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운 행성, 마차푸차레 베이스 캠프 – 안나푸르나 순례(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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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말라야 명상순례

새로운 행성, 마차푸차레 베이스 캠프 – 안나푸르나 순례(6)

목탁 소리 2012. 8. 11. 14:51

 

데우랄리 계곡을 따라 베이스캠프로

데우랄리 깊은 계곡에 날이 밝는다. 바로 곁에 계곡이 있어 그런가, 아니면 그만큼 높이 올라와서 그런가. 데우랄리는 지금까지 묵은 곳 중에서 가장 춥고 바람이 많은 곳이다.

어지간히 바람을 좋아하는 나이지만 이 곳 계곡의 골바람은 한겨울 살을 에는 그것처럼 차다. 밤새 꿈속에서도 들려오던 계곡 물소리, 바람소리와 짧은 작별을 고하고 이제 이번 트레킹의 목적지라 할 수 있는 안나푸르나 베이스 캠프(ABC, Annapurna Base Camp, 4130m)와 마차푸차레 베이스 캠프(MBC, Machhapuchhare base camp, 3700m)를 향해 발을 옮긴다.

계곡의 아침은 늦다. 완만한 경사의 오르막을 한참 오르도록 저 위에 봉우리에서만 밝게 빛나는 햇살은 내려 올 기색이 없다. 어둑어둑한 계곡길을 따라 춤을 추듯 느릿느릿 타박타박 걷는다. 고도를 높일수록 새로운 꽃들이 반긴다. 새롭게 고개를 내미는 꽃들을 만날 때마다 오랜 연인을 만나듯 설레는 눈빛으로 지켜본다.

고갯마루 하나를 올라서니 저 멀리 투명하고 노오란 설산 하나가 우뚝 다가온다.

새벽 빛에 물들어 수줍은 듯 얼굴을 붉히며 그러나 청정히 서 있는 설봉, 그 설봉을 향해 한 발 한 발 연인을 만나는 마음으로 발길을 옮긴다. 그야말로 '그녀를 만나는 곳 백미터 전'인데, 이 거리가 눈으로 보면 잠깐 사이에 오를 것 같지만 얼마나 먼 거리인지 도무지 가늠이 되지 않는다. 이 안나푸르나의 묵직하고 드넓은 풍경은 전에 보아오던 거리감이나 공간감이 아니다보니, 과거 비슷한 기억을 끄집어 내어 비교, 대조해 볼 대상이 내 안에 없는 것이다.

눈 앞 정면으로는 높은 설산 하나 우뚝하고, 왼쪽과 오른쪽으로는 높이 솟은 봉우리들의 어깨동무, 그리고 그 사이 내가 걷는 길 오른편으로 청연한 계곡의 물이 흐른다.

물길을 따라 위로 위로 걸어 오른다. 길 좌우로는 제법 드넓은 초원에는 꽃들이 흐드러지게 피어올라 잠시 뒤 있을 햇살과의 살가운 만남을 기다리고 있다.

 

또 다른 행성, 마차푸차레

그리 오래 걷지 않아 저 멀리로 MBC가 목전이다.

마차푸차레 베이스 캠프 가까이인데 왜 마차푸차레(Machapuchare, 6,993m) 봉우리가 왜 보이지 않나 싶었는데, 오른편 산봉우리 뒤로 잠시 숨었다가 MBC 롯지 가까이에 다다라서야 그 투명한 모습을 드러내 보이고 있다.

포카라에서, 사랑콧에서, 페와 호수에서 며칠이고 만나왔던 바로 그 뽀족히 우뚝 솟아오른 독특한 영봉의 주인공, 물고기 꼬리라는 뜻의 마차푸차레를 이렇게 가까이서 본다는 것이 어찌 감격스럽지 않을 것인가. 더욱이 마차푸차레는 히말라야에서 유일하게 아무도 등정하지 못한 산으로 유명하다. 1957년 지미 로버트가 이끄는 영국 등반대가 정상 50m 앞까지는 등반한 적이 있으나, 결국 그 이후로 단 한 사람의 등반가도 이 곳 봉우리까지 오른 이는 없다고 한다. 그런데는 네팔인들이 특별히 이 산을 신성시 하기 때문이기도 하다.

마차푸차레 베이스 캠프의 롯지에 오른다. 따뜻한 생강차 한 잔을 시켜 놓고 롯지 주위를 걷는다.

롯지는 마차푸차레를 비스듬히 좌측으로 바라볼 수 있게 지어졌으며, 뒤쪽으로는 안나푸르나 장엄한 영봉들을 병풍처럼 호위시키고 있다.

롯지 뒤쪽으로 난 길을 몇 미터 가면 탁 트인 뷰포인트를 만난다. 지금까지의 여정에서는 전혀 만나 볼 수 없었던, 그야말로 '여기가 바로 안나푸르나구나' 싶은 그런 이국적인 혹은 다른 행성에 온 것 같은 착각을 일으킬 법한 풍경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진다. 그 위쪽 안나푸르나 베이스 캠프 방향으로 계속해서 이 꿈같은 황량한 아름다움이 이어지는 것이다.

오전의 햇살이 드디어 롯지 위로 내려앉는다. 따스한 눈부신 햇살의 찜질을 받으며 따끈한 생강차 한 잔에 몸을 녹이며, 산들 산들 살랑살랑 불어오는 남실바람이 뺨 위로 스치우는 느낌에 귀 기울이며, 눈으로는 마차푸차레와 지나 온 여정의 계곡을 바라보고 이렇게 서 있다. 이렇게 가만히 서서 이 모든 것을 느껴본다.

온 산의 감각을 온몸으로 느끼며

깊은 평온 같은 것이 밀물처럼 가슴 속으로 파고든다. 바람이 맨살에 부딪히는 촉감조차 성스럽게 느껴진다. 눈귀코혀몸뜻을 완전히 활짝 열고, 예민하게 깨어 지켜보며, 이 여섯의 문으로 들어오는 대자연의 모든 것들을 거르지 않고 흡수한다.

눈에 비친 설산의 영봉들과 귓전을 스치우는 계곡 물소리, 바람소리, 사람들 소리, 어디선가 들려오는 무슨 동물의 꽥꽥이는 웃음소리, 그리고 간간이 그 소리 사이 사이에 묵직하게 내려 앉은 침묵의 소리 없는 소리까지 온 몸이 귀가 되어 그 소리들이 증폭되어 들려온다. 그리고 코로는 이 설산의 내음을 맡아 본다. 향기 없는 청정하고 순결한 그 어떤 내음이 나지 않는 맑은 샘 같은 향기가 코로 들려온다. 혀로는 생강차의 따스하고 달콤한 온기를 고르란히 굴리며, 몸으로는 노곤한 하루를 마치며 집에 들어와 쓰러져 누운 아비의 심신을 고사리 손으로 주물러 주는 어린 아이의 손길 같은 햇살과 바람이 만들어내는 사랑의 손길을 느껴본다.

이렇게 온몸의 감각을 열어두고 느끼다 보면 저절로 생각이 줄어든다. 어느덧 생각이 활동을 멈추고 생각 너머의 맑은 공간이 대자연의 이 공간 처럼이나 선명히 드러나곤 하는 것이다.

이 우리 몸의 여섯 문을 달마는 도적이라 비유했다. 이 여섯 문을 잘 지키면 그 문으로 들어오는 모든 대상에 속지 않을 수 있고, 집착하거나 욕망을 일으키지 않음으로써 우리 존재는 그 어떤 다툼도 일으키지 않는다. 그러나 이 여섯 문을 잘 다스리지 못하면 온갖 잡스러운 것들이 마구잡이로 들어오고 만다. 그러면서 우리 내면을 더럽히는 것이다.

이 눈귀코혀몸뜻의 여섯 도적을 잘 막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달마는 『파상론』에서 다음과 같이 설하고 있다.

"눈의 도둑을 쫓아 버리자면 물질적 대상에 집착하지 않아야 하고, 귀의 도둑을 억제하자면 들리는 소리에 좌우되지 않아야 하며, 코의 도적을 항복시키자면 향기에 대하여 분별하지 않아야 하고, 입의 도둑을 제압하자면 맛에 탐미하지 않으며, 법다운 말만을 해야 하고, 몸의 도적을 항복받자면 모든 감촉에 좌우되지 않아야 하고, 마음의 도적을 조절하자면 무지를 극복하고 지혜를 닦아야 한다."

눈으로 욕망의 대상이 들어오고, 귀로 달콤한 칭찬과 듣기 싫은 욕설이 함께 들어오고, 코, 혀, 몸, 생각에도 온갖 것들이 들어와 마음의 백지에 온갖 그림을 그리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가 똑바로 정신을 차리지 않고 내버려두면 그 여섯 문으로 들어오는 모든 것에 생각은 좋거나 나쁘거나, 옳거나 그르다는 분별과 차별의 이름을 붙여놓고서는 좋은 것은 집착하고 싫은 것은 미워하는 활동을 시작한다. 그 활동에서 모든 애착과 증오, 모든 괴로움과 쾌락이 시작되는 것이다. 그래서 달마는 눈귀코혀몸뜻으로 들어오는 모든 것들에 집착하거나, 좌우되며 휘둘리거나, 분별심을 일으키거나, 탐미하지 말고 지혜를 닦아야 한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면 이 여섯 문을 잘 지키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어떻게 해야 이 여섯 문에 집착하지 않고 지혜를 닦아갈 수 있을까. 주인이 자기 집 문을 잘 지키면 도둑이 들어오지 않듯, 우리 몸의 여섯 문을 잘 지켜보면서 그 문으로 무엇이 들어오고 나가는지를 분명하게 자각할 수 있어야 한다. 알아차리고 자각한다는 말은 다만 있는 그대로, 들어오고 나가는 그대로 지켜본다는 말이지 거기에 어떤 판단을 가하거나 특별한 쪽으로 해석한다는 말이 아니다. 자각과 깨어있음은 모든 분별을 넘어선 곳에 있다.

그래서 달마는 다음과 같이 설한다. "만약 마음을 거두어 내면을 관찰하고 밖의 대상의 일을 밝게 깨달아 잘 관조할 수 있다면 탐진치 삼독심을 완전히 끊을 수 있고, 밖에서 들어오는 여섯가지 도적들을 잘 막을 수 있다. 그러면 많은 공덕과 갖가지 장엄이 저절로 이루어질 것이요. 진리에 이르는 많은 길을 낱낱이 성취할 것이다. 그렇게 수행하는 사람은 머지않아 부처를 증득하게 되리 라."

여섯 문으로 들어오고 나가는 것을 잘 관찰, 관조해 보라는 것이다. 잘 지켜보라는 말이다. 지켜본다는 것은 무엇이든 들어오고 나가는 그 모든 것에 차별상을 붙이지 않고 어떤 것이든 그저 바람처럼 오고 갈 수 있도록 나를 열어두고 허용한다는 것이다. 즉 모든 것을 받아들인다는 말이다. 받아들이되 붙잡아 집착하지 않는 것이다. 그래서 잘 지켜본다는 것은 다시 말하면 그저 그것이 오고 가는 것을 충분히 느껴보라는 말이기도 하다. 분별 없이 잘 지켜보기 위해서는 그것을 느껴야 하기 때문이다. 그랬을 때 눈이란 문으로 한 송이 작은 꽃이 들어올 때도 그 꽃의 아름다움을 충분히 느끼면서 그 안에서 신의 특성을, 진정한 아름다움과 사랑을 찾게 되기도 하는 것이다.

무엇이든 그것을 잘 관하게 되면 그 안에서 신성을 만나고 근원을 마주하게 된다. 세상 모든 것은 그 안에 진리를 품고 있기 때문이다. 특히 이와 같은 인위적이지 않은 대자연의 자연스런 숨결을 마주할 때 그 진리의 속성들은 우리 안에서 꽃처럼 피어나기 쉽다. 가공되지 않은 천연스러움, 자연스러움이야말로 그것 자체가 이미 근원 속에서 숨쉬고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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