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강경 12분 존중정교분 강의 - 바른 법을 존중하라
법상스님의 목탁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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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강경과 마음공부

금강경 12분 존중정교분 강의 - 바른 법을 존중하라

목탁 소리 2009. 9. 4. 09:48




제 12, 존중정교분
바른 법을 존중하라


尊重正敎分 第十二
復次 須菩提 隨說是經 乃至四句偈等 當知此處 一切世間天人阿修羅 皆應供養 如佛塔廟 何況有人 盡能受持讀誦 須菩提 當知是人 成就最上第一希有之法 若是經典 所在之處 則爲有佛 若尊重弟子


“또한 수보리야, 이 경이나 내지 이 경의 사구게 하나만이라도 설한다면 마땅히 알라. 이 곳은 일체세간의 천인과 사람과 아수라가 마땅히 공양하기를 부처님의 탑묘와 같이 할 것이다. 하물며 사람이 이 경을 받아 지니고 독송함에 있어서이겠는가.
수보리야, 마땅히 알라. 그러한 사람은 최상의 제일가는 희유한 진리를 성취한 것이다. 이 경전이 있는 곳은 부처님이나 존경받는 부처님의 제자가 있는 것과 같으니라.”


  이 분 존중정교분에서는 금강경이라는 이 바른 법이 그대로 부처님이나 부처님의 제자와 다를 것이 없기 때문에 이 경전을 부처님과 바른 제자를 존중함과 똑같이 존중하라는 뜻을 담고 있다. 이것이 삼보(三寶)이며, 삼귀의(三歸依)의 정신이다. 부처님과 부처님의 가르침과 부처님의 제자, 불법승(佛法僧) 이 세 가지는 서로 다르지 않다. 부처님을 존중하듯 부처님의 가르침과 부처님의 가르침을 훌륭히 수지 독송하여 희유한 진리를 성취한 제자들 또한 마땅히 똑같은 무게로 존중받아 마땅하다.

이 분에서는 이와 같이 이 경전의 바른 가르침이야말로 부처님과 존경받는 제자가 있는 것과 같음을 밝히면서, 이 경전을 수지 독송하게 되면 천인과 사람 아수라가 마땅히 부처님 탑묘와 같이 존중할 것이며, 결국 최상의 제일가는 희유한 진리를 성취할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다.


“또한 수보리야, 이 경이나 내지 이 경의 사구게 하나만이라도 설한다면 마땅히 알라. 이 곳은 일체세간의 천인과 사람과 아수라가 마땅히 공양하기를 부처님의 탑묘와 같이 할 것이다. 하물며 사람이 이 경을 받아 지니고 독송함에 있어서이겠는가.

요즈음도 그렇지만 오래전부터 금강경 독송의 신행은 계속되어 왔다. 금강경 전체를 독송하거나, 혹은 사구게(四句偈) 하나만이라도 계속 반복하여 독송하는 수행의 방법은 많은 불자들에게 쉽고 친근하며 어렵지 않게 실천할 수 있는 수행방법으로 자리 잡고 있다. 유독 다른 경전에 비해서 금강경 독송을 더 많이 선호하며 외우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 답이 바로 여기에 있다.

부처님께서는 수보리에게 명확하게 금강경 독경이라는 수행법에 대해 말씀해 주고 계신다. 이 경이나 내지 이 경의 사구게 하나만이라도 받아 지니고 독송한다면 일체 세간의 천인과 사람과 아수라가 마땅히 공양하기를 부처님 탑묘처럼 할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금강경 독송의 수행은 바로 이 분에서 이렇게 명확히 제시해 주고 계신 것이다.

탑묘(塔廟)란 부처님의 사리를 모신 탑을 말한다. 부처님께서 열반하시고 많은 중생들은 부처님을 그리워하고 신앙하게 되었다. 그러한 그리움은 탑이라는 신행대상으로 나타나 부처님을 대신하여 탑을 세우고 탑 주위에서 기도하며 수행하는 분위기가 형성되어 갔다. 탑묘는 그대로 부처님을 상징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탑묘에 수많은 사람들이 찾아오면서 공양하고 찬탄하고 찬양하며 불탑을 중심으로 대승불교의 신행활동이 시작되게 되었다.
그런데 이 탑묘를 중심으로 많은 사람들의 공양과 기도행렬이 계속되면서 탑묘는 대승불교의 새로운 구심점이 되었고 이 곳을 중심으로 대승의 보살들이 출현하게 되었다. 그러나 탑묘는 일종의 상징이다. 탑이나 사리가 어찌 부처님일 수 있겠는가. 그것을 부처님과 동일시하고 집착하게 된다면 그것도 하나의 상에 빠지는 일일 뿐이다. 그러나 방편으로 하나의 상징으로써 탑묘를 숭배하고 신앙하게 된 것이다. 부처님을 법신으로써 본다면 탑묘 뿐 아니라 이 세상의 일체 모든 것들이 모두가 부처님의 몸이 될 것이다.

부처님의 계신 곳은 사람 뿐 아니라 온갖 불법을 옹호하는 선신들이 함께 하게 마련이다. 여기에서 천, 인, 아수라는 바로 그 호법선신들을 대변하고 있다. 모든 존재는 육도를 윤회한다. 육도는 다시 지옥, 아귀, 축생이라는 삼악도(三惡道)와 천, 인, 아수라라는 삼선도(三善道)로 나뉜다. 지옥, 아귀, 축생의 중생들은 자신이 지은 전생의 악업을 받느라고 끊임없는 괴로움과 어리석음 속에서 산다. 그러므로 부처님을 공양한다거나 불법을 옹호하거나 기도하고 수행하는 등의 행위를 하지 못한다. 그러나 천, 인, 아수라는 과거세 지은 선한 업의 결과를 받기 때문에 부처님 도량을 옹호하고 공양한다.

그러면 천, 인, 아수라가 불법을 옹호하기 위해 불탑만을 찾을 것인가. 불탑은 부처님에 대한 하나의 상징일 뿐이다. 불탑이 부처님인 것은 그것이 법신이기 때문이지, 사리이거나 탑이기 때문인 것은 아니다. 그 곳이 부처님 가르침이 있는 곳이며, 가르침이 설하는 곳이기 때문에 공양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가르침이 있는 곳은 어디든 그곳이 불탑이다.
그렇기에 이 분에서는 사구게 하나만이라고 설한다면 그곳이 불탑이 되어 일체의 천, 인, 아수라가 마땅히 공양하기를 탑묘와도 같이 한다고 했다. 하물며 이 금강경 전체를 받아지니고 독송하는 공덕은 말할 나위도 없다.

산스크리트 경전의 원문에서는 금강경을 받아지니고 독송한다는 구마라집 역의 ‘수지독송’에 대해 좀 더 세심하게 다음과 같이 표현하고 있다.

“하물며 이 법을 완전히 갖추어, 마음에 새기고, 독송하고, 완전히 이해하며, 상세하게 설명하여 줌에 있어서이겠는가.”

사실 구마라집 역의 금강경에 등장하는 ‘수지독송’이라는 번역은 이러한 표현의 짧은 번역이다. 수지독송의 참된 의미는 이처럼 이 가르침을 완전히 갖추어 마음에 새기고 독송하고 완전히 이해하며 상세하게 남을 위해 설명해 주는 것 까지를 포함하는 의미인 것이다. 그러니 금강경 수지독송의 공덕이 크다고 입으로만 외우고 만다면 그것은 참된 의미의 수지독송이 아니며, 위타인설의 공덕이 크다고 타인에게 경전을 유포하기만 한다면 그 또한 수지독송의 참된 의미는 아닌 것이다. 참된 수지독송이 되려면, 금강경의 가르침을 완전히 갖추어, 마음에 새겨 완전히 이해할 수 있어야 하고, 그렇게 완전히 이해된 금강경을 끊임없이 독송함으로써 그 의미를 더욱 깊이 새길 수 있어야 한다. 그렇게 되었을 때 비로소 남에게 상세하게 설명하여 줄 수 있는 것이다.

수지독송의 뜻이 이와 같다고 하니 문득 의문이 들 것이다. 금강경 독송의 수행을 하고자 발심한 수행자들이 묻는 질문 중 한 가지는 ‘금강경의 뜻을 잘 모르는데 독송해도 되는가’ 하는 질문이다. 여기 금강경에서 설하고 있는 것은 무작정 독송만 하기 보다는 금강경의 가르침을 온전히 이해하고 새길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을 뜻한다. 그렇다면 과연 금강경의 뜻을 모르는 초심자 입장에서 금강경 독경은 아무 공덕도 없는 것이며, 할 필요도 없는 것인가? 그렇지 않다.

금강경 독경은 두 가지 수행 방편으로 이해될 수 있다. 첫 번째는 금강경이라는 방편을 통해서 모든 불교 수행의 핵심인 지관(止觀), 정혜(定慧)에 이르는 것이다. 모든 수행의 핵심은 마음을 비우고 관하는 것이다. ‘지(止)’의 수행은 마음을 멈춘다는 것으로, 탐진치 삼독이며, 번뇌, 욕심, 집착, 상념 등 끊임없이 계속되는 마음의 번잡함들을 다 멈추고 그쳐 말끔하게 비우는 것이며, ‘관(觀)’의 수행은 그렇게 멈춰진 고요한 마음을 있는 그대로 알아차리고 관찰하는 것이다. ‘멈추고 관한다’ ‘비우고 알아차린다’는 이 두 가지 수행이야말로 불교의 핵심 중에 핵심 수행법인 것이다. 성성적적(惺惺寂寂)이란 표현도 관수행을 통해 ‘성성’의 지혜에 이르며, 지수행을 통해 ‘적적’의 고요함에 이른다는 뜻이다. 모든 수행의 방편, 즉, 이를테면 염불, 참선, 간경, 주력, 간화선, 절, 사경 등 이 모든 수행이 지관에 이르기 위한 방편인 것이다. 마음을 비워라, 멈춰라 해도 잘 비워지지 않는다고 하고, 그 마음을 관하라, 깨어있으라 해도 잘 관해지지 않는다고 하니 ‘관세음 보살’ 염불이 되었든, ‘금강경’ 독경이 되었든, ‘옴 마니 반메홈’ 진언이 되었든, 절이 되었든, ‘화두’가 되었든 그 한 가지를 지관수행의 방편 삼아 붙잡고 정진해 나아가라는 것이다. 즉 잡념과 욕심과 번뇌를 다 버리기 힘들다고 하니 ‘금강경’이든, ‘관세음보살’이든, ‘화두’든 그 한 가지에 집중하고 관함으로써 다른 일체의 모든 잡념을 한꺼번에 끊고 깨어있을 수 있다는 뜻이다. 그래서 금강경 독경을 통해 얻을 수 있는 첫 번째의 수행은 바로 지관, 정혜, 적적성성의 깨달음인 것이다. 이러한 지관의 수행을 위한 방편으로 금강경을 독경한다면 금강경은 그야말로 방편일 뿐이다. 금강경의 뜻을 굳이 모른다고 하더라도 금강경을 독경하면서 마음을 금강경에 집중함으로써 마음을 비우고 독경하는 순간 순간 올라오는 잡념 등을 관찰해 나갈 수 있다면 그 또한 훌륭한 수행의 길이 되는 것이다. 이처럼 금강경 수행의 첫 번째 공덕은 독경수행을 통해 지관의 수행을 닦아 깨달음에 이르는 것이다.

반면에 두 번째의 공덕은 금강경이라는 부처님의 지혜가 담긴 가르침을 공부하고 완전히 갖추어 이해함으로써 얻을 수 있는 경전공부의 공덕이다. 이 두 번째의 공부에 있어서는 금강경의 온전한 이해가 반드시 필요한 것이다. 불교에서는 신해행증(信解行證)의 네 가지 단계로써 깨달음에 이른다고 보는데, 그 첫째는 굳은 믿음[信]을 바탕으로 두 번째 부처님의 가르침을 이해[解]하고, 세 번째로 이해한 가르침을 삶 속에서 실천하고 행[行]함으로써 네 번째로 결국 깨달음을 증득[證]할 수 있다고 본 것이다. 이 네 가지 신행의 단계, 경전 공부의 단계에서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해’ 즉, 바른 이해에 있다. 바른 사유를 통해 바로 이해해야지만 바로 실천할 수 있고 바로 깨달아 알 수 있기 때문이다.

부처님께서 열반하시기 직전 ‘자등명 법등명(自燈明法燈明)’ 하라고 하셨던 가르침을 보면 더욱 분명해진다. 자등명은 자신 스스로를 법의 등불로 삼아 자기 자신의 마음을 비우고 마음을 관찰함으로써 자기 안에서 깨달음을 얻으란 의미로 자력의 지관 수행을 통해 스스로 깨달음을 얻을 수 있다는 전자의 의미고, 법등명은 그렇게 스스로 자기 자신을 바로 비우고 봄으로써 법을 깨닫기 어렵기 때문에 부처님께서 진리의 가르침이 담긴 경전을 통해 깨달음을 얻을 수 있다는 후자의 의미를 담고 있다.

이처럼 금강경 수행은 두 가지로 나누어 볼 수 있지만, 이 두 가지가 서로 다른 것이라 여겨 따로 따로 생각해서는 안 된다. 즉, 금강경 독경 수행을 하면서도 금강경 공부를 통해 바른 이해와 실천이 함께해야 하고, 금강경 공부를 통해 이해와 실천을 함과 동시에 금강경 독경 수행을 통한 지관의 실천도 뒤따라야 하는 것이다.

그러니 처음 공부하는 초심자가 금강경의 뜻을 모른다고 독경수행은 하지 않겠다거나, 금강경 뜻을 다 공부한 뒤에 독경 수행을 하겠다거나 하는 것은 잘못된 생각이다. 또한 금강경 독경 수행을 통해 마음을 비우고 관하면 되는 것이지 금강경을 꼭 해석하고 이해할 필요가 있는 것이냐고 한다면 그 또한 잘못된 생각이다. 바른 수행자라면 금강경 독경을 통해 지관을 닦고, 금강경 해석과 공부를 통해 바른 이해와 실천을 함께 해 나가야 할 것이다. 불가에서 스님들이 처음 출가해 사미계를 받고 나면 비구계를 받기 전까지 5년 여 기간 동안 경전공부를 하는 강원이나, 지관의 참선공부를 하는 선원에서 공부를 필히 마쳐야 하는 것 또한 이 두 가지 수행이 그만큼 수레의 두 바퀴처럼 중요하기 때문인 것이다.


수보리야, 마땅히 알라. 그러한 사람은 최상의 제일가는 희유한 진리를 성취한 것이다. 이 경전이 있는 곳은 부처님이나 존경받는 부처님의 제자가 있는 것과 같으니라.”

그렇게 금강경을 완전히 갖추어 마음에 새기고 독송하고 완전히 이해하며 상세하게 남을 위해 설명해 준다면 그 사람은 최상의 제일가는 희유한 진리를 성취한 것이다. 단순히 사구게 하나만이라도 설한다면 그곳이 일체 세간의 천인, 아수라가 부처님 탑묘처럼 공양할 것인데, 하물며 이와 같이 금강경을 완전히 갖추어 마음에 새기고 독송하고 완전히 이해하며 상세하게 남을 위해 설명해 준다면 그 사람은 최상의 제일가는 희유한 진리를 성취한 것이다. 이러한 가르침이 있는 곳은 그대로 부처님이나 존경받는 부처님의 제자가 있는 것과 같다.

그러니 어떠한가. 가르침이 있는 곳, 그 가르침을 수지독송하는 이가 있는 곳, 그곳이 바로 부처님이 계신 곳이며, 부처님의 존중받는 제자들이 있는 곳과 다름이 없다. 조금 확대 해석한다면 금강경이 있는 곳이 그대로 법당이며, 금강경을 수지독송한다면 그 사람이야말로 부처님, 또 부처님의 존경받는 제자들과 다르지 않은 것이다.
금강경과 부처님, 부처님의 제자는 둘이 아니기 때문이다. 부처님과 부처님의 가르침, 그리고 부처님의 제자 이 셋은 서로 다르지 않다. 불법승 삼보는 하나다. 부처님의 가르침이 있는 곳이 그대로 부처님이 계신 곳이며 존경받는 제자가 있는 곳이다.

그러니 어떠한가. 꼭 절에 가야지만 부처님이 계신 것이 아니다. 집을 도량으로 만들고, 회사를 도량으로 만들며, 내 몸을 도량으로 만들려면 늘 금강경을 수지독송하면 된다. 부처님의 가르침[法]이 있는 곳은 언제나 부처님[佛]이 함께 하시며, 부처님의 존경받는 제자[僧]들이 함께하는 것과 다름이 없기 때문이다. 사실 승보(僧寶)라는 것이 스님들에 한정된 개념은 아니다. 불법승 삼보 가운데 승보는 부처님과 부처님의 가르침이라는 두 가지 보배를 바로 믿고 이해하며 실천하며 살아가는 바른 수행자를 말하는 것이다. 이러한 수행자에게는 승속의 제한이 없다. 깨달음에 어찌 승속이 별도로 존재할 수 있겠는가. 불교는 일체의 나눔과 차별, 분별을 모두 해체시켜 완전한 무차별로써 평등에 이르는 가르침이다. 사부대중이라는 것도 비구(比丘), 비구니(比丘尼), 우바새(優婆塞), 우바이(優婆夷)로 청정승가란 남녀스님과 남녀신도 사부대중을 아우르는 말인 것이다. 그러니 부처님 가르침을 바로 믿고 신행하며 실천하는 불자라면 그 사람이 바로 승보인 것이다. 결국 금강경을 수지독송하는 이가 바로 수행자요 승보이며 승보는 불보와 법보와 다르지 않은 것이니, 내 안에 불법승 삼보가 모두 구족되어 있는 것이다.

용성스님께서는 이를 동체삼보(同體三寶)라 하셨다. 즉 ‘자성연각즉불보(自性緣覺卽佛寶)요, 자성적멸즉법보(自性寂滅卽法寶)며, 자성청정즉승보(自性淸淨卽僧寶)’라고 하여 ‘내 마음을 깨달으면 부처님이요, 내 마음이 고요하면 법이며, 내 마음이 청정하면 수행자’라고 말씀하고 계신다. 내 마음 안에 불법승 삼보가 모두 구족되어 있다는 뜻이다. 그러니 ‘청정’한 마음으로 금강경 수지독송을 통해 ‘고요’한 마음에 이르르면 결국 ‘깨달음’을 얻게 되는 것이다.  

금강경을 수지독송하는 공덕은 이와 같이 한량이 없다. 그저 사구게 하나만을 설하기만 하더라도 그 공덕은 한량이 없는데, 스스로 이해하고 독송하며 남을 위해 설해주는 공덕은 말할 나위도 없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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