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질문]
스님을 만난 인연을 항상 감사해 하며 살고 있습니다. 스님의 모든 말씀이 다 좋지만 저는 특히 '관수행'에 관한 가르침이 가슴에 깊이 와닿았습니다. 다시한번 깊이 머리숙여 감사드리며 한가지 질문 올립니다. 연령상 관리자의 위치에서 일을 하다보니 일을 지시하고 보고를 받아 검토해서 결재를 하는 일들이 주를 이루는데, 직원이 일을 잘못했을 때 많은 경계를 만나게 됩니다. 물론 그때 반응하는 제 마음을 지켜보면서 쉽게 경계에 끄달리지는 않습니다만, 스님의 말씀중에 누구의 생각도 옳다 그르다고 할수는 없으므로 그것을 그냥 '다른생각'으로 받아들이는 자세가 필요하다는 말씀이 있더군요. 그런데 논쟁이 되거나 당장 판단할 수 없는 그런 일이라면 당연히 '다른생각'으로 수용할 수도 있겠지만 능력이 떨어지는 직원들이 해가지고 오는 일을 보면 틀리고 잘못한 것들을 어렵지 않게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런 경우까지 '다른 생각'으로 받아들이는 것은 정말 어렵습니다. 물론 잘못된 일에 대해서 그것에 반응하는 제 마음을 관하고 그결과 관용심을 내는 것은 별개로 하고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가르침 부탁드립니다.
[답변]
안녕하세요. 늘 삶 속에서 마음을 관하고 계신다니 그 깨어있음을 깊이 찬탄합니다. 그래서 수행을 하는 사람이 수행이 어느 정도 되었구나 싶으면 일터나, 가정이나, 부모의 곁 같이 생생한 삶의 터전 안에서 자신의 수행 정도를 가늠해 보라고 하기도 합니다. 조용한 적정처에서 수행을 할 때는 마음 다스리기도 쉽고, 지켜보기도 쉽고, 조금씩 휘둘리는 마음도 마음을 관함으로써 잘 다스려 지곤 하는데, 생생한 삶의 터전에서 수많은 사람들과, 일들과, 또 가까운 인연들과 부딪치다 보면 이것이 생각처럼 쉽지 않다는 것이지요.
우리는 일상에서 주로 '생각' '사고'라는 것을 쓰며 살아갑니다. 그 머릿속에서 움직이는 생각을 가지고 사람이나 상황을 옳다 그르다 판단하는 것이지요. 그런데 그 생각이라는 것이 그저 불쑥 불쑥 튀어나오고, 실체 없이 오고 가며, 온전하지 못하고, 삶의 전체성을 자각하지 못한 채 다만 그 상황에서의 작고 좁은 판단만을 주로 하곤 합니다. 그 상황이 가지고 있는 전체성, 연기성을 자각하지 못한다는 것이지요. 모든 상황은 표면적으로 눈에 보이는 것 그 이면에 더 깊은 의미와 목적을 가지고 있고, 또 나와 내 주변, 그리고 이 우주와의 전체적인 연기성에 의해 깊이 서로 연결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 모든 것을 우리의 생각과 사고, 판단이 어떻게 다 이해할 수 있겠습니까? 도저히 그럴 수 없습니다.
그래서 '이것은 분명히 내가 옳다' '이 사실은 분명히 내 생각이 맞다'고 하는 바로 그 순간까지도 사실은 '오직 모를 뿐'이 되는 것입니다. 물론 눈앞의 현실에 대해서는 '옳고 그른 것'이 맞다고 생각될지 모르지만, 전체성, 연기성에서 볼 때 우리는 그것에 대해 완전히 알 수 없는 것이고, 더 깊은 차원에서 우리는 '모를 뿐' 인 것입니다. 그런데도 우리 생각은 늘 그 자체의 상황만을 보고, 그 사람의 행위만을 보고, 좋다 나쁘다, 옳다 그르다 라고 판단을 하곤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수행과 명상의 방식에서는 우리가 전혀 알지 못하는 영역, 즉 '오직 모를 뿐'인 영역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그것을 인정하기 위해 판단을 중지하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어느 한 직원이 분명한 실수를 저질렀고, 또 그것이 한두번이 아니라 계속되며, 그러다가 결국에 회사에 결정적인 타격을 줄만한 실수를 했어요. 그것은 분명한 실수입니다. 회사에서 봐도 그렇고, 사회적인 기준에서 봐도 그렇고, 분명히 다른 직원에 비해 잘못하는 일이 많습니다. 그것이 바로 현상계의 모습이예요. 그런데 그 이면에는 무엇이 있을까요? 그 이면에는 이를테면 이런 것들, 이런 이유와 목적이 있을 수 있습니다. 즉, 그 무능하게 보이는 직원이 우리 회사에, 그것도 내 부하직원으로 들어 오는 방식으로 나와 우리 회사가 가진 악업을 표면화시키게 되는 것이지요. 언젠가 있어야 할 나의 악업을 정화시켜 주기 위해서 그 부하직원이 바로 그 업을 녹이는 도반으로써 이 생에 나와 인연이 되었을 수도 있다는 말입니다. 또 지금처럼 법우님께서 마음공부를 하고 있을 때 그런 부하직원을 만났다는 것은 그야말로 엄청난 공부를 시켜주기 위한 매우 시의적절하고 반가운 공부재료가 될 수도 있는 것입니다.
그렇게 보면 그 부하직원의 잘못된 행동들이 반드시 잘못된 것으로만 보이지는 않을 것입니다. 당장에 눈앞의 판단으로 본다면 물론 잘못된 것이지만, 그것은 분명히 내 삶에서, 또 바로 그 순간에 일어나야 하고, 만나야 하는 일이었다는 것입니다. 바로 그것을 받아들이고, 완전히 수용하는 것 그것이 위빠사나이고 관 수행입니다.
삶의 전체성, 연기성, 업보성을 완전히 받아들이는 것이지요. 그랬을 때 타인의 옳고 그른 모든 것, 내 삶에 일어나는 좋고 나쁜 모든 것을 그저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게 되는 지혜의 정견이 열립니다. 물론 그것은 분별 없는 '바라봄'에 의해서 생기지요.
판단하는 것은 '있는 그대로를 있는 그대로' 바라보는 것이 아닙니다. 물론 삶을 살기 위해서는 순간 순간 '옳다 그르다' '잘 했다 잘못했다'는 판단을 해야 하고, 그 판단을 토대로 삶의 현장을 살아나가야 합니다. 그리고 그것은 아무 문제가 없습니다. 현실 속에서는 옳고 그른 것이 분명히 있고, 판단해야 할 일들이 끊임없이 펼쳐져 있습니다. 수행은 그것조차 하지 말라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다만 판단을 하고, 잘못된 일을 지적해 주고, 할지라도 거기에 얽매이거나, 집착하거나, 화를 내거나, 그것을 너무 심각하게 생각지 말라는 것입니다. 즉 '두 번째 화살을 맞지 말라'는 것이고, '응무소주 이생기심, 마땅히 마음을 내되 머무는 바 없이 마음을 내라'는 이치인 것입니다.
옳고 그른 생각이 없고 다만 다른 생각이 있다는 말은, 그저 그 모든 생각들을 '있는 그대로' 보라는 말입니다. 다만 있는 그대로 볼 뿐 거기에 판단을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다만 판단을 하더라도(이생기심) 그 판단에 얽매이거나 집착하거나 머물러 있음으로써(응무소주) 화와 성냄 등에 휘둘리지는 말라는 것입니다.
모든 '생각'과 '사고'들을 너무 신뢰하지 마세요. 그것은 '지금 이 순간'이 아니라 거의 대부분 과거이거나, 미래일 뿐입니다. 생각과 사고는 똑똑할지는 몰라도 그다지 지혜롭지는 못합니다. 판단이 일어나는 순간 생각은 과거로 뛰어가 현실의 그것과 비슷한 과거의 어떤 것을 가져옴으로써 판단의 잣대를 만들어 내고 그것을 기준으로 현재를 판단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현재 그 자체로만 보게 되면 그 모든 것들은 '다만 있는 그대로' 일 뿐입니다.
그리고 그 실수가 잦은 부하직원을 볼 때에도 '어제 실수했던 부하직원'으로 본다면 그것은 현재에 깨어있는 관이 아닙니다. 과거에 얽매인 시선으로 그 사람을 바라보는 것이지요. 그 사람은 '실수가 많은 부하직원'이 아니라 그저 지금 이 순간 전혀 새로운 한 사람일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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