속의, 내 고정관념 속의 세상도 아니며,
오직 지금 이 순간 밖에 없는
어린아이같이 순수하고 텅 빈 새로운 순간이 되는 것이다.
날마다, 아니 매 순간 순간이 새롭지 않을 수 없게 되는 것이다.

이렇게 집착이 없다는 것은
분별할 것이 없다는 말이고,
날마다 새롭다는 말이며,
그러한 시선으로 세상을 살아가게 된다면
그 삶 자체가 보시의 삶이 되고 복을 짓는 삶이 되는 것이다.

부처님 가르침과 그 실천을
따로 따로 공부하고
따로 따로 실천하고
그 수없는 방편을 다 수행하려고 애쓴다면,
그것부터가 분별의 시작이고 번뇌의 시작이 아닐까.

하나를 잡고 늘어지면
그 하나에서 전체를 보게 된다.

무집착.
방하착.
그 하나만 붙잡고 부여잡고 공부를 하면
그냥 거기서 다 통하게 된다.

금강경도 무집착이고,
화엄경도 무집착이고,
공사상도 무집착이고,
무아도 무집착이며,
연기도 무집착이고,

금강경의 범소유상 개시허망도,
응무소주 이생기심도,
반야심경의 오온개공도,
화엄경의 일체유심조도,
법화경의 제법종본래 상자적멸상도,
열반경의 제행무상 시생멸법 생멸멸이 적멸이락도,

팔만사천의 모든 법문이
무집착이면 된다.

또 조금 다르게 표현한다면
팔만 사천의 모든 법문이
다 보시바라밀이고,
다 무분별이며,
다 깨어있음이고,
지혜와 복덕이며,
관이다.

하나를 잡고
그냥 죽기 살기로 뛰어들면 된다.




Posted by 법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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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가지 소식이 있어 전합니다.
금강경과 마음공부 책에 대한 의견들이 많았었습니다.
주로 사진들이 너무 많아서 글에 집중하기 어렵다는 의견과
가격이 비싸다보니 사거나 선물하기도 망설여진다는 의견들이
많았었습니다.

아마도 출판사에도 그런 의견들이 개진되었었나 봅니다.
출판사에 사진을 다 빼도 좋고 흑백으로 하고,
표지도 하드보드지로 안 하고 최대한 값을 줄여줄 수 없느냐고
여쭈었더니 출판사에서 그런 단점을 보완하여
사진을 줄이고 흑백으로 하고 표지와 속지 종이질도 조금 낮춰
본래 나왔던 것은 계속 내면서
새로 '보급판 금강경과 마음공부'를 만들어
가격을 낮추어 보겠다는 제안이 있었습니다.

금강경과 마음공부 책이 너무 비싸서 저도 좀 독자분들께
죄송한 감이 있었는데,
그래도 출판사에서 기존의 책이 안 팔리더라도
보급판을 만들어 보다 많은 분들께 보급해 드리겠다고 해 주셔서
이렇게 보급판 금강경과 마음공부가 나올 수 있었습니다.

결국, 15,500원으로 최종 결정된 '금강경과 마음공부(보급판)'이
출판되어 나왔습니다.
아래의 인터넷 서점을 클릭하시면
10% 할인된 금액인 13,950원으로 구입하실 수 있습니다.

그리고 목탁소리에서 10권 이상 구입하시는 분들께는
저자에게 줄 수 있는 가격, 약 70% 가격인(보급판이라 60%는 어렵다네요)
10,500원까지 출판사에서 보내드리겠다고 하였습니다.

10권 이상 구입하실 분들께서는
권수와 주소, 전화번호와 받으실 분 성함을 적어서
아래의 이메일로 보내주시면
출판사로 연락을 하여 택배로 보내드리도록 하겠습니다.
결재는 책을 받으신 뒤에 책 안에 들어있는 출판사 계좌로 하시면 됩니다.

책 주문 이메일 :
buda1109@hanmail.net



금강경과 마음공부 보급판(인터파크)
금강경과 마음공부 보급판(yes24)
금강경과 마음공부 보급판(교보문고)
금강경과 마음공부 보급판(리브로)

Posted by 법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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