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정에서 도착의 기쁨을 알리듯
타르초가 흩날린다.

세상은 이대로 완전하다.


어느 하나 정확히 제자리 아닌 것이 없고,
그 모습 아닌 것이 없다.
이대로 시간이 멈추어 버린 듯 모든 것이 적연하다.
시공의 의미가 사라지고 심온하고도 묵직한 침묵이 내려 앉는다.

 

침묵의 소리를 들어 본 적이 있는가!
신묵의 그 무게감,
그 소리 없는 소리는
우리의 내면이 때때로 딱 멈추는 순간,
그런 흔치 않는 순간에 오는지 가는지도 모르게 찾아 왔다가
아무런 흔적도 남기지 않고
내면의 뜰을 텅 비우고는 사라진다.

 

바로 이런 순간에 그 소리가
고요한 대지 위로 잔잔한 선율처럼 들리는 듯도 하고,
내 생에에서의 그 모든 삶의 역사와 기억들조차
모조리 흡수해 아무것도 남기지 않게 만들고 가는 듯도 하다.

 

지금 이 순간의 고요함과 마주한다.

적연부동(寂然不動)!
아무런 방해나 거리낌 없이
이 대자연과 직접적으로 대면한다.
비교할 그 어떤 것도 없이
이 자체로써 있는 그대로의 고스란한 아름다움에 매료된다.

 

작고 소박한 것들이

새삼스레 투명하고 반짝이는 별처럼

진한 의미와 향기로 다가온다.

소소한 이름모를 꽃에 시선이 머문다.

이 작은 것 속에서

희말라야의 모든 크고 웅대한 것들을 본다.

 

 


 

 

바람이 좋다.
가벼운 소소리 바람이 불어 와
내 존재 위에 덕지덕지 남아 있을
무겁고 탁한 어떤 덩어리들을 툭툭 털어내 주는 듯 하다.

 

존재의 무게감이 사라지고,
그동안 심각해 하고 심중하게 느끼던 모든 삶의 절심했던 순간들이
그저 한 편의 재미난 연극처럼 가벼워짐을 느낀다.

입가에 한 줄기 홀연한 미소가 스친다.


가볍다.
홀홀하다.
모든 삶이 아름답다.
지금 이 자리에서 더 이상 필요한 것도, 바랄 것도 없다.

 

 

 

 

사실 희말라야를 오기 전
내 스스로 분명하게 느낄 수 있을만한
내면의 그 어떤 말할 수 없는 순수지속의 직관적인 무언가가 감지되었다.

알 듯 모를 듯 직관적인 알아차림!


삶의 홀연한 어떤 순간에는
어떤 말로도 설명할 수 없는 침묵의 소리가 들려오곤 한다.
생각이 오랜 번잡함을 가볍게 내려놓을 때,
해야 할 일들이 문득 사라지고 한가로워질 때,
그냥 그냥 지금 이대로 좋은 삶의 어느 조용한 오후에
한 줄기 햇살처럼 묵직한 내면의 소리가 들려오곤 하는 것이다.

 

희말라야에 오기로 결정이 되기 훨씬 전부터
내면에서는 희말라야를 꿈꾸고 있었다.
오랜 전생부터 이미 그렇게 되기로 결정되어 있었던 것처럼
이제 그 때가 오고 있노라고 말해 주는 어떤 소리가 있었다.

 

그리고 그것은 단순한 여행이나 산행이 아닌
이번 생에서 나에게 주어진 오랜 영적 순례의 길이 아닐까 싶은
어떤 강한 힘을 담고 있는 명증이기도 했다.
그리고 그 힘은 계속해서 덩치를 키우고 있었고,
떠나기 직전 내 삶에서 몇 번 일어나지 않았던
매우 선명한 꿈 한 자락이 투명한 메시지를 가지고 찾아왔다.

 

그리고 지금,
이렇게 이 모든 것이 현실로 소응되어

히말라야의 품 속 한 가운데 서 있다.

지금 이 순간,

바람이 분다.

 

삶의 그 어떤 순간보다도 깊은 관찰과 자각이
호흡과 걸음 속에서 햇살처럼 부서진다.

발걸음은 다시 내리막 길을 걷고 있다.


내려가다 보니
오르면서 보지 못했던 많은 여행자들의 발길이
하늘로 하늘로 무거운 걸음을 옮기고 있다.

 

 

 

 

첫날부터 몇 번이고 마주쳤던 이들도 제법 눈에 띈다.
프랑스에서 온 중장년의 아주머님 두 분과 그녀들의 가이드, 포터,
뉴질랜드에서 포터 한 명과 함께 온 여자 대학원생,
똑같은 유니폼을 입고 다녀 같은 회사 동료인 줄만 알았던
인도인 중년의 아저씨 삼총사,
또 일본에서 온 대졸 후 사회초년생이 되기 전
희말라야를 걷고 싶었다는 젊은 여성분,
델리의 붉은성 앞에서 잠깐 말을 걸었다가
라다크의 곰파에서 한 번 더 보고
어제 딩보체의 한 롯지 앞에서 다시 만났던 반가운 인연의 싱가포르 한 청년,
그러고 보니 시끌시끌 중국인 7인방은
어제 롯지에서 오늘 올라올 것이라고 하더니 보이지 않는다.

 

특히 오랜 여행 중이라면 더 그렇겠지만,
여행을 하다보면 한 번 마주쳤던 사람을
전혀 새로운 도시나 나라에서 또 다시 보게 되는 경험을 종종 하게 된다.
그럴 때의 그 반가움이란
고향 사람을 만난 것 이상이나 반갑고 정에 겹다.

 

두 번째 만나면,
또 혹시나 세 번까지 연이어 낯선 곳에서 만나게 되면
그것으로 벌써 친구가 되고 벗이 되곤 한다.
이것이야말로 여행이 주는 또 다른 즐거움이요
사람 사이의 풋풋한 정겨움이다.

 

길을 따라 내려가다가
나는 곰파를 보고 싶어 길 없는 가파른 절벽 같은 길로 발걸음을 돌린다.


곰파가 언제부터인지 스님이 살지 않고 있는데다가
문도 굳게 잠겨 있어 인적이 끊긴지가 오래되었다 보니
곰파로 가는 길도 없어진지 오래다.

 

특별히 불교에 관심이 있지 않고서는
어지간해서는 이 곰파를 보러
일부러 길 없는 길을 헤쳐가는 사람은 없다고 한다.
지텐도 사실 이 곰파는 처음 가 본다고.
어려운 부탁을 흔연하게 잘 들어준 지텐에게 고맙다.

 

한참을 길 없는 길을 헤매며
먼지 폴폴 날리는 마른 흙길을 해집고
곰파가 있는 방향을 향해서 걷는다.


곰파 가까이 오니 작은 스투파와 룽다만이
이곳이 인적은 없을지라도 여전히 곰파임을
그 힘찬 펄럭임으로 웅변해 주고 있는 듯하다.

설산 위로 푸두둥거리는 룽다의 표연한 움직임이
사자좌에 딱 중심 잡고 앉아
사자후를 토해내는 선사의 기상과도 같이 걸지다. 

 

 

 

 

 

 

바람과 룽다는 한생명이다.
바람이 룽다를 비로소 룽다이게 하듯,
이 척박한 산정에서는 룽다가 바람을 비로소 바람이게 해 준다.

 

곰파와 스투파를 지켜주는 건 룽다와 바람 뿐인 줄 알았는데
저기 곰파 뒤에서부터 4,000고지를 제 삶의 안락한 터전으로 알고
오랜 세월 살아오며 적응했을
이름모를 설산의 새들이 까맣게 일제히 날아오른다.

 

인적드문 곰파에 집을 짓고 절을 지키며 살아왔을 새들이
모처럼 찾아 온 인기척에 놀라기라도 한 걸까?
휘~익 쉭쉭거리며 창공 위를 높게 날아올랐다가
쏜살같이 곤두박질치기를 반복한다.

 

길도 없는 가파른 절벽 같은 산사면을 타고
곰파 쪽으로 미끄러져 간다.
곰파 쪽으로 난 길이 없는 것을 보니
그간 얼마나 사람들의 발길이 뜸했는가를 알겠다.


그리 크지 않은 곰파가 좌우로 나뉘어
오랜 역사를 증명하듯 고풍스럽고 소담한 모습으로
설산의 영봉들과 아름다운 조화를 이루며 서 있다.

 

 

 

 

가까이 가 보니 역시나 금당(金堂)의 문은 자물쇠로 굳게 잠겨 있고,
그 어떤 사람의 흔적도 남아 있지 않다.

 


아쉬운 일!
아마도 그 옛날, 설산고행의 붓다는 아닐지라도,
저 티벳의 밀라레빠나 파드마 삼바바가 설산을 순례하며 수행을 했을 법한
이 영기 어린 도량에 눈밝은 푸른 납자(衲子)는 고사하고
오랜 노승 한 분 뵐 수 없다는 것이야말로 얼마나 아쉬운 일인가.

 

혹시 모르지. 저 굳은 자물쇠를 보니
저 안에 말로만 듣던 3년, 6년, 10년 결사의 죽음도 불사하는
희말라야의 무문관 수행자가
이제 곧 밝아 올 깨침의 태양을 관조하며
평화로운 내관(內觀)을 행하고 있을지도.

 

밀라레빠는 10세기 티베트의 성자로
7세에 아버지가 돌아가신 뒤 백부가 모든 재산을 강탈해 가자
흑마술을 배워 친척을 몰살시킨다.
그 뒤 이러한 잘못을 깊이 뉘우쳐 참회하고
38세의 나이에 희말라야로 떠난다.
설산에서의 오랜 수행 뒤 8년 만에 집으로 돌아왔지만
어머님은 돌아가신 뒤였고 누이동생도 거지가 되어 있었다.


거지가 된 누이에게, 어머니의 뼈로 베개를 만들어 누워
밀라레빠는 진리의 노래를 부른다.

 

‘누이여, 세속의 욕망으로 괴로워하는 자여, 내 노래를 들으라.
황금 첨탑과 우아한 비단 옷,
이 모두를 가지는 것이 무슨 소용이랴.
나는 이 모든 것을 버리고 길을 떠났다.
누이여, 너 또한 모든 욕망을 버리고 희말라야로 가자.
나와 함께 눈 쌓인 희말라야로 가자.
사람은 언제 죽을 지 알 수 없으니
더 이상 지체 할 시간이 없다.
누이여, 너 또한 생사의 수레바퀴에서 벗어나고자 한다면
세속의 모든 욕망을 떨쳐 버리고 저 눈덮인 희말라야로 가자.’

 

희말라야는 바로 이 곳 오랜 곰파를 의미할 수도 있고,
눈덮인 설산을 의미할 수도 있으며,
무집착과 무욕(無慾)이라는 텅 빈 내면의 수미산일 수도 있다.

 

희말라야는 곧 출세간을 의미하고, 무집착을 의미하며,
청정한 무욕을 상징한다.
도량, 곰파, 사찰 또한 청정한 출세간의 수행 공간이자
집착과 욕망을 버린 절대청정을 상징한다.

 

희말라야 5,000고지의 낭카르창 봉우리 바로 아래,
아무것도 없는 무욕의 땅에 박회(迫懷)와 청정의 상징, 
티벳 사원 곰파가 홀연히 서서,
밀라레빠의 그 옛날 사자후의 외침을 전하기라도 하는 듯
시공을 초월하여 10세기가 넘은 지금
이 순간에까지 한 여행자의 내면에 빛을 놓는다.

 

 

 

 

 

 

아주 낯설고도 생기어린,
어떤 말로 표현되지 않는 느낌,
영감 같은 것이 가만 가만 도량 앞에 선 내 내면의 뜨락에
툭툭 치듯 노크를 한다.

 

이 척박한 먼지 나는 산비탈에서
신비롭게도 도량 주위에만 졸졸 흐르는 생명수가 흐르고,
그 주위로 초록의 생명들이 또 꽃들이 거짓말처럼 내 시선을 잡아끈다.

 

 

 

 

 

이래서 이곳에 오랜 곰파가 설 수 있었구나.
대자연이 품어주는 곳,
이 황량한 곳들 가운데 유독 이 산자락, 이 터에만
이렇게 생명을 품어 주도록
그렇게 법계에서는 이미 계획을 세워 놓고 있었던 것이다.


다만 그 법계의 숭고한 뜻을 이을
이 시대의 눈밝은 수행자가 아직 나타나지 않은 것일 뿐!

이런 곳에 앉아 설산을 붓다로, 면벽으로 여기며
‘내가 누구인가’를 들고 관조를 이어간다면
그 어떤 게으른 수행자가 제 허투른 정신을 깨고
이 외외당당한 쿰부 설산의 협조를 받지 않을 수 있을건가.

 

다시 숙소로 내려 온 시각은 점심 즈음,
간단히 점심을 먹고 오후 내내 별다른 하는 일 없이
이 평안한 휴식의 공간 속에서 푹 쉬어 본다.
쉰다기 보다는 그저 이 설산의 품 속에 나를 내맡긴 채
하는 일 없이 그냥 소요하는 것이다.

 

쉰다는 이 행위야말로 얼마나 본질적이며 숭고하고 아름다운 일인가!
아니, 쉰다는 것은 행위가 아니다.
행위가 끊어진 자리,
그야말로 ‘아무것도 하지 않는 시간’인 것이다.


그 텅 빈 시간을 가지고 누리는 것이야말로
현대를 사는 우리들에게 어쩌면 가장 필요한
삶의 덕목과도 같은 것인지 모른다.

쉼을 모르는 시대, 휴식이 없는 사람들,
아무것도 하지 않고 쉰다는 것이
죄악처럼, 게으름처럼 비쳐지기 쉬운 요즘 같은 세상에서
정작 필요한 건 아무 목적 없는 무조건적인 쉼이 아닐까.

 

몸만 쉬는 것이 아니라 정신도 생각도
심지어 감정의 흐름도 잠시 멈추어두고
그 모든 내적인 흐름을 잠시 그쳐보는 것이다.
나아가야 할 때 물론 나아가야 할 줄 알아야 하겠지만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그쳐야 할 때 그칠 줄 아는 것에 있다.
그만 둬야 할 때 그만 두지 못하는 것이야말로 가장 큰 장애다.

 

요즘 많은 사람들은 인생이란 전쟁터에서
‘더 빨리’, ‘더 많이’, ‘더 높이’ 성공하기 위해
초를 다투는 속도전을 매일같이 치러내기에 바쁘다.
이런 세상에 휴식과 쉼이라는 “느리게 그치는” 차원의 이야기가
얼마나 귓전을 두드릴 수 있겠느냐마는
바로 그 차원이야말로 이런 속도전에 미쳐가는 세상 속에서
우리가 비로소 살아남아 온전히 ‘존재’하도록 해 주는 더없이 귀한 가치다.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더 많이 소유하느냐’
혹은 ‘더 빨리 성취하느냐’에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지금 이 순간이라는 신성한 차원 속에서
‘얼마나 더 존재하느냐’에 달려 있다.

 

행복한 휴식과 함께 어느덧 날이 저문다.

눈부시게 하얗던 설산 봉우리가

진한 주황빛으로 물들며

내 마음 한 켠도 짠하게 진하게 물들이고 있다.

 

 


 

 

 

 

 

그리고...

진한 어둠이 찾아온다.
세상은 온통 암흑이다.


저녁 식사를 마치고 칫솔질을 하러 나가는데
저쪽 반대편 롯지 간판께 어딘가에 대낮처럼 밝은,
아마도 한국의 도심에서도 찾아보기 힘들 법한
무한 촉광의 가로등이 눈부시게 빛나고 있는 것이 아닌가.

 

그런가 보다 하고 칫솔질을 하다가 생각해보니
아무래도 이 딩보체 전기 사정을 감안했을 때
저토록 마을 전체를 밝힐만한 무한 광촉의 가로등이라는 건 미심적지 않은가.
더욱이 이 곳은 4,400고지 시골 고산 마을에,
오직 전기라고는 태양광 전지판 네쪽이 전부인 가난한 롯지가 아닌가.


입가에 치약 거품을 잔뜩 베어문채
문득 고개를 들어 눈부신 가로등을 바라본다.

 

아! 아! 아니었구나!
이건 가로등이 아니구나.
무한달빛!
달빛이 어찌 이렇게 밝고 눈부실 수 있단 말이냐.

 

아무리 보름날 어디 한 구석 찌그러들지 않은 만월이라 한들
어찌 이토록 밝을 수 있단 말인가.
도저히 믿어지지 않아 혼잣말로 달님께
이 형언할 수 없는 월화(月華)에 대해 묻고 또 묻는다.

 

롯지 문 밖으로 나가 뒷산 산길을 따라 조금 더 걸어 오른다.
도저히 믿어지지가 않아서다.
저 어둔 산골짝까지 따라오는가 보자.
아! 아! 이 야밤 어둠 속에 둘러 싸여 있어야 할
마을과 설산과 계곡과 바위들이
온통 풍요로운 달빛의 생명을 나누어 받아
또렷하게 노오랗게 투명히 빛나고 있다.

 

이것이 정작 내가 알고 그간 밤마다 사귀어 오던
바로 그 달님이 벌이는 축제가 맞단 말인가!
내가 이전에 보아오고 느껴오고 누려오던 그윽한 달빛 어쩌구 하던
그 묘사에 백배 천배 감성을 더 보태면
지금 이 순간을 오롯이 비춰낼 수 있을까?

 

아! 본래 달빛의 저작이
이 정도의 클라이막스를 이끌어 낼 저력이 있었던 것이다.
1,000고지, 기껏해야 2,000고지를 조금 넘는 달빛,
강원도 양구 금강산 1만 2천 봉의 유일한 남쪽 봉우리
가칠봉 철책을 스치던 새벽 1시,
그 그윽하게 산맥과 철책과 초병의 군모를 밝히던 그 달빛이
4,400고지로 올라오니 이토록 투명해지고 뚜렷해져 있는 것이로구나.

 

달빛쇼크!
오늘밤 달빛에게 뒤통수를 한방 얻어맞은 기분!
가슴이 뜨거워진다.
두 손, 두 발바닥에 땀이 찬다.
이것이야말로 희말라야 대자연과 달님이 합작해내는 진정한 달빛 소나타!
아니 대장엄의 달빛 오케스트라!

 

잠자리에 누웠는데, 눈도 감았는데
여전히 덩그러니 희고 밝은 토경(兎景)이
순수한 빛을 내 앞에 켜 두고 있다.

 

소소한 밤,
환하디 환한 잠 속으로 들어가
희고 고운 달빛 아래에서
설산을 무대삼아 한바탕 무애춤을 휘청여 보자.

[히말라야 내가 작아지는 즐거움]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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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법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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