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돕는 신비로운 존재들 - 안나푸르나 순례(9)
법상스님의 목탁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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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말라야 명상순례

나를 돕는 신비로운 존재들 - 안나푸르나 순례(9)

목탁 소리 2013. 2. 28. 1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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촘롱은 안나푸르나 지역에서 가장 크고 번화한 마을이다. 게스트 하우스도 많을 뿐 아니라 따뜻한 물이 부족하지 않아 샤워를 할 수도 있고, 어떤 롯지에는 탈수기도 있어 빨래를 빨리 말려 입을 수도 있다. 전기 사정도 좋아 전기제품이나 특히 카메라 건전지 충전을 마음껏 할 수도 있다.

처음 촘롱 입구에서 본 롯지에는 한글로 김치찌개, 김치, 된장에 심지어 백숙까지 한다며 한국인을 잡아끄는 곳도 있었다. 내가 머문 롯지에서도 네팔 닷밧을 시켰더니 한국인이라고 특별히 김치를 추가로 얹어주기도 했다. 그뿐 아니라 많이 비싸지만 전화를 사용할 수 있는 마지막 마을이기도 하다.

그런데다 촘롱을 넘어서면서 급격하게 뛰는 물가를 생각했을 때 촘롱은 모름지기 모든 여행자들이 마지막으로 문명의 혜택을 큰 부담없이 누릴 수 있는 안나푸르나 여행의 전진기지인 셈이다.

나도 어제 도착하는 대로 모처럼 샤워도 하고, 빨래도 하고, 카메라 밧데리 충전도 하고, 주전거리기도 하면서 모처럼 정리의 시간을 가졌다.

오늘부터는 안나푸르나 지역 최고의 전망을 자랑하는 푼힐을 가기 위한 날이다. 아침 일찍 새로운 마음으로 가볍게 길을 나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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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도를 보고 타다빠니를 찾아가는데 분명 지도상으로 보자면 저 아래 계곡마을 끝까지 다 내려가기 전에 두 갈래 길이 나와야 하는데 그저 올 때 왔던 길 밖에는 눈에 띄지 않는다. 내리막 중턱 즈음에 희미한 갈래길이 하나 있기는 했지만 길이 정상적인 갈림길처럼 확연하지 않았는데다 아무런 이정표가 없어서 설마 했던 것이 길을 잘못 들게 하는 결정적 실수가 된 것이다.

올라가자면 한 시간 여를 올라야 할 거리를 다 내려와서 마을 사람들에게 물었더니 단번에 돌아오는 첫 마디가 “길을 잃었다”는 말. 그러나 곧장 뒤따르는 말이 아주 희망적이다. “노프라블럼!”

한 30분만 다시 올라가면 또 다른 길을 만난다는 것이다. 이 낯선 곳에서 길을 잘못들어 30분 만에 다시 길을 찾을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감사한 일인가. 이렇게 길을 잘못 들은 것 또한 내가 알 수 없는 법계의 또 다른 더 큰 이유가 있었으리라.

아무리 사소한 상황, 아무리 사소한 문제가 발생되더라도, 그 모든 것은 우주적인 인다라망의 정연한 연결고리 속에서 더 큰 의미를 가지고 벌어지는 것일 뿐이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우리 앞에 펼쳐지는 그 모든 상황, 그 모든 사람, 그 모든 문제를 그저 아무런 분별이나 두려움 없이 받아들이고 수용하는 일이다. 더 깊은 우주적 차원에서 법계는 우리에게 그 일이 일어나도록 배려 해 줌으로써 그 순간 우리가 털고 가야 할 어떤 삶의 과제를 완성하도록 돕는 것이다.

때때로 그것이 나를 괴롭히는 방식으로, 나에게 아픔을 주는 방식으로 나타날지라도 그것은 내 삶에서 꼭 필요한 것이다. 바로 그러한 법계의 의미를 완전히 통째로 수용하고 받아들이는 것, 그래서 어떤 일이라도 내 존재위를 자연스럽게 오고 가도록 허용하는 것, 그것이야말로 우리가 삶 속에서 할 수 있는 최고의 수행이다.

좋은 것과 나쁜 것, 옳은 것과 그른 것으로 나누는 일을 그만두고, 양 극단을 뛰어넘는 완전한 대긍정으로 내 삶에 찾아오는 모든 경계를 받아들이라. 그 모든 것은 다 좋은 것이다. 더 큰 진리의 목적에서 보았을 때 모든 것은 다 좋은 것이다. 그것을 완전히 받아들였을 때, 부정적인 삶에 대한 인식과 판단을 버리고 양변을 뛰어넘는 중도적인 대 수용, 대긍정의 열린 마음으로 전환할 때, 우리의 삶에는 경이로운 변화가 깃들기 시작한다.

사사로운 내가 소멸되고 더 큰 진리의 질서와 조화를 이루게 되는 것이다. 바로 이 순간에 우리가 흔히 ‘업장소멸’이라고 부르는 대전환이 일어나기도 한다. 지고의 수행자, 우리가 흔히 말하는 성자가 현실의 삶을 살아가는 진리의 방식, 비법이 있다면 바로 이것을 두고 하는 말이다.

완전한 수용과 받아들임, 무분별의 대긍정은 그 모든 두려움과 근심 걱정을 통째로 날려버린다. 그런 경계가 닥치는 순간 수용과 대긍정이 가능해지려면 바로 경계와 접촉하는 그 순간에 깨어있어야 한다. 생각과 판단에 휘둘리는 순간 받아들임과 대긍정이란 깨어있음의 덕목은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말 것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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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르쳐 준 대로 걷기는 하는데 영 길을 잘못 들어 온 것인지 길이 끊기고 또 끊긴다. 대충 손짓으로 저 산 중턱까지는 가야 길을 만날 것이라고 했던 그 지점만을 바라보며 길 없는 우거진 숲길을 만들며 헤쳐간다.

마을에서부터 따라오던 피부병 심하게 난 개 한 마리에게 돌아가라고 아무리 손짓을 하고 소리를 질러도 아랑곳 않고 따라온다. 포기를 하고 숲길을 새로 내며 걸어가는데 이 녀석이 무슨 호법 신장이 된 것처럼 나를 앞지르더니 한동안 길을 들춰 오롯한 본래의 길로 안내를 해 주는게 아닌가. 옴 마니 반메 훔.

바른 길을 만나 반가운 마음에 길을 걷다가 아차 싶어 뒤를 돌아보니 그 개가 안 보인다. 비스킷이라도 주려던 마음에 안타까움이 서린다. 우주 법계 곳곳에 인로왕보살이 있고 나를 돕는 보이지 않는 힘이 없다고 어찌 섯불리 말할 수 있는가.

그러고 보면 이런 순간이 한두 번 정도가 아니라 삶의 곳곳에서 그런 생각지 못한 도움의 손길이 있어왔다.

대학시절 미국에 배낭여행을 갔다가 하루는 워싱턴에서 무작정 교외로 향하는 버스를 타고 여행을 시작했다. 잘 알려진 여행지가 아닌 그저 무작정 현지인들의 속살 안으로 파고들어 보자는 생각이었다. 한 겨울 버스 안에서 한참을 잠들었다가 정신을 차리고 보니 인적이 드문 시골을 지나고 있었다. 후다닥 버스에서 내렸더니 해는 저물고 뱃속에서는 꼬르륵 신호가 왔다. 배는 고프고, 여기가 어딘지는 모르겠고, 한 겨울이라 몸은 얼어오고, 가까이 여관이나 숙소 그림자는 하나도 안 보이고, 불빛 있는 쪽으로 몇 발자국을 걸었더니 도로 가 식당 안에서 행복한 가족이 오순도순 모여 앉아 따뜻하고도 정겹게 맛깔스런 음식을 먹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가족 생각도 나고, 외롭고, 또 어찌 해야 할지 방법은 없고, 이런 상황을 스스로 선택해 놓고도 답 없는 상황에서 난감해 하고 있던 중이었다.

겨울, 낯선 외국 땅, 그것도 여행자 하나 없는 시골 마을에 홀로 뚝 떨어진 상황에서 답답해하며 시간이 흐르자 점차 두려움이 몰려오기 시작했다. 그래서 그저 막연히 걸었다. 걷다 보면 무언가 해결책이 나오겠지. 추운 겨울, 어딘지도 모르고, 인적도 없는 미국의 어느 한 시골 마을을 그렇게 계속 걸었다. 그런데 멀리 교차로가 하나 보이고, 그 한 켠에 공중전화 부스가 있었다. 공중전화 부스를 보았지만 그것은 그저 도로 한 켠을 채우고 있는 의미 없는 배경에 불과했다. 그런데 그 흔해빠진, 아무 도움도 되지 않을 전화부스가 그 순간 반짝이며 내 눈에 들어온 이유를 나도 잘 모르겠다. 그것이 우주법계가 베풀어 놓은 나를 돕기 위한 장치였다는 것을 마치 알기라도 했다는 듯 나도 모르게 무심코 전화부스로 발길을 옮겼다. 보통 전화부스에는 영어로 된 전화번호부 책이 두툼하게 한 권 메달려 있곤 했다. 추위나 녹일 겸 전화 부스 안에 앉아 의미 없이 전화번호부를 뒤척이는데 이게 웬 일인가? 그 책 뒤에 한글로 된 한인 전화번호부가 무슨 부록처럼 달랑거리고 있지 않은가. 반가운 마음에 책을 뒤척였지만 도대체 이 많은 워싱턴 주변 한인 전화번호부의 수많은 사람들 이름과 상호명에서 어디로 전화를 걸어 SOS 요청을 한단 말인가? 한참을 살펴보았더니 그 뒤쪽으로 한인 종교시설들이 즐비하게 있는 것이 아닌가. 수 백 여 한인 교회 이름이 나왔고 이어서 단 몇 개 정도의 절 이름도 보였다. 그 중 단연 눈에 띄는 것은 ‘법주사’다.

무슨 생각이었는지 그저 전화를 걸었더니, 마침 주지스님께서 전화를 받으셨고, 한참을 그 주변에 무엇이 있는지를 물으시더니 ‘잠시’ 기다리라고 하시더니 전화를 끊으셨다. 그 ‘잠시’를 믿고 몇 십 분을 꼼짝 않고 벌벌 떨며 기다렸지만 스님의 소식은 없었다. ‘그래 다른 곳에 가서 나를 찾고 계실거야’, ‘이 미국 큰 땅덩어리의 어느 한 귀퉁이에 앉아 고작 주변 상호명 몇 개를 알려드렸는데 제대로 찾아온다는 것이 이상한거지’. 한 시간이 지나면서 그야말로 포기를 하고 있는데, “학생” 하며 누가 나를 부르는 것이 아닌가. 스님은 전화를 끊고 잠시도 쉬지 않고 차를 몰아 달리신 것이다. 이 정도 거리는 미국에서 ‘잠시’가 맞다는 것을 뒤늦게야 알았다. 그 날은 마침 구정, 설 전날이었다. 절에 가서 맛있는 음식도 먹고, 따뜻하게 단잠을 자고, 그 다음날에는 구정이라 절에 오신 신도님들과 떡국도 얻어 먹고 행복한 에피소드를 만들 수 있었다.

어디 그 뿐인가. 고등학교 3학년의 시작을 앞둔 1월의 어느 겨울, 한 번도 가보지 못한 겨울산을 오르겠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아무 생각 없이, 아무런 준비도 없이, 말 그대로 별 생각 없이 청바지에, 구두에, 얇은 점퍼만 하나 걸치고, 가방에는 물 한 병, 빵 한 조각 없이 새벽부터 치악산을 올랐다. 아무것도 모르던 어릴 때라 국립공원이니 가다보면 슈퍼나 민박집에 딸린 매점이라도 있겠거니 하고 올랐는데, ‘아니 이럴수가’, 그 흔한 매점 하나 없는 코스로 올랐던 것이다. 허기진 배야 어떻게든 되겠거니 하고, 뭐 죽기야 하겠는가 하는 안일한 생각으로 상원사 쪽에서부터 비로봉 쪽으로 눈으로 길도 뚝뚝 끊겨버린 능선을 따라 종주를 이어갔다. 시간은 점점 흐르고, 배는 고파오고, 손발은 꼼짝없이 얼어붙고, 구두는 낡고 미끄러워 번번이 미끄러지기 일수고, 게다가 겨울산을 산행하는 사람은 그 날만 그런 것인지 한 명도 보이지 않았다. 그렇게 걷고 또 걷다보니 시간은 저녁으로 치닫고, 마침 그 때부터 때 아닌 눈발까지 날리기 시작했다. 말 그대로 어찌 할 바를 몰랐다. 겨울 산행을 하다가 죽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이 완전 이해가 가고도 남았다. 가야 할 길은 아직 멀고도 멀었다. 중간에 내려가는 길이라도 있으면 좋겠건만 흔적조차 보이지 않았다. 그러다가 결국 정신까지 혼미해지고 있었다!

배고픔과 추위와 외로움과 공포, 눈보라와의 사투를 비몽사몽으로 이어가던 중 환영이 보였다. 아니, 자세히 보니 그것은 환영이 아니었다. 바로 무슨 절이 나온다는 이정표가 아닌가. 내려가는 길이었다. 미끄럼을 타듯 혼미한 정신으로 겨우 겨우 내려갔더니 스님께서 따뜻한 라면에 밥, 과일과 떡을 가득 내어주셨다. 잠시 쉬고 기운을 차리고 났더니 버스터미널까지 차로 데려다 주셨다. 살아서 집으로 돌아간 것이다.

가만 생각해 보면 이처럼 살면서 막막하고 답이 없을 것 같던 수많은 순간들을 우리는 잘도 헤쳐 나왔다. 늘 그 때마다 답은 있었다. 가만 생각해 보라. 기적 같지 않은가. 그야말로 나를 지켜주는 수호천사나 요정, 호법선신이 있는 것이든 아니면 예전에 돌아가셨던 할아버지 조상신께서 나를 돌본 것 같기도 하다. 무어라 불러도 좋지만 분명 그런 ‘분’은 계신다. 물론 그 분이 ‘분’이라고 불러야 할 만큼 사람이나 신적인 존재일지, 아니면 그저 불성이나 신성, 혹은 법신이나 성령처럼 형상이 없는 존재일지, 그것도 아니라면 말로 표현하기 어려운 어떤 원리일 수도 있겠지만 분명히 우리의 삶을 이끌어주고 돌보아 주는 수호천사는 있다!

아니 어쩌면 이 우주법계는 언제나 우리를 돕고 있다. 삶이라는 현장 그 자체의 근본 속성이 자비요 사랑이 아닌가. 불교에서는 자비를 기독교에서는 사랑을 말하고 있다. 그것은 그저 하나의 교리가 아니다. 이 우주법계가 언제나 우리를 지켜보며 돕고 있고, 자비와 사랑으로 감싸고 있다는 가르침인 것이다.

풀 한 포기, 나무 한 그루 조차 마음을 열고 바라보면 나를 돕는 자비로운 손길일 수 있다. 유정, 무정의 일체 모든 존재에게서 나는 어머님의 품 같은 자비로우심을 본다. 마음을 활짝 열고 다가서 보라. 발 아래 여린 풀꽃과 돌맹이 하나 조차, 하늘의 구름과 바람 한 자락 조차 소곤소곤 우리에게 따뜻한 말을 건네주고 있다. 삶이 버겁고 힘겨워질 때면 언제나 이 우주를 향해 가슴을 활짝 열어 보라. 풀리지 않는 문제가 생겼을 때라도 마음의 문을 활짝 열고 내면과 세상을 반짝이는 눈으로 지켜보라. 분명히 나를 돕는 손길을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는 사람일수도 있고, 동물일수도 있으며, 책 한 권일 수도 있고, 흘러가는 라디오 소리일 수도 있으며, 바람과 구름일 수도 있다. 스승님일 수도 있고, 어린 아이일수도 있으며, 바보 같다고 여겼던, 혹은 미워했던 누군가일수도 있다.

만약 아직도 그 도움의 손길을 보지 못했다면, 먼저 내 가슴이 덜 열려있지 않은지 살펴볼 일이다. 이 세상이 나에게 주는 가르침과 지혜를 받아들일 수 있을 만큼 마음이 열려있지 않은 것은 아닌가. 만약 가슴을 활짝 열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아무런 도움도 오지 않고 계속해서 괴롭거나 서글퍼진다면, 바로 그것 자체가 답일 수도 있다! 지금은 잠시 힘들고 괴롭고 슬픔을 경험해야 할 때인 것이다. 바로 괴로움과 슬픔을 통해 성숙해 나아가야 한다는 사실을 이 우주는 나에게 일깨워주고 있는 것이리라.

삶은 언제나 균형 있게 배워야 하기에. 우리는 언제나 균형 감각을 가지고 세상을 경험해 나가야 한다. 행복을 통해 얻는 것과 동시에 불행을 통해서도 얻을 것이 있다. 풍요로움을 통해 깨닫는 것과 동시에 가난을 통해 깨닫게 되는 것도 함께 얻어야 한다. 나에게 칭찬해 주는 사람을 만남과 동시에 나를 비난해 주는 사람을 통해서도 깨달아 나가야 한다. 어느 한 쪽만을 고집하면 영적 성숙이 균형을 잃는다.

어떤가. 삶은 얼마나 아름다운가. 얼마나 신비로운가. 이 우주법계는 다양한 방법으로 우리를 돕고 있다. 우리를 무한한 자비로움으로써 돌보고 있다.

히말라야가 아니라, 아프리카나 극지방에 있더라도 걱정할 것은 없다. 그 어떤 여행을 떠날지라도, 아무것도 모르고, 아는 사람이 아무도 없을지라도 걱정할 것은 없다. 우리에게는 이 우주법계라고 하는, 하늘과 바람과 구름과 숲과 나무와 동물 친구들이, 또 세계 각국의 사람들과 자연과 우주가 있지 않은가. 활짝 열린 가슴만 있다면 어디로 떠나도 좋다. 어디에도 좋은 벗, 좋은 스승은 있으니.

그러니 이 아름다운 세상을 살아가는 여행자들이여. 두려워하지 말라. 그 어떤 것도 겁내지 말라. 나에게 주어진 길을 걸림 없이 자유롭게 거닐어 보라. 이 우주가 나를 돕고 있다. 아니 나를 돕지 않는 것은 어디에도 없다. 아버지 하늘과 어머니 대지가 나를 품어 기르고 있다. 가슴이 진정으로 원하는 곳을 향해 우리는 다만 두려움 없이 걸어가면 된다.

이 우주에는 눈에 보이는 질서 그 이면에 눈에 보이지 않는 더 크고 깊은 법계의 질서가 분명히 존재한다. 눈에 보이는 현상계의 질서에만 귀 기울이고 살 것인가, 아니면 그 이면에 깊은 뜨락에 자리한 법계의 투명한 질서에 나를 내맡기고 자유롭게 휘적휘적 우리의 삶을 유영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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