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다보면 이따금씩
제가 짊어지고 온 삶의 그림자가
낯설게 느껴질 때도 있고,
앞으로 헤쳐나가야 할
보이지 않는 삶의 무게로
한참을 주춤거리며
내 삶의 시계가
딱 멈춰 섰을 때가 있다.
시간은 흐르지만
나에게 주어진 시간은
그대로 멈춰진 채
중심 없이
외로이 흔들릴 때가 있는 법이다.
어떤 일도 손에 잡히지 않고,
예전엔 생각만 해도
설레던 일들이
무의미해지고
낯설게 느껴질 때가 있다.
그 어떤 사람들이 곁에 다가와도
그 어떤 흥겨운 일을 벌이더라도
한참을 짓누르는
외로운 흔적을 떨쳐 버리지 못할
그런 때가 누구에게나 있는 법이다.
집에 들어 앉아 있어도
언젠가 나홀로 떠나
그림자와 함께 여행하던
그 바닷가 외로운 포구,
혹은 저홀로 울울창창 소리치며
그 깊은 산 우뚝 솟아 있던 소나무 한 그루가
지독하게 보고 싶을 때도 있는 법이다.
그 어떤 일도
그 어떤 사람도
그 어떤 희망도
이 길에 벗이 되지 못할 때.
오직 나홀로
이 외로운 길을 걸어가야 할 때.
바로 그 때...
그 때가 있는 법이다.
그래도...
외로운건 좋은 것이다.
외로울 때
비로소 내가 나의 친구가 되어주니까.
일상에서는
내가 나의 존재를 잊고
내 바깥 존재며 일들에만 관심을 가지고 살지
나 자신에게 고개를 돌리지 못하지만,
외로울 때
나홀로 고독의 한 가운데
딱 내 버려져 있을 때
그 때 비로소 내 안에 숨어 있던
참된 친구, 어진 벗을 만나게 되니까 말이다.
이 어둔 밤,
도량 옆 조용한 산길을 걸어본다.
후덥지근 하던 열대야 더위에서나
온몸을 달달 떨어야 하는
한겨울 추위에서는 느끼지 못할
그런 청정한 산기운이
길을 걷는 한 사람의
속 뜰을 비춰줄 수 있는 그런 날.
그런 날,
바로 오늘 같은 날에
삶의 무게를 무색하게 만드는
내 삶의 외로움이
소리 없이 찾아오는 것이 다.
그래도 다행인 건
신선한 요즈음의 밤공기며
함께 걸어줄 수 있는 숲의 식구들이 있어
그리 외롭지만은 않다는 점.
모처럼 찾아오는 이런 외로움의 때를
예전 같으면
무기력이나 우울증 쯤으로 여기며
벗어나려고 발버둥 치겠지만,
가만히 그 느낌을 바라보고 있노라면
그건 우울한 때가 아닌
오히려 신선한 삶의
활력이 되는 때임을 깨닫게 된다.
이럴 때가 있다는 것이
많이 고맙고 감사하다.
사람들은 이럴 때
우울증에 시달린다고 하지만
사실 이 때가
내 삶에 있어 가장 소중한 때다.
이런 때가 있다는 것은
우리의 내면이
모처럼만에 성숙할 수 있을
기회를 맞이한다는 것.
외로움의 깊이 만큼
내 삶의 깊이도 한층 깊어진다는 것.
그런 것이다.
밤공기가 참 좋다.
지난주에 법당 앞 단풍나무 아래
널찍한 평상을 마련해 두었더니
그냥 벌렁 누워 하늘의 별을 바라보고
아무 걸림 없이
그대로 세상을 마주할 수 있어서 좋다.
저 발아래
작은 텃밭도 이제 제법
어린 싹들이 사춘기로 접어드는지
재잘거리며 세상 구경하느라
싱그럽기 그지없다.
너희들도 이제 삶의 고된 때도 만나고
한바탕 거친 장마가 지고 나면
한순간 크게 성장하는 사춘기도 올 것이다.
그렇게 한 번 모진 삶의 때가 지나고 나면
그 후에 햇살 쨍 하고 내려 쬘 때
아침 이슬이 너희 잎사귀에 노래하며 내려 앉을 때
그 때
이 외로움의 소리없는 소리를
너희들도 듣게 될 때가 있을 것이다.
그 때
방 앞 작은 다실에서
차 한 잔 나누어도 좋을 것이다.
[2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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