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틀 머문 남체에 벌써 정이 든 것인지,

발걸음을 떼려니 꽁대와 남체바자의 풍광이 시선을 잡아 끈다.

 

 

매 순간 순간의 현실에 나를 활짝 열어 둔다.

진정 열려있음이란 어떤 것인지를 비로소 진하게 느낀다.

이 대자연의 모든 것이 그 어떤 걸러짐도 없이 파도치듯 안으로 밀려들어오고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란 그저 그것들을 받아들여 충분히 느끼는 것 뿐이다.

남체에서 텡보체(Tengboche, 3860m)까지의 첫 번째 구간은

어제 에베레스트 뷰 호텔에서 보았던 바로 그 길로

두세 시간 동안 계속해서 입을 다물지 못하게 하는 웅대한 파노라마가 펼쳐진다.

 

 

아! 이것은 자연이 만들어 내는 장엄한 예술작품이요

엄중한 오케스트라이고 설산의 대서사시다.

발걸음과 호흡과 눈에 비친 대자연이

괭하고도 영령한 조화를 이루며 이 모든 것들과 하나가 되어 걷는다.

아! 그렇다.

이것은 걷는다기 보다는 그렇게 하나가 되는 과정이 아닌가.

아무런 간섭도 받지 않고 홀로 걷는다는 것은

자연과 하나되는 조화요 교감이고,

우주적인 근원과 연결되는 기도요 수행이기도 하다. 

헨리 데이빗 소로우는

'확신하거니와 내가 만약

산책의 동반자를 찾는다면,

자연과 하나가 되어 교감하는 어떤 내밀함을 포기하는 것이 된다.'

라고 말했다.

 

 

안 클레르 콜라타 수녀님의

산책과 자연과의 교감, 그리고 기도와 수행의 일치성에 대한

다음과 같은 언급에 나는 전적으로 동의한다.

'나는 산책길에서 아주 오랫동안 쉬곤 합니다.

풀 위에 앉거나 누워서 꼼짝도 하지 않고 가만히 있으면,

온몸이 이 거대한 우주에 완전히 동화되는 것 같아요.

그럴 때 나는 높은 곳을 향해 기도합니다.

아마도 하나님과 함께 조용한 시간을 보내고 싶어서겠죠?

걷기와 기도, 이 두가지는 깊은 관련이 있습니다.

산책할 때 내쉬는 숨은

내게 기도와 같은 것입니다.'

이처럼 홀로 자연의 길을 걷는다는 것은

곧 자연과 하나 되는 불이(不二)의 깨우침이며,

그것은 달리 말하면 신과의 대면이고,

어머니 대지의 품속에서 함께 호흡하는 기도이자

면벽 스님들의 지고의 참선이며,

구도자의 수행과 다르지 않다.

설산을 배경으로

하얀 설산과도 같은 스투파(탑)가 우뚝 서 있다.

 

 

여행자는 길을 걷다

스투파 앞에서 예를 올린다.

이 장엄한 스투파 앞에서 모든 종교는 하나다.

종교의 틀이라는 것조차 조잡한 하나의 형식이 아닐까 하는,

그리하여 모든 진리는 하나로 통하는 것이 아니냐 하는

장대하고 너른 사유가 희말라야에서는 저절로 피어오른다.

아마다블람과 스투파의 미묘한 조화.

 

 

왼편으로는 에베레스트를

오른편으로는 탐세쿠, 아마다블람, 눕체 등의 영봉을

함께 걷는 구도의 도반처럼 곁에 두고 녹계의 하늘길을 걷는다.

 

 

한 두 시간 쉬엄 쉬엄 걸으면 사나사가 나오고,

두어 채의 롯지와 기념품 판매하는 곳에 이른다.

잠시 롯지 마당에 앉아 휴식을 취하면서 롯지의 툭 트인 전망을 바라본다.

 

 

이 곳까지 함께 걸어 온 많은 여행자들이

이 곳 사나사에서부터 고쿄로 가는 팀과 에베레스트 방면의 팀으로 나뉜다.

사나사를 지나다 보면 좌측 오르막길로 쿰중 가는 길이 보이고,

조금 더 가면 삼거리가 나온다.

이 삼거리에서 고쿄와 에베레스트의 두 갈래 길이 나온다는 것을 안내하는

반가운 이정표를 만날 수 있다.

 

 

희말라야를 다니면서 어지간 해서는 갈림길이라도 이정표를 발견하기가 쉽지 않은 것을 생각해 보면

이런 이정표를 볼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중요한 갈림길임을 대번에 알 수가 있다.

위쪽 산 중턱을 가로지르는 오르막이 고쿄로 가는 길이고,

아래쪽 숲길이 에베레스트와 칼라파타르로 가는 길이다.

남체에서부터 사나사를 지나 점심을 먹을 곳인 푼키텡가(Phunki Tenga, 3250m)까지는

평탄하거나 완만한 내리막이다.

가벼운 발걸음이 마음까지 경쾌하게 만든다.

설산 봉우리 중에도 단연 눈에 띄는 아마다블람을 가까이 곁에 두고 함께 걷는다.

 

 

아! 비로소 나는 지금 이 길 위에

아무런 기대도 없이, 아무런 바람도 없이

그저 그저 걷고 있을 뿐이다.

과거와 미래의 모든 것들이 놓여지고

지금 이 순간 내 앞에는

바로 다음의 발걸음과 한 호흡의 들숨과

눈앞에 펼쳐진 하이얀 산맥의 현존만이 강물처럼 흐른다.

 

 

아! 이 느낌!

이 현존,

모처럼 잊혀졌던 그 무언가들이 다시금 새록새록 존재 위를 흐른다.

푼키텡가 조금 못 미처 타싱가(Thasinga, 3600m)를 지나니

동네 아이들이 숲속을 놀이터로,

꺾어진 나뭇가지를 시소삼아 올라 타고 노느라 정신이 없다.

 

 

마을길을 지나 설산 초오유에서 발원한 두드코시를 지나는 다리를 건넌다.

두드코시는 우유란 뜻의 두드와 강이란 뜻의 코시가 합쳐진

우유빛을 띄는 빙하 녹은 물로

빙하물은 미세한 광물입자들을 함유하고 있어 빛과의 산란작용에 의해

우유빛 바탕에 푸른 에머럴드 색을 동시에 띈다고 한다.

 

 

이 두드코시가 언뜻 보기에는 그저 작은 산골의 골짜기 같지만,

이 강이 흘러 흘러 인도인의 영혼의 고향, 갠지즈강으로 뻗어나가고

최종적으로 인도양까지 흘러들게 되는 장대한 역사를 만들어내는 발원지인 셈이다.

 

 

두드코시를 건너 푼키텡가에서 점심을 먹으려는데

자리가 꽉 찬 터라 저쪽 구석자리에 홀로 앉아 계시는 지긋한 어르신께

옆 자리 함석을 여쭙는다.

그런데 지금까지 산에서 한 번도 보아오지 못했던 한국분이 아닌가!

“한국 분 아니세요?”

하는 물음이 얼마나 반갑던지.

춘추가 60이 넘으셨는데 이렇게 정년 퇴직 후에 산으로 산으로 떠도신다고 한다.

퇴직 후 지난 몇 년간 세계 도처를 여행하시다

요즘은 네팔의 설산에 반해 안나푸르나, 랑탕에 이어 이렇게 에베레스트까지 오시게 되었다고.

희끗희끗한 연세에 홀로 저렇게 여행할 수 있다는 것이 아름답게 느껴진다.

물론 그만한 경제적 여유도 있어야 하니

특별한 소수 특권층이나 가능한 것이라고 혀를 차는 사람들도 주위에 있다고 하던데,

이 어르신의 대답은

“물론 그것도 전혀 틀린 말은 아니지만,

돈이 있어도 못 오는 사람도 많고,

또 조금만 절약하면 인도나 네팔 같은 나라는 한국에서 지내도 그 정도의 돈은 쓸 정도”

라고 항변하신다.

나이가 들면 누구나 인생의 근원적인 어떤 것을 찾게 되듯

지긋한 연세에 이렇게 순례의 길을 나서는 사람들이

늘고 있다고 한다.

그런 분들에게 길을 떠난다는 것은

단순한 여행이 아닌 숭고한 영적인 순례의 길이 된다.

홀로 두 발과 몸뚱이 하나에 의지해서

낯선 길을 떠난다는 것은,

그 자체만으로 구도의 한 과정이며,

스와미 람다스의 말대로

'신과 자신을 찾아가는 것'이기도 하다.

불교 뿐 아니라 기독교, 유대교, 회교 등

거의 모든 종교에서 순례는 구도의 한 부분으로 여겼다.

기독교 순례자들은

예수의 자취를 따르고자 예루살렘을 향해 걸었고,

이슬람교도들은 알라의 집으로의 순례라는 뜻의 하지(Hajj),

즉 메카로의 순례를 의무적으로 행해 왔으며,

티벳인들 또한 라싸로 삼보일배의 순례를 떠나왔다.

또한 전 세계에서 불교 신자들이

부처님의 탄생, 출가, 성도, 열반지인 4대 성지를 향해

지금도 순례를 멈추지 않고 있다.

특히 티벳의 성산 카일라스는

우주의 중심인 수미산을 상징하는 곳이며,

불교, 힌두교, 자이나교, 라마교 등

주요 종교인들의 공통적인 성산이라 불리는 곳으로,

그 종교 뿐 아니라 요즘에는

세계의 수많은 사람들에게 거룩한 순례지로

일생에 꼭 한번쯤은 다녀오고자 하는

순례의 정점에 있는 곳이기도 하다.

이처럼 순례라는 것은

모든 종교를 초월해 근원에 이르기 위한,

깨달음에 이르기 위한 하나의 수행 방법이요,

종교적 실천의 핵심을 이루고 있기도 하다.

그렇기에 이렇게 특정 종교를 믿지 않는 사람들조차

누구나 한 번쯤은 거룩한 곳으로의 순례를 꿈꾸는 것이 아닐까.

그것은 어쩌면 누구나 자신의 근원으로의 귀향을 향해

나아간다는 점에서

인간 성품의 근간을 이루는

정신적 유전 요소인지도 모르겠다.

어르신과의 짧은 대화 속에서,

순례에 대한 의미를 찾게 된다.

순례자가 꼭 종교적이거나 영적일 필요는 없으며,

반드시 자연과의 교감과

신비에 대한 뚜렷한 체험 내지 신념이 있을 필요는 없다.

그저 산이 좋고, 여행이 좋고, 홀로 걷는 것이 좋으며,

새벽에 떠오르는 태양 앞에서 숨을 멈추고 바라볼 수 있는

작은 감수성이 있다면 그것을 애써 종교적이니 영적이니 순례니 하는

용어로 가두지 않더라도 그 본질에서는

결국 같은 길 위의 구도자가 되는 것이 아닐까.

어르신께서는 히말라야를 걸을 때 가장 행복하다.

그동안 오랜 삶 속에서 깨닫지 못했던 아름다움의 의미에 대해

비로소 진하게 경험하게 된 것이다.

그러면서 이 아름답고 진한 풍광의 경험과 느낌들을

아내나 자식들과 나누고 싶지만 그게 잘 안 된다.

아내나 자식들과 함께 오고 싶어 아무리 설득을 해도

“그 험한 산에 힘들게 왜 가느냐?”고 한다네.

그런 거 보면 모든 것은 제 마음이 동해야 하지

아무리 좋은 것도 저 싫다면 그만이다.

 

 

그래서 때때로 삶을 힘겨워 하는 사람들에게

이런 저런 방법 같은 것을 알려줘도 그것이 전혀 먹혀들지 않는다.

자기 자신만의 관점과 견해와 좋고 싫은 어떤 견고한 틀이 있어서 그렇다.

그래서 진정으로 길을 찾고자 하는 사람은

먼저 자신을 비우고 활짝 열 수 있어야 한다.

가슴의 창이 닫겨 있으면

그 창으로 지혜도, 행복도, 풍요로움도 들어갈 수 없다.

닫혀진 마음에는

늘 자신의 기존 관점이나 색안경으로 걸러진 선택적인 것들만 들어올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스승을 찾아갈 때는

언제나 빈 마음이어야 하고,

자신을 완전히 내려 놓고

‘내가 옳다’고 여겨 온 모든 울타리를 걷어 치우고 친견을 해야 하는 것이다.

그러지 않고 자기 고집, 아상과 아견을 꽁꽁 움켜쥔 채 찾아간다면

붓다나 예수를 만날지라도 거기에 소통과 참된 이해는 깃들지 않는다.

그 때 우주는 당신을 도울 수 없다.

늘 충만한 우주의 도움을 당신은 스스로 닫음으로써 받지 못하는 것이다.

그래서 붓다께서는 “인연 없는 중생은 붓다고 구제하기 어렵다”고 했다.

잠시의 대화를 뒤로한 채

점심을 마치신 어르신은 포터와 가이드를 영솔하며 먼저 길을 나서신다.

점심을 먹고 이 곳 롯지에서 파는 상점을 잠시 돌아 보며 숨을 돌린다.

 

 

이 곳 푼키텡가부터 텡보체까지는

무려 고도 600미터를 단숨에 올라야 하는 가파른 오르막 구간이다.

천천히 발걸음을 옮긴다.

오른 무릎의 통증은 여전하다.

오르막을 천천히 아주 천천히 걸어 오르며

오른 무릎으로 주의력을 옮긴다.

한발 한발 내딛을 때마다 찌릿찌릿한 느낌이 그곳에서 감지된다.

그것을 탓하지 않고, 걱정하지 않고, 빨리 나으라고 재촉하지 않고

다만 그 작은 통증을 가만히 지켜보며 걷는다.

지켜보는 동안 그 통증은 사실 ‘통증’이라는 이름과는 어울리지 않는

그저 단순한 어떤 느낌일 뿐이다.

공연히 그 하나의 생생한 느낌에 ‘통증’이라는 이름을 붙이지 않기로 한다.

그렇게 걷다보면 그것은 싫은 어떤 느낌이 아니라

그저 그것이 거기에 있을 뿐이다.

오히려 지켜보는 가운데 생기로운 생명력 같은 무엇을 느끼게도 되고,

그것을 통해 내면으로 들어가는 통로 같은 것을 느끼게도 된다.

그 하나의 통증이 오히려 명상의 통로가 되는 것이다.

Posted by 법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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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Favicon of http://www.californiareads.org/includs.asp BlogIcon fake rolex 2014.05.28 12:23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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