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질문]
사람이 사는 데 돈이 없으면 불편하고 궁색합니다. 주위를 보면 부자가 되려고 혈안이 되어 돈을 쫓아다니는데도 항상 궁색한 생활을 하는 사람들도 많고, 별다른 노력도 하지 않는 것 같은데 돈이 굴러 들어오는 사람도 있는 것 같습니다. 부자들은 전생에서든 현생에서든 물질적으로 남에게 많이 베푼 사람들일 것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스님! 자본주의 사회에서 힘겹게 살아가는 이 땅의 많은 사람들에게 부자가 될 수 있는 희망의 메시지는 무엇입니까?
[답변]
좋은 질문 해 주셨어요. 그게 우리들 사람 사는 데 가장 큰 문제입니다. 아무리 초월하고 산다고 해도 돈을 초월하고 산다는 게 어디 그리 쉽습니까. 누구나 돈을 좋아합니다. 저 또한 돈이 좋습니다. 수행자는 돈이 좋지 않은 사람이 아닙니다. 내 안에서 끊임없이 일어나는 돈에 대한 욕심과 바램, 집착들을 끊임없이 관찰하고 지켜보는 사람이 수행자인 것입니다.
'부자가 될 수 있는 희망의 메시지'라고 하셨는데요, 제가 생각하는 최고의 희망 메시지는 우리 모두가 ‘부자를 버리는 것’에 있다고 봅니다. 부자에 집착하는 마음을 버리고 오히려 청빈한 가난의 정신을, 작은 것으로도 만족할 수 있는 자족의 정신을 우리 존재 속에, 이 사회 속에 깃들게 하는 것만이 이 세상에 참된 부유함을 가져다 줄 수 있다고 봅니다.
물론 부자가 되면 좋지요. 그러나 나만 부자가 되거나, 소수의 사람들만 부자가 될 수 있는 것이라면 그것은 잘못 된 것입니다. 그러면 이 세상 모든 이들이 함께 부자가 되는 길을 찾아 봐야 한다는 말인데, 그것은 가난의 정신과 자족의 정신 외에는 없습니다. 인구는 넘쳐나는데 이 많은 인구를 다 부유하게 해 줄 자원도, 음식도, 물도, 돈도 이 세상에는 없기 때문입니다. 미국이나 유럽 같은 잘 사는 나라 사람들이 소비하는 패턴으로 지구인들을 모두 살도록 하려면 지구 같은 행성이 몇 개가 되도 모자란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들이 그러한 부자가 되는 순간 아마도 모든 이들은 또 다시 더 많은 것을 소유하고자, 남들보다 더 부자가 되고자 다툼을 벌이고야 말 것입니다.
그런 방식으로의 부자라면 우리는 그 부자를 과감히 버려야 합니다. 그런 부자를 버릴 때 진정 부유함을 누릴 수 있습니다. 돈이 많으면 그래서 그 돈으로 해야 할 일이 많아지면 우리는 더 행복해질 것 같지만, 더 행복을 누리지 못하게 되고 맙니다. 돈이 많아지면 그것으로 해야 할 일이 많아서 작고 소박한 행복을 놓치고 맙니다. 새벽 창으로 스미는 따스한 햇살, 봄에 피는 여린 꽃망울, 어린 아이의 맑은 눈동자, 눈 내린 겨울 산의 앙상한 가지가 주는 선연함들을 누리기 어려워집니다. 그것 말고도 돈으로 해야 할 좀 더 자극적이고 오감을 흥분시키는 것들이 많거든요. 그것 뿐이 아니예요. 돈이 많으면 작은 돈으로 살 수 있는 작은 것들의 고마움 또한 놓치고 맙니다. 옛날에 사 두었던 싸고 낡은 장갑과 아버님께 물려받은 빛바랜 소품들에 대한 가치를 잊습니다. 어제 먹다 남은 사과 반 조각이 오늘 아침 얼마나 맛있는지를 모르고, 지난 해 김장철에 해 놓았던 김치를 다음 해 여름, 가을까지 묵혀 먹는 묵은지의 맛을 모르며, 냉장고에서 썩어가는 음식물들을 버리는 일만 늘어갑니다. 이런 부자가 과연 얼마나 삶을 진하게 누릴 수 있을까요? 삶이 주는 작고 소담한 그러나 찐하고 짠한 행복을 어떻게 만끽해 볼 수 있겠습니까?
부자 되는 비법을 묻고 싶으셨다면 다소 실망감이 드실 수도 있겠는데요, 부언으로 조금 실질적인 답변을 드려 보지요. 이 세상 현상계는 화엄경의 ‘일체유심조’라는 말에서 볼 수 있듯이 우리 마음으로 짓고 무너뜨리고 그럽니다. 내 마음이 내 삶의 현상세계를 만들어내는데 그 중에 가장 큰 힘으로 형성력을 가지는 것이 바로 믿음, 즉 신념(信念)입니다. 가난한 사람이 계속 가난해 지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그것은 가난한 업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자신의 신념 속에 ‘나는 가난하다’는 ‘나 같은 사람이 부자가 될 수 있겠어?’하는 가난의 신념이 자리잡고 있기 때문입니다. 마찬가지로 부자들은 ‘나는 부자가 될 수 있다’는 신념이 있습니다.
바로 그 마음속에 자신의 삶에 대한 어떤 그림이 굳은 믿음으로 자리하고 있느냐에 따라 우리의 미래는 달라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삶의 어느 한 순간이나 어떤 한 사건을 계기로 신념이 확연히 바뀌는 사람은 그 때부터 현실도 바뀌기 시작하는 것을 봅니다. 우주법계는 언제나 우리의 신념에 100% 힘을 실어 줍니다. 언제나 그 믿음이 현현되도록 도와주지요. 그런데 문제는 우리가 부자가 되기를 바라기는 하지만 분명히 될 수 있다고 믿지는 못한단 말입니다. 그래서 부자가 못 되는 거예요. 기대나 바람이 미래를 만드는 것이 아니라 ‘믿음’이 미래를 만듭니다.
다시말해 부자가 되기를 기대하거나, 기다리거나, 바라지만 말고 ‘나는 이미 부자가 되었다’고 굳게 믿어버리란 말입니다. 지금 이렇게 가난한데 어떻게 이미 부자가 되었다고 믿느냐고 항변하겠지요? 그런데 왜 나 자신의 가난한 부분, 부족한 부분을 보고 가난하다고 낙인 찍는 것입니까. 가난한 부분도 물론 있겠지만 더 많은 부유한 부분이 우리 삶에는 넘쳐나고 있습니다. 아침 햇살의 따스함, 마음껏 누릴 수 있는 공기, 목마를 때 언제든 마실 수 있는 물, 가고 싶은 곳을 갈 수 있는 튼튼한 두 다리, 거기에 최소한의 청빈한 삶을 영위해 갈 수 있는 의식주가 있다면 그것은 더 이상 바랄 게 없는 부유함이라 할 수 있습니다. 사실 살펴보면 우리 삶에는 가난한 부분보다 부유한 부분이 훨씬 더 많습니다. 부자들과 비교를 하니 상대적인 가난을 느끼는 것일 뿐이지, 제가 인도나 네팔 등을 다녀보니 그 사람들에 비하면 우리나라에서 너무 가난해서 나라의 보조금을 받고 사는 사람들조차 그들보다는 훨씬 비교조차 할 수 없는 부유함을 누리고 있더란 말입니다.
다시말해 우리가 가난하다고 여기는 그 부족한 부분에 마음을 쏟으면 그것이 우리의 현실이 됩니다. 마음이 자꾸 가난한 부분, 부족한 부분을 보고 느끼니까 현실도 자꾸만 가난해지는 것이예요. 그런데 우리에게 이미 충분히 주어진 부유한 부분으로 시선을 돌리고, 마음의 관심을 돌려서 부유하고 행복한 그 부분을 충분히 삶 속에서 누리고 느끼고 지켜보아 보세요. 그러면 우리 마음에 부유함이 꽉 들어차게 되고 그러면 저절로 내 안에서 가난을 연습하기보다 부자를 연습하는 시간이 많아지고, 그것이 그대로 내면에서 부자라는 믿음으로 이어지는 것입니다.
우리의 내면은 무한한 창조의 에너지를 가지고 있는데, 중요한 점은 그 내면의 공간은 물질적인 현실을 보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의 마음을 본다는 점입니다. 마음이 부유한 사람에게는 그 부유한 마음에 따라 부유함이 창조되고, 마음이 가난한 사람에게는 그 가난한 마음에 따라 부족과 결핍이 창조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가난한 사람은 계속 가난해지고, 부자들만 계속 부자가 되는 것이 이유가 있는 거예요. 겉으로 보면 그게 불공평한 것 같지만, 사실은 부자들은 마음 속에서 부자라는 생각이 신념화되어 있다보니 계속 부유해지는 거란 말이지요.
그러니 부자가 되기 위해 정말 중요한 것은 돈을 버는 것에 있는 것이 아니라, 이미 주어진 작고 사소한 부유함일지라도 그것을 충분히 누리고 만끽함으로써 잊혀졌던 부유함의 감각을 우리 안에 살려 놓는데 있는 것입니다. 부자가 되는 희망의 메시지는 우리 삶에 이미 존재하는 작고 소박한 부유함을 누리고 느끼고 만끽해 보는 것에 있습니다. 결핍을 연습하지 말고 충만을 연습하는데 있는 것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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