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난과 험담에서 자유로와지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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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방한담 산사하루

비난과 험담에서 자유로와지려면

목탁 소리 2012. 6. 25. 16: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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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군가가 나를 비난하거나,

듣기 싫은 말을 하거나,

동의하기 힘든 평가를 내린다면,

바로 그 순간,

당신은 아주 중요한 선택을 내려야 한다.

 

그 말을 받아들임으로써

스스로 그 부정적인 말의 위력에 굴복당한 채

그런 존재가 되기를 선택하거나,

아니면 정신을 똑바로 차려 깨어있는 의식으로써

그 말이 그저 아무 힘도 얻지 못한 채

그저 흘러가도록 할 것인가를 선택해야 하는 것이다.

 

사실 나에 대한 상대방의 평가는

어디까지나 그의 단편적인 관점일 뿐이며,

그 말은 진실도 거짓도 없는 중립적인 에너지일 뿐이다.

 

그 말이 힘을 가질지 말지는,

그 말이 진실인지 거짓인지는

언제나 나의 선택에 달려 있다.

 

별 의미 없이 쉽게 내뱉는 상대방의 말 한마디에

우리는 언제나 과도하게 의미를 부여함로써

스스로를 그 말에 자신을 구속시키기를 서슴지 않는다.

 

화가 나서 홧김에 내뱉은

"재수없게 생겼어"라는 학창시절 친구의 말 한마디를

40이 넘어서까지 붙잡고 실체화하며 구속당한 채

정말 자신을 재수없는 사람으로 믿어 왔던 분을 보고

구업이라는 업력이 얼마나 강할 수 있는지를 새삼 느낀 적이 있다.

 

말의 힘이란 이와 같다.

자신이 그 말에 힘과 의미를 불어 넣는 순간

그 말은 살아 움직이며 자신의 삶을 지배하는

실체적 에너지로 바뀌고 만다.

 

그러나 자신이 그 어떤 말에도

실체성을 부여하지 않는다면,

그 어떤 최악의 험담이라 할지라도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못하고 말 것이다.

 

사실 상대방이 나에게 그 어떤 험담을 해 올 때

자신이 스스로에 대해 내리는 험담 만큼만

상대의 험담을 받아들이게 된다.

 

즉 상대의 험담이지만,

사실은 내 스스로 자신에게 내리는 자기 험담이며

자기 비난일 뿐인 것이다.

 

왜 상대방의 험담과 비난을

스스로 나서서 동의하고 동조하며

'맞아! 나는 저 정도의 험담을 받을 만 해'

라고 맞장구침으로써

그 험담에 힘을 부여하는가?

 

나는 그 어떤 외부의 판단이나 평가를 받지 않고도

자기답게 자신의 독립적인 삶을 살 수 있는 존재다.

좋거나 싫은, 옳거나 그른 그 어떤 평가 없이도

충분히 아름다운 삶을 살아갈 수 있다.

 

사실 이런 휘둘림은

내 스스로

자신을 옳은 사람으로, 좋은 사람으로

상대에게 보여지고 싶은 관념에서부터 시작된다.

 

스스로 평가나 판단의 희생양이 되기를 원하는 것이다.

좋게 평가받고 싶고,

좋은 대접을 받고 싶으며,

좋은 사람으로 인식되기를 바라는 것 자체가

이미 '좋고 나쁜' 상대적 분별심의

희생양이 되기를 선택하는 것이다.

 

상대방에게 평가 받지 않는 삶을 살 수는 없을까?

좋게 보이려고 애쓰지 않으며 살 수는 없을까?

험담 뿐 아니라 칭찬에 대해서도 기대하지 않을 수는 없을까?

 

칭찬 받고 싶고, 인정 받고 싶고,

관심 받고 싶으며, 좋게 평가 받고 싶은 그 마음에서 놓여날 때

비로소 비난, 험담, 비판의 말에도

자유로와 질 수 있는 중심 잡힌 힘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그 때 비로소

모든 삶의 주도권이 내 안에 들어온다.

상대방의 그 어떤 말이나 평가에도

전혀 휘둘리지 않을 수 있는 자기 중심이 잡힌다.

 

나와 상대를 평가하지 않음으로써,

상대의 좋은 평가를 기대하지 않음으로써,

상대의 나쁜 평가를 받아들이길 선택하지 않음으로써,

언제나 말의 주도권,

삶의 주도권을 굳건히 자기 안으로 가져 오는 삶을 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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